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골문자와 골각문자는 동이족의 것" 外

2018. 10. 11. 21:09글씨쓰기



2016.11.20 23:23 역사와 법

중국 최초의 문자로 알려진 갑골(甲骨)문자보다 1000년이나 오래된 것으로 보이는 새로운 문자가 발견됐다. 

4000 ~ 4500년 전 추정 … 동이족 문자 가능성

갑골문자는 중국 고대 상(商·BC 1600~1046년)나라의 수도인 은허(殷墟·허난성 안양현)에서 1899년 처음 발견된 이후 중국 최초의 문자로 인정받아 왔다.

   산둥(山東)대 고고미술학연구소 류펑쥔(劉鳳君) 소장이 최근 중국 고고학 관계자들을 초청한 세미나에서 갑골문자 이전에 다른 형태의 골각(骨刻)문자산둥성 창러(昌樂)현 지역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밝혔다고 홍콩 문회보(文匯報)가 21일 보도했다. 류 소장은 중국 고고미술학의 창시자로 학계의 명망이 깊은 학자다. 이 자리에 참석한 사회과학원 왕위신(王宇信) 교수 은상문화협회(殷商文化協會) 관계자 5명은 모두 류 소장의 학설에 동의했다고 이 신문은 전했다. 세미나에서 이 문자는 ‘창러골각문’으로 이름 붙여졌다. 

산둥성에서 발견된 신석기 시대 유물로 추정되는 골각문자(左), 
중국 최초의 문자로 알려진 갑골문자(右).


   류 소장은 산둥성 민간 소장가인 샤오광더(肖廣德)가 2004년부터 최근까지 창러현 지역 주변에서 수집한 수백 개의 골각문자를 연구한 결과 이 같은 결론을 내렸다고 설명했다. 류 소장에 따르면 이들 도안은 소의 어깨뼈와 사슴·코끼리 뼈에 새겨져 있었다. 

도안의 형태는 다양했다. 뼈 한 곳에 100여 개의 서로 다른 도안이 새겨진 것도 있고, 1~2개의 도안만 새겨진 뼈도 있다. 여러 개의 도안은 세로로 정렬돼 있어 특정 사안을 기록한 문자로 봐야 한다는 게 류 소장의 주장이다. 단순한 그림일 경우 이처럼 정렬된 형태로 나타날 수 없다는 것이다. 점복(占卜)기록인 갑골문자와 달리 골각문자에선 점복의 흔적이 나타나지 않았다.

   류  소장은 “뼈의 색깔과 석화(石化) 상태를 판단해 볼 때 문자를 새긴 연대는 4000~4500년 전으로 보이며, 이는 중국 산둥성룽산(龍山) 신석기 시대에 해당된다”고 말했다. 함께 출토된 뼈로 만든 칼과 송곳은 전형적인 룽산 중·후기 시대의 도구들이었다.

중국 고고학자들은 당시 산둥 지역은 한민족을 포함한 동이(東夷)족들이 집단으로 거주했기 때문에 이 골각문자는 동이문자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류 소장은 “문자의 모양도 대 상형문자인 동이문자 계열에 속한다”고 지적했다. 류 소장은 이어 “안양(安陽)을 중심으로 한 은허 지역에서 발견됐던 갑골문자도 동이족의 골각문자가 발전한 형태일 가능성이 크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20세기 중국 고고학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이 갑골문자 발견이었다면 이번 골각문자 발견은 중국 역사를 지금보다 1000년 이전으로 돌리는 21세기 중국 고고학의 역사적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출처: 중앙일보] 갑골문자보다 1000년 앞선 골각문자 발견

http://news.joins.com/article/3346996



위의 자료에 관심을 둔 사람이라면 한번쯤 공부해볼 자=> .https://www.facebook.com/HDLee0404/posts/1138024486258752



출처: http://badasok.tistory.com/2815 [침묵은 금이 아니다]



                                            "갑골문자골각문자는 동이족의 것"

2016.11.20.


badasok.tistory.com/2815   침묵은 금이 아니다







 

창락골각문자 발견과 연구

산동대 미술고고학 류펑쮠 교수

 

 

뼈에 새겨진 모양

 

창락골각문 확대본

 

 

번역 : 민승준  2009년 1월 28일

 

(一)
2004년 여름, 산동성 창락현의 수장애호가 샤오꽝더

창락현 원가장 및 그 부근의 쇼우꽝 지타이 등의 고문화 유적지에서

그곳 주민이 밭을 갈다가 나온 대형 소 어깨뼈를 발견했다.

그 당시 그는 이것이 고대 농기구의 일종이라고 짐작했고 집으로 돌아와 깨끗이 뼈를 세척했다.

그러자 문자같은 획이 새겨져 있는 것이 보였고, 그는 이것이 문자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획이 새겨진 뼈들을 수집하기 시작했고, 소중한 보물로 잘 보관해 왔다. 


 2005년 봄, 중국 산동성 제남시의 한 친구가 이 문양이 새겨진 뼈를 들고 나를 찾아왔다.

그는 이것이 웨이팡의 한 수장가의 것이며 이것 외에 몇 개가 더 있다고 알려주었다.

나는 자세히 살펴본 후 벗에게 말했다.

 

“이것은 분명 선사시대의 뼈로 보인다. 위에 새겨진 획은 확실히 문자이다.

이것은 중요한 문물이니, 수장가가 소장하고 있는 걸 다 들고 다시 나에게 보여줄 수 없겠는가?”

 

최근에서야 나도 이 뼈조각들이 샤오꽝더가 소장하고 있었던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최근 몇 년 사이 나는중국초기문자와 서예예술이라는 연구를 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샤오꽝더가 소장하고 있는 뼈들이 매우 중요한 자료라고 느껴졌다. 


 샤오꽝더는 이 뼈조각의 비밀을 정확하게 파악하고자

 웨이팡, 베이징의 전문가들을 찾아가며 가르침을 구했다.

그 과정에서 어떤 이는 이것이 벌레가 먹었거나 풀뿌리가 썩은 흔적이라고 여겼고,

또 어떤 이는 현대인이 새긴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 다른 전문가는 샤오꽝더에게

나를 찾아와 뼈조각을 보이고, 검정을 받는게 어떻겠느냐고 권고했다고 했다.


2007년 6, 7월경에 샤오꽝더는 여러차례 나와 전화로 연락을 주고 받았다.

전화상으로 그에게 몇 개의 실물을 들고 제남으로 와줄 수 있겠냐고 부탁을 했다.

7월 중순, 그는 일곱 덩어리의 글자가 있는 뼈조각을 들고 제남시 난쨔오 호텔로 나를 찾아 왔다.

당시 나는 이 호텔에서 열린 산동서화가 회의에 참석하고 있었다.

나는 로비에서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샤오꽝더를 발견했다.

그가 들고 온 뼈조각을 보고 그의 설명을 듣고 난 후 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내 수년의 전문적 연구와 검정경험에 비추어 보았을 때,

이 자료는 지극히 중요한 것이란 느낌이 들었고 앞으로 내 책임이 크겠다고 생각했다. 

 

 수장가 샤오꽝더의 설명을 듣고 있는 작가 류펑쮠



 이 글자는 사람이 새긴 획임에 분명하다고 판단했다.

그 이유는 조형에 주의를 기울였고, 완벽히 아름다웠으며 대다수가 호선으로 구성되었다.

또한 모두 새겨진 깊이가 일정하고 획의 유창함이 일치하며

오목히 들어간 부분 모두 단단하게 새겨진 흔적이 분명한 점으로 보아

 벌레먹거나 식물이 부식한 흔적이 절대 아니었다.

 

 벌레먹은 흔적은 하나의 점이 또 다른 하나의 둥근점과 이어져 있어

 획이 유창할 수 없고 또한 고르지 못하다.

풀 뿌리가 부식된 흔적이란 것은 표면이 떠있어 획이 규율이 없을 뿐 아니라 깊이가 없다.

다시 말해, 벌레먹거나 풀뿌리가 부식된 것은

 아름다우며 일정하게 규율이 있는 조형이 이렇게 많이 그리고 복잡하게 나타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뼈조각의 석화정도와 새겨진 글자조형의 특색에 근거해 분석하면,

이것이 정말 고문화 유적지에서 수집한 것이라면

 이것은 중국초기의 문자인 산동 용산문화 유물임이 분명하다.

만약 후인들이 새긴 것이라면,

그들은 이러한 조형의 글자를 바로 뼈조각에 새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분명 모본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마땅히 그것을 찾아내야만 한다.

우리는 중국 초기문자를 연구하기 위해 진실한 자료를 찾아야 한다.

동시에, 나는 깊고 절실한 사명감을 느꼈다.

 

나는 이 자료가 과학적인 검증결론을 얻기 위해 대량의 사업을 해야만 하고,

또 학술계의 인정을 얻으려면, 아주 많은 노력과 시간을 바쳐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나는 열심히 잘 해 나가 볼 작정이다. 이것은 나의 책임이며, 다른 선택이 없다.

우리가 고대문물을 대할 때는 이러한 태도가 필요하다.

근면하게 유물을 승인하고 열심히 그것을 대하며 자세하게 분석하는 태도야 말로

 확실히 고대문물을 해결할 수 있는 조건이 되는 것이다.


 당시 나는 이 뼈조각에 새겨진 것이 문자라고 주장했다.

그 주장의 근거는 다음과 같은 4가지이다. 


첫째, 새겨진 글자부호가 매우 많다. 분명 이것은 문자의 記事기사현상이다.


둘째, 새겨진 대부분이 인물, 동물, 식물의 도상형 부호이다.

 ‘서화동원(글씨와 그림의 근원은 같다)’은 여기에서 좋은 해설을 얻었다. 


셋째, 이러한 새겨진 부호의 포치와 결구는 규율성을 찾아볼 수 있다.

어떤 편방은 여러 차례 나타난다. 이는 일정한 지역내 보편적으로 인정받았거나

광범위하고 복잡하게 사용되어졌다는 것을 설명해 주고 있다. 


넷째, 최근 몇 년 창락현 주위죠우핑, 헝타이, 쇼우꽝, 린츠 등지 및

강소성 까오요우롱치유쫭서안의 화로우쯔 등지에서 모두

龍山용산 문화와 岳石악석 문화시기의 문자가 발견되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리 큰 주목을 끌지 못했다.

샤오꽝더의 수장품은 집중적 수장이다.

그래서 이러한 刻字각자는 분명히 중국 초기의 문자이다. 


 7월 하순, 나는 직접 차를 몰고 창락으로 갔다.

샤오꽝더와 농업종합개발 사무실의 류쩐쳥 주임 등이

 내가 검증차 창락에 들리는 것을 알고는 제청고속도로까지 달려와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샤오꽝더 집으로 들어가자 마자 멋진 글자가 새겨진 뼈조각들이 진열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내 눈을 믿고 자세하게 살펴보니 모두 고대인들이 새긴 것들이었다.

그 당시 기뻐했던 마음이 지금까지도 새록새록하다. 


 그 날 오후 반 나절동안 샤오꽝더와 함께 글자가 새겨진 뼈조각들을 관찰하고 분석했다.

이것들은 대부분 소의 어깨뼈였고, 근골, 기골 또 일부분은 사슴뼈, 코끼리뼈도 있었다.

나는 샤오꽝더가 수집한 것과 이런 뼈조각이 동시에 출토된 骨耜골사, 骨刀골도, (耜 :  보습 사, 쟁기날)

 骨錐골추 및 윤이 나는 黑陶片검은도자기조각귀신얼굴의 鼎足솥발 등을 자세히 관찰했다.

이것은 모두 용산문화의 전형적인 기물 혹은 전형적 기물의 깨진조각이었다. 


 

그림 1

산동 용산문화 玉鳥

 

자세한 관찰과 종합적 분석을 거쳐, 나는 이 골각문기본 연대가 정확하다고 생각했다.

연대를 추정하는데는 주로 아래의 일곱가지 방면에 따르고 있다.

첫째, 같이 출토된 전형적 기물의 연대와 뼈조각의 석화정도이다.

 둘째, 大汶口대문구 문화새김부호 상나라 안양 은허 갑골문사이에서

이 뼈조각에 나타난 조형적 특색을 고려한다.

 셋째, 많은 봉황새문양이 이미 발견된 산동성 용산문화의 옥봉황새 모양이 비슷하다. (그림1)

 

그림 2

양저문화 옥기 미세하게 조각된 도안

 

그림 2

양저문화 옥기 미세하게 조각된 도안

 

어떤 것은 미미하게 새겨진 문자가 비슷하다.

 같은 시기의 良渚양저문화 옥기의 얕게 조각된 선과

 조금은 달라도 교묘한 솜씨는 같은 오묘함이 있다. (그림2)

 

넷째, 이 골각문의 새김기법과 글자의 조형특색은 모두 다

서안 화로우쯔 용산문화 유적에서 출토된 뼈조각 위에 새겨진 문자와 같다. (그림3)

 

그림 3-1

서안 화로우쯔 용산문화 유적에서 출토된 뼈위에 새겨진 글자


 

그림 3-2

서안 화로우쯔 용산문화 유적에서 출토된 뼈위에 새겨진 글자


 

그림 3-3

서안 화로우쯔 용산문화 유적에서 출토된 뼈위에 새겨진 글자

 

다섯째, 글자가 새겨진 코끼리뼈를 고려해 보면,

이 지역에 코끼리가 생존했던 시기가 비교적 길었다.

상나라 초기에 이르러 점점 남쪽으로 옮겨갔다.

여섯째, 이 골각문은 주로 창락현 위엔지아쫭유적에서 출토되었는데

 이 지역은 용산문화시기의 유적지이다.

일곱째, 이 골각문은 석질 공구로 견고하게 새겨졌다.

안양 은허 갑골문桓台史家환태사가 岳石악석문화 갑골문

금속칼로 새긴 것들과는 현격하게 달랐다. (그림4)

 

그림 4

桓台史家환태사가 악석문화 제사기물 갱에서 출토된 글자가 새겨진 뼈

 

이러한 종합적인 분석을 거쳐,

나는 이 刻字각자가 지금으로 부터 4000~4500년 전의 산동용산문화시기의 유물로

東夷동이문자에 속하는 중국 초기의 圖畵象形도화상형 문자라고 판단했다.

이것은 안양 은허 갑골문과 다른다. 점술흔적이 보이지 않는 記事기사문자이다.

이 문자의 발견도 세계문자역사연구 중 비교적 중대한 사건이다.

이것은 고대이집트의 상형문자와 같은 중요한 의의가 있다고 보여진다. (그림 5)

 

그림 5

이집트의 상형문자, 승려문, 속체문

 

나는 당시에 샤오꽝더농업종합개발사무실 류젼쳥주임창락현 문화부 사람들과

내 검증결론을 논했고,  그 후 나의 검증결론은 신속하게

2007년 7월30일 <웨이팡일보 창락소식>과 이후의 <웨이팡일보>, <치루만보>,

<따쭝일보>, 웨이팡방송국, 산동위성방송, 및 포털사이트에 발표되었고,

사회와 학술계에 큰 주목을 받았다.


2007년 하반기, 刻字각자에 대한 나의 검증결론은

샤오꽝더창락현 정협문사학 위원회 주임 류씽궈의 관심과 중시를 받아

창락현 위원회, 창락현 정부에 보고되어진다.

 

창락현 위원회와 창락현정부와 창락현정협은

이것이 창락현의 문화적 대업으로 매우 중시하여 앞으로 내가 진행하는

창락골각문 검증과 연구사업을 적극적으로 지지해 주겠다고 힘을 실어주었다.

창락현 정협 텅찌엔쮠 주석의 관심과 구체적은 지시하에

 2008년 7월 산동대학 미술고고학연구소와 창락현 정협 문사위원회

 정식으로 <창락골각문 연구프로젝트 협의서>을 협정했다.

 

이 협의에 따르면

산동대학 미술고고학 연구소는 학술 연구와 도서편집및 학술회의 조직을 책임지고

이에 따르는 연구경비와 대량의 사업지원금을 창락현 정협이 부담한다.

창락현 정협은 이러한 보배로운 문화유산의 심도있는 연구를 위해 안정적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2007년 7월 첫 검증작업이 진행된 이래로

2008년 7월까지 나는 1년의 시간동안 다섯가지 방면의 큰 작업을 실행했다.

첫째, 나는 몇 차례 학생들을 유적지에 보냈다.

나의 학생들이 골각문이 출토된 현지에 가서 두가지를 조사하도록 했다.

하나는 이 유적지에서 골각문이 출토된 적이 있었던가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현재 이 부근에서 뼈에 문자를 새기는 사람이 있지 않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조사결과 전자는 긍정적이있고, 후자는 그렇지 않았다.

둘째, 나는 창락현 정협 리쩡홍 부주석, 왕용량 부주석, 짱신지에 국장,

 류씽궈 주임 및 샤오꽝더와 함께 골각문자 유적지에서 여러차례 조사를 진행했다. (그림6)

 

그림 6

위엔지아쫭 유적지에서 조사하고 있는 샤오광더, 류펑쮠, 리쩡홍, 류씽궈

 

지면의 유물과 방문한 사람들을 자세히 분석하여 여전히 유적지에서는

글자가 새겨진 뼈조각이 수집되고 있음이 드러났고 대량의 첫번째 자료들을 장악하게 되었다.

 셋째, 나는 창락 주변의 각각의 시와 현에 대해 대규모 조사작업을 실행했다.

 

그림 7

산동성 죠우핑 띵꽁유적에서 출토된 용산문화 도문

 

죠우핑(그림7), 헝타이, 린쯔(그림8) 쇼우꽝 등지에서

 모두 일찌기 유사한 문자가 출토된 적이 있었다.

다만 사람들의 주목을 끌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림 8-1

산동성 린쯔 황쳥에서 출토된 용산문화 돌화살촉


 

그림 8-2

산동성 린쯔 황쳥에서 출토된 용산문화 돌화살촉

 

이것은 창락현의 위엔지아쫭과 그 주위의 지타이 유적지에서 출토된 골각문자

결코 우연한 현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일찍부터 이들을 중시했어야 했다.

네번째, 나는 다양한 관련있는 문헌을 열람했을 뿐 아니라

이 시기와 비슷한 연대에 기타 다른 성에서 출토된 소량의 드문 자료들을

열심히 수집하고 분석 연구했다. (그림 9)

 

그림9

강소성 까오요우치우지아 유적지에서 출토된 용산문화 도문

 

 한 걸음 더 깊이 이 골각문을 인식하게 되었다.

다섯째, 이 골각문 사진과 동영상을 들고 산동성 내외의 다양한 전문가들을 찾아다녔고,

많은 전문가들의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지지를 받았다.
1년의 노력을 거쳐, 나는 나 스스로 검증한 자료에 대해 한 걸음 더 긍정하게 되었다.

 

2008년7월30일, 우리 산동대학 미술고고학연구소창락현 정협

 중국사회과학원 역사연구원왕위씬 교수, 보시 문물국 부국장짱꽝밍 교수,

산동갑골문국제교류센터 리라이푸이산장쭈위에핑 교수 등 전문가들을 창락에 초청했다.

우선 창락현 사진작가협회부회장 턍씬지에 선생이 촬영한 골각문자도편을 관람했다.

 

스크린 확대를 통해 본 사진에는 사람이 인공적으로 새긴 특색이 매우 정확하게 드러났다.

후에 전문가들은 긴 시간동안 자세히 글자가 새겨진 뼈조각의 실물을 관찰하고 분석했다.

아울러 비교적 심도있는 좌담 연구토론회를 가졌다. (그림 10)

 

그림10

2008년 7월 30일 좌담회 장면

류펑쮠, 짱꽝밍, 왕위씬과 뒤의 리랑푸

  

토론회에서 전문가들은 나의 검증결과에 모두 동의해 주었다.

이 문자는 안양의 갑골문에 비해 더 오래된 원시문자라고 생각했다.

또한 이 문자가 발견된 중요성을 강조하고,

 안양 갑골문의 뒤를 잇는 또 한번의 큰 발견인 만큼

중국문화의 큰 업적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창락현 위원회 왕슈화 서기, 창락현정부 차오샤오난 縣長현장,

 창락현 정협 텅찌엔쮠 주석및 정협의 각 지도자들이 시종일관 전문가들을 보필하며

많은 방면에 관심을 가져주었다. (그림11)

 

그림 11

텅찌엔쮠 주석과 창락골각문을 쓰는 왕위씬 교수

 

토론회에서 나와 전문가들은 모두 다 한결같이 이 골각문이

안양 은허 복사 갑골문과 다른 記事骨刻 기사골각 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주로 창락현 위엔지아쫭및 그 부근 쑈우꽝기타이 유적지에서 출토되었다.

그래서 昌樂骨刻文창락골각문’ 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이 문자는 더 많은 전문가들의 승인을 얻어, 과학적으로도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되었다.


(二)
이 창락골각문은 옥석에 새겨진 것 하나를 제외하고는 다 직접 뼈위에 새겨져 있다.

창락골각문에서는 상나라, 주나라의 금문 및 다른 갑골문에서 보이는

먼저 먹으로 쓰고 난 후 새기는 과정이 보이지 않는다.

대부분의 글자가 뼈조각의 외면(정면)에 새겨져 있다.

또 어떤 뼈는 동시에 骨內腔 (뼈내부의 비어있는 부분)와

骨臼 (뼈의 오목한 부분)에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런 뼈들은 지하에서 몇 천년에 걸친 자연적인 손상과

그곳 주민들이 파냈을 때 생긴 인위적인 파손 등으로 인해 새겨진 글자 대다수가 정확하지 않다.

 하지만 창락골각3은 보존이 비교적 좋은 상태이다. 20자가 넘는 글자가 정면에 새겨져 있다.

모두 정확하게 판독이 가능하다. 흔치않는 진품이다.

창락골각4 의 정면에는 무성하게 많은 글자들이 빽빽하게 새겨져 있다.

하지만 현재 판독해 낼 수 있는 것은 겨우 몇 글자 혹은 몇 개의 편방부수일 뿐이다.

샤오꽝더의 첫 통계에 따르면, 이 골각문은 대략 모두 수 백여자가 잔존한다고 한다.

 

 그림 12-1

 대문구문화 도존 상의 각화부호

 


그림 12-2

대문구문화 도존 상의 각화부호


 

그림 12-3

대문구문화 도존 상의 각화부호



최근 발견된 기타 소량의 자잘한 초기문자들은 각기 서로 다르다.

1980년대 협서성 창안현 화로우쯔 용산문화 유적지에서

10여 개의 골각문자부호가 출토되었고,

 1991년 산동성 쪼우핑 띵꽁유적에서

용산문화로 보이는 도자기문자가 출토되었다.

1990년대 강소성 까오요우치우지아쫭 용산문화유적지에서

도자기 편에 새겨진 문자가 출토되었고,

1995년 산동 헝타이스지아 유적지 문화제사기물 갱에서

세 덩어리의 복사가 새겨진 뼈가 출토되었다.

 

그림12-4

대문구문화 도존 상의 각화부호


 

그림 12-5

대문구문화 도존 상의 각화부호


 

그림12-6

대문구문화 도존 상의 각화부호


 

그림 12-7

대문구문화 도존 상의 각화부호


 

그림12-8

대문구문화 도존 상의 각화부호

  

최근 몇년 사이 필자는 칭쪼우, 쯔보 등지에서 조사를 진행했을 때,

용산문화말기로 보이는 돌화살촉 위에 새겨진 글자를 발견하였다.

 용산문화악석문화시기의 물질매체가 매우 풍부했다는 사실을 볼 수 있었다.

 도자기 위에 새겨진 부호는 일찌기 대문구문화, 하모도문화, 앙소문화 등에서도 이미 유행했다.

띵꽁우지아쫭 유적지에서 출토된 도자기 문자는 이러한 전통을 직접적으로 계승하고 있다.


 대문구문화기기는 이미 뼈위에 새긴 부호가 출현했다.

화로우쯔골각과 대량의 창락골각문의 출현은

용산문화기기 동물뼈가 이미 새김문자의 주요한 물질매체로 발전했음을 보여준다.

 

 만약 史家岳石사가악석문화 제사기물 갱에서 출토된

복사가 새겨진 뼈조각과 연관지여 분석해 본다면,

창락골각문은 물질매체를 이용한 것에서 제남 따씬쫭 안양에서 출토된 갑골문

 내제적 연원과 계승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설명해 준다.


 창락골각문음선각(음각으로 새긴 획)에 속한다.

그 새김방법은 전통적인 단단한 돌에 새긴 방법이다.

돋보기로 자세히 관찰해보면, 경도가 높은 도구로 새긴 느낌을 정확하게 볼 수 있다.

 필획의 양측에는 단단한 공구로 뼈에 새길 때 나타나는 올록볼록함이 드러나는데,

어떤 뼈조각은 깨끗이 세척한 후, 음각된 바닥부분의 흔적에서 정확하게 볼 수 있다.

 

헝타이 사가악석문화 제사기물 갱에서 출토된 복사가 새겨진 뼈에서는

 좌우 양변을 금속칼로 새긴 것 같은 느낌을 정확하게 보아낼 수 있다.

필획의 양측이 평평하고 시원스러운 것으로 보아

안양의 갑골문과 사용한 도구가 같다고 여겨진다.

 분명 비교적 날카로운 청동으로 주조된 칼을 사용했을 것으로 보여진다. 


 창락골각문에 사용된 단단한 돌 도구는

 아마도 창락에서 생산되는 藍寶石

(란바오스, 푸른색을 띄는 보배로운 돌,사파이어)를 사용한 듯하다.

그 곳 주민의 소개에 따르면,

창락 란바오스가 대량으로 쓰여지기 전에

곳곳에 널리 분포해서 쉽게 주울 수 있는 것이었다.

특히 가늘고 긴 5센티미터 정도의 란바오스는

가공을 거쳐 날카롭고 예리한 새김공구가 될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추측에 지나지 않아서 앞으로 고고학계의 증명을 기다린다. 


 창락골각문에 새겨진 획은 정밀하고 유창하다.

어떤 것은 매우 숙련되어 우아하고 고상하다.

그 세밀한 새김예술은 우리를 탄복하게 만든다.

 어떤 자는 길이와 넓이가 0.15-0.2에 불과하여 확대경으로 봐야만 정확하게 볼 수 있다.

그런데, 새긴 획을 분명하게 가릴 수 있고, 힘이 있고 유창하여

 良渚량저문화 玉器옥기 미세하게 조각된 아름다운 도안과 충분히 어깨를 견줄 만하다.

용산문화시기의 미세하게 새겨진 문자와 량저문화 옥기의 미세하게 조각된 도안은

원고시대 중국 공예조각의 최고의 성과물이다.

 동시에 창락골각문은 원숙함과 뛰어난 새김기법은

 우리에게 산동 용산문화시기에 이미

전문적인 문자창작과 記事기사에 종사하는 '서예가'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런 서예가는 사회적 지위가 아주 높았던 것으로 보여진다.


창락골각문은 대부분 뼈조각위에는 다만 새겨져 있거나

혹은 1자에서 5자가 존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6자에서 10자가 있는 것도 일정한 수를 차지한다.

하지만, 10자이상에서 20자가 넘는 글자가 있는 뼈조각은 극히 적었다.

그 장법과 포치는 자연스러움에 순응하여

 공식적으로 자유롭고 쾌적한 형을 초보적으로 형성하고 있다.

 

 대략 3가지 배치가 있다.

첫번째 배치는 한 뼈 덩어리위에 비교적 큰 한 글자만 있는 것이고,

또 어떤 것은 비록 한 뼈조각 위에 여러 글자가 새겨져 있지만,

그 중 어떤 글자는 단독으로 빈 자리위에 새겨져 있어

 주위의 다른 글자들과 밀접한 관계가 적어 보인다.

이것은 한 글자를 하나로 포치하는 것이다.

 

두번째 배치는 일정한 빈자리 위에 중간에 몇개의 글자부호를 새겨고

주변에 다시 소량의 글자부호를 새긴다. 이것은 일종의 글자군을 조합한 포국으로

 산락조합형이라 부를 수 있다. 이것은 상주갑골문금문포치 중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세번째 배치는 위에서 부터 아래로 행을 이루는 포치이다.

이러한 포치는 앞으로 발전하게 되는 서예예술의 주요한 포국형식이다.


창락골각문 문자의 크기와 조형차이는 매우 크다.

어떤 것은 弧線호선으로 조합된 동물과 인물의 형상이다.

 어떤 것은 호선과 직선에 유사한 선으로 조합한 식물과 동물의 형상이고

또 어떤 것은 호선과 직선에 가까운 선으로 조합되어 이루어진 부호이다.

어떤 형상을 비교적 커서 대략 7.5*6.5~2.5*2.1센티미터 사이이다.

