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다(煎茶)에 대한 고전문헌 자료 ㅡ 23

2018. 4. 29. 23:51차 이야기





 전다(煎茶)에 대한 고전문헌 자료 ㅡ 23 






容軒集 卷一 / 詩      ㅡ 이원(李原) , 1957   

幽居卽事   ㅡ  전다(煎茶)에 대한 고전문헌 자료 ㅡ 8 에 중복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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淸晨盥櫛戴烏紗,坐此茅茨一殼蝸。
酒滴槽床疑有雨,雪飄庭樹作飛花。
明牕點筆仍題句,碧澗敲氷自煎茶
客至從嗔還閉戶,年來過懶愛無譁。


은거하며 즉흥으로 짓다〔幽居卽事〕   ㅡ 이원(李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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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새벽에 세수하고 오사모(烏紗帽)를 쓴 뒤에 / 淸晨盥櫛戴烏紗
달팽이처럼 조그만 이 초가에 앉았네 / 坐此茅茨一殼蝸
술통에 술 내리니 빗소린가 의심하고 / 酒滴槽床疑有雨
뜰 나무에 눈 날리니 꽃잎이 날리는 듯 / 雪飄庭樹作飛花
창가에서 붓을 들어 그대로 시를 쓰고 / 明牕點筆仍題句
시내에서 얼음 깨어 스스로 차 끓이네 / 碧澗敲氷自煎茶
손이 오면 화를 내며 다시 문을 닫고서 / 客至從嗔還閉戶
근래에는 게을리 살며 조용함을 좋아하네 / 年來過懶愛無譁

[주-D001] 은거하며 즉흥으로 짓다 : 
1407년(태종7) 1월 30일 판한성부사에서 파직된 뒤 지은 작품이다. 이 작품부터 권2의 〈진관사의 욕실에 짓다〔題眞觀社浴室〕〉까지는 1407년 1월부터 이듬해 2월 요동(遼東)에서 세자를 맞이하기 이전에 지은 시이다.



  *** 이원(李原)  :  1368(공민왕 17)  ~ 1429(세종 11)

   요약 이원은 조선 개국 초기에 여러 관직을 거치면서 제도를 확립하는데 공헌했다. 특히 관직에 있으면서 일을 곧고 바르게 처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권근과 정몽주에게서 학문을 배웠으며 1385년 문과에 급제했다. 태종의 즉위에 협력하여 1401년(태종 1) 좌명공신에 책록되고 철성군에 봉해졌다. 공안부윤을 거쳐 대사헌으로 있을 때 순군 윤종을 구타해 파직되었다. 1408년 태조가 죽자 빈전도감판사가 되어 국장을 주관했으며, 1415년 외척간의 혼인을 금하는 상소를 올렸다. 세종이 재위기에 좌의정에 이어 영의정에 올라 세종의 정치 이상실현에 공헌했다. 1422년 태종이 죽자 정탁과 함께 국장도감도제조가 되어 장례를 주관했다. 1426년 노비를 강제로 빼앗았다는 모함을 받아 공신녹권을 회수당하고 여산에 안치되었다가 죽었다. 저서로는 <용헌집>, <철성연방집>이 있다.


   본관은 고성. 자는 차산(次山), 호는 용헌(容軒). 할아버지는 수문하시중 암(嵒)이고, 아버지는 밀직부사 강(岡)이며, 어머니는 청주곽씨이다. 어려서는 매부인 권근(權近)에게 배웠으며, 정몽주(鄭夢周)에게도 배웠다. 1382년(우왕 8) 성균진사과, 1385년 문과에 급제했다. 이어 사복시승·예조좌랑·병조정랑 등을 역임했다.

   1392년(태조 1) 사헌부지평이 되어 10조의 상소를 올리고 노비를 속공할 것을 건의했다. 1396년 사헌부중승이 되었으며, 태종의 즉위에 협력하여 1401년(태종 1) 좌명공신(佐命功臣)에 책록되고 철성군(鐵城君)에 봉해졌다. 공안부윤을 거쳐 대사헌으로 있을 때 순군 윤종(尹琮)을 구타해 파직되었다.

   1402년 경기좌우도도관찰출척사가 되었으며 1403년 승추부제학이 되었고, 이어 고명부사로 성석린(成石璘) 등과 함께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이어 평양부윤·서북면도순문찰리사·예문관제학·대사헌·한성부사 등을 지냈다. 1408년 태조가 죽자 빈전도감판사가 되어 국장을 주관했으며, 이어 경상도순찰사·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1411년 철성부원군에 봉해졌다. 1415년 외척간의 혼인을 금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추충익대좌명공신 호를 받고 이어 예조판서·대사헌·판한성부사·의정부참찬·병조판서 등을 지냈다.

   1417년 평안도·황해도의 응방인(鷹坊人)을 추쇄하여 군역에 충당시키고 1418년 군무사의를 논한 글을 올렸으며,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올랐다. 세종이 즉위한 후 영경연사를 겸임했으며, 이어 봉숭도감도제조가 되었다. 1419년(세종 1)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420년 집현전영전사를 겸임했다. 1421년 도성수축도감도제조가 되었으며 이어 좌의정으로 임명되었다.

   1422년 태종이 죽자 정탁(鄭擢)과 함께 국장도감도제조가 되어 장례를 주관했으며, 1425년 진하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26년 노비탈점 혐의로 공신녹권을 회수당하고 여산에 안치되었다가 죽었다. 1455년(세조 1)에 공신녹권을 돌려받았으며, 양헌(襄憲)이란 시호를 받았다. 저서로는 〈용헌집〉·〈철성연방집 鐵城聯芳集〉이 있다.  /  < 다음백과 > 







