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덕흥리고분(유주자사 진)의 피장자는 누구?

2018. 3. 11. 23:05우리 역사 바로알기

二十四年 甲寅 二月 樂浪王芙平薨 倉樊代之 芙軒太輔 周淡左輔 高穗右輔 尙能府庫令

四月 雋 以其弟軍為襄陽王 彭武昌王 恪太原王 評上庸王 覇吳王 友范陽王 厲下邳王 宜廬江王 度楽浪王 桓宜都王 逮臨賀王 徽河間王 龍歷陽王 納北海王 秀蘭陵王 嶽安豊王 德梁公 黙始安公 僂為南康公 時年十二 周太后出式云納子 咸楽安王 亮勃海王 溫帶方王 涉漁陽王 暐中山王 陽騖司空 尙書令覇 自冀州徙信都更名缺 後以讖改垂

玄菟(林西)太守乙逸 改封帝為駙馬都尉梁貊大王 時雋遷都于薊 垂留臺収拾人心為主 上亦歓待垂與乙逸

七月, <周淡>卒, <尙能>左輔, 皇子<津>右輔.

九月, 祭鹿於<龍山>. 閱四衛于<丸都>, 命諸将薦武才授以小幢, 賞良刀匠十二人.

24년(A.D.354) 갑인 2월 낙랑왕 부평이 죽어 창번을 대신하게 하고, 부헌을 태보로, 주담을 좌보로, 고수를 우보로, 상능을 부고령으로 삼았다.

4월 모용준(전연)은 자신의 동생 군을 양양왕으로, 팽을 무창왕으로, (모용)각을 태원왕으로, (모용)평을 상용왕으로, 패(覇, 훗날의 모용수)를 오왕으로, 우를 범양왕으로, 려를 하비왕으로, 의를 려강왕으로, 도를 낙랑왕으로, 환을 의도왕으로, 체를 임하왕으로, 휘를 하간왕으로, 용을 역양왕으로, 납을 북해왕으로, 수를 란능왕으로, 악을 안풍왕으로, 덕을 양공으로, 묵을 시안공으로 삼았다. 루는 남강공으로 삼았는데 나이 12살이었다. 주태후가 낳은 식은 납의 아들이라는 말이 있다. 함은 락안왕으로, 량은 발해왕으로, 온은 대방왕으로, 섭은 어양왕으로, 위는 중산왕으로, 양은 무사공으로 되었다. 상서령 패(覇)는 기주에서 신도(信都)로 옮겨와서 이름을 결로 바꾸었다가 좋지 않다하여 다시 수로 바꾸었다.

현토(림서)태수 을일을 보내서 다시 제(帝, 왕)를 부마도위 양맥대왕으로 바꾸어 봉하였다. 당시 모용준은 계로 천도하였고, 모용수는 마을에 있으면서 인심을 주로 하였다. 왕 또한 모용수와 을일을 환대하였다.


▨▨郡信都縣都鄕中甘里」

▨▨郡 신도현 도향 중감리 출신이며


釋加文佛弟子▨▨氏鎭」

석가문불의 제자인 ▨▨씨 진(鎭)은 벼슬하여


仕位建威將軍國小大兄左將軍」

지위가 건위장군 국소대형 좌장군

(주) 국소대형은 고구려의 관직이름으로 보인다


龍驤將軍 遼東太守使持」

용양장군 요동태수사


節東夷校尉幽州刺史」

지절동이교위 유주자사인


鎭年七十七薨焉永樂十八年」

진은 77세로 죽었다. 영락18년(A.D.408, 戊申)


太歲在戊申十二月辛酉朔廿五日」

간지가 무신(戊申)년인 12월 신유삭 25일


乙酉成遷移玉柩周公相地」

을유(乙酉)일에 완성되어 관을 옮기고, 주공(周公, 주 문왕의 아들이자 무왕의 동생)이 지세를 살피고


孔子擇日武王選時歲一」

공자가 날을 택하고 무왕이 택한 시간에, 사시가 한결같이 좋은 시간으로


使良葬送之後富及七世子孫」

장사를 보내게 한 이후로 7세에 미치고


番昌仕宦日遷位至矦王」

자손의 차례대로 번창하고 벼슬이 날마다 바뀌어 지위가 후왕에 이르도록 하라


造▨萬功日煞牛羊酒央米粲」

무덤을 만드는데 무수한 공력이 들었으며, 날마다 잡은 소와 양과 술은 먹었으나 쌀은


不可盡掃旦食鹽▨食一▨記」

먹지 못하였다. 아침 일찍 청소를 하고 식사로 쓸 소금과 간장을 창고에 보관하였으니,


之後世寓寄無疆」

기록하여 후세에도 맡기어 부치니 끝을 정함이 없다.




