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설인귀(薛仁貴) : 당나라의 명장 外

2018. 12. 26. 14:23우리 이웃의 역사

 

 

작자: 미상(*중국측 자료이므로 시각은 중국의 입장에서 보고 있음)

 

설인귀(614 - 683)의 이름은 예(禮)이고, 자가 인귀이다. 산서 강주 용문수촌 사람이다(지금의 산서성 하진시 수촌). 설인귀는 남북조시대의 명장 설안도(薛安都)의 후손이니, 하동 설씨집안이다. 그러나, 그의 대에 이르러서는 이미 몰락하여 어려서 집안은 빈한했다. 다만 타고는 팔힘은 뛰어났다. 젊어서 특별한 일없이 농사를 짓다가 유씨(柳氏)를 처로 맞이한다. 그는 원래 밥을 많이 먹었다고 한다. 그는 가난하고 희망이 없자, 조상을 묘를 이전하는 것도 생각했다. 그때 그의 처인 유씨가 "능력있는 사람이라면, 기회를 잘 잡아야 한다. 지금 황제가 친히 요동을 치러가고자 하니, 바로 맹장이 필요할 때가 아닌가? 당신은 재주가 있으니, 군에 들어가서 공을 세우는 것이 좋겠다. 나중에 공명을 얻은 후에 고향에 돌아와서 이장을 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설인귀는 처의 말을 듣고는 도리에 맞다고 생각하여, 처자와 이별하고 군에 들어간다.

 

고구려정벌에서 공을 세우다.

 

그는 군에 들어가자마자 자신의 용맹함을 드러내며 공을 세우게 된다. 정관19년(645년) 2월 12일, 당태종은 낙양을 출발하여 고구려를 정벌하러 떠난다. 요동의 전쟁터에서 당나라의 장수인 유군공(劉君?)이 고구려군에 겹겹이 포위당하여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위급한 시기에 설인귀는 단창필마로 뛰어들어가 고구려군의 장수 한명의 목을 잘라 말에 걸었다. 고구려군이 뒤로 물러나고, 유군공은 구조된다. 그는 일개 졸병으로서 장수가 해야 할 일을 해낸 것이다. 이 전투이후 설인귀의 명성은 군중에 떨치게 된다.

 

그 후 안시성전투에서 다시 자기의 무예를 드러낸다. 이 전투로 그는 당나라제일맹장이라는 칭호를 듣게 된다. 645년 4월, 당나라군의 선봉대는 고구려로 쳐들어가고 계속 고구려수비를 무너뜨렸다. 6월에 안시성에 도착한다. 안시성에는 고구려의 막리지가 보낸 고연수, 고혜진이 25만의 군대를 이끌고 산을 등지고 군영을 차렸으며, 당나라군을 막으려 하였다. 당태종은 지형을 시찰한 후, 여러 장군들에게 군대를 나누어 돌격하게 명령한다. 이 전투에서 설인귀는 기회를 잡아 이름을 날리려고 생각했던지, 괴상한 복장을 하고 전투에 참가한다. 그는 다른 사병들과 달리 흰 옷을 입고, 손에는 방천화극을 든다. 허리에는 활 두 자루를 차고, 단기필마로 고구려군에 뛰어들었다. 그의 활약은 아주 돋보였다. 고연수와 고혜진은 계속 진형을 가다듬었지만, 설인귀가 한번 치고 들어가면 진형이 무너저 버렸다. 당태종은 멀리서 전투를 지켜보고 있었는데, 흰옷을 입은 설인귀의 활약은 단연 돋보였다. 전투가 끝난 후 당태종이 그를 만나보니 졸병신분이었다. 그리하여 말 2필, 비단 40필, 노비 10명을 주었고, 유격장군, 운천부과의로 승진시켜준다. 아무런 관직도 없던 말단 병사에서 졸지에 황제가 직접 친견하고 장군의 직위를 내려주게 된 것이다.

 

나중에 당나라군대는 안시성을 무너뜨리지 못한다. 황제가 친히 전투에 나섰으므로 우회해서 진격할 수도 없었다. 그러다가 겨울을 만나고, 군수물자의 조달이 어려워지자, 철수하게 된다. 돌아와서 당태종은 설인귀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짐의 옛 장수들은 모두 나이가 들었다. 이미 전쟁과 같은 중임을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젊고 능력있는 장수를 발탁하고자 하는데, 너만한 자가 없다. 이번 정벌에서 요동을 얻었더라도 나는 기쁘지 않았을텐데, 너같은 인재를 얻었으니 아주 기쁘다" 당태종이 말한 "짐은 요동을 얻은 것이 기쁜 것이 아니라, 그대를 얻은 것이 기쁘다"는 말은 이후 널리 알려지게 되고, 설인귀의 명성은 높아졌다. 그는 다시 우령군중랑장으로 승진한다.

 

12년간 현무문을 지키다.

 

요동에서 돌아온 후에, 설인귀는 중요한 직위에 오르지 못한다. 농민출신의 사병인데다, 가족배경이나 인간관계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어찌 중요한 직위를 맡을 수 있겠는가? 그는 현무문을 지키는 업무를 맡게 된다. 현무문은 당태종과 관계가 깊다. 당태종은 현무문사변을 일으켜 황제에 오르지 않았던가. 설인귀는 12년반동안 현무문을 지키는 일을 한다.

 

당태종이 죽고 당고종이 즉위한 이후인 영휘5년(654년) 3월, 윤5월초삼일, 하늘에서 큰 비가 내려 산사태가 나고, 물이 현무문까지 들이닥쳤다. 설인귀는 죽음을 무릅쓰고 황궁내로 들어가 당고종을 구조한다. 당고종은 그의 행동에 크게 감격하고, 어마 1필을 내려준다. 황제의 목숨을 구해주었으니, 발탁될 날도 머지 않았다.

