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평요람 제150권 / 국조(國朝) [홍무제〔洪武帝〕
2018. 1. 19. 15:38ㆍ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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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평요람 제150권 / 국조(國朝)
[홍무제〔洪武帝〕]
[《고려사(高麗史)》 120권 〈윤소종전(尹紹宗傳)〉]
고려(高麗)의 대사성(大司成) 윤소종(尹紹宗)이 상서하기를,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어릴 때에 바른 길로 함양시킴은 성인(聖人)이 되는 공부이다.〔蒙以養正聖功也〕’고 하였습니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성품은 본디 착하고 악함이 없으니, 사람은 요순(堯舜)과 더불어 처음부터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 옛날의 성왕(聖王)은 진실로 태교(胎敎)를 받고 태어났으며, 강보(襁褓)에 싸여 있을 때에는 보육하는 사람이 있어서 그 신체를 보호하여 기거(起居)의 편의함을 알맞게 하고, 두려워서 삼가는 마음을 지니게 하였습니다. 또 스승이 있어 덕의(德義)로 가르쳐서 지나치게 즐겨하고 좋아함을 조절하고, 그릇된 견문을 방지하였습니다. 특별히 단아한 선비를 선발하여 함께 출입하고 기거하게 하였으므로 보는 바는 반드시 바른 일이었고, 듣는 바는 반드시 바른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외물(外物)의 유혹이 자연히 들어올 수 없고, 천성(天性)의 참됨이 제대로 함양될 수 있어 마음속에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곳이 깨끗하고 안정되어 가려짐이 없기 때문에 모두 요ㆍ순 같은 성군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신(臣)이 가만히 보건대, 전하(殿下)께서 《논어(論語)》를 받아 읽으신 지가 지금 13개월이 되었는데, 매일 새로 아는 것이라고는 많아야 3, 4자(字)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혹시 읽기가 어렵다고 하더라도 전하께서는 천부적으로 총명한 재주를 타고 나셨으니, 학문을 배움에 있어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아닙니다. 다만 전하께서 잠시 서연(書筵)에 행차하셨다가 사부(師傅)가 물러가지도 않았고, 음훈(音訓)이 통하지 않았으면서도 문득 글을 읽다가 벌떡 일어나서는 갑자기 식사할 때를 놓쳤다고 핑계하면서 번번이 내전(內殿)으로 들어가시니, 어떻게 전하의 학문이 진전되고 성덕(盛德)이 밝아지겠습니까?
상왕(上王)께서 처음에 즉위하셨을 때는 총명하시어 학문에 뜻을 두셨으나, 간교한 신하가 나라를 훔칠 계획을 세워 곧 강연(講筵)을 폐지하였으므로 우리 상왕을 그르치게 만들어서 거의 종묘사직을 전복시키게 되었습니다. 전하께서 왕위를 이어받은 처음에 대신(大臣)이 앞 조정의 일을 경계로 삼아 맨 먼저 경악(經幄)을 열어서 전하의 학문을 권면하여 요ㆍ순과 같은 성군이 되기를 기대하였습니다. 만일에 혹시 학문을 게을리 하신다면 종묘는 어떻게 할 것이며, 백성들은 어떻게 할 것입니까? 금년 7월 초하루에 태풍이 불어 곡식을 상하게 하여 나라와 백성의 대명(大命)에 위해를 끼쳤으니, 하늘의 견책(譴責)이 이보다 더 클 수는 없습니다. 홍범(洪範 《서경(書經)》의 편명(篇名))에 이르기를, ‘임금이 성스러움에 때에 맞추어 바람이 불고, 몽매(蒙昧)하매 언제나 바람이 불게 된다.〔曰聖 時風若 曰蒙 恒風若〕’고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학문을 게을리 하는 단서가 보이자 바람으로 재앙의 증험을 내린 것이니, 하늘이 전하께서 몽매하다고 경계하는 뜻이 매우 명백합니다.
옛날에는 8세에 소학(小學)에 입학하고, 10세가 되면 외부의 스승에게 취학하여 그곳에서 거처하였습니다. 옛날에 노 양공(魯襄公)은 나이가 겨우 6세이면서 천하의 제후(諸侯)들이 모이는 장소에 따라 나갔으니, 어찌 식사를 반드시 깊은 궁궐 안에서만 먹었겠습니까? 옛날에 정자(程子)가 강관(講官)이 되어 상서(上書)하기를, ‘임금이 하루 동안에 내시(內侍)나 궁첩(宮妾)을 가까이하는 시간이 적고, 어진 사대부(士大夫)를 접촉하는 시간이 많게 되면 자연히 기질이 변화하여 덕의 바탕이 이루어진다.〔人主一日之內 親侍人宮妾之時少 接賢士大夫時多 則自然氣質變化德器成就〕’고 하였습니다.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매일 아침 모후(母后 태후(太后))에게 문안을 드린 뒤에 편전(便殿)으로 나가시어 식사를 올리도록 명한 다음, 간관(諫官)과 관각(館閣)의 학사(學士)들에게 명을 내려 항상 좌우에서 모시고 조용하고 차근한 말로 도리(道理)를 설명하게 하십시오. 해가 지고 밤중이 될 때까지 하여 천명(天命)의 거취, 인심(人心)의 향배, 농사의 어려움, 변방 방비의 노고, 치란(治亂)의 근원, 흥망(興亡)의 자취, 고금(古今)의 예악(禮樂) 및 인물의 현부(賢否) 등을 날마다 어전(御前)에서 진술하게 하면, 주상의 들으심이 오래 축적되어 자연히 통달하게 되고 습관이 배어 천성을 변화시켜 요ㆍ순 임금과 덕행이 같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항상 깊은 궁궐 안에 계시면서 부녀자와 환관들의 사특함에 물들어 성스러운 덕이 변하여 몽매함이 되는 것에 비교한다면, 그 유익함이 어찌 대단히 크지 않겠습니까?
아첨으로 총애를 받는 측근들의 무례함은 실로 성스러운 덕을 해치는 잡초와도 같으며, 어진 사대부의 훌륭한 가르침이 유익함은 바로 성스러운 덕을 기르는 비나 이슬과도 같습니다. 무릇 궁인(宮人)과 내신(內臣) 역시 옛날 정자가 경연(經筵)에서 주달한 내용처럼, 나이가 40세나 50세 이상의 중후(重厚)한 사람을 선발하여 좌우에 대비시켜 놓고, 마땅히 나이가 젊은 자는 측근에 나오지 못하도록 하여 주상을 사특하고 사사로운 데로 인도하는 근원을 단절시키소서.
대궐 안에서 입으시는 의복과 기물은 은(殷)나라 주왕(紂王)의 옥배(玉盃)와 상저(象箸)로써 경계를 삼으시고, 옛날 우(禹) 임금이 거친 의복을 입은 것으로써 모범을 삼으소서. 영서연(領書筵)과 지서연(知書筵)은 옛날의 태사(太師)와 태부(太傅)에 해당하며, 시독(侍讀)은 옛날의 소사(小師)와 소부(小傅)에 해당합니다. 바라옵건대, 지금부터는 정전(正殿)에서 강독을 받으실 때 지서연이 들어오면 반드시 일어나서 앉았던 자리를 피한 다음에 강의를 들으시고, 그가 물러갈 때면 역시 일어나십시오. 시독이 들어오고 물러갈 때도 자리를 피하고 얼굴빛을 고치시어 사부에 대하여 존중하는 뜻을 보이소서. 이것이 이른바 ‘상(商)나라 탕(湯) 임금이 이윤(伊尹)에게 배우고 난 뒤에 그를 신하로 삼았기 때문에 힘을 들이지 않고 왕자(王者)가 되었으며,〔湯之於伊尹 必學焉而後 臣之故 不勞而王〕 제 환공(齊桓公)이 관중(管仲)에게 배우고 난 뒤에 신하로 삼았기 때문에 힘을 들이지 않고 패자(覇者)가 되었다.〔桓公之於管仲 必學焉而後 臣之故 不勞而覇者也〕’고 하는 것이니, 성스러운 덕을 양성함에 있어 이보다 더 급한 것은 없습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위로는 태조(太祖)께서 5백 년 동안을 전해주신 왕통(王統)을 생각하시고, 아래로는 삼한(三韓)의 수많은 백성들이 주상을 향하여 바라봄을 생각하소서. 그래서 하찮은 신이 간곡히 드리는 말씀을 죄주지 마시고 살펴 받아들여, 수양하고 반성하여 천만 년의 태평성대를 열게 하신다면 말할 수 없이 다행스럽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시독 정도전(鄭道傳)이 윤소종이 올린 소장(疏章)의 말미에 덧붙여 쓰기를, “문사(文詞)가 온화하고 쉬우며 의론이 적절하고 지극하여 진실로 군주에게 고하는 격식을 얻었으니, 【6】 이른바 군주를 어질고 의로운 데로 인도하였다고 할 만한 것입니다. 마땅히 전하께서 왕위에 오르신 이후로 신하들의 상서(上書)와 상소(上疏) 중에서 첫째로 손꼽을 만합니다. 전하께서는 매일 서연에 나가서 한 차례씩 강독하도록 명하여 한갓 똑똑히 들을 뿐만 아니라, 또 몸소 행하고 정성을 가지게 되면 전하께서 학문을 하는 방도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또 연달아서 아뢰기를, “옛사람의 말이 방책(方策)에 실려 있는 것은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도 그 글을 읽고서 상상(像想)을 하며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하물며 지금 윤소종이 말한 것은 모두가 전하께서 마땅히 실행하셔야 될 것들이니, 강학(講學)하는 여가에 한둘의 시학(侍學)과 더불어 강독하게 하여 실행하신다면 진실로 전하께 다행스러움이 될 것입니다. 옛날 주 성왕(周成王)은 나이 어린 자질로써 능히 주공(周公)의 가르침을 실행하여 마침내 훌륭한 임금이 되었습니다. 전하의 신하들 중에는 비록 주공과 같은 성자(聖者)가 있지 않으나, 만약에 능히 여러 신하들의 말을 들어 좇으신다면, 또한 오늘날의 성왕(成王)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7】
[《고려사(高麗史)》 78권 〈식화지(食貨志) 전제(田制) 녹과전(祿科田)〉ㆍ111권 〈문익점전(文益漸傳)〉]
고려(高麗)의 대사헌(大司憲) 조준(趙浚) 등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가만히 생각건대, 사전(私田)은 사삿집〔私門〕에는 이익이 될 것이나 나라에는 도움이 되지 않으며, 공전(公田)은 나라에도 이익이 되고 백성들에게도 매우 편리한 제도입니다. 사삿집에 이익이 되기 때문에 겸병(兼倂)이 일어나고, 이로 말미암아 용도(用度)가 부족하게 됩니다. 반대로 나라에 이익이 되면, 창고가 가득 차서 나라의 용도가 풍족하게 되고, 쟁송(爭訟)이 그쳐 백성들이 안정될 것입니다. 나라를 가진 자는 마땅히 토지의 경계를 정하는 것으로 어진 정사를 베푸는 시작을 삼아야 할 것인데, 어찌 겸병의 문을 열어 백성들로 하여금 도탄(塗炭)에 빠지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무릇 토지란 사람을 기르는 근본인데, 오히려 사람을 해치는 도구가 되어 버렸으니, 사전의 폐해가 이처럼 극도에 이르렀습니다. 다행히 하늘이 나라를 도와서 일찍이 세상에서 보기 드문 오래된 폐단을 제거하였습니다. 사전을 개혁하여 공전으로 회복시킨 이해(利害)가 분명한데, 대대로 나라의 녹봉을 받는 신하와 문벌이 높은 집안은 오히려 폐단이 되는 풍습을 따라 말하기를, ‘본조(本朝)에서 성립된 법을 하루아침에 갑자기 개혁할 수는 없는 일이며, 진실로 이를 개혁한다면 사군자(士君子)의 생계가 날로 군색해져서 반드시 공장(工匠)과 상고(商賈)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고 하면서, 근거 없는 말을 퍼뜨리어 인심을 선동하여 여러 사람들의 귀를 현혹시키고, 사전을 회복시켜서 자신들의 부귀를 보전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것이 한 집안의 계책으로 삼기에는 잘하는 일이겠지만, 사직(社稷)과 백성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만약 사전을 회복시킨다면 이는 삼한(三韓)의 백만 민중을 기름불 속으로 밀어 넣는 일과도 같습니다.
지금 나라가 잘 다스려지기를 도모하면서 도리어 백성들에게 걱정을 끼치는 것이 옳겠습니까? 가만히 생각하건대, 마땅히 경기(京畿) 땅은 사대부로서 왕실(王室)을 호위하는 자들의 전지로 만들어서 그들의 생계를 돕고 그들의 생업을 후하게 하십시오. 그 나머지는 모두 개혁해 없애서 공상(供上)과 제사의 용도에 충당하여 녹봉과 군수(軍需)의 비용을 넉넉하게 하십시오. 그리고 겸병의 문을 막고 쟁송(爭訟)의 길을 근절시켜 영원한 영전(令典)으로 정하소서.”라고 하였다.【8】
우사의(右司議) 오사충(吳思忠)과 내사사인(內史舍人) 이서(李舒), 간관(諫官) 이준(李竴) 등이 또 상소하여 아뢰기를, “사전을 회복시키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고 하니, 좌사의(左司議) 문익점(文益漸)이 이색(李穡)ㆍ이림(李琳)ㆍ우현보(禹玄寶)에게 붙어 병을 핑계하고 서명하지 않고서 이튿날에 곧바로 서연(書筵)에 나아갔다. 조준이 탄핵하여 아뢰기를, “문익점은 본래 시골 유생으로서 진주(晉州)의 궁벽한 산골에서 몸소 농사를 지었는데, 현량(賢良)으로 뽑아서 간의대부(諫議大夫)에 임명하여 임금의 측근에 두고서 자문에 응하도록 하였습니다. 진실로 충성스런 말을 남김없이 올리고 치도(治道)를 널리 개진하여 훌륭하게 다스리도록 보필하여야 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물쭈물하며 비굴하게 남의 비위나 맞추어 간쟁(諫爭)하는 절개가 없고, 오히려 몸을 굽실거리며 손을 묶은 듯이 남에게 순종만 하고 있습니다.
지난번에 동료 오사충과 이서가 각각 상소하여 당시의 일에 대해 매우 잘 말하였으나, 문익점은 녹(祿)을 잃을까 걱정하여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또 동료 낭관(郎官)들이 연명으로 상소하여 전제(田制)에 대해 논의하였는데, 문익점은 권세에 아부하여 병을 핑계하고 참여하지 않고서 스스로 잘한 계책이라고 여겼습니다. 이는 위로는 전하께서 사람을 알아보시는 현명함에 누(累)를 끼치고, 아래로는 사림(士林)들의 기대를 저버리는 일입니다. 마땅히 그의 관작을 삭탈하고 산야(山野)로 돌려보내서 말할 책임이 있으면서 말하지 않는 자의 경계로 삼도록 하소서.”라고 하니, 즉시 문익점의 관직을 파면하였다.【9】
[《고려사(高麗史)》 137권 〈창왕전(昌王傳) 원년조〉]
유구국(琉球國)의 중산왕(中山王) 찰도(察度)가 고려(高麗)에 사신을 보내어 왜구(倭寇)에게 사로잡혀 갔던 사람들을 돌려보냈다. 폐위된 창왕(昌王)이 전객령(典客令) 김윤후(金允厚)와 부령(副令) 김인용(金仁用)을 보냈는데, 그 답서(答書)에 이르기를, “우리나라는 귀국(貴國)과 바다를 사이에 두고 멀리 떨어져 일찍이 왕래를 못하였으나, 그동안 그대의 훌륭한 명성을 듣고 존경하여 사모한 지가 오래 되었습니다. 이제 사신을 보내면서 서신(書信)과 함께 좋은 선물까지 보내고, 잇달아 사로잡혀 갔던 본국(本國) 사람을 돌려보내니, 고맙고 기쁜 심정을 말로 다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보내주신 사신에게 예법(禮法)을 갖추어 잘 대접하지 못하여 참으로 미안하기 그지없습니다.
이제 전객령 김윤후 등을 보내어 부족하나마 감사의 표시를 하니 사정을 잘 살펴 주기 바랍니다. 보내온 서신에 이르기를, ‘사로잡혀 간 사람들을 내년에 모두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허락한다.’고 하니, 더욱 큰 기쁨을 느낍니다. 바라건대 김윤후 등이 돌아올 때에 데리고 나오게 하여 그들의 부모처자로 하여금 온 가족이 모두 모이게 한다면 대단히 다행스러운 일이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11】
[《고려사(高麗史)》 91권 〈양양공왕서전(襄陽公王恕傳)〉ㆍ115권 〈이숭인전(李崇仁傳)〉ㆍ120권 〈윤소종전(尹紹宗傳)〉]
고려(高麗) 폐위된 창왕(昌王)이 사헌부(司憲府)에 명하여 순군부(巡軍府)ㆍ전법사(典法司)와 함께 영흥군(永興君) 왕환(王環)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잘 살펴서 증거를 세우게 하였다. 왕환은 본래 종실(宗室)의 먼 족속으로, 처남인 신순(辛恂)이 신돈(辛旽)에게 빌붙었다가 신돈이 주살되자, 왕환이 그 일에 연좌되어 무릉도(武陵島 지금의 경상북도 울릉군)로 귀양을 가서 생존해 있는지 죽었는지를 알지 못한 지가 19년이나 되었다. 그의 아내 신씨(辛氏)가 왕환이 유배지로 가다가 태풍에 표류되어 일본국(日本國)에 이르렀다는 소문을 듣고, 도당(都堂)에 청하여 사사로이 금은(金銀)을 마련해서 가노(家奴)로 하여금 일본에 가는 회례사(回禮使)를 따라가 물색하게 한 것이 두서너 번이나 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그 가노가 이른바 왕환이란 자를 함께 데리고 왔는데, 사람됨이 매우 어리석고 얼굴 모양이 같지 않으며, 말도 많이 잊어버려서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이름과 성씨며, 살았던 동리(洞里)까지도 알지 못하였다. 왕환의 아내 신씨의 아우 전(前) 판사(判事) 신극공(辛克恭)과 그의 인척(姻戚)인 전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박천상(朴天祥), 전 밀직부사(密直副使) 박가흥(朴可興), 지밀직(知密直) 이숭인(李崇仁)ㆍ하륜(河崙)이 말하기를, “우리들이 왕환을 매우 잘 아는데, 이 사람은 실제 왕환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신씨가 경산부(京山府)에서 와서 보고는 매우 기뻐하며 말하기를, “남들이 아는 것이 어찌 아내가 아는 것과 같겠는가?”라고 하고, 마침내 사헌부에 소송을 제기하였다.
사헌부에서 종실과 박천상 등을 모아서 대질시켜 분별하였다. 영흥군의 두 아들과 그의 형인 승려 참수(旵髓) 및 종실의 여러 군(君)들이 모두 말하기를, “진짜 영흥군이다.”라고 하니, 박천상 등을 탄핵하여 무고죄(誣告罪)로 처벌하였다.【12】 이숭인이 도망쳤으므로 옥졸(獄卒)은 이숭인의 아들 이차약(李次若)의 두 손을 뒤로 결박하고 이숭인을 찾아내라고 채찍으로 등을 때리니, 피가 흘렀다. 이현(梨峴) 고개를 지나다가 마침 우리 태조(太祖)를 만나자, 옥졸이 이차약을 길가의 집에 숨겼다. 이차약이 큰 소리로 부르짖으며 말하기를, “원컨대 영공(令公 이성계(李成桂))께서는 나를 살려 주시오.”라고 하였다. 태조가 놀라서 불러 물어보고는 옥졸에게 말하기를, “어찌 아들에게 그 아비를 찾아내라고 강요할 수 있느냐?”라고 하면서 즉시 풀어줄 것을 명하였다. 또 종자(從者) 한 사람을 시켜서 이차약을 집으로 데려가게 하였다.
이에 시중(侍中) 이림(李琳)과 더불어 창왕에게 아뢰기를, “왕위에 오르신 처음에는 마땅히 너그럽고 어진 정사(政事)를 베풀어야 할 것이오니, 박천상 등을 사면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숭인은 서연(書筵)에서 모시고 강의하며 성의를 다해 보좌한 지가 오래되었으니, 그 직무에 힘쓰도록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박천상 등 4인은 먼 지방으로 유배시켰으며, 이숭인은 바로 서연에 나가 시강하게 하였는데, 사헌부에서 또 탄핵하였다.【13】 이때에 윤소종(尹紹宗)은 이숭인의 뛰어난 재주를 질투하고, 또 이색(李穡)이 이숭인을 칭찬하면서 자기를 칭찬하지 않는 것을 시기하여 갖은 방법으로 참소하고 헐뜯었다.【14】
[《고려사(高麗史)》 137권 〈창왕전(昌王傳) 원년조〉]
고려(高麗)의 폐위된 창왕(昌王)이 교서(教書)를 내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 이성계(李成桂)는 문무의 지략과 장수의 재주로써 조정에 들어와 삼공(三公)의 반열에 참여하였고, 외직으로 나가서는 병사들을 잘 거느렸도다. 지난 기해년(己亥年, 1359)에 군사를 지휘하기 시작한 이후로 30년 동안 크고 작은 여러 차례의 전쟁에서 이르는 곳마다 반드시 승리하였다. 큰 승첩으로 말하자면, 신축년(辛丑年, 1361)에 관적(關賊 홍건적(紅巾賊))이 경성을 침범하여 임금이 개경(開京)을 떠나 피난하였는데, 경(卿)은 대상(大相)을 보좌하여 흉악한 도적들을 섬멸시켜 개경을 회복시켰다. 또한 오랑캐 납합출(納哈出)이 우리 동북쪽 변방을 침범하였을 때에 여러 장수들이 패하여 달아나자, 적들이 승리한 기세를 타고 갑자기 고주(高州)의 경계까지 이르렀는데, 경은 싸우지도 않고 군사를 신속하게 이끌어 적들을 국경 밖으로 축출하였도다.
계묘년(癸卯年, 1363)에는 충선왕(忠宣王)의 서자인 덕흥군(德興君 왕혜(王譓))이 군사를 일으켜 서쪽 변방〔의주(義州)〕으로 들어오자, 경은 경기(輕騎)를 인솔하여 그들의 날랜 선봉을 꺾었다. 정사년(丁巳年, 1377)에는 왜구(倭寇)가 해주(海州)에 침입하자, 여러 장수들이 도망쳤으나 경은 혼자서 군사들의 선봉이 되어서 다 섬멸시켰다. 경신년(庚申年, 1380)에 왜구가 진포(鎭浦 지금의 충청남도 서천군)에서 바닷가를 따라 내려와 양광도(楊廣道)ㆍ경상도(慶尙道)ㆍ전라도(全羅道)의 경내를 멋대로 돌아다니면서 군읍(郡邑)을 분탕질하고, 사녀(士女)들을 죽여 세 도(道)가 소란하고, 원수(元帥) 배언(裴彦)과 박수경(朴修敬) 등이 패전하여 모두 죽었다. 그런데도 경은 만 번 죽을 각오로 일생을 돌아보지 않는 계책을 내어 휘하(麾下)의 장졸들을 거느리고 인월역(引月驛 지금의 전라북도 남원시 인월면)에서 일전을 벌여 왜구들을 남김없이 포획하였으므로 백성들이 그에 힘입어서 편안하게 되었도다.
경이 군사를 출동시킬 때에는 번번이 기율(紀律)을 준수하여 조금도 불법을 범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군사들은 경의 위엄을 두려워하고, 백성들은 경의 은덕을 생각하였으니, 비록 옛날의 유명한 장수라 할지라도 어찌 이보다 더할 것인가? 경의 위대한 공적이 사람들의 귀로 듣고 눈으로 본 데에 있는 것이 이처럼 환하게 빛나는데, 스스로 뽐내지 않고 겸연쩍게 여겨 겸손하였으니, 나라 사람들이 더욱 의탁하여 소중히 여기도다.”라고 하였다.【15】
고려(高麗)의 폐위된 창왕(昌王)이 친히 명(明)나라에 입조(入朝)하려고 영삼사사(領三司事) 홍영통(洪永通), 판문하사(判門下事) 이색(李穡), 판삼사사(判三司事) 심덕부(沈德符), 문하평리(門下評理) 설장수(偰長壽), 후덕부윤(厚德府尹) 이종학(李種學)을 종행관(從行官)으로 삼았다. 이색이 아뢰기를, “요동(遼東) 들판은 추위가 심하오니, 마땅히 일찍 출발하여야 됩니다.”라고 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창왕의 어머니 이씨(李氏)가 임금의 나이가 어린 것을 가엾게 여겨 도당(都堂)에 말하여 출발을 중지시켰다.
윤승순(尹承順)과 권근(權近)이 명나라 경사에서 돌아오는 편에 예부(禮部)에서 황제의 칙지(勅旨)를 받들어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자문(咨文)을 보냈는데, 그에 이르기를, “홍무(洪武) 22년(1389) 8월 초8일에 예부상서(禮部尙書) 이원명(李原明) 등 관리가 봉천문(奉天門)에서 삼가 황제의 칙지를 받았는데, 그에 이르기를, ‘고려가 안으로 사건이 많아 배신(陪臣)이 된 자 가운데 충신과 역적이 섞여 있으니, 하는 일이 모두가 좋은 계책이 아니다. 임금의 자리에 있는 왕씨(王氏)가 시해(弑害)를 당하여 후사(後嗣)가 끊어진 뒤부터 비록 가짜 왕씨인 이성(異姓)을 임금으로 삼았으나, 그 역시 삼한(三韓)을 대대로 지켜내려 갈 좋은 계책이 아니다. 옛날에도 임금을 시해한 역적이 있었지만, 이는 임금의 죄악(罪惡)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하였기 때문이다. 무릇 임금을 시해한 자가 비록 난신적자(亂臣賊子)이긴 하지만, 어진 정치를 베풀어 하늘의 뜻을 돌려 백성들을 편안하게 한 경우도 있었다.
지금 고려의 배신들은 은밀히 모의하고 자꾸 속이어서 아직까지도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있으니, 설사 반역(叛逆)으로 얻었을지라도 반역으로 지키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만약에 반역하는 것으로 떳떳함을 삼는다면 반역하는 신하가 계속 이어져 그것을 일삼을 것이다. 이는 모두 맨 처음에 반역한 자가 그렇게 하도록 가르친 것이니, 또 무엇을 원망할 것인가? 예부에서는 이문(移文)을 동자(童子)에게 먼저 보내 경사에 올 필요가 없다고 하여라. 과연 어질고 슬기로운 배신이 제 자리에 있어 임금과 신하의 명분을 정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할 계책을 나라에 세운다면, 비록 수십 년 동안을 입조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또한 무엇을 걱정할 것이며, 해마다 와서 조현(朝見)한다고 하여도 또 어찌 싫어하겠는가?’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17】
[《고려사(高麗史)》 45권 〈공양왕세가(恭讓王世家) 총서(總序)〉ㆍ〈공양왕세가(恭讓王世家) 원년조〉ㆍ115권 〈이숭인전(李崇仁傳)〉ㆍ〈이색전(李穡傳)〉ㆍ137권 〈창왕전(昌王傳) 원년조〉]
고려(高麗)의 간관(諫官) 오사충(吳思忠) 등이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이숭인(李崇仁)을 탄핵하기를, “전(傳)에 이르기를, ‘신하가 되었을 때에는 임금에게 공경하고, 자식이 되었을 때에는 부모에게 효도하여야 한다.〔爲人臣 止於敬 爲人子 止於孝〕’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치 않는 천하의 떳떳한 법(法)이니, 진실로 신하와 아들이 되어 효도하지 않고 공경하지 않는다면, 그 죄가 이보다 더 클 수는 없습니다. 부모의 상(喪)을 당하여 3년을 채우지 않고서는 과시(科試)를 주관할 수 없는 것이 나라의 제도입니다. 그런데도 이숭인은 산기상시(散騎常侍)가 되었을 때 어머니 상을 당하였는데도 감시(監試)의 시관이 되겠다고 요청하였습니다. 결국 조복(朝服)을 입고서 시관 노릇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산기상시의 높은 관직을 낮추고 상호군(上護軍)의 낮은 관직을 요구하여 그 과시를 주관하였습니다.
또 어머니가 사망하여 겨우 1백 일이 지나서 태연스럽게 고기를 먹으며 인륜(人倫)의 기강을 허물어뜨렸으니, 이것이 바로 불효(不孝)입니다. 시중(侍中) 이색(李穡)이 천하에 명망이 있는 자로서 질병을 참고 견디며 명(明)나라에 입조(入朝)하였는데, 이숭인이 따라가서 자신이 직접 물건을 사고팔기를 장사꾼과 같이 하였으므로 중국의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 삼한 사대부(士大夫)의 면목에 침을 뱉게 하였습니다. 비록 옛 위(魏)나라의 조식(曹植)처럼 일곱 걸음을 걷는 동안에 시(詩) 한 수(首)를 짓고, 입으로는 요순(堯舜)의 말씀을 외운다고 할지라도 진실로 이른바 소인배 유생이라 할 것입니다. 어찌 시독(侍讀)으로 삼아 전하(殿下)의 곁에 둘 수 있겠습니까?
근자에 이르러서는 종친(宗親 영흥군(永興君) 왕환(王環))을 무함하여 부자ㆍ형제ㆍ부부(夫婦)의 큰 윤리를 무너뜨리려고 하다가 진상이 드러나고, 말이 궁색해지자 어명(御命)을 어기고 숨었는데, 전하께서는 그를 시독이라는 이유로 특별히 사면하여 죄를 묻지 말게 하셨습니다. 또 서연(書筵)에서 시강(侍講)하라는 조서를 내려 두터운 예(禮)로 대우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숭인은 천지와 같이 포용하시는 은혜를 알지 못하고 한 달이나 지체하면서 즉시 나아가 사은(謝恩)하지 않았으니, 그 불경(不敬)함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있겠습니까? 항상 지켜야 될 도리를 무너뜨리고 풍속을 어지럽힌 것은 제왕(帝王)이 용서하지 못할 바입니다. 원하옵건대, 헌사(憲司)로 하여금 죄를 자세히 살펴 엄중히 다스리게 하여 멀리 변방으로 귀양을 보내어 부모에게 효도치 않고 임금에게 불경함과 나라를 욕되게 한 죄를 징계토록 하소서.”라고 하니, 폐위된 창왕이 그 소장(疏章)을 사헌부에 내려 그의 죄를 캐묻게 하였다. 이숭인이 또 도망치자 수색해 체포하여 경산부(京山府)로 귀양을 보냈다.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 권근(權近)이 상서(上書)하기를, “무릇 이숭인이 불효하다고 말하는 것은 그의 어머니가 죽고 나서 3년 안에 시관(試官)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시에 그의 아버지 이원구(李元具)는 이미 늙고 병들어서 생전에 그 아들이 과시(科試)를 주관하는 영화(榮華)를 보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에 나라에서는 이숭인의 재능을 중히 여기고, 이원구의 뜻을 불쌍히 여겨 감시(監試)를 주관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만약 이숭인이 진실로 사양하였다면 이는 죽은 어머니가 있다는 것만 알고, 살아 있는 아버지가 있다는 것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에 대한 비방을 면하고자 한다면 그 아버지의 뜻을 돌보지 않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마음이 편하지 못하였어도 힘써 시관의 직무에 나아갔던 것입니다. 이것이 비록 허물이 있겠지만, 공자(孔子)께서 이른바 ‘허물을 보면 그 어진 것을 안다.〔觀過 知仁者也〕’고 한 것이오니, 이는 진실로 효자의 불행스러운 일이지, 불효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지금 벼슬살이하는 자 가운데도 간혹 부모가 모두 사망한 지 3년 안에 높은 관직에 올라 부사(府司)에 앉아서 사람에게 형벌을 가하고 사람을 죽이면서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자도 있으니, 이러한 사람들은 부모가 모두 죽었으니 누구를 위한 것이겠습니까? 오직 자기를 위한 것일 뿐입니다. 아버지를 위하여 어머니께 미안한 일을 한 것이 오히려 불효가 된다면, 자기를 위하여 부모를 잊는 것이 효도가 될 수 있겠습니까? 이숭인을 불충(不忠)하다고 말하는 것은 그가 영흥군(永興君)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가리는 일 때문이었습니다. 이미 주상의 명을 받았으면 마땅히 즉시 나아갔어야 하는데, 지체하면서 나아가지 않고 숨어 피하기까지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숭인은 대신(大臣)이고, 영흥군이 진짜인지 가짜인지에 대한 분별은 말을 잘못한 작은 실수인 것입니다. 전일에 헌사(憲司)에서 상서하여 ‘대신은 법을 범하였을지라도 형리(刑吏)에게 보내어 곤욕을 당하게 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자, 전하께서 그렇게 여겨 판격(判格)으로 정하셨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이숭인은 전하의 판지(判旨)만 믿고 곧바로 나아가 변명하지 않았던 것인데, 헌사에서 성을 내어 추궁하고 잡아오게 한 뒤에야 판지가 족히 믿지 못할 것을 알고서 형세가 궁하고 일이 급박하여 숨어서 피신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비록 겁이 많고 마음이 약한 짓이기는 하지만, 또한 일을 처리함이 도리를 잃어 그를 놀래고 두렵게 한 것이니, 이는 이숭인이 마음에 불충한 생각을 품고서 주상의 명령을 거역한 것이 아닙니다. 작위(爵位)를 회복하게 된 뒤에 즉시 나아가서 사은(謝恩)하지 않은 것은 진실로 헌사를 두려워한 것이니, 역시 주상의 명령에 대한 불경(不敬)은 아닙니다.
중국에 사명(使命)을 받들고 가서 자신이 직접 물건을 사고팔고 하였다는 일로 그가 비방을 받게 된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이숭인과 사이가 좋지 않은 자가 있어서 이러한 말을 만들어 그를 무함하여 헐뜯었던 것인데, 듣는 자들은 한갓 비방하는 자의 말만 믿고 이숭인의 행실은 믿지 않으니, 이 또한 얼마나 편파적인 일입니까? 우리나라가 명나라를 섬긴 이래로 표전문(表箋文)과 사명(詞命)은 대부분 이숭인의 손에서 나왔습니다. 공민왕(恭愍王)께서 시호(諡號)를 얻고, 상왕(上王)께서 봉작(封爵)을 이어받으시고, 해마다 바치는 금은(金銀)과 마포(馬布)를 면제 받게 된 것도 모두 이숭인의 힘입니다. 황제가 누차에 걸쳐 문장(文章)의 아름다움을 칭찬하면서, 우리나라에 인물이 있다고 말한 것도 이숭인의 공이었습니다.
이숭인의 문장은 간결하고 고상하여 세상에 드물게 뛰어났고, 중국에서도 그 만한 인물이 드뭅니다. 의론을 제기하는 자들은 도리어 소인(小人)들이 음험하게 헐뜯는 말만 믿고 감히 대악(大惡)의 죄를 씌우니, 어찌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의론을 제기하는 자들이 또 말하기를, ‘이숭인은 글을 읽어 이치를 통달하여 본디 대단한 명성(名聲)이 있으므로, 다른 무지(無知)한 사람과 동일하게 취급하기는 어려우니, 죄를 저지른 것이 비록 작다고 할지라도 마땅히 극형(極刑)에 처해야 된다.’고 하는데, 어찌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 이처럼 심합니까? 의리를 알지 못하여 나라에 도움이 없는 자가 죄를 범한 바가 있으면 일일이 들추어 책망할 것이 못된다고 하면서 항상 용서하여 보호해줍니다. 반면에 문장에 능통하여 나라에 유익함이 있는 자에게는 조금이라도 의심된 점이 있으면 용서할 수 없다고 하면서 반드시 추궁하여 죄에 빠뜨린다면, 이는 후학들이 모두 구차히 죄를 모면하기 위해 염치없는 사람이 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애를 쓰고 힘을 써서 경서(經書)를 깊이 연구하고 이치를 통달하여, 헛된 명성이나 얻고 실제로는 화(禍)를 당하는 짓을 하려고 하겠습니까?
삼가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신(臣)의 이 글을 유사(有司)에 내리시어 그 비방한 자를 추궁하고 힐책하여 이숭인의 치욕을 씻어 주도록 하소서. 맹자(孟子)가 변명해주지 않았다면 광장(匡章)은 불효(不孝)가 됨을 면하지 못하였을 것이며, 같은 부서의 낭관이 돌아오지 않았다면 직불의(直不疑)는 금(金)을 도둑질한 누명을 면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비방함을 당하였다고 하여 이숭인을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전하께서 만약 신의 말이 옳지 않다고 여기신다면 마땅히 유사에게 넘겨, 신이 이숭인과 한패거리가 되어 주상을 속이는 죄를 바로잡도록 하소서.”라고 하였다. 대사헌(大司憲) 조준(趙浚)은 이때 상중(喪中)에 있으면서도 벼슬길에 나아갔기 때문에 부모가 모두 사망한 지 3년 안에 높은 관직에 올라 부사(府司)에 앉았다는 등의 말이 자기에 대한 발언이라고 여겨 깊은 원한을 품었다.【23】
고려(高麗)의 폐위된 창왕(昌王)이 김저(金佇)ㆍ조방흥(趙方興)을 순군옥(巡軍獄)에 가두었다. 김저는 본래 최영(崔瑩)의 조카로서 최영을 따른 지 오래되어 자못 권세를 부렸다. 전 임금이 폐출되어 황려(黃驪 여주(驪州))에 거처할 때 김저가 몰래 가서 알현하였다. 그러자 전 임금이 울면서 말하기를, “울적한 심사를 견딜 수 없으니, 여기에서 속수무책으로 죽을 수만은 없다. 역사(力士) 한 사람만 얻어 이성계를 해칠 수 있다면, 나의 뜻을 성취할 수 있다. 내가 평소 곽충보(郭忠輔)와 친하게 지냈으니, 그대가 가서 만나보고 일을 도모하라. 일이 잘 성사되면 왕비(王妃)의 여동생을 아내로 주어 함께 부귀를 누리게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고 나서 칼 한 자루를 주었다. 김저가 돌아와서 곽충보에게 알리니, 곽충보가 거짓으로 승낙하는 체 하고 우리 태조에게 달려가서 고하여 김저 및 정득후(鄭得厚)를 체포하였다.
정득후는 최영의 무리인데, 김저와 함께 모의하고 밤에 태조의 사저(私邸)에 갔다가, 문객(門客)에게 붙잡히자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김저를 순군옥에 가두어 대간(臺諫)들과 번갈아 문초하였다. 김저가 말하기를, “변안열(邊安烈)ㆍ이림(李琳)ㆍ우현보(禹玄寶)ㆍ우인열(禹仁烈)ㆍ왕안덕(王安德)ㆍ우홍수(禹洪壽)가 여흥왕(驪興王 여주(驪州)로 축출된 우왕)을 맞아들여서 내응(內應)하려고 모의하였다.”라고 하자, 전 임금을 강릉부(江陵府)로 옮겼다.【24】
우리 태조(太祖)가 판삼사사(判三司事) 심덕부(沈德符), 찬성사(贊成事) 지용기(池湧奇)ㆍ정몽주(鄭夢周), 정당문학(政堂文學) 설장수(偰長壽), 평리(評理) 성석린(成石璘),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 조준(趙浚), 판자혜부사(判慈惠府事) 박위(朴葳), 밀직부사(密直副使) 정도전(鄭道傳)과 더불어 흥국사(興國寺)에 모여서 군사들의 호위를 삼엄하게 하고 의논하기를, “신우(辛禑)와 신창(辛昌)은 본래 왕씨(王氏)가 아니니, 종사(宗祀)를 받들게 할 수 없다. 또한 천자(天子 명 태조(明太祖))의 명령도 있으니, 마땅히 가짜 왕씨를 폐하고 진짜 왕씨를 세워야 할 것이다. 정창군(定昌君 공양왕(恭讓王)) 왕요(王瑤 공양왕(恭讓王))는 신종(神宗)의 7대손으로 그 족속(族屬) 중에서 가장 가까운 친척이니, 그를 옹립하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조준이 말하기를, “정창군은 부귀한 왕족 집안에서 생장하여 다만 재산을 다스릴 줄만 알고, 나라를 다스릴 줄은 모르니, 임금으로 옹립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성석린이 말하기를, “임금을 세우는 데는 마땅히 어진 분을 선택하여야 할 것이지, 그 족속간의 친소를 논할 필요는 없다.”라고 하였다.
이에 종실(宗室) 중에 두어 사람의 이름을 써서 심덕부ㆍ성석린ㆍ조준에게 주어 보내어, 계명전(啟明殿)에 나아가서 고려 태조(太祖 왕건(王建))의 영전에 놓고 산가지〔籌〕를 뽑게 하였더니, 과연 정창군의 이름을 얻었다. 우리 태조가 심덕부 등 8인과 더불어 공민왕의 정비(定妃) 궁궐에 나아가 군사들로 호위하게 하니, 종친(宗親)과 백관이 모두 이를 뒤따랐다. 정비의 교서(敎書)를 받들어 창왕(昌王)을 강화(江華)로 추방하고, 정창군 왕요를 맞이하여 임금으로 세웠다.
그 교서에 이르기를, “우리 태조로부터 공민왕에 이르기까지 자손이 서로 계승하여 종묘사직을 받들어 왔으나, 불행하게도 공민왕이 세상을 떠나고 후사(後嗣)가 없자, 당시에 종척(宗戚)과 여러 신하들이 종실 중에서 어진 사람을 임금으로 세우자고 의논하였다. 마침 권신(權臣) 이인임(李仁任)이 오랫동안 나라의 권력을 잡고 있으면서 의리(義理)에 어긋난 일을 많이 행하였던 관계로 남에게 은혜를 팔아 자신의 죄를 면해보려고 꾀하였다. 그래서 역적 신돈(辛旽)의 자식인 신우를 공민왕의 아들이라고 꾸미고, 그를 낳은 어미 【반야(般若)】 를 죽여 입을 막아버리고, 자기의 조카딸을 신우에게 출가시켜 총애함을 굳혔으니, 신(神)과 사람이 분노를 쌓은 지 15년이나 되었도다.
그 후 신우는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을 많이 죽여 나라 안의 모든 사람들에게 원한을 샀고, 군사를 일으켜 중국을 침범하여 천자에게 죄를 얻었다. 이제야말로 왕씨(王氏)가 종사를 회복할 때인데도, 대장(大將) 조민수(曺敏修)가 이인임의 친척인 관계로 상상(上相 수상(首相))이 되어 이인임의 사악한 음모를 계승하여 신우의 아들 신창을 임금으로 세워 악인으로써 악인을 계승하게 하였다. 권력이 그에게로 넘어가 갑자기 그들을 제거하기는 어려운 형세였다.
홍무(洪武) 22년(1389)에 문하평리(門下評理) 윤승순(尹承順) 등이 명나라 경사에서 돌아올 때에 황제의 칙지(勅旨)를 받았다. 그 내용에 이르기를, ‘고려의 임금 자리는 왕씨가 시해를 당하고부터 그 후사가 끊기었다. 비록 가짜 왕씨인 이성(異姓)으로 임금을 삼았으나, 삼한(三韓) 땅을 대대로 지킬 좋은 계책은 아닐 것입니다. 현명하고 슬기로운 배신(陪臣)이 자리에 있어 임금과 신하의 명분을 바로잡는다면, 비록 수십 년을 입조(入朝)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또한 무엇을 근심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국론(國論)을 묻자, 종척과 대소 신료(臣僚)들이 모두 말하기를, ‘종친인 정창부원군 왕요는 바로 태조의 정파(正派)로 신종의 7대손이며, 족속 중에서 가장 가까우니, 마땅히 공민왕의 후사로 삼아야 한다.’고 하였다. 이에 왕요에게 명하여 왕위에 올라 종묘사직을 받들게 하고, 신우와 신창은 폐출하여 서인(庶人)으로 삼는다. 아! 한 혜제(漢惠帝)의 아들이라 칭하였던 유홍(劉弘 한 소제(漢少帝))을 폐위시키고, 대왕(代王) 유항(劉恒)으로 한나라 왕실의 종사(宗祀)를 회복시켜 4백 년 동안의 태평한 기업을 닦았으니, 지금의 일을 옛날 일에 견주어 보면 그 이치는 같다.”라고 하였다.【26】
이날에 왕요가 수창궁(壽昌宮)에서 왕위에 오르니, 이 분이 공양왕(恭讓王)이다. 신우와 신창을 강등시켜 서인으로 삼고, 이림 및 그의 아들 이귀생(李貴生), 사위 유염(柳琰)을 먼 지방으로 귀양을 보냈다. 아울러 공양왕의 아우인 정양군(定陽君) 왕우(王瑀)를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장단(長湍)에 가서 주둔하여 비상사태에 대비하게 하였다.【27】 이색(李穡)이 장단 별장에서 돌아와 대궐에 나아가서 왕위에 오른 것을 하례하였다. 이에 공양왕이 내전(內殿)으로 불러 용상(龍床)에서 내려와 맞이하고 말하기를, “평생을 한가로이 놀다가 오늘날에 이 자리를 얻게 될 줄은 생각하지 못하였소. 바라건대, 경(卿)이 도와주시오.”라고 하고, 이색을 다시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로 삼았다.
공양왕이 친히 태묘(太廟)에 제사를 지내고, 왕위에 오른 것을 고하였다. 이 일을 행하던 날 저녁에 유사(有司)가 우왕(禑王)의 어머니 신주(神主)를 철거하자고 청하였다. 그러자 이색이 말하기를, “이 일은 그 종말을 보장할 수 없으니, 아직 그대로 두고 천천히 하라.”고 하였다.【28】 순군옥에 갇힌 김저(金佇)가 옥중(獄中)에서 갑자기 죽자, 저잣거리에서 시체의 목을 베었다. 이때 김저의 공사(供辭)에 순군부(巡軍府)의 관리가 많이 연루되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그의 죽음에 대하여 의심을 품었다. 이에 문하평리 정지(鄭地)ㆍ이거인(李居仁) 등 27인을 유배시켰는데, 김저와 더불어 모의하였기 때문이었다.【29】
[《고려사(高麗史)》 45권 〈공양왕세가(恭讓王世家) 원년조ㆍ2년조〉]
고려(高麗) 임금 왕요(王瑤)가 교서(敎書)를 내려 이르기를, “삼가 생각건대, 태조(太祖)께서 나라를 건국하신 이후로 자손이 서로 계승하여 종사(宗祀)를 받들어 왔는데, 공민왕(恭愍王)에 이르러 불행하게도 아들을 두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시자, 역적 이인임(李仁任)이 정권을 제멋대로 휘두르려는 욕심에 나이 어린 서자 신우(辛禑)를 거짓으로 왕씨(王氏)라고 일컬으며 옹립하여 임금으로 삼았다. 신우는 성질이 완악하고 흉측하며 미친 듯이 난폭하여 장차 요양(遼陽)을 침범하려고 하였다. 이에 시중(侍中) 이성계(李成桂) 등이 사직(社稷)을 보존할 큰 계책을 세워서 무리를 타일러 회군(回軍)하여 왕씨를 세우기로 의논하였다. 그러나 이인임의 일당인 주장(主將) 조민수(曺敏修)가 다시 권력을 제 마음대로 부리기 위하여 간사한 꾀를 내어 사람들의 의논을 저지시키고 신우의 아들인 신창(辛昌)을 세우니, 왕씨의 종사가 끊어져 신(神)과 사람이 함께 분노한 지 16년이나 되었다.
홍무(洪武) 22년 11월 15일에 시중 이성계가 충성심을 분발하고 대의를 주창하여, 이내 시중 심덕부(沈德符), 찬성사(贊成事) 정몽주(鄭夢周)ㆍ지용기(池湧奇), 정당문학 설장수(偰長壽), 평리(評理) 성석린(成石璘), 지자혜부사(知慈惠府事) 박위(朴葳), 지문하사(智門下事) 조준(趙浚), 삼사우사(三司右使) 정도전(鄭道傳) 등과 더불어 계책을 결정하여 위로는 천자(天子)의 명백한 명령을 받들고, 아래로는 종친(宗親)ㆍ기로(耆老) 및 문무(文武) 신료들과 의논하여 공민왕의 정비(定妃)에게 아뢰어 명을 받아서 신우와 신창 부자를 폐위시키고, 나를 왕씨 중에서 가장 가까운 족속이라고 하여 조종(祖宗)의 대통을 계승하게 하였도다. 비록 내가 덕망이 없어서 이 무거운 책임을 감당치 못하더라도, 이성계 등이 명분을 바로잡고 다시 일으켜서 왕실을 되살렸으니, 그 공적은 실로 태조 때의 개국공신보다 작지 않아서 산하(山河)가 마르고 닳도록〔帶礪〕 잊기 어렵다. 그러니 벽상(壁上)에 화상을 그리고, 부모와 처(妻)에게 봉작(封爵)하며, 자손에게는 음직(蔭職)을 주고, 죄를 용서함이 10세(世)까지 미치도록 한다.”고 하였다.【31】
또 우리 태조에게 교서를 내려 이르기를, “아, 심상치 않은 변란을 제거하는 데는 반드시 한 시대에 뛰어난 인재를 기다려야 하고, 만세(萬世)에 전할 공적을 세운 자에게는 반드시 끝이 없는 보답을 누리게 하는 법이다. 옛날에 우리 태사(太師 홍유(洪儒)ㆍ복지겸(卜智謙)ㆍ신숭겸(申崇謙) 등)들이 태조를 보좌하여 삼한(三韓)을 통일하고 함께 태실(太室 종묘의 태조 실(太祖室))에 배향(配享)되어 지금에 이르기까지 5백 년을 전해 왔도다.
지난날에 이인임이 은밀히 공민왕에게 노국공주(魯國公主)의 영전(影殿)을 짓는 공사를 일으키도록 부추겨 상상(上相)을 얻고는 원망을 임금에게 돌아가게 하였다. 갑인년(甲寅年, 1374)에 갑자기 임금이 시해를 당하는 변고가 생겨 후사(後嗣)가 없자, 이인임은 옛날 진(秦)나라 장양왕(莊襄王)이 아들이 없자 승상(丞相) 여불위(呂不韋)가 진나라를 훔친 계책〔不韋盜秦之計〕을 써서, 공민왕 때의 요망한 승려(僧侶) 신돈(辛旽)이 낳은 아이 신우를 공민왕의 궁인(宮人)이 낳은 아들이라고 거짓으로 일컬어서 왕위에 세웠으므로, 공민왕의 모후(母后)께서 옳지 않다고 말하였다. 재상(宰相) 이수산(李壽山)도 종친 중에서 옹립할 것을 청하였으나 이인임이 따르지 않자, 온 나라 사람들이 실망하였고, 누런 안개〔黃霧〕가 사방에 끼어서 햇빛이 나타나지 않았다.
신우가 상사(喪事)를 주관하여 공민왕을 장사지낼 때에는 무지개가 태양을 에워싸고, 그가 증제(烝祭 겨울 제사)를 주관하여 제사를 지낼 때에는 올빼미가 종묘의 태실(太室)에서 울고 천둥과 번개가 요란한 가운데 지진(地震)까지 일어났다. 그가 공민왕의 아버지 의릉(毅陵 충숙왕(忠肅王))의 기일(忌日)에 재계(齋戒)할 때에는 큰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며 천둥과 번개에 우박도 쏟아졌다. 그가 임금의 봉작(封爵)을 이어받자 바람이 불어 조묘(祧廟 조천(祧遷)한 신주를 모신 곳)의 침원(寢園)에 있는 소나무와 잣나무가 뽑히고, 태실의 취두(鷲頭 망새)가 부러지며, 태묘의 문이 넘어지고 왕실의 창고에 화재가 났다. 이러한 변고는 조종(祖宗)의 혼령이 위엄을 발동하시어 신우와의 관계를 끊으려고 한 것이었다.
이인임이 신우의 어머니 반야(般若)를 죽여서 그의 입을 막으니 사평부(司平府)의 새 문이 저절로 무너졌다. 또 오래된 뼈를 장사지내면서 신우의 어머니라고 하자 널〔柩〕을 두었던 장막에서 하루에 두 번이나 화재가 났다. 이러한 것들은 하늘이 신우가 반야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먼 후세에까지 드러내어 보인 것이다. 신우가 왕위에 오른 지 2년이나 되도록 그 어머니의 성씨와 이름이 정해지지 않자, 재상 김속명(金續命)이 말하기를, ‘천하에 그 아비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는 간혹 있으나, 그 어머니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는 내가 듣지를 못하였다.’고 하다가, 거의 살육을 당할 뻔했으나, 공민왕의 모후(母后)께서 힘껏 구제해 준 덕택에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김유(金庾)는 명나라 황제에게 신우는 왕씨가 아니라고 말하였다가 돌아와서 살육을 당하였기 때문에 나라 사람들이 마음에 섬뜩하여 입을 다물고 말하지 못하였다.
신우가 이인임의 조카딸을 아내로 맞아 신창(辛昌)을 낳으니, 이에 왕씨가 다시 일어날 기대는 절망적이었다. 이인임이 국정(國政)을 제멋대로 하여 15년 동안을 백성들에게 해독을 끼쳤다. 게다가 신우도 미친 듯이 난폭해져 요동(遼東) 침공을 계획하여 삼한(三韓)의 백만 백성들을 몰아다가 참혹한 죽임을 당하게 하려고 하였다. 경(卿)은 조민수(曺敏修)의 부장(副將)으로서 군대를 거느리고 압록강(鴨綠江)을 건널 때 나라의 존망이 걸린 계책으로 여러 장수들에게 알아듣도록 설명하여 군사를 되돌렸다. 이는 경이 이미 뼈만 남은 우리 백성들에게 살을 붙여 준 것과 같으며, 종묘사직이 황폐한 쑥대밭으로 되지 않았음은 오직 경의 힘이었도다.
