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첨성대의 서사구조와 연개소문의 탄생

2018. 12. 7. 17:00별 이야기




평양 첨성대의 서사구조와 연개소문의 탄생| 역사와현실 

樂民(장달수) 


조회 43
|추천 0 | 2018.03.25. 23:44




평양 첨성대의 서사구조와 연개소문의 탄생

정 연 식*


머리말
1. 구요(九曜), 구지(九池)와 첨성대
2. 해·별과 물의 만남
1) 부여·고구려의 해
2) 신라·가야의 북극성
3. 평양 첨성대와 연개소문의 탄생
1) 첨성대의 건립 시기
2) 첨성대의 주인, 연개소문
4. 안학궁 옆 7각건물의 성격
맺음말


머리말

   1910년에 와다 유지(和田雄治) 경주 첨성대천문대라는 주장을 편 이후로 천문대설은 100여년 동안 지속되어 왔다. 그와 함께 개성 첨성대와 평양 첨성대도 천문대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그 증거는 첨성대라는 이름 밖에 없었다.


* 서울여자대학교 사학과 교수
대표논저 : 2008 「조선시대 이후 벼와 쌀의 상대적 가치와 용량」 ?역사와 현실?

69 ; 2001 「화성의 방어시설과 총포」 ?진단학보? 91 ; 2001 「조선시대의 끼니」 ?한국사연구?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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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평양전도」의 첨성대(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조선강역총도(朝鮮疆域總圖)」(奎古軸 4709.53)의 부분)


 필자는 경주 첨성대가 천문대라는 주장에 대해 여러 차례 비판해 왔다.1) 그리고 경주 첨성대는 영묘사, 분황사, 황룡사구층탑과 함께 선덕여왕의 이미지를 만들기 위한 건축물의 하나로서 선덕여왕의 성스러운 탄생을 상징하는 건축물이라고 주장했다.2) 그와 아울러 개성 첨성대와 평양 첨성대도 천문대가 아니라 왕건과 연개소문의 탄생을 상징하는 건축물일 것이라고 논문의 각주에서 간단히 언급했다.3) 이제 평양 첨성대가 연개소문의 위대한 탄생을 상징하는 건축물이었음을 밝히면서 별과 못, 우물이 어떤 관계에 있었는지 그 서사구조를 밝혀보고자 한다.


1) 정연식, 2009(a) 「첨성대의 기능과 형태에 관한 여러 학설 비판」 ?역사학보? 204 ; 2010(a) 「7세기 첨성대 건립과 천문 이변 기록 증가의 관련설에 대한 비판? ?역사학보? 206 ; 2010(c) 「조선시대 관상감 觀天臺와 경주 瞻星臺의 입지조건 비교」 ?한국고대사연구? 60

2) 정연식, 2009(c) 「선덕여왕의 이미지 창조」 ?한국사연구? 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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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문의 위대한 탄생을 상징하는 건축물이었음을 밝히면서 별과 못, 우물이 어떤 관계에 있었는지 그 서사구조를 밝혀보고자 한다. 그런데 최근 북한의 발표에 의하면 평양 첨성대에서 동북쪽으로 약 9㎞ 떨어진 안학궁 옆에서 첨성대 유적이 또 하나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 건물의 성격도 함께 살펴보기로 한다.