대부분은 2~1.5센티미터쯤 되는데 미세하게 새긴 예술에 속하는 섬세한 것도 있다.

초보적인 관찰과 분석에 근거해보면,

만약 하나의 조합 글자군안에 있다면 큰글자와 작은 글자는 아마도

내재적인 연계와 구별의의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조형과 서사방법으로서의 창락골각문

쓴 글자라고 하기 보다는 그린 그림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나은 듯하다.

 이러한 글자를 만약 상주시대 갑골문, 금문과 서로 비교한다면

 상주 갑골문, 금문의 자체결구와 조자규율은 상형, 회의, 지사

 이 ‘삼서’ 위주로 주로 표현한 것은 물상부호이다.

 

비록 회화예술이 사람들에게 형상적 운치를 제공해 주지만

그것은 이미 근원이 같은 그림과는 비교적 멀어졌다.

대다수 글자가 비록 物象天性물상천성을 形형으로 삼지만

대부분이 그 形형을 총괄하고 그 神신을 개괄하여

 마음속으로 깨닫고 뜻이 통하는 상징부호로 변했다.

 이외에 그 ‘삼서’는 상주시대 갑골문 금문에서 이미 보편적으로 출현했다.

그래서 상주시대 갑골문과 금문은 이미 성숙한 문자였다.

 

 창락골각문을 자세히 관찰, 분석하면 대다수가 지사상형으로

 비교적 이상적인 해설과 설명을 얻을 수 있다.

그것의 字體結構자체결구造字規律조자규율은 일부분은

필획과 형상부호를 간략히 한 것이고 다른 일부분은 일정한 ‘指事지사’의 요구에 근거하여

 많은 필획과 형상부호로 조합되어 ‘整體정체’적 글자를 이룬다.

 이런 형상부호로 써서 나온 그림, 그려서 나온 글자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래서 先左后右선좌후우, 先上后下선상후하 天覆地載하늘은 덮고 땅은 받치는 등

해서와 행서의 이상적 조자및 서사개념은 여기에서 완전한 이해를 얻을 수 없다.

회화의 이러한 획 기초기법은 대다수의 글자에서 비교적 충분한 설명을 얻을 수 있다.


문자의 기원에 대해서 곽말약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중국문자의 기원은 응당 指事지사象形상형 두 계통으로 귀납되어진다.

지사계통은 마땅히 상형계통의 이전에 발생한 것이다.

회의, 형성, 가차, 전주 등에 대해서는 더욱 그 후에 놓이게 된다.”

 

대문구문화 陶尊도존(도자기로 만든 술담는 용기) 상에 새겨진 부호

 앙소 문화에 새겨진 부호 모두 문자의 탄생과정 중의 지사현상이다.

창락골각문은 이 전통을 직접적으로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指事지사의 발전을 중요한 造字조자규율로 삼는다.

최근 어떤 학자들은 대문구 陶尊도존 에 새겨진 것을 글자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최근 이런 부호는 여전히 발견이 미비하다.

표지적 작용만 하고 있고 일종의 記事기사현상이라고 설명할 수 없다.

 만약 앞으로 고고학적 발견이 증가하여 이 같은 부호들이 보편화되어 진다면

이것이 글자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최근의 상황으로는 '문자성질을 가진 상징적인 부호'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은 창락골각문처럼 발견된 수량이 많지 않고

심지어 한 뼈조각 위에 연속해 많은 글자가 새겨져 있다.

명확한 것은, 창락골각문은 記事현상으로 문자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사실이다.


창락골각문자 대부분의 글자에서는 두 가지의 書寫서사새김상의 특색이 있다. 


하나는, 그림2와 같이 주요한 부분과 중간의 핵심부분을 우선 새긴 것으로

 그 조형은 머리부분을 먼저 새긴 후에 다른 몸통을 새겼고

 마지막으로 다리와 날카로운 발톱이 있는 발등의 부위를 보충했다.

 여기에서 동물의 형상은 상상의 농축과 개괄을 얻을 수 있다. 


다른 하나는, 대부분의 글자가 모두 주요한 획을 가지고 있는데

이러한 선은 아마도 한번에 새겨 나온 것으로 보여진다.

 연속적으로 몇번의 칼을 대어 새겨나온 것이라 보기도 한다.

그런 후에 필요에 따라

그 주요한 선 주위에 물상의 필요한 기타 부분적 선을 보충해서 새긴다.

그림39 와 같이 그 글자가 생동감이 있을 뿐만 아니라

 획의 주와 객이 분명하고 조화롭고 질서가 있다. 


 창락골각문의 이 두가지 書寫서사적 특징

 대문구문화와 앙소문화에 새겨진 부호에서는 아직 명확한 표현을 얻을 수 없다.

이것은 분명 한자의 초기 특색이다.

한 방면은, 이 시기의 문자는 아직까지 '글씨와 그림이 본래 한가지이다'는 범위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음을 설명한다.

 다른 한 방면은, 이 시기의 문자가 바로 자신의 발전의 길을 점차 조금씩 깊이 찾아가며

 회화와의 구별이 점점 빨라짐을 설명한다.

 

 창락골각문의 이 두 書寫서사적 특색

 상주시대 갑골문금문에 대해 직접적 혹은  간접적인 영향을 일으킨 적 있다.

 특별히 금문의 서사는 '中'을 쓸 때 '口'를 먼저 쓰고 중간에 세로획을 쓰듯이

먼저 주요한 곳에 붓을 대고, 부차적인 상관부분에 보태거나 더한다.

하지만 청동기 명문을 분석해 보면 먼저 세로획을 쓰고 후에 세로획 중간에 원을 그린다.

마지막으로 원 위아래의 세로획에 각각 두 가로획을 새긴다.

중심에 놓여진 세로획의 기초상에 상, 중, 하로 분해와 조합하는 이러한 서사방법은

더욱 조합미와 다중미의 시각효과를 가지고 있다.

 이런 창작과정은 공터 중간에 세로로 세워진 높은 장대에 부합하고

그 후 장대위에 채색으로 장식된 깃발의 의의가 주어진다.

만약 해서와 같이 금문 ‘中’을 쓴다면

이러한 특유의 고상하고 옛스런 조합의 아름다움이 결핍되게 될 것이다.

 

(三)
 이 창락골각문을 자세히 분석하면, 그 자체결구조형과 장법,

그리고 새김기법등 방면에 존재하는 일련의 변화를 볼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분명 창락골각문 전후의 발전 연변일 것이다.

이러한 전후 변화를 두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보자.

 첫번째 유형은 昌骨1-昌骨68, 두번째 유형은 昌骨 69-昌骨73이다.

 

첫번째 유형의 문자 대부분은 도화상형자이다.

 자체 크기가 비교적 크다. 특별히 미세하게 새긴 자들이 많은 편이다.

두번째 유형은 장법과 포국이 비교적 민첩하고 풍부하다.

조합자군을 전형으로 삼는 것과 같이 세 종의 포국이 완전히 갖추어 졌다.

글자들이 호선으로 조합되어 이루어졌고 새김처리가 깊어 힘이 보인다.

두 종 모두 특색있는 새김기법을 가지고 충분히 체현하고 있다.

 

두번째 유형의 글자는 도화상형부호상형 모두 다 지니고 있다.

 글자의 크기는 점점 통일되어져 간다.

그 장법과 포치는 주로 위에서 아래로의 혹은

위에서 아래로에 비교적 가까운 행렬의 포국을 이루고 있다.

호선과 직선에 가까운 것으로 조성되어진 글자는

새긴 정도가 비교적 얕아 약간의 느슨함이 드러난다.

이러한 두 유형의 골각문과 대문구문화 도존 위에 새겨진 부호를 서로 비교하면

첫번째 유형의 글자가 도존부호와 상통하는 요소가 많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반면 두번째 유형의 골각문은 쪼우핑의 띵꽁유적지에서 출토된 용산문화 말기의 도문,

 임기황성에서 출토된 용산문화 말기의 돌화살촉 각문과 견줄만한 부분이 많이 있다.

그래서 나는 초보적으로 추정한다.

첫번째 유형의 골각문은 분명히 용산문화 초중기에 주로 출현하거나 유행한 것이며

 심지어 용산문화 말기까지 연속되었다는 것이 이 골각문의 주요한 유형이다.

반면 두번째 유형의 골각문은 아마도 용산문화 말기 혹은 용산문화중기에서 말기에

치우치는 시기에 출현한 새로운 글자유형일 것이다.

이것은 추측일 뿐이다. 앞으로의 고고학 작업의 증명을 기다려야 한다.


창락골각문 대부분은 선이 감소된 필획이다.

 다른 한부분은 지사, 회의, 형상 부호이다.

초기의 글자는 그림이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글씨와 그림이 본래 같은 것이다’는 중국글자의 초기 표현형식이다.

중국문자가 성숙해진 후의 육서이론은 그것들을 완전히 설명하고 이해시킬 수 없다.

 그것은 비교적 계통적으로 중국사전미술의 심미특징을 반영한다.

그래서 물상의 심미재창조, 지사의 조합상징성, 용봉문화와 ‘鳳봉’자의 다양성이

 바로 창락골각문의 세가지 기본 조자규율이다.

 우리는 이러한 규율을 인식해야만 비로서 그것을 자세히 해독할 수 있을 것이다.


첫번째, 물상의 '심미 재창조성'이다.

일찌기 대문구문화 도존의 새김예술 중에 심미 재창조가 보여진다.

 

  이것이 바로 비교적 전형적인 예이다.

 

이 외에도 앙소문화의 인형도호(그림13)과 대문구 용산문화의 도격(그림14)등이 모두

 사람과 새, 돼지와 개등의 형상을 재창작한 예술이다.

 창락골각문은 이러한 전통을 계승하고 있고 게다가 표현하는 것이 매우 두드러져 있다.

  

그림 13

앙소문화 도자기로 만들어지 사람머리형상의 壺


 

그림 14

대문구 문화 도격 ㅜ


 

 우리가 이 문자를 봤을 때, 우선 사람같기도 하고 동물 같기도 한 형상에 끌리게 될 것이다.

그림19, 그림67 등은 보기만 해도 새긴 것이 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새김은 재창조의 예술이지 결코 자연계의 동물을 직접 모사한 것이 아니다.

 필요에 따라 분석하고 관찰한 기초에서 원래의 물상에 대해

귀납, 개괄 및 간략화 처리를 거쳤다.

어떤 것은 심지어 일부분을 확대나 축소하고 또 어떤 것은 옮겨버리거나

새로 조합해 처리하여 상형적 심미물상을 창조해 냈다.

이것은 중국초기문자의 두드러진 특색이다.

 이것은 회화와 아주 비슷한 창작사유를 있음을 의미한다. 



두번째, 지사의 조합상징성이다.

대문구 문화의 도존 새김예술 중에서의

 이것은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지사조합의 상징성 부호이다.

 

 

아래 부분은 산봉우리를 상징한다. 정상에는 태양이 있다.

중간에 문양이 의미하는 것은 산봉우리와 태양 사이를 연계하는 ‘鳥’이다.

하남성 린루옌춘 앙소문화유적지에서 출토된 도자기 단지에 채색으로 그려진

학이 물고기를 물고 있는 (그림15)것은 지사의 조합상징성을 보여주는 그림이다.

 

 

 그림 15

하남성 린류옌춘 앙소문화 유적에서 출토된 도자기 단지 위에 채색으로 그려진 그림

 

학을 토템으로 하는 부락이 돌 도끼를 들고

물고기를 토템으로 삼는 부락에 승리를 거둔 것이다.

 학은 의기양양 드높은 기세를 드러내고 있고

학이 입에 문 물고기는 숨이 곧 끊어질 듯 깔닥거리고 있으며

그 옆에는 무력의 상징인 나무자루에 묶여진 돌도끼가 세로로 그려져 있다.

 

창락골각문을 자세히 분석하면

 이러한 내재적인 문화영향과 전승관계를 볼 수 있다.

 그 예로 그림29, 그림30, 그림 37, 그림 41등이 있다.

 모두 전형적인 지사조합상징성이 돋보이는 문자이다.

그림 29는 세 가지 상형자의 조합으로 되어 있다.

‘鳥’와 식물과 다른 하나는 그다지 정확하지 않다.

아마도 사람과 어떤 곳의 자연환경 혹은

 어떤 물질과 관계가 있는 내용을 기재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림37은 보기에 글자와 닮았다.

 

사실은 ‘鳥’를 주로 삼는다.

아래부분은 기타물상을 덧붙인 지사조합상징 문자이다.

그림30은 조합이 매우 복잡하다.

최근 조합이 제일 복잡한 것으로 보여지는 것으로 내용도 아주 풍부한 글자이다.

또한 많은 부호로 조성된 내재적 연관이 있는 선묘화이다.

중간에는 상형자가 하나 있다.

 큰 코끼리가 놀라 두려워하는 모습과 비슷하다.

주위에 상형자와 부호들이 있다.

 각 부락의 거주지를 상징하거나 자연환경 물상을 의미한다.

 혹은 포위하고 몰아 사냥하는 듯 하기도 하다. 물론 다른 견해와 해설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종합적으로 분석, 연계하여 고려해볼 때,

그것들을 한 조의 글자로 삼아 해독하는 것이 아마

그것의 원초적인 의미에 제일 가까울 것으로 여겨진다.

그림 41은 놀라고 두려워하는 야생 소 같은 큰 동물이다.

신체가 축소되어 앞다리를 들고 부르짖고 있는 형상이다.

부근의 사슴을 닮은 동물은 마침 달아나고 있다.

 주위의 여러사람이 둘러싸고 이를 쫓고 있는 각각의 ‘人’의 동태가 있다.

이 조합중 각종의 동태를 보이는 ‘人’은 모두 상주 갑골문과 금문의 ‘人’의 조상격의 형태이다.

이러한 ‘鳥’와 ‘人’자의 분석을 통하여

창락골각문이 상주 갑골문과 금문에 대한 영향이 비교적 크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세번째, 龍鳳용봉문화와 ‘鳳’자의 다양성이다.

용봉문화는 중국문화에서 매우 특수한 문화영역이다.

선사시대 용문화의 전형적 예술작품으로는

하남성 푸양 시쉐이포 앙소문화유적지에서 출토된

조개로 만든 인물이 용을 모는 그림 (그림16, 빵수런우위롱투)가 있다.

 

 그림 16

하남성 푸양 시쉐이포 앙소문화유적지 출토된 그림

 

길이가 2미터에 달하는 용의 머리를 쳐든 긴 목선, 몸을 펼쳐 꼬리를 휘두른다.

사람이 그 용의 등에 타고 한 손은 앞으로 다른 한 손은 뒤로 해서 용을 모는 형상이다.

기타 호랑이, 사슴등의 대형동물들과 같이 배열해 놓았다.

그것이 우리에게 전달해 주는 계시는 살았을 때

용 토템을 숭배하던 무덤주인이 용을 몰고 승천하는 정신의 추구이다.

이는 영예롭게 ‘중화제일용’이라고 일컬어진다.

여기서 거론한 것은 형으로 정신을 전달한다는 것인데 이는

즉 일정한 조형예술로 규정된 정신을 표현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것은 일체의 심미재창조 예술에 적합하다.

 

 각 시대에 어떠한 형태로 무슨 정신을 표현해 전달하려 했는지는

최근 중국 미술이론연구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주역 계사하전>에는 이런 말이 전해진다.

 

“옛날 복희씨가 천하를 다스릴 때

우러러는 하늘의 象상을 관찰하고 구부려서는 땅의 법칙을 관찰했다.

새와 짐승의 文彩문채를 살피고 땅과 더불어 마땅하게 하였다.

 가까이는 몸에서 취하고, 멀리는 물건에서 취하게 하여 비로소 팔괘로 시작하였다.

 신령스런 밝은 덕으로 통하게 하여 만물의 뜻을 분류했다.”

 

고인이 팔괘를 창제했는데 이는 바로 ‘신의 밝은 덕’과 ‘만물의 뜻’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이것 역시 선사시대 미술창작의 심미표준에 속한다.


창락골각문중의 ‘龍’자는 비교적 적다.

그림2와 그림47은 상주 갑골문, 금문중의 ‘龍’자와 매우 비슷하다.(그림 17)

 

그림 17

상나라 갑골문, 금문의 '龍'자

 

 특히 그림 2의 용이 쏙 빼닮았다.

 만약 이 해독이 틀리지 않다면 창락골각문 그림2는 중국 제일의 ‘龍’자일 것이다.

창락골각문은 상주 갑골문과 금문에 대한 영향이 더욱 분명하게 들여다보여진다.


창락골각문중의 ‘용문양’의 글자는 매우 많다.

그림 4, 45, 46, 71, 73, 75, 77, 79, 81, 83, 90, 135등이 모두 ‘鳳’자이다.

70여건의 골각문중에서 10개 이상 심지어 더 많은 ‘鳳’자가 있다.

‘鳳’자는 ‘鳥’자가 승화된 것이다. ‘鳥’자의 기초상에서 장식이 확장되어 이루어졌다.

 몸이 수려하고 길며 머리에 높은 관을 쓰고

긴 꼬리가 화려하고 발톱에 웅장한 힘이 엿보이는 것이 그 기본특징이다.

 창락골각문의 대량으로 보이는 ‘鳳’자는 풍부한 현실조형미를 갖추고 있다.

상나라 갑골문중의 ‘鳳’자(그림 18)는 창락골각문의 기초상에서 간소화 되어진

도상부호임이 분명하다. 창락골각문의 ‘鳳’자는 비교적 많은 편이다.

 

상나라 갑골문 '鳳'자

 

우리들이 중시여길 만한 가치가 있는 문제이다. 창락골각문은 동이족의 문자이다.

동이족은 새토템을 숭배하는 민족이다.

 

大汶口대문구 문화부터 岳石 악석문화까지 발견되는 새문양 도안과 ‘鳥’자는 비교적 많다.

창락골각문의 ‘鳳’자는 자형이 크기의 차이가 있을 뿐 아니라 번잡하고 간략함도 하나같지 않다.

이것은 새겨진 시간이 다르고 ‘鳳’자의 차이가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려주는데

 이런 것을 제외하고도 실질적 내용이 같지 않았다는 사실도 표현해 주는 것이다.

 

 동이족에서는 봉황새를 토템으로 하는 부락은 아주 보편적이었다.

그들 사이에선 늘 각종 방식의 교류가 있어왔고 이러한 ‘鳳’자는 부락의 종족휘장이었다.

 그들은 각자 서로 교제하는 상황을 수시로 기록했으며

가장 간단명료한 방식은 바로 상대방의 종족휘장에 기록해나가는 것이었다.

한 두 문화유적지에서 동시에 이렇게 많은 종족휘장이 나온다는 것은

 그 당시 교류의 빈번함을 설명하는 것이다.

‘鳳’자 출현에서 보여지는 각종 차이는

역시 각 부락의 종족휘장이 같지 않다는 원인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아마도 부락간의 지위가 같지 않음을 설명해 주는 것이다.

그림4의 ‘鳳’자는 기세가 당당하고 정교한 아름다움을 견줄 데가 없을 정도니

중화제일의 ‘鳳’자라 불리어진다. 신석기시대 말기의 문화교류를 거쳐,

동이문화의 용봉문화는 이미 아주 높은 수준에 도달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동이문화와 서부중원내부의 문화예술이 서로 결합했으며

 동이용봉문화를 위주로 하여 중화민족의 용봉문화예술을 하나로 융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류펑쮠
산동대학 미술고고학연구소에서
2008년 10월 19일 밤

 

 

                                              창락골각문자 발견과 연구 류펑쮠
2009.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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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나라 갑골문보다 훨씬 더 빠른 고대한국 [골각문자]와 [홍산문자] - 한자의 원형 |한국상고사

흐르는 강물처럼 | 조회 655 |추천 6 |2017.08.21. 15:28 http://cafe.daum.net/121315/CK3e/298 



[밝은 앞날][꿈은 이루어진다][꿈은 미래의 현실이다]

 


백두산 천지  

[ 과거현재미래를 위해서 존재한다.]

 [ 영원히 살 것처럼 계획하고, 하루 살다 죽을 것처럼 실천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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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돌 주요 분포도]

 

- 백두산 부근 지역은 지대가 높아서 옛날에 사람이 많이 살지 않았으므로 고인돌이 많이 발견되지 않음.


고인돌은 전세계에 퍼져있지만 한반도에 세계 고인돌의 절반(50%) 이상이 몰려있다 할 정도로

한국은 [고인돌 왕국]으로 유명합니다. 


(일본의 고인돌은 2천수백년전에 한반도에서 건너간 것들인데   

8천년전 것도 있는 한국의 고인돌에 비하면 그 시대가 아주 뒤늦은 것들입니다.)



위 [고인돌 주요 분포도]에 나오듯이 만리장성 이남의 중국에서  

산동반도는 특이하게 고대 고인돌이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지진대]에 있다 봅니다.









위 그림은 동아시아의 [지진대]를 그린 것인데요


  


이처럼 중국 중부지방에는 지진대가 많습니다.


고대에는 사람들이 현대인보다 야생성이 많이 살아있었고

그래서 현대인들이 느끼지 못하는 정도의 작은 지진도 많이 느꼈으며

그래서 지진대에서 사는 것을 아주 싫어했을 겁니다.


그 사람들에게는 가끔 일어나는 큰지진보다 오히려 더 싫은 것이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작은 지진들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특히 5천년 이상 전의 사람들(특히 당시의 선진문명인들)은 [지진대]에 가는 것을 꺼려해서

[지진대] 지역은 미개한 지역으로 남아있는 경향이 강했다 봅니다.


예를들어 일본에서는 구석기시대의 유물이 거의 나오지 않는데

이는 그 시대에는 사람들이 일본땅에 거의 가지 않았다는 거죠. 지진이 많아서.


일본에 호랑이가 없는 이유

http://cafe.daum.net/121315/CK3e/273  <- 관련글



위 그림을 보면 [산동반도]는 지진대가 아니죠.


왜 만리장성 이남의 중국에는 특이하게 산동반도에 고인돌이 몰려있는지

그 이유가 [지진대]에 있다 하겠습니다.      


약 5천년 이상 전에는 고대한국인들이 중국 중부지방에서는 지진대가 아닌 산동반도로 많이 갔는데


그래서 산동반도에서는 오래전부터 [소호(少昊)문명]이라는 문명이 발전하게 되죠.


 

  요하(홍산)문명과 소호(少昊)와 소전(少典)  <- 관련글




중국 최초의 나라라 하는 [하나라]와 [은나라]는 모두 지진대에 존재했고

그래서 고대한국에 비해서 문명이 많이 뒤떨어졌으며 

문자(한자) 역시 고대한국에서 배워갔다는 근거가 계속 나오고 있다 하겠습니다. 

   

산동반도로 건너간 고대한국인들이 사용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고대한자가 많이 발견되었는데

 기존에 최초의 한자라 하던 은나라 갑골문보다 1천년 빠른 것들이라 크게 보도되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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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펌 - 발췌 ]

갑골문자보다 1000년 앞선 골각문자 발견

4000 ~ 4500년 전 추정 … 동이족 문자 가능성

 

[중앙일보 2008.10.22]

 

 

중국 최초의 문자로 알려진 갑골(甲骨)문자보다 1000년이나 오래된 것으로 보이는 새로운 문자가 발견됐다.


산둥(山東)대 고고미술학연구소 류펑쥔(劉鳳君) 소장이 최근 중국 고고학 관계자들을 초청한 세미나에서

갑골문자 이전에 다른 형태의 골각(骨刻)문자가 산둥성 창러(昌樂)현 지역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밝혔다고

홍콩 문회보(文匯報)가 21일 보도했다.



류 소장은 “뼈의 색깔과 석화(石化) 상태를 판단해 볼 때 문자를 새긴 연대는 4000~4500년 전으로 보이며,

이는 중국 산둥성의 룽산(龍山) 신석기 시대에 해당된다”고 말했다.



중국 고고학자들은 당시 산둥 지역은 한민족을 포함한 동이(東夷)족들이 집단으로 거주했기 때문에

이 골각문자는 동이문자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류 소장은 “문자의 모양도 고대 상형문자인 동이문자 계열에 속한다”고 지적했다.

류 소장은 이어 “안양(安陽)을 중심으로 한 은허 지역에서 발견됐던 갑골문자도 동이족의 골각문자가 발전한 형태일 가능성이 크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20세기 중국 고고학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이 갑골문자 발견이었다면

이번 골각문자 발견은 중국 역사를 지금보다 1000년 이전으로 돌리는 21세기 중국 고고학의 역사적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홍콩=최형규 특파원

http://news.joins.com/article/3346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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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기사에서 산동 [골각(骨刻)문자]라 하는 것은

 뼈에 새겨진 문자라 해서 [골각(骨刻)문자]라 합니다. 





http://baike.sogou.com/v69296989.htm





https://kknews.cc/zh-my/culture/p8kq4n8.html





https://kknews.cc/culture/b2jl9bj.html




위 사진들처럼 소뼈 등 동물의 넓적한 큰뼈에 새겨진 문자들인데

은나라 갑골문이 약 3천년 ~ 3천6백년전 것들인데 비해서 

1천년 정도 더 이전의 문자들입니다.



중국 언론을 보면 [산동 골각문]은 이미 은나라 갑골문을 넘어서는 '중국 최초의 문자'로 많이 인정받고 있습니다.   


아래는 중국 언론에 나오는 [산동 골각문]입니다.

 



http://news.sdchina.com/show/1892456.html



위 그림은 오른쪽부터 시대별로 [용(龍)]자의 변화인데

골각문 - 갑골문 - 금문 - 전서 - 현대한자 입니다.


   


고대 한자의 [용(龍)]인데

오른쪽이 [산동 골각문]이고  

왼쪽이 [은나라 갑골문]입니다.





http://news.sdchina.com/show/1892456.html




중국 고대사에서 유명한 동이족 장군인 [치우(蚩尤)씨]의 [치(蚩)]인데


오른쪽 골각문을 보면 사람의 얼굴 모습이며 

왼쪽 갑골문은 많이 상징화가 된 모양이죠. 





https://kknews.cc/culture/k8zyzpr.html



황(黃)이라는 글자는 원래는 [훌륭한 인물]을 뜻하는 글자이며



오른쪽 골각문은 역시 사람의 얼굴 모습이고

왼쪽 갑골문은 상징화가 많이 된 모습이죠.





[치(蚩)]의 원형인 이 그림은 

고대한국의 장군(무인)을 그린 것으로 보이며 

머리에 모양이 있습니다.  


[황(黃)]의 원형인 이 그림은

고대한국의 훌륭한 인물을 그린 그림으로 보이며

역시 머리에 모양이 있다 하겠고


상투

 

상투 모양도 있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위 인물은 머리에 뭔가를 2개 꽂은

형상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구려 때도 머리에 새깃털 2개 꽂았고

신라 화랑도 머리에 꽃가지 2개 꽂았고


조선 취타대


조선시대에도 머리에 2개 꽂아서


형태를 만드는 풍습이 있죠.


조선 임금의 머리 관도 형태.


고대한국에서 [지도자급 인물]의 머리를   형태로 만드는 풍습이

조선시대까지도 이어졌다 하겠습니다.



삼국유사에 환웅임금이 [서자(庶子)]라 하는데

원래 [서자(庶子)]라는 말은 [공자] [노자] [군자]처럼 

훌륭한 인물을 뜻하는 말입니다.

(아들(자식)을 뜻하는 말이 아닙니다.)


  [서자(庶子)]의 원래 뜻은 [세상에 빛이 되는 훌륭한 사람]

http://cafe.daum.net/121315/CK3e/270  <- 관련글









서(庶) 의 고대한자를 보면 





[ 서(庶) - 갑골문 ] 


 




[ 서(庶) - 금문(金文) ] 





출처 - http://www.internationalscientific.org/CharacterEtymology.aspx?submitButton1=Etymology&characterInput=%E5%BA%B6





위처럼 서(庶)의 고대형에서는 [사람]이 보이는데 




이처럼 머리에 뭔가를 꽂아서 형태로 만든 사람인 것 같습니다.


환웅임금이 [서자(庶子)]였다 한 것은 

훌륭한 지도자급 인물이었다는 얘기죠.  




조선(대한제국) 임금과 신하.


위처럼 조선의 임금은 머리(관)를  형태로 만들었고

신하는 2개를 위로 못세우고 옆으로.


고대한국의 지도자를 뜻하는 형태 전통이

한국과 중국에서 근세까지 계속해서 이어져내려왔다 하겠습니다. 


(흔히 중국 것을 베꼈다는 오해를 많이 하는데

사실은 고대한국의 전통이 중국에 전파된 것.) 



