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동이족東夷族과 화하족華夏族의 대륙의 역사 13편

2019. 2. 6. 03:28우리 역사 바로알기

본론으로 돌아가서,

뒤를 이어, 강왕康王, 소왕昭王, 목왕穆王 때는 주나라의 대외발전기로서, 소왕은 남쪽으로 나아가 초楚나라를 쳤고, 목왕은 서쪽으로 견융犬戎을 정복하였으며 동쪽으로는 서이徐夷를 정벌하는 등의 군사정벌을 통해 획득한 새 영토를 통치하고 교통로를 확보하기 위해 요충지에 동족 또는 이족 공신들을 제후로 봉하고, 제후들에게 일정한 지역과 주민을 지배하게 하여, 초기의 주周는 은나라 영토 전체를 거의 장악했으며, 동북쪽은 요녕성遼寧省 이르고 있었다는 사실이 소공 일족을 봉했던 연燕나라 청동기의 발굴로 밝혀졌다.

 

7대 의왕懿王, 9대 이왕夷王에 걸쳐서 왕실의 위엄이 쇠퇴하고, 경제가 점차 약화되자,

10대 여勵왕은 경사卿士 영이공榮夷公을 등용하여 새로운 경제정책과 호구조사를 실시하며 전제의 악정을 펼치매, 백성들의 반란과 귀족(국인國人)들의 강한 저항으로 왕은 체彘(산서성 곽현霍縣)로 달아났다가, 죽을 때까지 수도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 뒤 14년간은 왕이 없는 공위空位시대로서, 주공과 소공의 집정기였다는 설, 제후들이 협력하여 정치를 했다는 설, 몇 사람의 참주僭主들이 나타났던 시기라는 설이 있으나, 재상인 공백共伯 ‘화和’가 국정을 장악하여 천자의 업무를 대신한 ‘공백의 시대’로 봄이 무리가 아니듯 하며, 공백이 천자의 업무를 대신 한 해(年)인, BC841년이 중국 역사상 연대가 분명한 최초의 해이므로, 중국의 기년紀年으로 삼아, ‘공화원년共和元年’이라 한다.

 

여왕이 죽고, BC827년 선왕宣王이 즉위하여, 주변의 사이四夷를 토벌하는 등, 일시적으로 주왕실의 권위를 회복하는 듯하나, 흉작과 천재지변이 이어져 민심이 흉흉해지고, 제후들의 세력도 확장되어 독립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으며, 선왕을 이어 유왕幽王이 등장하여, 애첩인 포사褒를 후后로 삼고 아들을 태자로 삼는 등의 악정을 펼치니, 이에 분노한 정후正后의 오빠 신후申侯가 견융족犬戎族과 연합해 유왕을 죽이고, 태자인 의구宜臼를 옹립하니 평왕平王인데, 이는 BC771년 이전의 일로써, 평왕은 그 후로 계속되는 견융의 침입 때마다 제후들을 불러 모으는데 어려움이 있자 안전상의 이유로 동도東都인 성주成周(낙읍)로 천도하나, 서주西周는 멸망하고, BC770년부터, 이후 진秦(BC 221~206)이 전국을 통일할 때까지를 동주東周라 하는데, 이를 다시 2분하여 전반기를 춘추시대春秋時代(BC 770~476), 후반기를 전국시대戰國時代(BC 475~221)라 한다.

포사의 탄생에 관한 전설을 보자.

하(夏)나라의 마지막 왕 걸왕桀王시절에, 포褒(지금의 섬서성 포성현褒城縣)나라에 살고 있던 두 백성이 갑자기 두 마리의 용으로 변하여, 수천리를 날아가 걸왕의 궁궐에 떨어져, 피로에 지쳐 입에서 침을 흘리다가 갑자기 입을 열어 ‘우리는 포褒나라의 선왕이다’고 말하니,겁에 질린 걸왕이 용을 죽이려다 두려움에, 무당을 불러 점을 치게 하니, 점을 친 무당이 ‘절대 손을 대지 마십시오, 신선이 속세에 내려온 것은 길조이니, 폐하께서는 그것들의 침을 잘 간수해 두소서. 침은 용의 정기이니 그것들을 잘 간수해두면 훗날 복이 있을 것입니다’하니, 두 마리 용은 비바람을 일으키며 하늘로 날아갔고, 걸왕은 침을 쟁반에 받아서 황실의 보물창고인 주거朱柜에 보관하였다.

