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갈-여진, 거란이 고구려의 ‘정통후예’인가? 外

2019. 2. 28. 03:56우리 역사 바로알기



말갈-여진, 거란이 고구려의 ‘정통후예’인가?| ♣ 고구려 공부방 ♣

                 

간도 지기     조회 68 |추천 0 | 2008.01.20. 20:27                        


   


   말갈 혹은 여진, 만주족고구려의 후예중 하나라는 걸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일부 한국인이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보다 더 정통계승자인지 모르겠습니다.

고구려, 발해 멸망 이후 만주지역 상황, 그와 고구려인들의 인식간의 상관성 때문입니다.



1. 김용만 선생님의 저서 고구려의 발견에 따르면 고구려의 만주영토 - 그 중에서도 직접 통치지역은 요동평야, 요동반도 남단, 국내성 지역, 부여지역, 간도지역으로 구분됩니다. 그런데 이들 지역의 행보-발해 멸망이후의 행보가 전부 ‘제각각’이라서 그렇습니다.

높은 생산력덕에 거란, 여진, 만주족의 중심지로 재기한 요동평야와 요동반도 남단 주로 북방 유목민족에게 장악됨

반면 낮은 생산력 때문에 무주공산이 되버리고 만 국내지역, 그리고 부여지역.

오랜기간 무주공산으로 있었지만 일시적으로 여진족과 만주족의 서진 발진기지가 된 간도


   발해멸망 후 고구려의 만주지역 상황이 이 지경이었습니다. 그런데 여진족은 주로 동만주-간도와 동류송화강유역, 흑룡강, 목단강, 우수리강 유역에 퍼져 살았다는게 문제입니다.

여진족의 신화 중에 어느 부부가 세 마리 용과 싸워 승리해 세상을 완성한다는 신화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 마리 용은 각각 백두산, 송화강, 흑룡강을 다스리는 용으로 나옵니다. 여진족, 혹은 만주족의 주 터전이 동만주였다는 이야기입니다.

   만주서부는 유목민족이나 한족에게, 동부는 여진-만주족에게, 가운데 국내, 부여지역은 무주공산-이런 상황에서 여진족이 과연 고구려의 정통후예라고 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고구려인들이 자신들의 발상지를 얼마나 소중히 여겼는지 여겼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2. 고구려왕들 시호는 무덤이 있는 장소+생전의 업적+(호)태왕 이란 식으로 이루어집니다. 그중 맨앞에 무덤이 있는 장소를 표기할 정도라면 그들이 얼마나 묻히는 곳을 중시했는지 보여준다 할 수 있습니다. 실제 오늘날 남아있는 무덤이 거의 국내지역 아니면 평양지역에만 남아있는 점, 더구나 평양에 동명왕릉을 만들고도 졸본까지 가서 추모왕의 진짜능에 제사를 지낸적 까지 있는 점이 그 증거입니다.

그런데 고구려인들의 이런 생각은 다른 데서도 볼 수 있습니다.

   고구려 건국신화해모수가 하늘에서 내려오면서 시작됩니다. 그런데 그가 강림한 웅심산이 압록강 유역(연구에 따르면 졸본성-오녀산성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입니다. 이는 결국 스스로를 천손의 후예로 여긴 고구려인들에게 국내지역은 신성한 땅이란 의미로 받아들여집니다.

   투르크인들이 남긴 퀼테킨 비문, 돈황문서, 비잔티움 기록보면 보쿨리, 무구리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고구려를 가리키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이 단어들은 ‘맥구려’ 혹은 ‘맥국(貊國)’으로 풀이됩니다.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고구려인들이 자신들의 나라는 본래 ‘맥족의 나라’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증거가 됩니다.


   이는 두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1)나라이름으로 정체성을 확실히 할 정도면 고구려 내에 많은 이민족이 있었다는 의미
(2)그것은 한편으로 맥족의 땅, 압록강 유역은 결국 고구려 땅에서 중요한 땅- 여러 민족들을 다스리는 제국의 발상지로써 신성한 곳이란 의미에 도달하게 됩니다.

   로마제국에서 이탈리아는 제국의 발상지이자 제국의 ‘본국’으로 대우받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그랬던 덕에 지금도 이탈리아인들은 로마제국의 직계후예로 인식 받고 있습니다.
고구려시대에 이런식으로 발상지와 점령지를 행정적으로 구분했는지는 기록이 없어 확실하지 않지만 고구려인들이 추모왕을 신격화 시키는 과정에서 그들의 발상지를 성역화시켰음은 분명합니다.



   로마제국의 사례와 고구려인들의 정신세계로 보면 여진족이나 거란족이나 한국인이나 전부 고구려의 정통후예는 아닙니다. 여진족은 한때 고구려의 속민이었고, 일부는 고대한국인에서 직접 갈라져 나왔지만 동만주와 (근대에는)요동지역에 무게중심을 두었을 뿐이고, 거란족요동과 요서지역, 몽골고원지에 거점을 둔 몽골어를 쓴 국가였을 뿐이고, 한국인은 비록 국내성을 형식적으로 ‘소유’하고 있었지만 역시 압록강 이남까지만 경영했을 뿐입니다. 다만 한국인은 한때 수도로 번영했던 평양을 지금까지 차지했기 때문에, 고려 이래 역사인식계승(大신라는 고구려와 함께 싸웠던 당사자이므로 계승인식이 없어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신라, 가야, 백제, 마한, 조선, 고려와 고구려의 문화적 유사성 때문에 여진족과 거란족보다 더 나은 상황이라고 봅니다.



   지금까지 일부사람들이 여진족을 단순히 고구려의 ‘정통후예’로 인식한 건 그냥 만주란 땅을 평면적으로 인식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만주내 수많은 지역의 상황이 제각각이었는데도 이런 걸 전혀 고려하지 않고 그냥 거란, 여진족이 다 차지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이 무조건 고구려의 정통후예로 인식받지 않았나 싶습니다. 거기다 고구려인들의 정신세계까지 고려하지 않았으니 더욱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고구려인들이 자신들의 발상지를 신성화시켰는데, 평양은 어떻게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앞서 말했듯이 평양은 수도가 있던, 고분이 밀집된 지역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는 발상지가 아니었습니다. 이런곳으로 이사를 간다는 것은 태왕스스로 신으로 부터 이어받은 혈통과 신성성을 포기하겠다는 의미인데 어떻게 해결을 하고 수도를 옮겼는지 궁금해집니다.


