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 일본인이 영어로 쓴 동양 차 이야기(1)~(7) 外 / 반취다도교실

2019. 6. 9. 05:25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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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완(茶碗)


다도는 심미주의적(審美主義的) 종교

    차는 본래 약으로 사용되었는데 나중에 취미 음료가 되었습니다. 중국에서는 8세기에 이미 차를 마시는 것이 일종의 고상한 유희가 되었고 시가(詩歌)와 같은 영역에까지 높여졌습니다. 이것이 일본에서는 15세기에 이르러 심미주의적(審美主義的) 종교라 할 수 있는 다도가 되었습니다.

   다도는 일상생활의 소박한 살림살이 가운데 있는 아름다움을 발견하여 칭찬하고 떠받드는 것을 기조로 한 예법으로, 나와 남과의 순수한 조화, 자비로운 마음 가운데 생기는 신비스러운 힘, 그리고 낭만주의적 사회질서 관을 논하며 가르치는 것입니다.
또 다도는 「불완전(不完全)」을 존중하는데, 그 이유는 다도의 본질이 「인생이란 마음대로 되지 않는 상황 하에서 가능한 한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는 마음 착한 시도」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다도의 철학은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심미주의는 아닙니다. 윤리와 종교가 융합하여 인간과 자연과의 총체를 어떻게 볼 것인가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다도는 시끄러울 정도로 청결을 주장하기 때문에 위생학이라 할 수도 있으며, 복잡하고 비싼 것보다 오히려 간소한 것 가운데 아늑하고 포근한 것이 있음을 가르치므로 경제학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또 우주에 대하여 인간의 모습을 정의하기 때문에 정신기하학이라 말하기도 합니다.
다도는 주객 간 신분의 상하를 불문하며, 모든 것을 고상하고 멋진 도(道)의 귀족으로 예우하기 때문에 동양적 민주주의의 진수를 표현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일본은 오랜 동안 쇄국시대를 살아왔기에, 그만큼 깊게 스스로의 내면을 응시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결과적으로 다도 발전에 큰 기여가 되었습니다.
일본의 문화는 주거, 풍습, 의류, 요리, 도기, 칠기, 회화, 심지어 문학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도의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일본문화를 연구하려고 한다면 「다도의 존재」를 허술히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다도는 고아한 귀부인의 안방에서부터 미천한 천민의 단칸방에 이르기까지 이미 오래 전에 일반화되었기 때문입니다. 다도를 통하여 백성은 꽃을 가꿀 줄 알게 되었고, 최하층의 근로자라 할지라도 산수를 좋아하거나 존중할 줄 알게 되었습니다.
일본 사회에선 서로의 신상에 일어나는 희비극의 흥미진진함을 모르는 사람을 일컬어
“저 사람은 다기(茶氣)가 없어.”
라고 말합니다. 반대로 감정이 흐르는 대로 들떠 떠들며 놀기 좋아하는 사람을 일컬어서는
“저 사람은 다기(茶氣)가 너무 심해.”
라고 말합니다. 문외한의 눈에는 별 것 아닌 것 같은데 왜 저렇게 시끄러울까? 하며 놀랠 수도 있겠고, 차 한 잔 가지고 웬 소동이냐고 얘기할 수도 있겠지만 말입니다.

   삶의 즐거움을 담는 다완(茶碗)은 그 자체만으로도 미세하게 여겨집니다. 그것이 눈물로 넘실거리는 것도 순간, 무궁함을 추구하는 갈망 앞에서 초록빛 차는 차라리 무의미하게 마셔질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다완에 든 한 잔의 차를 그저 소동이라고만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인류는 계속하여 나쁜 일을 많이 해왔습니다. 주신(酒神) 박카스 앞에 예배하기 위해 서슴없이 짐승을 산 채로 바쳤고, 군신(軍神) 마르스의 피에 얼룩진 모습도 아름답게 이상화하였습니다.
그랬을진대 동백과(冬柏科)의 화형, 저 유명한 춘희(椿姬)라고 할 수 있는 차(茶)에 몸을 바쳐, 그 제단으로부터 우러나는 따스한 공감의 흐름에 취해 보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요.

   이 길로 인도된 사람은 상아색(象牙色) 자기에 넘실거리는 호박색(琥珀色) 액체에서 공자(孔子)의 현묘(玄妙)한 침묵, 노자(老子)의 신랄(辛辣)하고 떫은 맛[澁味], 그리고 석가모니의 천상(天上)의 방향(芳香)을 음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위대하다고 느끼고 있는 자기가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존재인가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타인의 가슴속에 숨겨져 있는 아름다움을 간파할 수가 없습니다. 같은 논리에서 자기만족에 빠져있는 서양인의 눈에는 다회(茶會)가, 동양의 수없이 많은 기교와 치기(稚氣)를 나타내는 「또 하나의 행사」 정도로 생각될 수 있습니다.


