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18세기말 천문역산 전문가의 과학활동과담론의 역사적 성격*-徐浩修와 李家煥을 중심으로-

2018. 3. 31. 22:01과학 이야기

18세기말 천문역산 전문가의 과학활동과담론의 역사적 성격*-徐浩修와 李家煥을 중심으로-


문 중 양**

<차 례> 차
1. 문제 제기
2. 서호수: 중국에서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
3. 이가환: 서양 천문학이 최고
4. 서호수와 이가환 과학담론의
역사적 위치
1) 고법 중심의 18세기 중국 천문
학의 패러다임
2) 신법 중심의 이가환과 서호수의
과학담론
3) 옹방강과 서호수의 담론의 격차
5. 맺음말
1. 문제 제기
기상서(紀尙書)와 철시랑(鐵侍郞)은 옹각학(翁閣學)1)이 역상(曆象)에
* 이 논문은 2002년도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원에 의하여 연구되었음(KRF-2002
-0500-H00001).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연구교수, 과학사학
1) 청나라의 대학자 옹방강(翁方綱, 1733~1818)을 말한다. 그의 자는 정삼(正
三), 호는 담계(覃溪).소제(蘇齊)로 유용.왕문치(王文治) 등과 함께 청나라
4대 서가의 한 사람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사고전서(四庫全書)의 편찬사업에
찬수관(纂修官)으로서 참여하기도 했다. 그는 조선 학자들과의 깊은 인연으로
도 주목할 만한데, 1801년에 박제가와 만나 인연을 맺고, 1810년 경에는 김정
희와도 만나 사제의 인연을 맺었다. 그의 고서화.탁본.전적 수집 등 고증학
적 학문 방법론은 김정희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옹방강
東方學志
- 52 -
조예가 깊다고 모두 말하였다. 그러나 나는 처음에 그가 춘추삭윤(春秋朔
閏)에 힘쓴다는 말을 듣고 그가 신법(新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게 아닌가
의심했었는데, 이제 그가 보낸 발어(跋語)를 보니 더욱 그 공소(空疎)함
을 징험하겠다. 대체로 중국의 사대부들은 한갓 성률(聲律)과 서화(書畵)
로써 명예와 승진(昇進)의 계제(階梯)를 삼을 뿐이요, 예악(禮樂)과 도수
(度數)는 쓸데없는 것으로 치부해버리고, 조금 실학(實學)을 힘쓰고자 하
는 자들도 고염무(顧炎武, 1613~1682)와 주이존(朱彛尊, 1629~1709)의 남
긴 실오라기를 주워 모으는 데에 지나지 않는다. 비로소 알겠구나, 이광지
(李光地)와 같은 순수 독실함과 매문정(梅文鼎, 1633~1721)의 정밀 심수
(深邃)함은 세상에 드물게 나타날 뿐이요, 많지 않다는 것을.2)
이 인용문은 1790년(정조 14) 사은부사(謝恩副使)로 북경에 간 서
호수(徐浩修, 1736~1799)가 청나라의 대학자 옹방강(翁方綱)에게 자
신이 지은 혼개통헌도설집전(渾蓋通憲圖說集箋) 의 서문을 부탁한
것에 옹방강이 서문대신 써준 짤막한 발어(跋語)를 읽고 그 느낌을
적어놓은 글이다. 사실 서호수는 중국인 대학자 옹방강의 명성을 익
히 들어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마침 그가 사고전서 의 교정
작업을 위해서 성경(盛京, 즉 潘陽)에서 올라와 북경에 체류하고 있
던 차에 자신이 저술한 저서의 서문을 받고자 기대했던 것이다. 하지
만 그러한 기대와는 달리 자신은 추보지학(推步之學)에는 어둡다며
서문은 고사하고 짤막한 발어 만을 옹방강이 보내왔으니 서호수의 실
망이 매우 컸으리라는 것은 짐작이 갈만한 일이다.
서호수의 실망으로 약간의 화가 묻어있는 글이긴 하지만 이 글에서
우리는 어렵지 않게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읽을 수 있다. 먼저 중국
의 관료들이 천문역산에 깊은 지식을 지닌 학자라고 소개해준 옹방강
과 조선 학인과의 인연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藤塚., 추사 김정희 또 다른
얼굴 , 아카데미하우스, 1994, 101~116쪽을 참조할 것.
2) 徐浩修, 燕行紀 권3, 9월 2일 己卯條
18세기말 천문역산 전문가의 과학활동과 담론의 역사적 성격
- 53 -
이 조선의 사신(使臣) 서호수의 눈에는 신법(新法), 즉 서양 천문학
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고대의 역법에만 관심을 가지고 매달려
있는 사람으로 비쳐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서호수는 한술 더
떠서 18세기 말 당시 중국의 사대부들은 도수지학(度數之學), 즉 천
문역산학을 등한시한다고 비판하면서, 그들의 실학(實學)적인 지식의
수준은 1세기 전 고염무와 주이존, 그리고 천문역산 지식은 이광지와
매문정에도 훨씬 못 미친다고 혹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야말로
조선의 사대부 관료 서호수 눈에 비친 중국 사대부들의 지적 수준은
매우 보잘 것이 없었던 것이다.
홍대용의 연행록이나 박지원의 열하일기 등에서 잘 나타나듯이 언제
부턴가 조선의 사대부 지식인들에게 연행사절단의 일원으로 북경에 가
보는 것은 학문적으로 대단히 열망하던 기회였다. 그들은 책으로만 접
하던 선진적인 청나라의 학문을 눈으로 직접 보고, 청의 학자들과 만나
면서 새로운 학문의 세계를 가슴으로 느끼고 싶어했다. 조선의 학자들
에게 중국 청나라는 이미 야만적인 오랑캐의 나라가 아니라 고대 성인
의 문명을 이어받았으며 서양의 색다른 지식까지도 수용한 학문 세계의
메카였던 것이다. 그런데 위 글에서는 중국의 선진적인 학문을 동경하
면서 열심히 배우고자 노력하던 조선 사대부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오히려 중국의 지식인들이 형편없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으니 그야말로
18세기 당시 조선과 중국의 학문적 위상을 역전시키고 있는 셈이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진정 서호수의 눈에
비친 것처럼 옹방강에게서 볼 수 있듯이 중국 사대부 학자들의 천문
역산학은 형편없었으며, 그에 비하면 서호수는 대단한 전문가적 지식
을 지니고 있었던 것일까. 이 논문은 이렇게 잘 이해가 가지 않는 서
호수의 인식을 역사적으로 해석해 보고자 한다.
먼저 2절과 3절에서는 18세기 말 당시 조선 최고의 천문역산 분야
東方學志
- 54 -
의 전문가로 인정을 받던 서호수와 함께 그와 상당히 유사하다고 판
단되는 이가환(李家煥, 1742~1801)의 과학활동과 전문가적 모습을 각
각 살펴본다.3) 이어서 4절에서는 그들의 과학 담론을 중국의 천문역
산 전문가들의 과학 담론과의 차이에 주목해서 고찰하겠다. 그 과정
에서 우리는 조선 최고의 천문역산 전문가인 서호수와 이가환의 담론
이 중국 천문역산 연구의 학풍과 상당히 차이가 남을 알게 될 것이
다. 이러한 학풍의 차이는 서호수로 하여금 중국의 천문역산이 수준
이 낮다고 인식하게된 가장 큰 배경이었던 것이다.
2. 서호수: 중국에서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
서호수가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사대부와는 달리 ‘소학(小學)’이라고
할 수 있는 전문적인 천문역산 지식을 지닌 학자였던 데에는 가학(家
學)의 전통이 큰 영향을 준 듯하다. 서호수의 집안은 영정조대 탕평
정국 하에서 정계와 학계에서 권위와 명예를 누렸던 경화사족의 대표
적인 가문이었다. 그의 생부 서명응은4) 정조대 대제학을 지낸 문형
(文衡)으로서 관료학계의 중심에 서 있었으며, 그의 숙부 서명선(徐
命善, 1728~1791)은 노론 정치세력을 견제하는 소론 정치세력의 핵심
으로서 지위가 영의정에 오르는 등 정조의 각별한 신임을 얻으면서
정조대 탕평 정국의 중심에 서 있었다. 이와 같이 영정조대 정계와
3) 서명응과 함께 그의 아들 서호수의 천문학에 대한 전문가적인 수준에 대한
논의는 兪景老, .朝鮮時代三雙의 天文學者., 우주론 및 우주구조; 홍대용기
념 워크샵 논문집 , 천문대, 1995, 14~31쪽을 참고 할 수 있다. 또한 이가환이
천문역산 분야에 전문가적 지식을 지니고 있었다는 논의는 崔相天, .李家煥과
西學., 韓國敎會史論文集Ⅱ , 1985, 41~67쪽에 잘 나와 있다.
4) 서호수는 서명응의 長子로 태어났으나 백부 徐明翼에게 출계했다.
18세기말 천문역산 전문가의 과학활동과 담론의 역사적 성격
- 55 -
관료학계의 중심에 서 있었던 혁혁한 경화사족 집안에서 태어난 서호
수는 청나라에서 수입된 최신의 방대한 지식 정보를 누구보다 많이
가깝게 접할 수 있는 좋은 환경에 처해 있었다.