<묵서명>


전실 서벽(西壁)상단(上端) ① 此十三郡屬幽州部縣七十五

                州治廣薊今治燕國去洛陽二千三百

                里都尉一 部幷十三郡(3행 36자)

              ② 六郡太守來朝時通事吏

              ③ 奮威將軍燕郡太守來朝時

              ④ 范陽內史來朝論州時

              ⑤ 魚陽太守來論州時

              ⑥ 上谷太守來朝賀時

              ⑦ 廣寧太守來朝賀時

              ⑧ 代郡內史來朝▨▨▨



전실 서벽(西壁)하단(下端)  ① 諸郡太守通使吏

              ② [北平]太守來朝賀時

              ③ 遼西太▨▨朝賀時

              ④ 昌黎太守來論州時

              ⑤ 遼東太守來朝賀時

              ⑥ 玄兎太守來朝▨▨

              ⑦ 濼浪太守來▨▨▨

              ⑧ ▨▨▨▨▨▨▨▨



전실 남벽(南壁)서측(西側)  鎭▨[府長]史[司]馬

              參軍典軍錄事▨

              曺僉史諸曺職[吏]

              故銘記之 (4행 25자)



전실 남벽(南壁)동측(東側)  薊縣令捉軒弩



전실 동벽(東壁)       ① 鎭▨[刺]史司馬

              ② 御使導從時

              ③ 治中別駕

              ④ 使君出遊時



전실 천정(天井)북측(北側)  ① 地軸一身兩頭

              ② 天馬之象

              ③ 天雀之象

              ④ 辟毒之象

              ⑤ 博位之猗頭生四

                耳▨有[得]自明在於右 (2행 16자)

              ⑥ 賀鳥之象學道

                不成背負藥▨ (2행 12자)

              ⑦ 零陽之象學道

                不成頭生七▨ (2행 12자)

              ⑧ 喙遠之象



전실 천정(天井)서측(西側)  ① 千秋之象

              ② 萬歲之象

              ③ 玉女之幡

              ④ 玉女之槩

              ⑤ 仙人持幢



전실 천정(天井)남측(南側)  ① 仙人持蓮

              ② 吉利之象

              ③ 牽牛之象

              ④ ▨▨之象

              ⑤ 富貴之象

              ⑥ 猩猩之象



전실 천정(天井)동측(東側)  ① 飛魚▨象

              ② 靑陽之鳥一

               身兩頭 (2행 8자)

              ③ 陽光之鳥

               履火而行 (2행 8자)



현실(玄室) 동벽(東壁)    ① 此人爲中裏都督典知

                七寶自然音樂自然

                飮食有▨之燔▨▨▨▨ (3행 27자)

              ② 此人與七寶

                俱生是故

                儉喫知之 (3행 13자)

              ③ 此二人大廟作食人也

              ④ 此二人持刀侍[衛]

                七寶▨時

              ⑤ 此二人持菓▨食時



현실(玄室) 서벽(西壁)    ① 此爲西薗中馬射戱人

              ② 射戱注記人



현실(玄室) 남벽(南壁)    此是▨前廐養馬子



연도(羨道) 서벽(西壁)    太歲在己酉二月二日辛酉成關此墪戶大吉吏



연도(羨道) 동벽(東壁)    童▨▨端亓▨道者▨▨▨笑

출처 : 역사의 블랙박스를 찾아서
글쓴이 : 정성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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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댓글

정성일 10.10.24. 21:33

전실서벽에 그려져 있는 13명의 태수이외에 두 사람이 무릅을 꿇고 있는데 이 사람이 통사리(通事吏)라는 벼슬을 하는데 해석해 보면 통역을 하는 벼슬아치로 생각된다.
13명의 태수와 피장자가 대화를 함에 통역관이 필요했다는 뜻이다.
이 무덤은 기유년인 409년 2월 2일에 통로를 막았으니 모두 그 이전의 사실만을 기록한 것이다.
또한 내조를 온 13군의 태수 또는 관리가 유주에 속해 있고 주의 치소가 광계 지금은 계薊이며, 연국(후연)의 치소라고 하였다.
 
