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광개토호태왕

2018. 2. 21. 19:58우리 역사 바로알기

광개토호태왕

 

■ 태왕릉은 국내성에서 동쪽으로 4km쯤 떨어진 곳에 있다. 태왕로 건너 압록강까지는 약 2km이다. 들어가는 문은 북쪽으로 나있다. 그 북쪽 마당을 두고 서로 바라보며 태왕조선족 소학교가 있다. 중국 당국이 왕릉 주변의 집들을 태왕신촌을 만들어 이주시키고 정비하였다.

 

 

 

이 능에서 “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이란 문자전돌[銘文塼]이 발견되어 태왕릉이라 부르게 되었다.

 

거대한 석재로 정사각형의 기단을 7층으로 쌓고 정상부는 깬돌과 자갈을 섞어 채워 덮었다. 한변이 66m인 정방형 계단식 돌무지무덤이며 현제 집안 지역에서 확인된 무덤 중 규모가 가장 크다. 현재 높이는 14.8m이다. 기단 4면에는 각 면마다 커다란 돌덩어리 5개를 경사지게 계단에 기대놓았는데, 이것은 장수왕과 같다. 원래 20개가 있어야 하는데 현재 13개가 남아있다. 높이는 3~5m, 너비 2~3m, 두께는 약 1m쯤 된다. 돌 한개의 무게는 약 10톤 이상으로 보인다. 기단 상단에 자갈을 채워넣었기 때문에 그 압력으로 무덤이 무너지는 것을 막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고, 역학적인 것과는 관계없이 무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기단을 쌓아 올리는 방법은 장수왕릉과 마찬가지로 잘 다듬은 긴 네모꼴 돌덩어리를 겹쳐 쌓아올렸다. 층마다 조금씩 안쪽으로 들여쌓았으며, 홈을 파서 돌덩어리가 바깥쪽으로 밀려나오는 것을 방지했고 계단 안은 자갈로 메웠다.

현재 기단석은 무너지고 무덤 안에 쌓아 넣었던 강돌과 산돌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1990년 조사에서 무덤 꼭대기 층(7층)에 널길[연도]이 딸린 대규모 횡혈실석실이 발견되었다. 석실은 매끈하게 다듬은 석재로 쌓았는데, 동서 2.8m, 남북 3.2m이며 연도가 붙어있다. 천장석의 동서 길이는 4.5m, 두께는 0.8m이다. 천장석 꼭대기에서 지반까지 약 17m이다. 석실에는 석곽이 들어있는데, 평면은 정사각형에 가까우며 천정은 맞배지붕 형태이다. 석곽 안에는 거석의 관상 2개가 나란히 있다.

 

무덤 위 돌무더기에서 “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이란 문자전돌[銘文塼]이 발견되었다. 또 기와 조각과 벽돌 조각이 널려있다. 수막새는 6개의 꽃모양이 양각되어 있는데 꽃망울 위에 Y자 무늬가 있는 것이 있다. 색깔은 회색인데 무덤에 쓰는 것은 회색, 궁정이나 절의 기와는 빨간색이라 한다.

 

무덤 남쪽에서 “辛卯年好太王□造鈴九十六”이라 새겨진 동제 탁령 출토되었다.

능 남쪽 변 중앙 기단에서 3m 남쪽에 배장묘로 보이는 유구가 발견되었다. 네 벽과 床面, 床石은 판석으로 조립되었다. 이곳에서 금동관식, 금동허리띠와 함께 동물뼈가 출토되었다. 2장의 벽돌도 출토되었는데, ‘未豆’로 읽을 수 있는 명문이 있다. ‘未’는 ‘朱’로도 읽을 수 있다고 한다.

 

 

 

 

■ 광개토호태왕비는 태왕릉에서 동북쪽으로 200m 떨어진 곳에 있다.

호태왕이 돌아간 지 2년째 되는 414년 즉 장수왕 2년에 세웠다. 비는 회흑석 응회암으로 만들었다. 중국에서는 각력응회암(角礫凝灰巖)이라고 발표했다. 자갈이 중간중간 박혀있는 응회암이다. 응회암은 그 부근 몇 군데 분포되어 있는데, 가장 비슷한 성격의 석재는 주몽이 최초로 나라를 세운 환인의 오녀산성 하단부에 있다. 이 비만큼 큰 덩어리의 암석을 채취할 수 있는 곳은 여기뿐이라 한다. 현지에는 백두산 천지에 있던 降龍石이라는 전설이 있다. 혹시 백두산에 있던 현무암이 화산으로 인하여 화산암이 되어 여기까지 온 것인지도 모른다. 자연석은 신성한 힘, 위대함을 상징한다.