1. 구요(九曜), 구지(九池)와 첨성대

우리나라에 첨성대는 모두 다섯이 있었다. 그 가운데 실물로 셋이 남아
있고, 실물은 사라지고 기록만 남은 것이 둘이 있다.4) 실물로 남은 것 가운
데 신라의 경주 첨성대가 월성 앞에 있고, 고려의 개성 첨성대가 고려궁성
터 옆에 있다. 그리고 조선후기에는 소간의를 올려놓고 천체를 관측했던
관천대를 일명 첨성대라고 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서울 계동의 현대사옥
안에 남아 있다.5)
기록만 남기고 사라진 첨성대 가운데 하나는 1702년(숙종 28)에 경희궁
개양문 밖에 세운 관천대이다. 첨성대라고도 불렀던 그 관천대는 아마도
1907년에 경희궁을 헐고 그 안에 통감부중학교(경성중학교)를 지으면서 주
변을 정리할 때에 즈음하여 헐린 듯하다.
3) 정연식, 2009(b) 「선덕여왕과 성조(聖祖)의 탄생, 첨성대」 ?역사와 현실? 74, 355쪽
4) 창덕궁 금호문 밖과 경희궁 개양문 밖에 있던 조선후기의 관천대(소간의대)는 분
명 첨성대라 불렀으나, 경복궁 안에 있었던 조선전기의 간의대와 소간의대도 첨성
대라 불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5) 창경궁 안에 있는 보물 851호 石臺도 첨성대로 알려져 있지만 그것은 소간의를 올
려놓고 천체를 관측했던 관천대가 아니라, 일성정시의를 올려놓고 시간을 측정했
던 일영대이므로 거론하지 않는다(정연식, 2010(b) 「조선시대 관천대와 일영대의
연혁 ‒창경궁 일영대와 관련하여 ‒」 ?한국문화?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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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하나는 평양 첨성대이다. 평양 첨성대는 ?세종실록? 지리지가 편
찬되었던 1454년까지는 남아 있었으나 ?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된 1481년에
는 이미 사라져버리고 터만 남았다.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따르면 첨성
대는 평양부에서 남쪽으로 3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한다.6) 하지만 그 터가
첨성대 터라는 것은 오래도록 전승되어, 18세기 중엽의 「평양전도(平壤全
圖)」에도 ‘첨성대(瞻星坮)’로 표시되어 있다. 그 지도에는 첨성대가 평양의
내성 남문 밖, 중성 함구문 안에 표시되어 있다(<그림 1>).
경주, 개성, 평양의 세 첨성대는 저마다 독특한 자료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경주 첨성대는 실물이 남아 있고, 극히 짤막한 기록이기는 하지만
?삼국유사?에 선덕여왕 때에 쌓았다는 중요한 정보도 남아 있다. 그런데
개성 첨성대는 실물만 남아 있고 기록 정보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오
랜 시간이 흐른 뒤 19세기에 편찬된 ?중경지(中京志)?에 만월대 서쪽에 첨
성대가 있다는 기록은 있지만,7) 실물이 현재 만월대 서쪽에 있으므로 기록
이 추가로 전해주는 정보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평양 첨성대는 실물이
없고 ?세종실록? 지리지에 짤막한 기록만 남아 있다. 그런데 그 짤막한 기
록은 매우 소중한 정보를 담고 있다.
성 안에 구묘(九廟)와 구지(九池)가 있다. 구묘는 바로 구요(九曜)가 날아든[飛
入] 곳이다. 그 못 옆에는 첨성대가 있다.8)
6) ?新增東國輿地勝覽? 권51, 平安道 平壤府 古跡 瞻星臺 “遺址在府南三里”. ?동국
여지승람?은 1481년(성종 12)에 50권으로 완성되었으며, 그 후 기록을 보충하여
1530년(중종 25)에 ?신증동국여지승람?이라는 이름으로 55권으로 다시 간행하면
서 증보된 부분에는 ‘增’자를 덧붙여 원 기록과 구분하였다. 그런데 평양 첨성대
기록에는 ‘增’자가 붙어 있지 않다.
7) ?中京志? 권7, 古蹟 瞻星臺, “瞻星臺在滿月臺西”
8) ?世宗實錄? 권154, 地理志 平安道 平壤府, “城內有九廟九池 九廟乃九曜飛入處也
其池旁有瞻星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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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록은 비록 23자로 된 이 짧은 기록이지만 평양 첨성대는 물론이고
경주 첨성대와 개성 첨성대의 성격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을 열어둔 소중한
기록이다.
조선후기에 첨성대라고도 불렀던 관천대는 소간의를 올려놓고 천체를
관측했던 시설이므로 분명 천문대이다. 그러나 평양 첨성대가 천문학적으
로 ‘별을 관측하는 대’가 아니라 ‘별을 쳐다보는 대’였다면 경주 첨성대도
달리 생각해 보아야 한다. 경주 첨성대가 평양 첨성대의 못과 같은 의미를
지닌 우물 형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물, 못, 샘, 늪 등으로 표현되는 물은 어떤 인물의 탄생과 관련되어 있
다. 동옥저 바다 가운데 여인국에는 바라만 봐도 아기를 잉태하는 신정(神
井)이라는 우물이 있었고, 나중에 금와왕(金蛙王)이 된 개구리처럼 생긴 아
이는 곤연(鯤淵)이라는 못의 돌 밑에서 부여왕 해부루에 의해 발견되었다.
박혁거세가 나정(蘿井)이라는 우물에서 발견되었고, 알영부인도 알영정(閼
英井)이라는 우물에서 발견되었으며. 개소문(蓋蘇文)은 물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연(淵) 또는 천(泉)을 성씨로 삼았다. 그리고 일본에는 위대한 인물들
이 탄생한 단조이(誕生井)라는 우물이 곳곳에 있다.9)
그리고 별도 위대한 인물의 탄생과 연관되어 있다. 유례이사금(儒禮尼師
今)은 어머니 박씨가 밤길을 가다가 별빛이 입으로 들어온 뒤로 잉태되었
고, 진평왕 때 자장과 원효도 어머니가 별이 품안으로 들어온 꿈을 꾼 뒤
로 잉태되었으며, 고려 때 강감찬은 별이 집에 떨어진 순간 그 집에서 태
어났다.10)
위인의 탄생에 한편으로는 우물, 못, 샘으로 표현된 물이, 또 한편으로는
별이 등장하는데 경주 첨성대와 평양 첨성대에는 두 가지가 동시에 등장한
다. 그런데 평양 첨성대에서 못과 함께 있는 사당에 별이 날아들었고 그
9) 정연식, 2009(b) 앞의 논문, 319~320쪽
10) 정연식, 2009(b) 앞의 논문, 3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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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옆에 첨성대가 있었으므로 첨성대는 위대한 인물의 탄생에 등장하는 별
을 쳐다보았던 대라고 추정할 수 있다.11) 마야부인의 몸을 본떠 선덕여왕
의 탄생을 상징하도록 우물 모양으로 만든 경주 첨성대의 첨성대라는 이름
은 그 위에서 별을 쳐다보았다는 뜻이다. 그리고 평양 첨성대는 못 옆에
있는 사당으로 별이 날아든 것을 쳐다보았던 대이다. 이 서사구조에서는
모두 별과 물이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그 전에는 경주 첨성대와 평양 첨성대에서 별과 우물 또는 못이
모두 위대한 인물의 탄생을 상징하지만 왜 함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별과 물의 결합은 첨성대에만 있었던 일이 아니
었다. 별의 범주를 해와 달과 별을 포함한 모든 천체로 확산시키면, 별과
물의 결합은 주몽 탄생설화에도 있었고 중국과 일본의 탄생설화에도 있었
다. 왜 위대한 인물의 탄생에 별로 대표되는 해, 달, 별과 물로 대표되는
우물, 못, 샘, 늪이 함께 거론되는지 그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답부터 먼저
찾아야 한다. 그것이 첨성대에 얽힌 이야기를 정확히 이해하는 올바른 길
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2. 해·별과 물의 만남
1) 부여·고구려의 해
별과 물(우물, 못, 샘, 늪)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별과 물의 서사구
조를 이해하기 위해 한·중·일 삼국의 설화를 하나씩 살펴보기로 한다.
11) 정연식, 2009(b) 앞의 논문, 357쪽
평양 첨성대의 서사구조와 연개소문의 탄생 237
(가) 은(殷)나라의 시조 설(契)의 어머니는 간적(簡狄)이다...셋이 함께 목욕을
하다가 검은 새가 알을 떨어뜨리는 것을 보고 간적이 이를 받아 삼켰다.
그로 인해 임신하여 설을 낳았다.12)
(나) 북부여 왕 해부루(解夫婁)가 (주몽을) 피하여 나라 땅을 동부여로 옮겼다.
부루가 죽자 금와(金蛙)가 왕위를 이었다. 그 때 태백산(太伯山) 남쪽 우발
수(優渤水)에서 한 여자를 얻었는데 그 여자에게 물으니 “저는 하백(河伯)
의 딸로 이름은 유화(柳花)라고 합니다. 아우들과 함께 놀러 나갔는데 한
남자가 스스로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解慕漱)라고 하면서 나를 웅신산
(熊神山) 아래 압록강(鴨綠江) 가의 방 안으로 꾀어 정을 통하고 가더니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부모님은 내가 중매도 없이 다른 사람을 따랐다고
꾸짖어 이곳으로 내쫓았습니다” 하였다. 금와가 기이하게 여겨 방안에 가
두었더니 햇빛이 비추었고, 몸을 피하면 다시 해그림자가 따라와 비추었
다. 그 때문에 임신하여 닷 되 만한 알 하나를 낳았다. … 어머니(유화)가
물건으로 싸서 따뜻한 곳에 두었더니 한 아이가 껍질을 깨고 나왔는데 뼈
대와 겉모습이 아름답고 기이했다.13)
(다) 옛날에 아메노히보코(天之日矛)라는 신라국 왕자가 있었다. … 신라국에
아구누마(阿具奴摩)라는 늪이 있었는데 이 늪 가에서 한 천한 여자가 낮잠
을 잤다. 이때 햇빛이 무지개처럼 빛나며 그 여자의 음부 위를 비추었
다...그래서 이 여인이 낮잠을 잔 후로 임신이 되어 붉은 구슬을 낳았
다...(아메노히보코가) 그 구슬을 가져와서 상(床)의 가장자리에 두었더니
곧 아름다운 낭자로 변하여 그 여자와 결혼하여 적처(嫡妻)로 삼았다.14)
12) ?史記? 권3, 殷本紀3, “殷契 母曰簡狄 有娀氏之女 爲帝嚳次妃 三人行浴 見玄鳥墮
其卵 簡狄取呑之 因孕生契”
13) ?三國遺事? 권1, 紀異2 高句麗
14) ?古事記? 中卷, 應神天皇段9, “昔有新羅國王之子 名謂天之日矛…新羅國有一沼 名
謂阿具奴摩 此沼之邊 一賤女晝寢 於是日耀如虹 指其陰上…故是女人自其晝寢時妊
身 生赤玉…故將來其玉 置於床邊 卽化美麗孃子 仍婚爲嫡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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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사기?에 기록된 은의 시조 설의 탄생설화이고, (나)는 ?삼국유
