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2. 14. 10:13ㆍ산 이야기
외설악 울산암
계조암에서 올려다 본 울산암 전경.
"네, 지금 올라가고 있는 사람이 톱입니다. 네, 막 첫 피치(자일 한동의 길이)를 끝냈군요."
바위 틈새마다 진달래가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한 설악산 울산암의 1983년 식목일이었다. 당시만 해도 설악은 이 땅의 최고 신혼여행지이자 사계절 단체 수학여행지였다. 울산암에서 내려다 본 계조암 부근에는 수학여행 온 학생들이 개미떼처럼 모여있었다. 몰려든 관광객들로 인해 벌집을 쑤셔놓은 듯 왕왕거리던 산 전체가 난데없이 들려온 마이크 소리에 한 순간 조용해졌다.
바위에 몸을 묶고 안중국씨를 끌어올렸다. 오랜만에 오르는 바위라서 잘 못하겠다고 엄살을 피우던 그는 쑥쑥 잘 올라왔다. 연세산악회 후배인 그와는 10년 가까이 함께 바위를 타왔다. 바위에서는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서로의 버릇을 잘 알고 있었다.
파트너가 보이지 않아도 그의 자일 움직임만으로도 그가 무엇을 원하며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자일은 우정과 속내가 흐르는 핏줄이었다. 안씨의 컨디션이 좋은 것 같았다. 쑥쑥 빠져나가는 확보줄이 순식간에 한아름이나 됐다.
"지금 라스트가 올라가고 있습니다. 몹시 엉기는군요. 아마 초보자일 겁니다." 다시 마이크 소리가 났다. 안씨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형, 혹시 우리를 중계하는 마이크 소리가 아닐까요." 그는 몰래 뒤보다 들킨 사람처럼 당황하며 씩씩거렸다.
나는 "그럴 리가 있겠냐"고 대꾸한 뒤 그의 자일을 카라비너 위로 돌렸다. 그렇게 해서 그와 울산암과 내가 한몸으로 묶였다. "네, 드디어 두 사람이 합류했습니다. 둘은 그곳에서 굳은 악수를 나눌 것입니다." 설마했던 마이크 소리는 우리를 따라다녔다.
얼핏 어른거리는 그림자가 누구 것인지 알아보려고 갑자기 몸을 움직이거나 손을 들어볼 때가 있다. 그처럼 나는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네, 톱이 손을 들었습니다. 여러분 박수를 보내주십시오. 짝짜작짝, 와, 휘익 휙…." 나는 깜짝 놀라 황급히 손을 내렸다. 월드컵 축구경기에서 우리나라가 역전골을 넣었을 때처럼 박수와 함성이 터졌던 것이다. 놀리는 듯한 휘파람 소리도 들렸다.
외설악에 사는 관광가이드들이 마이크를 잡고 수학여행 온 학생들에게 울산암을 소개하면서 우리의 오름짓을 중계하고 있는 것이었다. 외설악 구조대원들이나 적십자 구조대원들이 주로 관광가이드로 활동했다.
이들은 설악으로 수학여행 오는 많은 학생의 안전을 돌봐야 하는 일의 특수성 때문에 프로 산악인 못잖은 전문성을 갖추고 있다. 여기에 빨간 등산용 스카프를 목에 두르고 여름에도 눈덮인 산에서나 쓸 법한 색안경으로 한껏 멋을 부렸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폼에 죽고 폼에 사는 사람들이었다.
울산암을 등반하다 관광가이드의 중계방송 대상이 된 산악인이 적지 않다. 그날도 가이드의 마이크 소리가 우리를 줄곧 뒤쫓았다. 아무도 없는 골짜기에서 고독하게 이뤄지는 게 암벽등반이라고 믿어온 나는 중계방송을 당하는 것이 싫어 톱 자리를 안씨에게 내줬다.
