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2010년도 역사 ‧문화 인물

2018. 12. 28. 11:56잡주머니


[충북] 2010년도 역사 ‧문화 인물 | 以文學堂
이보|조회 107|추천 0|2010.09.05. 09:48 


강세황(姜世晃)

 

1713(숙종 39)∼1791(정조 15). 문인서화가․평론가. 서울 출생.

본관 진주(晋州), 자 광지(光之), 호 첨재(需齋)·산향재(山響齋)·박암 (樸菴)·의산자(宜山子)·견암(全菴)·노죽(露竹)·표암(豹菴)·표옹(豹翁)· 해산정(海山亭)·무한경루(無限景樓)·홍엽상서(紅葉尙書)

 

2010년 충북의 역사문화인물 선정 사유

   산수․사군자에 뛰어난 조선 후기의 서화가․문인으로, 진경산수화를 발전시켰으며, 풍속화․인물화를 유행시켰다. 진천군 문백면 도하리에 묘소가 있어 추모 및 선양 행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바, 2010년 ‘충북의 역사문화인물’로 선정하였다.

 

생애와 업적


   할아버지 백년(柏年), 아버지 현에 이어 71세 때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 ‘삼세기영지가’(三世耆英之家)로 칭송받았다. 아버지의 극진한 사랑과 교육, 자형 임정(任珽)의 영향을 받았고, 처남 유경종(柳慶種), 친구 허필(許御)·이수봉(李壽鳳)과는 절친했다. 이익(李瀷)·심사정(沈師正)·강희언(姜熙彦) 등 여러 사람들과 교유하였고, 김홍도(金弘道)·신위(申緯)가 그의 제자이다.

일찍부터 서화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32세 때 가난으로 안산(安山)에 이주하여 오랫동안 학문과 서화에 전념하다, 영조의 배려로 61세 때 처음 벼슬길에 올라 64세 기구과(耆耉科), 66세 문신 정시에 수석 합격하였다. 관직은 영릉 참봉(英陵參奉)·사포 별제(司圃別提)·병조 참의·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 등을 두루 거쳤다. 72세 때 북경 사행(北京使行), 76세 때 금강산 유람을 하고 기행문과 실경 사생 등을 남겼다.

   시·서·화 삼절(三絶)로 일컬어졌으며, 특히 한국적인 남종문인화풍(南宗文人畵風)의 정착에 크게 기여하였고, 진경산수(眞景山水)의 발전과 풍속화·인물화의 유행, 새로운 서양 화법의 수용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또한 서화론·서화평, 대나무 판각화, 사군자를 한 벌로 짝 맞추어 그리는 부분에서도 선구적인 위치에 있었다.

   그의 작품은 전 시기를 통해 발전적으로 전개되었으며 독자적인 화풍을 드러내었다. 작품 상당수가 현존하며, 제작 연대를 알 수 있는 작품이 많아 체계적인 이해가 가능하다. 주로 산수·화훼(花卉)를 다뤘고 만년에는 묵죽(墨竹)으로 이름을 날렸다. 작품으로 «현정승집 玄亭勝集»·«첨재화보 需齋畵譜»·«방동현재산수도 倣董玄宰山水圖»·«벽오청서도 碧梧淸署圖»·«표현연화첩 豹玄聯畵帖»·«표암첩 豹菴帖»·«송도기행첩 松都紀行帖»·«약즙산수 藥汁山水»·«삼청도 三淸圖»·«피금정도 披襟亭圖»·«난죽도 蘭竹圖»·«묵죽팔폭병풍 墨竹八幅屛風»·«사군자병풍 四君子屛風»·«임왕서첩 臨王書帖»·«동기창임전인명적발 董其昌臨前人名迹跋»·«제의병 祭儀屛» 외 다수가 전하며, 특히 54세 때 쓴 자서전 «표옹자지 豹翁自誌»에 들어 있는 2폭 자화상을 비롯하여 7, 8여 폭의 초상화를 남긴 사실이 독특하다.

 

 

   묘소는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도하리에 있고, 시호는 헌정(憲靖)이다. 1979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그의 문집인 «표암유고»를 영인, 출판하였다.

