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8. 6. 12:00ㆍ산 이야기
제가 이전에 올려드린 야외활동시 안전에 대한 글 중에서 요지음 처럼 비가 자주 오고, 번개가 빈번할 때에
가장 조심해야 할 낙뢰사고에 대한 항목이 누락되어 있어서,.......
월간 마운틴의 이영준 기자 작성의 기사 중에서 낙뢰에 대한 사고사례가 있어서 올려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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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untain Specialㅣ산악구조 - 시대별 유형별로 본 한국산악조난사 등산의 역사는 조난의 역사였다 월간마운틴 글 이영준 기자 입력 2013.07.24 10:29 수정 2013.07.24.
↑ 사고와 조난도 등산의 역사 중 한 부분을 차지해왔다. 때문에 초창기 산악인들에게 산에서의 조난은 곧 성스러운 죽음과도 같은 면이 있었다. 사진은 1957년 제주도에서 1948년 겨울 한라산 등반 중 조난당했던 전택 대장을 추모하고 있는 산악인들. 사진 한국산악회
등산은 철저히 한 인간의 자기지향적인 행위다.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거나 본능에서 비롯된 일이 아닌, 스스로의 의식과 판단으로 행하는 자주적인 활동이라는 뜻이다. 때문에 등산활동은 집을 떠나 정상에 오르는 것만으로 단순화 해 바라볼 일이 아니며 사고와 조난도 곧 큰 의미에서 등산활동의 한 부분을 이룬다. 등산의 역사는 숱한 조난 속에, 죽음과 생환의 반복 속에 흘러왔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 근대적 의미의 등산이 도입된 이후의 산악조난에 대해 살펴보았다.
최초의 조난은 단독등반 중 사고
우리나라에서 근대적인 산악운동이 시작된 것은 1920년대 중반으로 본다. 이후 1930년대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암벽등반 등 전문적인 등산활동을 해온 것으로 파악되고 있는 데, 등산인구의 증가에 따라 그 전과는 원인이 다른, 산에서의 크고 작은 사고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기록에 남은 최초의 산악조난자는 일제강점기 우리나라에서 활동하던 일본 산악인이었다. 1936년 1월 초 한라산 동계등반에 나섰던 경성제국대학 산악부원들은 등정 후 하산 중 대원 한명이 실종되는 사고를 당한다. 당시 대장이었던 이즈미 세이이치가 쓴 보고서에는 '조난자 마에카와 지하루가 왕관릉에서 탐라계곡으로 하산 중 실종되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후 실종자를 찾기 위해 구조대원으로 참가했던 이이야마 다츠오는 발견한 조난자의 시신이 바지가 반쯤 벗겨진 채 쪼그린 자세였다고 증언해 이 사고가 외부적인 조건이 아닌, 조난자의 실수로 발생한 것으로 추측되게 한다.
한국인으로 첫 조난은 1939년 4월 6일 양정고보 산악부 노정환의 도봉산 주봉 추락사고다. 당시 졸업반인 5학년으로 산악부의 리더였던 노정환은 자체 내에서 실시한 암벽등반 대회에서 모두 최고기록을 세울 정도로 노련한 클라이머였다. 그러나 동급생과 후배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친구들이 등반을 위해 준비를 하는 사이 단독등반으로 주봉을 오르기 시작해 정상에 올라서는 순간 균형을 잃고 추락, 하단 테라스에 부딪친 후 바닥까지 떨어졌다. 의식을 잃었지만 큰 외상이 없던 노정환을 부원들이 들것을 만들어 후송해 병원으로 옮겼지만 6일 만에 결국 사망하고 말았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구름 위의 자객, 낙뢰
급변하는 기후 속에서는 낙뢰에 의한 사고도 주의해야 한다. 특히 암벽등반이나 고산등반 등에서는 몸을 피하기가 더욱 어려워 낙뢰가 칠 조짐이 보이면 먼저 예상하고 대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우리나라에서 첫 낙뢰에 의한 산악사고의 기록은 1956년 7월의 일이다. 도봉산 만장봉을 등반 중이던 양두철이 낙뢰를 맞고 추락해 골절상을 당한 것이다. 그는 일제강점기부터 백령회원으로 활동해 당시 베테랑 클라이머 중 한 사람이었지만 급변하는 기상악화 속에 사고를 당했다. 다행이 낙뢰를 직접 맞지는 않아 골절에 그쳐 당시 함께 등반 중이던 변완철, 안광옥, 조남용, 윤현필, 한재설 등 동료들에 의해 구조되었다.
