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거론하면서 스페인 태생의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1876-1973)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가 열세 살 때의 일입니다. 1889년이었지요. 바르셀로나에 유학 중이던 카잘스는 그해에 풀 사이즈 첼로를 처음으로 갖게 됩니다. 당시 그는 시립음악학교에 다니면서 밤에는 카페 ‘파하레라’에서 연주를 하고 있었지요. ‘파하레라’는 스페인 말로 ‘새장’이라는 뜻입니다. 어린 카잘스가 용돈을 벌던 곳이었던 동시에, 첼리스트로서의 실전 감각을 키우던 연습무대이기도 했습니다. 카탈루냐의 시골마을 벤드렐의 성당 오르가니스트였던 아버지는 일주일에 한 번씩 아들을 찾아와 잘 지내고 있는지 살펴보곤 했지요. 그날도 그랬습니다. 바르셀로나에 온 아버지가 어느새 훌쩍 자란 아들을 위해 풀 사이즈 첼로를 사줬습니다. 카잘스는 아버지에게 카페에서 연주할 독주곡 악보도 사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부자는 부둣가의 어느 고서점을 함께 찾아갑니다.
카잘스는 먼지를 뒤집어쓴 악보 더미 속에서 아주 오래돼 변색된 악보 다발을 발견합니다. 주지하다시피 그 고색창연한 악보는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이었지요. 1번부터 6번까지, 한 곡도 빠지지 않은 온전한 전곡 악보였습니다. 열세 살의 카잘스는 매우 흥분했을 겁니다. 풀 사이즈 첼로에 기가 막힌 악보까지 발견했으니 마치 구름이라도 탄 기분이었을 겁니다. 한데 문제는 후대 사람들의 오해와 왜곡입니다. 어린 카잘스의 발견이 한 편의 ‘기적’으로 점점 신화화되면서, 급기야는 바흐 이후에 한 번도 연주된 적이 없었던 ‘전설의 모음곡’을 열세 살의 아이가 어느 날 갑자기 발견한 것처럼 회자되기 시작한 것이지요.
하지만 사실과 다릅니다. 실제로 <무반주 첼로 모음곡>은 1825년경 프랑스 파리에서 인쇄된 악보로 처음 출판됐고, 카잘스 앞 시대의 첼리스트들도 이 ‘모음곡’ 중 일부를 종종 연주하곤 했습니다. 물론 카잘스 본인도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내가 처음 발견했다”고 말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다만 그는 자신이 발견한 악보를 연습하고 또 연습해 스물다섯 살 되던 해에 처음으로 공개 연주회를 갖지요. 물론 전곡 연주는 아니었습니다. 카잘스는 “모음곡 가운데 한 곡을 연주했다”고 자신의 회고록 <첼리스트 카잘스, 나의 기쁨과 슬픔>(한길아트, 2003)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이 불세출의 첼리스트에 의해 유명해진 <무반주 첼로 모음곡>은 바흐가 괴텐 궁정의 악장이었던 시절(1717~1723)에 쓴 곡입니다. 작곡 연도를 1720년으로 추정하고 있으니 바흐가 마흔다섯 살 때였습니다. 첫 번째 아내 마리아 바르바라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 해였습니다. 하지만 음악가로서의 바흐는 한창 물이 올랐을 때였지요. 많은 예술가들이 40대에 이른바 ‘걸작의 숲’에 들어서곤 하는데 바흐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당시 바흐가 근무했던 괴텐 궁정의 영주 레오폴트는 칼뱅 파 개신교도였기에 의전용 교회음악을 별로 탐탁찮게 여겼습니다. 덕분에 바흐는 세속적인 음악에 집중할 수 있었지요. 오늘날 연주되는 바흐의 많은 기악 걸작들이 이 시절에 태어납니다. 그중에서도 <무반주 첼로 모음곡>은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등과 더불어 이 시기의 바흐를 대표하는 기악곡입니다.