 

 

 

권상하(權尙夏)

 

1641(인조 19)∼1721(경종 1). 학자. 서울 출생. 본관 안동(安東). 자 치도(致道), 호 수암(遂菴)·한수재(寒水齋).

 

2010년 충북의 역사문화인물 선정 사유

   송시열의 수제자이며 강문팔학사를 육성한 조선시대 뛰어난 유학자로,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에 한수재 황강영당이 있어 관련 학술회의가 개최되기에, 2010년 ‘충북의 역사문화인물’로 선정하였다.

 

생애와 업적

 

 

      1660년(현종 1) 진사시 합격,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하던 중, 숙종 즉위년, 앞서 효종 승하 시에 발생한 자의대비(慈懿大妃) 복제 문제로, 스승 송시열이 관작을 박탈당하고 덕원(德源)에 유배되자 남인정권에서의 관계 진출을 단념, 청풍의 산중에 은거해 학문과 교육에 전념할 것을 결심하였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송시열이 다시 제주에 위리안치되고, 이어 사약(賜藥)을 받게 되자, 유배지에 달려가 스승의 임종을 지키고 유품을 가지고 돌아와, 유언에 따라 괴산 화양동(華陽洞)에 만동묘(萬東廟)와 대보단(大報壇)을 세워 명나라 신종(神宗)과 의종(毅宗)을 제향하였다.

숙종 재위 중, 서인과 남인 간에 당쟁이 치열했지만, 그는 당쟁에 초연한 태도로 학문과 교육에만 전념하였다. 1703년 찬선, 이듬해 호조참판에 이어 1716년까지 13년간 해마다 대사헌에 임명, 그 밖에 1705년 이조참판, 찬선, 1712년 판윤, 이조판서, 1717년 좌찬성, 우의정·좌의정, 1721년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사직소를 올리고 나가지 않았다.

당쟁기에 살면서도 정치현실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선유(先儒)들로부터 제기된 조선시대 성리학적 기본문제를 규명하는 데 많은 힘을 기울였다. 그는 이이·송시열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학통을 계승하였으며, 그의 제자 간에 발생한 호락논쟁과 관련된 인성·물성 상이론의 제기는 예학적 학문이론을 활성화하고 심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송시열의 뛰어난 여러 제자 중 권상하는 훗날 ‘사문지적전(師門之嫡傳)’으로 불릴 정도의 명실상부한 수제자였으며, 이단하(李端夏)·박세채(朴世采)·김창협 등과 교유하였고, 문하에서 배출된 뛰어난 제자로는 한원진·이간·윤봉구(尹鳳九)·채지홍(蔡之洪)·이이근(李蓬根)·현상벽(玄尙璧)·최징후(崔徵厚)·성만징(成晩徵) 등 이른바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가 있다.

글씨에 능해 «기백이태연표 箕伯李泰淵表»·«형참권극화표 刑參權克和表»·«부사과이숙표 副司果李塾表»등의 작품이 전한다. 저서로는 «한수재집»·«삼서집의 三書輯疑» 등이 있는데 «한수재집»은 1979년 양장으로 영인, 간행되었으며, 가전되던 영정을 영인본에 수록하고 있다.

 

 

청풍의 황강서원(黃岡書院) 등 10여 곳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김득신(金得臣)

 

1604(선조 37)∼1684(숙종 10). 시인. 본관 안동(安東). 자 자공(子公), 호 백곡(柏谷).

 

2010년 충북의 역사문화인물 선정 사유

   노둔한 천품에도 불구하고 후천적인 노력을 통한 완성과 다독으로 유명한 인물로, 주옥같은 시를 남긴 문인이며 한시비평의 기준을 마련한 비평가로서 한국학 문학사에서 재조명될 필요가 있으며, 증평군 증평읍 율리묘소가 있어 해마다 김득신 백일장을 개최, 추모하고 있는 바, 2010년 ‘충북의 역사인물’로 선정하였다.

 

생애와 업적

 



   진주목사 시민(時敏)의 손자이며 경상도관찰사를 지낸 부제학 치(緻)의 아들로, 어머니는 사천 목씨(泗川睦氏) 첨(詹)의 딸이고, 부인은 경주 김씨이다.