老松先生日本行錄 / 四月     ㅡ 송희경(宋希璟) , 1420

四日

[DCI]ITKC_GO_1398A_0030_040_0020_2004_008_XML DCI복사 URL복사 
到泊小尾途津。人居緣岸接屋。僧 羅絡山上。此下七首。留泊待風時所作也。
日暮歸心促。行舟及尾途。長橋橫斷岸。衆室壓平湖。千里遠遊苦。舊本作客。 一身生事迂。可憐江口朢。渺渺海東隅。
船上雨中。書懷。
縹緲扶桑路。疲勞萬里身。江天微雨後。滄海異鄕人。愁裏紅顏改。吟邊白髮新。朝鮮雲際逈。何日拜 君親。
天寧寺
寺乃大刹。津頭人居撲地。山上僧舍連絡。
傑閣天寧寺。臨江塔幾層。門前喧賈客。堂上定禪僧。竹影侵階碧。松聲入座凝。別尋花木島。奇絶興堪乘。
淨土寺。此亦大刹。
林端殿角出。湖上梵宮開。面壁僧長坐。乘槎客自來。峯巒圍聳塔。松竹蔭層臺。土俗皆歸佛。沙門最樂哉。
海德寺
此寺。入湖築土而排置。四面皆海。
招提盡奇絶。殿入大湖中。軒外鼇身黑。門前魚眼紅。鍊修孤閣靜。來往一橋通。我問坐禪者。能知性本空。
常親寺。浴後主師煎茶
寺在閭閻中。甚精麗。
松檜森森佛宇東。階花開落動微風。道人茶罷關門睡。板屋禪扉擾擾中。
船上雨中聞鍾
浦口停帆日抵年。愁邊烟雨滿江天。閭閻寂寞鄕關遠。山寺鐘聲到客船。
朢庵子
八日。發小尾途津。過肥厚州。朢小島石壁間有小庵。人言安水月觀音。一僧常住。庵前有老松三株。三面大海。
八尺菴房依石壁。一株松老不知年。滄溟周匝琉璃界。知有觀音阿那邊。
過肥厚州向胷比
雲收別島日瞳瞳。掛席洪濤若上空。回首蓬萊渺幾許。棹歌聲裏倚孤篷。
發胷比向都毛梁
巨浪重重隔九霄。東歸日夜聽驚潮。客愁偏起難爲說。鄕夢長馳不可招。蛟室雲開山隱隱。蜃樓烟鎖水遙遙。懸帆碧海渺無際。借問何人作石橋。秦始皇作石橋。欲過海。觀日出處。有神人驅石下海行不速者。鞭之血淚。
未及都毛梁日沒。海中泊宿。
扶桑何處是王城。數月乘舟盡水程。地遠身疲空自歎。海深神爽更堪驚。瘴歸絶島雲初黑。夜入孤篷火獨明。男子壯心思報國。功名元是一毛輕。
泊無潞。書示無涯。此下五首。宗金送人於王所。留泊待其來時所作。
無涯與宗金。接余於阿彌陁寺。余旣至。僧皆入房不出。還歸舊主余毛時羅家。
水光山氣滿晴空。竹影梅陰覆梵宮。只恨居僧嫌宿客。無由榻畔聽松風。
阿彌陁寺僧。謝過請還。余與倪同來因宿。
參天夏木綠陰濃。抱郭澄江漾半空。客子登臨還杖策。居僧挽袖看前峯。
詠阿彌陁寺庭中梅樹。樹數圍。陰滿庭中。
庭中梅樹轉淸奇。老幹成陰蔚萬枝。來往一般五千里。恨余不及正花時日本水路不可計。然大槩去來萬餘里也。
庭中積石造山爲江湖。次壁上韻。
栽松積石可誇功。一片江湖入梵宮。我到憑軒吟未已。宛似身在海山中。
待風時。戱示無涯。
扶桑萬里遠遊人。海曲停帆羈思新。却怪靈師無一語。神通可致玉風神。舊本作新。又或作身。
自泊無潞至此詩。皆一日所作也。
[주-D001] 含 :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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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미도진(小尾途津)에 이르러 정박하니, 인가(人家)들은 언덕을 따라 줄지어 있고, 절은 산 위에 벌여 있었다
이하 7수는 머물러 순풍을 기다릴 때에 지은 것임.

날 저무니 가고픈 마음 급하여 / 日暮歸心促
배를 몰아 소미도(小尾途)에 왔네 / 行舟及尾途
긴 다리는 끊어진 언덕에 걸려 있네 / 長橋橫斷岸
많은 집들은 평평한 호수를 누르네 / 衆屋壓平湖
천 리에 멀리 노닐기 괴롭고 / 千里遠遊苦
한 몸의 생계 우활하이 / 一身生事迂
슬프다 강어귀를 바라보니 / 可憐江口望
해동의 모퉁이가 멀고 아득하네 / 渺渺海東隅

배 위에서 우중(雨中)에 회포를 적음
아득히 먼 부상의 길 / 縹緲扶桑路
만 리에 지친 몸이로다 / 疲勞萬里身
강하늘에 보슬비 개었는데 / 江天微雨後
창해의 이향 사람이라네 / 滄海異鄕人
시름 속에 홍안은 낡아가고 / 愁裏紅顔改
시를 읊는 사이에 백발은 새롭구나 / 吟邊白髮新
조선이 구름 저쪽 멀리 있으니 / 朝鮮雲際逈
어느 날 군친께 뵈올 것인가 / 何日拜君親

천녕사(天寧寺)
절은 대찰(大刹)이다. 나루 머리에는 인가가 땅에 가득하고, 산 위에는 사원(寺院)이 잇따라 있다.

전각(殿閣)이 크고 높은 천녕사 / 傑閣天寧寺
강에 다다르니 탑이 몇 층인가 / 臨江塔幾層
문 앞에는 장사꾼이 지껄이고 / 門前喧賈客
마루 위에는 참선하는 중이 좌정했네 / 堂上定禪僧
대나무 그림자는 섬돌에 푸르고 / 竹影侵階碧
소나무 소리는 좌석에 어리었네 / 松聲入座疑
따로 화목도를 찾으니 / 別尋花木島
너무나 기이하여 흥이 절로 나누나 / 奇絶興堪乘

정토사(淨土寺)이 또한 큰 절이다
수풀 끝에 전각(殿閣) 모서리 보이더니 / 林端殿角出
호수 위에 범궁이 있네 / 湖上梵宮開
중은 벽을 향하여 길게 앉아 있고 / 面壁僧長坐
뗏목을 타고 손은 스스로 왔네 / 乘槎客自來
봉우리들은 우뚝 솟은 탑을 둘렀고 / 峯巒圍聳塔
소나무 대나무는 층대에 그늘 지우네 / 松竹蔭層臺
토속이 모두 부처로 돌아가니 / 土俗皆歸佛
승려(僧侶)가 가장 즐겁겠네 / 沙門最樂哉

해덕사(海德寺)
이 절은 물 속에 들어가서 흙을 쌓아 배치(排置)한 것으로서, 사면이 다 바다이다.

절이 진실로 기절하구나 / 招提盡奇絶
전각이 큰 호수 속에 들어갔네 / 殿入大湖中
헌함 밖에는 자라의 몸이 검고 / 軒外鼇身黑
문 앞에는 물고기의 눈이 붉다 / 門前魚眼紅
연수하는 외로운 불각은 고요한데 / 鍊修孤閣靜
오가는 길은 외다리로 통하네 / 來往一橋通
나는 묻노니 좌선하는 자여 / 我問坐禪者
본성이 본래 빈 것을 아는가 / 能知性本空

상친사(常親寺)에서 목욕하고 나자 주사(主師)가 차 대접을 하였다
절은 여염(閭閻) 가운데에 있었으나 매우 정려(精麗)하였다.

소나무 전나무가 불당 동쪽 빽빽하고 / 松檜森森佛宇東
섬돌 꽃 피고 지고 미풍이 움직이네 / 堦花開落動微風
도인이 차 마시고 문 닫고 자니 / 道人茶罷關門睡
판자집 절 대문이 여염 가운데 있네 / 板屋禪扉擾擾中

비 내리는 배 위에서 종소리를 들음
포구에 돛 내리니 날이 해 같구나 / 浦口停帆日抵年
시름 속 연기와 비 강하늘에 가득하이 / 愁邊煙雨滿江天
여염은 적막하고 향관은 먼데 / 閭閻寂寞鄕關遠
산사의 종소리 손의 배에 들려오네 / 山寺鍾聲到客船

암자를 바라봄
8일에 소미도진(小尾途津)을 출발하여 비후주(肥厚州)를 지나가는데, 바라보니 작은 섬의 석벽 사이에 작은 암자가 있었다. 사람들은 “수월관음(水月觀音)을 안치하였다.”고 한다. 한 사람의 중이 상주하고, 암자 앞에는 노송 세 그루가 있는데, 삼 면이 큰 바다이다.

