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인물 열전 이항복 李恒福

2017. 7. 1. 05:43우리 역사 바로알기



       한국사 인물 열전
                  

이항복

李恒福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 전반까지의 조선 사회는 변혁의 시기였다. 왕조 초기의 정치적 혼란을 마무리 지은 훈구파들이 노쇠해지자 비판 세력으로 등장한 사림파중종반정 이후 국왕의 후원을 받으며 국가 통치에 성리학 이념 구현에 박차를 가함으로써 신구 정치세력 간에 힘겨루기가 시작되었다. 그 과정에서 돌출한 각종 사화는 훈구파의 손을 들어주었지만 결정적인 승리는 사림파의 것이었다.


명종 대는 사화기의 마지막 시기였다. 이미 사림파의 득세가 대세가 된 시점에서 문정왕후를 등에 업은 외척 세력의 등장은 훈구파가 피워낸 최후의 불꽃과도 같았다. 당시 사림파는 불교 부흥의 선봉에 섰던 보우대사를 극단적으로 배척했다. 그리하여 철녀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명종이 보우대사를 죽이고 외척 세력의 핵심이었던 윤원형을 쫓아내면서 조정은 사림파의 독무대가 되었다.


명종의 뒤를 이어 보위에 오른 선조는 중종의 후궁 창빈 안씨의 소생인 덕흥군의 셋째 아들로 성리학자 한윤명의 문하에서 공부했으므로 사림에 비교적 호의적이었다.

이항복은 바로 그런 시기에 조정에 출사하여 당파 간의 분쟁에 얽매지 않고 불편부당한 대의를 좇았을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같은 난세에 충절의 정점을 몸소 보여주었고, 계축옥사 당시에는 폐모론을 반대하고 삭풍이 몰아치는 유배지를 택함으로써 세인들의 존경을 받았다.


이항복

조선 중기의 문신,정치가,시인

             

개구쟁이 어린 시절

  이항복(李恒福)은 1556년(명종 11년) 5월 13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자상(子常), 호는 필운(弼雲)·백사(白沙)·동강(東岡)이다. 고려의 대학자 이제현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참찬 이몽량, 어머니는 결성현감 최윤의 딸이다.

그의 어린 시절 신비한 일화가 몇 가지 전해진다. 어머니 최씨가 잉태했을 때 집안에 상을 당한 후라 몸이 약했으므로 낙태하려고 독극물을 먹었지만 무사히 태어났다. 한데 사흘 동안 젖도 먹지 않고 울지도 않았다. 이상하게 여긴 아버지가 박견이라는 소경 점쟁이를 불러 물으니 장차 큰 인물이 될 점괘가 나왔다며 안심시켰다. 과연 아기는 건강하게 자라났다.


돌이 되기 전 우물에 빠져 죽을 뻔한 일화도 있다. 유모가 우물가에서 아기를 안고 있다가 잠시 졸았는데, 꿈에 얼굴이 긴 백발노인이 나타나 어찌하여 아기를 돌보지 않느냐고 호통을 치면서 지팡이로 그녀의 종아리를 때렸다. 깜짝 놀라 눈을 떠보니 아기가 우물 안으로 막 들어가려던 찰나였다. 유모가 아슬아슬하게 아기를 구했지만 꿈에 지팡이로 맞은 종아리가 며칠 동안이나 아파서 기이하게 생각했다.


그로부터 몇 달 뒤 이항복의 조상인 고려의 명신 이제현의 제사를 지내는데, 유모는 상 위에 놓인 영정을 보고 깜짝 놀랐다. 우물가에서 졸고 있을 때 종아리를 때린 인물과 낯이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이항복은 어린 시절 매우 총명해서 8세 때 아버지 이몽량이 ‘칼[劒]’과 ‘거문고[琴]’를 시제로 내자 순식간에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칼은 대장부의 기상이 있고,
거문고는 태고의 소리를 간직하고 있네. 
 

