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0. 25. 13:54ㆍ병법 이야기
6․25전쟁 초기 김홍일의 활동과 예편 - 한강선 방어전투를 중심으로 - 이 동 원(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1. 머리말 2. 6․25전쟁 발발과 시흥지구전투사령부의 창설 3. 한강선 방어전투의 전개 4. 육군 제1군단 창설과 김홍일의 예편 5. 맺음말 1. 머리말 6․25전쟁기 한국군 지휘관으로서 그 역할과 성취에 비해 가장 저평가된 인물을 꼽는다면 김홍일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김홍일(金弘壹, 1898.9.23.~1980.8.8)은 일제강점기 중국 국민혁명군과 조선의용대, 한국광복군에 가담하여 항일무장투쟁에 헌신했고, 해방 후에는 만주 일대에 거류하는 한국인 동포의 보호와 본국 송환에 진력하였으며 시흥지구 전투사령관으로서 6․25전쟁 초기 전투에서 눈부신 활약을 하였고 1951년부터 1960년까지 대만 대사를역임하였다. 그는 5.16군사정변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고문, 외무부 장관에 임명되었으나 박정희 대통령의 민정이양 약속 불이행, 한일기본조약 체결에 반대하여 재야인사로 변신하였고, 야당 정치인으로서 제7, 8대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1971~1972년 당수로서 신민당을 이끌었다.1 독립운동가이자 군인, 외교관이자 정치인으로서 김홍일이 보여준 입체적 생애는 식민, 분단, 전쟁, 개발독재로 이어지는 한국 근현대 사의 다양한 측면을 풍부하게 반영한다. 그러나 기존의 연구는 해방 이전 김홍일이 관계했던 단체와 활동들을 중심으로 그의 독립운동가로서의 면모를 드러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김홍일을 본격 적으로 다룬 최근의 두 연구도 해방 이전까지의 생애를 다루거나 1920년대 전반기 항일무장투쟁만을 주제로 하였다.2 독립운동가로서 김홍일의 활동을 이해하는 것은 김홍일의 삶의 궤적을 이해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선행 과제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그의 생애 전반을 이해하고 그의 역할과 기여를 역사 적으로 평가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 하에서 본고는 6․25전쟁 초기 한강선 방어전투를 중심으로 해방 이후 김홍일의 군인으로서의 활동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는 김홍일 개인에 대한 이해를 풍부하게 할 뿐만 아니라 기존에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한 인물을 통해 6․25전쟁 초기 한강선 방어전투를 새롭게 조명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한강선 방어전투의 구체적 전투 상황에 대해서는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서 출간한 『6․25전쟁사』 시리즈 중 제3권에서 이미 상세히 정리하고 있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기존의 연구서들이 한강선 방어전투를 어떻게 서술해왔는지 재검토하면서 다음과 같은 의문들을 해명하고자 한다.3 비전투부대인 참모학교장으로 재직 중이던 김홍일은 1950년 6월 28일, 북한군이 수도 서울을 점령한 급박한 상황에서 어떻게 시흥지구 전투사령관을 맡을 수 있었는가? 유엔군 참전 이전, 북한군과의 현격한 전력 차에도 불구하고 한국군이 한강선 방어전투에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인가? 한강선 방어전투를 이끈 김홍일은 왜 낙동강 방어전투가 한창이던 1950년 8월 말, 육군 제1군단장에서 육군종합학교 교장으로 보직을 옮겼고 이듬해 예편하였는가? 이에 대한 해명을 통해 한강선 방어전투가 6․25전쟁사에서 갖는 의의와 김홍일의 활동 및 예편의 의미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본고에서는 이를 위해 대한민국 국방부 정훈국 전사편찬회가 1951년 발간한 『韓國戰亂一年誌』, 미 육군 전사실(戰史室) 전사관 (戰史官) 로이 애플만(Roy Appleman)이 1961년 발간한 South to the Nakton, north to the Yalu(1963년 『유엔군전사, 낙동 강에서 압록강까지 제1집』으로 번역), 미 합동참모본부에서 1978년 발간한 The History of The Joint Chiefs of Staff, The Joint Chiefs of Staff and National Policy, Volume III, The Korea War Part 1 (1990년 『美國合同參謀本部史: 韓國戰爭 (上)』으로 번역) 등의 공간사를 주로 활용하였다. 또한 공산군 측의 입장을 확인하기 위해서 『소련군사고문단장 라주바에프의 6․25전쟁 보고서 1』(2001)를 참고하였다. 이 밖에 김홍일이 남긴 회고록『大陸의憤怒–老兵의回想記-』와 신문, 잡지 기사, 기타 관련 인물 회고록 등을 활용하였다.4 2. 6․25전쟁 발발과 시흥지구전투사령부의 창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전면 남침으로 전쟁이 발발하자 한국 정부와 사회는 일대 혼란에 빠졌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6․25전쟁사』 시리즈는 이 시기 대통령과 군 수뇌부의 전쟁지도및 작전지휘가 사실상 부재했음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남침 당시군 최고통수권자는 이승만 대통령이었으며 대통령의 군사문제를 보좌하는 직무를 띤 사람은 신성모 국방장관이었으나, 불행히도 이들은 군사문제에 어두웠고 전쟁지도를 수행할 능력이 없어 적절한 대책을 마련하지 못하였다.” 국군 지휘부의 작전 지도는 “단편적이고 즉흥적”이었으며 “국군 수뇌부는 전쟁 전 대비와 전략, 전술이 거의 없었던 상태에서 북한군에게 기습을 당했기 때문에 전쟁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5 특히 소규모 부대의 축차적 역습 투입은 화력 우위의 적 앞에서 무용지물이었고 아군 피해만 키울 뿐이었다. “북한군의 주공이 지향된 의정부 지역에서의 작전지휘는 여러 가지 되새겨볼 요소가 많았다. 소총, 기관총 박격포만으로 북한군의 전차를 멈추게 할 수 없었으며, 부족한 병력으로 실시한 반격은 병력의 소모만 가져와 부족한 병력을 더욱 부족하게 만든 결과를 초래하였다.” “의정부 지역에서의 국군의 작전 지휘는 준비태세 미비, 지휘계통의 혼선, 축차적이고 단편적인 역습에 의한 병력 소모, 병력보존을 위한 적극적 고려와 조치의 부재 등과 연관된 문제점을 드러냈다.”6 6․25전쟁 초기 한국군 작전지휘의 ‘부재’는 다른 연구들에서도 공통적으로 지적되고 있다. 박명림은 6월 27일 새벽 1시에 비상국무회의가 열렸을 때 “비상 국무회의 벽두 국방장관 신성모의 보고는 여전히 안일하고 낙관적인 것이었다. 전 국무총리 이범석의 핀잔과 제지로 신성모의 엉성한 전황보고는 도중에 중단되었다.”