18세기 경화사족들이 수많은 서적들을 보유한 장서가들이었던 것처럼
학계와 정계의 중심에 서 있었던 서호수 집안 역시 최신의 학술 서적들
을 보유한 장서가로 유명했다. 그의 아들 서유본(徐有本)이 술회하는
바에 의하면 그의 집안엔 만 여권에 달하는 장서를 소장하여 서고를
“필유당(必有堂)”이라 이름지었다고 한다.5) 이렇게 그의 집안에서 보유
하고 있는 서적들 중에는 최신의 천문역산 분야의 서적들이 포함되어
있었음은 자명할 것이다. 실제로 1766년 3월 황윤석이 서호수 집안을 드
나들면서 본 바에 의하면 그의 집안에는 수리정온(數理精蘊) 과 역상
고성(曆象考成) 등의 천문역산 저서들이 완비되어 있었다.6) 물론 이러
한 서적들은 일찍이 정부에서 연행 사절단에 역관(曆官)을 파견해 사들
여 왔었지만7) 관료 학계와 거리를 두고 있는 일반 사대부들이 그러한
서적들을 접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한 사정은 황윤석이 의
영고(義盈庫)의 봉사(奉事)라는 하급직에 있으면서 역상고성 과 역상
고성후편 을 구해보는데 1769년부터 10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어렵게 일
부분들을 필사해 구해서 보았던 예에서 잘 알 수 있다.8)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 최신의 천문역산 서적들을 접할 수 있었던
여건 뿐 아니라 그의 생부 서명응의 영향도 매우 컸다. 서명응은 그
5)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강명관, .조선후기 서적의 수입.유통과 장서가의
출현; 18.19세기 京華世族문화의 한 단면., 민족문학사연구 9집, 1996, 182
쪽을 참조할 수 있다.
6) 黃胤錫, .齋亂藁 1책, 545쪽.
7) 예컨대 역상고성 은 1729년, 수리정온 은 1741년, 역상고성후편 은 1742년
에 사행 역관들이 왕명을 받들어 사들여 왔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노
대환, .정조대 서기 수용 논의와 서학 정책., 정조시대의 사상과 문화 , 돌베
개, 1999, 209~212쪽의 표를 참조할 것.
8) 鄭誠嬉, ..齋黃胤錫의 科學思想., 淸溪史學 9집, 1992, 162쪽.
東方學志
- 56 -
의 보만재총서(保晩齋叢書) 에 잘 나타나 있듯이 명물도수학적(名物
度數學的) 박학을 지향하는 대학자로서 그가 천문역산 분야에 해박한
전문적인 지식을 지녔음은 그의 저서 비례준(.禮準) 과 선구제(先
句齊) , 그리고 선천사연(先天四演) 에서 잘 살펴볼 수 있다.9) 특히
천체의 형체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해놓은 비례준 과 천체 운행의
원리와 계산에 대해서 서술해 놓은 선구제 는 17세기 이후 조선에
유입된 서양 천문학 지식을 소화해서 체계적으로 정리해 놓은 저술로
서는 홍대용의 수학책 주해수용 과 함께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이었
다. 천문역산 전문가로서의 서명응의 모습은 저술 활동 뿐 아니라 영
조대 1760년 전국 각 지역에서의 북극고도의 측정이 절실함을 역설하
고 주장했던 것에서도 잘 나타난다. 또한 그는 1766년 함경도에서 유
배생활시 백두산 지역을 유람하면서 즉석에서 서양식 천문 관측 기구
인 상한의(象限儀)를 만들어 그 지역의 북극고도를 측정해 보는 일화
를 남기고 있다.10) 이러한 천문역산 전문가로서 서명응의 학문적 성
향은 그의 아들 서호수에게 그대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서호수가
찬집청 낭청으로서 동국문헌비고 .상위고.를 집필할 때 서명응은
편집당상의 지위에 있었다.11) 결국 조선후기 정부가 공인하는 역상
연혁과 천문학 이론을 정리해 놓은 .상위고.는 서명응의 지도하에 그
의 아들 서호수가 집필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개인적으로 좋은 여건에서 성장한 서호수는 영조대 말
1766년 홍문관 부교리로 벼슬을 하기 시작했으며, 1776년 정조가 즉위
9) 보만재총서 등 서명응의 저서에 대한 종합적이고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
는 金文植, .徐命膺저술의 種類와 特徵., 竹夫李.衡敎授停年退職紀念論文
集 , 1996, 127~198쪽을, 천문역산 분야에 국한된 내용에 대해서는 박권수, .
徐命膺의 易學的天文觀., 한국과학사학회지 20권 1호, 1998을 참고할 것.
10) 서명응의 북극고도 측정에 대한 논의는 배우성, 조선후기 국토관과 천하관의
변화 , 일지사, 1998, 382~396쪽을 참조.
11) 승정원일기 72책, 권1303, 영조 46년 4월 18일, 921쪽
18세기말 천문역산 전문가의 과학활동과 담론의 역사적 성격
- 57 -
해서는 곧바로 도승지(都承旨)로 임명되어 정조의 측근에서 고위 관
료직을 수행한 이래 1799년 죽을 때까지 줄곧 정조대 천문역산 활동
의 중심에 서 있었다. 실로 18세기 후반 조선에서 이루어진 정부 차
원의 천문역산 활동은 거의 대부분이 그의 손에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770년(영조 46)에 이루어진 동국문헌비고 .상위고.의 편찬은 공
식적으로 드러난 서호수의 천문역산 분야 활동의 시작이었다. 동국
문헌비고 는 국왕 영조의 명에 의해서 국가적 사업으로 편찬된 100권
40책의 문헌이었다. 그 중에 .상위고.는 천문역산 분야의 문헌으로
고대 이래 조선에서의 역상(曆象)의 연혁, 우주의 형체와 구조에 대
한 역대 이론들, 천체 운행에 대한 기본적인 천문학 이론, 중요한 천
문학의 상수들(예컨대 항성경위표, 황적수도, 북극고도, 동서편도, 중
성 등), 역대의 천문의기 등과 같은 내용을 담았다. 편찬사업이 왕명
에 의해서 시작되어 국가적 사업으로 진행된 것이기 때문에 이 문헌
에 수록된 천문학 지식은 정부 내 천문역산 전문가들이 공인하는 내
용으로 채워졌다고 할 수 있으며, 천문역산 전문가를 대표해서 서호
수가 찬집청 낭청(郎廳)의 지위로서 집필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이미 영조대 말부터 조선 관료학계에서 최고의 천문역산
전문가로 인정받은 서호수는 정조대 내내 정부 차원에서 이루어진 천
문역산 활동을 관상감제조로서 도맡아 했다.12) 정조 원년(1770년) 가
을 8월에 이루어진 제정각의 혼천의(渾天儀) 중수(重修)가 바로 관상
감제조였던 서호수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1789년 국가의 표준 시간체
제를 정비한 것도 서호수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다. 물론 이때 천문관
12) 정조대에 서호수의 주도로 이루어진 천문역산 활동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선 문중양, .18세기 후반 조선 과학기술의 추이와 성격 -정조대 정부
부문의 천문역산 활동을 중심으로-., 역사와 현실 제39호, 2001, 199~
231쪽을 참조할 것.
東方學志
- 58 -
측 기구인 적도경위의와 지평일구를 제작하고, 중성(中星)과 물시계
의 표준 잣대를 바로잡은 신법중성기 와 신법누주통의 를 편찬한
실무자는 역관(曆官) 김영(金泳)이었다. 그러나 이때 천문역산 분야
에 뛰어난 재주를 지닌 김영의 재주를 알아주고 그에게 실무작업의
중임을 맡긴이는 바로 서호수였다.
1791년에는 정부 내 천문역산 활동의 대대적인 정비가 관상감제조
서호수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다. 이때 이루어진 것은 그 동안 방만해
지고 나태해진 관상감 관원들의 측우기를 통한 강우량 측정과 보고를
정식화하고 강화하는 것, 이미 영조대 서호수의 생부 서명응에 의해
서 주장된 바가 있던 전국 8도에서의 북극고도 측정과 함께 동서편도
측정을 비록 실측은 아니지만 산정(算定)한 것13)을 들 수 있다. 아울
러 관상감의 운영과 제도의 정비가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 즉 대통
추보관과 같이 1653년의 시헌력 시행에 따라 필요 없어진 관원을 150
년이 가까운 기간동안 놔둔 것을 폐지하도록 하고, 관상감 관원 선발
시험 텍스트를 태초력 이나 대연력 처럼 시헌력을 시행하기 수 백
년 전에 사용하던 것들을 없애고 최신의 천문역산 내용을 담고 있는
수리정온 과 역상고성 으로 바꾸도록 조치한 것들이 그것이다.
서호수는 이와 같이 그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일련의 천문역산 개혁
의 성과를 역관(曆官) 김영, 성주덕과 함께 1796년 국조역상고(國朝
曆象考) 라는 문헌으로 정리.편찬했다. 이 국조역상고 는 문헌비
고 의 .상위고., 그리고 그의 사후 19세기 들어 편찬된 서운관지(書
雲觀志) (1818년)와 함께 조선시대 천문역산학의 가장 중요한 문헌이
13) 전국 팔도에서의 북극고도와 동서편도의 산정은 천문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
미를 지닌다. 과거 세종대의 역법 칠정산내편이 한양을 기준으로 하는 천문상
수를 처음 시행함에 따라서 자립적인 역법체계를 이룩해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때 전국 팔도에서의 북극고도와 동서편도를 산정함으로써 전국에서의 주야
(晝夜) 시각과 절기(節氣)의 조만(早晩)을 정확하게 계산할 수 있게 되었다.