경은 용맹이 삼군(三軍)에서 으뜸이요, 직위는 양부(兩府)에서 가장 높으며, 공명(功名)이 세상을 뒤덮었다. 그러나 경은 뽐내지 아니하고, 《강목(綱目)》과 《연의(衍義)》를 즐겨 읽어서 유후(留侯 장량(張良))와 강후(絳侯 주발(周勃)), 무후(武侯 제갈량(諸葛亮))와 양공(梁公 방현령(房玄齡))의 충성심에 감동한 바가 있기 때문에 위화도에서 군사를 되돌릴 즈음에 왕씨를 일으켜 회복시킬 것을 의논하였다. 조민수 역시 그렇게 하자고 하였다가, 돌아와서는 그의 친족인 이인임ㆍ이림(李琳)과 한 무리가 되어, 경이 의논한 것을 저지하고 신창을 옹립하고서 자신이 총재(冢宰)가 되었으니, 왕씨가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커다란 기회를 잃었다. 경은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참으며, 맡은 직위에 나아가 여러 사람의 의견으로 조민수를 알아듣도록 타이르고, 대간(臺諫)의 선발을 엄격히 하여 나라의 기강(紀綱)을 떨쳐 일으켰다. 이에 헌사(憲司)에서 조민수가 저지른 탐학과 위법한 행위를 탄핵하여 처단할 수 있었다.
경은 새벽에 일어나 앉아서 날이 밝아 아침이 되기를 기다리고, 목이 마른 사람이 물을 찾듯이 어진 사람을 구하였으며, 악한 행동을 한 자를 원수처럼 미워하였다. 그런가 하면 백성들에 대해서는 털끝만큼의 작은 이익이 될지라도 반드시 시행하려고 하였고, 한 오리의 머리털만한 해로움일지라도 반드시 제거하려고 하였다. 또한 언로(言路)를 열어 아랫사람의 심정을 위에 알리고, 숨은 인재를 천거하여 공정한 인사정책을 시행하니, 지난날에 뇌물을 바쳐 청탁을 경쟁하던 풍조와 관직을 팔고 옥송을 돈으로 해결하던 습속이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그래서 궁벽한 시골에 묻혀 있는 인재가 없고, 조정에는 요행으로 직위를 얻는 자가 없었다. 사자(使者)를 보내 절월(節鉞)을 주어 수령(守令)의 치적을 관찰하여 무능한 자를 물리치고 유능한 자를 등용케 하였으므로, 번진(藩鎭)에서는 감히 도적을 양성시키지 못하고, 지방의 수령들은 감히 백성을 해치지 못하였다.
또 수많은 소인(小人)들의 사특한 말을 배격하고, 여러 도(道)에서 사전(私田)을 혁파하여 백성들을 끓는 물과 뜨거운 불처럼 위급한 상황 속에서 건져 내어 풍요로운 생활을 누리게 하였다. 규전(圭田)과 채지(采地 식읍(食邑))의 제도를 써서 도성 부근에서 벼슬한 자에게 토지를 주고, 군자(君子)를 우대하며, 수위(守衛)를 엄중히 하고, 관작을 주되 사사로운 인정에 쏠리지 않으며, 처벌을 하여도 노여움에 의지하지 않았다. 경의 성실한 마음은 광명정대하기가 맑은 하늘에서 비추는 해와 같아서, 어리석은 백성들도 모두 보고 있으며, 그 영위(營爲)한 바는 왕씨를 일으켜 회복시키려고 한 것이 아닌 데가 없었다.
기사년(己巳年, 1389) 겨울에 신창(辛昌)이 친히 입조(入朝)할 것을 청하기 위해 명(明)나라에 보냈던 윤승순(尹承順)이 예부(禮部)에서 황제의 칙지(勅旨)를 받들어 작성한 자문(咨文)을 가지고 왔다. 그 글에 이르기를, ‘고려에서 왕위를 계승할 후사(後嗣)가 끊겨 다른 성을 가진 자로 임금을 세우고 왕씨(王氏)라고 일컫는 것은 삼한(三韓)을 대대로 지키려는 좋은 계책이 아니다. 과연 어질고 지혜로운 배신(陪臣)이 왕위에 있어 군신(君臣)의 명분을 정한다면 비록 수십 세대를 입조하지 않을지라도 무엇을 근심하겠으며, 해마다 와서 조알(朝謁)한다고 한들 또 어찌 싫다고 하겠는가? 동자(童子 창왕(昌王)을 말함)가 반드시 경사에까지 올 것은 없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거룩하신 천자(天子)가 명나라를 세운 뒤 사해(四海)가 안정되지 않았을 때에, 공민왕이 남보다 먼저 칭신(稱臣)하여 천하로 하여금 하늘의 명령이 명나라에 돌아갔음을 알도록 하여서 국운(國運)을 도와주는 데 크게 공이 있었음을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려의 종사(宗祀)가 끊어졌음을 가엾게 여기고서, 왕씨의 신자(臣子)에게 나라를 일으켜 회복시킬 것을 간절하게 바랐던 것이다.
신창의 외조부 이림(李琳)은 총재로 있으면서 명나라 황제의 칙지를 비밀에 부쳐서 발표하지 않으니, 흉악한 모략을 예측할 수 없어서 신씨(辛氏)의 변란은 아침이 아니면 저녁에 일어날 판국이었고, 왕씨는 이미 솥 안에 든 물고기가 되어 그 존망이 경각에 달려 있었다. 그런데도 경은 살아남기 어려운 위태로움을 돌아보지 않고 몸소 대의(大義)를 부르짖으며, 우리 왕씨를 무궁한 후대에까지 전할 계책을 정하자, 심덕부ㆍ정몽주ㆍ지용기ㆍ설장수ㆍ성석린ㆍ조준ㆍ박유ㆍ정도전의 여덟 장상(將相)이 따라서 이를 도왔다.
11월 15일에 공민왕의 왕비인 정비(定妃)의 궁전 뜰에서 명나라 황제의 칙지를 선포하고, 나를 종실의 저택에서 맞아다가 공민왕의 뒤를 계승하게 하였다. 그런데 한 사람도 처형하지 않고 짧은 시간 안에 16년 동안의 임금 자리에 있던 신씨(辛氏)를 제거하자, 그 인척(姻戚)과 지당(支黨)이 온 나라에 뿌리를 박아 서리어 있었지만, 그 광경을 둘러보고는 간담이 서늘하게 놀라서 태도를 바꾸어 순종하여 감히 요동하지 않았으며, 사람들은 얼굴빛이 변함이 없고 날은 따뜻한 봄철과 같았다. 위로는 31대 동안 서로 계승해 온 차례를 잇게 되고, 아래로는 끝없는 세대까지 지속되는 아름다움을 열어 놓았다. 그러니 경이 왕씨를 일으켜 회복시킨 공은 강후(絳侯)가 한(漢)나라 초기에 여씨(呂氏)를 제거하고 효문제(孝文帝)를 영립하여 유씨(劉氏) 왕조를 존속시킨 일과 오왕(五王)이 당(唐)나라 초기에 측천무후(則天武后)를 물리치고 중종(中宗)을 복위시킨 일에 견줄 바가 아니다.
경은 대대로 충의(忠義)를 쌓아서 왕실을 위하여 심력을 바쳤고, 그 두터운 덕(德)이 후대에 전해져 경의 몸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학문의 지식과 무예(武藝)의 계략을 다 갖추어 임금을 보좌할 인재이고, 나라만 생각할 뿐 집안을 잊은 채 사직(社稷)을 보전한 신하이다. 천지(天地)와 조종(祖宗)으로부터 영특한 재질을 부여받아 온 나라의 안위(安危)가 그대에게 달려있다. 공민왕의 신임을 받아 홍건적(紅巾賊)을 섬멸하여 개경(開京)과 서경(西京 평양)을 수복하였고, 요망한 승려 신돈을 몰아내 왕씨를 편안하게 하며, 납합출(納哈出)을 격퇴하여 사막(沙漠)에 위엄을 떨쳤고, 왜구(倭寇)를 패주시켜 서해(西海)를 보전하였으며, 인월역(引月驛)에서 격파하여 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도다.
경은 공민왕의 신임을 받아 감격하여 종묘의 제사가 끊기는 것을 애통히 여겨 우연(虞淵 해가 지는 곳)에 떨어진 해를 구해내기로 맹세하였다. 그 지극한 정성은 천지(天地)를 꿰뚫었고, 지극한 충심(忠心)은 역대 선왕들에게까지 통하였다. 지극히 공정(公正)하여 온 나라 백성들의 마음을 감복시켰고, 지극히 인자(仁慈)하여 만백성의 환심을 결집시켰다. 천명(天命)을 따르니 하늘이 도와주고, 크게 신의를 지키니 사람이 도운 것이다. 그러므로 왕실을 일으켜 회복시키기가 이와 같이 쉬웠던 것이다. 이렇듯 경은 진실로 공민왕의 신임에 보답한 것이다.
옛날에 주공(周公)이 큰 공로가 있어 동쪽 땅에 봉하였던 것처럼, 나는 경의 충성을 가상히 여겨 땅을 나누어 주고, 대대로 습봉(襲封)할 것이다. 또한 벽상(壁上)에 초상을 그리고 비석에 공적을 새길 것이며, 자손의 죄를 영원토록 용서할 것이니, 나는 원자(元子)를 데리고 종묘에 가서 이를 고할 것이다. 아! 경은 우리의 만백성을 살렸고, 우리 종묘의 제사를 계승토록 하였으며, 우리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운 공이 있는데, 이렇게 후하지 못한 포상으로 어찌 만분의 일인들 보답할 수 있겠는가?
경은 나라를 중흥시킨 대신으로서 그 명성은 건국 초의 배 태사(裴太師 배현경(裵玄慶))와 같으나, 책임은 옛날 상(商)나라의 아형(阿衡) 이윤(伊尹)보다 무겁다. 이에 제도와 규율을 확립하여 만세의 법전으로 삼고, 뛰어난 인재를 널리 구하여 우리 조정을 튼튼하게 하라. 덕망(德望)이 부족한 나를 도와 우리 사직(社稷)을 저 하늘처럼 무궁토록 보전케 하여 먼 후세에까지 더불어 제사에 흠향하게 한다면, 덕망이 부족한 나도 함께 영광스러움이 있을 것이다. 경의 자손이 경의 충량(忠良)함을 본받아서 영원히 잊지 않고 나의 후계 임금들에게 다리와 팔뚝 역할을 할 수 있는 중요한 신하가 되어, 나라와 기쁨을 함께 한다면 옳은 일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36】
[《삼봉집(三峯集)》 8권 〈부록(附錄) 사실(事實)〉, 《태조실록(太祖實錄)》 1권 〈태조(太祖) 원년조〉, 《고려사(高麗史)》 116권 〈심덕부전(沈德符傳)〉]
고려(高麗) 공민왕(恭愍王)이 세상을 떠나고부터 나라의 계통이 이미 끊어졌으며, 권세를 잡은 간신(奸臣)은 제멋대로 조정의 정사(政事)를 혼탁하게 어지럽혀 기강(紀綱)이 크게 허물어지고 민생이 도탄에 빠졌다. 이에 우리 태조(太祖)가 나라의 대정(大政)에 참예하여 도와서 경신(更新)하기를 떨쳐 거행하자 폐단이 제거되고 이로움이 일어나서, 백성들이 마음속으로 의지하여 믿어 존중하며 받듦이 날로 깊어져 사람들이 모두 천명(天命)이 바뀌고 있음을 알았다.【37】
정도전(鄭道傳)이 일찍이 태조를 따라 동북면(東北面)에 이르러 호령(號令)이 명확하고 엄숙하며 사졸(士卒)들의 행오(行伍)가 가지런히 정돈된 것을 보고서 앞으로 나아가 은밀히 말하기를, “아름답습니다. 이 군사들이 무슨 일인들 성취하지 못하겠습니까?”라고 하니, 태조가 말하기를, “무엇을 이르는 것인가?”라고 하였다. 정도전이 속여 말하기를, “왜구(倭寇)를 동남 방면에서 공격하는 것을 말했을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군영(軍營) 앞에 오래 묵은 소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정도전이 소나무에 시(詩) 한 수(首)를 남기겠다고 청하며 아뢰고 쓰기를, ‘아득한 세월 동안 한 그루의 소나무〔蒼茫歲月一株松〕 몇 만 겹의 청산(靑山)에 나고 자랐구려.〔生長靑山幾萬重〕 먼 훗날 서로 좋게 볼 수 있겠는가?〔好在他年相見否〕 인간은 천지(天地) 사이에 문득 종적 남기네.〔人間俯仰便陳蹤〕’라고 하였으니, 대개 천명이 있는 바를 알고 재촉한 것이었다.【39】
태조가 일찍이 시중(侍中) 경복흥(慶復興)의 집에 이르니, 경복흥이 맞아들여 그의 아내로 하여금 나와서 보게 하여 예절을 갖추어 경의(敬意)를 표함이 매우 지극하였다. 또 그의 자손들을 부탁하며 말하기를, ‘나의 자식들은 오직 공만을 비호하기를 번다히 할 것이니, 공께서는 잊지 말기를 바라오.’라고 하였고, 매번 대우하기를 반드시 존중하여 특이하게 하였다. 태조가 혹시 정토(征討)로 인하여 외지(外地)로 나가게 되면, 경복흥은 늘 고하기를, “동한(東韓)의 사직(社稷)이 장차 들어가서 손아귀에 넣을 것이니, 말〔馬〕이 땀을 흘리게 하는 노고를 꺼리지 말고, 능히 나라를 진정시킬 공적을 이루기 바라오.”라고 하였다.
삼군(三軍)이 신경(新京) 땅에서 사냥을 하자, 태종(太宗)도 함께 갔다. 사슴 한 마리가 뛰쳐나오자, 태종이 말을 달려 화살 한 개를 쏘아 죽였다. 그러자 10여 인의 왕족들이 높은 언덕 위에 모여 섰다가 이 광경을 보고는 깜짝 놀라 서로 돌아보며 말하기를, “사람들이 대부분 이씨(李氏)가 장차 일어날 것이라 말하더니, 정말 그러한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또 공정대왕(恭靖大王)이 시중 이인임(李仁任)을 그의 집에 가서 만나보고 나왔는데, 이인임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나라가 장차 반드시 이씨에게로 돌아갈 것이다.”라고 하였다. 많은 사람들의 기대가 이미 이와 같고, 태조에 대한 덕언(德言)이 날로 성대해지자 헐뜯고 시기하는 자들이 많아졌다.【40】
왕요(王瑤)가 임금의 자리에 오르던 날 저녁에 사위인 강회계(姜淮季)의 아버지 강시(姜蓍)가 궁궐 안으로 들어가 임금에게 말하기를, “여러 장상(將相)들이 전하를 맞이하여 임금으로 세운 것은 단지 자신들에게 미칠 화환(禍患)을 면하려고 도모하였을 뿐이지, 왕씨를 위한 것은 아닙니다. 전하께서는 조심하여 친근하게 믿지를 말고, 스스로 보신할 것을 생각하소서.”라고 하였다. 임금의 사위 우성범(禹成範)이 곁에서 모시고 있다가 이 말을 듣고는 그의 어머니 윤씨(尹氏)에게 알렸다. 윤씨의 사촌 오라비 윤소종(尹紹宗)이 그 말을 전하여 듣고서 아홉 공신(功臣)에게 고하였다. 그러자 공신들이 공양왕에게 나아가 아뢰기를, “전하께서 왕위에 오르시자마자 헐뜯는 말이 갑자기 들어오니, 신들은 황공하기 그지없습니다. 전하께서 만약 헐뜯는 말을 믿으시거든 즉시 신들에게 죄를 주시고, 신들이 가짜 성씨〔辛〕를 축출해 물리쳐 왕씨를 다시 옹립한 것이 종실(宗室)에 공로가 있다고 여기시거든 청컨대 헐뜯는 자들을 처벌하여 위아래로 하여금 불화가 없도록 하소서.”라고 하였다. 공양왕이 좌우를 돌아보고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자, 아홉 공신들이 한참 동안 엎드려 있다가 물러갔다.【41】
[《고려사(高麗史)》 45권 〈공양왕세가(恭讓王世家) 원년조〉]
고려(高麗) 공양왕(恭讓王)이 순안군(順安君) 왕방(王肪)과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조반(趙胖)을 보내 명(明)나라 경사(京師)에 가서 왕위에 오른 것을 고하게 하였는데, 아뢰기를, “신(臣)은 본국의 시조(始祖)이신 왕건(王建)의 직계 자손인 신종(神宗) 왕탁(王晫)의 7대손으로, 앞서 말씀드린 명분(名分)을 대대로 이어왔으나, 특별한 재덕(才德)이 없어 조심하고 두려워하면서 스스로 처신하여 타고난 수명(壽命)대로 살기만을 기대하였습니다. 그런데 여러 왕족〔宗戚〕과 신료(臣僚)ㆍ한량(閑良)ㆍ기로(耆老) 등이 폐하의 칙지(勅旨)를 공경히 받들어 나라 일에 대하여 함께 의논하였는바, 공민왕이 아들을 두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뒤 권세를 잡은 신하 이인임(李仁任) 등이 임금으로 옹립하였던 신우(辛禑) 부자(父子)는 실로 다른 성씨이니, 왕씨(王氏)의 종사(宗祀)에 주인이 없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신을 왕족 중에서 가장 가까우며 또 나이가 많다고 하여 공민왕의 정비(定妃) 안씨(安氏)에게 아뢰어 그의 명을 받들어서 신으로 하여금 나라를 맡아 제사를 받들게 하니, 신은 나아가지도 물러서지도 못할 처지에 놓여 몸 둘 곳이 없습니다. 가만히 보건대, 이인임 등이 저희들 멋대로 다른 성씨를 왕위에 옹립한 이후 정치와 교화가 방향이 빗나가고 풍속이 부박해졌습니다. 신은 폐하의 덕화(德化)에 점차 감화되어 진실하고 순박하게 회복시켜 주실 것을 원하오니, 삼가 바라건대, 폐하의 인자하신 마음으로 신이 직접 입조(入朝)하여 면대해 아뢰도록 허락하시어 온 나라의 백성들을 편안케 해 주옵소서.”라고 하였다.【42】
[《고려사(高麗史)》 115권 〈이색전(李穡傳)〉ㆍ120권 〈오사충전(吳思忠傳)〉]
고려(高麗)의 좌사의(左司議) 오사충(吳思忠)과 문하사인(門下舍人) 조박(趙璞) 등이 상소하였는데, 이르기를,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 이색(李穡)은 유학자의 존숭을 받는 사람으로 우리 현릉(玄陵)을 섬겨 직위가 재상에까지 이르렀습니다. 현릉이 세상을 떠나시고 후사가 없기에 이르자, 여러 신하들이 종실 중에서 현명한 자를 임금으로 영립하자고 의논하니, 권신 이인임(李仁任)은 자신이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며 탐욕스레 가짜 군주를 세우려 하므로, 이색이 그의 모의에 협조하여 신우(辛禑)를 옹립하였습니다.
대장(大將) 조민수(曺敏修)는 이인임의 인친(姻親)으로 신우의 아들 신창(辛昌)을 세워서 그 사특한 모의를 계승하려고 이색에게 계책을 물었으며, 이색 역시 일찍이 신창을 마음에 두고 있었으므로 마침내 그를 옹립하는 의론을 결정하였습니다. 이색의 아들 이종학(李鍾學)이 외척들에게 널리 알려 말하기를, ‘여러 신하들은 종실 중에서 맞이하여 옹립할 것을 의논하였으나, 마침내 세자(世子) 신창을 임금으로 세우게 된 것은 내 아버지의 힘이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색은 이인임의 신임을 받아 자신의 부귀를 보전하였습니다. 이인임이 자신의 일당인 임견미(林堅味)ㆍ염흥방(廉興邦)과 더불어 탐욕을 함부로 부려서 관작을 팔아 직위를 주고 옥송(獄訟)을 팔아 형벌을 경감시켜 뇌물이 공공연하게 유행하고, 백성들의 토지를 빼앗아 점유하여 원망이 쌓이고 죄악이 가득 차서 마침내 패망하게 되었는데도, 이색은 그들의 잘못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신우의 사부(師傅)가 되어서는 여러 차례 상사(賞賜)를 받았고, 젖내 나는 어린 자제(子弟)들을 모두 과거(科擧)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시켜 중요한 관직에 앉혀 놓았습니다. 신우가 포학한 짓을 멋대로 행하여 아무 죄가 없는 사람을 살육하는 것을 보면서도 이색은 그의 과실을 바로잡지 않았습니다. 신우가 망녕스럽게 군사를 출동하여 장차 명(明)나라 국경을 침범하여 동방(東邦)에 끝없는 재앙이 닥칠 원인을 만들었는데도 이색은 그 또한 말하지 않았습니다.
나라가 사전(私田) 때문에 궁핍하게 되어서 민생을 해치고, 송사(訟事)를 일으키어 풍속을 훼손시킨다고 하여 폐단을 고쳐서 전법(田法)을 바로잡으려고 의논하였으나, 이색은 상상(上相)이면서도 옳지 않다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이림(李琳)이 탐욕이 많고 줏대가 없어 용렬하다는 것은 온 나라 사람들이 아는 바인데도, 이색은 외척(外戚 이림(李琳)은 신창(辛昌)의 외조부임)과 사귀는 교분을 맺어 일신을 보전하려고 꾀하여 이림을 추천하여 자기를 대신해 재상이 되게 하였습니다.
또 유학자들의 존숭을 받는 처지로서 부처에게 아첨하여 사람의 심술을 허물어뜨리고, 풍속을 퇴락하게 어지럽혀 반복하여 속이는 짓을 많이 하다가, 이숭인(李崇仁)이 탄핵당하는 것을 핑계로 삼아 장단(長湍)에 돌아가서 사세(事勢)의 변동을 관망하였는데, 【이에 앞서 이색이 상소하기를, “신(臣)이 지난해에 하정사(賀正使)로 명(明)나라 경사(京師)에 갈 때 부사(副使)였던 이숭인이 지금 탄핵을 당하여 귀양 가 있으므로, 신이 감히 스스로 편안히 있을 수 없어서 사직(辭職)을 청합니다.”라고 하였으나, 창왕이 허락하지 아니하자 얼마 안 되어 장단의 별장으로 돌아갔다.】 전하(殿下)께서 즉위하시기에 이르러 공공연하게 와서 판문하부사의 관직을 받아 백관(百官)의 위에 오르고서 조금도 부끄러운 기색이 없었습니다. 청컨대 유사(有司)에 명을 내려 이색 부자(父子)와 조민수의 죄를 논정(論定)하여, 후세에 남의 신하가 되어서 불충(不忠)한 짓을 한 자에게 경계가 되게 하소서.【43】
이인임의 죄악은 전하께서도 친히 보셨던 바입니다. 헌사(憲司)에 맡겨 관(棺)을 쪼개고 목을 벨 것이며, 집을 허물어뜨리고 연못을 만들어서 그 죄악을 세상에 알리도록 하소서.”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삼사우사(三司右使) 김속명(金續命)은 ‘우왕의 어미를 분변할 수 없다.’는 말을 하다가 축출당하여 죽었으며, 공산부원군(公山府院君) 이자송(李子松)은 신우(辛禑)가 군사를 일으킨 것을 간하다가 마침내 사형을 당하였습니다. 청컨대 전하께서는 유사에 명을 내리시어 그들의 무덤에 제사를 지내게 하고, 그들의 자손을 채용하여 충혼(忠魂)을 위로하도록 하소서.”라고 하니, 명령을 내려 이색 부자를 파직시키고, 조민수를 폐출(廢黜)하여 서인(庶人)을 삼게 하였다.【44】
[《고려사(高麗史)》 107권 〈권근전(權近傳)〉ㆍ120권 〈오사충전(吳思忠傳)〉]
고려(高麗)의 헌사(憲司)에서 상소하여 권근(權近)의 죄를 논하였는데, 이르기를, “지금 윤승순(尹承順)이 명(明)나라의 예부(禮部)에서 보낸 자문(咨文)을 사사로이 뜯어 본 이유에 대해 캐어묻자, 윤승순이 대답하기를, ‘시중(侍中) 이림(李琳)이 병을 핑계하여 집에 있었으므로 권근이 자문을 가지고 가서 그의 집에 두었다가, 먼저 사사로이 뜯어 본 다음에야 도당(都堂)에 보냈다.’고 하였습니다. 신들이 곰곰이 생각해 보건대, 이 자문은 우리나라 종묘사직의 존망에 관계된 것이어서 즉시 도당으로 보내어 재상(宰相)들을 모아 놓고 뜯어보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권근이 여러 날을 사사로이 간직하였다가 자기 멋대로 뜯어보고서 나라의 중대한 기밀을 누설하였으니, 남이 모르게 꾸미는 계략을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청컨대 즉시 캐물어서 형률(刑律)에 의하여 죄를 결정하소서.”라고 하였다. 고려 공양왕(恭讓王)은 캐어묻지 못하게 하고, 먼 지방으로 유배시킬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권근이 자문을 사사로이 뜯어 본 데 대하여는 당시 사람들 대부분이 믿지 않았다.【45】
대간(臺諫)에서 번갈아 상소하여 이르기를, “지금 한두 사람의 대신(大臣)이 전하를 추대하여 공민왕의 뒤를 계승토록 하고, 신우(辛禑)가 공민왕의 아들이 아님을 바로잡아서 조정과 지방에까지 널리 알렸습니다. 그러므로 온 나라의 백성들이 서로 말하기를, ‘우리들이 생전에 태조(太祖 왕건(王建))의 후손을 다시 보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지난번에 홍륜(洪倫)이 공민왕을 시해한 변란을 일으킨 까닭과 신우의 어미 반야(般若)가 신우는 자신의 아들이란 말을 한 것 때문에 죽게 된 일은 전하께서도 분명히 알고 계시며, 명나라의 황제도 이미 들어서 아는 바입니다. 지금 이색(李穡)은 마음속으로 그 그릇된 일을 알면서도 이인임이 신씨(辛氏)를 임금으로 옹립할 즈음에 일찍이 한마디 말도 없었고, 조민수(曺敏修)는 신창(辛昌)을 옹립할 때 임금으로 받들어 모실 것을 맨 먼저 주장하였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이미 왕씨의 정통(正統)을 계승하셨는데도, 이종학(李鍾學)은 홀로 사람들에게 부르짖기를, ‘공민왕께서 이미 신우를 강녕군(康寧君)에 봉하고서 세자부(世子府)를 설치하였고, 명나라 황제께서도 신우에게 작명(爵命)을 내렸다. 그런데 이성계(李成桂)가 어떤 사람이기에 감히 공민왕의 명을 어기고 우리 여흥왕(驪興王)을 폐출시키는 것인가?’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신우의 부자(父子)에 대해 죄를 다스리고 태묘(太廟)에 고하여 백성들의 마음을 안정시키지 않으시고, 또 이색 부자가 신우의 부자에게 빌붙은 죄를 다스려서 여러 소인(小人)들의 은밀한 모의를 단절시키지 않으신다면, 전하께서는 하루라도 왕위(王位)에 편안하게 계실 수 없을 것입니다.
혹자는 말하기를, ‘신씨 부자에 대한 일을 명나라 황제가 알고 있으니, 분명한 명이 내려지기를 기다려 그들의 죄를 바르게 다스려야 한다.’고 하는데, 이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명나라 황제는 이미 고려의 배신(陪臣)들이 왕씨가 아닌 다른 성씨로 임금을 삼았다고 질책하였으니, 어찌 두 번째 명이 있었겠습니까? 혹시라도 명나라에서 신우의 목숨을 보존시키려 한다면 모르겠습니다. 전하께서도 그를 살려 두어 백성들의 마음을 안정시키지 않으실 작정이십니까? 《춘추(春秋)》의 법에 나라를 어지럽게 하는 신하와 부모에게 반역하는 자식은 사람이 누구나 죽여도 되는 것이니, 먼저 죽이고 난 뒤에 아뢰어도 괜찮을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분명하게 명이 내려지기만을 기다릴 것입니까?
이인임이 신씨를 추대한 죄는 바로 태조(太祖)와 하늘에 계신 여러 선왕들의 혼령이 모두 주륙하기를 바라는 바인데, 어찌하여 신들의 요청을 따르지 않으십니까? 이렇게 그냥 두고 주륙하지 않으신다면, 이는 먼 후대에까지 나라를 어지럽히는 불충(不忠)한 자가 나올 문을 열어 놓는 것입니다. 마땅히 유사(有司)로 하여금 관(棺)을 쪼개어 목을 베고, 집을 허물어 연못을 만들게 하며, 가산을 몰수토록 하소서. 이색과 이종학 부자에게 정직(停職)을 시켜서 산관(散官)에 속하게 하는 데만 그친다면, 먼 후세의 간적(奸賊)들을 어떻게 징계할 것입니까? 마땅히 유사에 명을 내려 그 죄를 명확히 다스리도록 하소서.
이숭인(李崇仁)과 하륜(河崙)은 처음에 이인임의 심복이 되었다가, 뒤에는 이색의 간교한 계책을 좇아서 신창(辛昌)이 명나라에 조현(朝見)할 것을 독촉하고, 폐출된 신우를 다시 옹립하여 여러 선왕(先王)들의 제사를 영원히 단절시키려고 하였으니, 그 죄는 처형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역시 유사로 하여금 논죄(論罪)하게 하소서. 또 이종학은 신창을 임금으로 옹립한 것을 자기 아버지의 공으로 삼아서 환관(宦官) 이분(李芬)에게 말하였고, 이분은 이림(李琳)의 딸에게 말하여, 이림에게 아부하고 빌붙어서 간교한 계책을 이루려고 하였습니다. 원하옵건대 이분을 유사에 내려서 정상(情狀)을 캐물어 그 죄를 다스리도록 하소서.
권근은 사사로이 명나라 황제의 뜻이 담긴 자문(咨文)을 뜯어서 먼저 이림과 이색에게 보였으니, 그 마음을 왕씨(王氏)에게 두지 않았음이 분명합니다. 얼마 전에 이숭인의 일을 핑계하여 상서(上書)하였다가 탄핵을 당하였으나, 그동안의 행동을 알 수 없으니, 먼 지방으로 유배시켜 그 죄를 다스리지 않으면, 어떻게 후세의 불충(不忠)한 신하를 징계할 수 있겠습니까? 전(前) 한양윤(漢陽尹) 문달한(聞達漢)은 이림의 인척(姻戚)으로 중간에 있으면서 권세를 마음대로 부리고 불의(不義)한 짓을 방자하게 행하였습니다. 이림의 족속들은 모두 이미 귀양을 보냈으나, 이림은 홀로 도성 안에 그대로 두었으니, 청컨대 직첩(職牒)을 거두고 지방으로 쫓아내소서.”라고 하였다. 이에 이인임의 저택을 허물어서 연못을 만들었으며, 이색의 부자와 이숭인ㆍ하륜ㆍ이분ㆍ윤달한을 유배시키고 조민수를 삼척(三陟)으로 옮겼다.【47】
[《고려사(高麗史)》 45권 〈공양왕세가(恭讓王世家) 원년조〉ㆍ120권 〈윤회종전(尹會宗傳)〉, 《동국통감(東國通鑑)》 54권 〈고려기(高麗紀) 공양왕(恭讓王) 원년조〉]
고려(高麗)의 사재부령(司宰副令) 윤회종(尹會宗)이 상소하여 신우(辛禑)와 신창(辛昌)을 죽일 것을 청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현릉(玄陵)께서 세상을 떠나신 뒤에 권신(權臣) 이인임(李仁任) 등이 역적 신돈(辛旽)의 자식인 신우를 우리 왕씨(王氏)의 후사로 삼아서 9묘(廟)의 제사를 단절시킨 지 16년이나 되었다. 다행히 하늘에서 나라를 도와 왕실이 이미 멸망하였다가 다시 일어났으니, 마땅히 깊이 생각하고 현명한 판단을 내려서 화란(禍亂)의 근원을 막아야 할 것입니다. 저 신우 부자(父子)가 임금의 자리를 도적질하여 차지한 지 16년 동안에 인친(姻親)과 세력을 떨치는 자들이 안팎에 널리 깔렸습니다. 만약 간흉(奸凶)의 무리들이 신우 부자를 떠받들어 옹위하고 나온다면, 신(臣)은 후회하여도 늦을 것으로 여기며, 전하(殿下)의 즉위하신 그 자리가 내쫓김을 당할까 두렵습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대신들과 더불어 궁궐 안에서 모의하여, 신우 부자에 대한 일을 태묘에 고하고 도성의 저잣거리에서 참수하여 안팎에 분명하게 드러내 보여, 또다시 왕실을 어지럽히지 못하도록 하여, 먼 후세에까지 왕통(王統)을 전하도록 하십시오.”라고 하였다.【48】
소장(疏章)이 올라가자, 공양왕(恭讓王)이 여러 재상들에게 두루 물었으나 모두가 말이 없었다. 우리 태조(太祖)가 홀로 말하기를, “이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미 신우를 강릉(江陵)에 안치하였다고 명(明)나라에 알렸으니 중간에 변경할 수 없습니다. 또 신들이 있는데 신우가 비록 반란을 일으키려고 한다고 하여도 무엇을 근심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러자 공양왕이 말하기를, “신우는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을 많이 죽였으니, 그 자신이 죽임을 당해야 마땅할 것이다.”라고 하고, 지신사(知申事) 이행(李行)에게 명하여 교서(敎書)를 내려 정당문학(政堂文學) 서균형(徐鈞衡)을 강릉에 보내 신우를 죽이게 하고,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유구(柳玽)를 강화(江華)에 보내 신창을 죽이게 하였다.【49】 신우의 아내 영비(寧妃) 최씨(崔氏)가 큰 소리를 내어 슬프게 울며 말하기를, “내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은 내 아버지〔최영(崔瑩)〕의 과실이다.”라고 하고, 10여 일 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고 밤낮으로 울었다. 밤이 되면 신우의 시신(屍身)을 껴안고 잤으며, 곡식을 얻게 되면 바로 깨끗하게 찧어서 전(奠)을 장만해 올렸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녀를 불쌍하게 여겼다.【50】
[《고려사(高麗史)》 120권 〈오사충전(吳思忠傳)〉]
고려(高麗)의 좌사의(左司議) 오사충(吳思忠)과 문하사인(門下舍人) 조박(趙璞) 등이 상소하기를, “환시(宦寺)는 본래 궁궐 안을 청소하는 것으로 직분을 삼고, 그 외의 일에는 간여함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진(秦)나라 때에 이르러 옛 제도를 허물어뜨리고, 조고(趙高)를 중거부령(中車府令)으로 삼아서 2세(二世 진 시황(秦始皇)의 아들 호해(胡亥))가 그의 손에 죽고, 서한(西漢) 때에는 홍공(弘恭)을 중서령(中書令)으로 삼자, 그가 충량(忠良)한 자를 죽여 왕망(王莽)이 임금의 자리를 빼앗았고, 조절(曹節) 등이 정권을 마음대로 휘두르더니 동한(東漢)이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당(唐)나라 때에는 구사량(仇士良)을 중위(中尉)로 삼자, 그가 임금을 마구 폐치(廢置)하였고, 송(宋)나라 때는 동관(童貫)을 장수로 삼자, 그가 두 황제(皇帝 휘종(徽宗) 흠종(欽宗))를 여진(女眞 금(金)나라)에 포로가 되게 하였습니다. 전원(前元)에서는 원사(院使 다사(茶事)를 받은 자)가 권력을 멋대로 부려서 마침내 천하를 잃게 되었으니, 이는 예부터 지금까지의 좋은 귀감(龜鑑)입니다.
우리 조종(祖宗)의 제도에는 환관(宦官)과 급사(給事)가 불과 수십 인밖에 되지 않았고, 또한 일찍이 봉록(俸祿)을 타서 먹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현릉(玄陵) 때에 이르러 거세(去勢)된 환관들을 조정의 반열에 많이 두었다가, 마침내 최만생(崔萬生)이 공민왕을 시해하는 변고를 초래하였으니, 이는 또한 전하께서도 친히 보셨던 바입니다. 전하께서 왕위에 오르신 뒤 다시 내시부(內侍府)를 세우시고, 관계(官階)를 3품(品)에 두었으니, 이는 전하께서 중흥(中興)의 군주로서 다시 망국(亡國)의 전철(前轍)을 밟는 것입니다. 원하옵건대, 지금부터 궁궐 안의 환관과 급사는 단지 의복과 양식만을 지급하고, 내시부는 혁파토록 하십시오.”라고 하였는데, 공양왕이 그 말을 듣지 않았다.【52】
[《고려사(高麗史)》 118권 〈조준전(趙浚傳)〉]
고려(高麗)의 대사헌(大司憲) 조준(趙浚) 등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경(敬)이란 한 글자는 제왕이 성군(聖君)이 되는 기초이고, 공(公)이란 한 글자는 제왕이 훌륭한 다스림을 이루는 근본입니다. 청컨대 전하(殿下)께서는 위로 황천(皇天)이 내려다보는 것을 두려워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이 우러러보는 것을 두려워하여〔上畏皇天之鑑臨 下畏億兆之瞻仰〕 여러 사람이 기뻐한 뒤에 상(賞)을 내리도록 명하시고, 여러 사람이 버린 뒤에야 형벌을 가하소서.〔衆悅而後命賞 衆棄而後加刑〕 자문(諮問)을 부지런히 하여 총명을 넓히고, 학문을 좋아하여 덕업(德業)을 높이며, 많은 신하들을 예로써 대접하고, 모후(母后)를 효도로써 받들며, 간사한 자를 버릴 때는 의심하지 말고, 명령을 내릴 경우에는 반드시 시행토록 하소서.
겹겹이 둘러싸인 깊은 궁중(宮中)에 거처하시면서 백성들이 비바람도 가려 막지 못함을 생각하고, 성대하게 차린 맛있는 음식을 올리거든 백성들이 술지게미와 쌀겨도 부족함을 염두에 두며, 가볍고 따스한 의복을 입을 때는 옛날 우(禹) 임금이 거친 옷을 입었던 일을 본받고, 연회 자리에 임할 때는 수 문제(隋文帝)가 한 가지 고기만 먹은 일을 본받으십시오. 검소함을 숭상하고 사특함을 경계하여 비용을 절약하고 백성들을 사랑하소서.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의 구분은 임금으로서 마땅히 알아야 될 바입니다. 안색을 바르게 하여 조정에 나아가서 숨김없이 다 말하며, 우뚝하게 서서 조금도 회피함이 없는 자가 군자이니, 전하께서 이러한 사람을 친근히 하고 신임하신다면 요순(堯舜)과 같은 다스림을 앉아서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인척(姻戚)들을 반드시 올려 쓰려고 하고, 은혜와 원한을 반드시 갚으려고 하며, 백성의 고통과 군주의 과실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으면서 거리낌 없이 말하지 않고, 입은 재앙을 부르는 문〔口是禍之門也〕이라고 하면서 오직 아첨만을 일삼으며, 부귀(富貴)를 도둑질하는 자는 소인이니, 전하께서는 이러한 자들을 기뻐하며 포용하신다면 옛날의 걸왕(桀王)ㆍ주왕(紂王)과 같은 멸망을 서서 기다리게 될 것입니다. 감히 어리석은 말을 이 뒤에 조목조목 들어서 열거하겠습니다.
첫째 이제(二帝 요순(堯舜))와 삼왕(三王 하우(夏禹), 은탕(殷湯), 주 문ㆍ무왕(周文武王))의 정치는 학문으로 말미암지 않음이 없습니다. 마음을 깨끗이 하고 뜻을 하나로 모아 그 중정(中正)의 도(道)를 잡은 것은 요ㆍ순의 학문이며, 표준이 되는 중도의 법칙을 세워 천하를 다스린 것은 탕(湯) 임금과 무왕(武王)의 학문입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큰 선비로서 경사(經史)에 통달하고 마음씨를 바르게 가진 자를 선택하여 날짜를 바꾸어 가면서 입직(入直)하게 하여 경사를 토론하고 나라 다스리는 방도를 헤아려 생각하시어 넓고 밝은 학문을 이루도록 하소서. 그리고 사관(史官)으로 하여금 곁에서 모시고, 좌사(左史)는 말씀하신 것을 기록하고, 우사(右史)는 행하신 일을 빠짐없이 기록하게 하여서 먼 후세에까지 전하소서. 또 세자(世子)를 위하여 특별히 서연(書筵)을 열어 당대의 뛰어난 선비로 사부(師傅)를 삼고, 경서(經書)에 밝고 품행이 바른 선비를 요속(僚屬)으로 삼아 아침저녁으로 함께 있으면서 경적(經籍)을 강론하여 근본을 바르게 하고 근원을 맑게 하는 학문을 밝히도록 하소서.
다음으로 부병(府兵)은 8위(衛)에 통속(統屬)되고, 8위는 군부사(軍簿司)에 통속됩니다. 42도부(都府)의 병사가 12만 인인데, 대(隊)에는 정(正)이 있고, 오(伍)에는 위(尉)가 있어서 상장(上將)에 이르기까지 서로 통속이 있게 한 것은 대궐의 경호를 엄하게 하고, 외적의 침입을 방어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원(元)나라를 섬긴 이후로 태평하였던 세월이 오래 지속되자, 문무(文武) 관원들이 안일하고 태만하여 대궐을 경호하는 금위(禁衛)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에 근시(近侍)와 충용위(忠勇衛)에 모두 호군(護軍) 이하의 여러 관직을 설치하여 금위의 임무를 대신하게 하고 봉록(俸祿)을 주었습니다. 이렇게 되어 조종(祖宗)의 8위 제도는 모두 유명무실하게 되었으며, 42도부의 5원(員)ㆍ10장(將)ㆍ위(尉)ㆍ정(正)은 나이가 어리고 유약한 자제들이 아니면 공장(工匠)ㆍ상인(商人)ㆍ천례(賤隷)들입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근시(近侍)는 좌우위(左右衛)에 합하고, 사문(司門)은 감문위(監門衛)에 합하고, 사순(司楯)은 비순위(備巡衛)에 합하고, 충용위(忠勇衛)는 신호위(神虎衛)에 합하소서. 나머지 각 애마(愛馬)는 직무가 비슷한 여러 위(衛)에 병합시켜 날짜를 번갈아 입직하게 하시고, 부지런함과 게으름을 상고하여 각각 그 위(衛) 안의 호군 이하에서 위ㆍ정의 직책에 이르기까지 품계에 따라 채용하여, 그 봉록을 받아먹으면서 그 직무에 부지런하도록 하소서. 그러면 사람들은 출사(出仕)하기를 즐거워하고, 나라의 봉록은 절약되며, 금위가 엄해지고 군비(軍備)도 신장될 것입니다.
사막(司幕)은 옛날의 상사(尙舍)이자 지금의 사설(司設)이며, 사옹(司饔)은 옛날의 상식(尙食)이자 지금의 사선(司膳)입니다. 지금은 사설이 봉록을 받아먹으면서도 직무를 수행하지 않으며, 사막은 일을 부지런히 하면서도 봉록을 받아먹지 못하며, 사옹 이하의 직책 역시 그러합니다. 원하건대 사막과 사옹 등의 애마를 6국(局)에 합하여 선왕(先王)의 옛 제도를 회복하고, 근대의 폐단을 개혁한다면, 명칭과 실상이 서로 맞고 직무가 제대로 확립될 것입니다.
다음으로 공로가 있지 않으면 후(侯)를 봉하지 않는 것이 우리 조정의 법입니다. 김부식(金富軾)은 참란(僭亂 묘청(妙淸)의 반란을 말함)을 제거하고 서도(西都 평양(平壤))를 평정하여 낙랑후(樂浪侯)에 봉하여졌으며, 김방경(金方慶)은 반란(叛亂 제주도에서 김통정(金通精)이 일으킨 반란)을 일으킨 탐라(耽羅)를 정벌하고 동쪽의 왜국(倭國)을 문죄하여서 상락공(上洛公)에 봉하여졌습니다. 원컨대 지금부터는 재상이라도 사직(社稷)을 편안하게 하고 변방을 평정시킨 공신이 아니면, 군(君)으로 봉하는 일이 없게 하십시오.
다음으로 환관은 건국 초부터 경릉(慶陵 충렬왕(忠烈王)) 때에 이르기까지 관직에 참여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근래에는 궁중에서 왕명을 전달하는 직임으로 도리(道理)를 논하고 국정을 다스리는 반열에 참여하게 하였으니, 이는 조정을 높이는 것이 아닙니다. 원컨대 지금부터는 환관에게 벼슬을 제수하는 것을 충렬왕 때의 제도에 따라서 조정의 관직을 수여함이 없도록 하십시오.
다음으로 학교(學校)는 풍속을 교화시키는 근원입니다. 나라의 치란(治亂)과 정치의 득실(得失)이 모두 여기로부터 시작됩니다. 근년에 병란이 일어나 학교가 폐지되고 돌보지 않아서 무성한 풀밭이 되었습니다. 고을에서 유학자를 칭탁하여 군역(軍役)을 피하는 자들이 5, 6월 사이에 이르러 아이들을 모아서 당ㆍ송(唐宋)나라 때 시인(詩人)이 지은 절구(絶句)를 읽게 하다가 50일이 되면 그만두었는데, 이것을 하과(夏課 여름 공부)라고 합니다. 수령(守令)이 된 자가 이를 보고도 아무렇지 않게 여겨 일찍이 개의치 않았으니, 이와 같이 하고서 경전에 밝고 행실이 착한 선비를 얻어 나라를 융성하게 다스리는 데 도움을 주고자 한들 될 수 있겠습니까?
원컨대 지금부터는 근면하고 민첩하며 학문이 넓은 자를 교수관(教授官)으로 삼아 5도(道)에 각각 한 사람씩 나누어 보내서 군현(郡縣)을 두루 돌아다니게 하고, 그가 탈 마필(馬匹)과 음식물의 공급은 향교(鄕校)에 맡겨 주관하게 하소서. 또 외방(外方)에서 한가히 지내며 유학(儒學)을 업으로 삼는 자를 본관(本官)의 교도(教導)로 삼아, 자제(子弟)들로 하여금 항상 사서오경(四書五經)을 읽도록 하고, 사장(詞章 시ㆍ부(詩賦))은 읽지 못하게 하소서. 교수관은 여러 곳으로 돌아다니면서 공부하는 과정을 엄하게 세우고, 몸소 어려운 부분을 강론하여 학업에 능통한지 능통하지 않은지를 시험하여, 그 이름을 올려 명부에 쓰고, 인도하고 권장하여 실제로 유용한 인재를 양성하게 하십시오. 이들 중에 인재를 많이 얻은 자가 있으면 차례에 관계없이 발탁하여 등용하고, 만약 잘 가르치지 못하여 성과가 없는 자는 벌(罰)을 논하도록 하십시오.
다음으로 맹자(孟子)께서 이르기를, ‘불효(不孝)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그중에서 뒤를 계승할 아들이 없는 것이 가장 크다.〔不孝有三 無後爲大〕’고 하였으니, 그것은 선조에 대한 제사를 끊어지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옛날에 부모가 세상을 떠나면 야외(野外)에 장사를 지낸 후 우제(虞祭)를 지내어 영혼을 편안하게 하고 사당(祠堂)을 지어 제사 지냈으니, 이는 사망한 부모를 섬기기를 생존한 자를 섬기는 것처럼 하는 도리입니다. 우리 동방에 가묘(家廟)의 법은 오랫동안 폐지되어 없어졌습니다. 지금은 국도(國都)에서부터 군현(郡縣)에 이르기까지 대체로 집이 있는 자는 반드시 영혼을 모시는 사당을 세워서 위호(衛護)라고 이르니, 이는 가묘의 유법(遺法)입니다.
아! 부모의 시신을 지하(地下)에 묻어두고 가묘를 만들어 제사 지내지 않는다면, 부모의 혼령이 어느 곳에 의지하겠습니까? 심히 자식 된 자의 마음이 아닌데, 다만 관습이 일상적인 예가 되어서 일찍이 생각을 하지 못한 것입니다. 원컨대 지금부터는 한결같이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써서 대부(大夫) 이상은 3대(代)까지 제사 지내고, 6품(品) 이상은 2대까지 제사 지내게 하며, 7품 이하에서 서인(庶人)에 이르기까지는 그 부모만을 제사 지내게 하십시오. 정결한 방 한 칸을 선택하여 각각 감실(龕室) 하나를 만들어서 그 신주(神主)를 넣어 두되 서쪽을 윗자리로 삼도록 하십시오. 매월 초하루와 보름날에는 반드시 전(奠)을 올리고, 외부에 출입할 때에는 반드시 고하며, 새로 나온 음식을 먹을 때에는 반드시 올리게 하십시오. 기일(忌日)에는 반드시 제사 지내게 하되 기일을 당해서는 말을 타고 외출하지 못하게 하며, 빈객(賓客)을 대할 때는 상중(喪中)일 때의 예절과 같이 하게 하며, 분묘(墳墓)에 성묘하는 예는 그 풍속을 따르도록 허락하십시오. 매년 삼령절(三令節)과 한식(寒食)은 조상을 추모하는 좋은 풍속을 이루게 하여서, 이를 어기는 자는 불효로 논죄하십시오.
다음으로 전(傳)에 이르기를, ‘충실한 믿음으로 대우하고 봉록(俸祿)을 후하게 주는 것은 선비를 권면케 하는 바이다.〔忠信重祿 所以勸士也〕’고 하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옛날에는 위로는 공경(公卿)으로부터 아래로 하급 관리에 이르기까지 봉록을 후하게 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무릇 조정에 벼슬하는 자는 공무(公務)에만 마음을 기울였는데, 호강(豪强)한 자들이 토지를 겸병한 이후로 조세(租稅)가 날로 감소하고 녹질(祿秩)이 해마다 줄어서 선왕(先王) 때 제정한 봉록의 수량은 한갓 문구(文具)가 되었습니다. 마땅히 유사(有司)로 하여금 옛 제도를 참작하여 그 녹질을 풍족하게 한다면, 선비들이 항심(恒心)이 있게 되어 염치(廉恥)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다음으로 경기(京畿)의 8현(縣)에는 요역(徭役)이 매우 번다합니다. 그러나 현령(縣令)이 통제하는 것도 아니고, 관찰사(觀察使)가 다스리는 것도 아닙니다. 또 수령(守令)이 교화를 펴는 일도 없기 때문에 과렴(科斂)이 고르지 못하고 부역에 제한이 없어 백성들이 의지하고 살 수 없어도 호소할 데가 없습니다. 원컨대 지금부터는 각 도(道)의 예(禮)에 따라 각 현(縣)마다 5, 6품(品)의 관원을 두어 개성부(開城府)로 하여금 그 치적을 조사하여 승진시키고 좌천시킴을 명확하게 하소서.
다음으로 근년 이래로 군사를 거느리는 직임은 그 재능을 묻지 않고, 다만 재상의 자리에 있으면 문득 명하여 내보내었으니, 군사들을 통제함이 마땅함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도적들의 기세가 더욱 확장되고 침략을 초래하여, 군현(郡縣)들이 텅 비어 쓸쓸하게 되었습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임금이 장수를 택하여서 쓰지 않으면 그 나라를 적에게 내주는 것이고, 장수가 병법을 모르면 그 군주를 적에게 주는 것이다.’고 하였으니, 장수를 택하여서 왜적(倭敵)을 제어하는 것이 진실로 오늘날의 급선무입니다. 원컨대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와 대간(臺諫)으로 하여금 위엄과 덕망(德望)이 일찍부터 드러난 자를 각각 천거하게 하고, 그들을 장수로 임명하여 군정(軍政)을 펼치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군정은 여러 곳에서 나오면 호령(號令)이 엄숙하지 못한 것인데, 지금 한 도(道)에 절제사(節制使)를 세 사람이나 두는 것은 옛 제도가 아닙니다. 원컨대 지금부터 동북면과 서북면 외에는 한 도에 한 명의 절제사만 두고, 나머지는 모두 없애도록 하십시오.
다음으로 군사란 백성의 생명을 맡고 있어서 나라의 큰 정사에 속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5군(軍)과 42도부(都府)는 대개 한(漢)나라 때의 남북군(南北軍)과 당(唐)나라 때의 부위병(府衛兵)에 해당하는 편제입니다. 요(遼 거란(契丹))나라와 금(金 여진(女眞))나라가 우리나라의 양계(兩界)에 접해 있는데, 요나라는 후당(後唐) 명제(明帝)의 사위 석경당(石敬瑭)을 후진(後晋)의 임금으로 세워서 아들의 나라로 삼고, 범이 먹이를 노리듯이 날카로운 눈초리로 천하를 보며 우리에게 화친을 요구하였으나, 우리 태조(太祖 왕건(王建))께서는 그것을 거절하였습니다. 금나라는 요나라와 송(宋)나라의 세 황제를 사로잡아 위세를 천하에 떨쳤으나, 감히 우리나라를 엿보지 못하고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은 조종(祖宗)들께서 행하신 군정(軍政)이 그 율령(律令)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근세에 와서 군사 제도가 크게 무너져서 전쟁을 한 지 30여 년 동안에 군정(軍政)의 계통이 없었으니, 전술이 없는 장수가 훈련되지 않은 백성들을 거느리고 싸우게 되니, 적이 왔다는 풍문에 놀라 달아나 흩어져서 천리의 들판에 해골(骸骨)이 버려져 있습니다. 하찮은 왜놈들이 이처럼 나라의 걱정거리가 되고 있으니, 어찌 가슴이 아프지 않겠습니까? 원컨대 지금부터는 전직(前職) 4품 이상인 사람들을 3군에 예속시켜 장좌(將佐)에 배치하고, 5품 이하의 사람들은 부위(府衛)에 소속시켜 군부사(軍簿司)의 통제를 받게 하여 위아래가 서로 매이고 체통이 서로 이어져서 군정이 한 곳에서 나와 여러 사람의 마음이 한 곳으로 모이도록 하소서. 그렇게 한 뒤에 군령(軍令)을 거듭 밝히고 사졸들을 훈련시킨다면, 백만의 군중이라도 몸이 팔을 쓰는 것과 같고, 팔이 손가락을 쓰는 것처럼 될 것이니, 어디를 지킨들 견고치 않겠으며, 어디를 공격한들 빼앗지 못하겠습니까?
