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계北界는 여진女眞과 달단韃靼과 요동遼東·심양瀋陽의 경계와 서로 연해 있으므로...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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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탁 | 조회 101 |추천 1 | 2018.09.06. 18:50


 


   "북계(北界)는 여진(女眞)과 달단(韃靼)과 요동(遼東심양(瀋陽)의 경계와 서로 연해 있으므로 실로 국가의 요해지(要害地)가 되니, 비록 아무 일이 없을 시기일지라도 반드시 마땅히 군량을 저축하고 군사를 길러 뜻밖의 변고에 대비해야 될 것입니다...“


   ㅡ "태조실록 1, 총서 69번째 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aa_000069

 


   태조단주에 침입한 호발도를 격퇴하고 변방을 평안히 할 계책을 올리다

 

   신우(辛禑) 9(1383) 계해 8, 호발도(胡拔都)가 또 와서 단주(端州)를 침구(侵寇)하니부만호(副萬戶) 김동불화(金同不花)가 외적(外敵)과 내응(內應)하여 재화(財貨)를 다 가지고 고의로 뒤에 있다가 짐짓 적에게 잡히었다. 상만호(上萬戶) 육여(陸麗)와 청주 상만호(靑州 上萬戶) 황희석(黃希碩) 등이 여러 번 싸웠으나 모두 패전하였다. 이때 이두란(李豆蘭)이 모상(母喪)으로 인하여 청주(靑州)에 있었는데, 태조가 사람을 시켜 불러 이르기를,


   "국가의 일이 급하니 그대가 상복(喪服)을 입고 집에 있을 수가 없다. 상복을 벗고 나를 따라오라.“

 

하니, 두란이 이에 상복을 벗고 절하고 울면서 하늘에 고()하고 활과 화살을 차고 태조를 따라갔다. 호발도(胡拔都)길주평(吉州平)에서 만났는데, 두란이 선봉(先鋒)이 되어 먼저 그와 싸우다가 크게 패하여 돌아왔다. 태조가 조금 후에 이르렀는데, 호발도는 두꺼운 갑옷을 세 겹이나 입고 붉은 털옷[褐衣]을 껴입었으며, 흑색 암말[牝馬]을 타고 진()을 가로막아 기다리면서 속으로 태조를 깔보아, 그 군사는 남겨 두고 칼을 빼어 앞장서서 달려나오니태조도 또한 단기(單騎)로 칼을 빼어 달려 나가서 칼을 휘둘러 서로 쳤으나, 두 칼이 모두 번득이면서 지나쳐 능히 맞히지 못하였다. 호발도가 미처 말을 타기 전에, 태조가 급히 말을 돌려 활을 당겨 그의 등을 쏘았으나, 갑옷이 두꺼워 화살이 깊이 들어가지 않는지라, 곧 또 그의 말을 쏘아 꿰뚫으니, 말이 넘어지는 바람에 호발도가 땅에 떨어졌다. 태조가 또 그를 쏘려고 하니, 그 휘하의 군사들이 많이 몰려와서 그를 구원하고, 우리 군사들도 또한 이르렀다

   태조가 군사를 놓아 크게 적군을 쳐부수니, 호발도는 겨우 몸을 피해 도망해 갔다

태조가 이로 인하여 변방을 편안하게 할 계책을 올렸는데, 그 계책은 이러하였다.

 

   "북계(北界)039) 는 여진(女眞)과 달단(韃靼)과 요동(遼東심양(瀋陽)의 경계와 서로 연해 있으므로 실로 국가의 요해지(要害地)가 되니, 비록 아무 일이 없을 시기일지라도 반드시 마땅히 군량을 저축하고 군사를 길러 뜻밖의 변고에 대비해야 될 것입니다. 지금 그 거주하는 백성들이 매양 저들과 무역[互市]하여 날로 서로 가까워져서 혼인까지 맺게 되었으나그 족속(族屬)이 저쪽에 있으므로 유인해 가기도 하고, 또는 향도(嚮導)가 되어 들어와 침구(侵寇)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唇亡齒寒]게 되므로, 동북면 한 방면의 근심에만 그치지 않습니다. 또 전쟁의 이기고 이기지 못한 것은 지리(地利)의 득실에 달려 있는데, 저들 군사의 점거한 바가 우리의 서북쪽에 가까운데도 이를 버리고 도모하지 아니하니, 이에 중한 이익을 가지고 멀리 우리의 오읍초(吾邑草갑주(甲州해양(海陽)의 백성들에게 주어서 그들을 유인해 가기도 하고, 지금 단주(端州독로올(禿魯兀)의 땅에 뛰어들어와서 사람과 짐승을 노략질해 가니, 이로써 본다면 우리 요해지의 지리·형세는 저들도 진실로 이를 알고 있습니다. ()이 방면(方面)에 임무를 받고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 없으므로, 삼가 변방의 계책을 계획하여 아뢰옵니다.

