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차의 발견으로 갖가지 궁리를 하게 되었다. 그 차를 담는 그릇 또한 차문화 발전에 한 몫을 차지했다. 다구의 발견은 차나무의 발견 못지않게 기나긴 역사를 지녀왔다. 왕포(王褒, 기원전~61년)는 서한시대의 사대부로 이름을 떨쳤는데, 『동약(童約)』 부(賦)에 "차를 끓이고 우리고 다구를 정갈히 한다(烹茶盡具)"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것이 역사상 처음 차와 다구의 만남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 뒤 육우의 『다경』이나 서긍의 『고려도경』 1987년 법문사 지하궁에서 발견된 당나라 궁중 다구를통해 적나라하게 음다 방법이 제시되었다.
송나라 서긍이 지은 『고려도경』의 기록에 "신라의 충담사(忠談師)는 앵통(櫻筒)을 메고 다녔는데, 그 속에서 찻잔을 꺼내 이용하였다", "보천(寶川)과 효명(孝明)은 우통수에서 물을 길어다가 1만의 문수보살에게 차를 공양하였다", 진감국사의 비문에 한명(漢茗)이라는 1말이 나온다. 이는 "한명을 공(供)하는 자가 있으면 가루로 만들지 않고 그대로 돌솥(石釜)에 넣고 삶았다" 라는 기록이다. 실제로 안압지 복원 공사 도중에 정언다(貞言茶)라는 명문(銘文)이 있는 토기 잔이 발굴되었고, 원효의 거처에는 병(甁)과 자구(瓷具)가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경포대와 한송정의 석지(石池)·석정(石井)·석조(石槽) 등 유물도 한국의 옛 차문화를 엿볼 수 있는 유물이다. 그리고 고분에서 출토되는 금완(金碗)·은완(銀碗) 등도 보기에 따라 찻잔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신라의 다구
우리나라는 신라시대부터 음차(飮茶)의 유풍이 유행하면서 다구(茶具)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왔고 그것이 바로 고려자기의 발전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된다. 우리 찻그릇의 첫 장을 연 사람은 충담 선사와 경덕왕이었다. 그러나 당시 충담이 사용했던 다구와 찻잔은 어떤 것이었는지 밝혀지지 않았으나 우리 차 발전사에 중요한 분수령이 되었다는 점은 확실하다. 충담과 경덕왕의 일화로 볼 때 당시 다구 발전에 중요한 전기가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려의 다구
신라에서 기원된 음다의 유행은 고려로 접어들면서 한층 성행하였다. 그것은 바로 고려 청차의 지대한 발전을 가져왔는데 고려시대는 왕실 및 문신 그리고 승려와 귀족층에 이르기까지 차가 폭넓게 음용되었다. 국가 중요행사에 차가 빠지지 않은 것 또한 차문화 발전에 중요한 전환점이었다.팔관회, 연등회, 공덕제(功德齊), 사신 맞이, 책봉의식 및 왕실의 중요행사에도차가 빠지지 않았다. 태조 왕건은 군민(軍民)들에게 차를 직접 하사했고 고려 6대 성종(成宗)께서 손수 공덕제를 베풀기 위해 차를 연하여 올렸음은 고려사에 나타난 사실이다.
