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완 - 당송, 고려, 일본의 시대를 품고 있는 / 김성태 님

2013. 8. 1. 20:57차 이야기

 

 

 

시대별 차 문화를 품고 잠들어 있는 화석

 

 

        당(唐). 송(宋). 고려(高麗). 일본(日本)

 

다완 (茶碗)

 

 

 

 

 

 

 김성태

 

 

 

 

남조시대(南朝)헌다용 다완

 

 

 

 

 

    동양 차문화의 역사 속에서 최초 다완의 출현은 남북조시대(420-589)의 헌다용으로 만들어진 다완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 헌다용 다완은 사람들이 차를 마시기 위함이 아니었고 또한 가루차를 담는 다완이 아니었으며 가루차를 담는 다완의 시작은 당(唐)으로부터 시작된다.

 

 

 

 

 

당나라 다완

 

 

 

 

    당에서 시작된 다완을 이용한 차마심은 연고차(硏膏茶)가 개발되는 오대시기(907-979)를 거쳐 송(宋)에 이르면서 그 사용법과 기형이 변모하게 된다.

 

 

 

 

 

고려다완

 

 

 

 

   송나라시대 대유행했었던 연고차문화는 고려와 일본으로 전파되면서 송을 위시한 동양 3國은 연고차를 이용한 말차법(沫茶法거품차)인 점다법(點茶法)을 다루는 다완을 사용했으며 중국과 한국에서는 원나라(1279-1368)가 몰락하고 명나라와 조선이 건국되면서 다완을 이용한 차마심이 사라졌고 외세의 침략이나 간섭이 없었던 일본은 오늘날까지 가루차의 그 맥이 이어지고 있다.

 

 

 

 

 

송나라 다완

 

 

 

 

 

 

당(唐)의 다완

 

 

   당나라 시기의 차마심에서는 기본적으로 자다법(煮茶法)과 엄다법(唵茶法)등 두 가지의 음다법이 사용되었는데 다완은 자다법에 이용되었다.

   그러나 당나라 시기에는 기본적으로 다완에 거품을 일군다는 발상 자체가 없었으므로 차를 다려낸 솥에서 차를 떠내어 다완에 따른 뒤 마시는 형태로서 말차법의 거품을 내는 송나라 점다법과는 큰 차이가 있다.

 

 

 

 

 

당, 월주요(옥벽저 다완)

 

 

 

 

 

고려청자(해무리굽 다완)

 

 

 

 

   그러므로 당나라 시기의 다완은 그 기형이 거품을 내기 적합하도록 높고 깊숙하게 만들어진 송나라의 다완과는 매우 다른 접시모양에 가까운 넓적한 형태를 지닌다. 다완의 굽은 초기에는 바닥이 평평한 평굽에서 시작하여 중앙부분을 깎기 시작하는데 대부분 옥벽저(玉璧底 / 일명 해무리굽)으로 깎아져 있으며 시기가 지날수록 둘레가 얇아지므로 초기와 중기 후기로 구분된다.

 

 

 

 

 

춘추  옥환

 

 

 

 

 

 

서한 옥벽

 

 

 

 

 

   옥벽(玉璧)이란 보주(寶珠)의 단면을 상징하는 영화(靈化)된 조형으로서 둥근 고리모양을 지닌 고대 벽(璧) 이라는 옥기와 같다하여 지어진 이름인데 다완바닥이 옥벽에서 시작되므로 다완을 보주로 영화시켜 인식토록 하는 사상적 의미를 담고 고안된 다완이었다.

   당나라 시기 자다법으로 차를 마시려면 탕관에 3-5시간동안 정성껏 차를 다려야 했는 데, 차를 마시려면 반드시 다동(茶童)이 맡아서 차를 다뤄야 했으므로 이렇게 차를 마신다 함은 상류사회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다완은 곧 부와 권위의 상징이었다.

 

 

오대(五代)시기의 다완

 

   귀족주의가 성행했었던 당나라의 권위적인 차문화에서 벗어나며 예술적인 차문화시대의 송나라를 연결하는 과도기적 시기라 볼 수 있다.

   이 시기 연고차의 개발은 동양 3국의 차문화에서 예술적 관점으로 볼 때 비록 큰 발전은 있었지만 차를 본질적으로는 크게 타락시키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번거로운 자다법과 쓰고 떫은 차에 첨가물을 섞어 마시는 맛없는 당나라의 음다법식에서 벗어나기 위한 얄팍한 기교로서 연고차가 이 시기 개발되었지만 아직까지 다완에 거품을 일구는 형태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오대시기의 다완은 넓적한 당나라 다완의 기형을 따르지만 구연부의 바깥 테두리부분이 두툼해지고 당나라의 옥벽저에서 테두리가 얇아지는 옥환저(玉環底)로 변모하면서 과도기적 양상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송(宋)의 다완

 

   과도기였던 오대시기를 거치면서 송나라에 도래된 연고차는 이 시기를 기점으로 이전 당나라의 과시적이며 권위적 차 문화에서 벗어나며 예술적 차 문화의 시대를 활짝 연다.

   그러나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송조(宋朝)가 개국되었던 북송 초기에는 차마심이 그다지 활발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여 지며 북송 중기 이르러서야 본격적으로 송나라 다운 차문화가 시작되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금대 산서 자주요(옥벽저 흑유다완)

 

 

 

 

 

금대 하남 배촌요(옥벽저 흑유다완)

 

 

 

 

 

금대 하남 흑유(옥벽저 다완)

 

 

 

 

   송나라의 차마심에서는 자다법이 연고차로 인하여 자다법 보다는 대부분 점다법과 엄다법이 크게 성행했으며 그 중에서도 다완을 이용한 말차법(거품차)이었던 점다법의 차마심은 송나라의 차문화를 상징케 하였고 송나라를 예술적 차 문화의 시대라 할 만큼 아름답고 흥미로운 문화로 이끌어 나갔다.

