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이덕일의 舍廊 1~5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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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 사랑] 옛 선비들의 새해 소망

 

조선일보 : 2006.01.02

  •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계해년(1803) 첫날 두 아들에게 주는 편지에서 “군자는 새해를 맞이하면 반드시 그 마음과 행동을 한 번 새롭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현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한 살 더 먹는 새해가 기쁘기만 한 것은 아니어서 이덕무(李德懋)는 ‘신사년 새해에 읊음’에서 “나이 얼마냐고 손님은 묻는데/입을 다문 채 말하고 싶지 않네(客問年多少/掩口不欲話)”라고 썼다.

     

    그러나 옛 선비는 자신의 나이보다 부모님의 연세가 더 중요하다는 점이 현재와 다르다. 택당(澤堂) 이식(李植)은 ‘새해 아침에’란 시에서 “명절이라고 보통 날과 다를 것이 뭐 있으랴”고 심드렁하면서도 “어버이 연세 더군다나 기쁘고도 두려우니/우리 형제 어찌 감히 편안함을 구하리요(親年添喜懼/與爾敢求安)”라고 말했다. 이는 ‘논어(論語)’ 이인(里仁)편의 “부모의 연세를 반드시 알아야 하는데, 한편으로는 오래 사셔서 기쁘고 한편으로는 쇠해지셔서 두렵기 때문이다(一則以喜 一則以懼)”에서 따온 것이다.

     

    새해에는 자식들이 학문에 정진하기를 바라는 마음도 현재와 같았다. 그러나 출세를 위한 학문만은 아니었다. 정약용은 가문의 몰락으로 벼슬길이 막힌 자식에게 ‘폐족(廢族)’의 후손도 ‘성인(聖人)·문장가(文章家)·참선비’가 되는 길은 막히지 않았다며 학문에 정진하라고 권고하고 있다.

     

    옛 선비들은 새해에 국사(國事)를 논하는 글을 올렸다. 계곡(谿谷) 장유(張維)는 “새해가 시작하는 때 더욱 신명(申命)의 아름다움을 맞으시기를 기원합니다”라는 글을 올렸다.‘신명’은 ‘주역(周易)’ 손괘(巽卦) 상사(象辭)에 ‘위에서는 아래의 마음을 따라 명령을 내리고, 아래에서는 위의 뜻을 좇아 따르는 것’을 뜻한다. 작년 ‘교수신문’의 사자성어(四字成語)로 화제였던 상화하택(上火下澤)의 사회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비결이기도 한데, 그 첫 시험대가 개각일 것이다. ‘아래의 마음’을 따랐는지 ‘위의 코드’를 따랐는지는 이번 개각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마음이 신명 나는지에 달려 있다.

     

     


     

    [이덕일 사랑]孝宗과 金堉의 入閣 승강이

     

    조선일보 : 2006.01.05

     

    효종이 즉위년(1649)에 우의정에 제수한 잠곡(潛谷) 김육(金堉)은 세 번이나 사양 상소를 올렸다. 효종도 이에 질세라 거듭 ‘불윤(不允)’하며 출사를 요청했다. 조선판 삼고초려(三顧草廬)였다. 그러자 김육은 “왕자(王者)의 정사(政事)는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보다 우선할 일이 없으니 백성이 편안한 연후에야 나라가 안정될 수 있습니다”라며 양호(兩湖:충청·전라)지역의 대동법(大同法) 시행을 출사(出仕) 조건으로 내걸었다.

     

     “신에게 나와서 회의하게 하더라도 말할 바는 이(대동법)에 불과하니, 말이 혹 쓰이게 되면 백성들의 다행이요, 만일 채택할 것이 없다면 다만 한 노망한 사람이 일을 잘못 헤아린 것이니, 그런 재상을 어디에 쓰겠습니까”(‘효종실록’, 즉위년 11월 5일조)라는 상소에 조정 일각에서는 왕을 압박했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김육이 ‘백성들의 다행’으로까지 평가한 대동법은 부자나 빈자나 같은 액수를 납부하던 공물(貢物)을 쌀로 통일하되 그 부과단위를 토지 소유의 다과(多寡)로 바꾸는 세법(稅法)이었다. 토지 소유자들의 세금 부담이 많아지기에 양반 지주들이 반대하자 효종은 충청 지역에 먼저 실시하는 것으로 절충했고 김육은 출사해 이를 주관했다. 그 주무관청이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선혜청(宣惠廳)인 것이 법의 성격을 보여주는데, 그 의미는 비단 빈자(貧者)를 위한 세법에 국한되지 않았다. 대동법에 따라 등장한 공인(貢人)들은 수공업자들에게 자본을 대주고 물품을 제작시키는 선대제(先貸制)를 시행했는데, 이는 상업자본주의의 초기 형태로서 일제 식민사학이 전파한 한국사 정체성론(停滯性論)을 부정하는 주요한 근거가 된다.