음다의 풍습이 성행했던 고려시대에는 다구의 발전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1123년 송나라 서긍이 쓴 『고려도경』에도 고려인의 음다풍을 읽을 수가 있다. "고려인들은 차 마시기를 매우 좋아하여 다구를 더욱 잘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금꽃이 있는 검은잔(錦華烏盞), 청자작은찻잔(翡色小), 세발차솥(湯壺) 등이 그것이다. 또 송과 비교하여 고려시대의 특유한 음다법을 『고려도경』을 통하여 보면, "무릇 연회에 나오는 차를 손님 앞에 내올 때는 아주 서서히 걸어서 들인다"의 기록으로 보아 당시에는 차를 손님 앞에 돌려놓은 후에야 비로소 마셨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는 고려 특유의 음다법으로 송나라 사람들의 눈에 기이하게 비쳤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한ㆍ중ㆍ일 차의 역사 중에서 절정기는 당시의 음다법과 한층 더 발전한 비색의 자기 생산기술로 미루어 고려시대로 보아야 한다. 다선일미, 화경청적이란 말도 이 시기에 생겨났고 송의 천목다완이나 이도다완(일본식 다완)이 꽃을 피웠다는 것이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조선의 다구
는 불교와 떼려야 뗄 수 없듯이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쇠퇴기를 겪었다. 이는 조선이 성리학을 내세우면서 불교와 인연이 깊었던 음다의 유풍이 꺼져가는 불빛처럼 되어간 것이다. 그러나 조선시대 음다풍은 19세기에 이르러 혜장, 초의, 범해 등의 다승의 출연과 다산 정약용, 자하 신위, 추사 김정희, 홍현주의 출현으로 다시 차문화의 부흥기를 맞는다. 일본의 국보인 천하제일의 명기인 이도다완 역시 조선의 이름 없는 도공이 만든 찻잔이었다. 그 그릇은 조선에서는 막사발이었는데 일본 다인의 눈에 띄어 천하제일의 명기가 되었다. 야나기무네요시(柳宗悅, 1889~1961)는 이도다완에 대해 "왜 다인들은 잡기였던 것을 명기라고 칭송했던가. 그것은 그 잡기 속에 결정(落着)된 고요함의 미(美)의 발견이었다"고 말하였다. 또한 그들은 수많은 명공(名工)들로 하여금 이도다완의 제작 방식을 모방하여 다완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위로는 코미츠(光悅)로부터 아래로는 리큐(樂) 다완에 이르기까지 300년 동안 무수한 다완이 일본에서 계속 만들었지만 고려 다완을 뛰어넘지 못했다. 그들의 대명물인 다도다완과 쯔쯔이쯔쯔(筒井筒)는 역사 속에 한 점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개탄한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이도’는 여전히 최고의 다완이라는 위치를 잃지 않았다고 말하였다.
초의의 『동다송』을 살펴보면, "탕을 살펴 물이 끓으면 그물을 들어 올려 찻잔에 조금 따라 부어서 먼저 냉기를 물리쳐 물을 따른 후에 마른 차를 넣는다. 차의 양이 많고 적음을 잘 가려야 한다. 그것을 가리지 못하면 중정을 잃어버린다"고 했다. 조선시대에는 오늘의 점다(80℃ 물을 식혀서 마시는 법)방식이 아니므로 뜨거운 탕관에 물을 끓여 다관에 부어 마시는 풍습이 있었다. 그 풍습이 오늘까지 이어져왔다. 근세의 다구들은 조선시대의 맥을 그대로 이어 오늘에 이르렀다.
차를 끓이는 도구
탕관
를 우려낼 물을 처음 끓이는 도구를 탕관이라고 한다. 탕관의 종류는 탕관의 제조에 쓰이는 재료로 그 종류를 나눈다. 돌솥, 쇠솥, 탕솥, 탕병, 쇠병, 은병, 돌냄비, 귀솥, 철관 등이 있다.
차솥
물을 끓이는 솥으로 무쇠솥, 곱돌솥, 약탕관, 등이 사용되나 곱돌솥이 제일 좋다. 무쇠솥은 녹이나고 냄새가 나기 쉬우나 돌솥은 돌 속에 천지의 수기가 엉겨 있다가 탕을 끓일 때 녹아 나와 차와 함께 어울려 맛을 싱그럽게 한다. 그 다음이 약탕관의 순서이다. 차솥 대신에 보온병을 쓸 경우도 있다.
화로
차를 달이는 첫째 요령은 불을 잘 다루는 일이다. 화로의 불이 벌겋게 단 후 차 주전자를 얹고 부채를 부쳐 물이 끓도록 한다. 이때 문무를 조절하여 중화가 되도록 해야 한다. 화로의 불은 백탄이 으뜸인데 백탄의 독특한 담향이 차의 격조에 어울릴 뿐 아니라 열 조정하기에 편리하기 때문이다.
물항아리
차 끓일 생수를 담아두는 항아리다. 도기제품을 주로 사용하지만 옹기항아리를 써도 무방하다. 찻물은 차의 몸이라서 물 선택이 매우 중요하며 청수통에 하루정도 재워서 쓰면 더욱 차맛이 좋아진다.
