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환의 文響_ 9 백자 은투각 새꽃넝쿨무늬 완(白磁金釦花鳥唐草文茶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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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IT강국의 후손들에게 전해진 문화적 자부심과 긍지


  • 김대환 문화재평론가
  • 승인 2015.06.23 16:06






김대환의 文響_ 9 백자 은투각 새꽃넝쿨무늬 완(白磁金釦花鳥唐草文茶碗)

 

▲ ①백자 은투각 새꽃넝쿨무늬 완

   韓民族의 창의성과 예술성의 끝은 어디까지일까. 1천100여년 전에 제작된 작은 찻사발(茶碗)이 21세기 IT강국 대한민국을 만든 잠재력을 충분히 증명한다(사진 ①·②)고 하면 지나칠까.
이번 호에 소개하는 이 찻잔은 우리나라에서 陶磁器가 본격적으로 생산되기 시작한 가장 이른 시기에 제작된 遺物에 속한다(新羅末~高麗初).  바닥의 굽은 일명 해무리 굽으로 낮고 넓어서 안정감 있게 만들었고, 삿갓처럼 거의 직선으로 뻗은 器壁은 두 손에 꼭 들어오게끔 했다. 경기도 용인 서리의 고려백자 요에서 생산된 10세기경의 백자와 비슷한 제작시기이거나 그 이전에 우리나라 서남부지방에서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두꺼운 유약을 몸체에 골고루 시유했고 氷裂이 잔잔하게 나 있다. 굽바닥까지 施釉해 내화토받침 흔적이 남아있고 內底圓刻이 있으며 갑발을 사용해 한 점씩 燒成한 고급 白磁다. 굽의 폭(접지면)/ 굽의 지름(저경)의 값이 0.25cm로 큰 편이고 입 지름은 15cm, 높이는 5.6cm, 굽 지름은 5.5cm이다.



▲ ②다완의 측면

   여기까지는 우리나라 초기 도자기제작의 일반적인 사항으로 특이할 것이 없다. 그러나 이 遺物이 당시 도자기의 선진국인 중국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유일한 名品으로 존재하게 된 이유는 世界最初로 금속공예기술을 尖端 도자기에 접목시켜서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작품으로 再誕生시켜 냈기 때문이다. 先祖들이 탄생시킨 名品으로 도자공예와 금속공예의 結合이며, 소박함이 미덕인양 잘못 알려졌던 그동안의 잘못된 상식을 타파한다(사진 ③·④).




   얇고 넓은 銀板을 부채꼴형태로 만들고 당시 유행하던 연꽃잎과 꽃 넝쿨 속에 노니는 새를 밑그림으로 그린 후, 일정한 힘의 세기로 은판의 밑그림을 따라 釘으로 새겨 넣고 쪼아서 따낸다. 무늬는 굽 부분과 입술부분의 꽃잎을 從屬文으로 둘렀고 몸체의 主文樣은 대칭으로 올라온 두 줄기의 넝쿨이 온몸을 휘감고 있다. 그 사이사이에 열일곱 송이의 꽃과 열 마리의 새를 털끝처럼 가느다란 새김조각기법인 毛彫技法으로 정교하게 조각했으며 透刻된 銀板을 다듬고 金으로 鍍金했다(사진 ⑤, ⑤-1, ⑤-2).

   그 다음이 더 놀랍다. 어떻게 도자기의 몸체에 밀착시켜서 한 몸으로 완성시켰을까? 생각하는 것은 간단하지만 실제로 제작하기는 매우 까다로운 공정이며 정교한 기술을 필요로 한다. 아교와 같은 접착물질을 사용해 붙였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어떻게 천년동안 거의 변함없이 붙어있을 수 있었는지는 後孫들이 풀어야 할 숙제다. 이 透刻銀板의 무늬는 南北國時代 新羅에서 즐겨 사용하던 自然의 동식물 문양으로 몸통인 해무리굽 백자와 제작시기도 일치한다(사진 ⑥·⑦, ⑦-1, ⑦-2, ⑦-3, ⑦-4, ⑦-5).




   국내에 도자기와 금속공예가 결합된 유물은 몇 점이 확인된다. 1990년에 국보 제253로 지정된 靑磁陽刻蓮花唐草牧丹文銀金口鉢(사진 ⑧)과 靑磁象嵌菊花文香盒(사진 ⑨), 청자상감국화무늬향합(사진 10, 소재지불명)이다. (사진 ⑧)이 國寶로 지정된 가장 큰 이유는 입술주변에 은테를 둘렀기 때문이다. 또한 고려왕의 行宮인 惠陰院址에서 朱錫으로 입술주변을 감싼 청자각접시 몇 점이(사진 ⑪) 출토되기도 했다. 이들은 모두 파손되기 쉬운 도자기의 입술부분에 금속 테를 감싸서 장식성보다는 실용성을 더 감안했다.

