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군차를 찾아 - 우리 차문화의 원형을 찾아

2017. 6. 18. 00:41차 이야기



       장군차를 찾아 - 우리 차문화의 원형을 찾아 제다 문화사

2010.03.08. 10:57                                                                                     동국대 박희준 교수

          http://blog.naver.com/algacha/101542149





 장군차를 찾아 - 우리차문화의 원형을 찾아

 

   자로가 공자에게 물었다. 위나라에 가시면 무슨 일을 하시렵니까? 공자가 말하였다 .

‘반드시 먼저 이름을 바르게 하겠다.’

子曰 必也正名乎(論語 子路篇)

 

  흔히 이를 공자의 정명(正名)사상이라고 한다. 이름을 바르게 하는 것을 명분을 세운다고 하고, 이름과 실제가 일치할 때 명실상부(名實相符) 명실허전(名實虛傳)이라고도 한다. 황금 돼지의 희망찬 희망에 시작했던 지난 한해는 이름과 실제가 붙은 한판 승부의 한해였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화제가 되었던 것은 한 미술대학교수의 학력위조 사건이었다. 그 뒤 줄줄이 밝혀지는 여러 사람들의 학력위조는 우리나라에 아직 공인을 점검할 제도적 장치가 없다는 사실과 함께 우리 모두가 황금과 학벌 지상주의라는 깊은 병에 빠졌다는 사실을 재확인하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반드시 그런 학력을 가져야 이 사회에서 대우를 받는가 하는 깊은 의문에 빠졌다. 실력있는 사람과 능력있는 사람. 비슷하면서도 너무나도 다른 사람 속에서 실력도 능력도 없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내가 그들의 발판이고 하잘것 없는 소품도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우치게 하였다. 나는 공자와 같은 명분논자는 아니다. 오히려 실제를 더 소중이 여기는 실학을 더 마음 속에 두고 산다.

 

이 사건을 우리 차계에 비추면 낯 뜨거운 유사한 일들이 적지 않다. 차를 마시는 다인들은 차를 먼저 접한 것을 차에 입문한 것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그래도 애교가 있다 할 것이지만, 선대에서부터 차를 마셨다는 이야기를 마치 소설처럼 만들어 낸다. 차를 마신다고 차인은 더욱 아니다. 우리가 차인이라고 부를 때는, 그 이름에 맞는 향기가 있어야 한다. 또한 차를 만들거나 차도구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은 몇대째 차를 만들어 왔다고 스스로 부풀려 과대포장을 한다. 부풀리는 이유는 그럴듯하게 보여서 믿음을 얻어내기 위한 나름대로의 포석이다. 그러나 그 부풀림이 사실과 다를 때는 믿음만 산산조각이 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실제 또한 파멸되고 만다는 사실은 너무 쉽게 잊고서 그 일들을 저지른다. 거짓말이 거짓말을 낳고, 부풀대로 부풀어서 마침내 역사까지 위조를 하게 된다.

 

우리 차문화를 이야기 할 때 우리가 저질러지는 또한 무서운 것은, 차를 중심에다 놓고 차와 조금 연관이 있는 것은 모두 차에다가 가져다 붙이는 것이다. 그래서 옛 문집 속에 차와 관련된 몇가지 기록만 나와도 차인이라고 하는 것은, 차 몇잔 마시고 다관 잡고서 차우리는 순서를 익힌 뒤 차인이라는 자격증을 따는 사람들 처럼 포장을 하는 것과 다름없다.

물론 차에 관련한 기록들이 흔하지 않은 상황 속에서 그런 성급한 평가를 내리는 것은 나름대로 뒷사람들에게 디딤돌이 되어준다는 긍정적인 측면도 없지 않지만, 속도전으로 진행되는 부실공사가 언젠가는 무너지고 만다는 두려움을 가져야 할 것이다. 바른 이름, 올 바라는 평가는 경쟁력이다. 차가 하나의 학문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이즈음, 이제부터라도 차중심적 사고에서, 민족의 숨결 속에 자리한 차문화의 진정성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 첫 번째 걸음으로 우리 차의 원형을 찾아 길을 나선다.




1. 죽로차 (우리 차문화의 뿌리 그리고 미궁)

 

   우리 역사 속에서 잊혀진 순서로 으뜸가는 것은 가야와 백제 그리고 발해의 순으로 이어질 것이다.

우리의 뿌리라고 하는 단군조선은 이미 역사 밖에 있다. 역사에는 사라졌어도 문자로 전하여지는 역사보다, 말없이 땅속에서 발견되는 유물이나 새로운 자료의 역사를 새롭게 써야하는 전기를 마련하기도 한다. 차문화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다. 문자 속에 기록된 차문화 뿐만 아니라 땅 속에 숨어 있는 차그릇의 파편과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오래된 차나무 등은 우리차문화의 역사가 만만치 않은 것을 증명해 주고 있지만, 아직 우리의 관심이 그것까지는 다 미치지 못한다.

 

   그 가운데서 우리에게 가장 흥미롭게 다가오는 것 하나가 가야차문화이다. 허황옥이 김수로왕이 시집올 때 차씨앗을 가져왔다 (金海白月山有竹露茶 世傳首露王妃許氏 自印度持來之茶種云)는 이능화<조선불교통사. 1917년 출판>의 기록은 가야차문화가 대렴공이 차씨앗을 가져온 것을 무려 800년을 앞 당겨주고, <삼국사기>에 기록된 제례에 쓰여진 차가 있어다는 것은 차례문화의 기원을 밝혀주는 등 한국차문화의 위상을 높이는 자료로서, 우리차문화의 뿌리 역활을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뿌리가 깊으면 바람에 흔들리지 않듯, 튼튼한 차문화의 기초가 마련된다. 그렇다면 가야사람들은 2000년이 넘는 세월 속에 차문화를 지켜왔다고 해도 좋을까? 지켜왔다면 어떻게 지켜왔을까? 그 진실성은? 그 가능성은? 여기에 대해서는 허명철, 김종간, 김대성, 김병모 등과 같은 재야사학자, 언론인, 역사학자가 뛰어들어 나름대로 가닥을 잡아가고 있다. 허황후의 차씨전래설은 인도의 아유타국과 중국 사천성의 보주(普州)로 압축되는데, 그런 노력 속에서 가야문화축제 행사기간 중에 국제가야차문화축제를 열고 있다. 차문화축제의 꽃은 당연히 ‘차’이다. 더군다나 김해는 ‘김해’ 찻사발로 유명한 도요지이다. 차와 찻사발이 있으니, 김해시는 차문화계에 2000년의 역사와 함께 2000년의 시작과 합께 양수겹장을 부르고 우리에게 다가선 것이다. 그 차에 이름을 ‘장군차’라는 이름을 붙인다. 또한 황차라고 하여 발효차를 만드는 것에 김해시와 김해 농가가 합하여 노력을 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여기서 과연 그 이름은 바른 것인가? 그 모든 것이 충분한 고증 속에서 나온 것인가?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2000년 역사를 가진 죽로차의 뿌리는 일단 역사학자들의 몫으로 남겨놓고, 김해 장군차에 대한 검토를 먼저 시작해보고자 한다.





2. 장군차는 동백나무인가?

 

   가야의 차문화라고 하면 김해로 집중되는데, 그보다는 더 큰 시각으로 가야차문화를 살펴보아야 한다. 이른바 육가야로 불리는 금관가야(金官伽倻;지금의 김해), 아라가야(阿羅伽倻;지금의 함안), 대가야(大伽倻;지금의 고령), 소가야(小伽倻;지금의 고성), 고령가야(古寧伽倻;지금의 함창), 성산가야(星山伽倻;지금의 성주)의 차문화를 아울러야 할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즉 경상북도 일원과 경상남도 일원의 차문화까지 포함하여 가야차문화를 조망하여야 한다. <조선불교통사>의 기록을 제외하고는,

<세종실록지리지>, <동국여지승람>, <신증동국여지승람>, <대동지지> 등 여러 문헌적 기록 속에서는 가야차문화의 원조라고 할 김해에서는 차가 보이지 않고 오히려 그 부근인 함안, 밀양, 진해에서 차가 토산품으로 나온다. 그러다가 1929년 간행된 <김해읍지>에 처음으로 토산 중에 차가 보이는데 우리에게 놀라운 사실을 2가지를 동시에 던져준다. ‘황차’와 ‘장군차’이다.


황차 금강곡에서 나는데 일명 장군차라고 한다.