근래에 간신(奸臣)이 정사를 어지럽혀서 장수의 재질이 아닌 자를 중방(重房)에 널리 배치해 두고 수많은 싸움에서 고생한 자들을 겨우 첨설직(添設職)에 임명하여, 상을 주고 벌을 주는 데 법도가 없었습니다. 때문에 군사들이 해체되어 이르는 곳마다 아무런 공적도 없습니다. 원컨대 지금부터는 견고한 적의 진지(陣地)를 깨뜨리고 함락시킨 공과 적의 장수를 베고 깃발을 빼앗은 용맹과 수많은 싸움에서 고생한 자 가운데 공이 큰 사람은 상호군(上護軍)을 삼고, 그 다음은 호군(護軍)ㆍ중랑장(中郞將)에서 별장(別將)ㆍ산원(散員)에 이르기까지 모두 적절하게 임명하여 적을 격파한 공을 권장하면, 사람들이 모두 자신의 상관을 친근하게 여기고, 그를 위하여 목숨을 바칠 것입니다.【64】
다음으로 서북면은 경계가 명(明)나라와 연접하여 관계가 매우 중요하니, 다른 도(道)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성조(聖祖 왕건(王建))께서 북쪽 변방을 순행하시며 여러 번 서도(西都)에 행차하신 것은 진실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지난번에 여러 흉악한 자들이 정권을 마음대로 휘두르면서 군민(軍民)의 행정을 맡은 관리를 현능(賢能)한지 현능하지 못한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고, 모두 자신들의 무리를 배치하고, 매관매직(賣官賣職)하여 억지로 팔았으며, 온갖 방법으로 세금을 징수하자 백성들이 고난을 견디지 못하여 늙은이를 부축하고 어린이를 이끌며 압록강을 건너 서쪽으로 갔으니 변방이 텅 비었습니다. 가히 한심하다고 이를 만하니, 요동(遼東)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사람이 있다고 말하겠습니까?【65】
지금 나라에서 장수를 선발하고 수령(守令)을 택하여서 5도(道)를 어루만져 안정시키고 있으나, 오직 이 한 방면만 아직도 옛 풍습을 좇아서 임금의 덕화(德化)를 받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원컨대 지금부터는 주현(州縣)의 백성을 다스릴 관원을 모두 벼슬이 높고 명망도 높은 자를 뽑아서 임명하십시오. 그 군(軍)은 한 곳에 만호(萬戶) 두 사람을 두되, 그 하나는 조정에 있는 관리로서 문무를 겸비하고 위엄과 명망이 일찍부터 드러난 자를 선택하여 삼을 것이며,【66】 그 하나는 그 지방의 관리 중에 청렴하고 위엄이 있으며 용맹이 있고 산천(山川)의 험준함과 평탄함을 잘 아는 자를 택하여 삼도록 하십시오.
천호(千戶) 역시 조정에 있는 관리 중에서 청렴하고 위엄이 있는 자를 채용하고, 백호(百戶) 이하는 그 지방의 관리로 하여금 많은 사람 중에서 선출하여 바꾸어 배치하도록 하십시오.【67】 또 여러 도(道)의 예에 따라 관찰사(觀察使)를 두어 각 고을을 순행하게 하여 군정과 민정을 맡은 관리를 축출하기도 하고 승진시키기도 하며, 동북면도 이 예에 따르도록 하십시오.
다음으로 근래에 와서 역호(驛戶)가 피폐하여 모든 역마의 이송과 길 안내 역할을 주군(州郡)에서 대신하게 하므로 그 고통을 받게 되어서 고향을 떠나 도망치는 경우에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주군으로 하여금 백성들의 생업(生業)을 회복시키도록 하려면 마땅히 먼저 역호를 구휼하여야 됩니다. 나라에서 비록 정역별감(程驛別監)을 두어 여러 역(驛)들을 안정케 하고 있으나, 한 사람이 혼자서 다스릴 수 없어서 역마다 사사로이 관속을 두어서 자신의 이목(耳目)으로 삼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도당(都堂)에서 파견한 사람이 아니어서 사람마다 업신여기고 얕잡아 보아서 안정시킬 수 없습니다. 원컨대 지금부터 역마다 5, 6품(品)의 승(丞) 한 사람씩을 두고, 그 보거(保擧)는 수령의 예와 같이 하여 파견하게 하십시오. 그중에서 역호를 부요하게 만들고 역마를 번성하게 한 사람이 있으면, 관찰사가 도당에 보고하여 수령이 궐원(闕員)된 곳에 보충하고, 또 경관(京官)을 제수하여 포상하며, 변방 먼 곳의 역승(驛丞)은 관찰사로 하여금 추천하게 하여 보임토록 하십시오.
다음으로 상평창(常平倉)과 의창(義倉)의 법은 흉년에 굶주리는 백성들을 구제하는 훌륭한 계책입니다. 경수창(耿壽昌)이 의창을 두자고 한 주소(奏疏)와 장손평(長孫平)이 사창(社倉)을 두자고 한 건의는 그 법이 대체로 주(周)나라 때의 위인(委人)이란 관직에서 나온 것인데, 나라를 가진 자는 마땅히 먼저 해야 할 일입니다. 지난해에는 한여름에 군사를 일으킨 데다 왜구의 침략까지 더해져서 농사를 짓는 시기를 어기게 되었고, 가을에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것도 제때를 놓쳤습니다. 금년에는 또 홍수(洪水)의 피해를 당하여 동남쪽 주군(州郡)이 텅 비어 아무 것도 없으니, 흉년을 구제할 계책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라에서 이미 사전(私田)을 혁파하였기 때문에 가는 곳마다 모두 곡식이 축적되어 있습니다. 원컨대 지금부터 주군에 모두 상평창을 설치하여 풍년에는 거두어들이고 흉년에는 나누어 주는 법을, 근일에 도평의사(都評議使)가 주청한 바에 따라 시행토록 하십시오. 가만히 듣건대, 양광도(楊廣道)에는 이미 상평창을 설치하였다고 하니, 마땅히 각 도(道)로 하여금 이에 의하여 시행케 하시고, 법대로 하지 않는 수령(守令)이 있으면 벌을 주소서.
다음으로 먹는 것은 백성들에게 하늘처럼 소중한 것이고, 곡식은 소〔牛〕로 인하여 생산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까닭에 이 나라에 금살도감(禁殺都監)이 있는 것은 농사를 소중히 여기고 백성들의 생계를 넉넉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달단(韃靼 북원(北元)의 몽고족(蒙古族))의 수척(水尺 백정(白丁))은 곡식을 경작하는 대신에 소를 도살하여 먹는데, 서북면이 더욱 심하여 주군(州郡)의 각 역참(驛站)에서는 모두 소를 잡아 손님을 대접하고 있으나 이를 금하지 않으니, 마땅히 금살도감과 주군의 수령들로 하여금 금령(禁令)을 거듭 시행하게 할 것이며, 법을 위반한 자를 붙잡아서 관아(官衙)에 신고하는 자가 있으면 금령을 어긴 자의 가산(家産)으로 상을 충당하게 하소서.
다음으로 외방(外方)에서 삭선(朔膳 매달 초하루에 지역의 산물로 임금께 차려 올리는 음식)과 사객(使客)을 접대하는 등의 일로 인하여 비록 한창 농사철을 당할지라도 농민들을 몰아서 집합시켜 가시덤불 속으로 내달리게 하며 열흘이나 한 달을 사냥하게 합니다. 이 때문에 농사짓는 시기를 놓치게 되니, 백성들이 먹을 것이 부족한 것은 오로지 여기에서 연유된 것입니다. 만약에 닭이나 돼지 같은 가축은 우리 안에서 잡을 수 있으니, 백성들에게 소요를 일으키지 않을 것입니다. 원컨대 지금부터 경기(京畿) 지역에 닭ㆍ돼지의 사육장 두 곳을 만들어서, 하나는 전구서(典廐署)에서 주관하게 하여 종묘 제사의 용도로 받들게 하고, 또 하나는 사재시(司宰寺)에서 주관하게 하여 어주(御廚)에 바치는 것과 빈객(賓客)을 접대하는 용도로 제공토록 하십시오. 주군의 각 역참에 이르기까지 모두 사육하게 하여 씀씀이를 절약하고 잘 길러서 새끼를 밴 것이나 알을 낳는 것을 도살하지 않는다면, 몇 해가 지나지 않아서 제사와 빈객의 소용에 공급할 가축이 넉넉해지고 우리 백성들이 먹을 것도 풍족하게 되어서 사냥하느라고 농사를 망치는 걱정도 없어질 것입니다.
다음으로 사옹(司饔)에서는 해마다 각 도에 사람을 보내 대궐에서 쓸 자기(瓷器)의 제조를 감독하고 있습니다. 원래 1년에 한 번씩 하게 되었으나, 공사(公事)를 빙자하여 사사로운 이익을 도모하여서 온갖 방법으로 침해하고 빼앗아가고 있습니다. 한 도(道)에서 짐을 싣고 오는 것이 8, 90마리의 소에 이르러 지나오는 곳마다 떠들썩하나, 경도(京都)에 이르러서 바치는 것은 모두 백분의 일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전부 사사로이 차지하니, 해가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또 화살을 만드는 새의 깃과 소의 힘줄, 전죽(箭竹) 등을 구하기 위하여 사람을 파견하여서 백성들을 성가시게 하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원컨대 지금부터 각 관사(官司)의 애마(愛馬)를 지방으로 파견하는 일은 일절 금하게 하소서. 다만 이에 관계되는 일은 모두 도당(都堂)에 알리게 하고, 도당에서 관찰사(觀察使)에게 명령을 내려서 관찰사가 물건이 있는 주현(州縣)에 배정하여 안건에 따라 직접 바치게 하면, 백성들이 편안해질 것입니다.
다음으로 군사들이 왜놈들과 싸워서 빼앗은 마필(馬匹)과 병기(兵器) 및 백성들이 왜적을 죽이고 획득한 물건을 그곳의 군인과 백성이 관아에 알려서, 경내(境內)에서 국문하기를 도적과 같이 하여 모두 경도(京都)로 실어 보내 큰 상을 받으려고 하니, 임금을 속이고 백성들에게 해독을 끼침이 이보다 더 심할 수 없습니다. 이 때문에 군사들이 해체되고 왜적들의 기세가 더욱 떨치게 되니, 매우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원컨대 지금부터 왜적을 격파한 모든 도(道)의 장수들은 귀만 베어서 바치게 하고, 군사와 백성들이 빼앗은 왜적의 물건에 대해서는 죄를 추궁하지 말도록 분명하게 기록하여 법으로 만들면, 사람들이 그 이득을 즐겁게 여겨 용감하게 싸울 것입니다. 이 법을 범하는 사람은 중앙에서는 헌사(憲司)에서, 지방에서는 관찰사가 청렴하지 못한 죄로 논하게 하십시오.
다음으로 재상(宰相)은 임금의 버금이 되는 자리이니, 부여된 바가 하늘이 준 지위를 함께하고, 하늘이 백성을 다스리는 일을 대행하는 자입니다. 그 존귀함이 비할 데가 없으니, 불행하게도 죄가 있으면 폐출시켜도 되고, 물리쳐도 되며, 사사(賜死)하여도 가합니다. 하지만 하리(下吏)를 시켜 결박하여 목에 칼을 씌우고 족쇄(足鎖)를 채우며, 머리를 베어 매달고 시체를 드러내놓고 장례를 치르지 못하도록 함은 너무 심한 일입니다.
한 문제(漢文帝) 때 가의(賈誼)가 상소하여 이르기를, ‘형(刑)이 대부(大夫)에게 미치지 않아야 한다.〔刑不上大夫〕’고 하니, 문제가 깊이 느끼고 받아들였습니다. 이로부터 대신(大臣)이 죄가 있으면 모두 사사하였지, 형벌을 가하여 죽여서 모욕을 주지 않게 하여 예로써 아랫사람을 대우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당시 사대부(士大夫)들이 남의 과실에 대하여 말하기를 부끄럽게 여겨 한나라 왕조(王朝) 4백 년의 예속(禮俗)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원컨대 지금부터 양부(兩部)의 대신이 비록 죽임을 당할 죄가 있더라도 나라에 반역한 죄명(罪名) 외에는 한 문제를 본받아서 죄인을 죽여 그 시체를 여러 사람에게 보이는 형벌은 쓰지 말아서, 나라에서 대신을 중히 여기는 성대한 은전(恩典)을 이루도록 하십시오.
다음으로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벌은 자손들에게 미치지 않게 한다.〔罪不及嗣〕’고 하였으며, 전(傳)에 이르기를, ‘죄인의 죄는 처자(妻子)에게 미치지 않는다.〔罪人不孥〕’고 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순(舜) 임금은 곤(鯤 우(禹)의 아버지)을 죽였으면서도 우(禹)를 재상으로 삼았고, 주 무왕(周武王)은 은(殷)나라 주(紂)를 죽였으면서도 무경(武庚 주(紂)의 아들)을 벼슬에 봉하였으니, 이는 곧 천지가 만물을 살리는 마음입니다. 근래에 이르러 사람을 죽이는 것을 음식 먹듯이 하고, 남의 가족을 다 죽여 놓고도 오히려 후손이 있을까 두려워하고 있으니, 불인(不仁)함이 매우 심합니다. 원컨대 지금부터는 무릇 죄가 있는 자는 삼대(三代)의 훌륭한 임금들이 시행한 제도를 본받아 그들의 아내와 자식을 연좌시킴이 없도록 하여, 조정에서 인자함을 베푸는 정치를 보여 주도록 하십시오.
다음으로 옛날 문왕(文王)은 모든 옥송(獄訟)과 여러 가지 삼가야 될 금계(禁戒)를 감히 알려고 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주나라가 잘 다스려지게 된 것입니다. 진평(陳平 한 문제(漢文帝) 때 재상)이 나라의 전곡(錢穀)이 출납되는 수량을 알지 못한 것에 대하여 군자(君子)들은 진평이 재상의 체통을 아는 사람이라고 말하였으니, 그가 다른 관아의 직무를 침범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본조(本朝)의 제도는 도당(都堂)이 백관을 거느리고 호령을 반포하며, 헌사(憲司)가 백관을 규찰하여 풍속을 바로잡고, 전법도관(典法都官)이 사리의 옳고 그름을 분별하고 옥송을 판결하는 것이 그 직책입니다. 근자에 이르러 요행을 바라고 이득을 탐내는 무리들이 대내(大內 임금이 있는 곳)를 기망하고 도당을 업신여기며, 송사의 서류가 구름처럼 쌓여 있고, 문서를 이첩하는 동안에 관습을 따라 구차하게 하여 번잡함을 이루 말할 수 없으니, 이는 관아를 설치하고 직무를 나눈 본래의 뜻이 아닙니다. 원컨대 지금부터는 송사를 하는 자로 하여금 각기 담당 관사(官司)에 소송을 제기하게 하고, 대내와 도당에 직접 올리는 것을 일체 금지시켜, 대내를 높이고 도당을 엄하게 하십시오.
다음으로 공적인 금전이나 사적인 금전을 불려서 늘리는 경우에는 일정한 원금에 일정한 이자를 붙여야 합니다. 그런데 근래에 재화(財貨)를 불리는 무리들이 이득에만 눈이 밝아 일정한 원금의 이자를 10배까지나 이르게 하여, 금전을 빌려 쓴 자들이 아내와 자식을 팔아도 끝내 다 갚지 못하기 때문에 나라에서 이미 이를 금하는 명이 있었습니다. 지금 공판도감(供辦都監)의 보미(寶米)는 이자를 증식시킴이 한도가 없어 빌린 자가 집을 잃고 생업을 잃게 하니, 나라에서 백성을 구휼하는 본래의 뜻이 아닙니다. 원컨대 지금부터는 일정한 원금에 일정한 이자를 받게 하고, 그 이상을 취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다음으로 삼사(三司)와 육부(六部)의 관원들은 때때로 직접 소속된 각 관아에 찾아가, 그들이 보고한 것을 가지고 문서(文書)를 대조하여 살펴보고, 회계(會計)를 일일이 점고(點考)하여 사무가 해이해짐이 없도록 하십시오. 만약 법을 받들지 않는 자가 있으면, 헌사(憲司)에서 조사하고 처리하게 하십시오. 죄가 큰 자는 강등시켜 다른 직무에 임명하거나 제명시켜 임용하지 말되, 죄에 따라서 의논하게 하고, 죄가 작은 자는 순군(巡軍)에 통첩하여 태장(笞杖)을 치게 한 다음에 본직으로 돌려보내도록 하십시오.
다음으로 무릇 서울과 지방의 대소 관리들이 임명장을 내린 지 여러 날이 되어도 즉시 관아에 나아가 부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공사(公事)를 지체시키고, 문서와 전곡(錢穀)이 모두 간교한 이속(吏屬)들에 의해 숨겨지게 되니, 이는 커다란 폐단이자, 신하가 성심껏 임금을 섬기는 도리도 아닙니다. 원컨대 지금부터는 대성(臺省)과 정조(政曹)를 제외한 서울과 지방의 대소 관리는 임명한다는 비지(批旨)가 내린 뒤로부터 서울의 관원은 3일을 한정하고, 지방의 관원은 10일을 한정하여 대궐에 나아가 사은(謝恩)하고 즉시 출발하여 관아에 나아가 부임하게 하십시오. 이를 권지행사(權智行事)라고 일컫는 것은 신관(新官)과 구관(舊官)이 마주 대하여 분명하게 계권(契券)을 만들어서 서로 직접 주고받기 때문이니, 고과(考課)의 증빙을 삼도록 하십시오. 만약 법대로 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서울에서는 헌사(憲司)가, 지방에서는 관찰사가 법에 따라 엄중히 다스리게 하십시오.
다음으로 근년 이래로 기강(紀綱)이 해이해져서 향리(鄕吏)가 된 자가 간혹 전쟁에 참여한 공로를 일컬어서 관직을 함부로 받기도 하고, 혹은 잡과(雜科)를 빙자하여 본래의 역(役)을 피하려고 꾀합니다. 혹은 권세 있는 자에게 청탁하여 외람되게 관질(官秩)이 올라간 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아서 주군(州郡)이 텅 비게 되고, 8도(道)가 피폐하게 되었습니다. 원컨대 지금부터는 세 아들 중에 한 아들〔三丁一子〕에게 3, 4대 동안 향역(鄕役)을 면제하였더라도 확실한 문계(文契)가 없는 자와, 전쟁에 참여한 공로로 향역을 면제하였더라도 특별히 뛰어난 공로가 없이 공패(功牌)를 받은 자와, 잡과라도 성균관(成均館)의 전교(典校)ㆍ전법(典法)ㆍ전의(典醫) 출신이 아닌 자와 첨설직(添設職)의 봉익(奉翊)과 실직의 3품(品) 이하는 강제로 본래의 역에 종사하게 하여, 주군(州郡)의 향리로 채우도록 하십시오. 지금부터는 향리에게 명경과(明經科)를 허락하지 마시고, 잡과 출신에게 향역(鄕役)의 면제를 허락하지 말며, 이것을 일정한 법식으로 삼도록 하십시오.”라고 하였다.【80】
[《고려사(高麗史)》 78권 〈식화지(食貨志) 전제(田制) 녹과전(祿科田)〉]
고려(高麗)의 헌부(憲府)에서 또 상소하여 전제(田制)에 대해 논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하늘이 화란을 뉘우쳐 여러 흉악한 무리들이 이미 섬멸되고, 신씨(辛氏)도 이미 제거되었습니다. 마땅히 사전(私田)을 일제히 개혁하여 백성들이 부유하고 장수하는 세상을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이때가 바로 그런 기회입니다. 그런데 세신(世臣)과 거실(巨室)들은 사직(社稷)을 위한 큰 계책은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폐해가 된 풍습을 그대로 따라서, 서로 터무니없는 소문을 퍼뜨리어 인심을 부추겨서 사전을 회복시키려고 합니다. 전하(殿下)께서 나라를 다시 일으켜 왕위에 오르신 지 열흘 만에 백성들이 도탄에 빠진 것을 걱정하고, 오랜 세대의 큰 폐해를 깊이 뉘우치어 깨달으셨습니다. 멀리는 주(周)나라 때 규전(圭田)과 채지(采地)의 법을 따르고, 가깝게는 문종(文宗)께서 경기(京畿)를 넓게 개척하였던 제도를 준수하여, 경기는 개경(開京)에 살면서 시위(侍衛)하는 자에게 전지(田地)로 주어서 사족(士族)을 우대하였으니, 이는 바로 주 문왕(周文王)이 벼슬한 자에게 대대로 봉록(俸祿)을 주신 아름다운 뜻입니다. 또한 각 도(道)에는 단지 군전(軍田)만 주어 군사들을 구휼하였으니, 곧 조종(祖宗)께서 군사를 선발하여 전지를 주었던 훌륭한 법입니다. 이에 중앙과 지방의 경계를 확실히 나눔으로써 서로 혼란을 방지하고, 겸병(兼倂)의 문을 막고 서로 다투며 송사하는 길을 막았으니, 참으로 성스러운 제도입니다. 그러나 경기 지역에서 전지를 받았는데도 수량이 차지 않는 자에게는 지방의 것을 주려고 하니, 이는 전하께서 다시 겸병의 문을 열어 온 나라의 백성들을 끓는 물과 뜨거운 불 속에 두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신들은 전하께서 나라를 다시 일으키신 성대한 정사를 위하여 몹시 애석하게 여깁니다. 먼저 토지 제도를 바로잡지 않은 채, 나라를 다시 일으킨다는 것은 신들이 감히 알지 못합니다.
지금에 6도(道)의 관찰사가 보고한 바로는 개간한 전지의 수량이 50만 결(結)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왕실에 바치는 곡물은 풍족하게 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10만 결을 우창(右倉 풍저창(豐儲倉))에 소속시키고 3만 결은 사고(四庫)에 소속시켰습니다. 관리들에게 주는 녹봉은 후하게 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10만 결을 좌창(左倉 광흥창(廣興倉))에 소속시키고, 조정의 관원들을 우대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경기의 전지 10만 결을 떼어서 나누어 주니, 그 나머지는 겨우 17만 결뿐입니다.
이는 6도의 군사들에게 주는 전지와 진(津)ㆍ원(院)ㆍ역(驛)ㆍ사찰(寺刹)에 주는 전지 및 향리(鄕吏)ㆍ사객(使客)ㆍ아록(衙祿)ㆍ늠급(廩給)의 용도로는 오히려 부족하고, 군수(軍需)로 써야 할 것도 나올 곳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또 경기 바깥의 지방을 사전(私田)으로 주려고 하니, 잘 모르겠습니다마는 왕실에 바칠 공상(供上)과 녹봉의 비용, 진ㆍ원ㆍ역ㆍ사찰 등 여러 명목의 전지는 어디에서 나오며, 방진(方鎭)의 병사와 해도(海道)의 군사에게는 무엇으로 먹이겠습니까? 만일 3, 4년 동안 홍수(洪水)와 가뭄의 재해가 있게 되면 무엇으로 진휼할 것이며, 수많은 군사들을 먹이는 비용을 무엇으로 제공할 것입니까?
전하께서는 위로는 태조(太祖)께서 건국하신 큰 사업을 계승하시고, 아래로는 쇠망하게 된 나라를 다시 일으켜 영원히 전할 기반을 열어 놓았습니다. 지금이야말로 나라에 필요한 것을 축적하여 제사와 빈객의 접대에 쓰이는 것을 넉넉히 하며, 녹봉을 넉넉하게 주어 백관(百官)을 후대하고, 군사들의 식량을 넉넉하게 하여 3군(軍)을 양성할 때입니다. 그런데 도리어 거실(巨室)들이 근거도 없이 퍼뜨린 말을 두려워하여 백성들에게 돌아갈 큰 폐해를 생각하지 않으시고, 지방에 사전을 회복하여서 간교한 무리들이 겸병하는 문을 열어 주려고 합니다. 3군을 굶주리게 하여 6도의 변방에 외적(外敵)의 침구를 조장하고, 녹봉을 박하게 주어 백관의 염치를 무너뜨리며, 나라의 씀씀이를 모자라게 하여 제사와 빈객의 비용을 부족하게 하시니, 어찌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하는 정치이겠습니까? 원컨대 전하께서는 무릇 개경에 거주하는 자에게는 경기 안의 전지만 주고, 경기 바깥 지방의 전지를 주는 것을 허락하지 않음을 국법으로 정하여 백성들과 더불어 고쳐 시작하십시오. 이로써 나라의 씀씀이를 넉넉하게 하고, 백성들의 생활을 후하게 하며, 조정의 관료들을 우대하고, 군량을 풍족하게 하십시오.”라고 하였다.【82】
[《고려사(高麗史)》 45권 〈공양왕세가(恭讓王世家) 원년조〉]
고려(高麗) 공양왕(恭讓王)이 효사관(孝思觀)에 나아가서 신우(辛禑)와 신창(辛昌)을 죽인 일을 태조(太祖 왕건(王建))에게 고하였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옛 조선(朝鮮) 말엽에는 나라가 아주 작게 나뉘어져서 78개국이 되기에 이르렀더니, 약한 나라를 강한 나라가 병탄(倂呑)하여 모두 큰 세 나라가 되어서 전쟁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성조(聖祖)께서 제왕의 대업(大業)을 일으켜 군사가 가는 곳마다 많은 도적들이 평정되었습니다. 김부(金傅 신라(新羅) 경순왕(敬順王))가 빈객(賓客)이 되고, 견훤(甄萱 후백제 임금)이 와서 항복하며, 그 아들 신검(神劍)이 투항하여 통일이 되어, 자손들이 서로 전하여 내려온 지 457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공민왕(恭愍王)이 아들을 두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니, 적신(賊臣) 이인임(李仁任)이 나라의 정사를 제멋대로 하려고 도모하였습니다. 이에 신돈(辛旽)의 비첩(婢妾)인 반야(般若)가 낳은 신우를 세워서 임금으로 삼고, 친척 아우인 이림(李琳)의 딸을 출가시켜 아들 신창을 낳고, 이들 아비와 자식이 서로 왕위를 계승하게 되어 나라의 운명이 중간에 끊어졌습니다.
근자에 신창이 명(明)나라의 경사(京師)에 입조(入朝)할 것을 청하자, 예부(禮部)에서 보낸 자문(咨文)에 이르기를, ‘황제의 칙지(勅旨)를 받드니 「고려의 임금 자리가 후손이 끊기어서 비록 이성(異姓)인 자를 거짓으로 왕씨(王氏)라고 하며 임금으로 삼았으니, 삼한(三韓)을 대대로 지키는 좋은 계책이 아니다. 과연 현명하고 슬기로운 배신(陪臣)이 있어 임금과 신하의 명분을 정한다면 비록 수십 년을 입조하지 않을지라도 무엇이 걱정이며, 해마다 내조(來朝)한다 하더라도 또한 어찌 싫어하겠는가? 동자(童子)는 경사(京師)에 올 필요가 없다.」고 하였습니다.’고 하였는데, 자문이 고려에 도착하자, 이림이 상상(上相)으로서 비밀에 부치고 발표하지 않았습니다.
시중(侍中) 이성계(李成桂)가 충심을 분발하고 대의를 주창하여 왕씨를 일으켜 회복시키려고 하니, 심덕부(沈德符)ㆍ정몽주(鄭夢周)ㆍ지용기(池湧奇)ㆍ설장수(偰長壽)ㆍ성석린(成石璘)ㆍ박위(朴葳)ㆍ조준(趙浚)ㆍ정도전(鄭道傳) 등 여덟 장상(將相)이 그 계책을 도와 결정하고서 종친(宗親) 및 조정의 모든 관료들과 함께 공민왕의 정비(定妃) 궁(宮)에 나아가 정비의 전지(傳旨)를 받들어 천자(天子)의 명을 선포하였습니다. 신우 부자(父子)의 폐출(廢黜)을 명한 것과 신(臣)이 태조의 후손이며 신종(神宗)의 7대 손인 까닭에 정통(正統)을 계승하게 되었다고 선포하였습니다.
6일이 지난 뒤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조상의 사당에 반정(反正)을 고하고, 신우ㆍ신창을 살려둔 채 천자의 명을 기다리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간신(諫臣) 오사충(吳思忠) 등이 신우ㆍ신창을 죽이자고 청하여 말하기를, ‘춘추필법(春秋筆法 대의명분(大義名分)의 엄정한 논법)에 난신적자(亂臣賊子)는 누구나 죽일 수 있으니〔如春秋之法 亂臣賊子 人得而誅〕, 먼저 실행한 다음 나중에 알리면 되니,〔先發後聞〕 명나라 사사(士師 옥송(獄訟)을 맡은 관리)의 판결은 필요하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계속해서 사재부령(司宰副令) 윤회종(尹會宗)이 상언(上言)하기를, ‘신우ㆍ신창 두 흉인(兇人)은 조종(朝宗)의 죄인으로서, 왕씨의 신하들과는 같은 하늘 아래에서 함께 살 수 없는 원수이니, 하루라도 왕씨의 땅 위에 두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그 말에 감복하여 그 글을 도당(都堂)에 내려 보냈더니, 모두가 간신들이 건의한 대로 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이에 신은 신우를 강릉(江陵)에서 죽이고, 신창을 강화(江華)에서 죽였습니다. 이미 그들의 죄를 다스렸으므로 심신(心身)을 깨끗이 하고 부정을 금기한 다음 날짜를 택하여 감히 성조(聖祖)의 진영(眞影) 앞에서 고하옵니다.
처음에 신우가 일찍이 왕위에 오르자, 재상 김속명(金續命)이 ‘그는 진짜 왕씨가 아니다.’고 말하였다가 이인임이 그를 추방하였고, 신돈의 비첩 반야가 스스로 말하기를, ‘신우는 바로 내가 낳은 자식이다.’고 하였다가 이인임이 그녀를 죽였습니다. 김유(金庾)와 최원(崔遠)도 명나라 황제에게 신우는 왕씨가 아니라고 하였다가, 모두 도륙을 당하였습니다. 나라 사람들이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여 아버지가 감히 그의 아들에게 이 사실을 말하지 못하고, 남편이 감히 그의 아내에게 말하지 못하였습니다. 세월이 이미 오래 되어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점점 적어지고, 또 그의 인척(姻戚)이 중앙과 지방에 뿌리를 박고 있어서 뽑아 없앨 수 없었는데, 이번에 왕씨가 다시 일어나서 회복하게 된 것은 실로 우리 성조께서 가만히 도와주신 공 때문입니다.
아! 이성(異姓)이 이미 제거되고 종묘사직이 이어졌으니, 어기지도 않고 잊지도 않아서 성조의 옛 법도를 심력을 다하여 따르려고 합니다. 우러러 생각건대, 성조께서는 공신(功臣)들을 성심으로 떠받들어 처음부터 끝까지 보전하여 주시고, 국사(國史)에 써서 먼 후세에까지 귀감이 되게 하였으니, 한 가지라도 따르지 않는다면 신은 효성스런 후손이 아닐 것입니다. 오직 하늘에 계시는 신령께서 신의 정성을 살피시고 신의 뜻을 도와주셔서 건국하신 대업(大業)을 실추함이 없이 계승하여 자손만대에까지 전해주실 것을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또 공신들에게 상(賞)을 주는 것을 고하는 글에 이르기를, “옛날 탕(湯) 임금은 이윤(伊尹)을 등용하여 우(禹) 임금의 옛 업적을 계승하였고, 손자인 태갑(太甲)이 끝맺음을 잘한 것은 이윤의 훈계에 힘입었기 때문이며, 이척(伊陟 이윤의 아들)은 태무(太戊)를 도와서 하늘을 감동시켰습니다. 태공 망(太公望)은 무용(武勇)을 떨쳐 천하가 주(周)나라를 떠받들게 하였고, 주공(周公)과 더불어 왕실을 보좌하여 도왔으므로 제(齊)나라에 봉함을 받아서 그 책명(冊名)이 맹부(盟府)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그의 후손인 제 환공(齊桓公)은 어지러운 천하를 바로잡아서 주나라를 높였습니다. 탕 임금은 6백 년 동안을 전해 내려갔고, 주나라는 은(殷)나라보다 오래갔으니, 국운의 장구함은 후세에 어떤 나라도 이에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진실로 임금들이 이윤과 여상(呂尙 태공망)이 보필한 공적을 잊지 아니하여서 그들의 자손이 어진 조상을 닮은 충성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한(漢)나라는 장량(張良)ㆍ소하(蕭何)ㆍ한신(韓信) 세 사람의 뛰어난 인물에 힘입어 건국되었습니다. 장량은 황제의 스승이 되었으나 치도(治道)를 논하게 하지 않고, 오히려 생식(生食)을 하여서 신선(神仙)이 되겠다는 청을 하였습니다. 소하는 한낱 문서를 기록하는 서리(胥吏)에서 재상이 되었으나 역시 옥(獄)에 갇혔고, 한신은 멸족(滅族)을 당하고, 영포(英布)는 반역을 꾀하여 그의 화살이 황제〔한 고조(漢高祖)〕의 몸에 맞았으니, 나라에는 믿을 만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제위(帝位)를 전하자, 아들 혜제(惠帝) 때에 대가 끊기어서 유씨(劉氏)의 한나라가 거의 진(秦)나라처럼 2대에 이르러 망하게 되었으니, 상(商)나라와 주(周)나라가 개국공신인 아형(阿衡) 이윤과 상보(尙父) 여상을 추대하여 후사(後嗣)를 보좌하게 해서 잘 다스렸던 것에 비교하면, 이 얼마나 거리가 멉니까? 성조(聖祖)께서 배현경(裵玄慶)ㆍ홍유(洪儒)ㆍ신숭겸(申崇謙)ㆍ복지겸(卜智謙)ㆍ유검필(庾黔弼)ㆍ최응(崔凝) 등 여섯 분의 공(功)에 보답하기 위하여 초상을 그려서 어진(御眞)과 마주 대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태묘(太廟)에 배향하여 봄가을로 어긋남이 없이 제사를 지냈습니다. 31대까지 전하여 오다가 공민왕 때에 이르러 아들이 없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니 국운이 중간에 끊어졌습니다.
공민왕의 장례(葬禮)를 치를 때에 무지개가 해를 거듭 둘러쌌습니다. 신우가 처음 태묘에 제사를 지내던 저녁에는 올빼미가 태실(太室)에서 울고 천지(天地)가 진동하였으며, 의릉(毅陵)의 기일(忌日) 새벽에는 큰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렸으며 천둥과 번개가 치다가 우박까지 내렸습니다. 신우가 임금의 작위(爵位)를 이어받기에 이르자, 큰 바람이 조묘(祧廟)에서 일어나 북쪽을 향해 부니, 태실의 망새〔鷲頭〕가 부러지고 묘문(廟門)이 넘어졌으며, 조묘의 침원(寢園)에 있는 소나무가 거의 절반이나 뽑히고, 쥐가 태실의 신주 밑에 깔아 놓은 요〔主褥〕를 갉아먹었으며, 왕실의 창고에 화재가 났습니다.
신창이 왕위에 옹립되자, 말이 전국보(傳國寶)를 넣어 둔 상자를 발로 차서 부서지게 하고, 자물쇠가 깨어져서 국보가 튀어나와 땅에 떨어져서 굴러갔습니다. 조종들께서 이성(異姓)의 왕위 계승에 분노하여, 그의 제사를 흠향치 않고 위엄을 나타내어 거절한 것이니, 비록 면대하여 명하고 귀를 당겨 타이르더라도 어찌 이보다 더하겠습니까? 이인임이 신우를 임금으로 세운 다음에 생모인 어미 반야를 죽여 입을 봉하자, 사평문(司平門)이 무너졌습니다. 또 오래된 뼈를 장사지내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공민왕의 궁인(宮人)이자, 바로 신우의 어머니이다.’고 하였는데, 그 관(棺)을 놓아두었던 장막(帳幕)에 화재가 나서 이를 바꾸었더니 또 화재가 났습니다.
재상 김속명을 축출하고 김유와 최원을 죽이자, 사람들이 모두 기운이 꺾여서 신씨(辛氏)에 관련된 말이면 깜짝 놀라 얼굴빛이 변하며 멸족당한다고 서로 경계하였습니다. 신우와 신창의 인척(姻戚)이 심복(心腹)과 조아(爪牙)가 되어서 중앙과 지방에 뿌리를 박고 있어서 이들을 제거하기가 산악(山岳)을 뽑는 것처럼 어려웠습니다. 시중(侍中) 이성계가 충성을 다하고 대의로 분발하여 제일 먼저 왕씨를 일으켜 나라를 회복시키자고 주창하자, 심덕부ㆍ정몽주 등 여덟 사람이 따라서 찬동하였습니다. 이에 신우와 신창 두 흉도(凶徒)를 제거하였으니, 하늘에 배향된 우리 조종 31대의 제사를 다시 계속하게 되었습니다.
옛날에 문왕(文王)은 네 사람 【굉요(閎夭)ㆍ산의생(散宜生)ㆍ태전(泰顚)ㆍ남궁괄(南宮括)】 의 어진 신하가 없었다면 주(周)나라를 세우지 못하였고, 무왕(武王)은 아홉 사람〔주공 단(周公旦)ㆍ소공 석(召公奭)ㆍ태공 망(太公望)ㆍ필공(畢公)ㆍ영공(榮公)ㆍ태전ㆍ굉요ㆍ산의생ㆍ남궁괄〕의 어진 신하가 있었기에 제왕의 대업(大業)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왕씨를 일으키고 나라를 회복시킨 것은 진실로 성조(聖祖)께서 은밀히 돕고, 시중 이성계 등의 충성심이 해와 달을 꿰뚫고 그의 공정함이 온 나라에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천도(天道)에 순응하니 하늘이 위에서 도와주고, 크게 믿음을 실천하니 백성들이 아래에서 복종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인임과 신우ㆍ신창이 양성하였던 사람들로 하여금 태도를 바꾸어 순종하게 하였고, 저잣거리에는 가게를 바꾸지 않았으며, 사람들은 얼굴빛도 변함이 없이 아침이 되기도 전에 왕씨(王氏)에게 돌아왔습니다.
이에 성조의 어진(御眞) 앞에 나아와서 공로를 고하고 상을 시행하며, 황하(黃河)가 띠〔帶〕처럼 변하고 태산(泰山)이 숫돌처럼 될 때까지 영원토록 공신의 후손에게 작록(爵祿)을 보장해 준다는 서약의 문권(文券)을 종묘에 보관해 둡니다. 원하옵건대 성조께서는 후대를 계승할 임금과 아홉 공신〔이성계ㆍ심덕부ㆍ정몽주ㆍ지용기ㆍ설장수ㆍ성석린ㆍ박위ㆍ조준ㆍ정도전〕의 후손을 도우시어, 마음과 덕(德)을 같이 하여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두려워하며, 위로는 종묘를 받들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보전하여 영구한 세대에 이르기까지 하늘이 내린 복록을 함께 누릴 수 있도록 하여 주소서. 아홉 사람의 자손들이 비록 나라에 반역하는 죄를 범하더라도 재량하여 가장 가벼운 죄에 처하게 하고, 다시 그 후사를 구하여 작위를 물려받아 제사를 받들어 대대로 끊어짐이 없도록 하여 아홉 사람의 공로에 보답할 것입니다.
후대를 계승하는 임금이 중흥(中興)의 어려움을 생각하지 않고 아홉 공신의 후손으로 하여금 작위와 식읍(食邑)을 잃게 하거든, 성조께서 그를 내쳐 임금의 자리를 누리지 못하게 하소서. 아홉 사람의 후손이 그들 조부의 충성을 잊고 간사한 생각을 품어 교만하고 사치하여 집안에 화(禍)를 끼치고 나라에 해를 끼치면, 성조께서 그에게 죄를 주시고, 그 작위와 식읍을 다른 후손에게 주어, 아홉 공신으로 하여금 영원한 세대에까지 제향(祭享)을 받도록 하소서.
신이 아홉 사람에게 이렇게 하는 것은 사사로운 심정에 이끌려서가 아닙니다. 실로 아홉 사람이 만 번이나 죽음을 무릅쓰고 계책을 내어 나라에 몸을 바치어 왕씨(王氏)를 일으키고 회복시켜, 우리 조상들의 종사(宗祀)를 하늘과 더불어 끝없이 받들게 한 것을 가상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종친(宗親)과 문무기로(文武耆老)ㆍ신료들이 나라를 다시 일으켜 반정(反正)할 때에 가짜 임금을 버리고 진짜 왕씨에게 돌아와서 어려운 지경에 처한 나를 지켜주었으니, 신은 이를 가상히 여깁니다. 원하건대 성조께서는 그 후손들을 길이 도우셔서 그들로 하여금 우리 왕실을 수호케 하옵소서.”라고 하였다.【87】
[《고려사(高麗史)》 126권 〈변안열전(邊安烈傳)〉]
고려(高麗)의 문하부(門下府) 낭사(郎舍) 윤소종(尹紹宗)과 이첨(李詹) 등이 상소하여 변안열(邊安烈)을 죽이자고 청하였다. 그 상소에 대략 이르기를, “변안열이 신우(辛禑)를 맞이하여 임금으로 세워서 왕씨(王氏)의 종사(宗祀)를 영원히 끊으려고 하였던 것은 실로 김저(金佇)가 분명하게 말하여서 나라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습니다. 청하옵건대 헌사(憲司)에 내리시어 형벌을 밝고 바르게 적용하시고, 그 집안의 재산을 몰수하도록 하소서.”라고 하였다. 그러나 공양왕(恭讓王)은 일이 죄인을 사유(赦宥)하기 이전에 있었다고 하여 그의 관직만 파면하였다. 이튿날에 상소가 또 올라가니, 관직만 삭탈하고 한양(漢陽)으로 유배시키게 하였다.
문하부 낭사가 다시 상언(上言)하기를, “홍영통(洪永通)은 이인임(李仁任)과 한 무리가 되어 그에게 빌붙고, 임견미(林堅味)ㆍ염흥방(廉興邦)과 함께 못된 짓을 하며 서로 도왔습니다. 그 흉악한 무리들이 다 주륙을 당하였으나, 홍영통만은 홀로 신우의 인척이라 하여 목숨을 보전하고 있습니다. 우현보(禹玄寶)는 벼슬이 아상(亞相)에까지 이르렀으나 관직을 잃을까 근심하였고, 백성들의 재물을 수탈하고 간사하게 아첨을 일삼아 우리의 예속(禮俗)을 허물어뜨렸습니다. 왕안덕(王安德)은 장수라는 명칭을 가지고서 왜적(倭賊)과 싸울 때마다 패배하였습니다. 남포(藍浦)의 싸움에서는 전군(全軍)이 대패하여 나라의 위엄을 크게 손상시켰으니, 마땅히 군법에 따라 참수하여야 합니다. 우인열(禹仁烈)은 서리(胥吏) 출신으로 권세 있는 자에게 연줄을 대어 올라가서 지위가 의정부(議政府)에 이르렀으나, 백성들에게 공덕(功德)을 끼쳤다는 소리는 듣지 못하였습니다. 정희계(鄭熙啟)는 염흥방과 인척을 맺어 불의(不義)한 짓을 자행하고, 또 신우의 처인 최천검(崔天儉)의 딸로 인하여 요행히 무진년(戊辰年, 1388)의 난(亂)을 면하게 되었습니다.
이들 다섯 사람은 죄악이 가득 찼으니, 반드시 목을 베어서 처형하여야 합니다. 더구나 변안열의 모의에 참여하여 신우를 추대하려고 하였으니, 이들은 모두 천지(天地) 사이에 용납되지 못할 자들이며, 전하께서 사사로운 인정을 쓸 수 없습니다. 원하옵건대 전하께서 대의(大義)로 결단하고 유사(有司)에 내려 국문(鞫問)하게 하여 죄를 다스리도록 하소서.”라고 하였다. 소장이 올라갔으나 윤허하지 않자, 간관(諫官)이 합문(閤門) 앞에 엎드려 하명(下命)이 있기만을 기다리며 한낮이 되도록 물러가지 않았다. 공양왕이 그제야 심덕부(沈德符)와 우리 태조를 불러서 의논하였다.
이에 교지(敎旨)를 내려 이르기를, “변안열은 이미 삭탈관직하여 유배를 보냈고, 홍영통ㆍ우현보ㆍ정희계 등은 김저의 공사(供辭)에서 모두 관련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왕안덕은 위화도에서 회군(回軍)할 때, 모의에 찬동하여 계책을 결정하였고, 우인열은 무진년에 설장수(偰長壽)와 더불어 명(明)나라에 들어가서 신우의 광패(狂悖)한 상황을 아뢰었으니, 그가 김저의 모의에는 반드시 간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단지 그들의 관직만을 파면시키도록 하라.”고 하였다. 그러고는 은밀히 밀직부사(密直副使) 유용생(柳龍生)을 보내어 홍영통에게 말하기를, “내가 있으니, 경(卿)들은 두려워할 것이 없다.”라고 하였다.
이때 마침 여우〔狐〕가 수창궁(壽昌宮)의 서문(西門)에서 나와 달아나 효사관(孝思觀) 서쪽 산등성이로 들어갔다. 낭사(郎舍)에서 다시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여우는 음류(陰類)여서 굴속에 사는 짐승이니, 소인(小人)이 권세에 의탁해 붙은 상(象)입니다. 그러므로 전(傳)에 소인을 제거하기 어려움에 대해 논하면서 ‘성벽(城壁)에 구멍을 뚫고 사는 여우는 물을 부을 수도 없다.〔穴墉之狐 不可灌也〕’고 하였으니, 성벽은 권세가를 비유하고 여우는 소인을 비유한 것입니다. 지금 신들이 합문 앞에 엎드려 소인을 제거하자고 청하였는데 요망한 여우가 나타났으니, 이는 소인이 다 제거되지 않은 현상이며, 하늘에서 견책(譴責)하는 뜻을 알림이 분명합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여우처럼 의심하는 마음을 가진 자는 참소하고 해치는 입을 놀린다.〔執狐疑之心者 來讒賊之口〕’고 하였습니다.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위로 황천(皇天)의 경계를 두려워하고, 다음으로 조종(祖宗)의 대업을 생각하여 변안열 등 여섯 사람의 죄를 다스려 조종에게 사과하신다면, 하늘의 견책을 그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나, 임금이 듣지 않았다.【91】
[《고려사(高麗史)》 61권 〈예지(禮志) 제릉(諸陵)〉]
고려(高麗)의 예조(禮曹)에서 적경원(積慶園)을 세우자고 청하여 이르기를, “삼가 살펴보건대, 주 문공(朱文公 주자(朱子))은 천자(天子)의 종묘에 대하여 논하면서 제후(諸侯)의 제도를 견주어 밝혔으니, 천자와 제후가 형세는 다르나 이치는 같습니다. 지금 고조(高祖) 서원군(西原君 왕영(王瑛)) 이하의 4대를 봉하여 높이고, 원(園)을 세우고 사관(祠官)을 두는 일에 대하여 삼가 전대(前代)의 전고(典故)에 의거하여 의논하고자 합니다. 한(漢)나라 말엽에 왕망(王莽)이 제왕의 자리를 빼앗았는데, 광무제(光武帝)가 나라를 다시 일으켜 한나라의 왕실을 회복시켰습니다. 효원황제(孝元皇帝)는 세대가 한 고조(漢高祖) 이후 제8대에 있고, 광무제는 제9대에 있으므로 효원제를 고묘(考廟)로 삼고, 직계(直系) 4대의 묘(廟)를 낙양(洛陽)에 따로 세워 아버지 남돈군(南頓君) 이상의 용릉절후(舂陵節侯)에 이르기까지를 제사 지냈습니다.
송 영종(宋英宗)은 인종(仁宗)의 종형(從兄)인 복왕(濮王)의 아들로서 들어와 황제의 대통(大統)을 계승하였습니다. 영종이 조칙(詔勅)을 내려 복왕을 높이는 전례(典禮)를 의논하게 하자, 사마광(司馬光) 등이 논의하기를, ‘남의 후사(後嗣)가 된 자는 그의 아들이 되는 것이니〔爲人後者 爲之子〕 친부(親父)에게는 높은 관직으로 받들어 황백(皇伯)이라 일컫고 이름을 부르지 말아야 한다.〔宜尊以高官大爵 稱皇伯而不名〕’고 하였다. 또 여씨(呂氏 여회(呂誨))는 정자(程子)의 말을 인용하여 이르기를, ‘남의 후사가 된 자는 자기를 후사로 삼은 이를 부모라 하고,〔爲人後者 謂其所後者 爲父母〕 그 낳은 이를 일러 백부모 또는 숙부모라 한다.〔謂其所生者 爲伯叔父母〕’고 하였으니, 이는 천지(天地)의 큰 법칙이고 사람의 큰 윤리(倫理)이므로 변경하여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낳아 준 의리는 지극히 높고 크니 마땅히 뜻을 정통(正統)에 전념하여야 하겠으나, 어찌 낳아준 사사로운 은혜를 끊을 수 있겠습니까? 마땅히 일의 형편을 잘 헤아려 다른 칭호(稱號)를 세워야 될 것입니다.