 

전체 높이는 6m 39cm, 폭은 1m쯤 되고, 무게는 37톤이다. 대석과 비신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석은 20cm 두께의 화강암을 사각형으로 다듬었다. 길이 3.35m, 너비 2.7m로 3면을 빼고는 많이 깨어져 나갔다.

비신은 사각 기둥 모양인데 어느 정도 다듬은 부분도 있으나 거의 원래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이처럼 자연석의 몸과 머리 부분만 약간 손질하고 거칠고 투박한 네 면에 글자를 쓴 소위 四面環刻碑는 잘 다듬어 글을 새기는 중국의 비석 제작 방법과는 전혀 다른 고구려 고유의 고구려식 비석이다. 이것은 선돌에서 변화된 우리 고유의 형식으로 거석문화의 유풍이다.

 

비신 표면에 바둑판처럼 선을 반듯하게 그은 뒤 한 글자의 크기는 14~15cm, 깊이는 5mm 정도로 모두 1,775자를 새겼다. 알아볼 수 없는 글자가 141자이다. 당시 중국에서 유행하던 해서체를 따르지 않고 고풍스러우면서도 힘이 넘치는 예서체를 사용했다. 독자적 기준에 따라 서체를 선택한 것이다. 고구려 고유의 별체자, 약자도 사용하였다.

문장 구조가 논리적이어서 당시 학문이 상당한 수준임을 알 수 있다.

 

비문에는

① 건국신화,

② 대왕의 정복사업,

③ 묘 관리 제도 등이 기록되어 있다.

비문 전체가 조상과 후손 간의 혈통을 축으로 하는 구성으로 천하의 통치가 왕통을 계승하는 후손에게 한정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천제의 질서로 통어되는 천하이므로 천손들이 통치해야 한다는 정통성을 말하고 있다. 천제의 질서로 통치되는 천하에서 천제의 아들이 건국하고, 그 후손들이 통치하는 고구려가 그 천하의 중심에 위치한다는 것이다.

 

① 고구려 왕실의 역사를 요약했다. 해와 달의 아들이자 물의 신 화백의 외손인 주몽이 북부여에서 내려와 고구려를 건국했다. 제2대 유류왕, 제3대 대주류왕(대무신왕)을 이어 제19대 광개토호태왕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호태왕이 백성을 윤택하게 하고 많은 업적을 쌓았지만 아깝게도 39세의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다.

② 즉위 후 수행한 정복활동의 내용과 성과를 연대순으로 구체적으로 나열했다. 왕은 영락5년(395) 시라무렌강 유역에 거주하는 거란족 일파를 정복하고 포로와 노획물을 획득해 왔다. 그 다음해에는 백제를 공격해 한강 이북에 있던 58성 700촌을 빼앗았다. 또 영락8년(398)에는 이전에 이미 고구려에 예속되어 조공을 바쳐오던 동 만주의 숙신 지역에 소규모의 군대를 파견하여 지배권을 다잡았다. 영락 10년(400) 신라의 원군 요청을 받아들여 보기 5만의 군대를 파견하여 신라 영토 안에 들어와 있던 왜 세력을 내쫓고 가야 지역까지 추격전을 벌여 물리침으로써 백제-가야-왜 동맹군의 기세를 꺾어놓았다. 14년에는 황해로 쳐들어온 왜를 쳤다. 그리고 20년(410)에는 동부여성을 쳐 속민으로서의 의무를 소홀히 한 점을 응징하고 조공관계를 재강화했다.

③ 호태왕을 비롯한 역대 왕들의 능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한 수묘제를 개혁했다는 내용과 그에 관계되는 법령, 묘지기의 전체 인원과 그들의 출신지, 묘지기의 구성 방식 등에 대해 상세하게 적는 것으로 마무리 하였다.

 

 

다음은 다케다 유키오가 비문을 해석한 글이다. 권오엽, <광개토왕비문의 세계>, 제이엔씨, 2007. 45~49쪽.

 

생각건대, 옛적에 시조 鄒牟王이 나라를 創起하셨도다. 북부여에서 시작하였다. 천제의 아들로서 그 어머니는 하백의 딸이다. 알을 깨고 세상에 내려와 태어나면서부터 신성함을 가지고, □□□□, □□수레를 명하여, 순행하여 남하하셨다. 길은 부여의 엄리대수에 이르렀다. 왕이 나루에 임하여 말씀하시기를 “나는 바로 皇天의 아들로 어머니는 하백의 딸인 추모왕이니, 나를 위하여 갈대를 엮고 거북이를 띄워라”고 말씀하셨다. 그 소리에 응하여 즉시 그렇게 하여 갈대를 엮고, 거북이를 띄우고 그런 후에 건너게 하였다. 비류곡의 忽本 서쪽에 있는 산상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웠다. 왕위를 즐겨하지 않았다. 하늘이 황룡을 보내 내려와서 왕을 맞이하게 하였다. 왕은 홀본의 동강에서 용의 머리를 밟고 하늘에 올라 세자 유류왕에게 고명하여, 도로써 흥치하게 하였다. 대주류왕은 기업을 紹承하여 17세손인 國江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에 이르렀다. 18세에 등조하고 호를 永樂大王이라 한다. 은택은 황천과 같고 무위는 떨쳐 사해를 덮었다. □□를 掃除하여, 기업으로 庶寧하여, 나라는 부유하고 민은 성하여 오곡이 풍숙하였다. 호천은 불쌍히 여기지 않았다. 39세에 돌아가시어 나라를 버렸다. 갑인년 9월 29일 을유에 산릉으로 遷就하였다. 여기에 이르러 비를 세우고 勳績을 명시하여 그것으로 후세에 알린다. 그 辭에 말하기를,