 

     黃茶 在金剛谷 一名將軍茶

     <김해읍지> 토산 78쪽

 

이 기록을 중심으로 가야문화연구회는 1985년부터 가야차를 찾아 나선다. 그 불을 지핀 사람은 그 당시 한국일보에 근무하던 김대성인데, 그때 김해의 도시 개발열풍 속에서 가야차를 지키고자 노력한 모습은 김대성<차문화유적답사기> 상권에 자세하게 쓰여져 있다. 그때도 기록자는 가락차라고 하였지, 황차나 장군차라고는 하지 않았다. 다음은 김기원이 김해 차밭골(茶田 현재 동상동 일원)에서 채집한 차 민요를 보자.

 

    다전리에 봄이오면 삼월이라 삼짇날에

    다전리에 햇차따서 만장샘에 물을길어

    어방산에 솔갈비로 밥물솥에 끓인물에

    제사장님 다한정성 김해그릇 큰사발로

    천겁만겁 우려내어 장군차로 올릴까요

    죽로차로 올릴까요 바리바리 차립니다

    나라세운 수로왕님 십왕자의 허왕후님

    가락국가 세운은혜 이차한잔 올립니다

    합장하고 비옵니다 김해사람 복받으소

    잘못한일 점지하소

 

이 민요가 언제부터 불려진지는 잘 알 수 없지만, 김해 그릇 큰사발이라는 김해다완이 제사에 올려졌다는 것은 가야차와 김해차완의 만남을 알 수 있게 한다. 이른바 일본인들이 이름붙힌 긴까이차완(김해차완)이 소박한 민요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김대성이 이 차밭골의 현장을 찾아나섰을 때 현지 주민들이 차나무를 차라고 하지않고, ‘약나무’, ‘작살’이라고 한 것은 장군차나 죽로차로 문헌으로 전승되어지던 이름보다 일반적인 명칭이 보다 상용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럼 이제 <김해읍지>에 기록된 이 금강곡을 살펴보자.




3. 금강사의 장군수 (차나무인가? 동백나무인가?)

 

그동안 금강곡에 관련된 기록은 하연<불훼루기>가 주를 이룬다. 그동안 여러 글들에서 금강곡이라는 이름은 금강사가 있는 골짜기로 기정사실화 하고서 논리적 전개를 한다. 또한 이 <불훼루기>가 나오는 기록들을 검토해보면 내용은 대동소이 하지만 장군차 부분은 윤색되고 가필되어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럼 불훼루가 있는 금강사의 첫 번째 기록이라고 할 수 있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김해도호부 불우조의 금강사를 살펴보자.

 

        금강사(金剛社) 는 김해부의 북쪽 대사리(大寺里)에 있다.

        고려 충렬왕(忠烈王)이 합포(合浦)에 행차하였을 때, 여기에 와서 놀았다.

        불훼루(不毁樓)가 있다. 하륜(河崙)이 기문에, “김해(金海)는 옛날의 가락가야(駕洛伽倻)이다.

        가락은 신라와 함께 일어났는데, 수로왕의 탄생은 참으로 기이하고, 전하여 내려오는 내려온

        풍속에는 아직도 순박함이 있다. 또 가까운 곳에서 높은 곳으로 오르기 좋은 경치로는 남방에서

        첫째인데, 그 중에서도 금강사의 소헌(小軒)이 제일이다.

        사(社)에 산다수(山茶樹)가 있어 온 뜰을 뒤덮는데, 전조(前朝) 충렬왕이 보련(寶輦)을 여기에

        멈추고 장군이라는 칭호를 내렸으므로 부로들은 이 일을 미담으로 서로 전해 온다.

        내가 소년 시절에 객으로 왔을 때, 때마침 중춘(仲春)이어서 산다화가 활짝 피어 있어서 반나절

        이나 구경하였지만 흡족하지 않았다.

        다만 마루가 낮고 작으므로 나뭇가지와 잎이 서로 가리워서 멀리 내다보기가 어려웠다.

        문을 나와서 산과 바다의 참모습이 보여서 배회하며 읖조리기를 오래하다가 돌아왔다. .....

        金剛社 在府北大寺里 高麗忠烈王 幸合浦時 來遊于此 有不毁樓 O

        河崙紀 金海 古之駕洛伽倻也。駕洛與新羅幷起。首露之生。儘奇異。

        遺俗尙有淳風。且其登臨之美。冠於南方。金剛社之小軒。爲第一。社有山茶樹。

        蔭于一庭。前朝忠烈王。駐輦于。此賜號將軍。父老相傳以爲美談。余昔少年爲客。

        時方仲春。山茶盛開。留賞半日。猶以爲未足。祇是軒楹低小。枝葉交加。未易盡其遐矚。

        及旣出門。乃見山海之眞態。徘徊吟詠。久之而還。

        .....<신증동국여지승람>32권 김해도호부 불우조

 

이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불훼루기>가 정본이 되어, 하륜의 문집인 <浩亭先生文集>에서는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인용하고 있다. 그러나 <김해읍지>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을 옮겨오는

과정에서 조금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불훼루기>를 인용한다.

 

       金剛社 在府北大寺里 高麗忠烈王(時) 幸合浦時 來遊于此 有不毁樓 O

       (領議政)河崙(不毁樓)紀 (曰)金海古之駕洛伽倻也。駕洛與新羅幷起。首露之生。儘奇異。

       遺俗尙有淳風。且其登臨之美。冠於南方。金剛社之小軒。爲第一。社有山茶樹。蔭于一庭。

       前朝忠烈王。駐輦于。此賜號將軍(茶)。父老相傳以爲美談。余昔少年爲客。時方仲春。

       山茶盛開。留賞半日。猶以爲未足。祇是軒楹低小。枝葉交加。 <김해읍지> 불우조에서

 

여기서 (時)는 때를 나타나는 것으로 큰 무리가 없지만, ‘(영의정) 하륜’은 하륜의 벼슬을 드러내어 보다 기록의 신빙성을 더하고 권위를 더하고자 하는 의도가 명백히 드러난다. 그러나 더욱 염려되는 것은 ‘장군(차)’ 부분이다. 장군이란 호가 내려진 나무는 중춘에 현재로서는 5월경에 피어나는 ‘산다’ 즉 춘백인데 흔히 우리는 동백나무라고한다. 차나무 꽃은 가을이 깊어가며 초겨울 까지 피는 꽃인데, 5월에 꽃이 피는 차나무라고 한 것이다. 차나무는 동백나무과 속하기는 하지만 차나무를 동백나무라고 하는 것은, 마치 밤나무와 나도 밤나무와 같은 차이가 있다.


   다산 정약용<아언각비>에서 차와 산다를 명확히 구분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 당시 산다라는 표현은 동백나무와 ‘산에서 자라는 차나무’라는 뜻이 혼용하여 쓰여지고 있었음을 여러 기록들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래서 동백나무를 구분해서 기름이 나오는 유다(油茶)라고 하고, 지방에 따라서는 차나무가 기름도 많이 나오지 않는 나무라고 해서 ‘개동백’이라고도 한다.

2000년대 차가 우리 문화의 중심으로 이동하면서, 어떤 연유에서인지는 몰라도 김해의 차는 장군차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식자간에서는 동백나무를 차라고 잘못 붙힌 이름이라고 한다. 하여 김해차는 동백나무잎으로 만든 차이지, 진정한 차가 아니라고 한다.

과연 2000년 차역사를 가진 김해사람들은 차나무와 동백나무도 구분하지 못한다는 말인가?

내가 확인한 또 다른 <김해읍지>는 1899년 필사본으로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된 것이다. 그 읍지에 나오는 기록은 또 앞선 1929년판 <김해읍지>와는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金剛社 在府北( )大寺里 高麗忠烈王 幸合浦時 來遊于此 有不毁樓 O (領議政)河崙(不毁樓)紀(曰)

     金海古之駕洛伽倻也。駕洛與新羅幷起。首露之生。儘奇異。遺俗尙有淳風。且其登臨之美。

     冠於南方。金剛社之小軒。爲第一。社有山(上)茶樹。蔭于一庭。前朝忠烈王。駐輦于。

     此賜號將軍(茶號)。 <김해읍지>1899년 필사본

 

여기서 금강사의 위치를 알려주는 ‘재부북( )대사리’에서 북자는 먹칠이 되어 분명하지 않다. (영의정)하륜(불훼루)기는 앞서 살펴본 1929년판 김해읍지와 같이 지방읍지의 권의를 세우기 위한 가필로 보인다. 다음의 산(상)다수에서 ‘산다수’와 ‘상다수’의 뜻의 차이를 먼저 살펴보자. 산다수는 물론 동백나무이다. 상다수라고 하였을 때는 아직 그 예를 찾지 못했지만 좋은 차를 가르키는 것으로 보이다.