영감과 직관을 통해 자연의 생명을 조화롭게 읊은 시가 으뜸이라 평가되는 조선 중기의 대표적 시인이며 문학가이다. 1642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1662년(현종 3) 증광문과에 급제, 이후 여러 직을 거쳐 1684년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었으며 안풍군(安豊君)에 봉해졌다. 뒤늦게 벼슬에 올랐으나 장차 사화(士禍)를 예견하여 벼슬을 버리고 괴산읍 능촌리에 있는 취묵당(醉默堂)에 내려와 시인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어릴 때 천연두를 앓아 노둔한 편이었으나, 아버지의 가르침과 훈도를 받아 서서히 문명을 떨친 인물이다. 공부할 때에 옛 선현과 문인들이 남겨놓은 글들을 많이 읽는 데 치력하였는데, 그 중 «백이전 伯夷傳»은 억 번이나 읽었다 하여 자기의 서재를 ‘억만재(億萬齋)’라 이름 붙였다. 당시 한문사대가인 이식(李植)으로부터 “그대의 시문이 당금의 제일”이라는 평을 들음으로써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효종도 그의 «용호한강시 龍湖漢江詩»를 보고 감탄했다고 한다.

저술이 병자호란 때 많이 타 없어졌으나, 문집인 «백곡집»에는 많은 글들이 전하고 있다. 그 중 시가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문보다는 시에 능했음을 알 수 있고, 특히 오언·칠언 절구를 잘 지었다. «용호 龍湖»·«구정 龜亭»·«전가 田家» 등은 어촌이나 산촌과 농가의 정경을 그림같이 묘사하고 있는 작품들이다.

 

 

그 외 술과 부채를 의인화한 가전소설 «환백장군전 歡伯將軍傳»·«청풍선생전 淸風先生傳»을 남기기도 했다.

시를 보는 안목 또한 높아, «종남총지 終南叢志» 같은 시화도 남겨, 어무적(魚無迹)·이행(李荇)·정사룡(鄭士龍)·정철(鄭澈)·권필(權億) 같은 앞 세대 유명시인 등과 남용익(南龍翼)·김석주(金錫胄)·홍만종(洪萬宗) 같은 당대 문사들의 시를 뽑아, 자기 나름의 비평을 덧붙여 한시 비평의 기준을 마련하였다.

 

 

 

신미대사(信眉大師)

 

생몰년 미상(1403~1480?). 승려. 영동(永同) 출생. 본관 영산.

본명 김수성(金守省).

 

2010년 충북의 역사문화인물 선정 사유

   조선 초기 속리산 복천암에 거주하던 승려로, 법주사 복천암 수암화상 부도(보물 1416호)의 주인공이며 훈민정음 창제의 주역이라는 설이 제기되고 있기에, 2010년 ‘충북의 역사문화인물’로 선정하였다.

 

생애와 업적

 

 

   아버지는 옥구진(沃溝鎭) 병사였던 김훈(金訓)이며, 동생은 유생이면서도 숭불을 주장했던 김수온(金守溫)이다.

세조 때의 선승(禪僧)으로, 행장은 전하지 않으나 왕실과의 관계 속에서 행해진 불교 중흥의 기록들을 통하여 그 행적을 살필 수 있다.

법주사(法住寺)에 출가하여 사미(沙彌) 시절에 수미(守眉)와 함께 대장경을 읽고 율을 익혔다. 그 뒤 세종 말년에 왕을 도와 불사를 중흥시켰다. 세종은 말년에 두 왕자와 왕후를 3년 사이에 잃게 되자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신불(信佛)하였다.

이 때 신미와 김수온은 세종을 도와 내원당(內願堂)을 궁 안에 짓고 법요(法要)를 주관하는 등 불교를 일으키기에 노력하였다. 또한, 세종을 도와 복천사(福泉寺)를 중수하고 그곳에 아미타삼존불을 봉안하였다.

문종은 선왕의 뜻을 이어 그를 선교도총섭(禪敎都摠攝)에 임명하였다. 세조 때는 왕사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세조는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그를 경애하였고, 왕위에 오르자 불교의 중흥을 주관하게 하였다.