팔 척 암자가 석벽에 의지했네 / 八尺庵房依石壁
한 늙은 소나무 연륜 알 수 없어라 / 一株松老不知年
창해가 둘러싸니 유리계로세 / 滄波周匝琉璃界
관세음 저곳 계심 알 수 있구나 / 知有觀音阿那邊

비후주(肥厚州)를 지나서 흉비(胸比)로 향함
별도에 구름 걷혀 해가 돋는데 / 雲收別島日曈曈
큰 물결에 돛 올리니 공중 오른 듯 / 掛席洪濤若上空
돌아보니 봉래산이 어디인지 모르는데 / 回首蓬萊渺幾許
뱃노래 들으며 외로운 선창 의지하네 / 棹歌聲裡倚孤篷

흉비를 출발하여 도모량으로 향함
큰 물결 겹겹으로 하늘을 격했는데 / 巨浪重重隔九霄
동으로 가는 배 놀란 조수 밤낮 듣네 / 東歸日夜聽驚潮
객의 시름 일어남을 어이 말하랴 / 客愁偏起難爲說
고향 꿈 길게 달려 부를 수 없네 / 鄕夢長馳不可招
교실에 구름 걷혀 산 은은하고 / 蛟室雲開山隱隱
신기루에 연기 잠겨 물 아득하이 / 蜃樓煙鎖水遙遙
돛 다니 푸른 바다 멀리 끝없는데 / 懸帆碧海渺無際
묻노니 돌다리를 누가 지었노 / 借問何人作石橋
진 시황(秦始皇)이 돌다리를 만들어 바다를 건너 해 돋는 곳을 보려 하니, 신인(神人)이 돌을 몰아가지고 바다로 내려가는데 속히 가지 않는 것은 채찍으로 치니 피가 흘렀다고 한다.

도모량에 미처 가지 못하고 해가 지매 바다 가운데서 배를 대고 잤다
부상 어느 곳이 왕성이런가 / 扶桑何處是王城
두어 달 배를 타도 모조리 물길일세 / 數月乘舟盡水程
땅이 멀고 피로하여 부질없이 탄식하고 / 地遠身疲空自歎
바다 깊어 상쾌하나 다시금 놀라누나 / 海深神爽更堪驚
장기 낀 외딴 섬에 구름이 검어지고 / 瘴歸絶島雲初黑
외로운 배에 밤이 드니 불만 홀로 밝구나 / 夜入孤篷火獨明
남아의 장한 마음 보국을 생각할 뿐 / 男子壯心思報國
공명은 원래가 터럭처럼 여기누나 / 功名元是一毛輕

무로(無潞)에 머무르면서 무애(無涯)에게 써서 보임
이하 5편은 종금(宗金)이 사람을 왕소(王所)에 보내고, 머물러 정박하면서 그가 오기를 기다릴 때에 지은 것이다.
무애가 종금과 함께 나를 아미타사(阿彌陀寺)에서 대접하였다. 내가 도착하자 중들이 다 방에 들어가고 나오지 않았다. 그리하여 돌아와 옛 주인 여모시라(余毛時羅)의 집에 들었다.

물 빛과 산 기운이 갠 하늘에 가득하고 / 水光山氣滿晴空
대 그림자 매화 그늘 범궁을 덮었네 / 竹影梅陰覆梵宮
한스럽다 중들이 손 재우기 싫어하여 / 只恨居僧嫌宿客
탑 가에서 솔바람 들을 길 없네 / 無由榻畔聽松風

아미타사(阿彌陀寺)의 중이 사과하고 도로 오기를 청하매, 나와 양예(亮倪)가 함께 와서 유숙하였다
하늘 닿는 여름 나무 푸른 그늘 짙은데 / 參天夏木綠陰濃
성을 안은 맑은 강이 반공중에 출렁이네 / 抱郭澄江漾半空
나그네가 등림 위해 지팡이를 돌리니 / 客子登臨還杖策
거승이 소매 잡고 앞 봉우리 보라 하네 / 居僧挽袖看前峯

아미타사 뜰 가운데 있는 매화나무가 두어 아름이나 되고 그늘이 뜰 안에 가득한 것을 읊음
뜰 안의 매화나무 볼수록 기이하이 / 庭中梅樹轉淸奇
늙은 줄기 그늘 이뤄 일만 가지 울창하네 / 老幹成陰蔚萬枝
오가는 길 다같이 오천 리여서 / 來往一般五千里
꽃 한창 필 때에 오지 못함 한스러워 / 恨余不及正花時
일본의 물길은 계산할 수 없으나 대체로 갔다 오는 것이 1만여 리가 된다.

뜰 가운데 돌을 쌓아 산을 만들고 강호(江湖)를 만들었으므로 벽상의 운자를 차운함
솔 심고 돌 쌓은 공 자랑할 만하이 / 栽松積石可誇功
한 조각 강호가 범궁에 들어왔네 / 一片江湖入梵宮
내 와서 헌에 기대 읊기 마지않으니 / 我來憑軒吟未已
완연히 이 몸이 해산 속에 있는 듯하이 / 宛似身在海山中

바람을 기다리며 희롱으로 무애(無涯)에게 보임
부상 만 리 멀리 온 나그네 / 扶桑萬里遠遊人
바다 굽이 돛 내리니 객회(客懷)가 새로워라 / 海曲停帆羈思新
괴이하다 스님은 말 한마디 없는데 / 却怪靈師無一語
신통하여 옥풍신 구본에는 신(神)이 신(新) 또는 신(身)으로 되어 있다. 오게 할수 있다네 / 神通可致玉風神
‘무로에 머무르면서 무애에게 써서 보임’으로부터 이 편에 이르기까지의 시는 다 하루에 지은 것이다.
[주-D001] 범궁(梵宮) : 
사원(寺院)ㆍ불전(佛殿)의 총칭. 범왕궁(梵王宮)ㆍ범관(梵關)이라고도 한다.
[주-D002] 유리계(琉璃界) : 
유리로 된 세계처럼 빛나는 곳. 유리처럼 깨끗하고 광채 나는 세계. 여기서는 바다가 빛나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주-D003] 관세음 : 
여기서는 유리관음(琉璃觀音)을 뜻함. 곧 관음의 하나. 용모가 단정하고 연꽃을 타고 물 위에 떠 있으며 손에는 향로(香爐)를 쥐었음. 향왕관음(香王觀音)이라고도 함.
[주-D004] 비후주(肥厚州) : 
비후주(肥厚州)는 비후주(肥後州)이다. 곧 서해도(西海道) 빙고[備後].
[주-D005] 도모량(都毛梁) : 
도모량(都毛梁)은 도모즈[鞆津], ‘梁’은 ‘즈’의 유사음 ‘도’ 음과 ‘津梁’의 뜻을 표시한다.
[주-D006] 교실(蛟室) : 
교인지실(鮫人之室)의 준말로 인어(人魚)가 사는 곳임. 인어는 깊은 바닷속에 살고 있으므로, 깊은 바다의 뜻으로 쓴다.
[주-D007] 장기 : 
더운 지방에서 습기로 인해 일어나는 독 있는 기운.
[주-D008] 무로(無潞) : 
무로(無潞)는 무로쓰[室津]. ‘潞’는 ‘로’ 음과 ‘津’의 뜻을 표시한다.
[주-D009] 옥풍신(玉風神) : 
바람을 맡은 신(神).