그러나 ‘장군(茶號)’에 있어서는, 이렇게 윤색하기 위해 산다수를 상다수로 바꾸지는 않았나 하는 의심이 더욱 증폭된다. 1899년 <김해읍지>에서 장군이란 이름이 다호(茶號. 차나무에 붙혀진 호)라 하였다. 그 뒤 그 기록이 전승되어 1929년판 <김해읍지>에서는 드디어 ‘장군차’라고 이름이 붙게 된다. 이 기록을 인용하는 적지 않은 사람들은 아무런 식물학적 구분없이 동백나무 산다수에 붙혀진 장군이란 이름을 산다수에 붙은 이름이라고 하여 장군차라고 쓰고 있는 것이다. 과연 동백나무 잎으로 만든 산다수에 장군차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출처] 장군차를 찾아 - 3. 금강사의 장군수(차나무인가? 동백나무인가?)|작성자 algacha



     

4. 금강사 가는길(송악당과 불훼루)


<신증동국여지승람><김해읍지>의 기록을 살펴보면 금강사는 김해부의 북쪽 대사리에 있다라고 하였다. 대사리는 그이름 큰절골이다. 큰 절이 있던 곳이다. 금강사가 사찰이었던 것은 하륜<불훼루기>에서 알 수 있다. 대사리가 큰절이었던 금강사가 있던 터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금강사의 알려주는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김해도호부 사묘 조에 나오는 송악당에 관련한 기사이다.


       송악당(松岳堂) 금강사(金剛社)에서 서북쪽으로 2백 보쯤 되는 지점에 있는 작은 언덕 위에

       신사(神祠)가 있는데, 송악당이라 한다. 전설에는, “고려 원종(元宗)이 원 나라의 명을 받들고

       장군 김방경(金方慶)을 보내어 동쪽으로 일본을 정벌할 때에 금강사에 머물렀다.

       그때에 이 언덕에서 송악의 신에게 제사하였다.” 한다. 고을 사람들이 그대로 따라 제사하여서

       이 고을의 성황당 신에게 제사하는 자는 반드시 여기에도 겸해서 제사지낸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김해도호부 사묘조


    금강사가 있는 곳 가까이 즉 서북쪽 200걸음이 닿는 곳에 송악당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려 충렬왕 원년 (1274)에 있었던 여원연합군의 제 1차 일본정벌이 있었고 충렬왕 7년(1281) 제 2차 정벌이 있었다. 충렬왕은 1차정벌 때는 합포에 직접 행차를 하였고, 2차 정벌을 앞둔 충렬왕은 합포(지금의 마산)에 정동행영(征東行營)을 두었다. 즉 1274년 이전에 금강사가 있었고, 김방경이 1차와 2차에 걸쳐 대마도 정벌을 할 때 금강사에 머물면서 송악당에 산신제를 모시고 출전을 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1929년판 <김해읍지>에 보면 다음과 같이 송악당이 그려지고 있다.


       송악단 부성의 북쪽 3리에 있다. 고려장군 김방경 일본을 토벌할 때 이곳에서 빌었다.

       신신령스런 도움이 있는데 지금은 폐지되었다.

       松嶽壇 在府北三里 高麗將軍 金方慶討日本時禱之 有靈助 今廢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송악당이 <김해읍지>의 송악단으로 바뀐 것을 알 수 있다. 송악산은 김해의 진산인 분산(盆山)아래에 있는 삼각형의 산인데, 문헌과 고지도에는 송학산(松鶴山)으로도 나온다.


즉 김해부성의 북쪽 3리지점에 송악당이 잇고 그곳에서 남동쪽으로 200걸음 내려오면 금강사가 있었다는 것이다. 하륜<불훼루기>를 쓴 것은 1380년 부친상을 당한 뒤로 보인다.


        금강불훼는 불교의 말이라, 내가 그 뜻을 잘 풀이할 수는 없다. 그러나 누의 터가 절의 경내에

        이어져 있고, 누를 완성한 것도 또한 절의 스님들에 의해 지어졌으니 절의 이름을 따서

        누 이름으로 하여도 또한 구차하지 않을 것이다. 절이 허물어지지 않으면 누 또한 허물어지지

        않을 것이며, 누가 허물어지지 않으면 여러분의 이름도 또한 없어지지 않으리라.


        대개 누관(樓觀)을 짓고 제목으로 하여 글을 짓는 것이 세도와 관계가 없을 듯하나, 여기에서

        세도의 오르내림을 볼 수 있다. 만약 정사가 화평하지 못하여 송사가 다스려지지 않거나 시절

        (時節)이 화합하지 못하여 풍년으로 여유롭지 않으면 백성과 함께 즐거움을 같이 하려는 뜻이

        있는 자라 하더라도 능히 이르지 못할 것이다...... 또한 내가 옛날에 거닐던 당이 아닌가.

        나는 사양하지 못하고 이름을 불훼라고 하였다.


        金剛不毀。釋氏之說也。余不能演其義矣。然樓之基。旣繼社境。而樓之成。又出社僧。

        則其取名社之說而以爲樓名。亦非苟矣。社旣不毀。則樓亦不毀矣。樓旣不毀。則數君子之名。

        亦且不毀之矣。且夫樓觀之,經營題詠。似不關於世道。而可以見世道之升降矣。

        若非政平訟治。時和年豐。油然有與人同樂之意者。莫能反矣。‘’

        .......。況其余昔年徘徊之地乎。余是以不固辭。名之曰不毀。

        ...... <신증동국여시승람> 김해도호부 불우조에서


 금강사 옆에 자리한 불훼루 그곳에 차나무가 있어다는 이야기는 없다. 금강사에 갔다가 산다수 아래에서 비를 피한 뒤 그 산다수에게 장군이란 이름을 내린 충렬왕, 장군 산다수가 환하게 핀 봄날 먼 바다를 바라보며 아름다운 풍광에 흠뻑 빠졌던 소년 하륜, 그곳에 가면 모든 사람들이 사람을 보듬을 넉넉한 동백나무가 있었다. 금강사 불훼루는 우리 마음 속에 감추어진 금강석이라고 할 수 있다.






5. 금강사에 금강사가 있었다.

 

하륜의 아버지인 하윤린은 금강사라는 모임을 가졌다. 하륜이 변계량에 부탁한 아버지 하윤린의 비문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을사년(1365, 공민왕 14) 봄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가을에 정승공이 과거에 급제하고,

       이듬해 사관(史官)이 되었다.

       공이 말하기를, “조정에 벼슬하는 아들이 있고 나는 늙었으니, 다시 벼슬하고 싶지 않다.” 하고,

       고을의 부로들과 함께 금강사(金剛社)를 결성하고 한가히 노닐면서 세월을 보냈다.

       乙巳春。還鄕。秋。政丞公登第。明年。爲史官。

       公曰。有子立朝。吾老矣。不欲復仕。乃與鄕之父老。結爲金剛社。優游卒歲。

 

    <춘정집> 유명조선국 증 충근 익대 신덕 수의 협찬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 진양부원군

    하공 신도비명 병서 (有明朝鮮國贈忠勤翊戴愼德守義協贊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領義政府事晉陽府

    院君河公神道碑銘) 幷序에서

 

이 금강사라는 계회가 김해에서 만들어진 것이지 아니면 타지역에서 만들어진 것인지는 잘 알 수가 없다. 하륜이 벼슬을 하기전(1365년) 김해의 금강사를 방문하였던 것을 보면 하륜뿐만아니라 그 당시 하륜의 아버지인 하윤린 또한 이곳을 방문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1411년 변계량은 이 신도비를 지었는데, 이 비석이 서있는 곳이 현재의 진주시 미천면 오방리이다.

이 비문의 기록을 통하여 금강사라는 사찰에서 금강사라는 새로운 계회가 만들어졌을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추론해 본다. 한편 <불훼루기>의 내용에서 민간의 누대가 절을 경내에 들어가고 절의 스님들이 민간누대 조성에 동원이 되는 등, 같은 이름의 서로 다른 성격의 금강사를 통해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가는 그시기에 사찰이 유교의 영향권에 안에 들어가는 모습을 알게 된다. 그러다가 드디어 영원할 것 같던 금강사 불훼루가 무너지고 만다. 1443년 세종 21년의 일이다.