 

불혹의 나이에 사방을 평정하다.

 

현경2년(657년) 우둔위장군 소정방(蘇定方)이 서돌궐로 진격한다. 설인귀는 참가하지 않았지만, 가장 중요한 아이디어를 내서, 소정방이 서돌궐을 멸하는데 중요한 공헌을 한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적의 세력을 분리시켜, 한곳에 잘대해주어 내부혼란을 일으키는 것이다. 구체적인 계획은 더 상세했다. 소정방은 당나라의 명장으로 이정(李靖)의 적통제자였다. 즉, 이정병법의 승계자이며, 설인귀보다 20살정도 많았다. 이런 대장이 현문을 지키는 장군에 불과한 설인귀의 의견을 받아들인 것을 보면, 그도 설인귀를 존중해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658년에 설인귀는 자기의 군대를 지휘하게 된다. 이때부터 그의 전설적인 지휘생애가 시작되는데, 이미 44세에 이르렀다. 658년 6월, 설인귀는 영주도독 겸 동이도호 정명진과 함께 고구려를 교란시킨다. 설인귀는 일거에 적봉진을 함락시키고 400명을 참수하고 100여명을 포로로 잡는다.

 

658년 6월, 고구려는 대장 두방루(豆方婁)에게 3만의 병사를 붙여 파견하여 당나라군에 대적하게 한다. 그러나, 설인귀에 대패한다. 수급3000급이 잘린다.

 

659년 11월, 설인귀는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의 대장 온사문(溫沙門)과 횡산(요양부근의 화표산)에서 전투를 한다. 설인귀는 앞장서서 돌격하고, 고구려군이 당해내지 못해서, 패주했다.

 

659년 11월, 당나라군은 고구려군과 석성에서 전투를 한다. 설인귀는 단기로 진격하여 고구려군의 궁사를 생포한다. 이 전투가 시작되자 마자, 고구려군의 한 신궁(神弓)이 연속하여 당나라군의 병사 10여명을 사살하자, 설인귀는 노기충천하여 활을 맞쏜 것이 아니라 말을 몰고 달려들어가서 그 신궁을 생포해 온 것이다.

 

659년 12월 설인귀와 신문릉은 흑산에서 거란을 격파한다. 그리고 거란왕 아복고(阿卜固)와 여러 수령을 포로로 잡아 낙양으로 압송한다.

 

설인귀는 공로를 인정받아 좌무위장군으로 승진하고, 하동현남(河東縣男)에 봉해진다.

 

삼전정천산(三箭定天山)

 

용삭원년(661년) 10월 철륵(鐵勒)이 당나라의 변방을 침범했다. 설인귀는 철륵도행군부총관이 된다. 출발전에 당고종은 병사들을 환송하는 자리에서, 설인귀에게 옛날에 활을 잘 쏘는 사람들은 갑옷 5개도 뚫는다는 말을 하면서 설인귀에게 한번 쏘아보도록 한다. 설인귀는 황명에 따라 화살을 쏘고, 화살은 갑옷5개를 꿰뚫는다. 당고종은 먹적어하며, 그에게 튼튼한 갑옷을 상으로 하사한다.

 

662년 2월, 회흘의 철륵9성돌궐(아홉부락)은 당나라군대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10여만명을 모은다. 그리고 천산(몽고 항애산)의 유리한 지형을 활용하여 당나라군대를 저지한다. 662년 3월 초하루, 당나라군대와 철륵은 천산에서 교전을 시작한다. 철륵이 수십명의 대장을 보내어 도전을 하고, 설인귀가 출전해서 홀로 수십명을 막아낸다. 그리고, 화살을 연속 3발 쏘아서, 3명의 장수를 말에서 떨어뜨린다. 적군은 혼란에 빠졌고, 설인귀가 기회를 틈타 명을 내린다. 적군 13만은 즉석에서 투항한다. 철륵은 수십년간 당나라의 변방을 교란시켰으므로, 설인귀는 조정의 명에 따라 항복한 철륵군사를 갱살(坑殺)한다. 그리고 계속 북진하여 철륵의 수령인 섭호(葉護) 3형제를 생포한다. 그로써는 두번째로 적군의 군주를 생포한 기록이다. 이후 회흘의 구성돌궐은 쇠락한다. 이후로 "장군삼전정천산 장사장가입한관(將軍三箭定天山, 壯士長歌入漢關, 장군의 화살 세 대가 천산을 평정하고, 장사들은 노래를 부르면서 한나라로 되돌아오다)"는 말이 유전된다. 그런데, 이번 전투에서 주장은 정인태였고, 설인귀는 부장이었다. 비록 설인귀가 공을 크게 세우기는 했지만, 정인태는 철륵의 사결, 다람갈들 부족이 투항하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노략질했다. 그러자 그들은 도망쳤고, 정인태는 추격했지만, 병사들만 잃었다. 설인귀도 이번 전투에서 철륵의 여자를 첩으로 취한다. 조정에 돌아오자, 정인태와 설인귀를 탄핵하는 소리가 높았다. 다만, 공이 있었으므로 죄는 묻지 않고 지나가게 된다.

