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9. 21. 23:02ㆍ향 이야기
1시간 분량의 평화
유선애 입력 2018.08.31. 13:45 수정 2018.09.04. 18:11
마음이 시끄럽다. 매일 쿵쾅거리는 마음을 다들 어떻게 붙잡고 살고 있는 걸까. 명상은 엄두가 안 난다고 하자 누군가 향도(香道)와 다도(茶道)를 권했다.
향의 시간
“서양의 향수는 가슴이 ‘울렁’해요. 마음을 동요하게 만들죠. 우리의 전통 향은 반대예요. 마음이 고요해지고 평온해집니다. 이것이 두 문화의 결정적 차이예요.”
필동 남산한옥마을 앞을 무수히 지났지만 그 안으로 들어가본 건 처음이었다. 약간의 비탈과 연못을 가로지르는 돌다리를 건너니 망막한 정적이 도시와 벽을 쌓는다. 기분 좋은 단절, 고립이다. 남산한옥마을 내 윤택영 제실 사랑채에서는 일주일에 두 번, 사단법인 한국향도문화협회 문향에서 주관하는 일일 향도 교실이 열린다. 오늘의 수업을 주관한 이는 한국향도문화협회의 박희준 선생. 나무로 둘러싸인 한옥, 그 안에 앉아 즐기는 향도(香道)라니! 향도는 좋은 향이 지닌 기운을 받아 마음을 닦는 수행법 중 하나다. “수행을 위한 도(道)는 많지만 그중 향도를 백미로 꼽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향과 연기를 주재료로 하기 때문입니다. 가벼운 향과 연기를 다루는 만큼 이 수업에 오기 전 준비해야 할 것은 ‘가장 가벼운 마음’이에요.”
첫 의식은 도향(塗香)이다. 말 그대로 향을 몸에 바르는 의식. 수행자의 몸에 향을 발라 부정을 씻고 사기(邪氣)를 없앤다는 의미다. 본격적인 향도에 앞서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기 위해 행하는 의식이다. 이날의 도향 재료는 백단(白檀) 가루였다. 우리에게는 샌들우드라는 말로 익숙한 백단향은 은은하면서도 마음을 평안하게 해 명상에서 자주 사용한다. 선생의 가르침을 따라 백단 가루를 손바닥에 조금 다음 양손으로 비빈 후 관자놀이와 목 언저리에 발랐다. 목을 감싼 두 손을 다시 무릎에 내려놓는 동안 한 줄기의 향이 확 퍼졌다. 마지막으로 두 손에 남은 잔향을 얼굴 가까이 대면 도향 의식은 끝이 난다. 향을 바르고 맡는 과정에서 방 안에 앉은 6명의 사람들은 그 어떤 소리도 내지 않았다. 향 때문인지, 가라앉은 마음 때문인지 순간적으로 음 소거가 된 듯 주변이 고요했다. 이게 얼마만의 ‘무음’인지.
“오늘은 전향법(篆香法)을 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려 시대 도원 이숭인, 조선시대에는 매월당 김시습이 즐긴 것으로도 알려져 있죠. 전향이란 향 재료를 가루로 내 향 틀에 맞춰 형태를 빚은 뒤 향길을 내 향을 피우는 의식이에요.” 향길, 즉 향이 지나가는 길이라는 뜻이다. 수행의 언어가 이렇게나 아름답다. 오늘 피울 향은 자단향(紫檀香). 붉은색 향가루로, 자단나무라고 하면 낯설지만 다른 말로 하면 향나무다. 석향나무라고도 부르고, 울릉도에서 자라 울향나무라고도 한다. 중국과 일본에도 향도 문화가 있지만 이들과 다른 점 하나가 있다면 한국의 경우 향나무가 자생하기 때문에 우리 땅에서 자란 재료를 주로 쓰고, 중국과 일본은 수입한 나무를 사용했다는 점이다.