서정(庶政)이라는 말을 검색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처럼 서정(庶政)이라는 말은 [모든 정치]를 뜻하고

서정쇄신(庶政刷新)이라는 말은 모든 정치를 새롭게 발전시켜서 하겠다는 말이죠.


서정(庶政)이란 원래 [서자(庶子)의 정치]라는 말이고 

고대한국에서 세상에 문명을 전하려 퍼져나간

서자(庶子)들, 즉 여러 환웅임금(고대한국의 젊은 지도자)들의 정치가 훌륭했다는 것이 

   지금도 말(언어)로 남아있다 하겠습니다.




중국 산동반도로 건너간 고대한국 사람들의 유물 중에    

[아사달 문양]이라는 유명한 문양이 있죠.  



산동반도에서 발굴된 고조선족의 팽이형 토기와 아사달 모양(네모 안).

중국 측은 6300년전∼ 4200년전의 유물로 추정한다.

사진 제공 신용하 교수 - http://www.donga.com/fbin/output?n=200705260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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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한국의 상징문양 중 하나인 위 [아사달문양]은  

아침을 뜻하는 한자 단(旦)의 원형입니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시대별로 달라지는 아침 단(旦)




http://blog.sina.com.cn/s/blog_72c717440102vei9.html



이처럼 산동반도로 간 고대한국인들이 쓰던 [아사달문양]이

차차 아침 단(旦) 이라는 한자로 변합니다.



환인(桓因) 환웅(桓雄) 단군(檀君)


환(桓)


아침 단()이 있죠. 


단(檀)


역시 아침 단()이 있죠. 





 중국에서는 이미 [동이 골각문]이 은나라 갑골문보다 훨씬 빠른 문자이고 

은나라 갑골문의 원형이라는 것이 정설화된 것 같습니다. 


이러한 일이 또한 동북꽁정이라는 말도 안되는 짓을 감행하는 이유가 되었겠죠.


고대한국에서 건너간 문명이 중국문명의 뿌리라는 것이 계속 밝혀지니까 말이죠.


아래는 중국에서 [동이 골각문]을 정리한 것 중 일부입니다.  



 오른쪽부터 [골각문실제 - 골각문 - 갑골문 - 금문 - 전서 - 현재한자]입니다.













 


 





https://baike.baidu.com/pic/%E9%AA%A8%E5%88%BB%E6%96%87/5103204/0/1f569482755f68f7f703a663?fr=lemma&ct=single#aid=0&pic=e7cd7b899e510fb30ec9a6acd833c895d1430c3c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전해오기를

'창힐이라는 사람이 새 발자국을 보고 한자를 처음 만들었다.' 하죠.

 

이상한 것이

한자는 대개 사물의 형상을 그린 것이고

고대에 여러 많은 사람들이 그림을 그리다가 차차 자연스럽게 생겨나고 정립된 문자인데 

왜 '창힐이라는 단 한사람이' 그것도 '새 발자국을 보고' 만들었다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조선(朝鮮 : 고조선)을 뜻하는 조(朝)자에 새발자국 같은 형상이 나옵니다. 



    [ 조(朝) - 금문 ]


                         




위에서 보이듯이 [새발자국 형상]은 고조선의 상징 중 하나입니다. 



조(朝)는 (고)조선을 표현하기 위해서 생겨난 글자

http://cafe.daum.net/121315/CK3e/257   <- 관련글


물론 이러한 형상은 [새발자국]이 아니라 

[천지인(天地人) 삼위일체(三位一體)]를 뜻합니다.


의 형상과 뜻이 상통하는 모양입니다. 

 [천대 지대 인역대(天大 地大 人亦大)]

하늘(天)도 위대하고 땅(地)도 위대하고 사람(人)도 위대하다는 뜻이죠.







고구려 토기


http://m.blog.daum.net/_blog/_m/articleView.do?blogid=09KZ7&articleno=1736043



고구려 토기에 자가 많이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얘기인데


[새발자국 형상]도 있습니다.


고대한국의 전통이 이어진 것이죠.






위 사진은 서울 풍납토성에서 출토된 마한 혹은 백제의 기와들입니다.


  [새발자국 형상] 많이 나옵니다.








신라의 금관들입니다.


왼쪽 위가 초기 금관인데 [새발자국 형상]이고


후대의 것들은 형상이죠.


여기서도 [새발자국 형상]과 형상이 원래 같은 의미인 것을 알 수 있는데


고대한국의  형상은 원래는 한라산, 설악산 등의 자연 산(마운틴)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뜻하고 [천지인(天地人) 삼위일체(三位一體)]를 뜻합니다.


삼국사기에 "평양자 본선인왕검지택야(平壤者 本仙人王儉之宅也)"

"평양(平壤)은 본래 선인왕검(仙人王儉)의 집(宅)이다." 했듯이


단군왕검은 선인(仙人)이시라 존칭되었고


환웅임금의 가르침이 신교(神敎), 선교(仙敎)였으며


고대한국의 최고지도자는 신인(神人), 선인(仙人)이시라 존칭되었습니다.


(일본 전통종교인 '신교(신도)'라는 명칭은 고조선의 시원종교를 흉내낸 것.

천황(天皇)이라는 말 역시 원래는 고대한국 최고지도자의 존칭 중 하나를 본딴 것.)


우리나라의 전통종교는 선도(仙道) 불도(佛道) 유도(儒道)라 하는데

그 중 선도(仙道)가 제일 먼저이며 (고대한국의 시원종교.)


에 예의를 갖추는 사람(人)을 뜻하는데

여기서 이란 자연 산(마운틴)이 아니라

천지인(天地人) 모든 세상의 진리를 뜻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형상과 같은 의미를 갖은 형상이

[새발자국 형상]이고


'창힐이 새 발자국을 보고 한자를 처음 만들었다.'는 것은

동물 새의 발자국을 보고 만든 것이 아니라


[새발자국 형상]을 상징으로 하는 사람들

즉 고대한국인들의 문자를 베껴서 중국인들에게 가르쳐줬다는 얘기가 되겠습니다.


위에 소개해드린 산동반도의 [동이 골각문]보다 더 빠른 문자도 여러가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홍산문화의 [옥으로 만든 도장]입니다.



 



 

많이들 아시듯이 [홍산문화]는 고대한국의 문명 중 하나인데


아래와 같은 2개의 옥도장에서 글자가 발견되었습니다.



동물형뉴(動物形紐) 옥인장 - 동물 모양의 구멍뚫린 옥으로 만든 인장


이 도장의 아랫면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래는 또다른 도장입니다.




쌍두조형뉴(雙頭鳥形紐) 옥인장 - '머리가 둘인 새' 모양의 구멍 뚫린 옥으로 만든 인장  







http://blog.donga.com/milhoon/archives/384






이 도장들은 대략 6천년전 것들이고

4천 수백년전의 [산동 골각문] 보다도 천년 이상 빠른 것들입니다.


(은나라 갑골문 보다는 2천년 이상 빠릅니다.)


[산동 골각문]을 보셨으면 이 도장의 '부호'들이

글자(문자)인 것이 와닿을 것입니다.


이 뿐만이 아니라 이미 발견된 고대한국인들의 문자(동이문자) 많을 것인데

'중국의 자존심' 때문에 많이 숨겨져 있을 것이며

중국 학자들이 이러한 고대한국인들의 문자(동이문자)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어서

"한자는 동이족이 만들었다.'는 얘기가 중국학자들 사이에서도 많이 나오고 있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학자적 양심으로 진실을 말하는 것이죠.

즉 고대한국에서는 6천년 전에도 이미 여러가지 글자(문자)를 쓰고 있었고

그 글자(문자)를 창힐이라는 사람이 베껴갔고

(물론 여러 사람이 베꼈겠지만 창힐이라는 사람이 많이 베꼈다고 볼 수도 있고)


고대한국인들의 상징 문양 중 하나가 [새발자국 형상]이기 때문에


후대에 중국에서는 '창힐이 새 발자국을 보고 한자를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8회 농촌경관 사진공모전 수상작 중에서




  고랭지 배추밭의 녹색 파노라마

강원도 강릉 







 저 푸른 초원 위에

강원도 영양   



감사합니다.



[ 영원(永遠)에 합당(合當)한 삶을 살아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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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하는 한국혼(韓國魂)

 

[홍익인간]의 정신은 [사해동포주의]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민족, 다른나라 사람이라고 해서 공연히 배타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일 것입니다.

 

 

다이나믹 코리아, 게이트웨이 투 더 월드

[밝은 앞날][꿈은 이루어진다][꿈은 미래의 현실이다]






 

창락골각문자 -동이족 view 발행 | 기자 조선

뿌다오웡 2008.10.31 01:24

 

중국 산동에서 출토된 창락갑골문

2008년 10월 30일

번역 : 민승준

 

 

早于甲骨文文字出土 獸骨刻滿符號

http://news.qq.com/a/20081030/001281.htm

 


新华网山东频道10月30日电 中国考古专家最新考证表明,

4年前在中国东部山东省昌乐县集中出土的100多块兽甲骨上

所刻的600多个符号,结构和布局有一定的规律可循,

应为距今约4500年的中国早期文字。

 

신화 산동채널 10월 30일 보도,

중국고고학 전문가들이 그 동안 고증한 자료를 분명히 밝혔다.

4년전 중국 동부 산동성 창락현에서 출토된 100여개의 짐승뼈조각에

새겨진 600여 부호들이 일정한 규율에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지금으로 부터 약 4500년전의 중국초기 문자임이 확실하다.

 

 

参与这项研究的考古专家告诉记者,这些神秘兽甲骨上所刻的

“行列整齐”的图案符号比殷墟甲骨文更为原始,明显处于画(符号)

与字的过渡状态,二者应具有某种传承关系,是解释中国汉字起源的新依据。

 

이번 연구에 참여한 고고학 전문가들은 기자에게 알려주었다.

이 신비한 수갑골상의 새겨진 "행렬이 정치된" 부호는

 은허 갑골문에 비해더 원시적이다.

이는 획과 글자의 과도한 상태로 보아 분명하다.

은허갑골문과 이 부호가 계승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중국한자기원의 새로운 증거로 해석된다.

 


2004年,

昌乐县一民间收藏爱好者肖广德在昌乐县袁家庄古遗址上采集陶器标本时发现,

当地农民在施工挖掘时,丢弃了许多亚化石状远古兽骨,

经过清理,可见上面有许多刻划痕迹明显的图案符号。

 

2004년, 창락현의 민간수장품애호가 씨아오광더 씨는

창락현 원가장 고유적지에서 도기 표본을 발견하게 된다.

당시 그 곳 농민들이 굴착공사를 하는 과정중

화석에 버금가는 원고시대 수골을 버리고 있었다.

그는 이것들을 깨끗이 처리하였고, 이로 인해 수골 위에 새겨진 

도안과 부호들을 볼수 있게 되었다.  


肖广德先是拣拾,后是高价收购,

共收集刻有文字符号的甲骨100多片及2块玉残片,共有600多个图画文字。

这些文字有的刻在骨片面上,有的刻在骨腔内,有的刻在骨臼头上。

 

씨아오광더 씨는 우선 도안 및 부호가 있는 것들을 가려내 높은 값에 사들였다.

문자부호가 새겨진 것은 갑골 100여편과 부서진 옥편 2조각으로 도안문자는 모두 600여 자였다.

이러한 문자들은 뼈조각 편위, 뼈 내부, 어떤 것은 뼈어금니(?)에도 새겨져 있었다.

 


今年7月底,来自北京和山东的7位考古专家对这些符号进行了专门研讨。

山东大学美术考古研究所所长、山东省甲骨文学会副会长刘凤君

发现,这些符号都属于阴线刻,笔画婉转曲折,刻画纤细,

多为弧笔和曲笔,呈现出螃蟹状、草虫状和鸟状等形态。

 

2008년 7월말, 북경과 산동에서 온 7명의 고고학자들이

이 부호를 놓고 전문적으로 연구 검토하였다.

 산동대학 미술고고연구소 소장, 산동성 갑골문 학회 부회장인 류펑쥔 선생은

이 부호들은 모두 음선각에 속하며 필획이 구성지게 굽이쳐 흐르고

새겨진 획이 섬세하며 다량의 호선과 곡선이 있다는 점, 그리고

게, 풀벌레, 새 형상등의 형태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中国社会科学院历史研究所研究员、中国殷商学会会长王宇信认定,

这些兽骨上有刀刻的痕迹,主笔、辅笔明显,为人工刻画。

 

중국사회과학원역사연구소연구원, 중국은상학회회장 왕위씬 선생은

이 수골상에 새겨진 흔적은 주로 붓, 보조적인 붓으로 이루어진 것이 명확하므로 

 사람에 의해 인공적으로 새겨진 것이라고 확정지었다.


专家对兽甲骨上的符号进行归类,发现符号中类似太阳符号有5到6个,

三角符号有4到5个,小鸟符号有4到5个。

“重复的符号是人有意识的刻划行为。”王宇信说。

 

전문가들은 수골상의 부호를 분류했다.

태양부호를 닮은 대여섯개, 삼각부호 너댓개, 작은 새부호 너댓개를 발견했다.

 "중복되는 부호는 그 당시 사람들의 의식적인 새김행위로 보여진다."

왕위씬 선생은 말했다.


迄今为止,中国已发现的时代最早、

体系较为完整的文字为在河南安阳出土的商朝王室用于占卜的殷墟甲骨文,

这一发现使中国与以纸草、泥板、石板为文字载体的古埃及、

古巴比伦和古印度并列世界文明古国。

 

지금에 이르기 까지 중국은 이미 체계가 비교적 완벽하고 발견시기가 가장 이른,

하남성 안양에서 출토된, 상나라 왕조가 점칠 때 사용했던 은허갑골문이 있다.

이 갑골의 발견은 중국을 풀로 만든 종이, 점토판, 돌판을 문자 재료로 사용했던 

고대 이집트, 고대 바빌론, 고대 인도 등의 위대한 문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만들었다


最近几十年,中国各地先后发现了一系列较殷墟甲骨文更早、与汉字起源有关的出土资料,

包括原始社会晚期及有史社会早期出现在陶器刻画或彩绘符号,

还有少量的刻写在甲骨、玉器、石器等上面的符号。

 

최근 몇십년, 중국 각지에서는 앞다투어 은허 갑골문보다 이른 시기의

한자기원과 관련된 계열의 출토자료들이 발견되고 있다.

원시사회 말기 및 역사사회 초기에 출현한 도기 부호, 채색부호

및 갑골, 옥기, 석기 위에 새겨진 소량의 부호들이 그것들이다.

 



王宇信说:

“在甲骨文之前,现已发现的许多新石器时期晚期陶片上的刻划符号

虽然说是汉字萌芽,但都是单字且无规律。”

 

왕위씬은 말하길 "갑골문 이전의 것으로,

 지금 이미 발견된 많은 신석기말기 도기상에 새겨진 부호들은

비록 한자의 맹아(싹)이라고 할 수 있지만 모두 한글자로 규율성이 없다. "


考古人员发现,昌乐骨刻文字的布局和结构有规律可循,

有些偏旁多次出现,而此前这一地区附近也曾发现过早期文字,

说明这次出土的骨刻文字不是一种偶然现象。

 

고고학자가 발견한 창락골각문자의 포치 및 결구는 규율을 따르고 있다.

어떤 편방이 여러번 출현한다.

게다가 일찌기 이 지역 부근에서 초기 문자가 발견된 적이 있다.

이는 이번에 출토된 골각만자가 우연적 현상이 아님을 설명해준다.


山东省甲骨文学会会长李来付说,生活在山东以及附近土地上的古人类,

最早被称作东夷人。东夷文化从距今8300年前的后李文化起,

历经北辛文化、大汶口文化、龙山文化、岳石文化。

东夷人以鸟为图腾,巧合的是昌乐骨刻文有些正反映出鹰和小鸟的形象。

 

산동성 갑골문학회 회장 리라이푸 선생은 말한다.

산동 및 이 부근 토지에서 생활한 고대 인류는

제일 이른 시기는 東夷人이라고 불리여졌다.

동이문화는 지금으로 부터 8300년전의 호우리문화부터 시작해서

베이씬, 따원코우, 롱샨, 위에쓰 문화까지 이른다.

동이인들은 새를 토템으로 삼았다.

공교롭게도 창락골각문에서는 매와 작은 새의 형상을 반영하는 것들이 있다.


专家们根据这批骨头石化程度、颜色、黏合度等判断,

其年代正是距今四五千年的龙山文化时期,制作上和殷墟甲骨文类似。

 

전문가들은 이러한  뼈들이 돌이 된 정도, 색, 찰진정도 등을 파악하고,

그 연대는 바로 4, 5천년전의 용산문화시기로, 제작상은

은허갑골문과 유사하다고 판단했다.


李来付认为,与商周甲骨文比较,昌乐骨刻文更为原始,

明显处于画(符号)与字的过渡状态,二者应当具有某种传承关系。

 

리라이푸 선생은

상주 갑골문과 비교해 보았을 때 창락골각문은 더 오래되었다고 주장한다.

새겨진 획과 부호, 글자의 과도한 상태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분명 상주갑골문과 창락갑골문은 어떠한 계승관계를 갖추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专家们研究认为,这批骨刻文字主要出土在昌乐古遗址,

又被昌乐爱好者收藏,暂定名为“昌乐骨刻文”。

虽然目前尚不能破译,但其发现对研究中国古文字的演变过程,

复原当时的社会形态,提供了宝贵的佐证。(完)

 

전문가들은 연구한 결과,

골각문자들은 주로 창락유적지에서 출토되었고

 또 창락의 수집애호가에 의해 수장되었으므로 잠시 창락골각문으로 부르기로 했다.

비록 최근 해독할 수는 없는 상황이지만

이 창락골각문은  중국고문자의 변천과정연구에 있어서

 당시의 사회형태를 복원해 주고 귀중한 증거를 제공해주는

중대한 발견으로 여겨진다. 

 (끝)

 



                                                                  창락골각문자 -동이족

2008.10.31

blog.daum.net/ttugi77/15710756  禪으로 가는 線






창락현은 기자일행이 조선으로 건너기 위한 경유지였다.이곳에서 최근 신시문자로 추정되는 동이갑골문 발견 view 발행 | 새로운 자료 [2]

구산(九山) 2008.10.15 19:01



[실증]창락현(昌樂縣)은 기자 일행이 조선으로 건너기 위한 경유지였다.

이곳에서 최근 신시문자로 추정되는 동이갑골문 발견되었다.

 

  창락현(昌樂縣)은 동방의 성인이신 기자께서 장도로 들어가는길에 잠시 머물렀던 경유지다. 이곳은 장도와는 거리가 천여리나 떨어져 있지만 등주수도인 험독의 거센 물길을 피하기 위해서 이곳에서 배를 띄워야 멀리 우회하여 건널 수 있기 때문이다.그러니까  창락현이 장도를 출입하는 관문이라는 얘기다. 기자께서 조선으로 가는길에 따르는 종자들과 함께 머물렀던 기록은 <속 창락현지>를 통해서 밝혀졌다.

 

   뿐만 아니라<상서주소>라는 <서경>의 기록을 통해서도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이곳 역시 신시의 영향권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상식일 것이다. 문자가 만들어진 시대가 대체적으로 치우시대에 해당한다고 한다. 치우가 다스리던 청구국은 지명의 이름이 영구(營口)로 바뀌어 바로 인근에 있었다. 그리고 한웅께서 신지 혁덕에게 문자를 만들도록 지시하여 창힐이 만들었다고 하는가림토도 멀지 않은 곳 환대에서 발견되었다.

 

《상서주소 권4고증》

   해대지역(海岱地域)에 있던 청주는 요(堯)나라 때 바다를 건너 요동과 소통하던 곳이다. 호위가 말하기를 아직 의심이 없는건 아니지만 한무제가 열었든 낙랑.현도 2군이 모두 옛날 우이지역에 있던 청주 지역이다. 우이는 희중이 삶을 열었던 곳이고, 기자를 조선에 봉했으나 불응하고 밖으로 나간 곳이다. 단 요동에 있는 건 아니다.

 

海岱惟青州疏堯時青州當越海而有遼東也○胡渭曰疏亦未盡疑漢武所開樂浪元菟二郡皆古嵎夷之地在青州之域者嵎夷羲仲所宅朝鮮箕子所封不應在化外先儒但云有遼東非也 

 

 

 

 

 1.환대--가림토문자  2.왜팡시--동이 갑골문자  3.창락--창락골각문자가 발견된 곳  3번의 창락은 기자일행이 장도로 건너기 위해 머물렀던 곳이고 백이숙제가 주나라의 간섭을 피하여 은신하던 곳이다. 후에 위만이 교역을 위하여 출입하던곳도 이곳이다.

 

 신시의 가림토 문자는 창락현의 좌측에 있는 환태(桓台)에서 발견되었고, 동이갑골문은 창락현의 우측에 있는 웨팡에서 발견된 것이다. 그리고 상서의 주석에서 말하는 기자가 주무왕의 제의를 거절하고 밖으로 나갔다고 한 곳이 창락과 같은 지역에 있는 청주(靑州)다. 창락에서 내주만으로 내려가면 연태로 향하는 항로가 연결되지만 기자 당시에 이미 바다가 형성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상서》우공편에서 말하는 <흑수는 동으로 흘러 삼위산에 이르러 남쪽바다로 들어간다>고 하는 기록은 바다가 형성되기 전에도 이곳에서 배를 타면 흑수가 직접 사문도(장도)로 연결됨을 알수 있다. 청주이정기가 치청절도사로 부임하여 제나라를 건국한 지역이고, 백제와 신라,고려까지도 자사 등을 임명했던 기록들이 보인다. 동쪽으로 래주에는 마안산(馬鞍山)이 있는데 원래 래이(萊夷)의 발상지었다고 하고 이 마안(馬鞍)이라는 지명이 장산군도로 옮겨져 마한땅에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산동성에서 배달국시대의 갑골문 발견

 

               은나라보다 천년이상 앞선 동이의 갑골문자 발견
 
대종언어연구소
 
   산동성에서 은허(殷墟)갑골문보다 천여년 훨씬 이전의 갑골문인 동이갑골문(東夷甲骨文)이 발굴되었다고 발표되었다. 산동 용산문화 중만기 유물로 지금으로부터 약 4,000 ~ 4,500년(치우배달국시대) 전의 것이고, 중국의 전문가들이 자기네 것이 아닌 동이의 문자(東夷文字)라고 발표하였다.

   연대적으로 치우 배달국 용산문화 후기의 유물로 배달국(구리)말기의 동이갑골문(東夷甲骨文)이 배달국의 부족 중 하나였던 기원전 1600년경에 상나라(은殷)을 세운 상부족의 은허갑골문(殷墟甲骨文)의 모체라는 것이다.

▲  산동성 창락현에서 발견된 갑골문자는 중국의 은나라 때보다 천년 이상 앞선다. 결국 동이족인 배달국 치우천왕의 시기와 거의 맞아 들어간다.  

     神秘东夷甲骨文有了“名份”

 

http://www.sina.com.cn  2008年08月15日07:37  大众网-齐鲁晚报

 

  □记者高祥森

  本报昌乐8月14日讯本报7月13日刊登的《神秘东夷甲骨文惊现潍坊?》引起国内外强烈关注。最近中国文字研究权威专家、中国社会科学院历史所研究员王宇信教授等人聚集昌乐,经过研究,专家们初步认定这些神秘甲骨上所附的“行列整齐”的符号为中国早期文字,在出现时间上应早于河南安阳殷墟甲骨文,为区别起见,专家把这些神秘符号命名为昌乐骨刻文字。

 

산동성 창락현의 신비 갑골문의 수수께끼를 풀다 :  안양갑골문보다 훨씬 빠른 시기이다. (山東昌樂神秘甲骨文解謎:比安陽甲骨文更早)

   제로만보(齊魯晚報) 의 7월 13일 간행 지면에 등재된 <신비의 동이갑골문(東夷甲骨文)산동성 유방(濰坊)에서 발견되어 세상을 놀라게 했다>라는 보도가 국내외의 지대한  관심과 집중을 불러 일으켰다.
최근의 중국 문자연구의 권위있는 전문가인 ‘중국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의 연구원인 왕우신교수 등이 산동성 창락현에 모여 연구경과를 토의했고, 전문가들은 여러가지 신비한 갑골위에 ‘행렬정제’된 부호가 중국의 초기문자라고 처음으로 인정하였다.

   발굴시기는 하남성 안양시에서 발굴된 ‘은허갑골문(殷墟甲骨文)’보다 훨씬 이전의 것으로 그 기원이 판명되었으며, 전문가들은 이 ‘신비부호’의 이름을 ‘창락골각문자(昌樂骨刻文字)’라 명명하였다.

 

 自2004年以来,昌乐县收藏爱好者肖广德在昌乐县袁家庄及其附近的纪台等古文化遗址上发现并收集了一批当地老百姓翻地挖出的带字骨头。2007年7月,山大美术考古研究所所长、博士生导师刘凤君教授开始对带字骨头进行研究,他认为这批资料极为重要:如果真是从古文化遗址上收集来的,它应是山东龙山文化的遗物,是中国早期的文字;如果是后人刻的,应该有摹本,这摹本应是龙山文化的遗物,应该把它找出来。刘凤君在肖广德家里,又看到了一百多块刻字的骨头。刘凤君认为这批刻字的骨头是山东龙山文化中晚期的遗物,距今约4000—4500年,属东夷文字。

  7月30日,中国古文字研究权威专家、中国社会科学院历史研究所研究员、中国殷商文化学会会长王宇信教授等5人聚集昌乐,观看了大量的骨刻文字照片和实物,举行了一次座谈研讨会。与会专家一致赞同刘凤君的鉴定意见,认为这批文字是比安阳甲骨文更早的一种原始文字,认为它与安阳占卜的甲骨文不同,是一批记事骨刻,应称为“昌乐骨刻文字”。与会专家认为它是继安阳甲骨文后的又一重大发现。

  有关专家认为,昌乐骨刻文字的发现表明,中国早在4000多年前就已有了作为文明标志的文字,使传说中的龙山文化时期成为信史。另外,昌乐骨刻文字和殷墟甲骨文类似,都是刻在兽骨或龟甲上,这和以纸草、泥板、石板为文字载体的古埃及、古巴比伦、古印度文字体系明显不同;它的出现,使有中国文字记载的历史可能再次提前。


记者 高祥森

 

 

   7월 30일 중국고문자연구의 권위있는 전문가이며 중국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의 연구원이고 중국은상문화학회(中國殷商文化學會)의 회장인 왕우신(王宇信)교수 등 5인이 창락현에 모여 대량의 골각문자의 사진과 실물을 살펴보았고 일차 좌담연구토론회를 개최하였다.
 
회의에 참여한 전문가들은 류봉군(劉鳳君)의 감정 의견에 모두 찬성동의하였고, 이 문자들은 안양갑골문자와 비교해 훨씬 이전의 일종의 원시문자(原始文字)로 인정하였고, 안양점복의 갑골문과는 서로 같지 않음을 인식하고, 이를 기사골각(記事骨刻)으로 창락골각문자(昌樂骨刻文字)로 칭하기로 하였다.
 
회의에 참여한 전문가들은 그것은 안양갑골문 발견된 이후에 이어진 또 하나의 중대한 발견이라는 것에 인식을 같이 하였다.


7月30日,中國古文字研究權威專家、中國社會科學院曆史研究所研究員、中國殷商文化學會會長王宇信教授等5人聚集昌樂,觀看了大量的骨刻文字照片和實物,舉行了一次座談研討會。
與會專家一致贊同劉鳳君的鑒定意見,認爲這批文字是比安陽甲骨文更早的一種原始文字,認爲它與安陽占蔔的甲骨文不同,是一批記事骨刻,應稱爲“昌樂骨刻文字”。
與會專家認爲它是繼安陽甲骨文後的又一重大發現。

   관련 전문가들의 인정이 있음으로 해서 창락골각문자(昌樂骨刻文字)의 발견을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중국 초기인  4,000여년 전에 이미 문명을 나타내는 문자를 만들었다는 것이고, 전설적인 용산문화시기가 역사임을 믿게 하였다.  

   그밖에, 창락골각문자와 은허갑골문자가 유사한데 모두 이것은 짐승의 뼈나 거북등껍질(龜甲) 위에 새겨졌으며, 이것과 지초(紙草), 니판(泥板)-진흙판, 석판(石板)위에 새겨서 문자 체계를 이룬 고대 이집트, 고대 바빌로니아, 고대 인도의 문자체계와 다름이 명백히 드러났다. 이것의 발견은 중국 문자 사용의 역사를 다시 한번 앞당길 수 있게 했다.  


