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다(煎茶)에 대한 고전문헌 자료 ㅡ 22

2018. 4. 28. 21:50차 이야기




 전다(煎茶)에 대한 고전문헌 자료 ㅡ 22  





老稼齋燕行日記卷之八 / [癸巳。二月。]        ㅡ 김창업(金昌業)  , 1712년

二十三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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晴。風甚寒。自楡關行。至鳳凰店朝飰。至角山宿。平明發行。至鳳凰店。是日襲豹裘。至此還脫。旣朝飰。余欲往角山寺。一行皆以雪後風寒難之。申之淳言絶峻不可騎者十里。而雪被其上。決難着足。縱得上去。今日內不可回到關上。且使行不往。則行色孤單。決不可獨往。意在沮泥。柳鳳山聞此言。勸止尤力。皆不聽。於是。齎脯二條,鰒魚數箇,藥果二片,燒酒二盞。皆掛鞍。以備療飢。又帶別扇一把。是則擬與寺僧也。所騎力弱。不堪登山。元建輩言商賈金漢珍騾。健而快。遂騎騾先行。至紅花店。店前有載谷車六十餘輛。塡塞路上。皆從關外來者也。過深河至山海關西羅城外。循城而北。初行人家中。俄而無路。散行邱墓田隴間約數百步。始得樵逕而進。路傍有一新墳。方栽松樹。高皆六七尺。周回成列。極其整齊。此乃山趾也。自城至此。可八九里。過此路峻急。然騾能上去。故不下。行數百步。有一紅門跨路。扁曰扶桑觀日。過此。路亦确。皆布石。石爲級如階砌然。善興以爲視前猶平坦。蓋舊則由西邊谷中直上。故尤艱。近年因皇子來遊。修治如此云。曲折行約二三里。當路又有一間屋。此於山爲三分之一。到此俯觀。關內外田野村落途路。皆歷歷可指。海中汎一舟。掛白帆。向東而去。望之。意思尤杳然。過此屋又上二三里。有六面亭。此亦遊人止歇之處也。扁曰玩芳亭。此在山約居三分之二。而望寺猶縹緲。自山底路距城可數百步間。漸上漸近。到此往往。去堞不過十餘步。路西折。度一壑。盤曲數百步。至寺。路雖改治。猶多峻急處。非騾則不可上。寺有圓峰。雖有巖石。不甚峭拔。左右各抽一麓爲龍虎。寺居其間。地雖高却平穩。是日。途上雪深數寸。風極凜烈。及至山底。風日却溫和。如入房中。山上則雪爲風所吹。盡入于壑。餘皆消盡。一路若灑掃然。蓋以地勢障北。而開南故也。以此路雖險。不覺甚難。意思從容。可幸。寺前後松林蔥蒨。而皆是數十年物。無大樹矣。於是下馬。從西邊小角門入去。佛殿不甚大。前有一重正門。左右廊室。不過四五。而居僧亦不過六七人。始至庭院。寂然若無人。正殿東邊小屋中。有讀書聲。遂直造其處。門內有金佛一軀。轉過佛卓後。東北隅有一小門。垂以帷。遂揭而入。一少年在炕上讀書。見余。遂掩卷起立。余直上炕。揖而坐。其人出紙筆。書問曰。老先生至此何幹。余答曰。外國人。因遊玩至此。不期得遇佳士。其人書曰。佳士二字。不敢當。呼童子。煎茶而進。若相酬酢。起而出。登寺之西岡。岡皆巖石。層累如臺。西邊陡絶。俯臨深谷。谷中水頗大。轉折南出。卽石河上流也。左右兩山。壁立千仞。其奇偉。非造次可盡。乍見還下。入東邊屋。屋有南北炕。隔以壁。有小門相通。僧輩使余處北炕。炕敞潔。欲更上寺後絶頂。時日去西嶺堇數丈。正以歸事悤悤爲恨。元建畫策曰。留宿此寺。趂明早行。亦可及出關。余聞而喜曰。然則固好。而得無所妨否。元建以爲無妨。但夕飰。具不曾持來。此却奈何。余曰。余則有所持糜與酒脯。以此可以療飢。惟患汝輩無所喫耳。元建曰。小人輩所食。求於寺僧可得。顧何患乎。於是。定計留宿。遂令業立。持騾子歸山海關。使於明早。以馬來待山下。作書于伯氏曰。到寺日已暮。勢難還。寺中又有讀書秀才。願與同宿。故遂留。當趂明早下山。分付廚房。具朝飰以待。寺僧及秀才。俱不可無面皮。紙束筆墨各若干。馬來時。伏望覓送。寺僧出饋夕飯。飯一甫兒。雜菜一大碟。淸醬一小碟。菜則各㨾乾菜。如瓜茹冬瓜之屬。炒以油醬。味不甚佳。飰亦山稻粳而少味。堇可喫。少年來見。余問今夜欲留宿。不知有餘榻。可借否。曰。有。有此炕好住。余曰。須知房錢多少。明日方好算還。請問主僧示之。南炕有一老僧。少年以余言告之。其僧聞之。微笑。無所答。然其意似順。於是使元建守房。與善興復上西崗。仍欲上絶頂。善興告以無路。余從巖隙。攀援而上。善興不得不隨來。而頗有難色。余緣忙不曾備芒鞋。仍着靴而行。往往未免滑跌。凡四五憩。約行數百步。去頂已近。風漸大。遂脫笠。繫在巖間小木。進至絶頂。其上平周。可坐數十百人。亦有小巖可踞。俯視關城。如在膝下。城池閭井。縱橫綺錯。東南二方。海水接天。登萊地方。亦可見。而但眼力不及耳。西南羣山。重複近海。時有靑峰。似是昌黎縣近處諸山也。西北峯巒。最奇壯磊落。皆自深谷拔起。直上千仞。凜然可畏。但其色如鐵。欠秀氣耳。其形勢頗似登毘盧。俯視九龍淵洞壑也。月沙所記以爲從堞上北望山缺處。黃沙白沙渺渺接胡村。意謂登此可望沙漠。却恨其不然也。蓋山勢非不高峻。而山後又有山隔胡地。不知其幾重。恐月沙未曾上此而記之爾。此來亦擬看日落。而其入海處。適爲遠山所遮。不得看。亦可恨也。但北望長城。隨山曲折。粉堞隱現於疊嶂間。自從偉觀。令人意思豪壯。恨獨來無與論奇勝耳。自絶頂東去十餘步。畧降一層。卽長城也。高不過丈餘。而以雜石築之。一如我國城。惟女墻也。以甎爲之。其絶險處則往往不築。城外山麓高處。皆置烟臺。新谷暗壑。無所不矚。使賊兵不得潛身。其設置。可謂壯且密矣。循堞徘徊。久而乃下。取笠子戴之。至寺後。有一碑在榛莽間。前面字皆磨滅。不可見。陰則皆古人題詠。似皆明人作也。讀已。更至西崗。俯臨仰眺。兪覺奇勝。少頃。歸寺觀庭碑。東兩碑。弘治萬曆所立。西兩碑。康煕所立也。時將曛黑。少年適出庭前。與余相遇。遂同至其房。明燭烹茶。閑話良久。余問何以來住深山。曰。爲讀書而來。問讀何書。曰。四書文章。卽科文也。余問此處科文。有八股之名。是何意也。少年遂出二冊。示之曰。見此則可知也。其冊一題以明文商。一題今文商。今文卽淸文。蓋皆科文程式。如我國東人也。少年遂展開示一扁曰。所謂八股者。以四書文字出題。演其義爲文。而首尾起結。皆雙關。一篇中闢合凡四次。故謂之八股者。以此也。少年又問我國科擧之法。余畧答之。是夜問答說話頗多。而所書紙。皆留少年處。不能書記。少年眉目淸俊。擧止閑雅。言語不苟。文字亦精。前後所見秀才。無如此人也。夜深歸所寓炕。和衣而臥。但以鞍上所覆氈片覆腰。亦不覺寒冷。夜中風起。松檜皆鳴。呼元建視夜。云月猶未出。余遂自起。出戶視之。海色蒼然而已。乃復還臥。自念人生。雖曰如浮雲不定南北。而此身來宿此寺。豈夢寐所曾及哉。於是。意思似喜似悲。遂不能睡。少頃。又起視之。月上東南。海波半明半暗。光景殊奇。時鷄已鳴矣。是日。約行九十餘里。


23일(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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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음. 바람 불고 매우 추웠다.
유관(楡關)을 출발하여 봉황점(鳳凰店)에 이르러 아침을 먹었고 각산사(角山寺)에 도착하여 잠을 잤다.

평명(平明)에 출발하여 봉황점에 이르렀다. 이날 입고 있던 표범 갖옷을 이곳에 와서야 다시 벗었다. 아침을 먹은 후 내가 각산사로 가려고 하니, 일행들이 눈이 온 뒤라 바람과 추위 때문에 어렵다고 한다.
신지순(申之淳)이 말하기를,
“말을 타고 갈 수 없는 험준한 곳이 10리나 되는데, 눈까지 덮여 좀처럼 발을 붙일 수가 없습니다. 설령 올라갈 수 있다 하더라도 오늘 안으로는 관상(關上)까지 돌아올 수가 없으며, 또한 사행(使行)이 가지 않는다면 행색이 초라할 것이니, 절대로 혼자 갈 수 없습니다.”
하였으니, 그 의도는 갈 길을 저지하려는 데 있었다. 유 봉산(柳鳳山)이 이 말을 듣자 더욱 힘써 그만두기를 권한다. 그러나 모두 듣지 않고 포(脯) 2개와 복어(鰒魚) 몇 개, 약과(藥果) 2덩어리, 그리고 소주(燒酒) 2잔 정도를 꾸려서 모두 말안장에 매달아 요기할 준비를 하였다. 그리고 또 별선(別扇) 한 자루를 지녔으니, 절에 있는 승려에게 주려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타고 있는 말의 힘이 약해서 산을 올라갈 수 없었다. 원건의 무리가 말하기를, ‘상인 김한진(金漢珍)의 노새가 튼튼하고 빠르다.’ 하여 마침내 그 노새를 타고 앞서 출발하였다.

   홍화점(紅花店)에 이르니 그 앞에 재곡거(載谷車 재곡거(載穀車)의 잘못. 곡식을 실은 수레) 60여 채가 길을 메우고 있었는데, 모두 관(關) 밖에서 오는 수레였다. 심하(深河)를 지나 산해관의 서쪽 나성(羅城) 밖에 이르렀다. 성을 따라 북쪽으로 처음에 인가가 있는 가운데로 지나갔는데 조금 후에 길이 없어졌다. 묘와 밭두둑 사이를 산개하여 수백 보쯤 걸어가니, 비로소 오솔길이 나왔다. 길옆에 새로 쓴 무덤이 있는데, 갓 심어 놓은 소나무들이 크기는 모두 6, 7척으로 주위를 돌아가며 줄을 지어 놓은 것이 매우 잘 정돈되어 있었다. 이곳은 곧 산기슭이었다.

   성에서 이곳까지는 8, 9리쯤 되었다. 이 길을 지나고 나니 길은 험준하고 급해졌으나 노새는 올라갈 수 있었으므로 말에서 내리지 않고 수백 보를 가니, 길 건너편에 홍예문이 있었다. 편액(扁額)은 ‘부상관일(扶桑觀日)’이라고 씌어 있었다. 이곳을 지나니 길이 또 험준하여 모두 돌을 깔았는데, 돌은 계단처럼 층계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선흥이 보기에 앞서보다 오히려 더 평탄하다고 한다. 옛날에는 서쪽 계곡의 한가운데로 바로 올라갔으므로 더욱 험난하였는데, 근년에 황태자가 유람을 왔음으로 인하여 이와 같이 잘 닦아 놓은 듯하다고 하였다.

   굽이를 꺾어 약 2, 3리쯤 걸어가 길을 만나니, 거기에 또 1칸 집이 있었다. 이 집은 산의 3분의 1쯤 되는 높이에 있는데 그곳에 이르러 내려다보니, 관(關) 안팎의 전야(田野)와 촌락, 도로 들이 모두 손금처럼 역력하게 보인다. 바다에는 배 1척이 흰 돛을 달고 동쪽으로 가고 있어 바라보는 마음을 한층 더 묘연하게 하였다.
이 집을 지나 또 2, 3리쯤 올라가니 육면정(六面亭)이 있었다. 이곳은 유람객이 잠시 머물러 쉬는 곳인데 편액(扁額)은 ‘완방정(玩芳亭)’이라 하였다. 이 정자는 산의 3분의 2쯤 되는 높이에 있는데 멀리 아득하게 절이 바라다보였다. 산 밑의 길에서 성까지 수백 보나 떨어져 있는 거리인데, 산 위로 올라갈수록 성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곳에 이르니, 이따금 성가퀴[堞]까지 10여 보에 불과한 곳이 있었다.
서쪽으로 길을 꺾어 계곡을 지나 산길로 꼬불꼬불 수백 보를 걸어가 절에 이르렀다. 비록 개수를 했어도 매우 험준하고 급경사의 길이었다. 만일 노새가 아니었다면 절에 올라갈 수가 없었을 것이다. 둥근 산봉우리가 비록 바위였지만, 심하게 깎아지른 듯 솟아 있지는 않았고, 좌우로 각각 한 기슭이 있어서 용호(龍虎)를 이루고 있었다. 그 사이에 절이 있는데 높기는 해도 평탄하였다.

   이날 길 위에 덮인 눈은 수촌(數寸)이나 되었고 바람은 심하여 매우 추웠는데 산 밑에 이르자 바람이 불던 날씨가 도리어 온화해져서 마치 방 안에 들어온 것 같았다. 산 위는 눈이 바람에 날려 모두 골짜기로 날려 들어갔고 나머지는 모두 녹아서 길이 청소를 해 놓은 듯 깨끗하였다. 아마도 지세가 북쪽은 막히고 남쪽은 터져 있는 때문인 것 같았다. 이 길이 험하기는 했지만 매우 어렵다고 생각되지 아니하고, 마음도 조용해지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절 앞뒤로는 송림이 푸르게 우거졌는데, 모두 수십 년생의 나무들이었고 큰 나무는 없었다.
여기서 말을 내려 서편에 있는 솟을문으로 들어갔다. 불전(佛殿)은 그리 크지 않았다. 앞에 겹으로 된 정문(正門)이 있고, 좌우로 낭실(廊室)이 4, 5채에 지나지 않는 절이었고 승려들도 6, 7명에 불과했다. 처음 정원(庭院)에 들어섰을 때 조용하여 사람이 없는 듯 하였는데, 정전(正殿) 동편에 있는 조그만 집에서 책 읽는 소리가 나므로 이윽고 곧장 그곳으로 갔다.
문 안에는 누런 불상이 있었는데, 불탁(佛卓) 뒤로 돌아가니 동북 모퉁이 구석진 곳에 작은 문이 있었다. 장막을 늘어뜨렸기에 들치고 들어갔더니, 한 소년이 온돌방 위에서 책을 읽고 있다가, 나를 보더니 책을 덮으며 일어났다. 내가 곧바로 온돌방에 올라가 읍을 하고 앉으니, 소년은 종이와 붓을 꺼내 글로 써서 묻기를,
“노 선생은 무슨 일로 이곳에 오셨습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외국 사람으로서 유람차 이곳에 이르렀는데, 뜻밖에 훌륭한 선비를 만나 보게 되었소.”
하였다. 소년이 글로 쓰기를,
“훌륭한 선비라는 말씀은 감당하지 못하니, 동자(童子)라고 불러 주십시오.”
하고 차를 끓여 내놓는다. 서로 몇 마디 말을 주고받다가 일어나 나왔다.

   절 서편 산마루로 올라가니, 산마루는 바위들이 층층이 쌓여져 마치 대(臺)처럼 되어 있었다. 서쪽은 절벽으로 깊은 골짜기를 굽어보니, 계곡에 물이 상당히 크게 굽이쳐 돌면서 남쪽으로 내려간다. 이곳이 바로 석하(石河)의 상류이다. 좌우에 두 산의 낭떠러지가 천 길의 높이로 마주 서 있으니 기이하고 웅장함은 잠깐 동안에 모두 구경할 수 없었다. 잠시 보다가 다시 내려와 동편의 집으로 들어갔다.
이 집은 남쪽과 북쪽에 온돌방을 만들고 그 사이를 벽으로 막고는 작은 문으로 서로 통하게 하였다. 승려들이 나를 북쪽 온돌방에 있도록 하였는데 자리가 몹시 불결하였다. 다시 절 뒤의 산꼭대기를 올라가 보고 싶었으나 해가 이미 서산으로 기울어 두어 발[丈]밖에 남지 않았다. 바로 돌아가야 할 일이 총총한 것이 한스러웠다.