 

댓글

 
뱀다리 몇가지를 남기겠습니다. 우선 이탈리아인이 로마인의 직계 후예라고 일부에서 '오해'하는 경향이 있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려드립니다. 로마제국의 근간이 되었던 라틴인이라는 것은 실상 이탈리아 반도에 있던 남유럽계 사람들이 로마에 의해 통일되면서 라틴이라 불린 것이지 처음부터 같은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이탈리아 반도에는 몇개의 발상지가 다른 여러 인종들이 계속 '이동'과 '정착'을 거듭하며 계속 그 모습을 달리해왔습니다.(이는 한반도와 만주도 마찬가지겠죠). 그리고 라틴인이란 '경계'가 인식론적으로 형성된 이후에도 그 인종적 순수성은 유지되진 않았습니다. 08.01.17 23:50
게르만족의 대이동 때 게르만인들이 로마제국 내에서 이합집산을 거듭해 여러 국가를 건설한 사실은 잘 알고 계실겁니다. 이탈리아에서도 이는 예외가 아니었고 롬바르트와 동고트에 의한 게르만 국가가 이탈리아에서 건립되었습니다. 이후 프랑크 왕국이 북 이탈리아를 점령하기도 했죠. 그런 이유로 이탈리아 북쪽은 인종적으로 게르만 계열이 다수입니다.(즉, 이탈리아=라틴 이란 건 로마란 국가가 가진 이미지를 통해 형성된 획일적 고정관념에 지나지 않습니다.) 08.01.17 23:57
인종과 사회적 분열로 인해 남쪽의 라틴계 이탈리아인과 북쪽의 게르만계 이탈리아인은 지금도 사이가 좋지 않지요. 그런 그들이 하나의 국가가 된 것은 이탈리아라고 명명된 하나의 지리적 공간 안에서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란 강대국의 압제를 벗어나려는 공동의 목표 때문에 벌어진 것입니다. 그들 스스로가 로마의 후예란 정통성을 강조한 것은 그 당시에 벌어진 일이라기 보다 무솔리니 때의 파시즘에 의해 선동된 결과가 더 큽니다. 만약 그런 식이라면 현재 미국의 정통성은 아메리카 인디언에게 있다는 얘기도 맞아야 된다는 얘기가 되겠죠. 08.01.17 23:59

둘째, 정통이란 관념도 따지고 보면 다분히 정치적 헤게모니 장악의 의도가 다분한 용어입니다. 그것이 실제이든, 실제가 아니든 다분히 목적을 가진 목적론적 용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번에 생활사 강의 1, 2회 때도 언급된 얘기지만 국가는 끊임없이 이동하는 인민을 붙잡아두고 그에 대한 착취를 하는 공식적인 기관이란 얘기를 밸틴님도 들으셔서 아실 것입니다. 때문에 관념적인 통제로서 당위성을 강조하게 되고 목적론으로서 '정통'을 강조한다는 것입니다. 전근대에는 당위성을 하늘이나 신에게서 구하고 천명 수명의 당위를 '정통'이란 표현으로 나타냈는데 이것이 인민을 하나의 경계로 통제하는 기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08.01.18 00:05
반면, 근대 시기가 되면 통치 당위를 초월적 존재에서 구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그 대체적인 수단으로서 신을 대신한 초월적 존재 '진리'에서 찾게 되는데 민족국가 시기의 진리는 '역사의 흐름'이란 진리와 함께 '민족'이 진리처럼 강조되었습니다. 그 민족 안에서의 '형제애'에 대한 상상은 근대 동아시아에서는 국가 통치의 당위성을 구하려는 동아시아적 전통과 맞물려 국가의 개인에 대한 통제로서 '원초적' 민족을 강조하고 과거 전근대인에게서부터 내려오는 '형제애' '혈연애'를 상상하게끔 하는 기제가 되었던 것입니다.(실제 확인이 안되었음에도) 때문에 정통이란 용어를 당위성 기제로 사용하는 것은 조금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08.01.18 00:12

지적 고맙습니다. 로마이후 이탈리아 상황을 간과한 게 있었군요. 뱀다리라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오히려 뱀이 이무기로, 이무기가 용이 되게 해주는 다리인 걸요. 08.01.18 00:12

음..이건 이건 밸틴님 글과는 상관없는 사족입니다만 언급해야할 것 같아 말씀드립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인간은 계속 이동합니다. 그건 국가형성기 이전부터 먹고 살기 위해 행한 인류의 본능입니다. 국가가 성립된 이후에 인간의 이동은 통제를 맞았습니다만, 국가가 붕괴되면 사람들은 또다시 이동을 거듭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원초적 영역으로서 '영토'가 강조되는 것은 다분히 목적론적인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즉, 원초적으로 한국인의 땅, 중국인의 땅, 일본인의 땅, 이탈리아인의 땅, 독일인의 땅, 만주족의 땅을 운운하는 것은 사실 무의미한 얘기란 것입니다. 계속 이동하는 걸요? 08.01.18 00:24

뒤에서 우리가 좀더 정통후예에 가깝다고 이야기한 걸 말씀하신거군요. 당위성 기제로 사용하는 건 위험하다는 의견은 받아드리겠습니다만, 문화상의 유사성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묻고 싶습니다. 고구려 중심부의 문화는 여진, 거란보다는 동시대 한반도 남부지역 국가나 이후 한국 국가들과 유사하지 않습니까. 거기다 고려황실과 귀족들쪽이 주로 황해도 출신-즉, 고구려 유민의 후예라 자연스레 계승의식이 형성된 것인데 이런 것들을 어찌 받아들여야 할까요. 08.01.18 00:54

정통문제를 들먹인 이유가 일부 입장-재야사학과 일부 한국인들의 주장- 여진이 고구려의 정통 후예, 우리는 그냥 신라의 후예라는 주장에 대해 반박하기 위해서였다는 걸 밝혀둡니다. 08.01.18 00:53

재야 쪽에서 그런 주장이 있었군요. 참 못말려서.. 밸틴 님께서 하신 말씀이 곧 김한규 교수요동사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내용이 되기도 합니다. 요동사로 묶기에는 고조선, 고구려가 요, 금, 청보다는 고려, 조선과 더 가깝다는 것이지요. 사실 요, 금사를 일종의 방계로 파악한다면 모를까, 한국사로 포함시키기는 어려울 것으로 생각합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미 발해를 끝으로 갈라졌다고 보아야 하겠죠. 08.01.18 13:25