다도는 삶의 술(術)

   일본이 조용하게 평화의 여러 가지 예술(藝術)에 몰두하고 있을 때 서양인은 일본을 야만국으로 보고 있었는데, 그 일본이 만주의 전장에서 대량학살을 시작하니 문명국이라 고쳐 불렀습니다.
일본의 무사도(武士道)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설 중
“그것은 죽음의 술(術)로 무사들의 자기희생을 고무해 온 것.”
이라고 이해하지만, 다도에 대하여서는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일본이 문명국으로 불리게 된 것이 잔인한 전쟁을 뒷받침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라면 그대로 야만인에 머물러 있는 것이 한결 좋았을 것입니다. 서양이 동양을 자극하지 않았다면, 일본의 예술과 이상이 바람직스러운 경의를 받을 때까지 기꺼이 기다릴 수 있었던 일이기 때문입니다.  
대체 어느 세월에 서양은 동양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아니 이해하려는 마음가짐이나 우러날 까요….
근거도 없이 아시아인을 두고 밑도 끝도 없는 기묘한 상상을 이야기하는 서양인을 대하다 보면 소름이 돋는 경우도 생깁니다.

   동양인들이 쥐[鼠]와 유충(油虫)을 먹고 살며, 또 연향(蓮香)을 맡으면서 살고 있다고도 합니다. 이는 비천한 육욕(肉慾)의 무능력한 광신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인도의 심령성(心靈性)은 무지(無智)로, 중국의 근엄성(謹嚴性)은 우둔으로, 일본의 애국심은 숙명적으로 몰락해 버려서 결국 동양인의 신경계는 무감각해지고 고통이나 상처를 느끼는 것마저 둔화되었다는 등의 이야기를 합니다.
서양인이여, 아시아인을 대상으로 마음껏 즐겨도 좋습니다. 그러나 어느 땐가는 아시아 측에서 되갚을 날이 올 것입니다. 그때가 되어 우리가 서양인에 대해 상상했던 것이라든지 기록해 둔 것을 낱낱이 읽어 본다면 훨씬 더 재미나는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우리들 마음은 유현(幽玄)한 것을 아름답다고 느끼며 신비(神秘)한 것에는 스스로 머리를 숙이지만, 노골적으로 속이거나 기만하는 것에는 마음속 깊이 분노를 느낍니다.
서양의 미덕이란 너무도 고상하게 갈고 닦기 때문에, 부러운 마음조차 가질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 갖가지 죄악까지도 그림처럼 아름답게 꾸며져서 힐난할 엄두를 낼 수가 없습니다.

   동양의 옛날 문인들 ― 지식이 풍부한 현인(賢人)들 ― 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서양인은 어딘가 옷 밑에 털이 부숭부숭한 꼬리를 숨기고 있으며, 막 태어난 갓난애를 잘게 도막내어 식용으로 한다.”
또 “서양인은 절대로 실행 못할 것을 말로만 떠버리는 인종이다.”    그래서 우리는 서양인을 세계에서 제일 쓸모없는 종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오해는 차츰 없어져 가고 있습니다. 동서양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필요에 의해 구주 여러 나라의 언어를 배워 말할 수 있게 되었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근대교육을 받기 위해 서양의 대학에 유학을 갔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겐 아직 서양문화를 깊이 관찰할 통찰력이 없을지도 모릅니다만 어찌되었든 알고 싶고 배워야겠다고 생각한 결과입니다. 일본인 중에는 이미 서양의 습관이나 에티켓을 지나치게 흉내 낸 나머지 빳빳한 칼라와 실크모자가 서양문화의 성과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생겨났습니다. 슬퍼해야 할 현상이며, 동시에 일본이 얼마나 엎드려 땅에 머리를 대며, 서양에 접근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예가 아닐 수 없습니다.

   불행스럽게도 서양은 동양을 이해하려는 성의를 전연 보이지 않습니다. 동양에 온 기독교 선교사들은 하나 같이 주려고만 하지 동양의 것을 받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귀를 기울이는 일이 없는 만큼 그들에게 있는 지식이란 지나가는 여행자의 이야기 같은 것이거나 우리의 방대한 문학에서 일부를 조잡하게 번역한 정도입니다.
물론 「라프카디오 한」이나 『인도생활의 구조(構造)』의 저자처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도 있기는 합니다만, 그러나 이런 분들이 아무리 글로 펼친다 해도 동양의 신비는 너무 깊어서 동양인이 갖고 있는 느낌 그대로를 감지하여 명시하기란 불가능합니다.

