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선비정신과 무사도의 상관관계

2018. 3. 9. 03:17병법 이야기

선비정신과 무사도의 상관관계*

유용규

 

* 이 논문은 2002년도 인천대학교 교수 연구지원비로 작성되었음.

 

 

 

서론


무사도란 무사가 추구하는 길이란 의미겠으나 무사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명확한 결론을 내리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자신의 행동이 규범이나 가치에 완전히 부합하는, 도덕적인 완전성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고 이러한 경향은 외부환경과의 조화 속에 균형을 찾을 때 비로소 참된 자아실현이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중세일본은 200년 이상의 긴 전국시대의 터널을 빠져나와 도쿠가와(德川)시대에 이르러 태평성대를 구가하게 된다. 따라서 원래의 사무라이의 본직이었던 전쟁이 없어짐에 따라 무사의 설자리를 찾기 위하여 그들의 정신적지주가 될 수 있는 행동규범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서 탄생하는 것이 무사도일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에서 이 논문을 쓰게 되었으며, 또한 거의 동시대에 같은 맥락에서 탄생한 우리나라의 선비정신과도 그 루트를 같이 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본고에서는 무사도의 원류와 사상을 고찰하면서 우리의 선비정신과의 상관관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아울러 무사도와 선비정신의 현대적 수용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고자 한다.

 

 


본론


제1장 무사도와 선비정신의 원류


1) 무사도의 사전적 의미
무사도와 선비정신의 상관관계를 고찰함에 있어서 먼저 두 사항에 대한 사전적 의미를 조사해 봤다.

 

① 岩波古語辭典
さぶらひ : さもらひの轉。
․․
モリは→見守る


② 廣辭苑
さぶらい(サブラフの連用形から)
さぶらう(サモラウの轉)


③ 大言海 (大槻文彦著)
さぶらひ : の下略
さぶらふ :「サモラフ」の轉。 さむらふとも云ふ。
も․む․ぶ音通ず。 (悲しぶ,かなしむ  否ぶ,いなむ)
 武士ハ、 信義ヲ重ンズルヨリ、 暗暗裏ニ、 神佛ヨリ加護ヲ蒙ルコト。 又、 實踐躬行スル、 武士の道義。

 

 

한편 우리나라의 ‘사무라이’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로 우리말의 싸움꾼이라는 의미의 ‘싸울아비’에서 ‘사우라이’라는 말이 생겨난 것이 지배적인 생각인 것 같다. 이러한 견해는 만요슈(万葉集) 연구가인 김사엽(金思燁)씨의 주장이 정착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음운변화의 규칙에서 벗어난 견해이며, 통사적으로도 무리가 있다고 보여진다.


그것은 신라시대에는 ‘사호다’라는 어휘는 존재하나 ‘아비’의 존재는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접두어「さ」는 중세국어에서「서로」의 의미를 갖는 ‘사’가 아닐까 생각된다. 또한 접미어라고 보여지는「ひ(い)」는 우리말「이」와 같은 어원으로 동사의 명사화를 의미하는 ‘이’, 또는 의성어 의태어에서 명사화하는 ‘이’라 보여지며, 그 예는 수없이 많다.

 

한편 선비란 ‘士’의 훈독이며, 사전적의미로는

 

교학사, 뉴에이지 새국어사전(1995)
① 옛날에 학식은 있으나 벼슬하지 않은 사람.
② 학덕을 갖춘 사람의 예스러운 말.
③ 어질고 순한 사람을 비유하는 말.

 

동아출판사
①조선 시대 또는 그 이전에, 유교적 교양과 학식과 인품을 갖춘 사람을 이르던 말.
②학문을 닦는 사람을 예스럽게 이르는 말. ¶ 그는 ~ 집안 출신이다.
③어질고 순한 사람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

 

이렇듯 선비란 학식은 있되 성품이 온화하고 어진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사무라이와는 그 이미지에서 사뭇 대조되는 어감을 주고 있다.

 

2) 선비정신과 무사도
선비는 조선500년 간의 양반들의 이상적인 지식인상으로, 중세유럽의 기사도나 일본의 무사도와 같이 옛날의 이상일 뿐 오늘날 우리가 본받을 만한 인간상은 아니다. 본디 이상적인 인간상이란 국가나 시대, 그리고 그 사회가 갖는 역사적 조건에 의해서 달라진다는 것은 우리의 역사적 사실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선비가 조선시대의 이상이 된 것은, 당시의 양반이라고 하는 신분의 사회적 조건이 있었기 때문이며, 유럽의 기사도나 일본의 무사도 역시 그 발생이 각각 중세 봉건제가 체제유지를 위한 필요성에서 태동한 인간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선비는 조선시대의 지배층, 즉 양반들의 도의적 규범이었음을 간과할 수 없겠다.