금나라를 건국한 동북여진들은 고구려시대 물길-흑수말갈의 후예로 생각됩니다. 고구려의 일원이기는 했지만 고구려의 핵심세력은 아니었지요. 요, 금이 고구려 내지 발해 계승의식을 가졌던 것은 사실 고구려가 동방 지역의 강국이었다는 이미지를 의식한 측면이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발해여진 동본일가"라는 말도 정치적 성격이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습니다. 물론 그들 나름대로 계승의식은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밸틴님의 지적처럼 고구려의 후예는 고려-조선 쪽으로 이어졌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겠지요... 08.01.18 13:50


                                                       말갈-여진, 거란이 고구려의 ‘정통후예’인가?      2008.01.20










거란족|문화역사지리학 강의실 

          

松河 李翰邦 | 조회 8 |추천 0 |2018.11.07. 01:46      http://cafe.daum.net/yngeo/ERsc/66        




거란족

몽골제국의 선배가 된 유목민 집단


  • 목차    


   유명한 여행가인 베네치아마르코 폴로는 자신의 책인 《동방견문록》에서 중국 북부를 ‘카타이’라고 불렀고, 예수회의 마테오 리치도 각각 1575년과 1607년에 중국에 도착해서 중국을 ‘카타이’라고 했다. 카타이는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기까지 유럽에서 중국 북부를 가리키는 말로 널리 쓰였고, 오늘날에도 ‘카타이’ ‘케세이’ 등이 중국을 가리키는 별칭으로 사용되고는 한다. 이 이름들은 200년 동안 중국 북방을 지배했던 ‘키타이(Khitai)’, 즉 거란족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거란의 위세는 한때 해외에서 중국을 뜻하는 대명사로 쓰일 만큼 막강했던 것이다.


고구려의 골칫거리, 수나라와 손잡다

   거란은 한자로 ‘계단(契丹)’이라고 쓰는데, 원래 이름은 ‘키타이’로, ‘칼날’이라는 뜻이다. 거란은 대체적으로 선비족에서 갈려져 나온 집단이 흉노의 남은 잔당들을 흡수한 데서 기원했다고 본다. 선비족은 본래 동호족의 후손으로 몽골 계통의 유목민이다. 이건 나중의 일이지만 칭기즈칸 시대 거란족은 몽골족과 언어와 풍습이 거의 같았다고 한다.

   한편 우리 역사에도 거란은 일찍부터 등장했다. 고구려 광개토대왕거란족을 공격하여 그들이 납치한 고구려 백성 1만 명을 구출해 온 일(392년 9월)과 거란족이 세운 나라로 추정되는 비려를 쳐부수고 역시 붙잡혀 간 고구려 백성들을 구출해 낸 일(395년)은 대왕의 대표적인 업적들로 꼽힌다.

   하지만 초기의 거란은 그다지 강력한 집단이 아니었다. 다음은 중국 역사서인 《수서(隋書)》에 언급된 거란 관련 기록들이다. 거란고막해족(동호의 후손)과 같은 족속이다. 요동 북쪽에 거주했고 돌궐족과 풍습이 비슷했다. 부모가 죽어도 울지 않는데, 나약하게 보일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북위 시절, 고구려의 공격을 피해 1만 호의 부족들이 중국으로 피신했다. 수나라 개황 5년(585년), 여러 추장들이 수나라를 방문하여 수문제를 알현했다. 거란의 일파인 출복 부족이 고구려와 동맹을 끊고 수나라로 오려 하자 황제가 그들의 이주를 허락했다.

   수가 늘어나자 요서 북쪽 200리로 거주지를 옮겨, 동서로 500리, 남북으로 300리를 점유하며 10개의 부족으로 나뉘어 살았다. 최대 3000명의 군사들을 낼 수 있었으며, 전쟁을 하려고 하면 여러 추장들이 합의를 하여 결정했다. 가축을 기르고 유목 생활을 했다.   

수나라가 들어설 때만 해도 거란족은 그다지 강하다고 할 수 없는 규모의 집단이었다. 동원할 수 있는 최대 병력이 고작 3000이라면, 몽골 초원을 근거지로 활동했던 유연이나 돌궐보다도 훨씬 못한 숫자라고 할 수 있다.

   서기 6세기 말, 약 300년 동안 분열 상태에 있었던 중국은 수나라에 의해 통일되었다. 그러자 수나라 주변 세력들은 자연히 수나라에 복속되었는데, 거란도 수나라에 접근하여 그들의 도움을 받으려 했다.

   수나라가 고구려와 전쟁을 치르는 사이, 거란은 점차 강력해졌다. 거란이 고구려와 친해질 것을 우려한 수나라가 많은 물자를 원조해 주었고, 고구려가 수나라와 싸우느라 신경을 못 쓰는 틈을 타서 고구려 변경을 습격해 많은 백성들을 납치해 갔기 때문이다.

   고구려 전쟁의 패배와 중원에서의 반란으로 수나라가 망하고 당나라가 들어서자 거란족은 당나라에 복속했다. 당나라도 수나라처럼 적국인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거란에 물자들을 대폭 지원해 주었고, 특히 황실의 공주를 거란족 추장에게 시집보내며, 거란 추장에게 당나라 황실의 성인 이씨 성을 하사하기까지 했다. 수나라 때보다 한층 더 파격적인 혜택이었다.

   그래서 거란족은 당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할 때, 군사를 보내 당군과 함께 고구려를 공격했다. 한 예로 654년, 거란족 추장 이굴가는 당나라군과 함께 신성에서 고구려군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당나라로부터 좌무위장군이란 벼슬을 받았다.



매사냥에 나선 거란의 귀족을 묘사한 그림

ⓒ 서해문집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당나라를 공포에 떨게 한 거란족의 반란

   그런데 고구려가 망하고 27년 후인 695년, 거란족은 당나라에 맞서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켰다. 자신들을 대폭적으로 지원해 주던 당나라였지만, 더 이상 그들의 속국이 아닌 자주적인 국가로서 동등한 관계를 갖기 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반란의 지도자인 이진충은 거란 추장 이굴가의 손자로, 당나라 수도인 장안에 오랫동안 인질로 잡혀 있던 경험이 있어 당나라의 지리와 내부 사정을 잘 알았다. 이진충은 자신을 ‘더 높은 곳이 없는 최고의 왕’이란 뜻의 무상가한(無上可汗)이라 칭하며 거란족의 독립을 외쳤다.

