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외인(方外人)은 죄가 없다. 外

2018. 12. 26. 15:51잡주머니



방외인(方外人)은 죄가 없다. | 멋지게 즐겨보자- 문화/예술

이노래 2007.10.08 21:12




 



   김시습 평전을 구입한지 1년 남짓이 되었지만 여전히 초입에 머물러 있다. 700쪽에 달하는 두툼한 분량과 친절하지 않은 서술 탓도 있지만, 솔직히 요즘은 글읽기가 되지 않는다.


   ‘시대의 비판자, 귀속을 거부한 자유인’이라는 부제가 맘에 드는데도 맘 같지 않은 것은 그만큼 치열함을 잃었기 때문이리라. 이 나이에..하는 생각을 좀 떨쳐버리기 위해, 불씨삼아 부싯돌만 그어본다.



   김시습이 살았던 시기는 세조의 왕위 찬탈과 같은 파란의 역사적 사건들의 연속이었다. 김시습은 이러한 혐오스러운 역사적 공간의 모순 속에서 끊임없이 고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를 과감하게 벗어 던질 수 없어 평생을 방외인(方外人)으로 살았다. 이 역사적 공간에서 김시습은 스스로의 이념을 버리지 않고 지키며 살려고 했기에 내면에 크나큰 상흔을 지닌 채, 평생 방랑과 은둔을 반복하였다


   세상을 흘겨보면서, 휘파람 불었던 인물.. 진정한 자유인의 초상..

자유인을 탈색시켜 유교적 절의를 부각시킨 것은 후대인들이 조작해낸 이미지에 불과하다.


   참고로, 조선전기 문인은 흔히 조정에서 문인 관료로 활동하던 관각파(館閣派)와 산림에 은거해 심성을 도야하던 사림파(士林派)로 나뉜다. 그리고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모순된 질서와 정치권력을 거부하면서 스스로 그 밖으로 탈주하지만, 현실에 대한 비판의 시선을 거두지 않는 인물.. 즉 비판적 지식인을 방외인(方外人)이라 불렀다


   “개에게 뼈다귀를 주지 마라/ 떼로 모여 어지러이 다툴 것이니./ 그 무리와 어길 뿐 아니라/ 마침내는 주인과도 어긋나리라./….” 출처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매월당의 길은 이처럼 선명하게 기존의 질서와 가치체계로부터 탈주하는데서 비롯된다. 그러나 그 발은 뜬구름이 아니라 탄탄하게 현실을 밟고 있다. 당연히 권력의 눈 밖에 나기 십상이다. 눈에 가시지만 차마 빼버릴 수 없는 방외인..  


   흔히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절의(節義)의 화신’으로 칭송한 것은, 서두에 밝힌 것처럼 김시습을 이념적으로 전유하려 했던 후대의 집권 유학자들의 ‘이미지 조작’의 요소가 꽤 있다. 반면에 ‘광인’이라는 발가벗김은 제도 권력의 허물을 전가하기 위한 장치가 아닌가 싶다


   율곡 이이가 지은 ‘김시습전’에는 이런 일화가 실려 있다. 서거정(徐居正)의 화려한 행차가 조정으로 향하던 때 일어난 일이다. 모두 길을 비켜서는데 허름한 차림의 사내(바로 김시습이다)가  “강중(剛中)아, 잘 지내느냐”며 길을 가로막고 섰다는 것이다. (<-강중은 서거정의 자(字))


   수행하던 벼슬아치가 놀라 김시습을 벌주려고 하자, 서거정 “그만 두어라. 미친 사람에게 따져 무엇 하겠느냐”고 만류했다고 한다. 그리고 “만약 이 사람에게 죄를 준다면 뒷날 그대 이름에 누가 될 것이다”고 했단다.


   권력에 배타적인 모습을 민중적 염원으로 그리다 보니 다소 과장되지 않았나 싶지만 어쨌거나 이 정도 진도를 빼고 극적인 구도로 가져갈 만한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그 외에도 술에 곯아떨어진 김시습을 딴에는 수습하여 편안하게 집까지 모셔와 재웠더니, 다음 날 아침 신숙주의 집인 것을 알고는 간다 온다 말없이 침 탁 뱉고 나왔다는 등, 권력에 빌붙고 출세 지향적인 정치모리배를 뜨끔하게 만드는 일화가 많다.