有關專家認爲,昌樂骨刻文字的發現表明,中國早在4000多年前就已有了作爲文明標志的文字,使傳說中的龍山文化時期成爲信史。
另外,昌樂骨刻文字和殷墟甲骨文類似,都是刻在獸骨或龜甲上,這和以紙草、泥板、石板爲文字載體的古埃及、古巴比倫、古印度文字體系明顯不同;它的出現,使有中國文字記載的曆史可能再次提前。(高祥森)
[기고 : 대종언어연구소]

 

 

 

2008.10.15


blog.daum.net/gusan0579/8006623   品 石 齋






동이족의 창락골각문자 昌樂骨刻文 | 상식 코-너
greekim|조회 63|추천 0|2010.12.11. 12:31

 

 

昌乐骨刻文

 

研究早期文字的奠基之作<昌乐骨刻文>面世 
초기문자
연구 기초의 걸작창락골각문》출판

출처    신화 산동 인터넷 뉴스채널     2008년 12 9    보도

 

 

류펑쮠 교수의 창락골각문

 

 昌乐骨刻文的发现者和鉴定者、

山东大学美术考古研究所所长刘凤君教授编著的《昌乐骨刻文》,

经过一年多的艰苦努力,2008年12月由山东画报出版社正式精装出版。 

 

창락골각문자의 발견자이자 검증인인

 산동대학미술고고학연구소 소장 류펑쥔 교수가 <昌樂骨刻文> 출판했다.

 1 여년이 넘는 노력을 기울여 산동화보출판사가 2008 12 부터 정식으로 출판하기 시작했다.

 

산동대 미술고고학 류펑쮠 교수

  
    全书共分为三部分:第一部分是刘凤君撰写的长文《昌乐骨刻文发现与研究》;

第二部分是226幅昌乐骨刻文精美图版;

第三部分附录《大众日报》、香港《文汇报》和《光明日报》

发表的介绍昌乐骨刻文的文章。

 

책은 부분으로 나뉘어 진다.

첫째는 류펑쮠선생의 <창락골각문자발견과연구>라는 문장이고,

둘째는 226폭의 창락골각문자 엄선된 도판이며,

셋째는 부록으로 따쭝르빠오와 홍콩의 원훼이빠오 꽝밍르빠오 신문사에서 발표된

창락골각문에 대한 문장을 수록하고 있다.

 

  刘凤君撰写的《昌乐骨刻文发现与研究》,分别论述了三个问题:

第一是昌乐骨刻文发现与鉴定的纪实回顾和关于年代及其文字定性等问题的分析说明。

昌乐骨刻文是山东龙山文化时期的遗物,距今约4000-4500年,是一种东夷的记事文字。

刘凤君教授提出的7个推断年代的根据已得到许多专家的赞同;

 

第二个问题是关于昌乐骨刻文艺术风格的研究,分别对骨刻文阴线刻技法特点与刻划工具,

以及字体结构造型、书写顺序和布局等问题进行了深入分析探讨;

 

第三个问题分为前后两部分,前部分是关于昌乐骨刻文类型的区分及其前后变化的研究。

后一部分根据“书画同源”的理论,提出了三个造字规律,即物象的审美再创作性、

指事的组合象征性、龙凤文化与凤字多样性。

 

刘教授在论述三个造字规律的同时,结合实物作了详尽说明,

并对“龙”、“凤”、“人”、“鸟”以及特殊的组合字群等作了极为精湛的分析和解读,

为研究中国早期文字的产生与发展,解读昌乐骨刻文提出了很深刻的指导性理论。

 

류펑쮠선생이 <창락골각문자발견과연구>라는 문장은 가지 문제로 나누어서 논술하고 있다.

첫번째는 창락골각문자발견과 검증의 문제에 대한 분석과 설명이다.

창락골각문자는 지금으로 부터 4000~4500년전 산동 용산문화대의 유물로서,

東夷동이의 記事기사문자이다.

교수는 많은 전문가들의 동의를 얻은 7 가지 연대추정의 근거를 제시했다.

 

 두번째는 창락골각문자에 관한 예술풍격의 문제이다.

골각문자의 음각새김기술의 특색과 새긴 공구를 나누어 보고,

글자의 결구조형에 관해 분석했으며 순서와 포치등의 문제를 깊이 있게 분석, 검토했다.

 

 세번째는 전후 두부분으로 나뉘어지는데

앞부분은 창락골각문자유형의 구분및 전후 변화에 대한 연구이다.

뒷부분은 서화동원 이론에 근거하여 가지 造字조자규율을 분석하여 제시했다.

물상의 심미적 재창조성, 指事지사의 조합상징성, 용봉문화와 鳳봉자의 다양성이다.

 

교수는 가지 造字조자규율을 논술함과 동시에 상세하게 설명한 실물을 결합했다.

 “”, “”, “”, “ 특수한 조합 字郡글자군등에 대하여 아주 세밀하게 분석하고 해독했다.

창락골각문자의 해독은 중국 초기문자의 탄생과 발전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심도있게 우리를 이끌어 것으로 확신한다.  


    第二部分将73件昌乐骨刻文分为226幅图版加以介绍。根据字的多少和内容不同,

将每件骨刻文分为总体、局部和特写三种表现形式,前后紧密联系,贯通一体。

为读者提供了一部详尽、真实而又易读的骨刻文资料,

也为专家学者和爱好者们解读昌乐骨刻文建造了一座科学坚实的平台。

 

2부분에서는 73개의 창락골각문자를 226폭의 도판으로 소개하고 있다.

골각문자가 글자의 수량과 내용이 다름에 근거해 각각의 골각문자를

총체적, 국부적, 특사적인 3가지 표현형식으로 나누고

앞뒤의 긴밀한 연관성 일체를 관통했다. 대다수의 골각문자를 국부적, 특사적으로 배치했다.

 이는 일반독자들이 상세하고 세부적으로 골각문자 자료를 읽을 있게 하기 위함인 동시에,

전문가들이 골각문자를 해독하여 과학적이고 견실한 테라스를 세우게 하기 위해서이다. 

 

   《昌乐骨刻文》一书,是一部融文字学、考古学和艺术学于一体的力作,

是一部昌乐骨刻文学的奠基之作,也是第一部研究中国文字产生和早期文字的开启之作。

 

 <昌乐骨刻文>라는 저작은 문자학, 고고학, 예술학이 일체된 역작이며,

창락골각문 학의 기초를 다진 걸작이다. 중국문자의 탄생과 초기문자를 열어젖히는 대작이다.

 

 

 

http://scitech.people.com.cn/GB/8237445.html
 

 

   山东“昌乐骨刻文”发现“鸟栖图”记事文字 

산동 창락골각문자에서 새둥지그림의 기사문자가 발견되었다.
2009년 1월 20일      
출처:新华网   기자 劉寶林
 
一只小鸟悠闲地栖息在桑枝上,享受着落日余晖,这是山东昌乐出土的一块古代兽骨上的图景。

近日经考古专家研究,这是早期人类部落东夷族大事记的一种文字符号。

    这块长 17厘米,直径 2.7厘米至 5.5厘米的

远古动物残胫骨是在昌乐已发现的100余块骨刻文中的一块 。

 

어린새가 뽕나무 가지위 둥지에서 한가로이 떨어지는 해의 석양 빛을 즐기고 있다.

이것은 산동성 창락에서 출토된 고대 짐승뼈위의 그림이다. 

최근 고고학 전문가들의 연구를 거쳐 이것은 초기 인류 부락인 동이족의 기사문자 부호라 판명되었다.

이것은 길이 17센티미터,  직경 2.7~5.5센티미터로

이 정강이가 깨진 원고시대 동물 뼈는  창락에서 발견되어진 100여 골각문 중의 하나이다.

 

2004年,山东昌乐县民间收藏爱好者肖广德在袁家庄古遗址上采集陶器标本时,

偶然发现许多刻有图案符号的亚化石状远古兽骨,经山东大学美术考古研究所所长刘凤君教授鉴定,这批带“字”骨头是山东龙山文化中晚期的遗物,距今4500年左右,是东夷文化时期的记事文字。

 

2004년, 산동성 창락현 민간 수장가인 샤오꽝더가 원가장 고유적지에서 도기표본을 수집할 때

우연히 원고시대 도안부호가 있는 수준이 조금 못 미치는 많은 뼈조각들을 발견했다.

산동대학 미술고고연구소 소장 류펑쥔교수의 검정을 거쳐

이 글자를 가진 뼈조각은 지금으로 부터 약 4500년 전의 산동성 용산문화 말기의 유물로

동이족 문화시기의 기사문자로 드러났다.

 

2008年,刘凤君邀请北京及山东的考古专家就这些骨刻符号进行了研讨,

认定这些兽骨上所刻的“行列整齐”的图案符号比殷墟甲骨文更为原始,

明显处于画(符号)与字的过渡状态,定名为“昌乐骨刻文”。

 

2008년 류펑쮠 교수는 북경 및 산동의 고고학 전문가들을 요청해 이 골각부호에 대해 연구하고 검토했다.

이 짐승뼈위에 새겨진 행렬이 정제된 도안부호는 은허 갑골문에 비해 더 원시의 것이고,

획(부호)와 글자의 과도한 상태가 드러나 "창락골각문"으로 부르기로 했다.

 

    刘凤君认为,这不是一幅简单的绘画,而是有特殊意义的象征性组合字群。

东夷族是崇拜凤鸟的民族,“昌乐骨刻文”中有关凤和鸟的文字很多,这幅字群中也有一种鸟的形象。纵观整体布局,记录的应是东夷族中一个部落在某特定场合内,进行的一次值得记载的活动,

所以不应该称之为一幅画,而是记事文字。同时,这个文字不像今天这样规范,

只有进行了综合研究,才能揭示当时记载的事实。

 

류펑쮠 선생은 이것은 단순한 회화가 아니라 특수한 상징적 의미가 담긴 조합 글자군이라고 생각했다.

동이족은 봉황새를 숭배한 민족이다.

 "창락골각문" 중에는 봉황과 새의 문자와 관련된 것이 특히 많다.

이 글자군 중에도 새의 형상이 있다.

정체적 포치를 보면,

동이족중 한 부락이 어떤 특정한 장소내에서 진행했더 기재할 만한 활동이다.

그래서 그림이라고 불러선 안되고 기사문자라 해야 한다.

동시에 이 문자는 지금의 이렇한 규범과 흡사하지 않다. 그러므로

종합적 연구를 진행해야지만, 비로서 당시에 기재된 사실을 밝힐 수 있다고 보여진다.

 

 

 

 


 山東昌樂神秘甲骨文解謎 : 比安陽甲骨文更早
산동성 창락현의 신비한 갑골문의 수수께끼를 풀다 :  안양갑골문보다 훨씬 빠른 시기이다.

출처 : 齊魯晩報 치루완빠오

 

齊魯晚報7月13日刊登的《神秘東夷甲骨文驚現濰坊?》引起國內外強烈關注。
最近中國文字研究權威專家、中國社會科學院曆史所研究員

王宇信教授等人聚集昌樂,經過研究,專家們初步認定這些神秘甲骨上

所附的“行列整齊”的符號爲中國早期文字,
在出現時間上應早於河南安陽殷墟甲骨文,爲區別起見,

專家把這些神秘符號命名爲昌樂骨刻文字。


제로만보(齊魯晚報) 의 2008년 7월 13일 간행 지면에 등재된

<신비의 동이갑골문(東夷甲骨文)이 산동성 유방(濰坊)에서 발견되어 세상을 놀라게 했다>

라는 보도가 국내외의 지대한  관심과 집중을 불러 일으켰다.
최근의 중국 문자연구의 권위있는 전문가인

 ‘중국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의 연구원인 王宇信교수 등이

 산동성 창락현에 모여 연구경과를 토의했고, 전문가들은 여러가지 신비한 갑골위에

‘행렬정제’된 부호가 중국의 초기문자라고 처음으로 인정하였다.
발굴시기는 하남성 안양시에서 발굴된 ‘은허갑골문(殷墟甲骨文)’보다

 훨씬 이전의 것으로 그 기원이 판명되었으며,

전문가들은 이 ‘신비부호’의 이름을 ‘창락골각문자(昌樂骨刻文字)’라 명명하였다.

自2004年以來,昌樂縣收藏愛好者肖廣德

在昌樂縣袁家莊及其附近的紀台等古文化遺址上發現並收集了

一批當地老百姓翻地挖出的帶字骨頭。

 

2004년부터 창락현의 수장애호가인 肖廣德이

창락현에 있는 원가장(袁家莊) 및 그 부근의 기태(紀台)등

고문화 유적지에서 발견하여 수집하였고,

거기에서 한 농부가 땅을 파다 밖으로 드러난 대자골두(帶字骨頭)를 수집하였다.


2007年7月,山大美術考古研究所所長、博士生導師劉鳳君教授

開始對帶字骨頭進行研究,他認爲這批資料極爲重要:

如果真是從古文化遺址上收集來的,它應是山東龍山文化的遺物,是中國早期的文字;

如果是後人刻的,應該有摹本,這摹本應是龍山文化的遺物,應該把它找出來.


2007년 7월 산동대학교 미술고고연구소 소장이며 박사생 지도교수이신

劉鳳君선생이 대자골두에 대한 연구를 처음으로 시작하였고,

그는 이런 자료들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만약 정말로 고문화유적지에 속한 곳에서 수집되어 나온 거라면

그것은 응당 용산문화의 유물로 중국의 조기 문자이다 ;

만약 그것이 후대에 조각된 것이면 마땅히 모본이 있어야 하고,

 그 모본들도 당연히 용산문화적 유물이므로 반드시 그것을 찾아 내야 한다.


劉鳳君在肖廣德家裏,又看到了一百多塊刻字的骨頭。

劉鳳君認爲這批刻字的骨頭是山東龍山文化中晚期的遺物,

距今約4000—4500年,屬東夷文字。


劉鳳君은 肖廣德 집에 있는 일백 여개의 각자가 새겨진 골두(骨頭)를 보게 되었다.

유봉군은 각자의 골두들을 지금으로부터  4,000~4,500여년전의 동이문자(東夷文字)에 속하는

산동용산문화 중말기의 유물임을 알게 되었다.


7月30日,中國古文字研究權威專家、中國社會科學院曆史研究所研究員、

中國殷商文化學會會長王宇信教授等5人聚集昌樂,

觀看了大量的骨刻文字照片和實物,舉行了一次座談研討會。


7월 30일, 중국고문자연구의 권위있는 전문가

 중국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의 연구원

 중국은상문화학회(中國殷商文化學會)의 회장인

 왕우신(王宇信)교수 등 5인이 창락현에 모여

 대량의 골각문자의 사진과 실물을 살펴보았고

 일차 좌담연구토론회를 개최하였다.

 

與會專家一致贊同劉鳳君的鑒定意見,認爲這批文字是比安陽甲骨文更早的一種原始文字,

認爲它與安陽占卜的甲骨文不同,是一批記事骨刻,應稱爲“昌樂骨刻文字”。

與會專家認爲它是繼安陽甲骨文後的又一重大發現。


회의에 참여한 전문가들은 劉鳳君의 감정 의견에 모두 찬성동의하였고, 이 문자들은

 안양갑골문자와 비교해 훨씬 이전의 일종의 원시문자(原始文字)로인정하였으며,

안양 점복의 갑골문과는 서로 같지 않음을 인식하고,

이를 기사골각(記事骨刻)으로 창락골각문자(昌樂骨刻文字)로 칭하기로 하였다.
회의에 참여한 전문가들은 그것은 안양갑골문 발견된 이후에 이어진

 또 하나의 중대한 발견이라는 것에 인식을 같이 하였다.

 

有關專家認爲,昌樂骨刻文字的發現表明,

中國早在4000多年前就已有了作爲文明標志的文字,

使傳說中的龍山文化時期成爲信史。


관련 전문가들의 인정이 있음으로 해서 창락골각문자(昌樂骨刻文字)의 발견을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중국 초기인  4,000여년 전에 이미 문명을 나타내는

문자를 만들었다는 것이고, 전설적인 용산문화시기가 역사임을 믿게 하였다.  


另外,昌樂骨刻文字和殷墟甲骨文類似,都是刻在獸骨或龜甲上,

這和以紙草、泥板、石板爲文字載體的古埃及、古巴比倫、古印度文字體系

明顯不同;它的出現,使有中國文字記載的曆史可能再次提前。

(高祥森)

그밖에, 창락골각문자와 은허갑골문자가 유사한데 모두

 이것은 짐승의 뼈나 거북등껍질(龜甲) 위에 새겨졌으며,

이것과 지초(紙草), 점토판(泥板), 석판(石板)위에 새겨서 문자 체계를 이룬

고대 이집트, 고대 바빌로니아, 고대 인도의 문자체계와 다름이 명백히 드러났다.

이것의 발견은 중국 문자 사용의 역사를 다시 한번 앞당길 수 있게 했다.  

 

 

 

 

早于甲骨文文字出土 獸骨刻滿符號

중국 산동에서 출토된 창락갑골문

http://news.qq.com/a/20081030/001281.htm

 


新华网山东频道10月30日电 中国考古专家最新考证表明,

4年前在中国东部山东省昌乐县集中出土的100多块兽甲骨上

所刻的600多个符号,结构和布局有一定的规律可循,

应为距今约4500年的中国早期文字。

 

신화 산동채널 10월 30일 보도,

중국고고학 전문가들이 그 동안 고증한 자료를 분명히 밝혔다.

4년전 중국 동부 산동성 창락현에서 출토된 100여개의 짐승뼈조각에

새겨진 600여 부호들이 일정한 규율에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지금으로 부터 약 4500년전의 중국초기 문자임이 확실하다.

 

 

参与这项研究的考古专家告诉记者,这些神秘兽甲骨上所刻的

“行列整齐”的图案符号比殷墟甲骨文更为原始,明显处于画(符号)

与字的过渡状态,二者应具有某种传承关系,是解释中国汉字起源的新依据。

 

이번 연구에 참여한 고고학 전문가들은 기자에게 알려주었다.

이 신비한 수갑골상의 새겨진 "행렬이 정치된" 부호는 은허 갑골문에 비해더 원시적이다.

이는 획과 글자의 과도한 상태로 보아 분명하다.

은허갑골문과 이 부호가 계승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중국한자기원의 새로운 증거로 해석된다.


2004年,昌乐县一民间收藏爱好者肖广德在昌乐县袁家庄古遗址上采集陶器标本时发现,

当地农民在施工挖掘时,丢弃了许多亚化石状远古兽骨,

经过清理,可见上面有许多刻划痕迹明显的图案符号。

 

2004년, 창락현의 민간수장품애호가 샤오꽝더 씨는

창락현 원가장 고유적지에서 도기 표본을 발견하게 된다.

당시 그 곳 농민들이 굴착공사를 하는 과정중

화석에 버금가는 원고시대 수골을 버리고 있었다.

그는 이것들을 깨끗이 처리하였고, 이로 인해 수골 위에 새겨진 

도안과 부호들을 볼수 있게 되었다.  


肖广德先是拣拾,后是高价收购,

共收集刻有文字符号的甲骨100多片及2块玉残片,共有600多个图画文字。

这些文字有的刻在骨片面上,有的刻在骨腔内,有的刻在骨臼头上。

 

씨아오광더 씨는 우선 도안 및 부호가 있는 것들을 가려내 높은 값에 사들였다.

문자부호가 새겨진 것은 갑골 100여편과 부서진 옥편 2조각으로 도안문자는 모두 600여 자였다.

이러한 문자들은 뼈조각 편위, 뼈 내부, 어떤 것은 뼈어금니(?)에도 새겨져 있었다.


今年7月底,来自北京和山东的7位考古专家对这些符号进行了专门研讨。

山东大学美术考古研究所所长、山东省甲骨文学会副会长刘凤君

发现,这些符号都属于阴线刻,笔画婉转曲折,刻画纤细,

多为弧笔和曲笔,呈现出螃蟹状、草虫状和鸟状等形态。

 

2008년 7월말, 북경과 산동에서 온 7명의 고고학자들이

이 부호를 놓고 전문적을로 연구 검토하였다.

 산동대학 미술고고연구소 소장, 산동성 갑골문 학회 부회장인 류펑쥔선생은

이 부호들은 모두 음선각에 속하며 필획이 구성지게 굽이쳐 흐르고

새겨진 획이 섬세하며 다량의 호선과 곡선이 있다는 점, 그리고

게, 풀벌레, 새 형상등의 형태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中国社会科学院历史研究所研究员、中国殷商学会会长王宇信认定,

这些兽骨上有刀刻的痕迹,主笔、辅笔明显,为人工刻画。

 

중국사회과학원역사연구소연구원, 중국은상학회회장 왕위씬선생은

이 수골상에 새겨진 흔적은 주로 붓, 보조적인 붓으로 이루어진 것이 명확하므로  

사람에 의해 인공적으로 새겨진 것이라고 확정지었다.


专家对兽甲骨上的符号进行归类,发现符号中类似太阳符号有5到6个,

三角符号有4到5个,小鸟符号有4到5个。

“重复的符号是人有意识的刻划行为。”王宇信说。

 

전문가들은 수골상의 부호를 분류했다.

태양부호를 닮은 대여섯개, 삼각부호 너댓개, 작은 새부호 너댓개를 발견했다.

 "중복되는 부호는 그 당시 사람들의 의식적인 새김행위로 보여진다."

왕위씬 선생은 말했다.


迄今为止,中国已发现的时代最早、

体系较为完整的文字为在河南安阳出土的商朝王室用于占卜的殷墟甲骨文,

这一发现使中国与以纸草、泥板、石板为文字载体的古埃及、

古巴比伦和古印度并列世界文明古国。

 

지금에 이르기 까지 중국은 이미 체계가 비교적 완벽하고 발견시기가 가장 이른,

하남성 안양에서 출토된, 상나라 왕조가 점칠 때 사용했던 은허갑골문이 있다.

이 갑골의 발견은 중국을 풀로 만든 종이, 점토판, 돌판을 문자 재료로 사용했던 

고대 이집트, 고대 바빌론, 고대 인도 등의 위대한 문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만들었다


最近几十年,中国各地先后发现了一系列较殷墟甲骨文更早、与汉字起源有关的出土资料,

包括原始社会晚期及有史社会早期出现在陶器刻画或彩绘符号,

还有少量的刻写在甲骨、玉器、石器等上面的符号。

 

최근 몇십년, 중국 각지에서는 앞다투어 은허 갑골문보다 이른 시기의

한자기원과 관련된 계열의 출토자료들이 발견되고 있다.

원시사회 말기 및 역사사회 초기에 출현한 도기 부호, 채색부호

및 갑골, 옥기, 석기 위에 새겨진 소량의 부호들이 그것들이다.

王宇信说:

“在甲骨文之前,现已发现的许多新石器时期晚期陶片上的刻划符号

虽然说是汉字萌芽,但都是单字且无规律。”

 

왕위씬은 말하길 : 갑골문 이전의 것으로,

 지금 이미 발견된 많은 신석기말기 도기상에 새겨진 부호들은

비록 한자의 맹아(싹)이라고 할 수 있지만 모두 한글자로 규율성이 없다.


考古人员发现,昌乐骨刻文字的布局和结构有规律可循,

有些偏旁多次出现,而此前这一地区附近也曾发现过早期文字,

说明这次出土的骨刻文字不是一种偶然现象。

 

고고학자가 발견한 창락골각문자의 포치 및 결구는 규율을 따르고 있다.

어떤 편방이 여러번 출현한다. 게다가 일찌기 이 지역 부근에서 초기 문자가 발견된 적이 있다.

이는 이번에 출토된 골각만자가 우연적 현상이 아님을 설명해준다.


山东省甲骨文学会会长李来付说,生活在山东以及附近土地上的古人类,

最早被称作东夷人。东夷文化从距今8300年前的后李文化起,

历经北辛文化、大汶口文化、龙山文化、岳石文化。

东夷人以鸟为图腾,巧合的是昌乐骨刻文有些正反映出鹰和小鸟的形象。

 

산동성 갑골문학회 회장 리라이푸선생은 말한다.

산동 및 이 부근 토지에서 생활한 고대 인류는

제일 이른 시기는 東夷人이라고 불리여졌다.

동이문화는 지금으로 부터 8300년전의 호우리문화부터 시작해서

베이씬, 따원코우, 롱샨, 위에쓰 문화까지 이른다.

동이인들은 새를 토템으로 삼았다.

공교롭게도 창락골각문에서는 매와 작은 새의 형상을 반영하는 것들이 있다.


专家们根据这批骨头石化程度、颜色、黏合度等判断,

其年代正是距今四五千年的龙山文化时期,制作上和殷墟甲骨文类似。

 

전문가들은 이러한  뼈들이 돌이 된 정도, 색, 찰진정도 등을 파악하고,

그 연대는 바로 4, 5천년전의 용산문화시기로, 제작상은 은허갑골문과 유사하다고 판단했다.


李来付认为,与商周甲骨文比较,昌乐骨刻文更为原始,

明显处于画(符号)与字的过渡状态,二者应当具有某种传承关系。

 

'리라이푸' 선생은

상주 갑골문과 비교해 보았을 때 창락골각문은 더 오래되었다고 주장한다.

새겨진 획과 부호, 글자의 과도한 상태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분명 상주갑골문과 창락갑골문은 어떠한 계승관계를 갖추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专家们研究认为,这批骨刻文字主要出土在昌乐古遗址,

又被昌乐爱好者收藏,暂定名为“昌乐骨刻文”。

虽然目前尚不能破译,但其发现对研究中国古文字的演变过程,

复原当时的社会形态,提供了宝贵的佐证。(完)

 

전문가들은 연구한 결과,

골각문자들은 주로 창락유적지에서 출토되었고

또 창락의 수집애호가에 의해 수장되었으므로 잠시 창락골각문으로 부르기로 했다.

비록 최근 해독할 수는 없는 상황이지만

이 창락골각문은  중국고문자의 변천과정연구에 있어서

 당시의 사회형태를 복원해 주고 귀중한 증거를 제공해주는

중대한 발견으로 여겨진다.  

 



                                                 동이족의 창락골각문자 昌樂骨刻文

2010.12.11

cafe.daum.net/greekim/Hiut/168  하나님의 다큐멘터리






골각문자는 무엇인가| 신화전설방

T조세원 | 조회 29 |추천 0 |
2011.08.11. 10:43

 

류펑쥔(劉鳳君)의 골각문자설

 

중국의 갑골문자가 아닌 한민족(동이족)의 골각문자 - 갑골문자보다 1000년 앞서

                        중국 하남 신정구차산(河南新郑具茨山)에서 발견된 4000년전 암벽화

                            출처 : http://eurasiad.blog.me/50036534091

                                     http://blog.naver.com/bhjang3?Redirect=Log&logNo=140056948884

 

  중국 최초의 문자로 알려진 갑골(甲骨)문자보다 1000년이나 오래된 것으로 보이는 새로운 문자가 발견됐다.

  갑골문자는 중국 고대 상(商·BC 1600~1046년)나라의 수도인 은허(殷墟·허난성 안양현)에서 1899년 처음 발견된 이후 중국 최초의 문자로 인정받아 왔다. 산둥(山東)대 고고미술학연구소 류펑쥔(劉鳳君) 소장이 최근 중국 고고학 관계자들을 초청한 세미나에서 갑골문자 이전에 다른 형태의 골각(骨刻)문자가 산둥성 창러(昌樂)현 지역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밝혔다고 홍콩 문회보(文匯報)가 보도했다.

  전문가는 쥐츠산 암벽화는 우리나라 중부지역 암각, 암벽화의 공백을 메움으로써 중원지역 고문화의 내용을 풍부히 하고 이 지역 문화를 포함한 상고문화의 연구에 새로운 실물의 근거를 제공하는 중요한 학술가치가 있다고 인정하고 있다.

 

 

 

                                                                             여성의 생식 숭배의식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뼈에 새겨진 모양

 

   류 소장은 중국 고고미술학의 창시자로 학계의 명망이 깊은 학자다. 이 자리에 참석한 사회과학원 왕위신(王宇信) 교수 등 은상문화협회(殷商文化協會) 관계자 5명은 모두 류 소장의 학설에 동의했다고 이 신문은 전했다. 세미나에서 이 문자는 '창러골각문'으로 이름 붙여졌다.

  류 소장은 산둥성 민간 소장가인 샤오광더(肖廣德)가 2004년부터 최근까지 창러현 지역 주변에서 수집한 수백 개의 골각문자를 연구한 결과 이 같은 결론을 내렸다고 설명했다. 류 소장에 따르면 이들 도안은 소의 어깨뼈와 사슴·코끼리 뼈에 새겨져 있었다.

