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왕사

2019. 2. 23. 00:49우리 역사 바로알기



발해/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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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계보


1. 개요[편집]

   발해는 왕이 최소 15명[1]에 역사는 228년이고 평균 재위 기간은 15.2년으로 상대적으로 짧다. 하나의 왕조가 500년 ~ 700년, 심지어 천 년까지도 이어지는 한국의 메이저급 왕조치곤 역사도 짧은 편이다.

발해를 메인으로 다룬 사서가 전멸 수준이기 때문에 기록이 매우 희박하고 파편적임에도 연호나 왕의 본명은 거의 전부 온전하게 남아있다. 한국의 왕조 중 남아있는 연호가 가장 많으며, 사용도 가장 꾸준히 한 것으로 보인다. 전해지지는 않지만 11대 이후로도 분명히 연호를 사용했을 것이다.

   11대 왕부턴 시호가 전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구당서, 신당서 등에 활용된 발해국기대이진 대에 편찬되었기 때문.[2] 11대 대이진을 화왕, 12대 대건황을 안왕, 13대 대현석을 경왕, 15대 대인선을 애왕이라고도 하나 좀더 연구해야 할 과제다. 특히 경왕, 애왕의 경우는 일본이 신라의 경애왕과 그를 혼동한 듯하며 다른 사료적 근거가 발견된 바 없기 때문에 현재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참고) 그리고 화왕과 안왕은 출처는 환단고기이다. 환단고기 자체가 위서이니 현재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한편 고왕의 연호라고 전해지는 '천통'은 환단고기 및 태씨 족보에만 실려있다. 따라서 발해의 연호로 확실시되는 건 중국 측 사서에서도 확인되는 2대의 연호부터 11대의 연호까지다. 그런데 문제는 '천통'이란 연호가 국사 교과서에서도 발해의 연호로 확실한 것마냥 다른 연호들과 함께 실려 있다는 것. 하지만 당에 저항하여 세워졌고 천하중심관을 가진 고구려의 후손으로서 건국의 정통성을 알리기 위해 연호를 분명 쓰긴 썼을 것이라 추측하는게 정설.

   또한 중국 사서를 통해 전해지는 시호가 묘호일 가능성도 있다. 고려의 군주의 경우도 묘호의 조종을 때고 왕으로 읽는 경우가 당대의 유학자(사대파) 또는 조선에 있었다 (문종 -> 문왕, 현종 -> 현왕)
전해지는 발해 시호의 형태가 묘호와 매우 유사하므로 추측을 해볼 수 있느나 확인할 길은 없다. 직접적인 유물이 발굴되기 전에는..

2. 계보[편집]

  • 3대 문왕 대흠무의 경우 존호도 전해지나, 다른 왕들은 존호가 전해지지 않으니 본문서에는 넣지 않았음.
  • 1대 고왕부터 9대 간왕까지는 대조영계, 10대 선왕부터 15대 대인선까지는 대야발계.[3]
대수
재위 기간
나라 사정
1대
고왕(高王)
대조영(大祚榮)
□□
698년 ~ 719년
건국
2대
무왕(武王)
대무예(大武藝)
인안(仁安)
719년 ~ 737년
팽창
3대
문왕(文王)
대흠무(大欽茂)
대흥(大興), 보력(寶歷)
737년 ~ 793년
정비 - 안정기
4대
폐왕(廢王)
대원의(大元義)
□□
793년
내분
5대
성왕(成王)
대화여(大華璵)
중흥(中興)
793년 ~ 794년
내분
6대
강왕(康王)
대숭린(大崇隣)
정력(正歷)
794년 ~ 809년
안정
7대
정왕(定王)
대원유(大元瑜)
영덕(永德)
809년 ~ 812년
내분
8대
희왕(僖王)
대언의(大言義)
주작(朱雀)
812년 ~ 817년
내분
9대
간왕(簡王)
대명충(大明忠)
태시(太始)
817년 ~ 818년
내분
10대
선왕(宣王)
대인수(大仁秀)
건흥(建興)
818년 ~ 830년
전성
11대
□왕
대이진(大彝震)
함화(咸和)
831년 ~ 857년
전성
12대
□왕
대건황(大虔晃)
□□
857년 ~ 871년
전성
13대
□왕
대현석(大玄錫)
□□
871년 ~ 894년?
쇠퇴
14대
□왕
대위해(大瑋瑎)
□□
894년? ~ 906년?
쇠퇴
15대
?
대인선(大諲譔)
□□
906년? ~ 926년
중흥 시도 - 멸망
?
일하
壹夏[4]
원기
元璣[Z]
굉림
宏臨
광덕
匡德[Z]
10. 인수
신덕
新德
11. 이진
12. 건황
13. 현석