 

   1. 외적(外敵)을 방어하는 방법은 군사를 훈련하여 일제히 적군을 공격하는 데 있는데지금은 교련(敎鍊)하지 않은 군사로써 먼 땅에 흩어져 있다가 도적이 이르러서야 창황(倉皇)히 불러 모으게 되므로, 군사가 이르렀을 때는 도적은 이미 노략질하고 물러가 버렸으니, 비록 뒤따라 가서 싸워도, 그들이 기[]와 북[]을 익히지 않았으며 치고 찌르는 것도 연습하지 않았으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원컨대, 지금부터는 군사를 훈련하는 데에 있어 약속(約束)을 엄하게 세우고 호령(號令)을 거듭 밝혀서, 변고를 기다려 군사를 일으켜 일의 기회[事機]를 잃지 마옵소서.

 

1. 군사[師旅]의 생명은 군량에 매여 있으니, 비록 백만의 군사라도 하루의 양식이 있어야만 그제야 하루의 군사가 되고, 한 달의 양식이 있어야만 그제야 한 달의 군사가 되니, 이는 하루라도 식량이 없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040) 의 군사는 예전에는 경상도(慶尙道강릉도(江陵道교주도(交州道)의 곡식을 운반하여 공급하였으나, 지금은 도내(道內)의 지세(地稅)로써 이를 대체시켰는데, 근년에는 수재(水災)와 한재(旱災)로 인하여 공사(公私)가 모두 고갈되었고, 게다가 놀고먹는 중[]과 무뢰인(無賴人)이 불사(佛事)를 핑계하고서 함부로 권세 있는 사람의 서장(書狀)을 받아서 주군(州郡)에 청탁하여, 백성들의 한 말[]의 쌀과 한 자[]의 베를 빌린다고 하고는, [甔石]이나 심장(尋丈)041) 으로써 거둬들이면서 이를 반동(反同)이라 명칭하며 바치지 아니한 빚[逋債]처럼 징수하여, 백성이 배고프고 추위에 떨게 되었으며, 또 여러 아문(衙門)과 여러 원수(元帥)들의 보낸 사람이 떼를 지어 다니며 기식(寄食)하여 백성의 피부를 벗기고 골수를 쳐부수니, 백성이 고통을 참지 못하여 처소를 잃고 떠돌아다니는 사람이 십상팔구(十常八九)이니, 군량(軍糧)이 나올 곳이 없습니다. 원컨대, 모두 이를 금단(禁斷)하여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소서. 또 도내(道內)의 주군(州郡)은 산과 바다 사이에 끼여서 땅이 좁고도 척박한데, 지금 그 지세(地稅)를 징수하는 것이 경지(耕地)의 많고 적은 것은 묻지도 않고 다만 호()의 크고 작은 것만 보게 됩니다. 화령(和寧)은 도내(道內)에서도 땅이 넓고 비옥하여 모두 이민(吏民)의 지록(地祿)042) 인데도, 그 지세(地稅)는 관청에서 거둘 수가 없게 되어, 백성들에게 취하는 것이 균등하지 못하고, 군사를 먹이는 것이 넉넉하지 못하니, 금후(今後)로는 도내(道內)의 여러 주()와 화령(和寧)에 한결같이 경지의 많고 적은 것으로써 세()를 부과하여 관청과 민간에 편리하게 하소서.

 

1. 군사와 백성이 통속(統屬)되는 곳이 없으면 위급한 경우에 서로 보전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이로써 선왕(先王)의 병신년의 교지(敎旨), 3()로써 1()로 삼아 백호(百戶)로써 통솔하고, 통주(統主)를 수영(帥營)에 예속시켜, 사변이 없으면 3()가 상번(上番)하고, 사변이 있으면 다 함께 나오고, 사변이 급하면 가정(家丁)을 모두 출동시키게 하였으, 진실로 좋은 법이었습니다. 근래에는 법이 폐지되어 통속된 곳이 없으므로, 매양 군사를 징발할 적엔 흩어져 사는 백성들이 산골짜기로 도망해 숨으므로 불러 모으기가 어려우며지금 또 가물어 흉년이 들어서 민심이 더욱 이산(離散)되었는데, 저들은 금전과 곡식으로써 

미끼를 삼아 불러들이고, 군사를 몰래 거느리고 와서 노략질하여 돌아가니, 한 지방의 곤궁한 백성이 이미 항심(恒心)도 없는데다가, 또 모두가 잡류(雜類)이므로, 저쪽과 이쪽을 관망하다가 다만 이익만을 따르게 되니, 실로 보전하기가 어렵겠습니다. 원컨대, 병신년의 교지(敎旨)에 의거하여 다시 군호(軍戶)를 정하여, 그들로 하여금 통속(統屬)이 있게 하여 그들의 마음을 단단히 매[固結]게 하소서.

 

1. 백성의 기쁨과 근심은 수령(守令)에게 매여 있고, 군사의 용감함과 겁내는 것은 장수에게 달려 있는데, 지금의 군현(郡縣)을 다스리는 사람은 권세 있는 가문에서 나오기 때문에, 그 세력만 믿고 그 직무는 근신하지 아니하여, 군대는 그 물자(物資)가 모자라게 되고, 백성은 그 직업을 잃게 되어, 호구(戶口)가 소모되고 부고(府庫)가 텅 비게 되었습니다. 원컨대지금부터는 청렴하고 근실하고 정직한 사람을 공정하게 선출하여, 그 사람으로 하여금 백성을 다스리게 하여 홀아비와 홀어미를 사랑하고 어루만져 주게 하며, 또 능히 장수가 될 만한 사람을 뽑아, 그 사람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려서 국가를 방어하게 하소서."

