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프독의 전쟁사 - 日 메이지 유신 시대의 銃器들 外

2018. 10. 31. 20:19병법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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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메이지 유신 시대의 銃器들

울프독의_전쟁사 작성자: 울프독
조회: 7100

작성일: 2012-01-16 14:3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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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메이지 유신 시대의 銃器들



   케이블 방송 Channel-J에 일본 메이지 유신 때 큰 활약을 했 사카모토 료오마의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실제 인물을 충실하게 표현하고자 곱슬머리 분장까지했지만
배역 배우들의 중량감이 실물에 영미치지를 못한다.]

 

           

사카모토 료오마
거구의 당당한 체구였지만 근시였다. 



   일본 야후와 소프트 뱅크의 사장인 손정의씨가 인터뷰 중에 사카모토 료오마의 말을 인용했던 것이 신문에 보도되기도 했을 만큼 일본에서 유명한 인물인 그는 도오사 번(藩)의 하급 무사 출신으로 도쿄 북진일도류 지바 도장에서 수학했던 검술의 달인이다.

   그는 개방에 뜻이 있었고 일본 해군의 모태인 해원대
지도자이기도 하였는데, 그의 최대 공로는 일본 최초의 해군을 창설한 것이나 최초의 주식회사형 무역회사를 설립했던 것도 있지만, 당시 도쿠카와 막부에 반기를 든 조오슈와 사쓰마 두 번(藩)의 연합을 중재해서 성공시킨 것이다.
[두
번(藩)은 연합 전에는 서로 전투를 벌일 만큼 개와 고양이와 같은 사이였다.]
 


                                                                             일본에서는 잘 알려진 사카모토의 연인 오료
                                                            후에 결혼하여 일본 최초의 신혼 여행을 다녀온다.

                                                                            사카모토 사후 재혼했지만 곤궁하게 살다가 죽었다. 
                                                               사카모토는 명치유신 성공 직전 암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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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카모토는 검술의 달인이었음에도 소형 권총을 가지고 다녔었다.
 
조오슈 지사 다카스키 신사쿠선물한 것으로 그가 습격당했던 데라다야 격투에서도 이 권총을 사용했었다고 한다.

평소 사카모토가 사용한 권총의 정체에 대해 궁금했었기에 여기에 소개한다.




사카모토의 S&W  모델 1, 22 short 호신용  권총

유연 화약으로 발사되어 위력은 약했으나 급소에 명중하면 치명적인 상처를 줄 수 있었다. 

                                                                  포켓 피스톨의 원조 격이 되는 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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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남 지역의 조오슈, 사쓰마 두 번이 사카모토의 중재로 연합하여 250년간 계속되었던
도쿠카와 막부를 붕괴시킬 수 있었던 이면에는 신형 총기들이 한 몫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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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은 1467년 오닌의 난[應仁の亂)이래 100 여년간 60 여개 국가로 나뉘여져 밤낮없는 전쟁을 벌였었다.

전국 말기 나타난 오다 노부나가가 거의 통일을 이루었으나
막바지 시점에 부하 아케치 미쓰히데의 배신으로 죽임을 당하고 그 뒤를 이은 것이 조선을 침략했었던 도요도미 히데요시다.

그러나 도요도미 히데요시가 죽고 난 후 도쿠카와 이에야스가 히데요시의
추종파들과 벌인 일본 최대의 전투인 세키카하라 전투에서 승리하였고, 도쿠카와 막부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도쿠카와 이에야스 편을 동군, 도요도미 히데요시 추종 세력의 편을 서군으로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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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로시마를 근거로 했었던 조오슈의 모리 가문은 서군 편에 섰다가 패전 후 세력이 휠씬 축소되어 당시 일본 변방인 서남쪽으로 쫓겨났다.

사쓰마도 서군에 섰지만 참여의 정도가 적어서
번주 시마스 요시히로은퇴하는 정도로 가벼운 처벌을 받았지만 두 번(藩)은 250년 동안 막부로부터 찬밥 취급을 받으며 내심으로는 권토중래[捲土重來]를 꿈꾸었다.

거의 견원지간으로 사이가 좋지 않았던 조오슈
사쓰마 사카모토의 중재로 연합[후에 도오사 번도 참여]한 뒤에 본격적인 막부 토벌 운동을 벌였다.

처음에는 천황을 모시고 서양 오랑캐의 침략에 대비하자는
취지로 막부 토벌 운동을 시작하였지만 나중에는 천황을 모시고 국가를 개방하여 실력을 쌓자는 쪽으로 방향이 바뀌었다.

   죠오슈사쓰마는 막부 시절 서남쪽 변방의 세력들이었지만 세월이
흐르고 보니 남쪽에서 밀려오는 서구의 신문물이 들어오는 입구에 있게된 것인데, 덕분에 일본의 어느 곳보다 일찌기 서구문물에 눈을 뜨고 이를 받아들였다.

   사쓰마는 환경을 최대로 활용하여 부[富]를 축적하는 방법을 택했다.

   사쓰마의 시마즈 나리아키라라는 명군[名君]은 서양 기술을 대폭 수용하여 서양식 방적 공장까지 건립하는 정도가 되었는데 사쓰마 1609년 일찌기 유구국(오키나와)을 점령해서 이곳의 산출물인 흑설탕일본 전국에 팔아 부를 축적하기 시작했다.

   두 번째로 사쓰마 번에 돈을 벌어준 것은 조선의 남원에서 몽땅 잡아 온 도공의 후예들이 만든 도자기 였다. 중국의 도자기 생산 중심지인 경덕진 태평 천국의 난으로 유린되자 서양의 도자기 무역업자들이 일본으로 발길을 돌려 일본 도자기를 붙티 나게 유럽으로 실어 내간 것이다.

   중국 상하이와의 밀무역조오슈사쓰마의 돈줄이었는데
이런 돈벌이로 사쓰마는 서남[西南]의 웅번[雄藩]이라 불리우게 되었다.

   이렇게 돈이 쌓이자 사쓰마는 최신 병기를 사들여서 군사력을
대폭 증강시켰는데 그 중심은 프러시아제(독일제) 후장총[後裝銃, 탄약을 총의 뒤쪽에서 재는 소총]인 게베르[GEWHER] 소총이었다.

   당시 일본에 많이 들어와 있던 무기는 전장총[前裝銃, 탄약을 총구(銃口)에 재는 소총]인 프랑스제 미니에 소총으로 사격하는 병사는 총을 세우고 뻣뻣이 선채 총구 안에 실탄을 밀어 넣어야했다. 총탄이 난비하는 전장에서 이렇게 서서 장탄한다는 것은 피탄[被彈]의 위험성을 초래하는 짓이었다.

 

 미니에 라이플로 무장한 프랑스 군
미니에 총은 영국 엔필드나 미국  스프링필드 총의 원조가 되었지만 

이로 무장한  프랑스군은 게베르 소총인 DREIYSE 총으로 무장한 프러시아 군대에게 패배하였다.

                                                

  반면 더 신형인 게베르 소총은 엎드린 자세에서 총신 후미에 장탄[裝彈]가능했기 때문에 은폐 엄폐가 가능해 미니에 소총에 비해 절대 우세하였다.

   경제력이 좋은 사쓰마후장총인 프러시아제(독일제) 게베르 총을 대량으로
수입, 이를 주력화기로 무장했고 게베르 총을 조오슈에 원조하기도 하였다.

 

 

                                                           프러시아제 게베르 총 - DREYSE NEEDLE GUN




   결국 일왕[日王]을 등에 업은 사쓰마, 조오슈 군막부사이에 무진전쟁이 벌어졌고 막부군은 패배해서 250년 막부 정치의 문을 닫아야 했다.

   무진전쟁에서 관군[官軍-실제로는 사쓰마, 조오슈 연합군]
은 주로 프러시아제[독일제] 무기를 사용했었고 막부군랑스제와 미국제 무기를 주로 사용했었다.

   그런데 패배한 막부군의 무기 중에서 눈에 띄는 것들이 있다.

   에노모토가 지휘하는 막부군의 패잔병들이 호카이도 하코다테로 물러나 저항할 때의 전투 상황 기록을 보니 도쿠카와 병사미제 스펜서 카빈을 사용하고 있었다. 



 

                                                                                        스펜서 연발총 - 5발 연발.


   스펜서 카빈은 남북 전쟁에서 출현한 연발총으로 사거리와 화력은 약했지만 연발 사격력으로 단점을 극복했던 총기였다.

   이 스펜서 카빈은 일본에서 무진전쟁으로 왕정이 복고되고 나서 불과 몇 년 뒤인 1871년 신미양요 조선 강화도 광성보 전투에 나타난다.

   또 다른 무기도 있다.

   반 독립적 위치에서 관군에 저항하던
나가오카 번개틀링 기관총으로 관군을 공격했었는데[나중에 조오슈 군벌의 우두머리가 된 야마가타 아리토모기관총 사격에 부상을 입기도 했었다.] 이 개틀링 기관총은 뒤늦게 조선군에 수입되어 1894년 공주 우금치에서 동학군에게 큰 피해를 주고 대패하게 하였다.

 

개틀링 기관총



   일본은 메이지 유신 중에 서구 문물을 대거 받아들였으며
그 와중에 자주 국방을 위한 주요 무기의 국산화에 힘을 쏟았다.

최초의 일본 국산총무라다 소총은 당시의 최신이었던
독일의 모젤 총을 카피한 것이다.

풍운 급박한 아시아의 정세 속에서 적어도 일본은
무진전쟁이라는 내전의 단계에서부터 세계 일류의 총기들을 사용했었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 폐쇄적인 은둔 국가로 살아가던 조선이
강화도를 침공했던 프랑스군과 미군들에게 대항 하는 무기로 내세웠던 것은 1592년 일본군이 조선을 침공하면서 휴대했던 화승총에서 단 일보도 발전하지 못한, 화승총 그대로였다.