생각건대, 건국하신 태조(太祖)께서 삼한(三韓)을 통합하고 4백여 년을 전해 내려오다가 공민왕(恭愍王) 때에 이르러서 불행하게도 아들이 없이 세상을 떠나시자, 신우(辛禑) 부자가 임금의 자리를 농간하니 그 흉화(凶禍)가 한나라 말기의 왕망(王莽) 때보다 덜하지 않습니다. 전하께서 천명(天命)을 받아 단절된 나라를 다시 일으킨 것은 광무제가 왕통을 계승하여 대대로 내려온 선조의 제사를 받들게 된 것과 부합합니다. 서원군(西原君) 이하는 마땅히 한나라와 송나라 때의 전례에 따라 높은 관작(官爵)으로 받들며, 원(園)을 세우고 사관(祠官)을 두어 다른 아들로 제사를 모시게 하고, 그의 자손이 작위를 물려받게 하는 것이 예(禮)에 있어 당연한 일입니다. 청컨대 생부(生父)인 정원부원군(定原府院君 왕균(王鈞))을 높여 삼한국태공(三韓國太公)으로 삼고, 〈조부〉 순화후(淳化侯 왕유(王瑈))를 마한국공(馬韓國公)으로, 비(妃) 신씨(申氏)를 마한국비(馬韓國妃)로 삼으며, 증조 익양후(益陽侯 왕분(王玢))를 진한국공(辰韓國公)으로, 비(妃) 박씨(朴氏)를 진한국비(辰韓國妃)로 삼고, 고조 서원후(西原侯 왕영(王瑛))를 변한국공(卞韓國公)으로, 비(妃) 황보씨(皇甫氏)를 변한국비(卞韓國妃)로 삼으소서. 원(園)을 세워 적경원이라 하고, 사관(祠官)을 두어 적경서(積慶署)라 하며, 6품(品)의 영(令) 1인과 7품의 승(丞) 2인을 두어 제향(祭享)을 초하루ㆍ보름과 사시(四時)의 첫 달에 올리는 것으로 도를 삼으소서.”라고 하였다. 임금이 그대로 따르고, 마침내 성균관(成均館) 서편에 적경원을 설치하였다.【97】
[《고려사(高麗史)》 120권 〈윤소종전(尹紹宗傳)〉, 《동국통감(東國通鑑)》 55권 〈고려기(高麗紀) 공양왕(恭讓王) 2년조〉]
고려(高麗) 공양왕(恭讓王)이 경연관(經筵官)을 두고 《정관정요(貞觀政要)》를 열람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정몽주(鄭夢周)에게 그 서문을 강론하게 하였다. 강독관 윤소종(尹紹宗)이 나아와서 말하기를, “전하께서 나라를 다시 일으켰으니, 마땅히 옛날 이제(二帝)와 삼왕(三王)을 본받아야지, 당 태종(唐太宗)은 족히 취할 것이 못됩니다. 청컨대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읽어 제왕의 다스림을 밝게 드러내소서.”라고 하니, 임금이 그렇게 여겼다.【99】
이때에 큰 호랑이를 잡아서 바치는 자가 있었다. 지경연사(知經筵事) 정도전(鄭道傳)이 말하기를, “여러 도(道)에서 정해진 공물(貢物) 이외의 것을 바치는 것은 물리침이 옳으며, 그렇지 않으면 유사에 맡겨서 나라의 비용에 대비하도록 하소서. 큰 호랑이와 같은 것은 도로에서 떠메고 오자면 수십 인이 동원되어 번거로운 폐단이 더욱 심할 것입니다. 또한 그 고기는 제사에도 쓰지 못하니, 장차 어디에 쓰겠습니까?”라고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겨서 공물과 바치는 물건을 모두 유사에 맡기었다.【100】
[《고려사(高麗史)》 126권 〈변안열전(邊安烈傳)〉]
고려(高麗)의 대사헌(大司憲) 성석린(成石璘) 등이 상소하여 변안열(邊安烈)을 주살할 것을 청하였다. 이때에 강도(强盜)가 동대문(東大門) 밖에서 남의 물건을 탈취한 일이 있었다. 윤소종(尹紹宗) 등이 임금의 면전에서 아뢰기를, “당 헌종(唐憲宗) 때에 오원제(吳元濟)가 채주(蔡州)를 근거지로 삼고 반란을 일으키자, 승상(丞相) 무원형(武元衡)과 중승(中丞) 배도(裴度)가 토벌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그때 이사도(李師道)가 번진(藩鎭)에 있으면서 명성과 위세를 떨치며 오원제와 서로 의지하였던 까닭에, 도적을 보내 무원형을 살해하고 배도의 머리에 부상을 입힌 뒤 가버렸습니다. 여러 신하들이 오원제를 용서하여 번진을 안정시키자고 의논하였으나, 헌종은 듣지 않고 배도를 승상으로 삼아 마침내 오원제를 평정하고 천하를 편안하게 하였습니다. 지금 왜적이 경성(京城) 가까이 있고, 한양(漢陽)에도 있는데, 강도가 발생하는 것은 바로 이 무리들 때문이니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물러 나와서 상소하기를, “전에 변안열이 나라에 반역한 일 때문에 다섯 번이나 상소하여 치죄(治罪)할 것을 청하였으나, 전하께서 너그럽게 용서하고, 단지 한양의 별업(別業)에 안치하게 하니, 나라 사람들이 실망하였습니다. 신우(辛禑)가 강릉(江陵)으로 옮겨져서 한탄하기를, ‘변안열 때문에 죽게 되었다.’고 하였고, 또 변안열은 조종(祖宗)에게 죄를 지었으니, 전하께서 사사로운 정(情)을 둘 바가 아닙니다. 바라옵건대 헌사(憲司)로 하여금 그 죄를 분명히 다스리어 난적(亂賊)을 징벌토록 하소서.”라고 하였다. 임금이 그 소장을 헌사에 내리며 말하기를, “귀양 간 곳에 가서 다시 국문(鞫問)하지 말고 바로 처형하라.”고 하자, 헌사에서 밤에 녹사(錄事) 배원식(裴原式)을 보내 한양부윤(漢陽府尹) 김백흥(金伯興)에게 통첩하여 변안열을 처형하게 하였다.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서 아뢰기를, “대신(大臣)을 어찌 그 까닭도 묻지 않고 바로 극형(極刑)에 처할 수 있습니까?”라고 하니, 임금이 좌사의(左司議) 오사충(吳思忠)과 사헌집의(司憲執義) 남재(南在)에게 명하여 가서 국문하게 하였다. 오사충 등이 출발하여 벽제역(碧蹄驛)에 이르러 배원식을 만났는데, 이미 변안열을 베어 죽이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변안열이 처형당할 때에 탄식하기를, “신우를 맞아들이려고 모의한 것이 어찌 유독 나뿐이었겠는가?”라고 하면서 무슨 말을 하려고 하였으나, 김백흥이 묻지 않았다.【101】
[《고려사(高麗史)》 112권 〈박의중전(朴宜中傳)〉]
고려(高麗) 공양왕(恭讓王)이 경연(經筵)에 나아가서 시강관(侍講官)에게 말하기를, “내 나이가 이미 많으니, 비록 성현(聖賢)의 경전을 읽는다고 할지라도 아마 유익함이 없을 것 같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밀직(密直) 박의중(朴宜中)이 말하기를, “옛날 진 평공(晉平公)이 사광(師曠)에게 이르기를, ‘내 나이 77세이니, 배우고 싶은 마음은 있는데 늙은 것이 걱정이다.’고 하니, 사광이 말하기를, ‘왜 촛불을 손에 잡지 않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진 평공이 말하기를, ‘어찌 신하가 되어 임금을 희롱하는 것인가?’라고 하니, 사광이 말하기를, ‘눈먼 제가 어찌 감히 임금을 희롱하겠습니까? 제가 듣건대, 「소년 시절에 학문을 좋아하는 것은 해가 돋을 때의 볕과 같고, 장년(壯年)에 학문을 좋아하는 것은 한낮의 햇빛과 같으며, 노년(老年)에 학문을 좋아하는 것은 촛불의 불빛과 같다.〔少而好學如日出之陽 壯而好學如日之光 老而好學如秉燭之光〕」고 하였습니다. 촛불을 잡고 앞을 밝힌 것이 어두운 길을 가는 것과 같겠습니까?’라고 하자, 진 평공이 옳게 여겼습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춘추(春秋)가 아직도 젊으시니, 배움이 늦지 않았습니다.”라고 하니, 임금이 가상히 여겨 그의 의견을 받아들였다.【102】
[《고려사(高麗史)》 126권 〈변안열전(邊安烈傳)〉ㆍ〈조민수전(曺敏修傳)〉]
고려(高麗)의 문하부(門下府) 낭사(郎舍) 윤소종(尹紹宗) 등이 상서(上書)하기를, “예로부터 난신적자(亂臣賊子)는 무리가 없이 감히 포악한 짓을 한 자가 있지 않았습니다. 신들이 가만히 듣건대 역신(逆臣) 변안열(邊安烈)이 처형을 당할 때 스스로 말하기를, ‘신이 죽는 것은 진실로 마땅하나, 함께 모의한 자가 많은데 오직 신만이 죽어야 합니까?’라고 하였으나, 김백흥(金伯興)이 묻지도 않고 목을 베었습니다. 변안열의 심복(心腹) 이을진(李乙珍)도 반드시 모의에 참여하였을 것이니, 국문(鞫問)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김백흥이 역당과 한패가 되어 죄상을 덮어버린 죄를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103】
조민수(曺敏修)는 적신(賊臣) 이인임(李仁任)과 한패가 되어 탐욕스럽고 포악한 짓을 멋대로 저질러 풍속을 크게 문란하게 하였습니다. 또 주장(主將)으로서 왕씨(王氏)를 세우자는 의논을 저지시키고, 신창(辛昌)을 왕위에 세워 종묘(宗廟)로 하여금 영원히 제향(祭享)을 받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권근(權近)은 사사로이 명(明)나라 황제의 칙지(勅旨)를 열어보고서 신씨(辛氏)에게 붙어 이림(李琳)에게 먼저 알렸으니, 모두 하늘과 땅 사이에 용납할 수 없는 바이고, 역대의 조종(祖宗)께서도 용서하지 못할 바입니다. 청하옵건대, 유사(攸司)에 내리어 죄를 밝게 다스려서 처형하도록 하소서.”라고 하였다. 이에 공양왕(恭讓王)이 교지를 내리기를, “조민수는 지난 무진년(戊辰年)에 대의를 주창하여 회군(回軍)하였으니, 그 공로가 상을 줄 만하다. 그러므로 거듭 논죄(論罪)하는 것은 마땅치 않으니 먼 지방으로 유배시키도록 하라. 권근은 그 도(道)의 관찰사로 하여금 곤장 1백 대를 쳐서 역시 먼 지방에 유배 보내고, 김백흥은 파직하라.”고 하였다.【104】
[《고려사(高麗史)》 115권 〈이색전(李穡傳)〉]
고려(高麗)의 간관(諫官)이 또 상소하여 이색(李穡)과 조민수(曺敏修) 등을 헌사(憲司)에 내려서 엄하게 국문을 가하여 극형(極刑)에 처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이색의 관직을 삭탈하고 조민수와 함께 변방으로 옮겼다. 공양왕(恭讓王)이 좌사의(左司議) 오사충(吳思忠), 집의(執義) 이고(李皐), 규정(糾正) 전시(田時)를 보내어 장단현(長湍縣)에 내려가 이색을 국문하게 하고, 이내 명을 내려 이르기를, “이색을 놀라게 하지 말라. 만약에 범죄 사실을 자복하지 않거든 다시 나의 명을 받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색이 과연 자복하지 않고 말하기를, “신창(辛昌)을 임금으로 세우자고 주창한 것은 나 이색이 모르는 바이다. 내가 망녕된 말을 할 것 같으면 하늘이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으니, 청컨대 조민수와 대질시켜 주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오사충이 전시를 보내 사실을 아뢰니, 임금이 고문을 가하도록 명하였다.
전시가 돌아가서 교지를 선포하고서 옥졸을 시켜 곤장(棍杖)을 잡고 좌우에 서서 하루 종일 밤낮으로 핍박하고, 또 조민수가 창녕(昌寧)의 옥중(獄中)에서 자백한 공술서를 보이니, 【이에 앞서 공양왕이 전시(田時)를 창녕에 보내 조민수를 국문하게 하자, 전시는 ‘조민수가 신창을 임금으로 세우려고 한 계책이 이색에게서 나왔다.’고 하는 말을 받아내려고 하였는데, 조민수가 굴복하지 않고 말하기를, “신창을 세운 죄는 내가 본래 독단으로 한 짓이니, 이색은 실로 모의에 참여하지 않았다.”라고 하다가, 여러 날을 핍박하자 그제야 자복하였다.】 이색이 말하기를, “위화도에서 회군(回軍)하여 임금을 세울 것을 의논할 때에 조민수가 나 이색에게 종친(宗親)과 신우(辛禑)의 아들 신창(辛昌) 중에서 누가 합당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당시 조민수는 주장(主將)으로서 군사를 거느리고 돌아왔고, 또 신창의 외조부인 이림(李琳)과는 족척(族戚)인 관계로 마음을 같이 하고 있어서 내가 감히 그 뜻을 어기지 못하였습니다. 신우가 왕위에 오른 지 이미 오래되었으므로 당연히 그의 아들 신창을 임금으로 세워야 한다고 대답하였을 뿐이지, 내 마음대로 신창을 세우자고 먼저 권유한 말은 없었습니다.
지난해에 명(明)나라의 경사(京師)에 입조(入朝)하여 예부(禮部)에 도착하니, 상서(商書) 이원명(李原明)이 말하기를, ‘그대의 나라에서는 아비를 내쫓고 아들을 왕위에 세웠으니, 천하에 어찌 그런 도리가 있는가? 임금과 최영(崔瑩)이 모두 옥에 갇혔다고 하니, 그것은 무슨 말인가?’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내가 응답하기를, ‘최영이 임금을 부추겨 요양(遼陽)을 침범하려고 하자, 장군 조민수가 이성계(李成桂)와 더불어 옳지 못한 일이라고 생각하여 의주(義州)까지 와서 감히 출발하지 않았습니다. 최영이 자주 독촉하자, 마지못하여 군사를 돌이켜서 최영을 옥(獄)에 가두었던 것입니다.
이에 임금이 노하여 여러 장수들을 해치려고 하였기 때문에 태후(太后)께서 임금을 폐출하여 강화(江華)에 안치하였습니다. 강화는 개경(開京)과의 거리가 20여 리(里)이고, 옛 도읍의 명승지라서 성정(性情)을 수양하기에는 이와 같은 곳이 없습니다. 또 재상들이 모시고 호위하며, 의장(儀仗)ㆍ기물(器物)과 아침저녁으로 받들어 올리는 음식이 모두 평상시와 같은데, 어찌 쫓아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명나라에서 돌아와서 시중(侍中) 이성계에게 말하기를, ‘이원명이 한 말은 귀로는 들을 수 있어도, 입으로는 말할 수 없소. 여흥(驪興)은 땅이 먼 곳이니, 모셔다가 가까운 곳에 두면 임금을 쫓아냈다는 비난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한 말은 다만 이 말뿐이었고, 진실로 맞아다가 임금으로 세우자는 의논을 없습니다.”라고 하였다.【105】
이색이 일찍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옛날에 진 원제(晉元帝)가 들어가서 진나라의 대통(大統)을 계승하였는데, 치당 호씨(致堂胡氏 호인(胡寅))가 논하기를, ‘진 원제는 성이 우씨(牛氏)이면서도 성을 속이고 진나라의 종사(宗祀)를 이었는데도, 동진(東晉)의 군신(君臣)이 어찌 가만히 있으면서 그를 내쫓지 않았는가? 오랑캐 갈(羯)이 번갈아 침범하여 강좌(江左) 지역이 미약하였기 때문일 것이니, 만약 옛 왕업(王業)에 의지하지 않았다면 어찌 능히 인심(人心)을 잡아맬 수 있었겠는가? 옛 것을 버리고 새로 창건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우니, 이 또한 형세를 타서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부득이하여 그렇게 한 것이다.’고 하였다. 지금 내가 신씨(辛氏)를 세우는 데 감히 이의(異議)를 가지지 못하는 것도 그러한 뜻인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대간(臺諫)이 다시 이색과 조민수의 죄를 논하였으나, 임금이 답하지 않았다.【107】
[《고려사(高麗史)》 120권 〈윤소종전(尹紹宗傳)〉]
고려(高麗) 공양왕(恭讓王)이 조계종(曹溪宗)의 승려 찬영(粲英)을 맞아다가 스승으로 삼고자 하니, 대사헌(大司憲) 성석린(成石璘)과 좌상시(左常侍) 윤소종(尹紹宗)이 합문(閤門)에 엎드려 아뢰기를, “석씨(釋氏 석가(釋迦))는 청정(淸淨)과 적멸(寂滅)을 종지(宗旨)로 삼고 있기 때문에 나라에 도움을 줄 수 없고, 승려를 스승으로 삼는 것은 쇠퇴한 세상의 폐법(弊法)입니다. 전하(殿下)께서 스승을 구하려고 하신다면 원로대신들이 있는데, 왜 승도(僧道)에 마음을 두시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마침내 연명(聯名)하여 상소하기를, “삼강오상(三綱五常)은 천하와 나라의 큰 근본으로서, 요순(堯舜)과 삼대(三代)가 오랫동안 나라를 지속하며 훌륭한 정치를 이루었던 것은 바로 이 도(道) 때문입니다. 한 명제(漢明帝)가 불교를 숭상한 뒤로 난리가 이어져 멸망하였습니다. 양 무제(梁武帝) 때에 이르러서는 너무 심하게 불교에 현혹되어서 종묘(宗廟)의 제향에 면(麵)을 희생(犧牲)으로 삼았고, 채색 비단에 조수(鳥獸)의 형상을 넣어서 짜는 것까지 금하였다가, 마침내 후경(侯景)의 반란을 초래하여 대성(臺城)에서 굶어죽었습니다.【109】 당 헌종(唐憲宗)이 대궐 안에 불골(佛骨)을 들여다 놓자, 형부시랑(刑部侍郎) 한유(韓愈)가 상서롭지 못하다고 말하기를, ‘불씨(佛氏)가 중국에 들어온 이후로 불교를 섬기기를 독실하게 한 군주일수록 왕위에 있던 기간이 더욱 짧았다.’고 하였으나, 헌종이 듣지 않더니, 얼마 안 되어서 갑자기 죽었습니다.
우리 태조(太祖)께서는 건국하신 이후에 누적된 폐단을 깊이 염려하시고 후대의 임금과 신하가 사사로이 불찰(佛刹)을 짓는 것을 금지하였습니다. 당시 공신인 태사(太師) 최응(崔凝)이 불법(佛法)을 제거하자고 청하자, 태조께서는 말하기를, ‘신라(新羅) 말기에 불씨의 설(說)이 사람들의 뼛속 깊이 들어가서 사람마다 생사화복(生死禍福)이 모두 부처가 주는 것이라고 여기고 있다. 이제 겨우 삼한(三韓)이 통일되어 아직 인심이 안정되지 않았는데, 갑자기 불교를 제거한다면 반드시 반란이 일어날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훈요(訓要)를 지어 이르기를, ‘마땅히 신라가 불사(佛事)를 많이 일으켜 멸망하기에 이르렀음을 거울로 삼아야 한다.’고 하였으니, 성조(聖祖)께서 허황된 근원을 뽑아 없애서 후대의 임금들이 선조의 뜻과 사업을 계승해 갈 것을 간절하게 기대하였던 것입니다.
신들이 듣건대, 전하께서 조계종의 승려 찬영을 대궐 안에 맞아들여 높이 받들어 왕사(王師)로 삼는다고 하는데, 신들은 전하를 위하여 이를 애석하게 여깁니다. 삼대(三代)의 제왕들은 도(道)를 논하고, 나라를 다스리며, 음양(陰陽)을 조화시킬 자를 스승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므로 탕(湯) 임금은 이윤(伊尹)을 스승으로 삼아 하(夏)나라의 걸(桀)을 쳐서 백성을 구제하여 6백 년을 지속한 상(商)나라를 세웠습니다. 무왕(武王)은 태공(太空 여상(呂尙))을 스승으로 삼아 무용(武勇)을 떨쳐 은(殷)나라의 주(紂)를 토벌하여 8백 년 동안을 지속한 주(周)나라를 세웠습니다. 반면에 요진(姚秦 요씨(姚氏)의 후진(後秦)임)은 호승(胡僧) 구마라습(鳩摩羅什)을 스승으로 삼았다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망하였습니다. 원(元)나라도 번승(藩僧) 파라발제(婆羅跋蹄)를 스승으로 삼았다가, 말기에 이르러서 천자(天子)의 존귀한 몸으로 종이 상전을 섬기듯이 승려 지공(指空)을 떠받들어 복을 받고 장수하기를 바라다가, 마침내 응창(應昌)에서 패망함을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부처의 교리는 아버지도 없고, 임금도 없기 때문에 요진과 원나라는 오호(五胡)와 북적(北狄)의 풍속으로써 제왕(帝王)의 다스림을 본받지 않고, 강상(綱常)을 어지럽게 무너뜨렸으므로, 하늘에 죄를 얻어서 혼란과 패망을 재촉하였던 것입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나라를 다시 일으켰으니, 바야흐로 법을 만들어 모범을 보여서 후대의 성자(聖子)ㆍ신손(神孫)이 억만 세대에 이르기까지 따르도록 하여야 할 것인데, 지금 오호와 북적의 실패를 답습하고 오랑캐의 교리를 스승으로 삼으려 하십니다. 나라를 가진 자는 정사(政事)를 베풀 때에 명분에 따르고 실질을 강구해야 합니다.
이른바 스승이란 그의 도(道)를 본받는 것입니다. 석씨(釋氏)는 신하와 아들로서 임금과 아버지를 배반하고 산림(山林) 속으로 도망하여 들어가서 적멸(寂滅)로 즐거움을 삼았습니다. 만약 그 불법을 본받는다면 반드시 온 나라의 백성들에게 머리를 깎게 하고, 태조 이하 구묘(九廟)의 제사를 끊은 뒤에야 그 명분에 맞을 것입니다.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임금과 아버지를 섬기지 않는 자를 스승으로 삼지 마시고, 요순(堯舜)과 공맹(孔孟)의 도(道)를 높이 받들어 삼한의 태평한 사업을 이룩하십시오.”라고 하였다. 소장(疏章)이 올라가니, 공양왕이 마지못하여 따랐다. 승려 찬영이 숭인문(崇仁門)에까지 이르렀다가 결국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갔다.【111】
[《고려사(高麗史)》 116권 〈심덕부전(沈德符傳)〉ㆍ120권 〈윤소종전(尹紹宗傳)〉]
고려(高麗)에서 대간(臺諫)이 임금을 면대하고 아뢰는 법을 폐지하니, 윤소종(尹紹宗) 등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요순(堯舜)은 사악(四岳)에게 자문(諮問)하고, 사방의 문을 열어두고서는 사방의 눈으로써 자신의 눈을 밝게 하고, 사방의 귀로써 자신의 귀를 트이게 하여 세상의 좋은 말들이 숨겨짐이 없게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한 마디 말이라도 혹시 아래에서 막혀서 위로 전달되지 않을까 하고 염려하여 신하들에게 명하기를, ‘내가 도리를 어기면 그대들이 보필해야 하니, 그대들은 나의 앞에서는 복종하는 체 하다가 물러가서는 비난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하였습니다. 또 명하기를, ‘그대들은 선한 말〔昌言〕을 하여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삼대(三代)의 성왕(聖王)들은 모두 요ㆍ순의 이 도(道)를 좇아서 꼴꾼과 나무꾼 같은 천한 사람에게도 자문을 구하니, 백공(百工)이 그들의 기예(技藝)에 관한 일을 가지고 간(諫)하였습니다. 비방지목(誹謗之木)이 있고, 진선지정(進善之旌)이 있었으며, 필부필부(匹夫匹婦)의 말이 모두 위로 전달되어, 위아래가 서로 소통하여 태평하게 되었습니다.
주(周)나라가 쇠퇴함에 미쳐서는 비방하는 자를 감시하여 그치게 하니, 마침내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의 천하를 잃게 되었습니다. 진(秦)나라는 충성을 다하여 간하는 사람을 요망하다고 하여 이를 금지시켜서, 지록위마(指鹿爲馬)라고 하는데도 그 잘못을 말하는 자가 없는 데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천하를 얻었지만 2세(二世)에 망하고 말았습니다. 한(漢)나라로부터 원(元)나라에 이르기까지 언로(言路)가 열리면 나라가 다스려져 편안하고, 언로가 막히면 어지러워져 망하였습니다.
이성(異姓)이 나라를 훔친 이래로 대간(臺諫)이 입을 닫은 결과, 무진년(戊辰年)에 요동(遼東)을 정벌하는 일에 이르러서도 한 사람도 말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전하(殿下)께서 즉위하신 이래로 5일에 한 번씩 조회에 나오시어 대간으로 하여금 면전에서 시정(時政)의 득실을 아뢰게 하시니, 삼한(三韓)의 백성들이 기뻐서 뛰고 춤추며 태평을 기대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대간으로 하여금 다시 면전에서 시정의 득실을 아뢰지 말게 하시니, 어찌 중흥(中興)의 정치에 크게 누가 되지 않겠습니까? ‘한 마디 말로 나라를 잃는다.〔一言喪邦〕’고 하였으니, 이를 말한 것입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다시 명을 바꾸시어 대간이 전처럼 면대하여 시정의 득실을 아뢰게 하시고, 나머지 여러 관사(官司)도 각기 그 직분에 관계된 일을 진언하게 하여 총명을 넓혀 지치(至治)를 이룩하십시오.”라고 하였다.【120】
고려(高麗) 공양왕(恭讓王)이 장단(長湍 지금의 개성직할시 장단군)에 행차하여 전함(戰艦)을 보려고 하니, 대간(臺諫)이 상소하기를, “임금이 하는 일을 반드시 기록하는데, 그 기록한 것이 모범이 되지 않는다면 후사(後嗣)들이 무엇을 보겠습니까? 지금 전함을 보고자 하는 것은 무비(武備)에 유의(留意)하시는 것이니, 이는 참으로 편안할 때에 위태로움을 잊지 아니하는 원대한 계책입니다. 그러나 나라 사람들은 무비를 갖추려는 뜻을 알지 못하고서, 모두가 유람하고 사냥하기 위한 것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하물며 지금은 바야흐로 봄 농사가 시작되었는데, 대가(大駕 어가)가 이르는 곳마다 도로를 닦는 번거로움과 음식을 이바지하는 비용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할 일의 완급(緩急)으로 말하면, 교제(郊祭)의 참례(參禮)와 능묘(陵墓)의 배알, 적전(籍田)의 친경(親耕), 문묘(文廟)의 참배가 마땅히 먼저 해야 할 일입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우선 이 거둥을 멈추어 나라 사람들의 의심을 해소하고, 농사를 방해하는 폐단을 없애소서.”라고 하였다.【121】 임금이 사람을 보내어 시중(侍中) 심덕부(沈德符)에게 묻기를, “금일의 거둥을 장차 어찌해야 하겠는가?”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임금의 행동거지는 대간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뜻을 정하고 장차 거둥하려고 하였으나, 대간도 오히려 물러나지 않았다. 성석린(成石璘)이 곧바로 내전으로 들어가서 아뢰기를, “대간의 말은 거부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니, 임금이 억지로 그 말을 따랐다.【122】
[《고려사(高麗史)》 126권 〈왕안덕전(王安德傳)〉]
고려(高麗) 공양왕(恭讓王)이 헌납(獻納) 함부림(咸傅霖)을 불러서 말하기를, “내가 대간(臺諫)과 형조(刑曹)에 명하여 왕안덕(王安德)과 우인열(禹仁烈), 우홍수(禹洪壽) 등을 논핵(論劾)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너는 알고 있느냐?”라고 하니, 함부림이 대답하기를, “신은 이를 알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네가 이미 이를 알고 있다면, 어찌하여 논핵하기를 고집하며 그치지 않는가? 내가 비록 부덕하지만 이미 임금이 되었으니, 너희들이 내 명을 따르지 않는 것이 옳은가?”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상벌이 부당하면 대간이 논박하는 것이 바로 그 직분입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대들이 내 명을 따르지 않으면 마땅히 죄를 주겠다.”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예로부터 임금이 언관에게는 죄를 주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현릉(玄陵)의 때에는 간관(諫官)으로서 죄를 받은 사람들이 많았다.”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현릉을 어찌 본받으실 수 있습니까? 즉위한 처음에는 어진 마음과 어질다는 소문이 있어서 다소 현군(賢君)이라고 일컬었지만, 그 뒤에는 자못 스스로 성군(聖君)인 체 하여 아랫사람들을 멸시하였으므로, 비록 말하는 자가 있더라도 그 말을 마음에 두지 않았고, 시기하는 것이 날로 심해져서 대신과 대간이 모두 그 화(禍)를 입었습니다. 그리하여 언로(言路)가 막혀져서 점차로 갑인년(甲寅年)의 변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신민(臣民)의 추대를 받아 대업(大業)을 계승하시고 회복하시니, 삼한(三韓)이 기뻐하면서 다시 태조(太祖)의 세상을 보게 되었다고 하였는데, 만약 현릉을 본받는 데만 그치신다면, 그것이 어찌 신민들의 소망이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우홍수는 지금 공신이 되었고, 왕안덕(王安德)은 회군에 참여하였으며, 우인열은 명(明)나라에 입조하여 우왕(禑王)의 부도(不道)함을 아뢰었으니, 이들이 어찌 우왕을 맞이하여 임금으로 세우려 하였겠는가?”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무진년(戊辰年)의 회군은 그 권한이 이 시중(李侍中 이성계(李成桂))에게 있고, 왕안덕은 그 휘하에 있었으니, 어찌 감히 이의(異議)가 있겠습니까? 우인열이 명나라 조정에 들어갔던 것은 나라의 명에 따라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하였던 일입니다. 우홍수가 공신이 된 것은 대간이 이미 그 지나침을 말하였습니다. 대체로 이랬다저랬다 하는 소인배들은 권력과 이익이 있는 곳이면 따르니, 청컨대 전하께서는 대의(大義)로써 결단하십시오.”라고 하니, 임금이 기뻐하지 아니하였다.【123】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34권 〈공양왕(恭讓王) 2년조〉]
고려(高麗)의 대간(臺諫)이 교대로 소장(疏章)을 올려서 상소하기를, “삼가 명(明)나라 황제가 선유(宣諭)한 성지(聖旨)를 보건대, 고려국 안에 배신(陪臣 제후의신하)이 된 자들은 충신(忠臣)과 역신(逆臣)이 뒤섞여 있으니, 비록 왕씨(王氏)라고 거짓으로 꾸며서 이성(異姓)을 임금으로 삼았으나, 또한 삼한(三韓)이 대대로 지킬 좋은 계책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황제 폐하는 강하고 분명하며 과감하게 결단하는 자질로 신상필벌(信賞必罰)을 함으로써 천하를 통일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외국의 일을 꿰뚫어보는 것이 마치 폐간(肺肝)을 보는 듯하니, 천하의 사람들이 말하기를, ‘만 리(里)를 환히 내다본다.〔明見萬里〕’고 하는 것이 참말이며, 제후(諸侯)를 회유하고 후사(後嗣)가 끊어진 나라를 계승하게 하는 뜻도 지극합니다.
지금 시중 이성계(李成桂)는 평소 충의(忠義)를 품고 위조(僞朝)에 속을 썩였으나 감히 드러내지 못하였는데, 신우(辛禑)의 광망(狂妄)함이 날로 심해져서 마침내 요동(遼東)을 공격하는 일이 있게 되었습니다. 최영(崔瑩)이 이를 주장하자, 시중 이성계가 힘써 저지하였습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어 부득이 출행(出行)하여 압록강(鴨綠江)에 이르렀다가, 대의(大義)를 들어 회군(回軍)하여 신우를 물러나게 하고, 최영을 축출하고서는 종친(宗親)을 임금으로 세우는 것을 의논하였습니다. 마침내 명나라 황제께서 선유하는 말을 보고 개연히 반정(反正)할 뜻이 있어서 죽음을 무릅쓰고 계책을 내어서 대의(大義)를 부르짖고 대책(大策)을 정해서 전하를 받들어 정통(正統)을 회복하여, 종묘(宗廟)가 제사를 받게 되었습니다. 신들은 모두 말하기를, “이 분이 바로 천자(天子)께서 말씀하신 충신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인임(李仁任)이 제멋대로 정사를 행하고 총애를 견고하게 하고자 하여 신우를 임금으로 세웠고, 그 뒤에 조민수(曺敏修)와 이색(李穡)이 함께 그 아들 신창(辛昌)을 세웠습니다. 변안열(邊安烈)ㆍ이림(李琳)ㆍ이귀생(李貴生)ㆍ정지(鄭地)ㆍ우인열(禹仁烈)ㆍ왕안덕(王安德)ㆍ우홍수(禹洪壽)ㆍ원상(元庠) 등이 또 시중 이성계를 해치려고 도모하여 우리 왕씨(王氏)를 끊으려고 하였습니다. 다행히 조종(祖宗)의 영험함에 힘입어 그 계책이 이루어지지 못하였습니다. 지난번에 변안열의 계책이 행하여졌더라면, 어찌 시중 이성계만이 죽음을 면하지 못하였겠습니까? 종친들도 남은 사람이 없을 것이고, 전하의 대사(大事)도 실패하였을 것입니다. 신들은 말하기를, “이들이 바로 천자께서 말씀하신 역적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비록 변안열은 처형되었으나, 그 나머지 무리들은 아직 극형에 처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들이 죄 줄 것을 청하였지만, 전하께서는 윤허하시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도리어 포장(襃獎)을 가하였으며, 상소문이 두 번이나 올라가도 비답을 내리지 않아 충신과 역적이 뒤섞여 있어서 중흥(中興)에 크게 누가 되고 있습니다. 청컨대 이림 등의 죄를 다스리신다면 충신과 역적이 분별되고, 조정이 깨끗하고 밝아져서 난신적자(亂臣賊子)가 경계할 것을 알 것입니다.”라고 하니, 이림ㆍ정지ㆍ우인열 등이 마침내 외방(外方)으로 유배되었다.【125】
[《고려사(高麗史)》 120권 〈윤소종전(尹紹宗傳)〉]
고려(高麗) 공양왕(恭讓王)이 예조 판서(禮曹判書) 윤소종(尹紹宗)을 금주(錦州)에 방치(放置)하였다. 일찍이 윤소종이 상호군(上護軍) 송문중(宋文中)에게 말하기를, “지금 시중(侍中) 이성계(李成桂)가 군자를 등용하거나 소인을 물리치지 못하니, 만약 하루아침에 소인의 계략에 떨어진다면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심덕부(沈德符) 등이 이 말을 듣고 임금에게 고하니, 임금이 노하여 윤소종에게 죄를 주려고 하였다. 우리 태조가 청하기를, “조정의 신하 가운데 직언(直言)하는 사람은 오직 윤소종뿐이니, 그를 죄 주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좌부대언(左副代言) 이사위(李士渭)도 아뢰기를, “윤소종이 누차 상소하였으나 전하께서는 모두 들어주시지 않았는데, 지금 갑자기 그를 죄 주신다면, 바깥의 의논이 반드시 전하께서 직언하는 신하를 미워한다고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이미 윤소종을 높은 관직에 임명하였는데, 사람들이 어찌 미워한다고 말하는가? 시중 이성계는 그 공이 사직(社稷)에 있는데, 윤소종 등이 감히 욕되게 하였으니 죄를 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고, 마침내 그를 방치하였다.
윤소종은 일찍이 처족(妻族) 최을의(崔乙義)와 노비(奴婢)의 일로써 다투어서 오래도록 해결하지 못하다가, 우왕(禑王)이 총애하던 신하인 반복해(潘福海)에게 부탁하여 노비를 얻었다. 윤소종이 조준(趙浚) 등의 천거를 받아서 낭사(郞舍)가 되어 나랏일을 논하기를 좋아하였는데, 임금이 매번 윤소종이 반복해에게 청탁한 일을 말하면서 심히 미워하였다.【127】
[《고려사(高麗史)》 115권 〈이색전(李穡傳)〉]
처음에 고려(高麗)의 대간(臺諫)이 이색(李穡) 등의 죄를 논핵하였다. 공양왕(恭讓王)이 재상(宰相)과 더불어 이 문제를 의논하려고 하니, 지신사(知申事) 이행(李行)이 아뢰기를, “대간의 논핵이 공신(功臣)들의 뜻이 아닌지 어찌 알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임금이 손수 상소문의 말미에 적기를, “지신사는 이색을 좌주(座主)로 여기고 있다.”라고 하고서 우대언(右代言) 조인옥(趙仁沃)에게 대신 서명하게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대간이 이행을 탄핵하기를, “임금을 속이는 것을 일삼는다.”라고 하고, 아울러 조인옥이 월권하였다고 탄핵하니, 임금이 어쩔 수 없이 모두 파직시켰다. 우리 태조(太祖)와 공신 7인이 상서(上書)하여 아뢰기를, “대간이 이색을 논핵한 것은 신들이 모르는 바인데, 사람들이 이것으로 신들에게 허물을 돌리고 있습니다. 신우(辛禑)ㆍ신창(辛昌)의 무리가 신들을 미워하여 없는 말을 만들어 비방하니, 청컨대 신들은 자리를 피하여 비방을 그치게 하고, 목숨을 보존하고자 합니다.”라고 하고, 드디어 두문불출하였다. 대사헌(大司憲) 성석린(成石璘)도 이 소식을 듣고 상서하여 사직하였다.
대간이 이색을 더욱 집요하게 논핵하였다. 임금은 평소에 이색이 난리를 도모하였을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 또한 우홍수(禹洪壽)가 부마(駙馬) 우성범(禹成範)의 아버지인 까닭에 대간이 탄핵을 그치지 않는 것에 노하여 수라를 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대간이 대궐문에 엎드려 명을 청하자, 임금이 어지(御旨)를 전하여 이르기를, “이림(李琳)과 이색 등은 모두 이미 유배를 보냈으니, 더 이상 논핵하여 죄를 청하지 말라.”고 하였다.
임금은 공신들이 정사를 돌보지 않자, 평리(評理) 배극렴(裵克廉)에게 명하여 도당(都堂)에서 일을 대신 처리하게 하였다. 또 안종원(安宗源)과 권중화(權仲和) 등의 말을 좇아서 아홉 공신에게 일을 보게 하였으나, 공신들 모두 나오지 않았다.【130】
[《고려사(高麗史)》 45권 〈공양왕세가(恭讓王世家) 2년조〉ㆍ115권 〈이색전(李穡傳)〉, 《동국통감(東國通鑑)》 55권 〈고려기(高麗紀) 공양왕(恭讓王) 2년조〉]
고려(高麗)의 왕방(王昉)과 조반(趙胖) 등이 명(明)나라의 경사(京師)에서 돌아와 아뢰기를, “예부(禮部)에서 신들을 불러 이르기를, ‘너희 나라 사람 파평군(坡平君) 윤이(尹彝)와 중랑장(中郞將) 이초(李初)라는 자가 와서 황제에게 호소하기를, 「고려의 이 시중(李侍中)이 왕요(王瑤)를 세워 임금으로 삼았으나, 왕요는 종실이 아니며 바로 이성계(李成桂)의 인척입니다. 왕요가 이성계와 함께 병마를 움직여 상국(上國)을 범하려고 하자, 재상 이색(李穡) 등이 옳지 않다고 하니, 곧바로 이색ㆍ조민수(曺敏修)ㆍ이림(李琳)ㆍ변안열(邊安烈)ㆍ권중화(權仲和)ㆍ장하(張夏)ㆍ이숭인(李崇仁)ㆍ권근(權近)ㆍ이종학(李種學)ㆍ이귀생(李貴生) 등을 살해하고, 우현보(禹玄寶)ㆍ우인열(禹仁烈)ㆍ정지(鄭地)ㆍ김종연(金宗衍)ㆍ윤유린(尹有麟)ㆍ홍인계(洪仁桂)ㆍ진을서(陳乙瑞)ㆍ경보(慶輔)ㆍ이인민(李仁敏) 등을 멀리 유배 보냈습니다. 이에 멀리 귀양 가 있는 재상 등이 몰래 우리들을 보내어 천자에게 고하게 하였습니다.」고 하고, 이어 친왕(親王)에게 천하의 군사를 동원하여 와서 토벌해 달라고 청하였다.’고 하고서, 윤이와 이초가 적은 이색ㆍ조민수 등의 이름을 꺼내어 보여주었습니다. 조반이 윤이 등과 더불어 면대하여 논변하기를, ‘본국이 사대(事大)하기를 성심으로 하였는데,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라고 하고, 윤이에게 묻기를, ‘그대는 지위가 봉군(封君)에 이르렀다니, 자못 나를 알겠느냐?’라고 하니, 윤이가 깜짝 놀라 실색하였습니다. 이에 예부의 관원이 말하기를, ‘천자가 명철하셔서 이것이 무고(誣告)인 것을 알고 있으니, 그대가 빨리 본국으로 돌아가서 임금과 재상에게 말하고, 윤이의 글 속에 있는 사람들을 힐문하고 와서 보고하라.’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간이 서로 잇달아 상소하여 윤이와 이초의 무리를 국문할 것을 청하였으나, 상소문을 보류한 채 유사(攸司)에 내려 보내지 않았다.【131】
처음에 나라에서 조반의 말을 듣고 관련된 자들을 추국(推鞫)하려다가 주저하고 의심하여 결정을 짓지 못하고 있었다. 지용기(池湧奇)가 김종연과 사이가 매우 친밀하여서 은밀히 김종연에게 말하기를, “공의 이름이 윤이와 이초의 글 속에 있으니, 공이 위태로워질 것이다.”라고 하니, 김종연이 두려워하여 도망을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갑자기 큰 옥사(獄事)가 일어나서, 마침내 우현보ㆍ권중화ㆍ경보ㆍ장하ㆍ홍인계ㆍ윤유린 등을 순군옥(巡軍獄)에 가두었다. 옥관(獄官)이 먼저 윤유린을 가혹하게 국문하니, 그의 공사(供辭)에 최공철(崔公哲)ㆍ최칠석(崔七夕)ㆍ조언(曹彦)ㆍ조경(趙瓊)ㆍ공의(公義)ㆍ한성(韓成)ㆍ김충(金忠) 등이 모두 관련되어 있었으므로 모두 하옥하고, 이색ㆍ이림ㆍ우인열ㆍ이인민ㆍ정지ㆍ이숭인ㆍ권근ㆍ이종학ㆍ이귀생 등을 청주옥(淸州獄)에 가두었다.【132】
유구(柳玽)와 윤호(尹虎) 등이 청주(淸州)에서 여러 죄수들을 국문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천둥이 울리고 큰비가 쏟아지더니 앞의 내〔川〕가 갑자기 불어서 범람한 물이 성(城)의 남문을 부수고 곧장 북문까지 다다랐다. 성 안의 물 깊이가 한 길이 넘어서 관사(官舍)와 민가(民家)가 거의 다 수몰되었다. 옥관들이 황급히 나무를 휘어잡고 올라가서 죽음을 면하였다. 나이 많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청주 고을이 생긴 이래로 수재(水災)가 이처럼 심하였던 때는 이제껏 없었다.”라고 하였다.【133】
청주에 큰 홍수가 일어나고, 또 지난달에 눈이 내렸다고 하여 공양왕(恭讓王)이 심덕부(沈德符)와 우리 태조를 불러서 의논하여 죄수들을 방면하기로 하고, 이조 판서(吏曹判書) 조온(趙溫)을 청주로 보내어 하교(下敎)하기를, “왕방과 조반이 명나라의 경사(京師)에서 돌아와서 전하여 아뢰기를, ‘명나라 예부(禮部)가 본국에서 도망한 두 사람과 대질하여 심문을 하였는데, 한 명은 윤이(尹彛)라는 자로서 파평군(坡平君)이라 사칭(詐稱)하였고, 또 한 명은 이초(李初)라는 자로서 중랑장(中郞將)이라 칭하였습니다. 이들이 말하기를, 「본국이 이색(李穡) 등 10인을 살해하고, 우현보(禹玄寶) 등 9인을 멀리 유배 보냈으며, 병력을 일으켜 장차 중국(中國)을 침범하려고 하므로 귀양을 가 있는 재상들이 윤이 등을 시켜서 경사로 가서 이 사실을 고하게 하고, 이어서 친왕(親王)에게 천하의 병력을 움직여서 고려에 가서 토벌해 줄 것을 청하였다.」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이에 의거해 본다면, 윤이 등이 말한 것처럼 시킨 자는 죄가 반역에 해당되어 추국하여 밝히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윤이의 친척인 윤유린을 국문하게 하였더니, 스스로 그 죄를 알고 아무것도 먹지 않고 죽었다. 함께 모의하였던 최공철은 처형되고, 김종연은 도망하여 아직 잡지 못하였다. 그 나머지 사람들은 범죄의 상황이 아직 밝혀지지 않았는데, 고문을 가하여 신문한다면 잘못에 빠지는 자가 있을까 염려되어, 내가 심히 가엾게 여긴다. 앞의 사람들 중에서 죄가 이미 드러나 죄를 자백한 자를 제외하고서, 나머지 사람들은 마땅히 각 처에 안치한 뒤에 그 실상이 드러나면 내가 감히 사사로운 정(情)을 두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니, 나라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이튿날에 또 비가 오래도록 그치지 않는다고 하여 경성(京城)의 죄수 150인을 석방하였다.【135】
윤사강(尹思康)은 윤유린의 사촌동생으로서 일찍이 승려가 되었다가 도적이 되어 죄를 범하여 명나라로 들어가서는 그 이름을 윤이(尹彛)로 고쳤다. 윤유린의 가신(家臣) 정부개(丁夫介)가 평소에 그를 잘 알고 있었는데, 조반을 따라 명나라 경사에 가서는 말하지 않았다가, 돌아와서야 그 죄상(罪狀)을 말하였다.【136】
[《고려사(高麗史)》 112권 〈박의중전(朴宜中傳)〉ㆍ120권 〈윤회종전(尹會宗傳)〉]
고려(高麗)의 서운관(書雲觀)에서 상소하기를, “《도선밀기(道詵密記)》에 지리(地理)의 쇠왕(衰旺)에 관한 설이 있으니, 마땅히 서울을 한양(漢陽)으로 옮기시어 송도(松都)의 지덕(地德)을 쉬게 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공양왕(恭讓王)이 박의중(朴宜中)에게 말하기를, “경(卿)은 천도(遷都)를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옛날에 임금이 참위(讖緯)의 술수로써 그 나라를 보전하였다는 말을 신은 들어보지 못하였습니다. 또 많은 사람들을 동원하면, 백성들을 소란하게 하는 폐단과 공억供億)의 비용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필부필부(匹夫匹婦)가 스스로 편안함을 얻지 못한다면, 임금이 더불어 그 공을 이룰 수 없다.〔匹夫匹婦不獲自盡 人主罔與成厥功〕’고 하였으니, 원컨대 전하께서는 이를 살피십시오.”라고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그 폐단을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음양설(陰陽說)이 또한 어찌 허망한 거짓이겠는가?”라고 하고, 이내 평리(評理) 배극렴(裵克廉)을 보내어 가서 궁궐을 수축하게 하였다.【140】
임금이 또 연복사(演福寺)를 중수(重修)하고자 하여 인근의 민가 30여 호를 철거하였다. 형조총랑(刑曹摠郞) 윤회종(尹會宗)이 상소하기를, “국상(國祥)의 장구함은 임금이 덕(德)을 쌓고 인(仁)을 베풀어서 방본(邦本)을 배양하는 데 있을 뿐입니다. 어찌 그것이 도성(都城) 지세(地勢)의 왕기(旺氣)에 달린 것이겠습니까? 예전에 상(商)나라 임금 반경(盤庚)이 경(耿) 땅을 떠났던 것은 황하(黃河)가 터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고, 주(周)나라 태왕(太王)이 빈(豳) 땅을 떠났던 것은 적인(狄人)의 침입이 있었기 때문이며, 주나라 평왕(平王)이 동천(東遷)하였던 것은 견융(犬戎)의 난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이런 몇 가지 일이 없는데도 장차 한양으로 천도하고자 하여, 물의(物議)가 일어나 놀라고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단지 강물이 붉게 끓어오르며,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고 하여 이내 참위(讖緯)의 말을 믿어서 거처를 옮겨 이를 피하고자 하는 것일 뿐입니다. 또 부도(浮屠) 법예(法猊)의 설(說)에 현혹되어 연복사를 중수하면서 사방의 인가를 다 허물어 거소(居所)를 잃은 백성들이 많으니, 신은 전하를 위하여 잘 하시는 일이라 할 수 없습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천도를 중지하고 법예를 내쫓으시며, 하늘을 두려워하고 반성하여 천심(天心)에 답하시고, 한갓 사설(邪說)에 미혹됨이 없도록 하소서.”라고 하였다.【145】
[《고려사(高麗史)》 117권 〈강회백전(姜淮伯傳)〉]
고려(高麗)의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강회백(姜淮伯)이 상주문을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길흉(吉凶)과 화복(禍福)은 사람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어찌 부처를 공양하고 중에게 음식을 대접하여 복리(福利)를 바라는 이치가 있겠습니까? 불씨(佛氏)의 도(道)는 청정과욕(淸淨寡慾)과 수심양성(修心養性)을 첫째 종지(宗旨)로 삼으니, 불상을 만들고 불탑을 세워서 민력(民力)을 고갈시키는 것은 도리어 불씨(佛氏)에게 죄를 얻어서 앙화(殃禍)를 초래하는 일입니다.
근일에 연복사(演福寺)의 역사(役事)로 인하여 백성들 가운데 파산하고 생업을 잃은 사람들이 있는데, 이 또한 인정(仁政)을 손상시키는 큰 사단(事端)입니다. 천시(天時)와 지리(地理)는 인화(人和)만 못하고,〔天時地理 不如人和〕 한 번 다스려 지고 한 번 어지러워지는 것〔一治一亂〕은 모두 자연의 이치이니, 어찌 지기(地氣)의 쇠왕(衰旺) 때문에 나라가 융성하고 쇠망함이 있겠습니까? 하물며 때때로 재이(災異)가 나타나는 것은 실로 하늘이 임금을 인애(仁愛)하기 때문입니다. 마땅히 두려워하고 반성하여 날마다 삼가고, 몸을 검소하게 하여 용도를 절약하며, 이때에 세렴(稅斂)을 적게 하여 백성을 편안하고 태평하게 한다면, 모든 복이 저절로 이르고 재이도 저절로 소멸될 것입니다. 어찌 반드시 한양(漢陽)으로 천도하는데 농민들을 몰아서 궁궐을 짓는 역사에 동원하고, 과렴(科斂)과 징발(徵發)로써 농사를 짓고 수확하는 때를 잃게 하여, 백성들을 분노하게 해서 화기(和氣)를 손상시킬 필요가 있겠습니까?【148】
지금을 위한 계책으로는 정성과 공경을 다하여 상국(上國)을 섬기고, 임금에게 충성하는 마음을 백성들이 품게 하며, 곡식을 저축하고 군량을 모아서 군국(軍國)의 수요에 응하고, 병사들을 훈련시켜 안팎의 모욕을 막으며, 씀씀이를 절약하여 백성들을 아끼고, 백성들을 부리기를 때에 맞게 하여 인심을 진정시키고 감복하게 하여 그 삶을 이루어 주는 것만 한 것이 없으니, ‘불은 더 뜨거워지고 물은 더 깊어지는〔如火益熱 如水益深〕’ 고통스러운 탄식이 없도록 하여야 합니다. 이보다 더 급한 것이 없으니, 원컨대 전하께서는 깊이 살피소서.”라고 하였다.【150】
[《고려사(高麗史)》 45권 〈공양왕세가(恭讓王世家) 2년조〉]
고려(高麗) 공양왕(恭讓王)이 사헌규정(司憲糾正) 이감(李敢) 등 9인을 좌천하여 모두 현(縣)의 감무(監務)를 보게 하였다. 이때에 임금이 궁중의 부녀(婦女)와 환관(宦官)에게 상을 하사하는데 절제가 없어서, 창고에 묵은 저축이 없었다. 이감이 풍저창(豊儲倉)의 분대(分臺)가 되어서 말하기를, “집안을 잘 다스리는 사람도 반드시 먼저 씀씀이를 절약하는데, 하물며 나라의 임금이 함부로 사인(私人)에게 상을 하사하여 창고를 텅텅 비게 하는 것이 옳겠는가? 환관은 늘 내주(內廚 궁궐 안의 주방)의 음식을 먹고 녹봉(祿俸)을 받고 있는데, 지금 또 쌀을 하사하였으니, 그 이름은 비록 다르지만 낭비는 마찬가지다.”라고 하고, 썩은 보리를 주니 환관들이 이를 하소연하였다.
임금이 노하여 도당(都堂)에 명하여 그 죄를 다스리게 하고, 이감의 가노(家奴)를 가두었다. 규정(糾正) 등이 의논하기를, “대관(臺官)이 자신의 가노가 감옥에 갇힌 것은 예전부터 이제껏 없었던 일이다.”라고 하고, 모두 병(病)을 핑계로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좌천이 있었던 것이다.【152】
고려(高麗) 공양왕(恭讓王)이 한양(漢陽)으로 천도(遷都)하였다. 이날 저녁에 큰비가 내리고 천둥이 치고 번개가 쳤고, 사람과 가축들이 얼어 죽었다.
얼마 안 있어 형조판서(刑曹判書) 안원(安瑗)이 상서(上書)하기를, “지난번에 술사(術士)가 천재(天災)와 지괴(地怪)로 인하여 천도하여 화를 피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지금 천도하여 행차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는데, 맹호(猛虎)가 사람을 상하게 하고 변괴가 그치질 않으니, 술사의 말은 이미 증험(證驗)이 없습니다. 청컨대 속히 환도(還都)하여 하늘의 뜻에 응함으로써 인망(人望)을 위로하십시오.”라고 하니, 임금이 이를 가납하고 우리 태조와 정몽주(鄭夢周)를 불러서 의논하여 송도(松都)로 돌아왔다.【154】
[《고려사(高麗史)》 45권ㆍ46권 〈공양왕세가(恭讓王世家) 2년조ㆍ3년조〉ㆍ104권 〈김종연전(金宗衍傳)〉ㆍ116권 〈심덕부전(沈德符傳)〉]
고려(高麗)의 서경(西京) 천호(千戶) 윤귀택(尹龜澤)이 천호 양백지(楊百之)와 술을 마시다가 술이 거나해지자 말하기를, “그대는 재상(宰相)이 되고 싶은 마음이 없는가?”라고 하니, 양백지가 대답하기를, “누군들 그런 마음이 없겠는가? 다만 그렇게 되는 것이 어려울 뿐이다.”라고 하였다. 윤귀택이 말하기를, “김종연(金宗衍)이 선공판관(繕工判官) 조유(趙裕)와 함께 공모하여 이 시중(李侍中)을 해치고자 한다. 그대가 만약 정예 병력을 이끌고 우리와 뜻을 함께 한다면, 재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심 시중(沈侍中 심덕부(沈德符))도 이 모의를 알고 있다.”라고 하니, 양백지가 겉으로 응하는 체 하였다.
윤귀택은 자신이 모의한 일이 누설될까 염려하여, 먼저 개경(開京)에 이르러 은밀히 우리 태조에게 고하기를, “김종연이 도망하여 서경에 이르러 나와 함께 거병하여 시중을 살해할 것을 모의하였습니다. 김종연은 이미 개경으로 잠입하여 시중 심덕부(沈德符), 판삼사(判三司) 지용기(池湧奇), 전(前) 판자혜부사(判慈惠府事) 정희계(鄭熙啓), 문하평리(門下評理) 박위(朴葳), 동지밀직(同知密直) 윤사덕(尹師德), 한양부윤(漢陽府尹) 이빈(李彬), 나주도절제사(羅州道節制使) 이무(李茂), 전주도절제사(全州道節制使) 진을서(陳乙瑞), 강릉도절제사(江陵道節制使) 이옥(李沃) 및 진원서(陳原瑞)ㆍ이중화(李仲和) 등과 함께 난을 일으키기로 모의하였습니다. 조유도 나에게 말하기를, ‘심 시중이 그의 부하인 진무(鎭撫) 조언(曹彦)ㆍ김조부(金兆府)ㆍ곽선(郭璇)ㆍ위충(魏种)ㆍ장익(張翼)으로 하여금 조유 등과 휘하의 군사를 거느리고 장차 이 시중을 공격하려고 한다.’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우리 태조가 그의 말을 은밀히 심덕부에게 알리니, 심덕부가 조유를 하옥시키고, 천호 정을방(鄭乙邦)을 개경으로 보내어 김종연의 처(妻)와 종〔奴〕 및 그 족속(族屬)인 박천상(朴天祥)과 박가흥(朴可興)을 체포해서 순군옥(巡軍獄)에 가두었다. 이들을 국문하였더니, 종〔奴〕이 말하기를, “주인 김종연이 상복(喪服)으로 변장하고 박가흥의 집으로 들어가서는 저에게 말하기를, ‘윤귀택이 병력을 거느리고 오기를 기다리면 일은 성취된다.’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박천상이 말하기를, “이중화가 저에게 말하기를, ‘김종연이 감옥에서 도망하여 지용기의 집에 4, 5일 동안 숨어 있었고, 정희계의 집에서는 5, 6일 동안, 박가흥의 집에서는 10여 일 동안 숨어 있은 뒤에 성을 나갔다.’고 하였다.”라고 하니, 박가흥이 드디어 자복(自服)하였다.【155】
우리 태조가 아뢰기를, “신은 심덕부와 더불어 마음을 함께하여 나라를 받들었으며, 본래 시기하고 의심하는 바가 없었습니다. 청컨대 조유를 심문하지 말아서 우리 두 신하로 하여금 처음부터 끝까지 정의를 보전하게 하소서.”라고 하니, 공양왕(恭讓王)이 조유를 석방하려고 하였다. 심덕부가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라서 아뢰기를, “조유의 공사(供辭)가 신에게 관련되었으니, 지금 만약 신이 이 일을 전혀 알지 못하였다는 것을 묻지 않는다면, 신이 어떻게 변명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고, 스스로 순군옥에 나아갔다. 공양왕이 두 번이나 명하여 부르니, 심덕부가 이내 대궐에 나아가서 사례하였다.