정성일 10.10.24. 21:53
그렇다면 전연 혹은 후연이 드나들던 나라는 어디일까?
드나드는 이유가 하례와 유주의 일에 서로 논의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피장자는 전연 혹은 후연과 매우 친했다는 것이다.
만약 고구려라면 주로 전연 혹은 후연과의 전쟁성과에 대한 기록을 주로 하였을 것이다.
물론 고구려와 연나라가 잠시 화친을 한 경우도 있었으나, 이는 잠시 휴전을 한 것이지, 화목했던 것이 아니다.
즉 이 무덤의 주인공은 백제인으로 77세까지 살았을 법한 인물은 근초고왕 밖에 없다.
전연이 멸망하고 후연이 성립하기 전에 힘의 공백기간이 있었다. 바로 그 시간을 말함이다.
 
 
라디오 10.10.25. 11:29
自冀州徙信都 更名缺 後以讖改垂

讖이 무슨 뜻인가요?

해석이 이상하군요.
 
정성일 10.10.25. 20:03
인터넷에 검색해보면 모용수의 본래이름은 모용패인데, 말을 타다가 넘어져 이가 빠져 모용수로 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위의 기록에 의하면 이가 빠져 개명한 이름은 모용결이고, 다시 후에 참언(예언)에 의하여 모용수로 개명했다는 뜻이로 풀이됩니다.
 
라디오 10.11.01. 19:48
尙書令覇 自冀州徙信都 更名缺 後以讖改垂
= 尙書令상서령 覇패는 冀州기주로부터 信都신도로 옮겨 와서, 이름을 고치는 것이 빠졌고(이름을 고치지 아니하고), 후에 讖(참)으로서 垂(수)로 고쳤다.

무당에게나 참언서를 통해서.. 개명하라고 조언을 받았나 보군요.

㉠예언(豫言)
㉡참서(讖書: 미래의 일에 대한 주술적 예언을 기록한 책)
㉢조짐(兆朕)
㉣뉘우치다(=懺)


㉠이지러지다
㉡없다
㉢없어지다
㉣모자라다
㉤부족하다(不足--)
㉥(할 일을) 빠뜨리다
㉦비다
㉧아니 하다
㉨나오지 않다
㉩빠지다
ⓐ머리띠 (규)
 
라디오 10.11.01. 19:55
/更名/缺= 이름을 고치지 아니하고, 이름을 고치는 것이 빠졌고,

이렇게 해석해야 하는군요. 정정했습니다.
 
 
라디오 10.10.25. 11:42
使良葬送之 後富及七世子孫
= 좋은 장사로 하여금 그를 보내니, 후에 富가 7세 자손까지 미쳤다.
= 좋게 장례를 치루어 그를 보내니, 후에 부유함이 7세 자손에까지 미쳤다.

이때 及= 미치다. 라는 동사입니다.
及이란 글자는 보통 주어로 물건을 받으니까, 이때 주어는 富가 되는거죠.

이런 뜻입니다.
 
 
라디오 10.10.25. 11:38
永樂十八年 문구가 나와 있으므로, 논리적으로도 저 인물은 백제인이 될 수 없는거죠. 백제인이 될려면..백제연호가 나와야 정상입니다. 그러니..님의 주장은 다른 사람에게 어필이 되지 못 하는거죠.
 
라디오 10.10.25. 13:53
우리가 할 일은 저 사람이 속했던 시대를 보다 더 깊이 조감해 보고 느끼는데 있는거죠. 異說을 주장할 대상이 아닙니다.
 
