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고종과 명성왕후

2019. 1. 14. 14:36잡주머니

고종과 명성황후 통해 보는 근대 격변기-
일본·청·러시아 돌아가며 손잡다 끝내...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 했던가. 1863년 아들 고종 즉위로 권력 중심에 섰던 흥선대원군은 1873년 최익현의 탄핵 상소가 중요한 계기가 돼 10년 권력을 잃고 일선에서 물러났다. 본격적으로 고종의 친정이 시작됐지만 고종에게는 정치적 감각으로 무장한 만만치 않은 부인이 있었다. 훗날 명성황후로 추존된 왕비 명성왕후. 고종의 동반자기도 했지만, 친정 가문을 정치에 끌어들여 왕 권력을 무력화시키는 데도 일조했다.
고종(1852~1919년)은 1863년 12세에 왕이 됐으나, 아직 혼례식을 올리지 않은 상태였다. 왕이 된 직후에는 가례를 올릴 수 없었다. 철종 3년상이 아직 끝나지 않은 기간이었기 때문이다. 철종 신주를 종묘에 부묘한 직후인 1866년(고종 3년) 3월에 여흥 민씨 민치록(1799~1858년)의 딸(후의 명성황후, 1851~1895년)과 가례를 올렸다. 1866년 혼례 때 고종은 15세, 왕비는 16세로 왕비가 연상이었다.

명성황후는 1851년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났으며, 여주에 생가가 복원돼 있다. 혼례 주도권은 관례에 따라 수렴청정하던 대왕대비 조씨가 쥐고 있었으나 흥선대원군 의중이 크게 작용했다. 대원군이 민치록 딸을 왕비로 맞아들인 것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 명문가 집안 후예로서 안동 김씨 위세를 누를 수는 있지만 횡포를 부릴 국구(國舅)가 없다는 점이 컸다. 민치록은 숙종 계비인 인현왕후 아버지 민유중의 5대손이다. 민 씨 집안은 조선 후기 최고 명문가였지만 그 위상은 군수를 지낸 민치록대에 이르면서 상당히 낮아졌다. 더욱이 민치록은 명성황후가 8세 때 사망했다. 왕비 가문이 너무 좋아 외척이 권력을 행사하는 세도정치 폐해를 직접 경험한 흥선대원군은 가능한 한 미미한 집안 딸을 원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영향력이 미칠 수 있는 인척을 원했다. 이런 조건에 맞았던 인물이 바로 민치록의 딸이었다.

흥선대원군 부인이 여흥 민씨였던 만큼 명성황후는 인척이기도 했다. 더구나 민치구의 딸인 대원군의 부인과 왕비 오라비가 되는 민승호는 혈통상 친남매였다. 명성황후가 외동딸이었으므로 민치록은 친척인 민치구의 아들 민승호(1840~1874년)를 양자로 들였다. 이렇게 민승호와 명성황후는 남매가 됐지만 나이 차이는 21세. 명성황후는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해 민승호를 아버지처럼 모셨다.

이처럼 다양한 요인을 고려해 선택한 며느리는 그러나 뒷날 시아버지 흥선대원군을 정면으로 겨냥하는 당찬 며느리가 된다.

명성황후(이하 왕비)는 민승호를 필두로 친인척을 활용해 정치 전면에 나섰다. 하지만 1874년 민승호는 집에 배달된 물건함을 열어보다가 폭사하는 비운을 맞이했다. 왕비는 대원군 쪽 소행으로 파악하고 분노했다. 민승호가 아들 없이 사망한 후 왕비는 민태호 아들 민영익(閔泳翊, 1860~1914년)을 양자로 들였는데, 이후 민영익은 왕비의 핵심 정치 세력으로 성장한다.

민 씨 척족이 권력을 잡으면서 조선 정치 방향도 대원군이 추진한 쇄국에서 개항으로 흐름이 바뀌었다. 1876년의 강화도조약으로 일본에 개항장을 내준 것이 대표적이다. 일본의 세력 침투 과정에서 신식군대인 별기군이 창설됐고 구식군대 여건은 갈수록 열악해졌다. 결국 밀린 봉급 대신 지급된 쌀마저 선혜청 관리가 착복하자, 1882년 6월 구식 군인들은 폭동을 일으켰다. 임오군란이다. 구식 군인들은 일본공사관을 습격해 불태우고 선혜청 당상 민겸호를 처단했다. 신변에 위협을 느낀 왕비는 장호원으로 피신했고, 왕비 반대편에 있었던 대원군이 다시 권력을 잡는다. 대원군은 명성황후 생사가 불분명한 상황에서 왕비 국장을 선포하는 등 왕비의 존재 자체를 없애려 했다. 이때 명성황후는 고종에게 자신이 건재함을 알리고 청나라에 지원을 요청했다. 청나라 역시 대원군을 톈진으로 납치하는 강수를 둔다.

