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0. 31. 20:19ㆍ병법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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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메이지 유신 시대의 銃器들
작성일: 2012-01-16 14:3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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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메이지 유신 시대의 銃器들
케이블 방송 Channel-J에 일본 메이지 유신 때 큰 활약을 했던 사카모토 료오마의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실제 인물을 충실하게 표현하고자 곱슬머리 분장까지했지만 배역 배우들의 중량감이 실물에 영미치지를 못한다.]
사카모토 료오마
거구의 당당한 체구였지만 근시였다.
일본 야후와 소프트 뱅크의 사장인 손정의씨가 인터뷰 중에 사카모토 료오마의 말을 인용했던 것이 신문에 보도되기도 했을 만큼 일본에서 유명한 인물인 그는 도오사 번(藩)의 하급 무사 출신으로 도쿄 북진일도류 지바 도장에서 수학했던 검술의 달인이다.
그는 개방에 뜻이 있었고 일본 해군의 모태인 해원대의 지도자이기도 하였는데, 그의 최대 공로는 일본 최초의 해군을 창설한 것이나 최초의 주식회사형 무역회사를 설립했던 것도 있지만, 당시 도쿠카와 막부에 반기를 든 조오슈와 사쓰마 두 번(藩)의 연합을 중재해서 성공시킨 것이다.
[두 번(藩)은 연합 전에는 서로 전투를 벌일 만큼 개와 고양이와 같은 사이였다.]
일본에서는 잘 알려진 사카모토의 연인 오료
후에 결혼하여 일본 최초의 신혼 여행을 다녀온다.
사카모토 사후 재혼했지만 곤궁하게 살다가 죽었다.
사카모토는 명치유신 성공 직전 암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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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오슈 지사 다카스키 신사쿠가 선물한 것으로 그가 습격당했던 데라다야 격투에서도 이 권총을 사용했었다고 한다.
평소 사카모토가 사용한 권총의 정체에 대해 궁금했었기에 여기에 소개한다.
사카모토의 S&W 모델 1, 22 short 호신용 권총
유연 화약으로 발사되어 위력은 약했으나 급소에 명중하면 치명적인 상처를 줄 수 있었다.
포켓 피스톨의 원조 격이 되는 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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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남 지역의 조오슈, 사쓰마 두 번이 사카모토의 중재로 연합하여 250년간 계속되었던 도쿠카와 막부를 붕괴시킬 수 있었던 이면에는 신형 총기들이 한 몫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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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1467년 오닌의 난[應仁の亂)이래 100 여년간 60 여개 국가로 나뉘여져 밤낮없는 전쟁을 벌였었다.
전국 말기 나타난 오다 노부나가가 거의 통일을 이루었으나 막바지 시점에 부하 아케치 미쓰히데의 배신으로 죽임을 당하고 그 뒤를 이은 것이 조선을 침략했었던 도요도미 히데요시다.
그러나 도요도미 히데요시가 죽고 난 후 도쿠카와 이에야스가 히데요시의 추종파들과 벌인 일본 최대의 전투인 세키카하라 전투에서 승리하였고, 도쿠카와 막부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도쿠카와 이에야스 편을 동군, 도요도미 히데요시 추종 세력의 편을 서군으로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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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를 근거로 했었던 조오슈의 모리 가문은 서군 편에 섰다가 패전 후 세력이 휠씬 축소되어 당시 일본 변방인 서남쪽으로 쫓겨났다.
사쓰마도 서군에 섰지만 참여의 정도가 적어서 번주 시마스 요시히로가 은퇴하는 정도로 가벼운 처벌을 받았지만 두 번(藩)은 250년 동안 막부로부터 찬밥 취급을 받으며 내심으로는 권토중래[捲土重來]를 꿈꾸었다.
거의 견원지간으로 사이가 좋지 않았던 조오슈와 사쓰마는 사카모토의 중재로 연합[후에 도오사 번도 참여]한 뒤에 본격적인 막부 토벌 운동을 벌였다.
처음에는 천황을 모시고 서양 오랑캐의 침략에 대비하자는 취지로 막부 토벌 운동을 시작하였지만 나중에는 천황을 모시고 국가를 개방하여 실력을 쌓자는 쪽으로 방향이 바뀌었다.
죠오슈나 사쓰마는 막부 시절 서남쪽 변방의 세력들이었지만 세월이 흐르고 보니 남쪽에서 밀려오는 서구의 신문물이 들어오는 입구에 있게된 것인데, 덕분에 일본의 어느 곳보다 일찌기 서구문물에 눈을 뜨고 이를 받아들였다.
사쓰마는 환경을 최대로 활용하여 부[富]를 축적하는 방법을 택했다.
사쓰마의 시마즈 나리아키라라는 명군[名君]은 서양 기술을 대폭 수용하여 서양식 방적 공장까지 건립하는 정도가 되었는데 사쓰마는 1609년 일찌기 유구국(오키나와)을 점령해서 이곳의 산출물인 흑설탕을 일본 전국에 팔아 부를 축적하기 시작했다.
두 번째로 사쓰마 번에 돈을 벌어준 것은 조선의 남원에서 몽땅 잡아 온 도공의 후예들이 만든 도자기 였다. 중국의 도자기 생산 중심지인 경덕진이 태평 천국의 난으로 유린되자 서양의 도자기 무역업자들이 일본으로 발길을 돌려 일본 도자기를 붙티 나게 유럽으로 실어 내간 것이다.
중국 상하이와의 밀무역도 조오슈나 사쓰마의 돈줄이었는데 이런 돈벌이로 사쓰마는 서남[西南]의 웅번[雄藩]이라 불리우게 되었다.
이렇게 돈이 쌓이자 사쓰마는 최신 병기를 사들여서 군사력을 대폭 증강시켰는데 그 중심은 프러시아제(독일제) 후장총[後裝銃, 탄약을 총의 뒤쪽에서 재는 소총]인 게베르[GEWHER] 소총이었다.
당시 일본에 많이 들어와 있던 무기는 전장총[前裝銃, 탄약을 총구(銃口)에 재는 소총]인 프랑스제 미니에 소총으로 사격하는 병사는 총을 세우고 뻣뻣이 선채 총구 안에 실탄을 밀어 넣어야했다. 총탄이 난비하는 전장에서 이렇게 서서 장탄한다는 것은 피탄[被彈]의 위험성을 초래하는 짓이었다.