1년 뒤에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이항복은 서울에서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천성적으로 의협심이 강하고 재기가 넘쳤던 그는 친구들과 동네방네 휘젓고 다니며 짓궂은 장난에 몰두했다. 그와 죽마고우인 한음 이덕형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는 당대에도 뭇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고, 오늘날에는 《오성과 한음》이라는 제목의 베스트셀러로 낙양의 지가를 올렸다.



이항복과 이덕형

             

여론보다 대의를 좇다

이항복은 16세 때인 1571년(선조 4년) 어머니까지 여의고 고아가 되었다. 눈물로 삼년상을 마친 그는 1575년(선조 8년)에 진사 초시에 급제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다. 당시 그의 재능을 눈여겨 본 영의정 권철이 그를 손녀사위로 삼았다. 그의 장인은 임진왜란 때 이치승첩과 행주대첩을 이끌어낸 도원수 권율이었고, 전란 초기 탄금대에서 전사한 신립 장군은 그의 동서였다.


과연 그는 비범한 재능에 걸맞게 25세 때인 1580년(선조 13년)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조정에 출사했다. 첫 벼슬은 승문원 부정자였다. 이듬해 예문관 정열이 되었을 때 율곡 이이의 천거를 받아 임금 앞에서 《강목(綱目)》을 강연했다. 그 공으로 이덕형 등 다섯 명과 함께 홍문관에 들어갔다. 1583년(선조 16년)에 사가독서의 은전을 입은 그는 홍문관 정자·저작·박사, 예문관 봉교·성균관 전적과 사간원의 정언 겸 지제교·수찬·이조좌랑 등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1589년(선조 22년) 정여립의 난이 일어났다. 그 여파로 이어진 기축옥사에서 수많은 선비들이 희생당할 때 예조 정랑이었던 이항복은 국청에서 문사낭청(問事郎廳)으로 죄인의 취조서를 작성하여 읽어주는 임무를 담당했다. 그때의 공적으로 호조 참의로 복무하던 1590년(선조 23년)에 평난공신 3등에 책록되었다.


당시 이항복은 신료들이 동서로 갈려 분쟁이 일어나면 삼사에 드나들며 중재하고 시시비비를 공평하게 가려주었으므로 그의 은혜를 입은 관리들이 많았다. 실로 그는 여론보다는 대의를 좇았던 인물이었다.

일례로 기축옥사 당시 우의정 정언신이 곤장을 맞고 갑산으로 유배당하자 아들 정율이 식음을 전폐한 끝에 피를 토하고 죽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반역에 연좌될까 두려워 그 집안을 멀리했고, 일가친척들조차 장례식 참석을 망설였다.


그때 정언신 부자의 원통함을 알고 있던 이항복은 장례식에 찾아와 문상한 다음 정율의 관 속에 시 한 수를 넣어주었다. 30여년 뒤 정율의 아들이 이장하기 위해 관을 열다가 그가 쓴 시를 발견하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훗날 실학자 이익 《성호사설》‘백사의 만인시(白沙挽人詩)’ 하여 그 시와 얽힌 내용을 기록해 두었다.


입이 있어도 감히 말하지 못하고
눈물이 흘러내려도 감히 울지 못하네.
베개를 어루만지면서 남이 볼까 두려워하고
소리를 삼키며 남 몰래 눈물만 훌쩍이네.
그 누가 장차 날선 칼날로
굽이굽이 맺힌 마음의 고통 잘라내 줄까. 
 

이듬해 정철이 이산해의 계교에 빠져 광해군을 세자로 추대하려다 신성군을 마음에 둔 선조의 미움을 샀다. 이에 사람들이 사건에 연루될까 두려워하여 정철을 외면했지만 이항복은 좌승지의 신분으로 날마다 그를 찾아가 대화를 나누었다. 그로 인해 동인들로부터 탄핵을 받고 일시 파직되었지만 대사헌 이원익의 적극적인 비호가 있어 곧 복직되고 도승지에 발탁되었다.