  *** 송희경
(宋希璟)  

                : <한국 향토문화 전자대전>  참조





老松先生日本行錄 / 五月      ㅡ 송희경(宋希璟) , 1420

十六日

[DCI]ITKC_GO_1398A_0030_050_0020_2004_008_XML DCI복사 URL복사
至寶幢寺。見書契後。遊天龍寺。
寺爲大刹。居僧二百。皆着鴉靑紵絲長衫。或鵝靑綃長衫。或白苧袍長衫。到處皆然。日本無乞食僧。如此大寺皆富倭願堂。僧徒四時衣糧皆富倭常供。僧則坐食而已。此山名嵯峨也。余到松月菴。王亦來寺。
千間梵宇彩金多。使者乘閑問此過。樓外風烟非絶域。門前洞壑異中華。夏深講殿還無熱。春盡禪軒別有花。又聽鈴聲傳十里。傾家崇佛慕梁家。
遊臨川寺。贈主師。
主師掌國文書者。見我曰。官人還不過十日。上下皆喜。
淸晨騎馬入臨川。一見高師思豁然。五月林塘人骨冷。小樓嘉樹亦堪憐。
遊西方寺
花林池水作淸涼。松竹烟霞午梵長。半日坐來探勝事。東區自有一西方。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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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당사(寶幢寺)에 가서 왕의 서계(書契)를 본 뒤에 천룡사(天龍寺)에서 놂
   절은 대찰(大刹)이다. 거처하는 중이 거의 2백 명이나 되는데, 다 아청색(鴉靑色)인 저사장삼(紵絲長衫)을 입었다. 혹은 아청색 비단 장삼을 입기도 하고, 또 혹은 흰 모시베 장삼을 입었는데, 가는 곳마다 다 그러하였다. 일본에는 밥을 빌어먹는 중은 없었다. 일본의 이같은 큰 절은 다 호부(豪富)한 왜인의 원당(願堂)이므로, 승도의 사시의 옷과 식량은 다 호부한 왜인이 상시로 제공한다. 그리하여 중들은 앉아서 먹을 뿐이다. 이 산의 이름은 차아산(嵯峨山)이다. 내가 송월암(松月庵)에 이르니 왕도 절에 왔다.

일 천 간 사원(寺院)에 채금을 많이 했네 / 千間梵宇彩金多
사자가 한가한 틈 타 이곳 찾고 지나가네 / 使者乘閑問此過
누 밖의 풍경은 절역 같지 않으며 / 樓外風煙非絶域
문 앞의 골짜기는 중화와 다르구나 / 門前洞壑異中華
여름이 깊건만 강당(講堂)은 덥지 않고 / 夏深講殿還無熱
봄은 다했는데 헌함에는 꽃이 피었네 / 春盡禪軒別有花
또 들으니, 경쇠 소리 십리에 뻗치누나 / 又聽鈴聲傳十里
가산 기울여 부처 숭상하는 모량가(慕梁家)일세 / 傾家崇佛慕梁家

임천사(臨川寺)를 유람하고 주사(主師)에게 줌
이 절의 주사는 나라의 문서(文書)를 맡은 자인데, 나를 보고 차를 내오며 말하기를, “관인(官人)의 돌아가는 것이 10일을 넘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상하가 다 기뻐하였다.

맑은 새벽 말을 타고 임천사(臨川寺)에 들어가서 / 淸晨騎馬入臨川
고승(高僧)을 한번 보매 생각이 훤하구려 / 一見高師思豁然
오월의 수풀과 못은 사람 뼈가 시린데 / 五月林塘人骨冷
작은 누대 고운 나무 또한 어여쁘구나 / 小樓嘉樹亦堪憐

서방사(西方寺)를 유람함
꽃나무 숲 연못 물은 맑고 서늘한데 / 花林池水作淸涼
송죽과 안개 속에 낮 범패(梵唄)가 길구나 / 松竹煙霞午梵長
반날을 여기 앉아 좋은 경치 더듬으니 / 半日來坐探勝事
동구에서 서방사(西方寺)가 제일이라네 / 東區自有一西方
[주-D001] 원당(願堂) : 
개인이나 왕실에서 스스로 짓거나 혹은 특별한 인연으로 그들의 명복을 빌던 절. 궁중의 것은 내원당(內願堂)이라 했음.
[주-D002] 모량가(慕梁家) : 
모량가(慕梁家)는 양(梁) 나라를 사모하는 사람. 즉 중국 남북조 시대 양 무제(梁武帝 소연(蕭衍))는 나라를 세웠으나 불교를 혹신하다가 나라는 망하고 자신은 굶어 죽었다. 일본에 불교가 성함을 풍자한 것이다.
[주-D003] 범패(梵唄) : 
불교 음악의 일종. 여래(如來)의 공덕을 찬미하거나 기타 축원하는 말을 독특한 가락으로 읊음.






錦南先生漂海錄卷之一 / 閏正月     ㅡ 최보(崔溥) . 1489

二十四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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至健跳所。是日晴。曉過穿岩里。里西有山。戴石壁。屹立穹窿。有大竇洞望如虹。門里之得名以此。又過田嶺。嶺上有僧。作佛宇橫道路。行人從寺中以過。臣等平地雖或乘轎。嶺峻路險。下轎步行爲多。至此寺百技跛行。寺僧憐之。煎茶以供。少留。行至海浦。有兵舡具戎器。循浦上下。示以水戰之狀。臣從鼻居舠以渡。則乃是健跳所也。城臨海岸。所千戶李昂。軀幹壯大。容儀丰美。具甲冑兵戎。導臣等入城門。門皆重城。鼓角銃㷁。聲震海岳。其嗩吶等大小角末端。皆上曲鉤。向吹者眉目間。城中人物第宅。視桃渚所尤豐盛。李昂引臣至一客館。與翟勇,許淸,王匡,王海等及所之有姓莊也尹也。亡其名。俱是厚重老官人。皆環立卓之左右。問臣以漂流之故。臣略陳首末云云。李昂請升堂行賓主之禮。昂由西階。臣由東階而上。相對再拜後。昂饋臣茶果。又饋臣之從者以酒肉。頗示忠款之意。姓尹老官人。引程保等。詣私第飮食之。因見其妻妾子女以展禮。其人心淳厖如此。有一人以丙午年登科小錄來示臣曰。此吾的登科第榜錄也。又指點錄中張輔二字曰。此吾的姓名也。因問曰。你國亦貴其登科者乎。曰。然。曰。我國制。草茅士登第者。皆官給俸祿。旌表門閭。刺銜亦書賜進士及第某科某等人云云。引臣至其家。則其家前街。果以雕龍石柱。作二層三間之門。金碧眩曜。其上大書丙午科張輔之家之標。輔蓋以己之登第誇示臣。臣亦以浮誕之言誇之曰。我再中科第。歲受米二百石。旌門三層。足下其不及於我矣。輔曰。何以知之。臣曰。我之旌門。遠莫致之。我有文科重試小錄在此。卽撥示之。輔於錄中。見臣職姓名。下跪曰。我殆不及矣。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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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도소(健跳所)에 이르렀음.
이날은 맑았습니다. 새벽에 천암리(穿岩里)를 지나니 마을 서쪽에 산이 있어 석벽을 이고 공중에 높다랗게 섰는데, 큰 구멍의 골이 있어 바라보니, 홍예문(虹霓門)과 같으므로, 마을이 천암(穿岩)이란 이름을 얻은 것은 이 때문이었습니다. 또 전령(田嶺)을 지나니 전령 위에는 중이 불우(佛宇)를 짓느라 도로를 가로막았으므로, 행인들이 절 가운데로 지나갔습니다. 신 등은 평지에서는 더러 교자도 탔지마는, 고개가 높고 길이 험하므로 교자에서 내려 걷는 일이 많았는데, 이 절에 이르러 온갖 모습으로 절룩거리니, 그 절 중이 불쌍히 여겨 차를 끓여 대접하므로 조금 머물렀습니다.