사?에 수록된 고구려 시조 주몽(朱蒙)의 탄생설화이며, (다)는 ?고사기(古
事記)?에 기록된 신라 왕자 아메노히보코의 아내 아가루히메(阿加流比賣)
의 탄생설화이다. 이 설화들에는 상당한 공통점이 있다.
(가)에서 간적은 냇물에서 목욕을 하다가15) 검은 새가 떨어뜨린 알을 삼
키고 설(契)을 낳았다. 검은 새가 떨어뜨린 알을 삼킨 이야기는 진(秦)의
시조 대업(大業)의 탄생에도 되풀이되는데,16) 검은 새는 해를 상징한다. 이
미 오래 전부터 ?산해경(山海經)?, ?회남자(淮南子)?에서 해 안에 까마귀
가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고 화상묘(畵像墓), 칠화(漆畵), 청동기물(靑銅器
物) 등에도 일중삼족오(日中三足烏)가 나타났으며, 한반도에서도 삼족오가
무용총, 각저총 등의 고분벽화나 금동관식에 등장했다.17) 그리고 일본의
?일본서기?, ?고사기?에서도 해는 머리 크기가 여덟 뼘이나 되는 커다란
까마귀 ‘야타카라스(頭八咫烏, 八咫烏)’로 나타났다.18)
(나)와 (다)도 해와 관계된 이야기이다. (다)에서 붉은 알은 붉은 해를
상징한다. 알이 해를 상징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연구자들이 지
적한 바이다.
그런데 주몽의 탄생설화와 아가루히메의 탄생설화는 여러 가지 면에서
15) 唐의 司馬貞이 지은 ?史記? 주석서 ?索隱?에서는 簡狄이 내[川]에서 목욕했다고
하였다.
16) 秦의 시조 大業은 어머니 女脩가 옷감을 짜다가 검은 새가 떨어뜨린 알을 삼켜 낳
은 아들이다(?史記? 권5, 秦本紀5).
17) 이형구, 1994 「고구려의 삼족오 신앙에 대하여」 ?동방학지? 86 ; 신용하, 2001 「고
조선문명권의 삼족오태양 상징과 조양 원대자벽화묘의 삼족오태양」 ?한국학보?
27 ; 손환일, 2006 「삼족도(三足圖) 문양의 시대별 변천」 ?한국사상과 문화? 33
18) ?日本書紀?에서는 頭八咫烏로(?日本書紀? 권3, 神武紀 卽位前紀 무오년 6월 23일
정사 ; ?日本書紀? 권3, 神武紀 卽位前紀 무오년 11월 7일 기사 ; ?日本書紀? 권3,
神武紀 卽位前紀 임술년 2월 2일 을사), ?古事記?에서는 八咫烏로 기록되었다(?古
事記? 中卷, 神武天皇段 東征).
평양 첨성대의 서사구조와 연개소문의 탄생 239
아주 유사하다.
첫째로 남자의 이름이 해와 관계되어 있다. 해부루(解夫婁)와 해모수(解
慕漱)의 ‘해(解)’는 15세기에 ‘’로 읽었는데 ‘해[日]’의 옛말도 ‘’이다.19)
주몽은 「모두루묘지(牟頭婁墓誌)」에서는 ‘해와 달의 아들[日月之子]’로 기
록되었고 ?위서(魏書)?에서는 ‘해의 아들[日子]’이라 하였다.20) 그런데 아메
노히보코의 이름도 해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천지일모(天之日矛)’는 ?일
본서기(日本書紀)?에서는 ‘천일창(天日槍)’으로 나타나며, ?풍토기(風土
記)?에서는 신라국이 아니라 고려(高麗: 고구려)에서 온 ‘천일모(天日鉾)’
로 나타난다. 과감한 추리를 시도해본다면 ‘천지일모(天之日矛)’는 ‘천지일
자(天之日子)’의 ‘자(子, こ)’가 ‘모(矛, ほこ)’로 잘못 기록된 것이 아닌가
한다.21) 신라(고려) 왕자의 이름에 특별히 창이 들어갈 이유를 찾기 어렵
기 때문이다. 추측대로라면 ?고사기?에서 ‘자(子)’가 ‘모(矛)’로 바뀌었고
?일본서기?에서는 ‘모(矛)’가 다시 같은 뜻의 ‘창(槍)’으로 표기되었고, ?풍
토기?에서는 ‘모(鉾)’로 표기되었을 것이다. ‘천지일자(天之日子)’는 ?위서?
에서 주몽을 일컫는 ‘일자(日子)’와 통하는 말이다.
둘째로는 여인이 햇빛에 감응하여 알을 낳았다는 것이다.22) 1세기에 편
찬된 왕충(王充)의 ?논형(論衡)?에 수록된 주몽설화에서는 왕의 시비(侍婢)
에게 알 같은 기운이 내려와 잉태되었다고 했으나23) 이는 햇빛에 감응하여
19) ?龍飛御天歌?(1445) 50장, “ 므지게 예 니이다(白虹橫貫于日)”; ?東國新續
三綱行實圖?(1617) 烈女 6:71, “산(解産)”
20) ?魏書? 권100, 列傳88 高句麗
21) ‘天之日子’가 옮겨 적는 과정에서 실수로 ‘天之日矛’로 바뀐 것일 수도 있고, 아니
면 신라(고려)의 왕자를 日子로 기록하는 것을 꺼려 의도적으로 변형한 것일 수도
있다.
22) ?삼국유사?에서 유화가 알을 잉태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해모수와의 관계가 아
니라 햇빛의 감응으로 기술되어 있다.
23) ?論衡? 권2, 吉驗篇
240 역사와 현실 79
알을 낳았다는 이야기와 사실상 같은 이야기이다.
세째로는 알을 낳거나 받은 여자의 처지가 유사하다. ?삼국유사?에서는
쫓겨난 여자가 ,?논형?에서는 왕을 모시는 계집종이24) ?고사기?에서는 천
한 여자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범위를 확대하여 주몽의 탄생설화를 설
의 탄생설화와 비교하면 간적은 내에서 목욕하던 세 여자 가운데 하나였는
데, 이규보가 ?구삼국사?를 토대로 지은 「동명왕편」이나 이승휴의 「제왕
운기」에서도 유화는 세 자매 가운데 하나였다.25)
이 세 설화의 공통점은 해와 여인과 알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해
도 여인도 알도 등장하지 않는데 세 설화와 유사한 설화가 있다. 금와왕의
탄생설화이다.
(라) (북부여 왕 해)부루가 늙도록 아들이 없었다. 하루는 산천에 제를 지내 후
사를 얻으려는데 타고 있는 말이 곤연에 이르러 큰 돌을 보고 마주하여 눈
물을 흘렸다. 왕이 괴이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 돌을 굴려 치우게 하니 어
린 아이가 있었는데 금빛 개구리 모양이었다. 왕이 기뻐하며 “이는 바로
하늘이 내게 후손을 주신 것이 아닌가!” 하였다. (그 아이를) 데려다 기르
고 이름을 금와(金蛙)라고 하였다.26)
우선 앞에서도 말했듯이 해부루(解夫婁)의 ‘(解)’는 ‘[日]’이다. 그리
고 해부루가 얻은 아이가 금색으로 빛났다고 하는데 금색은 고귀함 또는
빛나는 태양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24) ?法苑珠林?에는 寧稟離王의 侍婢가 하늘에서 내려온 이상한 기운에 감응하여 임
신하였다고 하였고(?法苑珠林? 권11, 歸信篇 述意部), 그것은 ?삼국유사?에도 소
개되어 있다(?삼국유사? 권1, 기이2 고구려).
25) ?삼국유사?에서는 맏딸 유화와 그 아우들로 표현하였으나, 「제왕운기」에서는 하
백의 세 딸로 표현했고, 「동명왕편」에서는 柳花, 萱花, 葦花로 세 딸의 이름까지
밝혔다.
26) ?三國遺事? 권1, 紀異2 東扶餘
평양 첨성대의 서사구조와 연개소문의 탄생 241
사건의 무대가 된 곤연(鯤淵)의 ‘곤(鯤)’은 물고기 알을 뜻하므로 곤연은
단순한 못이 아니라 알을 낳는 ‘알못’이다.27) 그리고 아이가 개구리 모양으
로 묘사된 것은 개구리는 알에서 태어나는 동물이며, 물에서 나오는 동물
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금와는 곤연에서 알로 잉태되어 개구리로 나온
것이다. 그리고 곤연이라는 알못 가에 있었던 돌은 알의 다른 표현방식이
다. 돌을 굴려 치웠더니[轉石] 개구리 모양의 아이가 나타났다고 했는데,
이는 박혁거세 설화에서 알을 깨뜨리니[剖卵] 그 안에서 아이가 나왔다는
말과 같은 뜻이다.
이러한 설화들은 모두 남성과 여성의 성적 결합을 기본 구조로 만들어
졌다. (가)에서 간적은 냇물에 벌거벗은 몸으로 목욕하고 있었고 (나)에서
여인은 늪가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냇물이나 늪은 여인의 상징적 표현이
며, 벌거벗은 것과 잠을 잔 것은 성행위를 연상시킨다. 더구나 (다)에서 햇
빛이 음부에 비추었다는 것은 성적 결합을 직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
리고 (가)의 간적이 알을 삼킨 것도 수정을 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입으로 수정하여 임신이 된 예는 고려 태조의 비 장화왕후(莊和王后) 오씨
의 사례가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28)
사람들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19세기에 난자가 관찰되기 전까지는 남자
의 아기 씨알이 어머니의 몸속에 들어가 그곳에서 자라나 아이로 태어난다
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낳고 어머니가 길렀다는 ?시경?의 표현도 그러한
의식의 소산이다.29) 결국 해는 여인의 몸에 씨알을 넣은 것이다.
27) 鯤을 ?莊子? 逍遙游에도 등장하는 大魚로 해석하여 곤연에 위대한 못이라는 의미
를 함께 부여할 수도 있지만 주된 의미는 역시 알못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옳을 듯
하다.
28) ?高麗史? 卷88, 列傳1 后妃1 莊和王后吳氏, “太祖以水軍將軍 出鎭羅州 泊舟木浦
望見川上 有五色雲氣 至則后浣布 太祖召幸之 以側微不欲有娠 宣于寢席 后卽吸之
遂有娠生子 是爲惠宗 面有席紋 世謂之欇主” 正史에 실린 이 기이한 이야기는 왕
권이 조롱당했던 고려 초의 상황을 전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242 역사와 현실 79
그런데 금와왕 탄생설화가 이상하게 여겨지는 것은 왕의 죽음이 아니라
탄생을 이야기하는 설화에서 말이 눈물을 흘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성과 관련된 이야기로 이해하면 자연스럽게 풀린다. 말을 타고 있는 해부
루의 가랑이 사이에서 뻗은 말의 머리는 해부루의 성기를 상징하며 눈물을
흘린 것은 사정행위를 뜻한다. 곤연이라는 알못에 말의 눈물이 뿌려져 수
정이 됨으로써 돌알이 생겨났고 그 돌알을 치우니 금와가 태어난 것이다.
결국 금와왕의 탄생설화에는 해와 여인과 알이 없는 것이 아니라 모두 숨
어 있을 뿐이다.
2) 신라·가야의 북극성
부여와 고구려의 시조 설화는 모두 남성을 상징하는 해와 여성을 상징
하는 물의 만남으로 구성되었다. 그런데 이런 만남의 구조는 신라, 가야의
시조설화에도 등장한다. 다만 남성이 해가 아니라 별로 바뀐다.
(마) 높은 곳에 올라 남쪽을 바라보니 양산(楊山) 밑 나정(蘿井) 옆에 번갯빛 같
은 이상한 기운이 땅에 드리우고 있고 흰 말 한 마리가 꿇어 절하는 모양
을 하고 있기에 가서 살펴보니 자색(紫色) 알 하나가 있었다. 말은 사람을
보자 길게 울고는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알을 깨고서 어린 사내아이를 얻
었는데 모양이 단정하고 아름다워 놀랍고 이상하게 생각했다.30)
(바) 호공(瓠公)이 밤에 월성 서쪽 마을에 가다가 시림(始林)에 밝은 빛이 보이
기에 (가 보니) 자색 구름이 하늘에서 땅으로 드리운 가운데 구름 속 나뭇
가지에 걸려 있는 황금궤(黃金櫃)에서 빛이 나오고 흰 닭이 나무 아래에서
29) ?詩經? 小雅 谷風之什 蓼莪 “父兮生我 母兮鞠我”. 이 구절은 ?明心寶鑑? 孝行篇
에도 등장한다.
30) ?三國遺事? 卷1, 紀異2 新羅始祖赫居世王
