고구려 고분벽화의 세계

2017. 5. 16. 21:49우리 역사 바로알기



       고구려 고분벽화의 세계| 새로 발간된 책 알림방

경주학연구원 | 조회 43 |추천 0 | 2004.11.20. 09:38


고구려 벽화에는 우리 민족의 얼이 살아있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세계/ 전호태 지음/ 서울대 출판부
권영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미술사
입력 : 2004.11.19 17:31 32'

   역사 유물 가운데는 유난히 우리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것들이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가 바로 그런 유에 속한다. 서평자만 해도 반세기 전인 국민학교 시절에 배운 무용총 벽화의 사냥 장면을 통해 고구려인들의 웅건한 기상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그 후 우리가 펼쳐야 할 꿈이 거기에 서려 있음을 가끔씩 되새기곤 한다.

 

   1906년에 고구려 고분벽화가 새롭게 발견된 이래 지금까지 근 1 세기 동안 그 분야를 소개한 책들이 적지않게 출간되었다. 그러나 대부분 발굴 보고서와 도록(圖錄)류일뿐, 그 벽화를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견지에서 조명한 책들은 그리 많지 않은 사정이다. 특히 국내외 학계의 동향을 함께 짚어가면서 서술한 경우는 더욱 드물다. 그간 우리가 이런 책이 있었으면 하고 아쉬워했던 바로 그런 책이 이번에 나온 ‘고구려 고분벽화의 세계’라고 생각된다.

더욱 이 책을 값지게 만드는 부분은 지금까지의 국내외 연구 상황을 정확하게 분석하고 연구사, 연구 방법, 연구문헌 목록을 총망라하여 부록으로 첨부한 점이다. 실로 고구려 고분벽화에 대한 전문 사전의 역할을 하고 있음이 또한 다른 책들과의 차별성이다. 이런 점은 저자 자신이 고구려 고분벽화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 이후 줄곧 30여편 이상의 무게있는 논저를 출간할 만큼 연구가 축적되었던 것에서 가능했을 것이다.


 


▲ 고구려 고분벽화를 처음 세상에 알린 평안남도 강서고분군 중 강서대묘의 산수 벽화. 1906년 강서군수 일행이 고분 내부의 벽과 천장을 발견했다.

   이 책의 구성은 ‘고분벽화란 무엇인가 / 중국 장의(葬儀) 미술의 동북아시아로의 파급 / 고구려 문화의 특징과 고분벽화 / 고구려 고분벽화의 재발견과 분포 현황 / 초기 고구려 고분벽화의 특징 / 5세기 고구려의 대내외적 위치와 고구려 문화의 성격 / 중기 고구려 고분벽화의 세계 / 6~7세기 고구려의 사회적 과제와 후기 고분벽화의 전개 방식 / 고구려 고분벽화의 현재와 내일’ 등을 주제로 하여 9장으로 가름하였으며, 거기에 250여 면의 부록을 첨부하여 총 651면에 달하게 꾸몄다. 이 가운데 중국과 일본의 자료를 포함한 112컷의 도판은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된다.


 

   이 책은 벽화를 미술사의 관점에서 통사(通史)적으로 다루면서 각 시대마다 역사적 배경과 벽화의 양식을 함께 엮어, 그 두 사안이 상호 괴리됨이 없이 조응함으로써 벽화의 이해를 효과적으로 만들고 있다. 무엇보다도 동아시아에서의 고구려 벽화의 특징을 부각시켜 원류지인 중국의 것과 구별되게 하려는 데에 역점을 두었다. 여기에서 고구려의 국가적 정체성이 드러난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특히 저자는 종래의 막연한 국수주의적 관점에서 벗어나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하는 입장에 서 있다.


 

   최근까지도 한·중 간에 학술 토론의 차원을 넘어서서 정치 외교의 문제로까지 비화되었던 고구려 논쟁은 기실 국가 정체성의 문제로서 벽화 자체가 그 해결의 결정적인 자료가 된다고 할 수 있다. 벽화가 고구려인들의 고유한 생활과 사상을 고스란히 담아내었기 때문이다.