영락 5년 세가 을미에 있을 때 왕은 비려의 □인을 □하지 않는 것을 가지고, 친히 이끌고 往討하였다. 부산 ․ 水+貝산을 지나 염수 근처에 이르러 그 3개 부락과 6, 7백 營을 평정했다. 소와 말, 群羊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여기서 수레를 돌려 양평을 지나 동래 ․ 후성 ․ 역성 북풍오비해를 지나 토경을 유관하고 전렵하여 돌아왔다.

百殘과 신라는 원래부터 속민이었는데, 아직 조공하지 않고, 倭는 신묘년부터 건너오기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왕은 백잔과 왜를 공파하고, 신라는 복속시켜 신민으로 삼았다. 그리고 6년인 병신, 왕이 친히 □군을 이끌고 잔국을 토벌했다. 군은 □의 남쪽에 □하여, 영팔성 ․ 구모려성 ․ 각모려성 ․ 간저리성 ․ □□성 ․ 관미성 ․ 모려성 ․ 미사성 ․ □사조성 ․ 아단성 ․ 고리성 ․ □리성 ․ 잡진성 ․ 오리성 ․ 구모성 ․ 고스야라성 ․ 막□□□□성 ․ □이야라성 ․ 전성 ․ 어리성 ․ 농매성 ․ 두노성 ․ 비□□성 ․ 미추성 ․ 야리성 ․ 태산한성 ․ 소가성 ․ 돈발성 ․ □□□성 ․ 누매성 ․ 산나성 ․ 나단성 ․ 세성 ․ 모루성 ․ 우루성 ․ 소희성 ․ 연루성 ․ 석지이성 ․ 암문□성 ․ 미성 ․ □□□□□□□리성 ․ 취추성 ․ □발성 ․ 고모루성 ․ 윤노성 ․ 관노성 ․ 삼양성 ․ □□성 ․ 유□로성 ․ 구천성 ․ □□□□을 공격하여 빼앗고 그 국성을 □하였다. 잔은 이에 복종하지 않고 감히 나와서 백전하였다. 왕이 대단히 혁노하여, 아리수를 건너 파견하여 성을 치며 공격하였다. □□혈을 치고 바로 성을 포위하였다. 그러자 잔주가 곤핍하여 남녀 포로 일천 명, 세포 천필을 바치고 왕에게 꿇어앉아 스스로 “이제부터 이후에는 영원히 奴客이 되겠습니다”라고 맹세했다. 태왕의 은으로 先迷의 잘못을 용서하고 그후의 순하는 정성을 기록하였다. 이리하여 58성과 7백 개의 마을을 얻고 잔주의 동생 및 대신 10명을 데리고 군사를 되돌려 환도하였다.

8년 무술, 교하여 편사를 보내 숙신토곡을 보게 하였다. 그리고 바로 막□라성 ․ 가태라곡의 남녀 3백 명을 사로잡았다. 이 일 이후에 조공하고 논사하였다.

9년 기해에 백잔이 맹세를 어기고 왜와 화통하였다. 왕이 평양으로 순화하였다. 바로 신라가 사신을 보내 왕에게 아뢰어 말하기를, “왜인은 그 국경에 가득 차 성지를 파괴한다. 노객은 민이 되어 왕에게 귀하여 명령을 청합니다.”라 하였다. 태왕 은 은자로 그 충성을 칭찬하였다. □에 사신을 보내 돌아가서 알리게 하기를, □계를 가지고 하였다.

10년 경자, 교하여 步騎 5만 명을 보내, 가서 신라를 구하게 하였다. 남거성에서 신라성에 이르기까지 왜는 그 안에 가득 찼다. 관군이 도착하려 하니 왜적이 퇴□하였다. 뒤를 쫓아가 급히 공격하여, 임나가라의 종발성에 도착하자마자, 성은 바로 귀복하였다.

라인의 술병을 두어 신라성 ․ □성을 □하였다. 왜가 □하고, 왜가 무너졌다. 성은 크게 □□, 더욱이 □□, 라인의 수병을 두었다. 만□□□□기□□□□□□□언□□□□□□□□□□□□□□□□□□□□□□□□□사□□□□□□□□□□□□□궤□□□□라인의 수병을 두다.