평양 첨성대의 서사구조와 연개소문의 탄생 243
울고 있었다. 그대로 왕에게 보고하자 왕이 그 숲에 행차하여 궤를 열어보
니 어린 사내아이가 있는데 누워 있다가 곧 일어났다.31)
(사) 사는 곳 북쪽 구지(龜旨)에서 무언가 수상한 소리로 부르는 기척이 있어
무리 2,3백 명이 이곳에 모였다. 사람 소리 같은 것이 들리는데 모습은 숨
긴 채 소리내어 이르기를 “여기에 누가 있느냐?” 하기에 구간(九干)들이
“우리들이 있습니다” 하니 또 “내가 있는 곳은 어디냐?” 하여 “구지입니
다” 라고 대답했다. 또 “황천(皇天)께서 내게 이곳에 임하여 나라를 새로
세우고 임금이 되라고 하셨기에 내려왔다. 너희들은 산꼭대기 흙을 파면
서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내밀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 하며
노래를 부르고, 발을 구르며 춤을 추어라. 그러면 대왕을 맞이하여 뛸듯이
기뻐하게 될 것이다” 하였다. 구간들은 그 말대로 모두 기뻐 노래하며 춤
을 추었다. 얼마 후 우러러 살펴보니 다만 자색 줄이 하늘에서 내려와 땅
에 닿았다. 줄 끝을 찾아가니 붉은 보자기에 싸인 금합[金合子]이 보이기
에 열어 보았더니 해처럼 둥근 황금알 여섯 개가 들어 있었다. 여러 사람
이 모두 놀라고 기뻐서 함께 몸을 굽혔다 펴면서 백번 절하였다. 얼마 후
(금합을) 싸서 안고 아도간(我刀干)의 집에 돌아와 탑상[榻] 위에 둔 후 무
리는 흩어졌다. 12일이 지난 다음날 날이 밝아 무리가 다시 모여 합을 여
니 여섯 알이 어린 아이로 변해 있었는데 용모가 매우 훌륭하였다. 곧 상
[床] 위에 앉자 무리들이 절하며 경하하며 공경하기를 그치지 않았다.32)
(마)는 신라시조 혁거세 탄생설화이고, (바)는 신라 김씨 왕실의 시조 김
알지의 탄생설화이며, (사)는 수로왕을 포함한 6가야 왕의 탄생설화이다.
이 설화들은 앞서 소개한 네 설화와는 약간 다른 이야기이다. 예전의 연구
에서는 알을 모두 해로 보았으나 이것은 해와 관련된 이야기가 아니라 북
극성과 관련된 이야기로 보인다.
해가 북극성으로 바뀐 데에는 이유가 있다. 해는 밝기와 열기에서 다른
31) ?三國遺事? 권1, 紀異2 金閼智脫解王代
32) ?三國遺事? 권2, 紀異2 駕洛國記
244 역사와 현실 79
천체와 비교도 할 수 없는 엄청난 존재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여러 천체
가운데 해를 최고의 권능을 지닌 천체로 여겼고, 태양신에 대한 숭배가 전
세계적으로 행해졌다. 해 다음으로는 크고 밝게 빛나는 달이 숭배되었으며
그 다음 순위에 별이 있었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16세기까지 태양을 중심
으로 한 황도좌표를 사용하고33) 태양이 지나는 길에 있는 별들을 황도 12
궁이라 하였다.
그런데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양 문화권에서는 해를 최고의 천체로 숭
배하다가 아주 오래전부터 다른 생각을 갖게 되었다. 천체의 움직임에 일
정한 법칙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해와 달을 포함하여 모든 천체는 동쪽
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거나 하늘에서 원을 그리며 도는데 움직이지 않는
천체가 있었다, 그것이 하늘의 모든 별의 중심에 있는 북극성이었다. 따라
서 북극성은 가장 위대한 천체가 되었고34) 해와 달은 그 다음이었으며 나
머지 별들이 뒤를 이었다. 동양에서는 모든 별의 중심에 있는 북극성을 존
귀하게 생각하여 북극성을 정점에 둔 적도좌표를 사용했다.
그 북극성은 모든 별의 제왕이며 가장 위대한 하나, 태일(太一)로 표현
된다.35) 이 사고체계에서는 때로는 해와 달도 별의 하나로 취급되어 일태
양성(日太陽星), 월태음성(月太陰星)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도교에서도 북
극성은 자미대제(紫微大帝)로서 하늘을 지배하는 최고의 권능을 지닌 존재
이고, 불교에서도 북극성은 가장 존귀한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로 표현되
고 일광변조보살(日光遍照菩薩), 월광변조보살(月光遍照菩薩)로 표현되는
해와 달은 치성광여래의 협시로서 오행성과 함께 북극성을 보좌하는 천체
33) 김향 옮김, 1995 ?하늘의 과학사? 가람기획(中山茂, 1984 ?天の科学史? 朝日新
聞), 67쪽
34) 북극성에 대한 숭상은 이미 ?논어?에도 나타나 있다(?論語? 爲政篇, “子曰 爲政以
德 譬如北辰 居其所而衆星共之”).
35) ?淮南子? 권3, 天文訓, “太微者 太一之庭也(太微 星名也 太一 天神也) 紫宮者 太一
之居也”
평양 첨성대의 서사구조와 연개소문의 탄생 245
일 뿐이다.
따라서 지상의 제왕이 탄생할 때에는 북극성의 정기를 받아 태어나게
된다. 그런데 그 북극성은 자색과 관련이 있다. 하늘에는 동번팔성(東蕃八
星)이라 부르는 자미8성과 서번칠성(西蕃七星)이라 부르는 자미7성이 이룬
담장 자미원(紫微垣)이 있는데, 그 안쪽을 자미궁(紫微宮) 또는 자궁(紫宮)
이라고 부르며, 자궁에는 하늘의 제왕 자미대제가 가족과 여러 권속을 거
느리고 살고 있다.
자궁의 자미대제 북극성의 빛에 의해 자란(紫卵)이 생겨난 것은 당연하
며, 자미대제가 내린 빛이 (바)의 김알지 탄생설화에서는 위아래로 기다랗
게 뻗은 자색 구름[紫雲]처럼 보였고, (사)의 수로왕 탄생설화에서는 기다
란 자색 줄[紫繩]로 나타났다.
앞의 네 설화에서는 해가 직접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드러났지만, (마)
부터 (사)까지 세 설화에서는 북극성이 분명히 드러나지 않는다. 만약 세
설화가 해와 관련된 설화였다면 그저 간단하게 햇빛이 비추었다고 했을 것
이다. 그러나 햇빛이 아니라 별빛이기 때문에 잘 드러나지 않았던 것이다.
어차피 설화이므로 별빛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낮에는 북극성을 볼 수 없
기에 별빛이라 하는 것보다는 번개 같은 이상한 빛이나 자색 구름이나, 자
색 줄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사)의 수로왕 탄생설화에서 줄은 자색이라 하더라도 내려 보낸
알은 황금색이니 북극성이 아니라 해를 상징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으나,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알 여섯이 모두 해일 수는
없기때문이다.
그런데 부여, 고구려의 시조설화와는 달리 신라, 가야의 시조설화에서는
고도의 은유가 이루어져 사람은 관망자로만 등장할 뿐 탄생에 직접적으로
관계하지 않는다. 하지만 여기서도 남성과 여성의 성적 결합이라는 기본
구조는 그대로 계속되고 있다.
246 역사와 현실 79
<그림 2> 나정 유구(방위는 진북)
(마)의 박혁거세 탄생설화에서는 여인 대신에 우물이 등장한다. (다)의
아메노히보코 설화의 음부는 여기서 우물로 바뀌었다. 우물은 아기가 나오
는 산도(産道)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되는데,36) 아기가 나오는 산도는 당
연히 아기의 씨알이 들어가는 곳이기도 하다. 따라서 별은 빛을 뿜어 아기
의 씨알을 내려 보내고 우물은 그것을 받아들여 위대한 인물을 잉태하는
것이다. 기본적인 서사구조는 우물 속에 별빛이 들어가 아기가 잉태되는
것이다.
나정이 별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나정의 방향으로도 알 수 있다. 나정
을 발굴한 결과 나정에서는 북동쪽에 서서 남서쪽을 바라보며 제의를 거행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그림 2>).37) 나정의 앞쪽으로는 반원형의 차폐벽이
있었고 나정 구덩이에 이어진 경사진 고랑은 그 반대편에 있었는데, 비탈
36) 정연식, 2009(b) 앞의 논문, 320쪽
37) 정연식, 2009(b) 앞의 논문, 369쪽
평양 첨성대의 서사구조와 연개소문의 탄생 247
<그림 3> ‘별뜬산[星浮山]’을 향한 시조묘의 나정
(시조묘의 나정을 지도의 나정 위치에 맞춤. 등고선 하나는 100m 차이)
진 고랑의 방향이 나정에서 제의를 거행할 때에 나정을 바라보는 각도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 고랑의 방향은 진남(眞南)에서 시계방향으로 약 32˚
이다.38)
38) 발굴보고서 도면에서는 고랑의 방향은 자북에서 약 38.5° 시계방향으로 돌아가
있다(중앙문화재연구원·경주시, 2008 ?경주 나정 ‒별지 도면 ‒? [별지-2] 1차시
설~4차시설 배치도). 그런데 경주 지역의 圖北과 磁北의 차이 圖磁角은 6.5°이
고, 圖北과 眞北의 차이 圖偏角은 0.07′로서 무시해도 좋은 수치이다(1983년판
국립지리원의 경주 1:25,000 지도). 따라서 도랑의 방향은 진북에서 시계방향으로
32°가량 돌아선 셈이다.
248 역사와 현실 79
그런데 나정에서 남서쪽 32° 방향으로 6.2km 떨어진 곳에는 성부산(星
浮山)이 있다.39) 성부산(星浮山)은 말 그대로 ‘별뜬산’이다.40) 결국 나정에
서는 ‘별뜬산’을 바라보며 제사를 지냈던 것이다. 나정에서 ‘별뜬산’을 향해
제를 지냈던 것은 나정이 별과 관련된 우물이었음을 짐작케 한다(<그림
3>).41)
결국 박혁거세의 알을 우물에서 태어나게 한 빛은 ‘별뜬산’의 별빛이고,
그 별은 제왕을 태어나게 한 별이므로 하늘의 제왕 북극성이었을 것이며,
그 북극성이 자궁(紫宮)에 살고 있으므로 북극성이 태어나게 한 알이 자색
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의 박혁거세 탄생설화에서는 말이 등장하는데 이 또한 금와
왕의 탄생에 등장한 말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말이 ‘무릎 꿇어 절을
하였다’고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무릎 꿇어 절을 하는 것과 같은 모습
39) 망산은 나정에서 43.5˚ 방향, 금실산은 42.5˚ 방향, 보깃산은 28˚ 방향, 성부산
은 34˚ 방향에 놓여 있으므로 성부산이 각도 상으로 가장 근접해 있다. 성부산
정상은 34˚ 방향으로 비록 2˚의 차이는 있지만 도랑이 정확하게 직선으로 파인
것은 아니므로 그 정도의 오차는 충분히 있을 수 있다.
40) ?三國遺事? 권2, 紀異 文虎王法敏. 星浮山은 星孫乎山으로 표기되기도 한다. ‘孫
乎’의 損은 ‘덜다’이고 乎는 ‘온’의 음가를 지니므로(이두에서 ‘爲乎’는 ‘온’으로
읽는다), ‘損乎’는 ‘던’이라는 음을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뜬’이라는 뜻이다(고대
우리말에는 된소리가 없었다는 것이 국어학자들의 일치된 견해이다). 따라서 ‘星
浮山’은 뜻을, ‘星損乎山’은 소리를 표기한 것으로 ‘별뜬산’을 뜻하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41) ?삼국유사?에 전하는 이야기에는 신라군이 백제를 멸하고 난 후 漢山城에서 고구