차를 마시는 도구
다관
탕관의 물로 잎차를 우려내야 하는데, 그 둘을 함께 담는 주전자를 다관이라고 한다. 다관의 재질은 철, 동, 은 등이 있으나 차의 격조에 맞지 않아 일반적으로 도자기로 빚은 다관을 많이 쓴다. 다관의 명칭은 그 모양새와 손잡이에 따라 달라지는데, 한국에서는 횡파형(손으로 잡고 가로로 붓는 형태) 다관을 많이 쓴다. 색채, 체형, 덮개, 주둥이, 거물, 손잡이가 잘 어울린 것을 좋은 다관의 기준으로 삼는다. 좋은 다관은 물을 따를 때 손에 무리가 없어야하고, 차를 따를때 물이 고르게 잘 흘러야 한다. 또한 뚜껑이 다관의 기울기에 따라 움직이지 않게 안정되어 있어야하고, 차 가루가 흘러내리지 않아야 좋은 다관이다.
찻잔
찻잔의 종류는 그 형태에 따라 구분된다. 주둥이가 넓고 아래로 갈수록 좁아지는 형태를 잔(盞)이라고 하고, 아랫부분에 굽이 높이 서있는 것을 배(杯, 盃)라 하며, 위와 아래의 크기가 같고 몸통이 높아 수직으로 솟은 것을 종(種)이라 구분한다. 그러나 뜨거운 열이 겉으로 배어나지 않는 것을 일반적으로 좋은 찻잔이라고 구별한다.
물식힘 사발
말 그대로 탕관의 물을 식히는 그릇이다. 잎차형 차에는 쓰임이 있으나 분말 형태의 타에는 쓰임이 없다. 다관에 물을 부을 때 물이 흐르지 않도록 주둥이가 잘 만들어져야 좋은 사발이다.
찻잔받침
찻잔받침은 잔을 놓을 때 소리가 나지 않고 깨짐이 없어야하므로 은, 동, 철, 자기의 재료보다는 나무나 대나무의 재료를 써서 많든 것이 좋다. 배, 곷잎, 원, 타원, 다각형 등 형태가 다양하다.
차통
통, 기둥, 단지의 형태를 띠고 있으며 나무, 대나무, 은, 주석, 양철 등으로 만든다. 밀폐의 효과가 큰 것이 좋은 차통이다.
차숟가락
적당량의 차를 떠 옮길 수 있는 크기의 숟가락이라야 크기가 알맞다. 나무, 대나무, 은, 동, 철 등으로 만들고 전차용으로 대나무를 절반으로 가른 것과 오동나무 등 목재가 쓰이며, 숟가락에서 차 향을 해치는 냄새가 나지 않아야 한다.
찻수건
음차를 하고 남은 물기를 깨끗이 닦는 행주로, 흡수력이 좋아야 한다.
물버림사발
음차하기 전 잔을 씻거나 예온수, 차찌꺼기 등을 버리는 그릇으로 원통형, 사방형, 항아리형 등이 있다.
차반
다구를 정돈해 주는 도구용의 다반과 찻잔을 나르기 위한 다반이 있다. 재료는 죽제, 목재류가 많고 모양은 원형, 정사각형, 직사각형, 타원형, 팔각형 등이 있다.
찻상
찻상은 둥글거나 네모진 것이 대부분인데 너무 커도 불편하고 너무 작아도 볼 품이 없다. 찻상의 다리가 통반으로 되어 있고, 찻상 둘레에 외고가 있는 것이 찻상으로 제격이다.
표주박
차솥에 생수를 붓거나 끓인 물을 떠서 옮기는데 사용한다.
찻상보
무명이나 삼베로 만든 보자기를 일반적으로 쓰지만, 『고려도경』의 기록 중에는 붉은 색을 띤 보자기도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도자 역사상 한국만큼 다양하고도 아름다운 다완(찻사발)을 많이 만든 나라는 지구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다완에 관한 연구나 기록한 자료가 없어 다완 전문 서적이 전무(全無)하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웃나라 일본의 도자 서적들을 참고하는 실정을 안타까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안압지에서 발굴되어 경주박물관에 소장된 우리나라 최초의 다완으로 알려진 ‘차茶’ 자가 새겨진 토기 다완을 비롯하여 고려시대의 비색 청자 다완들과 조선시대의 무수한 각종 다완들은 세계인들의 눈에도 한국은 분명 다완(찻사발)의 보고(宝庫)입니다.