임금이 조유를 석방하라고 명하였다. 헌부(憲府)에서 상소하여 조유와 윤귀택을 대질시켜 변명할 것을 청하니, 박위(朴葳)에게 명하여 대간(臺諫)과 함께 국문하여 죄를 다스리게 하였다. 박위가 먼저 윤귀택을 고문(拷問)하려고 하자, 집의(執義) 유정현(柳廷顯)이 말하기를, “고발한 자를 먼저 국문하는 것은 무슨 이치인가?”라고 하니, 박위가 낯빛이 변한 채 말없이 가만히 있었다. 이에 조유를 국문하였더니, 조유가 사실대로 자복(自伏)하였다. 헌부에서는 심덕부를 탄핵하고, 드디어 조언(曹彦) 등 5인을 감옥에 가두었다. 조유를 교수형에 처하고 가산을 적몰하였다.【156】 조언 등은 곤장을 쳐서 먼 곳으로 유배를 보냈다. 헌사(憲司)에서 연일 대궐문에 엎드려서 김종연의 무리를 논핵하니, 지용기를 삼척(三陟), 박위를 풍주(豐州), 정희계를 안변(安邊), 윤사덕을 회양(淮陽), 이빈을 안협(安峽)으로 유배를 보냈다. 헌사에서 대궐문에 엎드려 논청(論請)하니, 심덕부를 토산(兎山), 진원서를 흥덕(興德)으로 유배를 보냈다.【157】
우리 태조는 ‘벼슬과 지위가 가득 차서 넘치도록 풍성하면 편안하게 지내기가 어렵다.〔盛滿難居〕’고 여기고, 전문(箋文)을 올려서 사직을 청하여 이르기를, “신이 용렬함에도 불구하고 특별한 대우와 은혜를 입어 지위가 장상(將相)에 이르렀는데도, 오히려 국정(國政)에 털끝만한 보탬도 없습니다. 마땅히 스스로 사직하여 전하로 하여금 어진 이를 등용하는 길을 열어 성명(聖明)의 지치(至治)를 펴게 하는 것이 도리라고 여겨 정성을 다하여 두 번이나 천청(天聽 임금이 듣는 것)을 더럽혔지만, 매번 윤허를 받지 못하여 두려워하고 조심함이 더욱 깊어졌습니다.
가만히 생각건대, 나라는 대소(大小)의 차이가 있고, 일은 고금(古今)의 다름이 있으나, 임금과 신하가 서로 만나기 어려운 것만은 다르지 않습니다. 한 고조(漢高祖)와 문제(文帝)는 창업(創業)한 군주로서 사람을 알아서 잘 등용하였지만, 공신(功臣)을 잘못 처우한 것에 대해서는 식자(識者)들이 그 결점을 유감으로 여겼습니다.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는 중흥(中興)의 군주로서 호걸들을 망라하여 한실(漢室)을 부흥시키고, 또 공신들을 잘 처우하여 끝까지 잘 보전해주어, 후인들이 모두 그 아름다움을 칭송하고 있습니다. 한 고조의 공신이었던 한신(韓信)과 주발(周勃)은 마침내 장량(張良)이 뒤끝을 보전한 것만 못하고, 구순(寇恂)과 등우(鄧禹)도 오히려 자릉(子陵)의 고상(高尙)함에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신이 비록 배우지는 못하였지만, 장량과 자릉을 본받기를 원합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전하께서는 광무제와 같기를 원하옵니다.
신은 병신년(丙申年, 1356) 6월에 선부(先父)인 신(臣) 모(某 이자춘(李子春))를 모시고 현릉(玄陵)에게 명을 받고서 쌍성(雙城)을 평정하여 옛 강토를 수복하고, 남은 힘으로 영토를 개척하여 청주(靑州)에 이르기까지 번진(藩鎭)으로 삼아서 동쪽을 돌아보는 근심이 없게 하였습니다. 현릉은 그 공을 가상히 여겨서 신의 부친을 영록대부(榮祿大夫)ㆍ장작감사(將作監事)를 제수하고, 이어서 삭방도만호(朔方道萬戶)로 삼았습니다. 또 차례를 밟지 않고 신을 발탁하여 승진시켜서, 나이 서른이 못 되어 지위가 재보(宰輔)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보좌도 못하여서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근심하고 두려워하였습니다.
무진년(戊辰年, 1388)에 이르러 가성(假姓)이 군대를 일으켜서 중국을 침범하니, 사람들 중에 감히 간하는 자가 없어서 사직이 거의 무너질 뻔했기에 신이 앞장서서 대의를 주창하여 회군(回軍)하고 종묘사직을 다시 안정시켰더니, 사람들은 이것을 가지고 제멋대로 군사를 움직였다고 말합니다. 그 뒤 기사년(己巳年, 1389) 11월에 삼가 교지(敎旨)를 받들어 위성(僞姓)을 멸망시키고 왕씨(王氏)를 다시 회복시켜서 종사(宗祀)를 바로잡았더니, 사람들은 이것을 가지고 집권하였다고 합니다. 지금 제군사(諸軍事)가 되어서 군사를 양성하고 가만히 지키면서 간웅(姦雄)들을 진압하고 외구(外寇)를 소멸시켰더니, 이것을 또한 군자(軍資)를 소모시켰다고 하는 등 물의(物議)가 분분하여 변명하기가 어렵습니다.
신에게는 세 가지의 불행한 일이 있습니다. 공(功)은 작은데, 상(賞)이 커서 사람들에게 꺼리는 바가 된 것이 첫째 불행입니다. 사직을 보전하고 정통(正統)을 회복시키고 도적을 그치게 하는 등의 일에 일찍이 조그마한 도움이 없지 않아서, 이를 인하여 총애를 받는 것이 둘째 불행입니다. 예로부터 공과(功過)는 서로 덮지 못하거늘, 고집이 세고 미련하여서 용감하게 물러가지 못한 것이 셋째 불행입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고 보니 참으로 황공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윤(伊尹)이 말하기를, ‘신은 총애와 복록을 받았다고 하여 공을 이루었다고 자랑하지 않겠습니다.〔臣罔以寵利居成功〕’고 하였으며, 채택(蔡澤)은 ‘춘하추동(春夏秋冬) 사시(四時)의 순서처럼 공을 이루어 놓은 것이 떠나가야 합니다.〔四時之序 功成者去〕’고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자연의 이치입니다. 신 또한 오래도록 어진 이를 등용하는 길을 막아서는 안 되니, 청컨대 시골로 돌아가서 여생을 보전하는 것이 신의 소원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자애를 베풀어 공신의 명예를 보전하게 하여, 광무제에게만 아름다운 칭찬을 독차지 하지 않게 하신다면, 참으로 다행일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전문(箋文)이 올라가자, 공양왕은 윤허하지 않고 하교하여 이르기를, “대신(大臣)의 한 몸은 나라의 흥함과 쇠함에 관계되고, 백성의 기쁨과 슬픔이 매여 있으니, 직임도 이처럼 중요하므로 그 거취를 경솔하게 처리하여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주 소공(周召公)이 임금에게 고하고 귀향하려는 마음을 가지자, 주공(周公)이 독비(篤棐)의 의리로써 설득하였던 것이다. 경은 산천(山川)의 간기(間氣)이며 사직(社稷)의 원신(元臣)이니, 공(公)을 따르고 사(私)를 잊어서 그 충성이 해를 꿰뚫었으며, 신실함에 기대고 대의를 편안하게 여겨서 그 공업(功業)이 하늘을 기둥처럼 떠받들고 있다. 이에 선왕 때부터 과인의 날에 이르기까지 그대가 힘을 써서 우리나라를 화목하고 편안하게 하였다. 무진년(戊辰年)에 중국을 침범하려던 군대를 막고, 기사년(己巳年)의 난리를 평정하는 계책을 정하여 국운(國運)이 다시 이어지고, 백성들이 다시 소생하였다. 또 군사를 훈련시켜 양성하여 왕실을 수호하고 일마다 모두 천리(天理)에 부합하니, 어찌 남들의 말에 근심할 필요가 있겠는가? 높은 지위에 오른 것을 두려워함은 경이 스스로 지키는 바이니, 함께 협력하여 정치를 해나감에 있어서 내가 일을 맡길 자 그 누구이겠는가?
아! 자릉(子陵)이 고상하였던 것은 광무제가 일을 맡기지 않았기 때문이며, 유후(留侯)가 떠난 것은 한실(漢室)이 이미 안정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옛일로써 지금을 보건대 사세(事勢)가 같지 않으니, 경은 마땅히 그 자리를 편안해하여 짐의 마음에 부응하라.”고 하였다.【169】
우리 태조가 또 전문(箋文)을 올려서 이르기를, “오직 덕(德)을 헤아려서 직위를 주는 것은 임금의 현명함이고, 총애를 믿고 공(功)을 내세우지 말아야 하는 것은 신하의 도리입니다. 만약 영화를 탐하여 함부로 나아간다면, 아마도 재화(災禍)를 맞이하고 원망을 부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 소공(周召公)은 지위가 가득 차서 넘치도록 풍성하면 편안히 살기가 어렵다고 근심하였으며, 채택(蔡澤)도 공을 이룬 자는 떠나가야 한다고 한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 조정에서 시중(侍中)의 직임은 바로 주나라 총재(冢宰)의 벼슬과 같아서 나라를 공평하게 해야 하고 음양도 조화롭게 해야 합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신은 국량(局量)이 좁고 얕으며 학문이 정밀하지 못하고 거칩니다. 가성(假姓 신우(辛禑)를 가리킴)이 나라에 독을 퍼뜨릴 때에 군대를 일으켜 중국을 침범하는 거사가 있어서, 신(神)과 사람이 공분(公憤)하고 종묘사직이 거의 기울어졌습니다. 그래서 제장(諸將)과 함께 회군하여 천자의 명을 삼가 받드니, 참위(僭僞)의 종자는 저절로 멸망하고 정파(正派)의 정통이 다시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조종(祖宗)의 음덕이 도운 것이지, 진실로 신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특별히 작명(爵命)의 은택을 입어 중외의 일을 맡게 되었는데, 수의(垂衣)의 교화에 보탬이 없어서 늘 복속(覆餗)의 근심을 품어 왔습니다.
금년 봄에 윤이(尹彝)와 이초(李初)가 도망하여 중국으로 들어가서 천자를 속여 농락하고, 친왕(親王)에게 천하의 군대를 움직여 줄 것을 청하여 사직(社稷)을 바꾸려고 하였습니다. 김종연(金宗衍)이 그 주모자였는데, 스스로 의혹을 품고 도망쳤습니다. 이것은 왕실의 안위에 관계된 일로서 자신의 이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김종연을 숨겨주거나 일부러 놓아주어 모반하는 자들이 은밀히 서로 모의하였던 것은, 단지 신이 받은 총애와 복리(福利) 때문이었습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고 보니 황공하기 짝이 없습니다.
근자에 우규(右揆 우상(右相))를 면하게 되어서 스스로 다행으로 여겼는데, 지금 또 신을 시중(侍中)에 제수하는 명이 위에서 내려오니 몸 둘 곳이 없습니다. 【전(前) 고려 공양왕(恭讓王)이 우리 태조(太祖)를 영삼사사(領三司事)로 삼았다가, 얼마 안 있어 다시 문하좌시중(門下左侍中)으로 삼았다.】 하물며 지금은 나라가 다시 소생하여 문물이 중흥하니, 진실로 큰 인재가 아니라면 어찌 국정을 도울 수 있겠으며, 큰 덕망이 있지 않다면 어찌 인심을 따르게 할 수 있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신의 지극한 정성을 헤아려서 신의 무거운 책임을 벗게 해 주십시오. 신은 삼가 마땅히 어진 사람에게 길을 피해주어서 헛되이 자리만을 차지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지 않고, 집에서 노년을 보내면서 오로지 축리(祝釐)의 정성을 바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공양왕이 또 윤허하지 않고 하교하여 이르기를, “난세를 다스려 반정함〔撥亂反正〕은 실로 명세지재(命世之材)이며, 도(道)를 논하고 나라를 다스림〔論道經邦〕은 반드시 하늘을 대신하는 재상을 기다려야 한다. 그러므로 그 몸의 거취는 나라의 안위에 관계된다.
경은 그 뜻이 풍상(風霜)을 겪어도 굳세고, 그 기(氣)는 광악(光岳)의 기운이 모인 것이다. 예로부터 왕실에 공로가 있어 지금까지 그 은덕이 백성을 덮고 있으며, 납합출(納哈出)을 북방에서 쫓아내고 왜구를 사방에서 섬멸하였다. 선왕(先王)이 돌아가신 뒤 위신(僞辛 우왕(禑王))이 그 사이에 왕위를 훔쳐 유람과 사냥에 빠지고 주색(酒色)을 탐하며 살육을 자행하는 등 제멋대로 흉악한 짓을 행하였다. 군사를 일으켜 화하(華夏 중국)를 범하려고 할 때에는 경이 그 역리(逆理)와 순리(順理)을 밝게 알고서 대의를 주창하여 회군하였다. 종친 및 여러 신하들과 모의하여 마침내 위성(僞姓)을 폐출하고 과인을 추대하여, 거의 위태롭던 나라의 터전을 다시 안정시키고, 이미 끊어진 종묘사직을 다시 이어지게 하였으니, 그 공덕(功德)을 헤아려보건대 고금(古今)에 걸쳐 길이 빛난다. 마땅히 우리 왕실을 길이 돕고 영화를 후사(後嗣)에게 전해야 할 것인데, 어찌 여러 소인배들이 간사한 계획을 몰래 꾸밀 줄 생각하였겠는가? 이는 실로 나 때문이지, 경 때문이 아니다. 깊이 자신을 책망하고 반성하는 데에 뜻을 두고, 장차 그 형장(刑章 형법)으로써 바로잡고자 하거늘, 경이 갑자기 전장(牋章 전문(箋文))을 바쳐 직임(職任)을 면하려고 꾀하는데, 경은 비록 깊이 생각하였겠으나, 내가 바라는 것은 그렇지 않다. 원수(元首)와 고굉(股肱)이 이미 한 몸이니, 산하(山河)가 마르고 닳도록 어찌 감히 내 마음에서 잊겠는가? 번거롭게 고사(固辭)하지 말고, 속히 그대의 직임을 행할지어다.”라고 하였다.【178】
우리 태조가 또 전문(箋文)을 올려서 이르기를, “모든 정사가 조화를 이루는 것은 명철한 군주가 재상을 택하는 데 달려 있고, 백 가지 책망이 모이는 것은 마땅히 수효만을 채운 신하가 어진 사람을 추천해야 합니다. 만약에 대의(大義)를 잃은 채 영화만을 추구한다면, 이는 사리(私利)를 좇아서 성덕(聖德)에 누를 끼치는 것입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신이 그릇은 작은데 직임은 커서 일을 할 때마다 비방이 일어납니다. 비록 관중(管仲)처럼 군주의 신임을 얻어서 정사를 마음대로 한 것이 아니더라도, 증서(曾西) 같은 사람으로부터 공로가 없다고 배척받을까 두렵습니다. 그래서 저의 정성을 다하여 다시 신총(神聰 임금의 귀)을 더럽혔던 것입니다.
3월에 다시 신을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제수하셨으니, 그 총애가 지극히 두텁지만 청의(淸議)에 심히 부끄럽습니다. 매번 윤허를 내리시지 않는 교서(敎書)를 받을 때마다 부끄럽고 두려운 마음이 실로 깊어지고, 직무를 태만히 한다는 비난을 끼치게 되니, 두렵고 근심스런 마음이 더욱 무겁습니다. 하물며 신은 본래 병이 있고, 만물의 생성이 사계절의 순서대로 이루어짐을 생각하면, 더욱 높은 지위에 있는 것을 경계해야 함이 마땅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포용하는 도량을 넓히시고 측은히 여기는 마음을 베푸시어, 신의 지극한 마음을 가엽게 여기어 신에게 걸골(乞骨)을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면 신은 삼가 마땅히 한가한 곳에서 병을 치료하면서 중흥의 공을 길이 보전하고, 분수를 지키고 마음을 편안히 하면서 항상 상수(上壽)의 축원을 올리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공양왕이 또 윤허하지 않고 하교하여 이르기를, “이는 한 나라의 안위(安危)와 크게 관계있으니, 대신(大臣)의 거취를 가볍게 하여서는 안 된다. 어째서 높은 지위를 경계하여 절조(節操)를 지키려 하며, 물러남으로써 몸을 보존하려고 하는가? 경은 산천(山川)의 빼어난 기운과 해와 달처럼 빛나는 충절을 가졌다. 대의(大義)에 따라 회군하니 나라가 다시 안녕하고, 명분을 바로잡으니 신(神)과 사람이 모두 기뻐하였다. 나라를 새로 만든 이때를 맞아 경이 독실하게 보좌한 덕분에 장차 정치를 함께하여 태평을 이루려고 하거늘, 어째서 핑계 대는 말로써 사직을 꾀하는가? 비방이 일어난다면 이치로써 물리치고, 병이 중하면 마땅히 의원으로 하여금 다스리게 할 것이니, 직위를 내놓고 한가하게 거처할 필요가 없고, 정신을 즐겁게 하여서 잘 보전하라. 이미 번거롭게 세 번이나 사양하였으니, 다만 조금 안정을 취하기를 바랄 뿐이다.”라고 하였다. 우리 태조가 병으로 여러 번 사직을 청하였으나, 끝내 물러나지 못하였다.【182】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35권 〈공양왕(恭讓王) 4년조〉]
올량합(兀良哈)과 알타리(斡朶里)가 고려(高麗)에 와서 조회에 참석하여 윗자리를 다투었다. 알타리가 말하기를, “우리들이 윗자리를 다투려고 온 것은 아닙니다. 예전에 시중(侍中) 윤관(尹瓘)이 우리 땅을 평정하고 비(碑)를 세워서 이르기를, ‘고려의 땅이다.〔高麗地境〕’고 하였습니다. 지금 경내(境內)의 인민(人民)들이 모두 제군사(諸軍事)의 위엄과 신의를 흠모하여 왔을 뿐입니다.”라고 하고서, 마침내 서로 다투지 않았다.
우리 태조(太祖)가 올량합과 알타리를 집에서 대접하였는데, 그들이 진심으로 복종하였기 때문이었다.【183】
[《고려사(高麗史)》 104권 〈김종연전(金宗衍傳)〉]
고려(高麗) 조정에서 임순례(任純禮)를 파견하여 곡주(谷州 지금의 황해북도 곡산군)의 산중에서 김종연(金宗衍)을 잡아 왔는데, 이튿날 옥중에서 죽었다. 임순례가 압송하는 도중에 김종연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고, 하루 밤낮으로 3백 리를 달려서 피곤과 추위에 지쳐 죽게 하였던 것인데, 사람들이 모두 이를 의심하였다. 마침내 김종연의 사지를 찢어서 여러 도(道)에 돌렸다.【184】
[《고려사(高麗史)》 79권 〈식화지(食貨志) 화폐(貨幣)〉ㆍ85권 〈형법지(刑法志) 금령(禁令)〉]
고려(高麗)의 중랑장(中郞將) 겸 전의시승(典醫寺丞) 방사량(房士良)이 상소하기를,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특이한 물건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날마다 쓰는 물건을 천하게 여기지 않아야 백성이 풍족해진다.〔不貴異物賤用物 民乃足〕’고 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오랜 세월을 지내오면서 우리 땅에서 나는 명주와 모시, 삼베만을 사용했기 때문에 상하(上下)가 넉넉하였습니다. 지금은 귀천이 없이 외국의 물건을 다투어 사들여서 길에는 황제의 복장을 갖추어 입은 사내종들이 넘치고, 골목에는 황후의 장식을 한 계집종들이 널려 있습니다. 원컨대 지금부터는 사서(士庶)와 공상(工商), 천례(賤隷)에게는 비단 복장과 금은ㆍ주옥의 장식을 일절 금하여 사치한 풍속을 그치게 하고, 귀천의 구별을 엄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인가(人家)의 자손들이 집이 가난하고 돈이 없어서 비단 요와 이불을 마련하지 못하고, 예물로 줄 의복을 준비하지 못하여 세월만 끌다가 혼인할 시기를 놓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부모가 죽은 뒤에 족속(族屬)이나 노비(奴婢)에게 의지하여 살다가, 이로 말미암아 예(禮)를 어겨서 인륜(人倫)을 해치는 자들이 왕왕 있습니다. 원컨대 지금부터는 혼인하는 집안에서 오로지 면포만을 사용하게 하고, 다른 나라의 물건은 일절 금지시켜야 합니다. 만약에 구폐(舊弊)를 그대로 행하는 자가 있다면, 제서(制書)의 법을 어긴 죄로 처벌해야 할 것입니다.【186】
천하가 비록 지방이 다르면 풍속도 다르지만, 사농공상(士農工商)은 각기 생업으로 그들의 삶을 영위하여,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자기에게 없는 것을 교역하는데, 피차가 서로 통용하는 것은 화폐입니다. 그 바탕이 견고하고 사용이 편리하며, 불에도 타지 않고 물에도 젖지 않으며, 쥐〔鼠〕가 축내지도 못하고, 칼이 손상시킬 수도 없어서, 한 번 주조하여 만들면 만세에 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천하가 이를 보배로 여깁니다.
우리나라에서 추포(麤布)를 화폐로 삼는 법은 동경(東京 지금의 경상남도 경주시)의 몇몇 주군(州郡)에서 시행하였습니다. 추포는 사용한 지 10년도 되지 않았는데 잠시라도 불과 습기를 만나면 바로 못 쓰게 되고 썩고, 비록 관아의 창고에 가득 차 있더라도 습기의 손상을 면치 못하는 폐단이 있습니다. 원컨대 관아를 설치하여 돈을 주조하고, 겸하여 저폐(楮幣)를 만들어 화폐로 삼아 추포를 화폐로 사용하는 것을 일절 금하십시오.【188】
《서경》에 이르기를, ‘명령을 내는 것은 행하려고 함이다.〔令出惟行〕’고 하였습니다. 만약 명령이 내려져도 행하지 않는다면, 그런 나라는 나라가 아닐 것입니다. 지금 명령이 엄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행상(行商)들이 열 명이나 다섯 명씩 무리지어 소와 말을 끌며 금과 은을 싣고 날마다 중국 땅으로 가서 매매하는 바람에 나귀와 노새 따위의 느리고 둔한 동물들만이 나라 안에 가득합니다. 원컨대 지금부터는 몰래 강을 건너가 소와 말을 파는 자와 관인(官印)이 찍힌 말을 팔아서 데리고 돌아오지 않는 자들을 법을 어긴 죄로 형벌을 가하십시오.”라고 하였다.【190】
[《고려사(高麗史)》 120권 〈김자수전(金子粹傳)〉]
고려(高麗)의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 김자수(金子粹)가 상서(上書)하기를, “전하께서는 숨은 덕망이 드러나 알려져서 인심(人心)의 추대로 조종(祖宗)의 사업을 밝게 회복하였습니다. 난리를 평정할 때에 모두 현릉대비(玄陵大妃 정비(定妃))의 명을 받들어 행하였기 때문에, 즉위한 처음에 곧 왕대비(王大妃)로 봉하여 위호(位號)를 바르게 하고 책보(冊寶)를 바쳤으니, 이는 심히 성대한 전례(典禮)였습니다. 따라서 전하께서 왕대비를 섬기는 예(禮)는 마땅히 후해야 할 것입니다. 지난해 남쪽으로 행차한 때부터 금일에 이르기까지 일찍이 왕대비의 궁전에 한 번도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이는 종사(宗祀)를 계승하는 중요성을 소홀하게 여기는 것이니, 그것이 옳겠습니까? 전(傳)에 이르기를, ‘남의 후사가 된 자는 그의 아들이 된다.’고 하였으니, 이는 고금의 대의(大義)입니다. 왕대비가 돌아가신 뒤에는 전하께서 양암(亮陰)의 예(禮)를 진실로 극진하게 하여야 하나, 살아계실 때 섬기는 예도 마음을 다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원컨대 지금부터는 세시(歲時)의 복랍(伏臘)에 반드시 왕대비의 궁전에 찾아가서 문안을 드려 대의를 밝히십시오.
근자에 봉숭도감(封崇都監)을 설치하여 왕세자(王世子)를 책봉(冊封)하려고 하는데, 신은 그것에 대해 의혹이 없을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 아직 황제의 조칙을 받지 않으셨는데, 세자가 먼저 책보(冊寶)를 받는 예를 행하는 것이 옳겠습니까? 전하께서 친히 황제를 조회하여 명을 받은 뒤에 서서히 의논하여 행하여도 늦지 않습니다. 하물며 지금 명나라 조정의 사신이 와서 양마(良馬) 1만 필을 요구하여, 모든 관사(官司)가 명을 받들기 분주하여 지쳤는데, 이런 때에 억지로 책봉 의례를 행하는 것은 여론에 부합하지 않을 듯합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처음에 연복사(演福寺)의 탑(塔)을 중수하고 넓히기 위하여 민가 3, 40호를 철거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또 부도(浮屠)를 크게 일으켜서 토목 공사를 번거롭게 시작하였습니다. 지금 농사일이 한창 바쁜데, 교주도(交州道)에서는 나무를 베고 목재를 나르느라 사람과 우마(牛馬)가 모두 병들게 되었습니다. 일찍이 이를 조금도 불쌍하게 여기지 않으시고, 반드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닌 내세의 복을 구하고자 하여 현세의 백성들에게 실제의 재앙을 끼치게 하니, 백성의 부모가 되어 이와 같이 할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밝은 조칙을 내려서 이 공사를 그치게 하여 백성들의 힘을 넉넉하게 해주십시오. 전하께서 즉위한 이래로 태묘(太廟)와 능묘(陵墓)를 수리하고 손질한 일이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불탑(佛塔)을 일으키는 데만 급급하시니, 이는 조상을 추모하고 은혜에 보답하는 정성이 오히려 복을 구하고 자신을 이롭게 하려는 생각에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찌 전하의 큰 덕에 한 가지 흠이 되지 않겠습니까?
부도의 설도 믿을 수 없는데, 하물며 괴탄하고 허황한 무격(巫覡)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나라 안에 무당(巫堂)을 설립하는 것도 이미 법에 어긋난 일인데, 이른바 별기은(別祈恩)이라는 곳이 10여 곳이나 됩니다. 사시(四時)의 제사와 수시로 지내는 별제(別祭)까지 1년에 소비하는 비용이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습니다. 제사를 지낼 때에 금주령(禁酒令)이 아주 엄하더라도, 무당들은 떼를 지어서 나라의 행사라고 핑계를 대니, 유사(有司)가 감히 그들을 힐책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술을 잔뜩 마시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큰길에서 북을 치고 노래하고 춤을 추며 온갖 짓을 자행하니, 풍속이 아름답지 못하게 된 것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청컨대 유사에게 밝은 조칙을 내려서 법전에 기재된 제사 외에는 음사(淫祀)를 일절 금하십시오. 그리고 무당들이 궁궐에 드나드는 것을 엄격하게 금하고 요망한 짓을 근절하고 풍속을 바르게 하십시오.
근자에 교서(敎書)를 내려서 직언을 구하는 것이 적절한 듯합니다. 신이 보기에는, 대성(臺省)에서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갑자기 화를 내시면서 현재의 직임을 빼앗거나 혹은 외직으로 내쫓거나 혹은 벼슬을 강등하였습니다. 신은 전하께서 직언을 구하는 교서가 비록 간절하지만, 여전히 간언(諫言)을 거부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을까 염려됩니다. 청컨대 전일에 파직된 신하들을 모두 불러 등용하시고, 그들이 말한 일들을 모두 시행하여 후대에 모범이 되신다면, 뜻있는 선비로서 누군들 전하를 위하여 말을 다하지 않겠습니까?【197】
[《고려사(高麗史)》 117권 〈이첨전(李詹傳)〉ㆍ〈정몽주전(鄭夢周傳)〉]
고려(高麗)의 성균박사(成均博士) 김초(金貂)가 상서(上書)하여 부처를 비방하니, 공양왕(恭讓王)이 그를 죽이고자 하였으나 적절한 죄명을 찾지 못하였다. 좌대언(左代言) 이첨(李詹)이 아뢰기를, “우리 태조(太祖) 이래 역대로 불법(佛法)을 숭상하고 믿었는데, 지금 김초가 이를 배척하였으니, 이는 선왕(先王)의 법도를 비방한 것입니다. 이것으로써 그를 죄 준다면, 죄명이 없다고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니, 공양왕이 옳게 여겼다.【198】
병부정랑(兵部正郞) 정탁(鄭擢)이 상소하기를, “삼가 들으니, 김초가 이단(異端 불교를 가리킴)을 배척하면서 극언까지 꺼리지 아니하였는데도, 전하께서는 선왕의 법을 비방하였다고 하여 극형(極刑)에 처하려고 하니, 신은 삼가 전하를 위하여 이를 애석하게 여깁니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선왕의 법도를 잘 살펴서 오랫동안 허물이 없게 한다.〔監于先王成憲 其永無愆〕’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선왕의 법도라고 말한 것은 삼강오상(三綱五常)인데, 불씨(佛氏)가 이를 모두 어기고 있으니, 김초가 선왕의 법도를 비방한 것이 아니라, 전하께서 스스로 그것을 비방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대언(代言) 등이 임금의 노여움을 두려워하여 감히 아뢰지 못하자, 정몽주(鄭夢周)가 상소하기를, “신실함은 임금이 지녀야 할 커다란 보배입니다. 나라는 백성에 의해 보전되고, 백성은 임금의 신실함에 의해 보전되는 것이 당연한 이치입니다. 근자에 전하께서는 특별히 하교하여 직언을 구하면서 말하기를, ‘말하는 사람은 죄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조정의 관원 및 한량인(閑良人) 등이 교대로 글을 올려 정사의 득실과 민생의 애환을 다 털어놓았으니, 진실로 이른바 거리낌이 없는 조정이었습니다.
국자박사(國子博士)와 생원(生員) 등이 이단을 배척한다는 이유로 글을 올려 말하였다가, 말을 삼가지 않아 임금의 위엄을 범하여 조정에 있는 신료들이 두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들이 생각건대, 불씨를 배척하는 것은 유자(儒者)의 떳떳한 일이므로, 예로부터 군왕이 그냥 내버려 두고 논하지 않았습니다. 하물며 전하의 관대한 은혜는, 보잘것없고 버릇없는 유생(儒生)을 너그럽게 용서해 줄 만큼 넓으시니, 청컨대 관대한 은혜를 베풀고 모두 용서하여 나라 사람들에게 신실함을 보이소서.”라고 하니, 김초 등에게 태형(笞刑) 40대를 가하였다.【201】
[《고려사(高麗史)》 120권 〈정도전전(鄭道傳傳)〉]
고려(高麗) 공양왕(恭讓王)이 정당문학(政堂文學) 정도전(鄭道傳)을 불렀다. 정도전이 일찍이 상소를 하였는데도 윤허하지 않자, 병을 핑계로 조정에 나아가지 않았다. 임금이 좌부대언(左副代言) 안원(安瑗)을 보내어 간절하게 효유하니, 정도전이 그제야 나아갔다. 임금이 이색(李穡)과 우현보(禹玄寶)의 죄를 물으니, 정도전이 갖추어 대답하는 것이 전에 올렸던 상소문의 뜻과 같고, 그 말이 물 흐르듯이 거침이 없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색은 그 죄상이 조금 드러났지만, 우현보의 죄는 아직 명백하지 않다.”라고 하니, 정도전이 대답하기를, “이색의 죄는 이미 드러났으니, 마땅히 극형(極刑)에 처하여 그 불충(不忠)을 세상에 보여야 합니다. 우현보와 같은 자는 그 죄상이 아직 명백하지 않기 때문에 대간(臺諫)이 교대로 글을 올려서 먼 곳으로 유배 보낼 것을 청하는 것입니다. 신도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은 한데 섞어 두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색과 우현보의 일은 그 논의를 그치게 한 지 이미 오래되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항의하는 상소가 있는 것은 반드시 경의 상소문이 그 빌미가 되어서이다. 경이 근자에 과인을 보지 않았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라고 하였다. 이에 정도전이 대답하기를, “군신(君臣) 간의 의리는 부자(父子) 간의 정과 같아서, 비유하자면 아버지가 자식의 불효를 꾸짖고도 이튿날에 또 자식을 그 전처럼 사랑하는 것은 천리(天理)를 덮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전하께서는 지금 신을 책망하시지만, 뒤에 진심으로 신을 임용하신다면, 어찌 감히 분발하여 힘을 쓰지 않겠습니까? 지금 농사철을 당하여 하늘이 오래도록 비를 내리지 않다가, 전하께서 신을 불러서 면대하여 정사를 의논하니, 하늘에서 비가 내렸습니다. 예전에 장맛비가 오래도록 그치지 않아서 곡식이 무성하지 않았는데, 전하께서 신을 불러서 정사를 의논하니 비가 그쳤습니다. 전하께서는 이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만약에 간사한 무리들이 어지(御旨)라고 사칭하고 신을 죄 준다면, 신은 면대하여 아뢸 것을 청한 연후에 죄를 받겠습니다.”라고 하였으나, 임금이 기뻐하지 않았다.【202】
[《고려사(高麗史)》 117권 〈정몽주전(鄭夢周傳)〉]
고려(高麗)의 정몽주(鄭夢周)가 재상(宰相)들과 함께 상소하기를, “상벌(賞罰)은 나라의 큰 규범이니, 대개 한 사람에게 상을 주면 천만 사람이 힘쓰고, 한 사람에게 벌을 주면 천만 사람이 두려워합니다. 상벌이 지극히 공정하고 밝지 않으면 그 적절함을 잃게 되어, 온 나라의 인심을 복종시킬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래로 성헌(省憲 문하부와 사헌부)과 법사(法司)에서 교대로 상소를 올려 탄핵하기를, “아무개는 왕씨(王氏)를 세우자는 의논을 저지하고, 신우(辛禑)의 아들 신창(辛昌)을 세운 자이다. 아무개는 역적 김종연(金宗衍)의 역모에 참여하여 행재소(行在所)에서 내응한 자이다. 아무개는 제장(諸將)들이 천자(天子)의 명을 받들어 신우 부자(父子)가 왕씨가 아니니, 왕씨를 회복하자고 논의할 때에 신우를 맞이하여 왕씨를 영원히 단절시키려고 도모한 자이다. 아무개는 윤이(尹彝)와 이초(李初)를 상국(上國)에 보내 친왕(親王)에게 천하의 군대를 움직여 고려를 토벌할 것을 청한 자이다. 아무개는 은밀히 선왕(先王)의 얼손(孼孫)을 길러서 몰래 모반을 도모한 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상소들이 여러 차례 올라가서 전하의 성심을 괴롭혔으나,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 시비가 명백하지 않습니다. 그 사이에 필시 죄 있는 자가 그릇되게 용서를 받았거나 무고(無辜)한 자가 아직 깨끗하게 그 혐의를 씻지 못하였을 것이니, 공도(公道)로써 보건대 양쪽 다 공정성을 잃었습니다. 그 때문에 논의가 분분하여 지금까지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신들이 생각건대, 마땅히 성헌과 법사로 하여금 함께 의논해서 위에 관련된 사람들의 초사(招辭 공초한 말)와 문권(文卷)을 다시 상세하게 살피게 하여, 아무개의 죄는 용서할 수 없으니 마땅히 법에 따라 처리하고, 아무개는 실정(實情)이 의심스러우니 마땅히 가벼운 법에 따라 처리하며, 아무개는 죄가 없는데도 무고를 입은 것이니 마땅히 명백하게 분변해야 할 것이라고 하여야 합니다. 옥장(獄章)이 이미 올라갔으면, 전하께서 재보(宰輔)와 신료(臣僚)들을 불러서 함께 살피시고, 하나씩 친히 임하여 기록들을 살펴서 그 시비를 분별하고 억울함이 없게 한 다음에 벌하시거나 용서하신다면, 인심이 복종하고 공도가 행하여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204】
[《고려사(高麗史)》 85권 〈형법지(刑法志)〉 금령(禁令)]
고려(高麗)의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서 상서하여 이르기를, “나라의 이해와 군기(軍機)의 중요한 일을 논하고 간악한 일을 고발할 때는 반드시 날짜를 분명하게 적고 사실을 있는 그대로 진술하여야 합니다. 몰래 익명서(匿名書)를 던지거나 없는 말을 만들어 비방하여 국정을 어지럽히는 자는 헌부(憲府)와 법사(法司)로 하여금 엄히 살피게 하고, 발각되어 탄핵을 당한 자는 종친(宗親)과 귀척(貴戚)에 상관없이 계문(啓聞)을 기다리지 말고 바로 직첩(職牒)을 거두고, 국문하여 논죄해야 합니다.”라고 하니, 공양왕(恭讓王)이 주저하다가, 한참만에야 이를 허락하였다.【205】
[《고려사(高麗史)》 46권 〈공양왕세가(恭讓王世家) 3년조〉]
고려(高麗)의 예조(禮曹)에서 상소하여 이르기를, “지금 전하께서 세자(世子)로 하여금 명(明)나라에 가서 황제를 알현하게 하였습니다. 신들이 삼가 생각건대, 전하께서 즉위하신 지 3년이 되던 해에, 명나라 조정에서 처음으로 사신을 보내어 말〔馬〕 1만 필을 구입하고자 하였는데, 우리나라에서 보낸 것은 채 2천 필도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세자로 하여금 명나라에 들어가서 조회하게 하는데, 만약 명나라 조정에서 말을 보내는 것이 더디고 늦은 것을 문책한다면, 세자께서 장차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원컨대 전하께서는 다시 신료들로 하여금 의논하게 해서 시행하십시오.”라고 하였다.【206】
[《고려사(高麗史)》 79권 〈식화지(食貨志) 화폐(貨幣)〉, 《동국통감(東國通鑑)》 56권 〈고려기(高麗紀) 공양왕(恭讓王) 3년조〉]
고려(高麗)의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서 홍복도감(弘福都監)을 폐지하고 자섬저화고(資贍楮貨庫)를 만들어 저폐(楮幣)를 만들 것을 청하여 아뢰기를, “삼가 듣건대, 우(禹) 임금은 9년 동안 홍수를 겪고, 탕(湯) 임금은 7년 동안 가뭄을 겪었지만, 역산(歷山)과 장산(莊山)의 금(金)으로 모두 화폐를 주조하여 백성의 곤궁함을 구제하였습니다. 주(周)나라의 강태공(姜太公)은 구부환법(九府圜法)을 세웠으니, 이것이 화폐의 시초입니다. 한(漢)나라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시대마다 각기 화폐가 있었습니다. 송(宋)나라 때의 지폐인 회자(會子)와 원(元)나라 때의 지폐인 보초(寶鈔) 같은 것은 비록 화폐 제도가 바뀐 것이지만, 실상은 선왕의 뜻을 본받은 것이니, 이 또한 재난을 대비하고 백성의 이용을 편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동방(東方)의 화폐는 삼한중보(三韓重寶)ㆍ동국통보(東國通寶)ㆍ동국중보(東國重寶)ㆍ해동중보(海東重寶)ㆍ동해통보(東海通寶) 등이 중국의 문헌에 실려 있어서 대개 그 흔적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근래에는 은병(銀甁)을 주조하여 화폐로 삼으니, 이 모두 포필(布匹)과 더불어 자모(子母)의 화폐로 서로 맞추어 통용되게 하였습니다. 그 뒤에 법의 폐단이 있었기 때문에 동전(銅錢)과 은병이 모두 폐지되고 통용되지 않아서 오로지 오종포(五綜布)만을 화폐로 삼아 사용하였습니다.
근년 이래로 베올〔布縷〕이 굵고 성글어져 점점 이승포(二升布) 내지 삼승포(三升布)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비록 여인들이 힘들게 베를 짜도 백성들은 쓰기에 불편하고, 이를 실어 나르면 소〔牛〕가 땀을 흘리며, 이를 쌓아두면 쥐가 갉아 먹으며, 장사〔商賈〕들이 이를 유통시키지 않으니 미곡(米穀) 값이 폭등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지금 전하께서 정성을 다하여 정사에 힘을 쓰시어 정치와 교화가 새로워졌는데, 오직 이 한 가지 일만은 여전히 옛 폐단을 따르고 있습니다. 만약 한두 해에 걸친 홍수와 가뭄의 재난이 발생하고, 수십만 명의 군비(軍費)가 생긴다면 장차 무엇으로 대처하시겠습니까? 지금을 위한 계책으로는, 은(銀)과 동(銅)은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서 동전(銅錢)과 은병을 갑자기 화폐로 사용하기는 어렵습니다. 마땅히 유사(有司)로 하여금 고금을 참작하여 회자(會子)와 보초(寶鈔)의 법을 본받아 고려에서 통행되는 저화를 발행하여 유포시켜 오종포와 함께 통용하게 하십시오. 민간에서 여러 가지 물건을 매매하고, 중앙과 지방의 창고에 바치는 미곡과 공물, 물화(物貨) 등을 이 화폐로 절납(折納 대납(代納))하는 것을 허용하고, 거칠고 성긴 추포(麤布)의 사용을 일절 금하십시오. 이와 같이 하면 매우 편리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212】
또 아뢰어서 야관(冶官)을 두어 철(鐵)을 주조하여 국용(國用)을 도와야 한다고 청하였으나, 일이 끝내는 시행되지 않았다.【213】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35권 〈공양왕(恭讓王) 3년조〉, 《고려사(高麗史)》 113권 〈정지전(鄭地傳)〉ㆍ117권 〈이첨전(李詹傳)〉]
고려(高麗)의 성헌(省憲)과 형조(刑曹)에서 신우(辛禑)의 아들 신창(辛昌)을 임금으로 세우고 신우(辛禑)를 마중나간 일과 김종연(金宗衍)ㆍ윤이(尹彛)ㆍ이초(李初)ㆍ왕익부(王益富)의 무리들이 지은 죄를 하나하나 들추어가며 아뢰었다. 공양왕(恭讓王)이 정몽주(鄭夢周)ㆍ윤호(尹虎)ㆍ유만수(柳曼殊)ㆍ김주(金湊) 등을 불러서 이를 의논하게 하였다. 김주가 아뢰기를, “조민수(曺敏修)가 회군(回軍)하여 이색(李穡)에게 물었더니, 이색이 말하기를, ‘아버지가 나라를 가지고 있으면, 자식에게 전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고 하였는데, 조민수가 그 말을 좇아서 신창을 임금으로 세웠다면, 이색의 죄가 분명합니다.”라고 하였다. 정몽주와 김여지(金汝知) 등이 말하기를, “조민수는 신창의 근친(近親)이니, 신창을 임금으로 세우려고 한 것은 조민수의 뜻이기도 하였습니다. 이때를 당하여 이색이 비록 종실(宗室)을 임금으로 세우고자 하였더라도 조민수의 뜻을 빼앗을 수 있었겠습니까? 이색의 죄는 응당 가장 가벼운 죄로 처리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그 말을 옳게 여겨서 조민수와 변안열(邊安烈)은 그 집을 적몰하고, 지용기(池湧奇)ㆍ박가흥(朴可興)은 예전 그대로 부처(付處)하게 하고, 우인열(禹仁烈)ㆍ왕안덕(王安德)ㆍ박위(朴葳)는 지방에서 편리한 대로 살게 하고, 나머지는 모두 개경(開京)이나 지방에게 편리한 대로 살게 명하였다. 정몽주가 임금에게 아뢰어 영(令)을 만들기를, “앞으로 다시 윗사람의 죄를 논하는 자가 있다면, 무고(誣告)로써 논죄하겠다.”라고 하였다.【214】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정지(鄭地)가 죽었다. 정지는 어려서부터 큰 뜻이 있고, 용모가 훤칠하고 뛰어났으며, 성품이 관후하였다. 독서하기를 좋아하고 대의(大義)에 통달하여, 다른 사람에게 설명해주면 그 사람의 의문이 시원하게 트였다. 출입할 때에도 항상 서적을 가지고 다녔다.
일찍이 경상(慶尙)ㆍ전라(全羅)ㆍ강릉(江陵)ㆍ해도(海道)의 원수(元帥)가 되었다. 봄에 전염병이 크게 일어나 수군(水軍) 가운데 죽은 자가 태반이었다. 바다에서 죽은 자가 있으면 그때마다 뭍으로 내어다가 장사지내 주니, 사졸들이 감격하여 목이 메었다.
이때에 정지가 거느린 전함은 겨우 47척으로서 나주(羅州)와 목포(木浦)에 주둔하고 있었다. 왜적이 큰 배 1백 2십 척을 바다에 띄우고 오니, 경상도 연해 지역이 크게 진동하였다. 합포원수(合浦元帥) 유만수(柳曼殊)의 보고가 이르자, 정지가 밤낮으로 배를 저어 가기를 독촉하고, 어떤 때는 직접 노를 잡으니, 전함의 노 젓는 도부(櫂夫)들이 있는 힘을 다하였다. 섬진강(蟾津江)에 이르러 합포(合浦 지금의 경상남도 마산시)의 군사들을 징집하니, 왜적은 이미 남해(南海)의 관음포(觀音浦 지금의 경상남도 남해군)에 이르러 있었다. 마침 비가 내렸는데, 정지가 사람을 보내어 지리산(智異山)의 신사(神祠)에서 빌기를, “나라의 흥망이 이 한 번의 거사에 달려 있으니, 부디 나를 도와주시어 신령의 부끄러운 일이 없게 하소서.”라고 하였더니, 과연 비가 그쳤다.
왜적의 깃발이 허공을 뒤덮고, 칼과 창이 바다에서 번득이었다. 적이 사방을 포위해서 전진해오자, 정지가 머리를 조아려 하늘에 절하고 전진하기를 재촉하였다. 갑자기 바람이 아군에 이롭게 불자 바다 가운데서 돛을 올리니, 배가 나는 듯이 나아갔다. 적군은 큰 배 20척으로 배마다 정예 군졸 1백 4십 인을 태워 선봉으로 삼았다. 정지가 진격하여 이들을 먼저 패배시키니, 물에 뜬 시신이 바다를 덮었다. 또 남은 적들을 활로 쏘니, 시위 소리가 날 때마다 적들이 쓰러져서 마침내 모두 패주하였다. 정지가 장수와 부관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말〔馬〕을 땀 흘리게 하면서 적을 패배시킨 일이 많았지만, 오늘과 같은 쾌거는 없었다.”라고 하였다.【215】
고려(高麗) 공양왕(恭讓王)이 경연(經筵)에 행차하였다. 《정관정요(貞觀政要)》를 강론하다가 당 태종(唐太宗)이 다시 고구려(高句麗)를 침범하려고 하니, 방현령(房玄齡)이 표(表)를 올려서 간(諫)하였다는 말에 이르렀다. 좌대언(左代言) 이첨(李詹)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중국에 대하여 신하로서의 절의를 지켰습니다. 예전에 양 무제(梁武帝 소연(蕭衍))가 후경(侯景)의 핍박을 받을 때에 우리나라에서 사신(使臣)을 보내어 조회하게 하였는데, 사신이 이르고 보니 예전의 그 번성하였던 조정과 저자가 변하여 무성한 풀밭이 되어 있었습니다. 사신이 그 광경을 보고 울자, 후경이 잡아서 까닭을 물었습니다. 사신이 답하기를, ‘예전에 국운이 융성하던 때와 같지 않아서 운다.’고 하니, 후경이 의롭게 여겨서 놓아주었습니다.
당 현종(唐玄宗)이 안녹산(安祿山)의 화(禍)를 당하여서 서쪽으로 촉도(蜀道)에 행차하였습니다. 그때 우리 사신이 촉(蜀) 땅까지 가니, 현종이 기뻐하여 친히 십운시(十韻詩)을 지어서 주었으니, 이 모두 역사책에 실려 있어서 환히 볼 수 있습니다. 원(元)나라가 말기에 이르러 북쪽으로 상도(上都)를 옮기자, 달려가서 빙문(聘問)한 것이 오히려 공손하였으니, 이것은 신들이 직접 목격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신하로서의 절의를 굳게 지키는 일은 다른 나라가 우리나라에 미치지 못합니다. 하물며 지금은 당당한 천조(天朝 명나라를 가리킴)이니, 어찌 감히 조금이라도 신하로서의 절의를 어기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지문하(知門下) 김사형(金士衡)이 아뢰기를, “우리나라는 궁벽한 먼 곳에 있고 산천이 험준하니, 만약 제후로서의 도리를 삼가고 지킨다면 누가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겠습니까?”라고 하니, 임금이 그의 말을 깊이 가납하였다.【219】
[《고려사(高麗史)》 115권 〈이색전(李穡傳)〉, 《태조실록(太祖實錄)》 1권 〈총서(總序)〉ㆍ〈태조(太祖) 원년조ㆍ4년조〉]
고려(高麗) 공양왕(恭讓王)이 역마(驛馬)를 보내 이색(李穡)을 부르니, 이색이 개경(開京)으로 돌아왔다. 이색이 우리 태조(太祖)를 사저에서 알현하니, 태조가 놀라면서도 기뻐하였다. 태조가 상좌(上座)로 맞이해서 무릎 꿇고 술을 올리면서, 이색에게는 서서 마시기를 청하였다. 이색이 사양하지 아니하니, 사람들이 모두 그것을 그르다고 여겼지만, 술자리는 아주 화기애애한 가운데 끝이 났다. 임금이 그 소식을 듣고 말하기를, “그 두 사람은 예전부터 정(情)이 서로 두터웠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일찍이 좌우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지난번에 성헌(省憲)이 자주 상소하여 이색을 죽여야 한다고 청하였다. 하지만 나는 생각하기를, ‘이색이 일찍이 현릉(玄陵)을 섬길 때에 나랏일을 말하다가 어지(御旨)를 거슬렸다. 현릉이 비록 몹시 노하였지만 오히려 예(禮)로써 대우하였다. 또 위조(僞朝 우왕(禑王))를 위하여 명을 받들고 사신이 되어 대명(大明)에 갔는데, 황제가 은총으로 후하게 대우하였고, 편전(便殿)으로 불러 누차 연회를 베풀어서 위로하여, 온 천하가 그의 사람됨을 흠모하였다. 현릉의 밝은 식견과 황제의 위엄으로도 그를 대우하는 예모(禮貌)가 저와 같았거늘, 하물며 과인 같은 사람이 감히 그를 해치겠는가?’고 하였다.”라고 하였다.【220】
정도전(鄭道傳)이 우현보(禹玄寶)와 더불어 숙원(宿怨)이 있어서 우씨(禹氏) 집안을 해칠 수 있는 일이면 도모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가 즉위하자, 정도전이 이색과 우현보 등 십여 인을 모두 극형에 처할 것을 청하였다. 태조가 말하기를, “이들을 어찌 극형에 이르게 하겠는가? 더 이상 논하지 말라.”고 하였다. 정도전 등이 감등(減等)하여 죄를 줄 것을 청하니, 태조가 말하기를, “다시는 말하지 말라.”고 하였다.【221】 나중에 이색을 불러서 오랜 친구의 예(禮)로 대우하고, 술을 차려 놓고서 흡족하게 즐기었다. 과전(科田) 120결(結)과 미두(米豆) 300곡(斛), 소금 5곡을 하사하고, 또 술과 고기를 하사하면서 말하기를, “경은 이미 늙었으니, 마땅히 술과 고기를 다시 먹어서 몸의 기운을 길러야 한다.”라고 하였다. 이때에 이색이 부처를 섬기면서 술과 고기를 끊었기 때문에 이러한 명이 있었던 것이다. 또 재목과 기와를 하사하여 거처할 집을 짓게 하였다. 이색을 한산군(韓山君)에 봉하고, 이내 명하여 의성(義成)과 덕천(德泉) 등 오고(五庫)의 도제조(都提調)로 삼았다. 그리고 우현보의 직첩(職牒)을 되돌려주었다.【223】 활달하여 시대를 구제하는 도량과 인후(仁厚)하여 사람 살리기를 좋아하는 태조의 덕은 천성(天性)에서 나왔으며, 훈공이 빛날수록 더욱더 겸손하고 공손하였다.