옛날 신라의 寐錦이 몸소 와서 논사한 적이 없었다.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매금□□□구□□□□조공하였다.

14년인 갑진에, 이른바 왜는 不軌하게도 대방의 계에 침입하여, □□□□□석성□연선□□□하였다. 왕이 친히 이끌고 □□하여, 평야에서 □□□봉, 서로 왕당에서 만나, 요절하여 盪刺하였다. 왜구는 궤패하여, 참살당한 자가 무수였다.

17년의 정미, 교하여 보기 5만을 파견하여, □□□□□□□□□사, □□합전하여, 참살하여 탕자하였다. 노획한 투구와 갑옷은 1만여 벌, 군자 ․ 기계는 셀 수 없었다. 돌아오면서 사구성 ․ 투성 ․ □주성 ․ □□□□□□나□성을 쳐 부셨다.

20년 경술, 동부여는 이는 옛적부터 추모왕의 속민이었는데, 도중에 배신하여 조공을 바치지 않았다. 왕이 친히 이끌고 왕토하였다. 군사가 여성에 이르렀다. 그러자 여성의 나라, 놀라서 □□□□□□□□□, 왕의 은혜가 널리 덮었다. 여기서 시환하였다. 또 그것을 모화하여 관을 따라서 온 자는 마루구압로 ․ 비시마압로 ․ 서사루압로 ․ 숙사사압로 ․ □□□압로였다.

무릇 공파한 성이 64성이고, 촌락이 1천 4백이었다.

守墓人의 연호, 매구여의 민은 國烟이 2, 看烟이 3. 동해의 買는 국연이 3, 간연이 5, 돈성의 민은 4가를 모두 간연으로 삼았다. 간성은 1가를 간연으로 하였다. 비리성은 2가로 국연을 삼았다. 평양성의 민은 국연이 1, 간연이 10, 시련은 2가로 간영으로 하였다. 배루의 민은 국연이 1, 간연이 33, 양곡은 2가가 간연이 되었다. 양성은 2가를 간연으로 하였다. 안부련은 22를 간연으로 하였다. □곡은 3가를 간연으로 하였다. 신성은 3가를 간연으로 하였다. 남소성은 1가를 국연으로 하였다. 신래의 한과 예, 사수성은 국연이 1, 간연이 1, 모루성은 2가를 간연으로 하였다. 두비압령의 한은 5가를 간연으로 하였다. 구모객두는 2가를 간연으로 하였다. 구저의 한은 1가를 간연으로 하였다. 사조성의 한과 예는 국연이 3, 간연이 21. 고수라야성은 1가를 간연으로 하였다. 경고성은 국연이 1, 간연이 3. 객현의 한은 1가를 간연으로 하였다. 아단성과 집진성은 10가를 합하여 간연으로 하였다. 파노성의 한은 9가를 간연으로 하였다. 구모로성은 4가를 간연으로 하였다. 각모로성은 2가를 간연으로 하였다. 모수성은 3가를 간연으로 하였다. 한씨리성은 국연이 1, 간연이 3. 미추성은 국연이 1. 간연이 7. 야리성은 3가를 간연으로 하였다. 두노성은 국연이 1, 간연이 2. 오리성은 국연이 2, 간연이 8. 수추성은 국연이 2, 간연이 5. 백잔의 남에 있는 한은 국연이 1, 간연이 5. 태산한성은 6가를 간연으로 하였다. 농매성은 국연이 1, 간연이 7. 윤노성은 국연이 2, 간연이 22. 고모루성은 국연이 2, 간연이 8. 전성은 국연이 1, 간연이 8. 미성은 6가를 간연으로 하였다. 취자성은 5가를 간언으로 하였다. 삼양성은 24가를 간연으로 하였다. 산나성은 1가를 국연으로 하였다. 나단성은 1가를 간연으로 하였다. 구모성은 1가를 간연으로 하였다. 어리성은 8가를 간연으로 하였다. 비리성은 3가를 간연으로 하였다. 세성은 3가를 간연으로 하였다.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이 생존해 계실 때, 고하여 말씀하시기를 “조왕 ․ 선왕, 단지 교하여 원 ․ 근의 구민을 취하여 묘를 지키고 쇄소시킬 뿐, 나는 구민이 변하여 그야말로 嬴劣해지려는 것을 염려한다. 만일 내가 만년 후에도 수묘자를 안전하게 확보하기 위해서는 그저 내가 몸소 돌아 약래한 한과 예를 취하여 쇄소에 대비히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교하여 말하길, 이와 같았다. 이를 가지고, 교처럼 한과 예의 220가를 취하게 하였다. 그 법을 알지 못하는 것을 고려하여 다시 구민 110가를 취하였다. 신 ․ 구의 수묘호를 합하면 국연이 30, 간연이 300으로 도합 330가이다. 상조 ․ 선왕부터 이래 묘상에 비석을 세우지 아니하여 수묘인 연호로 하여금 차착하기에 이르렀다. 오직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만이 모든 조 ․ 선왕을 위하여 묘상에 비를 세우고 그 연호를 기록하여 차착하지 않게 하였다. 또 만들어 “수묘인은 지금 이후로 서로 전매하지 못한다. 부가 족산 자가 있다해도 역시 멋대로 사는 것을 못한다. 그래서 법을 어기고 파는 자가 있으면 이를 형한다. 사는 자에게는 제령으로 묘를 지키게 한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호태왕 대 기사가 실제보다 1년씩 늦게 서술되어 있다. 왕들은 천손의식으로 중국과는 다른 독자적인 천하관을 가지고 있었다. 고구려 왕은 그저 왕이 아니고 태왕, 호성태왕이다.