 

고구려멸망

 

건봉원년(666년)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사망하고, 장남 연남생이 막리지를 승계한다. 그의 동생 연남건, 연남산은 막리지를 자칭하고, 병사를 일으켜 연남생을 공격한다. 연남생은 아들인 연헌성(淵獻誠)을 당나라에 보내어 구원을 요청한다. 666년 6월 7일, 우효위대장군 계필하력(契苾何力)을 요동도안무대사로 임명하여 병사를 이끌고 천남생을 지원한다. 천헌성을 우무위장군으로 임명하여 길안내를 맡게 한다. 666년, 좌금오위장군 방동선(龐同善), 영주도독 고간(高侃)이 행군총관이 되어 함께 고구려를 토벌하러 떠난다. 666년 9월 방동선은 고구려군을 대파한다.

 

666년 9월, 설인귀가 병사를 이끌고 출병한다. 666년 12월, 이적(李績)을 요동도행군대총관으로 임명하고, 사례소상백 학처준(?處俊)을 부대총관으로 임명한다. 계필하력, 방동선도 부대총관 겸 안무대사가 된다. 수륙제군총관과 운량사인 두의적(竇義積), 독고경운(獨孤卿雲), 곽대봉(郭待封)등은 이적의 지휘를 받아서 함께 고구려를 공격한다. 하북의 모든 세금을 끌어모아 요동전투에 쏟아붓는다. 667년 9월 14일, 이적은 고구려의 군사요지 신성(新城, 지금의 요동성 무순의 북쪽에 있는 고이산성)을 차지하고, 계필하력에게 지키게 한다. 그리고 기세를 몰아 주변 16개 성을 모두 함락시킨다.

 

신성은 전략적으로 아주 중요한 곳이었다. 그러나, 이적은 금방 얻은 신성의 방어에 소홀하였다. 과연 667년 9월, 고구려의 우두머리 천남건이 대군을 이끌고 군영을 야습하였다. 신성이 위기에 처하지 설인귀가 병사를 이끌고 미친듯이 달려갔다. 그리하여 열세에 있던 당나라군은 졸지에 우세로 바뀌어 수백명을 사살하게 되고, 신성을 위기에서 구해낸다.

 

667년 10월, 방동선은 계속 진공한다. 금산로에서 고구려의 대군 20만과 부닥쳐서 패하고 도망친다. 고구려군이 추격해오자, 설인귀의 군대가 반격에 나섰고, 고구려군은 혼란에 빠진다. 결국 설인귀의 군대가 고구려군을 물리치고 5만명을 참수한다. 667년 10월, 당나라군은 승리를 틈타 남소(/南蘇, 지금의 요동 무순 동쪽 소자하와 혼하가 만나는 곳), 목저(木底, 요녕 신빈 서목기진), 창암(蒼巖, 길림 집안 서쪽)의 3성을 점령하고, 천남생의 군대와 회합한다. 그리고 금산(金山)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다. 당고종은 친필서신을 써서 설인귀를 위로한다. 금산전투는 당나라초기에 드물게 보는 대규모 전투였고, 고구려와 싸운 4대전투중 가장 중요한 전투였고, 최대의 전투였다. 이 전투를 통하여 기본적으로 고구려군의 정예부대는 소멸되며, 승리의 기초를 닦았다. 이 전투는 설인귀가 직접 지휘하였으니, 그의 공이 적다하지 않을 수 없다.

 

667년 11월 하순, 설인귀는 2000명의 현갑기(당나라의 정예병)병을 데리고, 전진하여 부여성으로 향한다. 어떤 장수들은 극력 반대했다. 인원이 너무 적다는 이유에서이다. 그러나 설인귀는 "병사는 많아야 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 써야하는 것이 중요하다"로 하고 병사를 데리고 신속히 이동했다. 고구려군은 10만에 가까운 군대를 신성으로 보내어 주동권을 되찾아오고자 했다. 다만, 고구려군은 당나라군이 이렇게 빨리 도착할 줄은 몰랐다. 겨울인데다 동북이어 하얀 눈이 내린 곳에서 갑자기 설인귀의 2000명 현갑기병은 모두 흰 옷을 입고 고구려군의 진영으로 뛰어들었다. 고구려군은 백색의 옷을 입은 당나라군이 쳐들어오자 혼란에 빠졌고, 결국 2만여의 병사를 잃고, 나머지 7만여의 병사들은 부여성으로 되돌아가서 수비를 하게 된다. 2000명을 이끌고 계속 전진한 설인귀는 668년 2월 20일 부여성을 점령한 이후, 연속하여 40여개 성을 함락시킨다. 설인귀의 명성은 요동지방을 울리게 되었고, 고구려군이 가장 두려워하는 장수가 되었다.

 

이처럼 설인귀의 부대는 수도인 평양성으로 직진했다. 방어가 박약한 해변으로 가던 온 이적등의 대군과 평양에서 만나서, 함께 평양을 공격하여 함락시킨다. 설인귀는 고구려국왕의 투항을 받아내니, 고구려가 이때 멸망한다. 고구려는 수양제 양광의 3차에 걸친 공격, 당태종의  제4차정벌이 모두 실패로 돌아갔는데, 설인귀는 고구려를 멸망시킨 것이다.

 

이후 당고종은 설인귀에게 병사를 이끌고 평양을 지키도록 한다. 설인귀는 우위위대장군이 되고, 평양군공(平陽郡公)에 봉해지고, 안동도호을 겸직한다. 그가 안동도호를 지낼 때도 뛰어난 정치적인 능력을 발휘한다. 669년에 설인귀가 편찬한 <<주역신본주의>>는 군사관련 저작이다. 이 시기는 설인귀에게 있어서 최전성기이다. 이후 그는 인생의 바닥으로 다시 떨어지게 된다.

 

청해호의 한

 

청해 대비천(大非川) 전투에서 그는 패배한다.