 

    장령 우효강(禹孝剛)이 아뢰기를, “경상도 관찰사 이선(李宣)이 도절제사 이교(李皎)와

    김해부 금강사루(金剛社樓)에서 잔치하였는데, 누(樓)가 무너져 눌려 죽은 자가 8인이나 되오니,

    그 관직을 파면하고 그 죄상을 국문하게 하옵소서. ”하니,

    임금이, “우선 공문을 보내어 그 사유를 조사하게 하라.” 하였다.

    掌令禹孝剛啓: “慶尙道觀察使李宣與都節制使李皎宴於金海府金剛社樓上, 樓頹壓死者八人,

                        請罷其職鞫其罪。”

   上曰: “姑令移文, 劾其事由

   <세종실록>28책 87권 19장

 

금강사루가 잔치장소가 되었던 것이다. 하륜이 백성의 즐거움과 함께 하려고 했던 불훼루가 잔치장소로 바뀌고 말았다. 불훼루 위에서 잔치를 벌이던 이선과 이교는, 그 이름이 가진 참된 의미를 알지 못했다. <불훼> 그것은 금강을 지키는 자의 것이었다. 불훼루가 무너진뒤 금강사 또한 어떠한 연유인지 알 수 없지만 곧 훼멸된 것으로 보인다. 서거정<김해금강사>시를 보면 참담한 모습으로 금강사가 나타난다.

 

   歷盡名區信馬蹄      역대로 이름난 곳 모두 말발굽 달려서

   盆城城北訪招提      분성 북쪽에서 날 불러서 찾아왔네

   金官故國乾坤老      금관가야 옛나라터는 하늘 땅도 지쳤는가

   玉輦曾遊歲月迷      임금님 수레는 이곳을 놀다갔어도 세월은 혼미

   始祖陵深山寂寂      시조릉은 깊고 깊고 산은 적적하기만 한데

   將軍樹老草萋萋      장군수는 늙어만 가고 풀만 무성하여 처량하고나

   伽倻古物琴猶在      가야 옛물건 가운데 가야금만 그대로 인데

   要遣佳人唱更低      가인을 보내어 노래소리도 낮추어야 하리

   <금해금강사 金海金剛社 전문> <사가시집 四佳詩集>補遺 三 에서

 

이 시는 여지승람에 기록된 것을 <사가시집>을 재발간 할 때 보유편에 옮겨 놓은 것이다.

서거정이 김해를 방문한 때는 1481년 이전의 일로 보인다. 1481년 <신증동국여지승람>이 간행된 해인데, 서거정은 이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발간을 책임진 사람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서거정의 시가 되었다는 것은, 금강상의 존례여부를 잘 알려주는 결정적 자료가 된다. 금강사를 방문한 서거정은 참담한 마음으로 금강사터를 바라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뒤 금강사에 관한 기록은 잘 나타나지 않는다. 이상의 기록 속에서 아직 금강사에서 차나무가 있었다는 사실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김해읍지의 금강곡의 장군차는 어떤 기록을 옮겨 놓은 것일까? 금강곡의 장군차는 동백나무인가 아니면 차나무인가? 먼저 여기서 먼저 고백하여야 할 것이 있다.


아직 나의 한계로 서거정이후 기록 이후, <조선불교통사>와 1929년판 <김해읍지>에 이르는 공백을 메울 기록 가운데 가장 기초가 될 1929년판 <김해읍지>이전의 <김해읍지>를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1929년판 <김해읍지>의 범례에 따르면 <김해읍지>는 인조 경오년(1630)에 처음 편성되었고 순조 임진년 (1832) 에 증보판을 내고 1929년에 속간한 것으로 나온다. 내가 찾은 1899년의 필사본 <김해읍지>가 있는 것을 보면 이외에도, 다른 필사본 <김해읍지>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




6. 강진에 다산, 김해에는 낙하생이 있다.

 

먼저 차계에 처음 소개되는 낙하생 이학규(洛下生 李學逵 1770년(영조 46)-1835년(헌종 1))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알아보자. 이학규는 평창 이씨 이응훈의 유복자로 태어났다. 외가인 성호 이익의 가문에서 자라면서 외조부 이용휴로부터 성호 이익의 학문을 전수받았다.

정조가 총애한 17학사의 하나로 문장을 인정받았지만, 1801년에 일어난 신유사옥과 황사영백서 사건 때 그 중심에 있던 외숙 이가환, 삼종숙 이승훈이 죽었고, 이학규 또한 연루되어 전라도 능주(지금의 화순), 경상도 김해 등에서 24년간 유배 생활을 하였다. 유배 기간 중, 다산 정약용과 문학과 사상면에서 긴밀한 교유를 하였다.

낙하생이란 이름은 서울사람이란 뜻을 담고 있는데, 이학규가 취한 뜻은 스스로를 낮추어 ‘서울 촌놈’이란 뜻으로 보인다. 처음에는 서울사람으로 지방정서를 이질적으로 받아들이던 낙하생은 나중에 유배가 끝났을 때 , 고향으로 돌아가서 적응을 하지 못하고 다시 김해로 내려온다. 바로 김해가 낙하생의 마음의 고향이었던 것이다. 24년의 유배생활 동안 김해인이 되었다.

 

우리차문화가 한창 꽃피던 시절 다산 정약용이 강진으로 유배를 가 있던 때, 세상은 찬바람과 칼바람이 불었다. 바로 천주교의 탄압과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 속에 정조가 이루었던 찬란한 조선문화의 부흥이 나락으로 떨어지던 때이다. 그때 그 어둠 속에서 눈부시게 내면을 밝힌 사람들 가운데 다산 정약용과 낙하생 이학규는 우리 차문화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 준다.

다산이 해남에서 황다를 발견하고 강진의 다산초당에서 제다법의 혁신을 통해 차무역을 꿈꾸던 일이나 낙하생 이학규가 김해의 금강곡에서 소쩍새 울음 속에서 차를 찾아내는 일은 다산과 성수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도 마치 성난 바다에서 한배를 탄 것처럼 거센 강물 앞에서 서로 바라보고 있는 두 언덕의 사람들처럼 서로 격려하고 위로 하며 그 힘든 세상을 견디어 낸다. 그 곳에 차가 있었다. 다음의 시는 김해에서 보낸 낙하생의 시를 받고서 답한 다산의 시이다.

 

신유년(1801) 봄 내가 장기(長鬐)로 귀양갈 때 성수(惺叟)는 능주(綾州)로 가 나는

영남으로 그는 호남으로 갔었다가 그해 겨울 내가 탐진(耽津)으로 배소를 옮기자

성수는 또 금관으로 옮겨가 호남ㆍ영남이 서로 바뀌었던 것이다.

이렇게 두 사람 다 옮겨 다니는 통에 끝까지 서로 가까이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시에다 우선 그 뜻부터 밝힌 것이다.

 

    我來鬐縣空     내 떠나오자 장기가 텅 비고 /

    君去綾城空     그대 떠나가니 능주도 텅텅 비어 /

    兩動無一靜     한 자리에 가만히 둘 다 못 있으니 /

    終古不會同     끝까지 못 만나는 것 당연하지 /

    雙曜値三五     해와 달도 보름이 되면 /

    朝暮各西東     아침에 뜨고 저녁에 떠 제각기 동에서 서로 가듯 /

    方其燕來時     제비가 옛집 찾아올 때면 /

    已無先花鴻     기러기는 이미 떠나고 없어 /

    耽津與金官     탐진과 금관이 /

    遂亦在南中     다 남쪽에 있는 고을이나 /

    相去五百里     서로 오백 리나 떨어져 있어 /

    異雷猶同風     풍속만 같지 천둥소리도 안 들린다네 /

    詩來自漢城     시도 한양에서 오자면 /

    曲折傳郵筒     우체통으로 전달이 되겠지만 /

    靜思其來路     오는 길을 곰곰이 생각하면 /

    千里垂長虹     긴 무지개가 천리를 뻗은 것 같애 /

    兩彌不相挽     양쪽 활끝이 서로 당겨지지 않는 /

    頗似無弦弓     어쩌면 시위 없는 활과도 같고 /

    又如幷頭蓮     어쩌면 나란히 핀 연꽃이 /

    藕絲由蔕通     속실은 꼭지까지 연결된 것도 같네 /

    崎嶇乃如此     이렇게도 기구한 운명들 /

    撫念肝腎恫     생각하면 오장육부가 아프다네 /

    <다산시문집> 성수에게 보내다[寄惺叟] 30운 부분

 

   이 시에서 나오는 ‘성수’는 낙하생 이학규의 자이고, 탐진과 금관 지금의 강진과 김해이다.