 

 
조선의 포수들과 화승총. 관광용  사진 촬영을 위해 포즈를 취해주고 있다. 


  그래도 임진왜란 때는 조선도 일본의 신무기에 맞서 비격진천뢰, 화차, 화포 등의 여러 무기들을 사용했었는데 병인양요 이래 프랑스군, 미군과 대결하고자 한 대원군이 내놓은 무기(?) 라는 것이 척화비[斥和碑]였으니 조선이 국제 정세와 과학 기술을 외면한 채 얼마나 깊은 수면에 빠져 들었었는지를 짐작 할 수가 있다.


   그후 일본에 농락당했던 역사를 되집어 보면 애석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같은 시기 호전적인 민족인 일본이 본격적이 개국정책 실시 이전 자기들끼리의 내전에서부터
세계의 최첨단 무기를 사용했다는 사실은 조선에게 침략의 미래가 오고 있다는 안 좋은 징조를 예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日 메이지 유신 시대의 銃器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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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대 사무라이 사상가들, 사이고 다카모리 요시다 쇼인 사카모토 료마 POD도서

  • 저자 탁양현 출판사 퍼플
  • 책소개

    • 칼을 모시는 사무라이
      그리고 메이지유신




         일본의 ‘사무라이[侍]’는, 무언가를 ‘모시는’ 사람이라는 의미다. 이에 대해, 대체로 그 ‘모심’의 대상이 主君인 것으로 이해한다. 그런데 실상 사무라이가 모시는 대상은 칼이다. 칼이 곧 주군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人類史에서, 古代로부터 근대에 이르는 칼의 시대에, 칼은 곧 권력을 의미한다.

    •    전통적으로 일본사회에서, 칼은 상징적인 권력이면서, 동시에 실제적인 권력이기도 하다. 그래서 칼을 거부하거나 저항하면, 칼로써 베어져 죽임을 당하게 된다. 사무라이는, 그러한 칼 자체를 神처럼 모셨던 것이다. 그러다가 근대 이후, 銃의 시대가 되면서, 칼은 권력을 상실했고, 사무라이도 精神性도 다른 모습으로 변모케 된다.
      따라서 尙武精神의 상징이었던 칼은, 物質精神의 상징인 총으로 대체된다. 칼이 主君을 의미했다면, 이제 총은 資本을 의미한다. 물론 근대 이전 中世에, 이미 일본은 서구 제국주의에 의한 開港으로써 총의 시대가 시작되었고, 예컨대, 일본의 근대를 이끈 ‘메이지유신’ 시기의 ‘세이난 전쟁’은, 철저히 총과 대포를 이용한 전쟁이었다.
      그러나 메이지유신 시기까지, 일본사회는 분명 칼을 모시는 사무라이들이 주도하는 사회였다. 그러다가 메이지유신 이후, 기존의 사무라이들은 ‘생존의 이득’을 목적하며 정치적 자본가로서의 변모를 꾀했고, 대부분 근대적 자본가로서 거듭나게 된다. 이것이 일본사회에서, ‘칼과 사무라이’의 시대가 ‘총과 자본가’의 시대로 변화하는 樣相이다.

         메이지유신을 주제로, 대표적인 사무라이 사상가들을 살피면서, 필자로서는 여전히 한국사회를 주도하고 있는 植民史觀이라는 幽靈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非但, 식민사관만이 아니라 東北工程이나 半島史觀의 문제도 그러하다. 흔히, 이러한 문제들은 ‘역사적 史實’의 문제이므로, 역사학의 所管인 것으로 판단하기 쉽다.

    •    그러나 역사라는 것은, 역사적 문제이면서 동시에 정치적 문제임을 인식해야 한다. 어떠한 ‘역사적 事實’이 歷史書에 史實로서 기술되어, 하나의 歷史가 정립되는 과정은, 지극히 정치적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조선왕조의 半島史觀’, ‘日帝의 植民史觀’, ‘중국의 東北工程’ 등에 의한 역사는, ‘역사를 위한 역사’가 아니라, ‘정치를 위한 역사’임은 周知의 사실이다.
      흔히, ‘조선왕조의 반도사관’을 ‘日帝 식민사관’의 일종이라고 인식한다. 그러나 ‘요동 정벌’ 명령에 抗命하며, ‘위화도 회군’이라는 정치적 결정을 하고,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를 선언할 때 작동한 ‘史觀’이야말로, ‘반도사관’이다. 본래 우리 민족의 영토이던 ‘요동’을 포기하고서, 우리 영토를 ‘압록강’ 이남의 ‘韓半島’로 국한시켰기 때문이다.

    •    ‘일제’는 그러한 ‘조선왕조’의 전통적인 ‘역사관’에, ‘반도사관’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따라서 ‘조선왕조의 반도사관’‘식민사관 중의 반도사관’은 뭉뚱그려질 수 없는 별개의 개념이므로, 명확히 분별하여 살피는 것이 타당하다.
      ‘식민사관’은 19세기 말 도쿄제국대학에서 시작되었는데, ‘神功皇后’의 新羅征服說과 任那日本府說, 滿鮮史論 등을 내세우다가, 20세기 초부터 朝鮮侵略이 본격화되자 日鮮同祖論, 他律性論, 停滯性論, 黨派性論 등을 제시하고 있다.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 ‘이마니시 류(今西龍)’, 李丙燾 등이 대표자들이다.

      -하략-

    저자소개

    • 저자 : 탁양현
         현재에 이르러서는 親中主義, 親美主義, 親日主義, 從北主義 등의 문제도 얽히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知彼知己의 認識으로서 상대를 명확히 파악하지 못하면, 이내 그릇된 결정을 하게 되기 십상이다. 예컨대, 조선왕조 말기에 이루어졌던 일련의 정치적 결정들은, 그러한 그릇됨을 여실히 드러낸다.

    •    그런데 단지 개인의 결정이라면, 그 反響이 微微할 수 있지만, 공동체의 집단적 결정이라면, 국가공동체 자체가 소멸될 수도 있다. 그러니 東西古今을 막론하고서 知彼知己의 자세는, 삶의 태도로서 참으로 결정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현대사회에서도, 현재 대한민국의 입장에서, 미국이나 중국의 속내에 대해 명확히 알지 못한다면, 자칫 그릇된 결정을 내릴 수 있다. 그랬다가는 조선왕조 말기의 前轍을 밟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나아가 북한이나 일본에 대한 理解 역시 그러하다.
      특히 북한은, 남한에게 있어 가장 직접적인 분석의 대상이다. 그러나 북한에 대한 온갖 이성적 논리와 분석들이 넘쳐나며, 갖은 감성적 조작과 왜곡들이, 쉼없이 ‘生存의 利得’이라는 혼돈 속으로 이끈다. 그러나 참으로 자명한 것은, 현재의 대한민국을 존속시켜 남북통일을 실현시키며, 故土 滿洲를 수복하는 발전으로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    그러기 위해서는 북한, 미국, 중국, 일본 등을 더욱 명확히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그릇된 결정을 피할 수 있다. 일본 근대의 사무라이 사상가들을 살피는 까닭 역시 그러하다. 그러니 마음 같아서는, 저 먼 古代로부터 소급하여 韓中日의 관계를 고찰하고 싶지만, 필자가 그러한 작업이 실제적으로 실행될 수 있을지는, 다소 의문이다.
      하지만 그저 무관심할 수 없으므로, 우선 현대사회에 결정적 인과관계를 가지는, 일본 근대사회를 우선 살피고자 한다. 일본 근대사회를 대변하는 역사적 사건은, 두말 할 나위 없이 ‘메이지유신’이다. 그런 메이지유신을 살핌에 있어, 당시 메이지유신을 주도했던 사무라이 사상가들에 대한 고찰은 필수적이다.

    •    특히 ‘사이고 다카모리’, ‘요시다 쇼인’, ‘사카모토 료마’는, 當時는 물론 현재까지도 일본사회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갖는 인물들이다. 물론 그 외에도 많은 캐릭터들이 존재하므로, 여건이 허락한다면 향후 고찰해 나갈 것이다. 여하튼 이러한 考察로써, 필자는 물론 독자들 역시 적잖은 공부가 될 것이다.
      그럼으로써 일본이 단지 배척의 대상일 수만은 없으며, 地政學的으로도 不得已하므로 항상 유념해야만 하는 대상임을 인식케 될 것이다. 韓民族의 東夷文明이 오랑캐의 문명이 아니듯이, 현대의 일본인 역시 倭寇쯤으로나 비하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비록 오랜 세월 동아시아 문명이, 부득이하게 중국문명 중심으로 재단되어버렸지만, 이제는 持難한 事大主義의 굴레를 벗고, 우리 민족의 歷史와 政治를 재정립해만 한다. 慘酷한 植民主義의 굴레 역시 그러하다. 그렇지 않다면, 메이지유신 세력에 의해 소멸해버린 末期 朝鮮王朝나, 한갓 그림자에 불과했던 大韓帝國처럼, 우리 민족의 미래는 결코 밝지 못할 것이다.

         메이지유신을 작동시켰던 動力으로서 ‘대동아공영권’ 개념에 대해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일본의 입장에서, ‘대동아공영권’과 연합국과의 전쟁 裏面에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바로 中國이라는 市場이었다. 일본은 미국의 인가를 받던 중국 시장에 대해, 일본만의 ‘특별한 관계’를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시장들의 잠재적 富의 풍부함을 인식한 미국은, 일본이 중국으로의 수출에 있어서 우위를 갖게 하는 것을 결코 인정할 수 없었다.
      일본 제국은, 중국 시장에서의 일본의 공식적인 이점을 확보하기 위한 시도로서, 처음에는 중국을 침략하고, 나중에는 ‘대동아공영권’을 추진했다. 일본의 외무대신 ‘도고 시게노리’에 따르면, 일본이 ‘대동아공영권’ 건설에 성공한다면, 지도국으로서 동아시아를 통합할 것이고,대동아공영권이라는 말은, 일본 제국과 동의어가 될 것이었다.