한 가지만 더, 한명회와 관련한 것이다.


   한명회가 늘그막에 한강 근처에 정자를 지어놓고 시를 한 수 걸어 두었는데 김시습이 지나가다가 이를 보고는.. '청춘부사직(靑春扶社稷)'의 '부(扶)'를 '망(亡)'으로, '백수와강호(白首臥江湖)'의 '와(臥)'를 '오(汚)'로 각각 고쳐 써넣었다는 얘기다.


'청춘망사직(靑春亡社稷) 백수오강호(白首汚江湖)' 젊어서는 나라를 망치고 늙어서는 세상을 더럽힌다는 뜻으로 바뀐 것이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 '개작시(改作詩)'를 보고 배를 잡고 웃을 수밖에.. (아마 요즘 같아선 이렇게 바꾸었으리라. 初期亡社稷 後期汚江湖)


   하여간, 김시습은 사유와 행동, 저술을 모두 중시한 인물이었으며, 절의의 화신, 광인이라기보다는 시인이면서 사상가였고 고독한 영혼을 소유한 진정한 자유인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방랑은 그에게 존재의 방식이자 문학의 한 길이었으며 세상과 만나는 통로였다. 그는 길 위의 삶에서 일탈의 자유를 찾았다. 그는 자신의 길 위의 삶을 '탕유(宕遊)’로 표현하였다. ‘탕유’란 자유분방한 노닒을 의미한다.


평생 자신에 대해 전혀 꾸밈이 없었고, 모든 허위를 미워했던 그는 탕유할 수 있었기에 고뇌의 늪 속에서 허우적거리지 않고 자연과 역사, 민중의 삶을 애정 어린 눈으로 돌아볼 수 있지 않았나 싶다.


   그는 마지막으로 이런 글을 남겼다.


태어나 사람 꼴 취하였거늘/ 어찌해서 사람 도리 못 다 하였나/ 젊어선 명리를 일삼았고/ 장년이 되어선 자빠지고 넘어졌네/ 고요히 생각하면 부끄러운 걸/ 진작 깨닫지 못하였나니/ 후회해도 지난 일을 돌이킬 수 없기에/ 잠 못 이루고 가슴을 방아 찧듯 쳐댄다/ … 나 죽은 뒤 내 무덤에 묘표를 만들 적에/ 꿈꾸다 죽은 늙은이라 써 준다면/ 나의 마음 잘 이해했다 할 것이니/ 품은 뜻을 천 년 뒤에 알아주리.” (‘나의 삶(我生)’ 중에서)



   일생을 돌아보며 자신을 ‘꿈꾸다 죽은 늙은이(夢死老)’로 기억해 달라고 한 매월당..


當書夢死老(당서몽사로)  꿈꾸다 간 늙은이라 그렇게만 쓸지어다.. 누가 감히 이렇게 치열하게 꿈을 꾸다가 갈 수 있단 말인가..


인간의 본연성에 대해 고민했던 사람, 민본주의, 인간 평등사상을 실현하려고 애쓴 사람, 유·불·도를 넘나들었던 그는 사상을 ‘몸으로 살았던’ 진정한 자유인이다..


   팔도를 떠돌다가 기력이 다한 말년에 부여 무량사(無量寺)에 몸을 기댄 그가 꿈속에 누운 것은 1493년 59세 때... 부도는 무량사 일주문 개울 건너 무진암 근처 부도밭에 있다고 한다. 경내에는 매월당이 살아 그렸다는 자화상이 보관되어 있다.


   끝으로, 이 책 저자가 본 김시습을 소개하며..