마치 해와 달처럼, 한줄기에서 나온 연꽃과 같지만 끝내 서로 만날 수 없는 현실속에서 정치적 종교적 박해 받는 기구한 운명을 함께 견디어 나간다. 그런 서로의 마음을 문학작품으로 위안하며 풀어나가는 가운데 다산과 낙하생은 , 서울 중심의 문화틀을 지방으로 확산시키는 역할을 수행한다. 자의든 타의든 이른바 지방문화 그리고 민중문화에 대한 재인식의 창구가 된다. 그 가운데 김해에서 24년 동안 유배생활을 한 이학규가 남겨놓는 기록들은 현장을 기록한 사진처럼 선명하다.

<죽지사> ,<영남악부> 그리고 <금관기속시>와 같은 작품을 통해 경상도의 정서와 경상도가 가진 문화적 산물을 사실주의 적인 회화기법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강진에서 쓰여진 다산의 시가 풍자적인 민중적 정서를 해학적으로 담고 있다면, 김해에서 쓰여진 성수의 시는 화려하지 않고 소박한 민중적 정서를 진솔하게 담고 있다. 그럼 먼저 금강사의 금강곡을 노래한 이학규의 다시한편을 살펴보도록 하자.

 

    금강곡 골짜기에 소쩍새가 울고

    송악당 옆 보리이삭이 고개를 숙이는데

    다섯자 대 지팡이는 두자루가 있어도 아깝지 않으니

    호계를 건너면서 세사람이 크게 웃었던 옛이야기를 하랴?

 

금강곡은 본명이 금강사이다. 부성의 북쪽 5리에 있다. 고려 충려왕이 합포에 행차하였을 때 이곳에 머물렀는데 불훼교가 있다. 송악당은 금강사 서쪽 200걸음 떨어진 곳에 있다. 세상의 전하는 말에 고려 원종이 원조의 명을 받아 장군 김방경이 일본을 정벌을 할 때 이곳에 머물면서 송악당 안에 있는 송악산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호계수는 금강사의 동쪽 몇리 떨어진 곳에서 부성으로 들어간다.

 

剛谷裏子規啼 松嶽堂邊麥혜(禾+惠)低 五尺고(竹지+叩)雙不惜 不須三笑過前谿

 

金剛谷本名金剛社 在府城北五里 高麗忠烈王幸合浦時 留此于此 有不毁橋 松嶽堂在金剛社西二百步

世傳高麗元宗承元朝命 命將軍金方慶征日本時 留此于此 祀松嶽山神于堂中 虎谿水在金剛社東數里

入府城中    <洛下生集> 冊 13 海榴菴集 金冠紀俗詩 부분

 

여기에서 처음으로 금강곡이란 지명이 등장한다. 금강사가 폐사가 되고 난 다음 금강곡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을 알 수 있다. 김해부성 5리 밖에 있다는 송악당은 김방경이 송악산신에게 제사를 모신 곳인데, 금강사의 위치를 파악하는데 좋은 자료가 된다. 충렬왕이 다녀가고 김방경 장군이 머물던 비교적 큰 규모의 사찰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학규가 김해에서 유배를 당했던 시절만 하여도 아직

불훼교라는 다리가 있어 불훼루의 옛 자치를 그 나마 짐작할 수 있었던 같다. 충렬왕이 머물고 고려의 장군이 머물던 금강사에 차가 있었을 가능성은 크다. 그렇지만 금강사에서 차가 난다는 사실은, 지금까지의 기록으로는 알 수 없다. 이보다 앞선 금강사 기록들은 모두 장군 산다화 즉 동백나무를 차나무로 점점 바꾸어 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차라는 언급은 한글자도 보이지 않는데 , 나는 왜 이 시를 다시라고 하는가? 새소리를 문학작품으로 승화시킨 금어십장(禽言十章)의 소쩍새를 노래한 한편의 시 때문이다.





7. 소쩍새 울음 속에 피어는 금강곡의 찻잎

 

     速摘茶                            솥적다(빨리 차를 따소)

     春將사(賜 -易+余)            봄이 장차 늦어지려 하네

     前山昨夜雨 灌樹齊生芽      앞산에 어제 밤 비오더니 온나무 물을 주어 싹들이 돋아나네

     新芽作葉農事急                새싹이 잎이 되니 농사일이 급하여라

     恐爾明朝不在家                다만 두려운것은 내일 아침 집에 아무도 없을 것이라는 것.

     <낙하생집> 금언십장(禽言十章)의 부분

 

소쩍새가 ‘솥적다 솥적다’ 울면 풍년이 오고, ‘솥텡 솥탱’ 울면 흉년이 온다고 한다. 즉 풍년이 와서 솥이 적을 정도로 많은 밥을 하는 생각만 하여도 배가 부르고, 흉년이 오면 솥이 텅 빌 정도로 배고품을 느끼기 때문에 더 많은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을, 새소리를 통해서 우리선조들은 힘든 삶을 이겨내는 지혜를 담아 준 것이다. 그런데 이학규는 ‘솥적다’를 ‘속적다’ 즉 ‘빨리 차를 따소’이라고 듣고 있다.

어지간한 차꾼이 아니면 이런 환청의 경계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하여 금강곡에서 울던 소쩍새 울음소리도 틀림없이 ’빨리 차를 따소‘로 들었을 것이다. 하여 앞에 인용한 금관기속시의 한부분을 의역하면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금강곡에는 속적다(빨리 차를 따소) 소쩍새가 울고

    송악당 옆에는 보리이삭이 고개를 숙였네

 

이외에 적지 않은 다시가 <낙하생집>에 보인다.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가야의 조선 후기의 차문화가 이학규를 통해서 부분적이지만 드러난다. 이렇게 조심스럽게 타진해보면 어떨까?

다산과 오랜 연분 속에서 다산을 통한 우리 동다에 대한 재인식을 시작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가운데 해남의 정약용이 정약용이 새롭게 발견한 황차에 대한 인식이 김해의 이학규에게 까지 전하여 진 것은 아닐까? 앞으로 이에 대한 연구가 좀 더 심도 깊게 있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8. 금강차, 장군차, 노암하 - 19세기 말의 김해차의 이름들

 

허훈(許薰) (1836년(헌종 2) -1907년(순종 1))은 자는 순가(舜歌) 호는 방산(舫山)이다. 서구과학을 받아들이지만 천주학을 비판하는 기호남인(畿湖南人)의 맥을 잇는 성재 허전(性齋 許傳)의 제자로 주로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일생을 바쳤다. 여기서는 허훈이 남긴 김해 차관련 기록인 금강차대해 알아보도록 한다. 1899년 허훈이 64세가 되었을 때 자신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김해를 방문한다. 그때 지은 금관16영(金冠十六詠) 가운데 하나인 <금강영차>는 다음과 같다.

 

    金剛谷裏綠旗槍     금강곡 안에 푸른 찻잎들이 펼쳐졌는데

    美味眞同顧渚香     아름다운 맛은 고저차의 향기와 같네

    何事昔年輕費舌     무슨 일로 옛날에 가볍게 말했을까

    始知奇品冠東方     비로소 기품이 동방에서 제일인 것을 알겠네


    余嘗著說斥金剛茶矣 後攷茶經 始知此品甚佳 나는 금강차를 배척하는 말을 하였다. 뒤에 <다경>을

                                                             고찰해보니 비로서 이 차가 참으로 좋다는 것을 알았다.

    

    - 방산선생문집 <舫山先生文集>권 1 金剛靈茶

 

   우리는 비로소 이 시에서 금강곡에 차나무가 있다는 사실을 접하게 된다. 그리고 전혀 새로운 이름인 금강차라는 이름을 마주하게 된다. 이 이름은 지명을 딴 차이름으로 정다산만불차(萬佛茶)와 함께 우리나라 차문화가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서는 한 지점을 만나게 된다. 그 이전의 차이름은 주로 작설, 죽로차, 죽전차 등 주로 찻잎의 생긴 모양세나 생산되어지는 환경의 묘사를 통한 것이지만, 이 금강차는 당당하게 지역적 특산물로 그 이름을 취한 것이다. 또한 허훈은 이 금강곡에 오기전에 이미 금강차를 접하였다는 사실은 이 시에 붙은 꼬리글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러나 현지에서 이 금강차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놀라운 말을 한다. <비로서 기품이 동방에서 제일이란 것을 알았네>. 이 기록은 허훈이 과연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차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가졌는가 하는 의문을 품어야 한다.