4C 초 중국 세력을 몰아내고 초월적 군주가 된다. 왕중왕이란 뜻의 태왕이란 칭호가 붙는다. 4C말~5C초 북부여 중심의 건국신화가 확립된다.

 

① 광개토호태왕비는 태왕이 돌아간 지 2년째 되는 414년 즉 장수왕 2년에 세웠다. 그뒤 완벽한 묘지기 제도 아래에서 잘 보전되었다. 668년 고구려가 멸망하고 당나라는 고구려 옛 땅에 안동도호부를 두고 당나라 군사들을 주둔하게 하였다. 발해가 건국될 때까지 30년 동안 당나라 군대의 탈취와 파괴가 있었을 것이다. 광개토호태왕 능과 비석도 이때 일부 파손되고 폐허에 묻혔을 것이다.

한족과 싸워 이긴 우리 민족의 영웅치고 능비와 사적이 남은 것이 없다. 姜以式, 乙支文德, 淵蓋蘇文 등의 비문이나 유적이 단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② 발해 때에는 국가적으로 보호하였다. 926년 발해가 멸망하고 그 땅은 거란(요), 여진(금), 몽골(원) 족이 차례로 차지하였다. 1125년 요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집안이 고구려 옛 서울이라는 것이 알려져 있었으나 금 ․ 원나라에서는 완전히 잊혀져 중국이나 우리나라 문헌에서도 모두 사라지고 만다. 발해 멸망 후 역사의 무대가 한반도로 국한됨에 따라 기억이 사라진 것이다.

 

③ 1370년 당시 고려의 장군 이성계가 명나라에 망한 원나라의 잔존세력이었던 北元의 東寧府를 치러갈 때 집안을 통과한다. 이성계는 공민왕 8년(1369) 동북면 원수로 임명되어 동녕부를 공격해 이듬해 정월 압록강을 건너 당시 원의 거점이던 于羅山城을 점거한다. <용비어천가>에 평안도 강계부 서쪽으로 강 건너 140리의 들에 옛 성이 있는데 금나라 황제의 성이라 불린다 했다. 거기서 7리쯤 되는 곳에 돌로 된 비가 우뚝하다고 하였다.[大金皇帝城 城北七里有碑] 이처럼 조선은 비의 정확한 실체를 모르고 집안 일대가 옛 금나라 영역이라는 것만 알고 고구려 왕성인 국내성과 그 근처에 있던 비를 금나라 황제의 것으로 알고 있었다.

 

④ <고려사>에서는 이곳을 皇城이라 했고 <조선왕조실록>은 이 황성을 “여진(금) 황제의 성”이라 설명하고 있다.

 

⑤ 성종 18년(1487) 평양감사 成俔이 압록강 가를 시찰하다가 집안에서 이 비를 발견하고 지은 “望皇城郊”란 시에서 집안은 황성, 태왕릉은 皇帝陵, 태왕비는 千尺費라 하고 글자를 읽을 수 없다고 해 성현도 그 비가 누구의 비인지 몰랐다. ‘至今猶謂皇城畿’라 한 것으로 보아 예부터 현지에서는 계속 황성이라 전해 내려왔음을 알 수 있다.

 

⑥ 중종 25년(1530)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는 집안 皇城坪은 金國所都, 태왕릉은 皇帝墓, 金皇帝墓라 하고 태왕비는 龍石이 있는데 十丈은 된다고 했다.

 

⑦ 중종 31년(1536) 집안 주변에 몰래 살고 있던 여진족에게 압록강에서 퇴거하라고 타이른 沈彦光(관서 警邊使의 임무를 띠고 평안도 강계, 만포진 일대를 시찰하던 공조판서)이 강 너머로 보이는 능비를 발견하고 읊은 시가 <지봉유설>에 전한다. 그도 금의 황제비로 알고 있었다. 그는 집안은 황성, 태왕비를 ‘皇帝遺蹟巨碣’이라 읊었다.