 

토번이 서역으로 진군할 때, 설인귀는 이미 56세였다. 대비천전투의 주장은 설인귀이고 부장은 곽대봉이었다. 곽대봉은 원래 명장 곽효각의 둘째 아들로, 처음에는 설인귀보다 관직이 높았고, 명문가 출신이다. 그러다보니, 설인귀의 지휘에 불복하는 일이 잦았다. 어쨌든, 설인귀의 7만부대는 토번의 40만부대와 맞부딛쳐서 전멸당하고 만다.

 

대비천전투의 패배원인중 하나는 당나라의 설인귀, 배행검의 뒤를 잇는 제3대 장수가 끊겼다는데 있다. 나중의 장수규, 설납, 아사나충과 같은 장수들은 설인귀가 죽은 후 20년뒤에나 두각을 나타낸다. 대비천전투때 누구를 내보내느냐가 가장 골치아픈 문제였다. 당시의 상황으로 주장을 설인귀로 하는 것은 부득이했다. 문제는 부장이었는데, 곽대봉은 고구려와의 전투에도 참전했는데, 이적의 부장이었다. 곽대봉을 부장을 딸려보낸 것은 그를 배양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유인궤는 설인귀의 아들인 설납을 부장으로 발탁해서 보내자고 주장하였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대비천전투의 패배원인은 여러가지가 있을 것이다. 첫째, 당나라군의 안서도호는 오랫동안 전투를 하지 않아 실전경험이 없고, 안서병의 전투력이 약했다. 둘째, 당나라정부는 황급히 응전하여 사전준비가 불충분했다. 셋째, 당나라의 부병제도의 폐단이 노출되어, 장수가 부족했다. 넷째, 곽대봉은 군기를 어겼다. 다섯째, 토번의 주장인 걸. 친링은 토번역사상  최고의 명장이자 전신이다. 여섯째, 설인귀는 곽대봉의 행동에 대하여 적시에 조치하지 못했다. 일곱째, 토곡혼은 토번과 친해서 현지인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이번 패전으로 설인귀는 평민으로 되돌아간다. 다만, 설인귀가 떠난지 얼마되지 않아, 고구려에서는 다시 반란이 일어나고, 할 수 없이 당나라조정은 평민인 설인귀를 기용하여 난을 평정하고자 한다. 그는 다시 한반도로 간다. 그러나, 좋은 시절이 오래가지는 못했다. 살인사건으로 그는 다시 상주(象州)로 유배된다.

 

상주유배기간

 

상주에 유배가 있는 동안의 여러가지 이야기들이 전해진다. 정사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하동설씨의 가족지 및 기타 일부 사서에서는 그에 관한 여러가지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그는 지방관리를 도와서 비적들을 토벌했고, 이재민을 구조하고, 농민을 이끌고 관개사업도 하며, 농민간 분쟁을 조정해주었다. 현지인들은 모두 그에게 감격했고, 그가 떠날 때는 모두 눈물을 흘렸으며, 그가 죽자 사당을 만들었다.

 

노장의 최후

 

조정에서는 대사면령을 내려, 그는 다시 조정으로 되돌아온다. 당고종은 그를 다시 기용하면서 과주장사, 우령군위장군, 검교대주도독의 직을 내린다.

 

개요원년(681년) 이미 68세가 된 고령의 설인귀는 생애 마지막 전쟁을 시작한다. 과주장사로 있을 때, 동돌궐이 자주 당나라의 북방을 침범했다. 682년 돌궐의 추장인 아사나골독록은 돌궐의 유랑인들을 모아 세력을 확장하고 스스로 칸이라 칭했다. 영순원년에는 흑사성(내몽고 후허하오터 동북쪽)을 점거하고 당나라에 반기를 들었다. 682년, 아사덕원진이 당나라에서 도망쳐 아사나골돌록과 힘을 합치며, 남주자사 왕덕무를 사살한다.

 

682년 겨울, 69세의 고령인 설인귀는 병든 몸을 이끌고 군대를 지휘한다. 대동일대에서 아사덕원진과 싸운다. 아사덕원진은 설인귀가 당나라의 주장이라는 것을 듣고는 바로 도망친다. 당나라군은 즉시 추격하여 1만의 수급을 베고, 3만여를 포로로 잡았다.

 

영순2년(683년) 2월 21일, 설인귀는 안문관에서 병사한다. 향년 70세이다. 당고종은 그를 좌효위대장군, 유주도독으로 추증한다.

 

설인귀는 평생 백포(白袍)를 즐겨 입었다. 그는 40년간 당나라의 장수로 있으면서 혁혁한 공을 세운다. 그 아들인 설납은 관직이 대원수, 재상에 오른다; 손자인 설숭(薛嵩)은 육주절도사, 평양왕에 이른다; 증손자인 설평(薛平)은 관직이 태자태보, 한국공에 이른다; 현손자인 설종(薛從)은 상장군, 하동현자에 이른다. 설인귀의 후예중 12대 47명, 그리고 하동설씨의 330여명이 당나라 289년동안 나라에 봉사하였다.

 

 

 

출처 : 중국,북경,장안가에서
글쓴이 : 중은우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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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경영]명장 "설인귀"의 패배와 몰락

전략과 전술은 상대방 입장에서, 계획은 최악을 대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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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비즈 작성일자2018.08.12. | 8,768 읽음

   설인귀는 중국 당나라 시대 최고 무장 중 한 명이다. 그의 최대 전성기는 668년 고구려 멸망 시기로, 당나라 장수 10여 명을 쏘아 죽인 고구려 용사를 단신으로 돌격해 생포해왔다는 식의 무용담이 수두룩하다.


그토록 막강하던 그는 669년 당나라가 토번(티베트족 국가) 정벌을 위해 투입한 전투에서 어이없이 대패하고 만다. 강력한 군대와 출충한 무술, 뛰어난 전략까지 갖춘 그가 왜 한순간에 적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신세가 됐을까?


