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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시대 연오군의 위치 - 1/2 상고사
2012.08.21. 13:52
전국시대 연오군의 위치 - 1/2
연오군
전국시대(BC3세기초) 연의 진개가 동에 있던 동호를 천여리 밀어내고 그곳에 5군을 설치했다 하는데 이 5군의 위치를 비정하는 것이 한국고대사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이 5군 중에 요동․요서군이 포함되어 있고, 진개 동정전의 전국시대 조선의 판도를 알 수 있으며, 동정후로도 역시 한의 무제에 이르기까지 요동군이 조선과의 경계였던 것처럼 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기] (♠1)흉노전에 「<...而趙武霊王亦変俗胡服 習騎射 北破林胡樓煩. 築長城 自代並陰山下 至高闕為塞 而置雲中鴈門代郡. 其後燕有賢將秦開 為質於胡 胡甚信之. 帰而襲破走東胡 東胡卻千餘里. 與荊軻刺秦王秦舞陽者 開之孫也. 燕亦築長城 自造陽至襄平 置上谷漁陽右北平遼西遼東郡以拒胡... 〉 ...조 무령왕 또한 습속과 복장을 호풍으로 바꾸고 기사를 익혀 북으로 임호와 누번을 격파하고, 대로부터 음산 아래를 따라 나란히 고궐까지 장성을 쌓아 새로 삼고 운중․안문․대군을 두었다. 그 후 연에는 현장 진개가 있어 호에 인질로 있었는데 호가 매우 신임하였다. 후에 돌아와서는 동호를 기습으로 깨뜨려 쫓아내 동호가 천여리 물러났다. 형가와 더불어 진왕을 찌른 진무양은 진개의 손자였다. 연 역시 조양에서 양평까지 장성을 쌓고 상곡과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군을 두어 호를 막았다...」
무령왕이 임호와 누번을 밀어내고 장성을 쌓았다 하였는데, [사기] (♠2)소진전에서 진개 동정전의 연지를 설명할 때 「燕東有朝鮮遼東 北有林胡樓煩 西有雲中九原 南有滹沱易水 地方二千餘里 ...」라고 하여 연의 북에 임호와 누번이 있고, 서로는 운중과 구원이 있다 하였다. 그런데 조가 북으로 임호와 누번을 격파하고 차지했다는 지역이 바로 정양과 운중, 오원이라는 것이다. 구원은 운중과 오원의 중간에 있다.
이것을 보면, 사실은 연의 서에 있다던 운중과 구원이 임호와 누번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같은 논리로 요동은 조선이었던 것이다.
그 후 연도 秦開(진개)가 호에 인질로 있을 때 그 허실을 파악하여 풀려나 돌아가는 즉시로 기습으로 들이쳐 동호를 천여리 밀어냈다 하였다. 그리고는 조양에서 양평까지 장성을 쌓고 5군을 설치하여 호를 막았다 한다.
이때 설치했다는 5군은 원래의 연지와 동호를 천여리 밀어내고 새로 확보한 지역에 설치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사기] 흉노전의 「東胡」와 소진전의 「東有朝鮮遼東」을 비교해보면 ‘東胡=朝鮮’임을 알 수 있다.
♠ [사기] 흉노전 『...自是之後百有餘年 晉悼公使魏絳和戎翟 戎翟朝晉 後百有餘年 趙襄子踰句注 而破並代以臨胡貉[1] 其後既與韓魏共滅智伯 分晉地而有之 則趙有代句注之北 魏有河西上郡 以與戎界邊. 其後義渠之戎築城郭以自守 而秦稍蠶食 至於恵王 遂抜義渠二十五城. 恵王撃魏 魏盡入西河及上郡於秦. 秦昭王時 義渠戎王與宣太後亂 有二子 宣太後詐而殺義渠戎王於甘泉 遂起兵伐殘義渠. 於是秦有隴西北地上郡 築長城以拒胡. 而趙武霊王亦変俗胡服 習騎射 北破林胡樓煩. 築長城 自代並陰山下 至高闕為塞 而置雲中鴈門代郡. 其後燕有賢將秦開 為質於胡 胡甚信之. 帰而襲破走東胡 東胡卻千餘里. 與荊軻刺秦王秦舞陽者 開之孫也. 燕亦築長城 自造陽[2]至襄平[3] 置上谷漁陽右北平遼西遼東郡以拒胡. 當是之時 冠帯戦國七 而三國邊於匈奴. 其後趙將李牧時 匈奴不敢入趙邊. 後秦滅六國 而始皇帝使蒙恬將十萬之衆北撃胡 悉収河南地. 因河為塞 築四十四県城臨河 徙適戍以充之. 而通直道 自九原至雲陽 因邊山険塹谿谷可繕者治之 起臨洮至遼東萬餘里[4] 又度河拠陽山北仮中. [1]索隠案 貉即濊也. 音亡格反. [2]集解韋昭曰 地名 在上谷 正義按 上谷郡今嬀州. [3]索隠韋昭云 今遼東所理也. [4]索隠韋昭云 臨洮 隴西県 正義括地志云 秦隴西郡臨洮県 即今岷州城. 本秦長城首 起岷州西十二里 延袤萬餘里 東入遼水...』
♠ [사기] 소진전 『去遊燕 歳餘而後得見. 説燕文侯曰 燕東有朝鮮遼東 北有林胡樓煩 西有雲中九原 南有滹沱易水[1]. 地方二千餘里 帯甲數十萬 車六百乗 騎六千匹粟支數年. 南有碣石[2]鴈門之饒[3] 北有棗栗之利 民雖不佃作而足於棗栗矣. 此所謂天府者也. 夫安樂無事 不見覆軍殺將 無過燕者. 大王知其所以然乎? 夫燕之所以不犯冦被甲兵者 以趙之為蔽其南也. 秦趙五戦 秦再勝而趙三勝. 秦趙相斃 而王以全燕制其後 此燕之所以不犯冦也. 且夫秦之攻燕也 踰雲中九原 過代上谷 彌地數千里 雖得燕城 秦計固不能守也. 秦之不能害燕亦明矣. 今趙之攻燕也 発號出令 不至十日而數十萬之軍軍於東垣矣[4] 渡滹沱 渉易水 不至四五日而距國都矣. 故曰秦之攻燕也 戦於千里之外 趙之攻燕也 戦於百里之內. 夫不憂百里之患而重千里之外 計無過於此者. 是故願大王與趙従親 天下為一 則燕國必無患矣. [1]集解周禮曰 正北曰並州 其川呼沱. 鄭玄曰 呼沱出鹵城. 索隠按 滹遝 水名 並州之川也 音呼沱. 又地理志鹵城 県名 屬代郡. 滹遝河自県東至參合 又東至文安入海也. 正義呼沱出代州繁畤県 東南流経五台山北 東南流過定州 流入海. 易水出易州易県 東流過幽州帰義県 東與呼沱河合也 [2]索隠(戦國策)碣石山在常山九門県. 地理志大碣石山在右北平驪城県西南 [3]正義鴈門山在代 燕西門 [4]索隠地理志高帝改曰真定也. 正義趙之東邑 在恆州真定県南八里 故常山城是也』
연의 동에 조선과 요동이 있다는데 조선은 국명이지만 요동은 지역명이다. 이것은 동정전에는 요동이 연지가 아니었다는 뜻이고 당연히 조선의 영역으로 보아야 한다. 또 연이 동호를 천여 리 밀어낸 후에 5군을 설치하였고, 그것이 「燕 東有朝鮮遼東」에 대응되므로 〈원래연지+동호(천여리)=원래연지+조선(요동포함)=연오군〉의 관계가 성립된다. 따라서 이 연오군의 영역을 비정하면 진개 동정전의 조선의 ‘서방영역’을 추정할 수 있게 된다. 요동이 북경~천진이므로 원래는 요동(북경)의 서방과 남방까지도 조선이었다는 뜻이다.
