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알피니즘을 빛낸 선구자들

2018. 2. 18. 13:40산 이야기

  예지 쿠쿠츠카~니콜라스 클린치~텐징 노르게이
알피니즘을 빛낸 80명의 선구자들
글 이용대 코오롱등산학교 교장


 ◇ 쿠쿠츠카, 예지


쿠쿠츠카, 예지 Kukuczka, Jerzy 1948~1989

폴란드 태생의 세계적인 등반가로 1979년부터 1989년 로체 남벽에서 사망할 때까지 10년 동안 8000m 고봉 17개를 완등한 20세기가 낳은 철인이다.
그와 14개 거봉 완등 레이스를 벌였던 메스너와 달리 낙후하고 폐쇄된 동구권에서 등산을 시작한 그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히말라야 거봉들을 전혀 새로운 스타일로 등반해낸 점은 세계 등반사에 길이 남을 업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1979년 그가 히말라야 무대에 혜성처럼 나타나서 1989년 로체 남벽에서 로프가 끊어져 사망할 때까지 10년 동안에 오른 8000m 고봉 편력은 매우 다채롭다.
그가 노말 루트로 오른 산은 오직 로체뿐이었고 에베레스트, 가셔브룸1봉과 2봉, 브로드피크, 낭가파르바트, K2, 마나슬루, 시샤팡마는 모두 새로운 루트를 개척했으며, 마칼루는 단독 등정했다.
특히 다울라기리, 초오유, 캉첸중가, 안나푸르나는 동계 등정을 이룩했다.
이 중 초오유와 캉첸중가는 동계 초등정이었으며, 어렵기로 정평이 나 있는 안나푸르나 남벽은 새로운 루트를 뚫고 정상에 올라 8000m 거봉 등정사에 새로운 족적을 남긴다.
1981년 베리에이션 루트를 열고 서북릉을 통해 단독으로 등정한 마칼루 등정은 등정 증거가 없어 의혹이 제기되었으나 다음 해인 1982년 한국대의 허영호가 정상에서 쿠쿠츠카가 정상 등정 증거물로 놓고 온 무당벌레 마스코트를 발견함으로써 그의 등정 의혹에 종지부를 찍는다.
쿠쿠츠카의 히말라야 중요 등반 연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79년 로체(8511m) 서북면 무산소 등정, 1980년 에베레스트(8850m) 남벽에 신루트 개척, 1981년 마칼루(8463m) 서북릉에 베리에이션 루트를 열고 단독 등정, 1982년 브로드피크(8047m) 등정, 1984년 북봉과 중앙봉을 연결하는 신루트로 등정하여 이 산을 두 번 등정하게 된다.
1983년 가셔브룸2봉(8035m) 동서릉과 가셔브룸1봉(8068m) 서남벽에 신루트를 개척하여 등정, 1985년 다울라기리(8167m) 동북릉 동계 초등정, 같은 해 초오유(8201m) 동남벽에 신루트를 개척하여 동계 초등을 이룩한다.
1985년 낭가파르바트(8125m) 동남벽에 신루트를 개척하여 등정한 후 1986년에는 캉첸중가(8586m) 서남벽 동계 초등을 성공시킨다.
1986년 K2(8611m) 남벽과 마나슬루(8161m) 동북벽에 신루트를 개척하여 등정, 1987년 안나푸르나(8091m) 북벽 동계 초등과 시샤팡마(8046m) 서릉에 신루트를 개척하여 등정하였다.
그의 경쟁자였던 메스너가 8000m급 14봉을 완등한 지 불과 4주 뒤 쿠쿠츠카가 시샤팡마를 마지막으로 14봉 등정을 끝내고 돌아왔을 때 메스너는 ‘당신은 제2인자가 아니다.
당신은 참으로 위대하다’라는 내용의 축하 전문을 보냈다.
저서로는 'Im Vierzehnten Himmel-Wettlauf im Himalaya' (1990)가 있으며, 국내 역서 <14번째 하늘에서>(김영도 옮김·1993)는 그가 남긴 오직 하나의 기록이다.
이 책 내용 중에는 1983년 한국 안나푸르나 원정대의 동계 초등 의혹에 대한 그의 견해를 언급하고 있어 흥미롭다.