백자 향로에 흰색의 재를 고르게 다지며 본격적인 의식을 시작한다. 입자가 고운 재 위에 도구 자국이 남지 않게 편평하게 가다듬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 이때 선생은 팔의 수직 수평을 지키며 바르게 고정할 것을 주문한다. 편평한 면을 만드는 것만큼이나 몸의 태도와 자세도 중요하다는 뜻이다. 이 또한 예법이니까. 뒤이어 재 위에 굴곡을 만들어 그림을 그리는 데, 박희준 선생이 그린 것은 모란꽃. 아무래도 하루 체험하는 수업에서는 시도하기 어려운 과정이다. 선생의 손길을 따라 굴곡이 몽글몽글 형태를 잡는데, 이과정에서 정말로 꽃이 피어난다. 그다음은 압회(壓灰). 다시 재를 누른다. 초보자는 이 과정에서 재의 일부가 향로 바깥으로 떨어져나가는데, 선생은 이 모습을 놓치지 않는다. “재를 가다듬는 공정이 전향법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 중 하나예요. 가장 가벼운 재를 다루는 일이니만큼 성질이 급하면 절대 안 됩니다. 재를 다듬으며 마음도 가라앉히세요.”
그 위에 ‘마음 심’ 자 향 틀을 놓고 향 가루를 올려놓는다. 틀에 맞게 적당량을 올려야만 글씨가 새겨지지 넘치거나 모자라면 절대 틀대로 되지 않는다. 마지막에 향 솔로 향틀 윗부분에 남은 향 가루를 정리하고 향 틀을 걷어내면 흰색 재 위에 붉은색 ‘마음 심’ 자만이 남는다. 그 위에 불을 붙이고 향이 타 들어가는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며 명상에 잠긴다. 이 과정까지 평균 15분이 소요되고, 향이 다 타들어가는 것을 지켜보기까지 총 30분. 이후 명상에 들어가는 것이 일반적인 과정이다. 서서히 연기가 피어오른다. “자, 보세요. 이렇게 고도로 집중해서 만든 향을 어떻게 한다? 뒤도 보지 않고 태워버려요. 재미있지 않아요? 오늘처럼 화창한 날보다는 비 오는 날이 향 피우기에 좋아요. 연기가 낮게 좍깔리면 구름 위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향로 뚜껑을 닫으니 그 틈새로 연기가 피어오른다. 이때 두 손을 가까이 대향기를 코 가까이 가져오는 것. 요령이 있다면 연기를 꽉 쥐는 게 아니라 살짝 감싸안는 느낌이어야 한다. 그래야 매운 연기가 아니라 향만 가져올 수 있다고. 도향에서 그랬듯 향을 쥔 손을 얼굴로 가져가본다. 처음에는 향을 느끼기 어렵지만(정말 아무 향이 안 난다) 집중해서 반복하면 아렴풋하게 향의 흔적이 느껴지고, 그렇게 몇 번을 거듭하고 나니 온방 안에서 향이 넘실거린다. 집중한 만큼 향을 느낄 수 있다.
“오늘의 과정이 향도의 전부가 아닙니다. 아홉 마리 소의 털 한 가닥이라 할 만큼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아요. 넓게 보면 살아 있는 기쁨을 느끼는 것이 향도입니다. 숨을 깊게 들이쉬고 내뱉으며 좋은 향을 맡는 것, 결국 숨 공부죠. 요즘 현대인들 보면 참 다 잘해요. 못하는 게 없는 거 같아요. 근데 못하는 게 하나 있다면 자기를 들여다볼 줄 모른다는 거예요. 자신을 들여다보는 데 향만 한 게 없습니다.”
어디에선가 향도를 두고 ‘코를 통해 자신의 육체와 정신을 관찰하는 궁극의 수련법’이라는 해석을 본 적 있다. 아마 그 글을 쓴 사람은 향도를 해보지 않았을 것 같다. 향도는 ‘코’라는 신체 기관과 후각이라는 감각만을 사용하는 예법이 아니다. 모든 과정에서 사용하는 도구와 재료를 보기 좋게 정돈하고, 최대한 아름다운 것을 눈에 담으며, 바르게 행하고, 공간의 달라진 공기까지 느껴야 하니까.
37℃가 넘는 한여름에 다도 수업에 참여했다. 30년 이상 차를 다뤄온 오양가 선생이 진행하는 정기 다도 수업이다. “다도에서 장소와 시간, 용도 등 고려해야 할 배경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건 계절이에요. 계절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선에서 그날의 차를 선택해야 합니다. 오늘은 여름에 즐기기 좋은 차를 함께 마셔봅시다.”