역사를 들여다보면 아이러니도 많고 설명이 곤란한 사건도 많다. 중국 당나라 시대의 무장 설인귀(613∼683)의 인기도 이 중 하나다. 설인귀는 격투는 물론이고 활쏘기와 기마술도 뛰어난 용사였다. 집안이 가난했던 설인귀는 당 태종이 고구려 원정을 시행한다는 말을 듣고 자원한다. 고구려 원정에서 최대의 전투가 안시성 근방에서 벌어진 주필산 전투다.


안시성을 구원하기 위해 달려온 고구려군 15만과 벌인 전투에서 당군은 대승리를 거뒀고, 이 전투에서 설인귀는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후 그는 고구려 원정에 내내 종군하면서 당나라 최고의 스타가 됐다. 몇 년 전에는 중국에서 그의 일대기가 드라마로 제작됐을 정도다.

(설인귀 초상화)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흥미로운 점은, 설인귀가 당나라뿐 아니라 우리나라 무속에서도 큰 인기 스타가 됐다는 점이다. 그가 고구려 멸망에 지대한 공로를 세웠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해하기 힘들다. 혹 신라의 입장에서는 그가 고구려 멸망의 주역이었기에 고맙게 여길 수도 있겠다. 그러나 669년 이후로 그는 나당전쟁에서 당군측 사령관이 돼 신라군과도 치열하게 싸웠다.


신라뿐 아니라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설인귀는 우리나라 무속에서 제일 인기 있는 무장이었다. 고려 현종이 거란군을 피해 나주로 도망칠 때, 설인귀가 나타나 구원해줬다는 전설까지 있을 정도다. 조선 후기에는 그를 주인공으로 한 설인귀전이라는 소설까지 나왔고, 심지어 설인귀가 경기도 파주 또는 적성에서 출생한 한국인이라는 설까지 있었다.


수많은 무용담을 남긴 당나라 무장 설인귀

어쨌든 설인귀는 매우 뛰어난 장수였다. 당태종은 설인귀를 보고 “요동을 얻은 것보다 설인귀를 얻은 게 더 기쁘다”는 유명한 말까지 남겼다. 그는 고구려와의 전쟁뿐 아니라 돌궐, 철륵(몽고족의 일파) 등 유목 민족과의 전투에서도 맹활약을 했다. 설인귀는 개인적으로 무용이 뛰어난 용사였을 뿐 아니라 장군이 되어서도 당나라 전체에서 당할 자가 없을 정도로 과감하고 대담한 전술을 사용했다.


설인귀는 수많은 무용담으로도 유명하다. 단신으로 적진에 들어가 적장의 목을 말안장에 걸고 나왔다거나, 당나라 장수 10여 명을 쏘아 죽인 고구려의 용사를 단신으로 돌격해 생포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한번은 방동선이라는 장군과 한팀이 됐는데, 방동선은 설인귀와는 정 반대로 전투보다는 군대 관리, 조직운영에 능력이 뛰어난 장군이었다.  


어느 날 방동선의 당군과 고구려군이 격돌했는데, 고구려군이 너무 강해서 당군이 크게 위축됐다. 이를 눈치챈 고구려군은 승세를 잡고 당군을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그 순간 설인귀가 뛰쳐나와 고구려 군을 향해 돌진했다. 그의 군대는 고구려 진영을 관통해서 군을 반으로 갈라놓았다. 놀란 고구려군은 붕괴했고 5000명이 전사했다. 고구려 원정의 마지막 해에 그는 겨우 2000의 병력으로 부여 정복에 나서 수만 명을 죽이고 부여 땅을 정복했다.

설인귀의 인생에서 최고의 절정기는 668년 고구려 멸망 당시였다. 당나라는 고구려 땅을 통치하기 위해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했다. 설인귀는 안동도호부의 책임자가 됐다. 2만의 병력을 보유하며 정복지 고구려의 치안을 책임지는 임무까지 맡았다. 그의 최후 목표는 분명 제후 책봉이었을 것이다.


요동 지역의 제후가 된다면 그는 이 지역의 세습군주가 되어 대대로 권력을 누릴 수 있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당나라는 그가 죽은 뒤 2세대도 지나기 전에 내란에 빠졌다. 만약 설 씨 가문이 만주를 장악했다면, 그의 집안은 전 중국에서 가장 강력한 군벌이 될 수 있었을 테고, 나라를 세우고 황제의 자리를 다투는 수준으로 성장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고구려 정복만으로는 공이 조금 부족했던지, 설인귀는 제후로 책봉되지 못했다. 실망이 컸을 설인귀에게 귀가 번쩍 뜨이는 소식이 전해졌다. 서기 669년 당나라가 토번 정벌에 설인귀와 그의 군대를 투입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이었다. 토번은 지금의 티베트다. 티베트 고원은 지금도 북부는 몽고족, 남쪽은 티베트족의 거주지로 나뉘는데, 그때도 북쪽은 선비족, 남쪽은 티베트족이 거주했다. 선비족 국가를 토곡혼, 티베트족 국가를 토번이라고 했다. 


중국의 전통적인 외교정책은 ‘이이제이(以夷制夷·오랑캐는 오랑캐로 다스린다)’ 정책이다. 그 원칙대로 당나라는 토번과 토곡혼을 끊임없이 분열시켰다. 그런데 토곡혼의 일부 세력과 토번이 합세해서 토곡혼에서 친당세력을 축출하고, 토번과 토곡혼을 병합했다. 당나라는 이 사태를 간과할 수 없었다.

