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다(煎茶)에 대한 고전문헌 자료 ㅡ 13

2018. 4. 15. 01:34차 이야기



전다(煎茶)에 대한 고전문헌 자료 ㅡ 13 





청음집 제6권 / 칠언율시(七言律詩) 164수(一百六十四首)    ㅡ  김상헌(金尙憲)



 은대(銀臺)에서 이자시(李子時)의 영설(詠雪) 운을 차운하다 이름은 이민구(李敏求)이다. [銀臺次李子時詠雪韻 名敏求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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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눈이 옥제 궁궐 장엄하게 꾸몄는데 / 曉雪粧嚴玉帝宮
해가 처음 떠오르자 봄빛이 확 퍼지누나 / 日華初動乍春融
봉지 못에 날아 내린 난새 거울 속 엿보고 / 鳳池飛下鸞窺鏡
계수나무 날아온 학 바람 속에 춤을 추네 / 鷄樹飄來鶴舞風
초나라의 고가를 또 누가 다시 화답하랴 / 楚國高歌誰更和
양원에서 읊은 옛 부 그 역시도 없어졌네 / 梁園舊賦亦成空
쓸쓸하니 홀로 앉아 차 달이는 곳에서는 / 蕭然獨坐煎茶
이는 시흥 파수 동쪽 아득 멀리 달려가네 / 詩興迢迢灞水東
[주-D001] 이민구(李敏求) : 
1589 ~ 1670.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자는 자시(子時)이며 호는 동주(東洲)ㆍ관해(觀海)이다. 이괄(李适)의 난 때 도원수(都元帥) 장만(張晩)의 종사관이 되어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으며, 이후 대사간, 승지, 임천 군수(林川郡守), 이조 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소임을 다하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아산(牙山)에 유배되었다가 영변(寧邊)으로 옮겨졌으며, 풀려난 뒤에는 대사성, 도승지, 예조 참판 등을 지냈다. 문장에 뛰어나고 사부(詞賦)에 능하였을 뿐 아니라 저술을 좋아해서 평생에 쓴 책이 4000권이 되었으나 병화에 거의 타버렸다. 저서로는 《동주집(東洲集)》, 《독사수필(讀史隨筆)》, 《간언귀감(諫言龜鑑)》, 《당률광선(唐律廣選)》 등이 있다.
[주-D002] 봉지(鳳池) : 
중서성(中書省)의 별칭인데, 흔히 대궐 안을 뜻하는 말로도 쓰인다.
[주-D003] 계수(鷄樹) : 
중서성을 가리킨다. 《삼국지(三國志)》 권14 위서(魏書) 유방전(劉放傳)에 “대궐 안에 닭이 깃들이는 나무가 있었는데, 그때에 유방이 중서에 있었으므로 후인들이 이것으로 인하여 중서성을 계수라 하였다.” 하였다.
[주-D004] 초(楚)나라의 고가(高歌) : 
전국 시대 초나라의 고아(高雅)한 가곡으로, 일반적으로 고상하고 아취 있는 곡이나 아름다운 시를 말한다. 초나라 서울 영(郢)에서 어떤 사람이 노래를 잘 불렀는데, 처음에는 보통 유행가인 하리(下里)ㆍ파인(巴人) 같은 것을 불렀더니 같이 합창하여 부르는 자가 수백 명이 있었다. 그러나 품격이 높은 노래를 부르니 따라서 합창하는 자가 10여 명에 지나지 않았고, 양춘(陽春)ㆍ백설(白雪)이라는 최고급의 노래를 부를 적에는 따라 부르는 자가 아주 없었다. 이로 인해 후대부터 초설(楚雪)은 고아한 악곡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주-D005] 양원(梁園) : 
서한(西漢)의 양효왕(梁孝王)이 세운 동원(東園)으로, 옛터가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개봉시(開封市) 동남쪽에 있는데, 원림(園林)의 규모가 굉장하여 사방이 300여 리나 되며 궁실이 서로 잇달아 있다.
[주-D006] 파수(灞水) : 
장안(長安) 동쪽에 있는 강으로, 그 강에 있는 다리를 파교(灞橋)라고 하는데 버드나무가 많고 경치가 아름답다. 당나라의 정계(鄭綮)가 시를 잘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상국(相國)은 요즈음 새로운 시를 얻었는가?” 하고 묻자 그는 “시흥(詩興)은 파교에서 풍설(風雪)을 맞으며 나귀를 몰아가는 때라야 떠오른다. 어찌 이런 데서 될 법이나 할 말인가.” 하였다. 《北夢瑣言》




재상열전 강직한 의기로 나라의 절개를 지키다

김상헌

청음(淸陰), 金尙憲  

   국가를 경영하는 데는 상황에 따른 유연한 판단력과 결정도 필요하지만, 도리를 중히 여기며 이를 현실 정치로 끝까지 실현하고자 하는 강직함도 필요하다. 병자호란 때 화의를 주장한 주화파에 맞서 의리를 중요시하며 끝까지 척화를 내세워 절개를 굳건히 지킨 이가 있으니 김상헌이 바로 그 사람이다.


