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각산 유람기〔遊三角山記〕/ 성호전집 제53권 > 기

2018. 2. 22. 15:30차 이야기



       


성호전집 제53권 / 기(記)




삼각산 유람기〔遊三角山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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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지(國誌)》를 살펴보면 삼각산(三角山)은 일명 부아산(負兒山)이라고 하는데, 부아산은 한성(漢城)의 종산(宗山)이다. 대개 도봉산(道峯山)으로부터 산맥이 뻗어 나와 남쪽으로 내려와서 백운봉(白雲峯)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우뚝 솟았다. 백운봉의 남쪽에 만경봉(萬景峯)이 있고 동쪽에 인수봉(仁壽峯)이 있는데 모두 높이가 백운봉과 비슷하다. 그중 인수봉은 더욱 깎은 듯이 가파르게 우뚝 솟아서 사람들이 기어오를 수 없고 바라보매 가장 빼어난 절경인데, 실로 오른쪽 두 봉우리와 나란히 우뚝하여 삼각산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이다. 서쪽으로 떨어져 있는 것이 노적봉(露積峯)이고 봉우리의 아래가 중흥동(中興洞)인데 중흥사(中興寺)가 거기에 있다. 동쪽에 있는 것이 취봉(鷲峯)이고 남쪽으로 돌아 비스듬히 뻗어 고개를 이룬 것이 석가령(釋迦嶺)이다. 이 고개에서 동쪽 지역을 조계(漕溪)라 하고 조계사(漕溪寺)가 있는데 이 절에는 폭포가 있다. 고개 서쪽 갈래는 나한봉(羅漢峯) 등의 여러 봉우리가 되어서 노적봉의 오른쪽 산기슭과 중흥동 어귀에서 합쳐지니, 이것이 옛 북한성(北漢城)의 터이다. 고개의 바로 남쪽이 보현봉(普賢峯)의 여러 봉우리가 되고 점점 뻗어 가서 인왕산(仁王山)에 들어가는데, 이곳은 만세토록 국조(國朝)의 공고한 기반이니, 지금 감히 다 기록하지 않는다. 보현봉의 서쪽은 문수암(文殊菴)이고 암자의 물이 탕춘대(蕩春臺)를 경유하여 한강에 들어간다. 이것이 그 대개이다.
내가 정해년(1707, 숙종33) 중춘(仲春)에 유람하려고 할 때 따라가기를 원하는 사람이 하나 있어 드디어 그와 함께 17일 경자일에 집에서 출발하여 18일 신축일에 동소문(東小門)을 거쳐서 천천히 걸어서 조계동(漕溪洞)으로 들어갔다. 〈산에 들어가다〔入山〕〉라는 율시 한 수를 지었다. 보허각(步虛閣)에 올라서 십일층폭포를 구경하고 또 〈폭포를 구경하다〔觀瀑〕〉라는 율시 한 수를 지었다. 방향을 돌려 조계사에 들어 기숙(寄宿)하였는데, 〈징 상인(澄上人)의 시축(詩軸)에 차운하다〉라는 율시 한 수를 지었다.
동틀 무렵 석가령을 넘어서 삼각산의 여러 봉우리를 바라보고 중흥사에 들어가 비로소 조반(朝飯)을 들었다. 우연히 종조손(從祖孫) 이종환(李宗煥)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이어서 백운봉에 오르려고 하였는데 얼음과 눈이 아직 녹지 않아 길이 막혀 올라가지 못하였다. 〈백운대를 바라보고〔望白雲臺〕〉라는 절구 한 수를 지었다. 내성(內城)의 남은 터를 따라가 석문(石門)을 구경하고 길을 바꾸어 문수암에 들어갔다. 〈문수암〉이라는 절구 한 수를 지었다. 문수암의 오른쪽 산등성이에 올라 서해(西海)를 바라보고, 이어 문수암에서 점심을 들었다. 또 보현봉에 올라서 왕성(王城)을 내려다보고 〈보현봉〉이라는 율시 한 수를 지었다. 정오에 탕춘대를 따라 내려와 〈산을 나오며〔出山〕〉라는 율시 한 수를 지었다. 마침내 도성 북문(北門)을 경유하여 돌아왔다.
[주-D001] 국지(國誌)를 …… 하는데 :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 〈한성부(漢城府)〉에, 한성의 산천에서 “삼각산(三角山)은 양주(楊州) 지경에 있다. 화산(華山)이라고도 하며, 신라 때에는 부아악(負兒岳)이라 하였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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