   ”격식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시를 짓고 글을 썼던 문인으로서, 유가 성리학과 정통 유가 사관의 주제를 저술로 남긴 참여 지향의 선동가로서, 불교의 철학적 사유를 유교의 이상과 연결시키려고 고심했던 철학자로서, 몸과 생명을 중시하여 수련 도교를 실천한 혁신적 사상가로서, 백성들의 고달픈 삶을 동정한 인도주의자로서, 국토 산하의 아름다움과 그 속에 깃들여 있는 역사미를 발견했던 여행가로서, 그의 일생은 다양한 면모를 지녔으나 그 어느 한 가지도 그의 삶의 유일한 본질이라고 보지 않고 그 모든 면모가 한데 어우러져 때로는 고뇌에 찬 듯 신음하고 때로는 천진난만하게 노래하는 하나의 자유인을 이루어냈다”

 

 

                                                   방외인(方外人)은 죄가 없다.

2007.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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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세상을 피하며 세상을 비판한 방외인 매월당 김시습| 옛날 야담/ 기담

카페지기 | 조회 33 |추천 0 | 2009.07.07. 01:49

  만 골짜기 천 봉우리 밖에서
  고독한 구름 외로운 새가 돌아온다.
  올해는 이절에서 지내지마는
  오는 해에는 어느 산으로 향할 건가.
  바람이 멈추니 소나무 창이 고요하고
  향이 스러지니 선실도 한가롭다.
  이번 삶을 나는 이미 단념하였기에,

  발자취를 물과 구름 사이에만 남기리라.

           - 만의 매월당 전집 -

 

 

보기 드문 신동


  1435년 성군으로 이름높은 세종 대왕이 나라를 다스린 지 17년째 되던 해였다.
그 해 어느 날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한양의 성균관에서 공자의 사당을 지키던 사람들이 모두 똑같은 꿈을 꾸었다.

궁 북쪽 근처에 있는 충순위라는 벼슬을 하는 김일성의 집에서 공자가 다시 태어나는 꿈이었다. 깨어나서 같은 꿈들을 꾼 사실을 알고 이상하게 생각한 사람들은 직접 그 집을 찾아가 보았다. 그랬더니 정말 갓난아이가 태어나 있었다. 크게 놀란 사람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고 한다.


   이 아이가 바로 기인 광인 천재로 너무 유명한 생육신의 한 사람이자 우리 나라 최초의 한문 소설의 작가인 매월당 김시습이다.이 아이는 태어난 지 8개월 만에 스스로 글을 알아보기 시작하였다. 말이 서툴러 잘 읽지는 못했으나 붓을 쥐여 주면 그 뜻을 써 냈다.

아이의 외할아버지는 크게 기뻐하며 말도 할 줄 모르는 아이에게 천자문을 가르쳐 주었다. 천자문은 단지 한자를 천 자 모아 놓은 것이 아니라 넉 자에 대구를 이루도록 하면서 중국의 산천과 문물과 역사를 담은 시인데 아이는 그 뜻을 척척 이해하였다. 이 놀라운 재주를 본 이웃의 최치운이라는 사람이 시습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시습이란 '논어'에 나오는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에서 따온 것으로 '재주만 믿지 말고 끊임없이 배워 노력을 계속하라'는 뜻이 담겨 있다.


  다섯 살이 되자 시습이 신동이라는 소문은 온 장안에 퍼졌다. 허조라는 정승이 그 소문을 듣고 확인하기 위해서 찾아왔다.

시습에게 "나는 늙은 사람이니 늙은 노 자로 시를 지어 보렴" 하자

"늙은 나무에도 꽃이 피듯 마음이야 늙겠습니까"라고 응답하니
그는 "이 아이야말로 말 그대로 신동이구나" 하며 무릎을 쳤다고 한다.


  이 소식을 들은 세종 대왕도 신하를 시켜 그를 시험해 보았다. 그리고 그의 재주를 알고 탄복하며 그 재주를 아껴 상을 내렸다. 게다가 열심히 공부할 것을 당부하고 뒷날 크게 쓰기로 약속하였다. 김시습은 다섯 살에 이색의 손자요 사육신의 한 사람인 이개의 아버지 이계전의 문하에서 '대학'과 '중용'을 배웠다. 보통 10대에 배우는 사서의 반을 다섯살에 배운 셈이다.

그는 여남은 살에 이미 거의 배우지 않은 책이 없을 정도로 학문을 넓혀 나갔다.