 

그로부터 천년이 지나, 하, 은殷 두 왕조가 무너지고 주周나라 10대 여왕厲王에 이르러,

그 용의 침을 보관해 두었던 주거에서 갑자기 광채가 쏟아지매, 담당 관리의 보고를 받은 여왕은 그 속이 궁금하여, 주거를 열어 안에 있던 쟁반의 이상한 물질을 보고, 무엇인지 몰라 두려워하다가 땅에 떨어뜨리니, 천년전에 담아두었던 용의 침이 전혀 변하지 않은 채 그대로 흘러내려, 자라로 변하여(작은 용으로 변하여 악취를 풍기며) 정원을 기어 다니니, 겁에 질린 여왕은 여인들에게 명하여 옷을 벗은 채(고대에는 나체의 미녀들이 사악함을 쫓아낸다는 속설이 있으며, 무巫가 춤을 춤도 이유가 될지도), 자라를 둘러싸고 고함을 지르게 하니, 갑작스런 소란에 깜짝 놀란 자라는 이리저리 기어 다니다, 왕궁 안으로 들어가 어디론가 사라졌는데, 이때 후궁에 있던 어린 계집종이 우연히 자라의 발자국을 밟았는데(우연히 침을 먹게 되어), 그로부터 그녀는 갑자기 배가 부풀어 오르기 시작하니, 여왕은 외간 남자와 정을 통하여 임신을 했다고 노하여 그녀를 감옥에 가두어 버렸다.

 

기원전 828년에 여왕이 세상을 떠나고, 그의 아들 선왕宣王이 왕위를 계승하였지만, 선왕도 그녀를 석방하지 않아, 수감된 지 40년이 지난 어느 날, 그녀는 갑자기 복통을 일으키다가 계집아이 낳았다.

전해오는 용의 침 전설에, 소녀가 임신한지 40년 만에 아이를 낳는 괴이한 일을 당하고, 수도 호경鎬京에는, ~산뽕나무로 만든 활과 기箕(콩대)로 만든 화살 통이, 주나라를 망하게 하리라~는, 노래도 널리 유행하니, 선왕은 불안하여, 계집아이를 물속에 던져 버리라고 명하고, 뽕나무 활과 가는 풀로 짠 화살통의 판매를 금지시켰다.

시국이 이러할 제, 엄중한 금령을 공포된 줄 모르는, 한 시골 부부가 뽕나무 활과 풀로 짠 화살 통을 팔려고 수도인 낙양洛陽으로 왔다가, 성문에 들어서자마자 병사들이 잡으려 하매, 눈치 빠른 남편은 재빨리 도망을 쳤으나, 아내는 병사들에게 잡혀서 죽고 졸지에 도망자 신세가 된 남자는 한적한 강가에서, 강물에 떠내려가고 있는 거적을 새들이 귀퉁이를 물어 물 밖으로 끌어내고 있는 광경을 보게 되니, 기이하게 여겨 거적을 살피니, 갓난아기가 깊이 잠들어 있으매, 아이를 키우기로 결심하고는 포褒나라로 친구를 찾아갔다.

 

세월이 흘러, 기원전 782년에 아들 희궁녈姬宮涅)이 왕위를 계승하니, 신申나라(하남성 남양현南陽縣) 공주를 왕후로 맞아, 태자 희의구姬宜臼를 낳은 12대 유왕幽王인데, 하夏의 걸왕桀王이나 은殷의 주왕紂王에 버금가는 폭군이라, 포褒나라의 제후 포향이 유왕에게 간언하다 투옥됨에, 포향의 아들 포홍덕은 ‘주 문왕의 동생 주공단이 은의 주왕을 타락시키기 위해 미녀 달기妲己를 훈련 시켜 주왕에게 보냈다’는 고사를 떠올리고는, 각지에서 미녀들을 모집하니, 뽕나무 활 때문에 죄인이 된 남자가 강가에서 거두었던 아이도, 아름다운 처녀로 성장하여 모집에 응하니, 그녀가 바로 포사로, 기원전 780년 포나라의 미녀들과 포사가 호경에 오니, 유왕은 포사의 미모에 반해 포향을 석방한다.

포사는 미모와 지혜로 즉시 유왕의 마음을 사로잡아, 1년 후에 희백복姬伯服을 낳고는, 왕후의 자리와 태자의 자리를 탈취하기 위하여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니, 포사에게 푹 빠진 유왕은, 기원전 773년 신후申后를 옥에 가두고, 태자 희의구姬宜臼를 신申나라로 유배시키고, 포사를 왕후에 희백복을 태자에 책봉했다.