안압지에서 출토된 찻사발, 국립경주박물관소장
경주 안압지(676년 건조)에서 출토된 토기류(무유, 無釉)의 다구(茶甌)에 “언(言), 정(貞), 차(茶), 영(榮)”이라 쓰여진 것이 말차용 찻사발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라 여겨진다. 크기는 구경 16.8cm 높이 6.7cm 이며 굽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조들이 빚어놓은 이러한 보물들이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하여 보물급 찻사발의 대다수가 일본에 있다는 현실은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 조선시대의 사발 중에 정호(井戶,이도) 다완은 일본의 국보로까지 지정되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 다완을 두고 간혹 미(美)의 기준을 운운하며 우리의 잡기이자 막사발이라고 폄하하는 일이 있는데, 이런 일은 더는 없어야겠습니다.
‘술을 좋아하는 나라는 망하고 차(茶)를 좋아하는 나라는 흥한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우리 그릇, 우리 차를 사랑하여 우리의 전통문화를 세계 속에 한류(韓流)로 만들어 후세에 유산으로 남겨주는 역사를 만들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2004년 출간되었던 ‘다완의 세계’ 서문을 붙이며 마무리합니다. 감사합니다.
‘다완의 세계(2004년)’ 서문에서 :
다완은 선조 사기장들이 일상 생활용기나 제수용기로 쓰고자 만들었다. 요즈음 들어 찻사발이 갖고 있는 옛날의 그 멋과 맛을 재현하고자 노력하는 도예가들이 현저하게 늘어가고 있으며, 일반 도자 애호가들 뿐만 아니라 茶人들 또한 지대한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이런 까닭은 과거 우리가 우리의 사발에 대한 미학을 발견치 못하고, 일본의 茶人들에 의해 음다용(飮茶用) 찻사발로 전용되고, 특히 일본의 국보와 중요 문화재 명물로 지정되면서 더욱 그 가치가 높아졌음에 기인함도 영향이 있어 보인다.
역사적 비운으로 우리는 우리의 것을 토착, 발전시키는 데에 소홀했을 뿐만 아니라 참고할 만한 역사 기록이 사발에 관하여는 전무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에 반해 일본은 찻사발 사용에 대한 기록과 연구가 대단하여 찻사발의 시대적 분류나, 명칭, 갖추어야 할 조건(약속)들을 정리하여 고유명사 내지 공용어화 시켜 놓았다.
그래서 일본은 우리 고유의 차문화와 도자예술을 받아들여 일본의 자신들의 문화로 정착 승화시키는 데에 성공하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에 따라 찻사발 명칭이나 분류등이 16세기 이래 장구한 시간 일본어로 쓰여져 왔고 이를 만드는 사람이나 사용하는 사람들도 그대로 통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로 인해 많은 비판이 있고, 현대에 이르러 우리말 이름 붙이기 운동을 펼치고 있으나 무수한 시간이 요구될 것이다. 자칫 억지 이름을 명명하게 되면 오히려 혼돈을 초래하여 역효과가 날 우려도 있으므로 각계의 중지를 모아야 할 것이다.
출생은 한국이나 성장은 일본에서 했으니 역사는 역사에 맡기고, 이제부터라도 진정한 우리 도자 예술과 차문화를 승계 발전시키도록 혼신의 힘을 다하는 것이 미래 지향적이지 않을까 하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정확한 근거나 자료 없이 자기의 막연한 추측이나 일본 저서 등의 설들을 믿고 자신의 주장을 공공연히 펼치는 것은 자칫 역사를 왜곡시키는 위험천만한 일이 아닐까도 우려된다.
공통성, 객관성 없는 추측성 자기 주장은 오만일 수도 있거니와 이를 보고 듣는 이들로 하여금 잘못된 지식이 전달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완(사발)을 만드는 사람중의 한 사람으로서, 이를 만들고자 하는 도예가들과 관심 있는 애호가들을 위하여 부득이 이제까지 쓰여져 온 용어와 있는 그대로의 사실들을 인용 서술하고, 사발을 빚을때에 경험이나 애로점등을 피력하고, 또한 강의를 듣는 많은 이들의 성화에 응답코자 용기를 가지고 집필하게 되었다.
옛 것을 알아야 새것을 안다는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의 말처럼 우리 선조 무명 사기장(도공)들이 빚은 찻사발의 진면목을 앎으로써, 전통 도자의 계승발전과 더불어 현대 도예 발전에 기여하고자 함이다.