 


▲ 권영필교수
   이 책의 저자는 고구려 고분벽화가 조용히 무덤 속에 걸려 있는 지나간 과거의 죽은 사료가 아니라 우리의 현재와도 연결되는, 살아 숨쉬는 존재임을 인식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저자는 벽화 보존에 대해 “현재는 참담하며, 미래는 불투명하다”라고 상황을 고발하고 자료의 공개와 공유가 해결의 실마리임을 이 책에서 강조하고 있다. 학술적으로도 “각 분야의 전문 연구자들에 의한 종합적 공동연구가 시도될 때”라고 진단하고 있는 등 여러 가지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 책도 한두 가지 아쉬운 점을 갖고 있다. 먼저 벽화의 편년(編年)에 관한 것인데, 일반적으로 선행 연구와 다른 연대관을 가질 경우 그 이유가 무엇인지 밝혀져야 한다. 다음은 인용 도판(圖版)에 관한 문제로, 예컨대 ‘돈황 벽화’라면 몇 호굴인지 상세 자료가 부가되어야 할 것이다.

 









[스크랩] 고구려 고분벽화의 세계| 동북공정 관련 글

금릉산방인 소전 | 조회 17 |추천 0 | 2007.02.16. 22:16


고구려 고분벽화의 세계

 

전호태(울산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고구려 고분벽화의 전개

 

 

   제1기: 영화로운 삶의 재현

 

  고구려 고분벽화의 전개과정은 크게 세 시기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제1기는 3세기말에서 5세기초에 걸치는 기간으로 고구려의 영토가 크게 확장되는 시기이다. 벽화는 주로 무덤 안에 석회를 바르고 그 위에 그림을 그리는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이 시기에 즐겨 택해지는 생활풍속계 벽화고분은 무덤칸 구조와 벽화 내용이 죽은자 생전의 저택구조를 재현하거나 상징적으로 드러내도록 서로 맞물리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무덤은 흔히 무덤칸의 모서리와 벽의 위 부분에 자주색 안료로 기둥과 들보 등 목조가옥의 뼈대를 그려 무덤 안을 주택과 같이 꾸민다.

 

   생활풍속은 죽은자 생전의 공적(公的) 생활 가운데 기념할만한 것과 사적(私的) 생활의 풍요로움을 무덤 안에 그림으로써 내세에도 이와 같은 삶이 재현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택해진 벽화주제이다. 때문에 생활풍속을 주제로 한 고분벽화에서는 무덤주인이나 무덤주인 부부가 남녀시종들의 시중을 받으며 춤과 노래, 놀이를 즐기는 장면, 대규모 행렬에 둘러싸여 출타하는 장면, 산야(山野)를 질주하며 사냥하는 장면 등이 자주 나온다. 벽화 속의 인물들은 흔히 신분과 계급, 지위 정도에 따라 각각 다른 사람의 몇배, 혹은 몇분의 1 크기로 그려지며, 모자와 머리모양, 입은 옷의 무늬와 빛깔, 소매나 가랑이의 너비와 길이 등이 다르게 묘사된다.

 

   생활풍속을 주제로 한 평양․안악지역의 고분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묵서(墨書)로 쓰인 명문(銘文)이 남아 있는 안악3호분과 덕흥리벽화고분을 들 수 있다. 안악3호분(357년)은 회랑에 10.5m에 걸쳐 250명 이상의 인물이 그려진 대규모 행렬도로 특히 유명하다. 덕흥리벽화고분(408년)은 중국의 하북성을 포함한 북중국 동북의 넓은 영역에 걸쳐 설치되었던 유주(幽州)의 13군태수(郡太守)가 무덤주인인 자사(刺史) 진(鎭)에게 나아와 배례(拜禮)를 하는 장면, 60여 개의 별자리 및 견우(牽牛), 직녀(織女)를 비롯해 신화, 전설상의 존재로 가득한 하늘세계의 그림으로 널리 알려진 무덤이다.