그가 농사를 귀하게 여기는 기호남인의 한사람으로서 <방촌선생문집>에 보이는 적지 않은 다시들은 차에 관한 전문적인 지식을 갖추고 있었을 것이란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나는 금강차를 배척하는 말을 하였다.’ 라는 말은 차에 관한 품평의 안목을 나름대로 갖추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수 있다.

허훈의 금강차에 대한 재발견의 감흥은 ‘금강곡에서 놀며(遊金剛谷)’ 라는 장편의 시로 발전한다.

 

     금관성 동북쪽에

     한 골짜기 그윽하게 길게 누웠네

     金官城東北 有谷窈而長

 

     맑은 시내 그 가운데 흐르는데

     흰돌 깔린 길이 그 옆에 있네

     淸流瀉其間 白石鋪其傍

 

     물 근원 따라 가고 또 가니

     시냇길엔 이끼꽃이 파랗게 피었네

     行行水窮源 磵路苔花蒼

 

     그 가운데 한 동천이 열리니

     곱고도 고운 것이 마치 담을 둘렀는듯

     中開一小洞 姸麗圍如牆

 

     나는 이곳 어른께 들었네

     이 골짜기를 금강이라 하는 것은

     吾聞古老言 此谷稱金剛

 

    사람드이 모여서 결사를 하며

    술잔을 서로 들었던 곳

    邦人曾結社 令辰共거(酉+據-手)觴

 

    누대가 있었는데 그 이름이 불훼루

    마치 천년의 서리를 맞고 서있었는 듯

    有樓扁不毁 若將窮千霜

 

    산다수가 그늘을 마당 가득 드리우면

    여름철 녹음에 서늘도 하였다지

    山茶蔭一庭 夏月綠陰凉

 

    고려 임금님은 일찍이 비를 피하고

    장군이란 사호를 이나무에게 내렸다네

    (고려 충렬왕이 합포에 왔을 때 금강사의 산다수 아래에서 비를 피하여 사호를 장군수라고 하였다.

    麗王嘗避雨 將軍賜號煌 (高麗忠烈王幸合浦時 避雨于金剛社之山茶樹下 因賜號曰將軍樹)

 

    나는 왔어도 볼 수 없어라

    단지 잡초만 황량하네

    我來不可見 但見雜卉荒

 

    머리 돌려 동해의

    일만이천 봉우리를 볼꺼나

    回首東海上 一萬二千岡

 

    그곳 금강산은

    참으로 빼어나서 동방의 으뜸이지

    此乃金剛山 奇絶冠東方

 

    이 골짜기 이름은 비슷해

    신선의 참된 고향이라 할 수는 없지만

    玆谷名雖似 未作仙眞鄕

 

    바위 가운데 아름다운 것은

    어찌 감히 석상으로 할 것이며

    凡石之佳者 不敢爲石床

 

    샘이 소리내어 흐르는 곳에

    어찌 대나무 낚시대를 드밀 수 있을까?

    凡泉之鳴者 不能若竿篁

 

    조금은 부족해도 언덕을 이루었으니

    연하장 세계를 모두 갖추었네

    劣作流峙勢 僅具煙霞藏

 

    촌 아낙네들은 엷은 분화장을 하지

    궁중의 화려한 화장을 따르지 않는다네

    村娥縱傅粉 거(言+巨)肖宮樣粧

 

    그러니 이 군의 경내에

    아름다운 자연이 드물어서

    然斯郡境內 素稀泉石良

 

    오직 이곳 계곡이 있을 뿐이서

    때때로 거닐어 노닐만 하지

    惟有此溪巒 可以時徜徉

 

    이곳 사람들에게 말 전하노니

    이 궁벽한 곳에 띄집 하나를 지으시길

    寄語玆土人 闢(榛-木+衣)置茅堂

 

    서쪽에는 단풍나무와 전나무를 심고

    남쪽 언덕에는 왕대를 심으시길

    西菴植楓檜 南岸種 운(竹 +員)당(竹+當)

   

    다음에 내가 다시 와서

    이곳 샘을 길어다가 차를 달여 마시려내

    他年我復來 酌泉煮旗槍

    <금강곡에서 놀며 遊金剛谷> 전문

 

이 <금강곡에서 놀며>는 우리에게 주요한 몇가지 사실을 일러준다. 장군 산다화를 장군수라고 이름한 서거정의 기록을 전승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변화는 허훈은 정확하게 동백나무인 장군수와 차나무를 구분하여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앞서 금강영차와 함께 해석해보면, 또한 금강곡에서 나는

차를 금강차라고 일반적으로 쓰여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1481년 <신증동국여지승람> 장군 하륜 산다화

1481년 <신증여지승람> 장군수 서거정 선다화

1899년 <방촌선생문집> 장군수 허훈 산다화

1899년판 <김해읍지> 장군(다호) 차

1927년판 <김해읍지> 장군차 차

 

1899년 당시 빼어난 금강곡의 자연환경과 함께 그 환경을 지켜나가는 방안을 마련해준다.

‘이곳 사람들에게 말 전하노니/ 이 궁벽한 곳에 띄집 하나를 지으시길/ 서쪽에는 단풍나무와 전나무를 심고/ 남쪽언덕에는 왕대를 심으시길’ 또한 ‘촌 아낙네들은 엷은 분화장을 하지/ 궁중의 화려한 화장을 따르지 않는다네’

 

1481년 서거정이 김해 금강사를 방문하였을 때 장군수가 늙어서 쇠약한 모습을 탄식하였다.

언제 그 장군수가 사라졌는지는 잘 알 수 없어나, 1830년대 이종학이 그에 대한 아무 언급이 없었고 허훈이 방문하였을 때는 이미 장군수는 전설이 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전설 속에서 장군차가 탄생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눈 여겨 보아야 한다.

허훈의 <금강영차>에 화답한 이종기의 <금강영차> 시에서 장군차라고 최초의 기록이 보이기 때문이다.

 

     金剛谷裏産靈茶                    금강곡 안에서는 신령스런 차가 나는데

     煎出槍旗味烈佳                    그 창과 기를 다려내니 맛이 아름답구나

     誤把將軍留俗號                    잘못하여 장군이란 속된 이름 주었는가

     不如含馥老巖하(谷+牙)         향기를 머금은 노암의 깊이란 이름보다 같지 못하지

     茶一名將軍茶以其有力故也     (차는 일명 장군차라고 한다. 차나무에 힘이 있기 때문이다)

     금강영차(金剛靈茶) <晩求先生文集 만구선생문집>에서

 

이종기(李種杞 1837년(헌종 3) - 1902년(고종 39))는 자는 기여(器汝), 호는 만구(晩求), 다원거사(茶園居士) 이다. 본관은 전의(全義)인데 태어난 곳은 경상북도 성주군 다산면 상곡리이다. 조선 후기 영남학파의 맥을 잇는 성리학자로 퇴계 이후 이기설(理氣說)의 이론을 심화시켰다고 평가되는 인물이다. 허훈과는 막역한 친분을 가지고 있었으며, 위의 시 <금강영차> 또한 허훈의 <금관16영>의 시에 화답하며 지은 시이다. 이 시에서 비로소 지금까지 발견된 첫 번째 장군차라는 이름이 나온다.

이종기가 태어난 곳이 다산면이고 본인의 호 또한 다원거사인 것을 보면, 이종기 또한 본인이 의식하던 의식하지 않는 가운데에서도 녹록치 않은 차에 대한 관점을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그이기에 장군차란 이름이 속되다고 한 것으로 보인다. 즉 금강영차에 장군이란 이름보다 향기를 머금은 늙은 바위의 깊이를 가진 차란 함복노암하(含馥老巖하(谷+牙):‘란 긴 이름을 새롭게 붙였을 것이다. 어쩌면 그냥 ‘노암하’라고 였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장군차는 금강사의 장군수와는 무관하게 차나무에 힘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실로 놀라운 말이 아닐 수 없다. 차의 기운을 논하는 이종기이고 보면 그가 지은 ‘노암하’라는 이름은 차기운이 좋기로 이름난 중국 복건성의 무이암차와 견주어도 뒤질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허훈은 금강차를 동방에서 으뜸이다(冠東方)이란 말을 아무 스스름 없이 쓸 수 있었을 것이다.





9. 소쩍새 울음소리를 기다리면서

 

지금 내 책상 위에는 김해 금강곡 골짜기에서 따온 찻잎 하나가 놓여 있다.

길이 14cm 엽폭 4cm의 대엽종 찻잎이다. 그리고 3년전 경남 사천에서 보았던 정동황차 차밭의 찻잎을 옆에 두고 본다. 비슷한 크기의 찻잎이다.


