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조의 가계도

2018. 3. 24. 06:14우리 역사 바로알기



      조선의 숨겨진 왕가이야기 


              조선 23대왕

순조의 가계도

조선 제23대 순조


요약 테이블
출생 1790년
사망 1834년
재위 1800년 07월 ~ 1834년 11월
순조 효명세자 (추존왕 익종) 헌종 순조의 가계도
순조의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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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자 집필자 소개

1953년 출생. 1975년 숙명여자대학교 무역학과를 졸업하고, 6년간 경일고등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했다. 문화재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뒤늦게 역사 공부를 시작했고, 현재 서울시문화관광해설사로 활동 중이다.접기

출처

조선의 숨겨진 왕가 이야기
조선의 숨겨진 왕가 이야기 | 저자이순자 | cp명평단문화사 도서 소개

조선의 왕족이 일생 동안 살았던 곳, 왕가를 알면 조선의 역사가 한눈에 보인다! 역사적 사건의 배경으로만 등장했던 왕가 이야기가 수면 위로 드러난다. 왕가라는 키워드로..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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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23대왕 , 순조의 가계도
(조선 제23대 순조)
  ㅡ 다음 백과사전


정조 이후의 왕실가계도..


(정조의 차남) 23대 순조
(순조의 손자, 익종의 장남) 24대 헌종
(정조의 동생 은언군의 손자) 25대 철종
(인조의 삼남 인평대군의 6대손, 정조의 동생인 은신군의 양자로 입적된 남연군의 손자)
26대 고종
(고종의 사남) 27대 순종




   선 제23대 왕으로, 재위기간은 1800~1834년이다. 정조의 둘째 아들로, 정조가 승하하자, 11세에 즉위하였다. 순조가 어린 탓에 대왕대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하였다. 1801년 대왕대비는 공노비를 혁파하는 등 노비해방을 추진시켰고, 서얼 유통(庶蘖流通)을 시행하여, 그들에게도 벼슬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하지만, 대왕대비는 정조 때부터 집권해 온 시파(時派)에게 보복하기 위하여 사교(邪敎) 금압을 명분으로 200여 명의 천주교신자들을 학살할 때 시파를 모두 숙청하였는데, 바로 신유박해이다.1804년 12월 순조가 친정을 시작했지만, 천주교 탄압은 계속되어, 1815년 을해박해가 일어나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죽임을 당했다.


   순조 때에는 김조순의 일문 안동김씨의 세도정권이 확립되어 과거제도가 문란해지는 등 정치기강이 무너졌고 민생은 어지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1811년 평안도에서 홍경래와 그 무리가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는데, 바로 홍경래의 난이다.  이 난은 1811년 12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약 5개월간에 걸쳐 일어났다. 순조 재위기간은 34년이었는데, 그 중 19년에 걸쳐 전염병 및 홍수 등 크고 작은 천재지변이 잇달아 발생했다. 


   순조는 안동김씨의 세도를 견제하려고 풍은부원군 조만영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아 풍양조씨 일문을 중용했으며, 1827년에는 세자에게 대리청정시키고 국정 일선에서 물러났다. 세자는 김조순 일파를 견제하면서 의욕적으로 정치의 개편을 추진하였지만 3년 후에 급서함으로써, 다시 순조가 정사를 볼 수 밖에 없었다. 1834년(순조 34) 11월 45세로 승하했다.


*서얼유통: 서자와 얼자(모두 첩의 자식으로 서자는 양첩, 얼자는 천첩의 자식)에게 가해졌던 벼슬(과거시험)에 대한 제약을 풀어줌으로써 그들도 벼슬을 할 수 있게 함 (=서얼허통)
*시파(時派): 조선 정조 시기 정조의 탕평책을 지지한 세력

*세도정치에 대하여 http://baobabstar.egloos.com/10913514
*조선후기 노비해방 http://baobabstar.egloos.com/10838500
*그림으로 한 눈에 알아보는 왕세자의 교육 http://baobabstar.egloos.com/10792133



baobabstar.egloos.com/11005007   바오밥나무가 있는 별..   발췌 ......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제23대 순조실록]:1.순조(이공,정조의차남)의 등극과 정순왕후의 수렴청정,2. 순조의 가족들|

안현상|조회 87|추천 0|2013.06.10. 08:55

[23대 순조실록]

 

1.순조의 등극과 정순왕후의 수렴청정

(1790-1834, 재위 기간 18007-183411, 344개월)

 

   19세기로 접어들면서 시작된 순조 대는 17, 18세기를 통한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로 농민층의 사회 의식이 성장하는 시기였다. 그런가 하면 세도 정치의 폐단으로 정치의 기강이 문란해져서 민생이 도탄에 빠졌고, 각종 비기와 참설이 유행하는 등 일대 사회 혼란이 일어났던 시기이다.