   김상헌의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숙도(叔度), 호는 청음(淸陰)이다. 아버지는 돈녕부도정 김극효(金克孝)이고, 형은 우의정 김상용(金尙容)이다. 어린 시절 윤근수(尹根壽)에게서 수학했다. 1596년(선조 29) 정시문과에 급제해 부수찬, 좌랑, 부교리를 지내고, 1608년(광해군 즉위년) 문과중시에 급제해 사가독서한 뒤, 교리, 응교, 직제학을 거쳐 동부승지가 되었다.

그러나 1615년(광해군 7)에 지은 〈공성왕후책봉고명사은전문〉이 광해군의 뜻에 거슬려 파직되었다. 김상헌은 인목대비의 서궁 유폐 등에는 반대하면서도 인조반정에는 나서지 않았다. 그러나 인조반정 후 다시 등용되어 대사헌, 대사성, 대제학을 거쳐 육조의 판서를 두루 역임했다.

   병자호란 때 끝까지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다 인조가 청에 항복하자 파직되었다. 1639년(인조 17) 삼전도비를 부쉈다는 혐의를 받고 청나라에 압송되었다가 6년 만에 풀려났으며, 귀국 후 좌의정에 올랐다. 사후에 서인 정권이 유지되면서 절개를 지킨 대로(大老)로 추앙받았다.

강직한 언론 활동으로 출사와 파직을 반복하다

   김상헌은 안동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이황의 문인이었던 윤근수에게서 수학했다. 타고난 성품이 강직하여 한번 품은 뜻은 굽힐 줄을 몰랐다. 과거에 급제하고 관직에 나가서도 출사와 파직을 반복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광해군 대에 동부승지에 오른 김상헌은 당시 실세 정인홍(鄭仁弘)이 자기의 스승 조식(曺植)을 옹호하고 퇴계를 규탄하는 상소인 〈회퇴변척소(晦退辨斥疏)〉를 올리자 이를 비판하는 글을 썼다.


   신들이 삼가 우찬성 정인홍의 차자를 보건대, 선정신(先正臣) 이황이 일찍이 자기 스승인 고(故) 징사(徵士) 조식의 병통을 논한 일과 고 징사 성운(成運)을 단지 ‘청은(淸隱)’이라고만 칭한 것을 가지고, 화를 내면서 당치 않게 헐뜯었다는 등의 말을 하는가 하면 이말 저말을 주워 모아 한껏 지척을 했고, 선정신 이언적까지 언급하면서 그를 마치 원수 보듯 했습니다.
아, 인홍은 그의 스승을 추존하려다가 저도 모르게 분에 못 이겨 말을 함부로 한 나머지, 도리어 그 스승의 수치가 되고 말았습니다.
《광해군일기》 권40, 광해군 3년 4월 8일 
    

   정인홍의 차자는 선현을 모함한 사특한 글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광해군은 “사람은 저마다의 소견이 있는 법이니, 굳이 몰아세워 억지로 자기에게 부화뇌동하게 할 것은 아니다.”라며 자신의 정치적 세력 기반인 대북파의 정인홍 편을 들어 상소를 못마땅해했고, 김상헌은 이를 알고 사직했다.

   후에도 출사와 파직을 반복했는데, 1615년(광해 7)에는 사과(司果)로서 작성한 공성왕후(恭聖王后)의 책봉 고명(誥命)에 대한 사은 전문에 “어머니가 자식으로 말미암아 귀해짐을 생각한다.”, “삼가 허물을 보면 어진지의 여부를 알 수 있다는 데 관계된다.”는 등의 말이 신하가 쓸 수 있는 말이 아니라 하여 관직을 삭탈당하기도 했다. 인목대비의 서궁 유폐 사건이 일어나자 김상헌은 의리에 어긋나는 일이라며 폐모론을 격렬히 반대하면서 낙향했다.


   김상헌은 김류, 최명길 등이 적극적으로 참여한 인조반정에도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군주를 폐출하고 새 임금을 세우는 일이 도리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서인은 인조반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공서(功西)와 참여하지 않은 청서로 나누어졌다. 김상헌은 청서파의 영수 격이었다. 공서와 청서의 대립은 인조 7년을 전후해 김류의 노서(老西)와 최명길의 소서(少西)로 나누어졌다. 그런데 병자호란 때 다시 조정 신료들은 척화파와 주화파로 나뉘어졌으며, 김상헌은 대표적인 척화파였다.