미니에 라이플로 무장한 프랑스 군
미니에 총은 영국 엔필드나 미국 스프링필드 총의 원조가 되었지만
이로 무장한 프랑스군은 게베르 소총인 DREIYSE 총으로 무장한 프러시아 군대에게 패배하였다.
반면 더 신형인 게베르 소총은 엎드린 자세에서 총신 후미에 장탄[裝彈]이 가능했기 때문에 은폐 엄폐가 가능해 미니에 소총에 비해 절대 우세하였다.
경제력이 좋은 사쓰마는 후장총인 프러시아제(독일제) 게베르 총을 대량으로 수입, 이를 주력화기로 무장했고 게베르 총을 조오슈에 원조하기도 하였다.
프러시아제 게베르 총 - DREYSE NEEDLE GUN
결국 일왕[日王]을 등에 업은 사쓰마, 조오슈 군과 막부군 사이에 무진전쟁이 벌어졌고 막부군은 패배해서 250년 막부 정치의 문을 닫아야 했다.
무진전쟁에서 관군[官軍-실제로는 사쓰마, 조오슈 연합군]은 주로 프러시아제[독일제] 무기를 사용했었고 막부군은 프랑스제와 미국제 무기를 주로 사용했었다.
그런데 패배한 막부군의 무기 중에서 눈에 띄는 것들이 있다.
에노모토가 지휘하는 막부군의 패잔병들이 호카이도의 하코다테로 물러나 저항할 때의 전투 상황 기록을 보니 도쿠카와 병사가 미제 스펜서 카빈을 사용하고 있었다.
스펜서 연발총 - 5발 연발.
스펜서 카빈은 남북 전쟁에서 출현한 연발총으로 사거리와 화력은 약했지만 연발 사격력으로 단점을 극복했던 총기였다.
이 스펜서 카빈은 일본에서 무진전쟁으로 왕정이 복고되고 나서 불과 몇 년 뒤인 1871년 신미양요 때 조선 강화도 광성보 전투에 나타난다.
또 다른 무기도 있다.
반 독립적 위치에서 관군에 저항하던 나가오카 번이 개틀링 기관총으로 관군을 공격했었는데[나중에 조오슈 군벌의 우두머리가 된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이 기관총 사격에 부상을 입기도 했었다.] 이 개틀링 기관총은 뒤늦게 조선군에 수입되어 1894년 공주 우금치에서 동학군에게 큰 피해를 주고 대패하게 하였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중에 서구 문물을 대거 받아들였으며 그 와중에 자주 국방을 위한 주요 무기의 국산화에 힘을 쏟았다.
최초의 일본 국산총인 무라다 소총은 당시의 최신이었던 독일의 모젤 총을 카피한 것이다.
풍운 급박한 아시아의 정세 속에서 적어도 일본은 무진전쟁이라는 내전의 단계에서부터 세계 일류의 총기들을 사용했었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 폐쇄적인 은둔 국가로 살아가던 조선이 강화도를 침공했던 프랑스군과 미군들에게 대항 하는 무기로 내세웠던 것은 1592년 일본군이 조선을 침공하면서 휴대했던 화승총에서 단 일보도 발전하지 못한, 화승총 그대로였다.
조선의 포수들과 화승총. 관광용 사진 촬영을 위해 포즈를 취해주고 있다.
그래도 임진왜란 때는 조선도 일본의 신무기에 맞서 비격진천뢰, 화차, 화포 등의 여러 무기들을 사용했었는데 병인양요 이래 프랑스군, 미군과 대결하고자 한 대원군이 내놓은 무기(?) 라는 것이 척화비[斥和碑]였으니 조선이 국제 정세와 과학 기술을 외면한 채 얼마나 깊은 수면에 빠져 들었었는지를 짐작 할 수가 있다.
그후 일본에 농락당했던 역사를 되집어 보면 애석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같은 시기 호전적인 민족인 일본이 본격적이 개국정책 실시 이전 자기들끼리의 내전에서부터 세계의 최첨단 무기를 사용했다는 사실은 조선에게 침략의 미래가 오고 있다는 안 좋은 징조를 예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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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원의 군사세계
일본 근대 사무라이 사상가들, 사이고 다카모리 요시다 쇼인 사카모토 료마
책소개
- 칼을 모시는 사무라이
그리고 메이지유신
일본의 ‘사무라이[侍]’는, 무언가를 ‘모시는’ 사람이라는 의미다. 이에 대해, 대체로 그 ‘모심’의 대상이 主君인 것으로 이해한다. 그런데 실상 사무라이가 모시는 대상은 칼이다. 칼이 곧 주군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人類史에서, 古代로부터 근대에 이르는 칼의 시대에, 칼은 곧 권력을 의미한다. - 전통적으로 일본사회에서, 칼은 상징적인 권력이면서, 동시에 실제적인 권력이기도 하다. 그래서 칼을 거부하거나 저항하면, 칼로써 베어져 죽임을 당하게 된다. 사무라이는, 그러한 칼 자체를 神처럼 모셨던 것이다. 그러다가 근대 이후, 銃의 시대가 되면서, 칼은 권력을 상실했고, 사무라이도 精神性도 다른 모습으로 변모케 된다.
따라서 尙武精神의 상징이었던 칼은, 物質精神의 상징인 총으로 대체된다. 칼이 主君을 의미했다면, 이제 총은 資本을 의미한다. 물론 근대 이전 中世에, 이미 일본은 서구 제국주의에 의한 開港으로써 총의 시대가 시작되었고, 예컨대, 일본의 근대를 이끈 ‘메이지유신’ 시기의 ‘세이난 전쟁’은, 철저히 총과 대포를 이용한 전쟁이었다.
그러나 메이지유신 시기까지, 일본사회는 분명 칼을 모시는 사무라이들이 주도하는 사회였다. 그러다가 메이지유신 이후, 기존의 사무라이들은 ‘생존의 이득’을 목적하며 정치적 자본가로서의 변모를 꾀했고, 대부분 근대적 자본가로서 거듭나게 된다. 이것이 일본사회에서, ‘칼과 사무라이’의 시대가 ‘총과 자본가’의 시대로 변화하는 樣相이다.