바흐 사망 200주기 ‘프라도 페스티벌’에서 연주를 하는 카잘스
마치 여러 대의 첼로가 동시에 연주하고 있는 듯한 착각
기본 구성은 ‘네 개의 춤곡’이지요. 알망드(Allemande), 쿠랑트(Courante), 사라반드(Sarabande), 지그(Gigue). 이 네 개의 전형적인 춤곡을 기본 뼈대로 삼는 것은 당시 독일 작곡가들이 ‘모음곡’을 쓰던 일반적 방식이었습니다, 바흐는 거기에 더해 맨 앞에 전주곡을 뜻하는 ‘프렐류드(Prelude)’를 배치함으로써 곡 전체의 주제와 분위기를 드러냅니다. 또 ‘사라반드’와 ‘지그’ 사이에 다른 춤곡들을 간주곡 풍으로 삽입해 약간의 변화를 시도하기도 합니다. 예컨대 미뉴에트(Menuet), 가보트(Gavotte), 부레(Bourrée) 등이 그것이지요.
결국 이 음악을 제대로 듣기 위해선 기본이 되는 네 개의 춤곡에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장 먼저 등장하는 ‘알망드’는 보통 템포의 빠르기에 약간 묵직한 느낌을 전해줍니다. 이어지는 ‘쿠랑트’는 프랑스어로 ‘달리다’라는 뜻인데, 가장 빠른 템포로 활달한 분위기를 풍기는 춤곡이지요. 반면에 쿠랑트 다음에 곧바로 이어지는 ‘사라반드’는 가장 템포가 느리고 장중합니다. 쿠랑트와 사라반드는 그렇듯이 어깨를 맞대고 ‘빠름과 느림’의 대구를 이룹니다. 마지막으로 ‘지그’는 약간 빠른 템포로 진행되는 3박자의 춤곡이지요.
또 다른 별미는 화성입니다.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듣고 있노라면 마치 여러 대의 첼로가 동시에 연주하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듭니다. 이른바 중음주법(더블 스토핑)이 수시로 등장하면서 기가 막힌 화음을 만들어내기 때문이지요. 1번부터 6번까지의 모음곡 중에서도 특히 ‘3번’에서 그런 특징이 잘 드러납니다. 프렐류드부터 현란한 더블 스토핑이 펼쳐지면서 듣는 이를 황홀하게 만듭니다. 모두가 잠든 한밤중, 혹은 비 내리는 새벽도 좋겠네요. 바흐가 전해주는 더블 스토핑의 짜릿함에 한번쯤 빠져보시길 권해 드립니다.
Bach, Suites for Cello Solo Nos.1-6, BWV 1007-1012
Mstislav Rostropovich, cello
Basilique Sainte-Marie-Madeleine de Vézelay
1991.03
추천음반
‘첼로의 성서’라 불리는 곡인만큼 수많은 첼리스트들이 연주했다. 먼저 이 곡 연주의 초석을 놓은 파블로 카잘스(1938, EMI)의 역사적 명연을 빼놓을 수 없다. 피에르 푸르니에의 연주는 카잘스의 묵직한 연주와는 달리 나긋한 보잉과 노래가 살아 있는 연주이다. 안너 빌스마는 바흐 당대의 첼로를 가지고 멋스럽고 고풍스러운 음악을 만들어 냈다. 빌스마의 제자인 피터 비스펠베이는 우리 시대의 명반을 만들어낸 젊은 거장이다.
1. 피에르 푸르니에(Pierre Fournier), 1960, Archiv. 카잘스의 1930년대 녹음이 ‘역사적 명반’인 것은 분명하지만 모노 녹음인데다 요즘 듣기에는 음질이 상당히 난감하다. 그런 까닭에 가장 먼저 손이 가는 음반은 피에르 푸르니에의 것일 수밖에 없다. 1906년 파리에서 태어나 1989년에 세상을 떠난 이 거장은 다소 느긋한 템포로 <무반주 첼로 모음곡>의 문을 연다. 그를 노상 따라다니는 ‘우아한’이라는 수식어는 이 녹음에서도 여실하다. 음표 하나하나에 연주자의 정신이 투영된 명연이다. 부드럽고 순하게 연주한다는 측면에서, 그러면서도 첼로의 음량을 풍부하게 구사한다는 측면에서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처음 구입하려는 이들에게 가장 먼저 권한다. 듣고 또 들어도 물리지 않는 ‘평생의 음반’이다.