    일본 근대 사무라이 사상가들...요시다 쇼인 사카모토 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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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0년대 일본의 외교와 외교론―무츠 무네미츠(陸奧宗光)를 중심으로―| 국사관 논총(3)

    樂民(장달수) | 조회 145 |추천 0 | 2018.09.30. 08:41

    1890년대 일본의 외교와 외교론
    ―무츠 무네미츠(陸奧宗光)를 중심으로―


    朴英宰*

    Ⅰ. 획기로서의 1890년대
    Ⅱ. 세계관과 외교론
    Ⅲ. 외교론과 외교의 한계
    Ⅳ. 잠복된 이상주의
    Ⅴ 맺음말 : 근대 일본의 한계


    Ⅰ. 획기로서의 1890년대


       1890년대는 여러가지 의미에서 동아시아 뿐 아니라 세계의 근현대사에서 19세기를 마감하고 20세기로 들어서는 세기 전환기라는 숫자상의 의미를 뛰어넘는 획기적인 중요성을 갖는 시기이다. 유럽세계 중심의 이른바 ‘근대사’가 막을 내리고 말 그대로 ‘세계사’로서의 ‘현대사’가 시작되는 조짐이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나타난다는 지적은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1) 여러 조짐 중 동아시아 세계에서 두드러진 점은 구제국주의의 퇴장과 신제국주의의 등장이다. 특히 러시아의 東進 미합중국의 西進 그 도달점이 태평양의 서안, 즉 동아시아 세계인 점은 20세기의 동아시아 세계가 편전쟁 이래의 이른바 ‘근대 동아시아사’와는 판이한 양상으로 전개될 것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즉 동아시아 세계를 둘러싼 국제적 환경이 바로 이 시기에 근본적 변환을 맞았으니, 우선 미국의 전통적 대외정책이 1890년대에 들면서 ‘새로운 패러다임(New Paradigm)’으로 크게 전환하였다.2) 19세기 중반 이래 남북미 대륙 안에서의 자주성
    을 위주로 하는 ‘먼로주의’로 대표되던 구패러다임은 세계문제에 대하여는 기껏 영국 외교에의 편승으로 자족하면서 주체성을 갖추지 못했던 소극적 미국외교에 반해 1890년대에 시작된 미국 외교의 새로운 패러다임은 세계 각지로 적극적 팽창을 수반하는 것이었다.


    * 延世大學校史學科敎授.

    1) G. 배러클러프(Barraclough), 《現代史의 性格》(金鳳鎬역, 삼성미술문화재단문고, 1977) 참조.
    2) R. Beisner, From the Old Diplomacy to the New, 1865∼1900(N. Y. : Crowell, 1975).

    - 50 -  國史館論叢 第60輯


    미국1898년 쿠바, 하와이, 괌, 필리핀을 비롯한 카리브해 태평양으로 ‘폭발적인 팽창’에 이어, 이듬해에는 이미 구제국주의에 의하여 실질적 분할 이루어진 중국에 대하여 ‘문호 개방’ 압력을 넣는 등 동아시아 세계에서도 신제국주의 국가로 등장한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러시아도 이 시기에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착공, 미국의 서진과 때를 같이 하여 동진에 나섰을 뿐 아니라 한반도에도 깊은 이해관계를 심고 영국진일퇴의 외교 공방을 벌이는가 하면, 1890년대에는 ‘삼국간섭’에서 보이듯 일본과 본격적인 각축·대결의 양상을 보이는 것도 ‘유럽 러시아’로부터 ‘아시아태평양 러시아’에로의 팽창적 변환을 보여주는 일이다. 한반도에서 러시아 신제국주의의 등장 러·간에 한반도의 남북 분할론이나 만주에서의 각축으로까지 나아간 사정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일본이 이 시기에 한반도와 중국으로 향한 본격적인 제국주의 팽창에 나선 일은 두말 할 나위 없이 1868년의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 국가 건설과정에서 하나의 중간 기착지였다. 건국 초기인 1870년대에 이미 신정부를 뒤흔든 ‘정한론’이란 조선침략 논쟁이, 논쟁의 본질은 차치하고서라도, 당시 일본의 국력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비현실성으로 인하여 중절되었지만, 20년 뒤인 1890년대가 되면 국면은 크게 달라지게 되었다. 하나의 예를 들자면 1889년 메이지헌법(‘大日本帝國憲法’)의 공포이듬해 국회 개원으로 메이지 일본은 대내적으로는 건국 이래의 어지러운 정치 항쟁이 고정된 하나의 헌정 질서의 테두리 속에 틀이 잡히게 되고, 대외적으로는 ‘불평등조약’체제의 수정을 서양제국에 요구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갖추게 된 것이다.

       1890년대가 되면 일본은 대외적으로 두개의 중대한 계기를 가진다. 하나는 이 불평등 조약체제의 종언이며 다른 하나는 청일전쟁에서의 승리이다. 전자가 서양 제국주의 세력들과의 국제법적인 평등관계의 구현이었다면 후자는 동아시아 이웃 나라들에 대한 압박국으로서의 등장이다.3) 특히 일본은 이 전쟁으로 경제·군사적 근대화 노력의 성과를 확인하였을 뿐 아니라 나라의 목표를 근대화와 자립으로부터 본격적 팽창주의로 전환하였으며, 이에 따라 1890년대는 한국을 포함한 대외관계에서도 전혀 새로운 발상과 정책이 전개된 시기였다.

       요컨대 동아시아1890년대란 중-영 아편전쟁 이래 반세기의 국제질서가 새로운 국면으로 재편된 시기였으며 그 특징은 무엇보다도 먼저 러시아와 미국의 태평양세력화를 꼽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열강에 대한 정책은 동아시아에서 재편되고 있던 이러한 국제관계의 새로운 틀 속에서 파악되어야 할 것이며 특히 일본의 경우 그 독자적인 대외 팽창정책의 형성이 자신을 포함한 동아시아에서의 신제국주의의 출현시기를 같이하고 있다는 점을 전제 조건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3) 나카츠카 아키라(中塚明), 《日淸戰爭の硏究》(東京: 靑木,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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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이지 유신 근대국가의 형성의 일단 완성 단계로서의 1890년대새로운 국제환경의 조성라는 안팎의 이중적 구조가 만나는 좌표 위에서 자리를 매김한 다음에 이 시기 일본대외-대한 정책의 구체적 분석과 평가를 내리는 것이 합리적이자 논리적 순서라고 생각된다.


       1890년대 일본의 한국에 대한 침략 정책사정치사, 군사사, 경제사 특히 국제법- 외교사의 국면에서 다룬 기왕의 연구는 적지 않다. 물론 본 연구는 기존의 연구 성과의 도움을 받아 이 시기 일본의 대한 정책의 본질을 찾는 것이 그 목적이다. 그러
    나 그 방법에 있어서는 실제 외교의 이론 또는 원동력으로서의 세계관과 외교론에 일단 초점을 맞춤으로써 위에서 요약해 본 시대적 특성에 맞물리는 19세기 말 즉 1890년대 그리고 나아가 20세기 동아시아 국제관계를 예측할 수 있는 주요 상수를 추출해 보고자 한다.

       무츠 무네미츠(陸奧宗光: 1844〜1897)는 19세기 말 일본의 외교를 주도하였던 인물이자 동시에 유신 이후 메이지 전기 일본의 대외관계의 최대 현안을 마무리한 인물이다. 일본 역대 외상 중 유일하게 외무성에 그 동상이 세워져 있는 무츠를 ‘근대 일본 외교의 창설자’로 부르는 데에는 연구자들 사이에 이론이 없다. 특히 그의 외교 회고록인 《蹇蹇錄》***은 근대 일본 외교사상 뿐 아니라 세계 외교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실증적 기록일 뿐 아니라 19세기 말 제국주의의 동아시아 세계를 일본의 입장에서 그려낸 유일한 개인 기록으로서 일본 근대사 연구자들이 무츠를 다룰 때 다른 느 분야보다 외교사 연구의 주대상으로 삼아온 원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무츠의 생애는 일개 외교관으로만 해석되기에는 폭이 더욱 넓은, 메이지유신 운동에서 메이지 근대국가의 건설 과정에 이르기까지 적극적으로 당시대의 문제 해결에 참여한 형적 메이지 지도자 중의 하나였다.

       무츠고산케(御三家)의 하나인 키이(紀伊)의 藩士다테 치히로(伊達千廣)의 아들로 태어났다. 열다섯에 에도, 쿄오토오로 나아가 근왕운동에 참가하고 유신 이후에 신정부에 등용되어 외국사무국, 카나가와(神奈川) 縣令을 거쳐 地租改正국장으로 신정부의 외교·내무·조세에 관한 새로운 정책의 입안과 시행의 핵심에 있었다. 이후老院의 간사로 재직 중 사츠마(薩摩) 쵸오슈(長州) 출신들이 독점한 藩閥의 전횡 정치를 뒤엎으려는 쿠데타음모에 가담-적발되어 1882년까지 4년간 투옥된다. 석방 뒤 후원자이자 신정부의 실력자인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주선으로 구미 여러나라를 견학하고 돌아와 1888년에 주미공사, 90년에 농상무대신, 그리고 중의원 의원 거쳐 92년에 이토오내각외무대신이 되어 청일전쟁 중의 전쟁 외교와 강화 교섭,그리고 조약개정 외교를 수행하고 은퇴한 뒤 요양 중에 위의 《蹇蹇錄》을 탈고하4) 세상을 떠났다.