18세기말 천문역산 전문가의 과학활동과 담론의 역사적 성격
- 59 -
다. 정부 내 천문역산 부서인 관상감의 운영과 조직, 그리고 업무 내
용 등에 대해서 정리한 책인 서운관지 의 편찬자 성주덕도 서호수의
지도를 받으면서 정조대 천문역산 활동을 수행했던 역관(曆官)이었
다. 결국 조선후기 정부에서 간행한 천문역상의 대요를 정리한 문헌
세 가지가 모두 서호수의 영향하에서 편찬된 셈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정조대에 정부 차원에서 이루어진 천문역산 활동 대부분
이 관상감 제조를 줄곧 지냈던 서호수의 주도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서호수의 천문역산에 대한 지식의 깊이는 다른 일반적인
관료들과 달리 전문 과학기술 부서인 관상감의 관원들을 관리.감독하
는 수준을 넘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상위고.처럼 국가적 편찬사
업이 아니라 서호수가 개인적으로 저술한 저서들에서 잘 드러난다. 그
의 문집 사고(私稿) 14)에는 그가 저술한 문헌들이 본문은 전하지 않
고 단지 서문들만이 수록되어 있어 그 목록만은 파악할 수 있다. 그것
에 의하면 서호수는 수리정온 에 실려있는 수학 이론을 요약 정리해
놓은 비례약설(比例約說) 과 수리정온보해(數理精蘊補解) , 역상고
성 과 역상고성후편 의 내용을 정리하면서 해설해 놓은 역상고성보
해(曆象考成補解) 와 역상고성후편보해(曆象考成後編補解) , 그리고
지구설이 혼천설(渾天說)과 개천설(蓋天說)의 절충에 의해서 설명할
수 있다는 논지의 내용으로 마테오 리치의 적극적인 협력자였던 이지
조(李之藻, 1565~1631)가 저술한 혼개통헌도설(渾蓋通憲圖說) 에 대
한 해설서 혼개통헌도설집전(渾蓋通憲圖說集箋) 4책을 저술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수리정온보해 가 규장각에 남아있는 것15)을 제외
하고 서호수가 저술한 앞의 문헌들은 현존하지 않는다. 그나마 문집에
14) 이 서호수의 문집은 이화여자대학교 도서관에 和藁 (古811.085 서95)라는
제목으로 소장되어 있다.
15) 수리정온보해 의 규장각 도서 청구번호는 “奎65603”이다.
東方學志
- 60 -
서문이 남아있어 그 수록 내용이나마 파악할 수 있어 다행이다.16)
이외에도 황윤석이 1778년에 술회하는 바에 의하면 남회인(南懷仁,
서양명 Verbiest)의 의상지(儀象志) 를 모방해서 서명응과 서호수가
조선의 천문기구에 대한 저서 동국의상지(東國儀象志) 를 저술했다
고 한다.17) 그러나 동국의상지 가 현존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이 문헌
을 편찬했다는 사실조차 다른 어느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없어 현재
로서는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어렵다. 또한 서지학자 윤병태의 한국
고서종합목록 (1968)에 의하면 서호수 저술의 율려통의(律呂通義)
4책이 개성의 중경문고에 소장되어 있었다고 하며, 윤병태에 의하면
이 개성 중경문고의 율려통의 4책은 이후 김일성종합대학으로 옮겨
졌다고 한다.18) 이 율려통의 는 서명으로 보아 역상고성 , 수리정
온 과 함께 천문역산 분야의 총서인 율력연원(律曆淵源) 의 한 부를
구성하던 율려정의(律呂正義) 를 보해(補解)하는 문헌이 아닌가 추
측된다. 결국 서호수는 청대에 편찬.간행된 천문역산 분야의 총서
율력연원 을 구성하는 세 문헌 역상고성 , 수리정온 , 율려정의
에 대한 보해서를 모두 저술한 셈이었다.
이렇게 서호수는 개인적으로는 수학과 천문학 분야에서의 가장 훌륭
한 텍스트였던 율력연원 에 대한 연구.검토를 마쳤으며, 국가적으로
는 1789년과 1791년에 걸쳐 일련의 천문역산의 개혁을 주도하고 그 성
과를 1796년에 국조역상고 의 편찬으로 정리함으로써 조선 천문역산
의 기반을 탄탄하게 닦아 놓았다. 18세기 최 말기에 이르면 조선의 천
16) 서호수가 개인적으로 저술한 천문역산 분야의 문헌들이 수리정온보해 를 제
외하고 남아있지 않은 데 비해, 농업기술을 담고 있는 농서 해동농서(海東農
書) 는 현재 남아 영인되어 쉽게 참고할 수 있다. 이 해동농서 에 대한 구체
적인 논의는 문중양, 조선후기의 水利學과 水利담론 , 집문당, 2000, 118~122
쪽을 참고할 것.
17) 黃胤錫, .齋亂藁 5책, 211쪽(1778년 7월 8일조).
18) 유경로, .서사쇄록Ⅰ., 한국과학사학회지 19권 1호, 1997, 52~53쪽.
18세기말 천문역산 전문가의 과학활동과 담론의 역사적 성격
- 61 -
문역산 부서를 책임지고 있던 서호수는 상당히 자신만만했던 듯하다.
청의 역서와 조선에서 편찬한 역서에 수록된 역법의 계산이 차이가 났
을 때 조선의 역법 계산이 맞으며 청력의 계산이 틀렸음을 당당하게
지적하는 서호수의 주장에서 그러한 사실을 엿볼 수 있다.19) 과거 조
선의 천문역산은 청나라의 천문역산을 힘들게 배워오는데 급급했으며,
청력(淸曆)과 조선력(朝鮮曆)이 차이가 날 때면 그 차이가 나는 연유
를 독자적으로 밝히지 못하고 의례 연행사절단에 역관을 파견해 왜 차
이가 났는지, 또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아오게 하곤 했던 것이 종래
의 일반적인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조선의 천문역산을 주도
하던 서호수는 정조대 말기인 1790년대 말에 이르러 청나라에서 더 이
상 배울 것이 없다는 정도의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3. 이가환: 서양 천문학이 최고
이상과 같이 눈부신 천문역산 전문가로서의 서호수의 활약에 비하
면 이가환의 활동은 매우 미미한 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가환은
그의 관료 생활동안 관상감제조를 겸한 적도 없으며, 정부 내 천문역
산 활동에 관여해 일정한 역할을 한 적도 없다. 뿐만 아니라 천문역
산 분야의 지식을 담은 책을 저술하지도 않았다. 따라서 이가환이 어
느 정도로 천문역산 분야의 전문가였는지는 확증할만한 직접적인 사
료가 없기 때문에 무어라 판단하기가 곤란하다. 단지 여러 간접적인
사료들에서 이가환이 남다르게 천문역산에 깊은 이해를 하고 있었음
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20)
19) 청력(淸曆)과 조선력(朝鮮曆)이 차이가 났을 때 서호수가 보였던 반응과 대응
책에 대한 보다 자세한 논의는 문중양, 앞의 글, 2001, 226~227쪽을 참고할 것.
東方學志
- 62 -
1778(정조 2)년 2월 14일 국왕 정조가 이가환을 불러놓고 친히 경
서에서 여러 가지 궁금한 점들을 문의한 내용이 실려있는 실록의 기
록은 그러한 한 예이다. 이때 이가환은 1777(정조 1)년에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른 지 1년밖에 되지 않아 직위도 승문원(承文
院) 정자(正字)라는 정9품의 말단에 불과한 하위직 관료였다. 그럼에
도 정조는 이가환이 작성한 대책(對策)과 시권(試券)이 우수하다 하
여 특별히 불러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이다. 이 자리에서 정조는 이가
환이 상위법(象緯法, 즉 천문역산학)에 해박하다는 소문을 들었다며
천문역산에 대해 몇 가지 물었다.
그런데 이때의 기록에 나타난 문답은 아주 기본적인 질의 응답에
불과했는데도21) 이가환의 답변은 사실 만족스러운 수준이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서경(書經) “기삼백주(朞三百註)”에 나오는 옛
역법은 잘못되었을 리가 없는데 왜 고대 이후로 역법이 달라졌으며
시각과 절기의 차이가 나타났느냐는 정조의 질문에 이가환은 기삼백
의 법은 고법이고 지금의 역법은 그와 같지 않으나 어떻게 다른지는
잘 모르겠다는 답변을 하고 있다. 물론 임금 앞에서 자신의 지식이 공
소(空疎)하다고 겸손해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어느 정도의 답변은 해
야하는데 이가환은 지금의 역법, 즉 이마두와 탕약망 등의 서양 선교
사들이 전해준 서양 천문학을 응용한 신법에 대해서 들어 알고는 있
지만 그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선 정말 모르는 듯 했다. 이어지는 문답
도 마찬가지였다. 정조는 시각의 차이와 절기 조만의 차이가 고금(古
今)의 역법에 따라서 차이가 나는 것은 혹시 현재의 천체와 별의 운
20) 이가환이 어느 정도 천문역산 분야에 해박했는지 알 수 있는 사료는 1778년
2월 정조와 나눈 문답 기록( 정조실록 所收), 1789년 정조의 천문책에 응대
한 대책(對策) 기록( 錦帶殿策 ), 그리고 정약용이 서술한 그의 묘지명 기록
( 與猶堂全書 所收“貞軒墓誌銘”)이 전부이다.
21) 이하 정조와 이가환의 문답기록은 정조실록 권5, 정조 2년 2월 을사(14일)
조를 참조할 것.
18세기말 천문역산 전문가의 과학활동과 담론의 역사적 성격
- 63 -
행이 과거와 달라졌기 때문인가라고 물었고, 이가환은 역법이 정밀하
지 못해서일 뿐 천체에 있어서는 만고에 한결같다는 답변을 하고 있
다. 이 답변을 보면 고금의 역법의 차이를 자세히 알지 못한다는 앞선
이가환의 답변은 겸손의 말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케 한다. 천체의 위
치와 운행이 고금이 다르고, 그에 따라 역법의 상수가 변할 수밖에 없
으며, 역법 체계도 바뀔 수밖에 없다는 역산가라면 당연히 인식하고
있을 간단한 사실을 부인하고, 이가환은 천체란 만고에 불변하는 것이
라며 전형적인 사대부 지식인들의 인식 수준을 드러냈던 것이다.22)
이와 같은 실록 기록에 의하면 1778년경 30대 중반의 이가환은 천문
역산에 대한 어느 정도의 상식적인 지식은 갖고 있었으나 구체적이고
깊이 있는 지식을 지니지는 못했다고 조심스럽게 짐작해 볼 수 있다.