남으로 호타․역수가 있다는데 호타하는 지금도 그대로 이름이 남아 있고 역수는 지금의 保定(보정) 남쪽을 동으로 흐르는 唐河(당하) 정도로 보인다. 易州(역주) 남쪽을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易水(역수)가 있기는 하지만 강이 작아 나라의 영역을 나타내는 지표지명으로는 사용불가로 보인다.
지도1 호타 역수
@ 오른쪽 위 易州(역주)의 남(동그라미)을 흐르는 易水(역수)는 작다.
오대산 일대에 장성이 세 갈래 있는데 동북으로 달리는 장성이 상곡의 造陽(조양)에서 시작된다던 연 장성이다.
오른쪽 아래(네모) 望都(망도)는 고조선식 청동검이 나온 곳이다.
그런데 두 강 모두 대체로 서에서 동으로 흐르므로 영역을 설명할 때 역수를 남방한계로 설명할 경우 그 남에 있는 호타하의 의미가 없어지고, 호타하를 남방한계로 설명할 경우 역수의 의미가 없어진다. 이처럼 어느 하나를 기준으로 삼을 수 없다는 말은 둘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조건을 찾아야 한다는 얘기가 된다. 그래서 보면 이 두 강의 발원지가 산서성 오대산 북으로 같은 지역이다.
지도2 호타 역수
@ 왼쪽(네모) 오대산의 서쪽(동그라미)에 호타하가 보이고,
가운데 위(네모) 靈丘(영구)의 서쪽에서 발원하는 강이 하나 있는데 동남으로 흘러 망도의 남(동그라미)을 지나간다.
지금은 唐河(당하)로 불리는데 이 강이 고대 역수로 보인다.
지도3 호타 역수
@ 서쪽에 호타하(동그라미)와 동쪽에 당하(동그라미)가 보인다.
이것은 원래 연지의 동남방한계가 산서성 대의 동쪽 오대산 일대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역으로 생각하면 「東有朝鮮遼東」에서 형식논리상 요수(영정하)의 동이 요동이므로 나머지 요수의 서남과 남으로 호타하까지가 조선이라는 의미가 될 수 있다. 이것을 보면 진개 동정전에는 연지가 “산서성 代 이북으로 산서성 동북부와 하북성 서북부 일부”였다는 뜻이다. 이것이 전국시대 진개 동정전 연의 실상이다.
그런데 「南有滹沱易水」라고 기술한 표면적인 의도는 무엇일까? 겉보기로 해석해보면, 두 강의 북쪽 땅이 연지라는 뜻이 되는데 이것을 실사와 매칭시키면 역수(당하)의 북은 원래의 요서 중 일부(역수~영정하)와 요동(영정하이동 북경)에 해당되므로 당장 「東有朝鮮遼東」이라는 구절과 where가 충돌을 일으킨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느냐 하면 이때 겉보기로 요동은 이미 古요수를 今요하로 설정하고 요동반도로 놓고 썼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 기사의 표면적인 의도대로 연지를 생각해보면 서쪽에 있는 임호(운중)의 동쪽 산서성 북부에서부터 동으로 今난하 정도까지가 원래의 연지라는 식으로 쓴 것이다. 이런 구도 아래 「東有朝鮮遼東」이라는 구절이 나오게 되었고 여기서 조선은 지금의 요서에 놓이게 되고 요동은 今요동반도를 가리키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古요수를 今영정하에서 今요하로 치환한 결과를 기술한 것이다. 이런 구도를 겉보기나마 바르게 해석하여 그린 것이 지도9에 해당되는데 지금의 요서가 山戎(산융)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즉 연의 동에 있다던 동호나 조선을 산융으로 보고 있는 사례라고 할 수 있는데 하북성 북부는 그 전체가 예맥고지였고 춘추전국시대의 산융이 곧 예맥이었던 것이다.
어양군
따라서 5군을 설치했다 한 곳은 원래의 연지와 새로 확보한 영역인데, 실사상 5군 중 요동군은 북경~천진이고 요서군은 요동군과 반대편 영정하의 서남방과 남방에 해당되며, 어양군은 [한서] 지리지에 의하면 원래의 요동영역인 북경의 동쪽에 해당되는데 그 속현 중에 平谷(평곡)이 북경시내 동쪽에 지금도 남아 있기 때문이다.
지도4 평곡과 요동 (서)안평
@ 오른쪽 위(까만점)에 전한 어양군 속현 平谷(평곡)이 있고
그 서남에 安平(안평)이 보이는데 전한 요동군 西安平縣(서안평현)에 해당된다.
왼쪽 아래 탁주시는 연의 수도 薊城(계성)이 있던 곳이며
다시 그 서남으로 역현(역주)도 연의 중심지였다.
우북평군
나머지 중에서 우북평은 서북평이다. 右가 동서남북 방향을 나타낼 때는 西方(서방)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북평은 요서의 서북방이자 요동(북경)의 서방으로서 지금의 북경시의 서쪽이라는 뜻이다. 蔚縣(울현)과 涿鹿(탁록) 정도가 그 중심일 것이다. 우북평이 서북평이라는 데는 다음과 같은 근거가 또 있다.
[사기] 화식전에 『夫燕亦勃碣之閒一都會也. 南通斉趙 東北邊胡. 上谷至遼東 地踔遠 人民希 數被冦 大與趙代俗相類 而民雕捍少慮 有魚塩棗栗之饒. 北鄰烏桓夫餘 東綰穢貉朝鮮真番之利』
「<夫燕亦勃碣之閒一都會也 〉 무릇, 연 또한 발해와 갈석 사이의 한 도회이다」라고 하는데 같은 내용이 [한서] 지리지 연지조에도 있다.
[한서] 지리지 연지조 『薊 南通齊趙 勃碣之間一都會也[1]. 初太子丹賓養勇士 不愛後宮美女 民化以爲俗 至今猶然. 賓客相過 以婦侍宿 嫁取之夕 男女無別 反以爲榮. 後稍頗止 然終未改. 其俗愚悍少慮 輕薄無威 亦有所長 敢於急人 燕丹遺風也. [1]師古曰 薊縣 燕之所都也. 勃 勃海也. 碣 碣石也』
「<薊 南通齊趙 勃碣之間一都會也 〉 계는 남으로 제와 조로 통하며 발해와 갈석 사이의 한 도회이다」라고 하는데 안사고의 주에 「<薊縣 燕之所都也. 勃 勃海也 碣 碣石也 〉 계현은 연의 도읍이다. 勃(발)은 발해이며 碣(갈)은 갈석이다」라고 한다.