차의 시간
제철에 맞는 차가 있다니. 선생은 가장 먼저 홍화꽃을 꺼냈다. 잎이 빼곡하고 봉오리가 큰 홍화꽃이었다. 홍화꽃은 노랗고 붉은 꽃잎을 지녔는데 초여름에 흐드러지게 핀다. 꽃봉오리 하나를 냉수가 담긴 유리컵에 담아 냉침을 시작했다. 그사이 이날의 수업 주제이기도 한 차의 보관과 찻물에 대한 이야기를 해나갔다. 오양가 선생에게 차는 ‘찻상에 표현되는 종합예술’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그녀는 차와 차를 마시는 예법 외에도 계절과 분위기에 맞는 다기와 테이블에 올릴 꽃꽂이를 중요시한다. 오늘은 자리마다 대나무 잎이 놓여 있었다. 20분 정도 지났을까, 수업을 하는 사이 홍화꽃이 서서히 우러나며 옅은 노란빛을 띠기 시작했다. 고소하면서도 뒷맛이 진하지 않아 입 안이 시원해졌다. 다음으로 선보인 차는 송화밀수(松花蜜水). 소나무의 꽃인 송홧가루를 꿀물에 탄 것으로, 잔을 입 가까이 대니 은은한 향이 올라온다. “송홧가루에는 비타민 D가 다량 함유돼 있습니다. 한여름 지친 몸에 활기를 불어넣어줘요. 조선시대에 임금이 석빙고에서 얼음을 가져다 송화밀수 위에 띄우고 즐겼습니다.” 말차를 본격적으로 마시기에 앞서 관리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말차를 상온에 보관하는 이들이 많은데 냉동고에 넣고 때마다 덜어 쓰는 게 가장 좋아요. 육안으로 말차의 상태를 확인하려면 색을 보는데 특유의 영롱한 초록색을 잃으면 맛과 향이 완전히 떨어진 거예요. 조금이라도 색이 탁하게 느껴진다면 마시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다도 테이블 위에 유리 다기가 놓여 있었다. 가장 먼저 다완(찻사발)에 뜨거운 물을 담은 뒤 데우기 시작했다. 물을 비우고 다완을 닦은 뒤 말차를 채에 걸러 데운 다완에 담았다. 차선(遮扇)으로 격불(擊拂)을 시작한다. 격불이란 말차를 마시기 위해 차선을 빠르게 움직여고운 거품을 내는 과정으로 말차의 과정 중 가장 중요한 순간 중 하나다. 숙련도에 따라 거품의 양이 다르다. 선생이 시범을 보였다. “다완에 차선을 처음 담글 때는 태극을 그립니다. 몇 차례 완만한 곡선을 그리다가 ‘마음 심’자를 그려야 해요. 마지막에는 천·지·인의 의미로 ‘ㅡ’자를 세 번 그으며 마무리합니다.” 어깨의 힘을 빼고 ‘마음 심’을 수차례 그리지만 생각처럼 손목이 움직이지 않는다. ‘마음 심’에 집중하다 보면 다시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어깨의 힘을 빼면 ‘마음 심’이 안 그려진다. 손목과 어깨가 따로 노는 것이 가장 고역스럽다. 선생의 투툼한 연둣빛 거품과 달리 거품이라 할 수도 없는 얇은 막 하나가 생겼다. 마음을 가다듬고 거듭할수록 능숙해진다는 점에서 격불 또한 수행의 한 과정이다. 격불을 끝내고 나면 차를 즐기는데 이 또한 예법이 있다. “먼저 테이블 위에 다완을 올리고, 숨을 고른 뒤 두 손으로 다완을 잡아 가슴까지 끌어올립니다. 첫 모금에는 15도 정도 아래를 지그시 바라보고, 두 번째 모금에서는 45도만큼 비스듬히 시선을 올리세요. 다 마시고 나면 먼 곳을 보며 입 안에 남은 향과 맛을 음미하면 됩니다.” 말차를 마시는 과정에 이보다 엄격한 규율이 있을 수 있으나 오양가 선생은 가장 자연스럽고 편안한 상태에서 자신에 맞게 차를 즐기면 그것이 다도라고 덧붙였다.
'향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레바논 백향목 (그리스도, 성전, 영생) (0) | 2019.01.27 |
---|---|
[스크랩] 회향(시라蒔蘿) (0) | 2019.01.27 |
[강병수 교수의 본초이야기20] 울금과 강황 그리고 봉출 (0) | 2018.09.21 |
[한약재정보] 강병수 교수의 본초이야기18 - 침향과 울향 (0) | 2018.09.21 |
한수석(寒水石), 편뇌(片腦), 해아향차(孩兒香茶) (0) | 2017.04.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