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예도보통지(御製武藝圖譜通志)

2019. 4. 3. 12:21병법 이야기



다음백과

무예도보통지

다른 표기 언어 武藝圖譜通志 동의어 무예통지(武藝通志), 무예도보, 무예보, 어제무예도보통지(御製武藝圖譜通志), 어정무예도보통지(御定武藝圖譜通志) 


요약  4권 4책으로 된 목판본이다. <무예통지>·<무예도보>·<무예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이후 실전 군사훈련용 무예서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1598년 <무예제보>가 간행되었고, 1759년 18기에 관한 도보인 <무예신보>가 간행되었다. 이 책은 <무예제보>·<무예신보>기예 6기를 더해 24기를 만들고 도보를 붙여 조선의 무예를 집대성했으며, 1790년에 완성했다. 정조의 명으로 이덕무·박제가·백동수 등이 편찬했다. 손쉽게 기예를 익혀 국방에 만전을 기하려는 의도로 도보를 중심으로 자세한 설명을 실었다.

   권수에는 정조가 찬한 <서문>과 <범례>·<병기총서>·<척모사실>·<기예질의>·<인용서목>의 순으로 실려 있다. 1790년에 언해본을 따로 별권으로 간행했다. 국립중앙도서관과 규장각 등에 소장되어 있다.

정조(正祖)의 명에 따라 이덕무·박제가·백동수 등이 편찬했다.


무예도보통지

〈무예도보통지〉,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 2015, All Rights Reserved.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4권 4책. 목판본. 1598년(선조 31) 한교(韓嶠)가 편찬한 〈무예제보 武藝諸譜〉와 1759년(영조 35)에 나온 〈무예신보 武藝新譜〉를 증수하여 조선의 무예를 집대성한 책으로 1790년(정조 14)에 완성되었다. 〈무예통지 武藝通志〉·〈무예도보〉·〈무예보〉라고도 한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무예는 궁시(弓矢) 위주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계기로 실제적인 군사훈련용 무예서와 단병(短兵:槍·劍·拳 등)의 필요성이 대두되자 선조의 명으로 1598년 〈무예제보〉가 간행되었으며, 1759년 죽장창(竹長槍) 등 12기(技)를 더하여 18기에 관한 도보인 〈무예신보〉가 간행되었다. 〈무예제보와 〈무예신보〉기예 6기를 더하여 24기를 만들고 도보를 붙여 〈무예도보통지〉라고 이름했다. 장졸(將卒)들이 손쉽게 기예를 익혀서 국방에 만전을 기하려는 의도하에 편찬된 이 책은 실제 훈련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도보(圖譜)를 중심으로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권수에는 정조가 찬한 〈서문〉과 〈범례〉·〈병기총서 兵器總敍〉·〈척모사실 戚茅事實〉·〈기예질의 技藝質疑〉·〈인용서목〉 등의 순으로 실려 있다. 〈병기총서〉는 조선건국 이래 역대 왕들의 군사정책 및 상무훈련에 대한 기록과 병서(兵書)·진법(陣法) 등의 편수·편찬, 무예시취(武藝試取)의 역사를 다루고 있어, 〈무예도보통지〉 편찬까지의 우리나라 전투기술사·병기사(兵技史)의 변천과정을 알 수 있는 기록이다.

  〈척모사실〉은 이 책을 편찬하는 데 기본이 된 〈기효신서 紀效新書〉의 저자인 계광(繼光)〈무비지 武備志〉의 저자인 원의(元義)소전(小傳)을 싣고 있다. 〈기예질의〉에는 병기에 관해한교 명나라의 허유격(許遊擊)에게 질의·문답한 내용과 한교의 소전이 수록되어 있다.