 

반면 무사는 즉, 12세기말 헤이씨(平氏)에 이어 겐지(源氏)가 정권을 잡은 이래 군사(軍事)에 종사한 무리들의 정치가 시작된 이래 메이지유신(明治維新)에 이르기까지 지배계층을 이룬 특수계층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도쿠가와시대에 이르러서는 무사는 장군을 정점으로 하여 주종관계를 맺고,「もののふのみち」「武士道」라 불리는 윤리․도덕을 정신적 지주로 하고 있다.


봉건제도에 의해 나타난 특권계급인 무사가 자기 자신들의 잘잘못을 심판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서 공통의 규범이 필요해졌는데 이것이 무사도의 발생동기라 할 수 있으며, 거기에는 기독교가 기사도(騎士道)에 정신적 덕목을 불어넣은 것처럼 몇 가지 기원이 있다.


하나는 일반적으로 무사도의 기원을 불교, 신도, 유교에서 찾고 있는 것 같다.


옛날에는「つわもの」「もののふ」라 불렀다.1) 이들이 자신의 군주를 섬기며 그들의 경호를 담당하게 되면서 ‘사무라이(侍)’라 불린 것 같다.

 


또 하나는 헤이안(平安)시대의 중엽부터 지방에 토착하는 유력한 농민이 무력을 빌려 귀족들의 횡포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낸 것이 그 시초라 할 수 있다. 그들은 유력자를 도료(棟梁=統率者)로 하여 무사단(武士団)을 형성, 점차 힘이 강해져 귀족들을 압도해 갔다.2) 한 때「弓馬の道」등으로 불리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실시한 병농분리(兵農分離)에 의해, 농민이나 쵸닌(町人)과는 다른 최상의 신분이 되었다.3)


또한 무가(武家)를 주군(主君)으로 섬기지 않는 특수한 사무라이로 궁가(宮家)에 봉사하는 미야사무라이(宮侍), 몬제키(門跡:격이 높은 사원)에 봉사하는 데라사무라이(寺侍)등이 있었다.


에도(江戶)시대에 이르러는 조선 중기 주자학의 대가 강항(姜沆)4)의 영향을 받아 유학, 특히 주자학에 의해 이론화되어 충의(忠義), 예의(礼儀), 명예(名譽), 무용(武勇)등이 중히 여겨지게 된다.

 

일본의 무사도에는 하가쿠레(葉隱)5)의 무사도와 니토베 이나조(新渡戶稻造1862-1933)6)에 의해 대변되는 무사도로 대별된다 하겠다. 즉, 무사도는 대의를 위해, 충군․애국의 길에 죽을 것인가(“武士道とは, いかに大儀のために, 忠君愛國の道に死すべきか”)하는 스토이크적인 발상과 무사도는 즉, 야마토타마시 = 일본정신으로, 무사의 발흥과 더불어 성립한 것이다. 또 멀리는 진무(神武)천황의 건국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武士道とは,すなわち大和魂=日本精神にして,武士の勃興と共に成立したものである。 また遠く源をさかのぼれば, 畏くも神武天皇の御建國の当初に至る)고 한 메이지(明治)유신 이래의 구역사가․사상가에 의해 주창된 설이 근간에 있는 것 같다.


이러한 주장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부터 제2차 세계대전의 종언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교육정책과 외교정책 속에 일관되게 선풍적으로 온 아시아를 유린하는 사상적 배경을 이루었다 하겠다.

 

 

제2장 우리나라의 무사도


고조선에서 시작하여, 삼한(三韓), 삼국시대를 거치는 과정에서 상류사회의 지배자들이 무사적(武士的) 신분계층이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일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각각의 정신적 세계가 있었을 것이며, 그 대표적인 것으로 신라의 화랑도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최치원(崔致遠)은 화랑도를「國有玄妙之道曰風流」하고,「說敎之源備詳僊史實迺包含三敎化群生」라고 종교에 비유하고 있다.