   한편으론, 청동 제품에 투각한 銀板을 감싸서 화려하게 장식한 국보 제92호 靑銅銀入絲蒲柳水禽文淨甁(사진 ⑫)이 있는데 첨대 아래 부분의 둥근 환테와 귀때의 덮개를 透刻銀板으로 감싸서 장식했다(사진⑬·⑭). 이것은 청동정병의 파손을 방지하기보다는 화려한 장식을 염두에 둔 것으로 아직까지 銀板을 투각해 감싼 부분에 대해 집중 조명한 연구자는 없다. 도자기는 아니지만 오히려 이 청동유물이 장식적인 측면에서 바로 (사진 ①)의 白磁金花鳥唐草文茶碗과 일맥상통하며 깊은 관련성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국에도 宋, 元代에 청자, 백자의 입구에 은테를 감싼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 물론 그 수량은 우리나라처럼 희소하며 고급자기에만 사용했다. 그리고 宋代 定窯白磁 露胎의 覆燒法으로 銀이나 朱錫으로 입술부분을 감싸기 위해 아예 입구부분의 유약을 훑어내고 소성한 경우도 있다. 대접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器形에 골고루 은테를 감싼 유물이 있는데 특히 주전자의 경우에는 뚜껑이나 물이 나오는 물대의 끝부분, 굽 부분 등을 銀으로 감싸기도 한다. 우리나라에 비해 워낙 잔존수량이 많고 다양해서 그동안은 도자기와 금속의 결합제품은 중국이 처음으로 개발해 생산했고, 우리는 그러한 중국의 기술을 받아들인 것으로 생각해왔다. 왜냐하면, 중국에 비해 유물의 수량도 적고 은테를 두른 도자기의 제작시기도 12세기 이후의 유물들로 추정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0세기를 전후한 유물(사진 ①)의 등장으로 중국보다 이른 시기에 더 화려하고 정교한 작품을 생산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됐다.


   여주 高達寺址高達寺元宗大師慧眞塔碑에는 “光宗이 945년에 元宗大師(868~958년)에게 瓷鉢을 하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은 현재 남아있는 은장식 청자(사진 ⑧~사진⑪)보다 이른 시기에 이미 金銀裝飾을 결합한 도자기가 존재했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기록이다. 그동안 이 기록에 등장하는 ‘金瓷鉢’을 當代에 수입한 중국도자기로 생각한 사례가 많았는데 이제는 수정할 필요가 있다. 도자기의 器壁에 透刻銀板을 씌운 이 유물(사진 ①)의 제작시기가 원종대사의 활동시기인 10世紀와도 일치하며 ‘金瓷鉢’이 이런 계통의 도자기일수도 있기 때문이다.



   작년 11월 신세계갤러리 전시회 「우리 도자의 아름다움」에서 고려백자 ‘金口鳳凰文碗’고려청자 ‘金口禽獸文碗’이 출품돼 화제를 모았다(사진 ⑮·). 고려백자와 고려청자의 器壁에 銀透刻板을 붙인 器物로 전례가 없던 유물의 등장이라며 전공자들조차 반신반의했다. 그러나 筆者에게는 전례가 있는 유물이었다. 두 번째로 보는 투각은판을 씌운 도자기였기 때문이다. (사진 ⑮)는 (사진 ①)과 같은 10세기경에 제작된 해무리굽 백자이며 (사진 )은 11세기에 제작된 순청자로, 투각된 은판무늬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동일한 계통으로 銀板透刻한 후에 金鍍金했다. (사진 )의 등장은 투각한 은판을 붙인 기법의 도자기가 적어도 10세기부터 11세기 후반까지 오랜 기간 제작되고 있었다는 증거다. (사진 )은 입 지름이 17.5cm이고 굽 지름은 5.1cm, 몸통의 높이는 7.3cm로 일반적인 찻잔의 크기보다는 약간 큰 편이고 (사진 ⑮)는 입 지름이 16cm, 높이가 6cm이다. 이렇게 도자기 외벽에 투각해 붙인 銀板무늬가 12세기 이후에는 象嵌技法의 발달로 청자대접의 외벽에 무늬로 새겨지게 되며(사진), 한편으로는 (사진 ⑧~⑪)처럼 도자기의 입술부분을 감싸주는 간편한 형태로 변모했다. 처음 공개되는 중요한 문화재는 完熟하지 못한 전공자로부터 眞僞 논쟁에 휘말리게 될 소지가 높다. 그래서 대부분의 개인 소장자들은 유물공개를 꺼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현명한 소장가들이 흔쾌히 조사와 발표를 허락하는 것은 우리나라 학문의 발전과 문화재의 공공성이 작은 眞僞論爭보다 우선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장가에게는 유물공개의 적임자를 선정하는 가장 중요한 결정권이 주어진다.

   세계최대의 도자기 생산국이었던 중국에도 透刻銀板을 몸통 전체에 씌워 화려하게 장식한 도자기는 없고 名品茶碗의 최대 소장국인 일본에도 없다. 당시 최첨단의 도자기생산기술을 지녔던 우리 선조들은 도자공예기술과 고조선 시대부터 이어진 금속공예기술을 접목해 세계 최고의 예술품을 창조했다. 이러한 사실이야말로 21세기 IT 强國의 후손들에게 문화적 자부심과 긍지를 심어주기에 충분하다.



교수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