 

⑧ 조선시대 만들어진 지도에는 집안은 皇坪, 광개토호태왕릉과 비는 皇帝陵이라 되어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국내성은 五國城이라 했는데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다.

 

⑨ 인조 15년(1637) 청나라가 명나라 장수 모문룡의 게릴라 활동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封禁制를 실시할 때 집안도 그 지역에 포함되었다. 이곳은 출입금지 구역이므로 이때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곳에 가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조선 후기 실학의 발달로 왕성한 연구열을 가졌던 학자들도 광개토호태왕비에 대한 새로운 연구와 인식을 가질 수 없었다.

고종 13년(1876) 봉금이 풀린다. 이때부터 공식적으로 회인현이 설치되고 개간이 시작되었지만 그 이전에 이미 청나라 통치 능력이 약화된 틈을 타서 몰래 들어가 살고있던 우리나라 농민들이 많았을 것이다. 1875년 조선족들이 동북지방에서 최초로 벼농사를 시작한 것이다.

 

1880년 전후한 시기에 광개토호태왕비가 재발견 것으로 본다. 비가 서있는 이 일대는 통구라 불리게 되었다. 1880년 개간을 하던 농부가 이 비를 발견하고 관청에 보고한다. 보고를 받은 현의 지사가 금석문에 밝은 關月山을 보내 조사하게 하였다. 관월산은 비에 덮힌 이끼와 넝쿨을 태우고 탁본을 하여 금석 애호가들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이 비가 관심을 끌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때의 탁본은 비교적 쉽게 읽을 수 있는 부분만 했을 것으로 본다.

비문 전체가 탁본된 것은 1882년이다. 이 탁본은 1883년 일본으로 들어간다. 이때부터 일본 육군 참모본부에 의해 약 5

년 동안 집중적으로 연구된다. 명치 22년(1889) 5월 그 내용이 <會餘錄>에 발표된다.

  

※ 광개토대왕의 영토확장

제19대 광개토호태왕 談德(391~413 재위)은 17세에 큰아버지인 소수림왕(371~384 재위)과 아버지 고국양왕이 나라의 기초를 닦은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그는 왕위에 오른 뒤 永樂이란 독자적 연호 사용한다. 이제 고구려는 큰 제국이니 구차하게 중국의 연호를 쓰지 않고 독자적인 연호를 쓰겠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로 연호를 쓴 왕이었고, 살아서도 영락대왕이란 칭호로 불렸다.

 

그는 두 방면으로 정복전쟁을 벌였다. 압록강 북쪽지역을 부챗살 모양으로 펴서 정복해나갔고, 남쪽의 좁은 지역은 수군으로 바다를 통해 공격하였다.

 

즉위 5년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서북쪽 유목민 碑麗族(거란의 일파)와 염수가에서 전투를 벌인다. 염수는 동몽골 초원지대 서북쪽 1000km 사라무렌강(내몽골) 상류 염전이다. 비려족은 끊임없이 고구려의 변경을 침략하였다. 이곳에 營子(고구려 마을)와 高麗河가 있다. 영락대왕은 거란의 내지로 깊숙이 쳐들어가 3개 부락을 휩쓸어 많은 소, 말, 양을 노획하였다. 거란족 500명을 포로로 잡아오고 또 잡혀갔던 주민 1만 명을 되찾아왔다. 이 정벌로 거란족은 멀리 달아나 고구려 침입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그쪽 방면에 살던 다른 부족들도 영락대왕의 위세에 한동안 잠잠했다.

이어 肅愼 정벌에 나섰다. 숙신은 읍루, 물길, 말갈로 불리며 민주의 동쪽과 러시아 접경지대에 살고 있던 동북아시아 종족의 하나였다. 초기에는 백두산 북쪽에 살면서 고구려에 맞섰고 바로 전 시기에는 백제와 신라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이들은 때로 고구려에 복속하기도 하고 무역을 트기도 하였으나 기회가 주어지면 침략을 일삼았다.

 

영락대왕은 398년 군대를 파견하여 주민 300명을 잡아왔다. 숙신은 더이상 고구려에 버틸 힘이 없어 조공을 바치며 우호를 보였다. 그후 신라와 백제에도 침입하지 않고 고구려의 지시에 따랐다. 약 50년 뒤 다시 침입을 시도했으나 거의 미미한 존재로 고구려에 흡수 통합되었고, 고구려의 후예인 발해가 건국할 때 발해의 지시를 받아 하부 구성원이 되었다.