   순조 대의 정치적 사건의 대표적인 예는 후에 외교적인 분쟁으로까지 비화하는 천주교 박해를 들 수 있다. 벽파인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맡으며 정적인 시파와 남인들을 치기 위해 천주교를 박해한 신유박해, 순조의 친정 뒤에 이어진 을해박해 등을 통해 전국적으로 수만에 달하는 사람이 목숨을 잃는 참사가 이어졌다. 또한 홍경래의 난을 시작으로 전국 각지에서 크고 작은 민란들이 끊이지 않았던 시기였다.


   순조는 정조의 둘째아들이며, 수빈 박씨의 소생이다

1790618, 창경궁 집복헌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공, 자는 공보, 호는 순재였다. 정조와 선빈 성씨 사이에 난 문효세자가 일찍 죽자 1800(정조 24) 정월에 왕세자에 책봉되고, 이 해 6월 정조가 승하하자 7월에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한다. 그러자 영조의 계비이며 대왕대비인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정순왕후는 사도세자의 죽음에 찬동하였던 벽파의 실세 김귀주의 누이로 벽파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안 가리는 인물이었다. 옥새를 거머쥔 정순왕후는 우선 친정 6촌 오빠인

김관주를 이조참판직에 앉히고 벽파들을 대거 등용한다. 권력을 잡은 김관주, 심환지 등은 정조의 탕평을 보좌하였던 인물들을 대거 살육함으로써 벽파 정권을 수립한다. 그리고 정순왕후는 즉시 왕의 즉위를 공포하는 글에서 '척사'를 표방했다. 이는 곧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정순왕후가 천주교를 탄압하는 데에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 첫째가 왕조 체제를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군신간의 상하 관계를 중시하는 조선의 지배윤리인 유교 윤리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천주교의 위험성을 미연에 막는다는 것이요


   둘째가 천주교를 공부하거나 믿는 사람 중에 벽파의 반대파인 시파나 남인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천주교도를 잡아들이는 것은 곧 유교 윤리를 받든다는 명분도 얻을 뿐더러, 반대파인 정적을 제거하는 이중의 효과를 얻을 수 있는 일이었기에 실권을 잡자마자 척사를 단행하였던 것이다.


   순조 1년에 들어서자마자 정순왕후는 곧 천주교 금지령을 내리고, 천주교도를 잡아들이기 위해 가작통법을 썼다. 이는 본래 다섯 가구를 한 통으로 묶어서 서로 강도, 절도 같은 범법 행위가 일어나는지를 감시하고 규제하는 치안 유지법이었다. 그 방법을 천주교도 색출에 동원하여 다섯 집끼리 서로 천주교도가 있는지 감시하고 고발하게 하였다. 그 중에 한 집에서라도 천주교신자가 나오면 다섯 집이 모두 화를 입게 되는 악명 높은 오가작통법을 써서 전국을 피바다로 몰아 넣었다. 이렇게 해서 죽은 사람이 전국적으로 수만 명이 넘었는데 이 중에는 진짜 천주교 신자도 있었지만 애매하게 연루되어 죽은 이도 많았다.

 

   당시 잡혀 죽거나 귀양을 간 시파나 남인계 인물로는 이가환, 권철신, 이승훈, 정약종, 정약전, 정약용 등이 있었다. 신유년에 일어난 이 사건을 가리켜 '신유사옥'이라 하는데 이 사건으로 정순왕후는 완전한 벽파 중심의 조정을 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정순왕후가 막을 수 없었던 것은 시파였던 김조순의 딸을 순조의 비로 맞아들인 일이었다. 1800년 정조 24, 초간택, 재간택을

거쳐 정조의 뜻이 결정되었으나 정조가 갑자기 죽어 삼간택이 연기되었다. 이때 정순왕후의 6 오라비인 김관주와 권유 등의 방해가 있었으나 결국 1802년 순조 2월 왕비로 책봉되었다


   한편 왕의 친정 뒤에도 천주교에 대한 탄압은 계속되어 1815년 을해년에는 경상, 충청, 강원도의 신자들을 죽이고, 1827년에는 충청, 전라도의 교인들을 검거해 혹독한 탄압을 가하였다.