 

수양 대군과 생육신


  그러나 천재 소년의 진로는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15세의 나이에 어머니를 여읜 김시습은 어머니의 묘소 옆에 초막을 짓고 3년 동안 모신 후 삼각산에 있는 중흥사에 들어가 공부에 전념하였다.
  20세가 되던 해였다. 절에서 공부하던 그는 서울에 더녀온 친구로부터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되었다. 수양 대군이 어린 조카 단종을 보좌하던 황보인 김종서 등의 정승들을 살해한 후 정권을 장악했다는 소식이었다. 이른바 계유 정란이다.
어려서부터 놀라운 재주로 세종 대왕을 감탄하게 하고 왕의 뜻에 부응하기 위하여 열심히 공부에 몰두하던 그로서는 청천 벽력과 같은 소리였다.


  이 소식을 들은 그는 문을 잠근 채 사흘 동안 밖에 나오지 않았다. 사흘째 되던 날 저녁 방을 나온 그는 땅을 치며 크게 통곡하고 그때까지 보던 책들을 모두 불살라 버렸다. 그리고 자신의 긴 머리를 서슴없이 잘라 마지막 불꽃 속에 던져넣었다.
그는 자신의 젊음과 꿈과 야망이 모두 한오리의 연기 속에 사라져 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제 그에게는 학문도 희망찬 미래도 세상을 사는 보람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마음 속에는 다만 잘못되어 가는 세상에 대한 저항심만이 남아있었다
그는 새남터?에 돌보는 이 없이 버려진 사육신의 주검들을 하나 하나 업어다가 정성껏 묻어 주고 난 후 시통 하나를 달랑 들고 전국을 방랑하였다. 그는 평생 벼슬하지 않음으로써 세상에 저항하였고 방외인으로 일생을 마쳤다.
그러면서 정신적 소요의 자유와 현실적 모순 사이의 고민을 담은 많은 시와 글을 남겼다. 그가 남긴 '매월당집'이 있고 유명한 '금호신화'가 있다. 의리와 절개가 높다 하여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불리기도 한다.

 


광인이라 불린 방외인


  김시습(1435-93)방외인을 자처했다. 방외인이란 한마디로 세상을 등진 사람이다.
일반적인 유학자들은 나아가면 벼슬하고 물러나면 산림에 묻혀 음풍농월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지만 방외인은 그와 달랐다. 세속의 통념에 자신을 맞추지 않고 자기 뜻대로 호방하게 살았다. 김시습은 시대의 기인이요 괴짜였다. 이런 일이 있었다.
세조'묘법연화경'의 번역 사업을 벌이고 있을 때였다. 불교계의 많은 승려들이 그 일을 맡을 사람으로 김시습을 추천했다. 세조의 부탁을 받은 효령 대군은 김시습에게 간청해서 다른 승려들과 함께 내불당에 들게 하였다. 내불당에 머문 지 열흘 쯤 되던 날 임금이 내정으로 스님들을 불러 법회를 열었는데 김시습도 이에 참여하였다가 이른 새벽에 행방을 감추었다. 사람을 시켜 행방을 찾으니 설잠(김시습의 승명)은 거리의 거름 구덩이에 들어가 얼굴만 내밀고 있었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김시습이 술에 거나하게 취해 한양 거리를 지나다가 영의정 정창손이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시습이 그 앞을 가로막고 큰 소리로
  "야, 이놈아 너는 이제 그만 좀 해먹어라!"
  하였더니 정창손은 못 들은 체하고 지나가 버렸다.
  또 어느날 김시습이 때묻고 더러운 옷에 새끼줄을 두르고 한양 거리를 지나고 있자니 뒤에서 물렀거라 는 벽제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어릴 적의 친한 친구인 서거정의 행차였다. 김시습이 썩 앞으로 나가,
  "야, 강중(서거정의 자)! 자네 요즘 편안한가?"
  하자 당시 대제학이었던 서거정은 수레를 멈추고 공손히 대답하였다.
  "그래, 그런데 자네도 편안한가?"
  이 광경을 본 사람들은 모두 놀라 넋을 잃고 서 있었다고 한다.
  이퇴계는 김시습을 평하여 "일종의 이인이며 색은 행괴(은벽한 것을 찾고 괴이한 행동을 하여 남의 시선을 모으고자 하는 사람 '중용'에 나오는 말)에 가깝다"고 하였다. 다른 기록에서는 김시습이 "미쳐서 읊조리고 다니며 세상을 구경거리로 여겨 희롱하고 세상을 피해 선승이 되었으나 불법을 지키지 않았으니 그를 광승으로 취급했다"고 했다. 그리고 또 "여러 아이들이 흉보고 비웃으며 다투어 기와 조각과 돌을 던져 몰아냈다"고도 했다. 그러나 김시습은 단순한 이인이나 광인이 아니었다.
그의 기괴한 행동은 당시의 사회적 이념적 모순과 결부시켜 해석할 때에야 비로소 이해될 수 있다.