려, 말갈의 군사에 몰려 위기에 빠졌을 때 김유신이 이 산 꼭대기에 壇을 쌓고 神
術을 쓰니 큰 독 만한 빛이 제단에서 나오더니 별이 되어 북쪽으로 날아가서 적군
을 쳐부숴서 한산성의 군사들이 무사히 돌아왔다고 한다. 그래서 그 산을 성부산
이라고 했다 한다(?삼국유사? 권1, 기이 태종춘추공), 하지만 성부산이라는 이름
은 그 전부터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더 높은 남산이나 선도산을 제치고
성부산에 단을 쌓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평양 첨성대의 서사구조와 연개소문의 탄생 249
[跪拜之狀]’을 하고 있었다고 표현한 것은 절을 하는 것과 같은 모습으로
다른 어떠한 행위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19세기에 신재효(申在孝)
가 정리한 판소리 여섯마당 가운데 하나인 「가루지기타령」에서 옹녀가 변
강쇠를 희롱하며 변강쇠의 성기가 눈물을 흘리며 절을 한다고 했던 것은
금와왕 탄생설화와 박혁거세 탄생설화의 말이 한 행위를 연상케 한다.42)
더구나 다리를 접고 꿇어앉은 말의 형상은 남성의 외부 생식기 일체를 연
상케 한다. 마찬가지로 (사)의 수로왕 탄생설화에서 거북이에게 머리를 내
밀라고 했던 것도 남성의 성기를 거북이 머리에 빗대었던 것으로 이해된
다.
그리고 이제까지의 논리를 따르면 박혁거세 탄생설화에서 빛이 우물 속
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빛이 왜 우물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우물 옆에 비추
어졌는지 이해할 수 있다. 북극성은 우물 옆에 빛을 내려 자신의 남성의
화신인 말을 내려 보낸 것이다.
실제로 박혁거세 탄생설화의 우물 속의 알을 표현한 유적이 백제와 일
본에서 발굴되었다. 8세기 나라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오사카 하비
키노시(羽曳野市) 노노카미(野々上) 유적의 2901호 우물에서는 주둥이 부
분을 일부러 깨서 떼어낸 스에키(須惠器) 항아리 9점이 출토되었다(<그림4
‒중>). 그리고 그 아래 최하층에는 목과 윗부분을 떼어내 아랫부분만 남
은 하지키(土師器) 항아리를 이중으로 겹쳐놓고 그 위에 온전한 하지키 항
아리를 올려놓아 만든 세트 여럿을 빈틈없이 늘어놓았다(<그림 4 ‒하>).
항아리 주둥이를 깨뜨린 것은 알을 깨고 나온 것을 표현한 것으로 생각되
며, 하지키 항아리 밑에 이중 받침 모양으로 있는 부분은 깨진 알 껍질을
상상하기에 충분하다.43)
42) 강한영校注, 1971 ?申在孝판소리사설집? 민중서관, 539쪽. “저 여인 살짝 웃으며
갚음을 하느라고 강쇠 기물 가리키며, 이상히도 생겼네, 맹랑히도 생겼네 … 성정
도 혹독하다, 화 곧 나면 눈물 난다 … 소년인사 다 배웠다, 꼬박꼬박 절을 하네”
250 역사와 현실 79
<그림 4> 우물 바닥의 토기들
(상) 풍납토성 우물의 항아리,
(중)(하) 노노카미 유적 우물의 항아리
같은 사례가 백제 유적에도
있다. 백제에서는 5세기 전반기
에 풍납토성 경당지구 206호 유
구에 우물을 파고 전국의 지방
세력들이 각자 갖고 온 항아리
215개를 주둥이를 일부러 깨어
우물 바닥에 다섯 층으로 묻었
다(<그림4 ‒상>).44) 경당지구 우
물은 5세기 전반에 조성된 온조
묘(溫祚廟)의 중심시설로 짐작
된다. 우물 바닥에 5층으로 묻은
215점의 토기는 여러 지방 세력
우두머리들이 태어난 알이며, 토
기 주둥이를 모두 일부러 깨뜨
린 것은 알을 깨고 탄생한 것을
상징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백
제의 귀족들은 항아리(알)를 한
우물에 묻음으로써 자신들이 모
두 한 우물에서 나온 한 핏줄이
라는 것을 강조하며 백제 왕실
에 충성을 서약하는 상징적 의
례를 치렀을 것이다.45)
43) 狹山池博物館, 2006 ?水にうつる願い?(平成18年度特別展都錄) 大阪府立狹山池博
物館, 28~29쪽
44) 정연식, 2009(b) 앞의 논문, 322쪽
45) 필자는 예전 글에서 우물 안의 항아리를 子宮으로 해석했으나(정연식, 2009(b) 앞
평양 첨성대의 서사구조와 연개소문의 탄생 251
(바)의 김알지 탄생설화에서는 황금궤와 흰 닭이 등장한다. (사)의 수로
왕 탄생설화에서도 황금궤와 같은 뜻의 금합이 등장하는데 다만 다른 것은
(바)에서는 황금궤 안에서 바로 사내아이가 나왔고, (사)에서는 황금알이
나와 그 황금알이 사내아이로 변한 것으로 되어 있다. (사)의 수로왕 탄생
설화와 같은 구조의 이야기가 석탈해 탄생설화이다. 석탈해는 본래 용성국
(龍城國) 왕비의 몸에서 큰 알로 태어났는데 왕이 불길하다 하여 궤(櫃)에
넣어 배에 실어 바다에 띄웠다. 그 배가 계림 동쪽 아진포(阿珍浦)에 이르
러 고기 잡는 노파가 이를 발견하고 궤를 열었더니 사내아이가 있었다고
하였다.46) 결국 석탈해도 궤 안에 알로 있다가 그 안에서 나온 것이다. 따
라서 (바)의 황금궤 안에도 알이 있었다고 볼 수 있으며 난생설화의 한 변
형으로 이해할 수 있다.47)
그리고 (바)의 황금궤 안에 알이 있었다는 더 뚜렷한 증거는 따로 있다.
여기서는 남성의 상징 말 대신에 닭이 등장한다. 닭은 여성의 상징이다.
알영부인은 계룡(雞龍)의 왼쪽 옆구리에서 태어났고, 처음에는 입이 닭의
부리모양으로 생겼다.48) 처음 어떤 동물을 남성과 여성의 상징으로 선택할
때에는, 흔히 볼 수 있고 성적 특징을 뚜렷하게 지닌 동물을 택했을 것이
다. 생식기가 매우 크고 힘차게 달리는 숫말을 남성의 상징으로 선택했듯
이 매일 알을 낳는 암탉은 여성의 상징으로 선택했을 것이다.
의 논문, 323~325쪽) 알로 수정한다.
46) ?三國遺事? 권1, 紀異2 第四脫解王
47) 설화들은 여기저기서 서로 얽혀 있다. ?고사기?에서 床 위에 놓아두었던 붉은 알
이 아가루히메로 변한 것과 ?駕洛國記?에서 榻에 놓아두었던 황금알이 수로왕으
로 변한 것이 그러하고, 「동명왕편」에서 낯선 남자와 관계했다는 이유로 아버지
河伯의 벌을 받아 입이 석 자나 되게 늘어났던 柳花가 왼쪽 겨드랑이로 알을 낳은
것과, ?삼국유사?에서 알영이 입이 닭 부리처럼 생긴 상태로 雞龍의 왼쪽 옆구리
에서 나온 것도 그러하다.
48) ?三國遺事? 권1, 紀異2 新羅始祖赫居世王
252 역사와 현실 79
흰 닭은 하늘에서 내려온 자색 구름에 감응되어 알을 잉태했고 알을 낳
아 둥우리에서 품고 있었을 것이다. 그 둥우리가 바로 나뭇가지에 걸려 있
던 금궤였던 것이다. 그리고 닭이 울었다는 것도 알을 낳으면 반드시 우는
암탉의 습성을 설화에 그대로 묘사한 것이다.
그리고 이제까지 설화에서 해나 북극성이 직접 떨어지지 않고 빛을 내
려 보낸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아무리 설화라고는 하지만 해나 북극성이 떨
어질 수는 없는 일이다.
경주 첨성대에서 우물 모양의 첨성대에 왜 첨성대라는 이름이 붙었는지
는 명백해진다. 우물 모양의 첨성대 안으로 별빛이 내려왔을 것으로 짐작
되며, 그 빛을 내려 보낸 별은 하늘의 제왕 북극성이었고 북극성의 별빛이
우물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선덕여왕이 잉태되었을 것이다. 첨성대는 빛의
형상으로 정기를 우물 속으로 보내어 위대한 인물이 지상에 잉태되고 태어
나게 한 별을 우러러 쳐다보는 대였던 것이다.49) 그리고 이러한 추리가 합
49) 필자는 예전 글에서 경주 첨성대에서 별이 탄생을 예고했다고 했는데 정확히 표현
하면 탄생을 예고한 것이 아니라 탄생에 직접적으로 관여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
다. 또한 경주 첨성대가 기본적으로 ‘선덕여왕의 위대한 탄생’을 상징하는 건축물
이며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박혁거세가 탄생한 우물과 석가모니가 탄생한 마야부
인의 몸에 선덕여왕의 탄생을 예고한 별이 어우러진 ‘삼위일체 성탄대’로 규정하였
다. 그러나 별과 우물이 서사적으로 하나로 결합되어 있으므로 삼위일체 성탄대라
는 주장을 철회한다. 물론 그렇게 하더라도 ‘선덕여왕의 위대한 탄생’이라는 기본
적인 의미에는 변화가 없으나 ‘삼위일체 성탄대’라는 규정은 蛇足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첨성대는 마야부인의 몸 모양을 한 우물에 별빛이 들어
가 선덕여왕이 태어났음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여기서 ‘마
야부인’은 성골의 조상 석가모니의 어머니 마야부인만을 지칭한 것일 수도 있지만,
석가모니의 어머니 마야부인과 선덕여왕의 어머니 마야부인을 동시에 지칭하는,
이중적인 의미의 것일 수도 있다. 이미 왕과 왕비의 이름마저 석가모니 부모의 이
름을 딴 중고왕실이 선덕여왕이 마야부인의 옆구리로 태어났다고 했을 가능성도
그리 낮지 않은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평양 첨성대의 서사구조와 연개소문의 탄생 253
당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개성 첨성대가 왕건의 탄생을 형상화하여 북극성
을 잉태한 태(胎)의 형상으로 조성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50)
그리고 이제까지 밝혀진 것에 의하면 시조 설화의 남성은 부여·고구려
에서는 해로 표현되었고, 신라·가야에서는 북극성으로 표현되었다. 그리
고 여성은 부여·고구려에서는 곤연과 구지에서 보이듯이 못으로 표현되었
으며 신라에서는 나정과 첨성대에서 보이듯이 우물로 표현되었다. 백제의
경우에도 풍납토성 경당지구 206호 유구에서 우물로 표현되었다.51) 결국
이것만으로 보면 한강 이북에서는 해와 못으로, 한강 이남에서 북극성과
우물로 표현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지역적 차이에 의한 것인지, 시간적
차이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이유로 인한 차이인지, 그것도 아니면
너무 적은 사례에서 흔히 나타나는 우연의 일치인지는 알 수 없다.
3. 평양 첨성대와 연개소문의 탄생
1) 첨성대의 건립 시기
이제까지 해나 북극성은 땅에 떨어지지는 않고 다만 빛을 내려 보내기
도 하고 말을 내려 보내기도 하고 끈을 내려 보내기도 했다. 평양 첨성대
에서는 구요가 떨어진 것도 아니고 빛을 내려 보낸 것도 아니며 날아들었
다고[飛入] 했다. 구요에는 해와 달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것들이 아주 떨어
졌다면 너무 비현실적이므로 그렇게 표현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보다는
다른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날아 ‘들었다’는 것은 그것이 지
금 ‘안에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9묘 안에는 9요가 있었을 것이다. 물론 9
50) 개성 첨성대에 관한 글은 곧 발표할 예정이다.
51) 정연식, 2009(b) 앞의 논문, 323~325쪽
