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중국 역사기행 2일차 환인 홀승골성, 집안 광개토 태왕비, 장수왕릉, 국내성 이미지

2018. 2. 22. 02:10우리 역사 바로알기

2일차 환인 홀승골성(오녀산성), 집안 광개토호태왕비, 광개토호태왕릉, 장수왕릉, 국내성 이미지

 홀승골성(오녀산성)내림계단

 

광개토호태왕비

 광개토호태왕비는 광개토호대왕의 아들인 장수왕에 의해 414년 세워졌다. 4세기경의 역사를 담은 금석문으로는 그 내용과 역사, 문화적 가치가 당대 최고이다. 화강암으로 높이 약 6.39m, 면의 너비는 1.5 m로서 3층 건물의 높이와 맘먹는다. 네 면에 걸쳐 1,775자가 당시 시대의 고구려서체 새겨져 있다. 내용은 대체로 고구려의 역사와 광개토대왕의 업적 그리고 능.묘의 건립과 능지기에 관해 기록되어 있다. 광개토대왕비문:“고구려를 세운 것은 추모왕이요 그의 아버지는 하늘이고 어머니는 물의 신이다.” 고구려 개국의 이야기로부터 대왕의 치적을 기록한 당대 최고의 금석문이다.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고 대왕의 호칭이 기록되어 있다. “나라를 강건하게 만드셨고 땅을 넓히셨으며 백성을 평안하게 해주신 좋은 임금님”이라는 뜻이다. 신묘년(396년)조 기사논란 "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爲臣民" <신묘년 이래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잔을 치고 신(?)라를 공략하여 신민으로 삼았다.> 임나일본부설의 타당화를 주장하게 된다. 역사학자 정인보는 위 기사의 주어를 "倭"가 아닌 '고구려'로 보고, "신묘년 이래 왜가 도래하자 바다를 건너 백잔을 치고 신라를 구원하여 신민으로 삼았다."로 해석한다. 장수왕이 아버지인 광개토대왕의 치적을 기록하면서 왜국의 정벌기사를 기록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이어 이형구에 의해 '倭'라는 글자는 '後'를 조작했고 '來渡海破'라는 글자는 '不貢因破'를 조작한 것으로 보고 "신묘년 이래 (백제와 신라가) 조공을 하지 않으므로 백잔과 신라를 치고 신민으로 삼았다."라고 해석했다. 또한 백제를 일컬어 百殘이라 호칭할 수 있는 당대의 세력은 고구려밖에 없다.

 광개토 호태왕비


 

광개토호태왕비

 

광개토호태왕비


 

광개토호태왕비 입구도로

 

광개토호태왕릉

광개토호태왕릉은 중국령 내 고구려 무덤 중 유일하게 피장자의 이름을 붙인 고분이다. 고분의 정상부근에서 발견된 명문전에 '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원컨대 태왕릉이 산악처럼 안정되고 견고하기를 바란다)라는 문장이 나왔고 고분으로부터 떨어진 곳에서 명문전(銘文塼)이 발견되었는데 천추만세영고(千秋萬歲永固)’,‘(보고)건곤상필(保固)(乾坤相畢)’,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무덤 기단의 한 변은 약 63m, 너비 약 1.75m, 한 변마다 높이 6m가량의 대형 호석 5개가 받치고 있다. 분구 정상부 매장부는 굴식 돌방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돌방의 방향은 서향이며 널길[羨道]은 널방[玄室]서벽 한가운데에서 시작된다. 널방의 천장부는 3단의 평행굄으로 짜여 져 있다. 천장은 지름 4.55m, 두께 0.8m의 대형 화강암 판석으로 덮여 있다. 널방의 동서길이는 2.82m, 남북너비는 3.16m이며 지면에서 분구 정상부까지의 높이는 16m 정도이다.


