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백운동 원림(園林), 사천왕사와 문두루(文豆婁) 비법, 부풍향차보(扶風鄕茶譜

2018. 3. 30. 15:46차 이야기

   

    
[4] 백운동 원림(園林)

다산은 1812년 가을, 유배지의 답답한 마음도 풀 겸 해서 제자 초의(草衣)와

윤동(尹�h)을 데리고 월출산 나들이를 한다.

옥판봉 아래 백운동 이씨의 집에서 하루 묵고 돌아와, 그곳의 12승경을 시로 읊었다.

그림 잘 그리는 초의를 시켜 '백운동도(白雲洞圖)'를 그리게 했다.

 이 시와 그림을 묶은 '백운첩(白雲帖)'이 남아 있다. 다산은 이 서첩의 끝에

역시 초의를 시켜 '다산초당도'를 남겼다.

담양의 소쇄원과 함께 강진의 백운동은 우리 전통 원림의 원형이 그대로 보존된

 몇 안 되는 별서(別墅)다. 민간 정원으로는 특이하게 집 옆을 흐르는 시냇물을

인위적으로 끌어와 뜰의 상지(上池)와 하지(下池)를 거쳐 아홉 굽이 휘돌아 나가는

유상구곡(流觴九曲)의 구조를 갖추었다. 시냇물에 술잔을 띄워 시를 지으며 노니는

유상곡수(流觴曲水)의 자취는 경주 포석정뿐 아니라 창경궁 안에도 남아있다.

 민간 정원의 것으로는 이곳의 규모가 가장 크다.

백운동 원림은 17세기에 처사 이담로(李聃老·1627~?)가 처음으로 조성했다.

이담로의 6대손 이시헌(李時憲·1803~1860)은 다산 문하의 막내 제자다.

그의 5대손인 이효천(李孝天) 옹이 지금도 백운동을 지키고 있다. 11대를 이어오며

 지켜온 유서 깊은 공간이다.

석축 유구와 화계(花階·계단식 꽃밭), 건물터의 주춧돌만 남아 있던 이곳이

최근 강진군의 꼼꼼한 복원 사업으로 본래의 제 모습을 점차 회복해 가고 있다.

 초의의 백운동 그림이 워낙 세밀한 데다 12승경을 노래한 다산의 시가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복원사업이 마무리되면 우리는 호남의 유서 깊은 정원 하나를

 되찾게 되는 셈이다.

백운동이 갖는 또 하나의 의미는 이곳이 우리 차문화의 중요한 현장이란 사실이다.

 이시헌은 이덕리(李德履·1728~?)가 지은 '동다기(東茶記)'를 필사해 세상에 전했다.

 그는 직접 떡차를 만들어 두릉의 다산에게 보내기도 했다. 일제시대 이한영이란 이가

백운옥판차(白雲玉版茶)를 만들어 판매한 곳도 이 근처다. 백운동 원림의 바로 뒤쪽은

 지금 아모레퍼시픽 다원의 너른 차밭이 자리 잡았다. 집주인은 지금도 옛 방식에 따라

 집 뒤 대밭에서 나는 야생차로 차를 덖어 가까운 이들과 나누곤 한다.

 

 

[5] 사천왕사와 문두루(文豆婁) 비법

 

668년(문무왕 8년), 신라의 운명은 한 치 앞을 가늠할 수 없었다.

 고구려를 멸망시킨 기쁨도 잠깐, 당나라 군대는 전쟁이 끝나고도 돌아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내친김에 신라까지 쳐서 아예 한반도 전체를 복속시킬 기세였다.

문무왕은 기습적인 선제공격으로 이를 막았다. 당나라가 배은망덕이라며 발끈했을 것은

불 보듯 뻔한 일. 670년 당 고종은 장수 설방(薛邦)에게 50만 대군을 주어 신라를 침공케 했다.

대군의 침공을 앞두고 전전긍긍하던 왕에게 명랑(明朗) 법사는 낭산(狼山) 남쪽

신유림(神遊林)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창건하고 법도량을 베풀 것을 주문했다.

 사정은 급박했다. 당의 대군을 실은 배들이 벌써 가까운 바다를 가득 덮고 있었다.

명랑은 채색 비단을 둘러 임시변통으로 없던 절을 만들었다.

오방신상(五方神像)은 풀로 엮어 대신했다. 그리고는 단 위로 올라가 문두루 비법을 베풀었다.

문두루의 위력은 놀라웠다. 난데없는 바람과 파도가 당나라 50만 대군을 실은 배를 일제히

침몰케 해 몰살시켰다.

문두루는 밀교의 결인(訣印)을 뜻하는 범어의 음역이다.