   가서 해포(海浦)에 이르니, 병선(兵船)이 있어 무기를 갖추고 해포(海浦)를 따라 오르내리면서 수전(水戰)하는 형상을 보였습니다. 신은 거룻배[鼻居舠]를 따라 건너니 바로 이곳이 건도소인데, 성(城)은 해안에 임했습니다. 건도소의 천호(千戶)인 이앙(李昂)은 신체가 장대하고 용모가 아름다웠는데 갑주(甲胄)를 갖추었습니다. 그가 신 등을 인도하여 성문에 들어갔는데, 문은 모두 겹성[重城]으로 되었고, 고각(鼓角)과 총통(銃㷁)의 소리는 바다와 산을 진동시켰습니다. 그 태평소[瑣吶] 등 크고 작은 피리는 끝이 모두 위가 굽어서 부는 사람의 미목(眉目) 사이를 향하였습니다.

   성안의 인물과 제택은 도저소에 비해 더욱 풍성했습니다. 이앙은 신을 인도하여 한 객관(客館)에 이르러서, 책용ㆍ허청ㆍ왕광ㆍ왕해 등과 소(所 건도소(健跳所))에 있는, 이름은 잊었고 성이 장(莊)이니 윤(尹)이니 하는 성품이 후중한 노관인(老官人)들과 함께 탁자의 좌우에 빙 둘러서서 신에게 표류된 까닭을 물으므로, 신은 대략 그 시말을 진술했습니다.
이앙은 신에게 당(堂)에 올라서 빈주(賓主)의 예를 행하자고 청하고는 이앙은 서계(西階)로부터 올라가고 신은 동계(東階)로부터 올라가서 서로 마주 보고 두 번 절한 뒤에 이앙이 신에게 다과(茶果)를 접대하고, 또 신의 종자들에게도 주육(酒肉)을 먹여서 자못 충관(忠款)한 뜻을 보였습니다.

   성이 윤(尹)인 노관인은 정보(程保) 등을 인도하여 사택으로 가서 음식을 먹이고 따라서 그 처첩(妻妾)과 자녀들을 보여 예절을 베풀었으니, 그 인심의 순후함이 이와 같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병오년에 등과(登科)한 소록(小錄)을 가지고 와서 신에게 보이기를,
“이것은 내가 과거에 오른 방록(榜錄)이오.”
하고, 또 방록 가운데 ‘장보(張輔)’란 두 글자를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나의 성명이오.”
하고, 이내 묻기를,
“당신 나라에서도 등과한 사람을 귀하게 여깁니까?”
하므로, 신은 말하기를,
“그렇소.”
하였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우리나라 제도는 초야(草野)에 있던 선비로서 등과한 사람은 모두 관청에서 봉록을 주고 문려(門閭)를 정표(旌表)하여, 명함(名啣)에도 진사(進士) 급제(及第)의 모과(某科) 모등(某等) 사람이라는 것을 써서 주게 되어 있소.”
하였습니다. 그는 신을 인도하여 그 집에 이르렀는데, 그 집 앞의 네거리에 과연 용(龍)을 아로새긴 석주(石柱)로 2층 3칸의 문을 만들었는데, 노란빛과 푸른빛이 눈이 부시도록 빛났고, 그 위에는 ‘병오과(丙午科) 장보(張輔)의 집의 표(標)’라고 크게 씌어 있었습니다. 장보는 자기의 등과한 것을 신에게 과시한 것입니다. 신 또한 부탄(浮誕)한 말로 그에게 자랑하기를,
“나는 두 번이나 과거에 합격하여 해마다 쌀 200석을 받았고 정문(旌門)이 3층이나 되었으니 족하(足下)가 나에게 미치지 못할 것이오.”
하니, 장보는 말하기를,
“무엇으로 이를 알겠소.”
하므로, 신은 말하기를,
“나의 정문은 먼 곳에 있으니 보일 수 없소만, 내게 문과 중시(文科重試)의 소록(小錄)이 있소.”
하고, 곧 펼쳐 보였더니, 장보는 소록 속에 신의 관직과 성명이 있는 것을 보고 꿇어앉아 말하기를,
“나는 아마 미치지 못하겠소.”
하였습니다.


  ***  최보(崔溥) : 1454(단종 2), 전남 나주   ~  1504(연산군 10)


요약   :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탐진(耽津). 자는 연연(淵淵), 호는 금남(錦南). 아버지는 진사 택(澤)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1478년(성종 9) 성균관에 들어가 김굉필(金宏弼)·신종호(申從濩) 등과 교유했다. 1482년 친시문과에 급제하여 교서관저작·군자감주부 등을 역임했다.

   최부는 1485년 서거정(徐居正)과 함께 〈동국통감〉의 편찬에 참여하여 논 120편을 집필했다. 이듬해 문과중시에 급제하여 홍문관교리에 임명되었고, 사가독서했다. 1487년 9월 추쇄경차관(推刷敬差官)으로 임명되어 제주에 파견되었다. 최부는 다음해 1월 부친상의 소식을 듣고 나주로 돌아오던 중 초란도(草蘭島) 해안에서 풍랑을 만나 14일간 표류한 끝에 명나라의 태주부(台州府) 임해현(臨海縣)에 도착했다. 왜구로 오인되어 살해될 뻔했으나 야음을 틈타 관가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여 베이징[北京]으로 호송되었다가 5개월 만에 귀국했다. 귀국 직후 성종의 명을 받아 그동안의 견문을 일기 형식의 〈금남표해록 錦南漂海錄〉 3권으로 기록했다. 그러나 아무리 왕명이라 하더라도 부친상을 당한 몸으로 귀국 즉시 고향으로 내려가지 않고 지체한 것은 선비의 도리가 아니라 하여 사헌부의 탄핵이 끊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뒤 지평·홍문관교리에 임명되었으나 논란이 일어 승문원교리로 밀려났다. 최부는 연산군대에 일찍이 중국에서 배워온 수차의 제작 및 이용법을 보급하여 사용하도록 했다.

   최부는 1498년(연산군 4) 7월 무오사화 때 김종직 문하인 이종준(李宗準)·이구(李龜)·김굉필·박한주(朴漢柱) 등과 함께 붕당을 이루어 국정을 비방했다는 죄명으로 함경도 단천에 유배되었다가 1504년 갑자사화 때 사형당했다. 〈금남표해록〉은 국내에서 한문·한글본으로 간행되었고, 일본에서도 당토행정기 唐土行程記〉·〈통속표해록〉 등으로 간행되었다.  / <다음 백과>






錦南先生漂海錄卷之三 / 四月     ㅡ 최보(崔溥) . 1489

二十四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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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會同館發程。是日晴。百戶張述祖與其子仲英。討車三輛於順天府遞運所而來。臣則騎馬。從者或坐車。或乘驢。從玉河橋。出自崇文門。復過通州新舊城。至潞河驛。驛吏李鳳煎茶來饋。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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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동관에서 길을 떠났음.
이날은 맑았습니다. 백호 장술조가 그 아들 중영(仲英)과 함께 수레 3량(輛)을 순천부 체운소(順天府遞運所)에서 청구해 왔는데, 신은 말을 타고 종자들은 수레에 타기도 하고 당나귀를 타기도 했습니다. 옥하교에서 나와 숭문문(崇文門)으로부터 다시 통주(通州)의 신성(新城)ㆍ구성(舊城)을 지나서 노하역(潞河驛)에 이르니, 역리(驛吏) 이봉(李鳳)차를 끓여 와서 접대했습니다.