고 지적하였다.7 국방부 정훈국 전사편찬위원회가 전쟁 중에 발간한 『韓國戰亂一年誌』에서도 전쟁 초기 한국군 사단들이 군 수뇌부의 통제 없이 개별적 판단에 의해 움직이고 있었음을 지적하였다. “27일 오후 7, 8시경에 이르러서는 서울 동북방 미아리고지를 방비하고 있던 제5, 7사 진지에 적이 침투하여와 전선은 혼란상황에 빠지고 피아의 구별을 못하게까지 되었다. (중략) 전차가 서울 시내에 침입하고 이미 육군본부와의 연락이 두절된 각 사단장들은 각개로 휘하부대의 노량진 집결을 명령하였다.”8 그렇다면 이와 같이 6․25전쟁 초기 한국군 지휘부가 혼란상을 드러내며 즉흥적 작전 지도에 머물렀던 원인은 무엇일까? ‘1949년 38선 충돌’의 성격과 6․25전쟁과의 관계를 상세히 밝혀낸 정병준은 1949년 이래 ‘북진통일’로 상징되는 한국군의 공세적 태도가 1950년 진정한 ‘불의의 기습남침’을 형성하는 주요 배경을 형성했다고 설명한다. 한국군은 38선상으로 전진배치되어 있었고, 방어형 편성이 아니어서 방어에 관한 한 거의 무방비 상태였다는 것이다.9 6월 29일 도쿄에서 급거 수원으로 날아온 맥아더 장군도 한강 이남에서 전선을 시찰한 뒤 6월 30일 합참에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한국 육군과 해안경비대는 혼란상황에 있고, 치열하게 싸우지 않았으며, 그들 자체로서는 통솔력도 결핍되어 있었다. 내부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경무장으로 편성되고 장비되었으므로, 그들은 전차와 항공기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역으로, 그들은 북괴군을 형성하고 있는 그와 같은 부대에 대하여 주도권을 획득할 수도 없었다. 한국 육군은 종심방어, 보급제대 또는 보급체제를 위한 준비도 하지 않았다. 후퇴이동시 보급품과 군수물자의 파괴를 위하여는 아무 계획도 수립되지 않았으며, 혹은 수립되었더라도 시행되지 않았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보급품과 중장비를 망실하였거나 폐기하였으며, 전혀 상호연락체제도 갖추지 못하였다.”10 소련 군사고문단장 라주바예프도 1단계 전투결과를 총결한 보고서에서 한국군의 방어 실상을 평가하면서 한국군이 38선을 따라 방어설비를 구축하는데 충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으며, 종심 깊이 고밀도로 조직된 방어망을 구축하지 않았고, 보병 경화기 중심으로 방어체계를 구축하고 대전차 방어설비를 구축하지 않는 등 적절한 방어계획이 부재했다고 평가했다.11 비록 미군과 소련군으로 소속은 달랐지만 맥아더와 라주바예프 모두 군사전문가로서 6․25 전쟁 초기 상황에 대해 매우 유사한 상황 판단을 내렸던 것이다. 이에 따른 한국군의 병력 소모는 심각한 수준이어서 6월 25일 현재 98,000명이었던 한국군은 6월 말 22,000명으로 보고되었고, 수일 후 피해가 적었던 6사단과 8사단 병력을 합해도 54,000 명에 불과했다.12 이는 전쟁 발발 수일 만에 전 병력의 약 45%를 잃은 엄청난 손실이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혼란과 막대한 병력 손실 속에서 시흥지구 전투사령부는 어떻게 편성된 것이며, 왜 하필 비전투부대인 육군 참모학교장 김홍일 장군에게 전투사령관의 중책을 맡겼던 것일까? 공식 전사들은 시흥지구 전투사령부의 편성을 채병덕 총참모장의 명령에 의한 것으로 묘사했다. “서울이 실함되기 직전 총참모장 채병덕 소장은 한강을 연한 방어선에서 인민군을 저지하기로 결심, 육본을 수원농업시험장으로 이동 개설한 후 육군참모학교 교장 김홍일 소장을 시흥지구전투사령관으로 임명하여 한강선 방어 임무를 부여 하였다”는 것이다.13 그런데 김홍일의 회고는 공식전사의 설명과는 다른 상황을 보여 준다.14 전쟁 발발 이틀 후인 1950년 6월 27일 오후, 참모학교장으로 재직 중이던 김홍일 소장은 채병덕 총참모장으로부터 문산지구 제1사단 백선엽 대령의 작전을 지도해달라는 지시를 받았다. 문산 방면에는 제1사단 3개 연대 외에 배속된 보병 2개 연대와 국군 유일의 포병대대를 보유하여 비교적 정연한 전투를 수행하고 있었 다. 이에 김홍일은 의정부 방향으로 침입하는 적을 견제하기 위해 동두천 방면 적의 측배(側背)를 공격하기 위해 부서를 짜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밤 12시경에 적 전차가 당시 창경원에 침입하였다는 전보를 접하고 1사단이 적의 포위망에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따라서 백선엽 사단장에게 공격 계획을 중지하고 도강 후퇴하여 한강 동안(東岸) 방어에 대비하되 수색과 행주에 속히 공병대를 파견하여 선척을 집합, 치중부대(輜重部隊)를 먼저 도하시키고 부근 민가를 몇 집 헐어 그 재목으로 보병이 통과할 부교를 가설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러나 백선엽은 김홍일의 ‘지시’를 듣지 않았고 사수하라는 ‘명령’의 수행만을 고수했다고 한다. 다시 말해 김홍일에 대한 채병덕의 ‘작전 지도’ 요청은 위기 상황에서 일종의 ‘고문’ 역할을 요청한 것일 뿐 지휘계통 상의 권한있는 지위를 부여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 상황에 대한 김홍일의 한탄 섞인 회고를 그대로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백사단장은 사수하라는 명령만을 받고 있는데 어떻게 독단으로 후퇴하겠는가고 결심을 내리지 못하였다. 사단장 이상의 대부대장은 이런 때의 독단 전행(專行)이 필요하거늘 이를 이해치 못하니 가탄할 일이나 또 나에게는 이를 강제할 아무 권한도 없으므로 즉시 육군본부로 달려와 채병덕 소장에게 백사단 도하 후퇴 명령을 급히 하달하도록 이해를 가려서 권고하였으나 전략사상이 없는 그는 후일 퇴각시켰다는 책임을 질 것을 두려워 내 말을 종시 듣지 않고 핑계만 하다가 새벽 1시가 지나서 제7사단장 유재흥 대령이 큰소리로 통곡하면서 육군본부에 나타나 적의 전차를 막을 길이 없이 미아리 방어선이 무너지고 적이 서울 시내로 진격한다는 보고를 하자 채병덕 총참모장은 황망히 장경근 국방차관과 같이 찝차를 몰아 달아나기에 어디로 가느냐고 물어도 대답도 않고 겨우 장차관이 수원으로 간다고 말할 뿐이었다.”15 김홍일은 백선엽에게 다시 한 번 도강 연락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말았고 하는 수 없이 채병덕을 따라 도강하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한강교 폭파 굉음을 들었다. 그는 수원을 향하던 중 이응준 장군을 만나 함께 육군 본부로 향했고 그곳에서 채병덕, 이응준 장군과 함께 상황 수습 방안을 논의하였다. 이에 대한 김홍일의 회고는 다음과 같다. “도중에서 이응준 장군을 만나 전세를 한탄하면서 정오 수원에 이르러 육군본부 지휘소를 찾았더니 채병덕 소장은 수일의 피로를 못 이겨 담화 중에도 코를 골며 잠꼬대를 하는 처지이니 작전을 지도할 정신적 체력적 여력은 없었다. 