   원건이 계책을 내어 말하기를,
“이 절에서 자고 밝은 무렵에 일찍 출발하면 역시 출관(出關)할 시각에 미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나는 그 말을 듣고 기뻐서 말하기를,
“그렇게 하면 참으로 좋겠지만, 아무런 지장이 없겠느냐?”
하였다. 원건은 지장은 없으나, 저녁 식사를 가지고 오지 않았으니, 이 일을 어쩌면 좋겠느냐고 한다. 나는 말하기를,
“나는 가지고 온 죽[糜], 술, 포가 있으니, 요기를 할 수가 있겠지만, 너희들이 먹을 것이 없어 근심이로구나!”
하였다. 원건이 말하기를,
“소인들이 먹을 것은 절의 승려에게 구하면 얻을 수 있을 것이니, 무슨 걱정이겠습니까?”
하였다. 그리하여 원건의 계책대로 절에서 자기로 하고 업립을 시켜 가지고 온 노새를 산해관(山海關)으로 돌려보내고, 내일 아침 일찍 말을 가지고 와서 산 밑에서 기다리도록 하였다. 그리고 백씨에게 글을 보내기를,
“절에 도착하니, 해는 이미 저물어 돌아가기 어려운 형편입니다. 또한 절 안에 글을 읽는 수재(秀才)가 함께 묵기를 원하므로 마침내 머물기로 하였습니다. 날이 밝으면 일찍 하산할 것이니, 주방(廚房)에 분부를 내리시어 조반을 준비하고 기다려 주십시오. 그리고 승려들과 수재에게 체면을 차리지 않을 수 없으니, 말 오는 편에 종이와 필묵을 각각 약간씩 보내 주기 바랍니다.”
하였다. 절의 승려가 저녁밥을 가져다 주었다. 음식은 밥 1그릇에 잡나물 1대접, 청장 1종지였다. 나물은 여러 가지 건채(乾菜)로 오이ㆍ호박 등을 기름 간장에 볶은 것인데 별맛이 없었다. 밥도 멥쌀밥으로서 맛이 없어 간신히 먹을 수 있었다.

   소년이 나와 보았다. 내가 묻기를,
“오늘 밤을 자고 가려 하는데, 남은 방을 빌릴 수 있겠는가?”
하니,
“있습니다. 이 온돌방을 쓰셔도 좋습니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방세가 얼마인지 일러 주면 내일 갚겠소.”
하고, 다시 물었더니, 주승(主僧)이 노승(老僧)이 있는 남쪽의 방을 가리킨다. 소년이 내 말을 전하니, 노승이 듣고 아무 대답 없이 미소만 짓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의미가 허락하는 뜻인 것 같았다.

   이리하여 원건에게 방을 지키게 하고는 선흥과 다시 서쪽 산마루로 올라갔다. 막 산꼭대기로 오르려고 하는데, 선흥이 길이 없다고 한다. 내가 바위틈을 붙들고 올라가자 선흥이 할 수 없이 따라오긴 하였으나, 자못 못마땅한 기색이었다.
내가 서두르는 바람에 짚신을 준비하지 못했으므로 가죽신을 신고 올라가니 종종 미끄러워 넘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모두 4, 5차례 쉬어 가며 수백 보를 올라갔더니, 산꼭대기가 가까워질수록 바람이 점차 크게 불어 댔다. 마침내 갓을 벗어 바위틈의 작은 나무에 매어 놓고 올라갔다. 산꼭대기에 올라와 보니, 위는 평평하고 둘레는 거의 100여 명이나 앉을 만한데, 역시 걸터앉을 만한 작은 바위들도 있었다.
아래로 내려다보니, 산해관의 성이 바로 무릎 밑에 있는 것 같았다. 성지(城池)와 여정(閭井)들이 이리저리 비단을 깔아 놓은 것 같고, 동쪽과 남쪽은 바닷물이 하늘에 맞닿아 있었다. 등주(登州)와 내주(萊州) 지방도 보일 듯한데, 시력이 그에 미치지 못하였다.

   서남쪽은 많은 산들이 겹겹이 싸여 있는데, 바다 근처에는 가끔 푸른 봉우리가 있었다. 아마도 창려현(昌黎縣) 근처에 있는 산들인 듯하다. 서북쪽의 산봉우리들은 가장 기묘하고 장대하여 깎아지른 듯하였다. 봉우리마다 모두 깊은 골짜기에서 곧장 솟아올라 천 길의 낭떠러지를 이루고 있어 두려움에 간담이 서늘할 지경이다. 그러나 그 모양이 쇠붙이 같을 뿐 빼어나게 아름다운 기품은 없다. 자못 금강산 비로봉(毘盧峯)에 올라 구룡연(九龍淵)의 계곡을 굽어보는 기분과 비슷하였다.
   월사(月沙)의 기록에 보면, ‘성가퀴 위로 북쪽을 바라보면 산이 끊어진 곳에 황사(黃沙) 백사(白沙)가 펼쳐져 까마득히 호촌(胡村)에 닿아 있다.’고 하였는데, 생각건대, 이곳에 올라와 사막을 볼 수 있었다면 오히려 그렇지 못함을 한했을 것 같다. 산의 형세가 매우 높고 험준했지만 산 뒤에 또 산이 있어 호지(胡地)와의 사이에 중첩된 산이 얼마인지 알지 못할 정도다. 아마도 월사(月沙)는 일찍이 이곳까지는 올라와 보지 못하고 기록한 것인 듯하다.

   이곳에 왔으니 또한 일몰(日沒)을 구경할 생각이었으나, 바다로 들어가는 곳이 마침 멀리 산에 가리워져 볼 수 없게 된 것이 한스러웠다. 그러나 북쪽으로 장성(長城)을 바라보니, 산을 따라가며 꾸불꾸불 하얀 성가퀴가 첩첩이 쌓인 산봉우리 사이로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면서 뻗어 있었다. 참으로 장관이라 사람의 마음을 호장(豪壯)케 하는데, 다만 한스러운 것은 홀로 와서 구경을 하고 있으니 더불어 뛰어난 광경을 이야기할 상대가 없는 점이었다.
산꼭대기에서 동쪽으로 10여 보쯤 걸어가 한 층계쯤 내려서면 곧 장성(長城)이다. 성의 높이는 한 길[丈] 남짓한데, 잡석(雜石)으로 쌓아 올린 것이 우리나라의 성과 꼭 같다. 단지 여장(女墻 성 위에 낮게 쌓은 담)만은 벽도로 쌓아 놓았다. 그리고 절벽으로 험준한 곳은 군데군데 성을 쌓지 않았고, 성 밖으로 산기슭이 높은 곳에는 모두 연대(煙臺 봉홧불을 올리는 곳. 봉수대)를 설치해 놓았다. 그리하여 조그마한 골짜기까지도 모두 보이도록 하여 적병(賊兵)이 은신하지 못하도록 하였으니, 설치가 참으로 장대하고도 치밀하였다.

   성가퀴를 따라오랜 동안을 배회하다가 마침내 내려왔다. 벗어 놓았던 갓을 찾아 쓰고 절 뒤에 이르니 나무가 우거진 풀숲 속에 비석이 있었다. 앞면의 글자는 모두 마멸되어 볼 수가 없고, 뒤에는 모두 옛사람들이 제영(題詠)해 놓은 것인데 모두 명 나라 사람들의 작품인 것 같았다. 그 글들을 읽어 보고 나서 다시 서쪽 산마루에 이르렀다. 밑을 굽어보고 위로 올려다보니 더욱 뛰어난 경치를 느끼게 하였다. 잠시 후 절에 돌아왔다. 절 뜰에 있는 비석을 보니, 동쪽에 있는 두 비석은 홍치(弘治)와 만력(萬曆) 연간에 세운 것이요, 서쪽의 두 비석은 강희(康煕) 연간에 세운 것이었다.

   날은 어두워지려 하는데, 소년이 마침 뜰 앞으로 나오다가 나와 서로 만나게 되자 함께 그의 방으로 들어갔다. 촛불을 밝히고 차를 끓여 마시며 오랜 동안 한담을 하였다.
내가 물었다.
“무엇 때문에 이 깊은 산에 와서 지내고 있소?”
“책을 읽으러 왔습니다.”
“무슨 책을 읽고 있소?”
“사서(四書)와 문장(文章), 즉 과거문[科文]을 읽습니다.”
내가 또 묻기를,
“이곳은 과문(科文)에 ‘팔고(八股)’라는 이름이 있는데, 그것은 무슨 뜻이오?”
하니, 소년은 책 두 권을 꺼내 보이면서 말하기를,
“이 책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였다. 책 한 권의 제목은 ‘명문적(明文啇)’, 한 권은 ‘금문적(今文啇)’이라고 했는데, 금문(今文)이란 다름 아닌 청문(淸文)으로서 모두 과거문의 격식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의 것과 같은 것이다. 소년은 마침내 한 편을 펼쳐 보이면서 말하기를,
“‘팔고(八股)’는 사서에 있는 문자로 출제하면 그 의의를 부연하여 문장을 짓는데 수(首), 미(尾), 기(起), 결(結)은 모두 쌍관(雙關)으로 하고, 1편 안에서 벽(闢 글뜻을 열음), 합(合 뜻을 마무리함)을 모두 4차례 하므로 팔고라 이르는 것입니다.”
하였다. 소년은 우리나라 과거법에 관하여 물어보기에, 요약해서 대답해 주었다.
이날 밤 서로 문답한 이야기는 자못 많았으나 글 쓴 종이를 모두 소년이 있는 곳에 두고 와서 다 기록해 적을 수가 없다.
소년은 얼굴이 청준(淸俊)하고 행동거지가 점잖으며 언어에 있어서 문자로 주고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또한 정확했다. 지금까지 보아 온 수재 중에 그와 같은 사람은 없었다.

   밤이 깊어 숙소로 돌아와 옷을 벗고 자리에 누웠다. 말안장에 있던 담요 조각[氈片]을 가져다 허리를 덮었더니 역시 추운 줄을 모르겠다. 한밤중에 바람이 불기 시작하여 소나무, 회나무들이 모두 울어 댔다. 원건을 불러 밤[夜]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보라고 했더니 달이 아직 떠오르지 않았다고 한다. 내가 마침내 일어나 문밖으로 나가 보니, 바다 빛만이 창연할 뿐이었다. 이내 다시 돌아와 자리에 누웠다. 스스로 생각해 보니, 인생이 비록 뜬 구름과 같아 남북을 정할 수 없다고는 하지만, 내가 이 절에 와서 묵게 될 줄이야 어찌 꿈엔들 일찍이 생각해 보았던 것이겠는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마음이 한편 기쁘기도 하고 한편 서글픈 것 같기도 하여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잠시 후 일어나 나가 보니, 달이 남해 바다 물결 위로 떠오르고 있었다. 반은 잠기고 반은 떠오른 달의 광경은 참으로 신기하였다. 닭이 이미 울었다. 이날 약 90여 리를 걸었다.



  ***  김창업(金昌業) :  대유, 가재, 노가재

개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대유(大有), 호는 가재(稼齋) 또는 노가재(老稼齋). 17세기에 활약한 노론의 정치가이며 유학자인 김수항(金壽恒)의 넷째 아들이다.


생애

   어려서부터 김창협(金昌協), 김창흡(金昌翕) 등 형들과 함께 학문을 익혔다. 특히 시에 뛰어나 후에 김만중(金萬重)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1681년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한양의 동교송계(東郊松溪 : 지금의 성북구 장위동)에 은거하였다. 1689년에 기사사화가 일어나자 포천에 있는 영평산(永平山) 속에 들어가 숨어살다가 1694년 정국이 노론파에 유리하게 되자 다시 송계로 나왔다. 이 때 나라에서 내시교관(內侍敎官)이라는 벼슬자리를 주려고 하였다. 그러나 응하지 않았고 스스로 노가재라 부르며 세상일을 멀리하였다. 그리고 향리에 사창(社倉)을 설치하고 거문고와 시 짓기를 즐기면서 사냥으로 낙을 삼았다.


활동사항

   중국 산천을 보지 못한 것을 늘 아쉽게 여기다가 1712년 연행정사(燕行正使)인 김창집(金昌集)을 따라 북경(北京)에 다녀왔다. 이 때 보고 들은 것을 모아 『노가재연행록稼齋燕行錄)』을 펴내었다. 이 책은 중국의 산천과 풍속, 문물제도와 이때 만난 중국의 유생, 도류(道流 : 도교를 믿고 그 도를 닦는 사람)들과의 대화를 상세히 기록하여 역대 연행록 중에서 가장 뛰어난 책으로 손꼽힌다.

   어려서부터 그림에 재주가 있어 젊어서도 그림 그리기를 즐겼으므로 아버지로부터 그림에 마음을 빼앗겨 학업에 방해가 될까 걱정이니 손을 떼라는 충고를 받았다.

   현존하는 그의 그림 「추강만박도(秋江晩泊圖)」(간송미술관 소장)나 그가 밑그림을 그린 제천 황강영당 구장의 「우암송선생칠십사세진」같은 작품으로 보아 그림 솜씨가 상당한 수준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그림에 대한 취향은 서자인 김윤겸(金允謙)에게 이어져 조선 후기에 유행한 실경산수화(實景山水畵)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참고문헌

  • 『노가재전집(老稼齋全集)』
  • 『노가재연행록(稼齋燕行錄)』
  • 『문곡집(文谷集)』
  • 『삼연집(三淵集)』
  • 『안동김씨문헌록(安東金氏文獻錄)』







추강만박도 / 김창업

노가재 김창업의 추강만박도. 비단에 수묵, 조선 후기, 간송미술관 소장.