출처 : DBR(동아비즈니스리뷰)

칭하이 고원으로의 진군

설인귀는 자기 휘하의 2만 병력과 중국 조정에서 지원한 병력을 합쳐 10만 대군을 이끌고 티베트 고원으로 진군했다.


그의 목적지는 지금의 칭하이성(靑海省)에 위치한 칭하이 고원이었다. 칭하이 고원은 해발 4000m가 넘는 고원지대다. 양쪽은 6000m가 넘는 산으로 막혀 있고, 산맥 사이는 사막 같은 초원이다. 말먹이로 쓸 풀 외에는 식량을 조달할 도시나 마을도 거의 없다. 고원의 끝에서 끝까지 길게 하천이 흐르지만 우기 외에는 거의 말라 있고 간간이 물웅덩이와 진창이 있는 수준이다. 그 물줄기 중 하나가 대비천(大非川)인데, 현재 이름은 사주옥하(沙珠玉河)라고 한다. 


해발 고도가 말해주듯이 대비천 일대는 춥고 건조하며, 날씨는 순간순간 변한다. 겨울로 갈수록 바람은 엄청나게 강해지는데, 강풍에도 불구하고 공기가 희박해 숨쉬기가 힘들다. 설인귀는 지형이 험하니 이런 곳에서는 정예 기병으로 돌격해 속전속결로 빠르게 승부를 내야 한다고 결정했다. 

사실 그는 언제나 그렇게 싸웠지만, 이곳에서는 의미가 특별했다. 중국 역사를 보면 국민들이 제일 두려워한 원정이 토번이나 운남 원정이었다. 두 지역은 다 4000m가 넘는 고원지대로 원정이 길어지면 고산병을 피할 방법이 없었다. 치료약도 없었으므로 원정의 성공, 실패를 불문하고 이 원정에 끌려간 병사들 가운데 살아 돌아오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니 무조건 속전속결로 끝내야 했다.


문제는 정예 부대만 치고 나가면 보급로가 길어지고, 뒤에는 약하고 병든 병사만 남는다는 것이었다. 토번은 게릴라전으로 나와 취약한 보급로를 공략할 게 뻔했다. 설인귀는 이런 사태를 막기 위해 티베트군 공격에 앞서 후위를 맡은 곽대봉에게 산으로 올라가 요새를 구축하고 이곳에 보급품을 모아 놓고 지키라고 명령한다. 


시작은 순조로웠다. 설인귀는 티베트군 선발대를 격파하는 데 성공했고, 수만 마리의 양도 노획했다. 계속 진군해서 목표지였던 오해성(烏海城: 위치 미상)까지 무사히 당도하는 데도 성공했다. 하지만 그때부터가 문제였다. 티베트군은 성 밖으로 나오지 않고, 계속 농성을 벌였다. 설인귀는 성을 계속 공격했지만 지형상 워낙 거칠고 험한 곳이라 공략이 쉽지 않았다.  


그 사이에 티베트군은 설인귀의 예상대로 후위 보급부대를 노렸다. 문제는 곽대봉이 설인귀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곽대봉은 설인귀의 명령대로 산 위에 기지를 축조하지 않고 보급품을 끌고 그냥 행군해서 설인귀의 뒤를 따라왔다. 아마도 그는 뒤에 남아 있는 게 무서웠던 모양이다. 결국 티베트군은 이들을 공격해서 몰살시키고 모든 군량을 빼앗아가 버린다.

충격의 전멸

놀란 설인귀는 후퇴를 명령했지만, 산맥으로 막힌 좁은 회랑이라 퇴로는 들어온 길 한 곳뿐이었다. 허겁지겁 좁은 외길을 따라 빠져나와 대비천에 도착했을 때, 티베트군은 퇴각로를 막고 전 병력이 합세해 당군을 공격했다. 굶주리는 데야 천하의 설인귀도 방법이 없었다.


결국 당군 10만이 전멸했고, 설인귀와 당군 지휘부는 포로 신세가 됐다. 설인귀는 이 대비천 전투의 패배로 티베트군에 살해될 수도 있었지만, 토번 지휘관 가르친링(論欽凌)이 포로로 잡힌 당군 지휘부를 석방해 준 덕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가르치링은 필요 이상으로 당나라를 자극하는 것은 피하고자 했던 모양이다. 극적으로 살아나기는 했지만 불패장군 설인귀의 전설은 끝나고, 그의 명성은 땅에 떨어졌다.

대비천 전투 패배의 교훈

설인귀는 대비천 전투 패배의 충격을 끝내 극복하지 못했다. 요동으로 돌아와 나당전쟁에 뛰어들었지만, 또 패배했다. 완전히 몰락한 그를 황제가 불쌍히 여겨 돌궐 전쟁에 파견한다. 여기서 그럭저럭 승리를 거두고 은퇴한 후 얼마 지나 사망한다. 끝내 제후로 책봉되지는 못했다.


티베트 원정의 패배는 외지인에게는 너무나 불리한 지형과 기후, 그리고 휘하 장수인 곽대봉의 명령위반 탓이 컸다. 설인귀도 곽대봉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했다. 그러나 설인귀에게도 문제가 있었다. 첫째는 설인귀의 전술과 스타일이 너무 뻔했다. 티베트군은 설인귀의 전술을 예측해 그를 깊이 끌어들여 요새에 못 박아 둠으로써 당군을 분리시켰다. 설인귀가 적의 전술을 예측했다고 하지만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 예비 계획은 전혀 없었다. 곽대봉의 명령 불복종도 지휘자로서 부하의 성향과 행동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다는 책임은 피하기 어렵다. 


