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0. 11. 21:09ㆍ글씨쓰기
4000 ~ 4500년 전 추정 … 동이족 문자 가능성
갑골문자는 중국 고대 상(商·BC 1600~1046년)나라의 수도인 은허(殷墟·허난성 안양현)에서 1899년 처음 발견된 이후 중국 최초의 문자로 인정받아 왔다.
산둥(山東)대 고고미술학연구소 류펑쥔(劉鳳君) 소장이 최근 중국 고고학 관계자들을 초청한 세미나에서 갑골문자 이전에 다른 형태의 골각(骨刻)문자가 산둥성 창러(昌樂)현 지역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밝혔다고 홍콩 문회보(文匯報)가 21일 보도했다. 류 소장은 중국 고고미술학의 창시자로 학계의 명망이 깊은 학자다. 이 자리에 참석한 사회과학원 왕위신(王宇信) 교수 등 은상문화협회(殷商文化協會) 관계자 5명은 모두 류 소장의 학설에 동의했다고 이 신문은 전했다. 세미나에서 이 문자는 ‘창러골각문’으로 이름 붙여졌다.
산둥성에서 발견된 신석기 시대 유물로 추정되는 골각문자(左), 중국 최초의 문자로 알려진 갑골문자(右). | |
류 소장은 산둥성 민간 소장가인 샤오광더(肖廣德)가 2004년부터 최근까지 창러현 지역 주변에서 수집한 수백 개의 골각문자를 연구한 결과 이 같은 결론을 내렸다고 설명했다. 류 소장에 따르면 이들 도안은 소의 어깨뼈와 사슴·코끼리 뼈에 새겨져 있었다.
도안의 형태는 다양했다. 뼈 한 곳에 100여 개의 서로 다른 도안이 새겨진 것도 있고, 1~2개의 도안만 새겨진 뼈도 있다. 여러 개의 도안은 세로로 정렬돼 있어 특정 사안을 기록한 문자로 봐야 한다는 게 류 소장의 주장이다. 단순한 그림일 경우 이처럼 정렬된 형태로 나타날 수 없다는 것이다. 점복(占卜)기록인 갑골문자와 달리 골각문자에선 점복의 흔적이 나타나지 않았다.
류 소장은 “뼈의 색깔과 석화(石化) 상태를 판단해 볼 때 문자를 새긴 연대는 4000~4500년 전으로 보이며, 이는 중국 산둥성의 룽산(龍山) 신석기 시대에 해당된다”고 말했다. 함께 출토된 뼈로 만든 칼과 송곳은 전형적인 룽산 중·후기 시대의 도구들이었다.
중국 고고학자들은 당시 산둥 지역은 한민족을 포함한 동이(東夷)족들이 집단으로 거주했기 때문에 이 골각문자는 동이문자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류 소장은 “문자의 모양도 고대 상형문자인 동이문자 계열에 속한다”고 지적했다. 류 소장은 이어 “안양(安陽)을 중심으로 한 은허 지역에서 발견됐던 갑골문자도 동이족의 골각문자가 발전한 형태일 가능성이 크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20세기 중국 고고학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이 갑골문자 발견이었다면 이번 골각문자 발견은 중국 역사를 지금보다 1000년 이전으로 돌리는 21세기 중국 고고학의 역사적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출처: 중앙일보] 갑골문자보다 1000년 앞선 골각문자 발견
http://news.joins.com/article/3346996
위의 자료에 관심을 둔 사람이라면 한번쯤 공부해볼 자료=> .https://www.facebook.com/HDLee0404/posts/1138024486258752
출처: http://badasok.tistory.com/2815 [침묵은 금이 아니다]
badasok.tistory.com/2815 침묵은 금이 아니다
창락골각문자 발견과 연구
산동대 미술고고학 류펑쮠 교수
뼈에 새겨진 모양
창락골각문 확대본
번역 : 민승준 2009년 1월 28일
(一)
2004년 여름, 산동성 창락현의 수장애호가 샤오꽝더는
창락현 원가장 및 그 부근의 쇼우꽝 지타이 등의 고문화 유적지에서
그곳 주민이 밭을 갈다가 나온 대형 소 어깨뼈를 발견했다.
그 당시 그는 이것이 고대 농기구의 일종이라고 짐작했고 집으로 돌아와 깨끗이 뼈를 세척했다.
그러자 문자같은 획이 새겨져 있는 것이 보였고, 그는 이것이 문자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획이 새겨진 뼈들을 수집하기 시작했고, 소중한 보물로 잘 보관해 왔다.
2005년 봄, 중국 산동성 제남시의 한 친구가 이 문양이 새겨진 뼈를 들고 나를 찾아왔다.
그는 이것이 웨이팡의 한 수장가의 것이며 이것 외에 몇 개가 더 있다고 알려주었다.
나는 자세히 살펴본 후 벗에게 말했다.
“이것은 분명 선사시대의 뼈로 보인다. 위에 새겨진 획은 확실히 문자이다.
이것은 중요한 문물이니, 수장가가 소장하고 있는 걸 다 들고 다시 나에게 보여줄 수 없겠는가?”
최근에서야 나도 이 뼈조각들이 샤오꽝더가 소장하고 있었던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최근 몇 년 사이 나는 “중국초기문자와 서예예술”이라는 연구를 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샤오꽝더가 소장하고 있는 뼈들이 매우 중요한 자료라고 느껴졌다.
샤오꽝더는 이 뼈조각의 비밀을 정확하게 파악하고자
웨이팡, 베이징의 전문가들을 찾아가며 가르침을 구했다.
그 과정에서 어떤 이는 이것이 벌레가 먹었거나 풀뿌리가 썩은 흔적이라고 여겼고,
또 어떤 이는 현대인이 새긴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 다른 전문가는 샤오꽝더에게
나를 찾아와 뼈조각을 보이고, 검정을 받는게 어떻겠느냐고 권고했다고 했다.
2007년 6, 7월경에 샤오꽝더는 여러차례 나와 전화로 연락을 주고 받았다.
전화상으로 그에게 몇 개의 실물을 들고 제남으로 와줄 수 있겠냐고 부탁을 했다.
7월 중순, 그는 일곱 덩어리의 글자가 있는 뼈조각을 들고 제남시 난쨔오 호텔로 나를 찾아 왔다.
당시 나는 이 호텔에서 열린 산동서화가 회의에 참석하고 있었다.
나는 로비에서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샤오꽝더를 발견했다.
그가 들고 온 뼈조각을 보고 그의 설명을 듣고 난 후 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내 수년의 전문적 연구와 검정경험에 비추어 보았을 때,
이 자료는 지극히 중요한 것이란 느낌이 들었고 앞으로 내 책임이 크겠다고 생각했다.
수장가 샤오꽝더의 설명을 듣고 있는 작가 류펑쮠
이 글자는 사람이 새긴 획임에 분명하다고 판단했다.
그 이유는 조형에 주의를 기울였고, 완벽히 아름다웠으며 대다수가 호선으로 구성되었다.
또한 모두 새겨진 깊이가 일정하고 획의 유창함이 일치하며
오목히 들어간 부분 모두 단단하게 새겨진 흔적이 분명한 점으로 보아
벌레먹거나 식물이 부식한 흔적이 절대 아니었다.
벌레먹은 흔적은 하나의 점이 또 다른 하나의 둥근점과 이어져 있어
획이 유창할 수 없고 또한 고르지 못하다.
풀 뿌리가 부식된 흔적이란 것은 표면이 떠있어 획이 규율이 없을 뿐 아니라 깊이가 없다.
다시 말해, 벌레먹거나 풀뿌리가 부식된 것은
아름다우며 일정하게 규율이 있는 조형이 이렇게 많이 그리고 복잡하게 나타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뼈조각의 석화정도와 새겨진 글자조형의 특색에 근거해 분석하면,
이것이 정말 고문화 유적지에서 수집한 것이라면
이것은 중국초기의 문자인 산동 용산문화 유물임이 분명하다.
만약 후인들이 새긴 것이라면,
그들은 이러한 조형의 글자를 바로 뼈조각에 새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분명 모본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마땅히 그것을 찾아내야만 한다.
우리는 중국 초기문자를 연구하기 위해 진실한 자료를 찾아야 한다.
동시에, 나는 깊고 절실한 사명감을 느꼈다.
나는 이 자료가 과학적인 검증결론을 얻기 위해 대량의 사업을 해야만 하고,
또 학술계의 인정을 얻으려면, 아주 많은 노력과 시간을 바쳐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나는 열심히 잘 해 나가 볼 작정이다. 이것은 나의 책임이며, 다른 선택이 없다.
우리가 고대문물을 대할 때는 이러한 태도가 필요하다.
근면하게 유물을 승인하고 열심히 그것을 대하며 자세하게 분석하는 태도야 말로
확실히 고대문물을 해결할 수 있는 조건이 되는 것이다.
당시 나는 이 뼈조각에 새겨진 것이 문자라고 주장했다.
그 주장의 근거는 다음과 같은 4가지이다.
첫째, 새겨진 글자부호가 매우 많다. 분명 이것은 문자의 記事기사현상이다.
둘째, 새겨진 대부분이 인물, 동물, 식물의 도상형 부호이다.
‘서화동원(글씨와 그림의 근원은 같다)’은 여기에서 좋은 해설을 얻었다.
셋째, 이러한 새겨진 부호의 포치와 결구는 규율성을 찾아볼 수 있다.
어떤 편방은 여러 차례 나타난다. 이는 일정한 지역내 보편적으로 인정받았거나
광범위하고 복잡하게 사용되어졌다는 것을 설명해 주고 있다.
넷째, 최근 몇 년 창락현 주위의 죠우핑, 헝타이, 쇼우꽝, 린츠 등지 및
강소성 까오요우롱치유쫭과 서안의 화로우쯔 등지에서 모두
龍山용산 문화와 岳石악석 문화시기의 문자가 발견되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리 큰 주목을 끌지 못했다.
샤오꽝더의 수장품은 집중적 수장이다.
그래서 이러한 刻字각자는 분명히 중국 초기의 문자이다.
7월 하순, 나는 직접 차를 몰고 창락으로 갔다.
샤오꽝더와 농업종합개발 사무실의 류쩐쳥 주임 등이
내가 검증차 창락에 들리는 것을 알고는 제청고속도로까지 달려와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샤오꽝더 집으로 들어가자 마자 멋진 글자가 새겨진 뼈조각들이 진열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내 눈을 믿고 자세하게 살펴보니 모두 고대인들이 새긴 것들이었다.
그 당시 기뻐했던 마음이 지금까지도 새록새록하다.