   이런 점에서는 나 역시 스스로 다도에 관한 소양이 없음을 고백하는 결과가 될 수도 있습니다. 다도의 진수인 「고아(高雅)」에 대하여 간추려 설명을 해야 하는데 얼마나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물론 나 자신이 「고아(高雅)한 다인」이 되려는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신구 양 세계간의 오해 때문에 여러 가지 불행이 야기되고 있으므로 그 오해를 풀고, 나아가 서로를 이해하는데 일조하려는 마음뿐입니다. 20세기 초, 만일 러시아가 겸허한 마음으로 일본을 이해하려고 했었다면 저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참상은 겪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요?

   동양을 경시하여 함부로 하면 상상하지 못한 무서운 결과가 인류에게 닥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유럽 제국주의자들은 동양인이 백인을 주시하는 것을 보면서도 「황화(黃禍」의 두려움에는 태연합니다. 아시아인 역시 「백화(白禍)」의 무서움을 느낄 날이 곧 올 것이란 점에 무관심합니다.
동양인을 두고 「다기(茶氣)가 너무 많다」고 비웃을지 모르지만 우리 쪽에서 보면 「서양인이란 태어날 때부터 다기가 너무 없다.」고 생각될 때가 많습니다.
이제라도 동서양 간에 서로 비꼬는 것은 그만 두고 상호 이익이 되는 상생 보완관계를 만들어 나가고자 진지한 마음을 기울여야 합니다.

   동양과 서양은 서로 다른 과정을 밟으며 발전하여 왔습니다. 그렇지만 한 쪽이 다른 한 쪽의 좋은 점을 배워서 나쁠 것은 없습니다. 서양은 발전과 확장을 위하여 평온한 것을 희생하여 왔지만, 동양은 침략에 대하여 힘 보다는 조화라는 것으로 대응했습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동양이 서양을 이기고 있다.”
이렇게 말하면 서양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우스운 이야기 같지만 동서의 인간성은 지금까지는 「다완(茶碗) 안에서」 잘 조화하고 있습니다.


아시아의 유일한 예법인 다례

    다례(茶禮)는 세계적으로 인식되어 있는 아시아인 공통의 예법입니다. 백인은 동양의 종교나 도덕은 조롱하여 왔지만, 다례(茶禮)만은 조용히 받아들였습니다.
쟁반과 잔 받침이 닿는 우아한 소리, 대접하는 부인의 옷이 부드럽게 스치는 소리, 설탕의 가부를 물을 때의 일정한 말씨 등을 보면 차(茶)를 숭배하는 예법이 확립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러나는 차(茶) 맛에 불만을 표하지 않고 운명적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다분히 동양적입니다. 작은 일 같지만 손님이 되어 차를 대접받을 때의 철학적 체관(諦觀)까지 동양정신이 엄연히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럽의 문헌상에 보이는 차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아라비아 여행자의 보고로, 그 내용은 「879년 이후 중국 광동(廣東)의 주요 재원은 소금과 차의 세금이다.」라고 한 것이며 마르코 폴로의 기록에는 중국의 어느 재무대신이 차세를 너무 올려서 1285년 면직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유럽이 극동을 더 잘 알게 된 것은 대항해시대(大航海時代)입니다. 16세기 말에 네덜란드인「동양인은 푸른 활엽관목(闊葉灌木)의 잎으로 상쾌한 음료수를 만든다.」고 차(茶)에 관한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젬바디스타 람지오(1559), L알메이더(1576), 마페이(1588), 달래이라(1610) 등의 여행자도 차(茶)에 대해 비슷한 언급을 했습니다.
서양에는 1610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선박에 의하여 처음 차(茶)가 수입되었습니다. 1636년에는 불란서에 전해졌고, 1638년에는 러시아로, 영국에는 1650년 전해졌습니다. 유럽의 상인들은 차를 선전하면서, 지나인(支那人)은 이를 「자」라 부르고, 타국민은 이를「티」,「테이-」라 부르는데 의학계 저명인사들이 이구동성 추천하는 음료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좋은 일에는 반대가 따르기 마련인지, 차를 애호하는 인구가 늘어남에도 불구하고 반격을 만나게 됩니다. 헨리 사비유(1678) 같은 이단자는 끽다(喫茶)를 불결한 습관이라며 물리쳤고, 쥬나스 한웨이『다론(茶論)』 (1756년)에서 「차를 상용하면 남자는 신장과 용모가 좋지 않게 되고, 여자는 여자다운 아름다움이 없어진다.」고 하였습니다.
초기에는 차가 고가품이어서(1온스에 15센트 정도) 일반인들은 손쉽게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왕실의 「환대향응용(歡待響應用)」이거나 왕후귀족의 예물용품이었는데, 급속도로 일반화되면서 서민 사회까지 차 마시는 습관이 번지더니 18세기에 접어들어서는 런던 거리에 다점(茶店)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후에 커피점이 된 곳도 시작은 차를 마시는 곳이었으며, 여기에 아디손이나 스티루 같은 문인들이 모여 차를 마시면서 환담했다고 합니다.