    - 52 - 國史館論叢 第60輯     *** 蹇 : 쩔둑발이 건


      19세기 일본 역사상의 한 인물로서 그의 행동은 크게 보아 첫째 유신 운동, 둘째 反번벌운동, 셋째 정치·외교 활동으로 나누어 볼 수 있으나 기존의 연구는 대부분 교가로서의 무츠를 대상으로 삼았다.5) 그러나 최근 반체제 정치운동가로서의 무츠 목하여 그의 메이지 번벌 정부 내에서의 비주류적 정치 위상을 분석한다든가,6)
    이지시대의 보기드문 자유주의자로서의 정치 사상에 초점을 맞춘 연구7)가 뒤를 잇고, 나아가 그의 이러한 사상적 배경을 바쿠마츠(幕末) 사상사에서 절충파의 하나로 자리매김하는 연구8)도 있다. 최근에는 이러한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蹇蹇錄》을 단순한 외교회고록의 차원을 넘어 다분히 정치적인 문서로 해석하는 연구도 나왔다.9)


       본고는 그가 외무의 일을 맡기 이전―바쿠마츠 시기도 포함하여― 시기에 형성된쿠마츠·메이지라는 19세기 중반에 형성된 사상과 세계관의 틀이 그가 주도하였던 본의 대외 정책의 실천구조 속에 어떻게 배어들고 또 구현되었는가를 실증적으로 검증하려는 시도에 초점을 맞추었다. 주로 그의 외교론과 세계관의 기반을 분석한 뒤 청일 전쟁외교對韓정책의 기본적 발상에 관련된 구체적인 몇 사례를 들어 문제의 본질에 해석적으로 접근해 보고자 한다.


    Ⅱ. 세계관과 외교론

       메이지 유신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무츠의 외교 경력은 자발적이고 또 적극적인 것이었다. 외국인과의 첫 접촉은 무츠가 스물네살 되던 1867년으로 그가 이미 脫藩하여 각지를 방랑 수학하고 사카모토 료오마(坂本龍馬) 휘하의 海援隊에서 활약하고 있을 때, 나가사키(長崎) 미국 선교사 집에 자청해 들어간 일이다. 당시 ‘하우스 보이’라 불리던 머슴 노릇을 하며 무츠가 노렸던 것은 영어를 배우는 일이었다. 영어 “지식을 세계에서 찾을 수 있는 기초적 도구”로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교사 부인에게서 배운 영어는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상당한 수준까지 올라 곧 있을 영국인과의 대담도 가능할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10)


    4) 나카츠카 아키라(中塚明), 《『蹇蹇錄』の世界》(みすず, 1992) 2-7; 탈고와 출판에 관한 상세한 논의가 있다.
    5) 대표적인 연구로 시노부 세이사부로오(信夫淸三郞), 《陸奧外交》(東京: 叢文閣, 1935) 등.
    6) Tek-jeng Lie, “Mutsu Munemitsu: 1844∼1897, Portrait of a Machiavelli,” Ph. D. Dissertation(Cambridge: Harvard Univ. Press, 1962).
    7) 하기하라 노부토시(萩原延壽), 〈日本人の記錄: 陸奧宗光〉(〈毎日新聞〉1967년 6월∼1968년 12월 연재) 등 일련의 연구.
    8) Young-jae Park, “Ideology and Action in Mutsu Munemitsu,” Ph. D. Dissertation(Univ. of Chicago, 1982).

    9) 나카츠카, 《『蹇蹇錄』の世界》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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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도 바쿠후(幕府) 잔당과의 전투가 진행되고 있던 1867년 12월, 무츠 오오사카(大坂)로 가서 영국 영사관의 통역이었던 어네스트 사토우(Sir Ernest Satow: 후일 주일공사)를 방문하였다. 마지막 쇼오군 토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대권을 반납(大政奉還)한 직후, 신정부의 성립을 눈앞에 두고 있는 시점이었다. 아무런 공식 직함도 없었고 상부의 지시에 따른 것도 아니었다. 무츠에 따르면 “홀로 천하의 정세를 살핀 바” 있었기 때문이었다.11) 한사람의 탈번 로오닌(浪人) 志士라는 개인으로서 토우를 단독 면담한 용건은 메이지 신정부의 대외 정책의 기조에 관한 조언을 청취하는 일이었다. 사토우를 통하여 영국 공사 파악스(Sir Harry Smith Parkes)도 만났다. 문답의 핵심은 페리내항 이래 종래 바쿠후가 취해왔던 개이라는 정책을 새정부도 이어받을 것인가, 아니면 바쿠후를 타도 대상으로 삼았던 유신주의자들과 쿄오토오(京都) 朝廷의 정서에 부합되는 쇄국 정책으로 돌아갈 것인가의 여부였다.


       무츠 자신으로 말하자면 탈번 이래의 방랑 유학 시절에 반바쿠후 즉 쇄국주의라는 당시의 반바쿠후주의자들에게 공통된 논리를 갖고 있었고, 더욱이 그를 가르친 미즈모토 세이비(水本成美)야스이 속켄(安井息軒) 등의 스승들 모두가 尊王攘夷라는 반개방적 시국관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무츠가 이 면담끝에 내린 결론은 ‘開國’었으니 이는 자신을 포함한 유신 주체들의 주요한 목표였던 '尊王攘夷’를 부정하는 것이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이들의 타도 대상이었던 바쿠후의 정책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무츠는 신정권의 실세 이와쿠라 토모미(岩倉具視)에게 ‘개국’을 건의하였 이와쿠라는 이를 받아들인다.12) 

       신정부는 곧 각국 사절에게 정권교체의 사실과 동시에 화친조약을 체결할 것을 포고하였다. 능력을 인정받은 무츠에게는 外務省의 전신인 外國事務局의 御用掛자리가 주어졌다. 함께 임명된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 이노우에 카오루(井上馨), 테라시마 무네노리(寺島宗則) 등을 포함한 여섯명 중에서 무츠는 스물 다섯으로 최연소였다.

       무츠가 유신 전후 일본의 사태를 예의 주시 분석하고 있던 파악스 공사 등 외국인들을 자진해서 찾아가 자문을 구하고 신정부 최초로 개국을 주장한 사실은 그의 발달된 국제적 감각과 뛰어난 판단력을 보여준다. 물론 그 바탕에는 일찍이 이토오 히로부미가 무츠를 평판하였듯 “시세에 빨리 적응하는 선천적 재능”13)이 틀림없이 자리잡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츠의 ‘선천적인 재능’을 하나의 현실적 세계관으로 빚어낸 데에는 그러한 선천적 재능 이외에 중요한 하나의 연결고리가 있었으니 그것 반체제―討幕이라는 역사적 움직임에 헌신하였던 浪人무츠가 겪었던 하나의 자적인 지적·정치적 경험이 그것이다. 이를테면 영어를 습득하기 위하여 스스로 선교사집의 허드렛 하인으로 들어갔던 일화는 그의 적극성을 보여주는 하나의 일화이지만 우리의 관심을 더욱 끄는 것은 그의 역사관을 여실히 보여주는 문헌이다.


    10) 오카자키 히사히코(岡崎久彥), 《陸奧宗光》上(東京: PHP, 1987) p.91.
    11) 위의 책 p.91.
    12) 하기하라, 앞의 논문 pp.122∼124.

    13) 오카자키, 앞의 책 p.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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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68년 미완성인 채 간행된 《藩論》무츠가 1867년 11월 이전에, 아마 토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大政奉還을 실행에 옮긴 10월 이전, 쓴 時論이다. 먼저 신·왕정복고에 뒤따르는 일반적인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러한 정세 변화의 와중에서
    일어날 수 있는 여러가지 가능성을 예측하면서 뜻있는 인사들이 취해야 할 자세를 구체적으로 논한 글이다. 우선 바쿠마츠(幕末) 시기의 제 정치 세력에 대한 동향을 분석한 무츠는 정세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려는 진보적 세력과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리려는” 반동의 세력으로 나누었다. 자신이 현재 살고 있는 “역사와 시세의 의미”를 감지하는 진보적인 인사가 근래에 보기드문 현실을 개탄하고, 전자의 실례 일본의 역사 속에서 들었다. 남북조시대무장 쿠스노키 마사시게(楠木正成: ?∼1336)와지막 쇼오군 토쿠가와 요시노부였다. 천황파 쿠스노키는 대세가 아시카가(足利) 바쿠후 세력으로 기울고 있는 흐름을 역행할 수 없다는 마지막 판단 아래 자결을 택했고, 요시노부 역시 유신의 대세를 감지하고는 대권을 천황에게 반납하는 결단을 내린 탓이었다. 무츠는 현실적 체제 변화와 과거의 충성과의 사이에서 대세에의 순응과 이에 따르는 적극적인 행동을 현실적 덕목으로 강조하였던 것이다.14)


       한마디로 《藩論》 “역사의 흐름, 곧 시세나 대세에 적극적으로 부응하는 현실적 대응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아직도 바쿠후를 편들고 있는 세력에 울린 하나의 이었다. 이러한 무츠의 주장에는 유신이란 대변혁을 이끌어 내게되는 ‘維新主義이념’의 역사관이 있었으니 이것은 무엇보다도 그의 부친 다테 치히로(千廣, 또는 무히로 宗廣: 1803∼1877)로부터 받은 학문적 영향이었다. 다테는 심판(親藩)이었던 카야마(和歌山)에서 번정(藩政)의 요직을 두루 거친 번의 중심 인물의 한사람이었지만 막말에는 어지러운 권력투쟁의 와중에서 실각-脫落하여 志士로서 활동하게 된다. 당시대의 군상을 일반화시키는 안목으로 보자면 그도 사무라이-學人-官人-志士라는 경력을 지닌 전형적인 막말 인물의 일인이었던 것이다.15)

       그러나 다테는 인물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바쿠후 말기의 번정과 막정의 정치사 보다는 오히려 사학사와 사상사의 분야에 남아있다. 근세 일본의 사상사적 잣대로서 굳이 분류하자면 그는 歌學에 정통한 古學者였다. 그러나 그가 남긴 대표적 저술 《大勢三轉考》는 일본 역사에 대한 하나의 통시적 해석이었다. 《大勢三轉考》에서 다테는 단순한 일본 역사 서술의 차원을 넘어 하나의 독자적인 시대구분을 시도하였다. 시대구분에 대한 근대적 잣대란 상상할 수 없는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다테는 일본의 전역사를 세 시기로 구분하였다.