그 날 오후 반 나절동안 샤오꽝더와 함께 글자가 새겨진 뼈조각들을 관찰하고 분석했다.
이것들은 대부분 소의 어깨뼈였고, 근골, 기골 또 일부분은 사슴뼈, 코끼리뼈도 있었다.
나는 샤오꽝더가 수집한 것과 이런 뼈조각이 동시에 출토된 骨耜골사, 骨刀골도, (* 耜 : 보습 사, 쟁기날)
骨錐골추 및 윤이 나는 黑陶片검은도자기조각과 귀신얼굴의 鼎足솥발 등을 자세히 관찰했다.
이것은 모두 용산문화의 전형적인 기물 혹은 전형적 기물의 깨진조각이었다.
그림 1
산동 용산문화 玉鳥
자세한 관찰과 종합적 분석을 거쳐, 나는 이 골각문의 기본 연대가 정확하다고 생각했다.
연대를 추정하는데는 주로 아래의 일곱가지 방면에 따르고 있다.
첫째, 같이 출토된 전형적 기물의 연대와 뼈조각의 석화정도이다.
둘째, 大汶口대문구 문화의 새김부호와 상나라 안양 은허 갑골문사이에서
이 뼈조각에 나타난 조형적 특색을 고려한다.
셋째, 많은 봉황새문양이 이미 발견된 산동성 용산문화의 옥봉황새 모양이 비슷하다. (그림1)
그림 2
양저문화 옥기 미세하게 조각된 도안
그림 2
양저문화 옥기 미세하게 조각된 도안
어떤 것은 미미하게 새겨진 문자가 비슷하다.
같은 시기의 良渚양저문화 옥기의 얕게 조각된 선과
조금은 달라도 교묘한 솜씨는 같은 오묘함이 있다. (그림2)
넷째, 이 골각문의 새김기법과 글자의 조형특색은 모두 다
서안 화로우쯔 용산문화 유적에서 출토된 뼈조각 위에 새겨진 문자와 같다. (그림3)
그림 3-1
서안 화로우쯔 용산문화 유적에서 출토된 뼈위에 새겨진 글자
그림 3-2
서안 화로우쯔 용산문화 유적에서 출토된 뼈위에 새겨진 글자
그림 3-3
서안 화로우쯔 용산문화 유적에서 출토된 뼈위에 새겨진 글자
다섯째, 글자가 새겨진 코끼리뼈를 고려해 보면,
이 지역에 코끼리가 생존했던 시기가 비교적 길었다.
상나라 초기에 이르러 점점 남쪽으로 옮겨갔다.
여섯째, 이 골각문은 주로 창락현 위엔지아쫭유적에서 출토되었는데
이 지역은 용산문화시기의 유적지이다.
일곱째, 이 골각문은 석질 공구로 견고하게 새겨졌다.
안양 은허 갑골문과 桓台史家환태사가 岳石악석문화 갑골문의
금속칼로 새긴 것들과는 현격하게 달랐다. (그림4)
그림 4
桓台史家환태사가 악석문화 제사기물 갱에서 출토된 글자가 새겨진 뼈
이러한 종합적인 분석을 거쳐,
나는 이 刻字각자가 지금으로 부터 4000~4500년 전의 산동용산문화시기의 유물로
東夷동이문자에 속하는 중국 초기의 圖畵象形도화상형 문자라고 판단했다.
이것은 안양 은허 갑골문과 다른다. 점술흔적이 보이지 않는 記事기사문자이다.
이 문자의 발견도 세계문자역사연구 중 비교적 중대한 사건이다.
이것은 고대이집트의 상형문자와 같은 중요한 의의가 있다고 보여진다. (그림 5)
그림 5
이집트의 상형문자, 승려문, 속체문
나는 당시에 샤오꽝더와 농업종합개발사무실 류젼쳥주임 및 창락현 문화부 사람들과
내 검증결론을 논했고, 그 후 나의 검증결론은 신속하게
2007년 7월30일 <웨이팡일보 창락소식>과 이후의 <웨이팡일보>, <치루만보>,
<따쭝일보>, 웨이팡방송국, 산동위성방송, 및 포털사이트에 발표되었고,
사회와 학술계에 큰 주목을 받았다.
2007년 하반기, 刻字각자에 대한 나의 검증결론은
샤오꽝더와 창락현 정협문사학 위원회 주임 류씽궈의 관심과 중시를 받아
창락현 위원회, 창락현 정부에 보고되어진다.
창락현 위원회와 창락현정부와 창락현정협은
이것이 창락현의 문화적 대업으로 매우 중시하여 앞으로 내가 진행하는
창락골각문 검증과 연구사업을 적극적으로 지지해 주겠다고 힘을 실어주었다.
창락현 정협 텅찌엔쮠 주석의 관심과 구체적은 지시하에
2008년 7월 산동대학 미술고고학연구소와 창락현 정협 문사위원회는
정식으로 <창락골각문 연구프로젝트 협의서>을 협정했다.
이 협의에 따르면
산동대학 미술고고학 연구소는 학술 연구와 도서편집및 학술회의 조직을 책임지고
이에 따르는 연구경비와 대량의 사업지원금을 창락현 정협이 부담한다.
창락현 정협은 이러한 보배로운 문화유산의 심도있는 연구를 위해 안정적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2007년 7월 첫 검증작업이 진행된 이래로
2008년 7월까지 나는 1년의 시간동안 다섯가지 방면의 큰 작업을 실행했다.
첫째, 나는 몇 차례 학생들을 유적지에 보냈다.
나의 학생들이 골각문이 출토된 현지에 가서 두가지를 조사하도록 했다.
하나는 이 유적지에서 골각문이 출토된 적이 있었던가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현재 이 부근에서 뼈에 문자를 새기는 사람이 있지 않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조사결과 전자는 긍정적이있고, 후자는 그렇지 않았다.
둘째, 나는 창락현 정협 리쩡홍 부주석, 왕용량 부주석, 짱신지에 국장,
류씽궈 주임 및 샤오꽝더와 함께 골각문자 유적지에서 여러차례 조사를 진행했다. (그림6)
그림 6
위엔지아쫭 유적지에서 조사하고 있는 샤오광더, 류펑쮠, 리쩡홍, 류씽궈
지면의 유물과 방문한 사람들을 자세히 분석하여 여전히 유적지에서는
글자가 새겨진 뼈조각이 수집되고 있음이 드러났고 대량의 첫번째 자료들을 장악하게 되었다.
셋째, 나는 창락 주변의 각각의 시와 현에 대해 대규모 조사작업을 실행했다.
그림 7
산동성 죠우핑 띵꽁유적에서 출토된 용산문화 도문
죠우핑(그림7), 헝타이, 린쯔(그림8)와 쇼우꽝 등지에서
모두 일찌기 유사한 문자가 출토된 적이 있었다.
다만 사람들의 주목을 끌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림 8-1
산동성 린쯔 황쳥에서 출토된 용산문화 돌화살촉
그림 8-2
산동성 린쯔 황쳥에서 출토된 용산문화 돌화살촉
이것은 창락현의 위엔지아쫭과 그 주위의 지타이 유적지에서 출토된 골각문자가
결코 우연한 현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일찍부터 이들을 중시했어야 했다.
네번째, 나는 다양한 관련있는 문헌을 열람했을 뿐 아니라
이 시기와 비슷한 연대에 기타 다른 성에서 출토된 소량의 드문 자료들을
열심히 수집하고 분석 연구했다. (그림 9)
그림9
강소성 까오요우치우지아 유적지에서 출토된 용산문화 도문
한 걸음 더 깊이 이 골각문을 인식하게 되었다.
다섯째, 이 골각문 사진과 동영상을 들고 산동성 내외의 다양한 전문가들을 찾아다녔고,
많은 전문가들의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지지를 받았다.
1년의 노력을 거쳐, 나는 나 스스로 검증한 자료에 대해 한 걸음 더 긍정하게 되었다.
2008년7월30일, 우리 산동대학 미술고고학연구소와 창락현 정협은
중국사회과학원 역사연구원인 왕위씬 교수, 쯔보시 문물국 부국장인 짱꽝밍 교수,
산동갑골문국제교류센터 리라이푸이산장과 쭈위에핑 교수 등 전문가들을 창락에 초청했다.
우선 창락현 사진작가협회부회장 턍씬지에 선생이 촬영한 골각문자도편을 관람했다.
스크린 확대를 통해 본 사진에는 사람이 인공적으로 새긴 특색이 매우 정확하게 드러났다.
후에 전문가들은 긴 시간동안 자세히 글자가 새겨진 뼈조각의 실물을 관찰하고 분석했다.
아울러 비교적 심도있는 좌담 연구토론회를 가졌다. (그림 10)
그림10
2008년 7월 30일 좌담회 장면
류펑쮠, 짱꽝밍, 왕위씬과 뒤의 리랑푸
토론회에서 전문가들은 나의 검증결과에 모두 동의해 주었다.
이 문자는 안양의 갑골문에 비해 더 오래된 원시문자라고 생각했다.
또한 이 문자가 발견된 중요성을 강조하고,
안양 갑골문의 뒤를 잇는 또 한번의 큰 발견인 만큼
중국문화의 큰 업적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창락현 위원회 왕슈화 서기, 창락현정부 차오샤오난 縣長현장,
창락현 정협 텅찌엔쮠 주석및 정협의 각 지도자들이 시종일관 전문가들을 보필하며
많은 방면에 관심을 가져주었다. (그림11)
그림 11
텅찌엔쮠 주석과 창락골각문을 쓰는 왕위씬 교수
토론회에서 나와 전문가들은 모두 다 한결같이 이 골각문이
안양 은허의 복사 갑골문과 다른 記事骨刻 기사골각 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주로 창락현 위엔지아쫭및 그 부근 쑈우꽝기타이 유적지에서 출토되었다.
그래서 ‘昌樂骨刻文창락골각문’ 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이 문자는 더 많은 전문가들의 승인을 얻어, 과학적으로도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되었다.
(二)
이 창락골각문은 옥석에 새겨진 것 하나를 제외하고는 다 직접 뼈위에 새겨져 있다.
창락골각문에서는 상나라, 주나라의 금문 및 다른 갑골문에서 보이는
먼저 먹으로 쓰고 난 후 새기는 과정이 보이지 않는다.
대부분의 글자가 뼈조각의 외면(정면)에 새겨져 있다.
또 어떤 뼈는 동시에 骨內腔 (뼈내부의 비어있는 부분)와
骨臼 (뼈의 오목한 부분)에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런 뼈들은 지하에서 몇 천년에 걸친 자연적인 손상과
그곳 주민들이 파냈을 때 생긴 인위적인 파손 등으로 인해 새겨진 글자 대다수가 정확하지 않다.