 

   제1기에 속하는 국내(國內, 현재의 중국 길림성 집안)지역의 벽화고분으로는 각저총(角抵塚), 무용총(舞踊塚)이 잘 알려졌다. 집안의 우산(禹山) 남쪽 기슭에 서남향으로 나란히 축조된 두 무덤의 내부는 목조가옥의 뼈대그림에 의해 벽면과 천장부가 나누어졌으며, 화면의 각 제재는 커다란 나무로 구분되었다. 각저총은 매부리코의 서(西)아시아계 인물과 고구려인 사이의 씨름그림으로 잘 알려졌지만, 무덤주인과 두 부인의 그림으로도 일반에게 익숙한 벽화고분이다. 무덤주인부부와 시종을 비롯해 벽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 같이 볼에 군살이 없이 얼굴선이 깔끔하게 내려오는 고구려인 특유의 갸름한 얼굴을 지녀 볼과 턱이 살진 평양권 벽화고분인 안악3호분 벽화 인물들의 얼굴과 대조를 이룬다.

 

   무용총은 산을 넘나드는 기마사냥 장면과 무용그림, 두 역사(力士)가 수박희(手搏戱)라고도 불리던 태껸류의 격투기를 벌이는 장면, 하늘로 떠오르는 연꽃과 연봉오리, 선인(仙人)과 청룡(靑龍), 백호(白虎) 및 갖가지 상서동물들로 가득한 하늘세계 그림으로 잘 알려진 무덤이다. 무용 장면은 말을 타고 나가는 무덤주인과 그 뒤의 시동(侍童), 무덤주인을 배웅하는 무용수와 합창대로 이루어진 그림의 일부인데, 5세기 전반 국내지역 화가의 기량을 잘 드러내는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제2기: 복잡해진 하늘세계

 

   제2기는 5세기 중엽에서 6세기초에 걸치는 시기로 동북아시아의 지배자 고구려가 내륙아시아의 패자 유연(柔然), 중국의 남조(南朝)와 북조(北朝) 등과 함께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좌우하는 4대 강국의 하나로 군림하던 시대이다. 이 시기 고구려의 외방이나 두방무덤에는 생활풍속과 사신, 혹은 생활풍속과 장식무늬가 공존하는 그림, 장식무늬만을 주제로 한 다양한 유형의 그림들이 그려진다. 사신이 무덤칸 안에 그려질 때에는 방위나 방향에 맞추어 좌(左[東])청룡, 우(右[西])백호, 전(前[南])주작, 후(後[北])현무의 순서로 그려진다. 사신은 무덤자리가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사신 형상의 지세인 사세(四勢)에 해당되지 않거나 최선의 자리가 아닐 경우, 이를 대신하여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생활풍속과 장식무늬, 혹은 장식무늬가 벽화주제인 무덤은 427년의 평양 천도 이후, 고구려 북방의 정치․문화중심으로 기능하던 옛 수도 국내(國內) 일대에서 다수 발견된다. 벽화의 장식무늬로는 동심원문(同心圓文), ‘왕’자문(‘王’字文), 연꽃문, 구름무늬, 얽힌용무늬[交龍紋], 인동무늬 등이 선택되며, 이 가운데 연꽃문을 주제로 한 경우가 벽화고분의 대다수를 차지한다. 이들 연꽃문은 5세기에 이르러 고구려에서 불교가 크게 유행한 것과 관련이 깊다. 무덤칸 안에 그려진 연꽃문은 죽은 자의 정토왕생(淨土往生)을 희구하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제2기를 대표하는 국내지역의 벽화고분으로는 장천1호분(長川1號墳)과 삼실총(三室塚)을 들 수 있다. 장천1호분은 전형적인 두방무덤으로 무덤주인과 그의 손님을 위해 펼쳐지는 여러 가지 놀이 장면, 여래와 보살, 비천과 기악천 등 불교적 존재들로 가득한 하늘세계와 이 하늘세계를 떠받치는 서아시아계 역사(力士)들의 모습, 두 사람의 동남동녀(童男童女)가 연꽃에서 화생(化生)하는 장면 등으로 내외의 관심을 모았던 벽화고분이다. 삼실총은 널방 세 칸이 ‘ㄷ’자 모양으로 이어진 특이한 형태의 벽화고분이다. 무덤 안의 두 번째, 세 번째 널방 각 벽에 가득 차게 그려진 역사는 장천1호분 벽화의 역사들과 같은 서아시아계이다. 초원의 길을 매개로 한 고구려와 중앙아시아 및 서아시아와의 문화교류를 짐작하게 하는 존재 가운데 하나이다.