  도안의 형태는 다양했다. 뼈 한 곳에 100여 개의 서로 다른 도안이 새겨진 것도 있고, 1~2개의 도안만 새겨진 뼈도 있다. 여러 개의 도안은 세로로 정렬돼 있어 특정 사안을 기록한 문자로 봐야 한다는 게 류 소장의 주장이다. 단순한 그림일 경우 이처럼 정렬된 형태로 나타날 수 없다는 것이다. 점복(占卜) 기록인 갑골문자와 달리 골각문자에선 점복의 흔적이 나타나지 않았다.

  류 소장은 “뼈의 색깔과 석화(石化) 상태를 판단해 볼 때 문자를 새긴 연대는 4000~4500년 전으로 보이며, 이는 중국 산둥성의 룽산(龍山) 신석기 시대에 해당된다”고 말했다. 함께 출토된 뼈로 만든 칼과 송곳은 전형적인 룽산 중·후기 시대의 도구들이었다.

  중국 고고학자들은 당시 산둥 지역은 한민족을 포함한 동이(東夷)족들이 집단으로 거주했기 때문에 이 골각문자는 동이문자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류 소장은 “문자의 모양도 고대 상형문자인 동이문자 계열에 속한다”고 지적했다. 류 소장은 이어 “안양(安陽)을 중심으로 한 은허 지역에서 발견됐던 갑골문자도 동이족의 골각문자가 발전한 형태일 가능성이 크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20세기 중국 고고학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이 갑골문자 발견이었다면 이번 골각문자 발견은 중국 역사를 지금보다 1000년 이전으로 돌리는 21세기 중국 고고학의 역사적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흑룡강신문=하얼빈) /신화사------------------

 

 

 

 

 

 

                                  주(註) : 남해양아리석각의 관련 이해

 

                    남해양아리석각                                             가을 성좌도                           천상열차분야지도

① 청나라 사람 하추도(河秋濤)는 1860년 남해양아리석각을 서불기례일출(徐市起禮日出 : 서불이 일어

    나 뜨는 해에 예를 표하다)이라고 했다.

② 최근 중국인 류펑쥔(劉鳳君)은 2010년 7월 남해양아리석각이 아직 해독되지 않음을 미끼로 이를 골

    각문자로 봐야한다고 했다. 류봉군 저 ‘창락골각문(劉鳳君 著 昌樂骨刻文)’에 남해양아리석각을 골각

    문으로 수록함

③ 경남 남해 출신의 조세원(趙世元)은 2010년 8월 20일 이후 지상(紙上)에 남해양아리

    각 우리나라 가을하늘의 성좌도임을 '천문도, 천상열차분야지도'에 명확히 밝혔다.

  

참조 

       http://www.nhtime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3656)

       http://www.morningnews.co.kr/article.php?aid=129101644030129028

       http://www.news4000.com/news/articleView.html?idxno=7540

 

 



                                                           골각문자는 무엇인가

2011.08.11

cafe.daum.net/7jeju/ME76/36  제주큰동산 






  동명(2012-03-20 12:30:33, Hit : 3373, Vote : 49
 고조선(古朝鮮) 문자(文字)에서 훈민정음(訓民正音)까지 (Ⅰ)


<고조선(古朝鮮) 문자(文字)에서 훈민정음(訓民正音)까지 (Ⅰ)>

고대 우리 민족의 강역(疆域)과 문화(文化)에 대해 아직까지 접근조차 하지 못한 상황에서 세삼스럽게 그들의 문자(文字)는 어떠 하였는지 동명(東明)은 몹시 궁금함을 느꼈다. 고대 우리 민족에게 문자(文字)가 존재 하였을까? 아마도 도상문자(圖象文字)의 형태로 존재 하였을 것이다. 심양(瀋陽) 신락문화(新樂文化) 유적지 하층(下層)에서 발견된 토기상의 갈 지(之)자 무늬는 내몽고 지역의 홍산문화(紅山文化), 부하문화(富河文化), 신개류문화(新開流文化) 및 대련(大連)의 토성자(土城子), 곽가장(郭家庄) 유적에서도 나타난다고 한다. 홍산문화(紅山文化)보다 비교적 늦은 시기로는 소하연문화(小河沿文化)가 있다. 소하연문화(小河沿文化)는 앙소문화(仰韶文化) 및 대문구문화(大汶口文化)와 상당히 밀접하다. 앙소문화(仰韶文化)에서는 사물의 모양으로 본 뜰 수 없는 추상적인 개념을 기호로써 표현한 지사부호(指事符號)가 많이 발견되었다. 또한 대문구문화(大汶口文化)에서는 약간의 상형부호(象形符號)가 발견되었는데, 소하연문화(小河沿文化)는 오히려 지사(指事), 상형(象形) 두 성분을 갖춘 부호(符號)가 발견되었다.

고대사회에서는 사람과 사람, 씨족과 씨족 간 언어의 발달과 더불어 복잡해져가는 인간관계와 증대해가는 사회활동에서 말보다 어떤 기록으로서 약속이 필요 하였을 것이다. 고대인들은 이와 같은 충족을 얻기 위해 그림을 그려서 표현하거나, 어떤 형태의 부호(符號)로 의사를 전달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부호(符號)는 보통 갑골(甲骨)에 표시 하였다. 우리가 흔히 일컫는 갑골(甲骨)을 복골(卜骨)이라고도 한다. 지금까지 가장 오래된 갑골(甲骨)이 출토된 유적은 발해(渤海) 연안 북부지구 서요하(西遼河) 상류의 부하구문(富河溝門) 유적이다. 이후 하가점하층문화(夏家店下層文化)에서 갑골(甲骨)이 많이 발견 되었으며, 1980년대 경남 김해시 부원동(府院洞) 유적과 전남 남해군 군곡리(郡谷里) 패총에서 복골(卜骨)이 다량으로 출토 되었다. 그렇다면 한자(漢字) 정통성을 주장하는 중국의 갑골문자(甲骨文字)에 대해 알아본다. 갑골문(甲骨文)은 중국 고대 상(商)나라의 수도인 은허(殷墟)에서 1899년 왕의영이 처음 발견하였고, 이후 1903년 유악이 펴낸 <철운장귀>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어 중국 최초의 문자로 인정받아 왔다.

은허(殷墟) 유물에 대한 연구는 라진옥, 왕국유등에 의해서 진행되었으나 과학적이고 본격적인 연구는 1928년부터 1937년까지 중국국립중앙연구원 역사언어연구소가 은허(殷墟) 유적을 발굴하면서 부터이다. 발굴을 주재했던 동작빈(董作賓)은 지금까지의 산발적인 연구를 집대성하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는데, 갑골문(甲骨文)의 서체 변천의 경우 제1기 무정왕 시대로 부터 제5기 상(商) 말에 이르기 까지 각 시대마다 각각 일정한 서체가 있고, 중국의 한자(漢字)는 상고시대로 부터 상(商)대에 이르기 까지 오랜 기간을 경과하면서 <도상문자(圖象文字)에서 일정한 자획을 갖는 부호문자(符號文字)로 변해왔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상(商)대에는 실용적인 갑골문(甲骨文)과 장식적인 금문(金文)이 병행하여 사용되고 있었다고 하였다. 은상(殷商)에서는 전기에 무자갑골(無字甲骨)이 성하고, 후기에는 유자갑골(有字甲骨)이 성행한다. 이와 같은 갑골문화(甲骨文化)의 발전과 더불어 갑골문(甲骨文)이 형성 되었고, 마침내는 한자(漢字)로 완성 되었다는 것이다.

산동(山東)대 고고미술학연구소 류펑쥔(劉鳳君) 소장이 중국 고고학 관계자들을 초청한 세미나에서 갑골문자(甲骨文字) 이전에 다른 형태의 골각(骨刻)문자가 산동성 창락(昌樂)현 지역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 자리에 참석한 사회과학원 왕위신(王宇信) 교수 등 은상문화협회(殷商文化協會) 관계자 5명은 모두 류펑쥔(劉鳳君) 소장의 학설에 동의 하였고, 이를 창락골각문(昌樂骨刻文)으로 이름 붙였다. 류펑쥔(劉鳳君) 소장에 따르면 이들 도안은 소의 어깨뼈와 사슴·코끼리 뼈에 새겨져 있었으며, 도안의 형태는 다양했다. 뼈 한 곳에 100여 개의 서로 다른 도안이 새겨진 것도 있고, 1~2개의 도안만 새겨진 뼈도 있다. 여러 개의 도안은 세로로 정렬돼 있어 특정 사안을 기록한 문자(文字)로 봐야 한다는게 류펑쥔(劉鳳君) 소장의 주장이다. 단순한 그림일 경우에는 이처럼 정렬된 형태로 나타날 수 없다는 것이다. 중국 고고학자들은 은상(殷商)대에 산동(山東) 지역은 동이(東夷)족들이 집단으로 거주했기 때문에, 이 골각(骨刻)문자는 동이(東夷) 문자(文字)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류펑쥔(劉鳳君) 소장은 “문자(文字)의 모양도 고대 상형문자인 동이(東夷) 문자(文字) 계열에 속한다고 하였고, 안양(安陽)을 중심으로 한 은허(殷墟) 지역에서 발견됐던 갑골문자(甲骨文字)도 동이(東夷)족의 골각(骨刻)문자가 발전한 형태일 가능성이 크다고 강조하였다.”

이러한 중국학자들의 견해는 골각(骨刻)문자가 발전하여 갑골문자(甲骨文字)가 되었고, 결국 한자(漢字)로 완성 되었다는 것이다. 한자(漢字) 전문학자인 진태하 교수가 중국에서 개최한 한자(漢字) 학술대회에서 “한자(漢字)는 동이(東夷)족이 만들었다”라고 주장 하였다. 이에 세계일보 기자는 중국의 석학 임어당(林語堂)이 우리나라 초대 문교부장관인 안호상(安浩相) 박사에게 “한자(漢字)는 당신네 동이(東夷)족이 만든 문자(文字)인데 그것도 아직 모른단 말입니까”라고 이야기 하였다는 것을 예로 들면서 은연중에 한자(漢字)는 우리 민족이 만들었음을 주장 하였다. 우리 민족이 한자(漢字)를 만들었다는 가설(假說)이 성립 하려면, 먼저 동이(東夷)족의 개념 정리가 필요 하다. 동이(東夷)족이 한민족이라는 가설(假說)에 대해 네티즌 사이에서 돌고 있는 것이 중국의 서량지와 엄문명이 “중국고대사와 은나라의 역사는 동이족의 역사임을 인정했다”라는 것인데, 우리가 알고있는 동이(東夷)족의 개념과 이들이 주장하는 동이(東夷)족의 개념은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북경대학의 고고문박학원(考古文博學院) 교수인 엄문명(嚴文明)의 저서와 논문에는 “중국은 동이문화(東夷文化)”라고 밝히고 있다. 이것이 바로 앙소문화(仰韶文化)이다. 산서성과 허난성의 황하(黃河) 중류지역에서 발굴된 신석기시대 유물을 일컬어 앙소문화(仰韶文化)라 한다. 엄문명(嚴文明)이 말하는 동이문화(東夷文化)라는 것이 바로 앙소문화(仰韶文化)인 것이다. 사실 그동안의 고고학적인 연구 성과를 모를 리가 없는 엄문명(嚴文明) 교수가 현재 중국 고고학계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다중심(多中心) 발전론” 내지 “중국문명의 다(多)기원설”을 부정하고, “중국은 동이문화(東夷文化)”라는 편협한 시각을 술회했다는 것 자체도 믿을 수 없다. 왜냐하면 “다중심(多中心) 발전론”을 주창한 것은 바로 엄문명(嚴文明) 교수 자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엄문명(嚴文明) 교수가 말하는 “동이문화(東夷文化)”는 “한(韓)민족의 문화”가 결코 아니었다는 점이다. 또한 서량지(徐亮之) 교수의 중국사전사화(中國史前史話)에 의하면 “중국 선사시대 사회는 신석기 시대로 진입하여 더욱 번성하였다. 중국의 정통문화는 각종의 단원문화(單元文化)가 용주(鎔鑄)되어 형성된 것이다. 이러한 융합과정은 금석(金石) 병용의 시대 혹은 청동기 시대에 이르러서 이미 기본적으로 완성되었다.” 라고 하였다. 이것은 신석기 시대 이래 현재 중국의 영토내에서 활동한 여러 민족 집단을 사실상 하나의 “자재적 민족(自在的民族)”으로 간주하는 대륙학자들의 주장과 다를 바가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오늘날 중국 영토내의 모든 민족은 과거에도 기본적으로 중국민족이며, 그들이 역사적으로 현재 중국의 영토내에서 거주하였던 이상 현재의 중국영토는 과거에도 중국의 영토였다는 웃지못할 주장인 것이다.

이상과 같은 견해들을 가지고 우리나라 네티즌들이 “중국문명의 원조는 우리 민족이다”라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근거로 이용하고 있지만, 신석기 문화에 대한 서량지(徐亮之)의 기본적인 인식, 그리고 “동이문화(東夷文化)”는 “한(韓)민족의 문화”가 결코 아니었다는 엄문명(嚴文明) 교수의 결론을 상기하면 이것은 단장취의”(斷章取義)라는 비난을 면치는 못할 것이다. 또한 임어당(林語堂)은 소설가로서 음운학 연구에도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이 사람의 역사 괴설을 가감없이 받아들이는 오류를 범했으며, 중국 고대사는 한(韓)민족의 것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서량지(徐亮之)와 엄문명(嚴文明) 교수의 발언을 이용하여 터무니없는 근거를 대고 있는 것이다.

류펑쥔(劉鳳君) 소장을 비롯하여 중국 학자들의 견해는 동이(東夷)족의 골각(骨刻)문자가 발전하여 갑골문자(甲骨文字)가 되었고, 결국 한자(漢字)로 완성 되었다는 것인데, 중화(中華)인들의 입장에서 한자(漢字)의 기원을 동이(東夷)족의 골각(骨刻)문자로 보는것은 일견 타당한 수순일 것이다. 앞서 소하연문화(小河沿文化)는 앙소문화(仰韶文化) 및 대문구문화(大汶口文化)와 상당히 밀접하다고 하였다. 대문구문화(大汶口文化)는 산동성(山東省) 일대에 나타난 후기 신석기 문화로 이는 동이(東夷)족들의 주요 거주 지역이다. 따라서 홍산문화(紅山文化)인들이 남하(南下)하여 소하연문화(小河沿文化) 및 대문구문화(大汶口文化)를 발전 시켰다고 보면, 홍산문화(紅山文化)인의 문자(文字)는 지사(指事), 상형(象形) 두 성분을 갖춘 부호문자(符號文字)가 널리 사용 되었음을 알수가 있다. 동쪽으로 이동한 홍산문화(紅山文化)인들도 또한 이러한 부호문자(符號文字)를 사용했음을 추정 할 수가 있겠다.

다음편 계속..........




카오스 (2012-03-21 12:33:10)  
음....동명님의 글은....東夷와 韓에 대한 인식만 바꾸면 아주 좋은 분석글이 되겠네요...

즉, '東夷'와 '韓'을 '고정된 지역(장소)'으로만 보지 말고 '이동할 수 있는 민족(사람)'으로 보는 인식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보입니다...동아시아의 고대사서에서 언급되는 '東夷'의 범위는 아래 그림이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물론 이 '東夷'의 속에 '韓'이 들어 있는 것이지요....'東夷'와 '韓'을 '현,한반도'로 국한해서 보는 인식에서는 '동아시아 고대역사의 실상'을 결코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고조선(古朝鮮) 문자(文字)에서 훈민정음(訓民正音)까지 (Ⅰ)

www.coo21.rgro.net/bbs/zboard.php?id=con_4&no=28599







Re:Re:DAUM "공감 에서 한자의 주인은 누구인가"를 읽고 호기심이 생기네요??(좀 깁니다 참고^)|고조선,부여,발해 등 고대사토론방
동명|조회 244|추천 0|2015.12.29. 19:26http://cafe.daum.net/alhc/ALGC/3827 



 

<고조선(古朝鮮) 문자(文字)에서 훈민정음(訓民正音)까지 ()>

 

우리민족의 고대 문자(文字) 가림토(加臨土)가 존재 하였다는 증거의 하나인 천부경(天符經)에 대한 일반적인 우리의 인식을 살펴 보기에 앞서 내몽고 및 동만주(東滿洲)에 거주하던 우리 민족계열 종족들이 의사를 전달하는 매개체로서 부호문자(符號文字) 및 갑골문(甲骨文)까지 사용 하였음을 유적으로 입증 되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부족연맹체에서 발전하여 정치체를 갖춘 부여(夫餘)나 고구려(高句麗)는 어떠한 문자(文字)를 사용 하였을까? 물론 부여(夫餘)나 초기 고구려(高句麗)가 어떠한 문자(文字)를 사용 하였는지 알수있는 유적이나, 유물은 없다. 다만 고구려(高句麗) 중기 이후 금석문(金石文)을 연구한 학자들의 견해를 알아봄으로써, 그것을 논변 하고자 한다.

 

<삼국지(三國志)>에 의하면, 고구려(高句麗) 언어는 부여(夫餘)의 언어와 비슷하였으며, 옥저(沃沮) 및 예()의 그것과도 비슷하였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보면 이들은 하나의 어군(語群)을 이루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후에 고구려(高句麗)가 이러한 어군(語群)의 지역을 통일함으로써 고구려(高句麗)어는 이 지역을 대표하는 언어가 되었다. 고구려(高句麗)어의 자료는 내외사적(內外史籍)에 나오는 고유명사(固有名詞)들인데, 그 중에서도 <삼국사기(三國史記)><지리지(地理志)>가 주된 자료일 것이다. <지리지(地理志)>에 수록된 지명(地名)들은 한자(漢字)의 음()을 차용하여 표기한 것과 훈()을 빌려 표기한 것이 있어, 이들의 대응관계를 수립함으로써 단어의 발음과 의미를 재구(再構)할 수가 있다. 고구려(高句麗)가 한자(漢字)의 음()을 차용 하였다는 것은 김부식(金富軾)의 자료뿐만 아니라, 4-5세기 <호태왕비문(好太王碑文)>과 같은 시기의 유물인 비() 금속기(金屬器) 인장(印章) (,벽돌) 도기(陶器) 등에 남겨진 명문(銘文)과 고분벽화에 남겨진 묵서(墨書)의 글자체가 중화(中華) 예서(隸書)체로 나타나는 것을 상기하면 타당한 결과일 것이다.

 

중화(中華)의 한자(漢字)가 고구려(高句麗)에 전해진 시기는 후한(後漢) 시대로 추정된다. 이 시기는 소전(小篆) 보다 간편한 예서(隸書)가 후한(後漢)에서 일반적으로 사용 되었기 때문이다. 중국어 문법과 음운을 연구한 최영애(崔玲愛) 교수에 따르면 베트남의 자남(字喃)은 한자(漢字) 형태를 겹쳐서 복잡하게 만든 것이고, 이미 사자(死字)가 된지 오래인 여진문자(女眞文字)나 거란문자(契丹文字)도 한자체(漢字體)의 변용(變容)이며, 서하(西夏)도 한자체(漢字體)를 모방하여 서하문자(西夏文字)를 만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를보면 한자(漢字)의 변용(變容)은 언제나 있어온 일임을 알 수 있다. 코노 로쿠로(河野六郞) 등이 주장한 것을 우리나라 최초의 언어학자인 이기문(李基文) 교수가 그대로 받아들여 한국어는 남방계(한계)와 북방계(부여계)로 갈라져 있고, 신라(新羅)어가 한국어 형성의 근간이 되었다는 학설을 주장하였다. 이에대해 김병제, 김영황, 홍기문, 류렬 교수 등이 신라(新羅)어 근간설을 맹렬히 비판하며 한국어는 고구려(高句麗)어가 근간으로 형성 되었다는 민족어 단일 기원설을 내세우고 있다. 최근에는 백제(百濟)어 연구와 함께 고구려(高句麗)어의 한자음(漢字音) 등이 활발히 논의되고 있다. 고구려(高句麗) 금석문(金石文)에는 한자(漢字)의 어순과 다른 일종의 변체한문(變體漢文)이 쓰여져 있다. 이러한 고구려(高句麗)의 변체한문(變體漢文)은 신라(新羅)에 전해져 이두(吏讀) 성립에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설총(薛聰)이 고대 한국어를 한문(漢文)으로 표현한 첫 문자(文字) 체계인 이두(吏讀)와 구결문자(口訣文字)를 규정한 것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으나,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삼국사기>방언(方言)으로 구경을 읽고 후생을 훈도하였다.”라 했고, <삼국유사>에는 방언(方音)으로 화이(華夷)의 방속(方俗)과 물건의 이름을 이해하고 육경(六經)과 문학을 훈해(訓解)했으니, 지금도 해동(海東)의 명경(明經)을 업()으로 하는 이가 전수(傳受)해 끊이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이 두 기록을 근거로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걸쳐 설총이두창제설(薛聰吏讀創製說)이 비롯되었으나, 이는 틀린 것이다. 향가(鄕歌) 표기법인 향찰(鄕札)은 설총(薛聰) 이전부터 이미 사용되고 있었다. 향찰(鄕札)은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의 비문에도 이미 나타나 있고, 설총(薛聰) 이전의 향가(鄕歌) 작품인 진평왕(眞平王) 때의 서동요(薯童謠), 혜성가(彗星歌)와 선덕여왕(善德女王) 때의 풍요 (風謠)가 모두 향찰(鄕札)로 표기 되어 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설총(薛聰)이 향찰(鄕札)을 창안한 것이 아니라 그때까지 존재하던 향찰(鄕札)을 집대성 했을뿐이다.

 

향찰(鄕札)이라는 말은 문헌상으로 균여전(均如傳)에 단 한번밖에 나타나지 않지만, 향가(鄕歌향언(鄕言향명(鄕名)이라는 말에서 우리 고유의 것을 향()이라는 글자로 자주 표현한 것을 보면 신라(新羅)와 고려(高麗) 시대에 자주 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초기 학자들은 모든 차자표기(借字表記)를 이두(吏讀)라고 하여 향찰(鄕札)이라는 개념을 따로 구별하지 않았다. 최근에 와서는 신라(新羅)시대의 차자표기법(借字表記法)은 향찰(鄕札), 고려(高麗)시대 이후의 차자표기법(借字表記法)은 이두(吏讀)라고 하여 구별하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향찰(鄕札)과 이두(吏讀)는 용도,문체,표기법상 차이가 있으므로 이를 구별하지 않을 수 없다. 이두(吏讀)는 고려시대에 와서 갑자기 향찰을 대신한 것이 아니라 향찰이 발달하기 이전에 이미 존재하였고, 향찰(鄕札)이 발달한 이후에도 공존하여 사용되었다. 따라서 이들을 시대의 차이에 따라 구분하는 것은 비록 명칭의 발생연대에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실재하였던 사실과는 맞지 않는다.

 

지금까지 고구려(高句麗)가 한자(漢字)의 음()을 차용하여 사용 하였으나, 이를 독자적으로 변용(變容)하여 한자(漢字)의 어순과 다른 일종의 변체한문(變體漢文)을 사용 하였다는 사실을 서술하였다. 이러한 고구려(高句麗)의 변체한문(變體漢文)은 신라(新羅)에 전해져 이두(吏讀) 성립에 크나큰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허나 한단고기(桓檀古記)에 수록된 이암(李喦)의 단군세기(壇君世記)와 이맥(李陌)이 저술 하였다는 태백일사(太白逸史)에 가림토(加臨土)문자가 남아 있다고 하는 주장이 제기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민족의 고대 문자(文字)가 존재하였다는 여러 가지 근거를 제시 하고 있다.

 

이맥(李陌)이 저술 하였다는 태백일사(太白逸史)의 소도경전본훈(蘇塗經典本訓)천부경(天符經)은 환인천제께서 다스리던 환국(桓國)에 있었던 구전(口傳)의 서()이다. 그 후 환웅께서 천강하신 후 신지혁덕에게 명하여 녹도문(鹿圖文)으로써 그것을 썼다. 훗날 최고운(崔孤雲)이 전고비(篆古碑)를 보고 갱부작첩하여 세상에 전하였다.”라고 하였다. 태백일사(太白逸史)의 기록에 천부경(天符經)을 우리민족 고유의 문자(文字)인 녹도문(鹿圖文)으로 썼는데, 후에 최치원(崔致遠)이 전고비(篆古碑)를 보고 갱부작첩하여 세상에 전하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통일신라시대에 최치원(崔致遠)은 우리민족 고유의 문자(文字)로 쓰여진 천부경(天符經)을 발견한 것이 된다. 최치원(崔致遠)이 저술 하였다는 고운문집(孤雲文集)은 고려시대 이후 역대로 누차 간행되었으나, 고판본(古板本)은 한결같이 전하지 않고 있다. 1926년 최치원(崔致遠)의 후손 최국술(崔國述) 등이 31책으로 간행한 것이 오늘날 널리 이용되고 있으나, 수록된 글들은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과 동문선(東文選), 불교관계 자료집, 금석문(金石文) 등에 산재(散在)한 것을 한데 모아 엮은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최치원(崔致遠)의 후손 최국술(崔國述) 등이 간행한 고운문집(孤雲文集) 사적본(史蹟本)에서 전비문(篆碑文)이 몹시 어렵고 읽기가 힘들어서 고운이 그것을 번역하였다.”라고 하여 최치원(崔致遠)이 마치 천부경(天符經)을 해석한 것으로 되어있다. 최치원(崔致遠)이 저술한 것중에 당나라에서 돌아와 헌강왕(憲康王)에게 진헌(進獻)한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 20권만이 온전하게 전하고, 문집 약간 권과 금석문(金石文) 몇 편이 전하고 있을 뿐 대부분 인멸 되었다. 1972년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大東文化硏究院)에서 간행한 최문창후전집(崔文昌侯全集)은 최치원(崔致遠)의 유문(遺文)을 거의 모두 수집(蒐輯)한 것으로, 그 내용은 크게 시문집(詩文集), 사산비명(四山碑銘), 법장화사전(法藏和尙傳),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으로 나누어진다. 최치원(崔致遠)의 유문(遺文) 가운데 현재 전해진 것은 금석문(金石文)으로 사산비명(四山碑銘), 최고운난랑비(崔孤雲鸞郞碑)가 있으나, 그 어디에도 최치원(崔致遠)이 전고비(篆古碑)를 보고 갱부작첩하여 세상에 전하였다고 하는 천부경(天符經)의 흔적을 발견할 수가 없다. 결국 최치원(崔致遠)의 후손 최국술(崔國述) 등이 간행한 고운문집(孤雲文集) 사적본(史蹟本)에 수록된 것에만 존재할 뿐이다.

 

최치원(崔致遠)이 과연 우리민족 고유의 문자(文字)로 쓰여진 천부경(天符經)을 번역한 사실과 그러한 의지가 있었던 것일까? 아래 최고운난랑비(崔孤雲鸞郞碑)를 살펴보자.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실로 삼교(三敎)를 모두 포함한다. 들어가서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나가서 임금에게 충성하는 것은 노 사구(魯司寇 공자(孔子))의 뜻이요, 무위(無爲)의 일에 처하고 불언(不言)의 가르침을 행하는 것은 주 주사(周柱史 노자(老子))의 종지요, 제악(諸惡)을 짓지 않고 제선(諸善)을 봉행하는 것은 축건 태자(筑乾太子 석가(釋迦))의 교화이다.

 

공자(孔子), 노자(老子), 석가(釋迦)의 사상을 추종한 최치원(崔致遠)이 과연 우리민족 고유의 문자(文字)로 쓰여진 천부경(天符經)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또한 사산비명(四山碑銘)에 수록된 희양산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曦暘山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碑)에 의하면 여기에 또 모든 성씨(姓氏)가 석가(釋迦)의 종족에 참여하는 가운데 존귀한 임금님이 삭발을 하고 승려가 되기까지 하였으며, 언어 또한 범어(梵語)의 소리를 답습해서 혀를 굴리는 소리에 다라(多羅)의 문자가 많았다. 이는 바로 하늘이 분명히 서토(西土)를 돌아보고, 바다가 이끌어 동방으로 흐르게 한 것이니, 군자의 고장에 법왕(法王)의 도()가 스며드는 것이 날이면 날마다 깊어지고 또 깊어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석가(釋迦)의 언어인 범어(梵語)은 범천(梵天)이 이 언어를 만들었다는 고대 인도의 전설속에 나오는 언어이다. 최치원(崔致遠)은 불교의 언어, 즉 석가(釋迦)의 언어인 범어(梵語)에 대한 내용을 후세에게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따라서 최치원이(崔致遠)이 우리민족 고유의 문자(文字)로 쓰여진 천부경(天符經)을 해석 하였다는 것은 최국술(崔國述) 등의 개인 의견일 뿐이다.