하지만 창락골각3은 보존이 비교적 좋은 상태이다. 20자가 넘는 글자가 정면에 새겨져 있다.
모두 정확하게 판독이 가능하다. 흔치않는 진품이다.
창락골각4 의 정면에는 무성하게 많은 글자들이 빽빽하게 새겨져 있다.
하지만 현재 판독해 낼 수 있는 것은 겨우 몇 글자 혹은 몇 개의 편방부수일 뿐이다.
샤오꽝더의 첫 통계에 따르면, 이 골각문은 대략 모두 수 백여자가 잔존한다고 한다.
그림 12-1
대문구문화 도존 상의 각화부호
그림 12-2
대문구문화 도존 상의 각화부호
그림 12-3
대문구문화 도존 상의 각화부호
최근 발견된 기타 소량의 자잘한 초기문자들은 각기 서로 다르다.
1980년대 협서성 창안현 화로우쯔 용산문화 유적지에서
10여 개의 골각문자와 부호가 출토되었고,
1991년 산동성 쪼우핑 띵꽁유적에서
용산문화로 보이는 도자기문자가 출토되었다.
1990년대 강소성 까오요우치우지아쫭 용산문화유적지에서
도자기 편에 새겨진 문자가 출토되었고,
1995년 산동 헝타이스지아 유적지 문화제사기물 갱에서
세 덩어리의 복사가 새겨진 뼈가 출토되었다.
그림12-4
대문구문화 도존 상의 각화부호
그림 12-5
대문구문화 도존 상의 각화부호
그림12-6
대문구문화 도존 상의 각화부호
그림 12-7
대문구문화 도존 상의 각화부호
그림12-8
대문구문화 도존 상의 각화부호
최근 몇년 사이 필자는 칭쪼우, 쯔보 등지에서 조사를 진행했을 때,
용산문화말기로 보이는 돌화살촉 위에 새겨진 글자를 발견하였다.
용산문화와 악석문화시기의 물질매체가 매우 풍부했다는 사실을 볼 수 있었다.
도자기 위에 새겨진 부호는 일찌기 대문구문화, 하모도문화, 앙소문화 등에서도 이미 유행했다.
띵꽁과 치우지아쫭 유적지에서 출토된 도자기 문자는 이러한 전통을 직접적으로 계승하고 있다.
대문구문화기기는 이미 뼈위에 새긴 부호가 출현했다.
화로우쯔골각과 대량의 창락골각문의 출현은
용산문화기기 동물뼈가 이미 새김문자의 주요한 물질매체로 발전했음을 보여준다.
만약 史家岳石사가악석문화 제사기물 갱에서 출토된
복사가 새겨진 뼈조각과 연관지여 분석해 본다면,
창락골각문은 물질매체를 이용한 것에서 제남 따씬쫭 및 안양에서 출토된 갑골문과
내제적 연원과 계승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설명해 준다.
창락골각문은 음선각(음각으로 새긴 획)에 속한다.
그 새김방법은 전통적인 단단한 돌에 새긴 방법이다.
돋보기로 자세히 관찰해보면, 경도가 높은 도구로 새긴 느낌을 정확하게 볼 수 있다.
필획의 양측에는 단단한 공구로 뼈에 새길 때 나타나는 올록볼록함이 드러나는데,
어떤 뼈조각은 깨끗이 세척한 후, 음각된 바닥부분의 흔적에서 정확하게 볼 수 있다.
헝타이 사가악석문화 제사기물 갱에서 출토된 복사가 새겨진 뼈에서는
좌우 양변을 금속칼로 새긴 것 같은 느낌을 정확하게 보아낼 수 있다.
필획의 양측이 평평하고 시원스러운 것으로 보아
안양의 갑골문과 사용한 도구가 같다고 여겨진다.
분명 비교적 날카로운 청동으로 주조된 칼을 사용했을 것으로 보여진다.
창락골각문에 사용된 단단한 돌 도구는
아마도 창락에서 생산되는 藍寶石
(란바오스, 푸른색을 띄는 보배로운 돌,사파이어)를 사용한 듯하다.
그 곳 주민의 소개에 따르면,
창락 란바오스가 대량으로 쓰여지기 전에
곳곳에 널리 분포해서 쉽게 주울 수 있는 것이었다.
특히 가늘고 긴 5센티미터 정도의 란바오스는
가공을 거쳐 날카롭고 예리한 새김공구가 될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추측에 지나지 않아서 앞으로 고고학계의 증명을 기다린다.
창락골각문에 새겨진 획은 정밀하고 유창하다.
어떤 것은 매우 숙련되어 우아하고 고상하다.
그 세밀한 새김예술은 우리를 탄복하게 만든다.
어떤 자는 길이와 넓이가 0.15-0.2에 불과하여 확대경으로 봐야만 정확하게 볼 수 있다.
그런데, 새긴 획을 분명하게 가릴 수 있고, 힘이 있고 유창하여
良渚량저문화 玉器옥기에 미세하게 조각된 아름다운 도안과 충분히 어깨를 견줄 만하다.
용산문화시기의 미세하게 새겨진 문자와 량저문화 옥기의 미세하게 조각된 도안은
원고시대 중국 공예조각의 최고의 성과물이다.
동시에 창락골각문은 원숙함과 뛰어난 새김기법은
우리에게 산동 용산문화시기에 이미
전문적인 문자창작과 記事기사에 종사하는 '서예가'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런 서예가는 사회적 지위가 아주 높았던 것으로 보여진다.
창락골각문은 대부분 뼈조각위에는 다만 새겨져 있거나
혹은 1자에서 5자가 존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6자에서 10자가 있는 것도 일정한 수를 차지한다.
하지만, 10자이상에서 20자가 넘는 글자가 있는 뼈조각은 극히 적었다.
그 장법과 포치는 자연스러움에 순응하여
공식적으로 자유롭고 쾌적한 형을 초보적으로 형성하고 있다.
대략 3가지 배치가 있다.
첫번째 배치는 한 뼈 덩어리위에 비교적 큰 한 글자만 있는 것이고,
또 어떤 것은 비록 한 뼈조각 위에 여러 글자가 새겨져 있지만,
그 중 어떤 글자는 단독으로 빈 자리위에 새겨져 있어
주위의 다른 글자들과 밀접한 관계가 적어 보인다.
이것은 한 글자를 하나로 포치하는 것이다.
두번째 배치는 일정한 빈자리 위에 중간에 몇개의 글자부호를 새겨고
주변에 다시 소량의 글자부호를 새긴다. 이것은 일종의 글자군을 조합한 포국으로
산락조합형이라 부를 수 있다. 이것은 상주갑골문과 금문포치 중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세번째 배치는 위에서 부터 아래로 행을 이루는 포치이다.
이러한 포치는 앞으로 발전하게 되는 서예예술의 주요한 포국형식이다.
창락골각문 문자의 크기와 조형차이는 매우 크다.
어떤 것은 弧線호선으로 조합된 동물과 인물의 형상이다.
어떤 것은 호선과 직선에 유사한 선으로 조합한 식물과 동물의 형상이고
또 어떤 것은 호선과 직선에 가까운 선으로 조합되어 이루어진 부호이다.
어떤 형상을 비교적 커서 대략 7.5*6.5~2.5*2.1센티미터 사이이다.
대부분은 2~1.5센티미터쯤 되는데 미세하게 새긴 예술에 속하는 섬세한 것도 있다.
초보적인 관찰과 분석에 근거해보면,
만약 하나의 조합 글자군안에 있다면 큰글자와 작은 글자는 아마도
내재적인 연계와 구별의의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조형과 서사방법으로서의 창락골각문은
쓴 글자라고 하기 보다는 그린 그림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나은 듯하다.
이러한 글자를 만약 상주시대 갑골문, 금문과 서로 비교한다면
상주 갑골문, 금문의 자체결구와 조자규율은 상형, 회의, 지사
이 ‘삼서’ 위주로 주로 표현한 것은 물상부호이다.
비록 회화예술이 사람들에게 형상적 운치를 제공해 주지만
그것은 이미 근원이 같은 그림과는 비교적 멀어졌다.
대다수 글자가 비록 物象天性물상천성을 形형으로 삼지만
대부분이 그 形형을 총괄하고 그 神신을 개괄하여
마음속으로 깨닫고 뜻이 통하는 상징부호로 변했다.
이외에 그 ‘삼서’는 상주시대 갑골문과 금문에서 이미 보편적으로 출현했다.
그래서 상주시대 갑골문과 금문은 이미 성숙한 문자였다.
창락골각문을 자세히 관찰, 분석하면 대다수가 지사와 상형으로
비교적 이상적인 해설과 설명을 얻을 수 있다.
그것의 字體結構자체결구와 造字規律조자규율은 일부분은
필획과 형상부호를 간략히 한 것이고 다른 일부분은 일정한 ‘指事지사’의 요구에 근거하여
많은 필획과 형상부호로 조합되어 ‘整體정체’적 글자를 이룬다.
이런 형상부호로 써서 나온 그림, 그려서 나온 글자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래서 先左后右선좌후우, 先上后下선상후하 및 天覆地載하늘은 덮고 땅은 받치는 등
해서와 행서의 이상적 조자및 서사개념은 여기에서 완전한 이해를 얻을 수 없다.
회화의 이러한 획 기초기법은 대다수의 글자에서 비교적 충분한 설명을 얻을 수 있다.
문자의 기원에 대해서 곽말약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중국문자의 기원은 응당 指事지사와 象形상형 두 계통으로 귀납되어진다.
지사계통은 마땅히 상형계통의 이전에 발생한 것이다.
회의, 형성, 가차, 전주 등에 대해서는 더욱 그 후에 놓이게 된다.”
대문구문화 陶尊도존(도자기로 만든 술담는 용기) 상에 새겨진 부호와
앙소 문화에 새겨진 부호 모두 문자의 탄생과정 중의 지사현상이다.
창락골각문은 이 전통을 직접적으로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指事지사의 발전을 중요한 造字조자규율로 삼는다.
최근 어떤 학자들은 대문구 陶尊도존 상에 새겨진 것을 글자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최근 이런 부호는 여전히 발견이 미비하다.
표지적 작용만 하고 있고 일종의 記事기사현상이라고 설명할 수 없다.
만약 앞으로 고고학적 발견이 증가하여 이 같은 부호들이 보편화되어 진다면
이것이 글자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최근의 상황으로는 '문자성질을 가진 상징적인 부호'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은 창락골각문처럼 발견된 수량이 많지 않고
심지어 한 뼈조각 위에 연속해 많은 글자가 새겨져 있다.