정동황차 차밭에서 따온 찻잎은 김해찻잎보다 산화해서 검은 갈색을 띄고 있다. 잎 옆면에 있는 거치는 김해 찻잎보다 사천 찻잎이 좀 더 날이 서있다. 잎은 두께가 비교적 얇은 편이지만 비교적 탄력이 있다. 이종기가 말한 차에 힘이 있기 때문이라는 표현은 차를 우렸을 때도 그렇지만 우리기 전 차나무의 외형이 주는 느낌에서 나온 것이지도 모른다.

 

이 글을 쓰기 몇 해전 나는 김해 장군차는 동백나무 잎으로 만든 것에 차라는 이름을 붙힌 것으로 생각했다. <김해읍지>에 나오는 장군차가 바로 동백나무라는 당시의 제한된 실기록을 바탕으로 마침내 다산이 동백나무 잎으로 차를 만들어서 황차라고 했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황차에 대한 주요한 기록인 다산 정약용이 해남에서 황차를 찾아내었다는 <송남잡지>의 기록과, <김해읍지>의 황차에 대한 언급은 일반적으로 동일한 맥락에서 파악하여 발효차라고 하고 있다.

하여 먼저 <김해읍지>에 나오는 ‘황차는 금강곡에서 나는데 장군차라고 한다.’는 비교적 최근의 기록을 중심으로 먼저 금강곡과 장군차에 대한 문헌을 살펴보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그런 과정에서 발견한 19세기초 낙하생 이학규의 기록은 가야차문화의 깊이를 더하는 것이었고, 19세기말 허훈과 이종기가 남긴 기록은 장군차라는 이름 외에 금강차와 노암하라는 새로운 이름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장군차는 금강사의 산다화 즉 동백나무 장군수와 연관을 무시할 수 없지만, 차나무에 힘이 있기 때문에 붙혀진 사실과 함께 그 당시 장군차란 이름이 폭 넓게 사용된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즉 19세기 말의 장군차는 동백나무가 아니라 금강곡에서 자라는 차나무로 만든 차라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이런 기록들을 정리하면서 나는 쾌재를 불렀다. 금강곡을 찾아서 금강차를 확인하면 그동안 한동안 화두로 떠올랐던 장군차의 논쟁에 나름대로 해답을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 이었다.

 

그러나 같은 김해에서도 사람마다 금강곡에 대한 주장이 서로 엇갈렸다. 주로 김해의 주산이라고 할 분산(盆山)을 중심으로 분산의 만장대, 동림사 그리고 멀리 떨어진 은하사까지 서로 금강곡이라고 주장하면서 장군차의 고향이라고 하고 있었다. 그렇게 된 것에는 서거정의 분성(盆城)밖에 있다는 기록이 이 혼란을 가져온 가장 큰 것으로 보인다. 김해에서 분성은 바로 김해를 뜻하는 옛지명이기도 하지만, 분산에 있는 성 또한 분산산성, 분성산성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이름이 준 혼란을 1990년대 까지 아직 해결하지 못했는데 지난 1월 인터넷(2008년 1월 22일 김해 뉴시스)을 통해서 장군차에 대한 언급을 접하고서 정말 금강곡을 찾았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경남 김해시의 대표적 특산물인 장군차 자생군락지가 도 지정 기념물로 지정된다.

       김해시는 22일 수로왕비가 인도에서 가져온 장군차의 자생지가 자연적으로 조성된 대단위 군락지를 최근 발견, 도 지정 문화재 등록을 위한 절차를 진행중에 있다고 밝혔다.

       이번에 도 지정 기념물로 지정하는 장군차 자생군락지는 시내 대성동 산2번지와 동상동 산6번지 일원 임야와 전.답 1만3980㎡에 900여주가 개인소유의 토지에서 자생하면서 군락지를 조성하고 있다. 이를 위해 시는 21일부터 25일까지 현장정밀조사에 나서는 것을 비롯해 3월께 장군차에 대한 도지정 기념물 지정을 신청과 도 문화재위원의 현장조사를 마친 후 4월께 위원회의 심의를 받을 계획이다.

       특히 시는 장군차의 역사를 재조명하기 위해 내달께 조선불교통신사나 동국여지승람 등 관련 문헌자료조사에 이어 관련 전문위원들에게 자문을 받을 예정이다. 장군차가 도 지정 문화재로 등록되면 역사적 의미 부여는 물론 우리나라 최초의 차나무 서식지로 널리 홍보되면서 판매 또한 급성장을 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이에 앞서 시는 장군차를 전국 명차로 육성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 지난 1999년부터 올해까지 10억5000만원의 사업비를 들여 250만 그루의 장군차 묘목을 지역농가에 무상 공급하는 등 명품차로 육성시켜 나가고 있다. 시 관계자는 "현재로선 장군차에 대한 문헌 등이 없어 고증을 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다"며 "장군차의 고증이 밝혀지면 현장정밀조사 등을 근거로 도 지정 문화재로 등록할 계획이다"고 말했다. - 강정배기자 kjb@newsis.com

 

장군차의 고증이 밝혀지면 현장정밀조사 등을 근거로 도 지정문화재로 등록할 계획이란 기사를 보고서 나름대로 안심이 되었다. 그리고 다시 <차문화유적답사기>에 나오는 가야문화연구회의 김종간 선생을 만나고 싶었다. 인터넷 한 사이트에서 만난 그의 글에서는 김해사랑이 듬뿍 배여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차가 가락국 때 최초로 들어왔다고 함부로 주장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렇다고 신라 흥덕왕 때 들어왔고 역사화해서도 안된다. 역사를 바로 정립하는 민족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 길은 누구하나 돌보지 않아도 억센 생명력으로 김해고유의 특산품임을 전하는 이 고장의 차나무를 바르게 관리하고 생산하는 지혜가 필요한 때다. 차나무를 심고 찻잔의 명성을 살리는 노력은 역사문화의 도시 "김해"로 가는 참으로 아름다운 길일 것이다.

 

그에게 내 찾은 자료를 보여주고, 역사문화의 도시 김해로 가는 참으로 아름다운 길을 보고 싶었다.

김해 찻사발을 연구하고 살리는 지암요 안홍관선생에게 연락이 닿았다. 새벽 일찍 서둘러서 김환기 사장과 함께 김해의 장군차를 찾아 떠났다. 착찹했다.

혹 엉뚱한 곳에 팻말을 꼽게 되는 것은 아닐까? 왜 분성 밖에 있다는 것을 분산 아래에서 찾을까?

아직도 불훼교는 남아있을까?

지암요에 닿았다. 차를 마신다. 아니나 다를까 황차라고 하면서 붉은 차부터 나온다.

‘이것은 황차가 아닌데....’하고 말문을 흐렸다. 차보다 차를 담고 있는 찻잔에 눈이 간다.

찻잔이 무엇인가 이야기 하는 듯하다.

서로 소개를 하면서, 내이름을 듣더니 ‘아하 이 황차 만드신다는 박선생님’한다.

나는 가벼운 입을 놀린다. ‘황차가 아니라 발효차’이지요.

지암요의 안주인 석혜영씨가 한 말 거든다.‘그렇지요. 이 차는 황차가 아니라 발효차지요’

그리고 능숙한 솜씨로 한 차학과 교수가 기술지도를 와서 만들었다는 김해황차(?)를 꺼내놓는다.

잭살이라고도 불리는 발효차이다. 그동안 마셔보았던 기존의 차보다 남다른 풍미가 있다.

목마른 사람이 샘을 판다고 나는 ‘김종간 선생부터 만나고 봅시다.’ 그러자

안홍관 선생은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뜸을 들이더니 ‘시장실에 연락을 해 놓았습니다.’

나는 말했다. ‘향토사학을 하시는 김종간씨 인데요.’

안홍관선생이 말했다. ‘시장실에 김종간선생이 있습니다.’,

문득 옛날 생각이 났다. 1978년 해남의 김봉호선생님을 찾아갔을 때이다. 버스에서 내려서 무조건 김봉호 선생님댁으로 택시기사에게 가자고 했다,

택시기사가 말했다.‘쌀봉호요? 보리봉호요?’ 같은 김봉호 선생이 있는데 한분은 당시 국회의원 김봉호선생이었고, 한 분은 극작가이자 초의선사를 세상에 드러내는데 일생을 바친 차인 김봉호 선생이었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그분도 돈 안되는 향토사학에 미쳐있지만 이곳에서는 시장이상의 존경을 받는 모양이구나.’는 생각이 미치자 ‘그럼 차나무부터 봅시다.’