 

이홍직(李弘稙)1974년 국사대사전(國史大事典)을 간행하면서 법수교(法首橋) 비문(碑文)은 평양 법수교의 비()에 새겨진 글월로 훈민정음 이전에 있었던 우리나라 고대문자로 추측된다.”라고 하였다. 이홍직(李弘稙)은 평양(平壤) 법수교(法首橋) 비문(碑文)을 가르켜 우리나라 고대문자(古代文字)가 아니냐고 추정하고 있다. 이홍직(李弘稙)1909년 출생하였고, 부모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1935년 동경제국대학 문학부 국사학과를 졸업 하였다. 특히 동경제국대학 문학부 국사학과를 졸업한 이홍직(李弘稙)의 행보가 주목된다. 이홍직(李弘稙)이 주장한 평양(平壤) 법수교(法首橋) 비문(碑文)에 대해 이유립(李裕岦) 선생은 평양(平壤)에 소재한다고만 밝혔을 뿐 구체적인 언급은 하지 않았다. 일설에는 법수교(法首橋)에 대하여 16세기 말에 편찬된 평양지(平壤志)에서는 평양 법수교 다리에 옛 비가 있었는데, 그 글자가 우리 글자(훈민정음)도 아니고 인도의 범자도 아니며, 중국의 전자도 아니라고 하면서 혹 말하기를 이것은 단군 때의 신지가 쓴 것이라고 하였는데, 세월이 오래 되어 없어졌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평양지(平壤志)에 수록된 것이 사실일까?

 

평양지(平壤志)은 서경지(西京志)라고도 한다. 목판본으로 원지(原志) 9, 속지(續志) 5, 후속지(後續志) 2, 합계 1610책이다. 원지(原志)1590년 평안도 관찰사 윤두수(尹斗壽)가 엮어서 펴냈고, 속지(續志)1730년 그의 후손 윤유(尹游)가 펴낸 것을, 1837년에 합간(合刊)한 것이다. 후속지(後續志)1855년 그 지방 사람이 편집한 것을 후세인이 속지(續志)에 합본(合本)하였는데, 이 책이 바로 그것이다. 평안도 관찰사 윤두수(尹斗壽)가 편찬한 평양지(平壤志) 서문(序文)을 보면, “강물을 보면서 하후(夏后)의 공덕을 생각하고 당() 땅을 밟으면서 제요(帝堯)의 풍도를 상상하는 것은, 대개 덕이 감화시킨 것이 깊기 때문이요, 땅이 품어주는 바가 멀기 때문이다. 평양은 기자(箕子)의 옛 도읍이다. 성의 북쪽에는 토산(兔山)이 있으니, 기자의 의관이 묻힌 곳으로 솔과 회목(檜木)이 하늘을 가릴 정도이다. 나라 사람들이 그곳을 공경하여 지금까지도 바라보면서 의지하는 땅으로 여긴다.”라고 하였듯이 윤두수(尹斗壽)는 중화(中華)를 하늘처럼 추앙하는 자이다. 이런 인물이 단군(檀君) 때의 신지(神誌)가 쓴 것이라고 거론 하였다는 것을 믿을수가 없다. 여지승람(輿地勝覽)의 평양(平壤) 고적(古蹟)조에 따르면 윤두수(尹斗壽)의 평양지(平壤志)에는 시록(柴麓)은 평양부(平壤府) 동쪽 30리에 있고, 묘가 있어 높이가 한 길이 넘는다. 근년에 도둑이 광내(壙內)를 파헤치니, 돌 위에 새긴 글자가 두어 줄 있었는데 고구려 동천왕묘를 이름하여 시원(柴原)이라 하였다.’고 하였으니, 지금의 시록(柴麓)이 아마 시원(柴原)이 아닌가 한다.”라고 하였다. 이를보면 평양(平壤) 법수교(法首橋) 비문(碑文)은 윤두수(尹斗壽)가 동천왕(東川王) 묘비(墓碑)로 추정한 것일뿐인데, 이를 후세 사가들이 우리나라 고대문자(古代文字)가 아니냐고 사견을 피력한 것이다.

 

다음편 계속.........

 

 

<고조선(古朝鮮) 문자(文字)에서 훈민정음(訓民正音)까지 ()>

 

앞서 우리민족의 고대 문자(文字)인 가림토(加臨土)문자가 존재하였다는 여러 가지 근거중 평양(平壤) 법수교(法首橋) 비문(碑文)은 윤두수(尹斗壽)가 동천왕(東川王) 묘비(墓碑)로 추정한 것일뿐인데, 이를 후세 사가들이 우리나라 고대문자(古代文字)로 오해한 것이라고 하였다.

 

허목(許穆)의 대표적 문집인 기언(記言)먼 옛날 창힐(蒼頡)이 새의 발자국을 보고 처음으로 글자를 만들어 조적서(鳥跡書)를 지었고, 신농씨는 수서(穗書), 황제씨는 운서(雲書), 전욱씨는 과두문자를, 무광은 해서(楷書)를 각각 만들었다. 또 기자의 고문이 있으나 너무 오랜 것이어서 알기가 어려웠는데, ()의 양웅(楊雄)이 이것을 알아보았다.” 라고 하였다. 이처럼 허목(許穆)은 중화(中華)의 고대문자(古代文字)에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고대의 전설적인 제왕인 황제(黃帝)의 사관(史官) 창힐(蒼頡)이 조적서(鳥跡書) 지었다고 수록 하였다. 창힐(蒼頡)에 대한 전설은 한()나라 때 이미 전해져 있었고, 창힐(蒼頡)이란 이름이 붙은 서적명이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 남아 있다고 한다. 중국 섬서성 백수현 사관향(史官鄕)에는 창힐(蒼頡)의 사당이 존재하며, 또한 창성조적서비(倉聖鳥跡書碑)가 있다고 한다. 창성조적서(倉聖鳥跡書) 비문(碑文)의 글자체는 본래 섬서고대서법유적종술(陝西古代書法遺蹟綜述)에 실려 있는 것을 환단지(桓檀誌) 발행인인 김성준(金成俊)에 의해 재인용한 것이다. 환단지(桓檀誌)에서 창성조적서(倉聖鳥跡書) 비문(碑文)의 문자(文字)와 단군(檀君) 시대 신지(神誌)의 녹도문(鹿圖文)이 서로 동질성이 있음을 들었으나, 같은 것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조선 후기의 인물로 알려진 김두영(金斗榮)의 전첩(篆帖)에 창힐(蒼頡)의 조적서(鳥跡書)로 알려진 서체가 발견되고 있지만, 현재로서는 녹도문(鹿圖文)과의 어떤 상관성을 규명할 수가 없다.

 

1971년판 영변지(寧邊誌)창힐(蒼頡)이 처음 문자를 제작하였다고 중국에서 말하는데, 그는 동국(東國)사람이라 하고, 그리고 단군시대의 신지(神誌)의 문자가 지금도 남아 있어, 이 책의 상면(上面)에 영인하여 붙인 것도 있어서, 문자가 있고 예의를 아는 것이 단군고족(檀君古族)으로 되었은즉...” 라고 하여 단군(檀君) 시대 신지(神誌)의 녹도문(鹿圖文)이 존재하였음을 증거 하였다. 영변지(寧邊誌)19세기 중엽에 편찬된 평안도 영변군(寧邊郡) 읍지(邑誌)로서 표지에는, 영변부읍지(寧邊府邑誌)로 되어 있다. 고적(古蹟)조에는 단군(檀君)의 탄강처(誕降處)로 전해오는 묘향산(妙香山) 향로봉(香爐峯) 아래 등천굴(登天窟) 등에 관한 설명과 단군설화(檀君說話) 및 주몽(東明王)에 관한 기록이 실려 있다. 1923년 한국유학연구회에서 펴낸 영변지(寧邊誌)는 이 읍지(邑誌)를 필사하여 복제한 것인데, 현재 규장각도서에 있다. 1971년판 영변지(寧邊誌)의 기본자료는 1942년에 발간된 영변군지(寧邊郡志)을 모태로 하고 있으며, 월남한 세대들에 의해 1971년 서울에서 재발간한 것이다. 그렇다면 1942년에 발간된 영변군지(寧邊郡志)19세기 중엽에 편찬된 영변부읍지(寧邊府邑誌)가 서로 상관관계가 있는 것인지, 현재로는 확인할 수가 없다. 1971년판 영변지(寧邊誌)에는 신지필적(神誌筆蹟) 이란 이름으로 맨 앞장에 실려있다. 이를 두고 안영태(安永泰)1974년 자신의 저서 (현대정치철학)에서 신지(神誌)의 전자(篆字)로 단군(檀君)시대의 기록이라고 하였다.

 

단군(檀君) 시대 신지(神誌)의 녹도문(鹿圖文)이 존재 하였다는 1971년판 영변지(寧邊誌)와 가림토(加臨土)문자를 입증 하는 자료로 1979년 이유립(李裕岦) 선생이 세상에 내놓은 환단고기(桓檀古記)가 이후 우리민족의 고대 문자(文字)인 가림토(加臨土)문자 존재설에 대한 단초가 되었다. 그밖에 단편적인 금석문(金石文) 자료에 의해 가림토(加臨土)문자 존재설을 제기 하게 되었다. 80년대에 들어와서 민족사 연구가인 홍흥수(오랜지 카운티 거주)오늘날 우리들에게 전해지고 있는 천부경(天符經)은 아마도 환웅(桓雄)시대 신지(神誌) 혁덕의 녹도문(鹿圖文)이 아니라 단군(檀君) 시대 신지(神誌)의 전문(篆文)을 최치원(崔致遠)이 한문으로 번역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라고 주장 하였다. 홍흥수는 해외 동포로서는 처음으로 1983424일 묘향산(妙香山) 단군(檀君)굴을 참배하고 역사 박물관장 최형민으로부터 1942년에 발간 되었다는 영변군지(寧邊郡志) 필사본을 입수하게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최치원(崔致遠)이 천부경(天符經)을 한문(漢文)으로 번역하여 묘향산(妙香山) 석벽에 새겨놓았다고 주장하는 그 석벽의 소재지는 확인 할 수 없었다고 하였다. 결국 1942년에 발간 되었다는 영변군지(寧邊郡志)의 실체는 북한 역사학계의 자료에 의해서만 확인 가능한 것이다.

 

북한은 1990년대 외세의 간섭을 배격하고 우리 민족끼리 자주통일을 이루자는 사상적 기반을 다지고자 단군릉(檀君陵) 발굴과 단군(檀君) 시대을 새로운 각도에서 깊이 있게 분석하였다. 북한학계는 이른바 대동강 문명론을 내세우며, 고조선(古朝鮮)시대에 신지(神誌) 글자가 있었고, 이 글자가 고조선(古朝鮮)시대의 토기 파편에서 확인되었으며, 또한 조선시대의 세종대왕은 이것을 보고 훈민정음을 창제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북한 역사학계의 주장은 2003년 제2차 단군 및 고조선에 관한 공동학술토론회를 통하여 남측 단군학회(檀君學會)에 크나큰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역사와 정치를 완전히 단절할 수는 없지만, 역사를 정치에 이용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2000년 민홍규씨가 필자의 가문에는 목은(牧隱), 범세동 등과 함께 두문동 72현 가운데 한 명인 농은(農隱) 민안부(閔安富) 어른이 남긴 천부경문(天符經文)이 전해온다. 그간 천부경(天符經)은 고본(古本)이 존재하지 않고 그 출처가 명확하지 않으며 그 난해성 때문에 강단사학계에 의해서 위·개작되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하지만 분명 고본(古本)은 전해지고 있다.”고 언론에 밝힌 바 있다. 민홍규씨는 언론에 발표하기전 송호수(宋鎬洙) 박사에게 처음 보여줌으로써 세상에 알려졌다. 민홍규로부터 농은유집(農隱遺集)을 접한 송호수(宋鎬洙) 박사는 자신의 저서 <한민족의 뿌리사상> 개정판에 영인본을 포함시켰다. 그러나 당시 송호수(宋鎬洙) 박사는 농은유집(農隱遺集)의 천부경문(天符經文)에 대한 해석은 하지 못했다. 그런데 웃지못할 사건이 터졌다.

 

2008년 터진 국새 사기사건의 중심에 민홍규 국새제작단장이 연루 되었다. 민홍규는 법정에서 5년을 구형 받고 26개월을 언도 받아 중형에 처해졌다. 민홍규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김성호씨도 공모죄로 같이 조사 받았으나, 국새 제작에는 직접 관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법정에 서는 것을 면하였다. 김성호씨는 현재 청소년역사문화교육원 원장이며, 그는 대학시절 독도연구회와 인연을 맺어 독도어울림에서 사무국장을 맡기도 하였다. 2006옥새(玉璽) 숨겨진 역사를 말하다.”를 펴낸 김성호씨는 왜 우리 정부가 우리 나라는 물론 세계에서 유일한 옥새 전각장인 민홍규 씨에게 도움을 받지 않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라고 하는 등 민홍규씨와의 두터운 친분관계가 있었음을 알수가 있다. 민홍규씨가 자신의 가문에서 전해왔다는 민안부(閔安富)의 천부경문(天符經文)이 존재한다고 언론에 밝힌것과 국새 사기사건과 무슨 관계가 있냐고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영리를 목적으로 국새 사건을 일으킨 민홍규씨의 말을 얼마나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 2002년 언어학자 박대종(朴大鍾)씨가 동방문자(漢字)의 기원인 갑골문(甲骨文)으로 쓰여진 농은유집(農隱遺集) 천부경(天符經)”에 대한 연구를 통해 갑골문(甲骨文)의 뿌리가 환웅(桓雄)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을 밝힘으로써, 민안부(閔安富)의 천부경문(天符經文)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재론 하였다.

 

민안부(閔安富)의 생졸년은 미상이며, 도첨의사인(都僉議舍人) 민유(閔孺)의 아들이다. 1392년 이성계(李成桂)가 개국을 하자 이에 반대하여 구홍(具鴻), 박심(朴諶), 채귀하(蔡貴河), 이맹운(李孟芸) 72현과 함께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서 고려에 대한 의리를 지켰다고 알려졌다. 허나 민안부(閔安富)의 친척인 민여익(閔汝翼)은 공양왕 폐위 당시 이성계(李成桂)에 협조한 공이 있었다는 사실이 기록에 있지만, 민안부(閔安富)에 대한 기록은 전무하다. 두문동(杜門洞) 72현에 포함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1783년 정조가 개성 성균관에 표절사(表節祠)를 세워 이들을 추모하였다는 사실과 조선 순조때 당시 72현의 한 사람인 성사제(成思齊)의 후손이 그의 조상에 관한 일들을 기록한 두문동실기(杜門洞實記)에서 전해지는 이름을 살펴보면, 임선미(林先味), 조의생(曺義生), 성사제(成思齊), 박문수(朴門壽), 김충한(金沖漢), 신규(申珪), 이경(李瓊), 맹호성(孟好誠), 고천상(高天祥), 서중보(徐仲輔)로 민안부(閔安富)는 보이질 않는다. 이것은 우리나라 족보의 발전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지금까지 우리민족의 고대 문자(文字)인 가림토(加臨土)문자가 존재하였다는 여러 가지 근거와 학자들의 견해를 살펴 보았다. 내몽고 및 동만주(東滿洲)에 거주하던 우리 민족계열 종족들이 의사를 전달하는 매개체로서 부호문자(符號文字) 및 갑골문(甲骨文)까지 사용 하였음과 부족연맹체에서 발전하여 정치체를 갖춘 부여(夫餘)나 고구려(高句麗)는 한자(漢字)의 음()을 차용하여 사용 하였으나, 이를 독자적으로 변용(變容)하여 한자(漢字)의 어순과 다른 일종의 변체한문(變體漢文)을 사용 하였다는 사실을 서술하였다. 우리민족의 고대 문자(文字)는 분명히 존재 하였다는 것에는 이의가 없다. 다만 가림토(加臨土)가 문자(文字)체계를 갖추고, 단군(檀君) 시대부터 사용 되었다는 가설은 어딘가 문제점이 많아 보인다. 최근에 발견된 만주(滿洲) 선춘령(先春嶺) 이북의 바위에 새겨진 문양, 남해 낭하리 암각화, 경북 경산시 와촌면 강학리 명마산(鳴馬山) 중턱에 자리한 바위의 문양, 경남 산청군에 있는 단속사(斷俗寺)의 비() 등의 글자 형태를 보고, 이를 가림토(加臨土)문자가 아니냐고 한다.

 

특히 명마산(鳴馬山) 중턱에 자리한 바위에 새겨진 문양을 재야 사학자인 예대원씨는 훈민정음 창제의 모태이자 기반이 된 것으로 알려진 가림토 문자가 확실하다.”고 단언 하였고, 한국정신문화원 박성수 명예교수는 바위에 암각된 문자가 가림토와 흡사한 형태를 하고 있다.”라며 구체적인 연구검토를 거쳐 가림토 여부를 판명해야 할 것 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명마산(鳴馬山) 바위의 문양을 자세히 보면, 각자(刻字)가 아니라 각화(刻畵)의 형태를 띠는 것으로 일종의 도상(圖象)에서 일정한 자획을 갖는 부호문자(符號文字)로 볼수 있다. 다른 금석문(金石文)에 나타나는 문양도 이와같다. 여러 가지 문양중에 가림토(加臨土)문자와 비슷한 형태를 가지는 것이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물증들이 만약 가림토(加臨土) 문자(文字)라고 한다면, 금석문(金石文)이 아니라 문헌기록에 존재하여야 한다.

 

마지막편 계속.........

 

 

 

<고조선(古朝鮮) 문자(文字)에서 훈민정음(訓民正音)까지 (마지막편)>

 

그동안 단편적으로 가림토(加臨土)문자가 단군(檀君) 시대와 관련성이 있다는 여러 주장들이 있었으나, 가림토(加臨土)문자가 단군(檀君) 시대와 관련성이 있다는 근거가 희박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마지막으로 가림토(加臨土)문자가 고조선(古朝鮮)의 문자(文字)라는 가설과 훈민정음(訓民正音)의 탄생에 있어 그 모태라는 가설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2002년 재야사학자 구길수씨는 천부인과 천부경의 비밀이란 저서를 통해서 천부경(天符經)하나, , , ,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이라는 16자로 된 하늘의 교훈이며, 글자마다 고유의 뜻을 가졌다고 말한다. 이 글자들은 한자(漢字)가 아니라 고조선 시대 문자인 신지녹도전자(神誌鹿圖篆字)라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특히 그는 한글의 원형인 가림다(加臨多)와 한자(漢字)의 시초인 금문(金文)이 신지문자(神誌文字)에서 유래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것을 입증할 만한 자료로 내세운 것이 앞서 기술하였던 섬서성 백수현 사관향(史官鄕)의 창성조적서비(倉聖鳥跡書碑), 평양 법수교(法首橋) 아래 기자고천문(祈子告天文), 영변군지(寧邊郡志) 등을 꼽았다. 고조선(古朝鮮)의 문자(文字)가 존재한다는 가설을 본격적으로 다룬 사람은 고조선 문자 연구가 허대동 선생이다.

 

허대동 선생은 1968년 경남 합천에서 태어나 부산대학교 독어교육학과를 졸업하였다. 영어교육학을 부전공하여 대학 졸업 후 1992년 양산여자중학교 영어교사로 근무 하였다. 허대동씨가 고조선(古朝鮮)의 문자(文字)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교육과학기술부 성삼제씨의 2005년도 저서 <고조선, 사라진 역사>에서 명도전(明刀錢)의 국적이 의심된다는 내용의 문제 제기를 읽고 부터였다. 여기서 잠깐 성삼제씨에 대해 언급하고 넘어간다. 성삼제씨는 2001년에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 사건이 일어났을 때 일본역사교과서 왜곡대책반 실무반장으로 활약하면서, 일본에게 왜곡의 빌미를 주지 않도록 우리 스스로 우리 역사를 체계적이고 지속적으로 연구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한 이후부터 한국고대사 역사연구에 매진한 것으로 보인다. 성삼제씨의 <고조선, 사라진 역사>에서 명도전(明刀錢) 출토 지역의 분포를 보면 고조선(古朝鮮)의 영역과 거의 일치한다. 만주사의 기초를 닦았다는 중국 길림대 역사학과의 장보촨(張博泉) 교수가 명도전(明刀錢)이 고조선(古朝鮮) 화폐일 가능성이 높다는 논문을 왜 발표했을까.” 라는 의문점을 제기 하였다.

 

이에따라 2011년 허대동씨는 2년여에 걸쳐 연구, 분석한 고조선(古朝鮮)의 문자(文字)에 대한 역서 <고조선 문자>를 발간한다. 그동안 춘추 전국시대 연()나라 청동화폐로 알려졌던 명도전(明刀錢)의 뒷면에 새겨진 글자들이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한글의 시초가 된 고조선(古朝鮮)의 문자(文字)였고, 명도전(明刀錢) 또한 고조선(古朝鮮)의 화폐였음을 밝혔다. 특징적인 것으로는 <훈민정음해례본>의 예시글자를 거의 찾았다는 점과 고조선(古朝鮮) 문자(文字)를 표음문자와 표의문자 양쪽의 시각으로 해석했다는 점, 그리고 한글 외에 갑골문, ()()()()()나라 한자, 티베트어, 범자(梵字 : 브라흐미 문자)를 비교 분석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비언어학자인 허대동씨가 자신의 능력으로 이러한 연구실적을 남겼다고 보기는 힘들다. 허대동씨의 사촌 손위 처남으로 추정되는 조흥근 법무사의 말에 따르면 단군조선에서 주조 발행되어 유통된 명도전에 새겨진 글자는, 단군조선의 가림토가 원래 상형문자에서 나온 소리글자임을 나타내 주는 동시에 한글의 원형임을 알려주고, 단군조선 시대의 문자 체계와 언어, 문화 등을 알 수 있게 하는 너무나 중요한 역사자료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허대동씨 자신이 조흥근씨의 검증을 받았다고 술회한 사실로 보아도 기존의 자료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생각된다.

 

고조선(古朝鮮)에 문자(文字)가 존재하며, 나아가서 한자(漢字)의 기원이라는 가설이 더욱더 발전하여 훈민정음(訓民正音)이 고조선(古朝鮮) 문자(文字)를 모방하여 탄생 하였다는 주장이 등장하였다. 이에대해 조철수(曺哲秀) 교수는 훈민정음이 가림토문자를 매개로 히브리문자를 모방해 창제됐다.”라는 파격적인 주장을 한다. 조철수(曺哲秀) 교수는 1995년 소설 <토정비결>의 저자(著者)에게서 가림토(加臨土)문자 이야기를 듣고, 그때부터 가림토(加臨土)문자와 히브리문자의 연관성에 대해 파고들었다고 한다. 조철수(曺哲秀) 교수의 주장에 대해 이근수(李覲洙) 교수는 훈민정음(訓民正音)이 창제된 15세기에는 주변국에서 이미 문자(文字)를 가지고 있었다. 당시 학문적·사회적 배경으로 보아 훈민정음(訓民正音)이 다른 문자와 음운이론 등을 원용했을 개연성은 얼마든지 있다. 그런 점에서 중국유대인이 사용한 히브리문자의 자형이 훈민정음의 자형과 몇 개 유사한 것이 있다는 건 주목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이것만 가지고 훈민정음이 히브리어문자를 모방했다고 하는 것은 속단이다. 표음·표의문자의 유형에 따라 글자의 모양이 서로 비슷한 것이 다수 발견된다. 실제로 중국 갑골문자와 몽골 파스파문자에도 훈민정음(訓民正音)의 글자와 비슷한 것이 보인다.”라고 하여 훈민정음(訓民正音)이 다른 문자(文字)를 원용(援用) 하였을 가능성은 있으나, 히브리어문자를 모방 하였다는 것에는 부정적인 의견을 제시 하였다.

 

사실 훈민정음(訓民正音)의 기원에 대한 논란은 오래 전부터 있어 왔다. 1940년 훈민정음해례본(訓民正音解例本)이 발견되기 전까지 훈민정음(訓民正音)의 기원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있어왔다. 이렇게 설이 구구했던 것은 1940년 전까지 훈민정음(訓民正音)의 기원에 대한 기록은 세종실록에 나오는 자방고전(字倣古篆: 글자는 고전을 본떴다)이라는 한 구절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고전(古篆)을 글자 그대로 옛날 한자(漢字: 전서체)로 보는 고전(古篆) 기원설이 등장 하였다. 이는 정인지의 훈민정음(訓民正音) 서문과 최만리의 반대 상소문에서 언급되어 있는 고전(古篆)을 근거로 하고 있다. 국조보감(國朝寶鑑)과 이덕무의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도 고전(古篆)기원설이 나타난다. 하지만 현재 이 설을 전적으로 신봉하는 학자는 거의 없다. 그 다음으로 등장한 것이 범자(梵字) 기원설이다. 여기서 범자(梵字)는 산스크리트 문자(文字)를 가리킨다. 조선 성종 때 성현(成俔)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서 초종성 8, 초성 8, 중성 12자의 글자 모양은 범

(梵字)에 기대어 만들었다.“라며 범자(梵字) 기원설을 처음으로 제기했다. 그 후 이수광의 지봉유설(芝峰類說)에서도 우리나라 언문글자의 모양은 모두 범자(梵字)를 본받았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다음은 파스파문자 기원설이다. 파스파문자는 원나라 세조(쿠빌라이) 때 제정된 문자로 훈민정음(訓民正音)보다 약 170년 앞섰다. 미국의 역사학자 레드야드는 고전(古篆)을 몽고전자(蒙古篆字)의 약자로 보아, 훈민정음(訓民正音)이 파스파문자를 본뜬 것으로 간주하였고, 이익은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파스파문자 기원설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이외에도 서장(西藏, 티벳)문자 기원설, 창호상형(窓戶象形)기원설, 태극사상 기원설, 거란·여진문자 기원설, 일본 신대문자 기원설, 팔리문자 기원설 등 갖가지 훈민정음(訓民正音) 기원설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1940년 경북 안동에서 훈민정음해례본(訓民正音解例本)이 발견된 이후에는 각종 기원설이 세력을 잃고, 세종의 친제(親制)설이 득세 하게 되었다. 하지만 훈민정음해례본(訓民正音解例本) 발견 이후에도 각종 기원설이 간간이 나왔다. 그중 일반인들의 관심을 끄는 것이 고조선(古朝鮮) 문자(文字)라는 가림토(加臨土)문자 설이다. 과연 훈민정음(訓民正音)이 가림토(加臨土)문자을 토대로 탄생하였다는 가설은 사실일까?

 

1940년까지 경상북도 와룡면(臥龍面) 주하동(周下洞) 이한걸가(李漢杰家)에 소장되었던 훈민정음해례본(訓民正音解例本)은 그의 선조 이천(李蕆)이 여진(女眞)을 정벌한 공으로 세종으로부터 직접 받은 것이었다. 이 책의 발견으로 그동안 제기 되어왔던 여러 가지 가설들은 모두 일소 되었고 발음기관 상형설(象形說)이 제자원리(制字原理)였음이 밝혀졌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훈민정음(訓民正音)이 가림토(加臨土)문자을 토대로 탄생하였다는 가설이 존재하고 있다. 이들은 훈민정음(訓民正音)이 가림토(加臨土)문자 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내세우는 기록들이 있다. 세종실록, 훈민정음해례(訓民正音解例)의 정인지 서문, 그리고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최만리 상소문이다. 그곳에는 공통적으로 언문(諺文)이 옛 글자인 전()의 모양을 본떳다는 기록들이 있는데, 이를 가림토(加臨土)문자를 토대로한 것이 아니냐고 한다.

 

<세종실록 144312/30>

是月, 上親制諺文二十八字, 其字倣古篆, 分爲初中終聲, 合之然後乃成字, 凡干文字及本國俚語, 皆可得而書, 字雖簡要, 轉換無窮, 是謂訓民正音》。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諺文) 28()를 지었는데, 그 글자가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고, 초성(初聲중성(中聲종성(終聲)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루었다. 무릇 문자(文字)에 관한 것과 이어(俚語)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요약하지마는 전환(轉換)하는 것이 무궁하니, 이것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고 일렀다.

 

세종(世宗)께서 친히 언문(諺文) 28()를 지었는데, 이를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고 불렀다. 세종(世宗)께서 새로운 문자(文字)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된 시기는 아래와 같이 1426년에 말을 구(求言)하는 교지(敎旨)를 내린 것으로 보아서 알수가 있다.