    송나라 점다법의 가장 큰 특징은 다완과 차 거품이 어우러지는 아름다움의 추구였다 할 수 있다.

따라서 송나라 다완의 기형과 색상은 모두 이 부분에 초점을 맞춰 제작되었는데 기형은 당 오대 시기에 비해 높아졌고 깊숙하며 다완 속에 격불을 하여 거품이 피어나기 용이하도록 되어있다.

   송대 다완의 굽은 테두리를 이전 시기보다 얇게 깎는 것이 보편화되지만 북방에서 제작된 흑유다완들과 송(宋)으로부터 전래된 연고차의 같은 차문화가 유행했었던 고려의 다완에서도 당(唐)시기와 같은 옥벽저굽의 형태도 많이 만들어졌으므로 굽 만으로 시대를 구분하기에는 매우 곤란하다.

 

 

 

 

 

 

 

 

 

 

 

 

고려(高麗)시대의 다완

 

    당시 고려에 있어서 송나라는 절대적 문화의 선진국이었으므로 송나라의 차 문화 또한 여과없이 받아들였으며 고려의 차문화는 송나라의 차문화와 같은 모습으로 전개된다.

고려시대의 다완이 지닌 기형은 당 오대의 점다법용 다완이 지닌 넓게 벌어지고 납작한 형태에서 크게 벗어나 점다법에서 거품을 내기 좋도록 만들어진 송나라 다완에서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았으며 송나라의 기형을 그대로 따른다.

   고려 다완에서 나타나는 해무리굽의 형태를 당 나라때 다완에 나타나는 옥벽저굽에 비교하여 많은 사람들은 고려청자의 발생 기원을 당나라로 끌어 올려 편년을 하곤 하지만 송시기부터 금대(金代)까지 북방에서 제작된 흑유다완의 굽에서도 흔히 나타나는 옥벽저 굽들의 존재를 볼 때 단순하게 고려다완에 나타나는 해무리굽의 형태만으로 고려청자의 기원을 당나라와 직접 연관 짓는다면 커다란 오류가 따르게 된다.

 

 

 

 

당초기(평굽 백자다완)

 

 

 

 

 

당중기(옥벽저 백자다완)

 

 

 

 

 

당후기(옥벽저 백자다완)

 

 

 

 

 

오대(옥환저 백자다완)

 

 

 

 

 

북송(권족 백자다완)

 

 

 

   고려청자의 많은 기형들 중에서 해무리굽은 대부분 다완에 국한되어있는데 고려다완이 지닌 기형은 분명 거품을 중시했었던 송나라 다완의 기형이 성립된 960년경 이후의 기형을 따른 것으로서 송나라의 다완과 기형이 일치되며 당. 오대시기의 다완이 지닌 기형과는 많이 다르다.

   이러한 점은 우리나라에서 고려청자의 발생설을 논할때 언제나 근거로 제시되는 해무리굽 다완의 기원을 밝혀주는 매우 중요한 근거로서 고려청자가 도래하게 된 배경에는 차 문화가 크게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가 있다.

 

 

 

 

일본(日本)의 다완

 

   일본은 송나라의 예술적 차문화가 성행하던 무렵 고려와 마찬가지로 여과없이 송나라의 차문화를 받아들여 오늘날 까지 이어오고 있다.

   송나라의 차문화가 도래되었던 초기에 일본에서는 송나라에서 만들어진 연고차는 물론이고 다완까지도 송나라의 다완을 수입하여 사용한다.

 

   송나라의 선승들에게 차마심은 더 이상 선차(禪茶)가 아니었으며 연고차를 위시한 멋스럽고 격식을 중시하는 문화로서 선승들은 귀족이상의 고급 다완과 고급스런 차문화를 즐겼다.

   일본에 송나라의 차문화가 전래되는 배경에는 송나라의 이러한 사원차문화의 바탕 위에서 유학했던 선승들이 그 역활을 했는 데 중국의 선승들과 함께 생활하며 즐겼던 연고차를 일본으로 도입해 가면서 서원차의 기원을 연다.

   오늘날 정호다완이라 칭하는 일본 다완은 송나라풍의 호사스런 서원차의 폐단을 일소한다는 명분으로 변모된 와비차를 풍미하던 시대에 무사계급 사이에서 크게 유행했었던 다완으로서 제작지만 조선일 뿐 우리나라 차문화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일본의 다완이다.

 

   또한 국내에서 정호다완과 같은 조형적 비례를 지닌 사발이 전래되거나 발견된 바 없고 일반 생활유적지에서는 파편조차 나타나지 않는 점 등을 미뤄 보면 우리의 생활문화와도 전혀 연관이 없는 일본 상인들에 의해 일본의 차 문화에 맞춰 알맞도록 제작해 간 주문용 다완으로서 조선의 막사발이니 제기이니 하는 주장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

    임진왜란 이전에 일본의 무사계급에서 사용되어 조선 침략을 위한 정신무장의 무기로 활용되었던 조선에서 만들어간 다완으로서 우리에게는 수치스런 이러한 일본 차사발이 우리 선조의 생활 사발이나 차문화 다기로 크게 잘못 인식되어 우리 차인들의 정신문화를 어지럽히는 작금의 현실은 반드시 재정립하여 반드시 올바르게 규명시켜야 할 것이다.

   한 시대의 정신문화를 주도해야하는 차인들이 민족의 수치가 담겨있는 차사발에서조차 그 정체성을 읽지 못한다면 과연 차인이라 할 수 있을까 ?

 

 

 

 

 

일본다완/대정호 다완(일본국보)

16세기.15.4㎝ (교토 대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