사실 이익이 일찍이 서양과학을 접하고 깊은 관심을 보였던 이래, 이가
환을 비롯한 성호 좌파의 학인들이 서양과학에 대해 본격적으로 탐구
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던 시기는 이승훈(李承薰, 1756~1801)이 북경
에서 세례를 받고 천문역산 분야의 서양 서적을 1784년 귀국 길에 가
지고 들어온 때를 전후해서였다는 사실23)을 고려하면 무리한 추정은
아닐 듯 하다. 어쨌든 언제부터 어떻게 이가환이 천문역산에 대한 해박
한 지식을 지니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파악 할 수 없으나 18세기 후반
22) 역산가와 유학자 사이에는 전통적으로 역법과 천체의 운행에 대한 인식의 괴
리가 존재한다. 즉 유학자들의 역법과 천체의 운행에 대한 인식은, 천체의 운
행은 불변하며, 불변하는 천체의 운행을 완벽하고 이상적인 역법이 구현해 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에 비해서 역산가들은 천체의 운행은 항상적으로 불규
칙하게 변해서 그것을 구현해내는 완벽한 이상적인 역법이란 있을 수 없으며,
천체의 운행이 시대에 따라 변하면서 같이 개력을 해야 한다는 인식을 지니
고 있었다. 이러한 역산가와 유학자의 인식의 차이를 고려하면 이가환이 지니
고 있던 인식은 천문역산의 전문가와는 거리가 있는 전통적인 사대부 유학자
의 입장이었다고 할 수 있다.
23) 이러한 주장은 徐鍾泰, .星湖學派의 陽明學과 西洋科學技術., 韓國思想史學
제9집, 1997, 238쪽을 참고할 것. 이 논문 232~233쪽에는 이승훈이 북경에서
가지고 들어온 서양 과학서적들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적혀있다.
東方學志
- 64 -
성호 좌파 학인들 사이에서 천문역산의 전문가로 서서히 인정을 받기
시작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한 사정은 정약용이 이가환의 묘지명에서
평한 다음과 같은 서술에 잘 나타나 있다. “이가환은 평소에 역상(曆
象)의 책을 좋아해, 일월(日月)의 교식, 오성(五星)의 복현(伏見), 황도
와 적도의 편차의 도수 등에 대하여 모두 그 원리를 통달하였고, 아울
러 지구(地球)의 경위도(經緯度)에 대해선 별도로 도설(圖說)을 그려
그것을 후배들에게 보여주곤 했다.”24) 이러한 서술을 보면 이가환은
언제부턴가 1778년과는 다르게 일식과 월식의 계산, 오성의 운행에 대
한 계산, 그리고 역법 계산에 반드시 고려해서 계산에 응용해야 하는
황도와 적도의 도수 차이에 대해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정도라면 분명 평범한 수준은 이미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1778년경에 전문가적인 천문역산 지식을 지니고 있었는지 의심스러
웠던 이가환이 1784년 무렵을 거치며 어떻게 변했는지는 1789년 정조
의 천문책에 응대한 대책(對策)에서 잘 드러난다.25) 이가환이 천문역
산 분야의 독립된 저술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천문역산 분야
의 쟁점들에 대한 그 자신의 견해를 논리적으로 서술해 놓은 이 “천
문대책”은 천문역산 전문가로서의 이가환의 모습을 가늠해 볼 수 있
는 중요한 문헌이라고 할 수 있다. 정조의 질문에는 고금의 천문역법
에서 논란이 되었던 다양한 문제들이 거론되었다.26) 예컨대 개천설과
24) 與猶堂全書 권2, 제1 시문집, “貞軒墓誌銘”, 593쪽.
25) 이가환의 “천문대책(天文對策)”에 나타난 천문역산 논의에 대한 구체적인 내
용은 崔相天, .李家煥과 西學., 한국교회사논문집Ⅱ , 1985, 53~63쪽 참고.
26) 정조가 내린 천문책은 弘齋全書 권50, 策問.天文(己酉○閣臣承旨應製).,
22b~26b쪽을 참조할 것. 이때 정조가 내린 천문책은 규장각 각신(閣臣)과 승
정원 승지(承旨)들을 대상으로 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전승지 이가
환과 이서구(李書九), 직각 이만수(李晩秀), 교리 윤행임(尹行恁) 4인에게만
응제를 명했던 것이라고 한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는 구만옥, .조선후기
천문역산학의 주요 쟁점 -正祖의 天文策과 그에 대한 對策을 중심으로-.(미간
논문)에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18세기말 천문역산 전문가의 과학활동과 담론의 역사적 성격
- 65 -
혼천설의 비교, 좌선설과 우선설의 비교와 절충, 혼의를 비롯한 역대
의 상징적인 천문의기에 대한 질문, 몽기(蒙氣)에 대한 전통적인 학
설 등을 비롯해서 분야설이나 점성술의 타당성에 이르기까지 전통 천
문학의 거의 모든 문제들이 망라되었다. 뿐만 아니라 서양의 천문학
에 관련된 문제도 빼놓지 않았다. 서양의 구중천설과 주희(朱熹)의
구중천설의 차이점, 전통역법과 서양역법에서의 주천도수(즉 365 1/4
도와 360도)와 세차설(歲差說, 즉 黃道西退說과 恒星東行說)의 비교,
그리고 전통 천문의기와 명대(明代) 상한의(象限儀)와 기한의(紀限
儀) 등 서양 천문의기와의 비교 등을 묻는 질문이 그것이었다.
이와 같은 질문들에 대해 이가환이 “천문대책”에서 설파하고 있는
것을 보면, 전문적인 서양 천문학 지식들을 이가환이 잘 인지하고 있
었으며, 그의 논증은 주로 서양 천문학의 이론들이 타당하다는 주장
들을 통해서 이루어졌음을 지적할 수 있다. 먼저 일반적인 사대부들
이 서양 과학의 내용 중에서 가장 당혹스러워 했던 지구설을 예로 들
면, 이가환은 지구(地球)의 형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설명
하고 있다. 즉 땅은 계란 노른자와 같고 하늘은 계란 껍질과 같아서
경위의 도수가 상응(相應)하기 때문에 하늘에 남북극이 있고 주천(周
天) 360도로 나누듯이 땅도 남북극이 있고 360도로 나눈다는 것이
다.27) 이러한 설명은 전통적인 혼천설에서 하늘과 땅의 형체로서가
아니라 위치 설정을 비유하는 서술로 계란에 비유하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명확하게 360도의 경위도로 나누
어지는 구형(球形)의 하늘과 같이, 땅도 남북극이 있고 360도의 경위
도로 나누어지는 구형(球形)의 형체를 지녔다는 분명한 설명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구형의 땅을 전제로 한서(寒暑)와 주야(晝夜)가
상반되는 지구상의 위치에 따른 차이의 원리를 이가환은 명확하게 설
27) 李家煥, 錦帶殿策 , .天文策., 11쪽.
東方學志
- 66 -
명했다. 즉 지면에서 북쪽으로 250리(里)를 가면 북극고도가 1도(度)
높아지고, 결국 4만 5천리 떨어지면 서로 대대(對待)의 위치가 되어
춘추(春秋)와 동하(冬夏)가 서로 반대되는 한서(寒暑) 상반의 현상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동서로도 7500리에 1시(時)의 차이가
나서, 4만 5000리가 차이나는, 즉 6시의 차이가 나면28) 밤과 낮이 반
대되는 주야(晝夜) 상반의 현상이 발생한다고 설명했다. 이와 같이
원리로 따지면 주야의 장단(長短)의 길이는 남북에 따라 차이가 나
고, 절기의 조만(早晩)은 동서의 차이에 따라 날 것이었다.29)
또한 구중천설(九重天說)에 대해서는 9중천이 종동천과 항성으로부터
금성천-수성천-태음천으로 이어지는 아홉 천체의 궤도라는 서양 천문학의
이론을 분명하게 서술하고, 나아가 궤도가 높고 낮음에 따라서 천체들간
에 가리는 현상(즉 掩食)이 생긴다는 것을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다.30)
이와 같이 지구의 둥근 형체, 그리고 천체들 사이의 공간적 거리에 대한
이해는 종래의 전통적 역법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것으로 서양 천문학의
구면(球面) 기하학적 이론에 근거한 것임이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역산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논란의 여지가 있었던 세차설(歲差
說)31)에 대해서는 더욱 정확한 설명을 하고 있다. 즉 전통 역법의 황
28) 전통 시제(時制)에 의하면 하루는 24시가 아니라 12시였다.
29) 李家煥, 錦帶殿策 , .天文策., 11쪽.
30) 李家煥, 錦帶殿策 , .天文策., 8쪽.