             

임진왜란의 참화 속에서

선조 대에 동서분당으로 빚어진 내부의 충돌은 급변하는 동아시아의 정세 속에서 빚어진 엄청난 재앙을 감당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인접국 일본이 오랜 전국시대를 종식시키자마자 그 칼날을 조선을 향해 내밀었던 것이다. 침략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국내의 통일 과정에서 과도하게 팽창한 무력을 해소하기 위한 방법으로 ‘정명가도(征明假道. 명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길을 빌리겠다는 거짓 명분)’를 내세워 조선을 급습했다.


1592년(선조 25년)에 일어난 임진왜란 초기에 왜군이 파죽지세로 북상하자 선조는 황망하게 피란길에 올랐다. 당시 이항복은 도승지로서 임금을 곁에 모셨고, 이후 7년여에 이르는 전쟁기간 동안 곁을 떠나지 않았다. 유성룡이 도체찰사로서 관군을 지휘하면서 동분서주할 때 이항복은 탁월한 견해와 통찰력으로 힘을 보탰다. 최초에 피난처로 의주를 제시했고, 명나라에서 원병을 청하자고 주장한 사람도 그였다.


명나라의 병부상서 석성은 조정에서 조선이 왜병을 끌어들여 함께 명나라를 침공하려 한다는 의심이 일어나자 황응양을 조사차 파견했다. 이때 이항복은 과거 일본이 보내온 문서를 내보이며 의혹을 해소시켜주었다. 그 결과 요동에 주둔하고 있던 조승훈과 사유의 3,000여 병력이 급파되었지만 초전에 패퇴하자 조선에서는 재차 원군을 간청했다. 그리하여 이여송이 수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국내에 들어와 관군과 의병과 함께 조명연합군을 결성한 다음 고니시 유키나가가 점령하고 있던 평양성을 탈환했던 것이다.


왜군이 서울을 버리고 남쪽으로 물러나자 선조는 세자인 광해군을 남쪽에 보내 경상도와 전라도의 군무를 맡아보게 했다. 그때 이항복은 대사마로서 세자를 보필했다. 1594년 봄, 전라도에서 송유진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관료들이 앞 다투어 세자와 함께 환도를 주장했다. 하지만 그는 환도 논의를 중단시키고 서둘러 반란을 진압함으로써 분쟁을 잠재웠다.


이후 그는 병조판서, 이조판서,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을 겸하는 등 요직을 거치며 안으로는 중신으로 국사를 살폈고, 밖으로는 명나라 사절의 접대를 전담한 외교관의 역할을 맡았다. 명나라 사신 양방형과 양호 등도 그를 존경하여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찾곤 했다.


1598년 우의정 겸 영경연사·감춘추관사에 올랐을 때 명나라 사신 정응태가 같은 사신인 경략 양호를 무고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때 우의정이었던 이항복은 진주변무사로서 부사 이정구와 함께 명나라 조정에 들어가 황제에게 사실을 복명하고 돌아왔다.

그 후 문홍도가 전란 당시 휴전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유성룡을 탄핵하자 자신도 함께 휴전에 동조했다면서 사의를 표명하고 병을 구실로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조정에서 그를 도원수 겸 체찰사에 임명하자, 남도 각지를 돌며 민심을 다스렸고, 서울에 돌아온 뒤에는 임금에게 안민방해책(安民防海策) 16조 지어 올렸다.


7년 간 이어졌던 전쟁은 마침내 조선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그것은 이항복, 이덕형 등이 이끌어낸 명나라 원군의 활약, 이순신이 이끈 수군의 남해 평정, 의병들의 게릴라전이 잘 어우러져 시너지 효과를 냈기 때문이었다. 이항복은 전란 중에 중책을 수행한 공로로 호성일등공신에 오성부원군으로 봉해졌다. 1600년(선조 33년)에는 47세의 나이로 영의정에 올랐다.