명확한 것은, 창락골각문은 記事현상으로 문자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사실이다.
창락골각문자 대부분의 글자에서는 두 가지의 書寫서사와 새김상의 특색이 있다.
하나는, 그림2와 같이 주요한 부분과 중간의 핵심부분을 우선 새긴 것으로
그 조형은 머리부분을 먼저 새긴 후에 다른 몸통을 새겼고
마지막으로 다리와 날카로운 발톱이 있는 발등의 부위를 보충했다.
여기에서 동물의 형상은 상상의 농축과 개괄을 얻을 수 있다.
다른 하나는, 대부분의 글자가 모두 주요한 획을 가지고 있는데
이러한 선은 아마도 한번에 새겨 나온 것으로 보여진다.
연속적으로 몇번의 칼을 대어 새겨나온 것이라 보기도 한다.
그런 후에 필요에 따라
그 주요한 선 주위에 물상의 필요한 기타 부분적 선을 보충해서 새긴다.
그림39 와 같이 그 글자가 생동감이 있을 뿐만 아니라
획의 주와 객이 분명하고 조화롭고 질서가 있다.
창락골각문의 이 두가지 書寫서사적 특징은
대문구문화와 앙소문화에 새겨진 부호에서는 아직 명확한 표현을 얻을 수 없다.
이것은 분명 한자의 초기 특색이다.
한 방면은, 이 시기의 문자는 아직까지 '글씨와 그림이 본래 한가지이다'는 범위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음을 설명한다.
다른 한 방면은, 이 시기의 문자가 바로 자신의 발전의 길을 점차 조금씩 깊이 찾아가며
회화와의 구별이 점점 빨라짐을 설명한다.
창락골각문의 이 두 書寫서사적 특색은
상주시대 갑골문과 금문에 대해 직접적 혹은 간접적인 영향을 일으킨 적 있다.
특별히 금문의 서사는 '中'을 쓸 때 '口'를 먼저 쓰고 중간에 세로획을 쓰듯이
먼저 주요한 곳에 붓을 대고, 부차적인 상관부분에 보태거나 더한다.
하지만 청동기 명문을 분석해 보면 먼저 세로획을 쓰고 후에 세로획 중간에 원을 그린다.
마지막으로 원 위아래의 세로획에 각각 두 가로획을 새긴다.
중심에 놓여진 세로획의 기초상에 상, 중, 하로 분해와 조합하는 이러한 서사방법은
더욱 조합미와 다중미의 시각효과를 가지고 있다.
이런 창작과정은 공터 중간에 세로로 세워진 높은 장대에 부합하고
그 후 장대위에 채색으로 장식된 깃발의 의의가 주어진다.
만약 해서와 같이 금문 ‘中’을 쓴다면
이러한 특유의 고상하고 옛스런 조합의 아름다움이 결핍되게 될 것이다.
(三)
이 창락골각문을 자세히 분석하면, 그 자체결구조형과 장법,
그리고 새김기법등 방면에 존재하는 일련의 변화를 볼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분명 창락골각문 전후의 발전 연변일 것이다.
이러한 전후 변화를 두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보자.
첫번째 유형은 昌骨1-昌骨68, 두번째 유형은 昌骨 69-昌骨73이다.
첫번째 유형의 문자 대부분은 도화상형자이다.
자체 크기가 비교적 크다. 특별히 미세하게 새긴 자들이 많은 편이다.
두번째 유형은 장법과 포국이 비교적 민첩하고 풍부하다.
조합자군을 전형으로 삼는 것과 같이 세 종의 포국이 완전히 갖추어 졌다.
글자들이 호선으로 조합되어 이루어졌고 새김처리가 깊어 힘이 보인다.
두 종 모두 특색있는 새김기법을 가지고 충분히 체현하고 있다.
두번째 유형의 글자는 도화상형과 부호상형 모두 다 지니고 있다.
글자의 크기는 점점 통일되어져 간다.
그 장법과 포치는 주로 위에서 아래로의 혹은
위에서 아래로에 비교적 가까운 행렬의 포국을 이루고 있다.
호선과 직선에 가까운 것으로 조성되어진 글자는
새긴 정도가 비교적 얕아 약간의 느슨함이 드러난다.
이러한 두 유형의 골각문과 대문구문화 도존 위에 새겨진 부호를 서로 비교하면
첫번째 유형의 글자가 도존부호와 상통하는 요소가 많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반면 두번째 유형의 골각문은 쪼우핑의 띵꽁유적지에서 출토된 용산문화 말기의 도문,
임기황성에서 출토된 용산문화 말기의 돌화살촉 각문과 견줄만한 부분이 많이 있다.
그래서 나는 초보적으로 추정한다.
첫번째 유형의 골각문은 분명히 용산문화 초중기에 주로 출현하거나 유행한 것이며
심지어 용산문화 말기까지 연속되었다는 것이 이 골각문의 주요한 유형이다.
반면 두번째 유형의 골각문은 아마도 용산문화 말기 혹은 용산문화중기에서 말기에
치우치는 시기에 출현한 새로운 글자유형일 것이다.
이것은 추측일 뿐이다. 앞으로의 고고학 작업의 증명을 기다려야 한다.
창락골각문 대부분은 선이 감소된 필획이다.
다른 한부분은 지사, 회의, 형상 부호이다.
초기의 글자는 그림이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글씨와 그림이 본래 같은 것이다’는 중국글자의 초기 표현형식이다.
중국문자가 성숙해진 후의 육서이론은 그것들을 완전히 설명하고 이해시킬 수 없다.
그것은 비교적 계통적으로 중국사전미술의 심미특징을 반영한다.
그래서 물상의 심미재창조, 지사의 조합상징성, 용봉문화와 ‘鳳봉’자의 다양성이
바로 창락골각문의 세가지 기본 조자규율이다.
우리는 이러한 규율을 인식해야만 비로서 그것을 자세히 해독할 수 있을 것이다.
첫번째, 물상의 '심미 재창조성'이다.
일찌기 대문구문화 도존의 새김예술 중에 심미 재창조가 보여진다.
이것이 바로 비교적 전형적인 예이다.
이 외에도 앙소문화의 인형도호(그림13)과 대문구 용산문화의 도격(그림14)등이 모두
사람과 새, 돼지와 개등의 형상을 재창작한 예술이다.
창락골각문은 이러한 전통을 계승하고 있고 게다가 표현하는 것이 매우 두드러져 있다.
그림 13
앙소문화 도자기로 만들어지 사람머리형상의 壺
그림 14
대문구 문화 도격 ㅜ
우리가 이 문자를 봤을 때, 우선 사람같기도 하고 동물 같기도 한 형상에 끌리게 될 것이다.
그림19, 그림67 등은 보기만 해도 새긴 것이 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새김은 재창조의 예술이지 결코 자연계의 동물을 직접 모사한 것이 아니다.
필요에 따라 분석하고 관찰한 기초에서 원래의 물상에 대해
귀납, 개괄 및 간략화 처리를 거쳤다.
어떤 것은 심지어 일부분을 확대나 축소하고 또 어떤 것은 옮겨버리거나
새로 조합해 처리하여 상형적 심미물상을 창조해 냈다.
이것은 중국초기문자의 두드러진 특색이다.
이것은 회화와 아주 비슷한 창작사유를 있음을 의미한다.
두번째, 지사의 조합상징성이다.
대문구 문화의 도존 새김예술 중에서의
이것은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지사조합의 상징성 부호이다.
아래 부분은 산봉우리를 상징한다. 정상에는 태양이 있다.
중간에 문양이 의미하는 것은 산봉우리와 태양 사이를 연계하는 ‘鳥’이다.
하남성 린루옌춘 앙소문화유적지에서 출토된 도자기 단지에 채색으로 그려진
학이 물고기를 물고 있는 (그림15)것은 지사의 조합상징성을 보여주는 그림이다.
그림 15
하남성 린류옌춘 앙소문화 유적에서 출토된 도자기 단지 위에 채색으로 그려진 그림
학을 토템으로 하는 부락이 돌 도끼를 들고
물고기를 토템으로 삼는 부락에 승리를 거둔 것이다.
학은 의기양양 드높은 기세를 드러내고 있고
학이 입에 문 물고기는 숨이 곧 끊어질 듯 깔닥거리고 있으며
그 옆에는 무력의 상징인 나무자루에 묶여진 돌도끼가 세로로 그려져 있다.
창락골각문을 자세히 분석하면
이러한 내재적인 문화영향과 전승관계를 볼 수 있다.
그 예로 그림29, 그림30, 그림 37, 그림 41등이 있다.
모두 전형적인 지사조합상징성이 돋보이는 문자이다.
그림 29는 세 가지 상형자의 조합으로 되어 있다.
‘鳥’와 식물과 다른 하나는 그다지 정확하지 않다.
아마도 사람과 어떤 곳의 자연환경 혹은
어떤 물질과 관계가 있는 내용을 기재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림37은 보기에 글자와 닮았다.
사실은 ‘鳥’를 주로 삼는다.
아래부분은 기타물상을 덧붙인 지사조합상징 문자이다.
그림30은 조합이 매우 복잡하다.
최근 조합이 제일 복잡한 것으로 보여지는 것으로 내용도 아주 풍부한 글자이다.
또한 많은 부호로 조성된 내재적 연관이 있는 선묘화이다.
중간에는 상형자가 하나 있다.
큰 코끼리가 놀라 두려워하는 모습과 비슷하다.
주위에 상형자와 부호들이 있다.
각 부락의 거주지를 상징하거나 자연환경 물상을 의미한다.
혹은 포위하고 몰아 사냥하는 듯 하기도 하다. 물론 다른 견해와 해설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종합적으로 분석, 연계하여 고려해볼 때,
그것들을 한 조의 글자로 삼아 해독하는 것이 아마
그것의 원초적인 의미에 제일 가까울 것으로 여겨진다.
그림 41은 놀라고 두려워하는 야생 소 같은 큰 동물이다.
신체가 축소되어 앞다리를 들고 부르짖고 있는 형상이다.
부근의 사슴을 닮은 동물은 마침 달아나고 있다.
주위의 여러사람이 둘러싸고 이를 쫓고 있는 각각의 ‘人’의 동태가 있다.
이 조합중 각종의 동태를 보이는 ‘人’은 모두 상주 갑골문과 금문의 ‘人’의 조상격의 형태이다.
이러한 ‘鳥’와 ‘人’자의 분석을 통하여
창락골각문이 상주 갑골문과 금문에 대한 영향이 비교적 크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세번째, 龍鳳용봉문화와 ‘鳳’자의 다양성이다.
용봉문화는 중국문화에서 매우 특수한 문화영역이다.