254 역사와 현실 79
요는 별이 아니라 초상이나 입체상의 형태로 봉안되어 있었을 것이다. 시
대와 상황이 다르기는 하지만 실내에 9요를 모신 것으로는 후삼국시대 동
주(東州: 철원) 발삽사(㪍颯寺) 불당의 예가 있다.52)
그러면 평양 첨성대는 언제 지은 건축물일까? 우선 평양 첨성대는 고구
려의 것으로 보인다. 물론 통일신라, 고려, 조선시대의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 가능성을 완벽하게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경주 첨성대가 신라의 왕
경에 있고 개성 첨성대가 고려의 황성에 있듯이 평양 첨성대도 수도에 있
었다고 보는 것이 확률적으로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별과
물의 결합에 의한 위대한 인물의 탄생이라는 서사구조는 7세기 말에 사라
졌다. 따라서 그것은 7세기 말 이전의 건축물일 가능성이 높고 그렇다면
고구려의 첨성대이어야 한다.53)
평양 첨성대가 고구려의 것이라면 설치 장소로 보아 6세기 후반 이후의,
이른바 후기 평양성 시기의 건축물로 짐작된다. 첨성대와 같은 건축물은
수도에 있는 것이 적절하기 때문이다. 첨성대가 있었던 곳은 고구려의 장
안성 지역으로 6세기 후반부터 수도가 된 곳이다. 고구려가 장안성의 축성
을 시작한 것은 552년(양원왕 8)이었고 안학궁이 있는 전기 평양성에서 장
안성으로 천도한 것은 586년(평원왕 28)이었다. 그러므로 첨성대의 건축시
기는 최대한 올려 잡아도 6세기 후반을 넘어서기는 어렵다.
52) 발삽사 불당에 흙으로 빚은 鎭星像이 熾星光如來像 앞에 있었다고 하므로(?三國史
記?, 권50 列傳10 弓裔; ?高麗史? 권1, 世家1 太祖) 진성상이 홀로 있지 않고 치성
광여래상과 함께 봉안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아 나머지 8요도 함께 봉안되어 있었
던 것으로 보인다.
53) 안타깝지만 지면의 제한이 있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음에 대해 양해를 구한다.
7세기 후반에 별과 물의 서사구조가 폐기된 것은 앞으로 차례대로 발표할 ①고려
개성첨성대, ②신라 종묘, ③신라의 왕과 별 등 세 편의 논문에서 밝혀질 것이다
(①②는 완성되었고 ③은 집필 중이다). 위의 사실은 ②단계에서 상당 부분이 설
명되는데 ②는 ①이 전제되어야 하므로 발표까지 시간이 필요하다.
평양 첨성대의 서사구조와 연개소문의 탄생 255
다음으로 평양 첨성대는 구요와 연관된 것으로 보아 7세기 이후의 건축
물로 보인다. 구집(九執)이라고도 하는 구요는 일월(日月)과 5행성(五行星)
을 더한 7요에 다시 인도 천문학에서 유입된 나후성(羅睺星)과 계도성(計
都星)을 더한 것을 말한다.54) 그런데 중국에는 이미 7세기에 인도천문학이
유입되어 있었다. 그것은 이미 600년 경에 ?바라문천문경(婆羅門天文經)?
이 저술된 것으로도 알 수 있다.55)
당나라에 도입된 구요 신앙이 고구려에 전파되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
이 소요된 것 같지 않다. 수나라와의 전쟁으로 오랫동안 시달려 왔던 고구
려와, 중원을 통일한 지 얼마 안 되어 안정이 필요했던 당이 서로 정략적
으로 우호적인 외교 관계를 맺고, 도교를 매개로 하여 활발하게 교류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56) 고구려에는 이미 도교의 한 갈래인 오두미교(五斗米
敎)가 성행하고 있었는데 624년(영류왕 7)에 고구려가 당에 책력(冊曆)을
요청했을 때 당 고조는 천존상(天尊像)과 함께 도사(道士)를 파견하였고 이
러한 교류는 그 이듬해에도 이루어졌다. 그리고 연개소문이 실권을 장악한
뒤로 그의 주도로 도교의 도입은 더 활발하게 추진되었다.57)
54) 일식과 월식은 태양의 행로 黃道와 달의 행로 白道가 교차하는 곳에서 발생하는데
인도에서는 두 군데 교차점에 일식, 월식을 일으키는 상상의 별로 나후성과 계도
성을 상정하였으며, 그 이름은 Rāhuḥ와 Ketuḥ를 소리 나는 대로 표기한 것이다
(김일권, 2008 ?우리 역사의 하늘과 별자리? 고즈윈, 210~211쪽).
55) Joseph Needham, 1959 Science and Civilisation in China Ⅲ, Cambridge
University Press, p.202. 인도천문학은 8세기에는 더욱 성하여 인도에서 온 구담
실달(瞿曇悉達: Gautama Siddhārtha)은 718년에 ?구집력(九執曆)?을 번역하여 인
도천문학을 전하고, 729년에는 ?개원점경(開元占經)?을 간행하였으며, 759년에는
불공(不空: Amoghavajra)이 ?수요경(宿曜經)?을 번역, 소개함으로써 인도천문학은
중국의 천문학과 역법에 깊숙이 침투되었다.
56) 김수진, 2010 「7세기 고구려의 도교 수용 배경」 ?한국고대사연구? 59
57) ?三國遺事? 권3, 興法3 寶藏奉老普德移庵. 7세기에 고구려에서 불교가 세력을 잃
고 도교가 성행하게 된 상황에 대해서는 정선여, 2005 「7세기대 고구려 불교정책
256 역사와 현실 79
이러한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건대 당과 교류하는 과정에서 7세기 이른
시기에 구요신앙과 연관된 인도천문학이 고구려에 도입되었을 가능성이 높
다. 그런데 고구려가 중국보다도 먼저 인도천문학을 받아들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9요와 관련된 첨성대의 건립시기는 인도천문학이 중국에
전파된 시기 이후로 볼 수밖에 없으며 그렇다면 그 시기는 7세기로 보아야
할 것이다.
2) 첨성대의 주인, 연개소문
이제까지의 추리에 따르면 평양 첨성대의 주인은 7세기의 인물로 추정
된다. 그 인물이 누구인지 추정할 수 있는 요소들을 하나씩 들어보기로 한
다.
첫째, 첨성대의 위치이다. 첨성대가 만약 왕의 탄생을 상징한 건물이었
다면 궁궐 가까이 세웠을 터인데, 첨성대는 내성의 궁궐터로 추정되는 만
수대 일대에서 약 2㎞나 떨어진 곳에 있다. 개성 첨성대가 고려궁성 터에
서 서쪽으로 약 100m 떨어진 곳에 있고, 경주 첨성대가 월성에서 약 300m
떨어진 곳에 있는 것과 비교하면 평양 첨성대는 왕의 탄생을 상징한 건물
이라기에는 궁궐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그림 5>). 따라서 평양 첨성
대의 주인은 왕은 아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평양의 장안성은 내성, 중성, 외성, 북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내성, 북성, 외성이 6세기 말까지는 완공되었을 것으로 보는 데는
별로 이견이 없다. 다만 중성은 연구자에 따라서는 고려시대의 것으로 보
기도 하지만 현재 북한에서는 중성도 6세기 말에는 완공된 것으로 보는 것
이 일반적이다.58) 그럴 경우 내성에는 궁궐이, 북성에는 궁성의 보호 시설
의 변화와 普德」 ?백제연구? 42 참조.
58) 최무장, 1995 ?고구려 고고학 Ⅰ?, 민음사, 212~217쪽 ; 임기환, 2003 「고구려 도
평양 첨성대의 서사구조와 연개소문의 탄생 257
<그림 5> 장안성의 첨성대와 궁궐 위치 추정도
이, 외성에는 주로 일
반 주민의 주택이 있을
것으로 보며, 중성에는
주로 행정기관과 귀족
의 저택이 있었을 것으
로 추정된다.59) 그렇다
면 첨성대는 어떤 귀족
의 것일 가능성이 높
다. 다만 이렇게 독특
한 건축물을 지은 귀족
이라면 평범한 귀족이
아니라 상당한 권력을
지닌 귀족이며 나아가
서는 실질적으로는 왕
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권력을 지닌 인
물로 생각할 수 있다.
다만 아무리 강력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더라도 신하가 의례(儀禮)에서도
왕을 능가할 수는 없으므로 궁궐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첨성대를 세웠을
것이다.
둘째, 9요와 연관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주인공이 왕은 아니지만
막강한 권력과 지위를 지닌 인물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만약 그것이 왕의
성제의 변천」 ?한국의 도성?, 서울학연구소, 23~24쪽 ; 김희선, 2010 ?동아시아
도성제와 고구려 장안성?, 지식산업사, 59~63쪽
59) 임기환, 2003 앞의 논문, 24쪽. 중성이 나중에 축조된 것이라고 하더라도 평양 첨
성대가 강력한 권력을 지닌 귀족의 것이라는 데에는 거의 장애가 되지 않는다.
258 역사와 현실 79
탄생을 상징한 것이라면 앞에서 말했듯이 북극성이나 해가 등장했을 것이
다. 물론 9요 가운데에도 해가 포함되어 있지만, 해가 단독으로 등장하지
않고 북극성을 보좌하는 여러 별 가운데 하나로 존재하기 때문에 왕을 상
정할 수 없다. 하지만 9요를 모두 거론한 것은 첨성대의 주인공이 9요의
정기를 한 몸에 받아 태어난 인물이라는 뜻이므로 제왕에 버금가는 막강한
권력을 지닌 존재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비슷한 사례로 훗날 흥무대왕(興
武大王)으로 추존된 김유신도 7요의 정기를 받고 태어나 등에 칠성 무늬가
있었다고 한다.60)
세째 구묘(九廟)와 연관되어 있다는 점이다. 본래 9묘는 황제의 사당이
다. 천자의 사당은 본래 태조묘(太祖廟)에 3소묘(昭廟)와 3목묘(穆廟)를 더
하여 7묘였다. 그런데 전한(前漢)의 왕망(王莽)이 황제 자리를 찬탈하고 신
(新)을 건국하면서 건국 초기에 여러 가지 새로운 제도를 만들어서 황제의
사당을 조묘(祖廟) 다섯에 친묘(親廟) 넷을 더하여 구묘로 바꾸었다.61) 이
때부터 황제의 사당이 종종 9묘의 형식을 취했다. 그런데 첨성대의 구묘가
황제를 칭하기 위해 구묘를 만들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듯하다. 기록이 남
지 않은 탓일 수도 있지만 7세기의 고구려 왕이 황제를 칭한 사례가 발견
되지 않고, 앞에서도 말했듯이 궁궐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것
은 5조(五祖)와 4친(四親)을 모신 사당이 아니라 말 그대로 9요를 모신 사
당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런데 9묘가 아무리 내용상으로는 5조묘와 4친묘를 합한 황제의 9묘가
아니라 9요의 묘라 하더라도 황제의 사당만이 칭할 수 있는 구묘라는 이름
을 칭한다는 것은 왕권을 능가할 정도의 실권을 장악한 인물이 아니라면
감히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이다.
결국 첨성대의 주인은 7세기에 고구려에서 왕을 능가할 만한 권력을 장
60) ?三國遺事? 권1, 紀異2 金庾信
61) ?漢書? 권99中, 王莽傳69中 始建國元年
평양 첨성대의 서사구조와 연개소문의 탄생 259
악했던 인물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 인물로는 단연코 연개소문