쿨리지, 윌리엄 Coolidge, William Augustus Brevoort 1850~1921

영국의 등산가. 알프스 등반사에 정통한 저명한 역사가다.
뉴욕에서 출생한 쿨리지는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했다.
병약했던 그는 이모의 보살핌 속에서 성장했다.
그의 이모 브레보오트(Brevoort)는 산악인으로 그녀가 사망할 때까지 쿨리지와 함께 등반하면서 그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1870년 라 메이쥬(La Meije) 중앙봉, 1876년 피츠 바딜레(Piz Badile)를 초등했으며, 1874년에는 베터호른(Wetterhorn), 융프라우(Jungfrau), 1879년 슈레크호른(Schreckhorn)을 동계 초등했다.
1865~1898년 동안 한 계절도 빠지지 않고 알프스를 등반하여 이 지역에 대한 풍부한 경험과 지식을 쌓았으며, 수많은 등반을 하였다.
그는 암벽등반보다는 빙벽등반을 선호했으며, 알프스 등반 사상 황금기가 끝난 후에야 암벽등반을 시작하였다.
그는 1882년 이후 알프스연구와 산악 도서관 건립에 생애를 바쳤다.
1897년에는 재직하고 있던 옥스퍼드를 떠나 그린델발트로 이주하였다.
그는 알프스를 서부, 중앙부, 동부로 구분하고 이를 다시 세분하였다.
이 분류법이 지금도 일반적으로 쓰이고 있다.
그가 최초로 펴낸 실험적 소책자인 에는 알프스에 대한 그의 방대한 지식과 등반가를 위한 정확한 정보가 담겨있다.
그의 저서는 등반가들에게 많은 정보를 제공해주는 중요한 자료로 높게 평가되고 있다.
그는 완고하고 논쟁적이어서 많은 등반가들과 대립했다.
30세 이후에는 성직에 종사하였으나 그린델발트로 옮긴 후 그린델발트의 현인(Sage of Grindelwald)으로 불리면서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저서로는 'Swiss Travel and Swiss Guide Books' (1889), 'Josias Simler et Les Origins de I Alpinisme Jusqu en 1600' (1904), 'The Alpine Nature and History' (1908), 'Alpine Studies' (1912) 등이 있다.

클린치, 니콜라스 Clinch, Nicolas 1930~

미국인 최초로 8000m봉 초등 기록을 이룩한 장본인이다.
일리노이주 에반스톤 출신인 그는 뉴멕시코 군사 전문학교와 스탠퍼드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변호사이자 등반가이다.
그는 20세부터 등반을 시작하여 경험을 쌓아갔으며, 그를 유명하게 한 것은 1958년 히든피크(가셔브룸1봉·8068m) 초등대를 지휘하여 셰닝(schoening)과 카우프만(Kauffman)을 정상에 올려 세계 최강국 미국의 체면을 세우게 한 점이다.
미국은 그동안 8000m 고봉 중에서 K2를 세 차례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하여 세계 열강들의 8000m 고봉 초등 경쟁 대열에서 뒤쳐져 있어 강대국의 체면이 평가 절하되고 있었다.
그래서 미국은 처음부터 이 산의 초등정을 이룩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1955년 남미 페루 서부의 푸카지르카(Pukajirka·6039m) 2·3봉을 초등, 1960년 마셔브룸1봉(Masherbrum·7821m)을 등정하고, 1966년 남극대륙의 빈슨매시프(Vinson Massif ·5140m)원정대를 지휘하여 셰닝과 에반스의 초등정을 성공시킨다.
이후 그는 미국산악회장을 역임한다.
저서로는 히든피크 초등 기록인 [A walk in the Sky](1982)가 있다.

