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6. 24. 09:58ㆍ차 이야기
청동 세발솥
청동 세발솥은 경상남도 김해 양동리 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이다. 청동 세발솥은 원래 음식을 끓이거나 데우는데 쓰는 예기(禮器)이다. 중국에서는 관청이 운영하는 공방에서 제작되는 고급 용기로 상주(商周)시대부터 사용되었으며, 소유자의 신분과 권위를 상징하는 물건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낙랑(樂浪)의 중심지인 평양과 진⋅변한 지역에 해당되는 울산 하대, 김해 양동 유적 등에서 출토되고 있으며, 시기상 대체로 중국 전한(前漢) 시대 세발솥으로 생각된다.
김해 양동리 고분군은 1969년 집중호우 때 일어난 산사태로 당시 중학생들에 의해 청동기 및 철기 시대의 유물이 우연히 발견되었다. 조사 결과 620여 기의 무덤에서 6,000점에 가까운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1990년부터 실시한 발굴조사로 움덧널무덤⋅덧널무덤⋅구덩식돌방무덤⋅독무덤 등이 확인되었다. 이 때 확인된 유물은 동제칼자루끝장식 1점, 동제유운문연방격규구사신경(銅製流雲文緣方格規矩四神鏡) 1점, 철제손칼 1점, 철모 2점, 토기 3점 등이다.
무엇보다도 주목을 받은 유물은 중국의 청동거울과 글씨가 새겨진 청동 세발솥이었다. 청동거울은 지름 20㎝의 정량(精良)한 것으로서 왕망(王莽, 재위 8~24)의 신(新)나라를 중심으로 전한 말에서 후한까지 성행한 형식의 중국 거울이다. 내구(內區)와 외구(外區) 사이에 있는 명대(銘帶)에 ‘상방가경진대구…(尙方佳竟眞大口…)’ 등의 28자가 쓰여 있다.
청동 세발솥은 솥 밑 부분에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그 내용은 ‘서구궁(西口宮)에서 쓸 한 말짜리 솥이며 뚜껑을 포함해 무게는 10kg 정도’로 해석이 가능하다. 서구궁은 섬서성(陝西省)의 지명으로 확인되며, 따라서 이 세발솥은 중국 섬서성에서 제작되고 낙랑군을 거쳐 수입되었거나, 낙랑군에서 만들어져 남부지방에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이러한 형태의 세발솥은 황하 중하류에서 주로 발굴되고 있어 2~3세기 가야와 이 지역과의 교류를 보여주고 있다. 아울러 수입된 이후에는 가야 지역 유력자의 위세를 과시하기 위한 물품으로 세대를 넘어 전래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당시 가야 지역에 강력한 지도자가 출현하여 중국의 선진 문물을 수입하였음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한반도 남부지방의 삼한 사회가 고대 국가로 발전해 나아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동기[銅器]
구리에 주석을 섞어 만든 여러 청동기물(靑銅器物).
시대적으로는 청동기시대에 선행한다. 자연동(自然銅)을 용해한 것으로 물건을 만들어서 사용한 시대를 동기시대라 하기도 하나, 실제로는 그것이 동이냐 청동이냐를 가리기 곤란하고, 동기시대의 개념 적용 범위가 애매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청동기시대의 초기, 또는 신석기시대의 말기로 편입하여 분류한다. 동기는 고대부터 중국에서 발달하여 우수한 기물을 많이 생산하였기 때문에 한국 ·일본 등지에서 동기라 하면 대개 중국의 청동기를 가리킨다. 이러한 금속문화가 한국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한(漢)나라가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하기 이전부터이며, 세형동검(細形銅劍)과 같은 동기는 그 분포가 전국에 걸쳐 있었음이 밝혀졌다.
동기의 대부분은 종묘(宗廟)의 제기(祭器)로서, 예기(禮器) ·이기(彛器) ·준이(尊彛)라 부른다. 그 중에는 무덤에 껴묻거리한 것이나 실용적으로 사용했던 것도 있으며, 악기(樂器) ·과(戈:창) ·검(劍) ·거마(車馬) 장식 등도 있다. 동기는 대개 술을 채워두는 준(尊:술통) ·이(彛:제사에 쓰이는 기물) ·호(壺:단지) ·유(卣:술통), 기타 작(爵:술잔) ·고(觚:술잔)와 그 밖에 물을 끓이는 격(鬲:오지병) ·정(鼎:세발솥) ·언(甗:질고리), 그리고 음식물을 담아두는 대(敦:옥쟁반) ·보(簠:보궤보) ·궤(簋) ·두(豆:나무제기) 등과 물을 넣는 반(盤:소반), 감(鑑:거울) 등으로 분류된다.