또 평소에 경술(經術)을 중시하여, 비록 군중(軍中)에 있더라도 창을 내려놓을 때마다 명유(名儒)를 인견하여 경사(經史)를 논하는 것을 즐기면서 피곤한 줄 몰랐으며, 간혹 한밤중에 이르도록 잠자리에 들지 않으면서 개연히 세도(世道)를 만회하려는 뜻을 품었다. 일찍이 가문에 유학(儒學)을 업으로 삼는 자가 없는 것을 꺼려서 태종(太宗 이방원(李芳遠))으로 하여금 학문을 하게 하였다. 태종이 날마다 독서에 힘을 써 게을리하지 아니하니, 태조가 일찍이 말하기를, “내 뜻을 이루어 줄 사람은 반드시 너이다.”라고 하였다. 신덕왕후(神德王后)는 태종이 책을 읽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탄식하여 말하기를, “어째서 내 소생이 되지 아니하였는가?”라고 하였다. 폐위된 우왕(禑王) 때에 태종이 과거에 급제하니, 태조가 대궐 뜰에서 절하면서 감사해 하였는데, 감격함이 지극하여 눈물을 흘렸다. 제학(提學)에 제수되었을 때에는 태조가 매우 기뻐하여 사람을 시켜서 관교(官敎)를 두세 번이나 읽게 하였다. 태조가 빈객을 모아서 연회를 베풀 때마다 태종으로 하여금 연구(聯句)하게 하였는데, 그때마다 말하기를, “내가 빈객들과 더불어 즐거운 것은 네 힘이 크다.”라고 하였다. 태종이 성덕(聖德)을 성취한 것은 비록 천성에서 비롯되었지만, 실상은 태조가 부지런히 학문을 권장하였기 때문이었다.【225】
[《태조실록(太祖實錄)》 1권 〈총서(總序)〉]
우리 태조(太祖)는 천성이 인후(仁厚)하여 구족(九族)과 화목하게 지내었으니, 비록 단문(袒免)의 먼 친척이더라도 그들을 어루만짐이 심히 두터웠다. 서모형(庶母兄) 이원계(李元桂) 및 서모제(庶母弟) 이화(李和)와는 그 우애가 지극하여 항상 함께 거처하였다. 공민왕(恭愍王)이 태조를 공경하고 중하게 여겼기 때문에 이화를 총애하고 대우하여 늘 궁중(宮中)에 있게 하였다. 태조는 이화의 어머니 정안옹주(定安翁主) 김씨(金氏)를 맞이하여 경저(京邸)에 이르게 하고서는, 그녀를 섬기기를 심히 삼갔으니, 나아가 뵐 때에는 늘 섬돌 아래에서 무릎을 꿇었다. 임금이 자주 연석(宴席)을 마련하여 이화에게 하사하고 그 어머니를 대접하게 하였으며, 또 교방(敎坊 고려 때 기생에게 가무를 가르치던 곳)의 음악을 내려주어서 우대하고 총애를 보였다. 태조는 임금의 이런 하사를 영광스럽게 여겨 전두(纏頭)를 많이 주었다.
환조(桓祖 이자춘(李子春))가 돌아가시자, 이천계(李天桂 이성계(李成桂)의 이복형)는 스스로 적사(嫡嗣)라고 생각하여 마음속으로 태조를 꺼렸다. 태조의 노예 중에 자신이 양인이라고 호소하는 자가 있었다. 이천계가 그 누이인 강우(康祐)의 처(妻)와 함께 모의하여 양인이라고 호소하는 자와 결탁하여 난을 일으키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태조는 조금도 개의하지 않고 이들을 대하기를 처음처럼 하였다.
이천계가 고려(高麗)에 벼슬하여 장작판사(將作判事)가 되었는데, 사람을 구타하여 죽이는 죄를 지어 사형을 당하게 되었다. 태조가 그를 구제하려고 힘써 청하기를 두세 번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서 매우 슬퍼하였다. 고아(孤兒)들을 양육하여 그들의 혼인 등에 관한 모든 일을 태조가 스스로 주관하였다. 강우의 처가 집이 가난하여서, 태조가 불쌍하게 여기고 노비를 많이 지급하여 그 생계를 넉넉하게 해 주었다. 개국(開國) 뒤에는 이천계의 자식에게 모두 높은 벼슬을 제수하였다.【228】
[《고려사(高麗史)》 114권 〈이염전(李恬傳)〉ㆍ115권 〈이색전(李穡傳)〉ㆍ117권 〈이첨전(李詹傳)〉, 《동국통감(東國通鑑)》 56권 〈고려기(高麗紀) 공양왕(恭讓王) 3년조〉]
고려(高麗)의 좌대언(左代言) 이첨(李詹)이 글을 올려서 아뢰기를, “신이 삼가 보건대, 전하(殿下)께서는 일찍이 정관(貞觀 당 태종(唐太宗)의 연호로 627~649)의 치리(治理)에 뜻이 있어서 《정관정요(貞觀政要)》를 읽으신 지 지금 2년이 되었습니다. 모든 사물은 반드시 그와 비슷한 유(類)가 있으니, 견주어 보면 크게 다를 게 없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당 태종(唐太宗)이 돈황공(燉煌公)이 되었을 때는 바로 전하가 정창군(定昌君)이 되었을 때와 같습니다. 정관 원년은 바로 전하께서 즉위하였던 원년과도 같습니다. 당 태종이 예전에 비하여 사형(死刑)을 태반(太半)이나 제거한 것은 바로 전하의 인자하심과 같습니다. 당 태종이 위로는 황천(皇天)을 두려워하고 아래로는 신하들을 꺼렸던 것은 바로 전하께서 스스로 겸손하게 하심과 같습니다. 당 태종이 여러 학사들을 불러서 문적(文籍)을 강론하였던 것은 바로 전하께서 경연(經筵)을 하시는 것과 같으며, 누리〔蝗〕 몇 마리를 삼켰던 것은 바로 전하께서 가뭄을 근심하는 것과 같습니다. 당 태종이 간쟁(諫諍)을 즐겁게 들었던 것은 바로 전하께서 직언을 구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신하들이 심력(心力)을 다하여 아는 것을 행하는 것은 방현령(房玄齡) 같은 사람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군막(軍幕)에서 계획하여 사직을 앉아서 안정시킴은 두여회(杜如晦) 같은 자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번거로운 일을 처리함은 대주(戴冑) 같은 자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간쟁을 자기 임무로 삼음은 위징(魏徵) 같은 자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격탁양청(激濁揚淸)하고 악인을 원수처럼 미워하였던 것은 왕규(王珪) 같은 자가 있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당 태종은 무덕(武德 당 고조(唐高祖)의 연호로 618~626) 연간 이전에는 사방을 경략(經略)하여 싸움에서 승리하여 전공을 취하였으니, 전하의 잠저(潛邸) 때와는 다릅니다. 수(隋)나라의 난을 평정하고 당(唐)나라를 세운 것은 전하께서 왕씨로 다시 나라를 일으킨 것과는 다릅니다. 정관 연간에는 한 해를 마치도록 사형으로 처단한 자가 겨우 29인이었으나, 오늘날에는 사형에 걸리는 자가 너무 많습니다. 정관 연간에는 홍문관(弘文館)에서의 강론이 때로는 한밤중까지 계속되었지만, 오늘날에는 경연(經筵)을 행하기도 하고 그만두기도 합니다. 전하께서 스스로 겸손하게 하시는 것이 과연 하늘의 뜻과 사람들의 바람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염려하시는 것입니까? 전하께서 가뭄을 근심하시는 것이 과연 모든 일을 다 잊고 몰두하여 병을 얻을 정도였습니까? 당 태종이 말년에 간언(諫言)을 하는 사람들이 그의 뜻을 거스르는 것을 싫어하였는데, 전하께서도 직언을 구하면서 과연 그렇습니까? 신하들이 나랏일을 천리(千里) 밖에서 진달할 때에 대면하고 말하듯이 하는 것이 과연 방현령과 같습니까? 힘써 인의(仁義)를 행하게 하여 성과가 넉넉한 것이 과연 위징과 같습니까? 군주의 노여움을 사면서까지 고집스럽게 간하는 것이 과연 대주와 같습니까? 한 마디 말로써 임금을 감동시키는 것이 과연 왕규와 같습니까? 지금 비슷한 사례를 가지고 견주어 보아, 차이가 있는 것은 그 까닭을 생각해야 합니다.
당 태종 말년에 위징은 상소하여 정관 초기와 비교하여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하는 것이 모두 열 가지라고 논하였습니다. 지금이 바로 정관 초기에 해당한다면, 지금 이후는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한 때에 해당합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전하께서는 스스로 당 태종과 견주었을 때 누가 더 낫다고 여기십니까? 당 태종은 매우 영명(英明)한 데도 위징의 말이 이처럼 간절하였습니다. 신은 삼가 위징에 견주어보나니, 전하께서는 신이 아뢰는 것을 헤아려보십시오.
나라는 소중한 보배와 같아서 얻기도 몹시 어렵고 지키기도 매우 힘듭니다. 밤낮으로 삼가고 두려워하여 덕을 닦고 인(仁)을 행하여 선왕(先王)의 사업을 지키도록 요구될 뿐입니다. 선왕의 사업을 지키는 방법은 다른 것이 없으니, 마치 큰 집을 지키는 것과도 같습니다. 지금 어떤 사람이 여기에 큰 집을 가지고 있는데, 장차 이를 자손에게 전하여 무궁하기를 꾀한다면, 반드시 집터를 견고하게 하고, 주춧돌을 튼튼하게 하며, 기둥과 대들보를 강하게 하고, 지붕을 두텁게 하며, 울타리를 높게 하고, 빗장과 자물쇠를 단단히 해야 할 것입니다. 다 이루어지면 자손 중에서 현명한 자를 택하여 삼가며 지키게 하고 날마다 달마다 살피게 하여, 기운 것은 버티고 헌 것은 보수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면, 비록 천년을 가더라도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백성은 나라의 집터이고, 예법(禮法)은 주춧돌이며, 대신(大臣)은 마룻대와 들보이고, 모든 관리는 지붕이며, 장수(將帥)는 울타리이고, 갑병(甲兵)은 빗장과 자물쇠이니, 이 여섯 가지는 아침저녁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임금이 조종(祖宗)들께서 이루어 놓은 법도를 삼가 지켜, 진실로 안일하게 행동하여 그것을 무너뜨리거나 참언과 아첨으로 그것을 훼손시키지 않는다면, 대대로 서로 계승하여 무궁할 것입니다. 만약에 안일과 오락 때문에 조종의 법도를 무너뜨리고 참언과 아첨 때문에 그것을 훼손한다면, 신(神)이 노하고 백성들이 원망하여 마침내는 망하여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신은 멀리 옛 것을 인용하지 않고, 위조(僞朝)의 일로써 말하여 청하겠습니다. 위신(僞辛)이 시기심 많고 난폭한 자질로서 하늘이 왕씨(王氏)를 불쌍히 여기지 않는 때를 당하여 우리 보배인 나라를 훔쳐서 무도한 짓을 자행하였습니다. 또 역량을 헤아리지 않고 명분이 없이 군대를 출동시켜 대국(大國)과 틈이 생기게 하여, 죄악이 가득히 쌓여서 멸망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전에 만약 위신이 조심하고 겸손하여 법도를 삼가 지켜 대신들로부터 회군(回軍)의 힘과 정책(定策 방책을 정함)의 공(功)을 빌리지 않았더라면, 천명(天命)은 아직 알 수 없고, 전하의 오늘도 기약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은(殷)나라 주왕(紂王)이 거울로 삼아서 경계해야 할 것은 먼 데 있지 않으니, 하(夏)나라 때의 걸왕(桀王)에게 있었다.〔殷鑑不遠 在夏后之世〕’고 하였습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전하께서 성조(聖祖)가 이루어 놓은 법도를 준수하시고, 위조(僞朝)의 복철(覆轍)을 경계로 삼아서 중흥(中興)의 사업을 보전하여 후세의 터전을 견고하게 하신다면, 인도(人道)가 아래에서 순응하고 천변(天變)이 위에서 그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231】
명(明)나라의 고황제(高皇帝)가 환자(宦者) 강완자독(康完者篤) 등 3인을 고려에 보내서 조서(詔書)를 내리기를, “삼한(三韓) 땅에서 임금과 신하가 올바른 도리를 어지럽힌 지 지금 20여 년이 되었다. 다행히 성(城)과 들판을 다투는 전쟁이 없어서 백성들이 시정(市井)과 향리(鄕里)에서 편안하다. 예전에 사신이 와서 고하기를, ‘왕씨의 후예가 이 백성들의 임금이 되었다.’고 하였다. 지금 특별히 사자를 보내어 위로하고 시정(施政)이 어떠한지를 살펴보고자 한다.”라고 하고, 이를 말미암아서 임금에게 저사(紵絲)와 능견(綾絹) 2백 필을 하사하였다. 공양왕(恭讓王)이 신하들을 거느리고 수창궁(壽昌宮)에서 제정(帝正 황제의 정월 초하루)을 하례(賀禮)하고, 천사(天使)와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는데, 한밤중이 되어서 파하였다.【232】
밀직사(密直使) 이염(李恬)을 순군옥(巡軍獄)에 하옥시켰다. 이에 앞서 팔관회(八關會) 때에 중방(重房)에서 추밀원(樞密院)에 예(禮)를 표하지 아니하여, 마침내 틈이 생겨 서로 글을 올려 다투었습니다. 그런데 임금이 모두 궁중에 머물러 두고 비답을 보내지 않으니, 이염이 몹시 앙심을 품었다. 이때에 이르러서 임금이 연회가 파하자 내전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이염이 술에 취해 임금 앞에 무릎을 꿇고 임금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면서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정창군(定昌君)으로 있을 때를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나랏일이 날로 잘못 되고 있는데, 어째서 소인배의 말만을 믿고 대신(大臣)의 글을 가볍게 여기십니까?”라고 하고, 마침내 모자를 벗어서 땅에 던지며 말하기를, “원컨대 임금에게 이 모자를 돌려드리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더욱 노하여 그 모자를 발로 차서 부수고 성난 목소리로 말하기를, “이염이 주사를 부리는 것이 이럴 수 있느냐?”라고 하고, 드디어 하옥시켰다. 이염이 순군만호(巡軍萬戶) 유만수(柳曼殊)에게 말하기를, “네 지위가 재상(宰相)에 이르렀지만, 불효(不孝)와 불우(不友 형제간에 우애하지 않음)의 평판을 짊어지고 있어서 대성(臺省)에서 두 번이나 그대를 논하였으니, 네가 어찌 나를 처벌할 수 있겠는가? 내가 임금에게 감히 간하였던 것은 죄가 아니며, 또한 주사를 부린 것도 아니다.”라고 하니, 유만수가 부끄러워하면서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숙였다. 이윽고 만호(萬戶) 배극렴(裴克廉) 등이 이르자, 이염이 맞이하여 말하기를, “유만수가 거의 나를 죽일 뻔했는데, 지금 공들을 보니 내가 살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국문(鞫問)을 가하였는데, 이염이 여전히 말하기를, “임금에게 간하는 예는 마땅히 그와 같이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배극렴 등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이염은 진실로 주사를 부렸던 것입니다.”라고 하니, 임금이 노하여 배극렴과 유만수 등의 만호 직책을 파면하고, 찬성사(贊成事) 조준(趙浚), 판개성(判開城) 안익(安翊),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유구(柳玽), 지문하(知門下) 김사형(金士衡)을 그에 대신하게 하고, 성헌(省憲)과 순군(巡軍)에 명하여 함께 국문하게 하였다. 간관(諫官)이 상소하여 이염의 불경(不敬)을 논하고 극형에 처할 것을 청하니, 우리 태조(太祖)가 아뢰기를, “이염이 실로 죄가 있으나, 그 말이 지나치게 곧은 데서 나왔으니 용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하니, 임금이 명하여 이염을 곤장 1백 대에 처하고 합포(合浦)로 유배 보냈다.【235】
뒤에 임금이 탄신일에 수창궁(壽昌宮)에 행차하여 조하(朝賀)를 받고 여러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는데, 이색(李穡)과 우현보(禹玄寶), 검교시중(檢校侍中) 이무방(李茂芳) 등이 자리를 함께하였다. 이무방은 그때 나이가 81세였는데, 축수(祝壽)의 잔을 올리고 일어나 춤을 추니, 이색이 취하여 소리를 내며 크게 웃었다. 근시(近侍)인 대호군(大護軍) 김정경(金鼎卿)이 이를 제지하자, 이색이 황공해 하면서 종종걸음으로 밖으로 나갔다. 정몽주(鄭夢周)와 유만수 등은 술에 취하면 그때마다 떠들썩하게 소리를 질렀지만, 이날에는 다소 자제하였으니, 이염의 일로써 경계한 것이었다.【236】
[《태조실록(太祖實錄)》 1권 〈총서(總序)〉, 《세종실록(世宗實錄)》 79권 〈세종(世宗) 19년조〉, 《고려사(高麗史)》 46권 〈공양왕세가(恭讓王世家) 3년조ㆍ4년조〉ㆍ117권 〈정몽주전(鄭夢周傳)〉ㆍ119권 〈정도전전(鄭道傳傳)〉, 《동국통감(東國通鑑)》 56권 〈고려기(高麗紀) 공양왕(恭讓王) 4년조〉, 《포은집(圃隱集)》 〈포은선생집본전(圃隱先生集本傳)〉]
우리 태종(太宗)께서 신의왕후(信懿王后)의 상(喪)을 당하여 거상(居喪)할 때, 제릉(齊陵) 곁에 여막(廬幕)을 치고 거처하였다. 이 때문에 개경으로 들어오는 길에서 태조(太祖)를 볼 때마다 눈물이 비 오듯이 흘러 멈추지 않았다. 태조의 저택에 이르러서도 문득 느낌이 있으면 통곡하여 태조의 주변 사람들이 슬퍼하였으니, 태조가 늘 그 효를 칭찬하였다.【238】
우리 태조께서는 예(禮)로써 어진 선비를 만나시고, 직언(直言)을 수용하며, 사문(私門)을 막고 분경(奔競)을 금하여 기강(紀綱)을 정돈하시니, 당시 사대부로서 뜻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따라 붙좇았다.【239】 고려 공양왕(恭讓王)은 태조가 공훈이 높고 인심을 얻는 것을 꺼려하였다. 또 구가(舊家)와 세족(世族)들은 사전(私田)을 개혁한 것을 원망하였는데, 임금이 태조를 꺼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다방면으로 무고하여 비방하였다. 신우(辛禑)와 신창(辛昌)의 당여(黨與)로서 왕실과 혼인으로 연결된 인척들도 조석으로 끊임없이 참소(讒訴)하였다. 공양왕은 이런 참언을 물리치기는커녕 도리어 믿고서 밤낮으로 좌우의 사람들과 더불어 태조를 제거하는 것을 몰래 도모하였다.
태조가 헐뜯는 참언(讒言)에 곤경을 겪자, 정도전(鄭道傳)과 남은(南誾), 조인옥(趙仁沃) 등에게 말하기를, “내가 그대들과 더불어 왕실을 위해 힘을 합쳤거늘 참언이 자꾸 비등하니, 우리들이 용납되지 못할까 염려스럽습니다. 나는 마땅히 동쪽으로 돌아가서 이를 피할 것입니다.”라고 하고, 먼저 가인(家人)들에게 명하여 행장을 재촉해서 장차 떠나려고 하였다. 이에 정도전 등이 말하기를, “공의 일신(一身)에는 종묘사직과 백성들이 매여 있으니, 어찌 그 거취를 경솔하게 정할 수 있습니까? 남아서 왕실을 돕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어진 사람을 등용하고 불초한 자를 물러나게 하여 기강을 일으킨다면, 참언은 저절로 그칠 것입니다. 만약 지금 물러나서 나라의 한 모퉁이에 거처한다면, 참언이 더욱 심하여져 반드시 화(禍)가 불측(不測)한 데에 이를 것입니다.”라고 하니, 태조가 말하기를, “옛날 자방(子房 장량(張良)의 자(字))이 적송자(赤松子)를 따랐으나, 한 고조(漢高祖)가 그를 처벌하지 않았습니다. 내 마음에는 다른 뜻이 없으니, 임금이 어찌 나를 처벌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정도전과 남은 등이 이해(利害)를 들어서 힘써 말하여 개경을 떠나는 것을 중지시켰다.【241】
태조 휘하(麾下)의 인사들은 공양왕이 참언을 믿는 것에 분개하여, 글을 올려서 그 무망(誣妄)함을 분변하고자 하여서, 글은 이루어 놓고 아직 올리지 않았다. 태조의 서형(庶兄) 이원계(李元桂)의 사위〔壻〕인 사재부령(司宰副領) 변중량(卞仲良)이 중간에 있으면서 사태의 변화를 보고 있다가, 임금의 의심이 이미 심해졌음을 알고, 그 화가 자신에게까지 미칠까 두려워하였다. 그는 평소에 임금의 사위인 익천군(益川君) 왕집(王緝)과 동경계(同庚契)를 맺고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태조 휘하의 인사들이 지은 글을 왕집에게 고하여 다른 날의 입지(立地)로 삼고자 하였다. 그래서 임금이 이를 알고 태조에게 말하기를, “듣자니 경의 휘하 인사들이 글을 지어 우현보(禹玄寶) 등을 논핵하고자 한다고 하던데, 그대도 알고 있는가?”라고 하였다. 그러자 태조가 놀라면서 모른다고 대답하고, 물러 나와서 휘하의 인사들을 불러서 그 실정을 알고 비로소 이를 그치게 하였다.
세자(世子) 왕석(王奭)이 명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므로, 태조가 황주(黃州)로 나가 마중하고서 드디어 해주(海州)에서 사냥하였다. 노루 한 마리를 쫓으며 활을 쏘아 맞혔는데, 미처 말의 고삐를 잡지 못하여 말이 진창에 빠져 넘어졌다. 그 때문에 몸이 몹시 좋지 않아서 견여(肩輿)를 타고 돌아왔다.【243】 공양왕이 경연(經筵)에 나아갔다가 태조가 말에서 떨어졌다는 말을 듣고 의원과 약을 보냈다. 강독관(講讀官) 이확(李擴)이 아뢰기를, “제군사(諸軍事)는 우리나라의 장성(長城)이니, 스스로 몸을 아끼지 아니하고 사냥하면서 내달리다가 만에 하나라도 다친다면 나라의 복이 아닙니다.”라고 하니, 임금이 책을 덮고 대답하지 않았다.【244】
일찍이 수시중(守侍中) 정몽주(鄭夢周)가 태조(太祖)의 위엄과 덕망이 날로 커져서 중외에서 백성들의 마음이 태조에게 쏠려 돌아오는 것을 꺼려서, 그들 무리와 함께 태조를 위태롭게 하고자 도모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태조가 말에서 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면서 사람을 보내어 대간(臺諫)을 사주하여 말하기를, “이성계(李成桂)가 지금 말에서 떨어져 병이 위독하니, 마땅히 먼저 그 우익(羽翼)인 조준(趙浚) 등을 벤 뒤에야 그를 도모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바로 대간이 삼사좌사(三司左使) 조준과 전(前) 정당문학(政堂文學) 정도전(鄭道傳), 전 밀직부사(密直副使) 남은(南誾), 전 예조 판서(禮曹判書) 윤소종(尹紹宗), 전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남재(南在), 청주목사(淸州牧使) 조박(趙璞) 등 6인을 탄핵하였다. 공양왕이 그 탄핵서를 도당(都堂)에 내려 보내니, 정몽주가 중간에서 부추겨서 조준 등 6인을 모두 먼 곳으로 유배 보내고, 그들의 무리인 순군천호(巡軍千戶) 김귀련(金龜聯)과 형조정랑(刑曹正郞) 이반(李蟠) 등을 6인의 유배지로 보내 국문해서 죽이려고 하였다.【245】
이때에 태종(太宗)은 제릉(齊陵)의 곁에서 여막을 치고 거처하고 있었다. 태조(太祖)가 말에서 떨어져 부상을 입고 돌아온다는 소식과 또 정몽주가 태조가 개경으로 들어오는 날에 난을 일으키고자 한다는 말을 듣고서, 말을 타고 달려서 길에서 태조를 맞이하였다. 벽란도(碧瀾渡)에 이르러 정몽주의 음모를 고하며 말하기를, “정몽주가 반드시 우리 집안을 무너뜨릴 것입니다.”라고 하였는데, 태조는 대답하지 않았다. 또 말하기를, “마땅히 속히 개경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하룻밤 유숙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으나, 태조가 허락하지 않았다. 태종이 두세 번 청한 뒤에야 비로소 태조가 이를 좇아서, 있는 힘을 다하여 밤을 새워 빨리 달려가서 미명(未明) 무렵에 개경에 들어왔다.
정몽주가 성헌(省憲)을 사주하여 상소문을 교대로 올려서 조준과 정도전 등을 주살해야 한다고 청하였다. 그러자 태조가 말하기를, “이와 같은 무함(誣陷)은 그 시비를 가리지 아니하여서는 안 된다.”라고 하고, 조정에 나아가려고 하였으나, 병으로 일어날 수 없었다. 그래서 공정대왕(恭靖大王)과 판의덕부사(判懿德府事) 이화(李和), 전 밀직부사(密直副使) 이제(李濟),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황희석(黃希碩), 예조 판서(禮曹判書) 조규(趙珪) 등을 대궐에 보내어 아뢰기를, “지금 성헌에서 조준을 논핵하고 있습니다. 전하를 임금으로 세울 때에 다른 사람을 세우자는 의논이 있으나, 신이 그것을 저지하였습니다. 청컨대 조준 등을 불러서 조준이 임금으로 세우고자 의논한 자가 누구인지, 신이 그것을 저지하는 말을 들은 자는 누구인지, 대간(臺諫)과 그 시비를 분명하게 가리게 하여 재삼 왕복하게 하십시오.”라고 하였으나, 임금이 들어주지 않았다.
여러 소인배들이 참언으로 죄를 얽어 만드는 것이 더욱 심해져서 장차 화(禍)가 불측(不測)한 지경에 이르려고 하자, 태종이 혼자 들어가서 정몽주를 죽여야 한다고 은밀히 청하였다. 태조는 허락하지 않고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명이 있으니, 다만 그 명을 좇아서 받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태종이 굳이 청하기를 서너 번 하였지만, 태조는 끝내 들어주지 않고 태종에게 명하기를, “속히 돌아가 너의 큰일을 마치도록 하라.”고 하였다. 태종이 하는 수 없이 밖으로 나와 숭교리(崇敎里)의 옛 사저에 이르러 사랑방에 앉아 근심을 하며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별안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서 급히 나가 보니, 바로 광흥창사(廣興倉使) 정탁(鄭擢)이었다. 정탁이 극언(極言)하기를, “백성들의 이해(利害)가 지금 결정되고, 여러 소인배들이 난을 얽어 만드는 것이 이처럼 급한데, 공은 어디로 가십니까? 왕과 제후, 장수와 재상이 어찌 정해진 씨가 있겠습니까?〔王侯將相 寧有種乎〕”라고 하였다.
태종은 즉시 태조의 저택으로 돌아와서 이화(李和)와 공정대왕, 이제(李濟)에게 말하기를, “아버님께서 내 말을 듣지 않으시나, 정몽주를 죽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가 마땅히 그 질책을 받겠습니다.”라고 하니, 이화와 공정대왕, 이제가 모두 허락하였다. 태종이 휘하의 인사인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 조영규(趙英珪) 등을 불러서 말하기를, “이씨(李氏)가 왕실에 충성하는 것은 나라 사람들이 다 알지만, 지금 정몽주의 무함으로 인하여 악명(惡名)을 덮어쓰게 되면, 후세에 누가 이를 분별할 수 있겠는가? 휘하에 인사들이 많으니, 이씨를 위해 힘을 다하는 한 사람이 없겠는가?”라고 하니, 조영규가 개연히 말하기를, “힘을 다하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였다. 조영규는 늘 태조를 따라서 정벌에 참여하였는데, 특히 검(劍)을 잘 쓰는 자였다.
태종이 조영규와 해주목사(海州牧使) 조영무(趙英武), 중랑장(中郞將) 고여(高呂), 판군기시사(判軍器寺事) 이부(李敷) 등으로 하여금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들어가서 정몽주를 치게 하였다. 이때 갑자기 행인(行人)들을 벽제(辟除)하는 소리가 나서 나가 보았더니, 정몽주가 문에 도착해 있었다. 변중량(卞仲良)이 이 모의를 정몽주에게 누설하였기 때문에 정몽주가 이를 알고 변(變)을 살펴보려고 문병을 핑계 대고 왔던 것이다. 태조는 정몽주를 대하기를 처음처럼 하였다.
이화가 태종에게 말하기를, “정몽주를 주살하는 것은 지금이 바로 그때입니다.”라고 하면서 다시 말하기를, “공(公 이성계)의 노여움이 두려우니 어찌하시겠습니까?”라고 하니, 태종이 말하기를,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공의 노여움은 내가 대의(大義)를 아뢰어서 위로하고 풀어드리겠다.”라고 하였다. 다시 조영규에게 명하여 공정대왕의 저택에 가서 검(劍)을 취하여 길가에서 기다리다가 맞이하여 치라고 하고, 고여와 이부 등 두어 사람을 따라가게 하였다. 정몽주는 태조의 집으로 들어가서 머물지 아니하고 바로 나왔다. 태종은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염려하여, 친히 가서 지휘하려고 문을 나서니, 마침 휘하 인사의 말이 안장을 얹은 채 문 밖에 있었다. 드디어 말을 타고 달려서 공정대왕의 저택에 이르러 정몽주가 지나갔는지를 물었더니, “아직 지나가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태종이 다시 방법과 계책을 주고 돌아왔다. 마침 이때 전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유원(柳源)이 죽었기 때문에 정몽주가 그의 집에 들러 조문하면서 머물러 있었다. 그래서 조영규 등이 병기(兵器)를 갖추고 정몽주를 기다렸다. 정몽주가 이르자 조영규가 말을 타고 내달리면서 쳤으나 적중시키지 못하였다. 정몽주는 돌아보면서 꾸짖고 말에 채찍을 가하여 달렸다. 조영규가 말을 달려 쫓아가서 말 머리를 치니, 정몽주가 말에서 떨어졌다가 다시 일어나 달렸는데, 고여 등이 쫓아가서 그를 베었다.
태종이 들어가서 고하자, 태조가 놀라서 일어나 진노하여 말하기를, “우리 집은 평소에 충효(忠孝)로써 소문이 났거늘, 너희들이 함부로 대신(大臣)을 죽였으니, 나라 사람들이 우리가 도리를 알지 못한다고 할 것이다. 부모가 자식에게 경서(經書)를 가르치는 것은 충효를 하게 하려는 것인데, 지금 감히 불효를 행함이 이와 같았으니, 나는 앙약(仰藥)하고서 죽고 싶다.”라고 하였다. 태종이 말하기를, “정몽주 등이 우리 집안을 무너지게 하려고 하였는데, 어찌 가만히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리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효를 행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태조의 노여움이 아주 대단하여서 신덕왕후(神德王后)가 곁에 있으면서도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태종이 말하기를, “어머니께서는 어째서 말씀하지 아니하십니까?”라고 하니, 신덕왕후가 성을 낸 기색으로 고하기를, “공께서는 늘 대장군(大將軍)임을 자처하시거늘, 어째서 이처럼 놀라 두려워하십니까?”라고 하였다.
이튿날 태조가 황희석(黃希碩)을 보내 임금에게 아뢰기를, “정몽주 등 죄인들이 대간(臺諫)을 은밀히 유혹하여 충량(忠良)한 자들을 무함(誣陷)하였습니다. 지금 정몽주가 이미 복죄(伏罪)하였으니, 청컨대 조준과 남은(南誾) 등을 불러서 대간과 변명하게 하십시오.”라고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장차 대간을 외직(外職)으로 내보내겠다.”라고 하였다. 이때에 태조는 노여움과 병이 심하여 말조차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태종이 여러 숙부 및 형들과 더불어 의논하고 공정대왕(恭靖大王)을 보내어 아뢰기를, “만약 정몽주의 무리를 문책하지 않으시겠다면, 청컨대 신들을 죄주십시오.”라고 하니, 임금이 마지못하여서 대간을 순군옥(巡軍獄)에 하옥시켰다. 임금이 또 말하기를, “외방으로 유배 보내는 게 좋겠으니 국문할 필요가 없다.”라고 하였다가, 이윽고 판삼사사(判三司使) 배극렴(裵克廉)과 문하평리(門下評理) 김주(金湊)에게 명하여 순군제조관(巡軍提調官) 김사형(金士衡) 등과 같이 국문하게 하였다. 좌상시(左常侍) 김진양(金震陽)이 자백하여 말하기를, “정몽주와 이색, 우현보 등이 이숭인(李崇仁)과 이종학(李種學), 조호(趙瑚) 등을 보내어 신들을 사주해서 탄핵하게 하였습니다.”라고 하니, 이숭인과 이종학, 조호 등을 순군옥에 하옥시켰다. 이윽고 김진양 및 우상시(右常侍) 이확(李擴), 우간의(右諫議) 이래(李來), 좌헌납(左獻納) 이감(李敢), 우헌납(右獻納) 권홍(權弘), 사헌집의(司憲執義) 정희(鄭熙), 장령(掌令) 김무(金畝)ㆍ서견(徐甄), 지평(持平) 이작(李作)ㆍ이신(李申) 및 이숭인ㆍ이종학 등을 먼 곳으로 유배 보냈다.
유사(有司)가 김진양 등의 죄를 논하여 마땅히 참수(斬首)해야 한다고 하니, 태조가 말하기를, “내가 살인을 좋아하지 않은 지 오래 되었다. 김진양 등은 정몽주의 사주를 받은 것뿐인데, 어찌 함부로 형벌을 가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유사가 또 말하기를, “그렇다면 이들을 장형(杖刑)에 처하여 심하게 매질이라도 하여야 합니다.”라고 하니, 태조가 말하기를, “이미 관대하게 처하였으니, 어찌 곤장을 치겠는가?”라고 하였다. 김진양 등은 이로 말미암아 죽음을 면하였다.【249】
이색을 한주(韓州)로 추방하였다. 헌부(憲府)에서 상주하기를,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래로 변고가 연달아 이어져 조정이 화목하지 못한 것은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상벌(賞罰)이 밝지 못하고 은의(恩義)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현보는 본래 절의가 없는 사람인데, 세상에 아부해서 출세하여 그 지위가 재상에 이르렀습니다. 마땅히 성심으로 힘을 다하고, 공손하고 신중하게 직분을 지켜 왕실을 보좌해야 하는데, 정몽주와 함께 난을 일으키기 위한 음모에 가담하였으니, 그 죄가 용서하기 어렵습니다. 전하께서 자주 용서하시는 은혜를 믿고서 사직의 안위에 관계된 계책을 소홀히 하여, 일찍이 경계하고 삼가는 일이 없이 날로 더욱 교만하고 충신을 제거하려고 도모하였습니다. 마침내 안팎으로 하여금 서로 의심하게 하여 임금의 측근 신하들이 화목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삼가 전하를 위하여 마음이 아픕니다. 법은 나라의 큰 권병(權柄)이니 사사로운 정리(情理) 때문에 굽혀서는 안 됩니다. 전하께서는 법을 굽혀서 관대하게 죄인들을 용서하여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섭섭하게 하였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사직(社稷)을 생각하고 대의(大義)로써 결단하여 그 죄를 밝게 바로잡아 만세에 경계를 보여주십시오.”라고 하였으나, 임금이 다만 삭탈관직해서 먼 곳으로 유배 보내라고만 명하였다. 그러자 대간이 또 교대로 소장(疏章)을 올려서 우현보의 죄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궁중에 머물러 둔 채, 유사에게 하달하지는 않았다.【250】
임금이 명하여 태종(太宗)과 사예(司藝) 조용(趙庸)을 불러서 말하기를, “내가 장차 이 시중(李侍中)과 더불어 동맹(同盟)을 맺으려고 하니, 경들은 내 말을 이 시중에게 전하여 그의 말을 듣고 맹서(盟書)를 기초해서 가지고 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반드시 고사(故事)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니, 조용이 엎드려서 답하기를, “맹약은 귀한 것이 아니니, 성인(聖人)이 싫어하였던 것입니다. 열국(列國)의 동맹 같은 것은 옛날에 있었지만, 임금과 신하가 동맹하였던 것은 근거할 만한 경적(經籍)과 고사가 없습니다.”라고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다만 그것을 기초하기만 하라.”고 하였다. 조용이 태종과 함께 태조에게 나아가서 임금의 교명(敎命)을 전하니, 태조가 말하기를, “내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그대가 임금의 교명을 가지고 기초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조용이 물러나서 기초하기를, “경이 있지 아니하였다면, 내가 어찌 여기에 이르렀겠는가? 경의 공덕을 내가 어찌 감히 잊겠는가? 황천(皇天)과 후토(后土 토지신)가 위에 있고 곁에 있으니, 대대로 자손들이 서로 해치지 말 것이다. 내가 경에게 빚진 것이 있어서 이와 같은 맹약을 한다.”라고 하였다. 조용이 태종과 함께 임금에게 기초한 글을 올리니, 임금이 말하기를, “괜찮다.”고 하였다.【252】 조용이 사관(史官)이 되어서 글을 써서 이르기를, “임금이 이 시중에게 자신을 도와 임금으로 세운 공적을 아직 보답하지도 않았거늘, 도리어 해치려고 하는 뜻이 생겼습니다. 천명이 떠나고 인심도 벌써 이반하였으니, 구구한 맹서는 기댈 만한 것이 못 된다.”라고 하였다.【253】
정몽주는 사람됨이 호탕하고 인품이 뛰어나 충효의 커다란 절의가 있었다. 젊어서부터 힘써 공부하여 갑과(甲科)에 발탁되었으며, 성리학(性理學)을 정밀하게 연구하여 깊이 터득한 바가 있어서, 【254】 강설(講說)하여 어렵고 깊은 뜻을 나타내는 것이 보통 사람의 생각을 초월하였다. 그래서 이색이 매번 칭찬하기를, “달가(達可 정몽주의 자(字))가 이치를 논하여 자유자재로 말하는 것은 이치에 합당하지 않은 것이 없다.”라고 하였다.【255】
우리 태조는 평소 정몽주를 소중하게 여겨서 분곤(分閫 장수로서의 출임(出任))할 때마다 반드시 그를 데리고 갔으며, 누차 천거하여 발탁되도록 하여 함께 재상의 반열에 올랐다. 이때 나라에 일이 많아서 기무(機務 나라의 중요한 일)가 번다하였는데, 정몽주는 일을 처리하거나 의심난 것을 결단할 때에 조금도 흔들리는 기색이 없고, 좌우로 수답(酬答 묻는 말에 대답함)하는 것이 다 조리 있고 합당하였다. 그가 지은 시문(詩文)은 호방하였다.【256】 우리 태종은 그가 신하로서의 절의를 온전하게 지킨 것을 가상하게 여겨서 영의정(領議政)을 증직하고 문충(文忠)이란 시호를 내렸으며, 그의 두 아들 정종성(鄭宗誠)과 정종본(鄭宗本)에게 벼슬을 주었다.【257】
[《고려사(高麗史)》 46권 〈공양왕세가(恭讓王世家) 4년조〉]
사신(史臣)의 찬(贊)에 이르기를, “신우(辛禑)가 왕위(王位)를 훔쳐서 차지하고 있을 때에 이미 왕씨(王氏)는 없어졌다. 충신(忠臣)과 의사(義士)들이 왕씨의 후예를 구하여 세워서 공양왕(恭讓王)이 왕위에 올랐으니, 왕씨의 제사가 이미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졌고, 왕씨의 나라가 이미 망하였다가 다시 일어났다. 그러니 공양왕은 마땅히 훈신(勳臣)과 현신(賢臣)을 성심껏 높이고 충간(忠諫)을 받아들여서 유신(維新)의 정치를 함께 도모해야 될 것인데, 어째서 오직 인척의 한(恨)을 품은 하소연과 부녀자와 내시의 사사로운 청탁만을 들어주며, 이를 믿고서 원훈(元勳)을 멀리하여 꺼리고 충량(忠良)한 자들을 해쳤던가? 그리하여 정사(政事)가 어지러워져서 인심이 저절로 이반하고, 천명이 저절로 떠나서 왕씨 5백 년의 종묘사직이 망하게 되었으니, 슬픈 일이다.”라고 하였다.【258】
[《태조실록(太祖實錄)》 1권 〈총서(總序)〉ㆍ〈태조(太祖) 원년조〉, 《고려사(高麗史)》 46권 〈공양왕세가(恭讓王世家) 4년조〉]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하는 때부터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남은(南誾)이 이조 판서(吏曹判書) 조인옥(趙仁沃) 등과 더불어 태조(太祖)를 임금으로 추대할 것을 은밀히 모의하였다. 개경(開京)으로 돌아와서는 이를 태종(太宗)에게 고하였더니, 태종이 말하기를, “이는 큰일이니 경솔하게 말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이때 여러 사람들이 서로 다투어 추대하려고 하여, 간혹 많이 모인 사람들 속에서 드러내놓고 말하기를, “천명과 인심이 이미 돌아갈 곳이 있는데, 어째서 빨리 왕위에 오르는 것을 권하지 않는가?”라고 하였다. 홍무(洪武) 25년(1392) 6월에 태종이 남은과 더불어 계책을 정하니, 남은이 은밀히 조인옥, 판삼사사(判三司事) 조준(趙浚), 충의군(忠義君) 정도전(鄭道傳), 대사성(大司成) 조박(趙璞) 등 52인과 더불어 추대할 것을 협의하였다. 그러나 태조의 진노를 두려워하여 이를 감히 고하지 못하였다. 태종이 들어가서 신덕왕후(神德王后)에게 아뢰어 태조에게 전달하게 하였으나, 신덕왕후도 감히 고하지 못하였다. 태종이 나와서 남은 등에게 말하기를, “마땅히 즉시 의식을 갖추고 즉위를 권해야 한다.”라고 하였다.【259】
7월 12일 신묘(辛卯)에 시중(侍中) 배극렴(裵克廉) 등이 정비(定妃)에게 아뢰기를, “지금의 임금은 어리석어서 군주로서의 도리를 이미 잃었고, 인심이 이미 떠나서 사직과 백성의 주인이 될 수 없으니, 청하옵건대 그를 폐하십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정비가 남은을 보내어 문하평리(門下評理) 정희계(鄭熙啓)에게 교서(敎書)를 가지고 북천동(北泉洞)의 시좌궁(時座宮)으로 가서 교지(敎旨)를 선포하고 나서 공양왕(恭讓王)의 죄를 열거하고 폐위시켰다. 공양왕이 부복한 채 명을 듣고 마침내 궁궐을 나가서 원주(原州)로 갔다.
백관(百官)들이 전국보(傳國寶)를 받들어 정비의 궁전에 두고 서무(庶務)를 가지고 나아가서 재결을 받았다.【260】 임진일(壬辰日)에 정비가 교지를 선포하여 태조에게 나랏일을 주관하면서 정사를 감독하고 기록하게 하였다. 을미일(乙未日)에 배극렴과 조준, 정도전 등이 대소 신료 및 한량(閑良)ㆍ기로(耆老)와 더불어 전국보를 받들고 태조의 저택에 이르렀다. 사람들이 골목을 꽉 메웠는데, 대사헌(大司憲) 민개(閔開)만이 홀로 기뻐하지 않는 낯빛으로 머리를 숙이고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남은이 그를 쳐서 죽이려고 하니, 태종이 말하기를, “의리상 죽여서는 안 된다.”라고 하면서 힘써 말렸다.
이날 마침 여러 친족의 부인들이 태조를 알현하였다. 태조가 신덕왕후와 더불어 물에 밥을 말아 먹는 중이었는데, 부인들이 모두 놀라고 두려워하여 북문(北門)을 통해서 흩어져 가버렸다. 태조는 문을 닫고 배극렴 등을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저녁이 되자, 배극렴 등이 문을 밀치고 곧바로 내정(內庭)으로 들어가서 전국보를 청사(廳事) 위에 놓으니, 태조가 놀라 몸 둘 바를 몰라 하였다. 이천우(李天祐)의 부축을 받고 겨우 침문(寢門)을 나오니, 백관들이 나열해서 절을 하고 북을 치면서 만세(萬歲)를 불렀다. 태조가 몹시 두려워하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배극렴 등이 합사(合辭)하여 즉위할 것을 권하여 아뢰기를, “나라에 임금이 있는 것은 위로는 사직을 받들고 아래로는 민생을 편안하게 할 뿐입니다. 고려(高麗)는 시조(始祖)가 개국한 때부터 지금까지 거의 5백 년이 되었습니다. 공민왕에 이르러 아들이 없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시자, 그때에 권신(權臣)이 정권을 잡고서 자기들의 총애를 견고하게 하고자, 요승(妖僧) 신돈(辛旽)의 아들 신우(辛禑)를 공민왕의 후사라고 거짓으로 칭하고 왕위를 훔친 것이 15년 동안이었습니다. 왕씨(王氏)의 제사는 그때 이미 끊어졌습니다.
신우는 포학한 짓을 자행하고 무고한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군대를 일으켜 요동(遼東)을 공격하는데 이르러서, 공(公)이 맨 먼저 대의(大義)를 주창하여 천자(天子)의 경내(境內)를 범하여서는 안 된다고 하여 회군하였습니다. 신우는 스스로 그 죄를 알아서 두려워하며 물러났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이색과 조민수 등이 신우의 처의 아비인 이림(李琳)과 한패가 되어 신우의 아들 신창(辛昌)을 받들어 임금으로 세워 왕씨의 제사가 다시 폐하여졌습니다. 이는 하늘이 왕위를 공에게 명하는 시기였는데, 공은 겸손하게 사양하여 왕위에 오르지 않으시고 정창부원군(定昌府院君)을 추대하여 나랏일을 임시로 맡게 하니, 거의 삼가 사직을 받들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전날에 신우의 악은 여러 사람들이 다 아는 일인데, 그 무리인 이색과 우현보 등이 미혹하여 깨닫지 못하고, 다시 신우를 맞이하여 왕위를 회복시키려고 모의하였습니다. 간악한 죄상이 드러나자 자신들의 화(禍)를 면하려고, 몰래 그 무리인 윤이(尹彛)와 이초(李初) 등을 도망시켜서 중국에 보내어 본국이 이미 반란하였다고 거짓으로 고하고, 친왕(親王)에게 천하의 군대를 동원할 것을 청하여 장차 본국을 소탕하고자 하였습니다. 과연 그 계책이 행하여졌다면 사직은 장차 폐허가 되고, 백성들도 멸망하는 데 이르렀을 것입니다. 이런 짓을 차마 할 수 있는데, 무슨 일인들 차마 할 수 없겠습니까?
간관(諫官)과 헌사(憲司)가 소장(疏章)을 교대로 올려서 계청(啓請)하기를, ‘이색과 우현보 등은 종묘사직에 죄를 짓고 백성에게 화를 끼쳤으니, 마땅히 그 죄를 다스려야 합니다.’고 하여 그 글이 수십 번 올라갔는데, 정창군(定昌君)은 오히려 인척이라는 연고로 법을 굽혀서 이들을 두둔하여 보호하고 언관(言官)들을 장형(杖刑)에 처하고서는 그냥 내쫓았습니다. 그로 인하여 간당(奸黨)들이 안팎에 포진하여 더욱 법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김종연(金宗衍)은 도망하여 있으면서 무리를 모아 난리를 도모하였고, 김조부(金兆府) 등은 안에 있으면서 그 변란에 응하고자 하였습니다. 이처럼 화란(禍亂)이 날마다 생겨서 그치지 않는데, 정창군은 사직과 백성을 위하는 대계(大計)를 돌아보지 않고, 사은(私恩)을 팔아서 인망(人望)을 얻고자 하였습니다. 또한 진실로 법을 범한 자가 있으면 반드시 모두 용서해 주고 특별히 뽑아 등용하였으니, 《서경(書經)》에서 이른바, ‘천하에 달아난 죄인들을 수용하는 주인이 되어, 물고기가 연못에 모이고 짐승이 수풀에 모이듯 한다.〔爲天下逋逃主 萃淵藪〕’고 한 것입니다.
정창군을 임금으로 받들어 세우는 계책을 정한 것으로 말하자면 공로가 사직에 있고, 대의(大義)를 주창하여 회군한 것으로 말하자면 은택이 백성에게 미쳤는데, 오히려 좌우의 부인과 환자(宦者)의 참소를 지나치게 들어서 반드시 사지(死地)에 두려고 하였습니다. 사람 중에 강직하여 아첨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모두 죄를 주니, 참소하고 아첨하는 자들은 뜻대로 되고, 충량(忠良)한 자들은 기운을 잃었습니다. 그 때문에 정치와 형벌이 문란해져서 백성들은 수족을 둘 곳조차 없어졌습니다. 하늘이 견책하는 뜻을 알려서 천문(天文)이 누차 변하고 요얼(妖孼)이 번갈아 일어나더니, 정창군도 스스로 임금의 도리를 잃고 민심이 떠나서 사직과 백성의 주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스스로 물러나와 사저(私邸)로 갔습니다. 군사를 통솔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지극히 복잡하고 중요하여 하루라도 통솔함이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니, 마땅히 왕위에 나아가서 귀신과 사람들의 여망에 부응하소서.”라고 하였다.
그러나 태조는 굳이 거절하면서 말하기를, “자고로 왕자(王者)가 일어나는 것은 천명(天命)이 있지 않으면 불가하다. 내가 실로 덕이 없는데, 어찌 이를 감당하겠는가?”라고 하고, 끝내 응하지 아니하였다. 대소 신료와 한량(閑良)ㆍ기로(耆老)들이 둘러싸고 물러나지 않으면서 왕위에 오를 것을 더욱 간절하게 권하였다. 병신일(丙申日)에 태조가 부득이 수창궁(壽昌宮)으로 행차하였는데, 백관들이 궁문 서쪽에서 반열을 지어 맞이하였다. 태조는 백관이 서 있는 곳에 이르기 전에 곧바로 말에서 내려 걸어서 정전(正殿)으로 들어가 즉위하였는데, 어좌(御座)를 피하고 영내(楹內)에 서서 여러 신하들의 조하(朝賀)를 받았다. 그로 인하여 육조(六曹)의 판서(判書) 이상에게 명하여 전(殿)으로 올라오게 하고서 말하기를, “내가 수상(首相)이 되어서도 오히려 두려워하고 위태롭게 여기는 마음을 품고서 늘 직책을 다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는데, 어찌 오늘날에 이런 일을 보게 되리라고 생각하였겠는가? 내가 만약 몸이 평강(平康)하다면 필마(匹馬)로 적봉(敵鋒)을 피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병으로 수족(手足)을 마음대로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경들은 마땅히 각자가 심력(心力)을 하나로 모아 덕이 적은 이 사람을 보좌하라.”고 하였다. 그러고는 전조(前朝) 중외의 대소 신료에게 예전처럼 자신이 맡은 일을 보게 하고, 드디어 사저로 돌아왔다.【263】
좌시중(左侍中) 조준(趙浚)이 전(箋)을 올렸는데, 거기서 대략 이르기를, “엎드려 생각하건대, 신이 처음에 현릉(玄陵)을 섬길 때 조정에서 정성껏 모셨는데, 중도에 비운(否運 막힌 운수)을 만나서 두문불출하고 독서하면서 몸을 마치려고 하였습니다. 전하(殿下)를 용잠(龍潛)에서 한 번 뵈었는데도 구면(舊面)인 것 같았으니, 이는 하늘이 신에게 전하를 만나게 하였던 것입니다.
무진년(戊辰年) 정월에 전하께서는 대장(大將) 최영(崔瑩)과 더불어 15년 동안 백성들에게 해독을 끼친 흉악한 무리들을 숙청하였는데, 그것은 전하께서 잔인한 무리를 제거한 은덕으로, 백성들의 마음에 있었던 것입니다. 최영은 학술이 없어서 위주(僞主)와 함께 요동(遼東)을 범하고자 하여 군대로 하여금 압록강을 건너가게 하였는데, 전하께서 대의(大義)를 주창하고 회군하여서 삼한(三韓)의 백성들이 썩어 문드러지는 것을 면하게 하였으니, 이는 전하께서 세상을 구제하신 공훈이 사직에 있는 것입니다. 이때에 전하께서 신을 발탁하여 대사헌(大司憲)으로 삼으셨습니다. 신은 알고 있는 것을 다 말하고, 전하께서는 신이 말한 것을 모두 따르셨으므로, 무너진 기강을 일으키고 공도(公道)를 펴서 밝히며, 뛰어난 사람들을 등용하고 간사한 자들을 물리치며, 백성들을 위하여 폐해를 제거하고, 상국(上國)과 우호를 맺어서, 이내 위조(僞朝)를 축출하고 왕씨(王氏)를 회복시켰습니다. 천자(天子)가 이를 가상하게 여겨서 사자를 보내어 위로하였으니, 이는 전하께서 나라를 바로잡아 회복시킨 공적이 천하에 알려진 것입니다.
처음에 전하께서 신을 등용하여 헌사(憲司)로 삼았을 때, 흔쾌히 만세(萬世)를 위하여 태평을 열 것을 하늘과 신명(神明)에게 고하고, 간사한 무리들의 비방을 배격하며, 명문거족의 분노를 범하여 사전(私田)의 해묵은 폐단을 개혁해서 백성들을 극심한 고통에서 구제하였습니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군량을 풍족하게 하고, 누선(樓船)을 만들며, 성보(城堡)를 쌓으니, 그로 인하여 무위(武威)가 떨치고 조운하는 뱃길이 개통되어, 삼한(三韓)에서 40년 동안이나 계속되던 왜노(倭奴)의 우환이 하루아침에 없어졌습니다. 경기(京畿)에 과전(科田)을 두어서 사대부들을 넉넉하게 하고, 주군(州郡)에 군전(軍田)을 두어 사졸을 양성하며, 향리(鄕吏)와 진원(津院 진도(津渡)와 역원(驛院))에 이르기까지 모두 전지(田地)를 지급하였습니다. 전지에는 정해진 제도가 있고, 나라에는 제정된 법이 있어서 각기 상하(上下)와 존비(尊卑)의 구분을 두어 서로 침탈하지 못하게 하니, 겸병(兼倂)이 끊어져서 억조창생의 전택(田宅)이 안정되고, 부렴(賦斂)이 가벼워져서 환과(鰥寡 홀아비와 과부)의 의식이 풍족해지고, 봉록이 후하여 염치(廉恥)가 행하여지고, 창고가 가득 차서 국용(國用)이 넉넉해졌습니다.
전하께서는 신과 더불어 탐관오리들이 백성을 해치고 용렬한 장수들이 도적을 양성하는 것에 분개하였습니다. 그래서 조정에 건의해서 대신(大臣)을 발탁하고 부월(斧鉞)을 주어 여러 도(道)를 순행하면서 출척(黜陟)하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번진(藩鎭)은 법을 어기지 아니하여 패배하는 근심이 끊어졌고, 주군(州郡)은 법을 받들어 지켜 탐욕스럽고 잔인한 풍조가 종식되었습니다.
