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치원의 四山碑銘(사산비명) (4) 경주 初月山(초월산) 大崇福寺碑(대숭복사비)

2017. 5. 27. 20:24여행 이야기


최치원의 四山碑銘(사산비명) (4) 경주 初月山(초월산) 大崇福寺碑(대숭복사비)


경주 初月山(초월산) 大崇福寺碑(대숭복사비)

 

   최치원의 사산비명 마지막은 경주 初月山(초월산)의 大崇福寺碑(대숭복사비)이다.

대숭복사비는 최치원의 사산비명이 대체로 선사들의 탑비인 것과는 달리 왕실에서 세운 절에 대한 기록이어서 다른 사산비명과 다른 점이며 신라 왕실과 중앙귀족들의 불교신앙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가 되고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實物(실물)은 파손되어 전하지 않으며 탁본도 없다. 다만 일부 조각(片)이 확인되어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으며 필사에 의한 문장이 전해져 그 내용은 알려지고 있으니 다행이라 하겠으며 비석받침 귀부가 남아 국립경주박물관 본관 앞 야외마당에 전시되고 있다.

 

 


















쌍거북 비석받침  (높이 77, 너비 180cm)

 


   경주 외동읍 말방리의 숭복사터에 있었던 비석받침이다. 머리는 용의 형상이나 전체적으로는 거북의 모습이며, 등에는 두 겹의 거북등무늬[龜甲文]가 새겨져 있다. 짧은 목에는 구슬목걸이가 걸려 있고 등에는 큼직한 비석받침[碑座]이 있으며, 그 위에는 별석의 또 다른 받침이 있다.  [국립경주박물관 설명]

 


   그러니까 숭복사는 경주 외동읍 말방리에 있었는데 현재는 터만 남아 있으며 그곳에 있던 숭복사비는 무슨 연유인지 파손되어 전하지 않고 있는데 쌍거북 비석받침만 남아 경주 박물관 야외전시장에 놓여있는 것이다.

아쉽게도 많은 사람들이 이것이 최치원의 사산비명중 하나인 대숭복사비의 유일한 잔해라는것을 알지 못한 채 지나쳐간다.

 

   삼국유사에 '원성왕의 능은 토함산 서쪽 기슭 鵠寺(곡사 : 숭복사)에 있으며 최치원이 지은 비문이 있다'는 기록이 있는것으로 보아 숭복사는 원성왕의 명복을 빌어주던 원찰이었던 것 같고, 그자리에 최치원이 비문을 써서 세웠다는 것이다.

 

   이러한 쌍거북 비석받침은 매우 드문 것인데 경주 拜里(배리)에 있는 창림사터와 암곡동 무장사터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숭복사와 함께 이 세 절은 모두 신라 왕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니 숭복사는 원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한 곳이며, 창림사 일대는 박혁거세가 세운 신라 최초의 궁궐터로 알려져 있으며 무장사는 태종 무열왕이 삼국을 통일한 뒤 병기를 숨겼다는 전설이 서려 있는 곳이다.

   유추해 보건대 신라 사람들이 왕실과 관련된 비석은 좀 더 화려하게 꾸미려고 쌍거북으로 하지 않았을까 싶다.

 

 

<최치원의 사산비명중 하나인 경주 初月山(초월산) 大崇福寺碑(대숭복사비) 쌍거북 비석받침...>



 

 

 

 

 

 

 

 

 

 

 

 

 

 

 

 




崇福寺(숭복사)터(址)

 

   원래 숭복사는 鵠寺(곡사)라는 이름으로 원성왕릉(괘릉) 자리에 있었는데 왕릉에 자리를 내어주고 말방리로 옮겨와 숭복사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폐사되어 末方里寺址(말방리사지)로 전해져오다가 碑片(비편)이 발견되면서 숭복사터로 알려지게 되었다.

원성왕릉을 조성하고 절을 옮겨 숭복사로 이름을 바꾼 후 경문왕이 꿈에 원성왕을 뵙고 사찰을 크게 수리하여 원성왕의 명복을 비는 원찰로 삼았으며 헌강왕에 이르러 최치원에게 비문을 짓도록 하였으나 헌강왕과 정강왕이 연이어 승하하자 한동안 비문을 짓지 못하다가 진성여왕 10년(896)에야 완성하였으니 이 무렵에 비석을 세운것으로 보인다.

숭복사비는 신라 하대 왕실과 불교와의 관계, 귀족들의 불교신앙을 자세하게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며, 풍수지리설에 입각하여 사원의 땅에 원성왕릉을 만든 관행을 알려주고 있어 주목을 받은 바 있다. 게다가 비문에 왕릉 근처의 땅을 매입하는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토지가격을 지불하고 있는 모습, 왕토(王土)나 공전(公田)이란 표현이 보이고 있어 신라 토지제도 연구의 기초 사료로 활용되고 있기도 하다.

 

현재는 <숭복사 터... 온전하지 않은 삼층석탑 쌍탑이 서 있다.>

























< 完  結 >

 

   석재 몇몇이 남은 금당터에 삼층석탑 2기가 있는데 삼층석탑은 동서로 나란히 서있는 쌍탑으로, 모두 2층 기단위에 삼층의 몸돌을 올린 모습이며 몸돌 일부와 상륜부가 없는 상태이다. 지역 일부에서는 문화재란 원래의 위치에 있어야만이 그 의미를 알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바 최근 이곳에는 대숭복사비를 복원하여 세워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