호 ·격 ·정 ·언 ·두 등은 토기에서, 작 등은 뿔[角]에서 그 조형(祖型)을 구할 수 있고, 감은 물거울과 관계가 있다. 전국시대에는 작을 대신하여 귀달린 술잔[耳杯]을 사용하였다. 또 동주(東周:BC 770∼BC 249) 말기부터는 수레나 말의 장식이 눈에 띄게 발전하였다. 한나라 때의 종묘제기에는 고형(古形)이 사라지고 무늬가 없는[素文] 정이나 호의 일종인 종(鐘)을 많이 사용하였으며, 실용품에는 박산로(博山爐)나 경렴(鏡奩:거울과 향합 또는 경대) 등이 유행하였다.
동기의 제법(製法)으로는 예전부터 준이의 종류에 납형(蠟型)을, 과 ·검 등에는 용범(鎔范:쇠를 녹이는 틀)을 사용하였다. 무늬 및 형태는 은(殷)나라 전반에는 허난[河南]의 이리강(二里岡)에서 출토된 작과 같이 얄팍하고 조잡한 것이었으며, 후반에는 소둔(小屯)의 은허(殷墟) 출토품과 같이 바탕이 두꺼우면서, 도철문(饕餮文:2개의 눈을 주체로 하는 중국 고유의 무늬)이나 기타 장중한 무늬로 장식한 것이 출현하여 서주(西周)로 이어졌다.
동주 말기에서 전국시대에 걸쳐 조금 경쾌한 감각의 동기가 출현하여 무늬도 반리문(蟠螭文:서린 이무기 모양을 아로새긴 무늬)이 보급되었고, 새나 짐승처럼 장식도 매우 사실적으로 발전하였다. 이로써 스키토 시베리아 미술의 영향을 알 수 있다. 문자도 예서(隸書)로 바뀌어 읽기 쉽게 된 한나라 때에는 동기도 일반적으로 간소하게 되었으며, 무늬도 수환(獸環) ·화문(華文) 외에는 거의 볼 수 없다. 주동(鑄銅)의 유적으로는 소둔이 유명한데, 장군회(將軍:장군들이 쓰는 바리)라 칭하는 토기의 감과(坩堝:도가니)가 출토되었으며, 또 공작석(孔雀石) 덩어리도 발견되었다.
제조공정은 우선 공작석을 감과에서 녹여 순수한 동을 만들어, 여기에 주석을 첨가해서 청동 상태로 거푸집에 흘려넣어 만들었다. 후한 말에서 진(晉)나라 때의 제실(帝室) 관계의 동기는, 병기는 좌상방(左尙方:왕의 일상품을 보관한 곳), 경(鏡) 등은 우상방(右尙方), 박산로 등은 중상방(中尙方)에서 제작하였다.
- 1. 한국 초기금속기문화
동검은 중국의 도씨검(桃氏劍)이나 북방계 단검과 달라 검신(劍身)에 홈통을 통하게 하여 단면의 형태를 복잡하게 하였으며, 칼의 몸줄기는 단소(短小)하여 별도로 만든 칼잡이에 넣은 세형(細形)동검이었다. 즉 전기 부여식은 한국화한 것으로, 검신 하반부의 너비가 줄어서 가늘고 긴 형태가 되며 중간의 돌기부가 중앙부보다 아래인 전체의 1/3 정도쯤 되는 위치로 내려가고 검의 첨단, 즉 검봉(劍鋒)이 길어진 것이 특색이다.
동모는 처음에는 단소(短小)하면서 견고한 실용품적인 것이었으나, 그 후 모신(鉾身)에 무늬가 나타나고 공구(銎口:구멍)에 고리 하나가 달리게 되었으며 점점 장대화(長大化)하여 의기적(儀器的)인 것으로 바뀌었다.