고을의 수령이 서리(胥吏)에서 나왔으므로 관질(官秩)을 올리고, 그 선임(選任)하여 쓰는 것을 중시하며, 대간(臺諫)과 육조(六曹)의 보거(保擧)를 사용하니, 향리에는 근심하여 탄식하는 소리가 없어지고, 유망(流亡)하는 자는 생업을 회복하는 즐거움이 있게 되었습니다. 죄를 짓고 도망하여서 직책을 더럽힌 관리들을 신문하여 그 향리로 돌아가게 하고, 향원(鄕原)과 토활(土猾 지방의 교활한 백성)의 간사한 무리들을 쳐서 그 음호(蔭戶)를 부역시켰습니다. 현(縣)에는 각기 현재(縣宰)를 두고, 역(驛)에는 각기 역승(驛丞)을 두니, 빈 터가 변하여 시정(市井)과 읍리(邑里)가 되고, 잡초와 잡목이 가득하던 황무지가 변하여 도량(稻粱)이 생산되는 옥토가 되었습니다. 쓸데없는 관원들이 국록을 축내고, 환관과 총애를 받는 사람이 나라의 직무를 더럽히고, 공상(工商)에 종사하는 자들과 노비들이 함부로 관직을 차지하며, 부도(浮屠)로서 편안히 앉아 먹는 자들이 전답을 많이 점유하고, 아무 공로도 없는 봉군(封君)과 유약한 자제들이 직무를 비워 두었는데, 전하께서 법을 세워 제거하니 요행의 문이 닫히고 분경(奔競)의 길이 막히게 되었습니다.
가묘(家廟)를 세워서 기제(忌祭)를 행하는 것은 백성들의 덕을 두텁게 하는 것입니다. 아울러 학교를 널리 세워서 교수(敎授)를 두는 까닭은 인륜을 밝히려는 것입니다. 문치(文治)가 이미 흡족하고, 무위(武威)가 멀리까지 밝아져서 부상(扶桑)의 도적이 보배를 받들고 와서 조회하고, 유구(琉球)와 남만(南蠻)이 통역을 거듭해서 들어와 조공을 바쳤습니다. 왕씨(王氏)가 이미 16년 동안이나 잃었던 왕업은 실로 전하에게 힘입어 다시 일어났습니다. 그런데도 왕씨가 혼미하여 도리어 꺼리고 미워하는 마음을 먹어서, 위신(僞辛)의 역난(逆亂)한 무리와 전지(田地)와 관직(官職)을 잃은 무리들이 물고기의 비늘처럼 좌우에 있으면서 근거 없는 말로써 차츰차츰 헐뜯어서 전하를 지목하여 권세가 너무 크다고 하고, 신들을 비방하여 붕당(朋黨)을 만든다고 하면서 전하를 제거할 것을 모의하여 흉악한 음모가 자주 바뀌었습니다.
금년 3월, 전하께서 세자가 명(明)나라에 들어가 조회하고 동쪽으로 돌아올 때, 개경(開京) 서쪽으로 수백 리의 먼 곳까지 나가서 맞이하였습니다. 또 몸소 사냥하고 돌아와서 하례(賀禮)하려고 하다가, 불행히도 말에서 떨어져 초막에 드러눕게 되었습니다. 간신 정몽주는 전하께서 품어 보호해 주던 자인데도, 자신이 총재가 되어 국정을 장악하자, 왕씨에게 영합하여 아부하고 대간을 사주하여, 신과 정도전, 남은(南誾)을 전하의 복심(腹心)이라고 말하며, 틈을 타서 음모를 꾸며 없는 죄를 얽어 만들어 신들을 먼저 내쫓고 다음에 전하를 도모하려고 하였습니다.
전하께서는 병든 몸을 수레에 싣고 밤낮으로 길을 재촉해서 돌아왔습니다. 4월 4일에 나라 사람들이 모두 분개하여 정몽주가 참형을 당하였습니다. 전하께서는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을 펴서 나머지 간사한 무리들을 한 명도 주살하지 않았습니다. 사저에 병들어 누워 빈객을 끊고서도 오히려 왕씨가 깨닫기를 바라서 형벌에 처하고 상을 주는 권한을 임금에게서 나오게 하였습니다.그러나 왕씨는 혼미하여 이를 깨닫지 못하여 흉악한 무리들이 더욱 방자하게 날뛰어 화(禍)가 경각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7월 12일, 하늘이 노하고 백성은 이반하여, 삼한(三韓)이 마음을 돌이켜 전하를 임금으로 추대하였습니다. 인심과 천명이 이미 여기에 이르렀으니, 전하께서 자장(子藏)의 절의를 지키고자 하더라도 그렇게 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에 전하께서 왕씨를 강릉(江陵)의 간성(杆城)에 봉(封)하였으니, 이는 상(商)나라의 성탕(成湯)이 하(夏)나라의 마지막 임금인 걸(桀)을 남소(南巢)에 추방한 것과 같습니다. 왕씨의 동모제(同母弟)를 기현(畿縣)의 마전(麻田)에 봉하여 신성공민(神聖恭愍 공민왕(恭愍王))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는데, 이는 주 무왕(周武王)이 미자(微子)를 송(宋)나라에 봉한 것과 같습니다. 여러 왕자(王子)들을 강화(江華)와 거제(巨濟)에 안치하여 곡식을 지급하게 하였으니, 이는 한ㆍ위(漢魏) 이래로 혁명을 한 군주들이 미치지 못한 조치입니다.
만약 지난번에 전하께서 나라를 취할 마음을 가졌더라면, 압록강에서 군사를 돌렸을 때 어찌 만사(萬死)를 무릅쓰고 일생을 버리면서 왕씨를 부흥시킬 의논을 제기하였겠습니까? 기사년(己巳年) 겨울에 황제의 조지(詔旨)가 왔을 때에도 어찌 종친(宗親)의 장(長)을 택하여 세워 왕씨에게 정권을 돌려주고자 하였겠습니까? 어찌 이미 관례(冠禮)를 치른 세자를 일찍 세워서 나라의 근본을 정하고자 하였겠습니까? 어찌 경연(經筵)을 열어서 학문에 밝은 선비들을 임금의 좌우에 나아가게 하고, 《정관정요(貞觀政要)》를 바쳐서 조석으로 가르치게 하였겠습니까? 어찌 서연(書筵)을 열어서 많은 선비들을 동궁(東宮)에 모이게 하고,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올려서 날마다 치도(治道)를 강론하였겠습니까? 어찌 상상(上相)의 정권을 벗고 택리(宅里)를 아들과 사위에게 나누어 주고서 상재(桑梓)로 돌아가 쉬기를 원한 것이 두세 번에 이르도록 더욱 힘써 하였겠습니까? 작년 가을에 또 어찌 세자에게 천자를 알현하도록 건의하였겠습니까?
전하께서 왕씨를 위하는 지극한 충성은 하늘이 굽어본 바이고, 삼한(三韓)이 다 아는 것인데, 왕씨는 참소하는 적당(賊黨)에게 미혹되어 전국시대(戰國時代) 연 소왕(燕昭王)이 악의(樂毅)에게 행한 일과 제 양왕(齊襄王)이 전단(田單)에게 행한 일과 같게 하지 못하고, 도리어 운대(雲臺)의 훈신(勳臣)을 도마 위의 고기가 되게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하늘이 왕씨의 덕을 싫어하고 전하의 왕업을 열게 한 것입니다.
나라의 일에 지극히 부지런하고 집안의 일에 검소한 것은 우(禹) 임금이 순(舜) 임금을 계승하였던 이유와 같고, 간언(諫言)을 따르고 어기지 않으며 허물을 고치는 데에 인색하지 않았던 것은 탕(湯) 임금이 하(夏)나라를 대체하였던 이유와 같습니다. 상(商)나라의 정치에 반대하여 천하가 다스려진 것은 무왕(武王)이 주(周)나라를 세운 이유와 같습니다. 어진 신하를 가까이하고 소인배를 멀리한 것은 전한(前漢)이 흥성하였던 이유와 같습니다. 반대로 소인배를 가까이하고 어진 신하를 멀리한 것은 후한(後漢)이 무너진 이유와 같습니다. 지금 하늘이 이미 전하에게 명하여서 삼한의 부모가 되게 하였습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삼왕(三王)의 훌륭한 다스림을 본받으시고, 양한(兩漢)의 득실을 거울로 삼아서 삼가고 두려워하며 생각을 여기에 두어 억만세(億萬世) 성자신손(聖子神孫)의 귀감이 되게 한다면, 참으로 다행일 것입니다.”라고 하였다.【274】
[《태조실록(太祖實錄)》 1권ㆍ2권ㆍ3권ㆍ4권 〈태조(太祖) 원년조ㆍ2년조〉, 《지퇴당집(知退堂集)》 6권 〈동각잡기 건(東閣雜記乾) 태조(太祖)〉]
고려(高麗)의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 및 대소 신료, 한량(閑良)ㆍ기로(耆老)들이 삼가 아뢰기를, “가만히 생각하건대, 우리나라는 공민왕(恭愍王)이 후사가 없이 세상을 떠나자, 신돈(辛旽)의 아들 신우(辛禑)가 권신 이인임(李仁任)에 의해 임금으로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어리석고 포악하여 제멋대로 무고한 사람을 많이 죽였습니다. 군대를 일으켜 요동(遼東)을 치려고 할 때에는 당시의 대장(大將) 이성계(李成桂)가 상국(上國)의 경계를 침범할 수 없다고 하며 대의(大義)를 들어서 회군하니, 신우는 스스로 그 죄를 알아서 두려워하면서 왕위에서 물러나고 그 아들 신창(辛昌)에게 물려주었습니다.
그러자 나라 사람들이 상주하여, 공민왕의 비(妃) 안씨(安氏)의 명을 받들어 종친(宗親)인 정창부원군(定昌府院君) 왕요(王瑤)를 권서국사(權署國事)로 삼았습니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4년이 되었는데, 혼미하여 법을 어기고서 오직 제 의견만을 따르고 바른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좌우의 측근들은 모두 아첨만을 일삼는 무뢰배인데, 없는 말을 만들어내고 그른 것을 옳다고 하여 국정을 어지럽게 하며 훈구대신을 이간질하였습니다. 승려와 무당이 공공연하게 궁궐 안을 출입하면서 청탁을 행하고, 신불(神佛)에게 기도하느라 전곡(錢穀)을 낭비하고, 토목공사를 일으켜 민력(民力)이 지쳤습니다. 죄를 범한 자가 있으면 법을 굽혀 용서해주고, 공을 세운 자가 있으면 사지(死地)에 두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위신(僞辛)의 무리가 안팎에 포진하고, 위세에 기대어 화란(禍亂)을 부채질하며 도모하였습니다.
그의 아들 왕석(王奭)은 어리석고 무지하여 소인배들을 모아서 술과 여색에 빠지고, 다른 사람들이 바로잡아주는 것을 싫어하여, 그 사부(師傅)를 죽여 언로(言路)를 막았으나, 올바른 도리로 자식을 가르치는 교훈은 없었습니다.
또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 정몽주(鄭夢周)는 이성계ㆍ조준ㆍ정도전ㆍ남은 등을 권서국사에게 참소하고, 유사(有司)로 하여금 죄를 논핵하게 하여 해치고자 하니, 나라 사람들이 분노하여 함께 정몽주를 목 베었습니다. 그러나 권서국사는 오히려 지난 잘못을 고치지 않고 다시 살육을 도모하였기 때문에 온 나라의 신민(臣民)이 진실로 사직을 염려하고, 백성들은 모두 그 해를 입어 두려워하며 어찌해야 할지를 몰랐습니다. 이와 같은 행위로는 이 백성의 군주가 되어서 사직을 받들기가 어려우므로, 공민왕의 비(妃) 안씨의 명으로 사저(私邸)로 물러나게 하였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군국(軍國)의 기무(機務)는 하루라도 통솔이 없어서는 안 되는데, 종친 중에서 골라 보았으나 여망(輿望)을 감당할 수 있는 어질고 덕망을 갖춘 사람이 없었습니다. 오직 문하시중(門下侍中) 이성계만이 은택이 백성에게 미치고 공적이 사직에 있어서 안팎의 인심이 일찍부터 모두 귀부(歸附)하였습니다. 그래서 온 나라의 대소 신료와 한량ㆍ기로, 군민(軍民) 등이 모두 임금으로 추대하기를 원하여,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조반(趙胖)을 파견하여 조정(朝廷)으로 나아가서 주달(奏達)하게 하였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많은 사람들의 뜻을 굽어 좇아서 한 나라의 백성을 편안하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명나라의 고황제(高皇帝)가 성지(聖旨)를 보내어 이르기를, “우리 중국은 강상(綱常 삼강오상(三綱五常))이 있는 곳으로, 열성(列聖)이 서로 전하고 지켜서 바꾸지 않았다. 고려는 산과 바다로 막혀 있어 우리 중국이 다스리는 곳은 아니지만, 성교(聲敎 덕화(德化))를 스스로 좇아서 천도(天道)를 따르고 인심(人心)에 합하게 하여, 동이(東夷)의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변방의 분쟁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사절(使節)이 왕래할 것이니, 진실로 너희 나라의 복이다.”라고 하였다.【275】
또 성지에 이르기를, “천지 사이에서 백성의 군주가 된 자들이 크든 작든 얼마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혹은 흥하고 혹은 망하였으니, 어찌 우연이겠는가? 상제(上帝)의 명이 아니면 불가한 것이다. 삼한(三韓)의 신민(臣民)들이 이미 이성계를 높이고, 백성들은 병화(兵禍)가 없어서 사람들이 각자 하늘의 즐거움을 즐기고 있으니, 이것은 상제의 명이다.”라고 하였다.【276】
또 성지(聖旨)에 이르기를, “동이(東夷)의 이름은 조선(朝鮮)이라는 호칭이 아름답고 그 유래가 오래되었으니, 이 이름에 근본을 두고 본받을 것이며, 하늘의 뜻을 체득하여 백성을 다스려 영원히 후사(後嗣)를 창성하게 하라.”고 하였다.【277】
설장수(偰長壽)가 명나라에 입조(入朝)하니, 고황제가 편전(便殿)에 불러 만나 오랫동안 한담(閑談)을 하면서 천하를 얻은 연유를 자세히 이야기하였다. 그러고 나서 말하기를, “그대 임금이 나라를 얻은 것도 이와 같다. 하늘이 허락하지 않고 인심이 귀부하지 않으면, 어찌 힘으로 나라를 얻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278】
태조(太祖)가 잠저(潛邸)에 있을 때, 꿈에 신인(神人)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금척(金尺)을 주면서 말하기를, “공은 자질이 문무(文武)를 겸하고 백성들의 믿음이 그대에게 쏠려 있으니, 이 금척을 가지고 나라를 바로잡아라. 공이 아니라면 누구이겠는가?”라고 하였다.【279】
일찍이 상명사(相命師 점쟁이) 혜징(惠澄)이 친한 사람에게 사사로이 말하기를, “내가 사람의 운명을 많이 보았는데 이성계와 같은 사람이 없었다.”라고 하니, 친한 사람이 묻기를, “비록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운명이 좋더라도, 그 지위는 총재(冢宰)에 그칠 뿐이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혜징이 말하기를, “만약 총재에 그칠 정도라면 어찌 입에 담을 만한 것이겠는가? 내가 본 것은 군왕의 운명이었으니, 왕씨(王氏)를 대신하여 반드시 일어날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승려가 태조(太祖)의 집 문(門)에 이르러 이서(異書)를 바치면서 말하기를, “지리산(智異山)의 바위 속에서 이 책을 얻었는데, 책 속에 ‘목자(木子)가 돼지를 타고 내려와서 삼한(三韓) 땅을 다시 바로잡는다.’는 구절이 있다.”라고 하였는데, 사람을 시켜서 맞이하여 들어오게 하였더니, 이미 가고 없었다. 그래서 그를 찾아보았지만 끝내 찾지 못하였다.
덕원(德源 지금의 함경남도 문천군) 땅에 말라죽은 지 여러 해가 된 큰 나무가 있었는데, 개국(開國)하기 1년 전에 다시 가지가 뻗고 꽃이 피어서, 당시 사람들이 개국의 조짐이라고 하였다.【281】
- [주-D001] 【1】어릴 …… 공부이다〔蒙以養正聖功也〕 :
- 이는 《주역(周易)》 〈단전(彖傳)〉의 글임.
- [주-D002] 【2】임금이 …… 된다〔曰聖 時風若 曰蒙 恒風若〕 :
- 이는 《서경(書經)》 〈주서(周書) 홍범(洪範)〉의 글임.
- [주-D003] 【3】임금이 …… 이루어진다〔人主一日之內 親侍人宮妾之時少 接賢士大夫時多 則自然氣質變化德器成就〕 :
- 이는 《속자치통감장편(續資治通鑑長篇)》 373권 〈철종(哲宗)〉의 글인데, 《맹자집주(孟子集註)》 〈고자 상(告子上)〉에는 “임금이 하루 동안에 어진 사대부를 접촉하는 시간이 많게 되고, 내시나 궁첩을 가까이 하는 시간이 적어지면 기질을 함양하고 덕성을 훈도할 수 있다.〔人主一日之間 接賢士大夫之時多 親宦宮妾之時少 則可以涵養氣質而薰陶德性〕”고 기록되어 있음.
- [주-D004] 【4】관각(館閣) :
- 경연청(經筵廳)ㆍ춘추관(春秋館)ㆍ승문원(承文院)ㆍ성균관(成均館)ㆍ홍문관(弘文館)ㆍ예문관(藝文館) 등 문신(文臣)들이 있는 관청을 말함.
- [주-D005] 【5】상(商)나라 …… 되었다 :
- 이는 《맹자(孟子)》 〈공손추 하(公孫丑下)〉의 글임.
- [주-D006] 【6】 :
- 이상은 《고려사(高麗史)》 120권 〈윤소종전(尹紹宗傳)〉의 기사임.
- [주-D007] 【7】 :
- 출전불명
- [주-D008] 【8】 :
- 이상은 《고려사(高麗史)》 78권 〈식화지(食貨志)〉 전제(田制) 녹과전(祿科田)의 기사임.
- [주-D009] 【9】 :
- 이상은 《고려사(高麗史)》 111권 〈문익점전(文益漸傳)〉의 기사임.
- [주-D010] 【10】유구국(琉球國) :
- 동중국해의 남동쪽, 현재 일본 오키나와 현 일대에 위치하였던 독립 왕국이다. 100여 년간 삼국으로 분할되어 있던 것을 1429년에 중산국(中山國)이 통일하여 건국하였다. 유구국은 중국이나 일본, 동남아시아 등과의 중계 무역으로 번성하였다. 여러 차례 일본의 침략을 받아 1879년에 일본에 강제로 병합되어 멸망하였고, 오키나와 현으로 바뀌었음.
- [주-D011] 【11】 :
- 이상은 《고려사(高麗史)》 137권 〈창왕전(昌王傳)〉 원년조의 기사임.
- [주-D012] 【12】 :
- 이상은 《고려사(高麗史)》 91권 〈양양공왕서전(襄陽公王恕傳)〉의 기사임.
- [주-D013] 【13】 :
- 이상은 《고려사(高麗史)》 115권 〈이숭인전(李崇仁傳)〉의 기사임.
- [주-D014] 【14】 :
- 이상은 《고려사(高麗史)》 120권 〈윤소종전(尹紹宗傳)〉의 기사임.
- [주-D015] 【15】 :
- 이상은 《고려사(高麗史)》 137권 〈창왕전(昌王傳)〉 원년조의 기사임.
- [주-D016] 【16】난신적자(亂臣賊子) :
- 세상을 살아가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천하에 몹쓸 사람이나 역적의 무리를 가리키는 말이다. 《맹자(孟子)》 〈등문공 하(藤文公下)〉에 이르기를, “공자(孔子)께서 《춘추(春秋)》를 완성하니 나라를 어지럽히는 신하와 어버이를 해치는 자식들이 두려워하게 되었다.〔孔子成春秋而亂臣賊子懼〕”라고 한 데서 나온 말임.
- [주-D017] 【17】 :
- 이상은 《고려사(高麗史)》 137권 〈창왕전(昌王傳)〉 원년조의 기사임.
- [주-D018] 【18】신하가 …… 한다〔爲人臣 止於敬 爲人子 止於孝〕 :
- 이는 《대학(大學)》 〈전3장(傳三章)〉의 글임.
- [주-D019] 【19】일곱 걸음을 …… 짓고 :
- 삼국시대 동아왕(東阿王) 조식(曹植)은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였는데, 특히 열 살 때 벌써 훌륭한 시를 지을 정도로 글재주가 뛰어났다. 조조(曹操)는 셋째인 조식을 총애하여 한때는 조비(曹丕)를 제쳐 놓고 후사로 삼을 생각까지 하였다. 위 문제(魏文帝) 조비는 어릴 때부터 동생 조식의 글재주를 시기해 온 데다 후사 문제에서도 밀릴 뻔했던 때가 있어서 조식을 미워하였다. 어느 날, 조비는 조식을 해칠 목적으로 일곱 걸음을 걸을 동안 시를 짓지 못하면 대죄로 다스리겠다고 윽박질렀다. 조식은 일곱 걸음을 걷는 동안 시를 완성하였는데, 그 시가 바로 〈칠보시(七步詩)〉이다. 《세설신어(世說新語)》 상권 〈문학(文學)〉 참조.
- [주-D020] 【20】허물을 …… 안다〔觀過 知仁者也〕 :
- 《논어(論語)》 〈이인(里仁)〉에 이르기를, “사람의 허물은 각각 그 부류에 따라 다르다. 그러므로 허물을 보면 그 어진 것을 안다.〔子曰 人之過也 各於其黨 觀過 斯知仁矣〕”라고 하였음.
- [주-D021] 【21】광장(匡章) :
- 제(齊)나라 사람으로 맹자(孟子)의 제자인데, 온 나라 사람들이 광장이 부모에게 불효(不孝)한다고 하자, 맹자가 세속의 다섯 가지 불효, 즉 ‘사지(四肢)를 게을리하여 부모의 봉양을 돌보지 않는 것〔惰其四肢 不顧父母之養〕’, ‘장기와 바둑을 두고 음주를 좋아하여 부모의 봉양을 돌보지 않는 것〔博奕好飮酒 不顧父母之養〕’, ‘재물을 좋아하고 아내와 아들을 사사로이 하여 부모의 봉양을 돌보지 않는 것〔好貨財 私妻子 不顧父母之養〕’, ‘귀와 눈의 욕망을 좇아서 부모를 욕되게 하는 것〔從耳目之欲 以爲父母戮〕’, ‘용맹을 좋아하고 싸우며 사나워서 부모를 위태롭게 하는 것〔好勇鬪狠 以危父母〕’을 들면서 광장은 여기에 하나도 해당됨이 없음을 설명하였다. 《맹자(孟子)》 〈이루 하(離婁下)〉 참조.
- [주-D022] 【22】직불의(直不疑) :
- 한 문제(漢文帝) 때 한 부서의 낭관(郎官)이 고향에 가면서 옆 사람의 금(金)을 잘못 가져갔는데, 잃은 자가 직불의를 의심하므로 직불의가 금을 사서 변상하였다. 나중에 고향에서 돌아온 낭관이 잘못 가져 갔던 금을 돌려주자, 금을 잃었던 낭관이 크게 부끄러워하였다는 고사이다. 《한서(漢書)》 46권 〈직불의전(直不疑傳)〉 참조.
- [주-D023] 【23】 :
- 이상은 《고려사(高麗史)》 115권 〈이숭인전(李崇仁傳)〉의 기사임.
- [주-D024] 【24】 :
- 이상은 《고려사(高麗史)》 137권 〈창왕전(昌王傳)〉 원년조의 기사임.
- [주-D025] 【25】아들이라 …… 회복시켜 :
- 한(漢)나라 여 태후(呂太后)의 집권 때, 혜제(惠帝)가 죽자, 궁인의 아들 유홍(劉弘)을 혜제의 아들이라 하여 제위를 계승시켜 소제(小帝)라 하였으나, 여 태후가 죽은 후 한 고조(漢高祖)의 옛 신하인 진평(陳平)ㆍ주발(周勃) 등이 소제를 폐위시키고, 고조의 아들인 대왕(代王) 유항(劉恒)을 옹립하여 효문제(孝文帝)로 삼았다. 《사기(史記)》 10권 〈효문제본기(孝文帝本紀)〉 참조.
- [주-D026] 【26】 :
- 이상은 《고려사(高麗史)》 45권 〈공양왕세가(恭讓王世家)〉 총서(總序)의 기사임.
- [주-D027] 【27】 :
- 이상은 《고려사(高麗史)》 45권 〈공양왕세가(恭讓王世家)〉 원년조의 기사임.
- [주-D028] 【28】 :
- 이상은 《고려사(高麗史)》 115권 〈이색전(李穡傳)〉의 기사임.
- [주-D029] 【29】 :
- 이상은 《고려사(高麗史)》 45권 〈공양왕세가(恭讓王世家)〉 원년조의 기사임.
- [주-D030] 【30】산하(山河)가 …… 닳도록〔帶礪〕 :
- 중국 황하(黃河)의 물이 허리띠같이 가늘어지고, 태산(泰山)이 숫돌같이 평평해지더라도 영원히 변치 않는다는 맹세이다. 《사기(史記)》 18권 〈고조공신연표(高祖功臣年表)〉에 이르기를, “관작에 봉하는 맹세로 말하기를, ‘황하가 띠처럼 되고 태산이 숫돌 같아도 나라를 영원히 보존하리.〔封爵之誓曰 使黃河如帶 泰山若礪 國以永存〕’라고 하였다.”라고 하였음.
- [주-D031] 【31】 :
- 이상은 《고려사(高麗史)》 45권 〈공양왕세가(恭讓王世家)〉 원년조의 기사임.
- [주-D032] 【32】여불위(呂不韋)가 …… 계책〔不韋盜秦之計〕 :
- 여불위(呂不韋)가 임신한 자기의 애희(愛姬)를 바쳐 진시황(秦始皇) 영정(嬴政)을 낳았다는 설에서 나온 말이다. 《사기(史記)》 85권 〈여불위열전(呂不韋列傳)〉 참조.
- [주-D033] 【33】규전(圭田) :
- 경(卿)ㆍ대부(大夫)ㆍ사(士)에게 주는 사전(仕田) 50묘(畝)이며, 규형(圭形)으로 구분되었으므로 규전(圭田)이라 하였다. 《맹자(孟子)》 〈등문공 상(藤文公上)〉에 이르기를, “경 이상은 반드시 규전이 있으니, 규전은 50묘이다.〔卿以上 必有圭田 圭田五十畝〕”라고 하고, 그 주에는 “옛날에는 경 이하 사에 이르기까지 모두 규전 50묘를 받으니 함께 지내는 제사 때문이다. 규는 깨끗함이다. 사전은 옛날에 규전이라고 하였는데, 이른바 사에게 밭이 없으면 또한 제사를 지내지 못할 뿐이라는 것이니, 겸손한 사에게 깨끗한 밭이 없는 것을 말한다.〔古者 卿以下至於士 皆受圭田五十畝 所以共祭祀 圭絜也 士田 古謂之圭田 所謂惟士無田 則亦不祭 言絀士無絜田也〕”라고 하였음.
- [주-D034] 【34】오왕(五王) :
- 당 중종(唐中宗)의 어머니 측천무후(則天武后)가 아들의 왕위를 탈취하였을 때, 무씨(武氏)를 축출하고 중종을 복위시킨 장간지(張柬之 한양군왕(漢陽軍王))ㆍ환언범(桓彥範 부양군왕(扶陽郡王))ㆍ원서기(袁恕己 남양군왕(南陽郡王))ㆍ최현위(崔玄暐 박릉군왕(博陵郡王))ㆍ경휘(敬暉 평양군왕(平壤郡王))를 말함.
- [주-D035] 【35】아형(阿衡) :
- 은(殷)나라 때 관직 명칭이다. 아(阿)가 의(倚), 형(衡)이 평(平)으로 임금이 의지하고 표준으로 삼는다는 뜻을 지녀 뒷날의 재상(宰相)에 해당한다. 당시 이윤(伊尹)이 이 직책을 맡았기에 그를 가리키는 말로도 쓰임.
- [주-D036] 【36】 :
- 이상은 《고려사(高麗史)》 45권 〈공양왕세가(恭讓王世家)〉 2년조의 기사임.
- [주-D037] 【37】 :
- 출전불명
- [주-D038] 【38】아득한 …… 남기네 :
- 이는 《삼봉집(三峯集)》 2권 〈제함영송수(題咸營松樹)〉의 시임.
- [주-D039] 【39】 :
- 이상은 《삼봉집(三峯集)》 8권 〈부록(附錄)〉 사실(事實)의 기사임.
- [주-D040] 【40】 :
- 이상은 《태조실록(太祖實錄)》 1권 〈태조(太祖)〉 원년조의 기사임.
- [주-D041] 【41】 :
- 이상은 《고려사(高麗史)》 116권 〈심덕부전(沈德符傳)〉의 기사임.
- [주-D042] 【42】 :
- 이상은 《고려사(高麗史)》 45권 〈공양왕세가(恭讓王世家)〉 원년조의 기사임.
- [주-D043] 【43】 :
- 이상은 《고려사(高麗史)》 115권 〈이색전(李穡傳)〉의 기사임.
- [주-D044] 【44】 :
- 이상은 《고려사(高麗史)》 120권 〈오사충전(吳思忠傳)〉의 기사임.
- [주-D045] 【45】 :
- 이상은 《고려사(高麗史)》 107권 〈권근전(權近傳)〉의 기사임.
- [주-D046] 【46】산관(散官) :
- 고려(高麗)와 조선(朝鮮) 시대에 실제 근무처는 없고 명칭만 있는 관직인 산직(散職)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 품계인 산계(散階)를 보유한 사람을 말하기도 하는데, 원래 산관은 후자의 뜻으로, 해당하는 품계의 관리가 될 수 있는 자격을 말한다. 산계는 과거ㆍ음서ㆍ진급ㆍ포상 및 역역(力役)의 대가 등 여러 이유로 주어지거나 승진되었음.
- [주-D047] 【47】 :
- 이상은 《고려사(高麗史)》 120권 〈오사충전(吳思忠傳)〉의 기사임.
- [주-D048] 【48】 :
- 이상은 《고려사(高麗史)》 120권 〈윤회종전(尹會宗傳)〉의 기사임.
- [주-D049] 【49】 :
- 이상은 《고려사(高麗史)》 45권 〈공양왕세가(恭讓王世家)〉 원년조의 기사임.
- [주-D050] 【50】 :
- 이상은 《동국통감(東國通鑑)》 54권 〈고려기(高麗紀)〉 공양왕(恭讓王) 원년조의 기사임.
- [주-D051] 【51】2세(二世) :
- 2세는 진(秦)나라 2대 황제 호해(胡奚)를 말한다. 환관 조고(趙高)는 시황제(始皇帝)가 평대(平臺 지금의 하남성 거록현)에서 죽자, 승상 이사(李斯)와 짜고 조서를 조작하여 시황제의 맏아들 부소(扶蘇)와 장군 몽염(蒙恬)을 자결하게 만들고, 결국 막내 호해를 2세 황제로 즉위시켰다. 조고는 황실의 공자(公子)ㆍ공녀(公女) 24인을 죽이고, 승상 이사마저 숙청시키고 권력을 잡았으나 다시 호해를 죽이고 부소의 아들 자영(子嬰)을 진왕(秦王)에 옹립한다. 그러나 조고는 오히려 자영에게 죽임을 당하고 유방(劉邦)을 위시한 반란군에게 자영이 살해됨으로 진나라도 멸망하고 말았음. 《사기(史記)》 5권 〈진본기(秦本紀)〉 참조.
- [주-D052] 【52】 :
- 이상은 《고려사(高麗史)》 120권 〈오사충전(吳思忠傳)〉의 기사임.
- [주-D053] 【53】위로 …… 두려워하여〔上畏皇天之鑑臨 下畏億兆之瞻仰〕 :
- 《자치통감(資治通鑑)》 192권 〈당기(唐紀)〉 태종(太宗) 정관(貞觀) 2년조에 이르기를, “사람들이 천자를 지존이라고 하여 두려워하고 꺼릴 것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짐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위로는 황천이 내려다보는 것을 두려워하고, 아래로는 신하들이 우러러보는 것을 꺼린다.〔人言天子至尊 無所畏憚 朕則不然 上畏皇天之監臨 下憚群臣之瞻仰〕”라고 하였음.
- [주-D054] 【54】여러 …… 가하소서〔衆悅而後命賞 衆棄而後加刑〕 :
- 이는 《정관정요(貞觀政要)》 8권 〈논형법(論刑法)〉의 글임.
- [주-D055] 【55】우(禹) 임금이 …… 본받고 :
- 공자(孔子)는 《논어(論語)》 〈태백(泰伯)〉에서 이르기를, “우 임금에 대하여서는 내가 흠잡을 데가 없다. 음식을 보잘것없이 하시면서도 귀신에게는 효도를 다하고, 의복은 초라하게 하시면서도 불면(黻冕)에는 아름다움을 다하며, 궁실은 나지막하게 하면서도 봇도랑을 파는 일에는 힘을 다하였다. 우 임금에 대하여서는 내가 흠잡을 데가 없다.〔子曰 禹 吾無間然矣 菲飮食而致孝乎鬼神 惡衣服而致美乎黻冕 卑宮室而盡力乎溝洫 禹 吾無間然矣〕”라고 하였음.
- [주-D056] 【56】수 문제(隋文帝)가 …… 먹은 일 :
- 수 문제(隋文帝) 때는 비록 홍수와 가뭄이 여러 차례 발생하였지만, 호구(戶口)가 증가하고 조운(漕運)과 육로를 통한 조세가 끊이지 않았다. 이러한 태평성대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몸소 절약하여 연회를 열지 않고 한 가지 고기만을 먹으니, 관리들도 이를 따랐다. 《수서(隋書)》 24권 〈식화지(食貨志)〉 참조.
- [주-D057] 【57】입은 …… 문〔口是禍之門也〕 :
- 오대(五代) 때 풍도(馮道)는 다섯 왕조에 걸쳐 여덟 개의 성을 가진 열한 명의 임금을 섬길 정도로 처세에 능하였다. 그는 재상으로서 73세의 장수를 누리는 동안,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서 입이 화근(禍根)임을 깨닫고 〈설(舌)〉에 이르기를, “입은 재앙을 불러들이는 문이요, 혀는 몸을 자르는 칼이다. 입을 닫고 혀를 깊이 감추면, 가는 곳 마다 몸이 편안하다.〔口是禍之門 舌是斬身刀 閉口深藏舌 安身處處牢〕”라고 입조심을 하라는 내용의 시를 남겼다. 《변의장자자경(辨意長者子經)》에도 “입은 화(禍)의 문이다.〔口爲禍之門〕”라고 하고, 《명심보감(明心寶鑑)》 〈언어(言語)〉에서도 “입과 혀는 화와 근심의 문이다.〔口舌者 禍患之門〕”라고 하였음.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52권 〈연산(燕山)〉 10년조에 따르면 연산군(燕山君)이 환관들에게 차게 한 신언패(愼言牌)에도 사용되었던 구절임.
- [주-D058] 【58】환관은 …… 하였으니 :
- 환관(宦官)은 궁중에서 여러 가지 일에 사역되는 내관(內官)을 말한다. 환관의 직임은 궁문의 수위, 어전 내의 보안, 관비(官婢)의 감독, 궁중의 전명(傳命), 궁궐 안의 청소 및 감선(監膳), 임금의 수행, 여러 의식의 각종 잡역을 담당하였다. 고려(高麗) 전기에 임금의 숙위와 근시를 맡은 내시 직에는 권문세족의 자제와 경전(經典)이나 문장에 뛰어난 문신들이 임명되었다. 그러나 의종(毅宗) 이후에는 환관들이 임명되어 임금의 측근 세력으로 활동하고, 원(元)나라가 고려의 내정을 간섭하던 때에는 이들이 대간(臺諫)의 권한을 대신하여 정치에 개입하고 토지를 점탈하는 등 정치ㆍ경제적 문제를 야기하였다. 공민왕(恭愍王) 때 이르러서는 환시(宦寺)가 양부(兩府) 8위(衛)의 반열(班列)에 참여할 정도로 위세가 대단하였음.
- [주-D059] 【59】불효(不孝)에는 …… 크다〔不孝有三 無後爲大〕 :
- 이는 《맹자(孟子)》 〈이루 상(離婁上)〉의 글임. 후한(後漢) 조기(趙歧)의 《십삼경주(十三經注)》에 이르기를, “《예기(禮記)》에 따르면 불효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于禮有不孝者三者〕 부모의 뜻을 무조건 따르고 좇아서 부모가 불의에 빠지는 것이 그 첫 번째 불효이고,〔謂阿意曲從 陷親不義 一不孝也〕 집안이 가난하고 부모가 늙었는데도 벼슬에 나아가서 봉록을 받지 않는 것이 두 번째 불효이며,〔家貧親老 不爲祿仕 二不孝也〕 결혼을 하지 않아 자식이 없어 선조에 대한 제사가 끊기는 것이 세 번째 불효이다.〔不娶無子 絶先祖祀 三不孝也〕”라고 하였음.
- [주-D060] 【60】삼령절(三令節) :
- 세 번의 좋은 절기라는 뜻으로, 당 덕종(唐德宗)이 조서(詔書)를 내려 2월 1일, 3월 3일, 9월 9일에 문무 관료들에게 산수가 빼어난 곳에 가서 경치를 즐기게 한 데서 유래하였다. 고려(高麗)는 이 제도를 본받아 3월 3일, 9월 9일을 영절(令節)로 정하고, 문무 관료들로부터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이 날을 명절로 삼아 놀았다. 3월 3일은 들판에서 노니는데 이를 답청(踏靑)이라 하고, 9월 9일은 산봉우리에 올랐는데 이를 등고(登高)라고 하였음.
- [주-D061] 【61】충실한 …… 바이다〔忠信重祿 所以勸士也〕 :
- 이는 《중용(中庸)》 20장의 글임.
- [주-D062] 【62】경기(京畿)의 8현(縣) :
- 경기 전체의 군현(郡縣) 가운데 경기 동쪽에 있는 8개의 현으로 장단(長湍)ㆍ송림(松林)ㆍ임진(臨津)ㆍ토산(兎山)ㆍ임강(臨江)ㆍ적성(積城)ㆍ파평(坡平)ㆍ마전(麻田)을 말함.
- [주-D063] 【63】요나라와 …… 사로잡아 :
- 세 황제는 요(遼)나라의 천조제(天祚帝), 송(宋)나라의 흠종(欽宗)과 휘종(徽宗)을 말한다. 1125년 금(金)나라가 북송(北宋)과 동맹을 맺고 공격해 오자, 요나라 천조제는 운주(雲州)의 음산(陰山)으로 도망가던 도중에 응주(應州)에서 금나라의 포로가 되어 항복하고, 결국 요나라도 멸망한다. 그런데 이 금나라에 대항하기 위하여 송나라가 요나라의 잔당과 손을 잡은 사실이 들통 나는 바람에 금나라의 분노를 사서 1127년 개봉(開封)이 공격당해 함락되고 황제인 흠종과 태상황(太上皇) 휘종 역시 포로가 되어 북쪽으로 잡혀갔음.
- [주-D064] 【64】 :
- 이상은 《고려사(高麗史)》 118권 〈조준전(趙浚傳)〉의 기사임.
- [주-D065] 【65】 :
- 출전불명
- [주-D066] 【66】 :
- 이상은 《고려사(高麗史)》 118권 〈조준전(趙浚傳)〉의 기사임.
- [주-D067] 【67】 :
- 출전불명
- [주-D068] 【68】정역별감(程驛別監) :
- 고려(高麗) 전기 역별감(驛別監)의 파견을 통해 역의 사무를 관장하도록 한 제도가 대몽(對蒙) 항쟁과 원(元)나라의 간섭 기간을 거쳐 홍건적(紅巾賊)과 왜구의 창궐로 인해 노정(路程)과 역참(驛站) 체계의 운영이 마비가 되자, 이를 복구하기 위하여 임시로 지방의 각 역에 파견된 관리를 말함.
- [주-D069] 【69】경수창(耿壽昌) :
- 한 선제(漢宣帝) 때 사람으로 천문학자이다. 수학에 능통하여 《구장산술(九章算術)》을 수정하였고, 대사농중승(大司農中丞)이 되어 선제 4년(58)에 변방의 군현에 모두 상평창(常平倉)을 세우게 하였음.
- [주-D070] 【70】장손평(長孫平) :
- 수 문제(隋文帝) 때 사람으로 자(字)는 처균(處均)으로 하남성(河南省) 낙양(洛陽) 사람이다. 아버지는 장검(長儉)으로 북주(北周) 무제(武帝) 때 관직에 나아간 뒤, 개부(開府)ㆍ낙부대부(樂部大夫)를 역임하였다. 장손평은 문제 개황(開皇) 3년(583)에 탁지상서(度支尙書)로 임명되어 의창(義倉) 제도의 실시를 건의하였다. 이후 공부상서(工部尙書)와 여러 주의 자사(刺史)를 거쳐 관직이 태상경(太常卿)ㆍ판이부상서사(判吏部尙書事)에 이르렀다. 수 양제(隋煬帝) 재위 중에 죽었다. 《수서(隋書)》 46권 〈장손평열전(長孫平列傳)〉 참조.
- [주-D071] 【71】금살도감(禁殺都監) :
- 소나 말을 도살하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임무를 맡았던 임시 관청이다. 고려(高麗) 때 홍건적(紅巾賊)이 개경(開京)을 함락시켜 소나 말을 거의 다 죽이자, 개경 수복 후인 공민왕(恭愍王) 11년(1362)에 민생회복을 위한 농업 정책의 일환으로 이를 설치하여 소나 말을 죽이는 것을 엄히 금하였다. 또한 고려 말에 조준(趙浚)이 도감을 설치하여 소를 도살하는 것을 금함으로써 농사를 돕게 하라고 상소한 바 있으며, 조선(朝鮮) 시대에도 농사를 돕기 위하여 종종 금살도감을 두었음.
- [주-D072] 【72】사객(使客) :
- 연로(沿路)의 수령이 해당 지역을 지나는 봉명사신(奉命使臣)을 가리켜 부르는 말. 출장 중인 국내 관원 뿐 아니라 외국 사신까지도 모두 해당됨.
- [주-D073] 【73】전구서(典廐署) :
- 고려(高麗) 때 가축의 사육과 제향(祭享)의 보좌 및 어선(御膳)ㆍ연향(宴享) 등에 축산물을 제공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서이다. 목종(穆宗) 때 이미 설치되어 있었으며, 문종(文宗) 때에는 직제가 정비되어 영(令 종7품) 1인, 승(丞 종8품) 2인과 이속(吏屬)으로 사(史) 3인, 기관(記官) 2인, 산사(算士) 1인을 두었다. 그 뒤 충렬왕(忠烈王) 34년(1308)에 전의시(典儀寺)에서 관할하게 하였음.
- [주-D074] 【74】사재시(司宰寺) :
- 고려(高麗) 때 궁중에서 필요한 해산물(海産物)과 하천(河川)의 교통을 맡은 관청이다. 관원으로는 문종(文宗) 때 판사(判事 정3품)ㆍ경(卿 종3품) 각 1인, 소경(少卿 종4품) 1인, 승(丞 종6품) 2인, 주부(注簿 종7품) 2인, 이속(吏屬)으로는 서사(書史) 6인, 기관(記官) 2인, 산사(算士) 2인 그리고 간수군(看守軍)으로 2인의 잡직장교(雜職將校)를 두었다. 충렬왕(忠烈王) 24년(1298) 사진감(司津監), 충렬왕 34년(1308) 도진사(都津司), 공민왕(恭愍王) 18년(1369) 사재감(司宰監) 등으로 명칭을 고쳤으나, 공민왕 21년(1372)에 다시 사재시로 환원되어 고려 말까지 존속하였음.
- [주-D075] 【75】형(刑)이 …… 한다〔刑不上大夫〕 :
- 가의(賈誼)가 상소한 내용은 〈치안책(治安策)〉에 기술되어 있으며, 본문에서 인용한 “형(刑)이 대부(大夫)에게 이르게 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은 그 당시 군신들의 위계가 제대로 서지 못한 것을 지적하면서 언급한 것이다. 《예기(禮記)》 〈곡례(曲禮)〉에도 “형이 대부에게 이르게 하지 않는다.〔刑不上大夫〕”라는 말이 나온다. 《한서(漢書)》 48권 〈가의전(賈誼傳)〉 참조.
- [주-D076] 【76】벌은 …… 한다〔罪不及嗣〕 :
- 이는 《서경(書經)》 〈우서(虞書) 대우모(大禹謨)〉의 글임.
- [주-D077] 【77】죄인의 …… 않는다〔罪人不孥〕 :
- 이는 《맹자(孟子)》 〈양혜왕 하(梁惠王下)〉의 글임.
- [주-D078] 【78】공판도감(供辦都監) :
- 보원해전고(寶源解典庫)와 관련된 관청이다. 공민왕(恭愍王) 22년(1373)에 노국공주(魯國公主)의 능인 정릉(正陵)과 혼전(魂殿)인 인희전(仁熙殿)에 설치하였다. 두 공판도감에는 경제적인 비축이 적지 않았고, 그 재원을 바탕으로 이자놀이를 하고 있었으므로 백성들에게 원망의 대상이 되었다. 《고려사(高麗史)》 118권 〈조준전(趙浚傳)〉에 따르면 그 곳에는 보(寶)가 설치되어 있고, 그 보의 미곡을 대여하였는데 미곡을 빌린 자들은 처자를 팔아서도 상환할 수 없어서 패가망신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 결과 공양왕(恭讓王) 3년(1391)에 폐지되었음.
- [주-D079] 【79】권지행사(權智行事) :
- 지방관으로 임명되었으나 아직 부임하지 않은 관리가 공식적인 취임 날짜에 앞서 부임지로 가서 구관(舊官)과 함께 사무를 인수인계함을 말함.
- [주-D080] 【80】 :
- 이상은 《고려사(高麗史)》 118권 〈조준전(趙浚傳)〉의 기사임.
- [주-D081] 【81】사고(四庫) :
- 요물고(料物庫)ㆍ대부상고(大府上庫)ㆍ대부하고(大府下庫)ㆍ내고(內庫)를 말함.
- [주-D082] 【82】 :
- 이상은 《고려사(高麗史)》 78권 〈식화지(食貨志)〉 전제(田制) 녹과전(祿科田)의 기사임.
- [주-D083] 【83】춘추필법(春秋筆法)에 …… 있으니〔如春秋之法 亂臣賊子 人得而誅〕 :
- 이는 《맹자(孟子)》 〈등문공 하(藤文公下)〉의 글임.
- [주-D084] 【84】먼저 …… 되니〔先發後聞〕 :
- 《논어집주(論語集註)》 〈헌문(憲問)〉에 이르기를, “호씨(胡氏)가 말하기를, ‘《춘추(春秋)》의 법에 임금을 시해한 역적은 사람마다 그를 토벌할 수 있다. 중니(仲尼)의 이 일도 먼저 실행하고 나중에 보고하는 것이 옳았다.〔胡氏曰 春秋之法 弒君之賊 人得而討之 仲尼此擧 先發後聞可也〕’고 하였다.”라고 하였음.
- [주-D085] 【85】태무(太戊) :
- 중국 은(殷)나라 태강(太康)의 아들로, 쇠퇴하였던 은나라를 다시 부흥시킨 임금이다. 이척(伊陟)ㆍ무함(巫咸)ㆍ신호(臣扈) 등의 재상을 등용하였음.
- [주-D086] 【86】맹부(盟府) :
- 맹약서를 보관하던 부고(府庫)인 사맹부(司盟府)를 말한다. 《춘추좌전(春秋左傳)》 희공(僖公) 5년조 기사 참조.
- [주-D087] 【87】 :
- 이상은 《고려사(高麗史)》 45권 〈공양왕세가(恭讓王世家)〉 원년조의 기사임.
- [주-D088] 【88】아상(亞相) :
- 총재(冢宰 서열 1위의 재상)의 다음 벼슬이다. 고려(高麗) 때는 5재(五宰)의 재신 직이 있었는데 문하시중(門下侍中)은 수상(首相), 평장사는 아상(亞相), 참지정사(參知政事)는 3상(三相), 정당문학(政堂文學)은 4상(四相),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는 5상(五相)이다. 아상은 재신 중 문하시중 다음의 서열로서 재신의 중간 정도의 지위를 차지함.
- [주-D089] 【89】성벽(城壁)에 …… 없다〔穴墉之狐 不可灌也〕 :
- 이는 《구헌집(臞軒集)》 2권 〈을미유월상봉사(乙未六月上封事) 제2찰(第二札)〉의 글임.
- [주-D090] 【90】여우처럼 …… 놀린다〔執狐疑之心者 來讒賊之口〕 :
- 이는 《한서(漢書)》 36권 〈유향전(劉向傳)〉의 글임.
- [주-D091] 【91】 :
- 이상은 《고려사(高麗史)》 126권 〈변안열전(邊安烈傳)〉의 기사임.
- [주-D092] 【92】적경원(積慶園) :
- 공양왕(恭讓王) 원년(1390)에 서원군(西原君) 이하 4대(代)를 봉하여 높이고 신주를 모시기 위해 세운 원(園)이다. 사관(祠官)을 두고 제향(祭享)을 지냈는데, 조선(朝鮮) 태조(太祖) 원년(1392)에 허물었음.
- [주-D093] 【93】용릉절후(舂陵節侯) :
- 중국 전한(前漢)의 황족이자 제후왕으로서 경제(景帝)와 당희(唐姬) 사이의 아들 유매(劉買)이다. 유씨 계통의 첫 장사왕(長沙王)으로서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의 직계 조상이다. 경제 2년(기원전 155) 3월 갑인일에 다른 형제들과 함께 제후왕으로 봉해져, 단절된 장사문왕(長沙文王) 오예(吳芮)의 가계를 대신하여 황족으로서는 첫 장사왕이 되었음.
- [주-D094] 【94】남의 …… 것이니〔爲人後者 爲之子〕 :
- 이는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 성공(成公) 15년조의 글임.
- [주-D095] 【95】친부(親父)에게는 …… 않는다〔宜尊以高官大爵 稱皇伯而不名〕 :
- 이는 《문헌통고(文獻通考)》 95권 〈종묘고(宗廟考)〉의 글임.
- [주-D096] 【96】남의 후사가 …… 숙부모라 한다 :
- 이는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 5권 한 선제(漢宣帝) 원강(元康) 원년조의 글임.
- [주-D097] 【97】 :
- 이상은 《고려사(高麗史)》 61권 〈예지(禮志)〉 제릉(諸陵)의 기사임.
- [주-D098] 【98】대학연의(大學衍義) :
- 중국 송(宋)나라 때 학자인 서산선생(西山先生) 진덕수(眞德秀)가 《대학(大學)》의 뜻을 부연하여 지은 43권의 책으로, 3강령(綱領)과 8조목(條目)을 세분하여 서술하고 있으며, 제왕(帝王)이 천하를 다스리는 근본이 수신제가(修身齊家)에 있음을 강조하였음.
- [주-D099] 【99】 :
- 이상은 《고려사(高麗史)》 120권 〈윤소종전(尹紹宗傳)〉의 기사임.
- [주-D100] 【100】 :
- 이상은 《동국통감(東國通鑑)》 55권 〈고려기(高麗紀)〉 공양왕(恭讓王) 2년조의 기사임.
- [주-D101] 【101】 :
- 이상은 《고려사(高麗史)》 126권 〈변안열전(邊安烈傳)〉의 기사임.
- [주-D102] 【102】 :
- 이상은 《고려사(高麗史)》 112권 〈박의중전(朴宜中傳)〉의 기사임. 위 내용 가운데 진 평공(晉平公)이 사광(師曠)과 대화한 부분은 한(漢)나라 때 유향(劉向)의 《설원(說苑)》 3권 〈건본(建本)〉의 글임.
- [주-D103] 【103】 :
- 이상은 《고려사(高麗史)》 126권 〈변안열전(邊安烈傳)〉의 기사임.
- [주-D104] 【104】 :
- 이상은 《고려사(高麗史)》 126권 〈조민수전(曺敏修傳)〉의 기사임.
- [주-D105] 【105】 :
- 이상은 《고려사(高麗史)》 115권 〈이색전(李穡傳)〉의 기사임.
- [주-D106] 【106】치당 호씨(致堂胡氏) :
- 송(宋)나라 때 유학자 호인(胡寅)을 말한다. 치당(致堂)은 그의 호(號)이다. 호인은 호안국(胡安國)의 아들이다. 호인은 원래 호안국 동생의 아들이었으나, 동생의 집안에는 아들이 많아 호안국의 부인이 호인을 자식으로 삼아 호안국의 아들이 되었다. 자(字)는 명중(明仲)으로 송 흠종(宋欽宗) 원년(1126)에 비서성교서랑(秘書省校書郞)으로 출사하였다. 이후 금(金)나라의 침공으로 송나라 수도가 함락되자, 남송의 고종(高宗)을 섬겼다. 《송사(宋史)》 435권 〈호인전(胡寅傳)〉 참조.
- [주-D107] 【107】 :
- 이상은 《고려사(高麗史)》 115권 〈이색전(李穡傳)〉의 기사임.