전국시대 연도 계현은 북경 남쪽 탁주에 있었고 수의 양제가 고구려 원정시 군을 집결시키고 馬祖祭(마조제)를 지냈다던 탁군의 薊城(계성)이 바로 이곳이다. 이 계현이 발해와 갈석 사이에 있다는데 발해는 지금의 발해(천진 앞바다) 그대로이므로 이 탁주 계현을 가운데 두고 발해의 반대편에 갈석이 있다는 뜻이다. 지금의 탁주를 가운데 두고 발해의 반대편을 대략 보면 산서성 靈丘(영구) 정도로 볼 수 있다. 이곳은 본래 西북평인 右북평과 북경 서남·남에 해당하는 요서군과의 접경 정도로 볼 수 있는 지역이다. 이곳에 갈석산이 있었다는 뜻이다.
이 탁주 계현은 후대에 燕國(연국) 계현, 幽州(유주) 계현 등으로도 불렸고, 지금의 천진시 북단 薊縣(계현)은 위사구도상 탁주의 계현을 이름만 옮겨놓은 것이다.
[한서] 지리지 요서군조에 『(전략)...海陽 龍鮮水東入封大水 封大水﹑綏虛水皆南入海 有鹽官...(중략)...肥如 玄水東入濡水 濡水南入海陽 又有盧水 南入玄 莽曰肥而...(중략)...臨渝 渝水首受白狼 東入塞外 又有侯水 北入渝 莽曰馮德. 絫 下官水南入海 又有揭石水賓水 皆南入官 莽曰選武』
요서군 絫縣(유현)에 揭石水(갈석수)가 있다 한다. 갈석수는 당연히 갈석산과 관련 있을 것이다.
[후한서] 군국지 요서군조 『遼西郡秦置 雒陽東北三千三百里 五城 戶萬四千一百五十 口八萬一千七百一十四. 陽樂 海陽 令支有孤竹城[1] 肥如 臨渝[2]. [1]伯夷叔齊本國. [2]山海經曰 碣石之山 (綱)[繩]水出焉 其上有玉 其下多青碧. 水經曰在縣南. 郭璞曰 或曰在右北平驪(城)[成]縣海邊山也』
임유현에 대한 주[2]에는 [산해경]에서 말하는 갈석산이 있다 한다. 역시 주[2]에서 郭璞(곽박)이 말하는 우북평 驪城(여성;驪成)은 본래 북경 서남이므로 해변산은 아니다. 다만 이미 옮겨진 지금의 창려 갈석산을 보면 해변에서 가깝기는 하다. 해변에 있다는 말은 역시 위사에 따른 虛記(허기)인 것이다. 海邊(해변) 또는 다른 기록에는 海畔(해반)이라고도 하는데 사실은 위의 군국지에 보이는 海陽(해양)이라는 속현이름을 변조한 것으로 보인다. ‘가[邊側;변측] 畔‘자이다. 湖畔(호반)=湖水(호수)의 가
[통전] 주군전 북평군조에는 『北平郡...(중략)...平州今理盧龍縣 殷時孤竹國 春秋山戎肥子二國地也 今盧龍縣 有古孤竹城 伯夷叔齊之國也 戰國時屬燕 秦為右北平及遼西二郡之境二漢因之 晉屬遼西郡 後魏亦曰遼西郡 隋初置平州 煬帝初州廢 復置北平郡 大唐因之 領縣三 盧龍漢肥如縣 有碣石山 碣然而立在海旁 故名之 晉太康地志云 秦築長城 所起自碣石 在今高麗舊界 非此碣石也 漢遼西郡故城在今郡東 又有漢令支縣城 臨閭關今名臨榆關 在縣城東一百八十里 盧龍塞在城西北二百里 石城漢舊縣 馬城』
갈석산이 있는 唐代(당대)의 북평군 노룡현이 원래 요서군 비여현이었다[盧龍漢肥如縣 有碣石山] 한다. [후한서] 군국지의 令支(영지)에 대한 주[1]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고죽은 백이숙제의 본국이라는 것인데 고죽국도 원래는 북경 서남의 요서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노룡이 난하 하류 동편으로 옮겨져 있어 많은 학자들이 고죽을 난하의 동편 今요서로 보고 있는데 古요수를 今요하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지도9, 17 참조).
앞서 본 [사기] 소진전 주[2]에는 「[2]索隠(戦國策)碣石山在常山九門県. 地理志大碣石山在右北平驪城県西南」이라 했다. 한편으로는 “갈석산이 상산 구문현에 있다”고도 하고, [지리지]에서는 “대갈석산이 우북평 여성현 서남에 있다” 하는데 바로 이것이다.
즉 북경 서쪽 우북평의 제일 서남에 위치한 여성현의 서남에 있는 갈석산이 한편으로는 요서군 임유현(비여현)의 서북에 있는 갈석산이기도 한 것이다. 하나의 갈석산이 두 군에 동시에 나타날 수 있는 것은 우북평군과 요서군은 남북으로 이웃하고 있고 우북평군 여성현과 요서군 임유현(또는 비여현)이 접경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 산서성 영구에 太白山(2,234m)이 있는데 이 산이 갈석산일 수도 있을 것이다.
지도5 원래의 갈석산(대갈석산)
@ [한서] 지리지 연지조의 「薊 南通齊趙 勃碣之間一都會也 〉
계는 남으로 제와 조로 통하며 발해와 갈석 사이의 한 도회이다」라는 구절과
그에 따른 안사고의 주 「薊縣 燕之所都也. 勃 勃海也 碣 碣石也 〉
계현은 연의 도읍이다. 勃(발)은 발해이며 碣(갈)은 갈석이다」라는 구절을
정확히 논리적으로 해석하여 찾은 원래의 갈석산이다.
이것만으로도 지금의 창려 갈석산이 가짜임을 알고도 남는다.
지도6 옥전과 노룡
@ 왼쪽 위(네모)에 천진시 북단 계현(양평성=요동성)이 보이고
그 동남 玉田(옥전)은 전한의 우북평 치소 無終(무종)이 후에 이름이 바뀐 것이라 하므로
천진의 동쪽에 우북평이 있었던 것처럼 보이게 되어 있다.
전한 요서군 肥如(비여)가 이름이 바뀌었다는 盧龍(노룡)이 지금은 난하 하류 동편에 붙여져 있고
동시에 전한 요서군 중심지 昌黎(창려)와 碣石山(갈석산), 楡關(유관), 海陽(해양) 등이 이름만 옮겨져 있다.
임유현의 臨渝關(임유관)을 臨閭關(임려관) 또는 臨楡關(임유관)으로 부르다가 지금은 楡關(유관)으로 부르고 있다.
이런 식으로 이름을 바꾼 것도 위사수법 중의 하나일 것이다.
상곡군
마지막으로 보면 산서성 代(대)의 동으로 요서군의 서쪽에 上谷(상곡)이 있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연 장성의 西端(서단)인 造陽(조양)이 포함된 군이다. 조양은 앞에서 본 [사기] 흉노전 주[2]에 상곡의 지명이라 하였다[集解韋昭曰 地名 在上谷]. 같은 내용을 기술한 [한서] 흉노전 주에도 조양은 상곡의 界(계)에 있고 양평은 요동의 치소라 한다[師古曰 造陽 地名 在上谷界. 襄平即遼東所治也].