   한편 명분과 도리를 중시하는 김상헌은 인조의 아버지 정원부원군의 추숭 문제가 거론되었을 때도 대의에 어긋나는 일이라면서 반대를 했다.


   전하께서 조정의 의논을 물리치시고 추숭하는 일에 마음을 굳혀 기어이 전례를 거행하고자 하시니, 만약 그렇게 하신다면 대원군의 신주를 올려 부(祔)하고 성종 대왕의 구묘(舊廟)를 체천해 철거해야 합니다. 대원군은 전하의 친(親)이며, 성종의 신하이며 자손입니다. 올려서는 안 될 신하와 자손을 올리는 일과 조천(祧遷)해서는 안 될 임금과 할아버지를 철훼(撤毁)하는 일이야말로 등급을 폐기하고 명분을 무너뜨린 것이니, 묘사(廟社)의 변치고 어느 것이 이것보다 더 크겠습니까.
《인조실록》 권26, 인조 10년 2월 18일 
    

   대사헌으로 재직하면서는 “첫째 사사로운 욕심을 끊어 성상의 옥체를 보양할 것, 둘째 효과있는 은덕을 실천하기에 힘써서 하늘의 경계에 조심할 것, 셋째 언로(言路)를 넓혀 듣고 보는 바를 널리 구할 것, 넷째 궁궐의 드나드는 자를 엄히 단속할 것, 다섯째 번잡한 일을 덜어 백성들의 수고를 늦추어 줄 것, 여섯째 훌륭한 장수를 가려 뽑아 변경의 수비를 튼튼히 할 것”의 여섯 조목을 상세하게 들어 왕의 정사에 대해 꼼꼼하게 건의하기도 했다.

선비의 도리로 화의를 반대하다

   광해군 대에는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중립정책을 취해 중국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 후금과의 충돌이 없었다. 그러나 인조반정으로 국면은 크게 바뀌었다. 새로 정권을 잡은 서인들은 대북 정권의 중립정책을 버리고 친명반후금(親明反後金)정책을 천명했다. 그리하여 후금과의 외교 관계를 단절하자 후금과 조선 사이에는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마침내 명나라와 대치하는 상황에서 조선의 후방 공격을 우려하고 있던 후금은 1627년(인조 5) 1월 압록강을 건너 조선을 침략했다. 이것이 정묘호란이다. 평양에 도착한 후금군은 화의를 청해 왔다. 인조는 강화도로 피란을 갔고 후금의 사신이 다시 와서 화의를 청하니 인조는 어쩔 수 없이 최명길 등의 의견을 받아들여 후금과 형제의 맹약을 맺고 강화에 응했다. 하지만 이는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조선에서는 화의를 주도한 주화파들을 비난하는 상소가 잇달았고, 후금과의 국교를 단절하자는 논의가 일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세는 조선에게 유리하게 돌아가지 않았다. 1636년(인조 14) 봄,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스스로 황제라 칭하며 사신을 보내 ‘군신의 예’를 다하라고 통보해 왔다. 조정은 발칵 뒤집혔고 다시 사신을 죽여 조선의 뜻을 알려야 한다는 척화파와 힘이 부족하니 화의를 해야 한다는 주화파가 첨예하게 대립했다. 인조가 우유부단하게 왔다갔다하는 사이 청이 요구한 최후의 시한을 넘겼고 급기야 병자호란이 터지고야 말았다.

   미처 강화로 피란하지 못한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몸을 피했고, 청나라에서는 군사력을 앞세워 화친을 요구했다. 그러나 김상헌은 여전히 ‘명분을 잃는 것은 모든 것을 잃는 것’이라며 윤집, 오달제, 정온(鄭蘊), 홍익한(洪翼漢) 등과 함께 격렬하게 척화를 주장했다. 인조 역시 주전론에 마음이 기울었으나 날은 춥고 성은 점점 고립되어 결국 항복을 결정했다.

대표적인 주화파였던 최명길이 항복 문서를 작성할 때 예조 판서였던 김상헌은 뛰어들어 국서를 갈기갈기 찢고 통곡했다. 그리고 인조에게 이렇게 아뢰었다.