2. 안너 빌스마(Anner Bylsma), 1992, Sony. 네덜란드 태생의 빌스마(1934~ )는 지금까지 두 개의 바흐 녹음을 남겼다. 그는 학문적 연구에 그쳤던 이른바 ‘시대악기’(원전악기ㆍ당대악기) 연주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은 ‘지적인 거장’이다. 시대악기의 잠재력을 깊숙이 탐구하고 있는 첫 번째 녹음(1979년)과 대형 스트라디바리 첼로로 좀 더 절충주의적인 해석을 시도한 두 번째 녹음(1992년) 모두 훌륭하다. 현대 첼로의 강렬함과는 맛이 다른 웅숭깊은 울림을 선사한다. 특히 느린 악장에서 담담하게 펼쳐지는 서정미가 빼어나다.
3. 피터 비스펠베이(Pieter Wispelwey), 1998, Channel Classics. 최근의 바흐 연주들은 ‘탐구 정신’으로 충만하다. 그중에서도 지히스발트 카위컨의 음반(Accent)과 테라카도 료의 음반(Denon)은 최근 재조명받고 있는 ‘어깨 첼로’(violoncello da spalla)의 독특한 분위기를 선사한다. 또 바흐 모음곡을 비올라 다 감바의 정신으로 재해석한 파올로 판돌포의 연주(Glossa)도 중요 녹음으로 거론된다. 그렇지만 가장 주목받는 연주자로는 빌스마의 제자인 비스펠베이를 우선적으로 떠올릴 수밖에 없다. 그는 2012년 내놓은 음반까지 포함해 지금까지 세 개의 녹음을 남겼다. 그중에서도 매우 대조적인 해석을 선보인 앞의 두 녹음을 먼저 들어볼 필요가 있다. 첫 녹음이 바로크 첼로의 투명한 음색을 살린 담백하고 소박한 연주였던 것에 비해, 추천음반으로 권하는 두 번째 녹음에서는 대담한 즉흥을 펼치며 정열적이고 화려한 연주를 선보인다.
글 문학수 1961년 강원도 묵호에서 태어났다. 대학 시절부터 클래식 음반을 쫓아다닌 음악 애호가다. 특히 좋아하는 장르는 대편성 관현악과 피아노 독주다. 오랫동안 경향신문에 음악 비평을 써 왔으며, 채널예스에 음악 칼럼 ‘내 인생의 클래식 101’, 서울시향의 기관지 SPO에 ‘20세기 음악 산책’ 등을 연재하였다. 경향신문사에서 문화부장을 두 차례 지냈고 지금은 다시 취재 현장으로 돌아와 음악 담당 선임기자로 일하고 있다. 저서에 <아다지오 소스테누토>(돌베개, 2013), <더 클래식 1: 바흐에서 베토벤까지>(돌베개, 2014), <더 클래식 2: 슈베르트에서 브람스까지>(돌베개, 2015), <더 클래식 3: 말러에서 쇼스타코비치까지>(돌베개 2016) 등이 있다.
출처 : 문화웹진 채널예스>칼럼>불후의 칼럼>‘내 인생의 클래식 101’ 2012.10.09
*아래는 문학수 기자의 해설에는 없으며, 카잘스가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6곡 각곡에 대해 언급한 것을 정리하여 보충한 것입니다. _라라와복래
모음곡의 구성과 성격
카잘스는 <무반주 첼로 모음곡> 6곡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1번 낙관적(optimistic), 2번 비극적(tragic), 3번 영웅적(heroic), 4번 장엄한(grandiose), 5번 격정적(tempestuos), 6번 목가적(bucolic). 이러한 특성은 각곡의 프렐류드(전주곡)에서부터 분명히 드러난다고 말했다. 1번부터 6번까지 모두 프렐류드-알망드-쿠랑트-사라반드-미뉴에트(혹은 부레나 가보트)-지그의 여섯 파트로 이루어져 있다.