그러나 이응준 장군과 셋이서 전장 수습과 전세 만회책을 협의한 결과 나는 시흥으로 가서 퇴산(退散) 부대를 수습하여 한강방어를 담임하고 이응준 장군은 수원에서 퇴산 부대를 수습하여 전방으로 수송 지원한다는 결정을 지어가지고 나는 다시 시흥으로 되돌아왔다.”16 따라서 시흥지구 전투사령부의 창설과 김홍일의 시흥지구전투사령관 임명은 방어계획이나 채병덕 총참모장의 명령에 의한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조치라기보다는 비전투부대를 맡고 있던 두 노장(老將)의 경험에서 나온 즉흥적이고 임시적인, 고육지책의 일환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17 당시 수도사단 참모장이었던 김웅수 장군이 “김홍일 장군은 상부의 명령 없이 후퇴하는 병력을 모아 한강변에 배치하며 지휘”하였다고 설명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는 “한강 남쪽으로 철수한 육군본부는 김홍일 소장을 시흥지구 전투사령관으로 사후에 소급 발령해 한강선 방어전을 지휘하게 하였다”고 회고하였다.18 한국군 입장에서는 6․25전쟁 발발 후 3일간의 전투에서 엄청난 병력 손실을 입고 남쪽으로 후퇴하기에 급급했던 군을 일단 수습하는 것 이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또한 역설적으로 김홍일과 이응준이 전투부대 지휘를 담당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육본을 따라 수원으로 비교적 신속하게 이동할 수 있었고 수습책 마련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한강선을 이용하여 지연작전을 펼친다는 개념은 1950년 3월 25일자 육본 작전명령 제38호(일명 국군방어계획)에도 어렴풋하게 나마 담겨 있었고,1950년 6월 26일 아침 국방부에 소집된 긴급군사회의에서도 논의된 바 있었다. 이 자리에는 신성모, 채병덕, 이응준, 김홍일 등 4인의 현역 군 관계인사와 유동열, 지청천, 이범석, 김석원 등 4인의 ‘재야군인’을 합하여 8인이 참석하였다. 이 자리에서 한강 방어선 형성 논리가 대두되었으나 신성모 국방장관과 채병덕 총참모장이 서울 고수론을 펼치는 바람에 결론을 도출하지 못하고 산회하였다. 이에 대한 김홍일의 회고는 다음과 같다. “이 좌석에서 나는 속히 전쟁방침을 정하여 어느 선에서 전병력을 집결하여 고주일척(孤注一擲)의 결전을 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UN군의 참전까지 시간의 여유를 얻기 위하여 지구전(지연작전)을 하느냐를 결정하여 군 당국으로 하여금 시행케 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유감되게도 이 자리에는 전쟁원리나 전략연구를 하여본 인사가 없는지라 나의 주장을 이해하지 못하고 공연한 고담광론(高談廣論)으로 괴뢰의 이번 공격은 시탐성(試探性)에 지나지 않으므로 UN군이 직접 참전하게 된 오늘날 적은 결코 서울까지의 공격은 못할 것이라는 안이한 적정판단으로만 시종하다가 결론 없이 헤어지고 말았다.”20 적의 전면 기습 공격을 받은 상황에서 축차적 부대 투입으로 인한 병력 손실을 피하고 병력을 집결하여 ‘결전’을 선택하거나 유엔군 참전까지 시간을 벌기 위한 ‘지구전’을 선택해야 한다는 판단은 군사전략상 매우 기본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육본 작전국은 한시적 수준의 서울 방어를 선택했고 이는 ‘수도 서울 사수’라는 당위로 인해 비롯된 작전 실패라고 볼 수 있다.21 결국 김홍일이 시흥지구 전투사령관을 맡게 된 것은 육본에서 있었던 채병덕, 이응준과의 협의의 결과이기는 했지만 그가 한국군 내에서 사단급 이상 대부대의 지휘 경험이 있는 유일한 인물로서 그러한 경험에 기반하여 군사전략을 이해하고 적절한 판단을 내릴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22 비록 고육지책으로 나온 임시적 조치였으나 시흥지구 전투사령부 창설과 김홍일의 전투사령관 부임, 한강선 방어전의 시작은 6․25전쟁 초기 한국군에게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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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초기 김홍일의 활동과 예편.2 군사 / 역사 Webzine
2018. 6. 9. 21:26
https://blog.naver.com/joseon_500/221295349083
6․25전쟁 초기 김홍일의 활동과 예편.2
3. 한강선 방어전투의 전개
1950년 6월 28일부터 7월 3일까지 진행된 한강선 방어전투는 한국군 시흥지구전투사령부 예하 3개 혼성사단(제2, 7, 수도사단) 이 한강 남안에 방어선을 형성해 북한군 제1군단 예하 보병 3개사 단(제3, 4, 6사단) 및 전차 1개 여단의 공격을 6일 동안이나 방어한 전투이다. 6월 28일 새벽에 서울에 진주한 북한군 제1군단은 제105 전차여단과 함께 한강 북쪽의 도하지점을 점령하는 한편, 시내의 주요 기관을 장악했다.1
북한군 최고사령부는 서울 점령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대통령 등 정부가 대전으로 이동하여 한국군의 항전이 계속되고 유엔 해공군의 개입이라는 예상 밖의 상황에 접하자 유엔 지상군의 참전을 의식하여 그 전에 남한을 석권하려는 기도 하에 황급히 미리 계획된 남진 명령을 하달하였다. 북한군은 “미 육군이 증원되기 전에 한강을 강습 도하하여 국방군의 주력을 격멸, 소탕한 후 평택․충주․울진선의 지역을 점령하며, 이를 위하여 주공을 영등포-수원-평택 방면으로 지향하는 동시에 다른 몇 개의 방향에 대해 조공을 둔다”는 작전방침을 결정하였다.2
한강을 도하하여 평택 방면으로 진출한 북한군 제1군단은 군단 주공인 제4사단을 신촌 일대에서 영등포 방면으로, 조공인 제3사단을 용산-한남동 일대에서 말죽거리로 지향하여 도하 준비를 서둘렀다. 한편, 문산 방면에서 합류한 제6사단은 수색 부근에 집결 하여 이미 김포비행장 부근까지 진출한 제14연대의 전황을 지켜보면서 그에 대한 지원태세를 갖추었고, 또 제1사단 주력은 서대문쪽으로 입성하여 제3, 4사단을 후속할 예비대가 되었으며, 제105 전차여단은 시가지 경계와 보병부대의 도하를 지원하면서 도하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나 북한군 1군단은 서울을 점령하자마자 그들 공군이 제공권을 거의 상실하게 되고 미 지상군의 참전도 점차 우려되어 도하를 한층 서두르게 되었고, 한강선 돌파에 선두부대가 된 제3, 4사단이 포병연대를 남산 기슭과 신촌 일대에 배치하여 화력 지원태세를 갖추었다.3
다음 지도는 한강선 방어전투의 작전 상황도이다.
<지도 1> 한강선 방어작전 상황도
앞장에서 살펴보았듯이 당시 한국군 지도부는 한강선을 방어하기 위한 체계적인 대응책을 강구할 경황이 없었다. 다만 적의 주공이 노량진 정면을 돌파해 시흥 - 안양 - 수원의 경부국도로 지향되리라는 판단 아래 병력이 수습되는 대로 부대들을 방어선 이곳 저곳에 투입할 뿐이었다.4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한강은 적의 전면 남침시에 자연 장애물로써 양호한 지연진지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만 언급되었을 뿐 이를 위한 구체적인 실행계획이 없었다. 병사들은 거듭된 전투와 철수로 말미암아 극도로 피로한 상태였고 수습된 인원도 1개 연대의 실병력이 대대 규모로 줄어들 정도였다. 군수 면에서 한국군이 직면한 실정은 더욱 어려운 상태였다. 한강교 폭파로 사단에 지급될 보급품을 실은 1,318대의 차량들이 전부 한강 북쪽에 갇혀 적의 수중으로 넘어갔다.5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 시흥지구전투사령관의 임무를 받은 김홍일은 6월 28일부터 한강선 방어 부대를 지휘하였다. 그는 시흥에 사령부를 설치하고 참모부를 구성하는 한편, 제7사단장 유재흥 준장을 혼성 제7사단장, 수도사단장 이종찬 대령을 혼성수도사단장, 제2사단장 임선하 대령을 혼성 제2사단장에 임명하고 안양천에서 광진교에 이르는 한강 남안 24km 정면의 방어 편성에 들어갔다.6
이때 군의 방어개념은 한강선을 고수한다는 것이었으며, 시흥사(始興司)는 미 지상군이 투입될 것으로 예상하고 그들이 가능한 한 북쪽에서 전개할 수 있도록 최대한으로 고수한다는 작전 개념으로 한강선 방어에 임하였다. 당시 사령부가 하달한 한강선 방어작전의 명령 요지는 다음과 같다.
