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여성인물 / 여성문화유산해설모임

2018. 2. 22. 21:47차 이야기



고구려의 여성인물-여성문화유산해설모임| 여성문화재


   
이순자    조회 4 |추천 0 | 2007.09.17. 09:43



낙랑공주(樂浪公主)
       ?∼32(대무신왕 15). 낙랑왕 최리(崔理)의 딸.


          32년 옥저로 놀이를 왔다가 최리를 따라 낙랑에 온 고구려 호동왕자(好童王子)와 혼인하였다.

       당시 낙랑에는 적병이 침입해오면 스스로 울려 이를 알리는 북과 뿔피리가 있어 정복하기가

       어려웠는데, 호동왕자의 부탁으로 몰래 북과 뿔피리를 파괴하여 고구려 군대로 하여금 낙랑을

       멸망시킬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를 알아차린 최리에 의하여 죽음을 당하였다. 일설에는 대무신왕이 낙랑을 멸망시키

       기 위해 의도적으로 호동왕자의 부인으로 맞아들인 뒤, 본국으로 돌려보내 그 북과 뿔피리를

       부수어버리게 했다고도 한다.
       이때의 낙랑을 한(漢)나라의 군현의 하나인 낙랑군으로 보지 않고, 평양을 중심으로 한 독립

       세력의 낙랑국으로 간주하는 견해도 있다.

 

유화부인(柳花夫人)
       생몰년 미상.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왕 주몽(朱蒙)의 어머니.

       

         전설에 의하면 수신(水神)인 하백(河伯)의 장녀인 유화는 동생 위화(葦花)·훤화(萱花)와 함께

       압록강가에서 놀다가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解慕漱)를 만나 크기가 닷되들이 만한 알을

       낳게 되었는데, 그 속에서 주몽이 나왔다고 한다.
          또, 이규보(李奎報)의 서사시 〈동명왕편 東明王篇〉에서는 주몽이 부여에서 남쪽으로

       이주할 때에 신모(神母:柳花夫人) 가 오곡(五穀)의 종자를 가지고 가라고 싸주었으나 이별

       하는 슬픔에 보리종자〔麥子〕를 빠뜨렸는데 신모가 사자(使者)인 비둘기를 시켜 주몽에게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사실은 유화부인, 즉 주몽의 신모가 맥류경작(麥類耕作)과 관련된 농업신의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유화부인은 서기전 24년(동명왕 14) 8월 동부여에서 죽었는데, 그 왕 금와(金蛙)는 태후(太后)

       의 예(禮)로써 장례를 지내고 신묘(神廟)를 세워주었다.
       한편, 뒤에 고구려에서는 주몽과 더불어 그 어머니인 하백녀(河伯女)가 국가적인 치제(致祭)

       의 대상으로 섬겨졌다. 

 

 

치희(雉姬)
생몰년 미상. 고구려 유리왕의 후실. 한인(漢人)출신.


   서기전 17년(유리왕 3) 왕비 송씨(松氏)가 죽자, 화희(禾姬)와 함께 유리왕의 후실이 되었다.
그러나 서로 왕의 총애를 다투다가, 결국 유리왕이 사냥을 나간 사이에 화희로부터 심한 모욕을 당하고 스스로 왕궁을 떠났다.
이 사실을 안 유리왕이 급히 찾았으나 끝내 돌아오지 않았고, 유리왕은 이를 슬퍼하여 〈황조가 黃鳥歌〉를 지었다.

 

 

평강공주(平岡公主)
생몰년 미상. 고구려 평원왕의 딸. 남편은 장군 온달(溫達)이다.


   《삼국사기》 온달전에 의하면, 공주는 어릴 때에 잘 울어서, 왕이 희롱하여 말하기를 바보 온달에게 시집보내겠다고 하였다.
그 뒤 커서 시집갈 나이가 되었을 때, 왕이 명문귀족 집안에 시집보내려 하였지만 공주가 이를 거부하였다. 왕이 노하여 궁궐에서 쫓아내니, 공주는 온달을 찾아가 혼인하였다.
그녀는 눈먼 시어머니를 잘 봉양하고, 바보스러운 남편 온달에게 무예와 학식을 가르쳤다. 공주의 도움과 가르침을 받아 온달은 뛰어난 무예를 지니게 되었다.
얼마 뒤 온달은 매년 3월 낙랑(樂浪)벌에서 열리던 사냥대회에서 남다른 활약을 보여 왕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이에 온달은 고구려의 장수로 발탁되었다.


   그 뒤 북주(北周)의 군대가 침공하여 왔을 때, 온달이 고구려군의 선봉이 되어 적을 격파하고 대공을 세웠다. 평원왕을 이은 영양왕 때에, 온달이 한강유역을 회복하기 위하여 신라를 공격하다가 화살에 맞아 수도로 돌아오던 중 죽었는데, 그 시체를 넣은 관을 운반하려 하였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공주가 달려와 관을 어루만지며 돌아가자고 말하니, 비로소 관이 움직여 이를 매장하였다고 한다.


   《삼국사기》 온달전의 내용에서 전하는 평강공주의 행적은 당시 사회에서는 퍽이나 파격적인 것이다. 그녀는 집안의 문벌이나 권력에 얽매이지 않고 순수한 애정에 의하여 결혼을 한 훌륭한 여인으로 칭송되기도 하였다.
또, 불우한 처지의 남편을 도와 입신출세하게 한 현명한 아내의 본보기로 내세워지기도 하였다.
그런데 온달전의 내용을 보면 설화적인 면이 짙다.
그러나 그것을 전혀 허구적인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 속에서 일정한 역사적 사실을 추출해보려는 시각이 필요하며, 다음과 같이 풀이하여 볼 수 있겠다.
먼저 당시의 시대상으로 보아, 그리고 위의 내용으로 볼 때도, 온달은 미천한 출신의 바보였다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그는 당시 왕실과 혼인할 수 있는 고급 귀족집안 출신은 아니었고, 아마도 하급 귀족정도 신분의 인사로서 그 자신이 무사로서의 뛰어난 활약으로 발탁되었던 인물로 여겨진다.
그러한 그를 왕이 사위로 맞이하려고 언약하였다.
그런데 이는 당시 신분제도와 관행에 비추어 어려움이 있고 또 반발도 있고 하여, 왕이 이를 취소하고자 하였는데 공주가 언약을 지킬 것을 고집하며 온달에게 시집갔다.
이 파격적인 공주와 온달간의 결혼을 두고 당시 귀족집안의 사람들이 야유와 시기를 하게 되어, 온달을 미천한 바보로 묘사하는 설화를 낳게 되었다. 자기들과는 다른 족속이나 신분에 속한 이를 이상하게 생긴 못난 인물로 묘사하는 예는 고대사회에서 널리 보이는 바이다.
이렇게 풀이하여 볼 때, 평강공주는 고구려의 귀족사회를 살아갔던 현명하고 정열적인 한 여인의 모습을 나타내주는 바이다.

 

 

화희(禾姬)
생몰년 미상. 고구려 유리왕의 후실(後室), 골천인(鶻川人)의 딸이다.


   서기전 17년(유리왕 3) 왕비 송씨(松氏)가 죽은 뒤 유리왕의 후실이 되었다. 그러나 함께 후실이 된 한인(漢人) 치희(雉姬)와 왕의 총애를 다투다가, 결국 왕이 기산(箕山)으로 사냥나간 사이에 치희에게 심한 모욕을 주어 스스로 왕궁을 떠나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