   이진충은 처남인 손만영을 장군으로 임명한 뒤, 약 20일 동안 수만 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주변 지역들을 공격해 닥치는 대로 약탈을 일삼고 저항자들을 죽이며 살아남은 자들을 항복시켰다. 이진충은 자신의 군대가 10만이나 된다고 과장하면서 섬서성에 있는 숭주를 침략했다. 그곳에서 반란을 토벌할 책임을 맡은 관리인 토격부사 허흠적을 생포하여 더욱 기세를 떨쳤다.

   반란 소식을 들은 당나라의 실권자 측천무후응양장군 조인사, 금오대장군 장현우, 우무위대장군 이다조, 사농소경 마인절을 포함한 28명의 장군들에게 거란족을 진압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서협석황장곡에서 벌어진 거란군과의 일대 격전에서 당군은 사령관인 장현우와 마인절이 생포되는 대참패를 당했다.

   당의 정예군이 거란족 반란군과의 전투에서 패배했다는 사실은 거란군의 전투력이 결코 당군보다 떨어지지 않았음을 보여 준 사례였다. 이는 이진충과 손만영이 당에 봉사하는 번병(외인부대)으로 오랫동안 복무하면서 당군의 전략과 전술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서신을 통해 서협석황장곡 전투의 패전을 알게 된 측천무후는 장안과 당나라 각지의 노비들 중에서 용감한 자들을 고른 뒤, 그들의 주인에게 돈을 주고 사들여 병사로 삼게 할 정도로 크나큰 위기감을 느꼈다.

   한편 승리한 이진충은 평주를 공격했지만 당군에게 막혀 물러났다. 그리고 현재 북경 인근의 단주를 들이쳤으나, 청변도부총관 장구절이끄는 군대에게 습격을 당해 철수했다. 이때 이진충이 갑작스레 죽었는데, 전사했다는 기록이 없는 걸로 보면 피로가 누적된 과로사이거나 부상 악화에 따른 죽음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진충이 죽자 손만영이 새로운 거란의 지도자가 되었으며, 그는 기주를 공격해 자사 육보적과 수천 명의 당나라 백성들을 학살하여 거란의 건재함을 과시했다.

   한편 이진충의 사망 소식을 접한 측천무후는 거란족을 제압할 절호의 기회라고 보고, 하관상서 왕효걸과 우림위장군 소굉휘에게 17만의 대군을 주어 거란을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하지만 당군은 병력 수에서 압도적으로 유리했음에도 동협석 전투에서 총수인 왕효걸을 포함한 수많은 병사들이 전사하는 패배를 당했다. 승리한 손만영유주와 영주의 현들을 공격하고 약탈과 파괴를 일삼았다. 우무위대장군 무유의가 장군을 보내 그들을 토벌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당나라에게는 몇 번을 패해도 얼마든지 보충할 수 있는 병력이 대기하고 있었다. 측천무후는 신병도대총관 무의종과 청변도대통관 누사덕, 청변중도전군총관 사탁충의에게 20만의 대군을 주어 손만영을 공격토록 명령했다. 그와 동시에 신변도총관 양현기해족으로 이루어진 군대를 이끌고 거란군의 후방을 기습했다. 즉, 측천무후의 전략은 20만 대군으로 손만영의 군대를 정면으로 압박하면서, 양현기의 별동대거란군의 후방을 찌르는 양동작전이었다.

   이 계획은 제대로 적중하여 전방의 20만 대군에만 신경 쓰고 있던 거란군은 갑자기 후방에서 들이닥친 당군의 공격에 놀라 허둥대다가 크게 패배했고, 용맹을 떨치던 장수인 이해고와 낙무정은 모두 당군에게 투항했다.

   해족으로 구성된 당군은 계속 거란군을 거세게 몰아붙였으며, 사태가 불리해지자 손만영은 황급히 도망쳤는데, 이 과정에서 수많은 거란군이 당군에 항복하거나 달아났다. 노하 동쪽으로 달아난 손만영은 자신이 부리던 노비에게 죽임을 당했고, 노비는 주인의 목을 당군에 바쳤다. 손만영의 죽음이 확인되자 장안의 당 조정은 일제히 환호하고 전국에 죄수들을 사면해 주었으며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연호를 ‘신성한 공적(神功)’으로 바꾸었다.

   이로써 거란족이 야심차게 추진한 독립의 꿈은 1년 만인 697년에 수포로 돌아갔다. 당군에 항복한 이해고와 낙무정은 각각 좌옥금위대장군과 우무위위장군에 임명되어, 당군을 거느리고 동족인 거란족들과 싸워야 했다.


서기 700년 무렵, 거란족의 영토를 표기한 지도

ⓒ 서해문집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이진충의 반란은 실패했으나 거란족은 독립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732년, 거란의 부족장인 가돌우는 당에 맞서 반란을 일으켜 당나라 장수인 유주부총관 곽영걸오극근을 포함한 당군 1만 명을 전사시켰다. 당나라 현종 황제유주장사 장수규를 보내 가돌우를 토벌케 했고, 장수규를 두려워한 가돌우는 돌궐로 달아나려 했으나, 부하인 이과절에게 피살되었다. 745년에도 거란의 추장인 이회수당나라 정락공주와 결혼했다가 곧바로 그녀를 죽이고 당나라에 반기를 들었다가 당나라 장수 안록산에게 패배했다.

   당나라 의종 황제 무렵인 함통 연간(860~874)에는 습이지라는 자가 나타나 거란족의 왕이라 칭했다. 습이지가 죽자 친척인 흠덕이 권력을 물려받았다. 그는 8개로 줄어든 거란 부족 간의 분쟁을 방지하기 위해 부족들이 합의하여 왕위를 세습이 아닌 3년마다 서로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는 을 만들었다.


영웅 야율아보기의 등장

   872년, 훗날 거란을 명실상부한 북아시아의 강대국으로 만들 위대한 영웅 야율아보기가 질랄부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영리했던 야율아보기큰아버지인 흠덕의 총애를 받고 일찍부터 장군에 임명되어 각지를 원정하며 전공을 세웠다. 901년, 야율아보기실위와 해족을 공격하여 많은 포로들을 잡아 개선했다. 902년에는 당나라의 하동과 대군을 습격하여 9개의 고을을 함락시키고 9만5000명의 포로와 많은 가축들을 노획했다. 903년 10월에는 당나라 하북의 계주 북쪽을 습격하여 포로들을 잡아왔다. 야율아보기의 눈부신 활약상에 흠덕은 그를 군사와 정치의 고관직인 우월(于越) 총지군국사(總知軍國事)에 임명했다.