그런데 연이 쌓았다는 장성이 「自造陽至襄平 〉 조양에서 양평까지」라고 하므로 양평은 연 장성의 東端(동단)에 해당하고 요동이므로 5군 중 요동군은 동쪽에 있다는 뜻이다. 확보된 연지는 대체로 하북성 북부에 해당하고 연장성은 북에 있는 호를 막기 위해서 쌓았다고 하므로 아무래도 동서로 쌓았을 것이다. 고로 서쪽 상곡의 조양부터 동쪽 요동의 양평까지 쌓았다는 뜻이다. 上谷(상곡)은 이름의 유래가 山地(산지)에 위치했기 때문이라 한다.
@ 지도1에서 왼편에 장성이 세 갈래 보이는데 이 지역이 산서성 대의 동쪽 오대산 일대로서 상곡군으로 비정되는 지역이고, 거기서 동북방 북경으로 달리는 장성이 바로 연이 쌓은 장성으로 비정된다. 동단은 지금의 천진 북단 계현의 바로 북에서 끝났는데 계현이 요동군 치소 襄平(양평)으로 비정되기 때문이다. 이 양평을 경유하여 남으로 흐르는 강이 바로 [수경주] 권14에 나오는 浿水(패수)이며 진개 동정후 연과 조선의 경계였다 하고(실사로는 아니다) 전한 무제 원봉3년(BC108) 이후 요동군과 낙랑군의 경계가 되는 강이었다([수경주] 카테고리 참조). 논리적으로 따지면 패수는 분명히 요동과 낙랑의 경계이므로 학자들 중에는 지금의 압록강을 패수로 보는 경우도 있다. 위만이 패수를 동으로 건너 조선으로 갔다 했으므로 패수의 동이 조선이자 후대 낙랑군이라는 뜻인데 대륙사서의 위사를 알아보지 못하는 반도사관에 의하면 평안·황해도에 낙랑군이 있었다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패수를 대동강 하나로 고정시켜 보면 해석이 안 되는 기록이 있으므로 패수가 여럿이라고 주장하는 것이지만 패수는 하나였다. 패수를 대동강 또는 청천강, 압록강 등으로 보고 고구려수도를 대동강평양으로 보는 것은 모조리 다 잘못된 설이다.
진개 동정후의 판도를 설명한 기록을 다시 보면, [사기] 열국분야에 「燕地尾箕之分野 召公封於燕 後三十六世與六國俱稱王 東有漁陽右北平遼西遼東 西有上谷代郡鴈門 南有涿郡之易容城范陽 北有新成故安涿縣良鄕新昌 及渤海之安次 樂浪玄菟亦宜屬焉」이라 하고, 같은 내용이 [전국책] 연1에도 「鮑本燕 東有漁陽右北平遼西遼東 西有上谷代郡鴈門 南有涿郡之易容城范陽 北有新城故安涿縣良鄉新昌 及勃海之安次 樂浪玄菟亦屬焉 〉 포본에 연은 동으로 어양․우북평․요서․요동이 있고, 서로는 상곡․대군․안문이 있고, 남으로는 탁군의 역․용성․범양이 있고, 북으로는 신성․고안․탁현․양향․신창 및 발해의 안차가 있고, 낙랑․현도도 연에 속한다」고 한다.
낙랑과 현도는 한 무제가 군현을 설치하기 전에는 조선이었다. 그렇다면 동정전에 연의 동에 조선과 요동이 있다 하였으므로 형식논리상 요동을 제외하고 나머지가 연과 조선이었다고 볼 수 있다.
연의 서쪽이 산서성 안문이고 대군은 동으로 그에 바로 인접해 있다. 따라서 요서의 서쪽이자 대군의 동쪽에 상곡이 있다는 뜻이다. [사기] 소진전에 「(서쪽의) 운중과 구원을 넘고, (동쪽의) 대와 상곡을 지나[踰雲中九原 過代上谷]」라고 하므로 연 장성의 서쪽 끝인 조양이 포함된 상곡은 역시 산서성 대의 동쪽임을 알 수 있다. 서부를 설명할 때는 동에 있는 운중부터 서쪽의 구원 또는 오원을 열거하고, 동부를 설명할 때는 서쪽의 대부터 동쪽의 상곡을 열거하고 있다.
그곳은, [사기] 소진전의 진개 동정전 연의 동남방 한계인 「南有呼沱易水 〉 남으로 호타․역수가 있다」는 구절에서 두 강의 발원지에 해당하는 오대산과 그 동부로서 하북성 중부 保定(보정)의 서쪽 정도로 볼 수 있다. 대략 지금의 산서성 五臺山(오대산) 일대부터 하북성 阜平(부평) 일대까지의 영역으로 볼 수 있다.
바로 이 오대산 인근에서 동북으로 달려 북경시 서북의 居庸關(거용관)을 지나고, 다시 북경시내 북을 돌아 천진시 북단 薊縣(계현)으로 뻗은 장성이 있는데 연 5군은 대체로 이 장성과 물려 있거나 장성의 남쪽에 위치한다(지도1참조).
상곡이 연의 서남방이라는 데는 또 다른 근거가 있다. [사기] 저리자감무전에 『燕秦不相欺者 伐趙 危矣. 燕秦不相欺無異故 欲攻趙而広河閒. 王不如齎臣五城以広河閒 請帰燕太子 與彊趙攻弱燕. 趙王立自割五城以広河閒. 秦帰燕太子. 趙攻燕 得上谷三十城 令秦有十一』
전국시대 조는 邯鄲(한단)을 중심으로 한 하북성 남부 冀州(기주)를 근거로 하였는데 「趙攻燕 得上谷三十城 〉 조가 연을 쳐서 상곡의 30성을 얻었다」고 하였으므로 기주를 근거로 하던 조가 연과 접경하던 곳은 기주의 바로 북쪽 상곡임을 알 수 있다. 중산이 소멸된 후에는 대략 지금의 定州(정주) 정도가 연과의 접경으로 추정된다. 정주의 서북으로 부평과 오대산 일대가 상곡군으로 비정되는 지역이다(지도1참조). 진개 동정전 (♠3)中山國(중산국)이 있던 곳은 연 상곡군의 남으로 인접한 지역이었고 그래서 중산국을 차지한 조가 자연스럽게 북으로 접한 연의 상곡군을 쳐서 빼앗았다는 것이다.
♠3 [전국책] 중산조에 「…中山 故鮮虞國 姬姓也…(중략)….杜預云 鮮虞白狄別種…」이라 하여 중산은 백적 선우국의 후예이다. BC414년에 中山武公(중산무공)이 수립한 후 BC407년에 魏(위)에게 1차로 망해 위의 속국이 되었다가 다시 20년 후에 桓公(환공)이 부흥시켜 90년 정도 유지하다가 BC296년에 조나라에 망했다 한다. 석가장시 북쪽 인근에는 중산국의 도읍이었던 靈壽(영수)와 최근 중산왕릉이 발굴된 平山(평산)이 있다.
지도7 진개 동정후 연오군
@ 이것이 일단은 실사적으로 해석한 진개 동정후의 연오군이지만
[한서] 지리지에는 오군을 진이 최초에 설치한 것처럼 기술돼 있어
연오군이란 존재 자체도 문제가 있는 것이다.
