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설악에 살다(8); 권금성산장의 사연들~봉정암 거사 김재중

2018. 2. 14. 10:13산 이야기

권금성산장의 사연들

 

권금성 산장지기인 유창서씨가 1975년 일본 북알프스 산행중 포즈를 취했다. [김근원씨 제공]

 

 

케이블카가 놓이며 권금성까지는 누구든 쉽게 올라올 수 있게 됐다. 그러면서 사방이 깎아지른 절벽으로 둘러싸인 까닭에 권금성 일대는 설악산 최고(?)의 자살터라는 이름을 날렸다. 그런 소문과 더불어 산장의 낙서판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기능을 담당하게 되었다.

자살하려는 사람은 그냥 죽지 않는다. 뭔가를 남기게 마련이다. 그럴 때 그 낙서판은 세상살이에 더 이상의 흥미를 잃은 그들이 골라잡게 되는 유서판이 된다.

혼자 산장으로 올라와서는 커피를 홀짝거리다가 슬며시 일어선 사람이 '왔노라 보았노라 가노라'라든가, '사랑하는 설악의 품으로'라든가, '누구 누구는 잘 먹고 잘살아'라든가, '내가 헛되이 보낸 오늘은 그가 그토록 진실하게 살아보려던 내일이었습니다'라는 식의 내용을 낙서판에 적어뒀다면 틀림없는 신고감이었다.

그렇게 하여 몇 건의 자살을 방지했으며 미처 손을 쓰지 못한 경우에는 낙서판으로 추적해 자살자의 신원을 알아낸 적도 있다.

이런 일도 있었다.

군인 복장의 어떤 젊은이가 헐레벌떡 뛰어와서는 애인이 권금성 자살바위에서 실족해 떨어져 사망했다고 신고해 왔다. 산장지기 유창서씨는 그 군인을 데리고 사고 현장으로 달려 갔다. 절벽 아래쪽으로 하강하며 추락장소로 다가갔더니, 천운으로 군인의 애인은 살아 있었다. 실신했다가 깨어난 그녀가 유씨 곁에서 놀란 눈으로 자신의 애인을 바라보던 그 군인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아저씨, 바로 저 자식이 날 떠밀었어요."

그 군인은 자신이 입대 후 돌연히 변심해 고무신을 거꾸로 신은 애인의 마음을 돌려보려고 자살바위로 데리고 가서는 마지막으로 윽박질러보다가 그녀가 앙칼지게 나오자 그만 일을 저지르고 만 것이었다. 애인을 절벽 아래로 떠민 그 군인에게는 좀 미안한 얘기지만 그의 애인이 살아나서 얼마나 다행인가.

"설악의 산심은 내 털만큼이나 푹신푹신한 게야."

곰 같은 이 권금성의 산장지기는 그 일을 다시 떠올리며 정말 푹신푹신한 느낌을 주는 자신의 턱수염을 자랑스레 쓰다듬었다.

설악은 제주도에 버금가는 국내 신혼여행지다. 그런 신혼여행지에는 연극 대본처럼 여행코스가 짜여 있게 마련인데 설악을 찾는 신혼부부들은 어김없이 권금성 산장에 올라 유창서씨를 가운데 두고 기념촬영을 하게 된다. 유씨와의 기념촬영은 설악을 다녀갔다는 증명사진과 다름없었다. 그럴 때마다 신혼부부들 사이에서 눈만 빠곰히 뜨고 앞쪽을 바라보는 수염 덮인 얼굴은 사람이라기보다는 반달곰을 연상시켰다.

유씨의 심성 또한 외모 이상으로 반달곰을 닮았다. 1971년 겨울 산간학교의 최종 빙벽훈련 때 유씨는 다른 강사진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30여명의 수강생을 토왕폭 하단에 한꺼번에 붙여놓았다. 토왕폭의 사나이로 태어나자면 무조건 토왕폭에 붙어 토왕폭을 두드려보아야 한다고 가르친 것이었다.

그런 반달곰 한 마리가 설악산 반달곰이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는 요즘에도 권금성 산장에서 곰털 수염을 키우며 살고 있는 것이다.

 

 

 

내설악 지킴이 이경수

 

대피소 앞으로 넓게 펼쳐진 내설악 수렴동 계곡의 아침 풍경.[김근원씨 제공]

 

 

외설악 권금산장의 유창서씨가 '털보파' 산장지기의 대부라면, 내설악 수렴동 대피소에 사는 이경수씨는 '비털보파' 산장지기를 대표한다.