   해가 바뀐 904년에도 야율아보기의 원정은 계속 이어졌다. 같은 해 9월, 야율아보기는 현재 내몽골 지역에 살던 유목민 흑거자실위족을 공격했다. 이때 당나라 노룡군절도사에 소속된 장수 조패가 수만의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오자, 야율아보기는 매복전을 벌여 당군을 격파하고 조패를 생포했으며, 곧이어 흑거자실위와도 싸워 이겼다.

   이처럼 연전연승하는 야율아보기는 거란족의 열렬한 신망을 한 몸에 받았고, 906년 12월에 흠덕이 죽자 많은 사람들의 추천을 받아 907년 1월, 왕위에 올랐다. 거란의 왕이 된 야율아보기는 예전에 하던 대로 실위와 해족, 중국의 군벌 세력들을 격하고 굴복시키는 원정에 몰두했는데, 911년 그의 동생들인 야율랄갈과 야율질랄, 야율인저석과 야율안단 등이 반란을 도모하다 발각당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야율아보기는 동생들의 배신에도 불구하고 계속 그들을 용서하고 사면해 주었다. 그는 동생들을 도와 역모에 동참한 300명의 부하들과 야율랄갈의 아내인 할랄기처형했을 뿐, 네 동생들은 모두 살려 주었다.

   4년 동안 계속된 역모 사건이 끝난 916년, 여러 부족의 대인들이 3년으로 제한된 임기를 넘기고도 계속 집권하고 있는 것을 트집 잡아 야율아보기에게 물러나라고 압력을 가했다. 이에 야율아보기는 대인들을 초청해 술과 음식을 대접하다가, 미리 숨겨 둔 병사들을 불러 그들을 모두 죽였다. 이로써 야율아보기의 장기 집권을 막을 반대 세력은 모두 제거되었다.

   그리하여 같은 해, 아율아보기는 2차 즉위식을 올렸다. 이미 907년에 올린 즉위식과는 달랐다. 그때는 거란 부족들의 연맹체 수장에 불과했지만, 이제는 명실상부한 전제 군주로서 즉위하는 것이었다. 야율아보기는 그해 2월 대성대명천황제(大聖大明天皇帝)로, 아내인 술율씨응천대명지황후(應天大明地皇后)라는 존호를 신하들에게 받고 모든 거란인들을 다스리는 황제에 올랐다.



요나라 태조 황제 야율아보기

ⓒ 서해문집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황제가 된 야율아보기는 거란 서쪽의 세력인 돌궐과 당항, 사타부 등 여러 부족들을 굴복시키고(916년 7월), 거란 문자를 만들었으며(920년), 발해를 멸망시켜(926년 1월) 거란의 위세를 크게 떨쳤다. 거란 문자는 한자를 본따서 만들었는데, 한족과 구별되는 거란족의 집단의식을 키우는 데 큰 공헌을 했다. 한때 ‘해동성국’이라 불리며 융성했던 발해는 거란의 기습 공격에 수도인 홀한성이 함락되고 국왕 대인선이 사로잡히는 바람에 일거에 몰락했다.

   야율아보기의 치세 기간에 거란은 중국 북방의 모든 세력들을 지배하는 강대국으로 발돋움했고, 200년 동안 중국과 대립할 수 있는 기반을 확보했다. 발해를 정복한 해인 926년 7월, 야율아보기는 5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중원을 지배할 뻔했던 거란족

   야율아보기가 죽자 그의 장남인 야율배와 차남인 야율덕광 사이에 권력 다툼이 일어났다. 일찍이 야율아보기는 발해를 무너뜨린 이후, 발해 영토에 괴뢰국가인 동단국(東丹國, 동쪽의 거란)을 세워 야율배를 국왕인 인황왕(人皇王)에 임명했다. 그러나 차기 황제 자리는 차남인 야율덕광에게 넘겨주었다. 야율배는 이런 처사에 불만을 품고 동생과 대립했으나, 힘에서 밀리자 가족을 데리고 후당으로 도망쳤다. 나중에 후당이 거란 병사들의 도움을 받은 후진에게 망할 위기에 처하자, 후당 황제 이종가신하인 진계민과 이언신을 보내 야율배를 죽였다.

   야율덕광은 아버지가 이루지 못한 중원 정복의 야망을 품었는데, 그의 꿈을 실현화할 기회가 뜻하지 않게 찾아왔다. 후당의 장수인 석경당이 권력을 잡기 위해 야율덕광에게 도움을 청하면서, 그 대가로 만리장성 남쪽 영토인 연운 16주 넘기겠다고 제안한 것이다. 연운 16주를 거란이 얻게 되면 중원 깊숙이 마음대로 뻗어 나갈 수 있으니, 거란으로서는 최고의 요충지를 확보하는 셈이었다. 야율덕광은 흔쾌히 석경당의 제안을 받아들여, 자신이 직접 거란군 5만을 이끌고 남하하여 석경당을 포위했던 후당군을 격파하고 석경당을 구출했다.

   거란의 도움으로 살아난 석경당은 황제가 되어 나라 이름을 후진으로 고쳤다. 그리고 거란에 보답하는 의미로 자신보다 열 살이나 어린 야율덕광(37세)을 아버지라 불렀으며, 약속대로 연운 16주를 모두 거란에 넘겨주는 한편, 매년 거란에 비단 30만 필을 공물로 바쳤다.

   그러나 942년, 석경당이 죽고 그의 조카인 석중귀가 황제가 되자 재상인 경연광은 거란 관리에게 “현재의 후진 황제는 거란의 도움 없이 제위에 올랐으니 결코 거란의 신하가 아니다. 우리에게는 10만의 날카로운 검이 있으니 결코 업신여기지 마라.”라는 말을 야율덕광에게 전하면서 거란에 맞섰다.

하지만 946년, 야율덕광이 직접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오자 후진연전연패를 당한 끝에 힘없이 멸망하고 말았다. 10만의 검이 있다고 큰소리쳤던 경연광은 거란군에 사로잡혔다가 수치를 감당하지 못하고 자살했다.