  김시습은 자신은 일하지 않고 편안히 지내면서 입으로만 애민에 힘써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스스로 땀흘려 일하는 괴로움을 겪으면서 농민을 대변하는 시를 썼다. 이런 시가 있다.

 

  농부는 한 해가 다 가도록 땀흘려 애쓰고
  누에 치는 아낙네는 봄 내내 쑥대머리로 고생하는데
  취하고 배부르고 좋은 옷 입은 무리들은 성 안에 가득하니

  만나는 사람마다. 편한한 분들일 뿐이로구나.

                - 영산가고 제4수 -

 


그의 시대


  그가 살았던 시대는 역사 구분으로 보면 중세였다. 중세의 사상은 동양과 서양을 막론하고 절대적인 가치나 이념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중세적 이념에서는 인간을 개별적인 존재로 보기보다는 보편적 존재로 보며 개별적인 것보다는 보편적인 것을 중시한다. 그리고 존재보다는 당위가 우선이다. 그래서 '실상이 이러이러하다'는 현실보다는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당위를 더욱 강조한다.
말하자면 '있는 것' 보다는 '있어야 할 것'이 더 중요하다. 이 '있어야 할 것'이 바로 이기철학에서 말하는 이(理)이다.


  서양은 기독교 사상으로 모든 모순과 사회적 불평등을 다스리려 하였고 중국들 비롯한 동아시아에서는 이기 이원론을 기본으로 하는 성리학을 채택하였다.
중세의 질서는 모든 힘을 하나로 돌리려고 하는 권위주의적인 것이었고 그 권위를 유지시켜 주는 것이 서양의 하나님과 동양의 천 다시 말해서 불변의 이(理)였다.
함없는 우주의 이치요 원리인 이(理)는 변화하는 모든 것 말하자면 '있는 것'-그것을 기(氣)라 한다-을 주재하고 통괄하는 힘을 가진다.

그래서 이가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고 이처럼 이를 중심에 두고 입장을 주리론이라고 한다. 예컨데 개별적인 부자 관계가 있기 전에 이미 부자간의 이가 있으므로 모든 부자 관계에서는 부자의 이를 지켜 친애하여야 한다는 식이다.


  조선 왕조 창건을 주도한 신흥 사대부들은 고려 귀족의 이념인 귀족 불교를 비판하고 이기 철학을 새로운 이념으로 제시하였다.

그들이 제시한 이기 철학은 이를 중시하는 입장에 선 것이었다. 따라서 그것은 사회 체제를 안정시키려는 목적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신흥 사대부들은 모든 사회 질서가 불변의 이치인 본원적인 이에 따라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설명하였고 사회적으로 모순이 확대되는 것은 왕도 정치가 불철저하기 때문이라고 보아 왕도 정치의 철저한 실현을 주장하였다. 또 설령 왕도 정치가 철저하게 실현되지 않더라도 그러한 이상을 가지는 한 사회는 근본적으로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이상에 자신을 맞출 수 없는 학자들은 이단적 지식인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중세적 질서에 반대하는 사상가들이 나타나면서 조선 왕조는 사회적, 이념적 모순을 점차로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김시습은 기존 권위를 거부하고 자기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한 철학적 노력을 펼쳤다. 스스로가 "성격이 편벽되어 궁해도 빌리지 않고 주어도 받지 않는다",
"나쁜 버릇인 줄 알지만 습관이나 성격은 고칠 수 없게 되었다"고 했듯이 타협을 거부하고 독선적이어서 자아를 굽혀 세상이 요구하는 대로 따르려 하지 않았다.
그는 이기 철학을 비판하고 이를 별도로 인정하지 않는 기 일원론을 폄으로써 중세적 이념에 심각한 도전을 결행한다.