31) 지구의 극축(極軸)이 비스듬히 기운 채(23.5도)로 회전하기 때문에 지구의 극
축이 2만 6000년을 주기로 하늘의 북극을 선회하는데 이를 세차운동이라 한
다. 이 세차운동에 따라서 춘분점이 매년 동에서 서로 50。씩 움직이게 되고
결국 춘분점에 대하여 태양이 같은 위치로 돌아오는 주기는 태양이 항성시에
대하여 원위치로 돌아오는 주기보다 짧아진다. 앞의 것을 회귀년(태양년)이라
하며 주기는 365.2421일이다. 뒤의 것은 항성년이라 하며 주기는 365.2563일이
다. 이 차이를 세차라 한다. 서양에서는 BC 150년경 그리스의 히파르코스가
처음으로 관측했고, 중국에서는 동진(東晉, 317~420)의 우희(虞喜)가 처음 발
견했다. 한편 전통 역법에서의 세차설과 서양 역법에서의 세차설에 대한 이론
의 차이에 대한 보다 상세한 내용은 具萬玉, .方便子柳僖(1773~1837)의 天
18세기말 천문역산 전문가의 과학활동과 담론의 역사적 성격
- 67 -
도서퇴설(黃道西退說)과 서양 천문학의 항성동이설(恒星東移說) 중에
서 어떠한 세차설이 옳은가에 대해서 역산가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있
었고, 이를 정조의 천문책에서는 물었던 것인데, 이에 대해서 이가환
은 서양 천문학의 항성동이설이 타당하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 이
유에 대해서도 항성의 황도 경도는 매년 동쪽으로 움직이고 황도의
위도는 불변하지만, 적도의 경위도는 모두 불변하는 것으로 보아 항
성동이설이 옳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또한 이가환은 혼상을
제작해서 그 가운데에 황도와 적도를 그려 넣고 설명하면 어느 것이
옳은지 증험할 수 있다고 자신만만해 했다.32)
천문의기에 대한 이가환의 이해는 “시대가 흐를수록 더욱 정교해지
고 새로운 것이 차츰 발명된다(後出愈巧新義漸發)”33)는 관점에서, 역
대로 이상적인 의기라고 이해하던 혼천의(渾天儀)의 문제점을 명확하
게 지적하면서 원대(元代) 곽수경(郭守敬)의 천문의기와 명대 이후 서
양식 천문의기의 우수성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예컨대 장형(張衡)의 수격식(水擊式) 혼천의는 찬란했던 한대(漢代)
천문학의 결정판으로 매우 정교한 이상적인 천문 관측 의기로 인식되
었다. 그런데 이가환은 이러한 장형의 혼천의가 사실은 밀실에만 두고
세밀하게 관측하여 분초를 구하는 것과는 거리가 머니, 기이함을 자랑
하고 교묘함을 다투어 세상을 놀라게 할 뿐 실용(實用)과는 거리가 멀
다고 지적했다.34) 이가환의 이러한 비판의 초점은 전통적인 혼천의들
이 천체의 운행들을 잘 반영하기는 하지만 관측 기구로서는 불충분하
다는 것이다. 왕번(王蕃)의 혼천의에 대한 비판이 그러한 사실을 잘 말
文曆法論-조선후기 少論系陽明學派自然學의 一端-., 韓國史硏究 113,
2001, 97~102쪽을 참조할 것.
32) 이가환의 세차설에 대한 논증은 李家煥, 錦帶殿策 , .天文策., 9~10쪽 참고.
33) 李家煥, 錦帶殿策 , .天文策., 15쪽.
34) 위의 주와 같은 쪽.
東方學志
- 68 -
해준다. 즉 왕번의 혼천의는 장형의 것에 비하면 관측을 위한 망통(望
筒)을 중앙에 설치해 실용적이 되었으나 결국 실내에 설치하고 판옥으
로 덮어 실제의 관측에 활용하기에 불충분했다고 보았던 것이다.35)
원대 곽수경의 천문의기는 이러한 문제점들을 해결한 우수한 관측 기
구들이었다. 사용하기에 간편하고 정밀한 관측을 할 수 있는 구조였던
간의(簡儀)와 고표(高表), 그리고 영부(影符) 등이 바로 그러한 기구들
이었다. 이렇게 정밀하면서도 간편하게 관측을 할 수 있는 기구들을 우
수하다고 파악하는 이가환의 평가는 명대(明代) 서양식 기구들에도 그대
로 적용되었다. 특히 상한의(象限儀)와 기한의(紀限儀)는 전통적인 혼천
의의 문제점을 해결한 것이었다. 즉 여러 개의 환(.)이 겹겹이 둘러싸
여 복잡하게 얽힌 혼천의는 망통(望筒)을 적당히 돌려가며 관측하기에
매우 불편했으니 그야말로 오래 전부터 해결하지 못한 통환(通患)이었는
데, 평면식 관측기구인 상한의와 기한의는 그러한 문제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결국 이가환은 상한의와 기한의는 비록 너무 간략한 듯 하지만,
그 간이(簡易)함으로 천하의 지극히 번잡함을 간소화함으로써 본체(本
體)를 똑바로 파악해 낼 수 있다며 그 우수성을 높게 평가했다.36)
이와 같이 지구설이나 구중천설과 같이 일반 사대부들이 매우 당혹
스러워했던 서양 천문학의 기본적인 내용뿐 아니라, 세차설과 같이 수
준 높은 천문학 이론까지도 이가환은 서양 천문학 이론에 근거해 이해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가환이 의존하고 있던 서양 천문
학의 지식은 건곤체의 (1605년)와 같은 개설서적인 텍스트였지, 역상
고성 (1722년) 또는 역상고성후편 (1742년)과 같은 전문적인 천문학
텍스트인 것 같지는 않다. 이가환이 어떤 수준의 문헌에 의존했는지
35) 위의 주와 같음.
36) 상한의와 기한의에 대한 이가환의 설명과 우수성에 대한 평가는 李家煥, 錦
帶殿策 , .天文策., 16~17쪽을 볼 것.
18세기말 천문역산 전문가의 과학활동과 담론의 역사적 성격
- 69 -
짐작할 수 있는 예는 몇 가지 지적할 수 있다. 예컨대 혼천설과 개천설
을 절충해서 하늘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37)이나 구루(晷漏), 즉 시간을
재고 알려주는 제도가 부실함은 혼개통헌의(渾蓋通憲儀)의 제도로 해
결하자는 주장38)을 보면 이지조(李之藻)의 혼개통헌도설(渾蓋通憲圖
說) (1607년)을 그가 읽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망원경을 통해 천체를
관측하면 토성(土星)의 두 귀(兩耳)와 은하수(雲漢)가 별이 조밀하게
모여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고 한 서술39)은 분명히 탕약망(湯若望, 서
양명은 Adam Schall)의 원경설(遠鏡說) (1626년)에 의존한 내용이라
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토성을 비롯한 목성 등 오행성의 형체에
대한 서술은 대진현(戴進賢, 서양명은 Ignatius K.gler)의 도설(圖說)
에 보인다는 서술40)로 보아 그의 황도남북총성도 (1723년)의 도설을
말하는 듯하다. 또한 원(元)의 곽수경(郭守敬, 1231 ~1316)이 창안한
이후 당시까지 가장 정밀하고 유용한 관측기구로 인식되던 간의(簡儀)
와 앙의(仰儀) 대신에 상한의(象限儀)와 기한의(紀限儀)를 사용하자는
주장은 남회인(南懷仁, 서양명은 Ferdinand Verbiest)의 영대의상지
(靈臺儀象志) (1674년)에 의존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이가환은 17세기 초 이후 건곤체의 를 비롯해서 혼개
통헌도설 , 원경설 , 황도총성도 , 그리고 의상지 등 천문역법에
관심이 많은 일부 사대부 지식인들이 탐독하던 한역(漢譯) 서양 천문
학서를 읽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지면에서의 250리 거리 차이에
따라 북극고도가 1도 차이가 난다고 이해하고 있는 것을 보면 역상
고성 과 같은 전문적인 텍스트에 의존하던 서호수의 모습과는 다른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지면에 따른 북극고도의 차이는 마테오 리치가
37) 李家煥, 錦帶殿策 , .天文策., 7쪽.
38) 李家煥, 錦帶殿策 , .天文策., 21쪽.
39) 李家煥, 錦帶殿策 , .天文策., 16쪽.
40) 李家煥, 錦帶殿策 , .天文策., 13쪽.
東方學志
- 70 -
건곤체의 (1605년)에서 250리마다 1도라고 소개한 이후에 이 문헌에
의존해서 지구설을 이해하던 조선의 시대부들은 ―심지어 홍대용과
서명응 까지도― 의례 250리설을 언급하곤 했다. 그러나 그러한 천문
데이터는 역상고성 (1722년)에서 200리마다 1도로 수정되었으며, 동
국문헌비고 .상위고.(1770년)는 그러한 역상고성 의 데이터를 용인
했었다. 결국 이가환은 천문역산가들의 텍스트인 역상고성 과 그것
을 수용해 국가 공인의 천문상수로 정했던 200리설 대신에 아주 오래
전 건곤체의 (1605년)의 데이터에 머물러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역상고성 , 수리정온 , 율력연원 등 천문역산 분야의 전
문적인 텍스트를 분석해 놓을 정도의 서호수에는 못 미쳤지만, 일반
적인 사대부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천문역산에 대한, 특히 서양
천문학에 대한 깊이 있는 지식을 이가환이 지녔음은 분명했다고 할
수 있다. 조선 천문학의 중심이던 서호수가 1799년 죽고, 그를 이어서
정부내 천문역산을 자신 있게 떠맡을 적임자가 없던 상황에서 정조는
이가환에게 천문역산 분야의 책임을 맡기려 한 데에서 그러한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즉 정조가 1799년에 북경에서 책을 사다가 수리와
역상에 관한 종합적인 책을 편찬하는 큰 프로젝트를 이가환이 맡아서
하면 어떻겠는가하고 자문한 일화에서 그러한 사정을 엿볼 수 있다.