〈인용서목〉에서는 국내외 148종의 무예서를 기록하여 조선의 무예가 다른 나라의 무예를 주체적으로 흡수·발전시켜온 변천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본문에는 4권에 걸쳐 24종의 병기(兵技)를 수록하고 있다. 그 내용을 보면, 권1에는 장창(長槍)·죽장창(竹長槍)·기창(旗槍)·당파·기창(騎槍)·낭선(狼筅), 권2에는 쌍수도(雙手刀)·예도(銳刀)·왜검(倭劍), 권3에는 제독검(提督劍)·본국검(本國劍)·쌍검(雙劍)·마상쌍검(馬上雙劍)·월도(月刀)·마상월도(馬上月刀)·협도(挾刀)·등패(藤牌), 권4에는 권법(拳法)·곤봉(棍棒)·편곤(鞭棍)·마상편곤(馬上鞭棍)·격구(擊毬)·마상재(馬上才) 등의 각종 무예를 창술·도검술·봉법·곤봉술·기술(騎術)로 분류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끝에는 관복도설(冠服圖說)고이표(考異表)를 붙였다. 무기를 설명함에 있어 먼저 각 무예에 쓰이는 병기를 자세하게 설명하고, 상단에서 동작설명, 하단에서 동작그림을 그려놓았는데 맨 뒷부분에는 전체를 연속동작으로 옮기는 그림을 싣고 있다. 그리고 무예에 대한 그림은 조선식과 중국식을 함께 그려놓음으로써 서로 비교할 수 있도록 해놓았다.


   이와 같은 서술방식은 누구나 쉽게 무예를 익히게 하려는 편찬목적에 적합한 구성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조선 초기 이래 무시해온 일본의 검술도 다루고 있는데, 이것은 일본과의 전쟁경험에서 나온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때까지 우리나라의 병서는 선진후기(先陣後技)의 사고방식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대부분 전략·전술과 같은 진법 중심으로 저술되어 무예에 대한 기록은 드문 편이었다. 이 점을 감안한다면, 이 책은 24기의 전투기술을 중심으로 한 실전훈련서라는 점에서 서술상·내용상의 특징을 찾을 수 있다.


   이 책을 통해 조선시대 무예와 병기에 대한 역사적 흐름을 전체적으로 조감할 수 있으며, 무기제조 및 복식사 연구에도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1790년(정조 14)에 언해본을 따로 별권으로 간행했다. 최근 이 언해본과 합본하여 한국체육사연구회에서 영인했다. 국립중앙도서관, 규장각 등에 소장되어 있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출처

다음백과
다음백과 | cp명Daum 전체항목 도서 소개

다양한 분야의 전문 필진으로 구성. 시의성 이슈에 대한 쉽고 정확한 지식정보를 전달합니다.








나무위키



무예도보통지

최근 수정 시각:


분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파일:attachment/unesco-memoryoftheworld.gif



이름

 한글

무예도보통지
영어
Comprehensive Illustrated Manual of Martial arts
프랑스어
국가·위치
소장·관리
등재 유형
기록 유산
등재 연도
제작 시기
1790년



1. 개요2. 편찬 배경3. 내용 구성4. 현대의 무예도보통지5. 패러디6. 기타7.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조선 시대 군용 무술 교본.
끊어서 읽는다면 '무예도' '보통지'가 아니라 '무예'(무술) '도보'(그림과 해설) '통지'(종합 서적)로 읽어야 한다.

조선에서 1790년(정조 14년) 정조의 명으로 규장각 검서관인 실학자 이덕무, 박제가와 장용영 소속 장교이자 무인인 백동수 등의 도움을 얻어 편찬한 조선 시대 군용 무술 교본. 임금의 명으로 만들어졌다 하여 어제무예도보통지(御製武藝圖譜通志) 또는 어정무예도보통지(御定武藝圖譜通志)라고도 불린다.

2003년 국립국어원이 100대 한글 문화 유산으로 선정하였다.국립 국어원 20년사

2017년 10월 30일, 북한의 문화 유산으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기사


2. 편찬 배경[편집]

파일:attachment/무예도보통지/horse_korea_04.jpg
무예도보통지의 6가지 마상 무예


   전통적으로 조선은 궁시 기예는 알아주는 나라였지만 단병접전에는 능하지 못했다. 임진왜란에서 그 문제점이 그대로 드러나자 선조의 명으로 척계광(戚繼光)의 기효신서(紀效新書)와 대왜구 전법인 《절강병법》을 참고하여, 속오법(束伍法)[1]삼수기법(三手技法)[2]을 도입하는 군제개혁을 한다. 또한 기효신서를 분석하고 명나라 병사들의 훈련을 참관하여 1598년(선조 31년) 한교(韓嶠)[3]가 곤봉, 등패, 낭선, 장창, 당파, 쌍수도(장도)의 무예육기를 담은 무예제보(武藝諸譜)를 편찬했다. 그리고 임란이 끝나고 1604년 광해군 때에는 선조의 뜻을 받들어 《무예제보》에서 빠진 부분을 추가하고 일본에서 구한 서적의 번역을 덧붙인 무예제보번역속집을 내놓는다.