근자에 일본의 무도사(武道史)나 무도철학을 연구하고 있는 학자들 중에 무사도의 정신을 화랑도에서 찾고 있는 것은 좋은 예일 것이다.


화랑도는 그 독특한 ‘무사도’로도 유명하다.《삼국사기》에 의하면 이 시기에는 화랑뿐 아니라 낭도나 일반 명사들까지 국가를 지키기 위해서는 목숨을 아키지 않는다는 무사도 정신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화랑 출신의 장군들이 모범을 보였다. 660년 김유신(金庾信)장군 인솔 아래 백제를 공격할 때 신라군의 사기를 드높인 화랑 관창(官昌)․반굴(盤屈)의 용맹과 672년 김유신의 아들인 화랑 원술(元述)이 석문전투(石門戰鬪)에서 당(唐)나라 군사와의 싸움에서 보여준 용맹함은 널리 알려져 있다. 진평왕 때 원광법사(圓光法師)가 제정한 세속오계(世俗五戒)는 신라 화랑의 지도이념을 대표하고 있다. 충(忠;事君以忠)․효(孝;事親以孝)․신(信;交友以信)․용(勇;臨戰無退)․인(仁;殺生有擇)의 5계 가운데 그들이 특히 소중하게 여긴 덕목은 충과 신으로서, 이것은 시대적으로 화랑도의 제정부터 삼국통일까지가 신라 역사상 국난기였던 것과 관련이 깊다. 화랑도는 삼국항쟁이 치열하게 전개되기 시작한 진흥왕 때 제정되어 삼국통일을 이룩할 때까지 크게 활기를 띠었다. 김유신․김흠춘(金欽春)․죽지(竹旨)․사다함(斯多含)․관창․원술․비령자(丕寧子) 등은 이 시기 유명한 화랑들로서, 김대문(金大問)은 《화랑세기(花郞世記)》에서 화랑도를 평하여 “현명한 재상과 충성스런 신하가 여기서 솟아 나오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사가 이로 말미암아 생겨났다” 고 말한 바 있다. 화랑도는 국가적 위기 때는 전사단(戰士団)으로 군부대에 배속되어 작전에 동원되었으며, 수련기간이 끝난 뒤에는 정규부대에 편입되어 정식 군인으로서 활동하였다. 한편 화랑도의 수련에서 빼놓을 수 없는 노래와 춤은 화랑도의 인격 형성, 나아가 세계관 형성에 놀이가 큰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최치원(崔致遠)의 《난랑비서(鸞郞碑序)》에는 풍류도라는 신라 고유의 가르침이 있어 화랑도는 그 가르침을 받들어 수련한다고 하여, 자유스러움과 호방함을 보여주는 선풍(仙風)과 유교․불교․도교의 3교를 포괄하여 이루어진 풍류도가 화랑의 기풍과 정신세계의 한 바탕이 되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화랑도는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점차 쇠퇴하였다. 수련은 군사적 목표를 상실한 채 놀이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신라 말기에는 귀족들의 문객(門客) 또는 사병적인 성격을 띠는 집단으로 변질되었고 신라의 멸망과 함께 화랑도는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화랑도의 정신은 한민족 고유의 전통과 이념의 발로로서 고려․조선시대를 통하여 면면히 계승되어 국가 유사시에는 독립․애국정신의 상징으로서 오늘날까지 줄기차게 존속되어 왔다.


전술한 바와 같이 신라의 최치원은 앞에서 말한 바 있는「난랑비서문(鸞郞碑序文)」에서 유, 불, 선 3교는 인류 시원(始源)이며, 이 신교로부터 갈라져 나가 제2의 고등종교로 발전한 것이며, 유, 불, 선의 사상이 포괄된 모체종교가 우리나라에 있었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적어 전하고 있다.

― 國有玄妙之道 曰風流 (우리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말하기를 풍류라 한다.)

 

즉 우리나라에는 본래 현묘한 도가 있어서, 외래종교인 유 불 선이 들어오기 이전부터 7500년동안 현묘한 도가 있어서 이것을 풍류도라 했다는 것이다.

 

― 說敎之源 備詳仙史 實乃包含 三敎 接化群生 (이 종교를 일으킨 연원은 선사[道家史書]에 상세히 실려 있거니와, 근본적으로 유 불 선 삼교를 자체 내에 지니어 모든 생명을 가까이 하면 저절로 감화한다.)