전투가 공성전이라는 시간의 늪에 빠졌을 때, 전술을 재검토하지 못했고, 식량 두절의 상황에도 대비하지 못했다. 곽대봉이 잘못했다고 하더라도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 준비가 있었다면 철수하더라도 대비천에서 몰살당하지 않고 빠져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전략과 전술은 언제나 상대편의 입장에서 보아야 하고, 모든 계획은 최선과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야 한다.

성공의 경험이 많고, 명성에 취한 사람일수록 자신의 방법에 확신을 가지고,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않게 되는 경우가 많다. 부하들도 당연히 자신을 따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설인귀의 부하들 중 일부는 그의 명성에 혹해서가 아니라 그가 뇌물도 적당히 받고, 부하들의 충성과 정복욕을 자극하기 위해 약탈과 노략질, 심한 경우는 학살까지도 적당히 허용한 덕분에 그를 따랐다. 하지만 칭하이 고원에는 쓸 만한 도시는커녕 약탈을 일삼을 마을도 거의 없었고 도처에 죽음의 냄새만 넘쳐흘렀을 뿐이다.



***  편집자 주) 전쟁은 역사가 만들어낸 비극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인간의 극한 능력과 지혜를 시험하며 조직과 기술 발전을 가져온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전쟁과 한국사를 연구해온 임용한 박사가 전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인터비즈] [전쟁과 경영]명장 "설인귀"의 패배와 몰락 - 1b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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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軍 사령관 薛仁貴의 협박 편지
문무대왕이 간다(5) 설인귀라면 645년 唐태종의 안시성 공격 때부터 참전했고, 668년 고구려 멸망 직후에는 안동도호를 역임한 歷戰(역전)의 인물이었다. 그가 문무왕에게 최후 통첩을 보낸 것이다.

鄭淳台(작가)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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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멸망 후 安東都護府(안동도호부)의 총사령관(都護‧ 도호)으로서 평양에 주둔하면서 신라에 압력을 가했던 薛仁貴(설인귀)는 왜 돌연 한반도에서 종적을 감추었던 것일까? 669년 9월, 吐藩(토번: 지금의 티베트)이 실크로드(天山南路)를 급습했기 때문이다. 평양에 주둔 중이던 설인귀는 급거 병력을 이끌고 西域(서역)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토번은 현재 靑海省(청해성)에 위치한 白州 등 18개 州를 점령했다. 실크로드의 허리를 끊어 버린 토번의 전격작전이었다. 唐으로서는 반격전을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반격전의 결과는 참담했다.

670년 7월, 설인귀와 郭大封(곽대봉)이 지휘한 당군은 靑海湖(청해호) 남방 大非川 전투에서 전멸했다. 이때 설인귀는 혼비백산해 자신의 몸만 겨우 빠져나왔다. 이 전투 직후에는 安西都護府(안서도호부) 휘하 4鎭이 토번에 함락되었다. 安西4鎭이라면 지금 신강위구르 자치구에 있는 쿠차·카슈가르·호탄·카라샤르에 있던 오아시스路)의 군사거점도시였다. 당의 서역 방면 총사령부인 안서도호부는 西州(서주: 지금의 투르판)로 물러났다.

唐의 서역 경영에 있어 최대의 적수는 吐藩(토번)이었다. 토번은 662년부터 西돌궐의 일부인 弓月(궁월)과 손을 잡고, 唐軍에 도전해 왔다.

670년 3~4월, 신라의 압록강 도강 작전과 봉황성 전투는 안동도호부의 主力이 서역으로 대거 이동한 상황에서 그 虛(허)를 찔렀던 선제공격이었다.

670년은 파란만장했던 한 해였다. 5월, 唐은 좌감문대장군 高侃(고간)을 東州道行軍摠官(동주도행군총관: 한반도 방면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6월, 고구려부흥군은 평양의 안동도호부를 점령하고, 唐의 관리와 부역자들을 처형했다. 그 직후, 고간이 지휘한 기병 1만과 이근행(부총관)이 지휘한 거란·말갈병 3만의 공격을 받은 고구려부흥군은 평양성에서 퇴각했다.

문무대왕은 보장왕의 서자 高安勝(고안승)이 이끌고 남하하던 고구려 유민들을 金馬渚(금마저: 지금의 전북 익산시)로 집단 이주시켜 당의 괴뢰였던 웅진도독부를 견제했다.

그때 웅진도독부는 백제 유민들을 포섭해 對신라戰의 전열을 가다듬고 있었다. 문무대왕은 대아찬(관등 제5위) 金儒敦(김유돈)을 웅진도독부에 급파해 화의를 요청하는 유화전술을 구사하면서 실질적으로는 백제 故土 강점작전에 들어갔다.

7월, 신라군은 唐軍과의 전면전에 대비해 교두보로 활용할 수 있는 주요 거점에 대한 일제 공세에 나섰다. 3개 방면에서 전개된 이 전격작전에서 신라군은 82개의 大小 성곽을 점령함으로써 백제 고토 남부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완전히 확보했다. 또 그 주민들을 대거 內地(내지: 신라 영토)로 이주시켰다. 병력과 노동력 확보를 위한 徙民(사민)정책이었다.

8월1일, 문무대왕은 고구려 유민의 지도자 高安勝을 고구려왕으로 책봉하고, 군량미 2000섬과 비단 등을 지원했다. 문무대왕은 고안승이 일본과 교류하는 것도 직·간접으로 지원했다.

문무왕 11년(671)은 백제 고토 강점작전이 마무리되던 해였다. 1월, 신라군은 웅진도독부의 治所(치소)인 공주 남쪽 근교에서 唐軍과 접전을 벌였다. 이 전투에서 幢主(당주: 부대장) 金夫果(김부과)가 전사했다. 이때 신라의 국경을 침범한 말갈군과의 전투에서 적병 300여 명의 목을 베었다.