출처 이미지 사이즈 960x486 |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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老稼齋燕行日記卷之九 / [癸巳]三月      ㅡ 김창업(金昌業)


初七日。甲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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陰。晩微雨。自永安寺行。至千山下朝飯。至龍泉寺宿。○曉起。善興得菉豆。同米煮爲粥進之。味勝於飯。湛元臥內炕未起。以白紙一束,煙竹一枝,南草二封留之而行。到崇慧房前。引路僧已鞴驢而待矣。以小囊齎糧。掛于鞍。又以一張疊摺小紙藏于帽。此則意是崇慧抵千山之書也。出南門時昧爽。僧策驢在前。其疾如飛。騾不能及也。過三里庄。有村數十家。至八里庄。村落頗盛。月沙記中自八里站。迤南行者卽此也。遂憩路側。飮騾子于井。仍問路。直南方。途遇一胡。跨無鞍馬。一路作行。自言家住千山東十餘里地。仍傳先來消息曰。前月二十九日。貴國人五。到俺家秣馬。用燒酒一甁,鷄卵八箇,小米二升。留紙束,火鐵而去云。行十餘里。其人向他路馳去。於是東南行。踰一土岡。途傍有耕者。以兩牛並駕。農器之制。亦與我國彷彿。自此以往。耕法皆同。豈高麗舊俗猶存耶。引路僧謂從者曰。勿問路。仍疾馳而過。過後。僧曰。耕者。乃地方官奴也。使勿問者。慮被盤詰也。以此見之。則非不知我行之冒禁而爲之導。其意尤難得。自過土岡。行谷中。谷盡而轉一隅。爲平川廣疇。自此向東行。望中山氣重重隱見。若雲霞興蔚。僧曰。此千山之俗傳此山共有九百九十九峯。山之得名。蓋以此云。從者皆喜曰。今日得見千山矣。自遼陽至此。約三十餘里矣。路左有一屋。立馬其門。使從者求水。仍問路。有腰鎌者出來。言此去祖越寺。可二十里云。時天色陰晦。雨欲墜。山翠益濃。望之若近。神興飛往。却怪馬之遲也。又行七八里渡一溪。溪自東行。蓋千山之水也。溪上有廟堂人家。自此十數里間。皆淸曠可居。景色與大路異。所過多藍田。其土肥。亦可見矣。山下有一大路。此則東八站。雇車直出十三山之捷徑。先來亦從此而行云。截大路而南及山趾。連逢耕者。問路而前。始入一谷。路有往來之轍。而夾路皆梨樹。樹下往往累石培其根。然深入四五里。不見人居。又不似寺觀所在。余疑而屢住。僧曰。第隨來。從者皆咎誤入。僧辨其不然。至於頸赤。而莫曉其語。彼此俱極泄泄。可歎亦可笑。已而山漸峻。而路漸窄。樹交藤密。殆不可行。僧乃捨驢。直攀崖而上。余亦下騾而立。使善興謂曰。今日所訪者。乃祖越寺。而路險如此。似誤入也。僧曰。旣要遊山。何憚險乎。善興曰。就令前有可觀處。我老爺決不可往。不如還。僧聞言遂止。此蓋山之西。而上嶺已至三分之二。還循來路。其遠幾六七里。出入登降之間。日亦晏矣。東踰一山麓。洞府寬曠。卽山之北也。三四峯特立奇秀。意或寺觀在其下。遂入焉。山下多廢趾。梨樹之多亦如前。入一二里。有驚雉決起馬前。角角飛去。已而路窮。乃還出。引路僧到此。却不免隨吾進退。可笑。從者皆告餒。余亦倦。欲就飯于人家。而村落皆在數里外。遂下馬坐草間。出所持燒酒藥果脯肉等物。分喫療飢。復出大路益東行。逢驅車而來者。問路行數十里。得一村朝飯。村在山之東北隅。至此峯巒見者益多。草屋凡六七家。雖在路傍。境落幽靜。如深山中。主人亦淳厚。見我人無驚怪意。以其妻女移外炕。坐余于內炕。人馬所食田米大豆。隨求皆給。不言其價。其女言今月初一日。在其舅家。見高麗人過去。問其舅家所在。則去此十餘里云。與向者所聞相符矣。有年少隣女三人入來。衣服皆鮮潔。坐外炕。與主女相語。已而借孩兒所懸器而去。主女求針子於從者。得之。有喜色。可知其城市之遠也。從者炊粟飯。而喫烹飯。以白紙一束與主人。自村迤南行數里。入山口。循溪西折。望見石塔出林表。凡行五六里。至祖越寺。寺處地頗高。前皆累石爲砌。高數丈。仰眺群峯。俯臨溪水。自是好伽藍。而荒廢無門墻。只有兩殿及左右僧寮。始至。闃然若無人。遂坐佛殿簷下。少頃。有一僧出見。余書問此殿何名。曰。雪山殿。問何以破壞至此。答曰。年久無人修。月沙所記佛殿後層樓及玉皇殿。蓋無存者。如寺門及佛殿所扁人境別區,千峯拱翠等書。今皆不可見矣。惟佛殿後大石壁所刻含澤宣氣四字及獨鎭群峯四字。皆宛然。畫大皆如股。僧言寺後有可觀。遂踏石磴而上。卽寺之東岡也。於是。善興持驛馬先往龍泉寺。治夕飯。業立守騾。惟毛疾從焉。岡南出數十步。陡絶下臨壑。上平如臺。有石塔峙焉。卽谷口所望者也。一塔在溪南。與此塔正相對爾。又有一大石如鼓。刻太極石三字。月沙以爲此石在玉皇殿傍。與今所見相左。又含澤宣氣所刻石壁。不過數丈。而謂之萬仞。此恐追記。故未免誤也。循岡脊益上。斲巖爲逕。間有險峻處。而險必有松有石。可蔭而坐。回望前峯。愈上愈奇。以此不知甚勞。行百餘步。有巖西出。僧引至其上。指曰。此卽玉皇殿故址也。到此直俯臨寺甍。其高可知。而平處不能踰尋丈。直一陡壁耳。不知於此何以着屋也。又上數百步。立小碑。到此地稍平展。稍上有屋三間。道士數人居之。庭除疏潔無塵。前有一帶短墻。亦不設門墻。下有數叢故菊。道士一人。年少解文。見余甚喜。延坐室中。煎茶連勸。又出各樣糖果。待之甚款曲。見龕中有小金像。余書問曰。此是道觀。何以供佛。其人對曰。燃燈道人。那不是佛。又北壁掛一影子。乃道士像。而眉目淸古。卓上有圖書及數卷書。余書問曰。這是何人影子。答先師祖之影。姓甚名誰。享壽幾歲。死於何年。答曰。郭含眞。享年四十三歲。足于康煕四十七年五月初八日羽化。余問卓上印信。是誰的。答道經師寶道號。問何處使用。答疏文。此殿何名。答音喜閣。卽名觀音閣。音喜之云。似出於聞人足音跫然而喜。而又云卽觀音閣者。不知其何義也。道士又書曰。家住廣東南海縣人氏。自少流落北方。故此出家。今已十年了。姓劉。道名淸閑。字弘虛。年二十五歲云。余問曰。廣東此去六十里之遠。因何飄轉到此窮邊。答曰。有花山賊難。隨父母逃難至此。父母俱已去世。因此出家。余曰。聞來不覺惻然。不知這山山賊是何賊。答曰。賊名香花針。問這賊現今尙在否。答不知。余問俺今夜止宿龍泉。你隨來。同榻穩話如何。答我如今此處管事。不能得離。有心留尊駕。在此宿。奔將不便。答我爲遊山來。期限甚促。勢難遲留。已將行李。送龍泉到彼歇了。明早使行。孤負盛意。可恨。曰。前生有緣。今生一遇。萬幸。余曰。你我所住。相去萬里。今在此地邂逅。可知有宿緣。而所恨行忙不得從容也。道士曰。天已晩了。龍泉寺還有三里。余遂以火鐵一介與之。道士引余。由屋後上數十步。有羅漢洞。洞左又有小洞。設窓戶。中設佛像。洞前有短碑在石上。卽景泰七年丙子仲秋所立。而其文有曰。唐之貞觀東征。駐蹕于此云。望東峯頂上。有一小屋。縹緲如畫中。余問曰。此屋有人否。淸閒曰。一道士居之。余聞言悚然。欲往訪。而日勢已暮。約朝日更來。淸閒曰。當具朝飯以待。願早臨。余諾而行。復過祖越寺。寺前有石橋。橋南北有故砌。月沙所謂延檻爲水閣者。似是此處也。有數尺折碑。而文字不可見。爲之徘徊悵然。纔過橋。遇六七人自龍泉寺下來。皆長者也。見余忻然。共相遮留。余爲少立。問虎狼谷遠近。答曰。可七十里。遂擧手爲別。時微雨作。遂冒而行。涉一溪。折而北行。自此始捨溪矣。路右多浮屠。其中三坐。圍墻設門。多植樹木。自山口至此。澗谷間森立者。都是梨。更無他樹。六七里間。無所間斷。聞花時遍山如雪云。自過溪而後。山勢却開豁。亦無樹木。但荒茅靡然而已。少前路有歧。右則龍泉之路。左者上西嶺。到此見之。則向來始入之路。與此只隔一嶺。方知引路僧不錯。而我輩却錯計。其枉走不下二十里也。自路歧以後。左右奇嚴競出。疊嶂回合。寺在其間。至百步內。亦不可見。路凡三轉。右折而入。兩巖間始有一虹門。扁曰勅建龍泉寺。傍書萬曆年號。入門數十步。又有一重門。兩門之間。絶壁夾路。如甬道然。右壁間刻嗽瓊二字。過第二門。始有平地。有屋五六間。皆廩舍。頗有車馬。乃燒香人持來者也。此上又有一層石砌。高數仞。佛殿僧寮。皆在其上。善興已設席于東邊室。敞潔可喜。主僧精進。盛設茶果以進。油粉所造果及各㨾實果及橘餠閩薑之屬。無不備。善興言始來入門。諸僧望見。競走來階下迎。問何來。對以遊山而來。又問曰。你獨自一介來。對曰。隨老爺來。老爺方在祖越寺。今且至。諸僧聞言益喜曰。我謂你不獨來。果然云。開南窓而坐。烟雨涳濛中。三四峯在望。興寄悠然。茶後觀佛殿。殿在三層階上。結構雖不雄傑。而莊嚴精麗。數十秀峯。羅列于前。左岡環抱。自東至南爲內案。不高不低。而以石渾成。內外壁立。其上置小屋曰羅漢殿。相去僅百餘步。風水極其緊固。殿西壁外。題詩甚多。皆是近人所作。其中七律一首。五律一首。稍可觀。七律曰。跡滯遼西悤復東。偶然憑眺意無窮。幽奇莫怪居龍尾。雄傑應敎起沛風。寺在畫圖如▣勝。人遊詩句直凌空。此行共領林泉趣。不讓廬陵老醉翁。五律曰。巖壑聞爭勝。山陰有萬千。何圖遼海地。別具蔚藍天。龍臥藏丹壑。峯高壓淺泉。尋幽恣登眺。跌望興悠然。下書康煕戊午八月。昆陵龔君書。遂歸東寮。精進進夕飯。菜蔬五六碟。極精備。其中有炒菌。味最佳。問之則乃楡蕈云。有一僧自西寮來。年可三十餘。能解書字。余書問曰。此山裏有瀑泉否。曰。此峯乃龍泉上邊。現有一介水。泉冬夏不斷。問此去多少路。答只有一里。又曰。此寺有十六處山景。暫記不淸。四閣上有詩十六副。明早請上去一觀。便明白。今日不必細問。余問曰。此山裏共有幾寺僧。書曰。龍泉寺,大安寺,祖越寺,中會寺,香元寺,雙峯寺,永淸寺。余問除了祖越,龍泉兩寺。這五寺內景致。誰勝。僧曰。惟有香元,大安。其餘平常。問自此至香元幾里。至大安幾里。僧曰。從此處還出山口去。先到大安。有二十里。自大安至香元。從西而嶺邊。有十五里。問這大安寺。還是騎馬的。答是的。問自大安寺至虎狼谷。可有多少路。答六十里。曰。然則明日。我早行看大安寺。可到虎狼谷否。答山路甚遠。還到不去的。問這大安寺。有何景致。答明月山。唐王箭射。唐帽山。御駕親臨。又仁貴菴。白袍將惜養瑞氣。英潞菴。雙鳳並立。正有許多奇景。一言難盡。仍曰。暫且念佛。明日再會。雨止。與善興往觀藏經閣。閣在東岡高處。自東寮行百餘步。當路有一間空屋。過此而閣在焉。凡三楹。而緣壁三面爲架。積佛書充棟。極其整齊。庭有一碑。都痒淸吾希夷汪東瀛撰。沖霄爲章甫宋文魁書。萬曆二十五年丁酉所立也。自經閣循脊而南。至羅漢殿回望。寺後有小菴。又其後有巖如屛。壁立數十仞。時暝色初上。殿宇重重。燈燭熒煌。諸僧在殿上。撞鍾念經。非世間景色。回至佛前。坐階上復望前峯。久而歸。宿東寮。善興守馬。宿它屋。是日。約行六十餘里。



7일(갑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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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흐리고 저녁에 약간의 비가 왔다. 영안사(永安寺)를 출발하여 천산(千山) 아래에서 아침을 먹었고 용천사(龍泉寺)에 도착하여 잤다.

새벽에 일어나니, 선흥이 녹두에다 쌀을 섞어 만든 죽을 가져다 주었는데, 그 맛이 밥보다 좋았다. 담원은 안방에 누워 아직도 일어나지 않았으므로 백지 1속과 담뱃대 하나, 남초(南草 담배) 2봉지를 남겨 놓고 떠났다. 숭혜의 방 앞으로 가니, 길을 인도하기로 한 스님이 벌써 나귀에 안장을 얹고서 기다리고 있었다. 작은 자루에 양식을 넣어 안장에 매어 달았고 또 포개어 접은 작은 종이 한 장을 모자 속에다 간직하였다. 그것은 아마도 숭혜천산(千山)으로 보내는 편지인 것 같았다.

   남문을 나섰을 때 날이 밝기 시작하였다. 스님이 앞에서 나귀를 채찍질하였는데, 마치 날아가는 나귀처럼 빨리 달려 따라갈 수가 없었다. 삼리장(三里莊)을 지나니 수십 집 되는 촌락이 있었고, 팔리장(八里莊)에 이르렀더니 촌락이 자못 큰 마을이었다. 월사(月沙)의 기록 중에 ‘팔리참(八里站)부터는 비스듬히 남쪽으로 갔다.’ 하였으니, 바로 이곳이었다. 마침내 길옆에 쉬면서 우물에서 나귀에게 물을 먹였다. 이어 곧 길을 물어 곧장 남방으로 난 길을 가다가, 안장 없는 말 위에 앉아 가는 호인 한 사람을 만났다. 그는 우리와 함께 같은 길을 가면서 스스로 말하기를,
“집이 천산 동쪽 10여 리 되는 곳에 있습니다.”
하였다. 그리고 이어 먼저 앞서 왔던 사람들의 소식을 전하기를,
“지난달 29일 귀국 사람 5명이 우리 집에 와서 말을 먹이고 소주 1병, 계란 8개, 쌀[小米] 2되를 먹고, 지속(紙束)과 부시[火鐵]를 남겨 놓고 갔습니다.”
하였다. 10여 리를 가서 그 사람은 다른 길을 향해 달려가 버렸다. 여기서 동남쪽으로 가다가 흙 언덕[土岡] 하나를 넘으니 길옆에 밭을 가는 사람이 있었다. 소 두 마리를 나란히 멍에 메웠는데 농기(農器)의 만듦새가 역시 우리나라와 방불하였다. 여기서부터는 밭갈이 하는 방법이 모두 같았으니, 어찌하여 고려(高麗)의 옛 풍습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인지 신기한 일이었다. 길을 인도하는 스님이 종자에 이르기를,
“길을 묻지 마십시오.”
하고, 빨리 달려 그 밭을 지나가더니 다 지나고 난 후 다시 말하기를,
“밭을 갈고 있는 사람은 지방의 관노(官奴)입니다. 길을 묻지 못하게 한 것은 자세히 캐묻고 조사 받을까봐 걱정이 되어서였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것을 보니 내가 금지를 무릅쓰고 유람을 가는 줄을 알고 있으면서 인도해 주고 있으니, 그의 생각은 더욱 얻기 어려운 고마움이었다. 흙 언덕을 지나서부터는 계곡으로 들어갔다. 계곡이 다 끝나서 모퉁이 하나를 돌아가니 평평한 냇물과 넓은 밭이 있었다. 여기서 동쪽을 향해 가노라니, 바라보이는 곳에 산 하나가 겹겹이 기운을 서리며 은연히 드러났는데, 거기에서 구름과 안개가 뭉게뭉게 피어나고 있는 것 같았다. 스님이 말하기를,
“저것이 천산(千山)입니다.”
하였다. 세상에 전하기를 이 산은 모두 999봉우리가 있으므로 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하였다. 종자들도 모두 기뻐하면서,
“오늘에야 천산을 보았다.”
하였다. 요양(遼陽)에서 이곳까지는 30여 리였다. 길 좌측으로 집 한 채가 있어 말을 그 문 앞에 세우고, 종자를 시켜 물을 구하게 하였다. 이어 길을 물었더니 낫[鎌]을 허리에 찬 사람이 나오면서 말하기를,
“여기서 조월사(祖越寺)까지 20리입니다.”
하였다. 그때 하늘빛이 어두워지면서 비가 내리려고 하니, 산의 푸른빛은 더욱 짙어 갔다. 바라보니 가까이 있는 것 같았다. 신바람이 나서 날아갈 것 같았는데, 오히려 말은 더디 가고 있었으니 괴이한 일이었다.