   명분이 일단 정해진 뒤에는 적이 반드시 우리에게 군신의 의리를 요구할 것이니, 성을 나가는 일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한번 성문을 나서게 되면 또한 북쪽으로 행차하게 되는 치욕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니, 군신이 전하를 위하는 계책이 잘못되었습니다. 진실로 의논하는 자의 말과 같이 왕과 세자가 마침내 겹겹이 포위된 곳에서 빠져나오게만 된다면, 신 또한 어찌 감히 망령되게 소견을 진달하겠습니까. 국서를 찢어 이미 사죄(死罪)를 범했으니, 먼저 신을 주벌하고 다시 더 깊이 생각하소서. 신이 어리석기 짝이 없지만 성상의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는 압니다. 그러나 한번 허락한 뒤에는 모두 저들이 조종하게 될테니, 아무리 성에서 나가려 하지 않더라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예로부터 군사가 성 밑에까지 이르고서 그 나라와 임금이 보존된 경우는 없었습니다. 진 무제(晋武帝)나 송 태조(宋太祖)도 제국(諸國)을 후하게 대우했으나 마침내는 사로잡거나 멸망시켰는데, 정강(靖康)의 일에 이르러서는 차마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당시의 제신(諸臣)들도 나가서 금의 왕을 보면 생령을 보전하고 종사를 편안하게 한다는 것으로 말을 했지만, 급기야 사막에 잡혀가게 되자 변경에서 죽지 못한 것을 후회했습니다. 이러한 지경에 이르게 되면 전하께서 아무리 후회하신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인조실록》 권34, 인조 15년 1월 18일 
    

   인조는 김상헌의 말을 듣고 한참 동안이나 탄식하면서 말했다.

“위로는 종사를 위하고 아래로는 부형과 백관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이 일을 하는 것이다. 경의 말이 정대하다는 것을 모르지 않으나 실로 어떻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다. 한스러운 것은 일찍 죽지 못하고 오늘날의 일을 보게 된 것뿐이다.” 하니 주변의 신하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고 소현세자 또한 목 놓아 울었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인조가 청의 황제 앞에 무릎 꿇고 항복하자, 김상헌은 원통함을 이기지 못하고 자진을 시도했지만 성공하지는 못했다. 《병자록(丙子錄)》은 그 일을 이렇게 전한다.


   어떤 사람이 와서 예조 판서 김상헌이 스스로 목을 매어 거의 죽게 되었다고 알려 주기에 급히 가 보니 얼굴빛이 죽은 사람과 다를 바가 없었다. 달려가 목맨 것을 풀었는데 얼마 후 다시 가죽 허리띠로 목을 매는 것이 보이기에 다시 말렸다. 간신히 사람을 붙여 자결할 수 없게 한 후에야 마음을 놓았고 이튿날 척화를 주장한 신하들을 오랑캐 진영에 보내기 위한 논의가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자결할 마음을 버렸다. 김상헌이 거짓으로 죽으려 하는 체했다는 말이 있지만 이것은 김상헌의 인품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나만갑, 《병자록》 
     

   척화신으로 자신이 잡혀가려고 자결을 그만두었지만, 청나라에는 젊은 척화파 윤집과 오달제 등이 가게 되었다. 김상헌은 울분을 삼키며 안동으로 내려가 학가산(鶴駕山) 아래 칩거했다.

청나라도 인정한 절개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에 항복한 후 김상헌은 안동으로 내려가 학가산 아래 칩거했다. 그러나 국가의 안위를 걱정하는 마음까지 닫은 것은 아니었다. 1639년(인조 17)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출병을 요구해 오자 김상헌은 반대 상소를 올렸다.


   근래 또 떠도는 소문을 듣건대 조정에서 북사(北使)의 말에 따라 장차 5,000명의 군병을 징발해 심양을 도와 대명(大明)을 침범한다고 합니다. 신은 그 말을 듣고 놀랍고 의심하는 마음이 정해지지 못한 채 그렇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로부터 죽지 않는 사람이 없고 망하지 않는 나라가 없는데, 죽고 망하는 것은 참을 수 있어도 반역을 따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전하께 어떤 사람이 “원수를 도와 제 부모를 친 사람이 있다.”고 아뢴다면, 전하께서는 반드시 유사(有司)에게 다스리도록 명하실 것이며, 그 사람이 아무리 좋은 말로 자신을 해명한다 할지라도 전하께서는 반드시 왕법(王法)을 시행하실 것이니, 이것은 천하의 공통된 도리입니다.
《인조실록》 권39, 인조 17년 12월 26일


   싸우다가 안 되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리고, 나라가 망하더라도 명의를 지켜야 나라를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 요지였다. 그러나 김상헌은 삼전도비를 부쉈다는 혐의를 받고 청나라에 끌려가게 되었다. 그때 그가 청으로 가면서 지었던 시조가 있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냐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하여라. 
  

   고국을 떠나면서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착잡한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예순아홉 노구(老軀)의 몸으로 끌려간 김상헌을 청나라 사신 용골대가 심문했다.