메이지유신을 주제로, 대표적인 사무라이 사상가들을 살피면서, 필자로서는 여전히 한국사회를 주도하고 있는 植民史觀이라는 幽靈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非但, 식민사관만이 아니라 東北工程이나 半島史觀의 문제도 그러하다. 흔히, 이러한 문제들은 ‘역사적 史實’의 문제이므로, 역사학의 所管인 것으로 판단하기 쉽다. - 그러나 역사라는 것은, 역사적 문제이면서 동시에 정치적 문제임을 인식해야 한다. 어떠한 ‘역사적 事實’이 歷史書에 史實로서 기술되어, 하나의 歷史가 정립되는 과정은, 지극히 정치적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조선왕조의 半島史觀’, ‘日帝의 植民史觀’, ‘중국의 東北工程’ 등에 의한 역사는, ‘역사를 위한 역사’가 아니라, ‘정치를 위한 역사’임은 周知의 사실이다.
흔히, ‘조선왕조의 반도사관’을 ‘日帝 식민사관’의 일종이라고 인식한다. 그러나 ‘요동 정벌’ 명령에 抗命하며, ‘위화도 회군’이라는 정치적 결정을 하고,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를 선언할 때 작동한 ‘史觀’이야말로, ‘반도사관’이다. 본래 우리 민족의 영토이던 ‘요동’을 포기하고서, 우리 영토를 ‘압록강’ 이남의 ‘韓半島’로 국한시켰기 때문이다. - ‘일제’는 그러한 ‘조선왕조’의 전통적인 ‘역사관’에, ‘반도사관’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따라서 ‘조선왕조의 반도사관’과 ‘식민사관 중의 반도사관’은 뭉뚱그려질 수 없는 별개의 개념이므로, 명확히 분별하여 살피는 것이 타당하다.
‘식민사관’은 19세기 말 도쿄제국대학에서 시작되었는데, ‘神功皇后’의 新羅征服說과 任那日本府說, 滿鮮史論 등을 내세우다가, 20세기 초부터 朝鮮侵略이 본격화되자 日鮮同祖論, 他律性論, 停滯性論, 黨派性論 등을 제시하고 있다.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 ‘이마니시 류(今西龍)’, 李丙燾 등이 대표자들이다.
-하략-
저자소개
- 저자 : 탁양현
현재에 이르러서는 親中主義, 親美主義, 親日主義, 從北主義 등의 문제도 얽히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知彼知己의 認識으로서 상대를 명확히 파악하지 못하면, 이내 그릇된 결정을 하게 되기 십상이다. 예컨대, 조선왕조 말기에 이루어졌던 일련의 정치적 결정들은, 그러한 그릇됨을 여실히 드러낸다. - 그런데 단지 개인의 결정이라면, 그 反響이 微微할 수 있지만, 공동체의 집단적 결정이라면, 국가공동체 자체가 소멸될 수도 있다. 그러니 東西古今을 막론하고서 知彼知己의 자세는, 삶의 태도로서 참으로 결정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현대사회에서도, 현재 대한민국의 입장에서, 미국이나 중국의 속내에 대해 명확히 알지 못한다면, 자칫 그릇된 결정을 내릴 수 있다. 그랬다가는 조선왕조 말기의 前轍을 밟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나아가 북한이나 일본에 대한 理解 역시 그러하다.
특히 북한은, 남한에게 있어 가장 직접적인 분석의 대상이다. 그러나 북한에 대한 온갖 이성적 논리와 분석들이 넘쳐나며, 갖은 감성적 조작과 왜곡들이, 쉼없이 ‘生存의 利得’이라는 혼돈 속으로 이끈다. 그러나 참으로 자명한 것은, 현재의 대한민국을 존속시켜 남북통일을 실현시키며, 故土 滿洲를 수복하는 발전으로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 그러기 위해서는 북한, 미국, 중국, 일본 등을 더욱 명확히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그릇된 결정을 피할 수 있다. 일본 근대의 사무라이 사상가들을 살피는 까닭 역시 그러하다. 그러니 마음 같아서는, 저 먼 古代로부터 소급하여 韓中日의 관계를 고찰하고 싶지만, 필자가 그러한 작업이 실제적으로 실행될 수 있을지는, 다소 의문이다.
하지만 그저 무관심할 수 없으므로, 우선 현대사회에 결정적 인과관계를 가지는, 일본 근대사회를 우선 살피고자 한다. 일본 근대사회를 대변하는 역사적 사건은, 두말 할 나위 없이 ‘메이지유신’이다. 그런 메이지유신을 살핌에 있어, 당시 메이지유신을 주도했던 사무라이 사상가들에 대한 고찰은 필수적이다. - 특히 ‘사이고 다카모리’, ‘요시다 쇼인’, ‘사카모토 료마’는, 當時는 물론 현재까지도 일본사회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갖는 인물들이다. 물론 그 외에도 많은 캐릭터들이 존재하므로, 여건이 허락한다면 향후 고찰해 나갈 것이다. 여하튼 이러한 考察로써, 필자는 물론 독자들 역시 적잖은 공부가 될 것이다.
그럼으로써 일본이 단지 배척의 대상일 수만은 없으며, 地政學的으로도 不得已하므로 항상 유념해야만 하는 대상임을 인식케 될 것이다. 韓民族의 東夷文明이 오랑캐의 문명이 아니듯이, 현대의 일본인 역시 倭寇쯤으로나 비하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비록 오랜 세월 동아시아 문명이, 부득이하게 중국문명 중심으로 재단되어버렸지만, 이제는 持難한 事大主義의 굴레를 벗고, 우리 민족의 歷史와 政治를 재정립해만 한다. 慘酷한 植民主義의 굴레 역시 그러하다. 그렇지 않다면, 메이지유신 세력에 의해 소멸해버린 末期 朝鮮王朝나, 한갓 그림자에 불과했던 大韓帝國처럼, 우리 민족의 미래는 결코 밝지 못할 것이다.
메이지유신을 작동시켰던 動力으로서 ‘대동아공영권’ 개념에 대해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일본의 입장에서, ‘대동아공영권’과 연합국과의 전쟁 裏面에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바로 中國이라는 市場이었다. 일본은 미국의 인가를 받던 중국 시장에 대해, 일본만의 ‘특별한 관계’를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시장들의 잠재적 富의 풍부함을 인식한 미국은, 일본이 중국으로의 수출에 있어서 우위를 갖게 하는 것을 결코 인정할 수 없었다.
일본 제국은, 중국 시장에서의 일본의 공식적인 이점을 확보하기 위한 시도로서, 처음에는 중국을 침략하고, 나중에는 ‘대동아공영권’을 추진했다. 일본의 외무대신 ‘도고 시게노리’에 따르면, 일본이 ‘대동아공영권’ 건설에 성공한다면, 지도국으로서 동아시아를 통합할 것이고, ‘대동아공영권’이라는 말은, 일본 제국과 동의어가 될 것이었다.