① 전투사령부는 한강선을 방어하려 한다.
② 혼성 제2사단은 신사리-동작리 정면을 고수하라.
③ 혼성 제7사단은 동작리-대방리 방면을 고수하라.
④ 혼성수도사단은 신길리-양평리(안양천) 정면을 고수하라.
⑤ 김포지구전투 사령부는 현 위치(김포)에서 적을 저지하라.
⑥ 각 사단은 적의 도하수단을 적극 분쇄하라.
⑦ 각 사단은 피난민에 대한 검색을 철저히 하여 적색분자의 침투를 저지하라.
⑧ 지휘소는 시흥(보병학교)에 위치한다.7
시흥사가 미 지상군 투입을 예상할 수 있었던 배경은 김홍일의 회고에 잘 나타난다. 그는 사령부 설치와 참모부 구성을 마친 6월 29일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이때 마침 원참모학교(原參謀學校) 고문관 로버트 하제레트(Robert Hazlett) 중령이 미 고문 5, 6인과 같이 역시 시흥에 도착하여 본 사령부의 고문단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한강방어작전을 토론하던 중 하제레트 중령이 말하기를 UN군이 참전하게 되었으나 서울함락이 예상 외로 너무 빨랐기 때문에 창졸간에 부산으로 수송을 시작한 미군 제24사단이 한강선까지 진출할려면 적어도 3일 이상의 시간이 필요한데 만일 3일 이내에 적이 한강을 도하하여 추격하여 온다면 전략상 부산에 상륙을 시작하던 미군도 일단 일본으로 철수하지 않으면 아니 될 처지이니 대한민국의 존망이 한강을 3일 이상 고수하느냐 못하느냐에 달렸다고 하였다.”8
김홍일은 이것이 “전략상 명백한 사실”이라고 느꼈고, 3일 이상 한강선을 고수하는 것이 “국운을 걸고 내게 지워질 중대한 책임” 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시흥사는 방어명령을 하달한 즉시 시흥에서 병력을 수습하여 그 병력이 500명 선으로 채워지면 곧바로 혼성 몇 대대로 명명하여 한강선으로 투입하는 한편, 새로이 한강 방어 편성지역을 분담한 각 혼성사단으로 하여금 지역 내에서 도하한 병력을 수습하여 강안에 재배치토록 진지 편성을 독려하였다. 특히 김홍일은 적이 교량을 이용할 것에 대비, 노량진 부근을 방어하는 혼성 제7사단에 우선권을 두고 혼성대대들을 투입하였으며, 각 사단도 제각기 책임 지역에 있는 나루터 방어에 중점을 두고 방어 편성을 서두른 결과 6월 29일에 가서야 간신히 방어선을 형성할 수 있었다.9
시흥사는 29일까지 예하 혼성사단으로 진지 배치를 일단 완료하였으나 혼성사단은 이름만 사단이지 병력은 1개연대 규모에 불과했고, 그나마 보유하고 있는 공용화기란 연대당 고작 박격포 2~3문, 기관총 5~6정에 지나지 않는 소규모 소총부대 수준이었다.10 게다가 당초에 시흥사는 한강선 방어부대에 대한 모든 지휘책임을 맡게 되었으나 통신망의 미비로 혼성 제7사단과 혼성수도사단만을 주로 지휘하여 노량진-영등포의 방어에만 치중하게 되었고, 혼성제2사단은 가로막힌 관악산으로 인하여 사실상 육본의 직접 지휘통제를 받고 있었다. 또한 김포사(金浦司)도 29일 현재 예하 6개대대 병력으로써 김포 방면에서 거의 독자적으로 방어작전을 수행하고 있었으므로 한강선방어부대의 지휘체제의 통일성은 일사불란하게 갖추어지지 못하였다.11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흥지구 전투사령부 예하 3개 혼성사단(제2, 7, 수도사단)은 미 군사고문단이 기대했던 3일을 넘어 6일을 버텨내는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북한군 주력의 도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을 6월 29일 오후부터였는데, 그날 밤에 흑석동 방면에서 아군 복장으로 위장한 적 1개 중대가 정밀 도하를 실시하다가 아군에 의해 격퇴되었다. 6월 30일 새벽에는 서빙고 방면에서 북한군 제3사단 예하 부대의 병력이 20~30명씩 목선을 타거나 헤엄을 쳐 도하를 시도했으나, 이를 발견한 아군에 의해 저지당했다.
김포 방면에서 한강을 도하해 김포공항을 지나 점차 동쪽으로 접근하던 북한군 제6사단 예하 부대 일부가 6월 30일에 오류동 일대까지 진격했으나, 역시 아군의 선방에 의해 저지되었다. 북한군 제 4사단은 7월 1일부터 마포 방면에서 도하를 시도했으나, 국군 혼성 수도사단이 이를 잘 방어했다. 특히 영등포 일대에 배치됐던 국군 제8연대와 제18연대의 일부 병력은 7월 3일까지 다섯 차례에 걸친 적의 도하 공격을 격퇴하면서 여의도를 굳건하게 사수했다.12
소련 군사고문단장 라주바예프의 6․25전쟁 보고서에서도 이러한 한국군의 저항과 이에 따른 북한군의 피해 상황이 잘 드러나 있다.
“1950년 6월 30일부터 7월 1일 사이 야간에 제105땅크사단(서울을 해방한 후 제105땅크여단은 제105땅크사단으로 개칭되었으며, ‘근위’ 칭호를 수여 받았다)은 적의 조직적인 소총과 기관총 사격 및 포격으로 인하여 막대한 손실을 입으면서 한강을 도하, 강의 남쪽 강변에 교두보를 확보하였다.” “7월 1일 하루 동안 교두보를 확보 하고 있던 부대들은 적 대규모 보병의 반격에 맞서 격렬한 전투를 수행하였다. 이 전투에서 제105땅크사단 기계화연대는 병력의 약 35%가 전사 혹은 부상당하였다.” 그 결과 “구성군 내 다른 부대들의 도하 역시 느린 속도로, 그것도 7월 3일 야간에서야 수행되었다.”13
그렇다면 시흥전투사령부가 한강선 방어전투에서 이렇게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김홍일의 회고는 하나의 해답을 제시한다.