 

태백산사고본 1117A국편영인본19

분류인물(人物) / 정론(政論) / 왕실(王室) / 행정(行政) / 역사(歷史) / 외교(外交) / 군사(軍事) / 재정(財政)


[039] 북계(北界) : 함길도.

[040] () : 함길도.

[041] 심장(尋丈) : ()8척 장()10.

[042] 지록(地祿) : 땅에서 생산되는 녹미(祿米).

 

 

 

 

   “북계(北界)여진(女眞)과 달단(韃靼)과 요동(遼東심양(瀋陽)의 경계 서로 연해 있으므로 실로 국가의 요해지(要害地)가 되니, 비록 아무 일이 없을 시기일지라도 반드시 마땅히 군량을 저축하고 군사를 길러 뜻밖의 변고에 대비해야 될 것입니다...”

 

북계(北界)

   고려 시대에 주로 지금의 평안도 지방이르던 말. 북계는 동계와 더불어 고려의 변방 지대로서, 태조 때부터 시행한 북진 정책에 의해 고려의 영토로 편입되었으며, 주로 남도의 주민을 이주시켜 북계 주민으로 충당하였음.“

[네이버 지식백과] 북계 [北界] (한국고전용어사전, 2001. 3.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북계(北界)

1 . <역사> 고조선평양 서쪽 . 삼국 시대고구려차지한 으로, 고려 성종 13(994)패서(浿西道), 북계(北界)하였으며, 15숙종 7(1102)서북(西北面)으로 고쳤다.“

   ㅡ (네이버 국어사전)

 

북계(北界)

   고려시대의 행정구역 5도 양계 중 하나.일반 행정구역인 ()와 달리, 계는 군사적 목적의 행정구역으로 북방 국경지역에 설치되었으며 병마사가 파견되었다. 앞서 고려 10 때는 패서도(浿西道)였으며, 서북면으로 지칭하기도 했다. 천리장성 이북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이후 조선 팔도평안도와 거의 겹친다. 변방 지역처럼 인식되기 쉽고 실제로도 북부는 그랬지만 고려는 고구려 계승의식을 표방했기 때문에 고구려의 옛 수도 서경(평양)이 있는 곳이라 묘청의 난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거의 제 2의 수도격으로 상당히 중요하게 여겼다. 여몽전쟁의 결과로 약 20여년 간 동녕부가 설치되어 원나라 직할영토가 되기도 했다.“

ㅡ  (나무위키-북계)

 

고려가 한반도에 있었던 것으로 해설해 놓았다!


 

 

함길도(咸吉道)

   오늘날 함경북도와 함경남도 지역의 조선 전기 명칭. 1416(태종 16)영길도(永吉道)로 부르던 것을 함길도로 고쳤다가. 1470(성종 1)에는 영안도(永安道)라고 고쳤다.“

[네이버 지식백과] 함길도 [咸吉道]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 용어사전), 2012., 한국콘텐츠진흥원)

 

   사전에서는 북계(北界)삼국 시대고구려차지한 으로 평안도라 하고조선왕조실록에서는 주를 달아 해설하기를 함경도라고 한다!

 


여진(女眞)

정의: 만주(滿洲) 동부에 살던 퉁구스 계통의 민족.

개설: 여직(女直)이라고도 한다. 주로 송화강(松花江목단강(牧丹江흑룡강(黑龍江) 유역과 동만주 해안지방에서 살았다. 여진의 명칭은 시대에 따라 춘추전국시대에는 숙신(肅愼), ()나라 때에는 읍루(挹婁), 남북조(南北朝)시대에는 물길(勿吉), (()시대에는 말갈(靺鞨)로 불렸으며, 10세기 초의 송나라 때 처음으로 여진이라 했고, 청나라 때에는 만주족이라 칭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여진[女眞]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타타르는 다음과 같은 뜻이 있다.

타타르 연맹12세기 몽골의 5개 부족연맹체(몽골, 케레이트, 나이만, 타타르, 메르키트) 중 하나이다.

러시아의 튀르크화된 몽골인을 말하는 아래의 타타르족과는 별 관계가 없다.

타타르(韃靼)은 방계 출신의 구리키(鬼力赤)가 계승하면서 바꾼 국호이다.

타타르(韃靼)타타르족을 뜻한다.“

(위키백과-타타르)



 

달단(韃靼)

몽고(蒙古) 또는 몽고족을 달리 이르는 말.“

(한국고전용어사전)

 

타타르 연맹

타타르(몰도바어: Татар, 몽골어: Татарын, 고대 튀르크어: ???)12세기 몽골 고원의 

주요 다섯 부족연맹체(몽골, 케레이트, 메르키트, 나이만, 타타르) 중 하나이다. "타타르"라는 

이름은 732경 물건인 돌궐퀼테긴 비문에 처음 나타난다. 비문에 보면 타타르 30부족 

연맹이라는 뜻의 오투즈 타타르 보둔(고대 튀르크어: ??? ??? ???? Otuz Tatar Bodun)”

이라는 말이 나온다.