이때 정조가 편찬하려던 천문역상의 종합적인 책은 청나라의 율력
연원(律曆淵源) 에 버금가는 조선 독자의 천문역산 분야의 총서를 의
미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정조는 일찍부터 중국 청나라에서 편찬.간행
된 천문역산과 지리, 그리고 농업기술 분야의 종합적인 총서들에 버금
가는 책들을 편찬하고자 했던 듯하다. 이러한 정조의 의도는 1789(정조
13)년 신료들에게 낸 천문책(天文策)과 지리책(地理策)에서부터 드러
나기 시작했다. 정조는 천문책에서 천문역상을 등한시하는 당시 사대부
들과 신료들의 실상에 대해서 개탄하면서 천문역산에 관심을 가질 것
18세기말 천문역산 전문가의 과학활동과 담론의 역사적 성격
- 71 -
을 촉구했다. 아울러 천문역산을 발전시켜 중국과 차이가 나는 조선의
역법을 독자적으로 정립하는 방안들을 강구해 써 올리라고 독촉했던
것이다.41) 1789년부터 서호수의 주도로 시작된 천문역산 분야의 지속
적인 개혁 정책은 바로 이 천문책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리책(地理策)에서도 정조는 여지승람 과 문헌
비고 이외에 광범위한 지리학 정보들을 담아낸 종합적인 지리서가 없
는 실상을 개탄하면서 신료들로 하여금 다양한 지리학 지식을 정리해
올리라고 독촉했다.42) 1795년에는 관삼감의 명과학(命課學) 분야의 고
전인 청나라의 상길통서(相吉通書) 와 협기변방서(協紀辨方書) 를
종합적으로 검토해 협길통의(協吉通義) 라는 명과학 분야의 종합적인
텍스트를 편찬하기에 이르렀다. 농업기술 분야에서는 1798년 11월 30일
에 .권농정구농서윤음.을 통해 전국의 유생들에게 농정과 농업기술에
관한 선진적인 지식을 정리해서 올리라는 윤음을 정조는 내리고 있는
데 그것은 바로 중국의 농정전서(農政全書) 와 수시통고(授時通考)
에 버금가는 “농가지대전(農家之大全)”을 편찬하고자하는 의도였다.43)
이와 같이 중국에서 편찬.간행된 율력연원 에 버금가는 종합적인
천문역산 분야의 총서를 편찬하려는 전문적인 프로젝트를 정조는 이
가환에게 맡기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가환은 남인의 영수 채제공
(蔡濟恭, 1720~1799)도 사망해 없는 당시의 정치상황을 고려해 “시속
의 무리들이 식견이 어두워 수리(數理, 즉 천문역산학)가 어떤 학문
인지 교법(敎法, 즉 서양식 천문역산학과는 비교되는 西敎)이 어떤
법술인지 알지 못하여 한통속으로 여겨 배척하고 있으니, 이 책을 편
41) 정조의 이와 같은 언급은 弘齋全書 2책, 권50 策問天文, 26a쪽을 참조할 것.
42) 弘齋全書 2책, 권50 .勢, 19~22쪽. 이 지리책은 홍재전서 에 의하면 책문
의 제목은 “지리(地理)”가 아니라 “지세(.勢)”였다.
43)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문중양, 조선후기 水利學과 水利담론 , 집문당,
2000, 134~144쪽을 참고할 것.
東方學志
- 72 -
찬한다면 신에 대한 비방의 소리가 늘어날 뿐 아니라 장차 위로 성덕
에 누를 끼치게 될 것”44)이라며 반대의사를 피력하고 사양했다.
이 일화를 통해서 우리는 비록 이가환이 천문역산 분야의 활동을 하
거나 문헌을 전혀 남기지 않았지만 서호수의 뒤를 이을 정도로 천문역산
분야의 전문가적 지식을 지닌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가환은 그 기회를 써보지 못하고 말았다.
4. 서호수와 이가환 과학담론의 역사적 위치
이상과 같이 살펴본 18세기 후반 조선 최고의 천문역산 전문가였던
서호수와 이가환의 과학 담론이 중국의 과학 담론과는 어떻게 달랐는
지 살펴본다.
1) 고법 중심의 18세기 중국 천문학의 패러다임
주지하는 바와 같이 마테오 리치가 17세기 초 천문역산학과 지리학
을 중심으로 서양 과학을 중국에 소개한 이후 서광계와 이천경, 그리고
이지조 등의 중국인 사대부 협력자들의 큰 도움으로 예수회 선교사들
은 17세기 동안 우여곡절은 있었지만45) 흠천감에 자리를 잡으면서 천
문역산 전문가로서 중국인 관료 사회에 정착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
땅의 형체에 대한 지구설(地球說)이나 윤달의 배치에 관한 이론인 정
기법(定氣法) 등을 내용에 담은 서양 천문학 이론도 청나라의 공식 역
44) 與猶堂全書 권2, 第1 詩文集, .貞軒李家煥墓地銘., 589쪽
45) 예컨대 양광선(楊光先, 1592~1669)의 공격으로 1660년대에 아담 샬 등 흠천
감을 맡고 있던 선교사들이 쫓겨났던 예를 들 수 있다.
18세기말 천문역산 전문가의 과학활동과 담론의 역사적 성격
- 73 -
법인 시헌력(時憲曆)이 1644년에 채택되면서 중국의 천문역산 지식화
해 갔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이 중국의 전통 천문학과 서양 천문학의
대립 속에서 서양 천문학이 승리해 간다는 식의 단순한 과정으로 일어
난 것은 전혀 아니었다.46) 물론 17세기 동안에는 전통 천문학과 우주
론이 전제로 하고 있는 상관적 자연인식 체계나 기하학적 우주형상학
이 수많은 선각적 지식인들에 의해서 부정되었지만47), 그렇다고 그들
이 서양 천문역산과 우주론을 그대로 수용한 것은 전혀 아니었다. 예컨
대 고전적 상관관계의 구도를 전면적으로 부정했던 왕부지(王夫之)가
기대와는 달리 지구설(地球說)을 부정한 것이 그러한 단적인 예이다.
뿐만 아니라 누구보다도 서양 천문역산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지니고
있었던 왕석천(王錫闡, 1628~1682)은 지구설 등의 서양 천문학 이론을
수용하면서도 주역(周易)의 체제와 같은 상관관계적 구도를 활용하려
고 했던 것은 그 반대의 상황을 보여주는 예가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일견 모순되어 보이기도 하는 서양과학에 대한 17세기 중
국 학자들의 접근을 조심스럽게 일반화시켜 본다면 중국의 전통 천문
역산의 전통 속에서 서양 천문역산의 장점을 수용해 ‘회통(會通)’하려
는 접근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48) 그런데 그러한 접근은 이미 일
46) 이에 대한 유용한 참고문헌으로는 Chu Pingyi, "Technical Knowledge,
Cultural Practices, and Social Boundaries: Wan-nan Scholars and the
Recasting of Jesuit Astronomy, 1600-1800", Ph.D. dissertation. UCLA, 1994를
들 수 있다.
47) 상관적 자연인식 체계란 천지감응, 음양오행, 월령체계, 주역(周易)에 근거한
상수학 체계 등을 말하며, 기하학적 우주형상학이란 분야설, 명당설, 하락설
(河洛說) 등을 말한다. 이러한 전통적 자연인식 체계가 17세기 중국의 학자들
에 의해서 부정되는 상황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John B. Henderson, The
Development and Decline of Chinese Cosmology, New York: Columbia Univ.
Press, 1984, 특히 7~8장을 참조할 것.
48) 이러한 주장과 구체적인 내용은 林宗台, .17.18세기 서양 지리학에 대한 朝
鮮.中國學人들의 해석.,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3, 93~148쪽에 잘 나
와 있다.
東方學志
- 74 -
찍이 이지조의 혼개통헌도설 (1607년)에서 예견된 바였다. 이지조는
서양 천문학의 지구설을 중국 고법인 혼천설과 개천설의 절충으로 설
명하려 했으며, 그 과정에서 그가 전혀 의도하지 않았지만 지구설이 이
미 중국 고대의 천문역산에 유사한 내용이 있음을 담게 되었다. 이러한
이지조의 사색은 결국 1660년대 왕석천에 이르러서는 서양 천문역산이
중국 고대의 천문학을 표절한 것에 불과하다는 주장으로까지 나아갔으
며, 이러한 사색이 바로 ‘서양과학의 중국기원설’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러나 왕석천의 다소 지나친 감이 없지 않은 표절론은 단지 서양
과학에 대한 반발만으로 나온 주장은 아니었다. 그것은 중국 고대의
천문역산 분야의 문헌들에 대한 고증학적 문헌학 연구에 의존한 바가
컸다고 할 수 있다.49) 즉 17세기 초 서양 선교사들이 전해준 서양 과
학의 참신함에 많은 흥미를 가졌던 17세기 전반의 분위기는 17세기 후
반에 들어 시들해진 것에 비해서, 1660년대 양광선의 사건을 전후해서
고대의 천문역산에 대한 고증학적 연구는 깊이를 더해갔고, 그러한 고
법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를 통해서 신법과 회통하려는 학문적 분위
기가 확산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중국의 고법과 서양의 신법을 회
통하려는 시도를 가장 수준 높게 체계적으로 이루어낸 이는 바로 매
문정(梅文鼎, 1633~1721)이었으며, 그의 역학의문(歷學疑問) (1693
년)에서 중국기원론과 회통의 시도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매문정의 관점과 그 연구성과는 그의 손자 매각성(梅殼成)이 강희제
의 명에 따라서 편찬한 역상고성 과 같은 국가 공인의 문헌에서 채
택되기에 이르렀다. 결국 18세기 들어 중국 전통의 고법을 중심으로
49) 17세기 이후 중국 학풍을 고증학적 연구방법의 발전과정으로 이해하고, 그러
한 흐름을 의리학적 성리학으로부터 탈피해 가는 중국 사상사의 발전적인 모
습으로 규정하는 연구성과로 Benjamin Elman, From Philosophy to
Philology; Intellectual and Social Aspects of Change in Late Imperial China,
Cambridge Mass.: Harvard Univ. Press, 1990을 참조할 것.