정성일 10.10.25. 20:19
371년 백제본기 기사를 보면 고구려가 군사를 일으켰다고 나옵니다.
- 여기까지는 삼국사기와 남당유고가 동일 -
그런데 이 군사가 백제를 침입해 올 것처럼 삼국사기에는 기록하고 있으나, 사실은 (전)연의 잔당을 공격하기 위해 서쪽으로 나아가기 위한 군사였습니다.
  이 말이 합당한 이유가 고국원왕은 전연에게 미천왕릉을 도굴과 어머니가 잡혀갔었는데, 원한이라면 백제보다는 연나라였겠죠.
더더군다나 370년에 전연이 전진의 부견에게 망했죠.
삼국사기에는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하였다고 나오지만, 남당유고에는 반대로 백제가 고구려를 공격했다고 합니다.
 
정성일 10.10.25. 20:32
   당시의 북방의 패자인 전진이 무서워 고구려가 전연을 공격하지 못했다는 말도 일리가 없죠.
370년에 전연이 멸망하자 모용평이 망명을 오는데, 고구려가 모용평을 붙잡아서 전진에게 바칩니다.
또한 소수림왕기에도 보면 전진의 부견이 순도를 통하여 불경과 불상을 보내줍니다.
멸망한 전연의 땅은 먼저 가지는 것이 임자여서, 전진의 승락하에 전연의 침공을 준비하였을 것입니다.
고국원왕이 군사를 막 일으키자 백제가 불의에 급습을 합니다.
13군태수 하례도라는 것을 보면 유주에 소속되며 주의 치소가 광계(계)이며 지금 연(당시 북연)의 치소라고 되어있습니다.
 
정성일 10.10.25. 20:57
13군태수는 연나라의 소속으로 보이며, 고구려나 백제에 소속되었다면, 사신 옆에 무릎을 꿇은 통사리(통역관)이 보이지 않아야 맞는 일이죠. 그러므로 피장자는 연나라 사람도 아닙니다.
덕흥리 고분을 이해할 때 가장 먼저 이해하여야 할 것이
1. 영락이라는 연호 2. 통사리(통역관) 3. 춘추77세 4. 피장되었을 당시 408-409년의 상황이죠
한가지 덧붙이자면 13군태수가 하례 이외의 목적, 유주에 관한 논의하러 왔다는 것이죠.
그리고 고구려라면 짧은 화해와 긴 반목이기 때문에 주로 전쟁기사 또는 전투신이 벽화에 남아야 합니다.
 
라디오 10.10.26. 09:31
백제와 고구려와의 관계를 깊이 있게 조사해 봐야 하는 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나 무리하게 저 피장자가 백제인일 거라는 생각은 무리입니다.

어디에 묻히는 가는 변수가 많아요.

저 피장자가 연나라출신으로 고구려에 망명 온 사람일 수도 있고,
고구려 출신이면서..연나라에 속해서..고향땅 고구려에 묻힐 수도 있고.. 변수가 많습니다.

저 사람의 관직이 國小大兄이라 나와 있기에 고구려에 녹을 먹은 사람입니다.

현재 님이 직접 해석한 것 같은데.. 해석이 부실해요.

太歲= 太歲(태세)라고 원문을 살려서 해석해야지..간지라고 해석하면 안 되요.
 
 
정성일 10.10.26. 20:10
일단은 하나하나 가능하는 것부터 천천히 접근하는 것이 순서일 것 같습니다.
해석부분도 고쳐야 할 부분이 있고, 전연 - 후연 - 북연으로 변동되는 과정을 살펴보고, 특히 전연과 후연사이의 공백기에 요동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13군태수가 누구의 소속이냐, 통사리(통역관)은 왜 유주자사와 소속의 태수 사이에 앉아 있는 것인가, 백제는 영락이라는 연호를 동진의 연호대신에 사용한 적이 있는가라는 여러 문제점에 대해 생각해 보려 합니다.
 
 
라디오 10.10.29. 20:48
요즘 다시 백제의 요서경략설이 화제가 되더군요. 제대로 할려면 을불대왕전, 미천대제기, 자치통감 3개를 동시에 보면서 해야하는 거죠. 모두 다 대작업입니다. 마음만 있을 뿐이죠. 비슷한 수준에 있는 3명이서,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같이 해야 해요. 그래야 성과가 있는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