"네, 톱을 교대했군요. 앞 사람은 그만 지친 겁니다. 무리하게 덤빈거지요. 지금 올라가고 있는 것이 침니입니다. 무척 쉬운 곳인데 몹시 엉기는군요. 아주 초보자인 것 같습니다. 거기 후미 후미 조용하세요. 계속 떠들면 자유시간 없어요. 어, 그래도. 야, 조용히 안 해! 이 자식들이, 형님이 설명하고 있는데…."
울산암 진실
"아, 두명 모두 바위 속으로 들어갔군요. 안 보이지요. 가다 못가면 쉬었다 가는 게 바위길입니다. 저런 곳에서는 어떤 자세로 올라가야 하는지 시범을 보여주지요. 자, 주목! 주목! 이리 보세요. 알겠지요. 알았죠. 저곳에서부터는 밖으로 나와 그위로 올라가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나오질 않는군요. 얌마들! 그 속에서 뭣들하고 있어. 안 보이잖아. 빨리 나와봐! 그래도 안 나오는군요. 매우 겁을 먹은 모양입니다. 겁쟁이들이군요. 그러면 내려오든지 해야지요. 내려오면 하강이고, 올라가면 등반이 됩니다. 알겠어요? 이건 만고불변의 진리예요. 사고는 하강 때 잘 나는 법입니다.
엊그제 서울 북한산 인수봉에서 일곱명이나 얼어죽었죠. 바로 저런 사람들이 그런 사고를 당하는거죠. 더 보자구요? 안돼요. 시간이 없어요. 궁금한 사람은 내일 신문을 보도록 하세요. 사고가 나면 신문에 날테니.
자, 조용, 조용히 해주세요. 이제 기다리고 기다리던 울산암의 개념을 설명해드릴테니. 저 잘 생긴 울산암으로 말할 것 같으면 제 고향인 울산 큰 애기, 울산 출신의 바위랍니다.
그런데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에 금강산에서 전국 바위컨테스트라는게 열렸지 뭡니까. 가장 잘 생긴 바위를 미스 코리아 뽑듯 뽑아내는 대회였어요. 이 소식을 접한 달마대사께서 '올커니! 울산의 그 바위라면 록코리아 진은 떼어 놓은 당상이다'며 신이 나서 그 바위를 금강산으로 끌어갔답니다.
그런데 한국 최대를 자랑하는 그 바위가 얼마나 무거웠겠어요. 아무리 힘 좋은 달마대사라지만 금강산을 지척에 두고 설악산까지 와서는 상금이고 그랑프리 상패고 뭐고 다 싫다며 그 자리에 놓아 버렸답니다.
그래서 그 길이가 무려 4km, 다시 말해 10리나 되는 이 바위가 바로 설악의 여기 이 자리에 떡하니 생겨난 거지요. 그래서 울산에서 왔다하여 울산암이 된 겁니다. 잘 알았죠?
기말 시험에 나올지 모르니 이 바위의 고향 울산과 그 곳에서 여기까지 끌고 오느라 진땀 뺀 달마대사님의 함자를 꼭 기억해두세요. 자, 이제 돌아갑시다. 1반. 2반. 어! 2반, 2반은 어디갔어. 이 자식들은 맨날 없어져. 야, 2반! 이것들을 콱!"
안중국씨와 나는 학생들이 내려갈 때까지 바위틈에서 나오지 않았다.
'정면벽 칸테 오른쪽 크랙'이라는 긴 이름의 이 코스는 1974년 8월 에코클럽의 유기수씨와 박일환씨가 개척했다. 울산암의 여러 암벽 중에서 가장 길고 깨끗하게 뻗어나간 바위면에 나 있는 이 코스는 갑자기 비박(텐트 없이 비상 노숙하는 것)을 요구하는 등 개척자들을 애먹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주 까탈스러운 코스는 아니어서 몸도 풀고 정찰도 할 겸 가벼운 마음으로 붙어봤는데, 난데없는 관광가이드의 중계방송 때문에 오도가도 못하고 세번째 구간의 침니 속에서 한참 웅크리고 있어야만 했다.