[1] 13대 대현석까지의 왕계 및 마지막 왕 대인선이라는 정보만 확실하고, 그 사이에 대위해를 비롯하여 몇 명의 왕이 있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대위해 한 명만 있었을 수도 있고, 더 있었을 수도 있기 때문에 15명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2] 시호는 왕이 죽은 후에 올리는 호칭이다.

[3] 무왕 무예가 당과 한 전쟁의 勝敗를 史書는 명확하게 적지 않으며,南邊으로 간 신라군에 날씨로 인한 退軍만 기록 기묘하게도 무왕이 사망하던 시기에 토번과의 전쟁으로 서북지역에서 전쟁이 있었다.어쩌면 당나라군이 親征한 무왕을 죽일 정도로 승리했으나, 토번의 공세에 退軍하지 않았을까? 뒤를 이은 문왕 흠무는 57년이라는 긴 치세 기간동안 통치하였는데, 이 기간은 당나라의 허리를 끊어버린 '안사의 난' 기간을 포함한다. 그런데 문왕의 행보는 이러한 호기에 그다지 팽창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당 현종 시기에 안녹산은 평로와 범양 및 하동의 번진을 총괄하다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 지역들은 河北일대를 포함하며 唐의 東北邊에 방위를 담당하던 지역들이였다. 안사의 난으로 당 현종이 쫓겨나고, 뒤를 이은 당 숙종기간에 어느 정도 제압되었다가. 대종시기사사명의 아들 사조의를 죽인 것이 763년인데, 이해에 당 숙종 사망에 들어가서야 해결되었다. 특히나 가장 동북방에 위치하던 평로번진이 산동으로 이동되고나서 이정기왕국의 기반인 평로치청이 된다.즉 이시기에 범양번진의 유주(북경인근)까지로 당의 영역이 축소 그런데 이시기 동안에 문왕은 수도 천도만 하고 있었다.이것도 매우 수상한데 잦은 천도는 국초인 당시 상황에서 좋은 현상이 아니다.) 또한 사후에 아들이나 손자가 아닌 부모가 불분명한 族弟인 원의가 계승하다가 쫓겨나고, 이후 9대 간왕까지 발해는 계속된 내란에 있었던 것 같이 왕들이 계속해서 교체되었다. 이는 일반적인 왕조의 계보 모습에서 많이 이상하다.(고려는 태조 왕건 사후 광종 혹은 현종때 까지 복잡한 사정이 있었지만, 왕조 초기의 불안에 가깝다면, 여기서는 문왕이 57년이라는 아주 긴 치세기간 뒤에 생긴 것이다.) 여기에 발해의 혼란을 안정시킨 인물인 10대의 선왕 인수는 대조영의 직계가 아니라 동생 대야발의 후손으로 제2왕통의 시작이며, 보통 발해의 전성기로 평가 받아서 이시기에 해동성국이라고 불리었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국가 전반기에 가장 정통성이 있는 왕통이 20여년간의 혼란 상황에서 끊어지고, 갑자기 왕조의 개창자에 동생 후손의 계통이 왕이 되어서 정통성을 가진다는 것은 결코 정상적인 것이라고 보기에는 많이 어렵다.

[4] 대무예의 사촌 형이자, 대조영의 조카. 대조영의 다른 형제는 대야발 뿐인 것으로 파악되므로, 대일하는 대야발의 아들이라 할 수 있다. 이는 확실한 것이 아니며, 대인수가 대일하의 증손이라는 보장 또한 없다.[Z] 5.1 5.2 족보에만 보인다.[A] 7.1 7.2 대현석 이후로는 계보가 명확하지 않기에 이와 같이 표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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