   동양에서 건너 온 이 야릇한 기호음료는 오래지 않아 그들 세계의 생활필수품이 되었고, 과세대상이 되었습니다.
차(茶)가 세(稅)와 관련되면서 근대 역사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는 미국 독립전쟁을 실례로 들 수 있습니다. 식민시대의 미국은 영국으로부터 여러 가지 압박에 잘 견디어 왔지만, 차에 무거운 세금을 매긴 것에는 참지 못하고 분노, 일단의 시민들이 보스톤항에 쌓아둔 차 상자를 바다에 집어던짐으로써 미국 독립전쟁(獨立戰爭)은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매혹의 나무 전즙(前汁)

   차 맛에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미묘한 매력이 있어서 한 번 맛들이게 되면 그만두기가 어렵습니다. 심지어는 하늘에서 내리는 감로(甘露) 인양 생각하게 됩니다.
서양의 유머리스트들은 자기 사색의 방향(芳香)에다 차향(茶香)을 더하여 음미하였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귀하게 여기는 포도주에도, 자의식 과잉의 커피에도, 도도한 코코아에도 없었던 일입니다.
1711년의 스펙테이터 지(紙)는 이런 선전 문구를 1면에 싣고 있습니다.
「매일 아침 차와 버터 빵으로 한 시간의 식사 시간을 갖는 훌륭한 가정 모두가, 차를 준비할 때 우리 신문도 거르지 않고 불러주시기 바랍니다.」

   또 샤무엘 존슨 같은 사람은 이런 자화상을 그렸습니다.
나는 덜렁덜렁하며 수치를 모르는 그저 차 마시기나 좋아하는 사람이다. 20년간 저 매혹의 나무 전즙 만으로 식사를 적게 하고, 차로 저녁을 흥겹게 함으로서 아침을 환희로 맞고 있다.」
자타가 인정하는 다인(茶人) 찰스 램「남모르게 선행을 하여 그것이 우연히 알려지는 것이야말로 내가 아는 최대의 흔쾌사(欣快事)다.」라는 말로 다도의 진수를 전하고 있습니다.
다도란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환희를 위해 그 아름다움을 숨기는 기술이고, 두드러지게 나타내지 않으면서 다소곳이 훈훈한 향기를 풍기게 하는 기술이며, 또 자신은 조용히 있으면서 마음이 원하는 데로 웃음 짓게 하는 심오한 가짐이며, 참다운 기지(機知), 깨달음이 있는 미소인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삿가레세익스피어 같은 유머리스트는 진정한 다인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폐퇴기(廢頹期) ― 어느 시대고 폐퇴기라 부를 수 있지만 ― 의 시인(詩人)들도 물질주의에 대한 반항으로써 다도를 택하는 경향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에 있어서는 기성의 미를 물리칠 수 있는 「불완전 숭배」를 마음에 떠오르게 하여 관찰함으로써, 동서가 만나 서로 위로하는 수단으로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

   도교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세상이 열리는 큰 시작(始作)에 마음(心)과 물건(物)이 필사적인 투쟁을 했습니다. 하늘의 태양인 황제는 어둠과 땅의 사귀(邪鬼)인 축융(祝融)에게 승리(勝利)하였습니다. 그러자 거인 축융은 죽음을 고민한 나머지 천정에 머리를 찧어 창천 하늘 비취의 천개를 산산이 때려 부쉈습니다. 별은 잠자리를 잃고 달은 황량하고 적막한 밤의 찢어진 틈새를 목표 없이 헤매었습니다. 황제는 사방으로 하늘을 수선할 사람을 찾았습니다. 동방의 바다에서 여와(女媧)라는, 뿔을 이고 용 꼬리를 한 여제(女帝)가 불꽃(炎) 갑옷을 입고 나타났습니다. 여와는 마법의 큰 가마솥에 오색 무지개를 녹여, 그것으로 중국의 하늘을 수리했습니다.