타타르인들은 5세기고비 사막 북동쪽에 살다가 10세기 거란요나라에 신종했다

요나라가 멸망하자 금나라의 지배를 받았으며, 금나라는 타타르가 다른 몽골 부족연맹들과 

싸우도록 뒤에서 조종하였다. 그 결과 타타르는 몽골의 암바카이 칸이 금나라에 잡혀가 죽는 

데 공헌하였고, 몽골과 원수지간이 되고 만다. 이 시기 타타르는 후룬 강부이르 강 유역의 

비옥한 지대에서 유목했으며, 중국으로 가는 무역길을 틀어쥐고 있었다.

몽골 제국이 성립된 뒤 타타르는 몽골의 일부로 흡수되었다. 이후 칭기스 칸의 손자 바투 칸은 

타타르인들을 데리고 서쪽으로 이동했다. 그 결과 몽골의 침략을 받은 서양, 특히 러시아에서는 

몽골(이 경우 킵차크 칸국)을 싸잡아 "타타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타타르족"이라 하면 12세기의 타타르 연맹과는 별 관계없이 오늘날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지역에 정착한 튀르크계 무슬림들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현대의 타타르족은 볼가 불가르

킵차크인, 쿠만인, 튀르크화된 몽골인(노가이인)들의 혈통이 섞여 있다.“

https://ko.wikipedia.org/wiki/%ED%83%80%ED%83%80%EB%A5%B4_%EC%97%B0%EB%A7%B9



 

타타르족[Tatar, ]

요약 우랄산맥 서쪽, 볼가강과 그 지류인 카마강 유역에 사는 투르크 어계(語系)의 종족.

인구 약 500(1987). 러시아 연방 타타르스탄 공화국의 기간주민인데, 공화국 이외의 지역

에도 널리 살고 있다. 킵차크족과 그 밖의 남()러시아 초원의 유목민과 고()불가르족

()의 자손으로 구성되었고, 농목축을 하고 있으며, 전통적인 수공예에 능하다. 또한 예로

부터 교역(交易)에도 뛰어나다. 14세기 이래 이슬람 교도가 되었으나 그 이전의 민간신앙도 

남아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타타르족 [Tatar, ] (두산백과)


여진(女眞)은 주로 송화강(松花江목단강(牧丹江흑룡강(黑龍江)

유역과 동만주 해안지방에서 살았다고 하고,

 

타타르(韃靼) 5세기 고비 사막 북동쪽에 살다가  칭기스 칸의 손자 바투 칸 

타타르인들을 데리고 서쪽으로 이동했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에서는 (北界)는 여진(女眞)과 달단(韃靼)과 요동(遼東

심양(瀋陽)의 경계와 서로 연해 있으므로 실로 국가의 요해지(要害地)가 되니비록 아무 

일이 없을 시기일지라도 반드시 마땅히 군량을 저축하고 군사를 길러 뜻밖의 변고에 

대비해야 될 것입니다라고 쓰고 있다!

 

여진(女眞)은 조선의 북쪽이나 북서쪽인 고비사막 지역에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타타르족(韃靼族)은 현재 우랄산맥 서쪽볼가강과 그 지류인 카마강 유역에 살고 있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唇亡齒寒]게 되므로동북면 한 방면의 근심에만 그치지 않습니다

또 전쟁의 이기고 이기지 못한 것은 지리(地利)의 득실에 달려 있는데저들 군사의 점거한 

바가 우리의 서북쪽에 가까운데도 이를 버리고 도모하지 아니하니

 

여진(女眞)과 달단(韃靼)이 조선의 동북쪽 또는 서북쪽에 가까이 있었다는 말이다





 군사[師旅]의 생명은 군량에 매여 있으니비록 백만의 군사라도 하루의 양식이 있어야만 

그제야 하루의 군사가 되고한 달의 양식이 있어야만 그제야 한 달의 군사가 되니이는 

하루라도 식량이 없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병조 판서 이이(李珥)의 상소- 1백만 군대가 하루아침에 흩어지게 되는 것은 

먹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http://cafe.daum.net/warong84/HzOs/96

 

우리나라의 군졸은 팔도(八道)를 통합하여 명색은 거의 1백 수십만에 가까우나...

http://cafe.daum.net/warong84/HzOs/81

 

그때 세조(世祖)가 농사에 힘쓰고 학교를 일으키고 군사를 양성하기를 일삼아서

궁병(弓兵) 백만을 길러 오랑캐[夷狄]를 제압하려고 결심...

http://cafe.daum.net/warong84/HzOs/33

 

조선의 군사는 항상 100만 이상임을 알 수 있다!



 

칭파우는 부모(父母)가 없고 다만 형제 3인이 있으며요동성(遼東城

동북쪽으로 6일 노정(路程)에 살고 있는데, 서북쪽으로 심양(瀋陽)과의 

거리도 또한 6일 노정(路程)이고...”