설악의 주릉은 공룡능선이다. 그 공룡능선을 기준으로 서쪽인 내륙쪽을 내설악이라 하고 동쪽인 바다쪽 산자락을 외설악이라 부른다. 그 내외 설악은 '내외'하는 부부처럼 서로 성(性)이 다르며 산세가 다르고 분위기 또한 다르다. 내설악은 집안을 지키는 안사람처럼 푸근한 모성을 보여준다. 그에 비해 외설악에서는 엄한 부성으로 다스려지는 서릿발 선 암릉이 연이어진다. 그렇게 다른 내외설악이 금실 좋은 내외처럼 맞붙어 '설악'이라는 하나의 산악 세상을 산사람에게 열어 놓고 있는 것이다.

사람과의 인연도 내외설악은 그 산세만큼이나 다르다. 내설악에는 설악에서 태어난 토박이들이 주로 살고, 외설악에는 설악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설악을 사랑하여 설악으로 찾아들어간 외지인들이 더 많이 산다. 내설악은 설악산 사람들의 삶의 터였고, 외설악은 설악을 찾은 타관사람들의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런 내설악에서 태어나 내설악에서 평생을 보낸 내설악 수렴동 계곡의 이경수씨를 찾아간 1990년의 어느 겨울날은 산자락마다 그리움으로 쌓이던 눈발들과 함께 고스란히 기억된다.

그날 이씨는 꽁치 통조림이나마 안주로 내놓으며 강원도 쪽으로 갈 때마다 마셨던 겨울달-경월 소주를 따르며 맞아 주었다.

"산에서 사람 만나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 미안합니다. 죄송하구요."

수렴동이 막 어둠에 잠길 무렵에 나그네를 만나 기뻐서 오히려 미안하다는 이씨는 취해서 죄송하다는 뜻인지 전혀 미안해할 경우가 아닌데도 후렴처럼 미안하다는 말을 주억거린다.

불콰한 낯빛이지만 취한 것은 아닌 듯했다. 시중들던 부인이 저녁 반주 겸해서 소주를 서너병밖에 들지 않았다고 귀띔해줬다. 이씨의 평소 주량은 소주 두되 정도로 알려져 있다.

"술 먹다가 다들 갔지요. 용대리의 술친구들 최운봉이, 광택이, 우춘이 뭐 죄다 술 먹다 죽고 혼자 남았습니다. 아, 미안합니다."

살아남아 미안하다는 그는 사실이지 인제군 원통면 용대리의 살아 있는 신화라는 이야기를 듣는 설악의 산사람이다.

용대리 태생으로 군복무를 마친 64년 설악산에서 살기 위해 내설악으로 들어왔다가 봉정암에 첫 거처를 정하고 머리를 깎으려다 단념했다. 그 이태 후부터 영시암터.백담사.오세암 등 내설악 계곡에 있는 절간을 전전하며 불목하니 처사 노릇으로 입에 풀칠을 했다.

지금의 수렴동 대피소와는 70년부터 인연을 맺었다. 그때부터 혼자서 관리해오다가 74년 인제군으로부터 임대받았다. 그 후로 관리권이 국립공원 측이나 강원도 장학회로 넘어갈 뻔했으나 그에게 붙어다니는 '신화적' 이미지와 그가 끝까지 믿어 보겠다는 설악의 산신령이 지켜주었는지, 오늘날 '수렴동'의 이름은 '이경수'와 동격으로 불리고 있다.

 

 

 

선녀와 산장지기

 

30여년 동안 수렴동 대피소를 관리해 온 이경수씨는 그동안 50여명의 등반객을 구조했다.

[김근원씨 제공]

 

 

"만일 내가 도를 알았다면 봉정암에서 머리를 깎았을 겁니다. 한데 도를 몰라 하산해 속인이 됐지 뭡니까. 아, 죄송합니다. 한잔 드시죠. 자, 미안합니다. 예, 죄송하구먼요."

슬하에 3남3녀의 자녀를 두고 외손녀까지 본 할아버지이지만 아직 힘이 장사여서 이경수씨에게는 불가사의한 설악의 신화가 여전히 따라다닌다.

그의 신화적인 힘은 약초를 캐거나 날품팔이 지게짐을 질 때도 한몫 거들지만 어쩌다 내설악 일대에서 조난사고가 발생하면 제대로 빛을 본다.

내설악 산행의 주요 기점인 수렴동을 지금까지 지키면서 조난자 50여명의 목숨을 구해냈고, 이미 절명해 산 아래로 져내린 시신의 수만 30여구를 헤아린다.

조난당했을 때 그의 등에 제대로 업힌 사람은 살아난다. 그러나 하늘을 보도록 등을 돌려 업힌 사람은 이미 죽음의 문턱을 넘은 사람이다.

