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의 비밀

2018. 3. 10. 19:13美學 이야기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의 비밀
                                              

왜 관음도(觀音圖) 앞에 수월(水月)을 붙였을까?.
‘중생의 마음이 물처럼 청정(淸淨)해지면 보살의 달그림자가 거기에 나타난다’
(衆生心水淨 菩薩月影顯)고 했다.
본성(本性)에 이르면 지혜로워지고 가장 아름다워 진다고 했다.
명경지수(明鏡止水) 같은 심경(心鏡) 상태 유지라는 정신수양과
마음 다스리기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리라.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
달이 물에 비친 듯이 흰 천을 걸친 청정(淸淨)한 보살이란 뜻을 담았다.
보살은 생명을 지닌 모든 존재를 통틀어 이르는 말로 불교에서는
진리를 구하는 존재로 보았다. 위로는 깨달음을 추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濟度)하는 수행자이다. 대자대비(大慈大悲)를
그 근본 서원으로 중생이 고난 중에 그의 이름을 정성스럽게 부르면
그 음성을 듣고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 중생을 구제하여 준다고 한다.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


700여 년 전, 일상에 들어온 수월관음도가 주는 교훈은 무엇이었을까?.
수월관음도는 단순 불화가 아닌 잃어버린 신성(神性)를 찾아 가는 길,
바로 신시복본(神市複本)를 염두에 두고 발원한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그 연원을 단군세기에서 살펴보자.

기원전 2182년 삼랑(三郞) 을보륵(乙普勒)은
“한웅천황께서 펼치신 신시개천의 도(神市開天之道)는
신도(삼신의 도)로써 가르침을 베풀어, 나를 알아 자립을 구하며
나를 비워 만물을 잘 생존케 하여 능히 인간 세상을 복되게 할 따름입니다.”
(神市開天之道 亦以神施敎 知我求獨 空我存物 能爲福於人世而已)
라 하여 3세 가륵(嘉勒) 단군(檀君)의 하문에 답했다.


신시개천의 도는 배달국 이전부터 가르쳐 온 홍도익중(弘道益衆)이다.
홍익인간(弘益人間)이라 표기한다.
홍익인간은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인간을 진정 이롭게 하는 것은 그저 생활의 질을 높여주는 데 그치지 않는다.
사람들 개개인이 본래 자기 모습,
즉 ‘참나’를 실현해서 참된 삶을 살아가게 해주는 것을 말한다.


태백일사 한국본기에는 한국오훈(桓國五訓)을 전하고 있다.
배달시대에는 참전계(參佺戒)가 있었는데 이는 온전한 인간이 되기 위한 계율이다.
고구려의 명재상 을파소가 하늘로부터 계시를 받아
이를 8조목의 강령과 366절목(節目)으로 정리했다.


단군시대에는 왕검이 백성들에게 참된 삶을 위한 8가지의 가르침을 내려주었다.
그 내용은 일심법, 경천, 충효, 화합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배달 신시 시대에 비롯된 삼륜구서(三倫九誓)는 기원전 2182년
3세 가륵단군이 가르침을 베풀었다.


44세 구물단군 때는 부여구서(夫餘九誓)가 있으며, 태백일사 삼신오제본기에는
“소도(蘇塗)의 설립에는 반드시 계율이 있었나니, 충·효·신·용·인 오상(五常)의
도(道)가 그것이다”라 했다. 이는 배달시대 이전부터 가르쳐 온 신시개천의 도로
후일 고려 불화를 비롯 여타 종교의 지향점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신시개천의 도를 의역했고, 그 뜻을 불화(佛畵)에 담았음이다.


깨달음을 찾아 길을 나선 선재동자가 인도 남부 보타락가산에 가서
관음보살 앞에서 예배를 올리는 장면이 하나의 그림처럼 기록된 것도 보인다.
이는 ‘참나’를 위한 끓임없는 수행의 길이다.
‘읽는 경전’이 아니라 ‘보는 경전’이라 할 수 있음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수월관음도는 신시개천의 도를 불화를 매개로
예술적으로 승화시켰으며 승계했다는 점에서 닮지 않았는가 싶다.