   영조 시대에는 청나라를 거쳐 모원의(茅元儀)《무비지》(武備志)를 수입해서 크게 영향을 받았는데, 1759년(영조 35년)에 무술에 관심이 많았던 사도세자가 대리 청정을 하던 시기 《무예제보》에 12종을 더 늘려 곤봉, 등패, 낭선, 장창, 당파, 쌍수도, 죽장창, 기창(旗槍. 깃발 달린 창), 예도, 왜검, 교전[4], 월도, 협도, 쌍검, 제독검, 본국검, 권법, 편곤의 18가지 보병 무예로 《무예신보》(武藝新譜)를 편찬했다. 이렇게 정해진 18종의 무술을 십팔기(18기, 十八技)라고 부르는 것이다. 애석하게도 《무예신보》는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무예도보통지에 실린 내용으로 미루어보아 무예도보통지의 구본격으로 짐작하고 있다. 유물이 남아있기만 했다면 무예제보번역속집에서 무예도보통지 사이의 징검다리로 무술적 학술적 가치가 클 것이라 많은 안타까움이 있다.

   그리고 정조 14년(1790년)에 이르러 《기효신서》《무비지》, 《무예제보》 《무예신보》 등등을 기초로 하여 십팔기기창(騎槍. 마상창), 마상월도, 마상쌍검, 마상편곤, 격구, 마상재를 추가해 24기(技)를 갖추어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한다.

3. 내용 구성[편집]

이렇게 완성된 무예도보통지는 4권의 한문본에 1권의 언해본(한글 해석본)으로 구성된다.

   무술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무기 만드는 법, 한중일 동일 무기의 형상 비교와 무기의 규격 등이 기록되어있다. 기효신서 같으면 무술을 아는 사람이 보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어서 각 자세에 대해 정확한 서술이 없고 단순히 세법과 형의 명칭만 나열하고 있으며, 책에 나온 내용과 명나라 병사들이 실제로 익히는 세법이 서로 다른 등의 문제가 있었는데 무예제보에서 무예도보통지까지의 편찬 과정에서 그런 부분을 세세히 조사해 그림으로 검보의 흐름을 표시해주고 있는 상세함이 돋보인다.

   무예도보통지의 내용 상당수가 해외의 무술을 수입 분석하여 만든 것이다보니 그 기원이 중국 무술이나 일본 무술에서 유래한 것이 많다. 예를 들어…
  • 권법 - 송 태조 장권 32세를 기초로 하여 중간에 상실한 부분이나 의미없는 부분 등을 추려내어 전하고 있다. 권법은 무예제보가 나오던 시절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았으나 무예제보번역속집이 나오던 때에 수록되었고 이것이 무예도보통지까지 이어졌다.
  • 곤방 - 정종유의 소림곤법천종에서 차용한 것을 담아왔다.
  • 장창 - 양가육합팔모창법 즉 양가창법에서 따온 것이다.
  • 예도 - '조선 세법'이라고도 하며 무비지에서는 조선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적고 있다. 조선의 검술이 중국으로 건너갔다가 다시 돌아온 셈.
  • 본국검 - 이름 그대로 조선의 고유 검술이다.
  • 쌍수도(장도) - 왜구가 노다치를 들고 쳐들어온 것에 영향받아 만든 중국의 장도(묘도)술을 가져온 것. 현대 게임 등에서 나오는 '쌍수'가 보통 쌍검을 뜻하는데 반해 이것은 양 손으로 큰 칼 하나를 쥐는 것을 뜻한다.
  • 왜검 - 숙종김체건이라는 군관이 일본에 건너가서 얻어온 토유류, 운광류, 천류류, 류피류의 네 유파의 검술이다. 무예신보에는 네 유파가 아니라 8개의 유파다. 교전은 이것을 기초로 김체건이 창안한 것.
  • 제독검 - 왜란 시절 명나라 장수에게 군사를 파견보내어 익혀온 검술. 명나라 제독 이여송의 검술이 아닐까 싶어서 제독검이라고 이름붙였다고 한다.