“나는 결사적 결의로써 후방보급이 되지 않아 병사들과 같이 주먹밥에 소금물을 마시면서 삼일삼야(三日三夜) 한잠도 자지 못하고 부하들을 고무 격려하면서 장병들의 애국심에 힘입어 참으로 기적적이고 위대한 임무를 완수하였던 것이다. (중략) 29일부터 포격과 더불어 도하를 시도하는 적의 기도를 분쇄시켰으며 기갑연대는 매일 계속하여 김포비행장까지 원거리 정찰과 아울러 문산방면 제1사단의 후퇴도강 부대를 인접하도록 임무를 수여하여 그 힘을 입음이 실로 컸다. (중략) 28, 29, 30 등 3일간 적은 주간에 맹렬한 포병 엄호사격 아래 한강남안 흑석동 언덕 아래 수도수원지(水道水源池), 사육신묘지, 노량진역 등처(等處)에 일부 병력을 도강시켜 교두보를 구성하려 하였으나 저녁만 되면 우리 병사들의 용감무쌍하고 참렬(慘烈)을 극한 백병전으로 이를 섬멸하여 적의 기도를 분쇄하였다.”14
김홍일 사령관의 솔선수범과 일선 장병들의 희생, 여기에 한국군 포병의 지원이 비교적 효과적으로 이루어졌던 것이 한강선 방어전 투의 성패를 가른 중요한 요인이었던 것이다. 소련군사고문단장 라주바예프도 그의 보고서에서 한국군 포병의 사격 결과는 막대한 양의 탄약소비를 통해 얻어졌으나 “포대단위의 경우 매우 효과적이고 견실한 사격 통제, 사격의 정확도 등이 보여졌다”면서 “대대 단위 화력집중 역시 서울 점령전, 한강 도하시 영등포(서울 남방), 수원 방면 등에서 많이 인지되었다”고 썼다.15
북한군이 신속한 남하 작전을 펼치지 못했던 것도 한강선 방어전 투의 또 다른 성공요인이었다. 북한군은 6월 29일 여의도, 흑석동, 신사리 일대에 정찰대를 투입하여 탐색전을 전개하였고, 6월 30일에야 도하 작전을 개시하였다. 16 라주바예프는 이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며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각 사단장들은 서울에서 퇴각하는 적을 적극적으로 추격하거나 한강 도선장들을 점령하지는 않은 채,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모호하게 행동하였다. 또한 제105땅크여단 예하부대들도 서울을 점령한 후 3일 동안 적을 추격하지 않은 채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음으로써 적에게 한강의 남쪽 강변을 강화하고 교량을 파괴할 수 있는 여유를 주었다. (중략) 서울을 점령한 후 사단 예하부대들을 계속 진격시켰다면 6월 29일에 최소한의 손실로 수행할 수도 있었던 제105땅크사단 전체의 도하는 이와 같이 7월 4일에야 대체적으로 완료되었다.”17
라주바예프는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 뒤 곧바로 남하 작전을 전개했다면 6월 29일에 북한군 제105탱크사단 전체가 최소한의 손실로 한강 도하를 완료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시흥지구 전투 사령부의 사령부 구성과 부대 편성이 6월 28일에 시작되었고 6월 29일에야 부대 배치가 완료된 점을 고려할 때 라주바예프의 평가는 설득력이 있다. 결국 북한군의 남하 지연과 그 기간 이루어진 신속한 시흥지구 전투사령부의 구성이 한강선 방어전투의 성공을 이끌었다고 볼 수 있다.
한강선 방어전투 성공의 마지막 요인은 미 공군의 신속한 개입이었다. 미국 시간으로 6월 26일 21시에 있었던 블레어 하우스 회의에서 애치슨 국무장관은 미국 해․공군에게 한국 내의 작전에 가해진 제한사항을 철폐하고 북한군 부대, 전차, 포병에 대한 공격을 포함하여 한국군에게 최대로 가능한 자원을 제공하도록 지시할 것을 제안했다. 이 제안이 받아들여져 6월 27일 아침 트루먼 대통령은 “미국 해․공군 부대가 한국군 부대에 엄호와 지원을 하도록 명령”했다고 발표했다. 맥아더 극동군 사령관에게도 “극동 해 ․ 공군 부대에 가해진 모든 제한조치를 해제한다. 그들은 한국군에게 재편성할 수 있도록 최대의 지원을 제공한다”는 훈령이 내려졌다.
해․공군에게 내려진 세부 훈령의 내용은 “한국 영토의 방위를 지원하고 돕는 데 있어 극동 공군의 완전한 운용을 막아온 종전까지의 모든 제한사항을 38도선 남쪽 작전에 대하여 제거한다. 38도선 이남에 위치한 모든 북한의 전차, 대포, 부대 및 기타 군사 목표물에 대한 공군의 공격이 허용된다. 그 목적은 남한에서 북한의 군사력을 제거하는데 있다. 이와 똑같이 해군은 38도선 이남의 연안이나 해상에서 한국에 대한 공격에 참여한 부대에 대하여 제한없이 운용한다”는 것이었다.18
맥아더 극동군 사령관은 합동참모본부가 대통령의 개입 결정을 통보하자마자 곧 극동공군에게 가능한 모든 전력으로 전진하는 적을 공격하도록 명령하였다. 6월 27~28일(한국시간) 밤에 B-26폭격기에 의한 공격으로 공중작전이 시작되었으나 그 효과는 악천후로 인해 감소되었다. 다음날에는 B-26과 F-80전투기가 B-29에 의해 증강되었다. B-29는 괌으로부터 급히 일본으로 전개하였으며 전술무기를 장착하였고 북한군의 부대, 전차, 대포, 철도 등을 표적으로 하였다.19
서울을 점령당하고 황급히 시흥지구 전투사령부를 꾸려 한강선 방어전투를 준비하던 시기 미 공군의 개입과 실질적 폭격의 시작은 한국군의 사기와 전력을 상승시키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한림은 “28일날 B-29기가 오후 5시쯤 될 것입니다. 우리 부대가 광나루 다리를 건너가는데 B-29편대가 서울 상공에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되었구나 이런 안도감을 가졌습니다”라고 회고했다.20 무초 대사도 6월 28일 아침 다음과 같이 전망했다.
“전투지원 결정과 처지(John H. Church) 장군의 명령은 사기에 큰 영향을 가져왔으며, 다가오는 공중 공격은 적의 사기를 저상하고 한강 제방 남쪽에서 한국군의 재편성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21
실제로 6월 말까지 미 극동공군기들은 지상기지에서 172회를 출격하였고 수요가 격증함에 따라 극동공군사령관 스트레이트 마이어 (Strate Meyer) 장군은 약 50여대의 F-51 전투기를 추가하여 전투력을 증강시켰다.22 1950년 6월 25일부터 7월 15일까지의 경과를 담은 유엔군 작전보고서 1호도 “6월 28일부터 미 공군의 항공기는 UN안보리이사회의 결의에 의하여 한국군을 지원하고 북한침략자에 대한 작전을 개시하였다. 미 공군기들은 침략군의 통신, 보급로를 마비시키기 위하여 삼팔선 이북의 군사목표를 공격하였다. 대손상을 입은 한국군은 한강 남안에서 재편을 하고 미 공군의 지원을 얻어 북한군 진출을 저지하려고 노력하였다”고 보고하였다.23
한강선 방어전투와 관련된 좀 더 구체적인 상황은 다음과 같다.
6월 30일 새벽 북한군 제4사단이 일부 병력을 노량진 대안에 투입하여 아직 절단되지 않은 경인 상행선 철교의 복구를 시도하였을 때, 마침 서울근교 교통망을 차단 폭격하던 미 제5공군 제3폭격전대가 교량을 폭격함으로써 그러한 기도를 무산시켰다. 같은 날 북한군 제3사단이 흑석동 일대와 신사리 방면으로 본격적인 도하를 개시하였을 때에도 흑석동에 위치한 한국군 제9연대 병력의 결사적인 도하저지 사격과 미 공군 제19폭격전대의 지원으로 적의 도하를 저지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날 한국군은 한강 장애물로 인해 적 전차의 기동이 억제되는 가운데 미 제5공군의 근접 항공지원을 받게 되자 이에 크게 고무되어 결사적으로 적의 진출을 저지하였다.24
이와 같이 한강선 방어전투의 성공은 김홍일의 지휘통솔과 육군 보병 및 포병부대의 분투, 북한군의 서울 점령 후 남하 지연, 미공군의 신속한 개입 결정과 공중 지원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이제 다음 장에서는 시흥지구 전투사령부를 모체로 한 육군 제1군단의 창설과 한강선 방어전투를 성공적으로 이끈 김홍일이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3월 육군 중장으로 예편하기까지의 과정을 간략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4. 육군 제1군단 창설과 김홍일의 예편
1950년 7월 3일, 북한군이 수리를 마친 한강철교로 전차를 동원해 도하를 시도하자 아군의 방어선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노량진에 진출한 적 전차는 아군 방어선을 돌파한 이후 곧바로 영등포로 진입했다. 이러한 상황을 파악하고 있던 김홍일 사령관은 후일을 기약하고 예하 대들에게 즉시 안양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전황이 이처럼 급박하게 전개됨에 따라 육군본부도 7월 4일 수원을 포기하고 평택으로 철수했다.25 이 시점에 대한 김홍일의 회고는 다음과 같다.