   이 여와가 창천을 수리할 때 두 군데 막는 것을 잊었는데, 거기서 사랑의 이원론(二元論)이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두 개의 혼이 공간에 떨어져 헤매기 때문에 그것이 합일하여 우주를 완성할 때까지 정지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희망과 평화로 이루어지는 자신의 하늘을 새롭게 쌓아 만들지 않으면 아니 됩니다. 현대에 있어서 인간성의 하늘은 부와 권력을 획득하려는 거대한 투쟁에 부딪혀 산산조각으로 깨어지고 흩어집니다. 세계는 이기(利己)와 속악(俗惡)의 어두움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지식은 병이 들어 자기에게 이득이 있어야만 덕을 베풉니다.


동양과 서양은 역류하는 바다에서 비명을 울리며 서로 붙들고 딩구는 두 마리 용처럼, 상실한 인간성의 보옥(寶玉)을 다시 찾으려고 하지만 효과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우리에겐 지금 방대한 황폐를 수선할 여와가 필요합니다. 동․서양이 모두 절대자의 재림을 기다립니다. 그 기다리는 동안 차라도 마시고 있는 것은 어떨까요. 햇빛은 죽림을 비추고, 흐르는 냇물은 환희의 거품을 일으키고, 들끓는 차 솥에선 솔바람 소리가 들려옵니다.
그런 것에 마음이 머물면 이제 부질없는 것을 꿈꾸며 이것저것 아름다운 세계에 생각의 나래를 펴 보일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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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파(流波)


차문화 발전의 3단계

    차는 예술품입니다. 그림에 좋고 나쁨이 있듯이 차에도 좋은 차와 나쁜 차가 있습니다. 하지만 지시안이나 셋숀[雪村]이 작품을 창작하는 데 아무런 규칙이 없는 것처럼 완벽한 점다(點茶)를 하는 데도 무언가 각별한 법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차엽(茶葉)의 제법(製法)에는 그것 나름대로의 개성이 있고, 물과 열(熱)에 대한 특유의 친화성이 있고, 그 위에 대대로 내려오면서 추억담이 곁들여져 독특한 비방이 이루어지는 법입니다.
차가 가지고 있는 고아(高雅)한 특질을 끄집어내어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만이 명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정성과 진실한 아름다움이 없어서는 안 되는데, 예술과 인생에 있어서의 단순한 근본 원칙이랄 수 있는 이 아름다움을 우리들은 자칫하면 무시하기 쉽고 그래서 혼이 날 때가 있습니다. 여기 대하여 명나라 시인 이죽신(李竹嬾)은 이렇게 한탄했습니다.
   “세상에 세 가지 슬퍼할 일이 있으니, 하나는 그릇된 교육으로 훌륭한 청년을 쓸모없게 만드는 것이요, 둘은 저속한 찬사로 훌륭한 그림의 격을 도리어 낮추어 버리는 일, 셋은 서투른 점다(點茶)로 좋은 차를 버리는 것이다.”
예술과 마찬가지로 차도 시대에 따라 변천이 있었습니다.

   차의 진화는 크게 단차(團茶)․말차(抹茶)․전차(煎茶)의 3단계로 나눌 수 있는데 현대는 세 번째인 전차 단계에 속해 있습니다.
진화 단계에 따라 음다법(飮茶法)도 변화하면서 그 시대정신을 여실히 나타내고 있습니다. 우리들 생활이란 결국 길들여진 속마음의 표현입니다. 무의식 가운데 드러내는 행동 역시 속마음의 끊임없는 발로입니다.
일상의 음다사(飮茶事)에, 철학이나 문학 속에서 반짝이는 섬광같이 그 민족의 이상을 알 수 있는 실마리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인기 있는 포도주의 이름이 변함으로 해서 유럽의 서로 다른 시대와 국민의 특질을 명확히 알 수 있듯, 시대가 이상(理想)으로 여긴 차문화의 변천은 동양문화의 다양한 양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달이는 차[團茶]․휘젓는 차〔抹茶〕․우리는 차〔煎茶]는 당대(唐代)․송대(宋代)․명대(明代)의 독자적인 취미를 분명히 구별해주고 있습니다. 상식적인 예술분류상의 용어를 빌면 그것은 차의 고전주의(古典主義)․낭만주의(浪漫主義)․자연주의(自然主義)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차나무는 중국 남부에 서식하는 것으로 먼 옛날부터 중국의 식물학 및 의학에는 잘 알려진 것이었습니다. 옛날 문헌에는 도(茶)․설(蔎)․천(荈)․가(檟)․명(茗) 등의 명칭으로 적혀 있습니다. 피로회복․심기상쾌(心氣爽快)․기력충실(氣力充實)․시력회복(視力回復) 등의 효능 갖고 있는 보배 같이 소중한 것으로, 내복약으로 음용했을 뿐만 아니라 가끔 류마티스 등의 통증에 바르는 외용약으로도 쓰였습니다.
도교에서는 이것을 불로장수의 주성분이라고 하였고, 불교에서는 좀 더 용도를 넓혀 장시간 명상 때 졸음을 물리치는 약으로 썼습니다.