해외 고산에서의 낙뢰사고도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1981년 한국대학산악연맹 아이거 북벽 등반대의 낙뢰 사고다. 북벽 등반 전 사전정찰을 위해 아이거 서릉을 오르고 내려오던 길에 낙뢰를 맞은 것이다. 이 사고로 신건호, 주동규 두 명이 사망하고 몇몇 대원들은 화상을 입었다.
우리나라 산에서 최악의 낙뢰사고는 지난 2007년 7월 29일 북한산과 수락산의 사고다. 이날 급작스런 국지성 집중호우와 함께 치기 시작한 낙뢰로 북한산 용혈봉에서 산비둘기 산우회 회원 4명, 수락산에서 등산객 1명이 사망하고 총 25명이 부상을 당하는 참사가 일어났다. 특히 최근 들어 기상이변으로 여름철 국지성 호우가 빈번하며 낙뢰에 대한 위험이 더욱 증가하고 있다.
↑ 1969년 설악산 죽음의 계곡 눈사태 사고 뒤 시신을 운구하고 있는 구조대원들. 구조와 발굴 작업은 한달 가까이 계속되었다.
70년대까지는 장비 부실 사고 많았다
지금은 등산장비의 발달과 사용법의 계몽으로 장비부실에 의한 사고는 그리 많지 않지만, 멀지 않은 과거까지도 단지 장비 때문에 어처구니없는 사고를 당하는 경우가 있었다. 장비부실로 인한 사고는 장비가 파손되는 경우와 처음부터 장비가 부족했던 경우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둘 모두 지금에 와서는 그다지 사고의 원인이 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반면 장비가 있음에도 사용하지 않아 발생한, 안전불감증이 원인이 되는 사고가 많아졌다.
지금까지의 장비부실 사고 중 눈에 띄는 것은 1958년 3월 31일 인수봉에서 발생한 사고다. 당시 수송전기공고 학생 1~3학년생 4명은 집에서 쓰던 전깃줄을 들고 등반에 나섰다가 바위 중간에서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이 되자 구조를 요청, 18시간 만에 전담, 변완철, 김정태, 김근원 등 한국산악회 회원들에게 구조되었다. 모두 무사히 내려와 에피소드로 끝나긴 했지만 모든 물자가 부족했던 당시의 상황과, 치기 넘쳤던 당시 청소년들의 면면을 엿볼 수 있는 사건이기도 하다.
장비로 인한 사고 중 가장 많은 빈도를 차지하는 것은 로프 절단이다. 클라이머에겐 생명줄과도 같은 로프이지만, 과거엔 로프의 성능이 떨어졌기에 발생한 경우도 있었고, 사용미숙으로 일어난 사고도 있었다. 1958년 3월 29일 북한산 백운대에 오른 양정고교 산악부원 중 최영철은 정상 뜀바위에서 로프를 걸고 건너다가 줄이 끊어져 추락, 사망했다. 당시 대부분의 로프는 마닐라 삼으로 된 것으로 지금과 비교했을 때 그 강도가 4분의 1도 되지 않았다.
<한국등산사>에 따르면 1930~1970년대까지 일어난, 기록에 남아있는 198건의 산악사고 중 전문등반장비 부실, 또는 장비의 미숙한 사용과 의복 부실로 인한 체온저하 등까지를 포함한 장비 관련 사고는 총 29건으로 15퍼센트에 달했다. 그러나 1980년대를 통틀어 북한산에서 발생한 128건의 사고 중 장비 관련 사고는 7건으로 5.5퍼센트로 크게 줄었다. 등산인구는 큰 폭으로 증가하고 이에 따른 사고도 많아졌지만 그 유형은 달라진 것이다.