========= <2/2에 계속> ========= 위의 글은 아래 주소에 있던 것임.
http://kr.blog.yahoo.com/kahistory@ymail.com/27
[출처] 전국시대 연오군의 위치 - 1/2|작성자 산책
2012.08.22. 16:45
http://kahistory.blog.me/110145597291
전국시대 연오군의 위치 - 2/2
그런데 진개 동정전 연지 설명에서는 「燕東有朝鮮遼東」이라 하여 그 뒤에 오는 국명과 지명이 연이 아니었다는 식이지만, 동정후 설명에서는 「燕東有漁陽右北平遼西遼東 西有上谷代郡鴈門 南有涿郡之易容城范陽 北有新成故安涿縣良鄕新昌及渤海之安次 樂浪玄菟亦宜屬焉」이라 하여 열거된 지역이 연지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때 동서로는 군명을 열거하고 남북으로는 지명을 열거하였다. 즉 동정전 설명에서 요동이 실제로는 조선에 포함되듯이 동정후 설명에서도 뒤에 열거된 지명들은 앞에 열거된 군의 일부로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동정전에는 외부를 열거하며 안쪽이 연지라고 막연히 얘기하였고, 동정후에는 연지 자체를 군이름과 현이름으로 이중기술하여 영역이 아주 넓은 것처럼 기술한 점이다.
그래서 동정전후를 비교해보면 새로 설치한 5군 외에 대군과 안문군 정도밖에 없다. 그런데 [사기] 흉노전에 보면 안문․대군은 조의 무령왕이 北征(북정)한 후에 설치했다 하였다[而置雲中鴈門代郡]. 그런 안문․대군이 연지가 되려면 무령왕 몰후에 연이 조지를 빼앗았다는 얘기가 될 수 있겠지만 그런 기록은 안 보인다. 연이 설치했다던 5군 중에서 그 전부터 있던 지역은 오대산 일대의 상곡군 일부와 하북성 서북부 우북평의 일부가 있었을 것이다. 즉 진개 동정전 연지는 산서성 안문․대군 이북의 산서성 동북부와 하북성 서북부의 우북평 일부, 대군의 동으로 산서․하북에 걸친 상곡군 정도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연지와 조지에 겹치는 雁門(안문)과 代(대) 두 군은 연이 조에 빼앗긴 것으로 보인다. 연은 상곡의 30성도 조에 빼앗길 정도였기 때문이다.
지도8 진개 동정전 연지
@ 여기서 요수(영정하) 이남 요서는 실사로는 조선의 낙랑이었고(지명 遂城이 지금도 있다),
낙랑의 동쪽이자 황하 하류 북으로 발해만 서안은 조선의 예맥(예군 남려의 先)이었다.
이 발해만 서안의 조선 예맥은 진이 통일했을 때에도 진에 넘어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곳은 전한 무제 원삭원년(BC128)에 예군 남려가 28만 인을 이끌고 한의 세력권에 처음으로 편입되었기 때문이다.
시황이 통일했을 때 진의 일부였다면 한 고조가 통일했을 때에도 자연스럽게 한의 일부가 이미 되어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이 앞서 본 대로, 진개 동정전 연지가 今요서까지였다면 진개가 천리 동정한 대상이 어디였나 하는 것이다. 분명히 동호를 쳐서 천여리 물렸다[帰而襲破走東胡 東胡卻千餘里]고 하였다. [東有朝鮮遼東]이란 구절과 대조해 보면 조선(동호)을 천여리 물러나게 한 것인데 그들이 확보한 곳에 설치한 요동군을 보면 今요동반도까지 확보했다는 듯이 기술해 놓은 것이다. 그렇다면 진개가 확보한 지역은 형식논리상 今요동을 제외하고도 조선을 천리 밀어냈다고 말하는 것이니 원래 조선이 요서에 있었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東有朝鮮遼東]이란 구절은 트릭이라고 하는 것이다. 실사상 요동이 북경이므로
북경의 남쪽 요서가 바로 조선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런데 중인학자들이 그린 지도를 보면 요동반도를 넘어 조선을 대동강 이남으로 밀어낸 듯이 해석하고 있는 것 같다.
지도9 중인학자가 그린 전국시대 연
@ 연 장성이 청천강까지 들어와 있고 지금의 요서와 요동, 평안도 일부를 山戎(산융)이라 하고
조선과 호를 분리하여 보고 있다. 연이 밀어낸 동호를 산융으로 보는 셈이다.
그러면 연의 동에 조선이 있다고 한 기록이 이상해진다.
청천강 하류 북안에 滿番汗(만번한)이 있었다고 보고 있는데 요동군과 조선의 경계라는 뜻이다.
이 경우는 청천강을 패수로 보게 된다. 요동의 동에 高夷(고이)가 있는데
전한이 위만조선을 멸하고 사군을 설치하기 전에도 고구려가 있었다는 단편적인 기록을 의식하여 붙인 이름으로 보인다.
지도10 중인학자가 그린 전국시대 연
@ 지도9와 비슷한데 동호와 조선을 따로 보고 있다.
그러나 「東有朝鮮遼東」이라 하였으므로 동호가 곧 조선이었다.
분리하여 보는 시각은 우선 조선의 존재를 흐리게 하고,
후예가 나라를 부지하지 못한 세력을 기술할수록 조
선의 후예인 한인들의 연고권을 축소시킬 수 있는 수법이기 때문이다.
@ 예맥과 임둔, 진번을 그려 넣고 있는데 역시 조선과 분리하여 보고 있다.
이런 구도는 [후한서]와 [삼국지] 동이전의 위사구도 그대로인 것이다.
연의 障塞(장새)가 황해도 북단까지 뻗쳐있고 동정후에는 王險(왕험)조차 연에 포함된 것처럼 그려져 있다.
▶ [사기]나 [한서]의 列國分野(열국분야)라는 것은 전국시대의 국별 영토를 설명하되 하늘의 별자리를 지상에 투영하여 그 별자리 방향과 국별 영역을 대략 설명하는 형식인데, 연지는 통상 尾箕分野(미기분야)라 하면서 꼭 조선(현도․낙랑)을 끼워 넣고 있다. 그런데 이때의 현도․낙랑이 今요동반도와 반도의 평안도라면 이것은 범위를 벗어나도 한참 벗어난 것이다. 미기분야의 외곽은 기껏해야 북경 정도에 해당될 뿐이다. 하늘을 보면 둥근데 그것을 지상에 투영했을 때 대체로 둥그런 원형에 가까운 대륙에다 엎어놓고 설명하면 동북방 미기분야는 아무리 크게 보아도 今북경시를 벗어날 수 없으며 북경과 천진 동쪽의 실사상의 현도와 낙랑조차도 해당되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갖가지 억지논리를 구사하며 그 범위를 늘여 반도 서북부까지도 그 속에 구겨 넣고 있는 것을 누누이 볼 수 있다. 아니면 당시의 하늘에는 미기분야에 거대한 뿔이라도 났었다는 것인가?
실사대로 經度上(경도상) 천진~난하에 있었던 낙랑과 현도를 포함시키는 것도 무리인데 심지어는 요동반도, 평안도까지도 억지로 구겨 넣고 있는 것은 대륙사서의 위사성을 반증하는 근거가 되는 것 외에 다른 의미가 없는 것이다.