1458년(세조 4)에 나라에서 해인사에 있던 대장경 50부를 간행하고자 했을 때 이를 감독하였고, 1461년 6월에 왕명으로 간경도감을 설치하여 훈민정음을 널리 유통시키기 위해 불전(佛典)을 번역, 간행했을 때도 이를 주관하였다.

그의 주관 아래 «법화경»·«반야심경»·«영가집 永嘉集» 등이 언해되었으며, 함허(涵虛)의 «금강경오가해설의 金剛經五家解說誼»도 교정하여 간행하는 등 불전의 국역과 유통을 위한 막중한 역할을 하였다.

1464년 2월 세조가 속리산 복천사로 행차하였을 때 그곳에서 사지(斯智)·학열(學悅)·학조(學祖) 등과 함께 대설법회(大說法會)를 열었다.

 

 

   또한, 같은 해에 상원사(上院寺)로 옮겨 왕에게 상원사의 중창을 건의하였고, 이에 왕은 «오대산상원사중창권선문 五臺山上院寺重創勸善文»을 지어 이를 시행하도록 하였는데, 이 권선문에는 그에 대한 왕의 존경심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세조는 혜각존자(慧覺尊者)라는 호를 내리고 존경하였다.

 

 

 

신채호(申采浩)

1880(고종 17)∼1936. 역사가·언론인·독립운동가. 본관 고령(高靈).

호 일편단생(一片丹生)·단생(丹生) 혹은 단재(丹齋).필명 금협산인 (錦頰山人)·무애생(無涯生)·열혈생(熱血生)·한놈·검심(劍心)·적심 (赤心)·연시몽인(燕市夢人), 가명 유맹원(劉孟源).

 

2010년 충북의 역사문화인물 선정 사유

청원군 낭성면에 사당 및 묘소가 있는, 애국계몽 운동가에서 독립 운동가로, 교육자이자 언론인이며 민족주의 사학자인 단재 신채호의 탄생 130주기를 맞이하여, 2010년 ‘충북의 역사문화인물’로 선정하였다.

 

생애와 업적

 

 



   충남 대덕군 산내에서 출생, 충북 청원에서 성장하였다. 1898년 독립협회에 가입, 활동하였고, 1901년 신규식·신백우(申伯雨) 등과 함께 고향 근처 인차리의 문동학원(文東學院)과 산동학원(山東學院)에서 신교육운동을 전개하였다. 1905년 장지연(張志淵)의 초청으로 «황성신문»의 논설기자로 위촉되어 활동하다, «황성신문»이 무기 정간되자, 이듬해 «대한매일신보» 주필로 초빙돼 1910년 망명할 때까지 당당한 시론(時論)을 써서 민중을 계몽하고 항일언론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우리나라 역사관계 사론(史論)을 써서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28세 무렵, 항일비밀결사인 신민회(新民會)조직과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에도 참여하여 논설을 통해 적극 지원하였다.

   1910년 봄, 중국으로 망명, 청도회의 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광복회(光復會) 조직, 부회장으로 활약하고, «권업신문 勸業新聞» 주필로 활동하였다. 1914년 동창학교(東昌學校) 교사 재직을 계기로 고구려와 발해의 고적지를 돌아보며 부여·고구려·발해 중심의 한국고대사를 체계화하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고, 이 무렵부터 1920년대에 걸쳐 «조선상고사 朝鮮上古史»·«조선상고문화사 朝鮮上古文化史»·«조선사연구초 朝鮮史硏究草» 등 주저(主著)들을 집필하였고, 1930년대에 «동아일보»·«조선일보»에 연재되었다.

   북경으로 돌아와, 1916년 애국적 항일투쟁의식을 그린 중편소설 «꿈하늘 夢天»을 집필하고, 1919년 대한독립청년단을 조직, 단장이 되었다. 그 해 4월 상해임시정부 수립에도 적극 참여하였으나, 이승만(李承晩)의 노선에 반대, 임시정부를 나온 후 임시정부를 비판하는 창조파(創造派)의 맹장으로 활약하는 한편, 임시정부기관지 «독립신문»에 맞서 «신대한 新大韓»창간, 주필이 되어 적극적인 독립노선을 주창하면서 이승만·정한경(鄭翰景) 등의 위임통치청원 같은 임시정부의 잘못된 노선을 비판했다.