1602년 정인홍과 문경호 등이 최영경을 모함, 살해하려 했다는 장본인이 성혼이라고 발설하자 삼사에서 성혼을 맹렬하게 공격했다. 이때 이항복은 성혼을 비호하고 나섰다가 동인들에게 정철의 편당으로 몰리자 망설임 없이 영의정에서 자진사퇴했다.

             

청렴과 위트가 어우러진 삶

1608년 선조가 승하하고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대북파 정권이 들어서자 서인이었던 이항복에게 정치적 박해가 시작되었다. 당시 좌의정 겸 도체찰사였던 그는 이이첨정인홍을 비롯한 대북파 신료들이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임해군을 제거하려 하자 강력하게 반대했다.


얼마 후 사림오현의 문묘배향 문제와 관련해 정인홍의 처벌을 요구하던 유생들이 구금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에 성균관에서 권당(捲堂, 동맹휴학)이 일어나자 분개한 광해군이 엄벌하려 했지만 그의 간곡한 설득으로 사태를 진정시킬 수 있었다.

1613년(광해군 5년) 가을, 이항복은 결국 인재 천거를 잘못했다는 구실로 대북파의 공격을 받아 파직 당했다. 그는 홀가분한 심정으로 서울의 북쪽 끝에 있는 노원촌에 동강정사를 짓고 동강노인으로 자칭하면서 지냈다.


공신에 봉해지고 영의정에까지 오른 그의 거처는 사람이 겨우 드나들 수 있는 단칸방에 불과했고, 살림살이는 거친 밥에 채소 반찬으로 끼니도 잇지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한낮이면 지팡이를 짚고 산과 물가에 거닐었고 밤에는 경서를 읽으며 평범한 삶을 즐겼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백성이 찾아와 하소연했다.

“나리, 신역(身役, 나라에서 강제로 부과하는 노역) 때문에 도저히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이항복은 멀뚱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그런가? 나도 호역 때문에 살아갈 수가 없다네.”

당시 이항복은 호역(護逆, 역모 사건을 변호)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았는데, 그 단어의 발음이 호역(戶役, 집집마다 부과하는 부역)과 같았던 것이다. 너나 나나 알고 보면 신세가 비슷하다는 너스레였다. 그가 시골에 내려와 겪어본 관리들은 조정의 신료들과 마찬가지로 부패하기 이를 데 없었던 것이다.


측간 쥐는 자주 놀라고 사당 쥐는 의심이 많아
안전하긴 관아의 창고에서 즐겁게 노닒만 못하리.
뜻은 배불리 먹고 또 무사하길 바라지만
땅 꺼지고 하늘 기울면 제 몸도 위태로워진다네. 
 

이 시는 올빼미·쥐·매미를 읊은 〈삼물음(三物吟)〉 가운데 쥐를 노래한 ‘서(鼠)’ 작품으로 시끄러운 세태를 모른 척하는 관리들을 조소하고 있다. 여기에서 변소 쥐를 초야에 은거한 선비로, 사당 쥐를 조정 신료로, 창고 쥐를 일반 관리로 대입해 보면 의도가 명확해진다.

무릇 선비로서 초야에 은거하거나 임금 가까이에서 아첨하기보다는 좀 떨어진 관청에서 철밥통을 끌어안고 사는 것이 편안해 보인다. 하지만 그곳조차 조심하지 않으면 횡액을 피할 수 없다. 이는 복지부동하는 관리들에 대한 신랄한 조소가 아닐 수 없다.