 

   평양 및 안악지역의 생활풍속계열 무덤에서는 생활풍속과 사신(四神)이 함께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초기단계에는 사신이 무덤칸 천장부에 별자리와 함께 그려지지만, 일정한 시간이 흐르면 벽면으로 내려와 결국 벽면 전체를 차지하면서 생활풍속 장면을 소멸시킨다. 제2기에 속하는 평양․안악지역의 벽화고분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쌍영총, 수산리벽화분, 덕화리1호분 등이다.두방무덤인 쌍영총 벽화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앞 시기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깔끔하고 세련된 필선으로 묘사된 갸름한 계란형 얼굴의 인물들이다. 남자들은 고구려 특유의 모자인 절풍(折風)을 머리에 쓰고, 선(襈)을 덧댄 왼섶 저고리에 통 넓은 바지를 입었으며, 여자는 선을 덧댄 저고리에 주름치마를 입었다. 수산리벽화분의 벽화에서도 이와 같은 모습의 인물들을 발견할 수 있다. 5세기 후반에 이르면 고구려 회화에서 고구려식 인물표현의 한 전형이 완성됨을 알게 한다.

 

 

   제3기: 보호받는 쉼터

 

   제3기는 6세기 중엽에서 7세기 전반에 걸치는 기간이다. 5세기 후반에 성립시킨 범(汎) 고구려 문화의 성과가 고분벽화를 통해서 확인되지만, 이어진 정치사회적 불안정으로 말미암아 동북아시아 패권국가로서의 지위가 흔들리고 동북아시아 문화중심으로서의 역할도 도전받는 시기이다. 고분벽화는 주로 무덤칸의 다듬어진 돌면에 그대로 그림을 그리는 방식으로 제작되는데, 안료 제작상의 기술적 진보를 읽게 하는 부분이다. 널방만 있는 외방무덤에 사신도(四神圖)가 즐겨 그려진다.

 

   제3기 벽화고분들은 모두 구릉기슭에 남향으로 축조되었으며, 뒤로는 산을 지고 앞으로는 들을 내다보는 이른바 ‘명당’의 기본조건을 갖춘 곳에 위치하였다. 이 시기 사신은 각각 널방의 한 벽면씩을 차지하는 존재이다. 이러한 현상은 사신이 단순히 하늘의 28별자리[28星宿] 가운데 동서남북 각 방위별 7별자리씩이 형상화된 방위신 정도가 아니라, 신선신앙과 불교신앙이 혼합된 형태의 내세를 지켜주는 우주적 수호신으로 여겨진 것과 관련이 깊다.

 

   제3기 평양지역 벽화고분을 대표하는 강서대묘와 강서중묘 벽화는 고구려회화가 6세기 전반 중국 남조로부터 받아들인 미술사조의 영향에서 벗어나 나름의 새로운 세계를 어떻게 만들어나갔는지를 잘 보여준다. 두 무덤 모두에서 사신(四神)은 아무런 배경 없이 벽면에 그려졌으나, 세련된 필치와 선명한 채색으로 말미암아 상상적 동물임에도 마치 실재하는 존재인 듯이 느껴진다. 강서대묘의 현무, 강서중묘의 백호가 획득한 실재성(實在性)은 무(無)배경의 벽면에 깊은 공간감을 주어 벽면이 마치 아득한 하늘세계처럼 보이게 만든다.

 

   제3기에 속하는 국내지역 고분벽화는 고구려 특유의 힘과 긴장감, 6세기경 국내 문화만의 화려하고 세련된 분위기를 함께 담아내고 있어 고구려 후기문화의 지역적 성향과 특징을 이해하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이 시기 국내 고분벽화의 특징은 오회분5호묘와 오회분4호묘 널방의 벽 및 천장고임 그림에 잘 담겨 있다. 널방 벽의 사신은 인동과 불꽃, 혹은 화생(化生)중의 인동(忍冬) 및 인동연꽃 위의 화생천인(化生天人)으로 채워진 화려한 연속변형귀갑문 위에 세련되고 숙달된 필치로 묘사되었다. 사신의 몸체는 세부까지 세밀하게 묘사되었고, 오색(五色)으로 화려하고 선명하게 채색되었다. 그러나 지나치게 선명한 윤곽선과 엄격하게 구분된 채색띠, 규칙적이고 도식적인 세부표현 등은 오히려 신수(神獸)로서 사신이 지녀야할 신비성과 사실성을 약화시키는 면도 있다.