어양과 우북평, 요서, 요동, 대, 상곡, 안문 등 7개 군을 열거해놓고, 다시 남으로 탁군의 역과 용성, 범양 등과 북으로 신성과 고안, 탁현, 양향, 신창 및 발해의 안차 등의 지명들을 열거하고 있는데, 북으로 있다고 열거한 지명들 중 후대에 요동군의 지명으로 나타나는 新昌(신창)을 제외하면 탁군 속현까지 포함하여 전부 원래의 요서군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또 이상한 것은 북경 남쪽의 지명들을 자신들이 요동반도로 상정한 후대 요동군의 속현 신창과 같이 열거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신창이 요동반도의 지명이 아니라 북경 근방의 지명이라는 뜻이다. 위사를 쓰면서도 요동이 북경임을 알려주는 흔적은 남겨놓은 것으로 볼 수 있다.
[한서] 지리지 요동군조 『遼東郡 秦置. 屬幽州 戶五萬五千九百七十二 口二十七萬二千五百三十九 縣十八 襄平 有牧師官 莽曰昌平 新昌 無慮 西部都尉治 望平 大遼水出塞外 南至安市入海 行千二百五十里 莽曰長說 房 候城 中部都尉治 遼隊 莽曰順睦 遼陽 大梁水西南至遼陽入遼 莽曰遼陰 險瀆 居就 室偽山 室偽水所出 北至襄平入梁也 高顯 安市 武次 東部都尉治 莽曰桓次 平郭 有鐵官﹑鹽官 西安平 莽曰北安平 文 莽曰文亭 番汗 沛水出塞外 西南入海 沓氏』
치소인 襄平(양평) 다음으로 新昌(신창)이 기술되어 있다. 군이름과 현이름을 동격으로 열거한 것도 이중으로 기술한 것이지만 이 지명들 중 지금도 남아 있는 것들을 지도에서 보면 아래와 같다.
지도11 역, 용성, 신성, 고안, 탁현, 양향, 안차
@ 신창과 양평도 이 지역으로부터 멀지 않다는 뜻이다.
북경시내 서남(까만점)에 良鄕(양향)이 있고 오른쪽 끝 廊坊(낭방)에 安次區가 있다.
낭방의 서쪽에 고안이 있고 그 서쪽에 탁주(탁현)가 있다.
탁주의 남쪽에 新城(신성)이 있고, 그 서남에 容城(용성)이 있으며, 맨 서쪽에 易(역)이 있다.
앞에서 요서군이란 군이름은 이미 나왔으므로 뒤의 요서지역 현이름을 열거한 것은 이중기술이라는 것이다. 일종의 착시현상을 유도하는 것인데, 앞문장에서 요서군을 들고는 나중에 요서군에 해당되는 현명을 구체적으로 열거하면서, 요서군을 今요하 서쪽 요서로 인식시키려고 한 것이다. 그러면 요동은 자연히 今요동반도가 되고, 그 다음 어양군은 [한서] 지리지에 나오는 속현이름 평곡을 북경시내 동쪽에 붙여놓고 어양이 북경 동쪽인 듯이 하고, 우북평의 치소 무종이 후에 이름이 옥전으로 바뀌었다 하면서 천진 동북의 도시에 옥전이란 이름을 붙여놓으면 우북평은 자연히 천진의 동쪽 정도로 인식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을 실사와 비교하여 정리해 보면, 요수를 영정하에서 요하로 치환한 후 요서군을 기술하고 다시 원래의 요서군 속현이름을 열거하여 이중기술함으로써 북경 남쪽 요서군을 今요서로 보내버리고 이에 따라 북경에 있던 요동은 今요하의 동으로 따라서 옮겨지며, 원래 북경 서쪽인 우북평군은 그 치소 ‘무종>옥전’을 이용하여 천진 동쪽으로 밀어서 원래의 낙랑군을 덮어버리고, 어양군은 속현명 ‘평곡’을 이용하여 북경시 동부로 보이게 함으로써 원래의 요동군과 현도군을 대략 덮어버린 것이다.
결과적으로 앞에서 보았던 북경 남쪽의 요서는 요하 서쪽 今요서로 보내고, 북경의 요동군과 그 동북의 현도군은 요동반도로 보내고, 현도의 남이자 요동의 동남에 있었던 천진~난하의 낙랑군은 평안도로 보이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군들끼리의 상대적인 위치는 비슷하지만 고대거리로 무려 2천리 이상 동으로 밀어 보낸 것이다. 즉 古요수인 今영정하를 今요하로 치환한 거대한 위사구도가 이미 [사기]의 전국시대 연지에서부터 적용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고대사서 집필자들이 위사를 쓴 것이 아니고 근세 들어 특정시점에 전면 개작한 것이다(추후해설).
[사기] 흉노전에 『匈奴 其先祖夏後氏之苗裔也 曰淳維 唐虞以上有山戎[1] 獫狁 葷粥 居於北蠻 隨畜牧而転移...(후략). [1]正義左傳荘三十年 斉人伐山戎 杜預云 山戎 北戎 無終三名也. 括地志云 幽州漁陽県 本北戎無終子國』
주에 보면 [괄지지]에서 유주 어양현은 본래 북융 무종자국이었다 한다. 어양도 원래는 춘추시대 무종자국이었고, 우북평군의 치소가 무종이라 하므로 춘추시대의 무종자국이 전국시대에는 연의 우북평군이 되었다는 뜻이다. 즉 어양군도 원래는 북경 서쪽의 우북평의 현 정도이던 것을 군으로 만들어 북경 동쪽으로 돌려 요동군의 일부와 현도군를 대략 덮어버렸다는 것이다. 이렇게 군현들의 위치가 [한서] 지리지에서부터 위사로 기술되어 있는 것이다.
지도12 연오군과 어양군 (실사2)
@ [사기] 흉노전에 대한 [괄지지]의 주석에 따라 어양군을 삭제한 것이다.
전국시대 연․진의 군에는 속현들이 직접적으로 기술된 것이 없고, [한서] 지리지에 한의 군현을 설명하면서 진이 설치했다는 식으로 기술하고 있다. 이런 것을 보면 전국시대 연이 5군을 설치했다는 것도 사실은 위사로 보인다. 한대에 설치한 것을 전국시대까지 소급하여 연·진이 설치했다고 기술해놓은 것이다. 후대의 것을 선대의 것으로 시대를 소급하여 기술하는 위사수법이다.
또 연이 진에 망할 때의 상황을 보면 요동조차도 연지가 아니었던 것 같다.
[사기] 진시황 21년기(BC226) 『二十一年 王賁攻(薊)[荊]. 乃益發卒詣王翦軍 遂破燕太子軍 取燕薊城 得太子丹之首. 燕王東收遼東而王之. 王翦謝病老歸...(후략) 〉 21년 왕분이 (계)[형]를 쳤다. 그리고는 왕전군에 군사를 더 보내 마침내 연 태자의 군을 깨뜨리고 연의 계성을 취한 후 태자 단의 머리를 얻었다. 연왕은 동으로 요동을 취하여 왕노릇을 했다. 왕전을 늙고 병든 것을 핑계로 직을 사임하고 귀향하였다...(후략)』
여기서 왕분이 공격한 ‘(薊)[荊]’는 ‘薊(계)’가 아니고 ’荊(형)‘일 것이다. 이것을 楚(초)의 荊(형)이라 하지만 그게 아니고 연의 역현 서쪽에는 ‘荊’자가 들어간 紫荊關(자형관)이라는 요새가 있었다. 아마도 진군은 연의 수도 계성을 치기 전에 자형관을 먼저 친 것으로 보인다.