海東雜錄[二]   / 本朝[二]       ㅡ 권별(權鼈) , 1670

金正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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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義城人。字國弼。慕齋之弟。號思齋。少受業於寒暄先生。我 中廟己巳擢壯元。歷敭淸要。己卯觀察黃海。爲學令勉訓後學。禍起。廢居高陽。自號恩休。後官至禮曹參判。摭言一帙。行于世。○與友人書云。二十年處約之中築室數間。產業數畝。冬絮夏葛。臥外有餘地。身邊有餘葛。鉢底有餘食。得此三餘。高臥一世。廣廈千間。玉粒萬鍾。綺紈百襲。視同腐鼠。恢恢乎處此身而無憾。遂自號三餘居士。 嘗按黃海。作警民編十三條。刊布村閭。曰君上父母。曰夫妻兄弟娣妹族親。曰隣里。曰鬪敺。曰勤業。曰儲積。曰作爲犯奸。曰盜賊殺人。曰奴主。 己卯罷歸高陽。自號恩休。寄詩慕齋曰。休弟心情同逸兄。一窩安樂送餘生。居閒便覺君恩重。莫說君恩要宦榮。丙丁錄思齋平生不解鷹。每見鴟嚇於樹。錯認爲鷹。與友書 居閒處約之中。所不可無者。惟書一架。琴一張。友一。四屨一雙。扶老一筇。煎茶一爐。負暄一楹。納涼一窓。迎睡一枕。尋春一驢而已。此二五不可去一。送了老境。此外何求。與人書 己卯之禍。廢居高陽之芒洞。諸生從學者甚多。築茅堂以處之。扁曰六務。相與講論不輟。墓誌 引法而參訂者。欲民之有所畏懼而知避也。語簡而辭俚者。欲民之有所不學而易曉也。凡事須務誠實。不謀詐僞。詐僞之事。終難掩覆。必陷於罪辜。警民編序 兄弟與我同出於父母。同氣而異軆。骨肉至親。無如兄弟。無知之人。爭小利害。遂爲仇讎。與禽獸奚擇。如有相殘不和者。則隣里共斥。國有常法。警民編 夫妻結緣。百年同居。夫須念妻。妻須順夫。夫益忍怒。妻益致順。然後家道不敗。同上 耕種須早。風霜可畏。除草須勤。草茂則害苗。同上 安東人今秋收穫。明年所食計除。堅藏餘穀。撙節喫破。故雖遇凶荒。不患飢餓。同上 凡民雖有疎親遠近之異。皆是一人之子孫。如木同根而異枝。如水同源而異派。同上 隣里同住一處。有無相資。患難相救。義同親戚。交相委曲。務爲和睦。不和則相爲仇隙。終至不測。如此者皆有罪。同上 北道之民。濫食無節。不用升斗。作餠炊食。朝飽不計夕飢。故一遇不稔。餓莩相望。同上 法。汚橋破舡。故令欺人過渡致死者絞。同上 男女情欲易熾而難防。所當勤愼者。莫如奸事。小不忍則終陷不測。同上 人之死生。在於頃刻。不忍一朝之忿。下手傷損。則終致無窮之悔。同上 自己卯禍起之後。群不逞之徒。以淸君側爲名。相繼而起。連頸就戮。猶不知止。摭言


정국(金正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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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관은 의성(義城)이며 자는 국필(國弼)이요, 모재(慕齋 김안국)의 아우로서 호는 사재(思齋)이다. 젊어서 한훤당(寒暄堂 김굉필) 선생에게 수업하여 중종 기사년에 장원 급제하고 청관(淸官) 요직을 역임하였으며, 기묘년에 황해도 관찰사가 되어 학령(學令)을 만들어 후학들에게 권면하여 가르쳤다. 화가 일어나자 벼슬에서 물러나 고양(高陽)에 살면서 스스로 호를 은휴(恩休)라고 하였다. 뒤에 벼슬이 예조 참판에 이르렀으며, 《척언(摭言)》한 질이 세상에 간행되었다.
○ 친구에게 보낸 글월에, “20년 동안의 구차스러운 살림 가운데 두어 칸 집을 짓고 두어 이랑의 밭을 일구어 겨울에는 솜옷이요 여름에는 갈포를 입는다. 누울자리 밖에는 남은 땅이 있고, 신변에는 남은 칡의 갈포가 있으며, 바리 밑에는 남은 밥이 있으니, 이 세 가지 남은 것을 얻어 한 세상 편안히 누웠으면, 천 칸 넓은 집이나 만 섬의 옥같이 흰 쌀이며 백 벌의 아름다운 비단옷도 썩은 쥐나 진배없이 보인다. 여유 작작, 이렇게 처신하여 조금도 한이 없다.” 하고, 드디어 스스로 삼여거사(三餘居士)라 불렀다. 본집
○ 일찍이 황해 감사로 있으면서 《 경민편(警民編)》 13조를 만들어 민간에 나누어 주었는데, 임금, 부모, 부부, 형제, 자매, 족친(族親), 이웃, 싸움질, 근면, 저축, 간음, 도둑질과 살인, 종과 주인 등의 내용으로 되어 있다. 본집
○ 기묘년에 파직되어 고양(高陽)으로 돌아와 스스로 호를 은휴(恩休)라 하고 모재에게 시를 지어 보내었는데,

은휴의 아우의 심정 은일의 형과 같아 / 休弟心情同逸兄
한 움집에서 안락하게 여생을 보내련다 / 一窩安樂送餘生
한가로운 생활에서 문득 임금 은혜 무거움을 깨달으니 / 居閒便覺君恩重
임금 은혜가 신하를 영화롭게 요구하는 것이라고 말하지 말라 / 莫說君恩要宦榮