겨울산의 두 얼굴 눈사태
우리나라의 겨울산에서 가장 많은 사고 또는 조난을 낳는 원인은 최근 들어 엉치뼈 골절이라는 이야기도 있지만(겨울산에서 엉덩이 미끄럼을 타다 다치는 경우), 눈사태로 인한 조난도 간과할 수 없다. 특히 눈사태는 한번 발생하면 대형 참사로 이어지고 구조와 수색에도 많은 인력과 시간이 투입돼야 하는 등 겨울산을 가장 위험하게 하는 요소다. 일례로 1916년에는 알프스를 뒤덮은 폭설로 눈사태가 일어나 9천 명이 사망하기도 한 역사가 있다.
만년설에서나 일어나는 것으로 알았던 눈사태가 우리 산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준 사고는 1969년 설악산 죽음의 계곡 10동지 조난이다. 한국산악회 히말라야 훈련대원으로, 당시 최고의 엘리트 산악인들이었던 10명을 몰사시킨 이 사고로 인해 그전까지 눈과 눈사태에 대해 희박했던 의식과 지식을 다시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1972년 총 14명이 사망해 히말라야 최악의 사고로 기록되는 마나슬루 원정대의 눈사태 조난으로 이는 더욱 국민적인 관심사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로도 설악산과 한라산 등 국내에서 눈이 많이 내리는 대표적인 산 두 곳에서는 눈사태 사고가 줄곧 이어졌다.
1970년 3월 16일, 설악산 인근 모 군부대원 일곱 명은 폭설로 인해 끊어진 통신선을 복구하러 길을 나섰다가 계곡에서 눈사태를 만나 매몰돼 이중 네 명이 숨지는 사고를 당하기도 했다. 1976년 2월 18일에도 대한산악연맹 에베레스트 원정 훈련대의 최수남 송준송 김재운 등 대원들이 설악골에서 훈련 중 눈사태로 사망했으며, 1985년 2월 20일에는 토왕골에서 야영 중이던 마산 무학산악회원 4명이 밤새 내린 눈에 텐트가 매몰돼 이중 박래경씨만 구조되고 3명은 사망하기도 했다. 눈사태 사고는 최근에도 발생했다. 1998년 1월 16일 토왕골에서는 등반을 위해 준비 중이던 경북대산악부원 등 8명이 최고 136cm에 달했던 폭설 속에 발생한 눈사태에 매몰되는 사고를 당했다. 곧바로 지역 산악구조대와 경찰, 소방관 등이 수색에 나섰지만 결국 사고 발생 11일 만에 모두 주검으로 발견됐다. 설악산에서는 2010년 1월에도 마등령 부근에서 발생한 눈사태로 2명이 조난당해 1명이 사고지점에서 1km나 떨어진 곳에서 시신으로 발견되기도 했다.
↑ 설악산 12선녀탕 계곡 입구에 있는 카톨릭의대 산악부원 조난 위령비. 1968년 10월 악천후로 하산 중 실족하며 7명이 숨졌다.
기상급변으로 인한 조난
겨울철 폭설이나 여름철 집중호우가 아닌, 계절을 예측할 수 없는 기상 급변으로 인한 조난은 북한산 인수봉에서 두 차례 있었다. 많은 사망자를 낸 기상 급변으로 인한 사고는 실상 철저한 대비가 사전에 있었다면 막을 수도 있던 것들이어서, 이후 등산에 대한 사회적인 문제로 불거지기도 했다.