 

세조실록 36, 세조 1161일 정축 5번째기사 

1465년 명 성화(成化) 1

 

http://sillok.history.go.kr/id/kga_11106001_005

 

신숙주·한명회·구치관 등에게 칭파우를 부르는 것에 대해 논하게 하다

 

신숙주(申叔舟)·한명회(韓明澮)·구치관(具致寬)·박원형(朴元亨), 도승지(都承旨

신면(申㴐) 등에게 빈청(賓廳)에 모이도록 명하여칭파우(稱波右)를 부르는 것을 물었다

그에 대하여 말하기를,

 

"1. 칭파우는 부모(父母)가 없고 다만 형제 3인이 있으며요동성(遼東城동북쪽으로 

6일 노정(路程)에 살고 있는데, 서북쪽으로 심양(瀋陽)과의 거리도 또한 6일 노정(路程)

이고, 북쪽으로 이만주(李滿住) 집과의 거리는 10여 일 노정(路程)입니다.

 

1. 이만주(李滿住)의 옛집[舊居]은 남쪽으로 지금 사는 곳과의 거리가 3일 노정(路程)인데

이만주 휘하(麾下)1백여 가()가 지금까지 거주합니다.

 

1. 화라온(火剌溫) 지방은 남쪽으로 이만주(李滿住) 집과의 거리가 3, 4일 노정(路程)

입니다.

 

1. 이만주의 집으로부터 동창(童倉)의 집으로 가는 데는 대개 평지(平地)에다 3, 4개의 

작은 내가 있을 뿐이고, 큰 숲과 늪이 없어서 길이 매우 평탄(平坦)합니다.

 

1. 올라 산성(兀剌山城) 이만주의 집 남쪽 2일 노정(路程)에 있고 길도 또한 평탄한데

도독(都督나랑합(羅郞哈)이 이곳에 살며보하토(甫下土)와 함께 모두 오을면(吾乙面) 

냇가에 있습니다.

 

1. 이만주의 집으로부터 동쪽으로 40여 리()를 가면 대다완현(大茶玩峴)에 이르는데

고개[]가 높고 험준하여 말을 타고서는 다닐 수가 없고, 고개를 넘어 또 동쪽으로 

6, 70리를 가면 길이 자못 평탄하여 강()을 건너면 만포(滿浦)에 이릅니다.

 

1. 이만주 등은 3, 4월 사이에 공격하여 들어갈 것을 의심하여, 산막(山幕)에 살다가 

이제 모두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13369B국편영인본7688

분류외교-()

 

 

칭파우는 부모(父母)가 없고 다만 형제 3인이 있으며요동성(遼東城동북쪽으로 6일 

노정(路程)에 살고 있는데, 서북쪽으로 심양(瀋陽)과의 거리도 또한 6일 노정(路程)이고...”


요동성(遼東城)

이 칭 :양평성(襄平城)

시 대 : 고구려

소재지 : 중국 요령성(遼寧省) 요양시(遼陽市)

관련전투 : 요동성(遼東城)전투

 

상세내용

고구려가 요동 일대를 통치할 때 중심적 위치를 차지한 성.본래 한() 요동군의 치소인 

양평현(襄平縣)이었으며, 고구려가 차지한 후 요동성이라고 하였다. 지리적으로 요동반도의 

중심에 위치하며, 이곳에서 동서남북으로 교통로가 이어지고 있어 정치적 행적적 군사적 

중심지이다. 현재 요동성은 남아 있지 않아 그 규모와 형태를 알 수 없다. 명대와 청대의 

요동부 치소가 있는 요동 구성(舊城)은 태자하와 요동 백탑 사이에 위치하였는데, 고구려대의 

요동성도 같은 위치로 짐작된다.1953년 평안남도 순천군 용봉리에서 발견된 고구려 고분

벽화에 요동성의 성곽도가 그려져 있어, 그 면모를 대강 짐작할 수 있는데, 이 벽화를 보면 

고구려 당시의 요동성은 방형의 내성과 이를 자 형태로 둘러싼 외성으로 된 2중 성곽의 

구조이다. 내성 안에는 골기와를 얹은 이층집과 삼층 누각이 그려져 있어 이 성이 주성(主城)

임을 알 수 있다. 성문은 내성의 왼쪽과 외성의 오른쪽에 각각 1개소가 있으며, 내성과 외성을 

잇는 곳에 1개소가 있다. 성벽에는 여장이 마련되어 있고 각 성벽의 모서리에는 누각이 그려져 

있다. 또 치()로 추정되는 시설물로 그려져 있다.요동성은 요동의 최대의 요충지였기 때문에

고구려를 침공하는 외적의 1차적인 공격 목표로서 수많은 전투를 치루었다. 대표적으로 전연

과의 전투에서도 여러 차례 전투가 있었으며, 특히 404(광개토왕 14) 후연의 침공을 

물리쳤다. 612(영양왕 23) 수 양제의 침공시에도 요동성은 함락시키지 못하자 이에 30만 

별동대로 하여금 평양성으로 침공하였다가 살수에서 참패하면서 퇴각하였던 것이다. 613

에도 수양제의 군대는 요동성 공격에 총력을 기울여 비루(飛樓충차(衝車운제(雲梯지도

(地道)의 공성무기로 공격하였는데, 20여일 동안 함락되지 않았다. 마침내 수양제는 흙을 

담은 포낭 백여만 개 쌓아 어량대도(魚梁大道)를 만들고, 누거(樓車)를 만들어 공격하여 매우 

위급하였는데, 마침 양현감(楊玄感)이 반역 소식이 전해져 퇴각하였다. 645(보장왕 3) 