 

   두 고분벽화의 천장고임에는 해와 달, 별자리 외에 해신과 달신을 비롯해 불의 신, 농사의 신, 대장장이 신, 수레바퀴의 신, 숫돌의 신 등 여러 종류의 문명신(文明神)과 악기를 다루는 천인(天人)들이 등장한다. 고구려 특유의 힘과 긴장감을 담은 자세로 해와 달을 받쳐들고 있는 해신, 달신 등은 평양지역의 고분벽화에는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같은 시기 중국 남북조의 회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존재들이다.

 

 

   닫으며

 

   고구려 고분벽화는 동북아시아가 하나의 독자적인 문화권으로 존재했음을 확인시켜주는 역사적 증언이자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3세기말부터 모습을 보이는 고분벽화는 고구려가 자국을 중심으로 한 ‘독자적인 세계’를 만들어내려고 애쓰던 과정, 동북아시아를 고구려의 ‘천하’라고 자부하며 이루어낸 문화적 성과를 생생히 잘 보여주는 역사현장 보고서라고 할 수 있다.

 


관련


cafe.daum.net/bghshufa/F0Ro/17   서예와 중국







[스크랩] 고구려 고분벽화의 세계| 동북공정 관련 글

금릉산방인 소전 | 조회 12 |추천 0 | 2007.02.16. 22:57


고구려 고분벽화의 세계

 

전호태(울산대 역사문화학과)

 

   고구려는 70여 년 동안, 때로는 국지전으로, 때로는 전면전으로 치러진 수․당과의 전쟁에 패하여 멸망하였다. 전쟁으로 패한 700년 왕국의 수도 평양일대에는 거대한 무덤들과 깨어진 기왓조각, 무너진 성터만이 옛 역사를 전하는 흔적으로 남게 되었다.

 

   고분벽화는 돌무더기에 불과할 수도 있는 고구려인의 자취에 보물찾기의 기호 쪽지처럼 꽂혀 있는 ‘살아 있는 역사 이야기’이다.고분벽화는 무덤 안에 ‘순장’의 대상이 되었던 사람과 물건 대신 모형을 묻기도 하고, 죽은 자 생전의 영광을 기리고, 죽은 자가 누리고 싶은 내세의 삶을 형상화한 그림을 무덤 안에 걸어두거나, 무덤의 벽과 천장에 직접 그리기도 하는 관습이 생겨나면서 발생한 장의미술의 한 장르이다. 우리나라 삼국시대의 경우, 신라와 가야에서는 모형을 껴묻는 습속이 오래 동안 지속되는 반면, 고구려에서는 일찍부터 무덤의 방 안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 유행하였다.

 

   현재까지 발견된 삼국시대의 벽화고분은 100기가 넘는다. 신라와 백제의 것이 각 2기, 가야의 것이 1기이며, 나머지는 모두 고구려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현재까지 고구려의 벽화고분은 환인과 집안지역에서 24기, 평양 및 안악일대에서 72기 정도가 발견되었다. 고구려에서 벽화고분은 대략 3세기말부터 7세기 전반까지 지속적으로 만들어졌으며 벽화의 주제와 내용, 표현기법 등이 시기에 따라 변화를 보인다.

 

   고구려 고분벽화는 초기와 중기에는 무덤방의 벽과 천장고임에 회를 바른 다음 그 위에 그림을 그리는 방식으로 제작되지만 후기에는 돌면에 직접 그림을 그리는 방식으로 제작된다. 돌면에 직접 그려진 벽화는 안료가 돌의 입자가 흡수되어 보존성이 아주 높아 후기 고분벽화는 지금도 그림 속의 물체가 살아 움직이는 듯 생생하여 후인의 경탄을 자아낸다. 백회 위에 그려진 그림은 회가 떨어져 나가거나 녹아 내리면 벽화도 훼손되는 단점을 지니지만, 필요에 따라 세부 표현을 수정할 수 있고, 벽화의 주제나 내용을 바꿀 수도 있다. 벽화의 채색안료로는 천연광물질이 주로 사용되었지만, 식물성 재료, 동물성 재료도 함께 쓰였다. 색채는 무덤칸의 분위기를 부드럽고 차분하게 하는 갈색계통(褐色系統)이 많이 쓰였으며, 흑색, 황색, 자색, 청색, 녹색 등이 함께 쓰였다.