   임란기부터 정조 대왕 대까지의 200여년의 조선 군용 무술의 변을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의 무술까지 포함하고 있는 삼국 무술의 집대성.

   원래 조선 시대부터 궁시는 선비의 교양으로 높게 쳐주었지만, 단병접전 무술은 그다지 높게 평가하지 않았고 민간에서 검술 연습하면 모반을 획책한다는 눈으로 보기도 했다. 칼들고 설치던 조폭 겸 무술 연습하던 도당인 검계(劍契) 같은 것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며, 일본처럼 폐도령으로 무기를 압수하지는 않았으나, 무과 지원을 위해 수련하는 것이 아닌 이상 칼든 자들이 뭉치는 경우 가만히 놔둘 이유가 없었다. 이런 이유로 조선 땅에는 일본이나 중국처럼 무술 문파가 세워질 수 없었다. 중국의 경우는 하도 땅덩이가 넓은 관계로 각 지역의 가전 무술 같은 것에 세세한 신경을 쓰지 않았고 중앙 집권이라는 개념이 그렇게까지는 강하지 않은데다 오히려 그런 명사들을 군의 교관으로 썼기에 무술이 내려져올 수 있었고 청 말기에 이르러 사회가 불안정해지며 폭발적으로 문파가 크게 중흥했다. 일본의 경우도 각 지역을 번이라고 불러 하나의 나라 취급을 하고 툭하면 전쟁을 벌이는 관계로 각 번마다 검술이나 창술 등의 무술이 성행할 수 있었고 도쿠가와 막부 이후에도 지역색이 짙어 각 번마다 무술이 내려올 수 있었다.

   그러나 한반도의 국가들과 한민족은 거의 천년을 내려오는 중앙 집권의 역사를 자랑하기에 중국이나 일본과는 무(武)의 개념이 다를 수 밖에 없었다.
일단 중국과 일본의 다양한 무술과 유파들은 분명 '호신'의 성격을 지닌 개인무술들을 발전시켰지만, 한국은 그딴거 없이 무조건 군대 편제에 맞추는 창, 협도, 방패와 칼등의 역할 분배가 아주 명백하게 갈리는 제식무술의 성격으로 발시켰기 때문.
실제로도 첩종 행사를 보면, 명나라에서 편곤이나 낭선등의 무기와 무술들을 수입하기 이전의 진법을 볼 수 있는데 방패와 창, 협도가 전부이다.

   물론 여말선초부터 사용해왔던 뼈대있는(........) 편제인 만큼 이 3가지로도 훈련이 잘 되었으면 왜구와 어느정도 백병전을 해 봤겠지만, 문제는 조선이 훈련과 준비가 너무나 덜 되어있던 것이다.
그러니까 핑계를 대자면, 진법이나 무기의 문제였다기 보다는 왜구들은 노련함과 훈련양, 실전 경험의 차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오랜 평화동안 전쟁 노하우들이 소실되어 굳이 효과를 내지 못한 옛 전술보다는 급하게 후딱후딱 명나라에서 큰 효과를 본 노하우가 확실한 무기와 기예를 수입하게 된 것.
그러나 기껏 수입한 곤방같은 무술도 편제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저 창술을 익히기 전에 봉에 대한 이해도를 높히기 위한 훈련용 무술로 사용되었다.
결국 봉술은 진법에 어울리기 힘든 개인용, 호신용 무술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한국의 무기의 종류가 일본이나 중국 처럼 다양하지는 않다는 아쉬운 점이 있지만, 반대로 협도, 기창, 팽배(방패와 칼), 검술 등의 족보가 기원이 흐지부지 사라진 수많은 중국의 무술들 보다는 확실하며, 진법을 이용한 단체전에서 큰 힘을 발휘하는 소수 정예로 구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기창은 기원이 조선 전기의 갑을창법, 협도는 조선 전기의 장검, 검술본국검, 방패술은 조선 전기의 팽배수에서 비롯 되었다.
확실히 중화의 무술들과는 뿌리가 다르다는 점이 있다. 다만, 그렇게 따지면 고려와 삼국시대에는 중국과의 무술 교류가 없었던 것이 아니기 때문에, 뿌리가 완전히 다른 남남이라기 보다는 서로 교류를 통해 비슷비슷하게 발전한 형재뻘이나 친구 정도로 보는게 타당하다.