 

14437/22 임금이 승정원에 이르기를,

이번에 말을 구[求言]하는 교지(敎旨)에 이르기를, ‘밀봉(密封)하여 아뢰게 하라.’ 한 것은, 유사(有司)에게 맡기지 아니하고 친히 보겠다는 말이다. 전날에 김충(金忠)에게 명하여 본원(本院)으로 하여금 말을 구[求言]하는 교지(敎旨)의 구례(舊例)를 상고하여 보고하게 하니, 본원(本院)에서 아뢰기를, ‘지난 병오년에 말을 구하신 교지 외에는 다른 때에 말을 구하신 교지에 밀봉하라는 말씀이 없었사온데, 지금 교서(敎書)에는 밀봉하라는 교지가 있사옵니다.’ 하였으니, 알지 못하겠다.”

 

따라서 훈민정음(訓民正音)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세종(世宗)께서 10여년을 연구한 결과물인 것이다. 그러나 훈민정음(訓民正音)이 음운체계를 갖추고, 문자(文字)로서 확립된 것은 이로부터 3년후인 1446년에 이루어졌다. 일설에는 세종(世宗)께서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친제(親制) 하였는지 의문을 가지고 있지만, 세종(世宗)께서는 직접 언문(諺文) 28()를 지어서 이를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 호칭한 것이므로, 친제(親制)라는 말은 맞는 것이다. 다만 실무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집현전(集賢殿) 학사들의 도움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훈민정음(訓民正音)이 가림토(加臨土)문자를 토대로 하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세종실록의 자방고전(字倣古篆)이란 문구를 가지고 세종(世宗)께서 가림토(加臨土) 글자체(字體)를 모방하여 훈민정음(訓民正音)을 만들었다고 한다.

 

자방고전(字倣古篆), 글자는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였다.” 라는 문구중 고전(古篆)이 가림토(加臨土) 글자체(字體)라고 한다. 전자(篆字)는 진()나라 때의 소전(小篆)이 발전하여 송() 시기에 접어들어 각 지방과 인근 국가들에서 여러 가지로 변형 되어 쓰여지고 있었다. 세종(世宗)께서 가림토(加臨土) 글자체(字體)를 모방하였다면, 고전(古篆)이라고 할 것이 아니라 고문(古文)이라고 표기하는 것이 더욱 합당하다. 아래 최만리(崔萬理)의 상소문을 보자.

 

언문(諺文)은 모두 옛 글자를 본뜬 것이고 새로 된 글자가 아니라고 하시지만, 글자의 형상은 비록 옛날의 전문(篆文)을 모방하였을지라도 음을 쓰고 글자를 합하는 것은 모두 옛 것에 반대되니 실로 의거할 데가 없사옵니다. 만일 중국에라도 흘러 들어가서 혹시라도 비난하여 말하는 자가 있사오면, 어찌 대국을 섬기고 중화를 사모하는 데에 부끄러움이 없사오리까.”

 

최만리(崔萬理)의 말은 세종(世宗)께서 중화(中華)의 옛 전자(篆字)를 모방 하였다고 하였으나, ()과 글자의 조합이 중화(中華)의 옛 전자(篆字)를 근거했다고 볼 수 없다고 하였다. 이에 세종(世宗)께서 이르기를 너희들이 이르기를, ‘()을 사용하고 글자를 합한 것이 모두 옛 글에 위반된다.’ 하였는데, 설총(薛聰)의 이두(吏讀)도 역시 음이 다르지 않으냐. 또 이두를 제작한 본뜻이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 함이 아니하겠느냐. 또 네가 운서(韻書)를 아느냐. 사성 칠음(四聲七音)에 자모(字母)가 몇이나 있느냐. 만일 내가 그 운서(韻書)를 바로잡지 아니하면 누가 이를 바로잡을 것이냐.”라고 하여 중화(中華)의 것을 빌어다가 음()을 변형시켜 사용해온 이두(吏讀)도 그러한데, 내가 창제한 언문(諺文)이 음()이 다르다고 하여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하고 있다. 그러면서 운서(韻書)를 아느냐고 하였다.

 

운서(韻書)는 한자(漢字)를 그 운()으로 분류 주석한 것이다. 운서(韻書)의 효시는 양()나라 심약(沈約)이 사성보(四聲譜)를 지음에서 비롯한 것이라 하나, 운서(韻書)다운 체제를 갖춘 것은 위()나라 이등(李登)이 찬한 성운(聲韻)인듯 하고, 그 뒤에 진()나라 여정(呂靜)이 찬한 집운(集韻) 등이 나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여러 운서(韻書)들을 종합 정리해서 언어정책상 가장 유용하게 활용된 것은 수()의 육법언(陸法言)이 지은 광운(廣韻), ()의 정도(丁度)가 지은 집운(集韻), ()의 황공소(黃公紹)가 지은 운회(韻會) 1202년 편찬, () 나라 태조(太祖)의 명에 따라 편찬한 홍무정운(洪武正韻) 1375년 편찬 등이 있다. 따라서 세종(世宗)께서 말하는 운서(韻書)1375년에 편찬된 홍무정운(洪武正韻)이다.

 

신숙주(申叔舟)의 홍무정운(洪武正韻) 서문(序文)우리 세종 장헌대왕께서 운학(韻學)에 유의하시어 끝까지 궁구하여 훈민정음(訓民正音) 몇 십 글자를 만들어 놓으시니, 사방에 있는 만물의 소리를 전하지 못할 것이 없으며, 우리 동방 선비가 비로소 사성(四聲)칠음(七音)을 알게 되어 저절로 갖추지 못할 것이 없으며, 특히 자운(字韻)에만 한정될 뿐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는 세종(世宗)께서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창제 하실 때 중화(中華)의 운서(韻書)를 참고 하였다는 사실을 알수가 있다.

 

세종(世宗)께서 친히 언문(諺文) 28()를 지었는데, 이를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고 불렀다. 라고 하였는데, 언문(諺文)은 무엇인가? 최만리(崔萬理)가 말하길 신라(新羅) 설총(薛聰)의 이두(吏讀)는 비록 야비한 이언(俚言)이오나, 모두 중국에서 통행하는 글자를 빌어서 어조(語助)에 사용하였다. 이두(吏讀)는 시행한 지 수천 년이나 되어 부서(簿書)나 기회(期會) 등의 일에 방애(防礙)됨이 없사온데, 어찌 예로부터 시행하던 폐단 없는 글을 고쳐서 따로 야비하고 상스러운 무익한 글자를 창조하시나이까.”라고 하였다. 이두(吏讀)는 야비한 이언(俚言)이라 하였는데, 이어(俚語)란 사투리 또는 야비하고 속된 말을 지칭한다. 우리말을 훈민정음(訓民正音) 본문에서는 국지어음(國之語音)’이라 하였고, 해례(解例) 종성해(終聲解)에서는 언어(諺語)’ 또는 ()’이라 하였으며, 합자해(合字解) ()과 정인지(鄭麟趾)의 서문에서는 방언이어(方言俚語)’라고 하였다. 따라서 이두(吏讀), 이언(俚言), 방언(方言)은 모두 같은 뜻이다.

 

언문(諺文)에 대해 살펴보면, ()자는 일찍부터 교훈(敎訓)이나 풍자(諷刺)등이 들어 있는 격언(格言) 혹은 예부터 내려오는 지혜가 담긴 멋진 속담(俗談) 등의 뜻으로 써온 글자로, 고언(古諺)이나 귀언(貴諺)으로 쓰여왔다. 그런데 이 언()자가 논어(論語), 맹자(孟子) 등의 경전들이 생겨난 이후, 중국(中國)에서는 리언(里諺: 촌스러운 말), 야언(野諺: 거친 말)이라는 말에도 쓰이게 되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언문(諺文)은 향찰, 토씨 글자, 이두문(吏讀文)을 이르는 말이다. 세종(世宗)께서 예부터 쓰여왔던 언문(諺文)을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익혀 쓰도록 새롭게 언()을 위한 문()인 소리글 28()를 지었던 것이다.

 

따라서 훈민정음(訓民正音)의 탄생은 세종(世宗)께서 예부터 쓰여왔고, 존재하던 언문(諺文)인 향찰, 토씨 글자, 이두문(吏讀文) 등을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익혀 쓰도록 하기 위해서 새롭게 중화(中華)의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고 음()을 초성(初聲중성(中聲종성(終聲)으로 나누어 조합하여 소리글 28()를 지었던 것이다. 또한 언문(諺文)을 정음(正音)이라고도 했던 이유는 곧 한글이 뛰어난 언문(諺文)일 뿐만 아니라, 바로 우리말 한자(漢字)’를 위한 정음(正音)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훈민정음(訓民正音)의 탄생이 이러할진데, 이를두고 고조선(古朝鮮) 문자(文字)라는 가림토(加臨土) 글자체(字體)를 모방하였다는 주장은 무엇이란 말인가?

 

지금까지 우리민족의 고대 문자(文字) 가림토(加臨土)가 존재 하였다는 여러 가지 증거들을 분석한 결과 그에 대한 해답을 찾을수 없었다. 다만 내몽고 및 동만주(東滿洲)에 거주하던 우리 민족계열 종족들이 의사를 전달하는 매개체로서 부호문자(符號文字) 및 갑골문(甲骨文)까지 사용 하였음을 유적으로 입증 되었음을 알았지만, 그 이후 부여(夫餘)나 고구려(高句麗)는 어떠한 문자(文字)를 사용 하였는지를 알수있는 유적이나, 유물이 발견되지 않아 이점이 아쉽다. 그러나 다행히도 세종(世宗)께서 우리글인 한글을 창제 하셨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우리민족의 최대 선물이다.


http://cafe.daum.net/alhc/ALGC/3827 






漢字는 단군왕검 때 만든 문자일 가능성이 크다 (4부)
갑골문자보다 천년이나 빠른 골각문자의 주인공도 동이족
 
편집부 기사입력  2016/07/20 [13:20]
현재 사용하고 있는 한자의 기원은?
 
중국은 현재 쓰고 있는 문자인 한자를 황제헌원 때 창힐(동이족)이 새와 짐승들의 발자국을 보고 창안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공자의 7대손 공빈(孔斌)이 쓴 <동이열전(東夷列傳)>에 의하면 그러한 중국의 주장은 완전 허구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황제헌원이 스승인 동이의 자부선인(紫府仙人)에게 녹서(녹도문자)로 된 내황문(삼황내문경)을 배워왔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동방에 오래된 나라가 있는데 동이(東夷)라 한다. 훌륭하신 분인 <단군>이 계셨는데 구이(九夷)의 추대를 받아 임금이 되셨다. 요임금 때의 일이다. 순임금은 동이에서 태어나 중국으로 와서 임금이 되어 훌륭한 정치를 하였다. 동이(東夷)에는 자부선인(紫府仙人)이라 하는 훌륭한 분이 계셨는데 '황제헌원'이 문하에서 내황문(內皇文)을 배워와 '염제신농'의 뒤를 이어 중화의 임금이 되었다. (東方有古國 名曰東夷 星分箕尾 地接鮮白 始有神人 檀君 遂應九夷之推戴而爲君 與堯병立 虞舜 生於東夷 而入中國 爲天子至治 卓冠百王 紫府仙人 有通之學 過人之智 黃帝受內皇文於門下 代炎帝而爲帝)
 
위 내용을 <태백일사 소도경정본훈>이 상세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삼황내문경(三皇內文經)>은 자부선생이 황제헌원에게 주어 그로 하여금 맘을 씻고 의로움으로 돌아오게 한 것이다. 선생은 일찍이 청구국(배달국) 대풍산의 남쪽에 있는 삼청궁에 사셨다. 헌원이 몸소 치우를 배알했는데 가는 길에 명화(지명)를 거치게 되어 소문을 듣게 된 것이다. 경문은 신시의 녹서(鹿書:녹도문자)로 기록되어 세 편으로 나뉘어져 있다. 후세 사람들이 추연하고 주(註)를 더하여 따로 신선음부의 설이라고 한 것이다.”이는 황제헌원 이전에 이미 신시의 녹서라는 문자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위 문자의 기원은 배달국 1대 환웅천왕 때 만든 태고문자(太古文字)일 가능성이 크다. <태백일사 신시본기>에 "환웅천왕이 신지 혁덕(神誌赫德)에게 명하여 문자를 만들게 하였다. 신지는 명령을 전하는 직책을 맡고 출납하는 임무를 전담하고 있었는데, 모든 명의 출납을 육성에 의존했을 뿐 문자로 기록하는 방법이 없었다. 어느 날 사냥을 나갔는데 암사슴을 보고 활을 쏘려했으나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종적을 놓치고 말았는데, 사방을 수색하다가 사슴의 발자국을 찾게 되어 사슴이 도망간 곳을 알게 되었다. 이에 '기록으로 남기는 법은 오직 이것뿐이다.'라고 크게 깨달고는 만물의 모양을 관찰하여 문자를 만들게 되었다. 이를 태고문자의 시작이라 한다. 그런데 그 문자는 편리하지 못했기 때문에 후세에 와서는 다 사라져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태고문자는 한자처럼 형상을 나타내는 문자로 사슴 발자국을 보고 만든 녹도문자 즉 녹서(鹿書)임을 알 수 있다.
 
또한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에 의하면, “신시에는 녹서(鹿書)가 있고, 태호복희에게는 용서(龍書), 자부선인에게는 우서(雨書), 치우에게는 화서(花書), 단군에게는 신전(神篆)이 있었으니 이들 글자는 널리 쓰여졌다. (중략) 지금 그 글자의 근원으로 삼는 것을 보면 모두 신시에서 전해진 법이며 지금의 한자도 그 지류를 계승한 것이 명백하다.”고 기록되어 있어 신시시대에 상형문자가 만들어진 이후 여러 번 글자모양이 바뀌었는데 사용이 불편해 나중에는 다 없어졌다고 한다. 
 
위 기록에서 보듯이, 황제헌원은 환웅천왕 때 만들어진 녹서로 쓰여진 내황문을 배워서 가져다가 썼을 뿐인데 어찌 헌원의 신하 창힐이 지금 한자의 기원인 문자를 만들었다는 말도 안 되는 역사왜곡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또한 중국은 은나라 유적지에서 발견된 갑골문(甲骨文)을 현 한자의 기원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 역시 대단히 잘못된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 죽간에 씌여져 있는 황제내경의 원책     © 편집부

단군왕검에 의한 문자 창제
 
그렇다면 지금의 한자의 기원을 찾아가 보기로 하겠다. <단군세기>에 "명을 내려 팽우(彭虞)에게 토지를 개간하게 하시고, 성조(成造)에게 궁실을 짓게 하시고, 고시(高矢)에게는 농사를 장려하도록 맡기셨고, 신지(臣智)에게 글자를 만들게 하셨다. 기성(奇省)에게는 의약을 베풀게 하시고, 나을(那乙)에게는 호적을 관장하게 하시고, 희(羲)에게 괘서를 주관하게 하시고, 우(尤)에게 병마를 관장하게 하셨다. 비서갑에 사는 하백의 따님을 맞이하여 황후로 삼고 누에치기를 맡게 하시니, 백성을 사랑하시는 어질고 후덕한 정치가 사방에 미치어 태평해졌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나라인 조선(朝鮮)을 세운 단군왕검 때 새로운 문자가 창제되었다는 말인 것이다. 단군왕검께서 신지에게 명하여 문자를 만들라고 명하셨는데 이 문자가 배달국에서 대대로 내려오던 녹서를 개량한 것인지, 아니면 획기적인 새로운 문자였는지는 확실치는 않으나 여하튼 지금 한자의 기원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또한 신시시대에 만들어진 문자가 사용하기 불편하다보니 다 없어졌다고 하는데, 그 시기는 단군왕검 때로 보이는데 그 이유는 이전보다 훨씬 편리한 새로운 문자를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나을에게 호적을 관장하게 했다고 하는데, 이는 편리한 문자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67년 갑오(B.C2267년) 단군왕검께서는 신하였던 순임금의 나라에 홍수가 크게 나자 태자 부루를 파견하여 도산(塗山)에서 순임금이 보낸 우사공(虞司空:하 시조)을 만나 오행치수의 방법을 전해주었다고 하는데, 이 역시 어떤 문자가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에 "창기소라는 사람이 자부선생이 만든 칠성력의 법을 재연하여 이로써 ‘오행치수’의 법을 밝혔다. 순임금 사람인 사우(하 시조)는 회계산에 이르러 조선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자부선인을 통해 창수 사자 부루를 뵙기를 청하여 <황제중경(黃帝中經)>을 받으니 이것이 신시황부의 중경이다. 우임금이 이를 취하여 쓰니 치수에 공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역시 단군왕검이 만든 편리한 문자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또 2세 부루단군 10년 경술(B.C2231년) “밭을 나누고 밭문서를 만들어서 백성들로 하여금 사사로운 이익을 구하지 않도록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밭문서를 만들 정도로 편리한 문자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드디어 "3세 가륵단군 2년 경자(B.C2181년)에 지방마다 서로 말이 틀리고 형상으로 뜻을 나타내는 참글(眞書)이 있다 해도, 열 집 사는 마을에도 말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백 리 되는 땅의 나라에서도 글을 서로 이해키 어려웠다. 이에 삼랑 을보륵에게 명하여 정음(正音) 38자를 만들어 이를 가림토(加臨土)라 하니 그 글은 다음과 같았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가림토문자가 나오기 이전에는 상형문자인 진서(眞書:한자)로 모든 문서를 쓴 것으로 보인다.
 
1년 후인 B.C 2180년 “신지 고글에게 명하여 <배달유기>를 편수케 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당시 일년 전에 만든 소리글자인 가림토 문자로 기록한 것 같지는 않고 아마 뜻글자인 진서(한자)로 역사책을 편찬했을 것으로 보인다. 역사책이란 소리글자로만 쓰면 정확한 뜻을 이해하기가 어려운 법이기 때문이다.  
 
위 기록들로 볼 때, 조선 초기에 광범위하게 문자가 쓰였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사용하기 불편한 배달국 때의 녹서(鹿書)를 대폭 개량한 획기적인 상형문자인 진서(眞書)를 단군왕검 때 새로 만들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진서가 지금 한자의 기원이 아닌가 생각된다. 물론 진서의 오리지날은 배달국 환웅천왕 때 신지 혁덕이 만든 녹서(鹿書)일 것이다. 

중국에서는 은나라 때의 갑골문자가 현 한자의 기원이라고 하나, 하(夏)나라와 은(殷)나라도 동이족의 나라였으니 또한 모두 단군왕검의 후손들이었다. 그들이 원래 있던 편리한 문자를 안 쓰고 새로운 문자를 창제해 썼을 리가 없다. 게다가 중국 기록에 은나라 때 문자를 만들었다는 기록도 없을 뿐만 아니라, 조선은 이들 나라와 서로 가깝게 있었기 때문에 단군왕검 때 만든 문자(한자)를 나중에 은나라가 가져가 쓰다가 그것이 갑골문자로 남겨져 유물로 출토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 갑골문보다 천년을 앞서는 산동성 창러에게 발견된 골각문자     ©편집부
산동성 창러(창락)에서 갑골문보다 1,000년이나 앞서는 골각문자가 발견되었다. 중국 언론에 따르면, 중국 고고학자들은 "당시 산둥 지역은 한민족을 포함한 동이(東夷)족들이 집단으로 거주했기 때문에 이 골각문자는 동이문자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고, "문자의 모양도 고대 상형문자인 동이문자 계열에 속한다. 은허 지역에서 발견됐던 갑골문자도 동이족의 골각문자가 발전한 형태일 가능성이 크다”고 강조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漢字는 단군왕검 때 만든 문자일 가능성이 크다 (4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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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명 관리자 email gukhak@gukhak.org
작 성 일 2009-07-20 13:44:14 조 회 수 1780
제 목 後漢書 東夷傳의 새로운 해석을 통한 東夷 인식
내 용

<東夷 관련 토론> 개요(2009년 7월 15일 수요일)

- 제목 : 後漢書 東夷傳의 새로운 해석을 통한 東夷 인식

 

1. 後漢書의 사료 가치

 

  398년에 山陰(지금의 浙江省 紹興)에서 태어난 范曄은 420년 宋이 건국된 뒤 尚書外兵郎, 新蔡太守, 尚書吏部郎, 秘書監 등을 역임했지만 傲慢한 성격으로 인하여 관직 생활은 그다지 순탄하지 않았다.

432년 宣城太守로 좌천되며 范曄은 10卷의 本紀와 80卷의 列傳으로 된 後漢書의 집필을 시작하였고, 그 뒤 左衛將軍 및 太子詹事 등을 역임하면서 10여년 동안 後漢書의 저술에 몰두하였다. 그러나 445년 宋 文帝의 彭城王 劉義康을 皇帝로 옹립하려 시도하다가, 徐湛之의 密告로 사로잡혀 처형되고 말았다.

范曄의 死後 梁의 劉昭가 司馬彪가 저술한 續漢書에서 律曆, 禮儀, 祭祀, 天文, 五行, 郡國, 百官, 輿服 등의 八志 부분에 註釋을 붙여 30卷의 補注後漢志를 편찬하여 後漢書에 첨부하였다. 이로써 本紀 10卷, 列傳 80卷, 志 30卷으로 이루어진 後漢書의 체재가 완성되었다.

後漢書는 光武帝(재위 25~57년)부터 献帝(재위 189~220년)까지 後漢 13代 196년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데, 중국 역대 왕조의 正史인 二十五史 가운데에서도 司馬遷의 史記, 班固의 漢書, 陳壽의 三國志와 함께 四史로 일컬어지며 중시된다.

後漢書 卷85의 東夷列傳은 陳壽의 三國志 魏書 卷30 烏丸鮮卑東夷傳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일부 새로운 사실도 있으며, 한국 古代史 연구에 중요한 史料로 활용되고 있다.

특히 東夷列傳에서 東夷의 개념에서 시작하여 東夷의 전반 역사를 정리하고 있는데, 한국 고대사를 제대로 정립하기 위해서는 이 부분을 비판적으로 신중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2. 四史의 한국 고대사 관련 기재 비교

 

<표1>. 四史의 비교

사서

저자 생몰 년대

사서 저술 년대

서술대상 역사

한국사 관련 서술 부분

史記

司馬遷

(BC135~BC90년)

BC104~BC91년

黃帝~漢 武帝

(?~BC101年)

朝鮮列傳

漢書

班固

(32~92년)

54~82년

前漢~王莽

(BC206~24년)

朝鮮傳

三國志

陳壽

(233~297년)

280~290년

三國時代

(220~265년)

魏書東夷傳

後漢書

范曄

(398~445년)

432~445년

後漢

(25~219년)

東夷列傳

 

위의 <표1>에 대한 분석을 통해, 다음과 같은 몇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1)史記와 漢書의 朝鮮 인식을 알 수 있다.

史記와 漢書는 朝鮮列傳 및 朝鮮傳에서 “燕人 滿이 朝鮮의 왕이 된 사실에서부터 시작하여, 漢 武帝가 朝鮮과 벌인 전쟁의 과정과 그 전쟁으로 인한 朝鮮의 멸망 그리고 그 전쟁의 功過에 따른 상벌”까지 기록하고 있다.

漢書는 史記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 놓았는데, 몇 글자가 첨삭되었을 뿐 내용에 변화는 없고, 단지 漢書에는 史記의 기록에 없는 四郡의 명칭이 구체적으로 기록된 것이 크게 다른 점이다.

史記는 列傳의 형식을 빌어 匈奴, 東越, 南越, 朝鮮, 西南夷 등 漢의 사방에 있는 여러 국가와의 관계를 서술하고 있다. 그 중 朝鮮列傳은 漢의 동북방 강역 등을 이해하는 중요한 기록이다.

史記와 漢書의 朝鮮列傳에는 漢이 燕을 멸망시키고 지금의 北京 일대와 灤河 以西 지역을 일시적으로 점유하게 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史記와 漢書의 朝鮮 관련 기록 일부 분석(별첨 사료 참조)

 

2)三國志 魏書東夷傳에서 처음으로 東夷傳이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三國志에서 東夷傳을 처음 기록할 수 있었던 시대적 배경에 대한 분석(별도 설명 참조)

 

3)後漢書 東夷列傳에서 東夷의 개념과 역사에 대한 구체적 서술이 시도되었음을 알 수 있다.

三國志 편찬 이후 140여년 뒤에 저술된 後漢書의 東夷列傳은 三國志 東夷傳의 내용을 대부분 그대로 옮겨 놓았지만, 列傳의 서문에 해당하는 부분은 그 내용을 보충하였다.

이 부분의 내용은 東夷의 개념에서 시작하여 東夷의 역사를 서술하며, 秦의 통일로 淮水와 泗水의 東夷가 소멸되는 과정과 秦始皇 死後와 漢 武帝 시기 및 그 이후 東夷의 변화를 서술하고 있다.

⇒後漢書 東夷列傳에 실린 東夷 인식 분석(별첨 사료 참조)

 

 

3. 後漢書 東夷列傳에 나타난 東夷에 대한 새로운 해석

 

중국에서의 東夷 연구 전문가인 山东大学 美术考古研究所 所长인 刘凤君은 최근 《창락골각문과 수양산 암서 상호 증명[昌乐骨刻文与首阳山岩书互证]》이란 글을 발표하며 “사실 上古時代에 東夷民族은 중국인과 일본인 및 한국인의 공동 조상이다.”라고 밝힌 바 있다(2009년 7월 8일자 人民网).

좁은 의미에서의 上古史의 東夷는 山東半島로부터 淮水 유역에 거주하였던 嵎夷․淮夷․萊夷․徐戎 등을 가리킨다. 넓은 의미에서 보면 東夷는 渤海․黃海를 둘러싼 오늘의 중국 江蘇省, 山東省, 河北省, 遼寧省, 吉林省, 黑龍江省 및 한반도 일대에 분포되어 살던 民族을 말한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東夷族은 서쪽의 華夏族과 더불어 古代 中國民族을 형성한 근간이었던 동시에 韓國上古史의 주인공인 韓․濊貊系가 그 주류를 이룬 종족인 까닭에, 이에 대한 연구는 韓中 양국의 민족형성사 연구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중국은 고대로부터 東夷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졌고 많은 기록을 남겼음은 물론 현재까지 활발하게 연구하고 있다. 고대에 嵎夷의 지역으로 알려진 산동성 靑州市는 현재 东夷文化生態园을 건립중이며 靑州市, 桓台縣, 烟台市, 青島市, 日照市 등과 강소성의 連雲港 등 각지의 박물관 및 유적지에서는 漢族과 차별화되는 東夷에 의미를 부여하며 그 문화를 전시하고 있다. 또한 작년 3월 30일 山东大學, 山东師範大學, 山东省社會科學院, 山东省历史學會가 주최하고 青州市가 주관하는 東夷文化硏究討論會를 靑州市에서 개최하는 등 東夷와 관련된 깊이 있는 연구를 꾸준히 진행하고 있다. 또한 2007년에 山東省 昌樂縣에서 殷墟의 甲骨文보다 천여년을 앞서며 東夷文化의 초기 문자일 가능성이 높은 东夷甲骨文을 발견하여 “中國文字史 중 하나의 중대 발견”으로 평가하였으며, 2008년 7월 30일 중국문자 연구의 권위 있는 전문가인 王宇信 교수 등이 昌樂에 모여 이 東夷文字가 河南 安陽의 殷墟甲骨文보다 이른 시기에 작성되었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였고 아울러 이들 문자를 다른 문자와 구별하기 위하여 ‘昌樂骨刻文字’로 명명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여러 분야에서 東夷의 문화에 대해 다양한 논의와 연구가 진행되고 있으며, 현재 중국 전역에서 벌이는 제3차 전국문물일제조사와 맞물려 東夷의 유적에 대한 발굴작업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韓致奫(서기 1765~1814년)이 『海東繹史』에 東夷 관련 문헌기록을 요약 정리하여 소개하는 등 일찍부터 관심을 가졌지만, 현재까지 東夷에 대한 연구성과는 만족스럽지 못한 실정이다. 金庠基(1947)는 東夷는 원래 중국의 서북부에 있다가 동쪽으로 이동하며 한 갈래는 山東半島 쪽으로 들어가고 다른 한 갈래는 다시 東進하여 渤海灣을 따라서 遼東 지방을 거쳐 韓半島에 들어오게 되었다는 韓․濊․貊의 이동설을 발표하였고, 뒤이어 金庠基(1954)는 종족으로서 광의의 東夷 개념을 정의하며 淮夷 및 徐戎 등과의 관계를 분석하여 東夷에 대한 학계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후 여러 학자들이 한민족의 형성이나 濊貊과 관련하여 東夷를 언급하기도 했고, 고고학 영역에서 東夷를 다루기도 했으며, 중국 문헌의 東夷傳에 기록된 東夷를 분석하여 그 개념을 정의하는 연구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 연구성과는 실로 미미하였다.