“정축년의 난에 국왕이 성을 나왔는데도 유독 청국을 섬길 수가 없다 했고, 또 임금을 따라 성을 나오려 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무슨 의도였는가?”

용골대의 물음에 김상헌은 조금도 굽히지 않고 말했다.

“내 어찌 우리 임금을 따르려 하지 않았겠는가. 다만 노병으로 따르지 못했을 뿐이다.”

“주사(舟師)를 징발할 적에 어찌하여 저지했는가?”

용골대가 다시 물었다.

“내가 내 뜻을 지키고, 내가 나의 임금에게 고했는데, 국가에서 충언을 채용하지 않았다. 그 일이 다른 나라와 무슨 관계가 있기에 굳이 듣고자 하는가?”

용골대를 비롯한 청인들이 감탄했다.

“조선 사람은 우물쭈물 말하는데 이 사람은 대답이 매우 명쾌하니 감당하기 어려운 사람이다.”


   김상헌이 심양의 감옥에 갇혀 있을 때는 마침 주화파의 대표인 최명길도 명나라와 내통했다는 죄목으로 갇혀 있을 때였다. 조선 땅에서는 척화파와 주화파로 서로 대립했던 두 사람은 이때 시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마음을 이해했다. 최명길은 김상헌에게 “그대의 마음은 돌과 같아서 마침내 구르기가 어렵고, 나의 도는 가락지 같아서 시의에 따라 믿음이 바뀐다.”는 시를 보내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기도 했다.


멀리서 그리워한 지 몇 해이던가.
오늘에야 기쁘게 서로 만났네.
스스로 돌아보면 둔하고 어리석기 짝이 없는데
그래도 너그러운 도량으로 용납했네.
주옥같은 말들은 하나하나 통하고
마음의 막이 한 겹 두 겹 걷히기에
좋은 술을 마시지 않더라도
참으로 도(道)의 기운이 짙어만 가네
  

최명길의 시에 김상헌은 다음과 같이 차운(次韻)했다.


세상사란 본래 어긋남이 많지만
인생에는 만남도 있다네.
어찌 반드시 득실을 비교할 필요가 있으리오.
다만 종용(慫慂)하게 있는 것이 옳도다.
술 떨어지고 돈도 부족한데
추위 누그러지자 취막(毳幕, 흉노의 천막)이 무겁게 여겨지네.
새로 지은 시를 번갈아 서로 화답하니
병든 눈에도 먹물 자국은 뚜렷이 보이도다. 
  

   적국의 감옥에서 같은 사형수의 입장이 되어 많은 시를 주고받으며, 서로 방법은 달랐으나 결국 나라를 위하는 마음에는 다름이 없음을 이해하게 되었던 것이다. 최명길은 김상헌이 그저 이름을 내려는 사람이라고 의심했는데, 죽을 자리에서도 절개를 지키는 것을 보고 그 의리 있음을 믿게 되었으며, 김상헌도 최명길이 청나라의 감옥에서 끝내 굴복하지 않는 것을 보고 역시 충정을 이해한 것이다.


   그러나 본디 두 사람의 성향은 다르니 1644년(인조 22) 청나라가 북경을 함락한 후 이듬해 세자와 봉림대군들과 함께 돌아올 때 김상헌과 최명길은 역시 다른 모습을 보였다. 청의 장수 용골대는 그들을 돌려보내면서 황제가 있는 서쪽을 향해 절을 하라고 했다. 최명길은 김상헌을 끌어당기면서 함께 절하자고 했으나 김상헌은 허리가 아프다는 핑계로 절을 하지 않았다. 최명길만 4배를 하니 용골대는 김상헌을 노려보다 물러갔다.


   때로 나라를 지킬 힘이 없는데도 의리만을 내세우며 척화를 주장한 척화파를 비판하기도 하지만 청나라는 김상헌은 물론, 척화론자로 청에 잡혀간 윤집, 오달제, 홍익한 등의 굽히지 않는 절개를 보고 “조선을 정복할 수는 있어도 통치할 수는 없다.”고 감탄했다고 한다. 그러니 왕이 항복을 하고도 나라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주화파의 적절한 대응력에 더해 김상헌과 같은 척화파의 꼿꼿한 선비정신이 존재했기 때문이라 할 것이다.


김상헌의 《설고시첩》

병자호란당시 척화를 주장하다가 심양에 볼모로 잡혀간 김상헌이 볼모 생활을 하는 동안에 지은 한문 기행 시첩이다. 심양에 함께 잡혀갔던 조한영(曺漢英, 1601~1637년)이 편찬했다.