태스커, 조셉 토머스 Tasker, Joseph Thomas 1948~1982

영국의 유명한 등반가로 1982년 5월 피터 보드맨과 함께 에베레스트 동북 능선상에서 행방불명되었다.
그의 이름은 흔히 조 태스커로 불리기도 한다.
그는 헐(Hull) 출신으로 어소대학(Ushaw College)에 진학하여 그 근처의 채석장과 호수지방(Lake District)에서 등반을 시작하였다.
또한 맨체스터대학에서는 사회학을 전공하였다.
1972~1974년 알프스의 3대 북벽과 아이거 북벽을 동계 등반했다.
1975년 두나기리(Dunagiri·7066m) 남릉을 알파인 스타일로 시도하여 6일치의 식량으로 10일을 버티는 대 서사시를 연출한다.
1976년 창가방(Changabang·6864m)을 초등정하고, 1979년 캉첸중가(Kangchenjunga·8586m) 북릉을 최초로 무산소 등정한다.
1980~1981년 에베레스트 서릉 원정에 참가하고, 1981년 보닝턴(Bonington), 보드맨과 함께 콩구르(Kongur·7719m)를 초등정했다.
그는 1982년 보닝턴이 지휘하는 에베레스트 원정대에 참가한다.
이 원정대는 에베레스트에서 최초로 알파인 스타일에 의한 베리에이션 루트 개척을 목표로 산소와 포터의 사용을 배제한 채 도전했다.
공격조에 선발된 태스커와 보드맨은 최상의 조건하에서 ABC를 출발했다.
8200m 지점까지 올라가는 두 사람의 모습이 보닝턴의 망원경에 관찰되었으나 곧 날이 어두워지고 두 사람의 모습은 사라졌다.
그것이 두 사람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아마도 두 사람은 그 지점에서 정상까지 얼음으로 연결된 사면에서 미끄러져 동벽의 캉슝빙하(Kangsung Glacier)로 추락한 것으로 추측했다.
이들의 실종은 영국 산악계의 커다란 손실이었다.
당시 원정대는 이들의 기적적인 생환을 기대하면서 10일 이상을 기다렸으나 그들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다.
8200m 이상의 고소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생존해 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철수했다.
태스커와 보드맨은 원정을 떠나기 전 공항에서 가진 기자 회견에서 “선배들의 피와 땀이 얼룩진 티베트 측면은 매력적이며, 어떤 곤란이 있어도 정상에 오르겠다”고 말했으나 그들의 꿈은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다.
그들의 최후는 1924년 에베레스트 북릉에서 사라진 말로리와 어빈의 조난을 떠올리게 한다.
그들도 추락했을 것이라는 추측만 있을 뿐 그 외는 모두가 미스터리에 싸인 채 망각되었으나 말로리는 실종된 지 75년이 지난 1999년에 8250m 지점서 시체로 발견되었으며, 태스커는 실종 10년 후인 1992년 정상 바로 아래서 일본원정대에 의해 시신이 발견된다.
저서로는 에베레스트 서릉 원정기인 'The Cruel Way' (1981)와 'Savage Arena' (1982)가 있다.
'Savage Arena' 는 그의 마지막 원정이 된 1982년 에베레스트 원정을 떠나기 바로 전날 저녁에 출판사에 전해진 원고이다.
국내 역서로는 <세비지 아레나>(허긍열 번역·1996)가 있다.