   후진의 영토를 점령한 야율덕광은 947년 2월, 나라 이름을 거란에서 요(遼)로 고치고, 자신이 요와 중국을 모두 다스리는 황제라고 선언했다. 만약 그대로 요나라가 중원을 지배하는 데 성공했다면, 이후 송나라는 등장할 수도 없었을 것이고, 중국의 역사는 크게 바뀌었을 것이다.

   그러나 요나라 병사들이 중원 각지에서 저지른 난폭한 행동으로 인해 그러한 기회는 사라져 버렸다. 한 예로 하남성 상주에서 요나라관리가 현지 주민들에게 죽임을 당하자, 야율덕광은 직접 병사들을 이끌고 10만 명에 달하는 주민들을 모조리 죽이고 여자들을 전부 노예로 삼아 요나라로 보냈다. 요나라 병사들이 자행하는 살육으로 수많은 후진 백성들이 죽어 가자 중원 각지에서 분노로 가득 찬 백성들이 잇달아 봉기군을 일으켜 요나라를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뜻밖의 사태에 놀란 야율덕광 “백성들의 곡식과 재산을 빼앗은 것이 잘못이었다.”라고 탄식하며 요나라 본국으로 돌아가다가 병이 나서 죽고 말았다.


송나라와의 전쟁과 대립, 그리고 타협

   야율덕광의 사망으로 요나라는 중국을 지배하려는 야심을 포기했다. 그러나 중원에서 완전히 손을 뗀 것은 아니었다. 951년 유숭이 현재 중국 동부 태원에 세운 나라인 북한(北漢)은 960년 건국한 송나라의 위협에 시달리다가 요나라의 도움을 빌려 송나라를 막아 내려 했다. 그래서 요나라는 북한이 멸망하는 979년까지 28년 동안 북한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979년 3월, 송나라의 두 번째 황제인 태종 조광의는 직접 대군을 이끌고 북진하여 북한을 도우려던 요나라군을 백마령에서 격파했다. 장수인 야율적렬도민, 당괄 등이 전부 전사했을 만큼 요는 큰 피해를 입었다. 승리한 송군은 곧이어 4월, 북한의 수도인 태원을 포위하여 맹렬한 공격을 가한 끝에 다음 달인 5월, 마침내 북한을 멸망시켰다.

   북한을 없앤 조광의는 내친 김에 그대로 요나라가 차지하고 있던 연운 16주마저 빼앗으려고 했다. 그리고 같은 해 6월, 역주와 탁주를 점령하고 요나라 장수 해저와 소토고가 이끈 군대를 패주시켰다. 연승한 송군은 요나라의 대도시인 남경(현재 북경)을 포위하고 공격을 퍼부었으나, 성벽이 높고 튼튼한 데다 태원 공성전의 피로가 풀리지 않아 병사들이 지쳐 있었다.

   아무리 공격해도 승산이 안 보이고 군량마저 떨어져가자, 조광의는 일단 후퇴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요나라의 명장인 야율휴가와 야율사진이 대군을 이끌고 송군을 추격했다. 송군과 요군은 고량하 전투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야율휴가가 별동대를 편성하여 밤중에 강을 건너와 송군의 측면을 기습하자 송군은 크게 놀라 전군이 붕괴되었다. 조광의는 간신히 나귀가 끄는 수레를 타고 요군의 추격을 피해 달아났다.

   7년 후인 986년 조광의는 장수 조빈에게 20만 대군을 주어 다시 요나라를 공격해 연운 16주를 빼앗으라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전세는 요나라에게 유리했다. 요군의 총수인 야율휴가는 송군의 보급로를 차단하여 그들을 궁핍하게 만든 다음, 대대적으로 기습을 가해 달아나는 송군을 사하라는 작은 강에 몰아넣고 철저하게 궤멸시켰다. 이 전투에서 셀 수 없는 송군이 죽었다.

   사하 전투의 패배로 송나라는 연운 16주를 무력으로 빼앗으려는 계획을 포기하고 요나라와 적대적인 대치 상태로 접어들었다. 두 나라 모두 상대방의 거센 저항에 부딪쳐 서로 위협만 할 뿐이었다. 결국 1004년, 매년 송나라가 요나라에 은 10만 냥과 비단 20만 필을 주는 대신, 요나라도 송나라의 영토를 더는 침략하지 말고 두 나라가 형제의 관계를 맺자는 ‘전연의 맹약’을 맺고 전쟁을 중지했다.

   전연의 맹약이 체결된 해는 성종(聖宗, 982~1031) 황제가 요나라를 다스리던 시기였다. 그의 치세는 거란 · 요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로 북으로는 흑룡강, 서로는 몽골 초원, 동으로는 연해주, 남으로는 연운 16에 이르는 방대한 영토가 모두 이들의 지배하에 있었다.



1025년, 요나라의 위세가 최고에 달했을 때의 영토

ⓒ 서해문집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성종은 동남쪽의 고려를 굴복시키기 위해 993년, 1010년, 1016년, 1018년, 1023년 등 여러 차례 집요하게 침략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우리가 잘 아는 귀주대첩강감찬 장군의 일은 1018년 있었다.


여진족의 반란

   전연의 맹약 고려 원정의 실패로 인해 요나라는 더 이상의 영토 확장을 포기하고 평화 공존의 상태로 접어든다. 평화는 좋았으나 요의 지배층들은 송나라 문화에 젖어 사치를 일삼고, 이를 유지하기 위해 백성들에게 각종 세금을 더욱 많이 걷기 시작했다. 그러자 백성들 사이에는 불만이 점점 높아져 갔다.

   특히 요나라 황족들의 사냥에 쓰이는 매 해동청(海東靑)은 모두 만주 동쪽과 연해주에 살던 여진족이 바치는 공물이었다. 요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천조제는 해동청을 이용한 사냥을 좋아했는데, 해동청은 험준한 낭떠러지에 살아서 이 매를 잡으려다 사람이 떨어져 죽기 일쑤였다. 그래서 해동청을 잡아 바치라는 요나라의 요구가 심해지면, 여진족들은 모두 분개하여 치를 떨었다.