― 且如 入則孝於家 出則忠於國 魯司寇之旨也 (집에 들어온 즉 효도하고 나아간즉 나라에 충성하니, 그것은 노사구(공자)의 교지(敎旨)와 같다.)

공자가 노나라에서 법무부 장관을 지냈다. 당시 그것을 사구라고 했기 때문에 노사구는 공자를 이른다. 공자가 우리 신교의 사상 중에서 ‘입즉효어가하고 출측충어국’하는 사상을 자기의 종지로 삼았다.

―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周柱史之宗也 (하염없는 일에 머무르고 말없이 가르침을 실행하는 것은 주주사(노자)의 교지와 같다.)

 

주나라에 주사라는 벼슬이 있다. 주사는 도서관 직원을 가리킨다. 노자가 주나라에서 도서관에 봉직했다. 그래서 여기의 주주사는 노자를 얘기하는 것이다. 노자도 역시 신교의 사상 중에서 하나를 절췌해서 자기의 사상으로 삼은 것이다.

- 諸惡莫作 衆善奉行 竺乾太子之化也 (모든 악한 일을 짓지 않고 모든 선한 일을 받들어 실행함은 축건태자(석가)의 교화(敎化)와 같다.)

 

 

제3장 일본무사도의 법적 형성과 종교


1) 무사도의 법적 형성과정
헤이안 말기 지방에서 성장한 무사단은 자연발생적인 무력집단으로서 아직은 다분히 세속적인 무자지침(武者の習)을 형성했다. 이 무자지침이 무사의 도덕률로서 자각되어지는 것은 가마쿠라무로마치(鎌倉室町)기의 약 400년 간이며, 그것이 좀더 도덕사상(무사도 또는 사도)으로서 반성적으로 체계화되는 것은 전국시대가 종언을 고하는 에도(江戶) 시대에 이르러서이다.


이러한 무자수행이, 법률로서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은, 1232년에 호죠야스토기(北條泰時, 1183-1242)가 시행한 세이바이시키모쿠(御成敗式目)이지만, 처음 일본에 법률이 생긴 것은 쇼토쿠타이시(聖德太子,574-622)시대였다. 쇼코쿠타이시는 새로운 중앙집권국가의 정치원리를 종래의 신화(神話)에서 합리적인 법률에서 찾아 새로운 법치국가의 이상을 보여주었다. 여기의 법률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태자가 제정한 헌법17조를 가리킨다.

 

그것은 일본의 성문법의 효시였지만, 내용적으로는 관에 대한 마음가짐이라고도 할만한 것이었다. 유교를 중심으로 하는 고대 중국과 한국의 정치사의 사상과 불교사상을 잘 소화하였으며 동시에 신화 이래의 천황숭배와 청명심(淸明心)등의 전통정신이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나 있다. 전체적으로 정치․도덕․종교에 걸쳐있지만, 특히 도덕적 성격이 강하게 반영되어있다.


이러한 쇼토쿠태자의 이상(理想)은 그 후 율령제도(律令制度)로 발전했다. 그러나 이 율령제도의 도덕적 정치 이상은, 오랜 신화적(神話的) 생활의 전통을 갖고있는 일본인으로서는, 위정자나 피지배자 모두에게 쉽사리 정착하지 못했다. 원류를 달리하는 사상이 혼재해 있었기 때문에 서로의 유기적 통일을 이루지 못했고, 따라서 정치적 대립항쟁을 불러일으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로 인해 신이었던 천황은 스스로 부처에의 봉사자로 자신을 폄하하는 자세를 취하게 됨으로 신불슈고(神仏習合)를 이룬 것이다. 즉, 신은 부처를 지키는 호법신(護法神)사상이며, 신의 제전의 구극(究極)의 위치에 절대자인 부처가 자리잡게된 것이다.


이상을 무사도의 기초라 할 수 있겠다. 처음은 이러한 법률과는 무관계한 용기와 힘만을 믿고 날뛰던 무사들은 무사의 지침(武士の習)이 만들어지자 불교를 중심으로 한 그 이상에 모순을 발견하게된다. 그것은 살인으로, 불교에서는 팔정도(八正道)에서 살생을 금하고 있다. 그래서 살생의 죄의 개념에서 불문에 귀의하는 무사도 생겨났다. 그러나 무사의 지침이 도덕으로 형성됨에 따라 살아있는 동안이 불문의 수행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무사에게 불교사상을 심어주게 된다.