"산 사람은 제대로 업어 다시 밟고 살아가야 할 땅을 보여줘야 하고, 죽은 이에게는 다시 못 볼 이승의 하늘을 마지막으로 보여줘야죠. 이게 모두 산신령에게서 배운 겁니다. 미안합니다. 쭉 드시고 한잔 주시죠. 죄송합니다."

술병이 덧없이 비어버린 게 자기 탓이라는 듯 미안하다며 다시 일어나서 소주 네병을 꿰어차고 돌아왔다. 껑충한 키에 건장한 몸집의 사내가 술판에 앉을 때는 학이 천년 묵은 소나무 가지에 내려앉듯 사뿐거리며 춤춘다.

몇 순배 술이 더 돌자 이씨는 자신의 남다른 힘에 얽힌 일화를 조금씩 털어 놓았다.

그는 한창 때 80kg 나가는 쌀 한가마를 지고 용대리에서 설악산을 넘어 속초 장터까지 들락거렸다 한다.

"지금도 자신 있습니다. 그런 민족 경기를 한번 열어 보세요. 씨름판보다 더 재미있을 겁니다. 이번 설악제 때 열릴 수 있도록 주선해 주시면 제가 꼭 우승해 보이겠습니다. 상금 따위는 필요 없습니다. 술 한잔만 받아주시면 됩니다. 아, 미안합니다. 죄송하고요."

힘이 아직 남아 있어 죄송하다는 그는 용대리에서 쌀 한가마를 지고 대청봉을 넘어 외설악의 설악동까지 누가 먼저 가는지 하는 대회를 열어보자고 제안했다. 용대리와 설악동에서 등짐지며 살아가는 여러 후배들이 죄다 출전하겠지만 아직은 자신이 우승할 수 있다고 장담하면서도 거듭 고개를 숙이며 죄송스러워했다. 술잔을 너무 쉽게 비워서 죄송해 하다가는 술잔을 받으면 더욱 미안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요 뒤쪽 가야동에 가면 제가 토굴 하나를 파 뒀습니다. 오전 1시면 어김없이 산신령이 동쪽으로 좌정하여 나타나는 그 토굴에 어느날 선녀 같은 아가씨가 들어왔지 뭡니까. 그 아가씨가 지금의 제 작은 처입니다. 나이는 제 반밖에 안 됐는데도 아이를 벌써 둘이나 낳았지요. 아, 미안합니다. 죄송스럽군요."

집사람이 둘이어서 미안하다는 것인지, 본처 자식들과 모두 합치면 아이들이 8명이나 되어서 죄송하다는 소리인지, 계속 죄송해 하면서 그는 연달아 술잔을 비웠다.

 

 

 

가야동 처녀

 

수렴동계곡은 백담사에서 봉정암을 거쳐 대청봉으로 오르는 내설악의 관문이다.

이곳은 단풍이 곱게 내려앉을 때면 등산객들로 붐빈다.

 

 

수렴동 대피소에서 이경수씨를 만난 다음날이었다.

봉정암을 거쳐 소청봉산장과 중청, 그리고 설악의 정상인 대청봉에 이르기까지 '수렴동 이경수의 신화'는 따라왔다. 설악의 정상에서 만난 산사람들에게 이경수씨에 대한 얘기를 꺼내자 그들은 매우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그 사람 요즘도 술을 마십니까. 저런 술을 끊었다더니…."

"그 사람 아마 웅담을 댓개나 먹었다지. 수백년 묵은 산삼은 물론이고. 그래서 힘이 엄청나다는 게야."

중청산장에서 만난 한 산악인은 이경수씨의 불가사의한 힘은 웅담 덕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그 양반 웅담 먹고 곰이 됐지 뭡니까. 한창 때 술 마시고 힘쓰는 걸 보면 옛날 곰골에 우글거리던 시커먼 곰들을 보는 것 같았어요."

사실 이경수씨가 태어나고 자란 용대리에 사는 노인들은 거의 웅담을 맛 본 장사들이다. 60대 이상 주민들이 젊었을 땐 내설악 일대에서 곰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으며, 곰 사냥은 불법이 아니었다. 그들은 곰을 잡으면 죽은 사람도 살려 놓는다는 웅담을 팔지 않고 자신들의 보신을 위해 먹었다.

웅담은 나무 한짐 얹은 지게를 제대로 못 지는 약골도 80㎏이 넘는 쌀 한가마를 거뜬히 들어올리는 장사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용대리에서는 웅담 구경도 못한 젊은이들 대신 웅담 먹은 할아버지들에게 힘쓰는 일을 부탁한다.

"아! 가야동의 그 토굴요? 그곳에 '작은 부인'을 숨겨뒀다죠. 누가 가봤다는데 기막히게 꾸며놨다고 합디다."