1923년 의열단의 행동강령인 조선혁명선언(朝鮮革命宣言)을 집필, 폭력에 의한 민중 직접 혁명을 주장하였고, 1925년 민족독립운동의 방편으로 무정부주의동방연맹(無政府主義東方聯盟)에 가입하였다. 1928년에 발표된 «용과 용의 대격전»에서는 자유·평등·폭력·혁명을 예찬하는 무정부주의의 논리가 강하게 나타난다고 한다.

 

 

1928년 5월 대만에서 무정부주의동방연맹의 외국위체 위조사건(外國爲替僞造事件)에 연루, 체포되어 10년형을 선고받고 여순감옥(旅順監獄)에서 복역하던 중 뇌일혈로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우륵(于勒)

생몰연대 미상(가야국 가실왕. 신라 진흥왕). 악사.

 

2010년 충북의 역사문화인물 선정 사유

우리나라 3대 악성의 한 사람인 우륵가야국에서 가야금을 갖고 신라로 망명하여 국원(國原-충주)에서 살았기에, 현 충주의 탄금대 및 제천 의림지 주변의 우륵정과 영호정·경호루 등 관련 유적지가 존재하며, 우륵문화재 같은 지역이미지 제고에 기여하는 바, 2010년 ‘충북의 역사문화인물’로 선정하였다.

 

생애와 업적

 

 

우륵 가야국 가실왕(嘉實王, 일명 嘉寶王) 때와 신라 진흥왕 때 악사로 활약한 가야금의 명인으로, 가야국 성열현(省熱縣)에서 살았다고 한다. 우륵이 태어난 가야국이 어느 가야인지, 또한 가실왕은 가야국 중 어느 나라 몇 대 임금인지 확실하지 않다.

한때 가실왕이 우륵에게 이르기를, “모든 나라의 방언도 각각 서로 다른데, 성음(聲音)이 어찌 하나일 수 있겠는가?”라고 하며 가야금을 위해 악곡을 지으라고 하여 12곡을 지었다고 한다.

그 뒤 가야국이 어지러워지자 가야금을 들고 제자 이문(泥文)과 함께 신라 진흥왕에게 투항하였는데, 왕은 그를 맞아 국원(國原 : 지금의 충주)에 안치시키고 계고(階古)·만덕(萬德)·법지(法知) 등을 보내어 그의 업(業)을 전습하게 하였다.

우륵은 이 세 사람의 재주를 헤아려 계고에게는 가야금, 법지에게는 노래, 만덕에게는 춤을 각각 가르쳤다. 그 후 이들은 우륵이 만든 12곡을 듣고는 “이 곡들은 번잡하고 음란하여 우아하고 바르지 못하다.” 고 하며 5곡으로 줄여 버렸다. 우륵이 이 소식을 듣고 처음에는 매우 노하였으나 새로 줄인 5곡을 모두 듣고 난 뒤에는 눈물을 흘리며, “즐거우면서 음란하지 않고, 슬프면서도 비통하지 않으니 가히 아정하다(아담하고 곧바르다) 하겠다.”라고 감탄하였다고 한다.

 

 

일찍이 우륵이 지은 12곡명은 «하가라도 下加羅都»·«상가라도 上加羅都»·«보기 寶伎»·«달기 達己»·«사물 思勿»·«물혜 勿慧»·«하기물 下奇物»·«사자기 獅子伎»· «거열 居烈»·«사팔혜 沙八兮»·«이사 爾赦»·«상기물 上奇物»이다. 이 중 «보기»·«사자기»·«이사»를 제외한 나머지 9곡은 당시의 군현명과 같아서 해당 지방 민요의 성격을 띤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정지용(鄭芝溶)

 

1902∼미상. 시인. 본관 연일(延日). 옥천(沃川) 출생.

 

2010년 충북의 역사문화인물 선정 사유

현대시의 거장으로서 «향수»․«호수» 등 백여 편에 달하는 주옥같은 시를 남겼으며, 옥천군 옥천읍 하계리생가가 있어 현재로 22회의 “지용제”가 개최되고 있기에, 2010년 ‘충북의 역사문화인물’로 선정하였다.