1804년 순조가 열다섯이 되던 해 대왕대비가 수렴청정을 거둠으로써 순조의 친정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곧 정조의 유탁을 받은 영안부원군 김조순 일문에 의한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김조순은 본래 정조 편에서 있던 시파계 일문이었으나, 규장각대교 당시 탕평을 건의하는 등 당색을 드러내지 않는 처신으로 벽파 세상이 된 정순왕후의 수렴청정 기간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정순왕후는 근 5년 동안의 수렴청정을 거두고 물러앉은 1년만에 죽는데, 벽파의 기둥이었던 정순왕후가 죽자 벽파는 다시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 동안 실권을 잡고 있던 김관주는 정조의 뜻을 배신한 죄와 왕비의 삼간택 방해를 방조한 죄목으로 귀양을 가다가 병사하고, 정순왕후의 오라비인 김귀주는 이미 죽고 없음에도 불구하고 정조를 해치려 한 죄목으로 역적의 율로 다스려졌다.

 

   이후로 국왕의 장인인 국구가 된 김조순은 나이 어린 왕을 곁에서 모시면서 세도 정치의 첫장을 열게 된다. 후대 사가들은 김조순이 그런 대로 청류임을 표방하여 어떤 종류의 벼슬도 사양하며 오로지 국왕의 보필에 전념을 다했다고도 하지만 벽파가 물러난 조정의 자리를 채운 것은 바로 김이익, 김이도, 김달순, 김명순 등 안동 김씨 일문이었다.

   이들이 조정의 요직을 모두 차지해 버리니 그들을 견제할 세력이 없었다. 견제 세력이 없는 정권은 부패하게 마련이다. 안동 김씨 일문이 요직에 앉아 한 가문의 영달을 위해 갖가지 전횡과 뇌물 수수를 일삼으니 공평한 인사의 기본인 과거 제도가 문란해지고 매관 매직이 이루어지는가 하면 정치 기강이 무너지고 신분 질서의 급속한 와해와 함께 왕조 사회의 위기가 도래하게

되었다.


   정치 기강이 문란해져 탐관오리 등이 횡행하고 농민층에 대한 수탈이 강화되자 농민층의 항거가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세도 정권의 성립 초기부터 시작된 농민들의 민란이 전국 각지에서 5차례에 걸쳐 크게 일어났으며, 마침내 1811(순조 11) 홍경래의 난으로 발전했다.


   서북인 차별 대우 철폐와 세도 정권의 가렴주구 혁파, 정도령의 출현 등을 기치로 내세운 이 반란은 몰락 양반과 유랑 지식인, 서민 지주층의 재력과 사상이 결합되어 나타난 대규모 반란으로서 단순한 농민 반란이 아니라, 체제 변혁까지를 도모하는 정치적 반란이기도 했다. 광산노동자, 빈농, 유민들을 봉기군의 중심 부대로 삼고서 홍경래 스스로 평서대원수라 칭하고 각지에

격문을 띄워 출병했다. 그리하여 거병한 지 열흘만에 관군의 별다른 저항도 받지 않고 가산, 정주 등 청천강 이북 10여 개 지역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곧 관군의 추격을 받은 봉기군은 그 세력이 급속히 약화되어 정주성으로 후퇴해 들어간다. 정주성으로 퇴각한 농민군은 보급로가 끊긴 채 무려 4개월 동안 관군과 대치하다가 18124월 마침내 관군에 의해 제압되었다.


   이씨 왕조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과 새로운 정치 제도를 기치로 내걸었던 이 난은 비록 실패로 끝나긴 했지만, 당시 조선 사회에 끼친 영향은 자못 큰 것이었다. 홍경래의 난은 농민층의 자각을 가져왔고 조선 후기 사회의 붕괴를 가속화시킨 사건이었다.

 

   이 밖에도 크고 작은 민란과 역모 사건이 끊이지 않았으며, 1821(순조 21)에는 서부 지방에 전염병이 크게 번져 10만여 명이라는 엄청난 숫자가 목숨을 잃었다. 또한 순조의 34년 재위 기간 19년에 걸쳐 수재가 일어나는 등 천재지변이 끊이지 않았다. 순조는 집권 초기에는 순왕후를 둘러싼 경주 김씨 일문 아래 있었고, 친정을 하게 된 15세 이후로는 장인인 김조순을

비롯한 안동 김씨 일문 아래 있었다. 순조 역시 세도 정권의 전횡을 모를 리 없었기에 풍양 조씨 조만영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아서 풍양 조씨 일문을 중용하고, 1827년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하게 함으로써, 안동 김씨의 세도 정권을 견제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또 다른 외척 세력인 풍양 조씨 일문의 세도 정권을 만들어 냈을 뿐, 균형과 견제가 이루어지는 정계 개편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이처럼 당시의 세도 정권은 당쟁이 없는 대신에 반대파가 없는 독정권으로서 민생과 사회 문제는 도외시하고 일문의 영달과 영예에만 관심을 쏟게 만들었다.