 '불설관정복마봉인대신주경(佛說灌頂伏魔封印大神呪經)'에 구체적 방법이 보인다.

 문두루비법은 국가적 위난과 재액을 당했을 때 중앙에 높게 단을 설치하고,

그 위에서 방위에 따라 각종 진언을 베푸는, 대단히 장엄하고 거창한 의식이었다.

이후 당나라에서 신라를 결코 얕잡아볼 수 없도록 만든 것이 바로 이 사천왕사의

 문두루 도량이었다.

국립경주박물관에서 26일부터 사천왕사 특별전이 개최된다. 여러 해 계속해온 발굴조사를

 

망라하는 전시가 될 듯하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녹유전(綠釉塼·녹색 유약을 입혀

 

구운 벽돌판) 부조상(浮彫像)의 파편들도 비로소 한자리에 다시 모이게 되었다.

 

상반신과 하반신이 따로 보관되어 있던, 투구 쓰고 갑옷 입고 화살과 칼을 든 채

 

악귀를 깔고 앉은 수호신상들이 90여 년 만에 합체되어 제 모습을 되찾은 것이다.


안팎의 국가적 위난을 한마음으로 물리쳤던 사천왕사 문두루 도량의 상징성이

 

새삼스러운 요즘이다. 그 도량 터 부조상의 합체를 계기로, 흩어졌던 마음들이

 

하나로 되모이고, 뒤숭숭한 나라 안팎의 시름도 씻은 듯이 가라앉았으면 좋겠다.

 

[6] 부풍향차보(扶風鄕茶譜)

 

18세기 실학자 황윤석(黃胤錫·1729~ 1791)은 자신의 일기 《이재난고(��齋亂藁)》에서

 

당시 부안현감으로 있던 이운해(李運海·1710~?)가 1755년경에 지은 《부풍향차보(扶風鄕茶譜)》

 

란 책을 소개했다.

 

이운해는 그때까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이웃 고창 선운사의

 

야생차를 따와서, 증세에 따라 향약(香藥)을 가미해 모두 7종의 약용 향차(香茶)를 개발했다.

 

부풍은 전북 부안의 옛 이름이다.


《부풍향차보》는 흔히 차에 관한 최초의 저술로 꼽히는 초의의 《동다송》보다

 

무려 70여년이나 앞선 의미 있는 저작이다. 〈다본(茶本)〉·〈다명(茶名)〉·〈제법(製法)〉·

 

〈다구(茶具)〉 등의 네 항목으로 구성되었다. 풍 맞았을 때와 추울 때, 더울 때와 열날 때,

 

감기 들었을 때, 기침할 때, 체했을 때 등 일곱 가지 증상에 따라 마시는 차의 종류를 구분했다.

 

풍증이 있을 때는 감국차 또는 창이자차를 마시고, 체했을 때는 산사열매를 가미한 차를

 

마시라고 처방했다.


만드는 방법은 비교적 간단하다. 6냥의 작설차에 증상별로 제시한 약초를 1전씩 함께 넣고,

 

물 2잔을 붓는다. 물이 반쯤 줄어들 때까지 졸인다. 그러면 차가 풀어지면서 약초의 향과

 

 약효가 찻잎에 배어든다. 이때 차와 향료를 고루 섞어 불에 쬐어 말린다. 원래의 저술에는

 

훨씬 풍부하고 자세한 내용이 적혀 있었을 것이다. 워낙 차에 관한 기록이 엉성한 터여서

 

이 자료의 가치가 더욱 소중하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지자체의 열성 어린 노력 덕에 지역의 특색을 살린 축제나 문화상품은

 

종류도 많아지고, 대단한 성공을 거둔 경우도 적지 않다. 부안 지역에서 지역 문화 상품의

 

하나로 《부풍향차보》의 7종 향차 세트를 개발해보는 것은 어떨까 생각해 본다.

 

차는 현대인의 필수 기호품이 된 지 오래다. 여기에 약용의 효과까지 곁들일 수 있다면

 

금상첨화가 아니겠는가.


문화재청은 지난 6월 1일 이운해가 부풍 향차를 만들기 위해 야생차를 따왔던 고창 선운산

 

도솔 계곡을 국가 지정 문화재인 명승(名勝)으로 지정예고 했다. 차제에 선운사에서

 

가꾸고 있는 너른 차밭과 연계해 잊혀진 부풍 향차의 향취를 복원할 수 있다면,

 

지역 문화 이미지 제고는 물론 지역 경제 활성화에도 기여하는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지 않을까 싶다

 

출처 : 영일서단(해맞이 마을)
글쓴이 : 古方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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