끝으로 찻사발을 빚는 도예가에게 감히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 자기가 만든 사발이 최고라든지, 자기가 조선 막사발을 재현 했다든지 하는 말은 자긍심을 넘어 오만일 수 있다.
옛것을 그대로 재현한다든가 모방한다는 것이 최상은 아니다. 똑 같이 재현할 수도 없거니와 옛날의 전용된 찻사발보다 처음부터 다음용(茶飮用)으로 만드는 현재의 사발이 더욱 훌륭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므로 차를 알고 차인의 심성을 아는 것은 만드는 이의 기본이다.
이러한 기초 위에 현대인이 정말로 쓰기 좋은 찻사발을 무욕(無慾)의 마음으로 만드는 것이 옛것을 재현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하는게 아닐까?
정호다완은 찻사발 중에서도 왕 중의 왕이라 칭할 만큼 가장 진중하고 사랑받는 찻사발 형태의 하나이다. 정호다완(井戶茶碗) / 田元 具誠會 作 윗 지름 15.3cm, 밑 지름 5.7cm, 높이 9.1cm, 깊이 7.5cm 미도요(美陶窯)의 도자기 명장(名匠) 田元 具誠會는 다완(茶碗/찻사발)을 중심으로 작품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고려말-조선초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정호다완 중 하나는 특히 일본에 건너간 후…
지금은 아카데미 이후 도자기학과 강의를 마친 후 개별 작품활동만 하고 있습니다. 인터넷 검색 중 과거 기사 내용에서 다완과 다도에 대한 설명, 그리고 차-도자기 축제에 대한 설명이 있어서 소개합니다. 감사합니다. '명품 찻사발' 빚을 전문가 빚는다 [시사저널 910호] 2007.03.26 13:31:48 - 도예가 구성회씨, '다완 아카데키' 개설 준비...다양한 '다도 행사'도 열어 구성회씨는 한국적인…
안녕하세요. 미도요에서 판매하고 있는 구성회 선생님의 작품을 소개해드리려고 합니다. 오늘 소개해 드릴 작품은 바로 고려시대 청자 동자다완, 오목다완의 형태에 새로운 유약을 입힌 청옥다완입니다. 청옥다완 (靑玉) 본래 우리 선조들은 사발을 만들 때 푸른색의 찻사발은 한 번도 만든 적이 없었다고 하는데요. 하지만 청옥다완은 최근 들어 많은 차인들이 코발트색의 찻사발이 나오면 말차와 색도…
다완은 찻사발이니 차(茶)에 대해서 알아보지 않을 수가 없다. 차와 도자기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 상호보완적으로 발전을 해온 것으로, 차와 도자기는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다.
<사진 : 다도동락(茶陶同樂)>
우리나라 자료에서 살펴보는 차(茶)와 다완
차 밭을 찾아가서 (전라남도 보성)
차나무 | 차씨와 차잎 | 차꽃
우리나라에서는 옛 부터 차를 즐겨마셨음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을 찾아볼 수 있는데, 표로 정리해보았다.
시대/국가
차에 대한 이야기와 다완 또는 차도구들
삼국시대이전
선인(仙人)들이 송화가루, 산삼가루를 솔잎으로 저어 마셨다는 이야기가 있다.
가야
김수로왕의 부인 허황옥(인도 태양왕조 야유타국의 공주)이 서기 48년 7월 27일 인도에서 금, 은 보화등과 함께 차를 가져왔다는 설.
일연(一然)이 쓴 삼국유사 중 `가락국기`에 661년 3월 세제사에 술과 단술을 빚고 떡, 밥, 차, 과일 등의 음식을 차렸다는 기록이 있다.
고구려
옛 고분에서 전차(錢茶: 건조와 보관 및 휴대에 편하게 엽전모양으로 가운데가 뚫린 모양의 차)를 발견하였고, 차를 끓일 때 쓰는 이동식 화덕을 발견하였다.
차를 휴대해가며 마실 정도였다니, 차가 상당히 생활 깊숙히 일부분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백제
교역이 활발하였으므로, 차 마시는 풍속이 널리 퍼졌을듯 한데, 필자가 자료를 더 자세히 찾지는 못하였다.