   한편 학문을 좋아한 순조는 2020책에 달하는 개인 문집인 '순재고'를 남기기도 하였으며, 학문의 발전에도 관심을 기울여 '양현전심록', '대학유의', '정조어정홍재전서', '서운관지', '동문휘고' 등을 간행하게 하였다.

순조는 34년 간의 치적을 남기고 1834114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그는 순원황후 김씨에게서 14녀를 두었으나 효명세자가 22세의 젊은 나이로 죽자 손자인 환으로 하여금 왕통을 잇게 한다. 그의 능호는 인릉으로 서울 강남구 내곡동에 있다.

 

 

 

2. 순조의 가족들 

 

   순조는 순원황후 김씨 외에 숙의 박씨가 있을 뿐이다. 순원왕후 김씨가 후에 익종으로 추존된 효명세자를 비롯하여 4녀를 낳고, 숙의 박씨가 1녀를 낳았다.

 

순원황후 김씨(1789-1857)

   

   안동 김씨 세도 정권의 창조인 영안부원군 김조순의 딸이다. 1800(정조 24) 초간택, 재간택을 거쳐 삼간택을 앞두었을 때 갑자기 정조가 죽자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의 외척 김관주와 권유 등의 방해로 위기에 처하기도 하지만 마침내 1802(순조 2) 10월에 왕비로 책봉된다.


   순원왕후 김씨는 아버지 김조순과 오라비 김좌근으로 이어지는 안동 김씨 일문의 집권에 지대한 공헌을 한다. 한때 세자비의 외척인 풍양 조씨 일문에게 정권의 주도권을 빼앗기다가 헌종 대에 이르러 다시 회복하지만 헌종이 젊은 나이에 갑자기 죽자 자손이 없는 헌종의 왕통을 누가 이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나타났다.

 

23대 순조 가계도


   정조와 수빈 박씨의 차남이 제23대 순조(1790-1834, 재위 기간 : 18007월에서 1834 11월까지 344개월이며 2명의 부인과 15녀의 자녀를 두었다. 순원왕후 김씨에게서 1 4(효명세자인 익종, 명온공주, 복온공주, 덕온공주, 일찍 죽어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한 명의 공주), 숙의 박씨에게서 1(영온옹주)를 두었다.

 

   이때 순원왕후 김씨는 조대비 일문이 미처 손을 쓰기 전에 재빨리 원상에 권돈인을 지명하고 사도세자의 증손자인 강화도령 원범(철종)을 지목하여 왕위를 잇게 한다. 또한 자신의 외가인 김문근의 딸을 왕비에 책봉함으로써 안동 김씨의 세도 정권이 절정기를 맞게 한다.


   순조와의 사이에 14녀를 두었으며 1857년 창덕궁에서 죽었다

능호는 인릉으로 서울 강남구 내곡동에 있다.

 

 

효명세자(1809-1830) 

  

   순조와 순원왕후 사이에서 났으며 이름은 영, 자는 덕인, 호는 경헌이다. 1812년 순조 12년에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며 1819년 영돈녕부사 조만영의 딸을 맞아들여 가례를 올렸다.


   1827년 부왕의 명으로 대리청정을 하였는데, 이때 그는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어진 인재를 등용하고, 형옥을 신중하게 하는 등 백성을 위한 정책 구현에 노력했으나 대리청정 4년만인 22세에 죽는다. 이때 그의 외척인 조씨 일파가 대거 등용되어 안동 김씨 일파와 정치적 세력 투쟁을 벌임으로써 정국이 혼란해지고 민생은 도탄에 빠지게 된다. 아들 헌종이 그의 뒤를 이어

즉위한 뒤 익종에 추존되었으며 1899년 고종에 의해 다시 문조익황제로 추존되었다. 능호는 수릉으로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다.



                                 (차남)의 등극과 정순왕후의 수렴청정,2. 순조의 가족들

2013.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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