   4, 5세기 경에는 양자강(楊子江) 유역 사람들이 차를 많이 애용하였는데, 현대의 「차(茶)」라는 표의문자는 대체로 이 시대에 정해진 것으로 보입니다. 「차(茶)」는 분명히 「도(荼)」라는 고전어의 변형인데, 남조(南朝) 시인의 작품에 보면 「액체를 이루는 비취의 포말」이라 하여 차를 열광적으로 숭배한 대목들이 있습니다.
당시의 황제는 고관들의 무훈이나 공로에 대한 포상으로 진귀한 제법(製法)의 차를 내렸습니다. 하지만 그 시대 음다법은 대단히 원시적인 것이어서 찻잎을 찌고[蒸] 발(鉢)에 갈아서 단차(團茶)를 만들어 쌀․생강․소금․귤껍질․향료․우유에다 때로 옥파까지 혼입(混入)하여 달였습니다.
이러한 풍습은 현재도 티베트나 몽골의 일부 부족 사이에 남아 있는데, 같은 재료로 변형된 시럽을 만들기도 합니다. 러시아인은 중국인 대상(隊商)에게 차 마시는 법을 배웠는데 그들이 차에 레몬조각을 띄우는 것은 이때 생겨난 습관으로 보입니다.


청자(靑磁)와 차의 관계

   8세기 중엽에 출생한 육우(陸羽)는 우리들이 마시고 있는 차의 최초의 사도(使徒)입니다. 그가 태어난 때는 불교․도교․유교가 상호보완하고 융합하려는 시대였습니다. 이와 같은 빛나는 시대정신이 있었기에 차는 자연 그대로 방치된 상태를 벗어나 참된 이상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범신론적(汎神論的) 상징주의의 영향으로 당시의 사람들은 개개의 존재에서 우주의 축도를 보았습니다. 시인 육우는 다탕(茶湯) 하나에서 만물을 지배하는 조화와 질서를 관취(觀取)하였으며, 유명한 저서 다경(茶經)』으로 다도를 확립하였습니다. 그 공적으로 육우는 성인(聖人)의 반열에 올려져 차의 성인(聖人), 혹은 수호신으로 숭앙받고 있습니다.
육우의 『다경(茶經)』은 모두 3권 10장으로 엮어져 있습니다. 제 1장은 차나무(茶木)의 성질, 제 2장은 다엽(茶葉)을 따는 기구(器具), 제 3장은 다엽(茶葉)의 선별법을 논하고 있는데, 육우의 말을 빌면 최상의 잎 「북방족(北方族)의 가죽신처럼 주름지거나 쭈그러진 것도 있고, 혹이 달린 들소의 가슴처럼 반듯한 것도 있고, 모가 난 것도 있다. 산에서 떠오르는 구름 같기도 하고 둥근 버섯 모양의 것도 있다. 바람이 잔잔히 수면을 스쳐갈 때처럼 잔물결 같은 것도 있다. 비에 씻긴 산뜻한 대지처럼 윤이 나고 부드럽다.」고 했습니다.
제 4장은 24종이나 되는 차 생활도구를 설명하고 있는데, 풍로(風爐)로 시작하여 도구 전부를 담는 차찬장[茶簞笥]으로 종결짓고 있는 것에서 육우의 도교적인 상징주의 경향을 엿볼 수 있습니다.

   차가 중국의 도자기 예술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중국의 자기는 비취의 묘한 색채를 재현시키기 위해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그 결과 당(唐) 시대 남부에서는 청자(靑磁)가, 북부에서는 백자(白磁)가 탄생했습니다.
육우는, 차를 하는 데는 청자가 이상적이라고 여겼습니다. 이는 백자가 차를 복숭아 색으로 보이게 해서 맛을 짙게 한다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당시의 차가 단차(團茶)였기 때문인데, 후일 말차(抹茶)를 즐겼던 송(宋) 시대 다인들은 짙은 쪽빛과 흑갈색(黑褐色)의 중량감 있는 다완(茶碗)을 애호했습니다. 그리고 전차(煎茶)를 즐긴 명(明) 시대 사람들은 순수한 백자를 좋아했습니다.
『다경』 제 5장에 육우는 점다법을 적고 있는데, 그는 소금 이외의 혼합물을 일체 배제했습니다. 이제까지 가끔 논하여졌던 물의 좋고 나쁨과 탕의 끓는 모양에 대하여는, 솟아나는 물[湧水]이 최상이고, 다음이 흐르는 냇물[川水], 그 다음이 우물물[井戶水]이라고 했습니다.
탕의 끓는 모양에도 3단계가 있다고 하였으니, 첫 끓음[沸]은 솥 안에 작은 물고기의 눈[目]같은 물거품[泡]이 송알송알 깔릴 때, 두 번째는 그 포말들이 공모양의 구슬을 이루어 솥 가운데로부터 구슬처럼 연달아 솟아오를 때, 세 번째 단계는 파도치듯 맹렬하게 끓는 것이라 했습니다.