   그나마 고려 시대에는 불안한 국가 정세로 인해서 각 지역마다 수박(手搏)[6]이 성행하였으나 조선 시대에 들어서며 거의 완벽에 가까운 중앙 집권 체제가 갖추어지고 치안이 안정되면서 그런 수박은 놀이, 즉 스포츠의 형태로 탈바꿈하게 된다. 조선 초에도 충청과 전라 양도의 백성들이 명절에 모여 수박을 즐겼다는 기록도 나올 정도다.

   이에 대해서 이게 무슨 우리 나라 무술은 다른 나라 무술에 비해 약해빠진 놀이라고 인식하는 경우가 있는데, 원래 맨손 무술은 스포츠로 일반에 퍼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고대 레슬링이나 복싱, 판크라티온 등도 그렇고 전 세계적으로 씨름 같은 것들은 어느 곳이던지 있었다. 무술의 강함과 스포츠인 것과 크게 관계가 없다. 오히려 스포츠화 된 무술이 그 저변이 넓어져서 더 강력해질 개연성이 있다. 고대 판크라티온이나 현대 MMA 등은 스포츠지만 돈이 되고 사람이 모이니 그 어떤 무술보다도 실전적이다.

   혹자는 가전 무술이나 산중 일인전승, 불문 전승으로 이어지는 무술이 있었다고 하는데, 어떤 이들은 일제 시대 탄압을 받아서 사라졌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런 주장들은 하나같이 근거를 내놓지 못한다는 공통점이 많다. 사실 일제 시대 탄압을 받은 무술이 없는 것은 아니다. 태껸이라고… 하지만 태껸은 하던 사람이 있고, 목격한 사람이 있는 근거가 있는 무술이다.

   그렇다보니 한국의 자칭 전통 무술가들은 절반 정도는 수상한 사이비 무술을 하는 사람이거나, 반은 실제 택견 같은 전통 무술. 나머지는 무예도보통지와 같은 군용 무술서를 연구 복원하고 있다. 사실 사이비 무술이든 아니든간에 한국 토종 무술을 한다면 무예도보통지를 거쳐가지 않기가 힘이 든다. 한국에서 이것 이상으로 확고하게 전통의 근거가 있는 무술은 없기 때문이다.

   정리를 하자면 일본 중국의 무술은 호신도 되고 이것 저곳에 써먹을 수 있는 개인용 무술이 발달 했다면, 한국은 닥치고 다같이 으쌰으쌰하는 단체용 소수의 제식 무술이 발달했으며, 민간 무술은 기껏 해봤자 수박이나 쇠도리깨로 마구 후리기(........) 정도로 발달되어 왔다고 보면 된다.

실제로도 중국의 무술들을 보면 무기류들이 매우 다양하지만, 군 편제에 채택 된 것은 찾아보기 힘들다.

물론 무예도보통지만으로는 확실한 정통성을 확보할 수는 없기 때문에, 주제의 특성상 민족주의에 호소하게 된다. 구체적으로 한국무예원환단고기[7], 경당대학 운동권, 검도화랑도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거나, 정통성의 근거로 내세우고 있다.

4. 현대의 무예도보통지[편집]

   아쉽지만 한국은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무술의 전통이 희미한 나라다. 조선 대부터 문치를 매우 중요시했고, 그 이전의 고려 시대나 삼국 시대는 조선보다 전쟁이 잦았고 기록상 당나라 등 중국에 못지 않은 병장기와 무술 체계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은 가능하지만,[8] 오랜 평화기로 단절되다시피 하고 남아있는 것은 유물 몇점만 나와도 보물 취급될 지경이다.[9] 이런 상황이다 보니 얼마 안되는 사료라도 뒤져서 연구를 해야 하기 때문에 국내 무술인들에게는 그나마 상세하게 남아있는 무예도보통지의 내용에 크게 의지하고 있으며, 덕분에 한국에서 한국적 무술 한다는 단체 치고 무예도보통지를 참고하지 않는 곳이 없다.