 광개토호태왕릉

 

광개토호태왕릉


 

광개토호태왕릉 이미지

 

장수왕릉

집안시를 둘러싸고 있는 산이 우산(禹山)인데 우산을 중심으로 펼쳐져 있는 고분떼를 우산하 고분이라 한다. 무덤은 화강암으로 붉은색을 약간 띤다. 무덤 중심부의 높이는11.28m, 밑변 한변의 길이는 29.34m, 밑면적860㎡로 알려져 있다. 1,100여 개의 장대석으로 외형을 축조한 후 내부는 강돌로 채웠다. 무덤의 기초부는 지면을 깊이 5m가량 파내고 자연석을 다져넣고 그 위에 큰 돌을 깔았다. 제1층 기단부의 바깥으로 4m가량 나오게 하여 무덤돌이 내리누르는 힘에 견딜 수 있게 했다. 이중 제1단에 쓰인 장대석 중 큰 것은 길이 5.7m, 너비 1.12m, 두께 1.10m에 이른다. 북면의 1개는 깨어져 없어지고 현재는 11개만 남아 있다. 사방에 4개씩 12개를 받쳐놓았다. 무덤정상부의 석재 표면에는 21개의 둥근 구멍이 뚫려 있는 것으로 보아 향당(香堂)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장수왕릉

장수왕릉

장수왕릉

 

장수왕릉 옆 고분

 

고구려의 두번째수도였던 국내성

 국내성은 평양천도 이전까지 약 400년간 고구려의 도성이었다. 중국 지린성 지안현[輯安縣]에 있다. 동남쪽을 흐르는 통구하의 이름을 붙여 통구성(通溝城)이라고도 한다. 성의 둘레는 2,686m 높이 약 6m에 이른다. 427년(장수왕 15) 평양으로 천도한 뒤에도 고구려 3경(三京)의 하나로 정치적·군사적 중심지였으나 666년(보장왕 25) 국 연개소문의 장남 연남생이 당나라로 투항해버린 이후 고구려의 영역에서 떨어져나가게 되었다. 장방형의 석축성으로 하단은 퇴물림방식의 고구려의 전형적인 축조법을 쓰고 있다. 일정한 간격으로 치(雉)를 설치했으며 성벽 위에는 여장(女墻)이 있다. 6곳의 성문과 4모서리에는 각루(角樓)가 있었던 터가 있다. 동남편으로는 압록강이 흐르고 남서로는 통구하가 흘러 자연 해자의 역할을 하고 있고 북서로는 노령산맥이 병풍처럼 국내성을 에워싸 천혜의 고도였음을 알 수 있다.

집안 고구려 도읍이었던 국내성의 잔존 성벽

 

고구려의 첫 도읍지였던 홀승골성(중국은 오녀산성 이라 부른다.)

 졸본부여의 왕녀 소서노와 고주몽이 함께 일으킨 고구려가 이곳에 있었다. 비록 왕성은 찾아 볼 수 없지만 피난성이었던 홀승골성이 강건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광개토대왕비의 비문에 이르기를 <모왕이 비류곡 홀본(忽本)의 서쪽 산 위에 성을 쌓고 도읍으로 삼았다>고 했는데 홀본의 서쪽에 쌓은 성이 바로 오녀산성으로 추정된다. 820m에 이르는 오녀산을 중심으로 남쪽의 절벽을 제외하고 동, 서, 북면을 돌로 쌓았다. 산정에는 보기와는 다르게 길이 1,000m, 넓이 300m에 달하는 평지가 있다. 천지로 명명된 0.9m 깊이의 연못과 샘물이 있어 장기간의 농성도 가능한 천혜의 요새이다. 동편의 성은 약 1.8m의 성벽으로 이루어져 있고 돌은 40cm~50cm의 장방형이 많다. 기단부에는 2m에 가까운 석재를 사용한 곳도 있다. 돌과 돌 사이의 틈새에는 작은 쐐기돌을 박아 넣어 성 돌이 어그러지는 것을 방지했다. 성벽의 높이는 바깥쪽이 4~6m, 안쪽은 1~2m 정도이다. 서쪽의 절벽 부분은 기암절벽으로 별도의 방어시설은 설치하지 않았다. 환인의 심장부를 태극모양으로 굽이쳐 흐르는 비류수가의 고력묘자촌(高力墓子村;高力은 고구려를 지칭)에는 수백 기에 이르는 고구려 돌무지무덤[積石塚(적석총)]이 있었으나 1970년대 초 중국의 다분히 의도적인 댐 건설로 인하여 수몰되어 물이 빠졌을 경우 겨우 몇 기만이 모습을 드러내곤 한다.


오녀산성에 있는 고구려비




오녀산성 성문

 
















출처 : 북한산탐방산악회
글쓴이 : 안재성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