     

    대동법은 빈자를 위한 민생법안일 뿐만 아니라 조선 사회 전체의 발전을 이끈 생산적이고 미래지향적인 개혁법안이었던 것이다. 세 번씩이나 사양하는 사람을 삼고초려한 효종이나 무엇이 될 것인가보다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했던 김육. ‘코드’가 전면에 등장한 시끄러운 현 개각 정국에서 효종 같은 임금과 김육 같은 재상이 벌였던 350여 년 전의 흐뭇한 출사 승강이가 어찌 그립지 않겠는가.

    (이덕일·역사평론가 newhis19@hanmail.net)

     

     


     

    [이덕일 사랑] 직지세계엑스포

     

    조선일보 : 2006.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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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문신 이규보(李奎報)의 ‘동국이상국집’ 후집에는 인종 때 재상 최윤의(崔允儀) 등이 ‘상정예문(詳定禮文)’을 편찬했는데, 이를 고종 때 최우(崔瑀)가 “주자(鑄字:금속활자)로 인쇄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를 고종 21년(1234)으로 추정하는데, 독일인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발명(1450)보다 216년 앞선다. 그러나 ‘상정예문’이 현전(現傳)하지 않아서 인정받지 못하다가 1972년 파리 국립도서관에서 우왕(禑王) 3년(1377) 간행된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이하 직지)’이 발견되면서 최초의 금속활자 발명국임을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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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대학교 도서관 소장의 ‘청량답순종심요법문(淸凉答順宗心要法門)’은 이보다 이른 충렬왕 23~24년(l297∼1298)경의 것인데 발(跋) 1면(面)이 활자본(活字本)으로 추정된다. 원나라 별불화(別不花)가 자금을 댄 이 책은 주자 기술이 원나라로 유입되었음을 말해주지만, 원나라 왕정(王幀)이 ‘농서(農書)’에서 “1313년경 놋쇠로 활자를 만들었으나 실용화하지 못해 다시 목활자를 썼다”고 적은 것처럼, 주자는 고려의 독점기술이었다

     

    그러나 고려의 주자본(鑄字本)은 유학이나 불교 관련 서적으로서 역사 변동에 큰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다. 반면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는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1483~1546)의 면죄부 판매를 비판하는 ‘95개조 명제’와 라틴어·히브리어 ‘신구약성서’의 독일어 번역본을 전 유럽에 전파함으로써 유럽인의 사상을 신부들로부터 해방시켰다는 세계사적 의미가 있다.

     

    ‘직지’가 발문에서 “충청도 청주의 흥덕사(興德寺)에서 주자(鑄字)했다”고 밝히고 있는 것을 기념해 청주시에서 2009년 ‘직지세계엑스포’를 열 계획이라는 보도다. 한편 통계청은 2005년 3·4분기 가구당 도서구입비가 1만397원으로 신문 구독료를 제외하면 제로 수준이라고 발표했다. ‘직지세계엑스포’에 참가한 외국인들이 버스나 지하철에서 멀뚱멀뚱 허공만 쳐다보는 한국인들을 보고 “정말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발명국이 맞나”라고 의심한다면 부끄럽기 짝이 없다. 그 전에 전 국민적인 책 읽기 운동이라도 벌여야겠다. (이덕일 역사평론가 newhis19@hanmail.net)

     

     


     

    [이덕일 사랑] 충선왕과 김정일

     

    조선일보 : 2006.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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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26대 충선왕(忠宣王·1275~ 1325)처럼 중국 각지를 전전했던 임금도 없다. 원(元) 세조의 외손자로 연경(燕京:북경)에 만권당(萬卷堂)을 짓고 고려와 원의 학자들을 교류시켰던 그는 티베트 불교에 심취해 1319년에는 강남 저장(浙江)성의 보타산(普陀山)까지 가서 강향(降香)하기도 했다.