무예도보통지의 무술을 연구하는 단체는 꽤 여러 곳이 있다.
  • 민족 도장 경당(24반무예)
    : 민족 운동하던 임동규남민전 사건 연루 등으로 시국 사범으로 복역하던 중에 무예도보통지를 연구하여 만든 단체. 임동규가 원래 무술인이 아니라서 초창기 복원의 무술적 완성도가 좀 의문스러웠다. 특히 어깨에 칼을 지고 있는 자세나 투로가 엉성하여 큰 비판을 받았다. 이후 대학교 동아리 중심(임동규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대체로 사회주의 성향이 강하다.)으로 퍼져나갔으며 연구회를 통해서 꾸준히 개선되고 있는 듯 하다. 특기할 만한 점으로 경당의 목검 길이는 130cm 정도로 상당히 길다. 무예도보통지에서 요도 규격을 4척 3촌으로 적고 있는데, 주척으로 재면 90cm 정도의 좀 짧은 물건. 경당의 목검은 쌍수도를 할 때나 어울릴텐데? 이에 대해서 당시 성인 남성의 평균 체격을 고려하여 현대인의 체격에 맞게 검의 길이를 늘렸다고 한다.[11][12] 어쨌든 목검만 보면 경당은 티가 확실히 난다. 그리고 지역에 따라 중시하는 분야가 다른 것도 특징. 현재의 경당은 (사)24반무예경당협회를 비롯해 몇 개의 단체가 독립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그 중 (사)24반무예경당협회 - 총재 : 임동규, 회장 : 김성하 - 가 가장 큰 조직으로 여전히 전국적으로 임동규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한 때 많이 사용했던 130cm짜리 목검은 지금은 사용하고 있지 않으며 일반적으로 시중에서 판매하는 목검으로 수련하고 있다. 더불어 경기도 화성시에 위치한 한국전통마상무예학교를 중심으로 마상무예를 복원, 훈련하고 있으며 여러 시범이나 지역 축제 등에서 실연하고 있다. 1989년 창립된 경당은 2014년 창립 25주년을 맞아 제주도에서 기념 행사를 개최하였다.
  • 대한검도회
    : 세계의 IKF(International Kendo Federation) 산하 검도 단체들은 모두가 일본이 종주국임을 인정하고 있는데, 한국의 대한검도회만은 검도가 한국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기묘한 단체다.[13] 심지어 검도라는 단어도 본래 명칭인 켄도(Kendo)가 아니라 한국식인 검도(Kumdo. 일본이나 서양에서는 저 단어를 쿰도라고 읽는다) 라는 표기법을 쓰고 있다. 검도는 명백한 일본 무술이지만, 일제 치하에서 검도를 배워 대한 검사회를 거쳐 대한검도회로 이어오고 있는 검도계의 높으신 분들께서는 검도가 일본 무술이라고 공식적으로 인정하기를 껄끄러워한다. 그래서 검도에서 왜색을 없애고 한국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무수한 삽질을 하고 있다. 하카마에서 요판을 떼거나, 시작 시에 하는 준거를 없애며, 시합시 홍백기가 아니라 청백기를 써서 파벌 싸움을 벌이기도 한다. 무예도보통지를 복원한 검술을 대한검도회 커리큘럼 안에 포함시키는 것도 이런 작업의 일환. 조선 세법(예도)본국 검법 같은 것은 대한검도회에서도 하고 있으며 별도의 단을 딸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검도하러 온 사람들은 조선 세법 하러 온 것이 아니라 죽도 스포츠인 켄도를 하러 온 것이므로 그냥 하지를 말던가 거합이나 추진해줬으면 하는 이야기도 있지만, 대한검도회에서는 조선 세법이 거합도의 원류라는 해석 하에 거합도도 한국이 원조라는 논리에 따라 대한검도회의 커리큘럼에 넣으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이 주장도 반대 세력에 의해 대립하고 있음.