당태종의 침공시에 당군은 개모성(蓋牟城), 비사성(卑沙城)등을 함락시키고, 이어서 요동성을 

공격하였다. 고구려에서는 신성과 국내성의 보기병(步騎兵) 4만을 내어 요동성을 구원하였

으나 대패하였다. 이에 당태종이 마수산(馬首山)에 진을 치고 요동성 공격을 지휘하여 포차와 

충차(衝車) 등으로 12일 동안이나 공격을 계속하였다. 마침내 남풍이 세게 불어, 화공(火攻)

으로 요동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죽은 자는 1만여명, 포로된 병사 1만여명, 남녀가 4만명

이었으며, 양곡은 50만섬이었다.현재 요동성은 남아 있지 않으며, 그 부근에 요 시대의 

백탑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요동성 [遼東城]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한민족 전투), 

2002., 한국콘텐츠진흥원)

 

심양(瀋陽)-선양

중국 둥베이(東北) 지방 랴오닝 성(遼寧省)의 성도(省都). ()나라 때는 심주(瀋州)에 

속했고 명()나라 때에는 심양중위(瀋陽中衛)에 속했다. ()나라 때에는 성경(盛京)

라고 했으며 승덕현(承德縣)을 설치하여 봉천부(奉天府)에 속하게 하였다. 일본의 통치하

에서는 펑톈(奉天)이라고 하였으나 만주국이 붕괴된 후 센양으로 하였다. ()'양지 

바른 곳'이라는 뜻으로 지명은 '심수(瀋水) 북쪽(北岸)에 있다'는 의미이다. 둥베이 지방 

제일의 종합 공업 도시로 정치·경제·문화·교통의 중심지이다. 동쪽의 푸순(撫順)과 남쪽의 

안산(鞍山) 등에 석탄과 철광석 산지가 있어 공업 발전의 입지 조건이 좋다. 특히 이 지역

에서는 '동방강'이라는 이름의 유명한 트랙터를 처음으로 생산했으며, 각종 기계·제철 공업 

등 중공업이 발달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선양 [瀋陽] (세계지명 유래 사전, 2006. 2. 1., 성지문화사)



 

노정(路程)

1 .목적지까지의 거리또는 목적지까지 걸리는 시간. 도합 사십오 리의 산길이니 하루 

노정으로선 단단하다. 출처 : 이병주, 지리산

2 .거쳐 지나가는 길이 과정[비슷한 말역정7정도12.  

 

험난한 노정

 혼자서지 새로운  가는 것이 아니고영순과 거닐었던  노정 따라 걷고 

 걷는 것이었다. 출처 : 주요섭, 미완성

(네이버 국어사전)

 

하룻길

성경의 여행거리 중 하나(11:31)로 성인 남자 기준으로 도보(徒步)로 낮 하루 동안 갈 

수 있는 거리를 말한다. 상황이나 걷는 사람의 상태에 따라서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대략 

1시간에 4, 8시간 동안 걸었다는 가정하에 대략 32정도를 말한다(31:8; 왕상 

19:4; 3:4; 2:44). 그외 성경에는 사흘 길’(30:36), ‘칠 일 길’(31:23), 

열하룻길’(1:2) 등이 있는데, 정확한 거리는 알 수 없다.“

[네이버 지식백과하룻길 [a day’s journey] (라이프성경사전, 2006. 8. 15., 생명의

말씀사)

 

6일 노정(路程)=32Km X 6=192Km 정도로 볼 수 있다!

 

칭파우는 부모(父母)가 없고 다만 형제 3인이 있으며요동성(遼東城동북쪽으로 6일 

노정(路程)에 살고 있는데,”

 

칭파우는 요동성(遼東城동북쪽 192Km 정도 거리 지역에 살았다!

 

서북쪽으로 심양(瀋陽)과의 거리도 또한 6일 노정(路程)이고...”

 

심양(瀋陽)은 칭파우가 살던 곳에서 서북쪽 192Km 정도 거리 지역에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설명하는 심양(瀋陽)의 위치와 지금의 심양의 위치가 맞지 않는다!


 


요동遼東은 사막...

 

http://cafe.daum.net/warong84/HzOs/97

 

 

평안도(平安道)가 지경(地境) 요동(遼東) 심양(瀋陽)에 맞닿았으니...