 

   고분벽화의 주제로는 보통 생활풍속, 장식무늬, 사신(四神) 등이 선택되었다. 초기인 3세기말~5세기초에는 두방이나 여러방무덤에 생활풍속 그림이 즐겨 그려지고, 외방무덤에는 사신이 그려졌다. 생활풍속이 주제인 벽화고분은 무덤칸 구조와 벽화내용이 죽은 자 생전의 저택구조를 재현하거나 상징적으로 드러내도록 서로 맞물리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무덤은 흔히 무덤칸 모서리와 벽 상부에 붉은 색 안료로 기둥과 들보, 두공 등 목조가옥의 골조를 그려 고분을 주택과 같이 꾸민다. 목조가옥의 골조는 장식무늬가 주제인 같은 시기의 고분벽화에서도 흔히 그려진다. 그러나 사신(四神)이 주제인 고분벽화에서는 이러한 표현이 잘 나타나지 않는다. 이것은 고분벽화의 주제로 생활풍속 및 장식무늬가 선택될 경우와 사신이 선택될 경우의 초점이 서로 달랐기 때문인 듯하다. 사신이 하늘의 28별자리가 형상화된 존재라는 점이 참고가 된다.

 

   생활풍속은 죽은 자 생전의 공적(公的) 생활 가운데 기념할만한 것과 사적(私的) 생활의 풍요로움을 무덤 안에 그림으로써 내세에도 이와 같은 삶이 재현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택해진 벽화주제이다. 때문에 생활풍속을 주제로 한 고분벽화에서는 묘주인(墓主人)이 홀로, 혹은 부인과 함께 앞방의 곁방 안벽이나 널방 안벽에 정좌한 채 남녀시종들의 시중을 받는 장면, 대규모 행렬에 둘러싸여 출행(出行)하는 장면, 산야(山野)를 질주하며 사냥하는 장면, 잔치를 베풀고 가무와 놀이를 즐기는 장면 등이 자주 나온다. 벽화 속의 인물들은 흔히 신분과 계급정도에 따라 다른 사람의 몇 배 혹은 몇 분의 1 크기로 그려지며 모자와 머리모양, 입은 옷의 무늬와 빛깔의 다양성, 소매나 가랑이의 너비와 길이 등이 다르게 묘사된다.생활풍속을 주제로 한 고분벽화에는 주로 죽은 자의 살아 있을 때의 생활 가운데 기념할만한 것과 풍요로운 생활모습을 그렸다. 무덤의 내부는 대부분의 경우 무덤 안의 각방 모서리와 벽에 붉은 색 안료로 기둥과 들보 등 목조가옥의 뼈대를 그려 죽은 자 생전의 저택처럼 보이게 하였다. 생활풍속이 주제인 평양지역 고분벽화의 인물들은 대개의 경우 맞섶이나 오른섶에 소매와 통이 넓은 중국계 복장을 한 모습으로 묘사된다. 집안지역 고분벽화의 인물들은 흔히 고구려 특유의 점무늬가 있는 왼섶옷을 입은 모습으로 그려져 평양지역 고분벽화 인물의 일반적인 복장과 대조를 보인다.

 

   장식무늬로는 불교의 정토(淨土)를 상징하는 연꽃무늬가 즐겨 선택되었으며, 이외에 동심원무늬, 보륜무늬[寶輪紋], 구름무늬, 얽힌용무늬[交龍紋], 인동무늬 등이 혼합적으로 쓰여지기도 하였다. 중기에 해당하는 5세기 중엽~6세기초에는 외방이나 두방무덤에 생활풍속과 사신, 혹은 생활풍속과 장식무늬가 공존하는 그림, 장식무늬만을 주제로 한 그림들이 그려진다. 이 가운데 주류를 이루는 것은 평양․안악지역에서는 생활풍속과 사신, 집안지역에서는 생활풍속과 장식무늬가 공존하는 벽화이다.