   또 7, 8리를 걸어가 개울을 건넜다. 개울은 동쪽에서 내려오고 있었는데, 천산(千山)에서 내려오는 물이었다. 개울 위에 묘당(廟堂)과 인가(人家)가 있었고, 그곳으로부터 수십 리 사이는 모두 청광(淸曠)한 곳으로 사람이 살 만한 곳이었다. 경치는 큰길과는 달리 지나는 곳마다 남전(藍田)이 많았으니, 토양이 비옥한 것을 역시 알 수 있었다. 산 아래로 대로(大路)가 있었는데, 동팔참(東八站)에서 수레를 세내어 십삼산(十三山)으로 곧장 가는 지름길로서 전에 왔던 사람들도 이 길을 따라 갔다고 한다. 대로를 가로질러 남쪽으로 산 밑에 이르는 동안 밭을 갈고 있는 사람을 연이어 만날 수 있었다. 길을 물어 앞으로 가다가 비로소 한 골짜기로 들어섰다. 길에는 오고 간 수레바퀴 자국이 있었다. 길을 끼고 좌우에 모두 배나무가 있는데, 그 나무 밑에 이따금 돌들이 쌓여 있어 그 속에 뿌리를 박고서 자라고 있었다. 그러나 4, 5리를 깊숙이 들어가도 사람 사는 곳은 보이지 않았고, 또한 사관(寺觀)이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나는 의심스러워 몇 차례나 머뭇머뭇하니까 스님이 말하기를,
“그저 따라만 오십시오.”
하였다. 종자들도 모두 잘못 들어왔다고 탓하니, 스님은 그렇지 않음을 밝히느라고 목이 붉어졌는데,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하여 피차간에 모두 답답하였으니 역시 우스운 일이었다. 산은 점점 험준해지고 길은 좁아지고 나무들은 빽빽하고 덩굴이 서로 엉켜들어 거의 갈 수가 없었다. 스님이 나귀를 버리고 직접 벼랑을 타고 올라갔다. 나 역시 노새[騾]에서 내려서서 선흥을 시켜 말하기를,
“오늘 찾아가는 곳은 조월사(祖越寺)인데 길의 험하기가 이와 같으니 아마도 잘못 들어온 것 같습니다.”
하니, 스님이 대답하기를,
“기왕에 산을 구경하기로 하셨으면 어찌하여 험함을 개탄하십니까?”
라고 하였다. 선흥이 말하기를,
“설령 앞에 구경할 만한 곳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 어르신네께서는 갈 수가 없으시니 돌아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스님은 그 말을 듣고 발을 멈추었다. 이곳은 대개 산의 서쪽으로서 고개[嶺]를 올라온 것이 이미 3분의 2에 이른 곳이라 온 길을 따라 다시 돌아가려 해도 그 거리가 6, 7리나 먼 거리이다. 들락거리며 오르고 내리는 사이에 해는 또한 저물었다.

   동쪽으로 산기슭을 넘어서니 경계[洞府]가 넓어지며 툭 터졌는데, 그곳은 산의 북쪽이었다. 봉우리 3, 4개가 우뚝 솟아 있는 것이 아름다웠다. 그 아래에는 혹 절[寺觀]이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마침내 그리로 들어가니, 산 아래에 옛 집터[廢址]가 많았고 배나무들도 역시 앞에서와 같이 많았다.
1, 2리를 들어가니, 놀란 꿩이 갑자기 말 앞에서 후두둑 하고 날아갔다. 한참 후 길이 막혀 다시 돌아 나왔다. 길잡이 스님이 이곳에 이르러서 도리어 우리를 따라오고 가니 가소로웠다. 종자들이 모두 배가 고프다고 했으며 나도 피곤했으므로 인가(人家)에 들어가 밥을 먹고 싶었다. 그러나 촌락은 모두 수 리 밖에 있으므로 마침내 말에서 내려 수풀 속에 앉아 가지고 온 소주, 약과, 포육(脯肉) 등을 꺼내 나누어 먹고 요기를 하였다.
다시 큰길로 나와 더욱 동쪽으로 가다가 마차를 몰고 오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길을 물어 수십 리를 걸어가 촌락을 만나 아침을 먹었다. 마을은 산의 동북쪽 모퉁이에 있었는데 이 봉우리에 이르러 보이는 것은 더욱 많은 초옥(草屋)이었다. 6, 7호 되는 집이 비록 길가에 있기는 하였지만 환경이 그윽하여 깊은 산속처럼 고요하였다. 주인 역시 순박하고 후했으며 우리들을 보고 놀라거나 괴이하게 여기는 기색도 없었다.
그의 아내와 딸들을 바깥 온돌방으로 옮기고 나를 안쪽 온돌방으로 앉게 하였으며 인마(人馬)에게는 쌀, 콩을 먹이는 등 요구하는 대로 모두 갖다 주면서도 그 값을 말하지 않았다. 그의 딸이 말하기를,
“이달 초하룻날 외가에서 고려(高麗) 사람이 지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였다. 외가가 있는 곳을 물었더니, 여기서 10여 리라고 하였다. 아까 들었던 말과 서로 일치하는 것이었다. 나이 젊은 이웃 여자 세 사람이 들어왔는데 의복이 모두 깨끗했으며 바깥 온돌방에 앉아 주인 여자와 서로 이야기를 하다가 어린애 달아매는 기구를 빌려 가지고 갔다. 주인 여자는 종자(從者)에게 바늘을 요구하더니, 그것을 얻자 기뻐하는 기색이었다. 그것으로 보아 성안의 시장이 먼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종자들은 조밥을 해서 먹고 백지 1속을 주인에게 주었다.

   마을을 떠나 천천히 남쪽으로 수 리를 걸어가 산머리로 들어서 냇물을 따라가다 서쪽으로 꺾어 드니, 멀리 수림 밖으로 나온 석탑(石塔)이 바라보였다. 5, 6리를 가서 조월사(祖越寺)에 도착했다. 절이 있는 지역은 자못 높았고 앞에는 모두 돌을 쌓아 섬돌을 만들었는데 높이가 몇 길[丈]이나 되었다. 위로 올려다보면 많은 산봉우리가 굽어보고 내려다보니 시냇물이 앞에 있었다. 참으로 훌륭한 가람(伽藍)이었으나, 황폐해 버려 문과 담장이 없고 단지 2개의 불전(佛殿)만이 있을 뿐이었다. 좌우에 있는 승료(僧寮)에 처음 이르렀을 때는 조용함이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불전 처마 밑에 앉아 조금 있노라니까 승려 하나가 나타났다. 내가 글을 써서 이 불전의 이름이 무엇인가를 물었더니, 설산전(雪山殿)이라 하였다.
“어떻게 이 지경으로 파괴되었습니까?”
“세월이 오래되었는데 수리하는 사람이 없어서입니다.”
월사(月沙)가 기록하였던, 불전 뒤에 층루(層樓)와 옥황전(玉皇殿)은 모두 없었으며 절 문 및 불전의 편액으로서 ‘인경별구(人境別區)’, ‘천봉공취(千峯拱翠)’ 등의 글씨도 지금은 모두 볼 수가 없었다. 오직 불전 뒤에 큰 석벽(石壁)이 있어 ‘함택선기(含澤宣氣)’라는 네 자와 ‘독진군봉(獨鎭群峯)’이라는 네 글자가 새겨져 있을 뿐이었는데, 글자들은 모두 완연했고 글자 획의 크기는 모두 팔뚝만 하였다. 승려가 말하기를,
“절 뒤에 구경할 만한 것이 있습니다.”
하여 마침내 돌사다리[石磴]을 밟고 올라가니, 바로 절의 동쪽 언덕이었다. 여기서 선흥은 역마를 데리고 먼저 용천사(龍泉寺)로 가서 저녁밥을 준비하게 하였고, 업립은 노새를 지키고 있었으며 오직 모질만 따라왔다. 언덕 남쪽으로 수십 보를 나가니, 절별 아래는 깊은 골짜기였고 위는 평평한 대(臺) 같았는데 석탑(石塔)이 마주 서 있었으니, 계곡 어귀에서 바라보이던 탑이었다. 탑 하나는 시냇물 남쪽에 이곳 탑과 마주 서 있었다. 또 북처럼 생긴 큰 돌이 있었는데 ‘태극석(太極石)’이라는 세 글자를 새겨 놓았다. 월사(月沙)는 이 돌을 옥황전(玉皇殿) 옆에 있다고 하였는데 지금 보는 것과는 다르며, 또 ‘함택선기(含澤宣氣)’라고 새긴 석벽도 몇 길에 불과한데 만 길이라고 하였으니, 아마도 그것은 추후에 생각해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잘못된 것인 듯하다. 산등성이를 따라 더 올라가니 바위를 깎아 내어 길을 만들었고 이따금 험준한 곳이 있었다. 험준한 곳에는 반드시 소나무와 돌이 있었고 그늘이 져서 앉을 만하였는데 앞 봉우리를 바라보니 위로 올라갈수록 더욱 기묘했다. 그렇게 힘든 줄도 모르고 100여 보를 걸어 바위가 있는 서쪽으로 나오니, 스님이 그 위로 인도하여 올가가서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이곳이 바로 옥황전(玉皇殿) 옛터입니다.”
하였다. 이곳에 이르니 절 지붕이 곧바로 내려다보이므로 높이를 알 만하였으며 평평한 곳은 한 발[尋丈]에 불과하였으니 하나의 곧은 낭떠러지일 뿐이었다. 여기에다 어떻게 집을 지었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또 위로 수백 보를 올라갔더니 작은 비석이 서 있었는데, 이곳부터 땅이 조금 평탄해졌다. 조금 올라가니 3칸 집이 있었는데, 도사(道士) 몇 명이 살고 있었다. 마당을 깨끗하게 청소하여 먼지가 없었고 앞에 낮은 담장을 둘러쳤는데 역시 문은 없었다. 담 아래로 여러 포기의 고국(故菊)이 있었다. 도사 한 사람은 나이가 어린데 글을 알고 있었다. 나를 보더니 몹시 기뻐하면서 방 안으로 앉게 하고는 차를 끓여 연방 권했으며 또 여러 가지 과자[糖菓]를 내와 대접을 하며 몹시 친절히 대했다. 감실(龕室) 안을 보니 작은 금부처[金像]가 있었다. 내가 글을 써서 묻기를,
“이곳은 도관(道觀)인데 어찌하여 부처님을 모십니까?”
하니까 그 사람이 대답하기를,
연등도인(燃燈道人 석가의 성불(聖佛)을 예언한 부처님의 이름)입니다. 어찌 부처가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또 북쪽 벽에는 영정[影子]이 한 장 걸려 있었는데, 도사의 모습으로 미목이 청고(淸古)하였다. 탁상에는 도서(圖書)와 몇 권의 책이 있었다. 내가 글로 써서 묻기를,
“이것은 어떤 사람의 영정입니까?”
하니,
“선사님[先師祖]의 모습입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성은 무엇이며 이름은 누구며 몇 살까지 살고 어느 해에 돌아가셨습니까?”
곽함진(郭含眞)이며, 43세까지 살고 강희(康煕) 47년(1708, 숙종 34) 5월 8일에 우화(羽化 도인이 죽는 것을 말함)하셨습니다.”
“탁상에 있는 인신(印信 도장)은 누구의 것입니까?”
“도경사(道經師)의 도호(道號)입니다.”
“어떤 곳에 사용하는 것입니까?”
“소문(疏文)에 사용합니다.”
“이 불전은 이름이 무엇입니까?”
음희각(音喜閣)으로 곧 관음각(觀音閣)이라는 이름입니다.”
‘음희(音喜)’라는 것은 사람의 발소리가 저벅저벅 들리면 기뻐진다는 데서 나온 것 같았으나 또 관음각(觀音閣)이라 한 것은 무슨 뜻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도사가 또 글을 쓰기를,
“저희 집은 광동(廣東) 남해현(南海縣)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북방을 유랑하다가 이곳에 와 출가(出家)를 한 지 이미 10년이 되었습니다. 성은 유(劉)요, 도명(道名)은 청한(淸閒)이며, 자(字)는 홍허(弘虛), 나이는 25세입니다.”
하였다.
“광동이라면 이곳에서 60리나 되는 먼 거리인데, 어떻게 이런 궁벽한 곳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까?”
“화산적(花山賊)의 난이 있어 부모님을 따라 피난을 다니다가 이곳에 와서 부모님이 모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하여 출가(出家)하게 되었습니다.”
“내력을 듣고 보니 저절로 측은해집니다. 그 산의 산적을 모르겠는데 어떤 산적입니까?”
“산적의 이름은 향화침(香花針)이라 합니다.”
“그 산적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습니까?”
“모르겠습니다.”
“나는 오늘 저녁 용천사에 머물러 자려고 하는데, 당신도 동행하여 자리를 함께하면서 정답게 이야기나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저는 지금 이곳에서 할 일이 있으므로 떠날 수가 없습니다. 마음으로는 선생님[尊駕]을 붙들어 이곳에서 묵어 가시게 하고 싶으나 몹시 불편하실 것 같습니다.”
“내가 산을 구경하러 오기는 했으나 기한이 매우 촉박하기 때문에 지체하여 머무를 수가 없습니다. 이미 짐들을 꾸려 용천사로 보냈으며, 거기서 잠시 머물렀다가 내일 아침 곧 떠나야 합니다. 성의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됨이 한스럽습니다.”
“전생의 인연이 있어 금생에서 이렇게 한번 만나게 되었으니 기쁩니다.”
“당신과 나는 사는 곳이 서로 만여 리나 떨어져 있는데, 지금 이곳에서 만나 보게 되었으니 전생의 인연임을 알겠습니다. 그러나 한스러운 것은 갈 길이 바빠 여유 있게 머무를 수 없는 점입니다.”
도사는 또 말하기를,
“날이 저물었습니다. 용천사까지 또 3리 길입니다.”
하였다. 내가 부시 1개를 그에게 주니, 도사는 나를 인도하여 집 뒤를 거쳐 수십 보를 올라갔다. 거기에는한동(羅漢洞)이 있었고 굴[洞] 왼쪽에 또 작은 굴[小洞]이 있었는데, 창문이 달렸고 안에는 불상을 모셨다. 굴 앞 석상(石上)에 작은 비석이 있었는데, 경태(景泰) 7년 병자년(1456, 세조 2) 중추(仲秋)에 세운 것이었다. 그 비문에는 ‘당(唐) 정관(貞觀) 때에 동정(東征) 길에 올라 이곳에서 머물다.[唐之貞觀東征駐蹕于此]’라고 씌어 있었다.
동쪽 봉우리를 바라보니, 산마루에 작은 집이 있었는데 멀리 가물가물하여 그림 속에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묻기를,
“저 집에는 사람이 있습니까?”
하니 청한(淸閒)이 말하기를,
“도사 한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하였다. 나는 그 말을 듣자 엄숙해지면서 찾아가 보고 싶었으나 해가 이미 저물었으므로 내일 아침 다시 오기로 약속을 하였다. 청한이 말하기를,
“아침을 준비해 놓고 기다릴 테니 일찍 오시기 바랍니다.”
하니, 나는 허락하고 떠났다. 다시 조월사(祖越寺)를 지나니, 절 앞에 석교(石橋)가 있고 다리 남북쪽으로 옛 섬돌[砌]들이 있었다. 월사(月沙)가 ‘길게 연이은 난간으로 수각(水閣)을 만들어 놓았다.’고 이른 것이 바로 이곳인 것 같았다. 수 척(尺)이 되는 깨진 비석이 있었는데 글자는 볼 수가 없었다. 주위를 배회하면서 창연해하다가 겨우 다리를 지났을 즈음, 거기서 6, 7명의 사람을 만났다. 용천사에서 내려오는 사람으로 모두 어른들이었다. 나를 보더니 기뻐하면서 모두 서로 막아 서며 나를 잠시 머물러 서게 하고 묻기를,
호랑곡(虎狼谷)이 얼마나 됩니까?”
하니, 답하기를
“70리 가량 됩니다.”
하였다. 이윽고 손을 들어 작별을 하였다. 그때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하였으나 그대로 비를 맞으며 걸어갔다. 개울물을 건너 꺾어 들어 북쪽으로 가니, 그곳부터는 비로소 개울물과 떨어지게 되었다. 길 오른편에는 많은 부도(浮屠)가 있었는데 그중 3개는 담을 둘러치고 문을 달아 놓았으며, 수목들이 많이 심어져 있었다. 산 어귀에서 이 계곡까지는 숲을 이루고 서 있는 나무들이 모두 배나무들로 다른 나무가 없었다. 6, 7리가 끊이지 않고 계속 배나무가 이어지니 꽃이 필 때는 온 산이 눈 온 것 같다고 하였다. 개울을 건넌 후부터는 산세가 문득 넓게 펼쳐지고 나무도 없었다. 단지 황막한 풀만이 엉켜 깔려 있을 따름이었다. 조금 앞으로 가니 길이 갈라져 있는데, 우측 길은 용천사로 가는 길이며 좌측은 서령(西嶺)으로 올라가는 길이었다. 이곳에 와서 보니 아까 올 때 처음 들어갔던 길과 이 길과는 단지 고개[嶺] 하나가 떨어진 곳으로 비로소 길잡이 스님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오히려 잘못 생각한 것임을 알았다. 그 길을 돈 것이 20리가 못 되지 않았다. 갈림길을 지나서부터는 좌우로 기암(奇巖)들이 다투어 나오고 산봉우리들이 겹겹이 쌓여 모여들었는데 절은 그 안에 있었다. 100보 내에 이르러도 길을 볼 수 없더니 세 번이나 빙빙 돌다가 우측으로 꺾여 두 바위틈으로 들어서니, 비로소 홍예문이 있었다. 편액에는 ‘칙건용천사(勅建龍泉寺)’라 써 있었고, 그 옆에는 만력(萬曆) 연호가 써 있었다. 문을 들어서 수십 보를 가니 또 하나의 중문(重門 겹문)이 있었다. 이 두 문 사이에 절벽이 길을 끼고 있어 마치 용도(甬道 양쪽에 담을 쌓은 길)와 같았다. 우측 벽에는 ‘수경(嗽瓊)’ 두 글자를 새겨 놓았다.
두 번째의 문을 지나고 나니 비로소 평지가 있으며, 거기에 5, 6칸 되는 집이 있었다. 그것은 모두 창고[廩舍]로서 수레와 말들이 꽤 많이 들어 있었으니, 소향(燒香)하러 온 사람들이 가지고 온 것이었다. 북쪽 위로는 또 하나의 층계로 된 섬돌이 있는데 높이는 몇 길이나 되었고 불전(佛殿)과 승료(僧寮)는 모두 그 위에 있었다. 선흥이 이미 동쪽 방에다 자리를 잡아 놓았는데 넓고 깨끗하여 마음이 기뻤다. 주지승 정진(精進)이 잘 차린 다과(茶果)를 가져다 주었는데 유분(油粉)으로 만든 과자 및 귤병(橘餅)ㆍ민강(閩薑) 등 갖추지 않은 것이 없었다. 선흥은 말하기를,
“처음 와서 문을 들어섰더니, 여러 스님들이 바라보고 다투어 뛰어와 계하에서 영접하면서 ‘어떻게 오셨습니까?’ 하고 묻기에, ‘산을 구경하러 왔습니다.’라고 대답했더니, 또 묻기를 ‘당신 혼자 왔습니까?’ 했습니다. 대답하기를 ‘선생님[老爺]을 따라 왔습니다. 선생님은 지금 조월사(祖越寺)에 계신데 이제 또 오실 겁니다.’라고 하였더니 여러 스님들은 그 말을 듣고 더욱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우리는 당신이 혼자 오지는 않았을 거라고 했는데 정말 그렇군요.’라고 했습니다.”
하였다. 남쪽 창문을 열어 놓고 앉으니 안개비[煙雨]가 자욱한 가운데 3, 4봉우리가 눈 앞에 바라보여 유연한 감흥을 일으켰다. 차를 마신 후 불전(佛殿)을 구경하였다. 불전은 3층 섬돌 위에 지었는데 비록 웅걸스럽지는 못했지만 장엄하고 정려(精麗)하였다. 수십 개의 빼어난 산봉우리들이 앞에 벌려 섰고, 왼쪽 산등성이 둥글게 싸안듯이 동에서 남으로 이르면서 안산(案山)을 이루었는데 높지도 낮지도 않았고 돌로 내외의 벽을 이루고 있었다.
그 위에 있는 작은 집은 나한전(羅漢殿)으로 겨우 100여 보쯤 떨어져 있었는데, 풍수(風水)에 있어서 지극히 요긴한 곳이었다. 나한전 서벽(西壁) 밖에는 시를 적어 놓은 것이 매우 많았으나, 모두 근인(近人)이 지은 것이었다. 그중에 칠율(七律) 1수와 오율(五律) 1수가 좀 볼 만하였다. 칠율은 다음과 같았다.
발길을 요서(遼西)에 머물다가 갑자기 동으로 와 / 跡滯遼西忽復東
우연히 돌아보매 그 뜻이 무궁하구나 / 偶然憑眺意無窮
그윽하고 기이함은 용미(龍尾)가 제일이고 / 幽奇莫怪居龍尾
웅걸스러운 산세는 패풍(沛風)을 일으키리 / 雄傑應敎起沛風
절은 그림 속에서나 보는 뛰어난 경치일레 / 寺在畫圖如□勝
사람이 노닐던 시구는 하늘을 뚫을 듯하도다 / 人遊詩句直凌空
이번 길에 다 함께 임천(林泉) 정취 깨달으리 / 此行共領林泉趣
여능의 노취옹(老醉翁)에 양보할 수 없도다 / 不讓廬陵老醉翁