[14]. 실제 관련 책자도 서점에서 판매중이고 쉽게 구입 가능. 현재 대한검도회의 조선 세법이나 본국 검법은 일본 고류 검술의 검리를 이용한 해석을 따르고 있으나, 일본 검술의 검리를 과감히 무시하여 해석하였다. 결국 정체성도 없고 검리도 맞지 않는 이상한 형태의 검술을 가지고 있는 것이 대한검도회 전통 검법의 현실이다.[15]
  • 해동검도
    : 해동검도가 고구려 사무랑과 아무 관련이 없으며, 창건자인 나한일김정호의 법정 공방을 통해 기술의 상당수가 심검도기천문에 영향받아 만들어낸 창작 무술임은 만천하에 드러나있다. 해동 검도에서 가르치는 검술 상당수는 심검도와 기천에서 따온 것이고, 일부는 둘을 혼합해서 나한일, 김정호가 창작한 것, 그리고 본국 검법은 무예도보통지를 기반으로 나름 재현해낸 것이다. 즉 본국 검법은 초창기부터 수련했었다. 하지만 쌍수 검법이나 해동 검법 같은 해동 검도 커리큘럼 내의 나머지 검술들은 무예도보통지가 아니라 심검도나 창작검술이다.[16] 해동검도 검술 중에 예도 검법이라는게 있어서 이것이 무예도보통지의 예도(조선 세법)이 아닌가 착각할 수도 있는데, 해동의 예도 검법 1번 ~ 9번은 나한일과 김정호가 창작한 검술이다. 해동 검도는 사범급 연수를 짧고 빠르게 해줘서 도장을 쉽게 세울 수 있게 하는 것으로 빠른 시간 내에 세력을 끌어모았는데, 해동 검도 브랜드가 한창 인기를 끌던 시기에 다른 무술 도장을 하던 사람들이 짧은 연수를 받고 간판만 갈아치우는 일이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무예도보통지를 연구하던 사람들도 해동 검도에도 흘러들어간 듯 최근에는 무예도보통지의 조선 세법도 하고 있다https://www.youtube.com/watch?v=dkg7i9b_Fy0. 날조한 전통이 법정 공방으로 드러나버렸으니 그것을 보충하기 위해 진짜 전통 검술인 무예도보통지의 연구를 본격적으로 하게 된 셈. 하지만 도장이 세워진 시기나 해동 검도 협회마다 커리큘럼이 제각각이기에, 모든 해동 검도 단체가 무예도보통지를 연구하지는 않는 듯 하다.
  • 한민족전통마상무예격구협회
    : 구 충혼당. 무예도보통지의 마상 무예만을 복원하여 수련, 보급하는 단체. 1994년 김영섭에 의해 강원도 속초시에 설립되었다. 이 단체 주도로 세계기사(騎射)연맹(World Horseback Archery Federation, WHAF)라는 국제 단체도 설립했다. WHAF는 2004년부터 세계 무술 연맹(World Martial Arts Union·WoMAU)라는 단체와 공동으로 세계 기사 선수권 대회(World Horseback Archery Championship)를 해마다 개최하고 있으며 각국에서 활동하는 기사 수련자들이 대거 참가한다. "마상 무예"란 단어를 최초로 사용한 무술 단체이며, 이에 대한 지적 재산권 논쟁으로 김영섭은 무예24기 보존회의 최형국과 한국 전통 마상 무예 학교 김광식[17]을 저작권법 위반 혐의로 고소하여 법정 공방까지 간 적이 있었다. 역사의 산물을 개인의 재산으로 생각하는 아이러니한 맨탈의 소유자. 결과는 저작권법 위반 혐의 없음으로 판결. 이에 김영섭은 항고, 결국 고등법원까지 갔으나 2013년 4월 19일자로 항고 각하 처분 되었다. 참고로, 마상 무예라는 단어는 경향 신문(1989년 6월 9일자 13면)에 최초로 등장하였다. 이는 김영섭이 마상 무예를 복원 발표하기 훨씬 전의 일이다.