김재중의 아우라
1988년 9월 요델산악회 후배들과 백두대간을 종주하고 있는 김재중씨(中).
그 다음 구간부터는 몸을 바위면 위로 완전히 드러내야 하는 외측등반이어서 또 광대노릇을 하게 될까봐 중계방송 아나운서(?)가 안내하는 수학여행객들이 모두 산을 내려갈 때까지 바위 속에서 기다렸던 것이다.
두 발은 앞벽에 붙이고, 엉덩이는 뒷벽을 미는 침니 등반 자세로 턱을 괴고 시간을 흘려보냈다. 손에서 바위 냄새가 난다. 오랜만에 맡아보는 바윗내였다.
나의 바위 타기 경험은 언제나 손에 남은 바윗내로 기억되고 더듬어진다. 그것은 찔레꽃 내음에 담긴 어린 시절의 추억 같은 것이다. 후각만큼 추억을 강하게 떠올려 주는 것은 없다.
갓 스무살의 젊은 피를 뜨겁게 달구며 처음 올랐던 큰 바위 얼굴-도봉산 선인봉-의 바윗내가 손에서 되살아났다. 선인봉 바위 틈새에는 많은 박쥐가 살고 있었기 때문에 유독 짙은 바윗내가 났다.
그 바윗내로 인해 다시 스무살로 돌아간다. 피가 먼저 알아보는 스무살의 가슴이 터질 듯 뛴다. 그 후에 겪어본 다른 지방의 바위에서는 이토록 진한 바윗내가 나지 않았다.
많은 관광객이 찾는 울산암의 바윗내가 선인봉만큼 진한 이유가 이 무거운 바위를 울산에서부터 가져왔다는 달마대사의 신통력 때문일까. 바윗길을 개척하는 것은 가장 진한 바윗내를 맡는다는 것이다.
첫 등정자는 장독 위에 쌓인 첫 눈을 쓸 듯 바위에 낀 태초의 내음을 맨 먼저 쓸어담아 가슴 깊숙이 들이마시게 된다. 그것이 바위가 첫 정복자에게 바치는 순결이다.
손을 내리자 공간과 시간이 10여년 전의 서울 선인봉에서 설악의 울산암으로 되돌아왔다. 오후 2시쯤에야 주변이 조용해졌다. 수학여행 온 학생들을 피하느라 바위 틈에서 두어시간을 허비한 것이다. 90도가 넘는 바위면으로 빠져나와 오른쪽으로 뻗은 엷은 바위 틈새를 따라 올랐다.
그곳부터는 깎아지른 직벽이 정상까지 뻗어 있었다. 이미 출발점에서 1백m는 올라온 듯했다. 그곳에서 내려다보니 가슴이 서늘했다. 서쪽으로 외설악이 한눈에 들어왔다. 대청봉까지 전신을 드러냈다.
그 높은 산마루의 중턱 위에는 잔설이 남아 있어 겨울산처럼 하얗다. 그 하얀 산은 화채봉과 만물상과 죽음의 계곡으로 뻗어내린 골짜기마다 부챗살 같은 하얀 눈줄기를 드리우고 있었다.
관광가이드들의 중계방송만 아니었다면 함께 설악으로 들어와 지금 울산암의 다른 코스에 붙어 있을 요델산악회 김재중씨와의 약속대로 오후 5시까지는 계조암으로 내려갈 수 있었을 터였다.
김재중씨와는 1981년에 처음 만나 설악의 용아장성.석주길.천화대 범봉.염라길 등을 함께 등반했다. 그와 등반했던 설악의 여러 코스들은 대부분 김씨의 요델산악회 선배인 백인섭씨와 송준호씨에 의해 개척됐다.
그런 코스를 김재중씨와 함께 오르며 나는 백인섭씨와 송준호씨라는 이름으로 전해지던 요델만의 아우라(라틴어로 분위기라는 뜻)를 호흡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울산암의 불뱀
신흥사로 향하는 긴 등잔불 행렬
울산암서내려다보니 불뱀 같아
백두산을 떠올리게 하는 설악산 마등령 부근의 모습.