18세기말 천문역산 전문가의 과학활동과 담론의 역사적 성격
- 75 -
신법, 즉 서양 역법을 회통한다는 관점, 그리고 서양 과학의 중국기원
론은 매문정과 매각성류의 산술적이고 실증적인 수리천문학의 방법론
과 함께 부정할 수 없는 패러다임으로 확고해졌던 것이다.50)
이와 같은 중국 천문역산학의 패러다임은 사고전서 (1772~1781
년)의 편찬과 완원(阮元, 1764~1849)의 주인전(疇人傳) (1799년)에
서 그대로 반영되었음은 물론이었다. 사실 1720년대에 역상고성 을
비롯해 수리정온 과 율려정의 가 편찬되어 율력연원 이 완성되고,
이어서 부족한 부분이 1742년 역상고성후편 의 편찬으로 보완되면서
서양 천문역산의 수입 이후 발전되어 전개되었던 중국의 천문 역산은
일단 총정리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18세기 중후반 중국에서의 천
문역산 연구는 중국기원론의 입장에서 주로 주비산경(周.算經) 등
과 같은 고문헌에 담긴 천문역산의 내용들을 새롭게 해석해 확인하는
작업이 주된 경향이었다.51) 서호수가 서문을 받으려고 했던 옹방강은
당시 이러한 학풍 속에서 사고전서 를 교정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
고, 그러한 작업의 과정으로 중국의 고대 이후 역대 역법들 간의 차
이점들을 비교 분석하는 연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2) 신법 중심의 이가환과 서호수의 과학담론
그런데 옹방강이 속해 있던 18세기 중 후반 중국의 이와 같은 학풍
과 비교해서 조선 최고의 천문역산 전문가 서호수와 이가환은 어떠한
관점에 서 있었던가? 먼저 중국기원론에 대해52) 이가환에게서는 분명
50) 매문정의 관점과 방법론이 18세기 국가공인의 것으로 정착되는 과정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는 Chu Pingyi, 앞의 글, 1994, 224~239쪽을 참조할 것.
51) 18세기 중후반 중국에서의 천문역산 연구의 이러한 모습은 흡사 토마스 쿤
(Thomas Kuhn)의 패러다임 정착 이후에 정상과학(Normal Science)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모습을 보는 듯하다.
東方學志
- 76 -
한 입장을 살펴볼 수 있다. 이가환은 .천문책.에서 서양 천문학의 지구
설은 처음 듣는 자들이 놀랄만한 주장이지만 증자(曾子)와 선거이(單
居離)의 문답이나 혼천설에서의 계란 노른자 비유 등에서 볼 수 있듯
이 이미 중국 고대에 있던 내용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53) 사실 이러
한 예들은 17세기초 마테오 리치가 지구설을 소개하면서 건곤체의 에
서 거론했던 것으로 마테오 리치는 지구설을 처음 접한 중국인들이 거
부감을 가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고대인들도 유사한 주장을 했었다
는 식으로 서술했었다. 그러나 중국 학자들은 마테오 리치의 기대와는
정반대 입장에서 서양의 지구설을 이해했던 것이다. 이러한 중국 학자
들의 입장을 조선의 이가환도 그대로 되풀이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가환의 중국기원론적 시각은 심각하지도 않았고, 중국 천문
역산가들 처럼 중국 고대의 역법에 대한 자부심이나 학문적 관심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이가환이 바라보는 고법과
신법에 대한 신뢰의 무게 중심은 완전히 신법으로 치우쳐 있었다. 그가
“천문대책”에서 조선 천문역산학의 부흥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으로 제
시한 역상의 근본과 의기(儀器)를 바로잡아야 한다(正曆象之本, 正曆象
之器)는 주장의 핵심은 결국 서양의 천문역산을 전폭적으로 수용하자
는 것이었다. 서양 천문학의 계산법과 원리를 적용한 시헌력이야 말로
중국의 역대 역법 중에 천행(天行)과 합치하는 가장 정밀한 역법이라
고 보았고, 서양 산술 계산법과 천문학 내용을 담은 수리정온 과 역
상고성 등의 책을 오로지 천문 데이터를 익혀 활용하는 데에만 그치
지 말고, 책에 담긴 이론을 깊이 있게 연구하면 천체 운행의 소이연(所
52) 18세기 조선 학자들의 중국기원론에 대한 논의는 盧大煥, .正祖代의 西器受容
논의 -‘중국원류설'을 중심으로-., 韓國學報 94, 1999, 126~168쪽이 유용하다.
53) 李家煥, 錦帶殿策 , .天文策., 16~17쪽. 지구설 뿐 아니라 구중천설도 굴원
(屈原)의 초사(楚辭) 에 나오는 구중천과 주자(朱子)의 구중천설에 이미 나
온다는 주장을 이가환은 하고 있다.
18세기말 천문역산 전문가의 과학활동과 담론의 역사적 성격
- 77 -
以然)의 이치가 환히 밝혀질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54) 심지어 이가
환은 전통 역법 중에서 가장 우수하다고 평가받는 수시력(授時曆)에
대해서도 비판적으로 보고 있다. 즉 수시력이 역대 역법 중에는 비교적
의기(儀器)의 관측을 통한 경험에 의존한 우수한 역법이기는 하지만,
곽수경(郭守敬)이 창안한 간의(簡儀)나 앙의(仰儀)는 그 설법(說法)이
매우 용렬한 것이어서 베르비스트의 의상지 에 나오는 상한의(象限
儀)나 기한의(紀限儀)에 비할 바가 못된다는 것이었다.55)
중국의 고전적 역법, 즉 고법에 비해 서양의 천문학, 즉 신법에 대한
신뢰를 지녔던 이가환의 관점은 서호수에게서는 더욱 강하게 드러난다.
이가환이 중국기원론을 큰 무게를 두지 않고 가볍게 서술하는 식으로 넘
어갔음에 비해, 서호수는 중국기원론을 동조하는 직접적인 언급을 한 적
이 없다. 단지 “동주(東周)의 주인(疇人, 즉 천문역산가)들이 흩어져서
천문역산이 수 천년간 불명(不明)했다”56)는 언급만 할 뿐 서양 천문학
의 내용들과 중국 고대 천문역산가들과의 어떠한 연관도 언급하지 않았
다. 매문정의 정식화된 주장은 고대의 주인(疇人)들이 지니고 있었던 이
천문역산이 그들이 흩어지면서 서양으로 흘러 들어갔고, 서양인들이 그
것을 이어받아 의기(儀器)와 수학적 방법을 이용해 발전시켰다는 논리였
는데, 서호수는 그러한 중국기원론의 논리를 따르지 않았던 것이다.
서호수는 이와 같이 매문정의 중국기원론의 논리를 따르지 않았을
뿐 아니라 고법을 중심에 두고 신법의 장점을 수용해서 중서(中西)의
천문역산을 회통하려는 매문정의 관점도 따르지 않았다. 서호수의
수리정온 과 역상고성 에 대한 신뢰가 절대적이었음은 그의 .수리
정온보해.와 .역상고성보해인.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수리정온 을
54) 李家煥, 錦帶殿策 , .天文策., 20~21쪽.
55) 李家煥, 錦帶殿策 , .天文策., 16쪽.
56) 徐浩修, 私稿 , .比例約說序..
東方學志
- 78 -
수학적 계산법만을 수록한 것이 아니라 그 소이연의 이치까지도 환하
게 밝혀놓았으며, 그랬기 때문에 보는 자마다 쉽게 이해할 수 있고
듣는 자마다 쉽게 활용할 수 있으니 실로 실용을 바로잡는 책(正實用
之書)이요 세상 일을 구제하는 도구(濟事之具)로 평가했다.57) 역상
고성 에 대해서는 역대의 모든 역산을 겸수(兼修)해서 중서(中西)의
천문학을 회통한 책으로 평가했다.58)
물론 역상고성 을 중서의 천문역산을 회통한 책으로 평가한 것은
매문정과 그의 손자 매각성이 의도했던 바를 제대로 파악한 것이다.
그러나 강조의 무게중심은 전혀 다른 곳에 가 있었음을 다음의 인용
문에서 잘 알 수 있다.
역상고성 의 수(數)와 이(理)는 모두 태서(泰西)의 선비 제곡(第谷,
즉 Tycho Brache)이 실측한 것이다. 무릇 법(法)과 수(數)를 말한 것
이 중국과 서양이 동일하지만 서력(西曆)이 중력(中曆)에 비해 뛰어난
것은 수(數)를 말함에 반드시 그 이(理)를 밝혔기 때문이다.59)
이 글은 두 가지 점에서 매문정의 중서(中西) 회통의 관점과 상반되
고 있다. 하나는 역상고성 의 수(數)와 이(理)가 모두 티코 브라헤가
실측한 것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관점이며, 또 하나는 서양 천문학과
중국 천문학이 법(法)과 수(數)에서는 동일하지만 그 이치를 밝히는 것
에 있어서는 서양 천문학의 원리가 훨씬 뛰어나다는 것이다. 이러한 서
호수의 입장은 .비례약설서.에서는 더욱 분명해서 “ 수리정온 이라는
책은 수람(收攬)이 넓고 부분(部分)이 심광(深廣)해서 학자들이 두루
살펴 진구(盡究)할 수 없을 정도이다. (중략) 그러하니 무엇하러 고법
57) 徐浩修, 私稿 , .數理精蘊補解序..
58) 徐浩修, 私稿 , .曆象考成補解引..
59) 徐浩修, 私稿 , .曆象考成補解引..
18세기말 천문역산 전문가의 과학활동과 담론의 역사적 성격
- 79 -
(古法)을 기다리겠는가”라고 했다.60) 이는 수리정온 에 담긴 수학지식
이 내용이 매우 깊고 넓어서 중국의 전통적 수학이 필요 없다는 말이다.
이와 같은 서호수의 입장은 중국 학자들의 관점에서 볼 때 가히 과
격하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매문정의 뒤를 이은 천문역산의 대가로
대진(戴震, 1723~1777)의 스승이기도 했던 강영(江永, 1681~1762)이
서양 역법의 윤달 배치법인 정기법을 옹호하면서 서양 천문학이 중력
(中曆)에 비해 우월하다는 주장을 한 이후 중국 학자들로부터 받은
공격을 생각해 보자. 그로 인해 강영은 매각성(梅殼成)이나 전대흔
(錢大昕) 같은 동시대의 학자들로부터 큰 배척을 받았으며, 완원은
주인전 에서 강영을 매우 부정적으로 묘사했던 것이다.61) 아마도 중
국의 학자들이 서호수의 이 .수리정온보해.와 .역상고성보해인.을 읽
었더라면 심대한 공격을 했을 것임은 자명할 것이다.