신라
삼국사기에 흥덕왕 3년(828년)에 ‘당나라 사신으로 갔던 김대렴(金大廉)이 찻씨를 가져와 이를 지리산에 심게 했다. 선덕왕(632~647) 때부터 성행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미 당나라에서 가루차(말차)가 수입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경주 안압지(676년 건조)에서 출토된 토기류(무유, 無釉 : 유약을 바르지 않은)의 다구(茶甌)에 “언(言), 정(貞), 차(茶), 영(榮)”이라 쓰여진 것이 말차용 찻사발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라 여겨진다. 크기는 구경 16.8cm 높이 6.7cm 이며 굽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이규보의'남행일월기(南行日月記)'에 신라의 원효대사가 “味極甘如乳, 因嗜点茶也”(맛이 지극히 감미롭고 거품이 우유같아지니 이를 즐기며 점다라 하느니라)라고 한 것으로 보아 당시 가루차(抹茶)를 행했음이 확실하고, 또한 최치원의 '진감국사비문'에 돌솥(石釜)에 끓인 팽다(烹茶) 운운한 기록으로 보아서는 전차(煎茶 : 찻잎을 물에 우려서 마시는 차) 또한 행했음도 알 수 있다.
고려
다선일체(茶禪一體)사상이 일반 백성에 까지 확산되어 차를 마시는 일이 보편화되어, 흔히 일어나는 일상의 일들을 ‘다반사(茶飯事)’ 라고 하는 말이 생기기 까지 했다.
이규보의 ‘다마시(茶磨詩)’에 “차 맷돌을 준 이에 사례한다”나 이인로(1152~1220)의 ‘승원다마(僧院茶磨,절간의 차맷돌)’에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역시 가루차(抹茶, 말차)가 성행했음을 알 수 있다.
청자의 햇무리굽완(盌)도 이 시기에 쓰여진 것으로 보여진다.
조선초기
주자학(朱子學)을 근본으로 가례(家禮)를 중시하게 되며 차문화는 점차 쇠퇴하게 된다. 그러나 관혼상제(冠婚喪祭) 때나 신년하례, 추석차례 때에 조상신 앞에 말차(가루차)를 점하여 절을 올리고 인사온 하객들에게도 한잔씩 접대했다. (고유명절이나 제사때에 조상숭배의 뜻으로 차를 올리는 것은 “차례”라 하고 형식과 예를 갖추어 의식행사에 올리는 차 행위는 “다례”라고 한다.)
조선시대 제례용 백자 다완 (해강박물관 소장, 높이 9.8cm, 구경 13.2cm, 굽높이 3.0cm, 굽외경 9.5cm) / 굽이 높고 사발내에 바닥 한가운데에는 차'茶'자가, 굽 안에는 앙'仰'자가 청화채로 선명하다.
일반적으로는 백자다완을 사용하고 양반 등 상류층은 백자다완 또는 분청상감다완이나 덤벙(粉引)다완 등 고급스러운 찻사발을 사용하고,서민들은 소위 막사발이나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사발들을 사용하지 않았을까라고 추정해본다.
조선후기
초의선사(草衣禪師, 장의순 1786~1866)는 우리나라 다도정신인 중정(中正)과 다선일여(茶禪一如, 茶禪一味) 사상을 강조했다.
'
中正'이라 함은 차를 우려냄에 있어 물과 불을 알맞게 선택하여 간을 맞게 하는 차의 행위가 우리 실생활에 분에 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는 자기 분수에 맞는 중도의 바른 길을 가야한다는 뜻과 상통한다.
또한 평범하고 일상적인 차를 마시는 일체의 행위들을 수행에서 말하는 정신세계와도 통한다는 것이 '다선일체'사상인 것이다. 참고로 중국의 다도정신은 '정행검덕(精行儉德)'이며 일본은 '화경청적(和敬淸寂)'이다.
위와 같이 다완에 드러난 당시 차 문화에 대해서 간략히 살펴보았다. 이외에 몇가지 조금 더 추가적인 이야기를 나열해본다.
찻사발을 부른는 명칭의 변화
다완에서 ‘완’의 한자어는 지금 ‘碗’이 통용되지만, 지장법사는 “차를 점(点)하여 구(甌) 가운데 화유(花遊)가…”한 것으로 보아 신라시대에는 당시 혼용되었던 완(椀, 盌) 보다는 구(甌)로 많이 쓰여졌음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여기서 화유(花遊)라 함은 말차의 거품이 마치 꽃이 노니는 것으로 비유 했음을 말한다.