 

세조실록 34세조 10 8 1일 임오 2번째기사 

1464년 명 천순(天順) 8

 

http://sillok.history.go.kr/id/kga_11008001_002

 

양성지가 군법·군정·군액·군제·사역에 관한 일로 상서하다

중에서

 

1. 군정(軍丁)을 보호하는 일()이 그윽이 생각하건대, 평안도(平安道)가 지경(地境) 

요동(遼東) 심양(瀋陽)에 맞닿았으니무수(撫綬)하는 방법을 염려하지 아니할 수가 없습

니다. 고려 때에 해마다 한 차례씩 순수(巡狩)하고인하여 조세(租稅)를 내려 주고 작()을 

내려 주고 시설을 내려 주어 은혜와 위엄을 베풀었고매양 회시(會試)를 과()할 때마다 

으레 본도(本道)의 향시(鄕試)의 한 사람을 취()하였으니진실로 그 뜻이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강가에서 방수(防戍)하는 노고는 다시 논()할 필요가 없으나북경(北京)으로 가는 

사신(使臣)들이 앞뒤에 서로 잇달으므로 으레 마른 양식[乾糧]을 내려 주는 외에도 

노상(路上)에서 사사로이 주는 것이 혹은 수십 석()에 이르고음식물(飮食物)도 갑절이나 

되는데이것은 귀신이 운수(運輸)하는 물건이 아닙니다모두 영호송군(迎護送軍) 

기재지(騎載持)420) 의 말[]이 이와 같이 받으니한 사람이 한 해에 혹은 두서너 차례를 

가는데여름철 비와 겨울철 눈에 두축(頭畜)이 죽고 재상(宰相)의 말 뼈가 길에 잇달아 

버려지고혹은 중[]이 아버지와 형을 대신하여 가는 자가 있습니다이 때문에 파산

(破産)하며이 때문에 요동(遼東)으로 도망하여 들어가는데 대개 그 숫자가 몇 천만 명이 

되는지 알지 못합니다.”

 

북경(北京)으로 가는 사신(使臣)들이 앞뒤에 서로 잇따라 감으로 영호송군(迎護送軍)에 

차출되어 가는 사람들이 많아짐으로 파산(破産)하며이 때문에 요동(遼東)으로 도망하여 

들어가는데 대개 그 숫자가 몇 천만 명이 되는지 알지 못한다고 하고 있다!

 

도대체 조선의 인구가 얼마나 되었기에 요동(遼東)으로 달아나는 이들이 몇천만이나 되었나?


그리고 심양이 있는 요동지역을 지나서 북경으로 가는 것이므로 

북경은 사막지역이거나 사막지역을 지나서 도달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옛날 고구려(高句麗)는 단지 평안도(平安道등의 도()만이 있었을 따름인데...

http://cafe.daum.net/warong84/HzOs/68

 

평안도(平安道) 영안도(永安道지방은 사막(沙漠지대와 접하였기 때문에...

http://cafe.daum.net/warong84/HzOs/40

 

고구려는 작은 나라()을 잘 지킴조선은 고구려에 비하여 배()나 크고 산천이 험준함

http://cafe.daum.net/warong84/HzOs/3



 


위의 정보를 종합하면

 

북계(北界)는 여진(女眞)과 달단(韃靼)과 요동(遼東심양(瀋陽)의 경계와 서로 연해 있었다!


달단(韃靼)고비 사막 북동쪽에 살았던 민족이었고 후에 서쪽으로 이동하였고,


여진(女眞)은 만주(滿洲) 동부에 살았던 민족으로 설명이 되어 있으나, 조선의 평안도가 

사막에 접하는 것으로 봐서 여진이 살던 영역은 조선의 북동쪽 또는 북서쪽일 가능성이 있다!

 

사전에서는 북계(北界)삼국 시대고구려차지한 으로 평안도라 하고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주를 달아 해설하기를 함경도라고 한다!

 

칭파우는 부모(父母)가 없고 다만 형제 3인이 있으며요동성(遼東城동북쪽으로 6일 

노정(路程)에 살고 있는데, 서북쪽으로 심양(瀋陽)과의 거리도 또한 6일 노정(路程)이다

, 요동성에서 동북쪽 192Km인 곳에 창파우가 살고, 창파우가 사는 곳에서 서북쪽으로 

192Km 인 곳에 심양이 있다! 현재의 심양과는 맞지 않다!

 

평안도(平安道)지경(地境) 요동(遼東) 심양(瀋陽)에 맞닿았다!

 

요동(遼東) 심양(瀋陽)은 사막지대에 있었다!

 

고구려는 조선의 평안도 지역이었고, 조선의 1/2 크기이었고, 사막을 경계로 하여 조선의 

북서쪽의 넓은 지역에 펼쳐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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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fe.daum.net/saengcho36/IJ4e/4391   생초36기  







발해유민에 대한 거란과 여진의 입장차| 발해 멸망기와 부흥운동기

                 

대연림 | 조회 563 |추천 0 | 2008.02.18. 01:41
   


   해동역사를 읽다가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다. 발해유민에 대한 거란과 여진의 입장차이다.

 

   거란, 여진, 발해 이들은 모두 고구려의 후예들이다. 굳이 따진다면 발해는 직계이고, 거란과 여진은 방계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거란요사에 자신들이 고조선의 옛땅에서 일어났고, 고조선의 관습과 법을 따르고 있다고 적고 있고, 여진말갈시기부터 고구려와 생사고락을 같이 한 존재이니 이들은 따지고 보면 한 집안 사람이다. 그래서 아골타발해유민들을 회유하며 '우린 한집안 사람이다' 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동질성이 현실적인 이해관계를 초월하는 것은 아니다. 거란과 여진, 그리고 발해유민들은 북방의 패권 두고 서로 으르렁 거렸고, 때로는 협력했다.