Pierre Fournier - Bach, Cello Suite No.1 in G major, BWV 1007
1번 모음곡 G장조 BWV 1007
제1곡 프렐류드는 즉흥적 요소가 강한 자유로운 형식으로 보통의 템포를 취하고 있다. 제2곡 알망드도 보통의 템포에 의한 2부 형식의 곡이다. 제3곡 쿠랑트는 활기 있고 빠른 템포의 2부 형식에 의한 이탈리아 풍 곡이다. 제4곡 사라반드는 느긋하고 장중한 기분의 스페인 춤곡으로 2부 형식이다. 제5곡 미뉴에트는 1미뉴에트와 2미뉴에트로 나뉘며 각각 2부 형식의 곡이지만, 실제로는 1미뉴에트, 2미뉴에트(트리오) 후에 1미뉴에트가 재현되는 복합 3부 형식으로 되어 있다. 제6곡에서는 이탈리아 풍의 템포 빠른 지그를 채택했다.
대개 3번과 5번 모음곡이 완성도가 높다고 하지만, 첫 관문인 1번 모음곡은 전체 모음곡의 성격을 보여주면서 그 첫 주제를 제시하는 교향곡에서의 1악장과 같은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따라서 1번 모음곡부터 접근해 가는 것은 전체 모음곡 6곡을 모두 이해하는 첫걸음이다. 이 1번 모음곡은 그렇게 난해하지도 않고, 특히 프렐류드가 개방현으로 연주되는 풍부한 울림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Pierre Fournier - Bach, Cello Suite No.2 in D minor, BWV 1008
2번 모음곡 D단조 BWV 1008
전주곡은 4분의 3박자이지만 이어지는 춤곡 부분은 1번 모음곡과 같은 배열이다. 쿠랑트, 지그는 다 같이 이탈리아 양식을 나타낸다.
Pierre Fournier - Bach, Cello Suite No.3 in C major, BWV 1009
3번 모음곡 C장조 BWV 1009
6곡 모음곡 가운데서 가장 인기 있는 곡이다. 전주곡은 4분의 3박자이다. 이어지는 춤곡 부분은 다섯 번째 곡에 미뉴에트 대신에 4분의 4박자의 부레(Bourée)를 둔 것 외에는 다른 모음곡과 같은 배열이다. 경쾌한 리듬의 부레는 미뉴에트와 마찬가지로 1, 2부레가 모였으며, 다시 그 후에 1부레가 반복 없이 연주된다.
Pierre Fournier - Bach, Cello Suite No.4 in E flat major, BWV 1010
4번 모음곡 E플랫장조 BWV 1010
3번 모음곡과 같은 구조이다.
Pierre Fournier - Bach, Cello Suite No.5 in D minor, BWV 1011
5번 모음곡 C단조 BWV 1011
이 모음곡에는 제1현을 A음에 조현한 것과 G에 조현한 것의 두 가지 원고가 있다. 거기에 따라서 일부의 음이나 운지법에 차이가 나타나지만 작품의 본질에 관한 문제는 아니다. 제1곡의 전주곡은 느긋하고 무게 있는 기분의 4분의 4박자의 서주와 8분의 3박자의 활발한 부분으로 구성된 이른바 프랑스 풍 서곡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어지는 춤곡 부분은 제5곡이 가보트(1, 2, 1로 연주된다)인 것 외에는 다른 다섯 곡과 같은 배열이다. 가보트(Gavotte)는 프랑스 산악 지방의 사람들을 지칭하는 가보츠(Gavots)에서 변형된 말이다. 대개 2/2박자인데, 17세기 초 궁중무곡으로 수용되었고, 베르사유 궁정 발레의 핵심 부분으로 받아들여졌다. 통상 가보트 1, 2 즉 전반과 후반으로 짝을 짓는데 후반부에는 가끔 뮈제트(Musette, 같은 음의 저음이 계속 울리는 것)가 나타난다.
Pierre Fournier - Bach, Cello Suite No.6 in D major, BWV 1012
6번 모음곡 D장조 BWV 1012
전 6곡 모음곡 가운데 가장 대규모로 기개와 도량이 웅장한 분위기를 띠고 있다. 원래는 4현의 첼로용이 아니라, A현의 위에 다시 E현을 더한 5현의 악기인 비올라 폼포사(Viola Pomposa)를 위해 쓰인 것으로 3옥타브 이상에 걸친 음역을 사용했으며, 그 때문에 첼로 연주로는 대단히 어렵다. 제1곡의 전주곡에서 볼 수 있는 f와 p의 교대에 의한 같은 프레이즈의 에코적인 반복은 바로크의 특징적인 양식이다. 춤곡 부분은 5번 모음곡과 같은 구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