선사시대 용문화의 전형적 예술작품으로는
하남성 푸양 시쉐이포 앙소문화유적지에서 출토된
조개로 만든 인물이 용을 모는 그림 (그림16, 빵수런우위롱투)가 있다.
그림 16
하남성 푸양 시쉐이포 앙소문화유적지 출토된 그림
길이가 2미터에 달하는 용의 머리를 쳐든 긴 목선, 몸을 펼쳐 꼬리를 휘두른다.
사람이 그 용의 등에 타고 한 손은 앞으로 다른 한 손은 뒤로 해서 용을 모는 형상이다.
기타 호랑이, 사슴등의 대형동물들과 같이 배열해 놓았다.
그것이 우리에게 전달해 주는 계시는 살았을 때
용 토템을 숭배하던 무덤주인이 용을 몰고 승천하는 정신의 추구이다.
이는 영예롭게 ‘중화제일용’이라고 일컬어진다.
여기서 거론한 것은 형으로 정신을 전달한다는 것인데 이는
즉 일정한 조형예술로 규정된 정신을 표현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것은 일체의 심미재창조 예술에 적합하다.
각 시대에 어떠한 형태로 무슨 정신을 표현해 전달하려 했는지는
최근 중국 미술이론연구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주역 계사하전>에는 이런 말이 전해진다.
“옛날 복희씨가 천하를 다스릴 때
우러러는 하늘의 象상을 관찰하고 구부려서는 땅의 법칙을 관찰했다.
새와 짐승의 文彩문채를 살피고 땅과 더불어 마땅하게 하였다.
가까이는 몸에서 취하고, 멀리는 물건에서 취하게 하여 비로소 팔괘로 시작하였다.
신령스런 밝은 덕으로 통하게 하여 만물의 뜻을 분류했다.”
고인이 팔괘를 창제했는데 이는 바로 ‘신의 밝은 덕’과 ‘만물의 뜻’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이것 역시 선사시대 미술창작의 심미표준에 속한다.
창락골각문중의 ‘龍’자는 비교적 적다.
그림2와 그림47은 상주 갑골문, 금문중의 ‘龍’자와 매우 비슷하다.(그림 17)
그림 17
상나라 갑골문, 금문의 '龍'자
특히 그림 2의 용이 쏙 빼닮았다.
만약 이 해독이 틀리지 않다면 창락골각문 그림2는 중국 제일의 ‘龍’자일 것이다.
창락골각문은 상주 갑골문과 금문에 대한 영향이 더욱 분명하게 들여다보여진다.
창락골각문중의 ‘용문양’의 글자는 매우 많다.
그림 4, 45, 46, 71, 73, 75, 77, 79, 81, 83, 90, 135등이 모두 ‘鳳’자이다.
70여건의 골각문중에서 10개 이상 심지어 더 많은 ‘鳳’자가 있다.
‘鳳’자는 ‘鳥’자가 승화된 것이다. ‘鳥’자의 기초상에서 장식이 확장되어 이루어졌다.
몸이 수려하고 길며 머리에 높은 관을 쓰고
긴 꼬리가 화려하고 발톱에 웅장한 힘이 엿보이는 것이 그 기본특징이다.
창락골각문의 대량으로 보이는 ‘鳳’자는 풍부한 현실조형미를 갖추고 있다.
상나라 갑골문중의 ‘鳳’자(그림 18)는 창락골각문의 기초상에서 간소화 되어진
도상부호임이 분명하다. 창락골각문의 ‘鳳’자는 비교적 많은 편이다.
상나라 갑골문 '鳳'자
우리들이 중시여길 만한 가치가 있는 문제이다. 창락골각문은 동이족의 문자이다.
동이족은 새토템을 숭배하는 민족이다.
大汶口대문구 문화부터 岳石 악석문화까지 발견되는 새문양 도안과 ‘鳥’자는 비교적 많다.
창락골각문의 ‘鳳’자는 자형이 크기의 차이가 있을 뿐 아니라 번잡하고 간략함도 하나같지 않다.
이것은 새겨진 시간이 다르고 ‘鳳’자의 차이가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려주는데
이런 것을 제외하고도 실질적 내용이 같지 않았다는 사실도 표현해 주는 것이다.
동이족에서는 봉황새를 토템으로 하는 부락은 아주 보편적이었다.
그들 사이에선 늘 각종 방식의 교류가 있어왔고 이러한 ‘鳳’자는 부락의 종족휘장이었다.
그들은 각자 서로 교제하는 상황을 수시로 기록했으며
가장 간단명료한 방식은 바로 상대방의 종족휘장에 기록해나가는 것이었다.
한 두 문화유적지에서 동시에 이렇게 많은 종족휘장이 나온다는 것은
그 당시 교류의 빈번함을 설명하는 것이다.
‘鳳’자 출현에서 보여지는 각종 차이는
역시 각 부락의 종족휘장이 같지 않다는 원인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아마도 부락간의 지위가 같지 않음을 설명해 주는 것이다.
그림4의 ‘鳳’자는 기세가 당당하고 정교한 아름다움을 견줄 데가 없을 정도니
중화제일의 ‘鳳’자라 불리어진다. 신석기시대 말기의 문화교류를 거쳐,
동이문화의 용봉문화는 이미 아주 높은 수준에 도달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동이문화와 서부중원내부의 문화예술이 서로 결합했으며
동이용봉문화를 위주로 하여 중화민족의 용봉문화예술을 하나로 융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류펑쮠
산동대학 미술고고학연구소에서
2008년 10월 19일 밤
blog.daum.net/ttugi77/15711094 禪으로 가는 線
| [고인돌 주요 분포도]
- 백두산 부근 지역은 지대가 높아서 옛날에 사람이 많이 살지 않았으므로 고인돌이 많이 발견되지 않음. 고인돌은 전세계에 퍼져있지만 한반도에 세계 고인돌의 절반(50%) 이상이 몰려있다 할 정도로 한국은 [고인돌 왕국]으로 유명합니다. (일본의 고인돌은 2천수백년전에 한반도에서 건너간 것들인데 8천년전 것도 있는 한국의 고인돌에 비하면 그 시대가 아주 뒤늦은 것들입니다.) 위 [고인돌 주요 분포도]에 나오듯이 만리장성 이남의 중국에서 산동반도는 특이하게 고대 고인돌이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지진대]에 있다 봅니다. 위 그림은 동아시아의 [지진대]를 그린 것인데요
이처럼 중국 중부지방에는 지진대가 많습니다. 고대에는 사람들이 현대인보다 야생성이 많이 살아있었고 그래서 현대인들이 느끼지 못하는 정도의 작은 지진도 많이 느꼈으며 그래서 지진대에서 사는 것을 아주 싫어했을 겁니다. 그 사람들에게는 가끔 일어나는 큰지진보다 오히려 더 싫은 것이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작은 지진들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특히 5천년 이상 전의 사람들(특히 당시의 선진문명인들)은 [지진대]에 가는 것을 꺼려해서 [지진대] 지역은 미개한 지역으로 남아있는 경향이 강했다 봅니다. 예를들어 일본에서는 구석기시대의 유물이 거의 나오지 않는데 이는 그 시대에는 사람들이 일본땅에 거의 가지 않았다는 거죠. 지진이 많아서. 일본에 호랑이가 없는 이유 http://cafe.daum.net/121315/CK3e/273 <- 관련글 위 그림을 보면 [산동반도]는 지진대가 아니죠. 왜 만리장성 이남의 중국에는 특이하게 산동반도에 고인돌이 몰려있는지 그 이유가 [지진대]에 있다 하겠습니다. 약 5천년 이상 전에는 고대한국인들이 중국 중부지방에서는 지진대가 아닌 산동반도로 많이 갔는데 그래서 산동반도에서는 오래전부터 [소호(少昊)문명]이라는 문명이 발전하게 되죠.
요하(홍산)문명과 소호(少昊)와 소전(少典) <- 관련글 중국 최초의 나라라 하는 [하나라]와 [은나라]는 모두 지진대에 존재했고 그래서 고대한국에 비해서 문명이 많이 뒤떨어졌으며 문자(한자) 역시 고대한국에서 배워갔다는 근거가 계속 나오고 있다 하겠습니다. 산동반도로 건너간 고대한국인들이 사용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고대한자가 많이 발견되었는데 기존에 최초의 한자라 하던 은나라 갑골문보다 1천년 빠른 것들이라 크게 보도되었었죠. -------------------------------------------------------------------------- [기사 펌 - 발췌 ] 갑골문자보다 1000년 앞선 골각문자 발견4000 ~ 4500년 전 추정 … 동이족 문자 가능성
[중앙일보 2008.10.22]
중국 최초의 문자로 알려진 갑골(甲骨)문자보다 1000년이나 오래된 것으로 보이는 새로운 문자가 발견됐다. 산둥(山東)대 고고미술학연구소 류펑쥔(劉鳳君) 소장이 최근 중국 고고학 관계자들을 초청한 세미나에서 갑골문자 이전에 다른 형태의 골각(骨刻)문자가 산둥성 창러(昌樂)현 지역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밝혔다고 홍콩 문회보(文匯報)가 21일 보도했다. 류 소장은 “뼈의 색깔과 석화(石化) 상태를 판단해 볼 때 문자를 새긴 연대는 4000~4500년 전으로 보이며, 이는 중국 산둥성의 룽산(龍山) 신석기 시대에 해당된다”고 말했다. 중국 고고학자들은 당시 산둥 지역은 한민족을 포함한 동이(東夷)족들이 집단으로 거주했기 때문에 이 골각문자는 동이문자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류 소장은 “문자의 모양도 고대 상형문자인 동이문자 계열에 속한다”고 지적했다. 류 소장은 이어 “안양(安陽)을 중심으로 한 은허 지역에서 발견됐던 갑골문자도 동이족의 골각문자가 발전한 형태일 가능성이 크다”고 강조했다. 이번 골각문자 발견은 중국 역사를 지금보다 1000년 이전으로 돌리는 21세기 중국 고고학의 역사적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 위 기사에서 산동 [골각(骨刻)문자]라 하는 것은 뼈에 새겨진 문자라 해서 [골각(骨刻)문자]라 합니다. http://baike.sogou.com/v69296989.htm https://kknews.cc/culture/b2jl9bj.html 위 사진들처럼 소뼈 등 동물의 넓적한 큰뼈에 새겨진 문자들인데 은나라 갑골문이 약 3천년 ~ 3천6백년전 것들인데 비해서 1천년 정도 더 이전의 문자들입니다. 중국 언론을 보면 [산동 골각문]은 이미 은나라 갑골문을 넘어서는 '중국 최초의 문자'로 많이 인정받고 있습니다. 아래는 중국 언론에 나오는 [산동 골각문]입니다. http://news.sdchina.com/show/1892456.html 위 그림은 오른쪽부터 시대별로 [용(龍)]자의 변화인데 골각문 - 갑골문 - 금문 - 전서 - 현대한자 입니다.