   「단차(團茶)」는 아주 부드러워질 때까지 불에 쪼여 좋은 종이에 말아 비벼서 가루로 만든 다음,  첫 끓음(初沸)에서 소금을 넣고, 두 번째 끓음에서(沸)에서 차를 넣고, 세 번째 끓음(沸)에서 냉수 한 잔을 섞어 차를 정지(靜止)시켜 물의 정기(精氣)를 식힌 다음 차를 다완(茶碗)에 부어 마신다.」고 했습니다.
영주(靈酒)란 바로 이런 차일 것입니다. 엷은 차잎이 맑은 하늘에 뜬 비늘구름처럼, 또는 에메랄드 흐름에 흔들흔들 떠도는 수련(水蓮)처럼 번지는 것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래서 당(唐) 시대 시인 노동(盧仝)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일완(一碗)으로 입술과 목을 축이고
이완(二碗)으로 우수(憂愁)를 쫓고
삼완(三碗)으로 몸속에 남은 것은 문자(文字) 5천권
사완(四碗)으로 현세의 모든 제악(諸惡)이 땀으로 발산되고
오완(五碗)으로 몸과 마음이 맑아지니
육완(六碗)에 이르러 불로(不老)의 세계로 나를 유인하는 구나
찰완(七碗)은 마실 수가 없구나. 우화등선(羽化登仙)의 심경에서 겨드랑이에 이는 청풍(淸風)을 느낄 뿐, 봉래산(蓬萊山)이 어디메냐, 이 청풍 타고 가고 싶구나.

『다경』 종장(終章)에는 세간의 음다법 중 속되고 좋지 않은 점, 차의 명인들의 간단한 전기(傳記), 중국 내의 유명한 다원(茶園), 여러 종류의 다기(茶器)․다도구(茶道具) 삽화(揷繪) 등을 기록했다고 하는데 이 장은 전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다경』이 세상에 처음 나왔을 때 대단히 평판이 좋았음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육우는 당의 8대 대종(代宗: 763~779)과 교분이 두터웠을 뿐 아니라 명성만큼 많은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득도한 사람은 육우의 점다와 제자의 점다를 맛으로서 구별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 관리가 찾아 왔다가 위대한 육우의 차 맛을 몰랐던 까닭으로 유명해졌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송(宋) 시대로 접어들어서는 말차(抹茶)가 유행하면서 그것이 차의 제 2의 유파가 되었는데 이는 차엽을 먼저 작은 돌절구[石臼]에 넣어 곱게 찧고, 거기에 열탕을 붓고, 대[竹]를 가늘게 쪼개어 만든 포립기(泡立器:茶筅)로 휘저어 줍니다.
이 새로운 점다법이 유행하면서 소금은 쓰지 않게 되었습니다. 송나라 사람들의 끽다열(喫茶熱)은 그칠 줄 몰라서 서로 경쟁적으로 진귀하고 새로운 점다법을 만들려고 애썼으므로 정기적으로 차 겨루기 대회를 열어 우열을 가리게까지 되었습니다.
송의 8대 황제 휘종(徽宗;1101~1124)은 정치적으로는 좋은 군주가 되지 못했지만 좋은 예술가이기는 했습니다. 그는 좋은 차를 구하기 위하여 많은 재정을 소모했고, 24권에 달하는 차에 대한 서적을 저술했는데, 여러 가지 차 중에서「백차(白茶)를 가장 진귀한 차라 하였습니다.

   송 시대 차의 이상(理想)은 당 시대에 들어서서 바뀌었으니 그것은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인생관의 차이에서 오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송 시대 사람들은 선조인 당 시대 사람들이 상징화했던 것을 현실에 구현하려고 했습니다. 즉 신유교(新儒敎)에 있어서는 우주의 법칙이 현상계(現象界)에 반영되는 것이 아니고, 현상계 그 자체가 우주의 법칙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영겁(永劫)은 순간이며 열반(涅槃)은 항상 손 안에 있고 불후(不朽)는 영겁(永劫)이 변전(變轉)하는 가운데 있다는 도교적인 이해가 그들 사고에 전적으로 침투하고 있었습니다.