 

생애와 업적

 

 

정지용은 고향에서 초등 과정을 마치고 서울 휘문고등보통학교(徽文高等普通學校)에서 중등 과정을 이수한 후, 일본 경도(京都)에 있는 도지사대학(同志社大學)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귀국 후 곧바로 모교인 휘문고등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8·15광복과 함께 이화여자대학교 문학부 교수와 경향신문사 주간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러다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녹번리(현재 은평구 녹번동)의 초당에서 은거 중 6·25동란 때 납북, 이후 정치 보위부에 구금되었다가 평양 감옥으로 이감된 후 타계한 것으로 알려졌다. 6·25 이후 그의 행적(行蹟)에 대한 갖은 오해로 그의 유작의 간행이나 논의조차 금기되다가 1988년도 납·월북작가의 작품에 대한 해금 조치로 작품집의 출판과 문학사적 논의가 가능하게 되었다.

정지용의 시단 활동은, 휘문고등보통학교 학생 시절의 요람동인(搖籃同人) 활동과 일본 유학시절의 많은 작품 활동에 관심을 갖은 김영랑(金永郞)과 박용철(朴龍喆)을 만나 ‘시문학’동인에 참여한 것이 계기가 되어 본격화된다.

그의 첫 시집이 간행되자 그를 모방하는 신인들이 많을 정도로 문단의 반향은 대단했다. 그의 이런 시적 재능과 활발한 시작 활동을 기반으로 상허(尙虛) 이태준(李泰俊)과 함께 «문장 文章»지 시부문(詩部門)의 고선위원(考選委員)이 되어 박두진(朴斗鎭)·조지훈(趙芝薰)·박목월(朴木月) 청록파(靑鹿派)를 위시하여 이한직(李漢稷)·박남수(朴南秀) 등 많은 역량 있는 신인을 배출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정지용은 우리 근대시사에서 하나의 큰 봉우리라 할 수 있다. 1920년대 초의 외래 문학사조의 영향으로 나타난 문예사조 혼류현상(混流現象) 중엽에 등장한 정지용은 우리말의 세포적 기능(細胞的 機能)을 추구하여 그 속성을 파악하고 언어의 감각미(感覺美)를 개척한 시인으로, 1930년대 한국 시단을 주도해 갔다.

유작으로는 «정지용시집 鄭芝溶詩集»(시문학사, 1935)·«백록담 白鹿潭»(문장사, 1941) 등 두 권의 시집과 «문학독본 文學讀本»(박문서관, 1948)·«산문 散文»(동지사, 1949) 등 두 권의 산문집이 있다. 그의 산문집에는 «수수어 愁誰語»·«다도해기 多島海記»·«화문행각 怜文行脚» 등과 같은 수필류와 시론(詩論) 및 기타 역시(譯詩)와 일반 평문 등으로 편성되어 있다. 이외에도 이들 단행본에 실리지 않은 시작과 산문의 상당수가 집성되어 1988년도에 민음사에서 시집과 산문집으로 구분하여 전집(全集)이 간행되었다.

 

 

 

 

 

 

홍범식(洪範植)

 

1871(고종 8)∼1910. 문신. 괴산 출생.본관 풍산(豊山). 자 성방(聖訪). 호 일완(一阮).

 

2010년 충북의 역사문화인물 선정 사유

임꺽정 작가 홍명희 부친으로 유명하며, 망국의 수치를 죽음으로써 항거한 순국의사로, 서거 100주년을 맞이하여 고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2010년 ‘충북의 역사문화인물’로 선정하였다.

 

생애와 업적

 

 

홍범식은 참판(參判) 승목(承穆)의 아들이며, 임꺽정의 작가 벽초 홍명희의 아버지이다.

