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환의 文響 (15) 백자 거북이 해시계(白磁龜形仰釜日晷) / 교수신문

2019. 2. 8. 22:50美學 이야기



일본 ‘고려미술관’에서 실견 … 국내에선 확인된 유물 없어

김대환 문화재평론가
승인 2015.10.14 11:03



김대환의 文響_(15) 백자 거북이 해시계(白磁龜形仰釜日晷)





   조선시대 해시계는 1437년(세종 19년)에 만든 것으로 전해지는 천평일구와 정남일구, 현주일구 등 여러 종류가 있었으나 조선 후기까지 꾸준하게 사용된 해시계는 仰釜日晷다. 影針의 그림자가 비치는 면이 오목한 ‘가마솥 모양의 해시계’란 의미다.

앙부일구는 본래 1434년(세종 16년)에 장영실이 만들어 종로의 惠政橋와 종묘앞 南街의 석축기단위에 세워 백성들이 볼 수 있게 했다. 글을 모르는 백성들을 위해 시각의 눈금위에 時를 상징하는 십이지신의 동물을 그려 넣어 누구나 시간을 볼 수 있게 배려했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이 앙부일구들은 모두 소실된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는 17세기경에 청동 몸통에 銀象嵌技法으로 線과 문자를 새겨서 제작한 2점의 앙부일구가 보물 제845호로 지정돼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돼 있다(사진①).

조선시대 해시계는 금속이나 나무, 돌, 도자기 등 여러 가지 재질로 만들어져 사용됐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존하는 유물이 매우 희소하며 특히 도자기로 만들어진 해시계는 아직 국내에서 확인된 유물이 없다. 2010년에 ‘백자귀형앙부일구’를 발견했다는 보도(<매일신문>, 2010년 7월 22일자)가 있었으나 필자의 판단으로는 현대에 만들어진 模作이었다(影針과 時盤이 반대방향). 그러나 국내에서 찾을 수 없는 중요한 문화재를 해외에서 찾는 경우도 종종 있다. 조선시대 제작된 ‘백자귀형앙부일구’가 일본에 있는 박물관에서 2점이나 확인된다. 일본 ‘고려미술관’과 ‘오사카시립 동양도자미술관’이다. 다행히도 우호적인 소장기관의 아낌없는 배려로 필자는 직접 수장고에서 實見하고 실측, 촬영할 수 있었다.



일본 고려미술관에 소장된 ‘백자 거북이 해시계’는 출토품으로 맑고 투명한 유약의 氷裂사이에 흙물이 스며있으며 속은 비어있다(사진②). 백자가마에서 燒成당시 火氣를 분출하는 두 개의 구멍이 時盤의 중앙과 거북이 꼬리부분에 나 있으며 네모진 바닥판에는 麻布 흔적이 찍혀있다. 成形하고 붙지 않게 천을 깔고 건조시킨 흔적이다. 時盤을 등에 지고 있는 거북이의 형상은 사실적으로 만들어졌다. 거북이는 18세기 신도비 龜趺의 모습이고 높은 수준의 도자성형기법을 사용한 官窯作品으로 추정된다(사진④). 바닥판의 일부분이 파손됐으나 복원했으며, 전체적인 보존 상태는 양호하다(사진⑥).

時盤에는 ‘北極高三十七度三十九分一十五秒’ ‘冬至~夏至 寅, 卯, 申, 酉, 戌’이라고 음각돼 있어서 1713년 漢陽의 北極高가 서양의 度法에 의해 측정된 이후인 18세기 초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오목하게 들어간 시반에는 13줄의 가로선(절기선)과 7줄의 세로선(시각선)을 陰刻線으로 그은 다음에 影針을 북극을 향해 위도에 맞춰 경사지게 붙였다. 影針의 길이는 시반 입지름의 절반 정도이고 끝이 해시계의 중앙에 오게 하며 방향은 천구의 북극을 향하도록 남극에 고정시켰다. 동쪽에서 해가 떠서 서쪽으로 질 때까지 영침에서 생기는 그림자가 시각선에 비쳐 시간을 알 수 있게 했다. 아울러 절기마다 태양의 고도가 변하므로 계절선에 나타나는 그림자의 길이가 다른 것을 보고 24절기를 알 수 있게 했다(사진⑧).

오사카시립 동양도자미술관에 소장된 ‘白磁靑畵龜形仰釜日晷’는 고려미술관의 해시계와 같은 형식으로 거북이등에 時盤을 얹고 있는 모습이다(사진③). 다만 시반의 깊이가 낮고 평평하며 청화안료를 사용해 절기선과 시각선, 문자와 거북이의 중요부분을 그렸다(사진⑤ ⑨) 바닥에는 ‘五衛都摠府 弘治元年’이란 중요한 명문이 있어 주목되는데 홍치원년은 1488년(성종 19년)으로 이 유물의 제작년도로 볼 수 있다(사진7). 조선 전기의 해시계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현실에서 조선 전기의 해시계를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유물이다. 銘文 중에 오위도총부는 1466년(세조 12년) 관제개혁 때에 설치된 軍令機關으로 五衛를 총괄하고 兵曹에 치우쳐있는 군사관계 업무를 분산시키는 기능을 했던 기구다. 그러나 중종(1506~1544년)때 비변사가 설치되면서 군국기무만 전담하게 되며 점차 기능을 상실하고 법제상의 관부로 명맥을 유지하다가 1882년(고종 19년) 군제개혁으로 폐지됐다.





정리하면, 이 해시계는 납작한 거북이 형상으로 균형이 잘 잡혀 있으며 불투명한 백자유약을 두껍게 시유했고 빙렬이 있다. 시문된 高價의 청화안료는 짙은 코발트색의 농도를 감안하면 국내에서 개발한 청화안료로 짐작된다. 器壁이 두꺼우면 燒成時에 터질 확률이 높기 때문에 바닥의 안쪽부분을 얇게 하려고 파냈으며 발바닥의 유약을 닦아내고 모래받침을 해 소성한 흔적이 보인다. 청화안료의 일부가 산화되고 유약의 빙렬사이에 흙물이 스며든 것으로 보아 출토품으로 보인다. 조선 초기 경기도 왕실관요의 작품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는 관청마다 유사한 해시계를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488년에 제작돼 오위도총부에서 사용한 해시계로 제작시기와 사용처가 명확한 중요한 유물이다(사진 ⑩).

일본의 ‘고려미술관’, ‘오사카시립 동양도자미술관’의 백자 해시계는 국내에는 없는 희귀문화재로 조선시대 전기와 후기의 도자기술 비교는 물론이고 과학기구의 발달사연구에도 매우 중요하다.

일본 ‘고려미술관’은 재일교포인 故 정조문 선생이 개인의 자산을 출연해서 일본에 흩어져 있는 한국문화재를 수집해 설립한 박물관과 연구기관이다. 해외에 소재한 유일한 한국문화재 전문 박물관으로 오랜 기간 동안 일본 속에서 한국문화의 우수성과 아름다움을 전파 해 오고 있지만 안정적인 재정지원을 받는 일본의 공립박물관과는 다르게 현재는 재정적인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고려미술관에 소장돼 있는 국보급·보물급 등 귀중한 우리나라 문화재의 보존과 연구를 위해서는 보다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우리정부의 재정적인 지원책이 시급하다. ‘고려미술관’ 설립자의 숭고한 정신은 문화재로 ‘韓民族의 뿌리’를 되찾는 것이었다.

김대환 문화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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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교수신문(http://www.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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