410년 영락대왕은 동부여 정벌에 나섰다. 동부여는 북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부여족의 나라이다. 한때는 고구려와 맞서는 나라였으나 늘 힘에 밀렸다. 동부여의 귀족들은 걸핏하면 고구려로 망명하였는데, 동부여는 뻔히 보면서도 힘이 부쳐 어떻게 해 보지 못했다. 동부여는 조공을 바치다가 중단하다가 하면서 늘 틈을 노리고 있었다.

 

영락대왕은 여성 땅에 가서 큰 승리를 거두었는데, 격파한 성이 64개, 촌락이 1400개였다. 이 정벌로 동부여는 죽정이만 남았으나 이름은 한동안 유지하였다.

 

요동지방에 있는 후연도 공격하였다. 후연에 대한 공격은 백제의 경우처럼 여러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영락대왕은 남쪽 백제를 공격하면서 후연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치기도 하였다. 이때 고구려의 사신은 조공을 비치러 간 처지이면서도 영락대왕의 자신에 찬 당당한 글을 올리고 행동도 뻣뻣했던 듯하다.

 

후연의 왕 慕容盛은 영락대왕이 거만하다고 하여 군사 3만을 이끌고 고구려의 전방 방위선인 新城과 南蘇城을 쳐 700여 리의 땅을 차지하였다. 그리고 후연의 주민 5천여 호를 농업이민으로 옮겨놓고 물러났다.

고구려는 계속 이곳을 공격하여 회복하였고, 이어 요동성을 굳건히 지켰다. 모용성의 뒤를 이은 慕容熙는 계속 요동지방을 공격하였으나 한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고구려는 407년 요하의 동쪽을 확실하게 확보하였다.

압록강 북쪽에서 4차례 큰 작전으로 고구려의 영토는 서쪽으로는 요하의 동쪽지방 곧 지금의 요동반도를 완전히 차지하였고, 서북쪽으로는 심양을 넘어 지금의 시라무렌강까지 차지하여 몽골땅을 바라보았다. 북쪽으로는 송화강 언저리의 넓은 평야를 차지하고 하르빈 지역과 맞대고 있었으며 동북쪽으로는 훈춘을 넘어 두만강 입구와 지금의 블라디보스토크 아래 지역을 확보하였다. 영락대왕은 우리나라 역사에 한번도 없었던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그의 뜻은 고스란히 아들 장수왕에게 이어졌다.

 

영락대왕은 북쪽으로 영토를 확장하면서 한편으로 배후를 공격하는 후방의 적도 막아야 했다. 또 고구려는 산악지대를 중심으로 영역을 확보한 탓으로 한강을 중심으로 한 들판을 차지하여 농업생산력을 키울 필요성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백제도 고구려의 남진정책에 위협을 느끼고 철저히 대비하였다. 강력한 고대 국가로 성장한 백제는 신라 정복에 나섰고 그 힘을 바탕으로 고구려에 선제공격을 해 타격을 입히기도 하였다. 제16대 진사왕(385~392 재위) 2년(385) 백제는 국내의 열다섯 살 이상의 장정을 징발하여 육지로는 북쪽지대와 바다로는 서쪽 일대에 방어초소나 목책을 두르는 등 關防을 설치하여 지키게 하는 등 총력체제에 들어갔다.

 

영락대왕은 즉위하던 해 두 차례 백제를 공격한다. 4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백제 북쪽 석현 등을 공격하였다. 백제의 진사왕은 영락대왕의 불패의 용병술을 듣고는 겁이 나 나가 싸울 엄두를 내지 못했다. 영락대왕은 열 개의 성을 함락하고 한강 북쪽의 여러 성을 함락하였다. 이때부터 한강 이북땅은 고구려 영토가 되었다.

 

또 이해 겨울 고구려는 關彌城(지금의 교동도로 추정)을 공격하였다. 관미성은 사면이 절벽으로 되어있고 성 둘레를 바다가 둘러싼 천혜의 요새이다. 고구려 군사들은 일곱 길로 나누어 공격하여 20일 만에 함락하였다. 이때 고구려는 수군을 동원하였다. 고구려는 수군이 약했는데 부지런히 수군을 양성하였다. 뒷날 신라 구원에 나서 왜군을 무찌를 때도 고구려는 수군을 동원하였다.

한강 입구의 요충지인 관미성이 함락되었는데도 진사왕은 狗原의 들어앉아 사냥을 일삼았다. 이해 진사왕은 행궁에서 죽고 그의 조카 아신왕이 왕위에 올랐다. 아신왕은 眞武에게 군사 지휘권을 맡겼다.