1971년 11월 28일, 인수봉에는 여느 때처럼 많은 클라이머들이 등반을 하고 있었다. 이날은 이미 한파주의보가 발령되어있어 등반에 앞서 철저한 준비를 필요로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상시 복장으로 등반에 나섰고, 결국 이날 오후부터 몰아친 강풍과 혹한에 하강을 하려 했으나 질서없이 로프를 던지는 바람에 줄이 꼬여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에서 7명이 동사하고 20여 명이 동상을 입는 사고를 당했다. 사고자들은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청년들로, 실상 산에서의 경험이 많지는 않은 연령층이었다. 사고에 대한 구조도 더디게 진행됐다. 한국산악회와 대한산악연맹 소속의 몇몇 베테랑 클라이머들 말고는 전문 구조인력이 없었기에 현장에 있는 경찰과 소방대원 등은 아무런 도움이 되질 못했다. 풍문이지만 절벽에 매달려 있는 시신을 총을 쏘아 로프를 끊어 떨어트리자는 말이 나왔을 정도라 하니 당시의 열악했던 상황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이전까지 인수봉 남면의 하강 피톤은 하나 뿐이었지만, 이후로 여러 개를 설치해 한번에 여러 명이 안전하게 하강할 수 있게 되었다.
산악계로서는 참변을 겪은 것이지만 이와 유사한 사고는 1983년에도 되풀이되었다. 이번에는 초겨울이 아닌 봄이었다. 4월 3일, 한국대학산악연맹 소속 학교산악부 회원들은 연맹합동등반을 위해 인수봉을 오르고 있었다. 오전 중에는 맑았던 날씨는 점심 무렵부터 갑자기 돌변하며 초속 15미터의 강풍과 눈보라로 바뀌어 몰아쳤다. 역시 하산을 서두르다 로프가 엉키거나 방한의류 등 준비 부족으로 이날 7명이 벽에 매달려 유명을 달리해야 했다. 사망자들 중에는 얇은 교련복 차림으로 바위를 오르던 사람도 있었다. 이 사고를 계기로 북한산에서는 경찰산악구조대가 창설되고 상주를 시작하게 되었다.
↑ 1958년 3월 수송공고생 4명이 전깃줄을 가지고 인수봉 등반을 시도하다 조난당했으나 18시간 만에 무사히 구조되었다. 70년대까지 장비 부실로 인한 사고가 많았으나 80년대 들어 큰폭으로 줄었다. 사진 한국산악회
산에서의 익사
산에서의 익사라고 하면 언뜻 이해가 잘 가지 않을 지도 모르지만, 설악산이나 지리산 등 계곡이 깊은 산에서 여름철 가장 많이 일어나는 사망사고는 바로 물 때문이다. 수영미숙이나 심장마비 등 자인에 의한 사고가 아니더라도 폭우로 인해 불어난 계곡에 휩쓸리는 등 불가피한 사고들도 많다. 때문에 익사는 지금까지도 국립공원 내 사망사고의 15퍼센트 가량을 차지하고 있다.
기록에 남아있는 산에서의 익사 사고는 1962년 8월 호남지방을 강타했던 태풍 노라호로 인한 것이 처음이다. 당시 한라산 탐라계곡을 오르던 전남대생을 비롯해 지리산 공안리 계곡에 있던 경기고교생 등은 불어난 계곡을 건너려다 미끄러지며 물에 빠져 익사했다. 1965년 7월에도 설악산 신흥사 인근에서 불어난 계곡을 건너던 에코클럽 회원이 몸을 묶고 있던 로프가 절단되며 급류에 휩쓸렸고 같은 날 오대산 월정사 앞에서는 고대생 12명이 폭 20m의 계곡을 스크럼을 짜고 건너려 했으나 급류에 손을 놓쳐 이중 10명이 조난했으며 여학생 1명은 익사했다.
특히 지금과 같은 정비된 등산로가 없던 1960~70년대에는 이 같은 유형의 익사 사고가 많았다. 1968년 10월 24일에도 설악산 십이선녀탕 계곡을 등산 중이던 카톨릭의대생 9명이 기상악화로 하산 중 협곡에서 추락하며 계곡에 빠져 7명이 숨지는 대형 사고가 일어나기도 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산노래 '설악가'와 천화대 석주길의 주인공인 요델산악회의 엄홍석과 신현주도 1967년 여름 토왕골 협곡에서 실족하며 물에 빠진 것을 구조하려다 함께 사고를 당한 경우다.