 

   926년 거란은 발해를 멸망시켰다. 당연히 발해인들은 처절히 저항했고, 거란은 발해인들을 강제이주시키는 것으로 대응했다. 그러나 거란이 발해인들을 탄압만 한 것은 아니다. 다음은 해동역사의 기록이다.

 

 

 야율아보기가 발해의 호구를 내지로 옮긴 뒤에는 발해군상온 과 발해군도지휘사사를 두어 요양로에 속하게 하여 이로써 고려를 제압하게 하면서 유사시에는 군사를 징발하였다.

 

   발해인 셋이 모이면 호랑이도 잡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발해인들은 용맹했다. 그 조상이 고구려인이니 그 피가 어디 가겠는가? 거란은 그러한 발해인의 용맹을 이용해 고려를 견제하고, 여진을 막아냈다. 거란말 여진이 급성장할 무렵에도 발해인들은 거란의 편에 서서 여진과 싸웠다. 이러한 발해인들을 거란은 특별대우 하였다.

 

 여러 도의 군사를 징발할 경우에도 유독 발해의 병마에 대해서만은, 비록 조서를 받들더라도 반드시 위에 아뢴 다음, 위에서 대장을 파견하여 금어부를 가지고 와서 맞춰본 다음에야 군사를 발했다. 무릇 전투를 하면서 적과 대치했을 때에는 발해의 군사들이 항상 앞장서서 싸워 항상 강했다.

 

   거란제국 안에는 발해인으로 구성된 부대가 있었고, 그 지휘권도 발해인이 가지고 있었다. 대연림발해사리군상온 이었고, 고영창발해무용마군지휘관이었다. 대연림과 고영창 같은 경우는 거란제국을 향해 칼을 들이댔지만, 발해상온 고청명은 거란의 편에서서 고려정벌군에 참전했고, 여진아골타영강주를 침공했을 때 고선수는 발해군 3천명을 이끌고 이를 막기도 했다. 이외에도 발해 태보, 발해 달마, 발해근시상온사 등 발해인에게 내리는 벼슬도 있었다.

 

   여진이 세운 도 이런 발해인들을 우대했다. 아골타"여진과 발해는 본디 한집안이다." 라며 동질성을 강조한 것은 발해인의 용맹 때문이었다. 금나라는 고영창대발해국을 제압하면서 한편으로는 발해인들을 회유했고, 금 건국과정에서 발해인들은 많은 공을 세웠다.

 

   발해인들은 한편으로는 거란제국을 돕고, 또 한편으로는 여진이 세운 금의 편에 서면서, 또 한편으로는 발해부흥운동을 전개했던 것이다.

처음에 금은 발해인들을 회유하면서, 맹안, 모극 등의 벼슬을 주었다. 그러나 금의 기반이 안정되면서 금의 정책은 바뀌었다.

 

 

    황통(금 희종의 연호) 5년(1145년)에 요동의 발해인과 한인이 맹안과 모극을 승습하는 제도를 혁파하여 점차 병권을 내족에게로 옮겼다. 9년 8월에는 재신들의 의논에 따라 요양에 있는 발해의 백성들을 연지방 남쪽으로 옮기고, 그 뒤에는 또 자주 산동지방에서 숫자리를 살게 하였다. 신유년에 이르러서 모두 내몰았는데, 옛 땅에 살고 있던 자들은 혹 거란 지역으로 들어갔다. 이에 발해의 종족이 드디어 끊어져 전해지는 바가 없게 되었다.

 

   금의 정책은 발해인들에게 벼슬을 주고 군지휘권을 맡겼던 거란과는 분명 달랐다. 금은 발해인들에게 주었던 병권여진족에게만 집중시켰고, 발해인들에 대한 강제 이주 정책을 강하게 실시했다. 발해인들이 이로 인해 거란땅으로 가거나, 그 대가 끊어졌다는 해동역사의 증언처럼, 금의 발해인에 대한 대우는 강압적이었다. 그들은 거란제국을 향해 칼을 꺽지 않았던 발해인들의 투혼이 두려웠던 것일까? 해동역사는 금사의 기록을 인용 이때 산동지방으로 강제 이주당한 발해인의 슬픔을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거란에서 연 지방으로 옮긴 발해 사람들의 숫자가 더욱 불어나 5천여 호나 되었으며, 군사가 3만 명이나 되었다. 이에 금나라 사람들이 이를 제어하기가 어려운 것을 근심하여 자주 산동지방에서 수자리를 살게 하였는데, 매년 수백 가를 옮기는데 불과하여 신유년에 이르러서야 모두 옮겨 가게 하니, 발해 사람들이 크게 원망하였다. 이들은 부유한 생활을 하면서 편안하게 산 지가 2백 년이 넘어 와왕 집에 정원을 만들고는 모란을 심었는데, 많은 경우에는 2,3백 그루나 되었으며 어떤 모란은 수십 줄기가 빽빽하게 자라난 것도 있었는데, 이는 모두 연 지방에는 없는 것이었다. 이때에 이르러 이런 정원들을 겨우 몇만 냥이나 혹은 5천 냥에 헐값을 팔아버리고 떠나갔다.

 


                                                  발해유민에 대한 거란과 여진의 입장차 2008.0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