초의선사와 다산 정약용
동다송(東茶頌)을 쓴 초의선사(草衣禪師, 장의순 1786~1866)는 전라남도 해남 대둔사에 일지암(一枝庵)을 세우고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등과 깊은 교류를 가지며 다도의 이론과 실제를 정리하고 발전시켰는데, 그곳을 답사하며 찍은 사진 몇 가지를 함께 살펴보며 글을 마무리 하고자 한다.
▲ 일지암 / 초의선사, 전라남도 해남
▲ 일지암 뒤의 차물을 받는곳 아직도 초의선사의 ‘차’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남아 있는 듯 하다.
▲ 다산초당 / 다산 정약용이 집필과 차 문화의 발전을 이루어온 곳이다.
▲ 다산초당 현판
▲ 다조 / 돌로 만들어진 찻상 아마도 이곳에 둘러앉아 찻물을 끓이고 차를 나누어 마셨을 것이다.
▲ 약천 / 찻물을 받던 우물 다산 정약용이 직접 파서 만든 샘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 너무 간략히 둘러본 것만 같아 아쉽기는 하지만, 차에 대한 스승과 전문가분들을 통해 공부하기로 하자. 다음에는 찻사발의 형태나 각 부위별 명칭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려고 한다.
경기도박물관(관장 이원복)은 2014년의 첫 번째 특별 전시로 ‘한국 차(茶) 문화대전-차향에 스친 치유의 미학’을 성황리에 열고 있다. 8월24일까지 이어지는 이번 전시에서는 경기도박물관 소장유물뿐 아니라 국립중앙박물관, 국립경주박물관, 국립광주박물관, 삼성미술관 리움, 아모레퍼시픽미술관, 고려대학교박물관, 서울역사박물관 등 전국 주요 박물관에서 출품한 차문화 관련 유물 200여점이 한자리에 모이는 유례없는 특별한 전시다.
▲ 초의선사가 지은 '동다송'과 초의선사 진영.
전시는 크게 세 파트로 진행된다. 먼저 ‘차와 생활’은 차에 대한 기본 정보에서부터 차 관련 책과 편지, 그림에 나타난 차 작품들, 차 그릇까지 다섯 주제로 차의 모든 것을 담았다.
‘① 즐거움을 만나다’에서는 차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와 함께 차를 마신 후의 힐링을 표현한 현대 화가들의 작품이 소개된다. 오관진의 ‘비움과 채움’, 김정옥 사기장(중요무형문화재 제105호)의 ‘덤벙분청다완’도 만날 수 있다.
‘② 즐거움에 빠지다’에서는 차와 관련된 편지, 서책 등의 전적류가 전시된다. 초의선사의 《동다송》, 황윤석의 《이재난고》, 등이 전시된다.
차를 통해 초의선사와 깊이 교류했던 다산 정약용(1762~1836)과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이야기는‘③ 즐거움을 나누다’에서 볼 수 있다. 초의가 그렸다고 전하는 ‘정약용 초상’, 허련의 ‘추사 김정희 초상’, ‘초의 선사 진영’이 교체 전시된다.
‘④ 즐거움을 더하다’에서는 모임과 잔치, 종교와 산수화병풍 속에 드러난 차의 모습이 전시된다. 차를 공양하는 모습이 담긴 ‘송광사 응진당 십육나한도 중 제 7·9존자’(보물 제1367호) 등이 소개된다.
‘⑤ 즐거움을 마시다’에서는 차를 담는 그릇이 전시된다. 경주 안압지에서 출토된 ‘차(茶)’글씨가 쓰인 토기 사발 등이 대표적이다.
▲ 송광사 응진당 십육나한도 중 제7 제9존자.
‘그림에 스민 차향’에서는 조선시대 회화 중에서 사대부들의 차문화를 그린 명품(名品)만을 모아 전시한다. 김홍도의 ‘군현도’, 심사정의 ‘송하음다’, 이재관의 ‘죽림칠현’등이 전시된다.
‘힐링존’에서는 다양한 차 종류 샘플과 함께 차나무 밭에서 여유를 찾아보고, 고려시대에 차에 대한 정책을 운영했던 관청인 다방(茶房) 등 차문화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을 알 수 있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