1888년(고종 25) 진사가 되었고, 1902년(광무 6) 내부주사(內部主事)·혜민서참서(惠民署參書)를 역임하였으며, 1907년(융희 1) 전라북도 태인(泰仁)군수에 부임하였다. 당시 일제침략에 항거하는 의병이 전국에서 봉기하여 치열한 항일전투를 전개하고 있던 때로서 적극적으로 의병 보호에 힘써 일본군의 체포망을 피하게 하였다. 1909년 금산군수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어 주민들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1910년 일제에 의하여 주권이 강탈되자 통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기울어진 국운을 바로잡기엔 내 힘이 무력하기 그지없고, 망국노의 수치와 설움을 감추려니 비분을 금할 수 없어 스스로 순국의 길을 택하지 않을 수 없다.”라는 말을 남기고, 소나무에 목을 매 자결, 민족의 분노와 저항의지를 표출했다. 그가 남긴 유서 5통은 일본경찰이 압수함으로써 그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다.

 

 

그의 묘소는 괴산읍 제월리에 있으며, 해방된 지 4년 만에 그와 같은 직함을 가진 금산 군수에 의해 전북 금산읍 하옥리 남산에 그의 순절비(殉節碑)가 세워졌고,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홍진(洪震)

1877(고종 14)∼1946. 독립운동가. 영동 출생.본관 풍산(豊山). 초명 면희(冕熹). 일명 진(鎭). 호 만호(晩湖, 晩悟).

 

2010년 충북의 역사문화인물 선정 사유

영동 출신의 독립 운동가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실질적 근간인 한성임시정부 조직 했으며, 한국독립당에서의 주도적 역할과 임시정부 27년 동안 행정수반인 국무령과 의정원 의장을 역임한 유일한 인물이기에, 2010년 ‘충북의 역사문화인물’로 선정하였다.

 

생애와 업적

 

 

1898년 법관양성소 졸업 후, 한성평리원(漢城平理院) 주사에 임명, 다음 해 평리원 판사로 승진, 1905년 충청북도 충주재판소 검사로 전임되었다.

1910년 8월, 일제 강점으로 검사직을 사임, 서울에서 독립운동가를 위한 변호사로 활동하다, 3·1운동 때 적극 가담하여 충청북도 청주군 연락책임자로 활동하였다. 1919년 4월, 13도 대표자 회의를 거쳐 한성임시정부를 조직, 법무차장에 선임되었다.

그 뒤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합류, 임시의정원의원·법제위원장(法制委員長)을 지냈고, 충청북도 충주군 조사위원과 충청도선거위원장으로도 활약하였다. 1921년 4월 상해 대한교민단(大韓僑民團) 단장에 선임되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하였으며, 8월 대태평양회의외교후원회를 조직, 간사장에 선임되었다.

 

1923년 대한민국임시정부 법무총장에 선임된 뒤 내무총장·외무총장 등 요직을 역임하였고, 1926년 7월 국무령에 임명, 9월에는 외무총장까지 겸임하면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시정 3대 강령을 제시하였다.

1927년 말, 임시정부 대표로 파견되어 3부(신민부·정의부·참의부)와 교민단 등 여러 단체와 의견 교환 후 한족자치연합회를 형성, 이를 모체로 1930년 7월 한국독립당을 조직하고, 그 당수로서 군민회의(軍民會議)의 부위원장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위원장 김동삼 체포, 김좌진 피살로 군민회의 활동이 침체되자 이를 수습한 뒤, 황학수(黃學秀)·지청천(池靑天)·신숙(申肅) 등과 함께 당세를 확장, 한국독립당을 민족대당으로 발전시켰다.

1931년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자 당군(黨軍)을 한국독립군으로 개편하고 총사령에 지청천을 선출, 항일 중국군과 연합전선을 펴 치열하게 싸웠다.

 

 

1934년, 동삼성의 한국독립당과 난징의 한국혁명당을 통합, 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을 재조직하고 조소앙과 같이 지도하였다. 1937년 7월, 각 지역의 여러 단체를 통합하여, 한국광복진선(韓國光復陣線)을 조직,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곽 단체가 되자 조소앙·엄항섭·조경한 등과 함께 직접 선전공작을 전개하였다.

1940년 조선혁명당,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을 통합, 새로운 한국독립당을 조직하자 중앙감찰위원장에 선임되어 한국광복군을 창설하는 데 전력, 총사령부를 설치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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