일본 근대 사무라이 사상가들...요시다 쇼인 사카모토 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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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보문고 POD
―무츠 무네미츠(陸奧宗光)를 중심으로―
Ⅱ. 세계관과 외교론
Ⅲ. 외교론과 외교의 한계
Ⅳ. 잠복된 이상주의
Ⅴ 맺음말 : 근대 일본의 한계
Ⅰ. 획기로서의 1890년대
미국은 1898년 쿠바, 하와이, 괌, 필리핀을 비롯한 카리브해와 태평양으로 ‘폭발적인 팽창’에 이어, 이듬해에는 이미 구제국주의에 의하여 실질적 분할이 이루어진 중국에 대하여 ‘문호 개방’ 압력을 넣는 등 동아시아 세계에서도 신제국주의 국가로 등장한 것이다.
즉 메이지 유신 이래 근대국가의 형성의 일단 완성 단계로서의 1890년대와 새로운 국제환경의 조성이라는 안팎의 이중적 구조가 만나는 좌표 위에서 자리를 매김한 다음에 이 시기 일본의 대외-대한 정책의 구체적 분석과 평가를 내리는 것이 합리적이자 논리적 순서라고 생각된다.
- 52 - 國史館論叢 第60輯 *** 蹇 : 쩔둑발이 건
19세기 일본 역사상의 한 인물로서 그의 행동은 크게 보아 첫째 유신 운동, 둘째 反번벌운동, 셋째 정치·외교 활동으로 나누어 볼 수 있으나 기존의 연구는 대부분 외교가로서의 무츠를 대상으로 삼았다.5) 그러나 최근 반체제 정치운동가로서의 무츠에 주목하여 그의 메이지 번벌 정부 내에서의 비주류적 정치 위상을 분석한다든가,6) 메이지시대의 보기드문 자유주의자로서의 정치 사상에 초점을 맞춘 연구7)가 뒤를 잇고, 나아가 그의 이러한 사상적 배경을 바쿠마츠(幕末) 사상사에서 절충파의 하나로 자리매김하는 연구8)도 있다. 최근에는 이러한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蹇蹇錄》을 단순한 외교회고록의 차원을 넘어 다분히 정치적인 문서로 해석하는 연구도 나왔다.9)
Ⅱ. 세계관과 외교론
메이지 유신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무츠의 외교 경력은 자발적이고 또 적극적인 것이었다. 외국인과의 첫 접촉은 무츠가 스물네살 되던 1867년으로 그가 이미 脫藩하여 각지를 방랑 수학하고 사카모토 료오마(坂本龍馬) 휘하의 海援隊에서 활약하고 있을 때, 나가사키(長崎)의 미국 선교사 집에 자청해 들어간 일이다. 당시 ‘하우스 보이’라 불리던 머슴 노릇을 하며 무츠가 노렸던 것은 영어를 배우는 일이었다. 영어란 “지식을 세계에서 찾을 수 있는 기초적 도구”로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교사 부인에게서 배운 영어는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상당한 수준까지 올라 곧 있을 영국인과의 대담도 가능할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10)
4) 나카츠카 아키라(中塚明), 《『蹇蹇錄』の世界》(みすず, 1992) 2-7; 탈고와 출판에 관한 상세한 논의가 있다.
5) 대표적인 연구로 시노부 세이사부로오(信夫淸三郞), 《陸奧外交》(東京: 叢文閣, 1935) 등.
6) Tek-jeng Lie, “Mutsu Munemitsu: 1844∼1897, Portrait of a Machiavelli,” Ph. D. Dissertation(Cambridge: Harvard Univ. Press, 1962).
7) 하기하라 노부토시(萩原延壽), 〈日本人の記錄: 陸奧宗光〉(〈毎日新聞〉1967년 6월∼1968년 12월 연재) 등 일련의 연구.
8) Young-jae Park, “Ideology and Action in Mutsu Munemitsu,” Ph. D. Dissertation(Univ. of Chicago, 1982).
아직도 바쿠후(幕府) 잔당과의 전투가 진행되고 있던 1867년 12월, 무츠는 오오사카(大坂)로 가서 영국 영사관의 통역이었던 어네스트 사토우(Sir Ernest Satow: 후일 주일공사)를 방문하였다. 마지막 쇼오군 토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가 대권을 반납(大政奉還)한 직후, 신정부의 성립을 눈앞에 두고 있는 시점이었다. 아무런 공식 직함도 없었고 상부의 지시에 따른 것도 아니었다. 무츠에 따르면 “홀로 천하의 정세를 살핀 바” 있었기 때문이었다.11) 한사람의 탈번 로오닌(浪人) 志士라는 개인으로서 사토우를 단독 면담한 용건은 메이지 신정부의 대외 정책의 기조에 관한 조언을 청취하는 일이었다. 사토우를 통하여 영국 공사 파악스(Sir Harry Smith Parkes)도 만났다. 문답의 핵심은 페리내항 이래 종래 바쿠후가 취해왔던 개국이라는 정책을 새정부도 이어받을 것인가, 아니면 바쿠후를 타도 대상으로 삼았던 유신주의자들과 쿄오토오(京都) 朝廷의 정서에 부합되는 쇄국 정책으로 돌아갈 것인가의 여부였다.
10) 오카자키 히사히코(岡崎久彥), 《陸奧宗光》上(東京: PHP, 1987) p.91.
11) 위의 책 p.91.
12) 하기하라, 앞의 논문 pp.122∼124.