 

기 일원론의 선구자


  김시습은 중세적 질서에 부딪혀 이를 거부하지 않을 수 없는 자아 의식을 최초로 심각하게 느낀 선구자이다. 이러한 자아 의식은 사회적 모순을 비판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념까지도 배격하는 양상을 띠게 되었다. 이념에 대한 비판이 없다면 사회 모순을 절실히 체험하였다. 하여도 종래의 방법으로 해석하여 왕도 정치의 불철저한 실현으로 인한 잘못으로 보든가 소인배들의 폐단으로 세상이 어지러우니 그럴수록 물러나 안빈 낙도하면서 심성을 닦아야 한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김시습은 사회 모순을 비판한 것 이상으로 이념 비판에도 적극적이었다.
그 때문에 그는 세상과 철저히 대립하였고 세상에 대한 저항의 표시로 평생을 방외인으로 남았으며 중이 되어 자기를 용납하지 않는 세상을 의식적으로 조롱하며 살았다.
  김시습은 기 일원론을 수립한 선구자이다. 서경덕이나 임설주 최한기 등으로 이어지는 기 일원론의 출발점이 바로 김시습이다.

일원적 주기론이라고도 하는 기 일원론은 주리론과 대립하는 이론이다. 주리론은 자연 현상이나 사회 현상을 이에 따라 파악하여 중세 사회를 합리화하고 그 윤리적 면모를 분명하게 제시하는 구실을 하였다. 주리론정도전 권근에서 비롯하여 이언적 이황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주리론에서는 이가 기보다 먼저 있으면서 기를 있게 하며 태극에서 음양이 나뉘고 음양에서 천지 만물이 생기니 태극이야말로 모든 존재의 본원이라고 주장한다.
그 태극이 바로 이(理)이고 음양은 기(氣)에 해당한다. 여컨대 중세적인 질서의 근원은 이(태극)이고 치자와 피치자의 관계는 이의 구현이기 때문에 움직일 수 없는 정당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시습 '태극설'을 지어, 주리론을 반박하였다.
그는 태극이 음양을 낳는 것이 아니라 태극이 곧 음양이고 모든 존재자는 음양에 의해 대립적인 운동을 하며 태극은 음양의 대립적인 운동을 가장 포괄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태극 곧 이(理)에서 생긴다는 견해를 부정하고 이는 기에 선행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기의 대립적인 운동 자체의 원리일 뿐이라는 점을 거듭 강조한다.

말하자면 이와 기의 관계는 주종 관계나 선후 관계가 아니라 대등 관게이며 그 자체로 의미 잇는 관계라는 것이다.


  그리고 음양의 대립적인 운동은 다른 그 무엇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기의 속성이라고 한다. 그는 '귀신설'이라는 논문에서 "하늘과 땅 사이에 다만 하나의 기가 풀무질하고 있다"로 하여 기만을 인정하고 이를 별도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조화의 자취는 두 가지 기(즉 음양)가 저절로 그런 것이 아닌 것이 없다"고 함으로써 이가 기를 주재한다는 것을 부정하고 있다.

  김시습은 삶과 죽음도 기로써 설명한다. '생사설'에서 그는 기가 모여 태어나면 사람이 되고 기가 흩어져 죽으면 귀가 된다고 했다.


  김시습의 기 일원론은 선구적인 의미를 가진 것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철저하지 못한 구석도 있고 체계도 덜 잡혀 있었다. 특히 본질적인 측면에서는 주리론을 과감하게 비판하였지만 윤리적인 문제에서는 주리론을 과감하게 비판하지 못하고 주리론적인 윤리관을 인정하고 들어간 점은 중요한 한계로 지적될 만하다. 철학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존재론에서는 진보적이었으나 윤리론에서는 보수적이었던 것이다.