 

포사는 방년 20세의 나이로 조정의 대권을 모두 차지하긴 하였지만 좀처럼 웃는 법이 없으매, 유왕은 그녀의 웃음을 보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였으나, 결코 웃음을 보이지 않았으나,

비단을 찢는 소리를 들으면 포사는 살짝 웃으니, 유왕은 그녀의 미소를 보기위해 막대한 돈을 들여 비단을 사들여, 국고는 바닥나고 백성의 원성이 자자해 질 때,

아첨을 잘하던 괵석보虢石父가,

‘근래에는 천하가 태평하여 그것을 사용한 적이 없으나, 옛날 서쪽 만족蠻族의 급습을 방비하기 위한 20여개의 봉화대에 불을 붙이면, 부근의 제후국에서 구원병을 보내줍니다. 전하와 왕후와 함께 여산驪山에 가서 봉화를 올린다면, 주변의 제후국의 대군이 구름처럼 몰려들 것입니다. 그들이 급히 달려와서 헛걸음치게 한 다음, 그 제후들을 놀린다면 왕후께서는 반드시 기뻐할 것입니다’함에,

유왕은 포사와 함께 여산에 와서 성대한 연회를 베풀고 봉화를 올리도록 명령하니, 정鄭나라의 제후 희우姬友가 깜짝 놀라 만류하였지만, 부근의 제후들은 밤중에 봉화가 올랐다는 급보를 듣고, 수도 호경이 오랑캐에게 포위당한 것으로 판단, 오로지 왕실을 구하겠다는 충성심으로 급히 지원군을 편성하여 달려왔으나, 적들의 그림자도 구경할 수 없어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해 하고 있을 때,

유왕은, ‘아무런 외침이 없었으나 내가 심심해서 한번 봉화를 올려본 것뿐이니, 원대 복귀하여 명령을 기다리시오’하니, 제후들과 병사들은 자신들의 귀를 의심할 정도로 허탈감에 빠져 돌아가는 모습을 본 포사가 비로소 웃음을 참지 못하고 생긋 웃으니, 이후에도 유왕은 포사의 웃는 모습을 더 보고 싶어서 봉화를 자주 올렸을 뿐만 아니라, 그녀가 좋아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려고 했었다는 ‘여산봉화驪山烽火’의 고사이다.

 

기원전 771년 포사에게 빠진 유왕은 신申나라에 유배시켰던 태자 희의구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니, 유왕의 장인이자 희의구의 외조부인 신나라의 제후(신후申侯)는 차마 외손자를 죽일 수가 없어 상소를 올려, ‘옛날 하夏의 걸왕은 말희妺喜를 총애하여 망했고, 상商의 주왕은 달기를 총애하여 망했는데, 지금 왕께서는 포사를 총애하여 적자를 폐하고 서자를 옹립함으로써, 부부의 정은 물론 부자의 정도 끊었으니, 명을 거두지 않으시면, 이 나라도 망하고 말 것입니다‘함에, 유왕이 격분하여, 신후申侯의 제후작위를 박탈한 다음 그를 토벌하려함에, 호경 부근의 만족蠻族 견융부락犬戎部落의 추장과 동맹을 맺길, ‘외손자가 왕위를 찬탈하면, 호경의 모든 재물과 많은 남녀를 노예로 바치겠다’고 약속하니, 신나라와 증繒나라, 서이西夷, 견융부락이 연합하여, 파죽지세로 수도인 호경성 아래에 다다르니, 유왕이 봉화를 올리나, 봉화의 불길을 본 제후들은 유왕과 포사에게 속았던 경험이 있었던지라, 제후국들은 구원병을 파견치 않았고, 미리 숨어있던 신나라의 군사들이 호경성문을 열어 줌에, 유왕은 포사와 여산驪山으로 탈출하나, 유왕은 견융족에게 죽음을 당하고, 성을 점령한 견융 족장은 포사의 미모에 반해 아내로 삼아 주나라에 계속 주둔함에, 신나라는 진晋, 위衛, 진秦, 정鄭등의 제후국과 연합하여 견융犬戎을 물리치니, 포사는 신나라의 제후가 용서치 않을 것을 알고 목매달아 죽으니, 기원전 771년의 사건으로, 만족蠻族에게 잡혀간 최초의 중국 황후로 전해진다.

신후申侯는 폐위된 태자 의구宜臼를 왕으로 옹립하니, 평왕平王이다.

 

출처 : 성주산포럼
글쓴이 : 날벼락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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