한국 上古史에서 東夷 연구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제대로 연구되지 못했던 이유는 대체로 다음 두 가지를 상정할 수 있다.

첫째, 東夷의 중심세력이었던 우리 민족이 後期 新羅 이후 국력이 크게 약화되고 특히 朝鮮時代에 접어들어 당당하게 東夷族의 후예임을 내세우지 못하고 중국의 亞流인 小中華를 자처함으로써 東夷의 역사와 문화를 감추고 은폐하는데 스스로 앞장섰기 때문이다.

둘째, 일제강점기 36년을 거치면서 그나마 얼마 남지 않은 古代史 자료들마저 인멸되고 또 사대적 역사학자들은 일제 植民史觀의 영향으로 民族魂과 自主意識이 극도로 빈약해졌기 때문이다.

申采浩가 “朝鮮史는 內亂이나 外寇의 兵火에서보다 朝鮮史를 著作하던 其人들의 손에서 蕩殘되었다 하노라.”라고 비판했듯, 우리 上古史의 중요한 부분인 東夷史는 한편으로는 중국의 中華主義에 의해 제대로 밝혀지지 못했지만, 더 중요한 요인은 오랜 事大의 역사 속에서 우리가 주체적으로 연구하지 못한 원인으로 인하여 그 실체가 밝혀지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그동안 東夷가 누구인지 또 우리 한민족과 東夷는 구체적으로 과연 어떤 관련이 있는지 東夷의 정확한 역사적 실체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지내왔다.

일본의 八木獎三郞은 “夏商周 三代의 東夷는 舊東夷이고 秦漢 이후 滿洲 및 朝鮮 등의 東夷는 新東夷로서 新東夷인 우리 한민족은 秦漢 이전 중국의 舊東夷와는 무관한 것”처럼 주장하는 견해를 발표하기도 하였는데, 현재 한국의 상당수 학자들이 이런 견해에 동조하고 있는 실정이다.

 

紅山文化는 물론 중국 河北省과 山東省 일대의 고고자료를 통해서, 중국 사서에 남겨진 기록들을 통해서 이제 東夷의 實體가 충분히 드러날 수 있는 여건이 되었다. 그 동안의 관점과 편견을 극복하고 東夷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통해 한국 상고사를 체계화시켜야만 한다.

⇒歷史地理學 관점, 고고학 관점에서 東夷의 강역과 문화(별도의 부연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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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골문자보다 천년 앞선 동이(한민족) 골각문자 발표 - 중국학자들|한글과 한자
미래를 위하여|조회 9597|추천 6|2008.10.24. 15:30http://cafe.daum.net/121315/CH9M/33 

 

 

[밝은 앞날][꿈은 이루어진다][꿈은 미래의 현실이다]


백두산 천지

 

[ 과거현재미래를 위해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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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지역은 석관묘(돌로 관을 만든 묘)의 주요 분포지역이고

또한 고인돌, 비파형동검 등 한민족 고대전통문화의 지역. 

 

 

 

 비파형 동검

 

 



 

 

중국 산동성에서 은나라 갑골문보다 천년(1000년) 더 오래된 문자가 발견되었다는 사실이 발표되었다.

 

 

 

 

 

 

 

 

 

만주와 중국 동해안에서 은나라 갑골문 보다 더 오래된 글자들이

많이 발견되었다는 것은 예전부터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중국학자들이 중국동해안의 고대문자를 공개했다.

물론 그 문자들의 극히 일부만 보도되었다. 

 

하지만 상당한 의미가 있는 것이 

언론 기사에 중국 고고학자들이

 

" 당시 산둥 지역은 한민족을 포함한 동이(東夷)족들이 집단으로 거주했기 때문에

이 골각문자는 동이문자로 봐야 한다고 주장" 했고

“문자의 모양도 고대 상형문자인 동이문자 계열에 속한다”고 지적했고 

은허 지역에서 발견됐던 갑골문자도 동이족의 골각문자가 발전한 형태일 가능성이 크다”고 강조했다는 것.

 

“문자의 모양도 고대 상형문자인 동이문자 계열에 속한다”는 말은

이미 많은 수의 동이문자 들이 이미 발견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동이문자 계열]이라는 표현이 나온 것.

 

은나라 갑골문도 고대한민족의 글자를 배워간 것이라는 주장.

 

한자의 기원이 고대한국에 있다는 말.

 

고대한국의 문자가 중국한자의 기원이라는 말.

  

 

이에 대한 언론기사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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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골문자보다 1000년 앞선 골각문자 발견

4000 ~ 4500년 전 추정 … 동이족 문자 가능성

 

[중앙일보 2008.10.22]

 

 

중국 최초의 문자로 알려진 갑골(甲骨)문자보다 1000년이나 오래된 것으로 보이는 새로운 문자가 발견됐다.

갑골문자는 중국 고대 상(商·BC 1600~1046년)나라의 수도인 은허(殷墟·허난성 안양현)에서

1899년 처음 발견된 이후 중국 최초의 문자로 인정받아 왔다.

산둥(山東)대 고고미술학연구소 류펑쥔(劉鳳君) 소장이 최근 중국 고고학 관계자들을 초청한 세미나에서

갑골문자 이전에 다른 형태의 골각(骨刻)문자가 산둥성 창러(昌樂)현 지역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밝혔다고

홍콩 문회보(文匯報)가 21일 보도했다.

 

류 소장은 중국 고고미술학의 창시자로 학계의 명망이 깊은 학자다.

이 자리에 참석한 사회과학원 왕위신(王宇信) 교수 등 은상문화협회(殷商文化協會) 관계자 5명은

모두 류 소장의 학설에 동의했다고 이 신문은 전했다.

세미나에서 이 문자는 ‘창러골각문’으로 이름 붙여졌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산둥성에서 발견된 신석기 시대 유물로 추정되는 골각문자(左), 중국 최초의 문자로 알려진 갑골문자(右).

 

류 소장은 산둥성 민간 소장가인 샤오광더(肖廣德)가 2004년부터 최근까지 창러현 지역 주변에서 수집한

수백 개의 골각문자를 연구한 결과 이 같은 결론을 내렸다고 설명했다.

류 소장에 따르면 이들 도안은 소의 어깨뼈와 사슴·코끼리 뼈에 새겨져 있었다.

도안의 형태는 다양했다.

뼈 한 곳에 100여 개의 서로 다른 도안이 새겨진 것도 있고, 1~2개의 도안만 새겨진 뼈도 있다.

여러 개의 도안은 세로로 정렬돼 있어 특정 사안을 기록한 문자로 봐야 한다는 게 류 소장의 주장이다.

단순한 그림일 경우 이처럼 정렬된 형태로 나타날 수 없다는 것이다.

점복(占卜)기록인 갑골문자와 달리 골각문자에선 점복의 흔적이 나타나지 않았다.

류 소장은 “뼈의 색깔과 석화(石化) 상태를 판단해 볼 때 문자를 새긴 연대는 4000~4500년 전으로 보이며,

이는 중국 산둥성의 룽산(龍山) 신석기 시대에 해당된다”고 말했다.

함께 출토된 뼈로 만든 칼과 송곳은 전형적인 룽산 중·후기 시대의 도구들이었다.

중국 고고학자들은 당시 산둥 지역은 한민족을 포함한 동이(東夷)족들이 집단으로 거주했기 때문에

이 골각문자는 동이문자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류 소장은 “문자의 모양도 고대 상형문자인 동이문자 계열에 속한다”고 지적했다.

류 소장은 이어 “안양(安陽)을 중심으로 한 은허 지역에서 발견됐던 갑골문자도 동이족의 골각문자가 발전한 형태일 가능성이 크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20세기 중국 고고학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이 갑골문자 발견이었다면

이번 골각문자 발견은 중국 역사를 지금보다 1000년 이전으로 돌리는 21세기 중국 고고학의 역사적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홍콩=최형규 특파원

http://news.joins.com/article/3346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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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호(少昊)족은 지금의 산동반도 

소전(少典)족은 지금의 서안,함양 지역에 있었다.

 

고대한국 사람들이 건너가서 그 지역 원주민들에게 문명을 전하며

공동체를 이룬 것이 소호(少昊)족과 소전(少典)족.

 

소(少)라는 말은 적다 즉 드물다, 귀하다는 뜻.

아무데나 널려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

 

소(少)라는 글자는 한강, 대동강, 압록강변에 있었던 (지금도 일부 남아있는)

[고대한국 3연성 중심 피라미드]를 뜻하는 글자로 본다. 

 

피라미드는 동이(東夷)민족의 것 - 설문해자 <- 관련글

 

즉 소호(少昊)나 소전(少典) 모두 고대한국 중심지에서 간 사람들이

그 곳 원주민에게 문명을 전하면서 공동체를 이룬 것.

 

중국의 시조로 통하는 [황제헌원씨]는 [소전의 아들(少典之子)]로 불리는데

이는 홍산문화를 통해서 서안,함양으로 이동한 고대한국인의 후손이라는 말로 본다.

지금의 교포2세, 3세 하는 식으로.

 

[염제신농씨(강신농씨)] 역시 [소전의 아들(少典之子)]로 불리는데

또한 [황제헌원씨]와 같은 경우로 본다.

 

중국인들은 자신들을 [염황지손(炎黃之孫)]이라 불러왔는데

이는 [염제신농씨]와 [황제헌원씨]의 자손이라는 말.

그런데 사실은 중국인들에 있어서 [염제신농씨]와 [황제헌원씨]는

핏줄의 선조인 면은 적고 문명의 선조인 면은 많다.

현 중국인들보다 현 한국인들이 [염제신농씨]와 [황제헌원씨]의 혈통과 더 가깝다.

 

이는 약 4~6천년전 아프리카계로 보이는 많은 수의 [지나족(가칭)]들이 중국 남부로 들어왔고  

약 2천년전 한나라 시대를 전후하여 중국 남부의 지나족들이

대거 중국에 편입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때 [중국인]들의 혈통이 많이 바뀌었다.

현 중국의 [한족]이 실제로 형성된 것은 약 2천년 정도밖에 안된다 하겠다.

 

한족(漢族)의 비밀  <- 관련글

 

5천년전인 [태호 복희씨]는 [염제신농씨]보다 더 전이지만

[동방의 인물]로 유명하기 때문에 중국인들은 대체로 자신들을 그냥 [염황지손(炎黃之孫)]이라 불러왔다.

이는 아마도 그들 생각에도 [태호 복희씨]가 [한반도-만주] 출신임이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이리 보면 고대 중국 지도자는 

[염제신농씨] -> [황제헌원씨]-> [소호금천씨]-> [제곡고양씨]-> [제곡고신씨] -> [요임금] -> [순임금]으로 이어지고  

그 후에 [하나라 -> 상(은)나라 ->주나라]로 이어진다.

 

상나라(은나라)는 대강 3천6백년전부터 3천년전까지 존재.

 

 

                   상나라(은나라) 전성기 영역도



 


은나라 당시 고조선의 영역이었던 중국 동해안을 중국역사책은 인방(人方)이라고 많이 기록하는데

이는 [인(人)의 지역] 이라는 말.

 

大라는 한자는 원래 [고대한국 중심의 훌륭한 사람들]을 그린 것이고

人이라는 글자는 그 사람들에게 교화된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는 동이(東夷) 즉 고대한국인을 뜻하는 글자인 [이(夷)]자를 보아도 알 수 있다.

 

[夷(이)-갑골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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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www.internationalscientific.org/CharacterASP/CharacterEtymology.aspx?characterInput=%E5%A4%B7&submitButton1=Etym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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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夷(이)-갑골문]은 고대한국인(大)가 주변지역 사람들(人)을 교화하는 모습.

단군신화에서 곰토템 부족(熊:웅)이 인간다운 인간인 인(人)이 되었다는 것도 이러함을 뜻한다.

동물 곰이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말하자면 '짐승 같은 사람들'이 '사람다운 사람'이 되었다는 것.

 

물론 단군신화는 [한반도-만주]의 일을 중심으로 기록한 것이겠지만

고대한국지도자들의 문명전파는 [한반도-만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세계적인 문명전파가 된다.

이는 [홍익인간]이라는 4자로 표현되어 있고

세계 학계에서는 이미 7천년전부터 시작된 [아리안의 이동]을 주목하게 한다.

 

[아리안의 이동]은 [게르만의 이동]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세계문명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프랑스어, 영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등 거의 모든 유럽어가 아리안의 말을 모태로 한다.

아리안어족은 인도-유럽어족이라고도 불린다.

http://krdic.naver.com/detail.nhn?docid=30864000

 

아리안에 대해서는 시간을 두고 차차 정리하기로 한다.

수메르인, 이집트 고대왕조, 인도의 브라만 등 거의 모든 고대문명은 

아리안을 모태로 한다.

 

아리수 - 아리랑 - 아리안 

 

아리 아리 동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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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夷(이) - 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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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夷(이) - 전서]는 활(弓)의 원조이고 잘 다루는 고대한국인(大)을 뜻한다.

 

중국 최고의 한자사전이란은 [설문해자]도 [夷(이)]자는 大에서 유래되었고 

사람의 형상을 본뜬 글자라 쓰고 있다.(東夷從大大人也)

 

大자는 고대한국인을 뜻하는 글자 (간략정리) <- 관련글 (누르시면 열립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5~6천년 전에는 지구기온이 높아서 지형도가 대략 위와 같았다.

 

산동반도로 전해진 문명이 소호(少昊)문명이고

(물론 산동반도에는 그 이전에도 고대한국문명이 많이 전해진다.

그 중 하나가 대문구문명(大汶口文明 (약 6500년전 이미 시작))

 

서안,함양으로 전해진 문명이 소전(少典)문명.

 

고대한국 피라미드가 홍산, 서안(장안), 함양으로 전파되다.  <- 관련글

 

중국고대사는 소호(少昊)족과 소전(少典)족의 어우러짐으로 이루어진다.

소전(少典) 출신 지도자는 [염제신농씨(강신농씨)], [요임금] 등이고

소호(少昊) 출신 지도자는 [소호금천씨], [전욱고양씨], [순임금] 등인데

 

순임금이 동이족(고대한국인) 출신으로 유명한 것은

그가 [한반도-만주]와 가까운 소호(少昊) 출신이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물론 요임금 역시 동이족의 후손이지만

소전(少典)은 소호(少昊)보다 비교적 고대한국으로부터 독립하려는 성향이 강했다고 본다.

 

[요임금이 순임금에게 왕위를 직접 계승한 일]은

단지 친아들이 아닌 인물에게 왕위를 계승했다는 부분만이 아니라    

소전(少典) 출신 지도자가 소호(少昊) 출신 인물에게 왕위를 계승시켰다는 데 큰 저기가 있다 하겠다.

 

말하자면 이는 본국(本國)인 고대한국에 대한 마음이 비교적 컸던

소호(少昊)족과의 정신적 통합을 시도했던 면도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순임금 이후 대에 바로 중국 최초의 [나라]라는 [하나라]가 세워진다.

 

순임금 때까지는 본국인 고대한국을 의식해서인지 [나라]를 표방하지는 않는데

요임금과 순임금이 소전(少典)과 소호(少昊)의 상징적 통합을 이루어낸 면이 있어서인지

순임금 다음 대에 바로 중국 최초의 [나라]라는 [하나라]가 세워진 것.

 

중국에서 순임금의 아버지가 악명으로 전해내려오는 것은

소호(少昊) 출신인 그가 고대한국에 대한 마음이 강해서

아들인 순임금이 소전(少典)으로 가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에

후에 중국인들의 미움을 사서 괜한 악명으로 전해지는 것이 아닌가 한다.

 

중국사서에 [소호금천씨]가 [황제헌원씨]의 아들처럼 기록되어 있는 것은

[황제헌원씨] 다음 대의 유명한 지도자가 [소호금천씨]인 것을

마치 [황제헌원씨]의 아들처럼 잘못 기록된 것이라 본다.

 

 

현존하는 중국 최고(古)의 책이라는 산해경의 대황동경(大荒東經)편에 보면

[소호금천씨]가 [전욱고양씨]를 동해(우리의 서해) 밖 위대한 골짜기에서

즉 [한반도-만주]에서 키웠다고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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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海之外 大壑 少昊之國 少昊孺帝顓頊于此 

동해지외 대학 소호지국 소호유제전욱우차 

 

[풀이]

 

 동해 밖 위대한 골짜기에 소호의 나라가 있다.

소호가 임금 전욱을 거기서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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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소호금천씨]와 그 후계자 [전욱고양씨]는 고대한국 출신이고 (압록강변 집안 추정)

계속 고대한국에 살면서 지도자였다거나

혹은 중국땅으로 건너가 정신문명 물질문명을 전파했다는 얘기.

 

  압록강변 출신인 소호금천씨와 전욱고양씨  <- 관련글

 

 

신라왕족 중 김씨계와 가야왕족이 스스로를 소호금천씨(少昊 天氏)의 후손이라 했다거나

고구려 왕족이 스스로를 전욱고양씨(顓頊 陽氏)의 후손이라 했다는 것도

[소호금천씨]와 [전욱고양씨]가 고대한국인이라는 하나의 방증이 된다 하겠다.

 

 

이번에 고대부터 인방(人方)이라 불리던 중국 동해안에서

은나라 갑골문보다 천년 전 문자인 골각문자가 발견되었고

이를 중국 저명한 학자들이 발표, 동의 했다는 것은

이미 예견된 일이라 하겠다. 

 

사실은 만주와 중국동해안에서는 은 갑골문보다 훨씬 앞선 연대의 고대문자들이

상당히 오래 전부터 많이 발견되었다.

이는 '그들'의 동북꽁정 감행의 큰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위 기사에서 산동(山東)대 고고미술학연구소 류펑쥔(劉鳳君) 소장이

이번에 발표된 골각문자에 대해서

“문자의 모양도 고대 상형문자인 동이문자 계열에 속한다”

“은허 지역에서 발견됐던 갑골문자도 동이족의 골각문자가 발전한 형태일 가능성이 크다”

라고 했는데

 

위 이야기는 은나라 갑골문과는 좀 다른 문자인 [동이문자]가 있고

은나라 갑골문의 부모뻘인 [동이문자]에 대해서 그도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얘기.

이번에 발표된 골각문자는 그 극히 일부에 불과할 뿐이라는 얘기.

 

중국학자들이 만주와 중국동해안에서 많이 발견했지만

그동안 숨겨왔던 [동이문자] 즉 [한자의 원형문자]를

이제야 일부만 발표했다는 얘기.

 

중국학자들은 학자적 양심에 따라 예전부터 발견된

모든 [동이문자]를 모두 공개하기 바란다.

 

 

첫째는 본 카페의 글들에도 많이 나오듯이

소호도 그렇고 소전도 그렇고 모두 고대한국에서 건너간 문명이고

그러므로 문자 또한 고대한국에서 건너간 것이 계승, 변화된 것이

은나라 갑골문이라 보아 왔는데

이번에 이미 예견된 그 실체가 조금 드러났을 뿐이라 하겠다.

 

중국 동해안이 은나라 지역보다 문명이 앞섰다는 것이 이번 골각문자의 발표로 다시 한번 드러났다 하겠는데

중국 동해안보다 더 문명이 앞섰던 [한반도-만주]에서 그보다 더 먼저 글자를 사용했다는 것이 드러나는 것도 시간문제라 본다.

 

사필귀정

 

 

 

 

 

 

 

 

전북 임실 옥정호

 

 

 

 

 

 

 

 

 

전북 전주에서

 

 

 

가끔이라도 눈을 들어 하늘을 보자.

보는 대로 생각하는 대로 자신이 달라지므로.

 

 

 

남산타워

 

세계최대 아니다.

동양최대도 아니다.

하지만 크다고 소중한 것이 아니다.

크건 작건

소중한 것이 소중한 것이다. 

 

 

 

 

 

 

 

 

 

 

이상 2장 - 수원화성 일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수원화성은 동서양 성의 장점을 고루 갖춰서 또한 유명한 성. 

 

 

 [ 이상 모두 퍼온 사진들 : 출처 - 디시인사이드 http://gall.dcinside.com/list.php?id=cool ]

 

 

 

 

 

 

 

[ 영원(永遠)에 합당(合當)한 삶을 살아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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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인간]의 정신은 [사해동포주의]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민족, 다른나라 사람이라고 해서 공연히 배타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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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갑골문보다 1천년 앞선 골각문(骨刻文)|| ☞ == 전서(篆書) == ☜
時丁|조회 39|추천 0|2012.01.04. 19:45

골각문

중국 초기 문자의 신발견 

 

중국 월간지  <진챠오>

  2010 10월호

/ 리웨이

 

 2010 7 15 한국 서울역사박물관 대강당에는 사람들로 가득 찾다. 여기에서 동아시아 상고역사의 문화기원이라는 국제 포럼 개최되었다. 한국 국학원의 초청을 받은 류펑쥔刘凤君 산동대학山东大学 미술고고학연구소 소장 이번 포럼에 참석하여 전문가들 앞에서 중국의 신비한 골각문자에 대해 소개했다. 골각문은 중국 초기의 문자로 3500~4500 전에 발생한 것이다. 회의에 참석한 전문가들은 소장이 연구 중인 골각문에 대해 인정하고 시기와 문자의 성격 조자 법칙에 관한 분석과 연구는 과학적이며 골각문 발견은 세계 문자역사상의 하나의 중대한 발견이라고 입을 모았다.

 

 

류펑쥔 刘凤君

 

 

 작은 조각 위의 신비한 도안

 

  1980년대 부터 시작해 산동성 중부지역인 웨이팡潍坊, 지난济南 일대와 중국관중关中지역 内蒙古내몽고 赤峰츠펑 등지의 고문화 유적지에서 문자가 새겨진 조각, 활석기, 도기, 도기 조각 등이 출토되었다. 조각이 95%이상을 차지하였다. 이러한 조각에 새겨진 골각문은 고고학자들이 들판에서 여러 출토한 있으나 다만 이를 중요시하지 않았고 벌레의 흔적이나 부식된 것으로만 이해했었다.

2005 봄에 류펑쥐 소장은 지난에서 신비한 도안이 새겨진 작은 조각을 발견하고 잠정적으로 이를 신석기 시대의 유물이고 위에 새겨진 것은 초기의 문자이다. 라고 판단했다. 2007 류펑쥔 소장 산동성 창러현昌乐县 소장된 골각문을 다시 감정하고 문자는 중국 초기문자 중의 종류라고 공개했다. 그는 산동 龙山文化용산문화 시기의 유물로서 지금으로부터 4000~4500 전의 것이고 동이문자에 속하며 중국초기의 도화 상형문자이다. 이는 安阳안양현 殷墟은허지역의 점복 갑골문자와 차이기 있는데 점복 흔적이 없는 기록문자이다.”라고 발표했다.

 도안이 새겨진 조각의 비밀을 밝혀내기 위해 류펑쥔 소장은 수년간의 야외조사와 종합적인 연구를 진행한 결과 산동성 寿光쇼우광, 青州칭조우, 济南지난 등지와 관중지역 츠펑지역에서 골각문이 발견하였고, 골각문의 사용시기는 지금으로부터 3500 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류펑쥔 소장은 웨이팡 지난 일대 문화유적 조사 결과, 3 법칙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첫째, 大汶口文化대문구문화에서 상나라 유적 조사 이러한 골각문을 발견한 적이 있다. 둘째, 작은 유적지에는 없고 대부분 십만 ㎡이상의 구모가 유적지에서 발견되었다. 셋째, 골각문은 골각문이 발견된 유적지 지역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길이 100~200미터 범위 내에서 발견되었다. 사실로부터 소장은 당시 골각문은 생활구역의 일부 범위 내에서 만들어 졌고, 유통이나 사용 범위도 한정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추론해 냈다.

 

 

 

http://blog.naver.com/arirang/140111108666

 

 

骨刻文 造字법칙

 

2008 12, 山东省 昌乐县창러현에서 동쪽으로 10 떨어진 남쪽 기슭 저수지 변두리에서 비교적 평평한 돌에 새겨진 首阳山쇼우양샨 岩书암서 발견되었다. 岩书암서는 시기에 나누어 새겨졌는데, 번째 시기에 새겨진 것은 선이 가늘고 얕으며 동물이나 사람 형상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번째 시기에 새겨진 것은 선이 굵고 깊으며, 어떤 것은 깊이가 1㎝에 달한 것도 있었다. 어떤 문자는 번째 시기의 문자 위에 새겨졌다. 문자 형태는 매우 간단하고 획수는 적은 편이다. 쇼우양산 岩书암서는 비록 전후의 변화가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도화 상형문자가 중심이다. 이는 골각문자와 같은 시기의 가지 형태의 초기문자라고 있다. 쇼우양산 암서의 발견으로 골각문의 시기와 성격이 확실해졌다.

 골각문자는 그림이라고도 있다. 문자와 그림의 기원이 같은 것은 중국 초기 문자 표현형태 중의 하나이다. 2008년에 류펑쥔 소장은 물상의 심미 재창조성, 지사의 조합 상징성, 용봉문화와 봉황 자의 다양성은 골각문자가 造字조자된 3 법칙이라고 주장했다. 골각문에는 주로 상형과 지사가 있는데, 중국 문자가 성숙된 후에 나타난 육서(상형, 지사, 회의, 형성, 전주, 가차) 이론으로는 이를 완벽하게 해석할 없다. 골각문은 중국 상고미술의 심미적 특징을 체계적으로 반영하였고 회화에 가까운 창조적 사유가 들어있다.

 

 

골각문은 갑골문의 중요한 기원

 

안양 갑골문이 발견된 , 사람들은 갑골문은 육서를 구비한 성숙된 문자이므로 분명히 문자의 기원이 있을 것이고, 변화 발전 과정은 적어도 1000 이상 걸렸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류펑쥔 소장 골각문은 갑골문의 주요 기원이고, 골각문이 갑골문이 되기까지 실제로 1000 이상이 걸렸다고 주장했다. 安徽省안휘성 蚌埠双墩벙부슈앙둔 유적지에서 출토된 도기, 대문구 문화시기 도기에 새겨진 부호, 앙소문화 시기 그릇에 새겨진 부호 모두 종류의 문자생성과정에 나타난 指事지사 현상이다. 골각문은 전통을 직접 본받았고 지사와 상형을 핵심 造字조자 규칙으로 발전시켰다. 골각문은 대문구문화 시기 도기 부호에서 상나라 갑골문까지의 1000 이상의 시간을 보완하였다. 도기부호, 골각문, 갑골문과 금문등은 모두 일맥상통한다.

 문헌의 기록에 따르면 황제, 염제, 치우와 그들의 계승자 우는 대체적으로 용산문화 시기 혹은 그보다 조금 늦은 시기에 활동했었다. 그들은 주로 화하华夏문화와 동이东夷문화 그룹으로 나뉘어졌다. 지역에서의 문자발견은 고도로 발달되었던 동이와 서하 문명연구에 깊이를 더하는 역할을 왔다. 문자들은 오랫동안 존재해 왔던 중국문명의 기원과 발생문제를 둘러싼 논쟁에 대해, 문명의 기원시기와 문명발생의 중심내용 면에서 실제적이고 확실한 설명을 제공했다. 아니라, 전설로 치부되던 시기 역사가 확실한 문자기록이 있는 역사라는 사실을 입증했다.

 

 

중국 월간지 金桥 금교 

/ 리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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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naver.com/arirang/140111108666

 

단법인 국학원은 2010年 7월 15일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린 ‘국학원 제22회 학술회의- 동북아평화정착을 위한 한중국제학술회의’를 개최했다. ‘동북아 문화의 이해를 위하여’를 주제로 동북아역사재단, (사)현정회 등이 후원한 이번 학술대회에 참석한 중국 산동대 류펑쥔 교수는 골각문 유물을 직접 가져와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공개해 학자들의 큰 관심을 모았다.

 

골각문은 지금으로부터 약 4,000년~4,500년 전후로 생겨나 사용되던 중국 초기 문자이며 갑골문보다 약 1천 년 앞섰다. 짐승 뼈에 새긴 글자로 매우 아름다운 창작성과 예술적 품격을 갖추었다고 평가된다. 류펑쥔 교수는 골각문의 연대를 측정하기 위하여 고문화 유적지에 대한 탐방과 조사를 했으며 ‘골각문’이란 개념을 정립했다. 창락, 적봉 등지에서 골각문을 발견해 2008년 12월 저서 <창락골각문>을 편찬했으며 최근 골각문에 관한 세 번째 저서를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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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골문보다 1천년 앞선 골각(骨刻文)|

2012.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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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골문보다   1천년 앞선 골각문(骨角文)은 동이족의 글자”
출처 : 코리안스피릿(http://www.ikoreanspiri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