지리산에서도 최근까지 대형 익사사고가 있었다. 특히 1998년 7월 31일 내린 폭우로 대원사와 내원사 계곡, 하동 화개천 등 지리산 자락에서 야영 중이던 등산객 15명이 숨지고 45명이 실종되는 참변이 발생하기도 했다. 실종자들 중에는 몇 시간 만에 섬진강을 따라 바다까지 떠내려가 영원히 발견되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설악산에서도 지난 2006년 한계리 일대에 내린 폭우로 마을 전체가 사라질 정도의 급류가 몰아쳐 숱한 희생자를 낳기도 했다. 이때 산악인 김세준씨 등은 등반장비와 기술을 이용해 주민들을 구조해내 화제가 되기도 했다.
↑ 등산인구의 연령 변화에 따라 심장병과 고혈압, 당뇨 등 성인병에 의한 조난사고가 증가하고 있다. 사진은 사고자의 심폐소생술 장면. 사진 북한산관리공단
음주와 안전불감증, 성인병에 의한 조난 증가
산에서의 음주로 인한 사고는 과거 드물었지만, 최근 들어 등산이 단순하고 일반적인 취미로 여겨지며 줄곧 늘고 있는 상태다. 허나 오래 전부터 유람으로써의 산행 분위기가 있던 탓에 한국인들은 외국의 경우에 비해 산에서 술을 마시는 경우가 많으며, 때로 고도의 집중력이 요구되는 암벽등반 등에까지 음주로 인한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자료상으로는 1966년 11월 관악산에서 열렸던 서울시체육회 주최 시민하이킹 대회에서 눈이 내리는 가운데 술을 먹고 저체온증으로 사망한 최모씨가 산에서의 음주사고 첫 번째로 기록된다. 당시 현장에 있던 김정태 조두현 등 전문산악인들이 구조해 후송했지만 결국 동사했다고 나와 있다. 추측컨대 느슨한 형태의 등산 행사에서 흥에 겨워 한두잔씩 마신 술이 결국 화를 부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비전문산악인들의 당일산행이 보편화된 요즘에 와서도 음주로 인한 사고는 꾸준히 계속되고 있다. 특히 리지등반 등 과거 전문가들만이 해오던 등산형태가 보편화되며, 위험한 동작을 계속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음주를 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이는 곧 안전불감증으로도 이어져, 장비를 정확히 사용하지 않거나 자신의 능력을 벗어난 무모한 시도를 하다 사고를 당하는 경우도 많아 사회문제화 되고 있다.
또 최근 들어 조난의 유형은 고혈압, 심장병, 관절염 등 만성지병으로 인한 사례가 큰 폭으로 늘고 있다. 2005년부터의 통계에 따르면 전국 국립공원에서 '돌연사'로 분류되는 이 같은 유형의 사망자들은 전체의 37퍼센트를 차지할 정도가 돼 사고 원인의 1위로 떠오르게 되었다. 등산이 중장년층에게 각광 받으며 조난의 유형도 변화한 것이다.
음주, 추락, 장비사용 미숙 등의 사고가 교육과 계도를 통해 줄어들 수 있고 눈사태, 익사 등 자연적인 요인은 상황에 따른 통제로 막을 수 있는 것이지만 이 같은 돌연사는 본인 스스로가 아니면 예방하거나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 앞으로도 노령화 사회가 계속될수록 꾸준히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산악인의 자살, 자살인가 사고인가
산악인의 자살에 관하여는 그 판단을 단정하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죽음의 원인을 파악하기 앞서 산을 오르는 행위 자체가 철저히 개인의 목적의식에 의해 시작된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죽을 지도 모른다'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보다 어렵고 힘든 곳으로 찾아가고 싶은 마음이 산을 오르는 자의 본능이라면, 그로 인한 사망은 예견된 자살일까 비운의 사고사일까. 물론 죽는 것이 산에 오르는 목적이 될 수는 없는 것이지만, 산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경우도 많다. 자살은 사회적 요인에 따라 영향을 크게 받아왔다. IMF이후 산에서 자살자 숫자가 급증했지만 최근에는 등산이 웰빙 분위기를 타며 지난 5년간 국립공원 내 사망사고의 10퍼센트 아래로 내려갔다.