 

2) 무사도와 종교의 영향


① 불교의 영향
불교는 무사도에, 운명에 대하는 편안한 신뢰감, 불가항력에의 조용한 복종, 위험이나 재난을 목적으로 한 때의 금욕적인 평정감, 생에의 모멸, 죽음에의 친근감 등을 가져왔다. 구체적으로는, 선수행(禪修行)을 행하고 있었다. 선이란「마음을 안정․통일시킴으로서 종교적 예지에 달하려는 수행법」이지만, 많은 옛 검호(劍豪)들은 이러한 선수행으로 병법(무술)의 경지에 달하려고 했다.

 

② 신도(神道)의 영향
신도는 다른 어떠한 신조(信條)에 의해서도 배울 수 없었던 주군에 대한 충성, 선조에 대한 숭경(崇敬), 나아가 효심 등을 그 교의(敎義)에 따라 무사들에게 가르쳤다. 신도의 선조에 대한 숭배는, 천황을 신으로 여겼기에, 일본인에게 애국심과 충성심을 심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한다면, 도덕적인 교의에 관해서는 유교가 그 근원이었다. 신도 역시 그 근원은 일본 고래의 민간신앙이 불교․유교의 영향을 받아서 성립되고, 이론화한 것이었다. 신도의 역할은 일본인에게 주군에의 강렬한 충성심과 애국심을 불어넣은 것이었다.

 

③ 유교의 영향
유교 가운데서도 공자의 가르침이 가장 풍성한 원천이었다. 공자가 말한 다섯 가지 이론적 관계 즉, 군신, 부자, 부부, 형제, 붕우의 관계는 그의 서책이 고대 한반도에서 전래되기 이전부터 일본인의 본능이 인지하고 있었던 사실의 확인에 지나지 않을 지도 모른다. 냉정, 온화하고 세재(世才)를 겸비하고 있던 공자의 많은 정치도덕의 격언은 지배계급이었던 무사에게 특히 알맞은 것으로 적합했던 것이었다.

 

 

제4장 무사도의 기본이념


무사도에는, 요시카와 에이지(吉川英次)의『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藏)』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많은 금욕적인 자기규제의 덕이 요구된다. 이러한 자기규제의 토대위에 무사도의 지주(支柱)가 되는 것은 의(義), 용(勇), 인(仁), 예(礼), 성(誠), 명예(名譽)이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지주가 되는 것을, 명예(名譽) 속에 있는 염치(廉恥), 즉, 수치심을 아는 것이다. 수치심에 대한 공포는 위의 무사도 속에 상존하는 것이었다.
이것들을 좀더 살펴보면,

 

① 의(義)
의(義)는 ‘도리(道理). 조리(條理). 사물(物事)의 이(理)에 맞는 것. 인간이 행해야할 도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의리(義理)’로서, 가르침을 지키게 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불교의 육방(六方), 즉, 부자(父子)의 도(道), 사제의 도, 부부의 도, 친우의 도, 군신의 도, 가르침을 믿는 자로서의 도, 이것을 지키게 하기 위해서는 뭔가의 권위가 필요해졌다. 왜 효도를 해야 하는가, 에 대해서 인간이 행해야할 도리인지라 하여 관습화되고 납득되었다. 그러나 ‘의리’가 생겨남으로 해서 그것은 간혹 궤변에 빠지게도 되었다. 가령 왜 어머니는 장자를 구하기 위해서 필요하다면, 다른 모든 자식들을 희생시켜야하는가? 왜 딸은 아버지가 방탕한 생활로 인하여 지게 된 빚을 갚기 위해서 그녀의 몸을 팔아야하는가? 와 같은 것이다.

 

② 용(勇)
용(勇)은、무사의 직업상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거기에는 ‘대의(大義)의 용’과 ‘필부(匹夫)의 용’의 구별이 있었다. 그것은 사람이 ‘두려워 해야할 것’과 ‘두려워해서는 안될 것’을 말한다. 무사는 어떠한 사태에서도 평정(平靜)을 잃지 않음을 보이고, 전쟁터에서도 냉정하고, 파멸적인 사태에서도 마음의 평정을 유지해야 했다. 가령 다가오는 위난 앞에서도 시가를 짓던가, 죽음 앞에서도 시(詩)를 음미하는 사람이야말로 훌륭한 사람으로 존경받았다. 글에서나 음성에서 어떠한 흔들림도 보이지 않는 이러한 넓은 도량은 무엇보다도 그 사람됨의 증좌(証左)였다.