1868년 미완성인 채 간행된 《藩論》은 무츠가 1867년 11월 이전에, 아마 토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가 大政奉還을 실행에 옮긴 10월 이전, 쓴 時論이다. 먼저 유신·왕정복고에 뒤따르는 일반적인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러한 정세 변화의 와중에서
일어날 수 있는 여러가지 가능성을 예측하면서 뜻있는 인사들이 취해야 할 자세를 구체적으로 논한 글이다. 우선 바쿠마츠(幕末) 시기의 제 정치 세력에 대한 동향을 분석한 무츠는 정세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려는 진보적 세력과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리려는” 반동의 세력으로 나누었다. 자신이 현재 살고 있는 “역사와 시세의 의미”를 감지하는 진보적인 인사가 근래에 보기드문 현실을 개탄하고, 전자의 실례를 일본의 역사 속에서 들었다. 남북조시대의 무장 쿠스노키 마사시게(楠木正成: ?∼1336)와 마지막 쇼오군 토쿠가와 요시노부였다. 천황파의 쿠스노키는 대세가 아시카가(足利) 바쿠후 세력으로 기울고 있는 흐름을 역행할 수 없다는 마지막 판단 아래 자결을 택했고, 요시노부 역시 유신의 대세를 감지하고는 대권을 천황에게 반납하는 결단을 내린 탓이었다. 무츠는 현실적 체제 변화와 과거의 충성과의 사이에서 대세에의 순응과 이에 따르는 적극적인 행동을 현실적 덕목으로 강조하였던 것이다.14)
14) 《藩論》의 내용과 관련된 저자의 확인과 출판에 대하여는 Y. Park, Ibid, pp.31∼36 참조.
15) 다테에 관하여는 최근 전저가 나와있다. 야마모토 시치헤이(山本七平), 《日本人とは何か》
둘째, 그러한 역사적 배경이 잔존하고 있는 한반도에 영국과 러시아 등 근대적 제국주의 열강의 이익이 이미 상륙해 있는 엄연한 ‘현실’이 가로놓여 있었다. 게다가 당시 일본의 군사력은 전쟁을 도발하는 측으로서는 결코 청군을 압도할 수 있는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였던 것이 객관적인 평가였다. 중국의 국토와 인구나 역사의 크기는 둘째치고 同治중흥 이래 길러온 양무 사업의 외형적 성과도 괄목할만 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조선에서 우위를 확보하겠다는 일본의 전쟁 목표는 그만큼 승률 여기서 무츠의 청일전쟁 외교를 모두 구체적으로 다룰 여유는 없다. 요약하자면 국제법상의 격식에 아직도 미숙한 조선과 청에 대하여는 국제법상의 상례 등에 근거한 문서상의 시비, 또 열강에 대하여는 세력균형을 이용한 상호 견제와 비밀주의 등, 전력을 다한 외교술로써 ‘조선의 독립’ 보장 뿐 아니라 랴오뚱(遼東)반도의 할양까지 규정하는 ‘시모노세키(下關)조약’의 조인에 성공하게 된다.28) 그러나 영국·독일·프랑스·러시아 등 열강간의 당시의 용어로써 이른바 ‘權衡(balance of power)’29)을 이용한 ‘術’의 외교의 성공은 ‘삼국간섭’이라는 좌절로 귀결된다. 우선 강화의 중재자를 러시아·영국을 배제하고 미국을 내세운 점이다. 러시아 둘째, 일본이 구상하고 있던 강화의 조건에는 중국의 영토 할양이 포함되어 있었다. 육군은 자신들의 전투로 차지한 랴오뚱 지역을, 해군은 타이완(臺灣)을 할양받을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물론 일본제국 팽창의 교두보로써 장래에 이용할 계획이 깔려 있었다.31) 그러나 1890년대란 제국주의 열강 어느 누구도 아편전쟁 이래 아직은 중국에서의 영토할양은 삼가거나 못하고 있을 때였다. 중재자는 어차피 쌍방의 강화 조건을 알 수밖에 없을 터이니, 구미 강국 중에서 미국만이 일본이 다룰 수 있는 순수한 의미에서의 중재자(go-between)의 역할을 수행할 것으로 기대되었다. 예상대로 강화교섭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셋째, 강화를 위한 일본의 조건은 그런 만큼 대외적으로 철저한 보안을 지킬 수 밖에 없었다. 강화회담을 열 때까지 일본이 요구하게 될 강화 조건이 새나가지 말아야 하며 더욱이 협상 과정에서는 영토 할양이라는 중대한 조건을 뻬이징 정부와 일일이 협의해야 할 수준의 말 그대로의 ‘사절’과는 협상을 성공적으로 끌어 나갈 수 없는 일이었다. 때문에 일본은 이토오 히로부미를 협상 대표로 내세우고 중국에 대해서는 리홍장(李鴻章)을 보내도록 요구하였다. 미국의 노력으로 이 역시 성공하였다.32) 그러나 이렇듯 철저한 외교적 전술에도 허점이 있어 랴오뚱반도와 타이완의 할양조건이 누설되고 러시아·프랑스·독일의 삼국은 연합하여 공동 무력 사용 불사의 태도로 일본의 욕구를 저지하였다. ‘시모노세키 조약’의 성공적인 조인 뒤 불과 일주일만의 ‘삼국간섭’이었다. 일본은 ‘삼국’의 무력에 저항할 수는 없었으며, 미국도 지금까지의 일본에 대한 적극적 지원을 떠나, ‘국외중립’을 표방하면서 돌아섰다.33) 랴오뚱반도의 영토 할양은 수포로 돌아갔고 이후 ‘굴욕외교’를 비난하며 내각 사퇴까지 요구하는 여론이 주도하게 되는 일본은, ‘와신상담’, ‘절치부심’ 등 러일전쟁(1904〜1905)까지 10년간의 구호가 드러내듯, 러시아에 대한 복수의 칼날을 갈며 때 - 61 - 토사(土佐) 출신을 주축으로 한 릿시샤(立志社)가 꾸민 이 쿠데타 음모는 정치적으로는 사츠마-쵸오슈우 藩閥전횡에 대한 지역적 반발에서, 이념적으로는 의회 기구를 설립하자는 초기의 ‘자유민권론’적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불발 쿠데타였지만 무츠는 적극적인 또 과격한 음모가였다. 동지들이 작성한 암살자 명단을 죽 훑어본 무츠는 명단에 “가장 중요한 인물이 빠졌다”며 첫번 순서에 추가한 이름은 이토오 히로부미였다. 