    14) 《藩論》의 내용과 관련된 저자의 확인과 출판에 대하여는 Y. Park, Ibid, pp.31∼36 참조.
    15) 다테에 관하여는 최근 전저가 나와있다. 야마모토 시치헤이(山本七平), 《日本人とは何か》

    上·下(京都: PHP.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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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고시대로부터 자신이 속한 시대까지 다테첫째를 骨의 代, 둘째를 職의 代, 셋째를 名의 代로 일본의 역사를 세개의 시대로 나누었던 것이다. 이것을 근대적 구분의 잣대로 간단히 대입해 보자면 첫째 시대 골의 대는 氏姓사회였던 일본의 상고 시를, 둘째 시대 직의 대는 대륙으로부터 차용한 律令제도가 지배하던 고대 사회를, 셋째 명의 대는 분권적 중세·근세를 아우른 封建시대에 해당한다 할 것이다. 이 근세 전 각 시대의 특성을 나름대로의 삼분법으로 나누었다는 사실 자체는 일본 근대사학의 두드러진 업적의 하나로 평가받을 만하다.


       그러나 우리가 다테의 시대구분에 더욱 의미를 부여하는 까닭은 각 시대를 단순한 왕조 교체라든가 집권자의 변화와 같은 전통적 왕조·순환 사관이 아닌, 각 시대가 지 質的 또는 구조적인 차이에 착안하여 시대를 삼분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역사를 구성하는 기본 요소의 하나인 ‘변화’의 개념을 도입하여 역사를 해석한 일로써, 근대적 역사학이 일본에 도입되기 이전의 역사학 수준에 비추어 볼 때 하나의 유례없는 독창적인 역사 해석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사론이 일본의 “전근대 사학과 근대 사학을 잇는 다리”라는 평가를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16)

       《大勢三轉考》다테가 죽기 4년 앞선 1873년 아들 무츠의 손으로 출판되었으며 아버지 다테의 역사론은 아들 무츠에게 고스란히 전승된다. 《藩論》에서 무츠가 변화에 대응하는 영웅으로 그린 인물 쿠스노키 마사시게다테《大勢三轉考》 같은 의미를 지니고 등장하는 인물이다. 쿠스노키의 죽음을 애도하면서도 다테하의 時勢가 천황의 손을 떠나 아시카가(足利)의 대권으로 돌아갔음을, 즉 구시대가 사라지고 새시대가 도래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 바뀌는 시대란 것은 사계의 변화와 같은 것으로서 인간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大勢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다테변화의 정의를 ‘제도적 차원에서의 변화’로 이미 내린 바 있다. “새로운 제도란 변화를 요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구체제와는 달리] 거스를 수 없는 시세의 흐름에 의하여 태어난 산물이기 때문”17)이라는 것이었다. 역사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다분히 역사의 변화에 따른 체제·제도의 변화의 정당성을 역설한 학자 오규우 소라이(荻生徂徠: 1666∼1728)의 담론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게 한.18) 다테는 나아가 시세란, 인간의 智力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하늘의 뜻으로서,그 변화는 제도의 변화를 초래하므로 역사상의 현명한 인물은 “마치 계절에 따라 옷을 바꿔 입듯 당연히 역사의 변화에 따라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16) 《大勢三轉考》에 관하여는 朴英宰, 〈『大勢三轉考』와 日本史의 時代區分〉(《東方學志》46·47·48 합집, 1985) pp.315∼343에 비교적 자세히 논급되어 있다.
    17) 다테 무네히로(伊達宗廣), 〈大努三轉考〉(마루야마 마사오 丸山眞男편, 《歷史思想集》, 日本の思想제6집, 東京: 岩波, 1972) p.419.
    18) T. 나지타, 《근대일본사》(박영재 옮김, 역민사, 1992) p.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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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테의 역사해석은 과거를 뛰어넘어 일본의 미래로까지 뻗었다. 1870년대의 그는 문명 개화를 위하여 일본은 세계에 대한 미래상을 넓히고 일본의 국가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는 유교·불교와 같은 ―심지어는 자신의 학문 영역이었던 國學까지도 포함하여― 단일한 사상에 매달려서는 안될 것으로 경고하였다. 시세가 바뀐 탓이었다. 1871년 6월 아들 무츠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다테 “시세의 변화란 자연적인 것이기 때문에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새삼 강조하기도 하였다.19)

       무츠는 훗날 1898년 발표된 시론 〈古今浪人の勢力〉에서 250년간 토쿠가와 역사토쿠가와 바쿠후 로오닌 사이의 질적 관계를 기준으로 전시기를 아버지와 같은 방법으로 역시 셋으로 구분하였다. 처음 100년을 로오닌들이 문학이나 경서에 몰입하면서 관료들에게 허리를 굽히며 시세에 동화한 시기, 다음 100년을 로오닌들이 스스로 官途로 나아가던 시기, 그리고 최후의 50년을 권력과의 동화가 결코 時務가 아님을 알고 국면을 타파하려한 시기로 나누었다. 무츠는 그 결말로써, 바쿠후불평 로오닌의 세력을 부정한 탓으로 패퇴를, 유신을 주도한 샷쵸오(薩長) 세력은 로오닌 세력을 포용했기 때문에 승리를 거두었던 것으로 결론지었던 것이다.20)

       더욱이 무츠는 일찍이 1874년 당시 ‘시세’란 것을 하나의 시대 정신으로 등치키고, “지금은 정치 체제 전체를 혁신할 때”라고 역설하였다. 그러나 그 혁신은 정권교체의 수준이 아니라 역사적 계기를 맞이한 혁명적 차원에서의 시세 변화로 규정였던 점을 고려한다면 그의 역사관이란 것은 오규우나 다테‘유신주의적’ 역사관 맥을 이어 받았음이 틀림없다. 이 담론은 이미 지적되었듯 일본의 근세 유학의 사고가 메이지유신에 이르는 행동 철학으로 변신하는 과정이라는 가닥 안에서 해석될 수 밖에 없는 하나의 일관된 현실주의적 역사관이기도 하다.21) 무츠가 다듬어 온 역사의 변화에 대한 능동적 정의, 토쿠가와시대 250년에 대한 해석, 메이지유신을 전후한 시대에 대한 그의 현실주의적 역사인식이 메이지국가가 형성된 이후 그가 담당하게 될 현실 정치와 외교에 어떻게 접목될 것인가가 우리의 다음 관심거리이다.

       적어도 무츠가 인식하고 있던 메이지 일본이 처한 ‘국제적 현실’기본구도는 무츠의 짧은 글 〈左氏辭令一班〉에 잘 드러나 있다. 1881년 옥중에서 초한 이 글은《春秋左氏傳》에 붙인 하나의 서문이다. 여기서 무츠메이지 10년대의 일본을 춘추전국시대의 소국이었던 鄭나라에 우선 비견하였다. 열국이 각축하는 19세기 후반의 제국주의 주도의 국제정세에서 일본같은 중소국이 살아남기 위한 비결을 무츠는 고대 중국의 鄭나라의 예에서 찾았던 것이다. 힘이 우선하는 국제관계에서 무츠가 주목했던 것은 요컨대 ‘禮’ ‘術’, ‘외교술’이었다.22)

    19) 《陸奧宗光關係文書》, 日本國會圖書館憲政資料室소장 마이크로 필름, #44-2.
    20) 陸奧宗光伯七十周年記念會편, 《陸奧宗光伯: 小傳, 年報, 附錄文書》(東京) p.123.
    21) 朴英宰, 〈近代日本의 韓國認識〉(歷史學會편,《日本의 侵略政策史硏究》, 一潮閣, 1984)
    pp.8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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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춘추시대에는 열국 “一言一行에 국가의 영욕이 걸리고 和戰을 가름하였다”고 보았다. 국내적으로도 바람직한 인간관계란 그 응접·揖讓할 즈음에는 반드시 언사 예모를 갖추어 禮와 詩로써 표정과 말씨를 修飾하였음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무츠가 인식하고 있는 19세기 후반 당시의 세태와 춘추전국시대의 국제 관계의 요체란 기본적으로 같은 것이었다.

       방금 海之內外사방만국의 내왕 회동이란, 싸우며 문물을 자랑하고 다투어 국세를 늘린다. 이는 춘추 열국이 하던 일의 확대판에 다름 아닌 터이니 禮文修辭之術을 어찌 강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응접·언론지제에 野함을 文으로, 모난 것을(直) 부드럽게(婉) 변환하지 않으면 아니되는 것23)이라고 하여 국제관계에서 대국과 소국간에 힘의 우열은 어차피 피할 수 없는 것, 이것을 만회할 수 있는 유일한 방도는 ‘예문수사지술’이란 단어로 압축된 외교 교섭에 있어서의 기술, ‘외교술’무츠에게 입력되었던 것이다. 