고대 한자의 [용(龍)]인데 오른쪽이 [산동 골각문]이고 왼쪽이 [은나라 갑골문]입니다. http://news.sdchina.com/show/1892456.html 중국 고대사에서 유명한 동이족 장군인 [치우(蚩尤)씨]의 [치(蚩)]인데 오른쪽 골각문을 보면 사람의 얼굴 모습이며 왼쪽 갑골문은 많이 상징화가 된 모양이죠. https://kknews.cc/culture/k8zyzpr.html 황(黃)이라는 글자는 원래는 [훌륭한 인물]을 뜻하는 글자이며 오른쪽 골각문은 역시 사람의 얼굴 모습이고 왼쪽 갑골문은 상징화가 많이 된 모습이죠. [치(蚩)]의 원형인 이 그림은 고대한국의 장군(무인)을 그린 것으로 보이며 머리에 山 모양이 있습니다. [황(黃)]의 원형인 이 그림은 고대한국의 훌륭한 인물을 그린 그림으로 보이며 역시 머리에 山 모양이 있다 하겠고 상투
상투 모양도 있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위 인물은 머리에 뭔가를 2개 꽂은 ㅂ 형상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구려 때도 머리에 새깃털 2개 꽂았고 신라 화랑도 머리에 꽃가지 2개 꽂았고 조선 취타대 조선시대에도 머리에 2개 꽂아서 ㅂ 형태를 만드는 풍습이 있죠. 조선 임금의 머리 관도 ㅂ 형태. 고대한국에서 [지도자급 인물]의 머리를 ㅂ 형태로 만드는 풍습이 조선시대까지도 이어졌다 하겠습니다. 삼국유사에 환웅임금이 [서자(庶子)]라 하는데 원래 [서자(庶子)]라는 말은 [공자] [노자] [군자]처럼 훌륭한 인물을 뜻하는 말입니다. (아들(자식)을 뜻하는 말이 아닙니다.) [서자(庶子)]의 원래 뜻은 [세상에 빛이 되는 훌륭한 사람] http://cafe.daum.net/121315/CK3e/270 <- 관련글 서(庶) 의 고대한자를 보면 [ 서(庶) - 갑골문 ]
[ 서(庶) - 금문(金文) ] 위처럼 서(庶)의 고대형에서는 [사람]이 보이는데 이처럼 머리에 뭔가를 꽂아서 ㅂ 형태로 만든 사람인 것 같습니다. 환웅임금이 [서자(庶子)]였다 한 것은 훌륭한 지도자급 인물이었다는 얘기죠. 조선(대한제국) 임금과 신하. 위처럼 조선의 임금은 머리(관)를 ㅂ 형태로 만들었고 신하는 2개를 위로 못세우고 옆으로. 고대한국의 지도자를 뜻하는 ㅂ 형태 전통이 한국과 중국에서 근세까지 계속해서 이어져내려왔다 하겠습니다. (흔히 중국 것을 베꼈다는 오해를 많이 하는데 사실은 고대한국의 전통이 중국에 전파된 것.) 서정(庶政)이라는 말을 검색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처럼 서정(庶政)이라는 말은 [모든 정치]를 뜻하고 서정쇄신(庶政刷新)이라는 말은 모든 정치를 새롭게 발전시켜서 하겠다는 말이죠. 서정(庶政)이란 원래 [서자(庶子)의 정치]라는 말이고 고대한국에서 세상에 문명을 전하려 퍼져나간 서자(庶子)들, 즉 여러 환웅임금(고대한국의 젊은 지도자)들의 정치가 훌륭했다는 것이 지금도 말(언어)로 남아있다 하겠습니다. 중국 산동반도로 건너간 고대한국 사람들의 유물 중에 [아사달 문양]이라는 유명한 문양이 있죠. 산동반도에서 발굴된 고조선족의 팽이형 토기와 아사달 모양(네모 안). 중국 측은 6300년전∼ 4200년전의 유물로 추정한다. 사진 제공 신용하 교수 - http://www.donga.com/fbin/output?n=200705260044 --------------------------------------------------- 고대한국의 상징문양 중 하나인 위 [아사달문양]은 아침을 뜻하는 한자 단(旦)의 원형입니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시대별로 달라지는 아침 단(旦) http://blog.sina.com.cn/s/blog_72c717440102vei9.html 이처럼 산동반도로 간 고대한국인들이 쓰던 [아사달문양]이 차차 아침 단(旦) 이라는 한자로 변합니다. 환인(桓因) 환웅(桓雄) 단군(檀君) 환(桓) 아침 단(旦)이 있죠. 단(檀) 역시 아침 단(旦)이 있죠. 중국에서는 이미 [동이 골각문]이 은나라 갑골문보다 훨씬 빠른 문자이고 은나라 갑골문의 원형이라는 것이 정설화된 것 같습니다. 이러한 일이 또한 동북꽁정이라는 말도 안되는 짓을 감행하는 이유가 되었겠죠. 고대한국에서 건너간 문명이 중국문명의 뿌리라는 것이 계속 밝혀지니까 말이죠. 아래는 중국에서 [동이 골각문]을 정리한 것 중 일부입니다. 오른쪽부터 [골각문실제 - 골각문 - 갑골문 - 금문 - 전서 - 현재한자]입니다.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전해오기를 '창힐이라는 사람이 새 발자국을 보고 한자를 처음 만들었다.' 하죠.
이상한 것이 한자는 대개 사물의 형상을 그린 것이고 고대에 여러 많은 사람들이 그림을 그리다가 차차 자연스럽게 생겨나고 정립된 문자인데 왜 '창힐이라는 단 한사람이' 그것도 '새 발자국을 보고' 만들었다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조선(朝鮮 : 고조선)을 뜻하는 조(朝)자에 새발자국 같은 형상이 나옵니다. [ 조(朝) - 금문 ]
위에서 보이듯이 [새발자국 형상]은 고조선의 상징 중 하나입니다. 조(朝)는 (고)조선을 표현하기 위해서 생겨난 글자 http://cafe.daum.net/121315/CK3e/257 <- 관련글 물론 이러한 형상은 [새발자국]이 아니라 [천지인(天地人) 삼위일체(三位一體)]를 뜻합니다. 山의 형상과 뜻이 상통하는 모양입니다. [천대 지대 인역대(天大 地大 人亦大)] 하늘(天)도 위대하고 땅(地)도 위대하고 사람(人)도 위대하다는 뜻이죠. 고구려 토기 http://m.blog.daum.net/_blog/_m/articleView.do?blogid=09KZ7&articleno=1736043 고구려 토기에 井자가 많이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얘기인데 [새발자국 형상]도 있습니다. 고대한국의 전통이 이어진 것이죠. 위 사진은 서울 풍납토성에서 출토된 마한 혹은 백제의 기와들입니다. [새발자국 형상] 많이 나옵니다. 신라의 금관들입니다. 왼쪽 위가 초기 금관인데 [새발자국 형상]이고 후대의 것들은 山 형상이죠. 여기서도 [새발자국 형상]과 山 형상이 원래 같은 의미인 것을 알 수 있는데 고대한국의 山 형상은 원래는 한라산, 설악산 등의 자연 산(마운틴)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뜻하고 [천지인(天地人) 삼위일체(三位一體)]를 뜻합니다. 삼국사기에 "평양자 본선인왕검지택야(平壤者 本仙人王儉之宅也)" 즉 "평양(平壤)은 본래 선인왕검(仙人王儉)의 집(宅)이다." 했듯이 단군왕검은 선인(仙人)이시라 존칭되었고 환웅임금의 가르침이 신교(神敎), 선교(仙敎)였으며 고대한국의 최고지도자는 신인(神人), 선인(仙人)이시라 존칭되었습니다. (일본 전통종교인 '신교(신도)'라는 명칭은 고조선의 시원종교를 흉내낸 것. 천황(天皇)이라는 말 역시 원래는 고대한국 최고지도자의 존칭 중 하나를 본딴 것.) 우리나라의 전통종교는 선도(仙道) 불도(佛道) 유도(儒道)라 하는데 그 중 선도(仙道)가 제일 먼저이며 (고대한국의 시원종교.) 仙은 山에 예의를 갖추는 사람(人)을 뜻하는데 여기서 山이란 자연 산(마운틴)이 아니라 천지인(天地人) 모든 세상의 진리를 뜻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山 형상과 같은 의미를 갖은 형상이 [새발자국 형상]이고 '창힐이 새 발자국을 보고 한자를 처음 만들었다.'는 것은 동물 새의 발자국을 보고 만든 것이 아니라 [새발자국 형상]을 상징으로 하는 사람들 즉 고대한국인들의 문자를 베껴서 중국인들에게 가르쳐줬다는 얘기가 되겠습니다. 위에 소개해드린 산동반도의 [동이 골각문]보다 더 빠른 문자도 여러가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홍산문화의 [옥으로 만든 도장]입니다.
많이들 아시듯이 [홍산문화]는 고대한국의 문명 중 하나인데 아래와 같은 2개의 옥도장에서 글자가 발견되었습니다. 동물형뉴(動物形紐) 옥인장 - 동물 모양의 구멍뚫린 옥으로 만든 인장 이 도장의 아랫면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래는 또다른 도장입니다. 쌍두조형뉴(雙頭鳥形紐) 옥인장 - '머리가 둘인 새' 모양의 구멍 뚫린 옥으로 만든 인장 http://blog.donga.com/milhoon/archives/384 이 도장들은 대략 6천년전 것들이고 4천 수백년전의 [산동 골각문] 보다도 천년 이상 빠른 것들입니다. (은나라 갑골문 보다는 2천년 이상 빠릅니다.) [산동 골각문]을 보셨으면 이 도장의 '부호'들이 글자(문자)인 것이 와닿을 것입니다. 이 뿐만이 아니라 이미 발견된 고대한국인들의 문자(동이문자) 많을 것인데 '중국의 자존심' 때문에 많이 숨겨져 있을 것이며 중국 학자들이 이러한 고대한국인들의 문자(동이문자)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어서 "한자는 동이족이 만들었다.'는 얘기가 중국학자들 사이에서도 많이 나오고 있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학자적 양심으로 진실을 말하는 것이죠. 즉 고대한국에서는 6천년 전에도 이미 여러가지 글자(문자)를 쓰고 있었고 그 글자(문자)를 창힐이라는 사람이 베껴갔고 (물론 여러 사람이 베꼈겠지만 창힐이라는 사람이 많이 베꼈다고 볼 수도 있고) 고대한국인들의 상징 문양 중 하나가 [새발자국 형상]이기 때문에 후대에 중국에서는 '창힐이 새 발자국을 보고 한자를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8회 농촌경관 사진공모전 수상작 중에서 고랭지 배추밭의 녹색 파노라마 강원도 강릉 저 푸른 초원 위에 강원도 영양 감사합니다. [ 영원(永遠)에 합당(合當)한 삶을 살아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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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하는 한국혼(韓國魂)
[홍익인간]의 정신은 [사해동포주의]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민족, 다른나라 사람이라고 해서 공연히 배타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일 것입니다.