진리는 신시개천의 도이며 신도(神道)로써 가르침을 베픔이다.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은 ‘참나’를 찾는 길이다. 고통과 번뇌가 있기 이전,
즉 너와 나의 구분이 생기기 이전 마음자리인 ‘참나’를 구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고해(苦海)에서 모든 중생을 구제하여 열반의 언덕으로 건너게 하여(衆生濟度)
인간 세상을 복되게 하려는 위대한 신시(神市)의 이념이 포함되어 있음이다.


고려 때 제작된 수월관음도는
충선왕(1275∼1325)의 비(妃)인 숙비(淑妃) 김씨(金氏)의 발원으로 제작된 것이다.
수월관음도 가운데 최고의 명품으로 꼽는다. 불교경전 안에 들어 있는
불교 전설이나 설화의 내용을 그림으로 옮긴 불화가 변상도(變相圖)이다.
대중들에게 불교 경전을 쉽게 가르치기 위해 그린 것이다.


발원자가 충선왕이 사랑한 숙비이다. 그렇다면 불화의 주인공은 숙비가 아니었을까?.
그림 속에서나마 청정(淸淨)한 마음을 담아 천추(千秋)를 살고자
염원한 것은 아닐까?. 숙비 김씨는 김취려(金就礪) 장군의 증손녀로
미모가 출중한 여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때문인지 세 번이나 결혼을 했고, 두 국왕의 사후 모두 그녀의 집에
빈소를 차릴 정도로 기구한 운명의 여인이었다. 단, 충선왕과의 패륜적
사랑의 오명(汚名)은 남아 있다. 숙비의 모습을 아래 글에서 유추해 본다.


“이 불화의 아름다움은 어디에 있는가? 왼쪽 상단의 관음보살 머리에서 하단 오른발까지 대각선 구도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우아하고 부드러운 원만한 얼굴 모습과 둥근 어깨, 풍만한 가슴은 전체적으로 우아하면서 부드러운 형태미를 보여준다.

옷 주름과 흰 사라천의 뚜렷한 선과 붉고 검은 필선이 대조를 이루어 유려한 선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보관에 금으로 그려진 정교하기 짝이 없는 연화당초문무늬, 사라천 끝단의 굵고 탐스런 금색 당초문 무늬, 연꽃무늬,

 꽃무늬 그림은 화려함과 치밀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문명대, ‘한국 괘불화의 기원문제와 경신사장 김우문필(鏡神社藏 金祐文筆) 수월관음도’, 2009).


이 불화에 기록된 화기(畵記)에 따르면,
1310년(충선왕2) 5월에 완성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화사(畵師) 김우(金祐)와
화직(畵直) 이계(李桂) 임순(林順) 송연색(宋連色) 최승(崔承) 등
다섯 명의 화가가 그렸다고 했다. 길이 419.5cm, 너비 254.2cm
(원래 크기 500cm, 너비 270cm)로 제작돼 현존 불화 중 규모가 가장 크다.


크기 자체가 우선 다른 불화를 압도한다. 또한 현존 불화 가운데
최고의 예술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 그림 속에 고려 불화의
아름다움과 특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것이 화계의 중론이다.


1314년 충선왕이 원나라 서울(燕京)에 만권당(萬卷堂) 세우고
남송(南宋) 출신 명유(名儒)인 요수(姚燧) 염복(閻復) 조맹부(趙孟頫)
장양호(張養浩) 등을 이 곳에 초치(招致), 학예를 수련하였고
이제현(李齊賢)이 이들과 교유하였다. 이즈음 고려와 원의 문화교류가
이곳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이루어 진 것을 보면
복본(複本)을 시도하려는 내밀한 작업이었지 않았을까?.