“7월 3일 밤 적은 다시 한강 제2철교의 불완전 폭파점을 이용하여 전차 12량이 도강하여 영등포 로타리를 점령하고 보병도 도강하였으므로 이튿날 새벽 공격이 있을 것을 예견하고 결사대를 조직하여 까소링병(甁) 등으로 화공(火攻)하였으나 실패하고 7월 4일 새벽 공격을 위하여 부득이 안양선으로 후퇴하였다.”26
이때는 이미 미 지상군 선발대가 오산에 도달하여 한미연합작전을 고려해야 했고, 서울 방어전과 한강선 방어전에서 한국군이 입은 인원, 장비 손실이 크고 편성이 혼재되어 있어 새로운 작전으로의 전환에 앞서 부대 정비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7월 5일 부로 시흥지구전투사령부로 제1군단사령부를 창설하고 그 예하에 혼성되어 있던 수도사단과 제1, 제2, 제3, 제5, 제7사단을 수도사단과 제1, 제2사단의 3개 사단으로 재편성하여 개편하였다. 그리고 수도사단장은 이준식 준장에서 7월 7일부로 김석원 준장이 맡게 되었고, 제1사단장은 백선엽 대령이, 제2사단장은 이한림 대령이 맡게 되었다.27
6월 30일부로 채병덕 총참모장의 후임으로 부임한 정일권은 이날의 재편성에 대해 “당시 제1군단장은 사단급 이상의 부대를 지휘한 경험이 있는 유일한 인물인 김홍일 장군을 임명하였고, 수도사단 및 제1, 2사단은 일부 부대가 분산되기는 하였으나 비교적 대대급 이상의 지휘조직이 건재하였기 때문에 재건사단으로 지정하였고, 제3사단과 제5, 7사단은 지휘조직이 완전히 상실되었기 때문에 해체하여 그 병력으로써 재편된 사단에 보충케 하였다”고 회고 하였다.28
김홍일도 “6개 사단 잔여병력을 통합하여 수도, 제1, 제2 등 3개 사단으로 축소 재편성하여 제1군단을 조직하니 7월 7일 0시경이었다. 내가 군단장으로 임명되고 유재흥 대령이 참모장으로 이준식 대령, 백선엽 대령, 이한림 대령이 각각 사단장으로 임명되어 경부 철도선을 작전 지역으로 정하여 미군이 철도선을 포함한 이서(以西) 지역을, 국군이 그 이동(以東) 지역을 담당하여 이때부터 비교적 정연한 작전을 실시”하였다고 회고했다.
이후 1군단장으로서 김홍일은 낙동강 방어전에 이르기까지 불리한 상황에서도 적에게 타격을 입히며 아군의 전력을 보존하는 방어전 및 지연전을 계속해 나갔다.29
한강 방어선이 붕괴된 후 한국군과 유엔군은 금강과 소백산맥 일대에 새로운 저지선을 형성하였는데, 김홍일 1군단장은 예하의 제2 사단 16연대와 제25연대, 독립 제17연대를 지휘하여 진천 남쪽 봉화산-문안산 일대에서 전차와 포병으로 증강된 북한군 제2사단의 남침을 5일 동안 저지하며 적에게 타격을 입혔다.
또한 7월 15일 독립 제17연대는 화령장 북쪽에 매복 작전을 펼쳐 속리산으로 남하하여 상주로 침공하려는 북한군 선두부대를 기습 궤멸시켰다. 제8사단은 안동 북쪽 일대에서 북한군 제12사단의 침공을 저지하던 와중에 서쪽 풍산지역으로 침공하는 북한군 제8 사단과 동쪽 배후에 침투해오는 북한군 유격대에 맞서 싸우며 나흘 동안 방어전을 전개하였다. 이 전투로 북한군의 안동 지역 진출이 상당히 지연되었다. 의성으로 철수한 뒤에는 북쪽 향로봉 일대에 주저항선을 형성하여 국군이 보현산과 기계 지역 정면에 새로운 주저항선을 형성할 수 있는 시간을 벌게 하였다.
낙동강 전선으로 철수, 방어에 돌입한 후에는 기계-안강-영덕-포항 일대에 침공해온 북한군에 역습포위 작전을 전개하여 적을 비학산 방면으로 격퇴하였다. 이 전투로 북한군 2개 사단은 낙동강 전선의 동부지역 돌파작전에 실패하였고, 제1군단은 기계와 포항지역 북방으로 후퇴한 북한군을 추격하여 다음 단계의 반격작전을 펼칠 수 있었다.
이처럼 성공적으로 1군단장 임무를 수행하던 김홍일은 낙동강 방어전이 한창이던 1950년 9월 1일부로 1군단장에서 해임되어 육군 종합학교장으로 전임되었다. 3사단장 김석원도 함께 해임되었으며 그 후임으로 신임 1군단장에 김백일, 3사단장에 이종찬이 각각 임용되었다.30 김홍일뿐만 아니라 김석원도 정규작전의 전투 지휘관 경험이 있는 한국군 내 몇 안 되는 인물이었기에 이러한 인사 조치는 당대에도 의문시되었고 국회는 그것을 파벌에 의한 인사조치라고 비판하고 즉각 거둬들일 것을 촉구하였다. 신성모 국방장관은 이에 대해 미 8군 사령관 워커의 건의를 받아들인 것이라 해명했고, 무초 대사는 미 국무부에 이 상황을 보고하였다.31
당시 상황에 대해 정일권 총참모장은 후일 그의 회고록에서 당시 한국나이로 58세와 53세였던 김석원과 김홍일이 6․25전쟁 발발 이후 격전을 치르면서 너무 지쳐있었기 때문에 배려 차원에서 전임한 것이라 해명하였다.32 그러나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던 상황에서 특별히 건강상의 이상이 없는 노련한 지휘관을 건강을 염려하여 교체했다는 해명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울 것이다.
양영조는 이승만 정부의 군부 통제에 관한 연구에서 이 인사 조치를 일본육사 출신인 김석원을 중심으로 설명하면서 “신성모와 정일권의 군사원로 배제라는 사적인 파벌의식이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만주군 출신을 통해 일본육사 출신을 견제하려는 이승만의 정치적 계산이 있었고, 이에 따라 정일권 총참모장 시기 함경도 출신과 만주군 출신이 상대적으로 강화되었다는 것이다.33 이러한 설명은 이승만 정부의 전체적인 군부 통제 매커니즘을 잘 보여주지만 독립군 출신인 김홍일 장군의 해임을 명확히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이와 관련하여 이승만 대통령의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의 회고는 다음과 같이 꽤 구체적인 상황을 보여준다.