 ◇ 테레이, 리오넬


테레이, 리오넬 Terray, Lionel 1921~1965

프랑스 등산가. 알프스 가이드 출신으로 루이 라슈날(L.Lachenal)과 팀을 이루어 1945년부터 1950년대에 걸쳐 서부 알프스의 거벽과 침봉을 섭렵한 프랑스를 대표하는 명가이드다.
1946년 그랑드조라스 북벽 워커 측릉의 제4등과 1947년 아이거 북벽 제2등을 기록했으며, 1950년 안나푸르나 원정대(초등대)에도 참가하였다.
1951년 12월 말 피츠로이(Fitzroy·3440m)로 원정을 떠난다.
기도 마뇨느(G,Magnone), 뽀엥스노(J.Poincenot)와 함께 떠난 이 원정에서 뽀엥스노는 급류에 휩쓸려 사망한다.
본격적인 등반은 1952년 1월부터 시작, 100여 개의 피톤과 120m의 고정 로프를 설치하면서 악천후를 뚫고 정상에 오른다.
1956년 그가 한 등반전문지에 기고한 피츠로이 등반기를 보면 “등반을 해보았으나 파타고니아에서의 등반은 나의 체력과 윤리관의 극한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기술적인 면에서는 알프스 화강암 등반보다 약간 떨어진다”고 말했다.
1955년 장꾸지와 마칼루(8463m)를 초등정한다.
1954년 초모렌쪼(Chmolonzo·7790m)와 마칼루2봉(7640m) 초등정, 1962년 자누(Jannu·7710m)와 닐기리 북봉(Nilgiri North·7061m)을 초등정한다.
1964년 헌팅턴(Mt. Huntington·3730m) 원정대의 대장으로 북동릉을 초등반한다.
그는 프랑스 베르꼬르(Vercors) 산군의 암벽을 오르다 안개 속에서 추락하여 사망한다.
테레이는 2차 대전 후 가스통 레뷔파, 루이 라슈날과 함께 프랑스 3대 등반가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아르망 샤를레 이후 전통적인 가이드로서 고전과 현대를 잇는 가교역할을 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저서로는 'Les Conquerants del Inutile; 무상의 정복자' (1961)가 있다.

텐징 노르게이 Tenzing Norgay 1914~1986

네팔 국경 타메이라 불리는 작은 셰르파 마을에서 출생했다.
1953년 힐러리와 함께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 정상을 최초로 밟은 인물이다.
1953년 5월 29일 에베레스트 정상에서 맹렬한 바람에 깃발이 흩날리는 피켈을 높이 쳐들고 있는 이 유명한 텐징의 사진은 불가능에 대한 인간 승리의 기록이기도 하다.
그동안 인류는 32년에 걸쳐 끈질기게 도전해왔던 이 산의 상징적인 정상을 현실적인 정상으로 실현시킨 순간이기도 하다.
그는 1939년 티리치 미르(Tirich Mir·7619m) 등반에 참가하고, 1951년 프랑스대의 난다데비 동봉(Nanda Devi·7434m) 등반에 참가하여 등정에 성공하였으나 대원인 뒤뿔라(Duplat)와 비느가 사망한다.
1946년 이래 여섯 차례나 에베레스트 원정에 참가했으며, 1953년 영국의 10차 에베레스트 원정대의 사다(Sirda)로 힐러리와 함께 개방식 산소 호흡기를 사용하여 초등정에 성공하였다.
그와 함께 정상에 오른 힐라리는 “그의 힘, 완벽한 등반기술, 능동적인 태도에 감탄하였다”고 말하면서 “나는 자신을 한번도 영웅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텐징은 예외였다.
그는 진정한 영웅이었다.
그는 미천하게 출발하여 세상의 정상에 올랐다”고 그를 격찬하였다.
에베레스트 등정 후 등반활동과는 인연을 끓고 다아질링에서 등산학교 강사로 후진을 지도하면서 인도 등산계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다.
한때 이 인류사적인 에베레스트 초등정을 놓고 호사가들은 두 사람 중 누가 먼저 정상을 등정했는가에 대해 관심을 모아왔다.
이 점에 대해 힐러리는 어느 언론 매체와 가진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누가 먼저 정상에 올랐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어려운 문제를 함께 해결해냈을 뿐이다.
다만 남봉(8749m)에서 정상까지는 내가 리드했다.
”텐징이 정상을 눈앞에 두고도 혼자 오르지 않고 뒤에 처진 힐러리를 30분이나 기다린 일은 매우 감동적이다.
힐러리는 정상에 올라 텐징의 사진만 찍고 자기는 사진찍기를 거절했다.
그가 천한 신분의 동반자를 진정한 영웅으로 여긴 때문이다.
저서로는 얼만(J.Ullman)의 도움으로 발간한 자서전 'Man Of Everest' (1955)와 'After Everest' (1982), 'Tenzing Norgay-Hero Of Everest: Ed Douglas' (2003)가 있다.
국내 역서로는 <텐징 노르가이>(강대은 번역)가 있다.


출처 : 산으로 가는 길
글쓴이 : 칠덕 대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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