대로로 추앙을 받다

   청나라에서 귀국한 뒤 김상헌은 인조에게 좌의정과 영돈녕부사 등을 제수받았으나 곧 나이가 들어 사직을 고하고 낙향해 은거했다. 실록에는 청나라 경중명(耿仲明)이 우리나라 사람을 만나면 반드시 김상헌의 안부를 묻고는 칭찬하기를 “동국에는 김 상서(金尙書) 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했다. 또 명나라 예부 상서 이사성(李思誠)은 이자성(李自成)의 난리에 절개를 굽혀 각형(脚刑)을 면치 못했는데, 그가 우리나라 역관을 만나서 “김 상서는 별고 없는가? 나는 지금까지 구차하게 살아남아 있다.”면서, 자기의 다리를 어루만지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효종이 등극한 뒤 서인의 명분론이 우세해지면서 김상헌은 대로로 추앙받았으며, 좌의정에 다시 제수되기도 했다. 그의 졸기에는 그의 성품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사람됨이 바르고 강직했으며 남달리 주관이 뚜렷했다. 집안에서는 효도와 우애가 독실했고, 안색을 바루고 조정에 선 것이 거의 50년이 되었는데 일이 있으면 반드시 말을 다하여 조금도 굽히지 않았으며 말이 쓰이지 않으면 번번이 사직하고 물러갔다. 악인을 보면 장차 자기 몸을 더럽힐까 여기듯이 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공경했고 어렵게 여겼다. 김류가 일찍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숙도를 만날 때마다 나도 모르게 등이 땀에 젖는다.” 했다.
《효종실록》 권8, 효종 3년 6월 25일 
    

   조선 후기 문예부흥을 이끌었던 정조가 김상헌에 대해 내린 평가도 주목할 만하다. 정조는 《홍재전서(弘齋全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청음(淸陰)의 바른 도학과 높은 절의를 우리나라에서 존경할 뿐 아니라 청나라 사람들도 공경하고 복종했으니 문장은 나머지일 뿐이다. 내가 그를 말할 때는 고상(故相)이라 하지 않고 선정(先正)이라고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정조, 《홍재전서》 
    

   선정이라는 용어는 정암 조광조, 퇴계 이황, 율곡 이이 등 문묘에 배향된 몇몇 사람에게만 선별적으로 쓰는 학자로서의 최고 존칭으로 학문에 뛰어났던 정조가 김상헌의 학문을 알아보고 내린 평가라고 할 수 있다.


   눈앞의 이익을 버리고 뜻을 굽히지 않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나라가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목숨을 걸고 절개를 지킨다는 것은 더더욱 쉬운 일이 아니다. 그가 손수 지은 묘비명에 그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지성은 금석에 맹서했고
대의는 일월처럼 걸렸네.
천지가 굽어보고 귀신도 알고 있네.
옛것에 합하기를 바라다가
오늘날 도리어 어그러졌구나.
아, 백 년 후에 사람들
내 마음을 알겠구나. 
  

   그의 바람처럼 우암 송시열의 주자학 지상주의가 노론의 집권 명분이 되면서 김상헌의 절개는 추앙받았으며 그의 가문 또한 세도가문으로 오래 영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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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무 집필자 소개

1937년 충북 괴산에서 출생하여 서울대 문리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사학과를 거쳐 국사학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국민대학교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 대학원 교수로 있으면서 미국..펼쳐보기

출처

재상열전
재상열전 | 저자이성무 | cp명청아출판사 도서 소개

표면적으로는 2인자의 자리에 있었지만 정치적으로 1인자였던 조선의 재상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때로 당쟁을 정국으로 분열시키고, 때로 국란의 혼돈 속에서 우왕좌왕하기도..펼쳐보기


전체목차

강직한 의기로 나라의 절개를 지키다 , 김상헌
(청음(淸陰), 석실산인(石室山人))









청음집 제15권 / 명 찬 송(銘贊頌) 5수(五首)     ㅡ  김상헌(金尙憲)