“6․25전쟁이 벌어지고 나서 얼마 후 김석원 장군은 3사단장에 임명됐다. 그의 지휘 아래 3사단은 적잖이 우여곡절을 겪었다. 한번은 너무 앞서 북진해버리는 바람에 미군들이 그를 제 위치에 붙잡아 두느라 무진 애를 먹었다. 그 뒤 영덕 쪽에 재배치되자 이번엔 후퇴명령을 지키지 않다가 때를 놓쳐 해로로 겨우 빠져나왔다. 포항 작전 지구에서 싸우고 있었는데, 지나치게 서둘러 밀고 올라가는 바람에 뒤쪽이 비었다. 그러자 서쪽의 왜관지구에 있던 적군이 퇴로를 끊고 들어왔으므로 김 장군의 부대는 해안선을 따라 퇴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김석원 장군뿐 아니라 김홍일 장군도 미 군단장 콜터 장군이나 한국군 제1연대와 함께 있는 브래들리 장군의 말을 잘 듣지 않았다. 바로 어제도(8월 28일) 부대를 조금 전진시키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움직이지 않았다. 이들에게 이야기를 좀 해달라는 워커 장군의 부탁을 받고 대통령이 경주로 김홍일 장군을 찾아갔다. 김 장군은 빨리 진격해야 된다며 좀 더 기다리라는 워커 장군의 지시에 이의를 표했다. 대통령은 그에게 명령은 명령이니만큼 따라야 한다고 타일렀다.”34
프란체스카의 회고는 신성모 국방장관의 국회 해명과도 어느 정도 일치한다. 김홍일, 김석원 두 한국군 지휘관이 작전에 대한 이견으로 미군 지휘관들과 갈등을 빚어 왔고, 대통령도 한국군에 대한 작전지휘권을 갖고 있는 유엔군사령부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결국 이 문제는 8월 30일, 이승만의 교체명령서 서명으로 결론이 났다. 이 날에 대한 프란체스카의 회고를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신성모 국방장관이 대구에서 왔다. 그는 대통령에게 김석원, 김홍일 두 지휘관을 교체할 것을 권했다. 이들이 명령을 따르지 않으므로 교체해야 한다고 콜터 장군이 고집한다는 이야기였다. 지금 상황에서 고위 지휘관을 갈아치우는 건 결코 바람직한 일이 못 된다. 특히 이 두 사람은 휘하 부대에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으니 교체될 경우 부대원들의 반응이 어떨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대통령은 국방장관 말대로 교체명령서에 서명했다.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장군은 그대로 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35
물론 이러한 설명은 정치적 부담이 있는 군 인사 조치에 대한 이승만 입장의 설명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김홍일도 당시 미군과의 갈등이 있었음을 회고하였다.
“나야 그때 반격 시작하기 전에 그만 둔 사람이니까 불쾌한 일만 많았죠. (중략) 그런데 제일 불쾌한 것은 지금 이 장군(이성가)도 여기에 계시지만 (중략) 이 장군은 철수는 금방 해야 되겠고 새로운 무기와 탄약을 전 부대에 배부하면 잘못하다가는 잃어버리기가 쉬우니까 분배하지 않고 기차에 싣고 내려왔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8사단의 고문관이 보고하기를 무기는 전 부대에게 주라고 해서 준 것인데 분배하지 않았다, 이것은 지휘관들이 나빠서 그대로 싣고 내려갔다고. 저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설명했습니다. (중략) 그래서 그 미군 고문단을 뚜들겨주고 싶었습니다.”36
이러한 한국군 지휘관과 미 군사고문단과의 갈등은 단순히 의사소통의 문제나 상황 인식 차이로 치부할 수 없는 성격의 것이었다.
김홍일은 이에 대해 “전쟁 초기에 있어서는 미국 사람들은 자기네가 배운 장비로 충분하고 이런 환경에서 배운 전술, 학문 경험으로 방어전을 하라는 것은 되는 일이나, 우리는 형편없는 장비로 20킬로 이상의 방어지역을 담당하는 것을 여기에 와서 그런 두뇌로 하려고 하니 트러블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후에 장비도 좋아 지고 미국 사람의 전술대로 그렇게 해도 될 그때부터는 나아진 것입니다”라고 설명하였다.37 연합작전 초기의 이러한 갈등은 비록 한국군이 유엔군의 작전 지휘 하에 있었으나 미군과는 장비 상태 등 부대의 현실이 다르기 때문에 작전 방식도 달라야 한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판단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연합작전 초기 미군과 한국군 지휘관 사이의 갈등은 실재하는 것이었고, 이것이 김석원, 김홍일 등의 군사원로를 배제하려는 이승만과 신성모, 정일권 등에게 좋은 명분을 제공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38 김홍일은 1950년 9월 1일부로 비전투부대인 육군종합학교장으로 전임되었고, 다음 해 3월 육군 중장으로 예편한 뒤 대만 대사로 부임하였다. 이승만은 예편하는 그를 ‘5성 장군’(중국 국민혁명군 2성+한국군 3성)이라고 칭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한국군은 6․25전쟁이라는 위기 상황에서 대부대 지휘 경험이 가장 많은 노련한 지휘관을 스스로 잃어버린 셈이었다.
5. 맺음말
이상의 논의를 정리하는 의미에서 한강선 방어전투가 6․25전쟁 사에서 갖는 의의가 무엇인지, 여기서 김홍일의 역할이 무엇이었는지를 간략히 정리하는 것으로 본고의 결론을 대신하고자 한다.
먼저 한강선 방어전투는 6․25전쟁 발발 직후 방어 태세 미비로 인한 실패를 ‘지연작전’이라는 명확한 작전 개념 하에 만회하기 시작한 첫 전투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김홍일 장군과 한국군은 미 지상군 개입을 염두에 두고 한강선 방어에 임했으며 이는 명확한 목표도 없이 남쪽으로 후퇴하기에 급급했던 그 이전의 전투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39 『韓國戰亂一年誌』 도 서울이 함락된 뒤 “온갖 수단을 다하여 도하에 성공한 국군병사 들은 한강 남안에서 김홍일 소장에 의하여 통합 재편되어 지연작전에의 제일보를 밟게 되었다”고 평가했는데 이는 낙동강 방어선 전투에 이르기까지 6․25전쟁에서 한국군 작전의 기본 개념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40
또한 한강선 방어전투는 극동군 사령관 맥아더의 전선시찰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미군 지상군 투입을 현실화하는데 기여하였다. 극동군 주한 전방지휘 및 연락단(ADCOM, GHQ)의 처치(John H. Church) 준장이 6월 28일 맥아더 장군에게 미 지상군 투입의 필요성을 개진하기도 했지만, 6월 29일 단행한 맥아더의 한강선 직접 시찰은 미 지상군 투입 결정을 담은 미 합참과 국무부의 공식 메시지가 하달되기 전에 이루어졌다. 맥아더는 시찰 후 도쿄로 돌아가 “현재의 선을 확보할 유일한 보장과 상실된 지역을 후에 회복할 능력은 미국의 지상군 전투부대를 한국의 전투지역에 투입하는데 달려있다”는 내용을 담은 보고서를 워싱턴으로 발송하였다. 결국 맥아더의 시찰은 미국이 한국전쟁에 최종적이고도 완전하게 개입하도록 선도하는 결과를 가져왔다.41
마지막으로 한강선 방어전투는 실제로 미 지상군 참전을 위한 시간과 공간을 확보한 측면이 있었다. 6․25전쟁에 최초로 참전한 미지상군 부대는 7월 1일 부산에 도착한 일명 ‘스미스 특수임무부대’ 였다. 미24사단 21연대 1대대장 스미스(Charles B. Smith) 중령이 지휘한 1개 대대 병력 406명은 7월 1일 부산에 도착한 뒤 기차로 이동하여 다음날 대전에 도달했고 그날 밤 평택과 안성에 진지를 편성했다.42 이러한 미 지상군의 신속한 전개는 김홍일의 시흥지구 전투사령부가 7월 3일까지 한강 방어선을 사수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7월 4일 시흥사가 수원에서 평택으로 철수한 후부터는 평택-안성선에 전개한 미 지상군이 경부국도를 중심으로 한 서부 전선을 담당하고, 한국군은 그 동쪽에서 동해안까지 전선을 분담하여 공동작전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6․25전쟁에서 한미연합 전선의 형성이라는 하나의 큰 전환점이 마련된 것이다.43
따라서 시흥지구전투사령관을 맡아 6일간의 한강선 방어전투를 성공리에 이끈 김홍일의 역할은 6․25전쟁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는 축차적 투입으로 인한 부대 소모 대신 후퇴하는 병력을 집결시켜 방어전 및 지연전을 펼침으로써 6․25전쟁 초기 한국군의 실책을 만회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미 연합작전을 전개하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김홍일은 미군 지휘관 및 군사고문단과 갈등을 빚기도 했지만 이는 한국군 입장에서는 충분히 이해할 수있는 정당한 성격의 것이었고, 이승만 정권의 군부 통제 차원에서 예편하였으나 6․25전쟁사에서 한국군을 대표할 인물로 새롭게 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 온창일,김광수 外,2010『6․25전쟁 60대 전투』황금알,38쪽.