「燕王東收遼東而王之 〉 연왕은 동으로 요동을 취하여 왕노릇을 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당시 요동이 연지가 아니었음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다. 연지가 아닌 요동을 취하여 거기서 왕을 했다는 뜻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상식적으로 그 전부터 요동이 연의 영지였다면 단순히 요동으로 피하거나 후퇴하였다고 했을 것이다. 연이 조선을 동으로 천 리 밀어내고 상곡과 우북평, 요서, 요동, 어양 등 5군을 설치했다 하였지만 요수 건너 요동 즉 지금의 북경 일대조차도 연지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중문학자들도 이 구절을 「연왕이 동쪽으로 요동을 점령하고 그곳의 왕이 되었다」고 번역하고 있다〈사기본기/정범진외(역)/까치/1,999/p157〉」. 요동이 원래 연지였다면 「요동을 점령하고 그곳의 왕이 되었다」는 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이 번역서 중 ‘진시황본기’는 중문학을 전공한 남종진과 정수국 두 학자의 번역이라 한다. ‘거둘 收(수)’자에는 ‘잡을 捕(포)’, 거둘 斂(염)‘, 모을 聚(취)’, ‘취할 取(취)’ 등의 뜻이 있다. 즉 중문학자들도 ‘取하다’는 뜻으로 번역한 것이다.
그런데 참으로 기이하게도 한국의 주류사학자들은 이런 줄도 모르고 고조선이 반도서북부에만 있었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사서를 읽을 줄 모르거나 읽고도 의미를 모른다는 뜻이다.
지도13 연오군 (실사3)
@ 이 결과는 앞서 본 지도11의 연지 북부지역과 대체로 맞아떨어진다.
연의 북부는 요수(영정하)를 거의 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 요동을 보면 역시 지도12에서 어양군을 삭제한 것이 바른 해석임을 확인할 수 있다.
지도14 전국시대 (BC300 전후)
@ 영문으로 된 것을 보면 서양학자가 그린 것처럼 보이는데
진개 동정 후에도 지금의 요동이 朝鮮[조선;Chao·hsien]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 지도를 그린 학자는 겉보기나마 [사기]의 연지 관련 기사를 정확히 해석한 것이다.
진개 동정후에도 요동이 연이 아니라는 것을 바르게 지도에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개가 동호(조선)를 밀어냈다던 천리가 연과 조선 사이에 갈색 선으로 둘러싸여 있고
「since 300 to Yen 〉 BC300 이후 연에 넘어감」이라 하여 진개 동정시기를 BC300 정도로 본 것이다.
이 시기는 연 昭王(소왕;BC312~279) 시대에 해당된다.
@ 조지 역시 趙[조;Chao] 武靈王(무령왕;BC326~299)의 북정 후 편입한
임호와 누번의 융적지가 노란색 선으로 둘러싸여 있고
역시 「since 300 to Chao 〉 BC300 이후 조에 넘어감」이라고 되어 있다.
조지가 된 이 흉노들의 영역을 기원전에는 戎狄地(융적지) 또는 單于庭(선우정)이라 하다가
기원후 오환·선비들이 할거할 때는 鮮卑庭(선비정)이라 불렀다.
《 [삼국지] 오환선비전에 의하면 「鮮卑庭東抵遼水 〉 선비정은 동으로 요수와 닿아 있다」고 하는데 융적지(선우정·선비정)는 定襄(정양)과 雲中(운중), 九原(구원), 五原(오원) 등이라고 [사기]와 [한서] 등에 여러 차례 나온다. 그 중 가장 동부인 정양은 지금의 산서성 북부 大同(대동)과 朔州(삭주)라 한다. 산서성 북부 대동과 삭주의 동으로 닿아 있는 강으로는 永定河(영정하)의 상류인 桑乾河(상건하)밖에 없으므로 영정하가 바로 고대의 진짜 遼水(요수)인 것이다. 지금의 요하 서쪽 요서는 융적지(선우정)였던 적도 없고 선비정이 된 적도 없기 때문에 지금의 遼河(요하)가 절대로 요수일 수 없다는 것이다 》
어쨌든 이렇게 전국시대 연이 설치하기 시작한 요동․요서군이 당대에 이르기까지 그대로 이어졌다고 [통전] 주군전 안동대도호부조에서 밝히고 있다. 이것은 요동․요서의 위치가 달라진 적이 없다는 뜻이다.
[통전] 주군전 안동대도호부조 『安東大都護府 舜分靑州爲營州 置牧 宜遼水之東是也 已具注序篇 春秋及戰國並屬燕 秦二漢曰遼東郡 東通樂浪 樂浪本朝鮮國 漢元封三年 朝鮮人斬其王而降 以其地爲樂浪玄菟等郡 後又置帶方郡 並在遼水之東 浪音郞 晉因之. 兼置平州 領郡國五 州理於此 自後漢末公孫度自號平州牧 及其子康 康子文懿 並擅據遼東 東夷九種皆服事之 魏置東夷校尉 居襄平 而分遼東昌黎玄菟帶方樂浪五郡爲平州 後還合幽州 及文懿滅後 有護東夷校尉居襄平 晉咸寧二年 分昌黎遼東玄菟帶方樂浪等郡國五置平州 以慕容廆爲刺史 遂屬永嘉之亂 廆眾所推 及其孫俊 移都於薊 其後慕容垂子寶 又遷於和龍 廆 胡罪反 大唐置安東都護府 前上元中 移於所 今府於遼東城』
이 [통전] 州郡典(주군전)의 내용은 특정지역을 놓고 각 왕조별로 그 지역에 설치했던 행정구역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즉 안동대도호부가 설치된 요동은, 「<春秋及戰國並屬燕 秦二漢曰遼東郡 東通樂浪 樂浪本朝鮮國. 漢元封三年 朝鮮人斬其王而降 以其地爲樂浪玄菟等郡 後又置帶方郡 並在遼水之東(浪音郞). 晉因之 〉춘추 및 전국시대에도 연에 속했고, 진과 전․후한은 요동군이라 불렀는데 동쪽으로는 낙랑으로 통하고 낙랑은 본래 조선국이었다. 한 원봉3년에 조선인이 그 왕을 죽이고 투항하여 그 땅을 낙랑․현도 등의 군으로 삼았다. 후에 또 대방군을 설치하였는데 나란히 요수의 동에 있다. 진도 이어받았다」 하고, 당은 안동도호부를 두었는데 전상원중(676) 치소를 옮겨 지금은 부가 요동성에 있다고 하였다[大唐置安東都護府 前上元中 移於所 今府於遼東城].
요동군이 춘추 및 전국시대에도 연에 속했다는 말은 여태 보았다시피 당연히 거짓말이며 기록상 진개 동정후에 연지가 된 것으로 되어 있지만 따지고 본 바 이 역시 거짓말이라는 것을 위에서 이미 보였다. 그 후 진과 전․후한 모두 요동군으로 불렀고 그곳 요동성에 당대에는 안동도호부를 두기도 했다는 것이다. [구당서] 지리지에 의하면 최초 고구려수도 평양에 설치되었던 안동도호부를 676년 ‘遼東郡故城(요동군고성)’으로 옮겼으나 1년 후에 (신라에 쫓겨나) 新城(신성)으로 다시 옮긴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 신성은 요서 신성이다(지도11). 이후 다시 신성에서 平州(평주;노룡 즉 전한 요서군 비여 근방)로 옮기고 뒤에 또다시 遼西故郡城(요서고군성)으로 옮겨졌다가 至德(지덕;756~758))후에 폐지된 것으로 되어 있다. [통전] 주군전 안동대도호부조의 「今府於遼東城 〉 지금은 (안동)부가 요동성에 있다」는 말도 거짓말인 것이다. 通典(통전)의 편수는 766년에 착수되었다.