- [주-D108] 【108】한 명제(漢明帝) :
- 후한(後漢)의 황제로서 광무제(光武帝)의 넷째 아들이며,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한(漢)나라 회복 사업을 공고히 하였다. 건무(建武) 19년(43) 황태자가 되었다. 일찍이 채음(蔡愔)과 진경(秦景) 등을 천축(天竺)에 보내 불법(佛法)을 구하였고, 영평(永平) 10년(67) 채음과 사문(沙門) 섭마등(攝摩騰), 축법란(竺法蘭) 등을 낙양(洛陽)에 오게 하여 백마사(白馬寺)를 세우고, 두 스님에게 《42장경(四十二章經)》을 편역하게 하면서, 중국에 처음으로 불교가 전파되도록 하였음.
- [주-D109] 【109】 :
- 이와 관련된 내용은 당(唐)나라 때 한유(韓愈)의 〈논불골표(論佛骨表)〉에 자세하게 나옴.
- [주-D110] 【110】훈요(訓要) :
- 고려(高麗) 태조(太祖) 왕건(王建)이 자손들을 훈계하기 위해 몸소 지었던 유훈 10조의 훈요와 그 서론에 해당하는 신서(信書)를 합친 〈신서훈요 10조(信書訓要十條)〉를 말한다. 그 가운데 훈요 2조에는 “모든 사원들은 다 도선(道詵)이 산수의 조화를 점쳐서 개창한 것으로, 도선은 ‘내가 가려 정한 곳 외에 함부로 더 창건하면 지덕을 훼손시켜 왕업이 길지 못할 것이다.’고 예언한 바 있다. 짐은 후세의 국왕이나 공후(公侯)ㆍ후비(后妃)ㆍ조신(朝臣)들이 각기 원당(願堂)이라 일컬으며 혹 사원을 더 만듦으로써 큰 근심거리가 생겨날까 염려한다. 신라(新羅) 말기에 앞 다투어 사원을 짓다가 지덕을 손상하여 결국 망하게 되었으니 어찌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고려사(高麗史)》 2권 〈태조세가(太祖世家)〉 태조 26년조의 기사 참조.
- [주-D111] 【111】 :
- 이상은 《고려사(高麗史)》 120권 〈윤소종전(尹紹宗傳)〉의 기사임.
- [주-D112] 【112】사악(四岳) :
- 요(堯) 임금 때 사악의 제후(諸侯)를 관장하던 관직 이름으로서 희화(羲和)의 네 아들인 희중(羲仲)ㆍ희숙(羲叔)ㆍ화중(和仲)ㆍ화숙(和叔)을 말하기도 한다. 《서경(書經)》 〈우서(虞書) 요전(堯典)〉 참조.
- [주-D113] 【113】요순(堯舜)은 …… 하여 :
- 이는 《서경(書經)》 〈우서(虞書) 순전(舜典)〉의 글임.
- [주-D114] 【114】비방지목(誹謗之木) :
- 백성들이 정치의 잘못을 써 놓도록 길에 세워 놓은 나무로, 순(舜) 임금이 이를 통해 정치의 잘못을 반성하였다고 한다. 《대대례(大戴禮)》 3권 〈보전(保傳)〉에 “옳은 것을 말하는 깃발이 있고, 비방하는 나무가 있으며, 감히 간하는 북이 있었다.〔有進善之旗 有誹謗之木 有敢諫之鼓〕”는 기록이 있음.
- [주-D115] 【115】진선지정(進善之旌) :
- 요(堯) 임금이 나라의 정치를 바르게 하기 위해 사통팔달의 네거리에 깃발을 단 깃대를 세워놓고, 정사에 유익한 말을 할 사람은 그 아래에 서 있게 하였다. 《사기(史記)》 10권 〈효문본기(孝文本紀)〉에 “옛날 천하를 다스릴 때 조정에는 선한 말을 간언하는 깃발이 있었다.〔古之治天下 朝有進善之旌〕”라는 기록이 있음.
- [주-D116] 【116】주(周)나라가 …… 감시하여 :
- 주 여왕(周厲王)이 포악한 정치를 하자, 백성 중에 비방하는 사람이 많으므로 위(衛)나라 무당을 시켜 비방하는 자를 감시하였음을 말한다. 《국어(國語)》 1권 〈주어 상(周語上)〉에 “여왕이 폭정을 행하자, 나라 사람들이 왕을 비방하였다. 소공(召公)이 아뢰기를, ‘사람들이 왕의 명령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고 말하였다. 왕이 화가 나서 위나라 무당을 얻어 그로 하여금 비방하는 자들을 감시하게 하였다. 비방하는 자를 알려오면 곧바로 그를 죽였다. 나라 사람들이 아무도 감히 말하지 못하고, 길에서 만나면 서로 쳐다보기만 하였다.〔厲王虐 國人謗王 召公告曰 民不堪命矣 王怒 得衛巫 使監謗者 以告 則殺之 國人莫敢言 道路以目〕”라는 기록이 있음.
- [주-D117] 【117】지록위마(指鹿爲馬) :
-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한다는 뜻으로, 진(秦)나라의 승상 조고(趙高)가 신하들의 마음을 떠보기 위하여 2세(二世) 황제에게 사슴을 말이라고 하여 바쳤던 일이 있다. 《사기(史記)》 6권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참조.
- [주-D118] 【118】이성(異姓)이 …… 이래로 :
- 우왕(禑王)을 신돈(辛旽)의 아들이라 하여 신우(辛禑)라고 하는데, 우왕이 즉위한 것을 두고 이성(異姓)이 나라를 훔쳤다고 말한 것임.
- [주-D119] 【119】한 마디 …… 잃는다〔一言喪邦〕 :
- 《논어(論語)》 〈자로(子路)〉에 “정공(定公)이 ‘한 마디 말로 나라를 잃을 수 있다 하니, 그러한 것이 있습니까?’라고 하자, 공자(孔子)께서 ‘말은 이와 같이 기필할 수는 없거니와 사람들 말에 「나는 임금된 것은 즐거울 것이 없고, 오직 내가 말을 하면 어기지 않는 것이 즐겁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曰 一言而喪邦 有諸 孔子對曰 言不可以若是其幾也 人之言曰 予無樂乎爲君 唯其言而莫予違也〕”라는 기록이 있음.
- [주-D120] 【120】 :
- 이상은 《고려사(高麗史)》 120권 〈윤소종전(尹紹宗傳)〉의 기사임.
- [주-D121] 【121】 :
- 이상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34권 공양왕(恭讓王) 2년조의 기사임.
- [주-D122] 【122】 :
- 이상은 《고려사(高麗史)》 116권 〈심덕부전(沈德符傳)〉의 기사임.
- [주-D123] 【123】 :
- 이상은 《고려사(高麗史)》 126권 〈왕안덕전(王安德傳)〉의 기사임.
- [주-D124] 【124】만 …… 내다본다〔明見萬里〕 :
- 한 광무제(漢光武帝)가 하서(河西)의 두융(竇融)에게 친서(親書)를 보냈는데, 두융의 실정을 꿰뚫어 보는 것 같이 하였으므로 하서 사람들이 말하기를, “천자는 밝게 만 리를 보는구나.”라고 하였다. 《후한서(後漢書)》 23권 〈두융전(竇融傳)〉 참조.
- [주-D125] 【125】 :
- 이상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34권 공양왕(恭讓王) 2년조의 기사임.
- [주-D126] 【126】방치(放置) :
- 처벌의 하나로, 죄인을 한 지역을 정하여 거기에 안치하고 벗어나지 못하게 하던 것을 말함.
- [주-D127] 【127】 :
- 이상은 《고려사(高麗史)》 120권 〈윤소종전(尹紹宗傳)〉의 기사임.
- [주-D128] 【128】좌주(座主) :
- 고려(高麗) 때 과거(科擧)에 급제한 사람이 그 과거의 시관(試官)을 경칭하여 일컫던 말.
- [주-D129] 【129】아홉 공신 :
- 공양왕(恭讓王)을 옹립한 이성계(李成桂), 판삼사사(判三司事) 심덕부(沈德符), 찬성사(贊成事) 지용기(池湧奇)ㆍ정몽주(鄭夢周), 정당문학(政堂文學) 설장수(偰長壽), 평리(評理) 성석린(成石璘),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 조준(趙浚), 판자혜부사(判慈惠府事) 박위(朴葳), 밀직부사(密直副使) 정도전(鄭道傳)을 말함.
- [주-D130] 【130】 :
- 이상은 《고려사(高麗史)》 115권 〈이색전(李穡傳)〉의 기사임.
- [주-D131] 【131】 :
- 이상은 《고려사(高麗史)》 115권 〈이색전(李穡傳)〉의 기사임.
- [주-D132] 【132】 :
- 이상은 《동국통감(東國通鑑)》 55권 〈고려기(高麗紀)〉 공양왕(恭讓王) 2년조의 기사임.
- [주-D133] 【133】 :
- 이상은 《고려사(高麗史)》 115권 〈이색전(李穡傳)〉의 기사임.
- [주-D134] 【134】윤이(尹彛)라는 …… 사칭(詐稱)하였고 :
- 윤이(尹彛)는 본관이 파평(坡平)이며, 처음 이름은 윤사강(尹思康)이다. 한때 승려가 되었다가, 장죄(贓罪)를 범하고 명(明)나라로 도망쳐 이름을 윤이라고 바꾸었다. 공양왕(恭讓王) 2년(1390) 명나라에서 이초(李初)와 함께 당시 이성계(李成桂)가 옹립한 공양왕은 종실이 아니라 이성계의 인친(姻親)이고, 이성계 등이 장차 명나라를 치려고 하며, 이색(李穡) 등 고려의 재상들이 이에 반대하다가 유배되고 살해되었다고 고소하였다. 이 사실이 고려(高麗)에 알려지자 대규모의 옥사가 발생하여 이색을 비롯하여 그에 연루된 사람들이 유배되거나 국문을 당하고 옥사하였다. 그러나 명나라에서 이를 무고로 판정함으로써 이초와 함께 율수현(栗水縣)으로 유배되었다. 사건 당시 윤이는 자신을 파평군(坡平君)을 사칭하였으나, 실제로 봉군(封君)된 적이 있는지는 확인되지 않음.
- [주-D135] 【135】 :
- 이상은 《고려사(高麗史)》 45권 〈공양왕세가(恭讓王世家)〉 2년조의 기사임.
- [주-D136] 【136】 :
- 이상은 《고려사(高麗史)》 115권 〈이색전(李穡傳)〉의 기사임.
- [주-D137] 【137】서운관(書雲觀) :
- 고려(高麗) 때 천문(天文)과 역법(曆法), 누각(漏刻)과 도참(圖讖) 등의 일을 맡아보던 관청을 말함.
- [주-D138] 【138】도선밀기(道詵密記) :
- 도선(道詵)이 지은 풍수지리(風水地理)와 도참(圖讖)에 관한 책이다. 건물이나 묘 터를 세우는 데 많이 이용되며, 특히 고려(高麗) 인종(仁宗) 때 묘청(妙淸)이 서경(西京) 천도를 주장하면서 이 책을 근거로 삼는 등 정치적으로 많이 이용되었음.
- [주-D139] 【139】필부필부(匹夫匹婦)가 …… 없다〔匹夫匹婦不獲自盡 人主罔與成厥功〕 :
- 이는 《서경(書經)》 〈상서(商書) 함유일덕(咸有一德)〉의 글임.
- [주-D140] 【140】 :
- 이상은 《고려사(高麗史)》 112권 〈박의중전(朴宜中傳)〉의 기사임.
- [주-D141] 【141】방본(邦本) :
- 나라의 근본이라는 뜻으로, 백성을 가리킨다. 《서경(書經)》 〈하서(夏書) 오자지가(五子之歌)〉에 이르기를,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굳건해야 나라가 편안하다.〔民惟邦本 本固邦寧〕”라고 하였음.
- [주-D142] 【142】태왕(太王)이 …… 떠났던 것 :
- 주 문왕(周文王)의 할아버지 태왕(太王)이 적인(狄人)의 침입을 받아 당시 수도인 빈(豳 지금의 중국 섬서성) 지역을 버리고 기산현(岐山縣 지금의 중국 섬서성 기산현)으로 옮겨간 사실을 말함.
- [주-D143] 【143】태백성(太白星) :
- 샛별로서 금성(金星)ㆍ계명성(啓明星)ㆍ장경성(長庚星) 등으로 불리며, 병란(兵亂)을 상징하는 별이다. 특히 이 별이 낮에 나타나는 것을 흉한 조짐으로 여겼음.
- [주-D144] 【144】부도(浮屠) :
- 승려의 사리나 유골을 묻는 일종의 탑으로, 여기서는 승려의 의미로 쓰였음.
- [주-D145] 【145】 :
- 이상은 《고려사(高麗史)》 120권 〈윤회종전(尹會宗傳)〉의 기사임.
- [주-D146] 【146】천시(天時)와 …… 못하고〔天時地理 不如人和〕 :
- 이는 《맹자(孟子)》 〈공손추 하(公孫丑下)〉의 글임. 《맹자》 원문에는 “천시는 지리만 못하고, 지리는 인화만 못하다.〔天時不如地理 地理不如人和〕”라고 하였음.
- [주-D147] 【147】한 번 다스려지고 …… 것〔一治一亂〕 :
- 이는 《맹자(孟子)》 〈등문공 하(滕文公下)〉의 글임. 맹자(孟子)는 성인(聖人)이 덕(德)에 의한 정치를 실행해서 천하가 태평해지는 시기 뒤에, 미처 계승자가 나타나지 못하고 폭군이나 사악한 이론이 횡행하는 시기가 이어지고, 다시 성왕(聖王)이 나타나 태평성대가 이어지며, 또 그 뒤에 폭군이 나타나는 일이 되풀이 된다고 보았다. 맹자는 이 역사의 흐름을 일치일란(一治一亂), 즉 한번 다스려지고 한번 어지러워진다고 하였음.
- [주-D148] 【148】 :
- 이상은 《고려사(高麗史)》 117권 〈강회백전(姜淮伯傳)〉의 기사임.
- [주-D149] 【149】불은 …… 더 깊어지는〔如火益熱 如水益深〕 :
- 이는 《맹자(孟子)》 〈양혜왕 하(梁惠王下)〉의 글임. 《맹자》 원문에는 “물은 더 깊어지고, 불은 더 뜨거워지다.〔如水益深 如火益熱〕”라고 되어 있음.
- [주-D150] 【150】 :
- 출전불명
- [주-D151] 【151】풍저창(豊儲倉) :
- 대궐에서 쓰는 쌀ㆍ콩ㆍ자리ㆍ종이 등을 맡은 관청이다. 일찍이 고려(高麗) 문종(文宗) 때 개경(開京)에 좌ㆍ우창(左右倉)을 설치하고, 근시(近侍)로서 별감(別監)을 삼아 나라의 재정을 주관하게 하였다. 그 뒤 충렬왕(忠烈王) 때 충선왕(忠宣王)이 정치를 대행하면서 우창을 풍저창으로 개편하고 공상미(供上米)를 관장하게 하였다. 관원으로는 사(使 정5품)ㆍ부사(副使 정6품)ㆍ승(丞 정7품) 각 1인이 배속되었는데, 공민왕(恭愍王) 때 이들의 품계를 한 등급씩 낮추었음.
- [주-D152] 【152】 :
- 이상은 《고려사(高麗史)》 45권 〈공양왕세가(恭讓王世家)〉 2년조의 기사임.
- [주-D153] 【153】한양(漢陽)으로 천도(遷都) :
- 고려(高麗) 숙종(肅宗) 원년(1096), 음양관(陰陽官)으로 있던 위위승동정(衛尉丞同正) 김위제(金謂磾)가 《도선기(道詵記)》 《삼각산명당기(三角山明堂記)》 《도선답산가(道詵踏山歌)》 《신지비사(神誌祕詞)》 등의 예언을 인용해 지금의 서울특별시인 남경(南京), 즉 한양으로의 천도를 건의하였다. 이 건의에 따라 숙종 5년(1101)에 남경개창도감(南京開創都監)을 설치하여 남경 조영공사(造營工事)를 진행하여, 숙종 9년(1104)에 궁궐이 준공되었다. 김위제가 남경 천도를 건의한 까닭은 만일 남경에 천도하면 사해신어(四海神魚)가 한강에 내조(來朝)하리라는 도참설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 뒤 14세기 말에 공민왕(恭愍王)은 원증국사(圓證國師) 보우(普愚)의 건의를 받아들여 이제현(李齊賢)을 남경에 보내어 궁궐을 짓고 남경 천도를 하려다가 중단한 일이 있었다. 공민왕의 뒤를 이은 우왕(禑王) 원년(1375)에 서운관(書雲觀)에서 “최근 천문에 이상이 나타나고 재변이 자주 발생하니 거처를 옮겨 재앙을 피해야한다.”라고 건의하였다. 이에 우왕이 도읍을 이전하는 문제를 논의에 부쳤고, 우왕 8년(1382)에 임금이 친히 남경에 거둥하여 사냥 판을 벌이기도 하였다. 우왕의 뒤를 이어 공양왕(恭讓王) 2년(1390)에도 임금이 남경으로 천도하고, 판삼사사(判三司事) 안종원(安宗源)과 문하평리(門下評理) 윤호(尹虎)로 하여금 개경(開京)을 유수(留守)하게 하고, 백관들을 시켜 따로 분사(分司)를 설치하게 하였으나, 곧바로 개경으로 환도하였음.
- [주-D154] 【154】 :
- 이상은 《고려사(高麗史)》 45권 〈공양왕세가(恭讓王世家)〉 2년조의 기사임.
- [주-D155] 【155】 :
- 이상은 《고려사(高麗史)》 104권 〈김종연전(金宗衍傳)〉의 기사임.
- [주-D156] 【156】 :
- 이상은 《고려사(高麗史)》 116권 〈심덕부전(沈德符傳)〉의 기사임.
- [주-D157] 【157】 :
- 이상은 《고려사(高麗史)》 45권 〈공양왕세가(恭讓王世家)〉 2년조의 기사임.
- [주-D158] 【158】벼슬과 …… 어렵다〔盛滿難居〕 :
- 이는 《상서찬전(尙書纂傳)》 32권 〈주서(周書) 군석(君奭)〉의 글임.
- [주-D159] 【159】구순(寇恂) :
- 광무제(光武帝)를 도와서 후한(後漢)을 일으킨 명장(名將)으로, 여러 곳의 태수를 역임하며 선정을 베푼 것으로 유명하다. 《후한서(後漢書)》 16권 〈구순전(寇恂傳)〉 참조.
- [주-D160] 【160】등우(鄧禹) :
- 광무제(光武帝)의 중흥을 도운 최고 공신(功臣) 중의 하나로, 광무제 즉위 후에 대사도(大司徒)에 임명되고 고밀후(高密侯)에 봉해졌다. 《후한서(後漢書)》 16권 〈등우전(鄧禹傳)〉 참조.
- [주-D161] 【161】자릉(子陵) :
- 광무제(光武帝) 때 엄광(嚴光)의 자(字)이다. 엄광과 광무제는 원래 동문수학한 친구 사이였는데, 광무제가 등극한 이후 광무제의 간곡한 부름을 거절하고 부춘산(富春山)에 은거하여 몸소 농사짓고 낚시질 하면서 살았다. 《후한서(後漢書)》 83권 〈엄광전(嚴光傳)〉 참조.
- [주-D162] 【162】옛 강토를 수복 :
- 공민왕(恭愍王) 5년(1356)에 고려(高麗)가 반원(反元) 정책을 추진하면서 화주(和州) 이북 지역의 쌍성총관부(雙城總管府)를 완전히 수복한 사실을 말함.
- [주-D163] 【163】가성(假姓) :
- 우왕(禑王)을 가리키니, 신돈(辛旽)의 자식이라고 하여 신우(辛禑)라고 하였음.
- [주-D164] 【164】신은 …… 않겠습니다〔臣罔以寵利居成功〕 :
- 이는 《서경(書經)》 〈상서(商書) 태갑 하(太甲下)〉의 글임.
- [주-D165] 【165】채택(蔡澤) :
- 전국시대(戰國時代) 연(燕)나라 사람으로, 지략이 많고 변설에 뛰어나 제후(諸侯)들을 찾아다니면서 유세하였다. 진 소왕(秦昭王)이 그를 객경(客卿)으로 삼았다. 얼마 뒤 범수(范睢)가 병을 이유로 재상의 직위를 내놓자 마침내 범수를 대신하여 재상이 되고, 서주(西周)를 공격해 멸망시킬 계책을 내놓았다. 다른 사람이 자신을 모함하자 후환이 두려워 즉시 재상에서 물러났다. 진나라에서 10여 년 동안 머물면서 소왕과 효문왕(孝文王), 장양왕(莊襄王)과 진 시황(秦始皇)까지 섬겼다. 진 시황을 위하여 연나라에 가서 태자(太子) 단(丹)이 진나라에 인질로 오도록 하였다. 《사기(史記)》 79권 〈범수채택열전(范睢蔡澤列傳)〉 참조.
- [주-D166] 【166】춘하추동(春夏秋冬) …… 합니다〔四時之序 功成者去〕 :
- 이는 《전국책(戰國策)》 〈진책(秦策)〉의 글임.
- [주-D167] 【167】독비(篤棐) :
- 임금을 독실하게 보좌함을 일컫는다. 《서경(書經)》 〈주서(周書) 군석(君奭)〉에 주공(周公)이 소공(召公)에게 말하기를, “임금을 독실하게 보좌할 사람은 나와 그대 두 사람뿐이다.〔篤棐 時二人〕”라고 하였음.
- [주-D168] 【168】간기(間氣) :
- 빼어난 인물이 세상에 드물게 품부 받고 태어나는 천지의 특수한 기운을 말함.
- [주-D169] 【169】 :
- 이상은 《고려사(高麗史)》 46권 〈공양왕세가(恭讓王世家)〉 3년조의 기사임.
- [주-D170] 【170】수의(垂衣)의 교화 :
- 옷 소매를 드리우고 행하는 무위(無爲)의 정치로써 교화하는 것이니, 성군(聖君)의 덕치(德治)를 가리킨다. 《주역(周易)》 〈계사전 하(繫辭傳下)〉에 이르기를, “황제(黃帝)와 요순(堯舜)은 의상을 드리웠을 뿐이나, 천하가 잘 다스려졌다.〔黃帝堯舜 垂衣裳而天下治〕”라고 하였음.
- [주-D171] 【171】복속(覆餗)의 근심 :
-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 중책을 맡았다가 화를 자초하는 것을 말한다. 《주역(周易)》 〈정괘(鼎卦)〉의 구사효(九四爻)에 이르기를, “솥발이 부러져 임금님 음식을 엎질러 그 얼굴이 무안하여 붉어졌다. 흉하다.〔鼎折足 覆公餗 其形渥 凶〕”라고 하였음.
- [주-D172] 【172】축리(祝釐) :
- 신(神)에게 제사를 지내 임금의 수복(壽福)을 기원하는 의례로, 불교의 재(齋)나 도교의 초제(醮祭) 등이 여기에 해당됨.
- [주-D173] 【173】난세를 다스려 반정함〔撥亂反正〕 :
- 발난반정(撥亂反正)은 난세를 다스려 안정을 회복하는 것을 말한다.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 애공(哀公) 14년조에는 “난세를 다스려 그것을 정도로 되돌아가게 하여 춘추(春秋)에 가까워지지 않게 한다.〔撥亂世 反諸正 莫近於春秋〕”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반정(反正)은 정도(正道)로 되돌아가서 질서를 회복하는 것을 말하는데 《시경(詩經)》 〈위풍(衛風) 맹서(氓序)〉에 이르기를, “선공(宣公) 때 예의가 쇠퇴하여 음행(淫行)이 크게 유행하고……그런 까닭에 그 뉘우친 일을 서술하여 풍자하였다. 정도로 돌아온 것을 찬미한 것이다.〔宣公之時 禮義消亡 淫行大行……故序其事以风焉 美反正〕”라고 하였음.
- [주-D174] 【174】명세지재(命世之材) :
- 《한서(漢書)》 36권 〈초원왕열전(楚元王列傳)〉에 나오는 말로서, 당세에 저명하여 치국(治國)의 재능을 가지고 있는 자를 가리킴.
- [주-D175] 【175】도(道)를 …… 다스림〔論道經邦〕 :
- 《서경(書經)》 〈주서(周書) 주관(周官)〉에 이르기를, “태사ㆍ태부ㆍ태보의 이 세 공은 도를 이야기하고 나라를 다스리며 음양을 고르게 다스린다.〔立太師 太傳 太保 玆惟三公 論道經邦 燮理陰陽〕”라고 하였음.
- [주-D176] 【176】광악(光岳) :
- 광(光)은 해ㆍ달ㆍ별의 삼광(三光)이며, 악(岳)은 태산(泰山)ㆍ숭산(嵩山)ㆍ형산(衡山)ㆍ화산(華山)ㆍ항산(恒山)의 오악(五岳)을 가리킨다. 전(傳)하여 천지(天地)를 말함.
- [주-D177] 【177】원수(元首)와 …… 한 몸이니 :
- 원수(元首)는 머리로서 임금을 말하고, 고굉(股肱)은 팔다리로서 신하를 가리킨다. 《서경(書經)》 〈우서(虞書) 익직(益稷)〉에 이르기를, “황제가 말하기를, ‘신하는 고굉과 이목이 된다.〔帝曰 臣作股肱耳目〕’고 하였다.”라고 하고, 그 소에는 “임금은 원수가 되고 신하는 고굉과 이목이 되니 대체로 한 몸이다.〔君爲元首 臣爲股肱耳目 大體如一身也〕”라고 하였음.
- [주-D178] 【178】 :
- 이상은 《고려사(高麗史)》 45권 〈공양왕세가(恭讓王世家)〉 2년조의 기사임.
- [주-D179] 【179】비록 관중(管仲)처럼 …… 두렵습니다 :
- 《맹자(孟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이르기를, “어떤 사람이 증서(曾西)에게 묻기를, ‘선생과 관중(管仲)은 누가 더 훌륭합니까?’고 하니, 증서가 발끈하여 화내며 말하기를, ‘네 어찌 나를 관중에게 비교하는가? 관중이 군주의 신임을 얻음이 저와 같이 오로지 하였으며 국정을 행함이 저와 같이 오래 하였어도 공적이 저처럼 낮은데, 네 어찌 나를 관중에 비교하는가?’고 하였다.〔曰然則吾子 與管仲孰賢 曾西艴然不悅曰爾何曾比予於管仲 管仲得君 如彼其專也 行乎國政 如彼其久也 功烈如彼其卑也 爾何曾比予於是〕”라고 하여 매우 불쾌하게 여겼음.
- [주-D180] 【180】걸골(乞骨) :
- 해골이 고향으로 돌아가 묻힐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하는 것으로, 나이 많은 신하가 벼슬을 내놓고 그만두기를 임금에게 청원하는 것이다. 비슷한 말로 걸해골(乞骸骨)ㆍ걸귀(乞歸)ㆍ걸신(乞身)ㆍ걸퇴(乞退)ㆍ걸해(乞骸)ㆍ걸치사(乞致仕) 등이 있음.
- [주-D181] 【181】상수(上壽) :
- 백수(百壽)를 누리는 것으로, 만수무강(萬壽無疆)을 의미한다. 《춘추좌전(春秋左傳)》 희공(僖公) 32년조에 대한 공영달(孔穎達)의 소(疏)와 《태평경(太平經)》 〈해승부결(解承負訣)〉에서는 120세를 상수라 하고, 《춘추좌전》 소공(昭公) 3년조에 대한 공영달의 소에서는 “상수는 100세 이상, 중수는 90세 이상, 하수는 80세이상이다.〔上壽百年以上 中壽九十以上 下壽八十以上〕”라고 하고, 《장자(莊子)》 〈도척(盜跖)〉에서는 “사람의 상수는 100세이다.〔人上壽百歲〕”라고 하였음.
- [주-D182] 【182】 :
- 이상은 《고려사(高麗史)》 46권 〈공양왕세가(恭讓王世家)〉 3년조의 기사임.
- [주-D183] 【183】 :
- 이상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35권 공양왕(恭讓王) 4년조의 기사임.
- [주-D184] 【184】 :
- 이상은 《고려사(高麗史)》 104권 〈김종연전(金宗衍傳)〉의 기사임.
- [주-D185] 【185】특이한 …… 풍족해진다〔不貴異物賤用物 民乃足〕 :
- 이는 《서경(書經)》 〈주서(周書) 여오(旅獒)〉의 글임.
- [주-D186] 【186】 :
- 이상은 《고려사(高麗史)》 85권 〈형법지(刑法志)〉 금령(禁令)의 기사임.
- [주-D187] 【187】저폐(楮幣) :
- 지폐를 말한다. 방사량(房士良)의 건의는 원(元)나라의 보초(寶鈔) 통화권에 속해 있던 고려(高麗)가 원ㆍ명(元明) 교체기에 자신만의 화폐를 만들려는 시도 가운데 하나로 이해된다. 고려 말, 조선(朝鮮) 초에 독자적으로 지폐를 발행하고자 한 것은 북송(北宋)의 교자(交子), 남송(南宋)의 회자(會子), 원나라의 보초에 영향을 받아 이루어진 것으로, 원나라의 멸망과 명나라의 건국이라는 새로운 국제 정세에서 독자적인 지폐를 제작하려는 시도인 듯함.
- [주-D188] 【188】 :
- 이상은 《고려사(高麗史)》 79권 〈식화지(食貨志)〉 화폐(貨幣)의 기사임.
- [주-D189] 【189】명령을 …… 함이다〔令出惟行〕 :
- 이는 《서경(書經)》 〈주서(周書) 주관(周官)〉의 글임.
- [주-D190] 【190】 :
- 이상은 《고려사(高麗史)》 85권 〈형법지(刑法志)〉 금령(禁令)의 기사임.
- [주-D191] 【191】책보(冊寶) :
- 임금이나 왕비의 존호(尊號)를 올릴 때 함께 올리던 옥책(玉冊)과 금보(金寶)의 총칭.
- [주-D192] 【192】양암(亮陰)의 예(禮) :
- 양암은 임금이 거상(居喪)하는 곳의 명칭으로, 거상의 예를 말한다. 《서경(書經)》 〈상서(商書) 열명 상(說命上)〉에 이르기를, “임금이 양암에서 상을 치르기를 삼년 동안 하여서 상을 벗고 나서 말을 하지 않았다.〔王 宅憂亮陰三祀 旣免喪 其惟弗言〕”라고 하였음.
- [주-D193] 【193】복랍(伏臘) :
- 여름철의 삼복(三伏)과 겨울철의 납일(臘日)에 지내는 제사를 말함.
- [주-D194] 【194】봉숭도감(封崇都監) :
- 임금이 책봉(冊封) 조서를 내리는데 필요한 의식과 절차를 맡아서 주관하던 임시 관청임.
- [주-D195] 【195】별기은(別祈恩) :
- 국행(國行)으로 명산대천에서 행하는 의식이다. 대전(大殿)이나 중궁전(中宮殿)에서 무녀로 하여금 임금과 왕자의 안녕을 위하여 주로 행하였다. 별기은에 대한 기록은 고려(高麗) 때 처음 보이며, 고려 중기까지는 불교의 불사(佛事)나 도교(道敎)의 재초(齋醮)로 행하여진 제의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고려 말에 와서 별기은은 무격이 담당하는 행사로 기록되어 있다. 고려 때에는 단지 기은(祈恩)이라고도 하였음.
- [주-D196] 【196】음사(淫祀) :
- 자신이 당연히 제사 지낼 것이 아닌 것을 제사 지내는 것이다. 즉 참람한 제사나 잡신(雜神) 등에게 제사 지내는 것이 여기에 해당함.
- [주-D197] 【197】 :
- 이상은 《고려사(高麗史)》 120권 〈김자수전(金子粹傳)〉의 기사임.
- [주-D198] 【198】 :
- 이상은 《고려사(高麗史)》 117권 〈이첨전(李詹傳)〉의 기사임.
- [주-D199] 【199】선왕의 …… 한다〔監于先王成憲 其永無愆〕 :
- 이는 《서경(書經)》 〈상서(尙書) 열명 하(說命下)〉의 글임.
- [주-D200] 【200】한량인(閑良人) :
- 여기서는 한량기로(閑良耆老)를 말한다. 한량기로는 고려(高麗) 말기에 70세가 넘어서 퇴직한 2품 이상의 벼슬아치들로, 하례(賀禮) 때나 나라의 중대사를 의논할 때 조정의 의논에 참석하였음.
- [주-D201] 【201】 :
- 이상은 《고려사(高麗史)》 117권 〈정몽주전(鄭夢周傳)〉의 기사임.
- [주-D202] 【202】 :
- 이상은 《고려사(高麗史)》 120권 〈정도전전(鄭道傳傳)〉의 기사임.
- [주-D203] 【203】법사(法司) :
- 고려(高麗) 때 법률(法律)ㆍ사송(詞訟)ㆍ형옥(刑獄) 등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를 말함.
- [주-D204] 【204】 :
- 이상은 《고려사(高麗史)》 117권 〈정몽주전(鄭夢周傳)〉의 기사임.
- [주-D205] 【205】 :
- 이상은 《고려사(高麗史)》 85권 〈형법지(刑法志)〉 금령(禁令)의 기사임.
- [주-D206] 【206】 :
- 이상은 《고려사(高麗史)》 46권 〈공양왕세가(恭讓王世家)〉 3년조의 기사임.
- [주-D207] 【207】홍복도감(弘福都監) :
- 고려(高麗) 때 임시 관청이다. 처음 설치한 연대 및 그 기능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일반적으로 국장(國葬)ㆍ국혼(國婚) 및 그 밖의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 설치하는 임시 기구가 도감이라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이 기구는 흥복도감(興福都監)ㆍ숭복도감(崇福都監)ㆍ전보도감(典寶都監)과 함께 노국공주(魯國公主)의 장사(葬事)를 주관하고, 명복을 빌기 위하여 설치된 관청으로 보임.
- [주-D208] 【208】자섬저화고(資贍楮貨庫) :
- 고려(高麗) 때 저화(楮貨)의 인조(印造) 업무를 담당하던 관청이다. 10세기 말부터 철전ㆍ동전 등 각종 주화와 은병(銀甁)ㆍ쇄은(碎銀) 등 칭량은화(秤量銀貨)를 법화로 유통 보급시키려 하였으나 실패를 거듭하자, 공양왕(恭讓王) 3년(1391)에 저화를 사용하는 문제가 제기되고, 그해 7월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는 홍복도감(弘福都監)을 폐지하고 자섬저화고를 설치하여 송(宋)나라의 회자(會子)와 원(元)나라의 보초(寶鈔)를 본떠 저화를 인조, 오종포(五綜布)와 함께 사용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 같은 도평의사사의 건의가 받아들여져 자섬저화고에서는 저화를 인조하였으나, 공양왕 4년(1392) 4월에 이르러 시중(侍中) 심덕부(沈德符) 등의 건의에 따라 자섬저화고가 폐지되고 인판(印板)은 소각되며, 이미 인조된 저화는 종이의 원료로 사용하게 하였음.
- [주-D209] 【209】구부환법(九府圜法) :
- 구부(九府)는 강태공(姜太公)이 만든 재화(財貨)를 맡아보던 관청 제도로서 대부(大府)ㆍ옥부(玉府)ㆍ내부(內府)ㆍ외부(外府)ㆍ천부(泉府)ㆍ천부(天府)ㆍ직내(職內)ㆍ직금(職金)ㆍ직폐(職幣)를 말하며, 환법(圜法)은 화폐를 원활하게 운용하는 법을 말함.
- [주-D210] 【210】자모(子母) :
- 화폐가 가볍고 가치가 낮은 것이 자(子)이며, 무겁고 가치가 높은 것이 모(母)이다. 즉 자는 보조화폐이고, 모는 본위화폐임.
- [주-D211] 【211】오종포(五綜布) :
- 다섯 새 베의 하나로, 고려(高麗) 때 은병(銀甁)ㆍ동전(銅錢) 등과 함께 화폐로 통용되었음.
- [주-D212] 【212】 :
- 이상은 《고려사(高麗史)》 79권 〈식화지(食貨志)〉 화폐(貨幣)의 기사임.
- [주-D213] 【213】 :
- 이상은 《동국통감(東國通鑑)》 56권 〈고려기(高麗紀)〉 공양왕(恭讓王) 3년조의 기사임.
- [주-D214] 【214】 :
- 이상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35권 공양왕(恭讓王) 3년조의 기사임.
- [주-D215] 【215】 :
- 이상은 《고려사(高麗史)》 113권 〈정지전(鄭地傳)〉의 기사임.
- [주-D216] 【216】방현령(房玄齡) :
- 두여회(杜如晦)ㆍ대주(戴冑)ㆍ왕규(王珪) 등과 함께 당 태종(唐太宗)을 도와서 정관지치(貞觀之治)를 이룩한 명신(名臣)이다. 《구당서(舊唐書)》 66권 〈방현령전(房玄齡傳)〉 참조.
- [주-D217] 【217】방현령(房玄齡)이 …… 간(諫)하였다 :
- 《신당서(新唐書)》 96권 〈방현령전(房玄齡傳)〉 참조.
- [주-D218] 【218】우리 사신이 …… 주었으니 :
- 《삼국사기(三國史記)》 9권 〈신라본기(新羅本紀)〉 경덕왕(景德王) 15년조에 이르기를, “임금이 당 현종(唐玄宗)이 촉(蜀) 땅에 있다는 말을 듣고 그에게 사신을 보냈다. 사신은 양자강을 거슬러 올라가 성도(成都)에 이르러 조공하였다. 현종은 5언 십운시(十韻詩)를 직접 지어 임금에게 보내며 말하기를, ‘신라 임금이 해마다 조공을 잘하고 예(禮)ㆍ악(樂) 및 대의명분을 훌륭하게 실행에 옮기므로 시 한 수를 지어 주노라.〔王聞玄宗在蜀 遣使入唐 泝江至成都 朝貢 玄宗御製御書五言十韻詩 賜王曰 嘉新羅王歲修朝貢 克踐禮樂名義 賜詩一首〕’고 하였다.”라고 하였음.
- [주-D219] 【219】 :
- 이상은 《고려사(高麗史)》 117권 〈이첨전(李詹傳)〉의 기사임.
- [주-D220] 【220】 :
- 이상은 《고려사(高麗史)》 115권 〈이색전(李穡傳)〉의 기사임.
- [주-D221] 【221】 :
- 이상은 《태조실록(太祖實錄)》 1권 〈태조(太祖)〉 원년조의 기사임.
- [주-D222] 【222】오고(五庫) :
- 고려(高麗) 말에는 내고(內庫)가 발달해 소위 창고궁사(倉庫宮司)가 설치되었다. 당시 최고 권력자인 임금과 그 족속인 왕실은 자신들의 사적인 물적 기반을 확보하지 못하면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당시 사전(私田)의 겸병 추세에 편승하여 스스로 공전(公田)과 사전을 점탈해 창고궁사전(倉庫宮司田)이 급증하였다. 이와 같은 창고궁사전이 지급된 곳을 이른바 오고칠궁(五庫七宮)이라 하는데, 그 가운데 오고(五庫)는 의성고(義城庫)ㆍ덕천고(德泉庫)ㆍ내장고(內藏庫)ㆍ보화고(保和庫)ㆍ의순고(義順庫)를 말함.
- [주-D223] 【223】 :
- 이상은 《태조실록(太祖實錄)》 8권 〈태조(太祖)〉 4년조의 기사임.
- [주-D224] 【224】관교(官敎) :
- 4품 이상 관리를 임명할 때 내리던 사령장(辭令狀)을 말함.
- [주-D225] 【225】 :
- 이상은 《태조실록(太祖實錄)》 1권 〈총서(總序)〉의 기사임.
- [주-D226] 【226】단문(袒免) :
- 참최(斬衰)ㆍ자최(齊衰)ㆍ대공(大功)ㆍ소공(小功)ㆍ시마(緦麻) 등 오복(五服) 이외의 친척에 대한 상복(喪服) 제도로서 두루마기의 오른쪽 소매를 벗고 사각건(四角巾)을 쓰는 아주 가벼운 복제(服制)을 말함.
- [주-D227] 【227】전두(纏頭) :
- 기생의 화대로, 옛날에는 붉은 비단을 기생의 머리에 둘러 주었음.
- [주-D228] 【228】 :
- 이상은 《태조실록(太祖實錄)》 1권 〈총서(總序)〉의 기사임.
- [주-D229] 【229】격탁양청(激濁揚淸) :
- 탁류(濁流)를 밀어내고 청류(淸流)를 끌어올린다는 뜻으로, 악을 제거하고 선을 장려함을 뜻한다. 이는 《구당서(舊唐書)》 70권 〈왕규열전(王珪列傳)〉에 나오는 말임.
- [주-D230] 【230】은(殷)나라 …… 있었다〔殷鑑不遠 在夏后之世〕 :
- 이는 《시경(詩經)》 〈대아(大雅) 탕지십(蕩之什)〉의 글임.
- [주-D231] 【231】 :
- 이상은 《고려사(高麗史)》 117권 〈이첨전(李詹傳)〉의 기사임.
- [주-D232] 【232】 :
- 이상은 《동국통감(東國通鑑)》 56권 〈고려기(高麗紀)〉 공양왕(恭讓王) 3년조의 기사임.
- [주-D233] 【233】팔관회(八關會) :
- 우리 민족의 고유한 민속신앙과 불교의 팔관재계(八關齋戒)가 결합된 국가적인 행사이다. 고려(高麗)의 팔관회(八關會)는 태조(太祖) 원년(1918) 11월부터 시작되었다. 태조 26년(943)에 발표한 〈태조십훈요(太祖十訓要)〉 가운데 제6조에 이르기를, “내가 지극히 원한 것은 연등(燃燈)과 팔관이다.……팔관은 천령(天靈)과 오악(五嶽), 명산대천(名山大川)과 용신(龍神)을 섬기기 때문이다. 후세에 간특한 신하가 가감(加減)을 건의하면 일절 금지해야 한다. 내가 당초부터 마음에 맹세하여 회일(會日)에는 국기(國忌)를 범하지 않고 임금과 신하가 함께 즐겼으니 마땅히 공경하게 이대로 거행해야 한다.”고 하였다. 때문에 고려 때에 팔관회는 천하의 태평과 군신의 화합을 기원하는 민족적이고도 호국적인 연중행사로 발전하였음.
- [주-D234] 【234】불효(不孝)와 …… 평판 :
- 《고려사(高麗史)》 105권 〈유만수전(柳曼殊傳)〉에 이르기를, “유만수는 조상의 덕으로 지위가 재상에 이르렀으나 어머니께 불효하여 사람들이 모두 천하게 여깁니다. 또한 소윤(小尹) 최수첨(崔秀瞻)의 처녀 딸을 강간한 일도 있습니다.……얼마 뒤에 헌사에서 다시 유만수가 모친을 모시고 봉양하지 않는다고 탄핵했으며, 또 자기 동생들의 전민(田民)을 빼앗은 죄를 다스리라고 건의했으나 허락하지 않았다.”라는 기록이 있음.
- [주-D235] 【235】 :
- 이상은 《고려사(高麗史)》 114권 〈이염전(李恬傳)〉의 기사임.
- [주-D236] 【236】 :
- 이상은 《고려사(高麗史)》 115권 〈이색전(李穡傳)〉의 기사임.
- [주-D237] 【237】제릉(齊陵) :
- 조선(朝鮮) 태조(太祖)의 비(妃) 신의왕후(信懿王后)의 능묘 이름.
- [주-D238] 【238】 :
- 이상은 《태종실록(太祖實錄)》 1권 〈총서(總序)〉의 기사임.
- [주-D239] 【239】 :
- 출전불명
- [주-D240] 【240】옛날 자방(子房)이 …… 따랐으나 :
- 한(漢)나라 일등공신 장량(張良)은 천하가 통일된 뒤 자신의 몸을 보전하기 위하여 고조(高祖)에게 아뢰기를, “인간사를 버리고 적송자(赤松子)를 좇아 놀기를 원합니다.〔願棄人間事 欲從赤松子遊〕”라고 하였음. 《사기(史記)》 55권 〈유후세가(留后世家)〉 참조.
- [주-D241] 【241】 :
- 이상은 《고려사(高麗史)》 119권 〈정도전전(鄭道傳傳)〉의 기사임.
- [주-D242] 【242】동경계(同庚契) :
- 나이가 같은 사람끼리 친목을 꾀하기 위하여 맺은 계(契)이다. 동경(同庚)은 동갑(同甲)을 의미함.
- [주-D243] 【243】 :
- 이상은 《태조실록(太祖實錄)》 1권 〈총서(總序)〉의 기사임.
- [주-D244] 【244】 :
- 이상은 《고려사(高麗史)》 46권 〈공양왕세가(恭讓王世家)〉 4년조의 기사임.
- [주-D245] 【245】 :
- 이상은 《고려사(高麗史)》 117권 〈정몽주전(鄭夢周傳)〉의 기사임.
- [주-D246] 【246】너의 큰일 :
- 신의왕후(信懿王后)의 삼년상을 치르는 것을 말함.
- [주-D247] 【247】왕과 제후 …… 있겠습니까〔王侯將相 寧有種乎〕 :
- 기원전 209년 7월, 진(秦)나라 2세 황제는 장성(長城) 건설 등 대규모 토목사업을 위해 과역(課役)이 면제되었던 빈민(貧民)까지 징발(徵發)하였다. 진승(陳勝)도 징발되어 둔장(屯長)으로서 900인의 일행과 함께 어양(漁陽)으로 출발하지만, 일행이 기현(蘄縣) 대택향(大澤鄉)에 이르렀을 때 큰비를 만나 정해진 기한 안에 도착할 수 없게 되었다. 당시 진나라는 법(法)으로 기한을 어기는 사람들을 참형(斬刑)에 처하도록 정해 놓고 있어서, 진승은 오광(吳廣)과 함께 무리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 진승은 “왕과 제후, 장수와 재상이 어찌 정해진 씨가 있겠는가?〔王侯將相 寧有種乎〕”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사기(史記)》 48권 〈진섭세가(陳涉世家)〉 참조.
- [주-D248] 【248】앙약(仰藥) :
- 극독인 짐독(鴆毒)을 섞은 술을 다 마시는 것을 말한다. 《한서(漢書)》 45권 〈식부궁전(息夫躬傳)〉에 이르기를, “평범하고 유약한 무리들이 마음이 초조하고 정신이 어지러워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잠시 후 신하들이 결단을 내리고 독약을 마시고 자살하였다.〔小夫愞臣之徒 憒眊不知所爲 其有犬馬之决者 仰药而伏刃〕”라고 하였음.
- [주-D249] 【249】 :
- 이상은 《태조실록(太祖實錄)》 1권 〈총서(總序)〉의 기사임.
- [주-D250] 【250】 :
- 이상은 《동국통감(東國通鑑)》 56권 〈고려기(高麗紀)〉 공양왕(恭讓王) 4년조의 기사임.
- [주-D251] 【251】사예(司藝) :
- 고려(高麗) 때 국학(國學)에 두었던 종4품 벼슬로서 주로 음악을 지도하는 일을 맡아 보았다. 충렬왕(忠烈王) 원년(1275)에 국자감(國子監)이 국학으로 명칭이 바뀌면서 사업(司業)이 사예로 고쳐졌으나, 다시 사업ㆍ악정(樂正) 등으로 바뀌었다가, 충선왕(忠宣王) 즉위년(1308)에 국학에서 바뀐 성균감(成均監)이 성균관(成均館)으로 명칭을 고치면서 다시 사예로 바뀌었음.
- [주-D252] 【252】 :
- 이상은 《고려사(高麗史)》 46권 〈공양왕세가(恭讓王世家)〉 4년조의 기사임.
- [주-D253] 【253】 :
- 이상은 《태조실록(太祖實錄)》 1권 〈총서(總序)〉의 기사임.
- [주-D254] 【254】 :
- 이상은 《고려사(高麗史)》 117권 〈정몽주전(鄭夢周傳)〉의 기사임.
- [주-D255] 【255】 :
- 이상은 《포은집(圃隱集)》 〈포은선생집본전(圃隱先生集本傳)〉의 기사임.
- [주-D256] 【256】 :
- 이상은 《고려사(高麗史)》 117권 〈정몽주전(鄭夢周傳)〉의 기사임.
- [주-D257] 【257】 :
- 이상은 《세종실록(世宗實錄)》 79권 〈세종(世宗)〉 19년조의 기사임.
- [주-D258] 【258】 :
- 이상은 《고려사(高麗史)》 46권 〈공양왕세가(恭讓王世家)〉 4년조의 기사임.
- [주-D259] 【259】 :
- 이상은 《태조실록(太祖實錄)》 1권 〈총서(總序)〉의 기사임.
- [주-D260] 【260】 :
- 이상은 《고려사(高麗史)》 46권 〈공양왕세가(恭讓王世家)〉 4년조의 기사임.
- [주-D261] 【261】합사(合辭) :
- 여러 관사(官司)나 관원이 합동으로 임금에게 상소(上疏)할 때 사연을 합하여 하나의 상소로 하던 일을 말함.
- [주-D262] 【262】천하에 …… 한다〔爲天下逋逃主 萃淵藪〕 :
- 이는 《서경(書經)》 〈주서(周書) 무성(武成)〉의 글임.
- [주-D263] 【263】 :
- 이상은 《태조실록(太祖實錄)》 1권 〈태조(太祖)〉 원년조의 기사임.
- [주-D264] 【264】용잠(龍潛) :
- 임금이 되기 전에 있던 잠저(潛邸) 또는 임금이 되기 전을 말함.
- [주-D265] 【265】보거(保擧) :
- 인재를 천거한 자가 훗날 자신이 천거한 자가 죄를 지으면 그 책임을 지는 것을 말함.
- [주-D266] 【266】향원(鄕原) :
- 겉으로는 성실한 척 하지만 사실은 매사에 옳고 그름을 분명하게 따지지 않고 시속(時俗)에 맞추어 두루뭉술하게 살거나 뚜렷한 가치관이 없고 삶의 태도가 진지하지 않아 위선적인 사람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원(原)은 원(愿)과 같다. 공자(孔子)도 《논어(論語)》 〈양화(陽貨)〉에 이르기를, “향원은 덕을 해치는 자이다.〔鄕原 德之賊也〕”라고 하였음.
- [주-D267] 【267】음호(蔭戶) :
- 독립 호(戶)임에도 불구하고 세금을 물지 않기 위하여 독립 호로 등록하지 않고 다른 집에 붙여 놓았던 민호(民戶)를 말함.
- [주-D268] 【268】부상(扶桑)의 도적 :
- 부상(扶桑)은 동쪽 바다 끝, 해가 뜨는 곳에 있다는 나무이다. 여기서는 동쪽에 있는 왜구(倭寇)를 가리킴.
- [주-D269] 【269】자장(子藏)의 절의 :
- 자장(子藏)은 춘추 시대 조 선공(曹宣公)의 공자(公子) 흔시(欣時)의 자(字)이다. 선공이 죽은 뒤에 새로 즉위한 임금을 의롭지 못하다고 하여 자장을 추대하려고 하자, 자장이 나라를 떠나 다른 곳으로 갔음.
- [주-D270] 【270】상재(桑梓) :
- 고향을 의미하는데, 《시경(詩經)》 〈소아(小雅) 소변(小弁)〉에 이르기를, “부모가 심은 뽕나무와 가래나무도 반드시 공경한다.〔惟桑與梓 必恭敬止〕”라고 한 데서 비롯함.
- [주-D271] 【271】연 소왕(燕昭王)이 …… 행한 일 :
- 소왕(昭王)은 악의(樂毅)를 등용하여 제(齊)나라에게 거의 망하였던 연(燕)나라를 다시 부흥시켜 제나라에 복수하였고, 또 악의에 대한 믿음을 끝까지 지켰음.
- [주-D272] 【272】제 양왕(齊襄王)이 …… 행한 일 :
- 전단(田單)은 연(燕)나라에게 거의 망하였던 제(齊)나라를 다시 부흥시켜 그 전토(田土)를 거의 회복하였으며, 이후 그 공로에 대한 후한 보상을 받았음.
- [주-D273] 【273】운대(雲臺) :
- 후한(後漢) 때 공신의 초상(肖像)을 걸어 놓았던 곳을 말한다. 한 명제(漢明帝)가 영평(永平) 3년(60)에 광무제(光武帝)의 공신 28인을 그려 이곳에 봉안하였음.
- [주-D274] 【274】 :
- 이상은 《태조실록(太祖實錄)》 2권 〈태조(太祖)〉 원년조의 기사임.
- [주-D275] 【275】 :
- 이상은 《태조실록(太祖實錄)》 1권 〈태조(太祖)〉 원년조의 기사임.
- [주-D276] 【276】 :
- 이상은 《태조실록(太祖實錄)》 2권 〈태조(太祖)〉 원년조의 기사임.
- [주-D277] 【277】 :
- 이상은 《태조실록(太祖實錄)》 3권 〈태조(太祖)〉 2년조의 기사임.
- [주-D278] 【278】 :
- 이상은 《지퇴당집(知退堂集)》 6권 〈동각잡기 건(東閣雜記乾)〉 태조(太祖)의 기사임.
- [주-D279] 【279】 :
- 이상은 《태조실록(太祖實錄)》 4권 〈태조(太祖)〉 2년조의 기사임.
- [주-D280] 【280】덕원(德源) :
- 당시 함길도(咸吉道) 덕원부(德源府)로서 조선(朝鮮) 태조(太祖)의 선조인 익조(翼祖)가 야인(野人)들을 피해 알동(斡東)을 떠나 적도(赤島)를 거쳐 덕원으로 옮겨 살았음.
- [주-D281] 【281】 :
- 이상은 《태조실록(太祖實錄)》 1권 〈태조(太祖)〉 원년조의 기사임.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권영창 이성호 (공역)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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