 

③ 인(仁)
인(仁)은 상대를 가엾이 여기며, 배려하는 마음이다. 일본어에는 무사의 정(武士の情け)이라는 말이 있다. 무사는 자기보다 약한 자, 못한 자에 대해서는 인(仁)을 가지고 접했다. 가령 패자에 대해서도 상대의 입장에 서서 판단하고 상대의 명예를 손상하지 않도록 배려했다.

 

④ 예(礼)
예(礼)는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생활의 규범의 총칭이며, 의식(儀式)․예법(礼法)․제도(制度)․문물(文物) 등을 포함하고 있다. 예(礼)는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며, 그것은 바로 예의범절이다. 그리고 모든 행동거지에 적용되며, 예의범절을 아는가 모르는가에 그 인물을 평가한다.

 

⑤ 성심(誠心)
성심(誠心)은 ‘꾸밈없고 거짓 없는 정(情). 남에게 친절하고 속이지 않는 것.’이다. ‘무사는 한 입으로 두말(二言)하지 않는다’ 는 말이 있다. 무사는 신이나 조상의 영령에 대해서 간혹 맹세를 했다. 그리고 맹세를 한 이상은 죽음으로 그 맹세를 지킬만큼 자신의 명예를 소중히 했다.

 

⑥ 명예(名譽)
명예(名譽)는 ‘무사계급의 의무와 특권을 중히 여기도록 어릴 적부터 교육하는 사무라이의 특색을 이루는 것’이었다. 그 내면에는 염치심(廉恥心)이라고 하는 감성이 있었다. ‘남의 비웃음을 받을 거야’ ‘체면을 욕되게 하지 말라’ ‘부끄럽지는 않은가’ 등의 말은, 잘못을 범한 소년들의 행동을 고치는 마지막 보도(宝刀)였다. 그래서 위에서 열거한 무사도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모든 ‘수치심’의 의식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명예 즉, ‘염치심’은 무사도의 기반을 이루고 있다고 하겠다.

 

 


결론


무사도가 일본의 사상적 근간을 이룬 이래 오랫동안 쇄국정책을 견지해온 결과로 경제발달이 지연되었고, 국민은 가난의 질곡에서 헤매야 했다. 전쟁과 재해, 전염병의 위험에 항상 전전긍긍해야 했다. 그 때문에 일본인은 어릴 적부터 엄격하게 길러지고 연약함을 보이는 것은 부끄러운 일로 철저하게 길들여졌다.


무사도의 몰락이 시작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하고, 천황자신이 인간임을 인정한 때부터 일 것이다. 패전과 더불어 일본은 정치적으로 민주주의를 지향함에 따라 구시대의 무사도는 서서히 몰락의 길로 들어섰는지도 모른다. 아니 감춰갔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얼마 전에 막을 내린 드라마에 등장하는 일본의 마지막 사무라이의 모습 속에서 무엇을 느꼈을까? 하는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역사는 과거 속으로 흘러간다. 흘러간 과거는 다시 돌아올 수 없지만, 망각 속으로 묻혀버리는 것은 아니다.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서 오늘을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이것을 역사의 교훈이라 한다.


이러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무사도와 선비정신에서 무엇을 찾아야 할 것인가 반추해 봐야 할 것이다.
본고에서는 우리의 선비정신이 일본의 무사도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하였으나 처음의 의도와는 달리 자료수집의 부족 등으로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러한 문제점은 금후의 연구과제로 삼고자 한다.


(인천대학교 일어일문학과 교수)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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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구복『인물로 읽는 三國史記』, 동방미디어, 2000
김용운『문화로 배우는 日本語』,디자인하우스, 1998
이진표『한국사상사』, 학문사, 1998
가사야 가즈히코「무사(武士)와 양반(兩班)」,『日本文化硏究 第8集』, 2003
新渡戶稻造『武士道』, 岩波書店, 2000
吉川英治『宮本武藏』, 講談社, 1995
俵木浩太郞『新․士道論』, 筑摩書房, 1992
高橋富雄『武士の心』, 近藤出版社, 1991
三橋秀三『劍道』, 大修館書店, 1981
三島由紀夫『葉隱入門』, 光文社, 1967
古賀斌『武士道』, 小學館,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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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생략


 

출처 : 목련꽃이 질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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