(淵蓋蘇文)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연개소문은 642년에 정변을 일으켜 영류왕을 살해하고 보장왕을 옹립한
뒤에 자신은 스스로 막리지(莫離支) 자리에 올라 왕 바로 밑의 최고 권력
자로 군림했다. 그는 실제로는 왕보다도 더 강력한 권력을 휘둘렀던 인물
이다. 물론 연개소문 집안은 할아버지 자유(子遊)나 아버지 태조(太祚) 때
에도 막리지를 지낸 최고 가문이었지만 도성 안에 이런 시설물을 세우는
것은 단순한 최고위관직자가 아니라 국왕을 능가할 만한 최고권력자 단계
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연개소문은 과시욕이 대단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평소에도 칼을
다섯 자루나 차고 다녔다 하며 좌우의 사람들도 그를 감히 쳐다보지 못했
고 말을 타고 내릴 때에는 귀인이나 무장에게 땅에 엎드리게 하여 딛고 오
르내렸다고 한다.62) 그런 인물이 자신이 9요의 정기를 받고 태어났다고 주
장하며 9묘를 세웠을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은 그리 부자연스러운 일이 아
니다.
그리고 첨성대의 주인이 연개소문이라는 결정적인 증거는 또 있다. 연개
소문은 본시 스스로 수중(水中)에서 태어났음을 자처했다고 한다.63) 그래
서 성도 못의 뜻을 지닌 ‘연(淵)’이라고 했다.64) 1913년에 뤄양(洛陽)에서
발견된 개소문의 맏아들 남생(南生)의 묘지명(墓地銘)에서도 조상이 샘에
서 나와 성을 천(泉)이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65) ?신당서(新唐書)?를
62) ?삼국사기? 권49, 열전9 蓋蘇文
63) ?삼국사기? 권49, 열전9 蓋蘇文
64) 연개소문은 ?日本書紀?에 ‘이리가수미(伊梨加須彌)’로 표기되었는데, ?釋日本紀秘
訓?에서는 그것을 ‘이리카스미(イリカスミ)’로 읽는다고 하였다. ‘카스미’는 ‘개소
문’을 나타내고 ‘이리’는 못, 샘, 우물을 뜻하는 고어 ‘얼’을 나타낸다(이홍직, 1956
「연개소문에 대한 약간의 存疑」 ?이병도박사화갑기념논총? ; 1973 ?한국고대사의
신연구?, 신구문화사, 288~294쪽).
260 역사와 현실 79
비롯한 중국측 기록에는 성이 천(泉)으로 기록되어 있고, 중국측 기록을 이
용하여 편찬된 ?삼국사기?에도 그러한데 이는 당 고조 이연(李淵)의 이름
을 피한 것이다. ‘연(淵)’이나 ‘천(泉)’은 구지(九池)의 ‘지(池)’와 상통한다.
첨성대와 관련 시설은 어떤 모습일까? 우선 어떤 인물이 9요의 정기를
한 몸에 받았음을 상정한다면, 9묘도 당연히 9요를 봉안한 하나의 사당으
로 보는 것이 옳다.66)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발삽사 불당이 그랬듯이 그 안
에는 9요를 인격신으로 형상화한 상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구지도 9개의 못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구지라는 이름을 붙인 하
나의 못이었을 것이다.67) 못은 아기가 나오는 곳이므로 만약 구지가 9개의
못이라면 9명의 탄생을 설정해야 한다. 그렇다면 연개소문의 아버지부터 9
대조까지의 인물을 상정하거나, 연개소문을 포함하여 8대조를 상정해야 하
는데 그것은 지나친 설정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연개소문의 5조(五祖)와 4
친(四親)을 모신 것으로 해야 하는데 그것은 왕을 능가하는 황제의 사당을
지었다는 것이 된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연개소문이 실제로는 아무리 보장
왕보다 더 큰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의례에서도 왕을 능가할
수는 없는 일이다.
따라서 전체적인 배치는 구요상을 봉안한 사당 구묘 앞에 못 구지가 있
고 그 옆에 첨성대가 서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다.
결국 평양 첨성대는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켜 실권을 장악한 642년 이
65) 「泉男生墓誌銘」 “公 姓泉 諱男生 字元德 遼東郡平壤城人也 原夫遠系本出於泉 旣
託神以隤祉 遂因生以命族”
66) 5묘의 경우에도 대개 사당 다섯 채에 따로 모시지 않고 한 채에 다섯을 함께 모
신다.
67) 나일성은 9지를 9개의 못으로 보고 <그림 1>의 「평양전도」에서 9개 가운데 6개를
찾았다(나일성, 2000 ?한국천문학사?, 서울대학교출판부, 18쪽). 그러나 중성을 외
성으로 잘못 보고 있으며, 9지가 9개의 못이라 하더라도 평양성 곳곳에 분산되어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9지 옆에 첨성대가 있었다고 했기 때문이다.
평양 첨성대의 서사구조와 연개소문의 탄생 261
후 고구려가 멸망하기 전 어느 때에 연개소문의 위대한 탄생을 기리기 위
해 세워졌을 것이다. 불확실한 추정이지만 더 범위를 좁혀본다면 연개소문
생존 시인 665년 이전에68), 그 중에서도 집권 초기에 세워졌을 가능성이
높다. 그 때는 경주 첨성대가 세워진 633년에서 그리 멀지 않은 시기이다.
첨성대가 연개소문의 집권 초기에 세워졌다고 보는 이유는 첨성대의 건
립 목적과 관련되어 있다. 경주 첨성대는 선덕여왕의 즉위에 대한 반감을
불식시키고 신성한 여왕의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지은 건축물이고, 개성
첨성대도 고려 건국 초기에 불안정한 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세웠던 것
으로 생각된다. 연개소문의 집권 초기에도 영류왕을 무자비하게 살해하
고69) 최고 권좌에 오른 그에게 반감을 품고 있었을 사람들이 많았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연개소문은 그러한 상황을 타개하고 자신의
위대함을 과시할 목적으로 첨성대를 세웠을 것으로 짐작된다.
4. 안학궁 옆 7각건물의 성격
이제까지 소개한 첨성대 외에 최근 또 하나의 첨성대가 후보로 등장했
다. 2009년 12월에 일본의 재일본 조선인총연합회 기관지인 「조선신보(朝
鮮新報)」는 평양 대성산 기슭에 건설 중인 평앙민속공원 부지 안에서 고구
려 첨성대 유적을 발굴했다는 소식을 전했고, 그 소식이 연합뉴스를 통해
68) 연개소문의 사망연도는 ?삼국사기? ?구당서? ?신당서? ?자치통감? 등에는 666년, ?일본서기?에는 664년으로 기록되어 있고 「泉男生墓誌銘」의 기록으로는 665년으
로 해석되는데 666년설은 타당성이 희박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이홍직, 1973 앞
의 책, 298~301쪽).
69) 연개소문은 영류왕을 살해한 뒤 시신을 토막 내어 구덩이에 버렸다고 한다(?삼국
사기? 권49, 열전9 蓋蘇文).
262 역사와 현실 79
<그림 7> 안학궁 옆 7각건물 평면도
<그림 6> 7각 보조시설(가)과
4각 중심시설(나)
(연합뉴스 2009년 12월 11일)
국내에도 전해졌다.70)
보도에 의하면 첨성대 유적은
대성산 소문봉 남쪽 기슭 안학궁터
의 서문에서 서쪽으로 약 250m 떨
어진 곳에 있으며, 유적의 총 부지
면적은 약 380㎡라고 한다. 형태는
한 변의 길이가 9.1~9.2m인 7각
형의 건물로 돌로 쌓았는데, 남쪽
면 중심점과 북쪽 꼭지점을 연결하
는 직선을 기준으로 방향을 판정하
면 자북(磁北)에서 동쪽으로 14˚,
진북(眞北)에서 동쪽으로 6.5° 치
우쳐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안쪽
은 돌과 석회를 다져서 쌓은 사각
형 시설이 있는데 상단 남북길이는
7.5m, 동서 너비는 6.7m이고 아래
기초부분의 남북은 7.2m, 동서는
6.7m, 폭이 2.1m라고 한다. 그리
고 가운데 부분은 숯과 자갈, 회를
엇바꾸어 층층이 켜로 쌓았다고 한
다. 그리고 중심부의 속이 빈 4각
시설을 중심시설로, 외곽의 7각시
설을 보조시설로 설정하였다(<그
림 6>). 조선신보의 보도를 통해
추정으로 그려본 평양 첨성대의 평
70) 연합뉴스 2009년 12월 11일 보도
평양 첨성대의 서사구조와 연개소문의 탄생 263
<그림 8> 평양 첨성대와 최근 발굴된 7각건물의 위치
면도는 <그림 7>과 같다.71)
그런데 이제까지 평양 첨성대는 ?세종실록?의 기록이나 지도에서나 후
기 평양성인 장안성 쪽에 있었다. 그런데 발표된 첨성대 터는 기존의 첨성
대 터에서 동북쪽으로 직선거리로 약 9㎞나 떨어진 전기 평양성 쪽에 있다
(<그림 8>).72) 그런데 왜 전기 평양성 쪽에서 발굴된 7각건물을 첨성대라
고 추정했는지 의문이 들지만 그와 관련된 정보를 전혀 얻을 수 없었다.
그런데 다행히도 2010년 10월 4일부터 7일까지 나흘 동안 블라디보스톡
에서 열린 ‘한·러수교 20주년기념 국제고려학회 국제학술워크숍’에 북한
측에서 일본측을 통해 김일성종합대학 력사학부 김경찬 강좌장의 첨성대
71) <그림 7>에서 7각형 안의 장방형 구조는 어느 쪽을 향하고 있는지 보도되지 않아
단순히 상상으로 그린 것임을 밝혀둔다.
72) 427년에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천도했을 때의 평양성을 이른바 전기 평양성이라 하
고, 586년에 장안성으로 천도했을 때의 평양성을 후기 평양성이라 부르기로 한다.
264 역사와 현실 79
발굴결과에 관한 글을 보내왔다.73) 그 글에서는 북한에서 이 시설물을 첨
성대로 추정한 근거로 대체로 네 가지를 들고 있다.
첫째로 기초가 단단하고 중심부 시설 주변에 화강암 석재가 많이 흩어
져 있는 것으로 보아 중심시설은 경주 첨성대와 같이 속이 빈 통 모양으로
높이 솟은 건축구조물이라는 것이다. 둘째로 유적의 위치가 대성산 소문봉
의 남쪽 기슭에서 뻗어 내려온 작은 능선이 평지로 내려오면서 형성한 완
만한 구릉 위에, 사방이 탁 트인 곳에 자리잡고 있어 천체 관측에 유리한
지점에 있다는 점이다. 셋째로 안학궁 서쪽 가까이에 있다는 점이다. 넷째
로 보조시설인 7각형 시설의 7이라는 숫자는 일월오행성의 7정과 일치하
며 별자리 28수도 방위별로 7개씩 존재했으므로 천문학과 밀접한 숫자라
는 것이다.74)
북한의 주장에는 수긍하기 어려운 점도 있다. 즉 경주 첨성대는 신라 궁
전 임해전 터 서쪽에 있고, 개성 첨성대는 만월대 서쪽에 있고, 조선 첨성
대는 경복궁의 근정전, 교태전의 서쪽에 있는데 7각건물도 안학궁 서쪽에
있으므로 첨성대일 것이라고 유추하고 있다. 그러나 개성 첨성대는 만월대
서쪽에 있지만 경복궁 첨성대(소간의대 또는 간의대)는 궁성 안에 있고, 경
주 첨성대는 궁성 북서쪽에 있으며, 경희궁 첨성대는 궁성(경희궁) 남쪽에
있다. 그리고 광화방 첨성대(소간의대)는 궁성(창덕궁) 서쪽에 있지만 궁성
이 첨성대보다 후에 건립되었으므로 정확히 말하면 첨성대를 궁성 서쪽에
세운 것이 아니라 궁성을 첨성대 동쪽에 지은 것이다.75) 그리고 설치지점
이 관측에 유리한 지점이라는 것도 사실 확인이 어려워 현재로서는 긍정도
73) 당시 학술워크숍에 참석했던 서울대 송기호교수가 김경찬의 글을 필자에게 전해주