그는 이런 글을 남겼다.

  제왕이 다섯 가지 가르침을 베풀면서 부모에게 효도하는 조목을 제일 첫머리에 두었고 또 삼천 가지의 죄를 별여 놓으면서 불효를 가장 큰 죄라고 하였습니다.

무릇 천지 사이에 살면서 누군들 길러 주신 은혜를 져버릴 수 있겠습니까.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 가서 조상을 뵈오리까? (해동명신록)

  그러나 비록 윤리적인 문제에서는 구체적인 견해를 제시하는 데에 이르니 못했지만 그의 존재론은 중세적인 이념의 근거를 비판한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김시습이 보인 한계는 훗날 허균에 의하여 극복된다.

 


금오신화의 탄생


  김시습의 철학과 그의 소설 '금오신화'는 무관하지 않다. 아니 무관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의 기 일원론과 소설의 구조는 정말로 닮은 꼴이다.
  김시습은 아무도 알아 주지 않는 고독한 예외자요 방외인이었기 때문에 자기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하여 온갖 기행을 거듭하며 세상과 끊임없이 대결하였다.
그 과정에서 세상을 개조할 수 있는 실제적인 방법을 확보할 수 없는 처지에 있던 그는 철학적인 비판을 저항의 무기로 삼았다.

물론 김시습이 기whs의 이기 철학을 깊이 터득하고 그것을 비판적으로 개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그 일은 가능하였고

또 그래서 주목할 만한 성과를 올릴 수도 있었다.


  김시습의 소설은 그가 벌인 철학적 투쟁의 문학적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금오신화'는 우리 나라 최초의 소설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것이 소설이라고 불리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소설이 신화나 전설, 민담 등과 구별되는 점은 '갈등' 다시 말해서 자아와 세상의 대립 그 자체에 중심을 둔다는 것이다.
'금오신화'는 그런 성격을 잘 보여 준다. 이 소설은 그 시대 유학자들이 비판과 탄압의 표적이 되었다.


  그 시대의 공식적 가치관인 주리론에 어긋나고 사회적 질서를 어지럽히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래서 '금오신화'는 매월당집에 수록되지 않았고 김시습 자신도 "책을 지어 석실에 감추니 후세에 알아볼 자가 있으리라" 하였다.
  기 일원론의 입장에서 보면 대립은 기의 속성이고 따라서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기에 의해 생겼다가 해결되고 또 해결되면서 생기는 항구적인 것이다.
기 일원론을 주장한 자들이 소설을 썼다는 것은 그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김시습은 스스로 소설을 썼고 서경덕은 직접 쓰지는 않았지만 그의 제자인 허엽의 아들 허균이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소설이라는 '홍길동전'을 썼다. 더욱 주목한 만한 것은 '금오신화'와 '홍길동전'은 권선 징악의 구조를 택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것은 대결과 모순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 선한 자는 복받고 약한 자는 벌받는다는 전형적인 노선에서 벗어난 것이기도 하다.


  '금오신화' '만복사저포기' '이생규장전' '취유부벽정기' 등의 세 편은 쉽게 말하면 연애 소설이다. 그리고 '남염부주지''용궁부연록'은 글쓴이의 이상과 정치관을 피력한 작품이다. 그런데 이 작품들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한결같이 남이 이해하지 못할 고독한 경험을 하고 혼자 고민하고 혼자 방황하며 또 혼자 비극을 겪는다. 그리고 그들이 부딪힌 문제들은 해결해 줄 수 있는 절대적 원리는 보이지 않는다.

즉 열심히 일하고 착하게 산다고만 해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또 언제나 결말 부분에서 주인공이 자취를 감추는 것도 중요한 특징이다. 몇가지 예를 들어 보자.