이토오는 메이지 신정부 안에서 무츠를 물심 양면으로 도와주던, 무츠에게는 대부나 마찬가지의 존재였다.34) 토사 출신도 아닌 무츠가 왜 한층 더 강경하고 적극적이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무츠는 쿠데타의 다른 주모자들과는 달리 동기 자체가 지역적인 것보다 이념적인 것이었고, 그가 품은 이념이란 것도 동시대의 수준에 비추어 본다면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과격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음모가 사전에 발각, 체포되어 4년여의 형기를 마친 무츠는 이토오의 배려로 구미여행길에 오른다. 미국과 영국을 돌아 잠시 시찰한 뒤 비인(Wien)에서 폰 슈타인(Lorenz von Stein)의 국가학 강의를 듣게하는 것이 프로이센식 헌법을 구상하고 있던 이토오가 주선한 이 여행의 주목적이었다. 그러나 무츠의 속셈은 딴 곳에 있었다. 런던에 장기간 체류하며 예정에 없이 영국 의회를 방청하는가 하면, 케임브리지대학에 출강하고 있던 법학자 워래커(Thomas Waraker)를 찾아가 영국헌법학 강의를 청한다. 수주간의 강의는 영국식의 입헌군주제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고 무츠가 이 주제에 얼마나 열중하였던가는 현존하는 강의 노트가 실증해 준다. 영국 입헌군주제의 역사로부터 현황과 문제점 그리고 무츠의 질문과 워래커의 대답으로 이루어진 이 노트는 한마디로 배우고자 하는 무츠의 열의와 워래커의 진지한 응답이 농축되어 있다.35) 워래커의 강의가 끝난 뒤 무츠의 대담한 질문이 있었다. 질문의 핵심은 실권이 없는 영국의 국왕처럼 일본도 실권없는 천황이, 그리고 그 천황 아래 의회와 국민에게 책임을 지는 ‘내각책임제’가 가능하겠는가였다. 1880년대 일본 정치인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가설이었을 뿐 아니라, 후세의 일부 사가들로부터 천황제 절대주의가 막 형성되기 시작하였다는 메이지 20년대의 일본의 政體를 밑바닥부터 뒤흔드는 발상이었다. 왜냐하면 무츠가 상정한 천황이란 수년 뒤 메이지 헌법이 규정하게 되는 천황과는 동떨어진, 마치 1945년 패전후 제정된 ‘맥아더헌법’이라고 불리우는 현행 신헌법이 규정한 천황에 더 가까운 존재였다.36) 일본의 사정에 정통하지 못한 워래커로서는 물론 명쾌한 대답을 주기 어려운 질문이었지만 영국의 경우 2세기나 걸린 일을 일본같은 나라가 ‘바로(at once)’ 채택하기는 어렵지 않겠느냐는 대답이었다.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헌법과 정치체제에 관련된 원론적인 수준에서의 무츠의 질문은 계속되었다. 메이지 일본의 政體에 관한 이 정도의 대담한 구상은 논의한 사실마저도 공개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과연 무츠는 이를 감추었다. 런던에서의 이 장기체류와 ‘불온한’ 수강 사실을 일체 비밀에 부치고, 처 료오코(亮子)에게만 런던 도중하차와 체제 사실을 알리기는 하였지만 구체적인 설명없이 “중요한 일로” 런던에 좀 더 체제하겠노라고만 전하였을 뿐이었다.37) 우리는 이 런던수강을 포함한 구미 여행길 이후의 무츠의 정치행각에 대해 그의 이념과 결부된 구체적 행장을 알지 못한다. 정치인으로서 그의 공직 생활만 따져보면 귀국 이래 이토오의 배려에 따라 곧 정부의 요직을 맡기 시작하여 1890년대의 전쟁외교와 조약개정외교를 치루어내는 외상직까지 거치게 된다. 다만 한 가지 우리의 흥미를 끄는 일은 무츠의 정치적 유산은 그의 ‘코분(子分)’이었던 하라 케이(原敬)로 계승된다는 사실이다. 다 알다시피 ‘삼국간섭’은 시모노세키조약에서 랴오뚱반도를 일본이 할양받음으로써 위협받게 될 열강간의 동아시아에서의 ‘권형’을 유지하려는 러시아·독일·프랑스의 제동이었다. 일본의 비현실적인 과욕임에 틀림없었지만 이는 해군과 육군의 타이완과 랴오뚱반도의 동시 할양 요구를 전쟁·강화 외교의 정책·집행 당국자가 수용한 결과였으며, 청일간의 강화 외교 교섭이란 바로 이의 실현을 목표로 한 청과 열강에 대한 공들인 외교‘술’의 과정이었다. ‘삼국간섭’으로 인한 랴오뚱의 포기·반환에 대해 무츠는 “국내의 형세와 국외의 형세를 조화시킬 방법이 없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그러나 랴오뚱 할양을 규정한 시모노세키조약 자체가 “외교란 나아갈 때에는 나아갈 데까지 나아가고 멈추어야할 데에서는 멈추어야 하는 것”이라는 무츠 자신의 원칙40)과는 정면으로 어긋나는 것이었다. ‘면도날 大臣’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의 예리한 현실감각을 지녔던 무츠의 원칙대로라면 개정 당시의 목표였던 조선에 대한 지배권의 확립에까지 ‘나아가고’, 비현실적인 목표인 중국에 대한 영토 할양 요구 이전에 ‘멈추어야’ 옳았던 것이다. 그러나 무츠는 자신의 원칙과 상충되는 무리한 목표의 달성을 위한 외교‘술’을 폈던 것이다. Ⅴ. 맺음말 : 근대 일본의 한계 지금까지 무츠가 일본 근대 외교의 창시자이며 본격적인 국제주의 팽창시기인 1890년대의 외교의 담당자라는 사실을 전제하고 그의 외교론을 사상의 뼈대에서부터 추적해 보았다. 지극히 현실주의자로 알려진 무츠의 청일전쟁, 강화 외교가 넘지말아야 할 선을 넘게 만든 것은 어찌보면, 마치 ‘책임내각제’로 향한 그의 감추어진 정치적 의지처럼, 바깥 세계에 공개적으로 드러낼 수 없었던 대륙에의 팽창이라는 하나의 이상처럼 품은 자신의 의지가 작용한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이를 뒷받침하는 무츠 개인에 대한 정의도 적지 않다. 첫째, 우리가 위에서 살펴본 그의 사상적 복합성 또는 이중성 말고도 무츠의 개성에 관한 평가를 들 수 있다. 