충선왕이 숙비 김씨를 통해 수월관음도를 발원토록 하고, 만권당을 토대로
잃었던 대륙을 다물(多勿)하고자 하는 원대한 포부의 산실이었지 않았을까?.
이는 기원전 2267년 태자 부루가 경당(扃堂)을 크게 일으켜
육례(六禮)를 체계화하고 수련의 장으로 만든 이래 만권당을 통해
천손의 맥(脈)을 쉼 없이 이으려는 고육지책(顧育之冊)으로 보임은 왜일까?.


끝없는 의문 부호가 남는 것은 충선왕은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고
담력도 많았으며,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쳐 고려가 당면하고 있던
폐단을 정리, 과감하게 개혁을 꾀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정방(政房)을 폐지하여 한림원(翰林院)에 합치고, 관제개혁을 실시하는 등
원나라의 간섭 하에 고쳐진 관제 이전의 형태로 복구하기도 했다.
이렇듯 관제개혁 속에는 반원적(反元的)인 요소가 내포되어 있다.


1316년 충선왕은 이제현(李齊賢)을 서촉(西蜀) 아미산(峨眉山)에 보내
치제(致祭)토록 했다. 서촉지역은 대(大)고조선의 영역이다. 치제는 죽은 병사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의식이다. 치제를 매개(媒介)로 위대했던 단군조선의 영토를
면밀히 두루 살피고, 고토 회복을 위한 사전 준비작업을 하지 않았을까?.


1319년에는 이제현을 대동, 절강성(浙江省) 보타사(寶陀寺)에 불공을 드리러 갔다.
고려의 금원(錦園)이 있었던 곳, 대륙의 동서(東西) 지역을 살폈다.
충선왕은 향불을 사르며 남북 5만 리, 동서 2만 여 리 12개의 나라를 통치했던
열조(烈祖)의 찬란했던 꿈을 재현하고자 염원한 것은 아니었을까?.
수월관음도가 주는 메시지, 바로 여기에 함축된 비밀일 수도 있음이다.


충선왕은 동족 환관의 모함으로 토번(吐蕃)에 유배되었고, 귀국 후 죽음을 맞았다.
실현되지 못한 신시복본, 그 꿈이 회한(悔恨)으로 남지 않았을까?.


훗날 이제현이 고려에 귀국해서 키운 제자가 이색이고, 다시 이색이 키운
제자가 정몽주와 정도전 같은 고려말 신진 사대부들이다. 충선왕은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고려말의 개혁적인 신진사대부들을 키운 원조가 된 셈이 되었다.


그러나 충선왕의 바램과 달리 여말선초에 이르러 경당(扃堂)의 교육 이념은 변질되고,
유위자(有爲子) 선지자의 예언처럼 광유(狂儒)의 길로 침잠되었다.
뼛속까지 물든 조선 사대부들의 존주대의(尊周大義)로 망가졌다.


여말선초부터 시작된 고사서(古史書)의 분서(焚書)는 지속되었고
삼국사기는 수정, 삭제하여 본 뜻을 왜곡, 둔갑시켰다. 고려사(高麗史)는
고조선과의 연계고리를 단절하기 위해 단군 기록을 의도적으로 누락시켰다.
단 백문보(白文寶) 열전 편에 1건 만을 삽입, 숭유억불을 정당화하는데 이용되었다.
고려는 관음도를 비롯, 금속활자, 경전, 청자기, 비단, 차(茶), 시문 등이
말해 주듯 최고의 문명국이었다. 환부역조하듯 황음무도한 왕조, 형편없는 나라로 폄하했다.


이제 내면의 신성(神性)이 회복되고 인간 세상을 복되게 할, 홍익(弘益)의
감각이 깨어나는 그런 세상을 만드려는 천손들이 있는 한 희망을 가져도
좋을 것이다. 끊겨버린 역사를 찾고자 하는 천손의 외침들이 하늘에 닿고 있다.
하늘 자손의 긍지요, 경외이며 신시복본을 하고자하는
염원이 무르익어 가는 싯점에 이르렀음이다.


- 한눌의 ‘고대사 메모‘ 중에서.





출처 : soo709
글쓴이 : 한문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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