다이나믹 코리아, 게이트웨이 투 더 월드 [밝은 앞날][꿈은 이루어진다][꿈은 미래의 현실이다]
뿌다오웡
2008.10.31 01:24
중국 산동에서 출토된 창락갑골문 2008년 10월 30일 번역 : 민승준
早于甲骨文文字出土 獸骨刻滿符號 http://news.qq.com/a/20081030/001281.htm
4年前在中国东部山东省昌乐县集中出土的100多块兽甲骨上 所刻的600多个符号,结构和布局有一定的规律可循, 应为距今约4500年的中国早期文字。
신화 산동채널 10월 30일 보도, 중국고고학 전문가들이 그 동안 고증한 자료를 분명히 밝혔다. 4년전 중국 동부 산동성 창락현에서 출토된 100여개의 짐승뼈조각에 새겨진 600여 부호들이 일정한 규율에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지금으로 부터 약 4500년전의 중국초기 문자임이 확실하다.
参与这项研究的考古专家告诉记者,这些神秘兽甲骨上所刻的 “行列整齐”的图案符号比殷墟甲骨文更为原始,明显处于画(符号) 与字的过渡状态,二者应具有某种传承关系,是解释中国汉字起源的新依据。
이번 연구에 참여한 고고학 전문가들은 기자에게 알려주었다. 이 신비한 수갑골상의 새겨진 "행렬이 정치된" 부호는 은허 갑골문에 비해더 원시적이다. 이는 획과 글자의 과도한 상태로 보아 분명하다. 은허갑골문과 이 부호가 계승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중국한자기원의 새로운 증거로 해석된다.
昌乐县一民间收藏爱好者肖广德在昌乐县袁家庄古遗址上采集陶器标本时发现, 当地农民在施工挖掘时,丢弃了许多亚化石状远古兽骨, 经过清理,可见上面有许多刻划痕迹明显的图案符号。
2004년, 창락현의 민간수장품애호가 씨아오광더 씨는 창락현 원가장 고유적지에서 도기 표본을 발견하게 된다. 당시 그 곳 농민들이 굴착공사를 하는 과정중 화석에 버금가는 원고시대 수골을 버리고 있었다. 그는 이것들을 깨끗이 처리하였고, 이로 인해 수골 위에 새겨진 도안과 부호들을 볼수 있게 되었다.
共收集刻有文字符号的甲骨100多片及2块玉残片,共有600多个图画文字。 这些文字有的刻在骨片面上,有的刻在骨腔内,有的刻在骨臼头上。
씨아오광더 씨는 우선 도안 및 부호가 있는 것들을 가려내 높은 값에 사들였다. 문자부호가 새겨진 것은 갑골 100여편과 부서진 옥편 2조각으로 도안문자는 모두 600여 자였다. 이러한 문자들은 뼈조각 편위, 뼈 내부, 어떤 것은 뼈어금니(?)에도 새겨져 있었다.
山东大学美术考古研究所所长、山东省甲骨文学会副会长刘凤君 发现,这些符号都属于阴线刻,笔画婉转曲折,刻画纤细, 多为弧笔和曲笔,呈现出螃蟹状、草虫状和鸟状等形态。
2008년 7월말, 북경과 산동에서 온 7명의 고고학자들이 이 부호를 놓고 전문적으로 연구 검토하였다. 산동대학 미술고고연구소 소장, 산동성 갑골문 학회 부회장인 류펑쥔 선생은 이 부호들은 모두 음선각에 속하며 필획이 구성지게 굽이쳐 흐르고 새겨진 획이 섬세하며 다량의 호선과 곡선이 있다는 점, 그리고 게, 풀벌레, 새 형상등의 형태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这些兽骨上有刀刻的痕迹,主笔、辅笔明显,为人工刻画。
중국사회과학원역사연구소연구원, 중국은상학회회장 왕위씬 선생은 이 수골상에 새겨진 흔적은 주로 붓, 보조적인 붓으로 이루어진 것이 명확하므로 사람에 의해 인공적으로 새겨진 것이라고 확정지었다.
三角符号有4到5个,小鸟符号有4到5个。 “重复的符号是人有意识的刻划行为。”王宇信说。
전문가들은 수골상의 부호를 분류했다. 태양부호를 닮은 대여섯개, 삼각부호 너댓개, 작은 새부호 너댓개를 발견했다. "중복되는 부호는 그 당시 사람들의 의식적인 새김행위로 보여진다." 왕위씬 선생은 말했다.
体系较为完整的文字为在河南安阳出土的商朝王室用于占卜的殷墟甲骨文, 这一发现使中国与以纸草、泥板、石板为文字载体的古埃及、 古巴比伦和古印度并列世界文明古国。
지금에 이르기 까지 중국은 이미 체계가 비교적 완벽하고 발견시기가 가장 이른, 하남성 안양에서 출토된, 상나라 왕조가 점칠 때 사용했던 은허갑골문이 있다. 이 갑골의 발견은 중국을 풀로 만든 종이, 점토판, 돌판을 문자 재료로 사용했던 고대 이집트, 고대 바빌론, 고대 인도 등의 위대한 문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만들었다
包括原始社会晚期及有史社会早期出现在陶器刻画或彩绘符号, 还有少量的刻写在甲骨、玉器、石器等上面的符号。
최근 몇십년, 중국 각지에서는 앞다투어 은허 갑골문보다 이른 시기의 한자기원과 관련된 계열의 출토자료들이 발견되고 있다. 원시사회 말기 및 역사사회 초기에 출현한 도기 부호, 채색부호 및 갑골, 옥기, 석기 위에 새겨진 소량의 부호들이 그것들이다.
“在甲骨文之前,现已发现的许多新石器时期晚期陶片上的刻划符号 虽然说是汉字萌芽,但都是单字且无规律。”
왕위씬은 말하길 "갑골문 이전의 것으로, 지금 이미 발견된 많은 신석기말기 도기상에 새겨진 부호들은 비록 한자의 맹아(싹)이라고 할 수 있지만 모두 한글자로 규율성이 없다. "
有些偏旁多次出现,而此前这一地区附近也曾发现过早期文字, 说明这次出土的骨刻文字不是一种偶然现象。
고고학자가 발견한 창락골각문자의 포치 및 결구는 규율을 따르고 있다. 어떤 편방이 여러번 출현한다. 게다가 일찌기 이 지역 부근에서 초기 문자가 발견된 적이 있다. 이는 이번에 출토된 골각만자가 우연적 현상이 아님을 설명해준다.
最早被称作东夷人。东夷文化从距今8300年前的后李文化起, 历经北辛文化、大汶口文化、龙山文化、岳石文化。 东夷人以鸟为图腾,巧合的是昌乐骨刻文有些正反映出鹰和小鸟的形象。
산동성 갑골문학회 회장 리라이푸 선생은 말한다. 산동 및 이 부근 토지에서 생활한 고대 인류는 제일 이른 시기는 東夷人이라고 불리여졌다. 동이문화는 지금으로 부터 8300년전의 호우리문화부터 시작해서 베이씬, 따원코우, 롱샨, 위에쓰 문화까지 이른다. 동이인들은 새를 토템으로 삼았다. 공교롭게도 창락골각문에서는 매와 작은 새의 형상을 반영하는 것들이 있다.
其年代正是距今四五千年的龙山文化时期,制作上和殷墟甲骨文类似。
전문가들은 이러한 뼈들이 돌이 된 정도, 색, 찰진정도 등을 파악하고, 그 연대는 바로 4, 5천년전의 용산문화시기로, 제작상은 은허갑골문과 유사하다고 판단했다.
明显处于画(符号)与字的过渡状态,二者应当具有某种传承关系。
리라이푸 선생은 상주 갑골문과 비교해 보았을 때 창락골각문은 더 오래되었다고 주장한다. 새겨진 획과 부호, 글자의 과도한 상태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분명 상주갑골문과 창락갑골문은 어떠한 계승관계를 갖추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又被昌乐爱好者收藏,暂定名为“昌乐骨刻文”。 虽然目前尚不能破译,但其发现对研究中国古文字的演变过程, 复原当时的社会形态,提供了宝贵的佐证。(完)
전문가들은 연구한 결과, 이 골각문자들은 주로 창락유적지에서 출토되었고 또 창락의 수집애호가에 의해 수장되었으므로 잠시 창락골각문으로 부르기로 했다. 비록 최근 해독할 수는 없는 상황이지만 이 창락골각문은 중국고문자의 변천과정연구에 있어서 당시의 사회형태를 복원해 주고 귀중한 증거를 제공해주는 중대한 발견으로 여겨진다. (끝)
2008.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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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증]창락현(昌樂縣)은 기자 일행이 조선으로 건너기 위한 경유지였다. 이곳에서 최근 신시문자로 추정되는 동이갑골문 발견되었다.
창락현(昌樂縣)은 동방의 성인이신 기자께서 장도로 들어가는길에 잠시 머물렀던 경유지다. 이곳은 장도와는 거리가 천여리나 떨어져 있지만 등주수도인 험독의 거센 물길을 피하기 위해서 이곳에서 배를 띄워야 멀리 우회하여 건널 수 있기 때문이다.그러니까 창락현이 장도를 출입하는 관문이라는 얘기다. 기자께서 조선으로 가는길에 따르는 종자들과 함께 머물렀던 기록은 <속 창락현지>를 통해서 밝혀졌다.
뿐만 아니라<상서주소>라는 <서경>의 기록을 통해서도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이곳 역시 신시의 영향권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상식일 것이다. 문자가 만들어진 시대가 대체적으로 치우시대에 해당한다고 한다. 치우가 다스리던 청구국은 지명의 이름이 영구(營口)로 바뀌어 바로 인근에 있었다. 그리고 한웅께서 신지 혁덕에게 문자를 만들도록 지시하여 창힐이 만들었다고 하는가림토도 멀지 않은 곳 환대에서 발견되었다.