진개 동정전 연지 면적이 「方二千里」였다는 것도 과장일 것이다. 동에 있던 조선(낙랑)에 연의 장수 진개를 인질로 징구당할 정도로 약체였기 때문이다. 조선(낙랑)을 동으로 천 리 밀어내고 하북성 중부를 차지한 후 비로소 전국칠웅으로 겨우 명함을 내민 정도였다.
연이 강국이 된 것을 [사기]에서는 연소공세가 소왕 28년기(BC285)에 「二十八年 燕国殷富 士卒樂軼軽戦 於是遂以樂毅為上将軍 與秦楚三晉合謀以伐斉. 斉兵敗 湣王出亡於外. 燕兵独追北 入至臨淄 尽取斉宝 焼其宮室宗廟. 斉城之不下者, 独唯聊莒即墨 其余皆属燕 六歳」라고 한다.
연이 부강해져 다른 5국과 연합으로 산동의 제를 치고, 제의 왕이 도망을 가버리자 연나라 단독으로 제를 분탕질을 했다 한다. 이 소왕 28년(BC285)이 아마도 진개 동정 직후로 보이는데 동정시기는 BC300~290 정도로 추정된다.
아래 한중사학자들의 지도들을 비교해 보면 중국의 역사침략은 한인학자들이 자청해서 불러들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도15 한무제 이전 상황
@ 요동군이 평안북도까지 들어와 있다. 청천강을 패수로 보고 있고.
청천강 하류 북안 정도를 滿番汗(만번한)으로 보고 있으며 연 장성이 청천강 하구까지 뻗쳐있다.
또 조선과 동시대에 고구려가 있었다는 단편적인 기록을 의식하여 高夷(고이)를 기술해 두었는데
이것이 후에 현도군 고구려현으로 연결된다고 보는 것 같다.
지도16 한무제 이후 상황
@ 처음 조선이 소멸된 후 4군이 설치되었다가
얼마 후 현도와 낙랑 두 군으로 통폐합된 상황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연오군(까만점)이 북경 서북부터 동으로 평안남도에까지 뻗쳐 있다.
[한서] 지리지 요동군조에 조선의 수도라 하던 험독이 속현으로 포함돼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장성이 황해도 동북부까지 뻗쳐 있다.
조선과 임둔, 진번은 없어지고 부여와 옥저, 반도 남부의 辰國(진국)만 남았다.
동호를 오환과 선비라 부르고 있다.
왼쪽 아래에 보면 定襄(정양)과 雲中(운중)이 보이는데 정양은 單于庭(선우정)의 동부에 해당된다. 앞서 본 대로 고대의 요수는 선비정의 동부인 정양(산서성 대동·삭주)과 동으로 접하고 있었으므로 산서성의 북부를 지나가는 강이다.
지도17 조위시대의 상황
@ 조위시에는 후한의 요동속국의 현들 중에서 전한 요서군 속현 일부를 조합하여 창려군을 만들어
연오군에서 군이 하나 늘어난 셈이 된다.
@ 이 지도에서 이상한 것은 요동군의 서쪽 요서에 창려군이 있는데 그 가운데쯤 치소인 창려(빨간점)가 있는 것처럼 되어있고 난하 하류 동편의 요서군은 치소가 陽樂(양락)으로 되어있는데 지금은 창려가 이 지도의 양락 근방에 있다는 점이다. 海陽(해양)도 지금은 臨渝(임유;楡關)의 동에 있는데 여기서는 난하의 서쪽에 그려 넣고 있다. 이 지도의 지명 일부는 현재의 지명은 고려하지 않고 사서에 기술돼 있는 대로 적당히 그린 것이다.
@ 후한의 遼東屬國(요동속국)을 보면 이 지도의 창려군에서부터 시작하여 조선의 수도였다던 험독(한중학자들은 대동강평양으로 본다)까지 포함돼 있으니 이 얼마나 황당무계한 모양인가. [후한서] 군국지의 요동속국조에 「遼東屬國故邯鄉 西部都尉 安帝時以為屬國都尉 別領六城 雒陽東北三千二百六十里 昌遼故天遼 故屬遼西 賓徒故屬遼西 徒河故屬遼西 無慮有醫無慮山 險瀆[1] 房. [1]史記曰 王險 衛滿所都」라고 하는데 昌遼(창료)가 昌黎(창려)이며 험독의 주[1]에는 왕험이라고도 하면서 위만의 도읍이라 하였다.
@ 또 평안남도에는, [진서] 지리지 낙랑군조에 진 장성의 기점[遂城秦築長城之所起]이라 하던 낙랑군 遂城(수성)이 표시돼 있고 일제시대 일인학자가 난하 서편에 있던 것을 배로 실어다 놓은 신사비가 있는 黏蟬(점제)도 있으며, 列(口)도 표기돼 있다.
@ 이 지도와 지도13(연오군 실사3)을 비교해 보면 대륙사서의 위사성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요수를 영정하에서 요하로 치환한 위사효과인 것이다.
지도18 한인학자의 한사군 위치비정
@ 청천강 하류 북안에 보면 番汗(번한)이 보이고 청천강을 浿水(패수)로 보고 있어 중인학자의 지도15와 같다.
평안남도 해안 쪽에 黏蟬(점제)와 대동강 하구 쪽에 列口(열구)가 보이는데 중인학자의 지도17과 같다.
아마도 대동강을 列水(열수)로 보고 하구 근방에 열구현이 있다고 본 것 같다.
그래서 대동강의 상류를 보면 역시 청천강의 남쪽에 列水(열수)라고 표기하고 있다.
@ 이 지도에서는 황해도 동북에 遂城(수성)이 보이는데 ‘遂’자 한 자 같다고
황해도 遂安으로 찍은 것으로 진 장성이 이곳까지 뻗쳤다고 주장한 셈이 되고 지도16과 같은 것이다.
또 海州(해주)를 ‘海’자 한 자 같다고 海冥(해명)이라 하였다.
위의 학자뿐만 아니고 학계의 대부분을 차지하면서 通說(통설)을 좌우하는 주류학자들은 설들이 大同小異(대동소이)하다.
지도15~18을 대조해 보면, 중인들이 동북공정을 추진하면서 한인학자들의 논문과 책들을 대거 수거해 가서 참조한다 했는데, 역시 고조선과 한사군 관련한 설들은 중인학자들이 한인학자들의 설을 가져다 베낀 것으로 보인다. 말을 바꾸면 한인학자들이 무능하여 실사는 전혀 밝혀내지 못한 채 대륙사서의 위사대로 충실히 영토에 대한 역사적 연고권을 중인들에게 갖다 바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비록 학문의 영역에서 이루어진 過失(과실)일지라도 결과적으로 부지불식간에 심각한 賣祖賣族(매조매족)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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