동과는 중국에서 들어왔을 것이지만, 과신이 검신과 같고 그 하단이 경사진 각으로 되어, 이것을 자루에 ㄱ자형으로 장착하면 그 각도가 90 °보다 작아진다. 동과에는 고식(古式)과 신식(新式)의 2종류가 있는데, 전자는 가운데 능각(稜角)이 상하로 계속되고, 후자는 능각이 과봉부(戈鋒部)에만 있으며 때로는 과신 척릉부(脊稜部) 좌우에 무늬가 들어 있다.
이 밖에 출토된 동기로는 마구(馬具) ·수레나 가마 등의 용구가 있는데, 검 ·모 ·과 등의 병기류와 함께 지배층 ·귀족층 등이 사용하였다. 동검류의 주형(鑄型)은 평남 ·함남 ·경기 ·전남 ·강원 등 각지에서 발견되며, 동제 다뉴세문경(多鈕細文鏡)을 비롯, 동부(銅斧) ·동착(銅鑿:동제의 끌) ·동추(銅錐:동제의 송곳) 등 일상 공구류의 주형도 출토되고 있다.
- 참조항목
- 세형동검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청동기시대 후기, 철기시대 전기의 동검.
- 이기 나라의 제례 때 쓰는 술그릇.
- 은허 중국 허난성[河南省] 안양현[安陽縣] 샤오툰촌[小屯村]에 있는 고대 상(商) 나라 수도 유적으로 2006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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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경주박물관,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의 수집품' 특별전
‘도자기’, ‘서화’, ‘중국 청동용기’ 등 모두 5부로 구성
김태우기자⁄ 2016.04.25 09:43:16
국립경주박물관(학예연구실장 김유식)은 오는 4월 26일부터 6월 19일까지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의 수집품’ 특별전을 연다.
국립경주박물관에 일제강점기(1910~1945) 일본인들이 수집한 한국・중국・일본 관련 문화재 1,302건 2,653점(금속519점, 도토제1,236점, 서화695점, 기타203점)이 소장품이 있다.
이 문화재의 일부는 광복 직후 박물관으로 입수되었고 또 그 나머지는 1963년 광복 당시 숨겨두었던 비밀 창고가 발견되어 박물관으로 이관돼 등록 관리하고 있다.
이번 특별전은 ‘도자기’, ‘회화’, ‘중국 청동용기’, ‘보존과학’ 과 ‘일제강점기 복제된 우리문화재’등 모두 5부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고려청자, 근대회화, 중국의 고대 예기 등 200여 점과 광복 이후 입수현황을 알 수 있는 관련 문서 등을 처음으로 일반에 공개한다. 또 일제강점기 당시에 수리 및 복원된 문화재를 전시하여 20세기 초의 박물관 기능과 보존처리 기법도 함께 소개한다.

▲청자양유문편병, 고려, 높이 29.9cm, 국립경주박물관
그 예로 조선총독부 초대통감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고려청자 수집광이었고 이왕가 박물관을 설립한 고미야 미호마쯔(小宮三保松) 역시 집안 가득 문화재를 수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광복 후 오구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 등 일본인 3명으로부터 접수해 국립경주박물관에 입수된 도자는 모두 574점입니다. 이 중 한국의 고려청자⋅조선백자⋅분청사기⋅청화백자와 중국 서진시대 청자⋅북송시대 월주요 청자⋅자주요 백자 및 일본의 20세기 초 유행한 이마리도자⋅라쿠양식 도자 등 103점을 전시한다.

▲계산독서도, 한국근대, 작자미상, 지본담채, 104.5×104.5cm, 국립경주박물관
제2부 서화는 조선시대 건국초기부터 도화원圖畵院이 설치되어 사대부와 화원들이 당시 회화의 발전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화원화가의 전통은 조선후기 한국적인 정서를 가장 잘 보여주는 정선의 진경산수, 김홍도와 신윤복의 풍속화 등이 탄생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은 식민정책을 강화하기 위하여 조선미술을 독창성 없는 중국의 아류로 보려는 풍조가 지배적이었다. 이에 따라 중국화풍을 따른 이인문과 심사정의 정형산수화를 더 애호하였고, 일본의 우키요에와 유사한 화조도나 풍속화 수집에 치중했다.
또 일본서화의 경우에 에도시대 이후 인물도와 화조도를 포함하여 서양화법이 가미된 풍경화 수집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이밖에도 제국주의 정책을 옹호하기 위해 그려진 불화를 다수 수집하였다.