1974년 3월 28일자 <동아일보>에는 '인수봉서 투신 기도'라는 제목의 2단 기사가 나온다. 내용은 27일 오후 4시 반경 인수봉 정상에서 김모씨가 투신을 하려했으나 구출됐다는 것이다. 그는 이날 오후 2시경 '나를 찾지 말라'는 유서를 남기고 집을 떠났는데, 이를 발견한 형이 평소 동생이 잘 가던 인수봉으로 달려가 정상에 서있는 것을 발견하고 당시 인수산장 주인 이경구씨에게 구조를 요청, 이씨는 로프를 들고 올라가 김씨에게 접근, 설득하고 붙잡아 줄로 묶어 산 아래까지 무사히 내려왔다는 것이다. 당시 스물다섯 살이었던 김씨는 학교 졸업 후 형 집에서 기숙해왔는데 실직을 비관해 이 같은 일을 저질렀다고 덧붙이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은, 산악인으로 나타난 청년의 현실과 사회의 단편을 엿볼 수 있는 일이다.
애틋한 자살도 있었다. 1985년 8월 4일 도봉산 선인봉 허리길을 등반 중이던 22세 여성 최모씨는 선등자가 추락하며 로프가 흔들리는데 부딪혀 테라스에서 균형을 잃고 15미터를 추락해 숨졌다. 이후 삼우제날인 8일에는 같은 허리길에서 24세 남성 양모씨가 단독으로 50미터를 오른 후 묶여있던 로프를 칼로 끊고 몸을 던졌다. 최씨와 연인관계였던 양씨는 최씨 사고 후인 5일, 혼백을 위로해주겠다며 집을 나서 선인봉 아래 텐트에서 지내왔는데, 텐트 안에는 평소 최씨가 사용하던 화장품 등 유품이 놓인 제사상이 있었다고 한다.
울지도 웃지도 못할 사고들
산에서 일어나는 조난사고들이야 어떤 경우라도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 원인을 보면 울기에도 웃기에도 황당한 사고들도 있었다. 1947년 6월 북한산 백운대로 하이킹을 떠났던 23살의 여성 모씨는 치마를 입고 등산을 하다가 때마침 바람이 불며 반사적으로 손을 치마로 가져가 잡고 있던 철주난간을 놓쳐 추락, 사망했다. 마릴린 먼로를 연상케 하는 어처구니없는 사고였다. 1967년 5월 지리산 산행에 나섰던 진주교대생 3명은 산행을 시작한 지 일주일 만에 산청군 시천면 내대리 골짜기에서 지나던 등산객에 의해 시신으로 발견됐다. 당시 사고 기사에 따르면 이들은 등산 중 배가 고파 독초를 약초로 잘못 알고 먹고 중독, 숨진 것으로 보인다고 나와 있다. 산에서 독초를 먹고 중독된 사례는 이후로도 많다. 1971년 6월 지리산 산행 중이던 알파산악회 회원 6명은 독초를 먹고 의식을 잃어 이중 1명이 사망했으며 1973년 7월 역시 지리산 반야봉에서 열여덟 살의 곽모씨와 최모씨는 산행 중 산삼을 발견해 그 자리에서 먹었지만 한 명은 현장에서 사망, 한 명은 중태로 실려 가야했다. 그들 역시 섣부른 지식으로 독초를 뽑아 먹은 것이었다.
산에서의 조난이 법적 공방으로까지 이어진 경우도 있었다. 1970년 7월 13일 한라산에서는 극심한 안개와 추위로 체감온도가 영하로까지 떨어지는 악천후가 닥쳤다. 이런 와중 백록담 부근에서 산행 중이던 대학산악부원 3명이 탈진해 1명이 동사하는 사고를 당했다. 그런데 수습 후 유가족이 나머지 두 명에 대해 구조에 최선을 다하지 않고 시신을 유기했다며 형사 고소를 한 것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최초의 산악사고에 대한 법적 공방이었다. 결국 법정에서는 동행자들도 극한 상황에서 내려왔기에 혐의를 인정할 수 없다는 판결이 내려졌지만, 등산가의 도덕적인 책임과 그 한계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된 일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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