동식서과송(冬食西苽頌) 갑신년 11월에 심관(瀋館)에 있으면서 지었다. [冬食西苽頌 甲申十一月在瀋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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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에서 자라나던 종자였는데 / 西方之種
유사 건너 멀리까지 흘러왔다네 / 遠過流沙
중국 땅에 건너와서 심어졌다가 / 來植中土
사방으로 멀리까지 퍼져 나갔네 / 布蔓四遐
들밭에서 자라나서 잘 익어서는 / 成於埜圃
올려져서 신선 사는 집에 있었네 / 薦在仙家
이곳에는 병든 노인 한 사람 있어 / 爰有病叟
머리카락 세어 온통 희고 희다네 / 白髮皤皤
긴긴 밤이 다 새도록 잠 못 드는데 / 長夜無眠
눈앞에서 번쩍번쩍 불꽃 일었네 / 火迸秋波
눈을 씹어 먹어 봐도 충분치 않고 / 嚙雪不足
갈증 나서 얼음 먹길 생각하였네 / 思竭氷河
상공께서 그 소식을 전해 듣고는 / 維相公聞之
껄껄대며 너털웃음 웃으시었네 / 乃發呵呵
자신 입에 안 대고 날 생각했으니 / 舍口念我
베풀어 준 그 은혜가 크고도 크네 / 厥惠孔嘉
모양새는 마치 푸른 옥과 같은데 / 體如靑玉
쪼개 보니 속은 붉은 노을과 같네 / 剖似丹霞
한 입 베어 우적우적 씹어 먹으니 / 咀之嚼之
서리런가 눈이런가 차고도 차네 / 霜耶雪耶
내 가슴속 상쾌하기 그지없어서 / 爽我心胸
나의 병이 완전히 다 나아 버렸네 / 痊我沈痾
맞상대가 될 만한 게 결코 없으니 / 決無與敵
그 기쁨이 과연 정말 어떠하겠나 / 其喜如何
말 듣건대 먼 옛날에 부잣집에선 / 昔聞豪貴
더위 당해 온갖 호사 다 부렸다네 / 當暑華奢
물에 참외 둥둥 띄워 시원케 한 일 / 浮苽取凉
아직까지 자랑삼아 전하여지네 / 尙爾傳誇
한 문공은 연밥 생각 간절하여서 / 韓公藕實
태화봉의 꼭대기만 선망하였고
/ 徒羨太華
도곡은 또 빈한했던 선비였기에 / 陶穀儒酸
단지 차를 달일 줄만 알았었다네
/ 但解煎茶
수박 읊는 노래 지어 읊조리자니 / 我作此頌
찬 기운이 돌아 이가 덜덜 떨리네 / 寒生齒牙
문을 열고 문 바깥을 바라다보니 / 開戶視之
지붕마다 눈이 잔뜩 쌓여 있구나 / 雪屋嵯峨
눈을 감고 한밤중에 앉아 있자 마치 석화(石火)가 번쩍번쩍 일어나는 것과 같았으므로 ‘화병추파(火迸秋波)’라고 하였다.
[주-D001] 유사(流沙) : 
사막(沙漠)으로, 서역(西域)을 일컫는 말로 쓰인다.
[주-D002] 물에 …… 일 : 
더위를 식히기 위한 즐거운 피서 방법 중의 하나이다. 삼국 시대 위나라의 조비(曹丕)의 시에 “맑은 샘물에 단 참외를 띄워 놓고, 찬물에 붉은 오얏을 담궈 놓았네.〔浮甘瓜於淸泉 沈朱李於寒水〕” 하였다.
[주-D003] 한 문공(韓文公)은 …… 선망하였고 : 
한 문공은 당나라 때의 문장가인 한유(韓愈)를 가리킨다. 한유의 고의(古意) 시에 “태화봉 산꼭대기 옥정에 있는 연은, 꽃 크기가 열 길이고 뿌리는 배와 같네. 차갑기는 서리와 눈 달기는 꿀과 같나니, 한 조각만 입에 물어도 묵은 병이 싹 낫네.〔太華峯頭玉井蓮 開花十丈藕如船 冷比雪霜甘比蜜 一片入口沈痾痊〕” 하였다.
[주-D004] 도곡(陶穀)은 …… 알았었다네 : 
도곡은 송나라 때 사람으로, 자는 수실(秀實)이다. 후주(後周) 때 한림학사(翰林學士)로서 송 태조(宋太祖)가 등극(登極)한 후 예부 상서(禮部尙書)를 역임하였으며, 《청이록(淸異錄)》 2권을 찬하였다. 도곡이 일찍이 눈 오는 날에 미인을 데리고 눈을 녹인 물에 차를 달여 마신 고사가 있다. 《宋史 卷269 陶穀傳》
[주-D005] 석화(石火) : 
돌을 서로 마주칠 때 번쩍하고 일어나는 불꽃을 말한다.