이번 전시에서는 당시 일본인의 미술품 애호 성향이 반영된 서화 15점이 공개되어 많은 관심을 불러 일으킬 것이다.

▲청동 정, 중국 춘추시대 중기, 높이 13.6cm, 국립경주박물관
제3부는 중국 청동용기인데 이것은 제작된 시기에 따라 청동예기靑銅禮器와 방고청동기仿古靑銅器로 나눌 수 있다.
청동예기는 중국 상주시대商周時代(기원전16세기~기원전771)부터 한대漢代(기원전206~기원후220)까지 제작되었다. 고대 중국의 황실과 귀족들이 제사, 연회, 전쟁 등 의식을 거행할 때 사용한 용기로 사용자의 지위와 신분, 권력에 따라 엄격한 제한이 있었다.
용도에 따라 음식 담는 그릇(食器), 술 담는 그릇(酒器), 물 담는 그릇(水器)으로 나눌 수 있고 방고청동기는 북송北宋(960~1127)부터 청대淸代(1644~1911)까지 제작된 고대 청동예기의 모방품이다. 당시 일본인들은 우리나라 문화재 이외에 중국문화재도 다수 수집하였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들이 수집한 중국 청동용기 53점을 소개한다.
제4부 보존과학 전시는 문화재보존을 이해하고 문화재를 과학의 눈으로 다시 살펴보는 기회를 제공하고자 마련하였다.
2016년은 박물관 6대 기능에 속하는 보존保存이 국립박물관에서 그 역할을 시작한지 40년이 되는 해다. 이번 특별전 전시품들이 수집되었던 일제강점기당시의 보존기술에 주목하여 현대의 보존기술과 비교해보고자 한다.
문화재의 보존에 얽힌 이야기와 과학의 시선視線으로 관찰하면서 문화재와 보존과학을 새롭게 느껴보기 바란다.

▲경주 입실리 출토 청동검 등 5점(본관8055~본관8058), 국립중앙박물관
제5부는 일제강점기에 복제된 우리문화재로 국립경주박물관이 소장한 전傳 경주 입실리 출토 청동기 5점은 1970년대 경주박물관에 근무한 이건무 전前 국립중앙박물관장에 의해 박물관 소장품의 복제품이라는 사실이 판명되었고, 2007년 학술발표에서 일반에 소개되었다.
이 입실리 출토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은 1920년 동해안 철도공사 중 발견되었다가 산일散逸된 것으로 조선총독부박물관이 1921년 일본인 모로가 히데오(諸鹿央雄)에게 구입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복제품의 정확한 출처와 복제 목적 등을 알 수 없었다.
박물관은 이번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일본책 ‘고고학관계자료모형도보考古學關係資料模型圖譜(1931년)’와 ‘고고학관계자료모형목록考古學關係資料模型目錄(1930년)’의 존재를 확인하였고, 이 책을 검토 결과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복제품들은 일제강점기 교토제국대학(京都帝國大學) 교수 하마다 고사쿠(濱田耕作)가 추진한 동서양 중요문화재 모형제작프로젝트의 결과물(총 230여점) 중 일부이며, 모형 제작은 교토에 위치한 우에노제작소(上野製作所)에서 진행하였음을 확인하였다.
또 전시에서는 ‘고고학관계자료모형도보’ 실물을 공개하며, 경주 입실리 출토 진품 청동기와 복제품을 비교 전시한다. 또한 이 책에 수록된 전傳 충남출토 동경(접수546) 복제품 1점도 함께 내어 그 동안 의문으로 남았던 이들 복제품들의 출처와 성격을 보여준다.
특히 특별전은 광복이후 국외 반출 위기에 직면했던 우리 문화재를 포함한 국외 문화재를 우선적으로 공개하는 자리로 일본인이 수집하였던 접수품에 대한 기초조사 결과를 적극적으로 알리고자 하는 차원에서 장소를 제공한 것이다.
이번 특별전을 계기로 지속적인 연구와 자료 보완 작업을 진행하여 연차적으로 접수품 자료집을 발간할 예정이다.
이 자료에 대해 더욱 자세한 내용은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실 연구사 오세은(☎054-740-7539)에게 문의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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