5. 패러디[편집]

http://whitebase.egloos.com/4667523

   게임으로 재해석 되었다. 포탈건(포탈건捕奪巾), 빠루(발우拔于), 플라즈마 커터(불라주마 고타佛羅朱魔 鼓打)가 등재되있다. 애니, 특촬도 패러디되어 페이트 스테이 나이트(패이투覇二鬪), 가면라이더 빌드(가면 기마사 건립 假面 騎馬士 建立)가 쓰여졌다.최종보스는 악천인 예불토(曀甶讨)라고 한다.

네이버 웹툰 호랭총각에서 조선무예도보통지란 이름으로 나오는데 그 내용이 건 카타, 제다이 이기어검술, 팩폭 등 이다.#


6. 기타[편집]

   위의 개요 항목에서 2017년 10월 30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는데 등록지가 북한이다. 조선군의 교육용 교본이었던 만큼 사본들이 역사적 사료치고는 온전하게 많이 남아있어서 대한민국에도 여러권 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에서 등록한 것이다. 문화재청의 해명에 따르면 그 이유가 가관이다. "소장 기관들이 등재 신청을 안해서"라더라(...).


7. 관련 문서[편집]


[1] 부대 편성을 사(司) → 초(哨) → 대(隊) → 오(伍)로 하여 상하 명령체계와 편성을 명확히 하는 것.[2] 병사를 포수, 사수, 살수의 삼수병으로 분류해서 멀리서 포수로 쏘고, 접근해오면 사수로 쏘고, 단병접전에서 살수가 칼들고 싸우는 형식.[3] 이 사람의 5대조가 그 유명한 한명회다.[4] 왜검을 기초로 만든 검술 대련법이다.[5] 흔히들 왜검교전이라고 이야기하나 무예도보통지에는 '교전' 이라고만 되어 있다.[6] 특정 무술이라기보다 무술의 총칭.[7] 무예도보통지주해의 주석을 참고하기 바람.[8] 가령 삼국사기에 나오는 신라의 장창당, 천보노나 고려 시대의 수박, 격구 등.[9] 물론 이 정도의 고대 유물 자체가 굳이 한국 뿐만 아니라 대부분 귀한 대접 받는것이 사실이다. 물론 한국은, 특히 무기 쪽은 심하게 안 나오는 편이다.[10] 두 단체를 합쳐 편의상 '십팔기협회'라고 하기도 한다.[11] 하지만 이것은 척도를 잘못 잰 오류일 뿐이라는 것이 연구 결과 통설이 되어 있다. 실제로 조선 시대에서 오늘날 전하는 환도들은 모두 길이가 짧은 것이고 이것은 주척으로 재는 것이 타당하다. 역사는 상상이 아니라 유물로 말한다.[12] 예도의 근원인 무비지의 조선 세법을 보면 환도가 아닌 거의 쌍수도급 길이의 장검으로 운용을 한다. 때문에 130cm 도검으로도 얼마든지 예도는 물론이고 제독검, 본국검, 왜검의 모든 동작이 원활하게 구현 가능하다. 오히려 100cm짜리 도검으로는 쌍수도 구사 때 검의 길이가 너무 짧아 자세에 빈틈이 생긴다.[13] 비슷한 사정의 유도계는 유도가 일본의 무술임을 정확히 명시한다.[14] 대표적인 예가 이종림 대한검도회 부회장의 거합도식 조선 세법과 김재일 경기도 검도회 회장의 조선세법[15] 한 때 일부 전통 무술 단체들은 이러한 대한검도회의 정체성을 비난하며 "국제 켄도 연맹 한국 지부"라는 단어를 사용했었다.[16] 그러나 쌍수 검법 중 12번은 무예도보통지의 쌍수도를 복원한 것.[17] 전 무예24기 보존회 시범단장.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이 저작물은 CC BY-NC-SA 2.0 KR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단, 라이선스가 명시된 일부 문서 및 삽화 제외)
기여하신 문서의 저작권은 각 기여자에게 있으며, 각 기여자는 기여하신 부분의 저작권을 갖습니다.

나무위키는 백과사전이 아니며 검증되지 않았거나, 편향적이거나, 잘못된 서술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무위키는 위키위키입니다. 여러분이 직접 문서를 고칠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의 의견을 원할 경우 직접 토론을 발제할 수 있습니다.



무예도보통지 - 나무위키

namu.wiki/w/무예도보통지    나무위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