 

   생활풍속과 사신이 함께 나타나는 평양․안악지역의 생활풍속계열 무덤에서는 초기단계에는 사신이 무덤칸 천장고임에 하늘 별자리와 함께 그리 높지 않은 비중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일정한 시간이 흐른 다음에는 사신이 생활풍속장면과 벽의 위와 아래를 나누어 표현되며 서서히 벽면에 가득 차게 그려진다. 반면, 생활풍속그림의 벽화 내 비중은 점차 낮아지다가 결국은 소멸한다. 사신계열의 무덤에서는 생활풍속그림이 일시 함께 그려지는 듯하다가 곧 사신 위주로 바뀐다. 이와 같은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시간이 흐르면서 고분벽화의 주제로서 생활풍속보다는 사신이 선호되었음을 의미한다. 무덤칸 천장고임 그림의 일부에 불과하여 벽화 내 비중이 낮은 단계의 사신은 문헌상으로 전하는 갖가지 동물의 형상적 특징을 어색하게 합성시킨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사신이 벽면의 반(半)이상을 차지하는 단계에 이르면 상상동물 특유의 신비성을 갖춘 사실적 형태로 그려진다.생활풍속과 장식무늬, 혹은 장식무늬가 벽화주제인 무덤은 집안지역에서 다수 발견된다. 벽화의 장식무늬로는 동심원문(同心圓文), ‘왕’자문(‘王’字文), 연꽃문 등이 선택되고 있으며 이 가운데 연꽃문을 주제로 한 경우가 벽화고분의 대다수를 차지한다. 이들 연꽃문은 5세기에 들면서 고구려에서 불교가 크게 유행한 것과 관련이 깊다. 무덤칸 안에 그려진 연꽃문은 죽은 자의 정토왕생(淨土往生)을 희구하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사신은 본래 사방(四方)의 방위신으로 하늘의 28개 별자리[28星宿] 가운데 동서남북 각 방위의 7별자리씩을 나타내는 존재이다. 무덤칸 안에 그려질 때에는 방위나 방향에 맞추어 좌(左[東])청룡, 우(右[西])백호, 전(前[南])주작, 후(後[北])현무의 순서로 그려진다. 사신은 무덤자리가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사신 형상의 지세인 사세(四勢)에 해당되지 않거나 최선의 자리가 아닐 경우, 이를 대신하여 그려진다. 후기인 6세기 중엽~7세기 전반에는 널방만 있는 외방무덤에 사신그림이 즐겨 그려진다. 사신도를 주제로 한 벽화고분들은 모두 구릉기슭에 남향으로 축조되었으며 뒤로는 산을 지고 앞으로는 들을 내다보는 곳에 위치하였다.

 

   이 시기 사신은 각각 널방의 한 벽면씩을 차지하는 존재이다. 이러한 현상은 사신이 단순히 하늘의 별자리가 형상화된 방위신 정도가 아니라 죽은 자의 세계를 지켜주는 우주적 수호신으로 여겨진 것과 관련이 깊다. 벽화고분의 천장부는 흔히 하늘세계를 상징하는 해와 달, 북두칠성 등의 별자리 및 별자리신앙과 관련된 선인(仙人), 천인(天人), 상상 속의 상서로운 동물[祥禽瑞獸]들로 장식된다. 또한 무덤에 묻힌 자 및 그 일족의 종교신앙 및 내세관에 따라 무덤칸 천장부의 장식요소가 바뀌기도 한다. 무덤칸 천장고임에 연꽃문이나 여래와 보살, 비천(飛天)과 기악천(技樂天) 등을 그려 죽은 자의 내세정토왕생(來世淨土往生)을 기원한 불교계통의 벽화가 있는가 하면, 용(龍)이나 기린(麒麟), 학(鶴) 등을 탄 선인들과 불로초(不老草)와 각종 상서로운 새와 짐승을 그려 신선이 노니는 이상향에서의 내세 삶을 추구한 신선도교계통의 벽화도 있다. 또 이 두 계통이 혼합된 벽화도 있는데, 고구려 고분벽화를 보면 오히려 종교혼합적 표현으로 무덤칸 천장고임이 장식된 벽화의 사례가 더 많이 발견된다.

 


관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