  그는 그 후에 혼인하지 않고 지리산에 들어가 약초를 캤는데 그가 어떻게 세상을 마쳤는지 알 수 없다(만복사저포기)

  그는 뼈를 수습하여 부모의 무덤 곁에 장사지냈다. 장사를 마치자 그리워하는 마음 때문에 병을 얻어 몇 달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 소식을 들은 이들은 슬퍼하고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의 외로움을 사모했다(이생규장전)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고 분향을 하고 땅을 쓸고 뜰에다 자리를 펴고 턱을 괴고 잠시 누웠다가 문득 세상을 떠났다(취유부벽정기)

  세상과 타협하기를 거부하는 의지를 거듭해서 보여 주는 비장한 결말이 아닐 수 없다.

결국 김시습의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바로 작가 자신인 것이다.



 세상 밖에서 세상을 비판하며 살다 간 방외인


  숙부가 조카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하며 충성을 맹세한 신하들이 변절하는 것을 본 김시습에게는 절대적 당위인 이가 권위를 가질 수 없었다. 그는 이 세상에서 그러한 이치가 실현되리라고 기대하지도 않았다. 절대적 권위를 누리며 군림하는 성리학의 이기론에 승복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권신들을 거리낌없이 조롱할 수 있었다. 이런 일이 있었다.
  수양 대군이 권력을 잡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권신 한명회가 한강가에 압구정이라는 화려한 정자을 짓고 거창하게 현판을 걸어 놓았다. 어느 날 김시습이 그 앞을 지나다가 그 현판을 보니 거리에 이런 시가 씌어 있었다.


  젊어서는 사직을 붙들고
  늙어서는 강호에 누웠네


  김시습은 이렇게 고쳐 놓았다


  젊어서는 사직을 위태롭게 하고
  늙어서는 강호를 더럽혔네


  한 행에 한 글자씩 즉 부(扶)자를 위(爲)자로 와(臥)자를 오(汚)자로 바꿈으로써 뜻을 정반대로 만들어 놓았다. 사람들이 보고 그럴듯하다고 수근거렸다.

한명회가 곧 현판을 치워 버렸음은 물론이다.


  김시습은 명리나 부귀를 추구하지 않았고 또 그랬기 때문에 자기의 사상에 규제를 받지도 않았다. 한때 승려가 되어 방랑하면서 불교에 심취하기도 하고 도교의 신선술의 일종인 선가의 수련에 몰두하기도 하였으나 그 어느 것에도 머물지 않았다.
'묘법연화경'의 번역 사업에 참여할 만큼 불교에 안목이 깊었으면서도 불교를 비판하고 또 도교를 비판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경세적 입장은 늘 유학이었다. 평생을 속세에 초연하여 은일하는 삶을 살았으면서도 유학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점 때문에 율곡그를 심유적불 즉 마음은 유가이나 그 자취는 불교적이었다고 일컬었다.
  결국 김시습의 사상은 서경덕과 마찬가지로 노자와 장자를 많이 닮아 있다.
다만 서경덕에서는 그것이 자연과 하나가 되는 경지를 추구하는 자연 철학적인 모습으로 나타났다면 김시습에서는 그것이 호방과 거침없는 비판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공통된 점은 둘 다 탈속한 삶을 살 수 있었고 종래의 학문적 체계에 구애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어지는 기 일원론의 맥락은 한국 유학의 한 줄기를 이룬다.


  이율곡은 김시습을 "재주가 그릇 밖으로 넘쳐 흘러서 스스로 수습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평하고 "그가 영특하고 예리한 자질로써 학문에 전념하여 공과 실천을 쌓았더라면 그 업적이 한이 없었을 것이다"고 하면서 애석해 하였다.
  선조는 그의 충절을 높이 평가해 생육신으로 떠받들게 하고 이율곡으로 하여금 '김시습전'윤춘년으로 하여금 '매월당전'을 짓게 하였다. 또 정조는 그가 죽은 지 거의 300년 후에 이조 판서를 추증하였다. 그러나 김시습이 벼슬하지 않은 것을 세종대왕에 대한 의리나 단종에 대한 절의로만 보는 것은 옳지 않다.

그보다는 잘못된 현실과 타협하지 못하는 그의 사상 때문에 세상을 등지고 방외인으로 살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2009.07.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