       19세기 후반의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장이 된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에서 국일 수밖에 없었던 일본이 나라의 위상을 확보하기 위한 방책을 그는 고대 중국의 춘추 전국의 역사 속에서 발견하였으니, 요컨대 ‘예’라는 국제법 또는 만국공법의 합법적 규범 안에서 최선의 외교적 기교·기술을 발휘하는 일이었다. 지금까지 무츠의 외교를 왕왕 ‘術의 외교’로 평가해온 이유는 주로 그의 외교적 기량에 대한 피상적인 관찰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무츠가 계발하고 있었던 이같은 역사관과 역사에 대한 해석과 이에 바탕한 현실적 적용 위에, 중국 춘추시대 역사에 고탁함으로써 빚어진 19세기 말 국제정세에 대한 무츠 나름의 定義가 합세하게 되었던 것이다.

    Ⅲ. 외교론과 외교의 한계
       무츠외교의 총결산이라는 청일전쟁의 전쟁 외교와 강화 외교에는 위에서 살펴본 그의 인식이 분명히 투영되고 있을 것이다. 우선 우리의 주목을 끄는 사실은 청일전쟁 중 대한·대청 외교 교섭을 구체적으로 기록무츠《蹇蹇錄》에 나타난 외교 담당자 무츠와 국외자들 사이에 보였던 일종의 팽창논쟁에 대한 무츠의 태도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무츠의 회고록은 개전 직후부터 조야에서 맹렬히 일고 있던 조선과 중국에 대한 과도한 팽창 욕구에 대한 강한 비판으로 가득차 있다.

    22) 하기하라 노부토시, 〈禮文修辭之術: 陸奧宗光の政治學〉(《季刊藝術》7, 1968) pp.33∼39.
    23) 《伯爵陸奧宗光遺稿》(東京: 岩波, 1939) pp.657∼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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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이 시작될 때부터 세계의 관찰자들은 일본의 승리는 불가능한 것으로 예상였다. 그러나 러한 예상을 뒤짚고 1894년 7월 말 서해 豊島앞바다에서 시작된 전쟁은 7∼8월에 경기·충청·함경 지역에서, 9월에는 평양 등을 점령, 10월에는 압록강을 넘었고, 연말에는 랴오뚱(遼東)반도에 상륙, 해를 넘기면서 주전투는 웨이하이웨이(威海衛)를 비롯한 山東반도로 들어가 수도 빼이징을 위협하는 사태까지 이르렀다. 수도가 위협받는 일은 영불연합군의2차 아편전쟁 침공 이래 처음있는 일이었다.

       이같은 예상 밖의 전황이 국내에서 과도한 팽창론에 불을 질렀다. 시중의 일반 여론 뿐만 아니라 일부 각료도 대청 강경론과 중국 점령론을 주창하였다. 더욱이 이 전쟁은 개전초부터 대내적으로는 물론 대외적으로도 ‘義戰論’이라는 담론으로써 정당화되고 있었다. 즉 이 전쟁은 문명과 야만의 전쟁이며 고루한 청국에 속박된 조선을 개화의 길로 해방시키려는 일본의 사명을 달성하기 위한 일본에게는 희생적인 전쟁이라는 논리였다.24) 전쟁에 대한 이러한 전제 위에 마츠카타 마사요시(松方正義)같은 각료는 1894년말 대청 강화가 본격적으로 거론되자 엄청나게 비현실적인 배상금을 주장하는가 하면 뻬이징에 일장기를 꽂을 때까지 진격을 멈추지 말자고 외치는 각료도 있었다.

       무츠로서는 우선 이 전쟁에 대한 定義부터가 달랐다. 무츠의 생각으로는 청일전쟁과 이를 유발시키기 위한 일본 주도의 조선 ‘내정개혁’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조선에 있어서의 ‘일본의 정치적 이익’을 확보하는데에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못박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같은 ‘의전론’이란 무츠의 눈에는 “치졸한 ‘의협론’, 유치한 ‘기사도’에 불과”한 것이었다. 나아가 사회 일반의 호전적인 열기가 ‘전승의 광기’라거나 ‘광란한 여론’으로 밖에 보이지 않은 무츠로 하여금 “외교보다 어려운 것이 內交”라는 탄식을 낳게 하였다. 영토 할양 대신 과도한 배상금을 주장한 마츠카타와 같은 동료 각료에 대해서도 거친 비판을 감추지 않았다.25)

       그러나 이러한 일반 여론을 ‘이상주의’로, 무츠를 비롯한 일부 정부 정책결정자들의 태도를 ‘현실주의’로 대비함으로써, 19세기말 일본의 조선침략을 메이지 정부로서는 결코 계획도 의도도 하지 않았던 ‘우연한 결과’였을 뿐이라는 구미에서 널리 알려져있는 한 해석은26) 피상적인 이분법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먼저 ‘현실주의자’ 무츠에게도 이 전쟁은 조선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 확보라는 전쟁 결과에 대한 명백한 팽창주의적 목표가 있었다는 점이다.

    24) 이를테면 나중에 크리스찬 평화주의자로 잘 알려지는 우치무라 칸조오(內村鑑三)도 이 의전
    론의 주창자였고 토오쿄오 대학의 토야마 마사카즈(外山正一)도 선동적 군가를 작사하고 있
    었다(우노 슌이치 宇野俊一, 《日淸·日露》, 日本の歷史26, 東京: 1976, pp.103∼105).
    25) 《蹇蹇錄》(日本の名著35 판본을 사용하였음)(東京: 中央公論, 1978) pp.82∼83.
    26) Hilary Conroy, The Japanese Seizure of Korea: A Study of Realism and Idealism in
    Inter-national Relations(Univ. of Pennsylvania Press, 1960) 의 소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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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욱이 이러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던 무츠를 비롯한 전쟁 지도자들이 당면하고 있던 현실적 제약이 존재하고 있었다. 

       첫째, 청나라가 아직도 조선을 속방으로 여기고 조선의 방어전쟁에 나서게 된 데에는 일국 대 일국간의 근대국가간의 이해관계를 넘어서는 특수한 역사적 배경이 있었던 것은 두말할 나위 없는 일이다. ‘事大’를 기축으로 하는 청·조 양국 관계란 것은 전통적인 ‘華夷질서’라는 세계관의 연장선상에 있는 하나의 역사적 인식에 바탕한 관계였기 때문이다. 근대적 국민·민족국가간에 존재하는 국제·외교관계와는 달리 이를테면 16세기말 임진왜란에 明군의 조선 출병 배경과 기본적으로는 다르지 않은 인식이 청일전쟁 당시의 청·조 두 나라 사이에 아직도 잔하고 있었다는 말이다.27)


       둘째, 그러한 역사적 배경이 잔존하고 있는 한반도 영국러시아 등 근대적 제국주의 열강의 이익이 이미 상륙해 있는 엄연한 ‘현실’이 가로놓여 있었다. 게다가 당시 일본의 군사력은 전쟁을 도발하는 측으로서는 결코 청군을 압도할 수 있는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였던 것이 객관적인 평가였다. 중국의 국토와 인구나 역사의 크기는 둘째치고 同治중흥 이래 길러온 양무 사업의 외형적 성과도 괄목할만 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조선에서 우위를 확보하겠다는 일본의 전쟁 목표는 그만큼 승률
    이 낮았으며 이 전쟁이 세계의 관심을 크게 끈 것도 일본의 야심이 그만큼 모험적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일본의 전쟁 지도부는 전 국력을 쏟을 수밖에 없었고 외교 담당자도 이러한 핸디캡을 ‘외교술’로 최선을 다해 메꿀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예상
    밖의 승전보가 외교를 뒷받침하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무츠의 청일전쟁 외교를 모두 구체적으로 다룰 여유는 없다. 요약하자면 국제법상의 격식에 아직도 미숙한 조선과 청에 대하여는 국제법상의 상례 등에 근거한 문서상의 시비, 또 열강에 대하여는 세력균형을 이용한 상호 견제와 비밀주의 등, 전력을 다한 외교술로써 ‘조선의 독립’ 보장 뿐 아니라 랴오뚱(遼東)반도의 할양까지 규정하는 ‘시모노세키(下關)조약’의 조인에 성공하게 된다.28)

       그러나 영국·독일·프랑스·러시아 등 열강간의 당시의 용어로써 이른바 ‘權衡(balance of power)’29)을 이용한 ‘術’의 외교의 성공은 ‘삼국간섭’이라는 좌절로 귀결된다. 우선 강화의 중재자를 러시아·영국을 배제하고 미국을 내세운 점이다. 러시아
    는 중재자로서는 말 그대로 중립적 자세로 일을 처리할 가능성이 컸다. 영국은 중자의 역할을 넘어 간섭자 노릇을 할 가능성이 너무 클 뿐 아니라 일본의 전승의 대가를 ‘합리적으로’ 조정할 가능성이 있었다.


    27) Bonnie Bongwan Oh, “Sino-Japanese Rivalry in Korea, 1876∼1885,” in Akira Iriye ed.,
    The Chinese and the Japanese: Essays in Political and Cultural Interactions(Princeton
    Univ. Press, 1980) pp.37∼57 참조.
    28) 이 문제에 대하여는 朴英宰, 〈淸日戰爭과 日本外交: 遼東半島割讓問題를 中心으로〉(《歷
    史學報》53·54 합, 1972) pp.151∼176 참조.
    29) 《陸奧宗光關係文書》에 〈東亞細亞列國之權衡〉(1890년 5월 15일자) 이란 제하의 외교론이
    실려 있다. 무츠의 문서로 짐작되지만 전후 문서의 배열상으로는 오오토리 케이스케(大鳥圭
    介)의 것일 가능성이 전혀 없지도 않다. 필자는 이 문서를 당시 국제 정세를 논한 하나의
    외교적 담론으로 일단 받아들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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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무츠 자신의 개인적 친분 뿐 아니라 미국의 조야 특히 미국 외교 담당자들과 일본측에 기운 여론에 기대한 바 있었
    다.30) 더욱이 영국 등이 중재에 나서겠다고 의지를 보였을 때 일본은 강화의 조건을 아직 구상 중에 있었다.