바쿠마츠―유신 운동 시기 카이엔타이(海援隊)의 동료들은 무츠를 아예 ‘거짓말쟁이 코지로오(小二郞: 무네미츠 이전의 아명)’라는 별명으로 불렀다.41) 또 정치인으로서의 무츠를 마키아벨리로 규정한 연구도 있다.42) 모두가 무츠의 독특한 개성을 새삼 강조해 주는 근거로써 위의 가설을 입증할만한 근거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그의 개성에 대한 고찰에 덧붙여 ‘무츠외교(陸奧外交)’를 ‘二重外交’, ‘비밀외교’와 동일시한 외교사적 연구도 있다.43) 그러나 우리가 1890년대, 특히 ‘삼국간섭’을 맞아 파탄되는 무츠의 청일전쟁·강화외교를 곰곰이 검토해 보면 이는 어떤 의미에서 무츠 개인 사업의 파탄이라기보다는 메이지 일본의 한계를 의미하는 일이기도 한다. 육·해군간의 이해와 전략의 상충이라든가 대청 강경 여론 등 국내 정치의 현실이 외상 무츠 뿐 아니라, 수상 이토오 등 대외정책 결정자들로 하여금 이들의 비현실적 욕구를 현실화시킬 수 있다는 비현실적 판단에 이르게 하였다고 한다면, 문제의 소재는 “외교란 국내정치의 연장이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상식적 외교론의 숙명적인 본질 문제로 귀착될 수밖에 없다. 무츠 자신도 “외교보다 더욱 어려웠던 일은 내교”였다고 실토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청일전쟁은 일본이라는 나라가 한덩어리가 되어 팽창주의의 길로 나아간 획기라는 지적을 음미할 필요가 있다.44) 이른바 ‘국론통일’이라는 것이다. 메이지 시대의 중반까지만 하여도 ‘국권론’과 ‘민권론’으로, 또는 ‘현실론’과 ‘이상론’으로 대외관을 나누어 볼 수 있는 해석상의 소지를 남기면서 진행되던 역사가 하나로 묶였다(fascio)는 것을 의미한다. 풀어서 말하자면 일본의 1890년대 후반은 광적인 징고이스트들 뿐 아니라 이른바 ‘현실주의자’ 외상 무츠, 그리고 그가 소속된 내각·정부를 비롯한 나라 전체가 대륙 팽창이라는 비정상적·비현실적 열기 속으로 빠져들어 간 채 20세기를 맞이하는 비극적 출발점이라는 점이다. 그 국가적 계기는 물론 무츠의 말대로 멈추어야할 곳에 멈추지 못한 채, 어쩌면 멈추지 아니한 채 국제 분쟁을 무력과 외교의 ‘술’로써 해결하려한 데에서 찾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는 위에서 살펴본 대로 무츠의 개인적 사상과 행동의 복합적 구성 요소에서 보이는 것처럼 ‘이상론’과 ‘현실론’으로 나누어 보는 양분법·이분법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메이지 일본의, 또 그 팽창주의의 실체일지 모른다. 이 글의 모두에서 논한대로 무츠는 근대 일본 외교의 창시자로서 외무성의 유일한 상징이다. 나아가 일본의 정통 외교계는 20세기 전반 일본의 본격적인 대륙 침략 때에도 ‘무츠외교 대망론’을 펼쳤을 뿐 아니라, 패전 이후의 외교도 1890년대 외교와의 단절이 아닌 연속선상에서 파악하고 있다.45) 그렇다면 위에서 살펴본 무츠외교의 실체는 어쩌면 근대 일본 외교의 가장 중요한 전통을 이루어 준 것으로 볼 수 밖에 없다. 1945년을 계기로 이후의 현대 일본 외교가 이 전통에서 과연 질적인 변화를 했는지 아니면 발전적인 계승만하였는지의 여부는 앞으로의 중요한 연구 과제의 하나로 남겨 둔다. 왜냐면 이 문제는 일본의 근대사와 현대사를 나누어야 할지 아니면 소시기로만 구분하여야 할지를 가름하는 시대구분의 잣대를 설정하는 문제와도 밀접히 연관되는 과제이기 때문이다.
상고시대로부터 자신이 속한 시대까지 다테는 첫째를 骨의 代, 둘째를 職의 代, 셋째를 名의 代로 일본의 역사를 세개의 시대로 나누었던 것이다. 이것을 근대적 구분의 잣대로 간단히 대입해 보자면 첫째 시대 골의 대는 氏姓사회였던 일본의 상고 시대를, 둘째 시대 직의 대는 대륙으로부터 차용한 律令제도가 지배하던 고대 사회를, 셋째 명의 대는 분권적 중세·근세를 아우른 封建시대에 해당한다 할 것이다. 이 근세 이전 각 시대의 특성을 나름대로의 삼분법으로 나누었다는 사실 자체는 일본 근대사학의 두드러진 업적의 하나로 평가받을 만하다.
20) 陸奧宗光伯七十周年記念會편, 《陸奧宗光伯: 小傳, 年報, 附錄文書》(東京) p.123.
21) 朴英宰, 〈近代日本의 韓國認識〉(歷史學會편,《日本의 侵略政策史硏究》, 一潮閣, 1984)
무츠외교의 총결산이라는 청일전쟁의 전쟁 외교와 강화 외교에는 위에서 살펴본 그의 인식이 분명히 투영되고 있을 것이다. 우선 우리의 주목을 끄는 사실은 청일전쟁 중 대한·대청 외교 교섭을 구체적으로 기록한 무츠의 《蹇蹇錄》에 나타난 외교 담당자 무츠와 국외자들 사이에 보였던 일종의 팽창논쟁에 대한 무츠의 태도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무츠의 회고록은 개전 직후부터 조야에서 맹렬히 일고 있던 조선과 중국에 대한 과도한 팽창 욕구에 대한 강한 비판으로 가득차 있다.
론의 주창자였고 토오쿄오 대학의 토야마 마사카즈(外山正一)도 선동적 군가를 작사하고 있
었다(우노 슌이치 宇野俊一, 《日淸·日露》, 日本の歷史26, 東京: 1976, pp.103∼105).
25) 《蹇蹇錄》(日本の名著35 판본을 사용하였음)(東京: 中央公論, 1978) pp.82∼83.
26) Hilary Conroy, The Japanese Seizure of Korea: A Study of Realism and Idealism in
Inter-national Relations(Univ. of Pennsylvania Press, 1960) 의 소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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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낮았으며 이 전쟁이 세계의 관심을 크게 끈 것도 일본의 야심이 그만큼 모험적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일본의 전쟁 지도부는 전 국력을 쏟을 수밖에 없었고 외교 담당자도 이러한 핸디캡을 ‘외교술’로 최선을 다해 메꿀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예상
밖의 승전보가 외교를 뒷받침하게 되었던 것이다.