   1112년 2월, 천조제는 운명의 만남을 경험한다. 만주 동부 혼동강에 가서 인근 지역의 여진족 추장들을 불러 잔치를 열던 중, 술에 취한 상태에서 여진 추장들에게 흥을 돋우기 위한 춤을 추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완안부 족장아골타(1068~1123)는 황제의 명을 거부하고 끝까지 춤을 추지 않은 것이다. 이에 불쾌감을 느낀 천조제는 그를 죽이려 하였으나, 추밀사 소봉손 “너무 가혹한 벌입니다.” 하고 간곡히 말려 그만두었다.



장막을 치고 잔치를 벌이는 거란족의 모습

ⓒ 서해문집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얼마 못 가 천조제는 아골타를 살려 둔 일을 후회하게 되었다. 1114년, 아골타가 부족의 군사를 모아 인근의 흘석렬 부족공격해 실력자인 아소가 요나라로 도망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그러자 아골타“아소를 돌려주지 않으면 조공을 영원히 끊고 성과 요새를 계속 만들겠다.”라며 일종의 협박성 통첩을 보냈다.

   아골타의 오만함에 분노한 천조제는 해족과 중경의 수비군, 각지에서 선발한 7000명의 군사를 동원해 그를 토벌하도록 했다. 그러나 요나라군은 1114년 10월, 지금의 길림성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혼동강을 건넌 여진족 별동대에 기습을 당해 아율불류와 소갈십, 최공의, 형영 등 주요 사령관들이 모두 전사하는 참패를 당했다.

   다음 달인 11월, 알린박 동쪽에 진을 치고 있던 도통 소적리 휘하의 요나라군도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참패했다. 이 사건에 자극을 받은 상주, 함주, 빈주, 철려, 올야 등이 전부 여진에 항했다.

   잇따른 요나라군의 참패에 천조제는 여진족의 힘이 만만치 않음을 깨닫고, 해가 바뀐 1115년 11월, 장수 소특발소찰랄에게 기병 5만과 보병 40만, 친군 70만 등 대군을 주어 여진토벌하게 했다.

   그러나 시대의 운명이 요나라를 버린 것인지, 황족인 야율장가노야율출자12월에 반란을 일으켰다. 여진 토벌을 위해 편성된 대군은 이 반란 진압에 투입됐고, 천조제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호보답강에서 그들과 싸웠으나 크게 참패하고 말았다. 요나라군은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두 반역자와 싸워 그들을 죽이는 데 성공했지만, 내분을 겪느라 국력이 더욱 약해져 있었다.

   1117년 봄, 요나라의 춘주와 여고, 피실과 태주 등 4개의 고을이 모두 여진군에게 항복했으며, 12월에는 도원수 야율순질려산에서 여진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참패했다. 계속되는 승리에 기세가 등등해진 아골타는 마침내 새로이 금나라를 세우고 자신을 황제라 칭했다.

   1118년, 갈수록 막강해지는 금나라의 힘에 겁을 먹은 천조제황족 야율노가를 사신으로 금나라에 보내 평화 협상을 벌였는데, 1120년 2월, 천조제가 몰래 고려에 지원군을 요청한 사실이 발각되면서 협상이 파탄나고 말았다. 아골타는 이것이 비열한 배신이라고 성토하며, 1120년 3월 요나라와의 모든 협상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했다.

   1121년에는 계속된 전쟁 끝에 요나라의 국토 절반이 전부 금나라에게 점령되었다. 더 이상 버티기가 힘들어진 천조제는 산서성 운중으로 피신했으나 금나라 군대는 추격을 멈추지 않았다. 그해 8월, 천조제는 석련역에서 금나라 군대와 싸웠으나 참패하고 황급히 달아났다. 12월에는 요나라의 남경마저 금나라에 떨어졌다.

   요나라를 두렵게 했던 금나라 황제 아골타1124년 8월에 죽었으나, 새 황제로 즉위한 아골타의 동생 오걸매는 요나라에 대한 전쟁을 계속 추진했다. 1125년 2월, 금나라 군대의 추격을 피해 고비 사막과 음산 산맥 일대를 떠돌던 천조제는 마침내 산서성의 신성 부에서 금나라 장수 완안누실에게 생포당했다. 금나라로 끌려간 천조제는 오걸매로부터 ‘바닷가의 가난한 왕(海濱王)’이라는 조롱 섞인 칭호를 받고, 연금당해 살다가 그해 8월, 54세의 나이로 죽었다.


란의 마지막 불꽃, 서요  

   천조제가 죽었다고 요나라가 완전히 망한 것은 아니었다. 금나라의 손을 용케 벗어난 황족 야율대석은 멀리 북쪽인 몽골 초원으로 피신하고, 현지 주민들에게 도움을 요청해 1만의 군사를 얻었다. 그리고 현재 중국 신강성 서쪽인 중앙아시아로 진격했다. 당시 중앙아시아는 이슬람교를 믿는 투르크인들이 지배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낮선 이방인인 거란족이 쳐들어오자 이를 경계한 카라한 왕조셀주크투르크인들은 서로 힘을 합쳐 거란족에 맞서 싸웠다.

   그러나 우즈베키스탄의 유서 깊은 대도시 사마르칸트 인근에서 벌어진 결전에서 망명자들로 구성된 거란족투르크족 연합군에게 완벽한 대승리를 거두었다.

   이 승리로 말미암아 중앙아시아의 투르크족들은 모두 야율대석에게 굴복했으며, 1124년 2월 5일 야율대석은 38세의 나이로 황제에 올랐다. 그는 발라사군을 수도로 삼고 나라 이름을 서요(西遼)라고 정했다. 야율대석은 1126년 3월, 7만의 기병을 거느리고 원수 금나라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직접 출정했으나, 가는 도중에 장마가 와서 말들이 집단 폐사하자 할 수 없이 회군했다. 1143년 야율대석은 사망했고 신하들로부터 덕종(德宗)이라는 묘호를 받았다.



중앙아시아에 들어선 서요

서구 학계에서는 ‘카라 키타이’라고 부르는데, ‘검은 거란’이란 뜻이다.

ⓒ 서해문집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야율대석의 후손들은 1211년까지 서요의 제위에 올랐다. 서요 백성들의 절대다수는 무슬림이었고 지배층인 거란족은 불교를 믿었다. 그러나 거란족은 백성들에게 불교를 믿으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1211년, 뜻밖의 사건이 발생했다. 1206년 몽골 초원에서 벌어진 전쟁에서 칭기즈칸에게 패배한 나이만 부족의 왕자 쿠틀륵이 8000명의 병사들과 함께 초원을 방랑하다가, 마침 초원으로 사냥을 나온 서요 황제 야율직고로를 사로잡고, 그에게서 군주의 지위를 빼앗아 서요를 지배하게 되었던 것이다.