"처음에는 같이 못 살게 하려고 이경수씨의 아들들이 그 처녀를 흠씬 두들겨 패곤 했답니다. 그런데도 처녀가 토굴을 떠나지 않자 이제는 본부인도 배다른 갓난아기를 돌봐줄 정도로 잘 대해 준답디다."

"설악에 자살하러 들어온 여자랍니다. 봉정암에 머물다 어느 날 봉정연봉으로 올라가 바위에서 뛰어내렸는데 뒤따라온 한 산악인에 의해 구조됐답니다. 그 산악인은 처녀를 연모하게 됐다던데…. 인연은 따로 있는 거지요. 아참, 그 산악인도 얼마 전 설악의 울산암에서 떨어져 죽었답디다. 자살이란 얘기도 있고, 등반 도중 추락했다는 소문도 돌던데, 어쨌든 애석한 일입니다. 설악은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죠."

이경수씨나 그의 작은 부인에 대한 이런저런 얘기들은 대청봉을 할퀴고 지나가는 바람처럼 무성했다.

혹시 이런 풍문 중에 이씨에 대한 험담이 섞여 있다면 그건 어디까지나 두 명의 부인을 두고 지천명을 넘긴 나이에 소주를 됫병으로 마시며 쌀 한가마를 지고 설악산을 오르내리는 그의 불가사의한 힘을 누군가 시기하고 있는 것이다.

 

 

 

'봉정암 거사' 김재중

 

이경수씨가 관리하던 수렴동대피소.[김근원씨 제공]

 

 

내설악의 품은 넓고 아늑하다. 하지만 내설악도 골산(骨山)인 설악의 반쪽이어서 불쑥불쑥 튀어나온 바위 봉우리들의 양기를 숨기지는 못한다. 수렴동에서 솟아올라 봉정암 뒤 산자락에서 마감되는 '용아장성'의 바위 연봉(連峰)은 내설악의 양기를 뚜렷이 보여준다. 용아장성은 요델산악회와 각별한 인연이 있다.

'요델산악회의 표범'으로 불리던 송준호씨가 1968년 여름 초등에 성공한 데 이어 요델의 산사나이들은 71년 겨울 초등까지 이뤘다. 때문에 요델의 김재중씨는 여름과 겨울 초등을 이룬 선배들의 열정이 서려 있는 용아장성에 깊은 애정을 갖게 됐다.

용아장성 등반은 수렴동대피소에서 시작해 봉정암에서 마무리된다. 김씨는 수렴동대피소와 봉정암에 서너달씩 머물며 용아장성의 다양한 암봉에서 등반을 즐겼다. 그는 설악으로 부는 바람이었다. 아니 설악에서 부는 바람이었는지도 모른다.

고교 졸업 후 요델산악회에 들어간 김씨는 설악의 석주길과 용아장성을 좋아해 계절을 가리지 않고 설악으로 달려가 설악의 산바람으로 몸과 마음을 씻었다. 그가 용아장성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1982년 용아장성을 함께 등반하다 추락사한 동료 김문한씨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라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

결혼과 취직을 거부했던 김재중씨는 봉정암에 오랫동안 머물렀기에 '봉정암 거사'로 불리기도 했다. 머리만 안 깎았지 무소유를 철저하게 실천한 불자였던 그는 어느날 밤 늘 지켜보던 용아장성의 한 암봉에서 투신하는 여인을 목격했다.

그는 재빨리 달려가 여인을 구조해 들춰업고 수렴동대피소를 향해 밤길을 뛰었다. 도중에 그는 가야동 골짜기에서 수렴동대피소를 관리하는 이경수씨가 파놓은 토굴로 들어갔다. 여기서부터 봉정암 거사의 구조활동은 이경수씨의 다음과 같은 회고와 겹친다.

"요 뒤쪽 가야동에 가면 제가 파둔 토굴이 하나 있습죠. 오전 1시만 되면 어김없이 동쪽을 향해 좌정한 산신령이 나타나는 그 토굴에 어느날 선녀 같은 아가씨가 들어오더군요. 그 선녀가 지금의 제 작은 처입니다." 이런 인연으로 이씨는 봉정암 거사를 봉정암 하늘 높은 곳에서 선녀를 보내준 산신령으로 떠받들게 됐다.

설악을 사랑하던 봉정암 거사는 89년 9월 어느날 설악의 울산암을 오르다 영원한 바람으로 돌아갔다. 김재중씨는 산친구인 외설악적십자구조대의 전서화.오세천씨와 함께 울산암 구공길을 등반하다 추락해 목숨을 잃은 것이다. 김씨는 일행의 맨 뒤에서 오르고 있었는데 추락 도중 그의 자일이 끊어진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자살이었을까?

박인식 <소설가.前 사람과 산 발행인>

 

출처 : 우.리.들.산
글쓴이 : 오로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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