6월, 金竹旨(김죽지)는 웅진도독부의 병량공급처인 부여 근교 加林城(가림성: 임천면 성흥산성) 주위 耕地(경지)를 불태웠다. 이때 唐軍과 石城(부여∼논산 사이에 위치함)에서 싸워 적군 5300 명의 머리를 베고, 백제 장군 2명과 唐의 果毅(과의: 고급장교) 6명을 사로잡았다.

문무대왕은 웅진도독부의 통치지역을 점령해 所夫里州(소부리주)를 설치하고, 그 治所(치소)를 부여에 두고 백제 고토에 대한 통치력을 확산시켰다.

7월26일, 문무대왕은, 西域(서역)에서 한반도 전선으로 복귀한 唐의 행군총관 薛仁貴(설인귀)로부터 신라의 反唐(반당) 군사활동을 힐책하는 편지를 받았다.

설인귀라면 645년 唐태종의 안시성 공격 때부터 참전했고, 668년 고구려 멸망 직후에는 안동도호를 역임한 歷戰(역전)의 인물이었다. 唐의 체제하에서 안동도호라면 唐고종이 문무왕에게 내렸던 계림대도독보다 상위의 관직이다. 도호부는 휘하에 3∼5개의 도독부를 관할했기 때문이다.

 

文武大王에게 보낸 薛仁貴의 협박장

이 장문의 편지는 『행군총관 설인귀는 삼가 신라왕에게 글을 보냅니다. 본인은 육로 만리와 해로 삼천리를 지나 이 땅에 왔습니다』로부터 시작된다. 그가 西域 戰線(서역 전선)으로부터 한반도 戰線으로 복귀해 왔음을 밝힌 것이었다.

그는 “신라가 은혜를 저버리고 군비를 강화해 백제의 故土를 강점한 것”에 대해 항의했다. 이어 그는 당에 대한 신라의 저항능력을 다음과 같이 輕視(경시)했다.

<왕은 지금 평안한 국가의 기반을 버리고, 원칙을 지키는 정책을 싫어하며, 멀리는 황제의 명령을 어기고, 가까이는 부친(태종무열왕)의 말씀을 어기며, 天時(천시)를 업신여기고, 이웃나라와 우호를 깨트리면서, 한 궁벽한 작은 땅(신라)에서 집집마다 군사를 징발하고, 해마다 전쟁을 일으켜, 젊은 과부가 곡식을 나르고, 어린 아이로 하여금 밭일을 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에 나라를 지키자니 의지할 곳이 없고, 싸움을 걸면 대항할 능력이 없게 되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적장 薛仁貴는 그의 편지를 통해 ‘젊은 과부와 어린 아이’까지 동원되는 擧國一致(거국일치)의 단합으로 세계 최강의 당제국과 정면대결도 불사하는 신라국가의 처절한 모습을 그대로 후세에 전하고 있다. ‘젊은 과부’라면 전사한 병사의 아내, ‘어린 아이’라면 전사한 병사의 아들이 아니겠는가? 이어 그는 문무왕의 고구려부흥군 지원과 高安勝(고안승)에 대한 고구려왕으로의 책봉에 대해서도 힐책하고 있다.  

<고구려의 安勝은 아직도 나이가 어리며, 패망 후의 마을과 성읍에는 주민이 반이나 줄어서, 자신의 거취에 스스로 의심을 품고 있으므로 왕의 직위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본인 설인귀의 樓船(누선: 대형 병선)은 돛을 펴고 깃발을 달아 북쪽 해안을 순시하면서도, 예전에 받은 신라의 고통을 불쌍히 여겨 차마 병사를 풀지 않았는데, 왕은 도리어 外援(외원)을 구하며 나에게 대적하니 어찌 잘못이 아니겠습니까!> 

설인귀의 편지는 사뭇 위협적이다. 唐의 압도적인 軍勢(군세)를 들먹이며 신라의 복종을 요구했다.

<고간 장군이 거느린 漢(族)의 騎兵(기병), 이근행이 거느린 藩兵(번병), 吳· 楚(오‧ 초)의 용감한 水軍과 幽州(유주)· 幷州(병주)의 惡少(輩)들이 사방에 운집하여, 兵船(병선)이 열지어 내려가고, 험한 곳에 의지하여 진지를 쌓고, 그들이 貴國(귀국)의 땅을 개간하여 밭을 갈게 된다면, 이는 왕에게 치유할 수 없는 病痛(병통)이 될 것입니다.> 

설인귀의 편지는 항복을 권유하는 문구로 매듭짓는다.

<왕은 마음이 밝고 풍신이 준수하니, 겸손한 자세로 원칙으로 돌아가 大唐(대당)에 순종하는 마음을 가진다면, 때에 따라 血食(혈식: 나라를 보존함)을 받을 것이요, 왕통이 바뀌지 않고 이어질 것이니, 이러한 행운을 선택하고, 복을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왕의 계책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삼엄한 軍陣(군진) 사이로 사절이 내왕하니, 왕의 휘하에 있는 승려 임윤편지를 맡겨 몇 가지 본인의 의견을 말씀드립니다.> 

필자는, 문무왕의 反唐 행위를 ‘배신행위’로 규정한 한 일본 학자의 제국주의적 이데올로기의 논문을 읽은 적이 있다. 사실, 설인귀의 편지를 얼핏 보면 羅唐同盟(나당동맹) 균열의 歸責事由(귀책사유)가 마치 신라에 있는 것처럼 오해할 수도 있다.

[ 2016-09-12, 16: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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