그리고 오언 율시는 다음과 같았다.

암학의 좋은 경치 소문이 났네 / 巖壑聞爭勝
산음의 천만 봉우리로다 / 山陰有萬千
어찌 생각했으랴 요해 땅에 / 何圖遼海地
따로 푸른 하늘 있으리라는 것을 / 別具蔚藍天
용은 누워 단학에 서려 있고 / 龍臥藏丹壑
봉우리는 높아 개울을 눌렀구나 / 峯高壓淺泉
그윽함을 찾아서 높이 오르니 / 尋幽恣登眺
바라봄에 흥취가 유연하도다 / 跌望興悠然

그 아래에는 ‘강희(康煕) 무오년(1678, 숙종 4) 8월에 곤능(昆陵) 공군(龔君)이 씀’이라고 써 있었다.

   드디어 동료(同寮)로 돌아오니 정진(精進) 스님이 저녁밥을 가져다 주었다. 채소 5, 6접시는 지극히 정성들여 준비한 것이었다. 그중에 버섯 볶은 것[炒菌]이 있었는데, 맛이 매우 좋아 물어보았더니 느릅나무 버섯[楡蕈]이라고 하였다. 서료(西寮)로부터 스님이 왔는데, 나이는 30여 세 된 사람으로 글을 알았다. 내가 글로 써서 묻기를,
“이 산속에 폭천(瀑泉)이 있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이 봉우리는 용천(龍泉)으로 그 위에 샘물이 하나 있는데 겨울이나 여름이나 마르지 않습니다.”
하였다.
“여기서 거리가 얼마나 됩니까?”
“1리 정도 됩니다.”
그리고 또 말하였다.
“이 절에는 16군데에 산경(山景)이 있는데 잠깐 동안에 명확하게 기억할 수는 없으나 네 전각[四閣] 위에는 시(詩) 16부가 있습니다. 내일 아침 올라가 한번 보시면 곧 명백할 것이니 오늘 자세히 물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 산에는 모두 몇 개의 절이 있습니까?”
“용천사(龍泉寺)ㆍ대안사(大安寺)ㆍ조월사(祖越寺)ㆍ중회사(中會寺)ㆍ향원사(香元寺)ㆍ쌍봉사(雙峯寺)ㆍ영청사(永淸寺)가 있습니다.”
“조월사와 용천사를 제외하고 나머지 다섯 절의 경치는 어느 절이 좋습니까?”
“향원사와 대안사가 좋고 나머지는 평범할 뿐입니다.”
“여기서 향원사까지는 몇 리입니까? 그리고 대안사는 몇 리입니까?”
“이곳을 따라 산 어귀로 다시 나아가면 먼저 대안사에 이르는데 20리이고, 대안사에서 향원사에 이르려면 서쪽으로 산기슭[嶺邊]을 따라 15리를 가야 합니다.”
“대안사에는 말을 타고 갈 수 있습니까?”
“타고 갈 수 있습니다.”
“대안사에서 호랑곡(虎狼谷)까지는 얼마나 됩니까?”
“60리입니다.”
“그러면 내일 일찍 떠나 대안사를 구경하고 호랑곡에 도착할 수 있습니까?”
“산길로는 매우 먼 길이라 다시 더 갈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 대안사에는 어떠한 경치들이 있습니까?”
“명월산(明月山)이 있는데 당왕(唐王)이 활을 쏜 곳이요, 당모산(唐帽山)은 어가(御駕 임금님의 수레)가 친림(親臨)했던 곳입니다. 또 인귀암(仁貴菴)은 백포장(白袍將 설인귀(薛仁貴))이 서기(瑞氣)를 기르던 곳이요, 영로암(英潞菴)은 두 봉황이 나란히 서 있는 등 신기한 경치들이 허다하여 한마디로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더니 곧이어,
“잠시 염불을 올려야 합니다. 내일 다시 만납시다.”
하는 것이었다.

   비가 그쳤으므로 선흥과 함께 장경각(藏經閣)을 구경하러 갔다. 장경각은 동쪽 산마루 높은 곳에 있었다. 동료(東寮)에서 100여 보쯤 걸어가니, 길 앞에 1칸짜리 빈 집이 하나 있었는데 그곳을 지나자 장경각이 있었다. 대개 3칸 집이었는데, 벽에 잇대어 3면은 시렁을 만들고 불서(佛書)를 가득 쌓아 아주 잘 정리해 놓았다. 뜰에는 비석이 있었다. 도양청오희이(都庠淸吾希夷) 왕동영(汪東瀛)이 글을 짓고 충소위장보(冲霄爲章甫) 송문괴(宋文魁)가 쓴 것으로, 만력 25년 정유년(1597, 선조 30)에 세운 것이었다. 장경각에서 등성이를 따라 남쪽으로 나한전(羅漢殿)에 이르러 돌아보니 절 뒤에 작은 암자가 있고 또 그 뒤에 바위가 병풍처럼 벽을 이루고 서 있었는데 그 높이가 수십 길이었다. 그때 어둠이 깃들기 시작하여 첩첩한 전우(殿宇)에는 등촉이 휘황찬란했고 여러 스님들은 불전에서 종을 치며 염불하고 있으니, 이는 인간[世間]의 경지가 아니었다. 불전으로 돌아와 섬돌 위에 앉아 다시 앞 산봉우리를 바라보면서 오랫동안 있다가 동료(同寮)로 돌아와 잤다. 선흥은 말을 지키느라고 다른 집에서 잤다. 이날은 약 60여 리를 갔다.


그림 〈유리창()〉, [연행도()] 중 제13폭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 1780년 이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복원된 유리창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추정한다.


1
2

그림  나빙의 자화상인 〈양봉도인 사립도()〉의 부분.1780년, 종이에 채색, 59.8×56cm, 베이징 고궁박물원 소장.

그림  나빙, 〈박제가 초상화〉(1790년 사진).나빙이 이별의 증표로 박제가에게 그려준 초상화로, 원작 그림은 남아 있지 않다.

      *** 사진 출처 :   2018.01.27 | 카페 > Daum카페  http://cafe.daum.net/j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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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地篇○地理類 / 火      ㅡ 이규경(李圭景) , 미상

[0140]取火藏火辨證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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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有火之辨證。而今又證辨火者。無乃覶縷乎。曰。此不然矣。但說家中日用火種而已也。
物理書。取火于竹。以乾竹破之。布紙灰而竹瓦覆上。竹瓦穿一孔。更以竹刀往來切其孔上。三四回。煙起矣。十餘回。火落孔中。紙灰已紅。石火烈。竹火易取。常用無毒。藏火法。棉花燒黑。將灰收之。香燃絲。去香則隱。少頃吹之復燃。《潛草》曰。杏仁灰包火。楊梅可佩。外域用火鴉駝雞肫皮。塗卵白。包火。又曰。紙捲香入竹筒。終日不滅。開則燃。合則隱。【竹木銃一發則朽。塗卵白則能三發。故卵可撲火。】《物理所》曰。火發房屋。可投雞鴨卵及大泥團。石碑衙扁。撲之亦止。續火者。杉炭、麻楷、草紙易燃。留火則棗蠟類也。藏火有長生火葫法、滿爐金法。眞水粉一兩。山烰炭二兩共爲末。放爐內。一點火星。卽刻滿爐。香爐灰法米湯和紙灰曬乾。煅紅硏之。三煅曰滿爐金。或一斗加鑛灰二升煅之。尋常燒柚皮千張灰。足矣。冷爐以草紙茄稭炭埋之。火亦自活。方中履曰。茶油餠滓入爐燃。《水經注》。盧水聖子木炭不滅。】燒炭忌?。五?柴燒火無焰。成炭之後。忽然自燒。故炭窰忌之。榕亦無焰。然其枝曝爲點火繩。八月割茅燒之有聲。汴力也。九月割則枯矣。巴菽瀉松脂。則松柴無焰。方中德。椶桄燒之。澀鬱不著。櫟炭以畫墨而燒之。則有墨處著。無墨處不著。凡墨不著者加硝黃。燒炭以隱。以沸水沃之。】 雜方。熾炭焰焰。如星不已。用焰投之則止。撒米泔浸炭則止。《和漢三才圖會》。葒草莖。燒爲炭。爲懷爐之炭。佳勝於茄莖之炭。雜方。炭加些礬在滾水內侵一宿。燒則耐久。《增補山林經濟》。難消炭法。細骨炭十斤。鐵屎塊十斤。用生芙蓉葉三斤。合搗爲末。糯米粥和成作團曬乾。每燃一枚。三日不滅。如不用。以灰掩之。又竈中燒柴火取出。罈閉成炭。不拘多小。搗爲末。用塊子石灰化開。取濃灰和炭末。加水調成。以竹一筒劈作兩半。合脫成錠。曬乾燒。終日不消。造香炭以石炭。無則木炭同。生葵葉搗和爲餠。曬乾焚香。雖冷濕地。火亦不滅。神隱方也。雜方。粘起炭火法。以燈心蘸油。再蘸白礬末。粘起炭火。石炭。取石炭作屑。和石灰用酒糊。切成薄片。待乾入罏。數日不消。今燕京以此爲日用火種。炊飯煎茶
[주-D001] 取火于竹 : 
『取火于竹』부터 『常用無毒』까지는 方以智 撰 《物理小識 卷2ㆍ石竹火》에 보인다.
[주-D002] 石火烈 : 
《物理小識》에 근거하여 보충하였다.
[주-D003] 棉花燒黑 : 
『棉花燒黑』부터 『故卵可撲火』까지는 《物理小識 卷1ㆍ藏火》에 보인다.
[주-D004] 一 : 
《物理小識》에 근거하여 보충하였다.
[주-D005] 《物理所》曰 : 
『物理所曰』부터 『撲之亦止』까지는 《物理小識 卷2ㆍ貯火油與滅火法》에 보인다.
[주-D006] 續火者 : 
『續火者』부터 『留火則棗蠟類也』까지는 《物理小識 卷2ㆍ續火》에 보인다.
[주-D007] 香爐灰法 : 
『香爐灰法』부터 『盧水聖子木炭不滅』까지는 《物理小識 卷8ㆍ香爐法》에 보인다.
[주-D008] 米湯和紙灰曬乾 : 
『米湯稻灰曬乾』으로 되어 있는데, 《物理小識》에 근거하여 고쳤다.
[주-D009] 或一斗 : 
『或或一斗』로 되어 있는데, 《物理小識》에 근거하여 『或』 1자를 삭제하였다.
[주-D010] 常 : 
《物理小識》에 근거하여 보충하였다.
[주-D011] 燒炭忌? : 
『燒炭忌?』부터 『以沸水沃之』까지는 《物理小識 卷8ㆍ燒炭忌?》에 보인다.
[주-D012] 方中德曰 : 
『方中德曰』부터 『以沸水沃之』까지 49자는 『方中德曰。椶桄燒之。澀鬱不著。燒炭以隱。以沸水沃之。方中通曰。櫟木畫木而燒之。則有墨處著。無墨處不著。凡木不著者加硝黃。』으로 되어 있는데, 《物理小識》에 근거하여 고쳤다.
[주-D013] 爲懷爐之炭 : 
『擁爐火』로 되어 있는데, 寺島良安 撰 《和漢三才圖會 卷94ㆍ葒花》를 참고하여 고쳤다.
[주-D014] 之炭 : 
《和漢三才圖會》에 근거하여 보충하였다.
[주-D015] 細骨炭十斤 : 
『細骨炭十斤』부터 『以灰掩之』까지는 高濂 撰 《遵生八牋 卷8ㆍ獸炭》에 보인다.
[주-D016] 又竈中燒柴 : 
『又竈中燒柴』부터 『終日不消』까지는 《遵生八牋 卷8ㆍ難消法》에 보인다.
[주-D017] 帶 : 
《遵生八牋》에는 『下』로 되어 있다.
[주-D018] 毛 : 
《遵生八牋》에 근거하여 보충하였다.
[주-D019] 用 : 
《遵生八牋》에 근거하여 보충하였다.
[주-D020] 造香炭以石炭 : 
『造香炭以石炭』부터 『神隱方也』까지는 柳重臨 撰 《增補山林經濟 卷16ㆍ雜方》에 보인다. 『造香炭以石炭』의 『造』는 《增補山林經濟》에 근거하여 보충하였다.