    하지만 1320년 원나라에 영종(英宗)이 즉위하면서 그의 불운이 시작된다. 고려 출신 환관 백안독고사(伯顔禿古思)에게 무고당해 제국의 오지인 토번(吐蕃:티베트)으로 유배되는 ‘악양의 화’[岳陽之禍]를 겪는 것이다. 이제현(李齊賢)이 원의 관료에게 “깎아지른 벼랑과 험한 길을 열 걸음에 아홉 번 비틀거리며” 추운 빙판길과 더운 열대지방을 지나, “소외양간에서 야숙(野宿)”하면서 반년 만에 티베트에 도착해 “보릿가루를 먹으며 흙방에서 거처했다”고 호소한 고난의 길이었다. 티베트와 칭하이(靑海)성 시닝(西寧) 같은 오지를 전전하던 충선왕은 이제현의 호소를 들은 승상(丞相) 배주(拜住)의 주선으로 간쑤(甘肅)성 두오스마(朶思痲)로 이배(移配)되었다. 이때 충선왕을 찾아가던 이제현은, “태산 같은 임금의 은혜 보답하지 못했으니/만 리를 달려간들 어찌 어려우리(主恩曾未答丘山/萬里驅馳敢道難)”라는 시를 남긴다. 그런데 충선왕의 신산스런 생은 그가 세자 시절 개혁을 하지 않으면 고려가 멸망할 것이라고 여기면서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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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광둥(廣東)성 광저우(廣州)와 선전(深?) 등을 방문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목적이 무엇인지 해석이 분분하다. 안팎으로 위기에 처한 북한이 사는 길은 핵 보유가 아니라 ‘맹자(孟子)’ 양혜왕(梁惠王)편의 “백성들이 고대하기를 큰 가뭄에 운예(雲霓:구름과 무지개)를 고대하듯 한다”는 말처럼 인민들을 살릴 개혁개방일 것이다. 위기해소에는 약이지만 정권에는 독일 수도 있는 개혁개방이기에 고민도 적지 않으리라. 충무공의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必死則生, 必生則死)”는 경구(警句)가 떠오른다.

    (이덕일·역사평론가 newhis19@hanmail.net)

     

     


     

    [이덕일 사랑]'왕의 남자'

     

    조선일보 : 2006.01.19

     

    화랑 사다함(斯多含)은 동성애자로 여겨졌다. ‘삼국사기’열전 ‘사다함’조는 “무관랑(武官郞)이 죽자 7일간 통곡하다가 또한 죽었다”고 전하는데, 친구 따라 죽은 것은 남색(男色) 때문이라는 추측이었다. 그러나 필사본 ‘화랑세기’는 그의 죽음이 빼앗긴 미녀 미실(美室)에 대한 상사병 때문으로 달리 기술하고 있다.


    ‘고려사’세가(世家) ‘공민왕(恭愍王)’조는 그가 꽃미남 경호부대인 자제위(子弟衛)를 설치하고 홍륜(洪倫) 등과 동성애를 나눴는데, 왕 자신이 ‘항상 스스로 여장(女裝)으로 분장(粉粧)하고’, 한번 동하면 수십 명을 갈아치웠으며, 홍륜에게 여러 왕비를 강간케 했다고까지 전한다. 익비(益妃)가 거절하자 공민왕이 칼을 뽑아 치려고 하니 왕비가 겁이 나 복종했다는 것이다. ‘고려사’열전 ‘조준(趙浚)’조는 “인도(人道)가 말살되었으니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라는 한탄도 전한다.


    그러나 조선 정조 때의 실학자 안정복(安鼎福)은 ‘동사강목(東史綱目)’고이(考異)편에서 “조준은 (조선의) 개국원훈(開國元勳)이 되었으니 그 말을 어떻게 믿겠는가? 궁중의 비밀과 방안에서 희롱한 일을 사관(史官)이 어떻게 기록하였겠는가?”라며 조선 개국공신들이 “지어낸 말을 사신(史臣)이 기록한 것”에 불과하다고 부정했다. ‘고려사’가 우왕(禑王)·창왕(昌王)을 신우(辛禑)·신창(辛昌)이라며 공민왕의 후손이 아니라고 강변하는 것처럼 조선 개창(開創)을 합리화하기 위한 창작일 가능성이 높다.


    연산군의 남색을 다룬 ‘왕의 남자’가 흥행가의 돌풍이다. 영화에서 여장 남자로 나오는 공길(孔吉)은 ‘연산군일기’ 11년 12월 29일조에 늙은 선비 장난을 하며, “임금이 임금답지 않고 신하가 신하답지 않으면…” 운운하는 논어(論語)를 인용했다가 불경(不敬)하다고 곤장을 맞고 먼 곳에 유배된 ‘배우’로 기록됐다. 이 짧은 구절을 토대로 발휘한 상상력이 연산군 시대의 역사 사실과 절묘하게 어우러지면서 흥미를 자아내는데, ‘와호장룡(臥虎藏龍)’처럼 전 세계에 통하는 한국적 사극으로 발전하기를 기대한다.

    (이덕일·역사평론가)

    출처 : 박동현工作所-모든 것은 상상력! 더 높이 나는 새는 없다.
    글쓴이 : 박동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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