       둘째, 일본이 구상하고 있던 강화의 조건에는 중국의 영토 할양이 포함되어 있었다. 육군은 자신들의 전투로 차지한 랴오뚱 지역을, 해군은 타이완(臺灣)을 할양받을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물론 일본제국 팽창의 교두보로써 장래에 이용할 계획이 깔려 있었다.31) 그러나 1890년대란 제국주의 열강 어느 누구도 아편전쟁 이래 아직 중국에서의 영토할양은 삼가거나 못하고 있을 때였다. 중재자는 어차피 쌍방의 강화 조건을 알 수밖에 없을 터이니, 구미 강국 중에서 미국만이 일본이 다룰 수 있는 순수한 의미에서의 재자(go-between)의 역할을 수행할 것으로 기대되었다. 예상대로 강화교섭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셋째, 강화를 위한 일본의 조건은 그런 만큼 대외적으로 철저한 보안을 지킬 수 밖에 없었다. 강화회담을 열 때까지 일본이 요구하게 될 강화 조건이 새나가지 말아야 하며 더욱이 협상 과정에서는 영토 할양이라는 중대한 조건을 뻬이징 정부와 일일이 협의해야 할 수준의 말 그대로의 ‘사절’과는 협상을 성공적으로 끌어 나갈 수 없는 일이었다. 때문에 일본은 이토오 히로부미 협상 대표로 내세우고 중국에 대해서는 리홍장(李鴻章)을 보내도록 요구하였다. 미국의 노력으로 이 역시 성공하였다.32)

       그러나 이렇듯 철저한 외교적 전술에도 허점이 있어 랴오뚱반도와 타이완의 할양조건이 누설되고 러시아·프랑스·독일의 삼국은 연합하여 공동 무력 사용 불사의 태도로 일본의 욕구를 저지하였다. ‘시모노세키 조약’의 성공적인 조인 뒤 불과 일주일만의 ‘삼국간섭’이었다. 일본은 ‘삼국’의 무력에 저항할 수는 없었으며, 미국도 지금까지의 일본에 대한 적극적 지원을 떠나, ‘국외중립’을 표방하면서 돌아섰다.33)

       랴오뚱반도의 영토 할양은 수포로 돌아갔고 이후 ‘굴욕외교’를 비난하며 내각 사퇴까지 요구하는 여론이 주도하게 되는 일본은, ‘와신상담’, ‘절치부심’ 러일전쟁(1904〜1905)까지 10년간의 구호가 드러내듯, 러시아에 대한 복수의 칼날을 갈며 때
    를 기다리는 태세를 가다듬게 된다. 랴오뚱의 반환 무츠가 일찍이 〈左氏辭令一班〉에서 규정한 열국간의 ‘禮文修辭之術’로서의 외교, 현실주의적 정세 판단에 입각 ‘術의 외교’의 파탄이었다. 개인적으로는 무츠외교의 파탄이었고, 당시의 여론에 따른다면 외무성의 대실패작이었고, 또 1890년대 후반 이토오가 이끌던 일본 정부의 실책이기도 하였다. 이 외교적 실패에 대하여는 물론 일본의 과도한 요구가 자초한 것이라는 해석이 자연스럽지만, 우리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각도를 조금 달리하여 조명해 볼 여지가 있다.


    30) Jeffrey Dowart, The Pigtail War: American Involvement in the Sino-Japanese War, 1894
    ∼1895(Amherst:Univ. of Mass. Press, 1975).
    31) 朴英宰, 앞의 논문(1972) 참조.
    32) 朴英宰, 〈淸日講和와 美國〉(《歷史學報》59, 1973) pp.53∼66 참조.
    33) 자세한 경위에 대하여는 朴英宰, 위의 논문(197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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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Ⅳ. 잠복된 이상주의

       메이지 신정부 안에서 정치인 무츠의 행각에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그러나 빠뜨릴 수 없는 이상주의자로서의 비현실적 면모가 있다. ‘정한론’의 여파로 일어난 내란 ‘사츠마의 반란(西南の役: 1877)’을 틈탄 쿠데타 음모에 무츠가 적극 가담한 일이다. 당시 무츠원로원의 간사직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각 지역의 반정부 음모 가담자들간의 연락을 맡았다. 무츠 자신 이 일을 훗날 “일대 厄難이자 집안의 역사상 씻을 수 없는 오점”으로 기록한 사건이었다.

       토사(土佐) 출신을 주축으로 한 릿시샤(立志社)가 꾸민 이 쿠데타 음모는 치적으로는 사츠마-쵸오슈우 藩閥전횡에 대한 지역적 반발에서, 이념적으로는 의회 기구를 설립하자는 초기의 ‘자유민권론’적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불발 쿠데타였지만츠는 적극적인 또 과격한 음모가였다. 동지들이 작성한 암살자 명단을 죽 훑어본 무츠는 명단에 “가장 중요한 인물이 빠졌다”며 첫번 순서에 추가한 이름은 이토오 히로부미였다. 이토오는 메이지 신정부 안에서 무츠를 물심 양면으로 도와주던, 무츠에게는 대부나 마찬가지의 존재였다.34) 


       토사 출신도 아닌 무츠가 왜 한층 더 강경하고 적극적이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무츠는 쿠데타의 다른 주모자들과는 달리 동기 자체가 지역적인 것보다 이념적인 것이었고, 그가 품은 이념이란 것도 동시대의 수준에 비추어 본다면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과격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음모가 사전에 발각, 체포되어 4년여의 형기를 마친 무츠는 이토오의 배려 구미여행길에 오른다. 미국과 영국을 돌아 잠시 시찰한 뒤 비인(Wien)에서 폰 슈타인(Lorenz von Stein)국가학 강의를 듣게하는 것이 프로이센식 헌법을 구상하고 있이토오가 주선한 이 여행의 주목적이었다. 그러나 무츠의 속셈은 딴 곳에 있었다.

       런던에 장기간 체류하며 예정에 없이 영국 의회를 방청하는가 하면, 케임브리지대에 출강하고 있던 법학자 워래커(Thomas Waraker)를 찾아가 영국헌법학 강의를 청한다. 수주간의 강의는 영국식의 입헌군주제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고 무츠가 이 주제에 얼마나 열중하였던가는 현존하는 강의 노트가 실증해 준다. 영국 입헌군주제의 역사로부터 현황과 문제점 그리고 무츠의 질문과 워래커의 대답으로 이루어진 이 노트는 한마디로 배우고자 하는 무츠의 열의와 워래커의 진지한 응답이 농축되어 있다.35)


    34) 코마츠 미도리(小松綠), 《明治外交秘話》(東京: 原書房, 1966) 및 오카자키, 앞의 책 上
    (1987) pp.252∼25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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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면 이토오의 주문에 따라 수강한 비인에서의 폰 슈타인노트 불성실하기 짝이 없다. 질문은 없다시피하고 심지어는 필체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무성의가 그대로 드러나는 난필이다. 자발적 학구열은 찾아볼 수 없는 무미건조한 수강노트
    뿐이다. 두 노트는 외관과 형상의 비교 차원을 넘어 1880년대 중반 무츠의 정치 이념의 지향점을 뚜렷이 보여주는 증거물이다.

       워래커의 강의가 끝난 뒤 무츠의 대담한 질문이 있었다. 질문의 핵심은 실권이 없는 영국의 국왕처럼 일본도 실권없는 천황이, 그리고 그 천황 아래 의회와 국민에게 책임을 지는 내각책임제’가 가능하겠는가였다. 1880년대 일본 정치인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가설이었을 뿐 아니라, 후세의 일부 사가들로부터 천황제 절대주가 막 형성되기 시작하였다는 메이지 20년대의 일본의 政體를 밑바닥부터 뒤흔드는 발상이었다. 왜냐하면 무츠가 상정한 천황이란 수년 뒤 메이지 헌법이 규정하게 되는 천황과는 동떨어진, 마치 1945년 패전후 제정된 ‘맥아더헌법’이라고 불리우는 행 신헌법이 규정한 천황에 더 가까운 존재였다.36) 일본의 사정에 정통하지 못한 워래커로서는 물론 명쾌한 대답을 주기 어려운 질문이었지만 영국의 경우 2세기나 걸린 일을 일본같은 나라가 ‘바로(at once)’ 채택하기는 어렵지 않겠느냐는 대답이었다.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헌법과 정치체제에 관련된 원론적인 수준에서의 무츠의 질문은 계속되었다.

       메이지 일본의 政體에 관한 이 정도의 대담한 구상은 논의한 사실마저도 공개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과연 무츠는 이를 감추었다. 런던에서의 이 장기체류와 ‘온한’ 수강 사실을 일체 비밀에 부치고, 처 료오코(亮子)에게만 런던 도중하차와 체제 사실을 알리기는 하였지만 구체적인 설명없이 “중요한 일로” 런던에 좀 더 체제하겠노라고만 전하였을 뿐이었다.37) 우리는 이 런던수강을 포함한 구미 여행길 이후의 무츠의 정치행각에 대해 그의 이념과 결부된 구체적 행장을 알지 못한다. 정치인으로서 그의 공직 생활만 따져보면 귀국 이래 이토오의 배려에 따라 곧 정부의 요직을 맡기 시작하여 1890년대의 전쟁외교와 조약개정외교를 치루어내는 외상직까지 거치게 된다.