- 북한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1981『조선전사 제25권-조국해방전쟁사 1』평양 과학백과사전출판사,140쪽(국방군사연구소,1995『한국전쟁 (上)』187쪽에서 재인용)
- 국방군사연구소,1995『한국전쟁 (上)』187~188쪽.
- 온창일,김광수 外,2010,위의 책,38쪽.
- 국방군사연구소,1995,앞의 책,188~189쪽.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2006『6․25전쟁사 3,漢江線防禦와初期遲延作戰』 139쪽.이에 대한 김홍일의 회고는 다음과 같다.“ 시흥원보병학교(始興原步兵學校)에 도착한 것은 28일 하오 3시경이었다.때마침 시흥에는 김백일 대령과 강문봉 대령이 내도하여 퇴산부대 수용에 착수하고 있었으므로 현지에 집결된 장교들로 시흥전투사령부를 조직하고 김종갑 대령을 참모장으로 기타 수명의 장교를 참모로 임명하여 병력수용 사무를 인수하고 김백일 대령과 강문봉 대령은 육군 본부로 귀대시켰다.”(김홍일,1964「나의 六․二五緖戰回顧-漢江防禦作戰에서平澤國軍再編成까지-」『사상계』138호,229쪽)
-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1967『한국전쟁사』제1권,710쪽.(국방군사연구소,1995, 앞의 책,190~191쪽에서 재인용)
- 김홍일,1964,앞의 글,229쪽.
- 국방군사연구소,1995『한국전쟁 (上)』191~192쪽.
- 김홍일은 “28일 야반까지 총수용 병력 3천명으로 6개 대대를 편성 전송하였다. (중략)29일에도 2개 대대 병력을 수용 전송하였으므로 2개 사단의 보병 병력은 거의 충족된 셈”이라고 회고했다.(김홍일,1964,앞의 글,230쪽)
- 국방군사연구소,1995,위의 책,192쪽.
- 온창일,김광수 外,2010『6․25전쟁 60대 전투』황금알,39~40쪽.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2001『소련 군사고문단장 라주바에프의 6․25전쟁 보고서 1』168쪽.
- 김홍일,1964,앞의 글,230쪽.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2001『소련 군사고문단장 라주바에프의 6․25전쟁 보고서 1』180~181쪽.
- 국방군사연구소,1995『한국전쟁 (上)』197~198쪽.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2001,앞의 책,166~168쪽.
-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1990『美國合同參謀本部史:韓國戰爭 (上),78~81쪽.
-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1990『美國合同參謀本部史:韓國戰爭 (上),83~84쪽.
- 강문봉,김홍일,이성가,이한림 外,1965「좌담회,한국동란비화 -6․25를 치른 지휘관들의 회고와 반성」『사상계』147호,179쪽.
-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1990,위의 책,85쪽.
- 육군본부,1963,『유엔군전사,낙동강에서 압록강까지 제1집』25쪽.스트레이트 마이어 장군은 6월 30일 워싱턴에 F-80 164대,F-82 21대,B-29 23대,C-54 21대 및 F-51 64대의 증강을 요청하였다.미 공군 당국으로부터는 F-80은 보낼 수 없으나 우수한 상태인 150대의 F-51로 대치하겠다는 회답이었다.F-51은 F-80 보다 작전반경이 더 크며 연료가 적게 들고 거친 한국비행장에 적합한 전투기였다.(육군본부,1963,『유엔군전사,낙동강에서 압록강까지 제1집』25쪽)
- 「재한 국제연합군 작전보고서 제1호(기간 1950년 6월 25일-7월 15일)」(大韓民國國防部政訓局戰史編纂會,1951『韓國戰亂一年誌』C270쪽)
- 국방군사연구소,1995『한국전쟁 (上)』197~198쪽.
- 온창일,김광수 外,2010『6․25전쟁 60대 전투』황금알,40쪽.
- 김홍일,1964「나의 六․二五緖戰回顧-漢江防禦作戰에서平澤國軍再編成까지-」 『사상계』138호,231쪽.
- 국본일반명령 제2호(1950.7.5);육군본부특명 제9호(국방군사연구소,1995,앞의 책,205쪽에서 재인용)한국군의 군단창설은 1950년 6월 26일 의정부지구전투사령부가 효시이고,29일 시흥지구전투사령부가 두 번째로써 제1군단은 동 사령부의 명칭을 바꾸어 놓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국방군사연구소,1995,위의 책,284쪽)
- 정일권,1986『6․25비록,전쟁과 휴전』 동아일보사,50쪽.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2006『6․25전쟁사 3,한강선 방어와 초기 지연작전』;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2008『6․25전쟁사 4,금강-소백산맥선 지연작전』;국 방부 군사편찬연구소,2008『6․25전쟁사 5,낙동강선 방어작전』
- 양영조,2007「이승만 정부의 군부 통제와 성격」『한국전쟁과 동북아 국가정책』선 인,154쪽.
- “TheAmbassadorinKorea(Muccio)totheSecretaryofState”,September8, 1950,FRUS1950Vol.VII,문서번호 498.
- 정일권,1996『정일권 회고록』고려서적,201~204쪽.
- 양영조,2007,앞의 글,152~154쪽.
- 프란체스카 도너 리,2010『6․25와 이승만』기파랑,119~120쪽.
- 프란체스카 도너 리,2010,위의 책,122쪽.
- 강문봉, 김홍일, 이성가, 이한림 外,1965「좌담회,한국동란비화 -6․25를 치른 지휘관들의 회고와 반성」『사상계』147호,180~181쪽.
- 강문봉, 김홍일, 이성가, 이한림 外,1965,위의 글,182쪽.
- 한편 2장에서 언급했던 전제현의 회고에 따르면, 김홍일은 1군단 사령부 천막에서 신성모 국방장관과 김석원 장군이 “아무래도 일본 군대를 데려와야 되지 않겠습니까,그러니까 그래야 되겠다고”하는 대화를 우연히 듣게 되어 무슨 얘길 하느냐고 호통을 쳤고,그 얼마 후 육군종합학교 교장으로 갔고 결국 군복을 벗었다고 회고했다고 한다.(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현대한국구술사연구사 업단,「전제현 장군 3차 구술면담」2014.6.9.)
- 김홍일,1964,앞의 글,229쪽.
- 大韓民國國防部政訓局戰史編纂會,1951『韓國戰亂一年誌』,A35쪽.
-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1990『美國合同參謀本部史:韓國戰爭 (上),84~95쪽.
- 육군본부,1963,『유엔군전사,낙동강에서 압록강까지 제1집』29~32쪽;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1990『美國合同參謀本部史:韓國戰爭 (上),103쪽.
- 국방군사연구소,1995『한국전쟁 (上)』203쪽
- [출처] 6․25전쟁 초기 김홍일의 활동과 예편.2|작성자 꽃향기나는 돌
https://blog.naver.com/joseon_500/2212895240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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