는 중재자로서는 말 그대로 중립적 자세로 일을 처리할 가능성이 컸다. 영국은 중재자의 역할을 넘어 간섭자 노릇을 할 가능성이 너무 클 뿐 아니라 일본의 전승의 대가를 ‘합리적으로’ 조정할 가능성이 있었다.
27) Bonnie Bongwan Oh, “Sino-Japanese Rivalry in Korea, 1876∼1885,” in Akira Iriye ed.,
The Chinese and the Japanese: Essays in Political and Cultural Interactions(Princeton
Univ. Press, 1980) pp.37∼57 참조.
28) 이 문제에 대하여는 朴英宰, 〈淸日戰爭과 日本外交: 遼東半島割讓問題를 中心으로〉(《歷
史學報》53·54 합, 1972) pp.151∼176 참조.
29) 《陸奧宗光關係文書》에 〈東亞細亞列國之權衡〉(1890년 5월 15일자) 이란 제하의 외교론이
실려 있다. 무츠의 문서로 짐작되지만 전후 문서의 배열상으로는 오오토리 케이스케(大鳥圭
介)의 것일 가능성이 전혀 없지도 않다. 필자는 이 문서를 당시 국제 정세를 논한 하나의
외교적 담론으로 일단 받아들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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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무츠 자신의 개인적 친분 뿐 아니라 미국의 조야 특히 미국 외교 담당자들과 일본측에 기운 여론에 기대한 바 있었
다.30) 더욱이 영국 등이 중재에 나서겠다고 의지를 보였을 때 일본은 강화의 조건을 아직 구상 중에 있었다.
를 기다리는 태세를 가다듬게 된다. 랴오뚱의 반환은 무츠가 일찍이 〈左氏辭令一班〉에서 규정한 열국간의 ‘禮文修辭之術’로서의 외교, 현실주의적 정세 판단에 입각한 ‘術의 외교’의 파탄이었다. 개인적으로는 무츠외교의 파탄이었고, 당시의 여론에 따른다면 외무성의 대실패작이었고, 또 1890년대 후반 이토오가 이끌던 일본 정부의 실책이기도 하였다. 이 외교적 실패에 대하여는 물론 일본의 과도한 요구가 자초한 것이라는 해석이 자연스럽지만, 우리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각도를 조금 달리하여 조명해 볼 여지가 있다.
30) Jeffrey Dowart, The Pigtail War: American Involvement in the Sino-Japanese War, 1894
∼1895(Amherst:Univ. of Mass. Press, 1975).
31) 朴英宰, 앞의 논문(1972) 참조.
32) 朴英宰, 〈淸日講和와 美國〉(《歷史學報》59, 1973) pp.53∼66 참조.
33) 자세한 경위에 대하여는 朴英宰, 위의 논문(1973) 참조.
Ⅳ. 잠복된 이상주의
메이지 신정부 안에서 정치인 무츠의 행각에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그러나 빠뜨릴 수 없는 이상주의자로서의 비현실적 면모가 있다. ‘정한론’의 여파로 일어난 내란 ‘사츠마의 반란(西南の役: 1877)’을 틈탄 쿠데타 음모에 무츠가 적극 가담한 일이다. 당시 무츠는 원로원의 간사직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각 지역의 반정부 음모 가담자들간의 연락을 맡았다. 무츠 자신 이 일을 훗날 “일대 厄難이자 집안의 역사상 씻을 수 없는 오점”으로 기록한 사건이었다.
34) 코마츠 미도리(小松綠), 《明治外交秘話》(東京: 原書房, 1966) 및 오카자키, 앞의 책 上
(1987) pp.252∼25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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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이토오의 주문에 따라 수강한 비인에서의 폰 슈타인의 노트는 불성실하기 짝이 없다. 질문은 없다시피하고 심지어는 필체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무성의가 그대로 드러나는 난필이다. 자발적 학구열은 찾아볼 수 없는 무미건조한 수강노트일
뿐이다. 두 노트는 외관과 형상의 비교 차원을 넘어 1880년대 중반 무츠의 정치 이념의 지향점을 뚜렷이 보여주는 증거물이다.
35) Mutsu Munemitsu Notebook; 일본 카나가와(神奈川)縣立도서관 소장, 필사본으로 현재 일본
어로 번역이 진행 중이다. 필자는 이를 영어 원문대로 공간할 예정이다.
36) 하기하라, 〈陸奧宗光紀行〉(《蹇蹇錄》, 中央公論, 日本の名著35 판본) pp.25∼26.
37) 이에 관하여는 하기하라, 위의 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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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려진 대로 이른바 ‘타이쇼오(大正) 데모크라시’ 정당정치의 주인공인 하라는 무츠가 옥중에서 벤담(Jeremy Bentham)의 대표적 저술(An Introduction to the Principles of Morals and Legislation)을 번역할 때 호시 토오루(星亨)와 함께 옥중을 드나들며 영어가 짧은 무츠를 도와준 적도 있다.38) 하라가 주도하게 되는 정당정치가 무츠가 갈망하던 책임내각제와는 거리가 없을 수 없을 터이다. 그러나 잠복해있던 무츠의 급진적 천황관과 하라의 정당정치와의 연결고리는 우리가 메이지-타이 쇼오의 정치사와 정치사상의 본질적인 문제에 접근할 때 시사하는 바 적지 않으리라 믿지만 앞으로의 연구과제로 남겨 둔다.39) 요컨대 메이지 정치사의 일반적 언설을 부정할 정도의 이같은 과격한 이상주의가 무츠의 정신세계에 잠복해 있었고 이것은 그가 도맡을 외교 정책에도 하나의 비현실적 요소로 잠복해 있을 가능성을 부정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38) 벤담의 저술을 무츠가 번역하게 된 동기나 그 사상적 배경에 대하여는 Park, Young-jae, 앞의 논문(1982) Ch. 4 참조.
39) 이 문제는 일본에서 최근에 제기되었다. 나카츠카 아키라, 《『蹇蹇錄』の世界》p.15; 후지무라 미치오(藤村道生) 등, 〈鼎談日淸·日露戰役秘話〉(《歷史と人物》, 1983년 7월) p.33.
40) 《蹇蹇錄》pp.258∼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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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시노부 세이사부로오, 앞의 책(1935) p.149 이하 참조. 이것은 물론 자본주의 발달도상에 있
었던 1890년대 일본의 계급적 모순과 외교와의 이중성에 초점을 맞춘 규정이기도 하다.
45) 나카츠카, 《『蹇蹇錄』の世界》pp.2∼7.
2018.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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