하였다. 《병진정사록》
○ 사재(思齋)는 평생 매[鷹]을 알지 못하였다. 솔개가 나무에서 우는 것을 볼 때마다 잘못 알고 매라고 하였다. 벗에게 준 편지
○ 한가로이 살며 구차스러운 가운데에서도 없어서는 안 될 것은 오직 책 한 시렁ㆍ거문고 한 틀ㆍ벗 한 사람ㆍ신 한 켤레ㆍ지팡이 한 개ㆍ차 달이는 화로 하나ㆍ등을 대고 따뜻하게 할 기둥 하나ㆍ서늘한 바람을 끌어들일 창 하나ㆍ잠을 맞이할 베개 하나ㆍ타고 봄 경치를 찾아 다닐 나귀 한 마리면 그만이다. 이것이 열 개의 버리지 못할 하나들이다. 늘그막을 보내는 데 이 밖에 또 무엇이 필요하랴. 남에게 준 글
○ 기묘년의 화에 파직되어 고양(高陽)의 망동(芒洞)에 살 때에 따르는 학도들이 매우 많았다. 조그마한 띠집을 짓고 거처하였는데, 육무당(六務堂)이라 이름 짓고 서로 더불어 강론하기를 그치지 아니하였다. 〈묘지(墓誌)〉
○ 법을 끌어서 바로잡은 것은 백성들이 두려워하여 피할 줄을 알게 하고자 함이요, 말이 간략하고 사연이 속된 것은 백성이 배우지 못한 사람도 쉬이 깨치게 하고자 함이다. 모든 일에 모름지기 성실을 힘쓸 것이며 거짓을 꾀해서는 안 된다. 거짓된 일은 끝내 숨길 수는 없는 것이니, 반드시 죄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경민편(警民編)》의 서문
○ 형제와 나는 부모에게서 같이 나온 것이므로 동기(同氣)이면서 몸이 다른 것이다. 골육지친(骨肉之親)에 형제 같은 것이 없는데, 무지한 사람들은 조그마한 이해를 다투다가 마침내는 원수가 되니, 금수(禽獸)와 무엇이 다르랴. 만일 서로 싸우고 화목하지 않는 자는 이웃이 다 함께 배척할 것이니, 나라에는 떳떳한 법이 있는 것이다. 《경민편》
○ 부부가 결혼하여 백년을 같이 삶에 있어 남편은 아내를 생각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할 것이며, 남편은 더욱 노여움을 참고 아내는 더욱 순종하게 되어야 가도(家道)가 무너지지 않는다. 상동
○ 밭갈이와 씨뿌리기는 일찍 해야 한다. 바람과 서리가 두렵기 때문이다. 김매기는 부지런히 해야 한다. 풀이 우거지면 모[苗]를 해친다. 상동
○ 안동(安東) 사람들은 금년 가을에 거두어들이면 내년에 먹을 것을 계산하여 제하고 남은 곡식은 알뜰히 저장하여 두며 아끼고 다 먹어 없애지 않는다. 그러므로 흉년을 만나도 굶주림을 걱정하지 않는다. 상동
○ 모든 백성은 비록 친하고 서먹서먹하고, 멀고 가까운 차이는 있으나 모두 한 사람의 자손이다. 그것은 마치 나무는 뿌리가 같으면서 가지가 다르고, 물은 근원이 같으면서 갈래가 다른 것과 마찬가지이다. 상동
○ 이웃은 한 고장에 같이 사는 것이므로 있는 것 없는 것을 서로 교환하고, 어려운 일은 서로 구하여 의리(義理)가 친척같이 하고 서로 의좋게 사귀어 힘써 화목하도록 하라. 불화하면 서로 틈이 벌어지고 원수가 되어 나중에는 헤아릴 수 없게 되니, 이런 자는 모두 죄가 있다. 상동
○ 북도(北道)의 백성들은 함부로 먹어치워 절제가 없고 되[升]와 말을 쓰지 않는다. 떡을 만들고 밥을 지어 아침에 배불리 먹고는 저녁에 굶을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한 번 흉년이 들면 굶어 죽은 사람을 서로 바라 보기만 한다. 상동
○ 법에, “낡은 다리[橋], 갈라진 배로 짐짓 사람을 속여 건너게 하다가 죽게 한 자는 교수형(絞首刑)에 처한다.” 하였다. 상동
○ 남녀의 정욕은 타오르기 쉽고 막기 어려운 것이니, 마땅히 근신해야 할 것은 간사한 일보다 더한 것이 없다. 조그만 것을 참지 못하면 결국 헤아릴 수 없는 궁지에 빠지고 만다. 상동
○ 사람의 죽고 사는 것이 잠깐 사이에 달려 있는 것이니, 한때의 분함을 참지 못하고 손을 대어 상하게 하면 마침내 끝없는 후회를 불러 오게 된다. 상동
○ 기묘년의 화가 있는 뒤로부터 불평 불만을 품고 멋대로 행동하는 무리들이 임금의 곁을 깨끗이 한다는 명목으로 뒤이어 일어나, 연이어 목을 잘라도 오히려 그칠 줄을 몰랐다. 《척언(摭言)》

  *** 권-별 []
  •   조선 시대의 학자(?~?). 호는 죽소(竹所). 성리학을 연구하였고, 기자 조선에서 고려 말까지의 왕실의 사적과 조선 초까지의 인물을 집대성하여 ≪해동잡록≫을 편술하였다.  / < 다음 국어사전>


       * <예천권씨종가문적 (醴泉權氏宗家文籍 )> :  경상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170호
    요약 : 경상북도 예천군 예천권씨 종가에 소장되어 있는 문적.


예천권씨 종가 문적

권문해의 아들인 권별이 1625년 정월부터 1626년 12월까지 2년간 쓴 일기 ≪죽소군일기≫ 1책과 1589(선조 22)∼1671년(현종 12)에 권별이 저술한 ≪해동잡록≫ 14책.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70호. 예천권씨 종택내 백승각에 소장.

출처 © 예천군청 | 이미지 사이즈 960x560 | 한국학중앙연구원

   

내용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70호. ≪죽소군일기 竹所君日記≫ 1책, ≪해동잡록 海東雜錄≫ 14책을 일괄 지정한 것이다. ≪죽소군일기≫ 1책은 1625년(인조 3)에 권문해(權文海)의 아들인 권별(權鼈)의 친필본이며, 1625년 정월부터 1626년 12월까지 2년간 쓴 일기로 1책 34장이다. ≪해동잡록≫은 1589(선조 22)∼1671년(현종 12)에 권별이 저술하였다. 중국의 음시부(陰時夫)가 저술한 ≪운부군옥 韻府群玉≫의 편례(編例)를 본따서 임관자(任官者)만을 선별하여 왕조별, 성씨별로 분류하고 그들의 학문과 일화를 책으로 엮은 문헌설화집이다.

   제1권에는 단군·기자·위만·마한·진한·변한에 대한 기술과 신라 59왕, 고구려 28왕에 대하여 기록되어 있다. 제2권에는 백제 30왕과 고려 22왕이 기술되어 있고, 제3권에는 고려 12왕과 왜(倭) 등 일곱가지가 기술되어 있다. 제4권에는 신라인 69명, 고구려인 24명, 백제인 9명이 서술되어 있다. 제5권부터 제7권까지는 고려인을 성씨별로 298명, 제8권에는 고려인 12명, 조선왕조 138명, 제9권에는 고려 제신 29명, 조선 인물 54명이 실려 있다.

1798년(정조 22)에 일부분이 판각되었다. 경상북도 예천군 권영기(權榮基)가 소장하고 있다.  /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海槎日記[二] / 十二月     ㅡ 조엄(趙曮) , 1763

初七日己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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晴東風。留藍島。○午間馬州守來見。馬州守有行。則以酊僧輒隨之。例也。三使出廳外相揖而入。就座後兩揖之禮如前。以日前曳船之失待。所傷副船之改造。搆成筆談。謄本在下 使首譯傳于馬州守。馬州守受而不披覽。替給其從者。使首譯更傳以披覽相議之意。則馬州守答以歸後當詳覽而仰報云。其或以不識文字之故。無可披見而然歟。更欲督之。而豈可困人於無聊之地乎。且彼人凡於公幹。未嘗卽地決斷。必爲私自消詳而後。始乃回報。此其事勢亦似然矣。島主來見。則例設床杯。而適値 國忌齋日。故只勸蔘茶而罷。備送床杯于其所。渡壹歧島時。折落鴟木。自福岡運置此島。故使之燒火。曳船失待者。旣使馬島守査處。且該州奉行。累日待罪。故他餘事。不必一向相持。杉重及日供。許其來納。余留此島。今已五日。而一未嘗倭茶矣。夜分後如厠而歸。見茶僧明燭煎茶。待我不寐。想其晝夜等待。未蒙一索。工夫誠可惜。强尋一鍾而嘗之。因給一扇子。拜首乂手。惶恐稱謝之際。他茶僧來以爲我是上房茶僧。是副房茶僧。吾未嘗暫離。適爲取燭而出。其間代守者得此帖給。可恨可恨。咄咄不已。通事適在座。解之以有數存焉。僧曰然矣然矣。聞之不覺絶倒。亦給一扇於本茶僧。