《상서주소 권4고증》 해대지역(海岱地域)에 있던 청주는 요(堯)나라 때 바다를 건너 요동과 소통하던 곳이다. 호위가 말하기를 아직 의심이 없는건 아니지만 한무제가 열었든 낙랑.현도 2군이 모두 옛날 우이지역에 있던 청주 지역이다. 우이는 희중이 삶을 열었던 곳이고, 기자를 조선에 봉했으나 불응하고 밖으로 나간 곳이다. 단 요동에 있는 건 아니다.
海岱惟青州疏堯時青州當越海而有遼東也○胡渭曰疏亦未盡疑漢武所開樂浪元菟二郡皆古嵎夷之地在青州之域者嵎夷羲仲所宅朝鮮箕子所封不應在化外先儒但云有遼東非也
1.환대--가림토문자 2.왜팡시--동이 갑골문자 3.창락--창락골각문자가 발견된 곳 3번의 창락은 기자일행이 장도로 건너기 위해 머물렀던 곳이고 백이숙제가 주나라의 간섭을 피하여 은신하던 곳이다. 후에 위만이 교역을 위하여 출입하던곳도 이곳이다.
신시의 가림토 문자는 창락현의 좌측에 있는 환태(桓台)에서 발견되었고, 동이갑골문은 창락현의 우측에 있는 웨팡에서 발견된 것이다. 그리고 상서의 주석에서 말하는 기자가 주무왕의 제의를 거절하고 밖으로 나갔다고 한 곳이 창락과 같은 지역에 있는 청주(靑州)다. 창락에서 내주만으로 내려가면 연태로 향하는 항로가 연결되지만 기자 당시에 이미 바다가 형성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상서》우공편에서 말하는 <흑수는 동으로 흘러 삼위산에 이르러 남쪽바다로 들어간다>고 하는 기록은 바다가 형성되기 전에도 이곳에서 배를 타면 흑수가 직접 사문도(장도)로 연결됨을 알수 있다. 청주는 이정기가 치청절도사로 부임하여 제나라를 건국한 지역이고, 백제와 신라,고려까지도 자사 등을 임명했던 기록들이 보인다. 동쪽으로 래주에는 마안산(馬鞍山)이 있는데 원래 래이(萊夷)의 발상지었다고 하고 이 마안(馬鞍)이라는 지명이 장산군도로 옮겨져 마한땅에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산동성에서 배달국시대의 갑골문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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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나라보다 천년이상 앞선 동이의 갑골문자 발견 | |||
| 산동성에서 은허(殷墟)갑골문보다 천여년 훨씬 이전의 갑골문인 동이갑골문(東夷甲骨文)이 발굴되었다고 발표되었다. 산동 용산문화 중만기 유물로 지금으로부터 약 4,000 ~ 4,500년(치우배달국시대) 전의 것이고, 중국의 전문가들이 자기네 것이 아닌 동이의 문자(東夷文字)라고 발표하였다. 연대적으로 치우 배달국 용산문화 후기의 유물로 배달국(구리)말기의 동이갑골문(東夷甲骨文)이 배달국의 부족 중 하나였던 기원전 1600년경에 상나라(은殷)을 세운 상부족의 은허갑골문(殷墟甲骨文)의 모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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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秘东夷甲骨文有了“名份”
□记者高祥森
本报昌乐8月14日讯本报7月13日刊登的《神秘东夷甲骨文惊现潍坊?》引起国内外强烈关注。最近中国文字研究权威专家、中国社会科学院历史所研究员王宇信教授等人聚集昌乐,经过研究,专家们初步认定这些神秘甲骨上所附的“行列整齐”的符号为中国早期文字,在出现时间上应早于河南安阳殷墟甲骨文,为区别起见,专家把这些神秘符号命名为昌乐骨刻文字。
산동성 창락현의 신비 갑골문의 수수께끼를 풀다 : 안양갑골문보다 훨씬 빠른 시기이다. (山東昌樂神秘甲骨文解謎:比安陽甲骨文更早)
제로만보(齊魯晚報) 의 7월 13일 간행 지면에 등재된 <신비의 동이갑골문(東夷甲骨文)이 산동성 유방(濰坊)에서 발견되어 세상을 놀라게 했다>라는 보도가 국내외의 지대한 관심과 집중을 불러 일으켰다.
최근의 중국 문자연구의 권위있는 전문가인 ‘중국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의 연구원인 왕우신교수 등이 산동성 창락현에 모여 연구경과를 토의했고, 전문가들은 여러가지 신비한 갑골위에 ‘행렬정제’된 부호가 중국의 초기문자라고 처음으로 인정하였다.
발굴시기는 하남성 안양시에서 발굴된 ‘은허갑골문(殷墟甲骨文)’보다 훨씬 이전의 것으로 그 기원이 판명되었으며, 전문가들은 이 ‘신비부호’의 이름을 ‘창락골각문자(昌樂骨刻文字)’라 명명하였다.
自2004年以来,昌乐县收藏爱好者肖广德在昌乐县袁家庄及其附近的纪台等古文化遗址上发现并收集了一批当地老百姓翻地挖出的带字骨头。2007年7月,山大美术考古研究所所长、博士生导师刘凤君教授开始对带字骨头进行研究,他认为这批资料极为重要:如果真是从古文化遗址上收集来的,它应是山东龙山文化的遗物,是中国早期的文字;如果是后人刻的,应该有摹本,这摹本应是龙山文化的遗物,应该把它找出来。刘凤君在肖广德家里,又看到了一百多块刻字的骨头。刘凤君认为这批刻字的骨头是山东龙山文化中晚期的遗物,距今约4000—4500年,属东夷文字。
7月30日,中国古文字研究权威专家、中国社会科学院历史研究所研究员、中国殷商文化学会会长王宇信教授等5人聚集昌乐,观看了大量的骨刻文字照片和实物,举行了一次座谈研讨会。与会专家一致赞同刘凤君的鉴定意见,认为这批文字是比安阳甲骨文更早的一种原始文字,认为它与安阳占卜的甲骨文不同,是一批记事骨刻,应称为“昌乐骨刻文字”。与会专家认为它是继安阳甲骨文后的又一重大发现。
有关专家认为,昌乐骨刻文字的发现表明,中国早在4000多年前就已有了作为文明标志的文字,使传说中的龙山文化时期成为信史。另外,昌乐骨刻文字和殷墟甲骨文类似,都是刻在兽骨或龟甲上,这和以纸草、泥板、石板为文字载体的古埃及、古巴比伦、古印度文字体系明显不同;它的出现,使有中国文字记载的历史可能再次提前。
记者 高祥森
7월 30일 중국고문자연구의 권위있는 전문가이며 중국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의 연구원이고 중국은상문화학회(中國殷商文化學會)의 회장인 왕우신(王宇信)교수 등 5인이 창락현에 모여 대량의 골각문자의 사진과 실물을 살펴보았고 일차 좌담연구토론회를 개최하였다.
회의에 참여한 전문가들은 류봉군(劉鳳君)의 감정 의견에 모두 찬성동의하였고, 이 문자들은 안양갑골문자와 비교해 훨씬 이전의 일종의 원시문자(原始文字)로 인정하였고, 안양점복의 갑골문과는 서로 같지 않음을 인식하고, 이를 기사골각(記事骨刻)으로 창락골각문자(昌樂骨刻文字)로 칭하기로 하였다.
회의에 참여한 전문가들은 그것은 안양갑골문 발견된 이후에 이어진 또 하나의 중대한 발견이라는 것에 인식을 같이 하였다.
7月30日,中國古文字研究權威專家、中國社會科學院曆史研究所研究員、中國殷商文化學會會長王宇信教授等5人聚集昌樂,觀看了大量的骨刻文字照片和實物,舉行了一次座談研討會。
與會專家一致贊同劉鳳君的鑒定意見,認爲這批文字是比安陽甲骨文更早的一種原始文字,認爲它與安陽占蔔的甲骨文不同,是一批記事骨刻,應稱爲“昌樂骨刻文字”。
與會專家認爲它是繼安陽甲骨文後的又一重大發現。
관련 전문가들의 인정이 있음으로 해서 창락골각문자(昌樂骨刻文字)의 발견을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중국 초기인 4,000여년 전에 이미 문명을 나타내는 문자를 만들었다는 것이고, 전설적인 용산문화시기가 역사임을 믿게 하였다.
그밖에, 창락골각문자와 은허갑골문자가 유사한데 모두 이것은 짐승의 뼈나 거북등껍질(龜甲) 위에 새겨졌으며, 이것과 지초(紙草), 니판(泥板)-진흙판, 석판(石板)위에 새겨서 문자 체계를 이룬 고대 이집트, 고대 바빌로니아, 고대 인도의 문자체계와 다름이 명백히 드러났다. 이것의 발견은 중국 문자 사용의 역사를 다시 한번 앞당길 수 있게 했다.
有關專家認爲,昌樂骨刻文字的發現表明,中國早在4000多年前就已有了作爲文明標志的文字,使傳說中的龍山文化時期成爲信史。
另外,昌樂骨刻文字和殷墟甲骨文類似,都是刻在獸骨或龜甲上,這和以紙草、泥板、石板爲文字載體的古埃及、古巴比倫、古印度文字體系明顯不同;它的出現,使有中國文字記載的曆史可能再次提前。(高祥森)
[기고 : 대종언어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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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古朝鮮) 문자(文字)에서 훈민정음(訓民正音)까지 (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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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동명님의 글은....東夷와 韓에 대한 인식만 바꾸면 아주 좋은 분석글이 되겠네요... 즉, '東夷'와 '韓'을 '고정된 지역(장소)'으로만 보지 말고 '이동할 수 있는 민족(사람)'으로 보는 인식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보입니다...동아시아의 고대사서에서 언급되는 '東夷'의 범위는 아래 그림이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물론 이 '東夷'의 속에 '韓'이 들어 있는 것이지요....'東夷'와 '韓'을 '현,한반도'로 국한해서 보는 인식에서는 '동아시아 고대역사의 실상'을 결코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
고조선(古朝鮮) 문자(文字)에서 훈민정음(訓民正音)까지 (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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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字는 단군왕검 때 만든 문자일 가능성이 크다 (4부)
www.greatcorea.kr/sub_read.html?uid=6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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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khak.org/board/content.php?bo_table=tb_upqa_9&left_menu=class.. 국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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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04
cafe.daum.net/imgyou/E8aJ/55 林溪全漢淑 書藝硏究院
*** “갑골문보다 1천년 앞선 골각문(骨角文)은 동이족의 글자”
출처 : 코리안스피릿(http://www.ikoreanspiri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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