 

점심으로 오리탕을 먹었다. 짧은 해가 염려되었다. 이러다가 정말 장군차를 찾아왔다가 제대로 된 차나무도 보지 못하고 가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안홍관선생이 안내한 곳에 벌써 사람들이 가야문화연구회 총무 한분과 시청에서 몇 분 나와 있었다. 어딘가 모르게 어색한 분위기는 이 날 답사가 끝날 때까지 이어졌다. 반신반의 하면서 2006년 12월에 세워진‘‘장군차 자생군락지 보호구역’ 푯말 앞에서 씁쓸함을 느꼈다. 찾아가는 길이 내가 생각했던 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허훈 선생이 남긴 그 아름다운 길을 꿈꾸던 나는 내앞에 서있는 것은 분산산성을 바짝 앞으로 머리를 드밀고 있는 아파트 군락과 주유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울을 따라 올라가면서 민가 담으로 변신한 차나무를 보면서 생각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한다. 내가 생각했던 동백나무가 지천으로 있는 금강곡이 아니었다. 고개를 슬쩍 돌리자 동향을 한 산비탈에 잡목 속에 무성한 차나무가 보였다.

어림작아도 키는 2.5M정도 아래 둥치는 지름이 4-5cm의 가지가 분생하고 있다. 분산성을 올려다 보자 온통 헐벗은 바위산이다. 그런데 보통 바위산이 아니라 어딘가 화재의 흔적이 느껴진다.

 

가야문화연구회 총무에게 물었다. ‘산불이 있었습니까?’ ‘한 5-6년전 산불이 났었지요,(확인한 결과 2004년 2월 17일) 여기까지 번지는 것을 막느라고 시껍했지요(어려웠다는 경상도 방언)’라고 했다.

‘여기까지’ 라고 손을 가르키는 곳을 보자 소나무 몇그루가 서있다. 그 화재에 소나무가 무사한 것은 이곳의 차나무를 지키고자 애쓴 김해인들과 가야문화연구회의 남모르는 노력이 숨어있었다.

계곡을 따라 오를수록 예사롭지 않다. 흰바위가 편평하게 너럭바위를 이룬다. 그래 이곳일지 모른다. 그런데 사정없이 돌들이 굴러온 모양을 보게되자 나는 고개를 가로로 져었다. 마치 축대가 무너진 형국을 하고 있다. 내 눈치를 쳈는지 가야문화연구회 총무는 혀를 차면서 ‘작년 여름 홍수 때 이 지경이 되었지요’라고 한다. 기가 찬다. 산불에 홍수에 금강곡이 무너지고 있었다. 산불이 없었다면 1,000년 넘게 지켜져온 금강곡이 이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먼저 차나무부터 봅시다’ 차나무 앞에 성급해지는 것은 나나 가야차문화연구회 총무나 매 일반이었다. 물을 가두는 보를 지나자 갑자기 산비탈이 30도이상으로 가파라 진다. 눈에 띄게 차나무가 많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곳은 차나무 박물관이었다. 500그루 남짓 되는 차나무군락이지만 가야차문화연구회 총무가 가려놓은 나무 개체수가 10종이 넘는다. 좀더 자세한 분류를 하면 더 많은 개체의 다양성을 보여줄 것으로 믿어진다. 찻잎의 14cm가 넘는 차나무가 있는가 하면 5-6cm의 찻잎을 가진 차나무가 있는데 문제는 모두 줄기가 4-5cm가 넘는다는 점이다. 정방형의 바위 아래 차나무를 발견하고 나는 문득 웃음이 나왔다. 이종기의 ‘노암하’라고 한 시가 떠 올랐기 때문이다.

 

중국 복건성 무이산을 가서 무이암차의 대표주자인 대홍포 모수앞에서 운남의 기로의 차왕수 앞에서 차를 올리며 고맙다고 빌었던 내가, 이곳까지 오면서 차한잔 올릴 준비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내 스스로도 놀랬다. 차나무들이 갑자기 내 어머니로 보였다. 갑자기 코 끝이 찡해진다. 내려오면서 볕바른 양지에서 내가 찾아온 자료를 펼쳐들고 가야문화연구회 총무에게 한판 토론이 벌어졌다. 현장을 지키는 사람의 매운 맛이 번떡인다. 여기를 서잿고이라고 하는데, 글을 읽는 서당이나 서재가 있어서가 아니라 분산으로 올라가다 보면 고개가 하나인데 그 고개를 중심으로 동으로 흐르는 개울은 동잿골, 서쪽으로 흐르는 개울 동잿골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서거정의 분성 기록에 대한 의문을 던지자 대뜸, ‘김해가 분성이요. 왜 분성이라고 하는가 하면 김해전체를 화분을 만드는 벽돌로 깔았기 때문이지’


그 말에 나는 단숨에 무너졌다. <김해읍지> 한 구석에 보이는 분성에 관한 기록이 바로 분성을 잘못찾아 헤메던 나를 바른 길로 일깨워 준 것이다. 그리고 송악당을 찾아보기로 했다. 이럴수가 산을 오르기전에 보았던 주유소 뒤편이 송악산 또는 송학산 백운산이라고 하였다.

그 아래에 송악당이 있었다는 것이다. 무엇인가 척척 맞아 들어가기 시작한다. 1929년 <김해읍지>의 김해부성 북쪽 3리에 있다는 기록이 그대로 맞아떨어지는 것이다.

‘그럼 금강사는요?’ 손으로 시내를 가르킨다. 가려진 고층 건물 사이로 기와지붕이 보인다.

‘저기가 북문인데, 얼마전에 복원을 했지요. 그 옆으로 기와집이 보이는데 향교요.

아마도 그 위쪽이 아닐까 하는데......’ 그 말을 들어면서 그쪽을 바라보면서 확인을 하다가 문덕 언덕 하나를 발견한다.

‘저기는 뭐하는 곳입니까. 느낌이 별다릅니다.’ 하고 물었다.

 ‘백운대요. 가야때 소도터요’ 그곳으로 갔다. 김해시와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온다. 그동안 내 가슴을 헤어메던 의문이 단숨에 풀리는 순간이었다. 김종간선생에게서 연락이 왔단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통성명도 하지 않았다.

가야문화연구회 총무가 말했다. ‘얼른 가보쇼. 나보다 그 분이 더 많이 아니. 그래도 안풀리는 것이 있으면 지암요에게 연락을 하고’ 여전히 퉁명스럽다. ‘존함이 어떻게 되시는지요’ ‘나는 이름이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아요. 가야문화연구회 총무라구만 하시오’ 어디가 불만스러운 구석이 보였지만, 그 뚝뚝하고 당찬 모습 속에서 가야문화연구회가 그 동안 장군차를 지키기 위해 애썼던 노력을 읽어낼 수 있었다.

 

김종간선생을 만나러 가는데 정말 김해시청으로 들어선다. 시장실에 들어서서 명함을 교환하다가 나는 크게 한방 맞고 말았다. 김종간 선생이 바로 김해시장이었다. 경상도 말로 ‘가가 가가’ 헛 웃음이 나온다. 곧이어 준비해간 자료를 설명했다. 시장실에 걸려있는 또다른 김해읍 고지도에서 분산 아래 송학산을 찾아내고, 서울에서 규장각과 국립중앙도서관 그리고 장서각을 뒤지던 내 모습이 떠 오른다. 백문이 불여일견. 내가 지금 선택한 길은 문헌을 바탕을 삼아 발로 확인해야 하는 작업이다. 다른 사실을 수용하면서 자신감있게 가야차를 전망하는 김종간 선생 아니 시장에게서 나는 다시 찻잎피는 봄 날 장군차를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저녁 시간 안홍관선생이 마련한 간담회에서 가야문화연구회 총무와 오해를 풀었다.‘워낙 가야차를 가지고 떠드는 사람이 많아서....’그 말 속에서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시달렸는지 미루어 짐작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한말을 덧붙인다. ‘그래도 공인이데 체계를 밟아야지, 시장부터 만나자고 하면 제가 어떻게 하요?’ 볼 멘 소리를 한다. 먼저 무례하였던 점을 이렇게 지면을 빌어서 용서를 구한다.

 

서울로 돌아와 차를 따른다. 금강곡의 소쩍새 울음속에서 ‘빨리 차잎 따소(速摘茶)’란 말을 발견한 낙하생 이학규처럼 나는 차를 따르면서 한 말을 만든다. 다로록(茶路綠). 차의 길은 푸르다.

소쩍새가 우는 봄밤이 기다려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