       다만 한 가지 우리의 흥미를 끄는 일은 무츠의 정치적 유산은 그의 ‘코분(子分)’이었던 하라 케이(原敬)로 계승된다는 사실이다.


    35) Mutsu Munemitsu Notebook; 일본 카나가와(神奈川)縣立도서관 소장, 필사본으로 현재 일본
    어로 번역이 진행 중이다. 필자는 이를 영어 원문대로 공간할 예정이다.
    36) 하기하라, 〈陸奧宗光紀行〉(《蹇蹇錄》, 中央公論, 日本の名著35 판본) pp.25∼26.
    37) 이에 관하여는 하기하라, 위의 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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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 알려진 대로 이른바 ‘타이쇼오(大正) 데모크라시’ 정당정치의 주인공인 하라무츠가 옥중에서 벤담(Jeremy Bentham)의 대표적 저술(An Introduction to the Principles of Morals and Legislation)을 번역할 때 호시 토오루(星亨)와 함께 옥중을 드나들며 영어가 짧은 무츠를 도와준 적도 있다.38) 하라가 주도하게 되는 정당정치가 무츠가 갈망하던 임내각제와는 거리가 없을 수 없을 터이다. 그러나 잠복해있던 무츠의 급진적 천황관과 하라의 정당정치와의 연결고리는 우리가 메이지-타이 쇼오의 정치사와 정치사상의 본질적인 문제에 접근할 때 시사하는 바 적지 않으리라 믿지만 앞으로의 연구과제로 남겨 둔다.39) 요컨대 메이지 정치사의 일반적 언설을 부정할 정도의 이같은 과격한 이상주의가 무츠의 정신세계에 잠복해 있었고 이것은 그가 도맡을 외교 정책도 하나의 비현실적 요소로 잠복해 있을 가능성을 부정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다 알다시피 ‘삼국간섭’시모노세키조약에서 랴오뚱반도를 일본이 할양받음으로써 위협받게 될 열강간의 동아시아에서의 ‘권형’을 유지하려는 러시아·독일·프랑스의 제동이었다. 일본의 비현실적인 과욕임에 틀림없었지만 이는 해군과 육군의 타이완과 랴오뚱반도의 동시 할양 요구전쟁·강화 외교의 정책·집행 당국자가 수용한 결였으며, 청일간의 강화 외교 교섭이란 바로 이의 실현을 목표로 한 청과 열강에 대한 공들인 외교‘술’의 과정이었다. ‘삼국간섭’으로 인한 랴오뚱의 포기·반환에 대해 무츠“국내의 형세와 국외의 형세를 조화시킬 방법이 없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그러나 랴오뚱 할양을 규정한 시모노세키조약 자체가 “외교란 나아갈 때에는 나아갈 데까지 나아가고 멈추어야할 데에서는 멈추어야 하는 것”이라는 무츠 자신의 원칙40)과는 정면으로 어긋나는 것이었다. ‘면도날 大臣’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의 예리한 현실감각을 지녔던 무츠의 원칙대로라면 개정 당시의 목표였던선에 대한 지배권의 확립에까지 ‘나아가고’, 비현실적인 목표인 중국에 대한 영토 할양 요구 이전에 ‘멈추어야’ 옳았던 것이다. 그러나 무츠는 자신의 원칙과 상충되는 무리한 목표의 달성을 위한 외교‘술’을 폈던 것이다.

    38) 벤담의 저술을 무츠가 번역하게 된 동기나 그 사상적 배경에 대하여는 Park, Young-jae, 앞의 논문(1982) Ch. 4 참조.
    39) 이 문제는 일본에서 최근에 제기되었다. 나카츠카 아키라, 《『蹇蹇錄』の世界》p.15; 후지무라 미치오(藤村道生) 등, 〈鼎談日淸·日露戰役秘話〉(《歷史と人物》, 1983년 7월) p.33.
    40) 《蹇蹇錄》pp.258∼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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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Ⅴ. 맺음말 : 근대 일본의 한계

       지금까지 무츠가 일본 근대 외교의 창시자이며 본격적인 국제주의 팽창시기 1890년대의 외교의 담당자라는 사실을 전제하고 그의 외교론을 사상의 뼈대에서부터 추적해 보았다. 지극히 현실주의자로 알려진 무츠의 청일전쟁, 강화 외교가 넘지말아야 할 선을 넘게 만든 것은 어찌보면, 마치 ‘책임내각제’로 향한 그의 감추어진 정치적 의지처럼, 바깥 세계에 공개적으로 드러낼 수 없었던 대륙에의 팽창이라는 하나의 이상처럼 품은 자신의 의지가 작용한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이를 뒷받침하는 무츠 개인에 대한 정의도 적지 않다. 첫째, 우리가 위에서 살펴본 그의 사상적 복합성 또는 이중성 말고도 무츠의 개성에 관한 평가를 들 수 있다. 바쿠마츠―유신 운동 시기 카이엔타이(海援隊)의 동료들은 무츠를 아예 ‘거짓말쟁이 코지로오(小二郞: 무네미츠 이전의 아명)’라는 별명으로 불렀다.41) 또 정치인으로서의 무츠를 마키아벨리로 규정한 연구도 있다.42) 모두가 무츠의 독특한 개성을 새삼 강조해 주는 근거로써 위의 가설을 입증할만한 근거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그의 개성에 대한 고찰에 덧붙여 ‘무츠외교(陸奧外交)’를 ‘二重外交’, ‘비밀외교’와 동일시한 외교사적 연구도 있다.43)

       그러나 우리가 1890년대, 특히 ‘삼국간섭’을 맞아 파탄되는 무츠의 청일전쟁·강화외교를 곰곰이 검토해 보면 이는 어떤 의미에서 무츠 개인 사업의 파탄이라기보다는 메이지 일본의 한계를 의미하는 일이기도 한다. 육·해군간의 이해와 전략의 상충이라든가 대청 강경 여론 등 국내 정치의 현실이 외상 무츠 뿐 아니라, 수상 이토오 대외정책 결정자들로 하여금 이들의 비현실적 욕구를 현실화시킬 수 있다는 비현실적 판단에 이르게 하였다고 한다면, 문제의 소재는 “외교란 국내정치의 연장이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상식적 외교론의 숙명적인 본질 문제로 귀착될 수밖에 없다. 무츠 자신도 “외교보다 더욱 어려웠던 일은 내교”였다고 실토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청일전쟁은 일본이라는 나라가 한덩어리가 되어 팽창주의의 길로 나아간 획기라는 지적을 음미할 필요가 있다.44) 이른바 ‘국론통일’이라는 것이다. 메이지 시대의 중반까지만 하여도 ‘국권론’과 ‘민권론’으로, 또는 ‘현실론’과 ‘이상론’으로 대외관을 나누어 볼 수 있는 해석상의 소지를 남기면서 진행되던 역사가 하나로 묶였다(fascio)는 것을 의미한다. 풀어서 말하자면 일본의 1890년대 후반은 광적인 징고이스트들 뿐 아니라 이른바 ‘현실주의자’ 외상 무츠, 그리고 그가 소속된 내각·정부를 비롯한 나라 전체가 대륙 팽창이라는 비정상적·비현실적 열기 속으로 빠져들어 간 채 20세기를 맞이하는 비극적 출발점이라는 점이다. 그 국가적 계기는 물론 무츠의 말대로 멈추어야할 곳에 멈추지 못한 채, 어쩌면 멈추지 아니한 채 국제 분쟁을 무력과 외교의 ‘술’로써 해결하려한 데에서 찾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41) 사카자키 빈(坂畸斌), 《陸奧宗光》(東京: 博文舘, 1898) p.29.
    42) T. Lie, 앞의 논문(1962) 참조.
    43) 시노부 세이사부로오, 앞의 책(1935) p.149 이하 참조. 이것은 물론 자본주의 발달도상에 있
    었던 1890년대 일본의 계급적 모순과 외교와의 이중성에 초점을 맞춘 규정이기도 하다.
    44) 우노 슌이치, 앞의 책(1976) 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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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는 위에서 살펴본 대로 무츠의 개인적 사상과 행동의 복합적 구성 요소에서 보이는 것처럼 ‘이상론’과 ‘현실론’으로 나누어 보는 양분법·이분법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메이지 일본의, 또 그 팽창주의의 실체일지 모른다.

      이 글의 모두에서 논한대로 무츠는 근대 일본 외교의 창시자로서 외무성의 유일한 상징이다. 나아가 일본의 정통 외교계는 20세기 전반 일본의 본격적인 대륙 침략 때에도 ‘무츠외교 대망론’을 펼쳤을 뿐 아니라, 패전 이후의 외교도 1890년대 외교와의 단절이 아닌 연속선상에서 파악하고 있다.45) 그렇다면 위에서 살펴본 무츠외교의 실체는 어쩌면 근대 일본 외교의 가장 중요한 전통을 이루어 준 것으로 볼 수 밖에 없다. 1945년을 계기로 이후의 현대 일본 외교가 이 전통에서 과연 질적인 변화를 했는지 아니면 발전적인 계승만하였는지의 여부는 앞으로의 중요한 연구 과제의 하나로 남겨 둔다. 왜냐면 이 문제는 일본의 근대사와 현대사를 나누어야 할지 아니면 소시기로만 구분하여야 할지를 가름하는 시대구분의 잣대를 설정하는 문제와도 밀접히 연관되는 과제이기 때문이다.


    45) 나카츠카, 《『蹇蹇錄』の世界》pp.2∼7.



                                     1890년대 일본의 외교와 외교론―무츠 무네미츠(陸奧...

    2018.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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