진무는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 남쪽을 공격하였다. 먼저 관미성 공격에 나서 성을 완전히 포위하였으나 성 안에 있던 고구려 군사들은 성문을 굳게 닫아 걸고 지키기만 하였다. 진무는 양식이 떨어져 아무 성과도 없이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그 뒤에도 파상적으로 공격이 이어졌으나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395년에 진무는 다시 왕명을 받들어 고구려 정벌에 나섰다. 영락대왕은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패수를 사이에 두고 싸움을 벌였다. 백제의 군사들은 8천 명이 죽고 8천 명이 포로가 되는 처절한 패배를 당했다. 그런데도 석달 후 아신왕은 친히 군사를 이끌고 복수전에 나섰다. 아신왕은 한강을 건너 개성 송악산 아래에 이르렀다. 큰 눈이 내려 군사들이 많이 얼어죽었다. 아신왕은 군사들을 이끌고 회군하였다.

영락대왕은 계속되는 공격을 물리치고 승리를 거듭하는데도 백제를 완전히 항복시키지 못하고 또 역공을 받기도 하는데 분노가 치밀었다. 그리하여 396년 즉위 6년 할아버지인 제16대 고국원왕(331~371)을 죽인데 대한 복수로 백체를 침략한다.전술을 바꾸어 왕이 이끄는 고구려 수군은 남양만으로 상륙, 한강 수로를 통해 곧바로 백제의 왕궁을 공격하였다. 백제 제17대 아신왕(392~4054)은 다급한 나머지 포로 1천 명과 좋은 베 1천 필을 바치고 머리를 조아리고 “영락대왕의 영원한 奴客이 되겠나이다”라고 맹세하였다.

영락대왕은 승자의 관례대로 모든 죄과를 은혜로 용서해주고 항복한 성의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58성을 빼앗고 700여 개의 촌락과 볼모로 아신왕의 아우와 대신 10여 명을 데리고 개선하였다. 황해도 안악 3호분에 고구려 군대의 모습이 있다.

임진강 호루호루성에서 탄화미, 좁쌀이 나왔다.

이렇게 몇십 년에 걸친 백제와의 전쟁에서 최대의 승리를 거두면 서해안 지역을 포함하여 한강 이북땅을 대부분 차지하였다.

 

신라는 제17대 내물이사금(356~402 재위) 26년(381) 고구려의 도움을 받아 사신을 전진에 보내 방물을 바쳤다. 이때 신라의 사신은 이제 신라도 예전의 미개한 수준을 벗어나 중국 제도를 본받아 개혁을 단행하여 名號를 바꾸었다고 하였다. 신라도 고구려와 백제의 율령제도나 불교 수용 사실을 알고 여기에 따르려 한 것 같다. 신라에서 중국 내륙으로 가려면 고구려 땅을 밟아야 한다. 배로 간다면 많이 돌아가야 한다. 신라는 후기에는 남양만으로 중국길을 텄는데 이 무렵에는 백제땅이어서 남양만 길도 쉽지 않았다.

 

신라는 392년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왕족 實聖을 볼모로 보냈다. 실성은 뒷날 왕실 회의에서 왕으로 추대될 정도로 명망이 있었다. 고구려는 뒷날 내물이사금이 죽자 실성을 신라로 돌려보냈다.

내물마립간은 너무나 고마운 나머지 왕이 직접 고구려에 가서 은공에 감사하면서 예를 올렸다. 신라왕은 고구려에 조공을 바친다.

 

경주 노서동 고분의 호우총에서 청동 壺杅가 나왔다. 1946년 5월 국립박물관이 광복 후 최초로 경주시 노서리 140호 고분을 발굴하였다. 그 제1호 고분에서 청동제 그릇 바닥에 양각으로 “乙卯年國/ 罡(四+止)上廣開/土地好太/王壺杅十”이라는 4줄의 명문에 있어 이 고분을 호우총이라 부르게 되었다. 글자체는 광개토호태왕비와 비슷하다. ‘을묘년’은 415년으로 생각되며, 광개토호태왕이 죽은 지 3년 되는 때이므로 장수왕이 만들게 한 것으로 보고있다. ‘十’은 수를 나타나는 것, 기호로 보는 설 등 난해하여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발굴에 참여한 김재원은 당시 인질로 잡혀 고구려에 머무르고 있던 왕자卜好가 가져온 것으로 보았다. 신라는 고구려의 속국이었다. 고구려는 중국과 동등한 동방의 패자이다. 동부여, 북부여, 북연, 백제, 신라, 가야는 고구려 지배질서 속에 함께 존재하였다.

4년 후 왜구가 또 황해를 통해 대방군 지역인 한강 언저리를 쳐들어왔다. 영락대왕은 직접 수군을 거느리고 나가서 맞받아 싸웠다. 왜구는 아무 성과도 없이 무수한 시체만 남기고 물러갔다.

광개토대왕은 남쪽의 국경은 한강 북쪽과 내륙의 중원, 동쪽의 삼척 일대까지 넓혔다.

광개토대왕까지 고유문화를 유지하였다.

 

4~5세기 고구려

 

 

출처 : 無碍洞天 세상과 사람
글쓴이 : 무애동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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