청장관전서 제9권 / 아정유고 1(雅亭遺稿一) - 시 1   ㅡ 이덕무(李德懋)



관재(觀齋)에서 차를 마시면서 윤증약(尹曾若)ㆍ유혜보(柳惠甫)와 함께 지음 [觀齋茗飮。與尹曾若,柳惠甫共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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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윤달의 그믐이라니 / 秋閏纔云晦
세월은 가고 아니 멈추네 / 年光駛不停
석류는 병든 나무에 곱게 열리고 / 榴房姸病樹
맹꽁이는 뒤뜰에 울어대누나 / 一部沸幽庭
복은 남겨 아이에게 주고 / 惜福貽童穉
시청은 아껴 마음 수양하게 / 頤神嗇視聽
사복시 우물물로 차달이니 / 瀹茶司僕井
값어치 남령에 비길레라 / 銖兩扺南靈


[주-D001] 남령(南靈) : 
차[茶]끓이기에 제일 좋다는 물. 《전다수기(煎茶水記)》에 “차 끓이기에 적합한 물이 7등급이 있는데, 양자강(揚子江)의 남령수가 제일 좋다.” 하였다.





  *** 이덕무 (李德懋)  :  1741(영조 17), 서울  ~ 1793(정조 17)


요약    조선 후기의 학자. 규장각에서 활동하면서 많은 서적을 정리하고 조사하여 교정하였고, 고증학을 바탕으로 한 많은 저서를 남겼다. 대표작으로 <칠십 리 눈길을 걷고>, <이서구에게 보내는 편지>가 있다.


   규장각에서 활동하면서 많은 서적을 정리·교감했고, 고증학을 바탕으로 한 많은 저서를 남겼다. 본관은 전주. 자는 무관(懋官), 호는 아정(雅亭)·청장관(靑莊館)·형암(炯庵)·영처(嬰處)·동방일사(東方一士). 아버지는 통덕랑(通德郞) 성호(聖浩)이다. 서자로 태어났다.

   어려서 병약하고 집안이 가난하여 정규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으나, 총명하여 가학으로 문리(文理)를 터득했다. 약관의 나이에 박제가·유득공(柳得恭)·이서구(李書九)와 함께 〈건연집 巾衍集〉이라는 시집을 내어 문명을 중국에까지 떨쳤다. 이후 박지원(朴趾源)·박제가·홍대용(洪大容)·서이수(徐理修) 등 북학파 실학자들과 교유하면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또한 고염무(顧炎武)·주이존(朱彛尊)·서건학(徐乾學) 등 중국 고증학파의 학문에 심취하여, 당대의 고증학자였던 이만운(李萬運)에게 지도를 받았다.

   1778년(정조 2) 사은 겸 진주사(謝恩兼陳奏使) 심염조(沈念祖)의 서장관으로 청의 연경(燕京)에 갔다. 이때 기균(紀均)·당악우(唐樂宇)·반정균(潘庭均)·육비(陸飛)·엄성(嚴誠)·이조원(李調元)·이정원(李鼎元)·이헌교(李憲喬)·채증원(蔡曾源) 등 당대의 석학들과 교유했다. 돌아올 때 그곳의 산천·도리·궁실·누대(樓臺)·초목·충어(蟲魚)·조수(鳥獸)에 이르는 기록과 함께 많은 고증학 관계 서적을 가지고 왔는데, 이것은 그의 북학론 발전에 큰 보탬이 되었다.

   1779년 박제가·유득공·서이수 등과 함께 초대 규장각 외각검서관(外閣檢書官)이 되었다. 근면하고 시문에 능했던 그는 규장각 경시대회에서 여러 차례 장원하여 1781년 내각검서관(內閣檢書官)이 되었으며, 사도시주부·사근도찰방·광흥창주부·적성현감 등을 거쳐 1791년 사옹원주부가 되었다. 그는 규장각의 도서편찬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대전회통〉·〈규장전운 奎章全韻〉·〈기전고 箕田攷〉·〈도서집성〉·〈국조보감〉·〈규장각지〉·〈홍문관지〉·〈검서청기 檢書廳記〉·〈시관소전 詩觀小傳〉·〈송사전 宋史筌〉 등을 정리·교감했다. 1793년 병사했는데, 정조는 그의 공적을 기념하여 장례비와 유고집인 〈아정유고 雅亭遺稿〉의 간행비를 내렸다. 서화(書畵)에도 능했다. 저서로는 〈영처시고 嬰處詩稿〉·〈이목구심서 耳目口心書〉·〈기년아람 紀年兒覽〉·〈사소절 士小節〉·〈영처문고 嬰處文稿〉·〈청비록 淸脾錄〉·〈뇌뢰낙락서 磊磊落落書〉·〈영처잡고 嬰處雜稿〉·〈관독일기 觀讀日記〉·〈앙엽기 盎葉記〉·〈입연기 入燕記〉·〈열상방언 洌上方言〉·〈예기고 禮記考〉·〈편찬잡고 編纂雜稿〉·〈협주기 峽舟記〉·〈천애지기서 天涯知己書〉·〈한죽당수필 寒竹堂隨筆〉 등이 있다.  /  <다음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