7일(기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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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맑음. 동풍이 불었다. 남도에 머물렀다.
낮쯤에 마주 태수가 보러 왔다. 마주 태수가 올 때면 이정암(以酊庵) 중이 문득 따랐으니, 준례다. 세 사신이 청(廳) 밖에 나가 서로 읍하고 맞아 들였다. 좌정한 뒤에 전처럼 두 번 읍하는 예를 행하고, 일전에 예선이 등대를 잘못한 것과 상한 부선 개조하는 일로 필담(筆談) 등본은 아래 있다. 을 만들어 수역을 시켜 마주 태수에게 전해 주었다. 마주 태수는 받아서 펴 보지도 않고 그의 종자(從者)에게 전해 주므로, 수역을 시켜 필담을 펴 보고 상의할 것을 다시 전했더니, 마주 태수는 돌아가서 자세히 본 뒤에 회보하겠다고 한다. 그것은 혹 문자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펴 볼 수 없어서 그런 것인가? 다시 독촉하고 싶었으나 어찌 남을 무안한 지경으로 괴룝혀서야 되겠는가? 또 저 사람들은 모든 공사를 즉석에서 결단하지 않고 반드시 사사로이 소상히 한 뒤에야 회보하니, 이것은 그 사세가 그럴 듯도 하다. 도주가 보러 오면 으레 술상을 차리는데, 마침 국기(國忌)의 재일(齋日)을 만났기 때문에 다만 인삼차를 권하고 술상을 갖추어 그의 관소로 보냈다.
일기도를 건널 때에 부러져 떨어진 치목을 복강(福岡)에서 이 섬으로 옮겨왔으므로 불태우게 하였다. 예선을 잘못 등대한 자는 이미 마도 태수로 하여금 조사해 처리하게 하였고, 또 그 주의 봉행(奉行)도 여러 날 대죄하기 때문에 그 외의 다른 일은 한결같이 고집할 것이 없어서 삼중(杉重) 및 일공(日供)만은 바치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내가 이 섬에 머문 지 이제 5일이 되었으나 한 번도 왜국 차를 맛본 적이 없었다. 밤중에 뒷간에 갔다가 돌아오니, 다승(茶僧 차 맡은 중)이 촛불을 밝혀 차를 끓여 놓고 나를 기다리며 자지 않고 있었다. 그 밤낮 등대하여도 한 번도 찾지 않음을 생각할 때 애쓰는 것이 참으로 애석하므로 억지로 한 잔을 달라 하여 맛보고 이어서 부채 한 자루를 주었더니, 손을 모아 절하며 황공히 사례할 무렵에 다른 다승(茶僧)이 와서 말하기를,
“나는 상방(上房)의 다승이요, 이는 부방의 다승입니다. 나는 잠시도 떠난 적이 없다가 마침 촛불을 가지러 나갔는데, 그 사이에 대신 수직하던 자가 이런 선물을 얻게 되었으니 한스럽습니다.”
하고, 혀를 차며 애석해 하여 마지 않는다. 통사가 마침 그 자리에 있다가 다 운수가 있는 것이라고 풀어주니, 중은,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고 한다. 그것을 들으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본다승(本茶僧)에게도 부채 한 자루를 주었다.

   *** 조엄(趙曮) :  명서(明瑞), 영호(永湖), 문익(文翼)

요약   : 1719(숙종 45)∼1777(정조 1). 조선 후기의 문신.

개설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명서(明瑞), 호는 영호(永湖). 조중운(趙仲耘)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조도보(趙道輔)이고, 아버지는 이조판서 조상경(趙商絅)이다. 어머니는 이정태(李廷泰)의 딸이다.


생애 

   1738년(영조 14) 생원시에 합격, 음보로 내시교관(內侍敎官)·세자익위사시직(世子翊衛司侍直)을 지내고, 1752년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 이듬해 정언이 되었다. 이어 지평·수찬·교리 등을 역임하고 동래부사·충청도암행어사를 거쳤다.

   1758년에 이례적인 승진으로 경상도관찰사에 임명되었는데 도내(道內) 시노비(寺奴婢) 1만 여명의 노비공(奴婢貢)을 견감(蠲減)시켜 그 불만을 가라앉히고 한전(旱田)에 대한 감세(減稅) 비율을 적용, 전세 부담을 줄이는 한편, 조창(漕倉)을 설치하는 치적을 쌓았다. 중앙으로 진출한 뒤 대사헌·부제학·승지·이조참의 등을 지냈다.

   1763년 통신정사(通信正使)로서 일본에 다녀온 뒤, 대사간·한성부우윤, 예조·공조의 참판 및 공조판서를 차례로 역임하였다

   1770년 이조판서로 있을 때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의 천거로 특별히 평안도관찰사로 파견되어 감영의 오래된 공채(公債) 30여 만냥을 일시에 징수하는 등 적폐(積弊)를 해소하는 수완을 보였다. 그러나 토호세력들의 반발로 탐학했다는 모함을 받아 곤경에 처하기도 하였다.

   이후 다시 이조판서로 서용되었지만, 1776년정조가 즉위하자 벽파(僻派) 홍인한(洪麟漢)·정후겸(鄭厚謙) 등과 결탁했다는 홍국영(洪國榮)의 무고를 받아 파직되었다.

   이어 일단 벗겨졌던 평안도관찰사 재임시의 부정 혐의가 새삼 문제가 되어 탐재학민(貪財虐民)한 부패관리(贓吏)의 대표적 인물로 지목, 평안도 위원으로 유배되었다. 이후 아들 조진관(趙鎭寬)의 호소로 죽음을 면하고 김해로 귀양이 옮겨졌으나 실의와 불만 끝에 이듬해 병사하였다.

활동사항

   문장에 능하고 경사(經史)에 밝았을 뿐만 아니라 경륜(經綸)도 뛰어났다. 민생 문제에 많은 관심을 가져서 남긴 업적이 적지 않다.

   특히 경상도관찰사 재임시 창원의 마산창(馬山倉), 밀양의 삼랑창(三浪倉) 등 조창을 설치, 전라도에까지만 미치던 조운을 경상도 연해 지역에까지 통하게 하여 세곡 납부에 따른 종래의 민폐를 크게 줄이고 동시에 국고 수입을 증가하게 하였다.

   또한 통신사로 일본에 갔을 때 대마도에서 고구마 종자를 가져오고 그 보장법(保藏法)과 재배법을 아울러 보급, 구황의 재료로 널리 이용되게 했던 점[제주도에서는 고구마를 조저(趙藷)라고 부르며, 고구마라는 말 자체가 그가 지은 『해사일기(海槎日記)』에서 일본인이 이를 ‘고귀위마(古貴爲麻)’라고 부른다고 기록한 데서 유래되었다 한다]은 후세에 공덕으로 크게 기려지고 있다.

상훈과 추모 

   1794년(정조 18) 좌의정 김이소(金履素)·평안도안핵어사(平安道按覈御史) 이상황(李相璜)의 노력으로 신원되고, 1814년(순조 14)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통신사로서 일본을 내왕하며 견문한 바를 적은 『해사일기(海槎日記)』가 전하고 있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참고문헌



  • 『영조실록(英祖實錄)』
  • 『순조실록(純祖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해사일기(海槎日記)』
  • 『운석유고(雲石遺鎬)』
  • 「감저전파고」(손진태, 『진단학보』 13, 1941)








    / 한국학중앙연구원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