   쿠틀륵은 매우 잔인한 폭군이었다. 기독교도였다가 불교도로 개종한 그는 무슬림이 대다수인 서요 백성들에게 불교를 믿으라고 핍박하다가 민심을 잃었다. 1218년, 칭기즈칸이 보낸 몽골군이 쳐들어오자 아무도 쿠틀륵을 지켜주려 하지 않았다. 몽골군을 피해 달아나던 쿠틀륵은 결국 붙잡혀 처형당했다. 쿠틀륵이 죽자 서요의 황족과 귀족들은 모두 몽골군에 항복했고, 이미 몽골군에 항복했던 중국 북부의 동포인 거란족들과도 합류하여 그대로 몽골에 흡수되었다.

   이리하여 고구려 시대로부터 자그마치 840년이나 이어져 오던 거란의 역사는 13세기에 이르러 그들의 친척인 몽골인들에 의해 영원히 소멸되고 말았다.


변발 문화와 과일 꼬치

   흉노유연과는 달리 거란족은 중국식 왕조를 세웠고, 상당히 풍부한 기록을 남겨 14세기 중엽 원나라에서 거란족의 역사인 《요사》를 편찬할 수 있었다.

   거란족은 원래 하늘과 땅 등 자연을 신격화한 샤머니즘 신을 가졌다. 하지만 나라를 세운 야율아보기 이후부터 거란족은 중국을 통해 들어온 불교에 심취하기 시작했다. 야율대석이 서요를 세웠던 때에는 거의 모든 거란족이 불교도가 된 상태였다. 불교를 믿었던 거란족은 각지에 절과 탑을 세우는 데도 열심이었는데, 지금도 남아 있는 중국 북경의 철탑이 요나라 때 만든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다른 유목민족들처럼 거란족도 머리의 정수리 부분은 깨끗이 밀어버리고, 양옆의 머리만 아래로 길게 늘어뜨리는 변발 문화 갖고 있었다. 건조한 지역에 살았던 유목민들은 머리카락을 감을 충분한 물을 구하기 어려웠고, 또 물이 흐르는 강을 발견해도 초원의 강은 너무나 차가워서 머리카락을 감기도 난감했다. 그래서 유목민들은 아예 귀찮은 머리카락을 대부분 밀어 버리는 변발을 택했던 것이다.



거란족의 변발 모습

정수리 부분의 머리카락은 모두 깎아 없애고, 양옆의 머리만 남겼다.

ⓒ 서해문집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거란족은 다른 유목민들과는 달리 생선을 즐겨 먹었다. 매년 봄마다 거란 황제송화강에 가서 직접 얼음을 깨고 물고기를 낚아 신하들에게 나눠 주는 잔치인 두어연(頭魚宴)을 벌였다. 천조제가 여진 추장들을 모아 놓고 춤을 추게 한 것도 바로 이 두어연 자리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음식 문화에 대해 거란족이 오늘날까지 남긴 유산이 있는데, 현재 북경의 명물인 과일 꼬치 ‘탕후루’다. 탕후루가 바로 요나라 시대에 등장한 요리였다. 거란족 산시나무 열매나 딸기, 포도 같은 각종 과일들을 설탕물에 묻혀 나무 꼬치에 꽂아 먹는 탕후루 요리를 즐겨 먹었는데, 이 요리가 지금까지 남아 중국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거란족은 한족들을 받아들여 그들의 재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배려했다. 거란의 최전성기를 이끈 성종 황제는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어머니인 소태후의 섭정을 받았는데, 소태후를 적극 도운 유능한 대신은 한족인 한덕양이었다.

   아울러 13세기 초, 몽골제국이 등장해 금나라를 공격하자, 당시 금나라의 지배를 받고 있던 거란족은 몽골과 손잡고 원수인 금나라와 맞서 싸우는 데 앞장섰다. 한 예로 몽골제국이 막 건국된 1206년, 몽골군은 95개의 천호(千戶, 1000명으로 조직된 하나의 부대 단위)를 거느렸는데, 칭기즈칸이 죽던 해인 1227년에는 129로 늘어나 있었다. 거란족이 대거 몽골군에 투항하여 새로운 부대로 편성되면서 몽골군의 수가 그만큼 증가했던 것이다. 또한 칭기즈칸오고타이칸을 섬겼던 재상인 야율초재(耶律楚材, 1190~1244)도 몽골군에 항복한 거란족이었다. 그는 중국 북부의 농경지를 초원으로 바꾸려던 몽골인들을 설득하여 그 계획을 취소시켰다. 대신 중국인들에 계속 농사를 짓도록 허락하고 정기적인 세금을 거두어 몽골제국의 재정 상황을 안정시켰다. 이렇듯 거란족은 자신들보다 3세기 늦게 발흥한 몽골족에게 대제국 운영의 경험과 지식을 전수해 주었던 것이다.


본 콘텐츠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위 내용에 대한 저작권 및 법적 책임은 자료제공처 또는 저자에게 있으며, Kakao의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도현신 집필자 소개

   순천향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석사 과정을 마쳤다. 2004년 장편소설 《마지막 훈족》(전2권)을 출간했으며, 단편소설 ‘나는 주원장이다’로 2005년 제4회 전국신인문학상 장려상을 수상했다. 저서로 《옛사람에게 전쟁을 묻다》 《한국사 악인 열전》《전쟁이 요리한 음식의 역사》 《왕가의 전인적 공부법》 《한국의 음식 문화》 《어메이징 한국사》 《어메이징 세계사》 등이 있다.접기

출처

지도에서 사라진 사람들
지도에서 사라진 사람들 | 저자 도현신 | cp명서해문집 도서 소개

  거란족, 흉노족, 수메르인 등 현재는 남아있지 않지만 역사 속에서 활발히 활동했다 사라진 세계의 역사들을 이야기한다. 침략으로 소멸되고, 강대국으로 흡수 되는 등 각 나라들의 흥망성쇠를 통해 세계사의 다양한 줄기와 가지들을 살펴보고, 그들이 남긴 유산이 우리가 사는 현재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교훈을 남겼는지 알아본다.접기




출처 :영남지리답사 원문보기   글쓴이 : 松河 李翰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