人事篇○人事類 / 攝生    ㅡ 이규경(李圭景) , 미상

[0282]四時十二時淸趣辨證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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予今行年。已過耳順。山居谷飮。養性鍊身而已。其他榮辱窮達。弁髦如也。稍待與草同腐。這間視息之際。遣閑無術。有此收拾古今人飣餖之物。而忽念皇明鍾伯敬惺《隱秀軒集》所引。雲間陸大宗伯。年九十五六矣。嘗語陳仲醇曰。天地如逆旅。人生其間。又如僦屋而居。期滿年至。主人見索。亦須歸之。仲醇曰。然。若僦屋者。不得罪主人。謹身洽隣。主人愛之。多住幾年。亦可知云。予亦云然。若假我幾年。則處於其間。以此爲日用而過了。則端不負主翁借屋假年之盛事。故辨說平日所欲爲者。錄前人已行之節目焉。

四時淸趣者。
。晨點梅花湯。課奚奴灑掃護階苔。禺中。取薔薇露浣手。薰玉蕤香。讀赤文、綠字書。晌午。採筍蕨。供胡麻。汲泉試新茗。午後。乘款段馬。執剪水鞭。攜斗酒雙柑。往聽黃鸝。日晡。坐柳風前。裂五色箋。集錦佳句。薄暮。繞徑灌花種魚
夏。晨起芰荷爲衣。傍花枝吸露潤肺。禺中。披古圖畫展法帖臨池。晌午。脫巾石壁。匡牀。談《齊諧》、《山海》。倦則取左宮枕。爛遊華胥國。午後。刳椰子盃。浮瓜沈李。搗蓮花。飮碧芳酒。日。浴罷硃砂溫泉矣。棹小舟垂釣于古藤曲水邊。薄暮。籜冠蒲扇。立層岡看火雲變現。
秋。晨起下帷撿牙籤。挹露硏硃點校。禺中。操琴調鶴。玩金石彝。晌午。用蓮房洗硯。理茶具。拭梧竹。午後。戴白接䍦。著隱士衫。望紅樹葉落。得句題其上。日晡。持蟹螯鱸膾。酌海川螺試新釀。醉弄洞簫數聲。薄暮。倚柴扉聽樵歌牧唱。焚伴月香壅菊。
冬。晨起飮醇醪。負暄盥櫛。禺中。置氈褥。市烏薪。會名士作黑金社。晌午。挾筴理舊稿。看晷影移階灌足。午後。攜都統籠向古松懸崖間。敲氷煮建茗。日晡。布衣皮帽。裝嘶風?鐙策蹇驢。問寒梅消息。薄暮。圍爐促膝煨芋魁。說無念生妙偈。談劍術。

十二時淸趣。
。夙興整衣襟。坐明窓中調息受天氣進白湯一甌勿飮茶。櫛髮百餘遍。使疏風淸火明目。去腦中熱。漱畢。早飡。宜粥宜淡小飽。徐行百步。以手摩腹。令速下食。天氣者。亥、子以來眞氣也。靜以淸。喧以濁。故天氣。至巳、午而微矣。
巳。讀書。或《楞嚴經》。或《南華經》。或《易》一卦。循序勿汎濫勿妄想勿聚談。了大義知止。勿積疑。倦則閉目嚥津數十口。見賓客。寡言以養氣。
午。坐香一線畢。經行使氣神安頓。始飯用素湯。當飢而食。未飽先止。茶。滌口膩漱去乃飮。行步多少。坐勿傴胸。中悶。則點呵氣二三口。凡飮食之節。減滿受虛。故當飯而節其滿未飽。留其虛
。獵史。看古人大局。窮事理。流覽時務。事來須應過。物來須論破。勿晝臥。無事無物。不妨事物之來。涉獵流覽。都是妙明生趣。讀書人。日用不知。
申。朗誦古人得意之文一二篇。引滿數酌。勿多飮令昏志。或吟名人詩數首。弄筆倣古帖。倦卽止吟誦。引白以王眞氣。亦是張旭草書被酒入聖時也。
酉。坐香一線。動靜如意。晩食宜早。課兒子一日程。如法卽止。小飮勿沈醉陶然。熱水濯足降火除濕漱滌一日飮食之毒。
戌。曁夜黙坐。勿多思。勿多閱。多思傷心。多閱傷目。坐勿過二更。須安睡以培元氣。臥必側身。屈上一足。先睡心。後睡眼。睡心是止法。睡眼是觀法。
亥、子。亥末子初。嬰始孩也。一身元氣。於焉發陳。當其候。起坐擁衾。虛心靜寧。無爲而行。約香一線。固其命門。精神日餘。元氣久盈。醒而行之。難老而長存也。
丑、寅。丑、寅間。精氣發生時也。勿酣睡靜守。令精住其宅。或轉側臥如弓。氣亦周流不漏。如勾萌不折。迎生氣也。
卯。醒見晨光。披衣坐牀。叩齒三百。轉動兩肩。調其筋骨。以和陰陽。振衣下榻。俾勿濫觴。十供。讀義理書。學法帖字。澄心靜坐。益友淸談。小酌半醺。澆花種竹。聽琴玩鶴。焚香煎茶。登城觀山。寓意奕棋。
見此可袪俗累塵愁。又非高遠難行之事爲。特爲飢火物慾所拘制。有沒身不得享其樂。況學聖希仙也哉。
[주-D001] 春 : 
『春』부터 『談劍術』까지는 程羽文 撰 《淸閑供ㆍ四時歡》에 보인다.
[주-D002] 起 : 
『夜』로 되어 있는데, 《淸閑供》에 근거하여 고쳤다.
[주-D003] 日晡 : 
《淸閑供》에 근거하여 보충하였다.
[주-D004] 囊 : 
『苑』으로 되어 있는데, 《淸閑供》에 근거하여 고쳤다.
[주-D005] 繞徑灌花種魚 : 
『而繞徑落花種魚』로 되어 있는데, 《淸閑供》에 근거하여 고쳤다.
[주-D006] 據 : 
『救』로 되어 있는데, 《淸閑供》에 근거하여 고쳤다.
[주-D007] 晡 : 
『燕』으로 되어 있는데, 《淸閑供》에 근거하여 고쳤다.
[주-D008] 鼎 : 
『陽』으로 되어 있는데, 《淸閑供》에 근거하여 고쳤다.
[주-D009] 辰 : 
『辰』부터 『俾勿濫觴』까지는 《淸閑供ㆍ二六課》에 보인다.
[주-D010] 坐明窓中調息受天氣 : 
『坐明胸中調息愛受天氣』로 되어 있는데, 《淸閑供》에 근거하여 고쳤다.
[주-D011] 盥 : 
『氣』로 되어 있는데, 《淸閑供》에 근거하여 고쳤다.
[주-D012] 滿未飽留其虛 : 
《淸閑供》에 근거하여 보충하였다.
[주-D013] 未 : 
『未』부터 『流覽』까지 13자는 《淸閑供》에 근거하여 보충하였다.
[주-D014] 除濕 : 
『除頭濕氣』로 되어 있는데, 《淸閑供》에 근거하여 고쳤다.
[주-D015] 暮 : 
《淸閑供》에 근거하여 보충하였다.
[주-D016] 機 : 
『氣』로 되어 있는데, 《淸閑供》에 근거하여 고쳤다.
[주-D017] 十供 : 
『十供』부터 『寓意奕棋』까지는 沈仕 撰 《林下盟ㆍ十供》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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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4]荼茶辨證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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荼字自中唐始變作茶。其說已詳于《唐韻正》《困學紀聞》荼有三誰謂荼苦。苦菜也。有女如荼。茅秀也。以薅荼蓼。陸草也。《爾雅》。荼、蒤字凡五見。而各不同《釋草》曰。荼苦菜注引《詩》荼苦。其甘如薺。疏云。此味苦可食之菜。葉似苦苣而細。斷之有白汁。花黃似菊。堪食。但苦耳。又曰。蔈荂荼注云。卽芳。疏云。按《周禮ㆍ掌荼》《詩》有女如荼。茅秀也。蔈也、荂也其別名。又曰。蒤虎杖注云。似紅草而粗大。有細刺。可以染赤。又曰。蒤委葉注引《詩》以茠蒤蓼。疏云。蒤。一名委葉。說詩云。蒤。陸穢草。然則蒤者。原田蕪穢之草。非苦菜也。《釋木》曰。檟苦荼注云。樹小如梔子。生葉可煮作羹飮。今呼早采者爲荼晩取者爲茗一名蜀人名之苦荼今以《詩》考之。《邶ㆍ谷風》之荼苦。《七月》之采荼《綿》之堇荼。皆苦菜也《夏小正》取荼莠。周禮ㆍ地官掌荼。《儀禮》茵著用荼。實綏澤焉。《鴟鴞》捋荼。茅莠也。《出其東門》有女如荼。《國語》吳王夫差萬人爲方陳。白常、白旗、素甲、白羽之矰。望之如荼。亦茅莠也。《良耜》之荼蓼。委葉之蒤也。惟虎杖之蒤與檟之苦荼。不見於《詩》《禮》王褒《僮約》云。陽武買荼張載《登成都白菟樓詩》云。芳荼冠六淸。孫楚詩云。薑桂荼荈出巴蜀。《本草衍義》溫嶠上表。貢荼千斤。三百斤。是知自秦人取蜀而後始有茗飮之事。王褒《僮約》前云炰鼈烹荼後云陽武買荼注云。以前爲苦菜。後爲《唐書》陸羽嗜荼。【自此後。荼字減一畫爲茶。】 著經三篇。天下益知飮茶矣。時回紇入朝。始驅馬市茶。至明代。設茶馬御史。《大唐新語》右補綦毋性不飮茶。著《茶飮》序曰。釋滯消壅。一日之利暫佳。瘠氣侵精。終身之害斯大。
愚按茶字之最古者。僅見《神農食經》《物理小識》。解答載《神農食經》古荼卽茶。【《漢ㆍ志》。荼陵音茶。詳《通雅》韓翃《謝茶啓》。吳主置晉人分茶晏子三茗自古以然。惟桑苧以製顯耳。唐竟陵陸羽《茶經》一曰二曰三曰四曰五曰有千萬狀。鹵莽而言。如胡人靴者蹙縮然。犎牛臆者廉襜然。浮雲出山者輪菌然。輕颷拂水者涵澹然。於古無見者。《神農食經》茶茗久服人有力悅志周公《爾雅》苦荼《晏子春秋》。相齊景公時。食脫粟飯。炙三弋、五卵、茗菜而已。郭璞《爾雅注》云。樹小似梔子。冬生葉。可煮羹飮《本草ㆍ木部》茗。苦茶味甘苦。微寒無毒。主瘻瘡。利小便。去痰渴熱。令人小睡。宋熊蕃宣和北苑貢茶錄》陸羽《茶經》裴汶《茶述》。皆不第建品。說者但謂二子未嘗至建。而不知物之發也固自有時。蓋昔者山川尙閟。靈芽未露。至于唐末。然後北苑出爲之最。是時僞蜀時詞臣毛文錫《茶譜》亦第言建。有紫筍而臘面乃産于福。五代之季。屬建南唐。歲率諸縣民。采茶北苑。初造硏膏。繼造臘面旣又製其佳者。號曰京鋌。聖祖開寶末下南唐。太平興國初。特置龍鳳模。遣使卽北苑。造團茶以別庶飮。龍鳳茶蓋始于此。蓋龍鳳等茶。皆太宗廟所製。至咸平初丁晉公始載茶錄。慶曆中。蔡君謨將漕小龍團以進。被旨仍歲貢之。自小團出。而龍鳳遂爲次矣。元豐間。有旨造密雲龍其品又加于小龍團之上。紹聖間。改爲瑞雲翔龍至大觀初。今上親製《茶論》二十篇。以白茶者與常茶不同。偶然出。非人力可致。于是白茶爲第一。凡茶芽最上曰小芽。如雀舌鷹爪揀芽。乃一芽帶一葉者。號一鎗一旗。次曰中芽。乃一芽帶兩葉。號一鎗兩旗宣和庚子歲。鄭公可聞始創爲銀線水芽蓋將已揀熟芽再剔去。秖取其心一縷。號龍團勝雪茶之妙。至勝雪極矣。然猶在白茶之次者。以上之所好也。宋蔡襄《茶錄》茶色貴白。而餠茶多以珍膏。油其面。故有靑黃紫黑之異。旣已末之。黃白者受水昏重。白者受水詳明。故建安人鬪試。以靑白勝黃白。南越陳鑑虎丘《茶經》注補陸桑苧《茶經》漏虎丘。竊有疑焉。嘗隱虎丘者也。井焉品。水焉茶。何漏。曰。非漏也。虎丘茶自在經中。無人拈出耳。《茶經》樹如瓜蘆注。瓜蘆。苦杕也。廣州有之。葉與虎丘茶無異。但瓜蘆苦耳。花如白薔薇注。虎丘茶花開。比白薔薇而小。茶子如小彈。上者生爛石。中生礫壤。野者上。園者次。宜陽崖陰林。紫者上。綠者次。筍者上。芽者次。葉卷上。葉舒次。凡采茶。在二三四月間。茶之筍者。生爛石。長四五寸。若薇蕨始抽。凌露采之。茶之芽。發於叢薄之上。有三枝四枝五枝者。選中枝穎拔佳。泉水上。天雨次。井水下。補。劉伯芻《水記》陸鴻漸李季卿虎丘劍池石泉水第三張又新劍池石泉水第五。《夷門廣牘》謂虎丘石泉舊居第三。漸品第五。以石泉渟泓。皆雨澤之積。滲竇之潢也。況闔閭墓隧。當時石工多閟死。僧衆上棲。不能無穢濁滲入。雖名陸羽泉。非天然水。道家服食。禁屍氣。湯之候。初曰蝦眼。次曰蟹眼。次魚眼。若松風漸至無聲。蝦、蟹、魚眼。鍑內水沸之狀也。】 聲如松濤漸緩。則火候到矣。此則勿用。

   以近世茶品言之龍井岕片爲第一。長洲呂種玉言茶之精者。浙以龍井爲第一。江南以岕片爲第一。冒襄巢民《岕茶彙抄》長興境産茶者。曰羅嶰。曰白巖。曰鳥瞻。曰靑東。曰顧渚。曰篠浦虎丘茶。作嬰兒肉香。吳人柯姓者。每桐初露白之際。入岕箬籠攜來。味老香深。具芝蘭金石之性。張心齋潮山來《岕茶彙抄》人屑茶爲末蒸而範之成餠。已失其本來之味矣。及至也。又復點之以鹽。《物理小識》。揚子宜荈謂揚子江中冷泉。偏宜煮茗也。