3) 옹방강과 서호수의 담론의 격차
이제 옹방강과 서호수의 예를 살펴보자. 서호수는 혼천설과 개천설
을 비교하면서 지구설을 알기 쉽게 이론적으로 설명해 놓은 자신의
저서 혼개통헌도설집전 을 옹방강에게 보여주면서 서문을 부탁했다.
옹방강은 당시 사고전서 를 교정하는 작업을 하면서 중국 역대의 천
문역산을 비교.검토하는 연구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호수의 저서
가 유용하리라 생각하고 4~5일 빌려달라고 자청하면서, 진(晉) 나라
원개(元凱)의 장력(長曆)과 당(唐) 나라 일행(一行)의 대연력(大衍
曆) 중에 어느 것이 우수하냐고 질문을 던졌다. 이에 서호수는 비교
60) 徐浩修, 私稿 , .比例約說序..
61) 이와 같은 강영의 과학담론과 그에 대한 중국 학인들의 반응에 대한 흥미로
운 내용은 Chu Pingyi, 앞의 글, 1994, chap.4, "Chiang Yung vs. Tai Chen",
244~330쪽을 참조할 것.
東方學志
- 80 -
적 긴 대답을 하고 있는데, 다음과 같은 서호수의 입장은 옹방강을
당혹하게 만들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서호수는 원개의 장력(長曆)과 대연력 모두 올바르지 못한 역법이
라면서 다음과 같이 부정적으로 평하는 대답을 옹방강에게 주었다.
한나라의 태초력(太初曆)은 황종(黃鐘)에서 수(數)를 일으켰고, 당나
라의 대연력(大衍曆)은 대연지수(大衍之數), 즉 시책(蓍策)에서 수(數)
를 일으켰으니 역(易)에서 역(曆)을 찾으려 한 것입니다. (중략) 대체
로 악(樂)과 역(曆), 역(易)과 역(曆)의 이(理)는 일관하지 않음이 없
으나, 그 법은 아주 다른 것이니 결코 억지로 갖다 붙여서 현혹하게 만
들어서는 안될 것입니다.62)
즉 이를 보면 서호수가 대연력을 주역(周易)의 체계에서 비롯된 상
수학적인 수(數) 개념에 입각한 역법으로서 견강부회해서 현혹시킨
옳지 않은 역법으로 혹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대연력에
대한 부정적 비판은 원개의 장력에도 마찬가지여서 전통적인 역법에
서의 역의 기원을 잡는 방법인 적년법(積年法)이 견강부회한 것에 불
과하다는 식으로 전통적인 역법에서의 중심되는 원리들을 부정했다.
결국 서호수는 장력이나 대연력과 같은 전통 역법의 잘못은 서양 역
법을 연구하면 분명히 드러날 것이기 때문에 숭정역지 나 역상고
성 을 두루 참고하라고 조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서호수의 답변은 옹방강이 질문한 의도와 너무나 빗나가 있
었음은 매문정 이래 당시 중국 천문역산의 상황을 고려하면 자명하다
하겠다. 서호수의 답변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전통적 역법의
이치가 잘못되었다는 주장을 늘어놓았으며, 서양 역법에 근거해서 그
러한 잘못을 바로 잡을 수 있다고 한 것이다. 옹방강이 언제 전통 역
62) 徐浩修, 燕行紀 권3, 8월 25일 癸酉條.
18세기말 천문역산 전문가의 과학활동과 담론의 역사적 성격
- 81 -
법과 서양 역법 간의 차이에 대해 물었던가? 장력과 대연력의 우열이
어떠냐고 물었는데, 둘 다 잘못이고 서양 역법이 옳다고 답변했으니
옹방강의 입장에서는 갑자기 봉변을 당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조선국의 사신이 아닌가. 옹방강은 앞서 인용한 바와 같이 천문역산
에 대해서는 자신이 무지하니 서문을 써 줄 수 없다면서 정중히 사양
했다. 옹방강의 서문을 받지 못한 서호수는 결국 이 절의 서두에서
인용한 바와 같이 옹방강이 고대의 역법에만 매달리는 것으로 보아
신법, 즉 서양 역법에는 문외한이며, 중국의 사대부들은 천문역산학을
등한시한다고 불평을 늘어놓았던 것이다. 이로써 중국과 조선의 대학
자들 사이의 의견 교환은 끝나고 말았다.
5. 맺음말
이상 정조대 최고의 천문역산가로 알려진 서호수와 이가환 각각의
활동과 저서, 그리고 사료를 통해서 그들의 천문역산 전문가로서의 실
상을 살펴보았다. 서호수는 그야말로 18세기 조선을 대표하는 최고의
천문역산 전문가였다고 할 수 있다. 정부 내의 천문역산 정책을 주도
했을 뿐 아니라 17,18세기 중국 천문역산학을 집대성한 율력연원 모
두를 연구 검토했으니 가히 조선의 매문정이라 할만 하겠다. 그런데
이러한 서호수는 북경에서 옹방강 같은 중국 학인들을 만나본 후에는
중국의 천문역산이 예전 같지 않게 수준이 낮다고 인식했으며, 중국의
역법에 비해서 조선의 역법이 전혀 뒤지지 않는다는 자부심을 당당하
게 지니기에 이르렀다. 이가환은 서호수에 비하면 활동이나 저술에서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미미했다. 그러나 서호수 사후에 그의 뒤를
이어 천문역산을 책임질 수 있는 역량을 지닌 천문역산 전문가로 정
東方學志
- 82 -
조로부터 인정을 받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아쉽게도 곧 이어 정조와
그 자신이 세상을 떠나면서 그러한 기대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와 같이 조선 최고의 천문역산 전문가로 인정을 받던 서호수와
이가환의 과학 담론을 17세기 이래 중국에서의 과학 담론의 전개 속
에서 위치 지워 보았다. 그러한 비교를 통해서 서호수와 이가환은 중
국의 학자들에 비해서 서양의 역법, 즉 신법에 대한 신뢰가 매우 컸
음이 드러났다. 그들에게 서양의 역법은 계산이 정밀하거나 실용적인
차원에서 매우 유용한 정도 이상이었다. 그것은 역법의 이치를 환하
게 밝혀낸 우수한 역법으로 중국 고대 성인의 이상적인 역법을 능가
하는 것이었고 중국 고대의 역법에 기원을 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와 같이 그들이 전통 천문역산에 큰 신뢰를 보냈던 중국의 학자들
과 달리 서양의 천문역산에 절대적인 믿음을 지녔다고 해서 동시대
중국 학자들의 천문역산 보다 앞섰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지는 않
을 것이다. 중국인 학자들의 눈에 비친 조선의 학자 서호수와 이가환
은 매문정 이후 18세기 중국 천문역산학에서 정착된 패러다임, 즉 중
국의 고전적인 천문역산의 체계 하에서 서양의 유용한 천문역산 지식
을 수용해 하나로 회통(會通)하려는 패러다임과 그러한 패러다임 하
에서의 정상과학 활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학자들로 인식되었
을 수도 있다. 그들이 가장 뛰어난 천문역산가로 평가했던 매문정의
패러다임을 그들은 따르지 않고 거부하지 않았던가.
핵심어 : 서호수, 이가환, 과학담론, 천문역산학, 18세기 후반 조선
18세기말 천문역산 전문가의 과학활동과 담론의 역사적 성격
- 83 -
<Abstract>
The Scientific Activities and Discourse of Some
Scholar-Officials on Mathematical Astronomy in the Late
Eighteenth Century Korea:
S. Hosu (1736-1799) and Yi Kahwan (1742-1801)
Moon, Joong-Yang*
63)
S. Hosu (徐浩修) and Yi Kahwan (李家煥) were the premier specialists
of mathematical astronomy during the reign of King Ch.ngjo (r.
1776-1800). S. did not only lead central government policies on astronomy
but having extensively studied and researched 17th and 18th century
astronomy, he may be considered Chos.n's equivalent of China's Mei
Wen-ting (梅文鼎, 1633-1721). However, after going to Beijing and meeting
prominent Chinese scholar-official such as Wen Fang-kang (翁方綱,
1733-1818), he concluded that the Chinese experts in mathematical
astronomy had declined in quality since the past, and came to believe that
Korean astronomers were more advanced than their Chinese counterparts.
Compared to S., Yi Kahwan was not his equal in terms of his activeness
and skill. However, he was recognized as the successor to S.'s intellectual
legacy who would carry on the development of astronomy, something which
he was unfortunately unable to accomplish before his death.
This paper viewed scientific discourse of S. Hosu and Yi Kahwan,
recognized as the two foremost specialists on astronomy in the late 18th
* Research Professor of History of Science, The Academy of Korean Studies,
Sungnam, Korea.
東方學志
- 84 -
century Korea, in this manner within the development of Chinese paradigm
of astronomy since the 17th century. Chinese astronomers such as Mei
Wen-ting had tried to accept and apply Western astronomy to a classical
Chinese paradigm from the early seventeenth century until the middle of
the nineteenth century. The theory that Western sciences came from
Chinese origins was the result of this approach to Chinese astronomy.
However, Korean astronomers such as S. Hosu and Yi Kahwan did not
accept this theory of Chinese origins. Compared to their Chinese
counterparts, they relied much more on Western scientific methods, or what
was called "the new method" (sinb.p), yet this was not restricted to
calendrical sciences or in other more utilitarian aspects of Western
astronomical science. However, having a belief in the absolute superiority of
Western astronomy, could it be said that Chinese astronomy was inferior to
their own? This was certainly not the case. There were simply different
perspectives on the Western and Chinese sciences among Korean and
Chinese astronomers which allowed specialists like S. to criticize Chinese
and their astronomical methods, and retain a belief in the superiority of
Korean calendrical sciences at one time.
Key Words: S. Hosu, Yi Kahwhan, Scientific Discourses, Mathematical
Astronomy, the Late Eighteenth Century Korea

출처 :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
글쓴이 : 樂民(장달수)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