             

충절로 맺은 생애

1614년(광해군 6년) 대북파 정권은 계축옥사를 통해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을 역모죄로 몰아 처형했다. 이듬해에는 선조의 유일한 적자인 영창대군을 죽인 데 이어, 서궁에 유폐되어 있던 인목대비마저 폐서인하고자 했다. 그처럼 칼날 같은 정치판에서도 이항복은 타고난 유머를 잃지 않았다. 유몽인《어우야담》에는 당시 이항복의 여유로운 성정을 보여주는 일화가 실려 있다.


그 무렵 삭탈관직 당한 사람은 대신이라 할지라도 ‘급제(及第)’했다며 자조하곤 했다. 조정에서 인목대비에 대한 폐모론이 불거지면서 이에 반대한 친구 이덕형이 영의정의 자리에서 쫓겨나고 좌의정이었던 자신도 삭탈관직당할 처지에 몰리자 그는 이렇게 너스레를 떨었다.

“내 벗은 급제한지 오래인데 나는 언제나 급제하려나?” 
 

이항복은 1618년 기자헌, 김덕함 등과 함께 폐모론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삭탈관직을 당하고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형에 처해졌다. 삭풍이 몰아치는 북행길에 병든 충신을 모신 사람은 평소 그를 아비처럼 따르던 정충신뿐이었다.

그해 5월 초, 이항복은 꿈속에서 선조와 이덕형을 보고 자신의 최후를 예감했다. 평생 충성을 바쳤던 선조나 죽마고우 이덕형은 이미 세상에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 달 11일, 이항복은 유배지 북청에서 62년 동안의 외롭고 고단한 생애를 접었다.


화산서원

경기도 포천시 가산면 방축리에 있는 서원, 경기도 기념물 제46호


그의 사후 포천과 북청에 사당을 세워졌으며 1659년(효종 10년)에는 화산서원(花山書院)이라는 사액이 내려졌다. 저술로는 《백사집》, 《북천일기》, 《사례훈몽》 등이 있으며 《백사집》에는 한문소설 《유연전》이 실려 있다. 《청구영언》과 《해동가요》에 시조 3수가 전한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훗날 정조는 《일득록》에서 그를 다음과 같이 상찬했다.


“백사 이항복으로 말할 것 같으면, 덕망과 공로와 문장과 절개 중에서 하나만 얻어도 어진 재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하물며 한 몸에 겸했음에랴. 세상에 전하는 우스개들이 꼭 모두 그가 행한 것은 아니겠지만 백성들이 지금까지도 그를 아끼고 사모하고 있는 까닭을 것을 충분히 추측할 수 있다. 임진왜란으로 임금이 파천하던 날 밤 궁궐을 지키는 위사들은 모두 흩어졌는데 홀로 손수 횃불을 들고 앞장서서 임금을 내전으로 인도했고, 조정의 의논이 결정되자 개연히 호종을 자처한 인물은 공 한 사람뿐이었다.

당시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기가 막히는데,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빠졌을 때 참된 신하를 알아본다.’라는 말은 바로 그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가 지은 〈철령가〉 중에서, ‘누가 외로운 신하의 원통한 눈물을 가져다가 구중궁궐에 뿌려 줄까?’라는 한 구절은 들을 때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게 한다. 참으로 충의가 탁월한 사람이 아니라면 어떻게 백 년이 지난 뒤에도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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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각 | 직업시인, 작가. 전체항목 집필자 소개

1963년 충남 태안 출신. 시인, 작가. 대한민국항공회 자문위원, 복잡하고 난해한 고전과 역사기록을 알기 쉽게 해석함으로써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역사 교양서를 쓰고 있다. 아울러 조선시대 역..펼쳐보기

출처

한국사 인물 열전
한국사 인물 열전 저자이상각 | 출판사Daum 전체항목 도서 소개

인물을 중심으로 살펴보는 재미있는 한국사 이야기. 이순신, 장영실, 사도세자 등 널리 알려진 역사인물부터 새로운 조명이 필요한 인물들까지 그들의 업적과 역사적 가치를 다양한 일화를 들어 흥미롭게 풀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