대원군의 납치로 고종이 친정 체제를 회복하고 왕비도 피난지에서 돌아온 이후 고종과 왕비는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청나라와 우호적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이 상황도 오래가지 못했다. 1884년 일본의 재정, 군사적 지원을 바탕으로 일본처럼 근대국가를 지향하는 급진개화파가 주도한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등 개화파 주도 세력 대부분은 서울 북촌을 기반으로 하는 명문가 자제들이다. 이들은 박지원의 손자인 박규수 사랑방(현재 헌법재판소 자리)에서 거사를 계획했다.

1884년 10월 17일 홍영식이 책임자로 있던 우정국 개국 축하연을 기회로 일으킨 정변은 일단 성공하는 듯 보였다. 민태호, 조영하, 민영목 등이 개화파 손에 희생됐다. 민영익은 큰 부상을 입었으나 알렌의 헌신적인 치료로 목숨만은 구할 수 있었다. 개화파는 고종과 왕비를 경우궁으로 납치해 근대 시민국가를 지향하는 혁신 정강 14개조를 발표했으나, 반격에 나선 청나라 군대의 개입과 지원을 약속한 일본이 태도를 소극적으로 바꾸면서 3일 만에 진압당했다. 갑신정변을 ‘3일 천하’라 부르는 것은 이런 까닭에서다. 10월 19일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은 일본군으로 망명했으며 고종은 창덕궁으로 돌아왔다.

갑신정변을 전후해 고종은 서양 여러 나라와 통상했고, 왕비는 적극 후원했다. 1882년 미국을 시작으로 1884년 영국과 독일, 1885년 러시아, 1886년 이탈리아, 1887년 독일과 수교가 이뤄졌다. 서양과의 통상은 조선에 대한 우월권을 독점하려는 청과 일본 야욕을 견제하는 조처기도 했다. 그럼에도 조선에 대한 청나라와 일본의 경쟁은 심화됐고, 1885년 청과 일본, 양국은 톈진조약을 맺어 두 나라 군대를 철수하고 향후 조선에 군대를 파병할 경우에는 사전에 서로 통보할 것을 협약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두 나라의 정치적, 경제적 경쟁과 조선 침략은 가속화됐다.

양국 경쟁은 1894년 청일전쟁으로 절정을 이룬다. 전쟁이 일본 승리로 끝나고 시모노세키조약이 맺어졌다. 청나라는 일본에 타이완과 랴오둥 반도를 할양하는 굴욕을 당했고, 조선에서 일본의 우위는 더욱 확고해졌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갑오개혁을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친일 내각 입지가 커지고 고종과 왕비는 제대로 권력을 행사할 수 없는 위치에 놓였다. 왕비는 일본을 견제할 수 있는 세력으로 러시아와 손잡고자 했다. 1895년 4월 일본의 중국 진출을 우려한 러시아, 프랑스, 독일이 협력해 일본에 압력을 가해 랴오둥 반도를 다시 반환하게 한 삼국협상도 고종과 왕비에게는 호재로 작용했다.

고종과 왕비는 1895년 8월 이범진, 박정양, 이완용 등 러시아와 가까운 인물을 기용하며 본격 반일 정책을 추진했다. 이런 움직임에 일본 역시 무력 행동으로 대응했다. 조선의 친러 정책 핵심에 왕비가 있음을 파악한 일본은 왕비를 살해하라는 전대미문 만행을 계획했다. 1895년 10월 8일 일본 공사 미우라와 전임 공사 이노우에는 일본인 수비대와 경찰, 기자 등을 규합했다. 암호명은 ‘여우 사냥’으로 하고 건청궁 곤녕합에 기거하던 왕비를 살해했다. 시신은 불살라져 인근 녹산과 향원정 연못에 버려졌다. 1895년 을미년에 일어났다 해서 ‘을미사변’이라 불리는 이 사건은 근대 조선의 비극적 운명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일본은 왕비의 라이벌인 대원군을 경복궁으로 데려와 조선 내부 갈등에 의한 왕비 살해로 사건을 꾸미려 했다. 하지만 이 장면을 목격한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 등에 의해 일본의 만행임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일본은 국제 여론에 밀려 미우라 등을 재판했으나, 이들은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다. 국모 시해와 단발령 시행에 항거하기 위해 ‘을미의병’이 결성돼 조직적으로 항거한 것도 이 무렵이다.

왕비를 잃은 참극을 경험한 고종은 자신에게도 위해가 가해질 것을 염려해 경복궁 탈출을 시도했다. 일본의 감시 속에 탈출이 여의치 않았으나 1896년 2월 11일 새벽, 궁녀가 타는 가마에 비밀리에 몸을 싣고 경복궁을 빠져나와 정동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했다. 러시아를 ‘아라사’라 했기에, 이 사건을 ‘아관파천’이라 한다. 정동에는 미국, 러시아 등 서양 공관이 많았기에 고종은 이곳을 피신처로 선택했다.

한 나라 왕이 외국 공사관에 체류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 정확히 120년 전 병신년에는 아슬아슬한 역사가 전개되고 있었다~

출처 : 오비 세상속으로
글쓴이 : 오비이락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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