   古今說茶者甚多。而但其文彩風致。總不如陸鴻漸《茶經》之造語淸新。故略抄其句。茶有九難。一曰造。二曰別。三曰器。四曰火。五曰水。六曰炙。七曰末。八曰煮。九曰飮。陰采夜焙。非造也。嚼味嗅香。非別也。羶鼎腥甌。非器也。膏薪庖炭。非火也。飛湍壅潦。非水也。外熟內生。非炙也。碧粉縹塵。非末也。操艱攪據。非煮也。夏興冬廢。非飮也。其說風罏。甚雅可取者也。又有煎茶諸器具。而煩不及焉。宋羅大經《鶴林玉露》余同年李南金《茶經》魚目、湧泉、連珠煮水之節。然近世瀹茶鮮以鼎鑊。用甁煮水。難以候視。則當以聲辨一沸、二沸、三沸之節陸氏之法。以未就茶鑊。故以第二沸爲合量而下。未若以今湯就茶甌瀹之。則當用背二涉三之際爲合量。乃爲聲辨之詩云。砌蟲喞喞萬蟬催。忽有十車梱載來。聽得松風竝澗水。急呼縹色綠瓷杯。其論固已精矣。然瀹茶之法。湯欲嫩而不欲老。蓋湯嫩則茶味甘。老則過苦矣。若聲如松風澗水而遽瀹之。豈不過老而苦哉。惟移甁去火。少待其沸止而瀹之。然湯適中而茶味甘。此南金之所未講者也。因補以一詩云。松風檜雨到來初。急引銅甁離竹爐。待聲聞俱寂後。一甌春雪勝醍醐吳從先小窓淸紀》煎茶非漫浪。須要其人與茶品相得。故其法每傳高流隱逸。有煙霞泉石磊磈於胸次間者。今燕都茶品之藉藉盛行者。普洱茶爲第一。白毫茶爲第二。靑茶爲第三黃茶爲第四。而黃茶每多流入我東。爲日用所飮。然惟在士大夫家及富豪者所用。而不如中原之以爲恒用也。東之無癖於茶。又可知也。然東人飮茶。亦自新羅爲始。《東國通鑑》新羅興德王三年戊申。卽唐文宗太和二年也。遣大廉如唐。得茶子來王命植于智異山。崔孤雲桂苑筆耕ㆍ謝探請料錢狀》有本國使船過海。某欲買茶藥寄附家信云云。則足可爲證者。宋孫穆《雞林類事ㆍ方言》高麗人稱茶曰茶。則高麗人亦飮茶矣。今茶之爲名者。出於嶺南竹田名以竹露茶出於密陽府衙後山麓産茶。名密城茶嶠南康津縣萬佛寺出茶丁茶山鏞謫居時。敎以蒸焙爲團。作小餠子。名萬佛茶而已。他無所聞。東人之飮茶。欲消滯也。奚暇如張又新煎茶水記》粉槍末旗。蘇蘭薪桂云云乎哉。雖茶爲天下之所尙。自唐、宋以來。有榷茶之法。與鹽鐵等。則其利又可知矣。初。德宗納戶部侍郞趙贊。稅天下、漆、竹、木。十取一。以爲常平本錢。及出奉天。乃悼悔。下亟罷之。貞元八年。以水災減稅。明年諸道鹽鐵使張滂奏。出茶州縣若山及商人要路。以三等定。十稅其一。自是歲得錢四十萬緡。然水旱亦未拯也。穆宗卽位。兩鎭用兵。帑藏空虛。鹽鐵使王播圖寵以自幸。乃增天下茶稅率百錢增五十。其後王涯判二使。置榷茶使。徙民茶樹於官場。焚其舊積者。天下大怨。令狐楚代爲鹽鐵使榷茶使。復令納榷。價而已。李石爲相。以茶稅皆歸鹽鐵。此榷茶之大略也。茶利旣與鹽鐵同。則略收其稅。妨也。

   其種植之方。亦不可不知也。《萬寶全書》。二月間種。每坑下子數十粒。待長移裁。常以糞水灌之。三年可採。茶有一旗二槍之號一葉二芽也。凡早採爲。晩爲。穀雨前後收者爲佳。粗細皆可。惟在採摘之時。天色暗明。炒焙適中。盛貯如法。茶宜箬葉而畏香藥喜溫燥而忌冷濕。故收藏家以篛葉封裹。入焙中兩三日。一次用火。當如人體溫。溫則去濕潤。若火多則茶焦不可食。《古今祕苑》茶性惡水。宜斜陂地中走水處。用糠與焦土種之。每一圈。可用六七十粒。覆土厚一寸。出時不要耘草。旱以米泔水澆之。常以小便糞水或砂壅之。水浸根必死。三年後可採。凡種茶。相離二尺一叢。藏茶法。將便灰放甁底。將茶葉不拘大小包。好撞在上面。潮氣自然收入灰內。不用烘。至八月間。另換灰。或用曬乾代灰亦可。我人取種於中國。如法種植。則亦可需用。而無人智心得來。

   日本人亦有所記。可考也。日本良安尙順《和圖會》凡投茶於器有序。先茶後湯。謂之下投。湯半下茶。復以湯滿者。謂之中投。先湯後茶。謂之上投春秋中投。夏。冬下投。茶之爲書者。陸翁《茶經》蔡襄《茶錄》子安《試茶錄》徽宗《大觀茶論》熊蕃《北苑茶錄》《北苑別錄》黃儒《品茶要錄》沈括本朝茶法張又新煎茶水記》蘇廙《十六湯品》葉淸臣《述煮茶小品》溫庭筠《採茶錄》唐庚《鬪茶記》徐獻忠《水品》田藝蘅煮泉小品》顧元慶《茶譜》馮時可《茶錄》許次紓《茶疏》聞龍《茶箋》羅廩《茶解》熊明遇《羅岕茶記》憑可賓《岕茶箋》陸樹聲《茶寮記》陳鑑《虎丘茶經》冒巢民《岕茶彙抄》。
以茶爲書者甚多。今何必强記若鬪茶品水者乎。

[주-D001] 荼字 : 
『荼字』부터 『終身之害斯大』까지는 顧炎武 《日知錄 卷7ㆍ荼》에 보인다.
[주-D002] 謂 : 
《日知錄》에 근거하여 보충하였다.
[주-D003] 冬 : 
『冬冬』으로 되어 있는데, 《日知錄》에 근거하여 『冬』 1자를 삭제하였다.
[주-D004] 周禮地官 : 
『禮禮官』으로 되어 있는데, 《日知錄》에 근거하여 고쳤다.
[주-D005] 之蒤 : 
《日知錄》에 근거하여 보충하였다.
[주-D006] 茶 : 
『茶』부터 『惟桑苧以製顯耳』까지는 方以智 《物理小識 卷6ㆍ茶》에 보인다.
[주-D007] 韓翃謝茶啓云 : 
『韓翃謝茶初』로 되어 있는데, 《物理小識》에 근거하여 고쳤다.
[주-D008] 陸羽《茶經》裴汶《茶述》者 : 
『陸羽茶經裴汶茶述者』부터 『以上之所好也』까지는 熊蕃 《宣和北苑貢茶錄》에 보인다.
[주-D009] 不知 : 
《宣和北苑貢茶錄》에 근거하여 보충하였다.
[주-D010] 茶色貴白 : 
『茶色貴白』부터 『以靑白勝黃白』까지는 蔡襄《茶錄ㆍ色》에 보인다.
[주-D011] 靑 : 
《茶錄》에 근거하여 보충하였다
[주-D012] 《夷門廣牘》謂虎丘石泉舊居第三 : 
『夷門廣牘謂虎丘石泉舊居第三』부터 『禁屍氣』까지는 陸廷燦《續茶經 卷下一》에 보인다.
[주-D013] 余同年李南金云 : 
『余同年李南金云』부터 『一甌春雪勝醍醐』까지는 羅大經 《鶴林玉露 卷3》에 보인다. 『鶴林玉露』는 『鶴玉露』로 되어 있는데, 《鶴林玉露》에 근거하여 고쳤다.
[주-D014] 後 : 
《鶴林玉露》에 근거하여 보충하였다.
[주-D015] 得 : 
《鶴林玉露》에 근거하여 보충하였다.
[주-D016] 煎茶非漫浪 : 
煎茶非漫浪』부터 『有雲霞泉石磊磈胸次間者』까지는 吳從先 《小窓淸紀ㆍ淸課》에 보인다.
[주-D017] 今 : 
崔致遠《桂苑筆耕集 卷18ㆍ謝探請料錢狀》을 참고하여 보충하였다.
[주-D018] 唐德宗納戶部侍郞趙贊議 : 
『唐德宗納戶部侍郞趙贊議』부터 『以茶稅皆歸鹽鐵』까지는 唐順之 《稗編 卷111》에 실린 《唐書ㆍ唐榷茶》에 보인다.
[주-D019] 詔 : 
《稗編》에 근거하여 보충하였다.
[주-D020] 估 : 
《稗編》에 근거하여 보충하였다.
[주-D021] 之 : 
《稗編》에 근거하여 보충하였다.
[주-D022] 加 : 
《稗編》에 근거하여 보충하였다.
[주-D023] 何 : 
『可』로 되어 있는데, 文義에 따라 고쳤다.
[주-D024] 茶宜箬葉而畏香藥 : 
『茶宜箬葉而畏香藥』부터 『若火多則茶焦不可食』까지는 《茶錄ㆍ藏茶》에 보인다.
[주-D025] 茶性惡水 : 
『茶性惡水』부터 『相離二尺一叢』까지는 《佩文齋廣群芳譜 卷21ㆍ茶四》에 보인다.
[주-D026] 陰 : 
『陽』으로 되어 있는데, 《佩文齋廣群芳譜》에 근거하여 고쳤다.
[주-D027] 上 : 
『下』로 되어 있는데, 寺島良安 《和漢三才圖會 卷89ㆍ茶湯》에 근거하여 고쳤다.
[주-D028] 子安 : 
『試子安』으로 되어 있는데, 陶宗儀 《說郛 卷93ㆍ目錄》에 근거하여 『試』를 삭제하였다.
[주-D029] 本朝茶法 : 
『本朝茶品』으로 되어 있는데, 《說郛》에 근거하여 고쳤다.
[주-D030] 唐庚 : 
《說郛》에 근거하여 보충하였다.





人事篇○服食類 / 茶煙      ㅡ 이규경(李圭景) , 미상


[0525]煎果湯茶辨證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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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此亦山居谷飮者。消永送閑之一條蹊徑。故一證一辨。
蜜煎果子。酸者用熱湯化朴硝放冷。浸去酸味。軟嫩者。只煉蜜放冷。澆在果子上。淹一宿。其酸味自去。漉出淘過控乾。竝先煉熟蜜復入。煎五七沸。放出冷。再入舊蜜內煎如琥珀色。去蜜置器中。煎時須用銀錫砂銚爲佳。此《居家必用》法也。《臞仙神隱》曰。以半蜜水煮十數沸。乘熱控乾。換純蜜入砂石銚內。用文武火再煎。取其色明徹爲度。入新缸盛貯。時復看視。纔覺蜜酸。急以新蜜煉熟易之。煎白梅。先用湯盪白梅肉。候冷却控乾。煉蜜浸之。如前法。此《必用》方也。煎靑梅。靑梅刮去皮。用銅靑極細末。銅器內勻滾令綠色。然後用生蜜浸。但覺有酸氣便換蜜。至三四遍。自然不復酸。可以久留。靑銅不拘多少。但滾勻便可。《必用》、《神隱》俱見。煎杏。杏一百箇。鹽半斤淹三日。出曬半乾。冷水澆過曬乾去核。以熟蜜三斤浸之。曬蜜乾爲度。《神隱》方也。煎桃。桃百箇去皮核。切作片子。先以蜜熬去酸水後。另用蜜煎撈出曬冷收之。上同。煎櫻桃。四月摘櫻桃去核。以蜜半斤銀石器內。慢火煎熬。出水控乾。再入密二斤。慢火煎如琥珀色爲度。放冷以磁器取貯。上同。今我東有櫻桃煎。取爛熟者。篩瀝去子。取其汁和菉末。及蜂蜜?拌。置篩蒸熟於銅鍋內。煉蜜浸櫻。蒸片熬一二沸控出略曬。入缸復灌煉蜜。聽用忌蜜淡。日久味變色醭。煎木瓜。先用蜜三斤或四五斤。於砂銀錫器內慢火熬濾過。次將木瓜去皮瓤核。取淨肉一斤。切作方寸大薄片。入蜜同煎。如滾起泛沫。旋旋掠去。煎至二三時。嘗味如酸入蜜。須要甛酸湯中。用匕挑出放冷器內。候冷再挑起。其蜜稠硬如絲不斷者爲度。若火緊則燋。味又不佳。但慢火爲佳。此《必用》方也。今我東木瓜煎法。取眞木瓜去皮瓤。切作方寸片。置篩上蒸熟。拌蜜入鍋內熬沸。數滾漉出乍曬。入缸中灌蜜。密封聽用。又一方。取木瓜濾片濃蒸爛熟。仍篩濾成汁後。拌和蜂蜜。鍋熬數沸。入缸灌蜜。密封聽用。
煎藕。初秋。取藕新嫩者。沸湯焯過半熟去皮。切作條。或作片。每斤用白梅四兩。以沸湯一大碗浸一時。漉出控乾。用蜜六兩煎去水。另取好蜜十兩。慢火煎如琥珀色。放冷。入罐貯之。此《神隱》方也。熟灌藕。用絶好眞粉入蜜。用射香少許灌藕內。以從大頭灌入。以油紙包札爛煮。切片啖之。此《倪雲林》方也。今我東煎藕。取藕根淨洗後。略蒸取曬之。拌蜜入鍋熬沸一二次。取出入缸灌蜜。密封聽用。煎薑。社前取嫩芽二斤。洗淨控乾。不用鹽淹。以沸湯焯過瀝乾。用白礬一兩半搥碎。湯泡一宿澄淸。浸薑二三宿。漉出再控乾。用蜜二斤煎一滾。放冷。却於磁器內入蜜。薑約十日半月。別換蜜一斤半。若經年換蜜兩次。此《必用》、《神隱》俱見。我東煎薑。去皮薄片乍煮。取出乾水氣。拌蜜鍋熬數時。色如琥珀。取出入鑵灌蜜。密封聽用。煎冬瓜。十月取經霜白瓜去靑皮。近靑邊肉切作片子。沸湯焯過。放冷。以石灰湯浸四宿。去灰水同蜜半盞。於砂鑵內煎熟。下冬瓜片子煎四五沸。去蜜水。別入蜜一大盞同熬。候瓜色微黃爲度。磁器內收貯。候極冷。方可覆蓋。《必用》、《神隱》俱見。今我東煎冬瓜。去皮瓤切方寸片。糝石灰少選。洗去沈水。淨盡灰末。略焯沸湯中。取出拌蜜。鍋熬煉過數時。作醬色後。取入缸中灌蜜。密封聽用。煎竹筍。十一月取筍十斤。和殼煎七分。則熟去殼。隨意切之。用蜜半斤浸一時許。漉乾。却用蜜三斤煎滾。掠淨入筍拌勻。磁器內收貯。久留不壞。《必用》、《神隱》方也。煎桔梗。二月揀均大者。以米泔水浸。去皮及爛者。以井水煎出。以蜜四兩慢火煎。蜜盡爲度。再用蜜半斤浸。日中曬乾蜜爲度。以磁盛再煉蜜添之。此《神隱》方也。今我東煎桔梗。桔梗淨治。略焯沸湯中。取出曬風去水。切作片段。半蜜鍋熬數時。候色如醬。取起貯缸。灌蜜聽用。煎山査。深秋取山中肥大紅爛山査。一一折開蟲蛀及蟲卵。去核置竹篩。略蒸濾汁。好汁色如臙脂。拌蜜入鍋熬數沸。愼不至變色。取出貯缸灌蜜。密封聽用。蜜乾則味渝色變。靑白醭蓋面。不可用。煎豆乙竹(들쭉)。此物或名杜隷。出北關茂山府白頭山下。狀如五味子。色黑乾。來京中甚稀。淨洗曬濕。淘潤如豆後。拌蜜鍋熬一沸。取起入缸。灌蜜聽用。汁如臙脂。煎五味子。煎與豆乙竹同。煎乾葡萄。與煎五味子同。煎山葡萄。卽蘡薁。俗呼麻萎。煎如豆乙竹。煎紅菇娘。以生沈煎果缸中。以出顔色。色如紅寶石珠。煎辛甘草。卽冬春窌養當歸筍。亦生沈煎果缸中。以助香味。此其大略也。或以大黑桑椹煉蜜充煎果者。關東三陟府頭陀山三寸桑椹。爲上品。稱仙藥云。好事者。或以生梨菁根菘莖。作煎果以備祭需。蜜乾乾葡萄法。《農政全書》極熟者。一一零壓摘取。刀子切去蔕。勿令汁出。蜜兩分和內葡萄中。煮四五沸後出。陰乾便成矣。滋味倍勝。又夏月不敗。