어 읽어볼 수 있었다. 자료를 제공해 준 송기호교수에게 감사를 표한다.
74) 김경찬, 2010 「새로 발굴된 고구려 첨성대터에 대하여」(한·러수교 20주년기념 국
제교려학회 국제학술워크숍 발표문)
75) 정연식, 2010(b) 앞의 논문, 6~7쪽
평양 첨성대의 서사구조와 연개소문의 탄생 265
부정도 하기 어렵다. 첨성대의 위치를 안학궁 서문에서 250m 떨어진 지점
이라 했는데, 구글 어스(Google Earth)를 이용하여 서문에서 서쪽으로
250m 반원을 그려 위치를 찾아보면 반원 위의 지점들이 사방이 탁 트인
곳은 맞는데 불룩 솟은 지점을 찾을 수는 없었다.76)
그런데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북한측의 주장에 귀 기울일 만한 요소
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선 안학궁의 건축시기에 대해서는 약간의 논란이
있으나 그것이 이른바 전기 평양성의 궁성이었다는 데 대해서는 크게 의심
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77) 고구려는 334년(고국원왕 4)에 평양성을 증축하
여 평양 경영을 시작했다. 그리고 392년(광개토왕 2)에 평양에 9사(九寺)를
창건하고 427년(장수왕 15)에 마침내 안학궁터 자리의 평양으로 천도했다.
그 후 552년(양원왕 8)에 현재의 평양 중심부에 해당하는 지역에 장안성을
쌓기 시작했고 571년(평원왕 13)에 궁실을 중수하여 마침내 586년에 장안
성으로 천도했다. 그러므로 안학궁과 아울러 7각건물도 427년 평양천도부
터 586년 장안성천도까지의 기간에 건설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북한에서도 5세기 전반기부터 6세기 말엽 사이에 지은 것으로 보았다.
5세기 전반부터 6세기 말엽 사이에 궁성 가까이에 높이 세운 속이 빈 7
각 건물은 무엇일까? 이 시기에는 9요를 상정한 인도천문학이 도입되기 전
이었으므로 7요(七曜)만이 인정되었다. 7각형은 작도도 어려운 독특한 다
각형인데 건물을 굳이 이런 형태로 지은 것은 7요의 보좌를 받는 북극성을
상정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제왕의 상징물로 인정할 수 있다는 뜻
이다. 그리고 도읍의 궁성 가까이에 있는 독특한 건물을 첨성대로 추정하
76) 민속공원 부지를 조성하는 과정에서 구릉 부분이 깎여서 지형이 변한 탓인지는 알
수 없다.
77) 안학궁의 축조시기에 대한 논란에 대해서는 임기환, 2003 앞의 논문, 20~22쪽 ;
노태돈·이인철, 2006 「안학궁의 역사적 배경과 기존의 연구성과」 ?고구려 안학
궁 조사보고서 2006?, 고구려연구재단, 22~31쪽 참조.
266 역사와 현실 79
는 것도 수용할 만한 가설이다. 경주 첨성대나 개성 첨성대도 궁성 가까이
있는 아주 독특한 형태의 건축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학궁 옆에 있는
7각건물이 첨성대라면 다른 첨성대가 그렇듯이 천문대라기보다는 어느 왕
의 탄생을 상징한 건축물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첨성대였는지는 근거자료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확신을 갖고 말하기 어렵다. 다만 가능성을 열어둘 뿐이다.
맺음말
평양 첨성대는 비록 실물이 남아 있지 않지만 ?세종실록? 지리지에 중
요한 정보가 남아 있어 우리에게 첨성대가 무엇인지 알려 준다. 구지(九池)
옆에 세운 첨성대에서 구묘(九廟)에 구요(九曜)가 날아든 것을 쳐다보았다
는 설정은 별과 못의 결합에 의한 위대한 인물의 탄생을 말하고 있다.
그 서사구조는 부여, 고구려, 신라, 가야의 시조 탄생설화의 서사구조와
일맥상통하며 중국이나 일본의 설화와도 연관되어 있다. 그 설화는 남자
또는 남자를 상징하는 해, 별 또는 말과 여자 또는 여자를 상징하는 우물,
못, 샘, 늪 또는 닭이 성적으로 결합하여 알을 잉태하게 하는 구성을 갖추
고 있다. 이러한 서사구조는 경주 첨성대와 나정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
다.
그리고 평양 첨성대는 7세기의 건물로 보인다. 그렇게 보는 이유는 586
년에 수도가 된 장안성 안에 있으며, 구요를 만들어낸 인도천문학이 600년
경부터 당에 도입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첨성대가 궁궐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며, 북극성이나 해가 아니라
북극성의 권속인 9요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그 주인은 왕은 아니었을 것이
다. 9요는 첨성대의 주인이 9요의 정기를 받아 태어난 인물이었다는 것을
평양 첨성대의 서사구조와 연개소문의 탄생 267
말하는 것이며, 9요가 날아든 9묘는 9요를 봉안한 사당 한 채로 그 안에는
9요의 형상이 봉안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9묘라는 이름은 비록 내용
으로는 9요와 연관되어 붙여진 것이라고 하더라도 겉으로 드러나는 바로는
황제의 사당에 해당된다. 따라서 첨성대의 주인이 9묘를 칭할 수 있었다는
것은 실제로는 왕을 능가하는 권력을 지녔던 인물이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여러 가지 상황을 종합해 보면 첨성대의 주인은 7세기에 왕을 능
가하는 권력을 휘둘렀던 고구려의 최고 권력자로 집약된다. 그 인물은 당
연히 연개소문이다. 그리고 결정적인 증거는 연개소문이 스스로 물 속에서
태어났다고 자처했던 인물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연개소문의 아들 남생의
묘지명에서도 되풀이된다. 연개소문은 자신이 영류왕을 잔혹하게 살해하고
권력을 장악한 것에 대한 여러 귀족들의 반감을 누르고 권력을 공고히 하
기 위해 첨성대를 세웠을 것으로 짐작된다. 스스로 9요에 감응하여 9지에
서 태어난 위대한 인물이라는 것을 과시함으로써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
고 자신의 권력에 신성성을 부여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고 북한에서는 2009년에 안학궁터 옆에서 발견된 7각건물터를 또
하나의 첨성대 유적으로 추정하였다. 그것은 몇 가지 정황으로 보아 상당
한 가능성을 지닌 가설로 생각된다.
* 이 논문은 2011학년도 서울여자대학교 교내학술특별연구비의 지원을 받았음
투고일자 : 2011. 1. 6 심사일자 : 2011. 1. 17 게재확정일자 : 2011. 2. 4
주 제 어 : 북극성, 못, 알, 평양 첨성대, 연개소문
268 역사와 현실 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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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0 역사와 현실 79
<Abstract>
The Narrative Structure that involved the
Cheomseong-dae(瞻星臺) Tower in Pyeong'yang(平壤), and the
Birth of Yeon'gae'so'mun(淵蓋蘇文)
Chung, Yeon-sik
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says that there were nine ponds(九池),
nine shrines(九廟) and a Cheomseong-dae tower in Pyeong'yang, and also that
nine 'luminaries(九曜)' flew into the aforementioned nine shrines. In ancient
myths, water sources such as wells, ponds, fountains or swamps, combined
with the essence of the stars or the sun, usually gave birth to greatly heroic
figures. Such narrative structure can also be identified from the myths that
chronicled the birth of progenitors -the founders- of several ancient political
entities like Buyeo, Goguryeo, Silla and Gaya. The wells, ponds, fountains or
swamps represented themselves in the form of females. They laid eggs after
having a relationship with the sun or the stars, which displayed themselves as
a male figure, and then, a great person was either hatched or born. The
Na'jeong well, as well as the Cheomseong-dae tower, both in Gyeongju, feature
stories that share the same narrative structure.
Cheomseong-dae in the Pyeong'yang area seems to have been built in the
7th century, and the owner, or the 'protagonist manager' of the facility so to
speak, seems to have been no other than Yeon'gae'so'mun, who was the
de-facto ruler of Goguryeo at the time. It must have been built as a symbol -his
dignified birth from a water source- that would show off the divinity of his
power.
In the year 2009, the remains of a heptagonal building were excavated near
the site of the An'ag Palace. North Korean archaeologists are claiming it as
another Cheomseong-dae tower of Goguryeo, but without further evidence, we
cannot be sure.
Keyword : the Polestar, pond, egg, Cheomseongdae in Pyeongyang(平壤 瞻星臺),
Yeongaesomun(淵蓋蘇文)


                                         평양 첨성대의 서사구조와 연개소문의 탄생

2018.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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