눈꽃을 머리에 인 진대봉이 보름달을 향해 고개를 곧추세우고 있다.
[김근원씨 제공]
또 올라온 오후반 수학여행객들이 산을 내려갈 때까지 나와 안중국씨는 바위 속에서 시간을 보내느라 결국 울산암 바위에서 비박(비상노숙)하게 됐다.
어느새 날이 어두워졌다. 엎어진 설악의 검은 실루엣만 밤 하늘에 선명히 그려져 있었다. 아무리 봐도 대청봉에서 중청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말안장 같다. 그래서 '안부(鞍部.봉우리와 봉우리 사이의 우묵한 곳)'라는 말이 생겨났나 보다. 그 안부에 안장을 얹어 동해나 하늘로 신나게 달려보고 싶어졌다.
별들이 몇 개씩 돋아났다. 시리우스가 보이고 오리온이 차츰차츰 그 밝기를 더해가더니 설악의 밤하늘은 온통 별들의 축제 마당이 됐다. 그 별빛을 따라 정신이 또렷해질 뿐, 도무지 잠은 오지 않았다.
무당들의 행렬인지 내원암에서 신흥사로 내려가는 계곡에 등잔불이 길게 이어졌다. 무리지어 흔들거리며 신흥사 쪽으로 빠져나가고 있는 등잔불들이 꼭 불뱀 같았다.
도봉산 선인봉이나 북한산 인수봉의 밤은 스모그에 찌든 별빛보다 발 아래로 깔리는 서울시가지의 불빛이 더 황홀했었다. 산정의 적막함과 도시의 현란함이 극단적으로 대비돼서인지, 아니면 산쟁이의 남모를 소외감 탓인지 서울시가지의 불빛을 바라볼 때마다 생각에 잠기곤 했다.
미아리고개에서 수유리로 뻗은 길을 내달리는 자동차 불빛의 긴 행렬을 바라보다가 나는 곁에 있던 자일파트너에게 "어느 시인이 저걸 불뱀이라 했지"라며 그럴듯하게 분위기를 잡은 적이 있다.
그 뒤 몇 년 지나 연세대 산악회 후배인 대학생들과 인수봉을 오르던 어느 날 밤, 한 3학년생이 꼭 내가 했던 말투로 옆에 있는 그의 후배에게 "얘, 어느 시인이 저걸 불뱀이라 했어"라며 으스대는 게 아닌가. 내 입에서 나온 그 불뱀 얘기는 모교 산악회에 쭉 전해내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형, 어느 시인이 저것을 불뱀이라 했지요."
함께 비박하던 안씨가 그 불뱀을 바라보며 말했다. 도봉산 선인봉에서 태어난 불뱀은 이산 저산을 떠돌다가 울산암에 이르러 후배 입에서 나와 내 귀로 들어온 것이다. 그러기까지 몇 년이 흘렀는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또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 행렬이 정말 불뱀 같은가 하는 것도 문제가 안 된다. 정작 중요한 것은 그런 기계에서 나온 불빛마저 불뱀으로 받아들이는 산쟁이의 시선이자 감성이다. 비박하는 산쟁이는 사랑에 빠진 연인들처럼 이미 시인인 것이다.
그로부터 10여년이 흐른 어느 날, 눈덮인 백두산을 바라보며 이런 시를 읊었다.
"보름달빛에 무게를 잃은 백두산이 구름을 타고 마냥 흘러갑니다/ 졸망졸망한 자식 같은 산자락을 떼어놓고/ 조강지처 같이 푸근한 떡갈나무숲마저 버리고/ 떠도는 자의 영혼을 닮은 떠도는 산은 만년으로도 녹지 않는 고독에 떠밀려 밤하늘을 마냥 흘러갑니다/ 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쓸쓸함으로 밤하늘을 떠도는 하얀 산도 떠도는 자의 영혼처럼 누군가에게서 용서받고 싶은가 봅니다."
박인식 <소설가.前 사람과 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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