《茶湯》杞菊茶《神隱》。用野菊花一兩、枸杞四兩、茶芽五兩、芝麻半斤。同硏爲細末。篩過如喫時用一匕入鹽少許。酥油不拘多少。以一滾沸湯調服。枸杞茶《必用》、《神隱》。至深秋。摘紅枸杞子。同乾麪和成劑。捍作餠樣。曬乾硏爲細末。一兩枸杞末二兩和勻。入煉化酥油三兩。香油亦可。旋添湯攪成稠膏子。用鹽少許。入鍋煎熟飮之。甚有益。明目。溫棗湯《必用》、《神隱》。大棗去核。用水熬汁生薑汁和蜜。同將三味調勻入磁罐內。攪令稀稠得所。入射香少許。每盞和一大匕沸湯點服。香蘇湯《必用》、《神隱》。乾棗一斗去核劈碎。木瓜五箇去皮瓤搗碎。紫蘇葉半斤。同一處再搗勻。分作五分內。將一分勻攤在竹籮內。燒滾湯潑淋下汁。嘗瓜棗無味則去却。換好者一分。依上潑之。以味盡爲度。將淋下汁。慢火於砂石器內。熬成膏子。冷熱任意。須問湯《必用》東坡居士歌括云。半兩生薑一升棗【竝乾用。去核。】 三兩白鹽 【炒黃】二兩草【炙去皮】 丁香、木香各半錢。約量陳皮一處搗。【去白】 煎也好點也好。紅白容顔直到老。水芝湯《必用》乾蓮實一斤。帶皮炒極燥。搗爲細末。粉甘草。一兩微炒。右爲細末。每錢入鹽少許。沸湯點服。蓮實搗至黑皮如鐵。不可搗則去之。世人用蓮實。去黑皮及澁皮竝心。大爲不便。黑皮堅氣。而澁皮住精。世人多不知也。此湯。夜坐過飢氣乏。不欲取食。則飮一二盞。大能補虛助氣。茴香湯《必用》、《神隱》炒茴香細末一兩。檀香薑末少許。只看滋味如何。隨意加減。沸湯點服。杏酪湯《必用》杏仁三兩半。浸百沸湯。蓋定候冷。如是五度。掐去皮尖入砂盆內細硏。次用好蜜一斤。煉至二三沸。看涌掇退半冷。旋傾入杏泥。又硏和勻鳳膸湯《必用》松子【卽柏子】 胡桃肉。湯浸去皮。各一兩硏爛。次入好蜜半兩和勻。每用沸湯點服。柏湯【卽側 採取嫩葉。線垂掛大甕中。紙糊其口。經月視之。如未乾。更閉之。至乾取出爲末。如不用甕。置密室中亦可。而但不及甕中者靑翠。此湯可以代茶。夜話飮之。尤醒睡。味大苦則少加山芋尤妙。《必》、《神隱》方也。紫蘇湯。夏月先作百沸湯。紫蘇不拘多少。用紙隔焙。不得飜動。候香以百沸湯入甁。仍將蘇葉投入。密封甁口。則香倍。只宜熱用。冷則傷人。木瓜漿《必用》、《神隱》木瓜一箇切下蓋去瓤。盛蜜却蓋了用簽。簽定入甑蒸軟去蜜。不用削去其皮。別入熟蜜半盞薑汁少許。擣硏如泥。以熟水三大碗攪均濾去滓。盛甁內。井底沈之。五味湯《必用》五味子滾湯浸一宿。取汁同煎。下濃豆汁。對當的顔色恰好。同煉熟密對入。酸甛得中。慢火同熬一時許。涼熱任意用。淸泉白石茶用桃核松子肉和眞粉。成小塊如石狀。置茶中《倪雲林》方。梅花茶《新方》。臘月後。用竹刀取半開梅花蕊。上下半蘸。以蠟投蜜缶中。夏天以熱湯就盞泡之。花卽綻。淸香可愛。菊花茶甘菊花半開時摘下。括去靑蔕之皮。用甘泉烹過。和蜜飮之佳。菊花已開者去蔕皮。以蜜拌濕之。轉去菉末中。投沸湯。暫焯過取。又投蜜水中。散柏子仁飮之。乃《新方》也。葡萄茶《新方》。葡萄及煉蜜。同擂碎取汁。少入生薑自然汁白蜜。和百沸湯候冷。傾入三汁。調勻飮之絶美。山葡萄、生梨、爛梨亦倣此爲之。浮柏子仁飮之。山裏紅中原法也。爛熟山査。擂爛成汁。和其核調蜂蜜飮之。頗淸爽。薑橘茶橘仁三錢。生薑五片。雀舌一錢。同煎如茶法。和蜜飮之。善開食積。出《新方》當歸茶。立春時。取窖中所養當歸莖。以刀切三分許。投微溫蜜水中。浮柏子飮之。出《新方》菉豆茶菉豆暫烹。取水和蜜飮之。《新方》浮小麥茶。取小麥。淘時浮小麥乾貯。暑月和水微烹。去滓取水飮辟暑。《新方》紅麴茶。取紅麴半勺。和水烹飮。四時最宜。取滓更乾。復烹用。《新方》五味子茶。取五味子十餘粒尾蔘少許。暑月同煎飮勻。以淸暑滌煩。《新方》。其他茶茗散見諸書。不復辨。煎茶法。在《茶辨》。《和漢圖會》。以湯滿者。謂之中投。先湯後茶。謂之上投。春秋中投。夏上投。冬下投。

   附食忌。沙糖與棗同食。病齲。與鯽魚同食。成疳蟲。與筍同食。不消成癖。身重不能行。西瓜與蕎麥同食。傷人。至死者亦多。李與砂糖合食則殺人犬與桃木著食。毒死。鱧卽黑鯉魚。作鱠食於桃木下。則膾之一線。脹爲一枝之大。逆上塞喉而死。豆腐煎於菎蔴油食之。中毒死生蔥與蜜同食死
生蟹醬和蜜食腸腑生火而死。食狗肉飮冷水。生寸白蟲。食罌粟菜與罌粟米。忌醋醬。南蠻椒與雞同食。生大風瘡。南瓜與羊肉同食。發水腫。芥菜有毛殺人。食甘藷。忌醋同食。河豚湯落天煤。誤食殺人。生鮮羹。野薔薇飛入殺人葡萄蟲屎尿落酒中殺人。多食鹿肉。損牙齒。但食後吃生米則不損。鱉肉與莧。腹生鱉蠱。食蠻椒。辣麻脣舌而噎。得火則愈甚。急吃沙糖。或吃濃末醬汁解之。松茸與米同藏於匱。翌日煮食。擧家皆死。然松茸漬泔水。特爲佳。米與泔不遠。蓋如吃砂糖。卽飮酒甚苦。而先酒後糖則不苦之理歟。松茸被毒者。吃蓼穗解之茄子亦可。孕婦食桑椹。復食鴨蛋。子橫生。食薑。子六指。食狗肉。子瘖。孕婦食蟹爪脚。落胎。多食麥蘗及蕎麥。消胎。凡多食蕎麥。動風髮脫。簷落水下所生菜。食之殺人。芥菜有毛者能殺人。玄雞白頭。食之病人。雞有六指四距。有五色者。皆殺人。蟹腹下有毛殺人。六畜有死肉。食之殺人。落花生與黃苽竝食殺人。凡果苽非時結熟者。雙蔕者。殺人。果木開花六出者。結果雙仁。殺人。花甁揷花水食之殺人黃精、萎㽔與梅實同食殺人商陵菜與犬肉同食殺人馬肝食之殺人。白馬鞍下肉。食之殺人。凡菌中內無摺文。尤毒殺人。凡菌與薑同煮。薑片色黑或變色有大毒殺人。秋葵菜食之。令人病瘟疫耳塞。入酒殺人。羊心有竅。食之害人。蛇化爲鱉。化鱉未入水。腹下尙有蛇紋者。食之殺人。六七月未經霜蟹。腹有物如芒。誤食中毒。故十分審愼。八月前勿食爲可。嘗於湖西。五六月蟹脫舊殼生新甲。軟脆如紙。人多捉食無恙。京中則六七月蟹多登市。賣蟹小賈。滿城喚售。人爲日用恒餐。亦無病死者。異於昔時。然宜愼之。値毒。紫蘇或生藕、乾蒜、冬瓜可解天門冬與鯉同食中毒。浮萍解之。食蜜。忌蔥及萵苣韭。食牛酪。勿食酸物生魚。黃顙魚與荊芥同食殺人。黃顙魚似是小葛伊魚也。不然則似爲石首魚也。多食豆腐。腹脹欲死揩子久用者。濯水飮之解若飮酒卽死《酉陽雜俎》苽兩鼻兩蔕者殺人簷下滴菜有毒堇黃花及赤芥殺人。大醉臥黍穰上。汗出眉髮落。婦人有娠食薑。令胎內消。十月食生霜菜。令人面無光。獸岐尾。鹿斑如豹。羊心有竅。悉害人。白馬鞍下肉食之傷人五藏鳥自死目不閉。鴨目白。鳥四距卵有八字竝殺人
[주-D001] 蜜煎果子 : 
『蜜煎果子』부터 『以磁盛再煉蜜添之』까지는 洪萬選《山林經濟 卷2ㆍ蜜煎果子法》에 보인다.
[주-D002] 半 : 
《山林經濟》에 근거하여 보충하였다.
[주-D003] 放冷以磁器取貯 : 
『放冷以磁器石取貯』로 되어 있는데, 《山林經濟》에 근거하여 『石』을 삭제하였다.
[주-D004] 十兩 : 
《山林經濟》에 근거하여 보충하였다.
[주-D005] 極熟者 : 
『取大棗極熟者』로 되어 있는데, 徐光啓《農政全書 卷30》에 근거하여 『取大棗』 를 삭제하였다.
[주-D006] 杞菊茶 : 
『杞菊茶』부터 『置茶中』까지는 《山林經濟 卷2ㆍ茶湯》에 보인다.
[주-D007] 酥油不拘多少 : 
『滴少酥油不拘多』로 되어 있는데, 《山林經濟》에 근거하여 고쳤다.
[주-D008] 二兩草 : 
『二兩甘草』로 되어 있는데, 《山林經濟》에 근거하여 『甘』을 삭제하였다.
[주-D009] 水芝湯 : 
高濂《遵生八牋 卷11ㆍ水芝湯》을 참고하여 고쳤다.
[주-D010] 二 : 
《山林經濟》에 근거하여 보충하였다.
[주-D011] 候 : 
《山林經濟》에 근거하여 보충하였다.
[주-D012] 又硏和勻 : 
『又硏和勻用』으로 되어 있는데, 《山林經濟》에 근거하여 『用』을 삭제하였다.
[주-D013] 柏湯 : 
『柏湯』위에 『醍醐湯見』이 더 보이는데, 文義에 따라 삭제하였다.
[주-D014] 用 : 
《山林經濟》에 근거하여 보충하였다.
[주-D015] 取 : 
『炒』로 되어 있는데, 《山林經濟》에 근거하여 고쳤다.
[주-D016] 苽兩鼻兩蔕者 : 
『苽兩鼻兩蔕者』부터 『令人面無光』까지는 段成式 《酉陽雜俎 卷11ㆍ廣知》에 보인다. 단, 『苽兩鼻兩蔕者』은『苽霓兩蔕者』로 되어 있는데, 《酉陽雜俎》에 근거하여 고쳤다.






萬物篇○草木類 / 花草       ㅡ 이규경(李圭景) , 미상

[1164]倒垂梅辨證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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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花經ㆍ梅譜》。其種有十一。《西京雜記》。梅有紫葉、紫萼、同心、麗技、朱梅、燕梅、候梅。宋周密《癸辛雜識》。載趙鎡【字功父循王諸孫。】約齋居士梅花淸致。花宜稱。凡二十六條。澹陰。曉日。薄寒。細雨。輕煙。佳月。夕陽。微雪。晩霞。珍禽。孤鶴。淸溪。小橋。竹邊。松下。明窓。疏籬。蒼厓。綠苔。銅甁。紙帳。林間吹笛。膝上橫琴。石枰下棋。掃雪煎茶。美人淡裝篸戴。花憎嫉。凡十四條。狂風。連雨。烈日。苦寒。醜婦。俗子。老鴉。惡詩。談時事。論差除。花徑喝道。對花張緋幕。賞花動鼓版。作詩用調羹驛使事。花榮寵。凡六條。主人好事。賓客能詩。列燭夜賞。名筆傳神。專作亭館。花邊謳佳詞。花屈辱。凡十二條。俗徒攀折。主人慳鄙。種富家園內。與麁婢命名。蟠結作屛。賞花命猥妓。庸僧窓下種。酒食店揷甁。樹下有狗屎。枝上曬衣裳。靑紙屛粉畫。生猥巷穢溝邊。此觀梅之名言也。淸宮夢仁《讀書紀數略》梅有四德四貴。初蕊爲元。開花爲亨。結子爲利。成熟爲貞。貴稀不貴繁。老不貴嫩。貴瘦不貴肥。貴含不貴開。此玩梅之韻語也。梅以千葉緣萼倒垂鴛鴦梅爲絶品。而我東則在於漢師昭義門天然亭云。按李瀷《星湖塞說》曰。梅樹有倒心之名。花皆倒垂。曾未見之。蓋絶品也。詩云。江邊一樹垂垂發。朝夕催人自白頭。疑卽指此。我東儒賢李退溪先生滉陶山訪梅一絶云。一花纔背尙堪猜。胡奈垂垂盡倒開。賴是我從花下看。昂頭一一見心來。自注云云。重葉也。重葉而倒心。又是奇品也。此可補范至能《梅譜》云。今之俗容楺梅枝。使之倒垂。將古槎揷其旁。自以爲奇品。奚異於邯鄲步、掩鼻歌耶。難免幽人之一哂耳。梅之最異者。眞紅梅、黑梅、墨梅、灑墨梅。蓋因接而然。非天生也。復有天生黃梅陳眉公繼儒《巖棲幽事》蠟梅。古人云本非梅類。以其與梅同時。香又相近。色酷似蜜脾也。又山谷謂京洛間。有一種香氣如梅。類女工撚蠟所成。故名之。又考蠟梅。原名黃梅。故王安國熙寧間尙詠黃梅詩。至元祐間。命爲蠟梅。而范石湖《梅譜》又云。本非梅種。以其與梅同時。而香又近之。如鸚?菊。亦以葉梗似菊。而花又同時也。張翊《花經》。首云一品九命。蠟梅亦在其中。洛陽亦有蠟梅。眞九英耳。淸陶澍。湖南省長沙府安化縣人。嘉慶時。官給事中。與我使臣筆談曰。如南方之梅。此處不能種也。又曰。見中國之梅。皆桃花非梅也。梅本另是一種。與桃不類。但此處不宜也云。則今北京燕都所稱梅花。非梅。故其說如是。學草木者。不可不知也。】 萃得群書。作辨梅說。畀園丁焉


[주-D001] 花宜稱 : 
『花宜稱』부터 『生猥巷穢溝邊』까지는 周密《齊東野語 卷15ㆍ玉照堂梅品에 보인다.
[주-D002] 梅有四德四貴 : 
『梅有四德四貴』부터 『貴含不貴開』까지는 宮夢仁 《讀書紀數略 卷54ㆍ梅四德四貴》에 보인다.
[주-D003] 貴 : 
《讀書紀數略》에 근거하여 보충하였다.
[주-D004] 梅樹有倒心之名 : 
『梅樹有倒心之名』부터 『疑卽指此』까지는 李瀷《星湖僿說 卷4ㆍ倒心梅》에 보인다.
[주-D005] 一花纔背尙堪猜 : 
『一花纔背尙堪猜』부터 『昂頭一一見心來』까지는 李滉《退溪先生文集 卷4ㆍ再訪陶山梅十絶》에 보인다. 단, 『一花纔背尙堪猜』의 『猜』는 『現』으로 되어 있는데, 《退溪先生文集》에 근거하여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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