   진실로 긴요한 것은 완성에 이르는 과정이지 완성 그 자체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런 논리를 통하여 인간은 자연과 직면하게 되었으며 「삶의 술(術)」에 새로운 의미가 부여되기 시작했습니다.
다도가 단순한 시적(詩的) 오락이 아니라 자기를 아는 것 ― 자성여해(自性予解) ― 의 수단된 것입니다.

   왕원지(王元之)는 차를 상찬(賞贊)하길, 「진지한 직언처럼 혼(魂)에 깊숙이 스며드는 그 현묘(玄妙)한 씁쓰레한 맛은, 좋은 말을 들은 뒷맛 같다」고 했습니다.
소동파(蘇東坡)차가 갖는 부패(腐敗)를 거부하는 청정무구(淸淨無垢)의 힘을 참된 유덕자(有德者)로 비유했습니다.
불교도들은 도교의 교의(敎義)를 폭넓게 융합한 남방선(南方禪)의 차 방법을 완벽하게 정립시켜 갔습니다. 선승(禪僧)들은 보리달마상(菩提達磨像) 앞에 모여 한 잔의 차를 성찬처럼 경건한 자세로 나누어 마셨습니다. 이러한 선(禪) 의식이 발전하여 15세기 일본의 다도로 확립되었던 것입니다.  


차 중의 차는 말차

    불행하게도 13세기 들어 몽골민족인 원(元)의 세력이 커졌습니다. 급기야 중국대륙을 지배하게 된 원(元)의 폭정은 찬란했던 송(宋) 문화를 송두리채 파괴시켰습니다.
후에 명(明)이 들어서서 국가 재흥(再興)을 시도하였지만 이도 오래 가지 못하고 내분에 시달리다가 17세기에 다시 외적인 만주인에게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역사의 격랑을 겪으면서 풍속습관이 변혁되고 왕년의 면모가 사라지니 말차(抹茶)도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명의 어느 훈고학자(訓古學者)가 송 시대 고전에 나오는 차선(茶筅)의 형태를 몰라 당황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지금에 와서는 뜨거운 물에 차엽을 넣어 우려서 마시고 있으니 서양인이 옛 끽다법을 모르는 것은 당연합니다. 유럽은 명(明) 시대 말기에 처음으로 차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중국인에게 차는 중요한 음료이기는 하나 옛날처럼 정신적 이상은 아닙니다. 이 나라의 기나긴 비참한 역사가 이 나라 사람들의 「삶의 의미를 희구하는 마음」을 고갈시킨 까닭입니다.
고난의 역사를 거울로 삼으며 중국도 현대화했습니다. 새롭게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시인이나 옛 사람들의 영원한 활력원 ― 꿈을 믿는 숭고한 신앙 ― 은 잊혀지고 말았습니다.
우주의 철리를 공손히 받아들이고 자연과 더불어 호흡은 하지만, 자연을 정복하려는 의욕도 없고 숭배하려고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꽃과 같은 방향(芳香)을 발산하는 황홀한 중국인의 전차(煎茶) ― 당 송 시대 의식이 보여주었던 그 몽환경(夢幻境)은 찻잔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습니다.


   중국 문명의 발자취를 충실하게 밟아온 일본은 이 차의 3단계를 빠짐없이 알고 있었습니다. 729년 성무천황(聖武天皇) 때에 이미 나라[奈良]의 궁정에서 100인의 승려에게 차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때에 사용된 차엽은 견당사(遣唐使)를 통하여 당에서 수입되었을 것이고, 당시 당에서 유행하는 점다법에 따라 사용되었을 것입니다.
801년에는 승(僧) 최등(最澄)이 당에서 차 종자를 가져와 에이산(叡山)에 심었습니다. 그 후 차가 귀족, 승려사이에서 애호되고 일반화되면서 여러 지방에 다원(茶園)이 조성되었습니다.

   송 시대 말차남방선(南方禪)을 공부하러 갔던 에이사이선사(榮西禪師)의 귀국과 함께 1191년 일본에 들어왔습니다. 그가 가지고 온 새 품종이 세 지역[三個地方]에 심어졌는데 교오토(京都) 근교 우지지방(宇治地方)의 다원이 그 중 하나입니다. 우지에서는 오늘날도 세계에 자랑하는 좋은 차가 생산되고 있습니다.
에이사이(榮西) 선사가 전한 남방선도 놀라운 속도로 포교되면서 송의 다례법(茶禮法)과 이상(理想)이  함께 보급되었습니다. 이윽고 15세기에 이르러, 다도가 완전히 확립되면서 종교에서 분리 독립한 예법으로 그 자리를 굳혔습니다.

   중국에서 유행한 전차(煎茶)는, 일본에는 비교적 근년에 전하여진 것입니다. 17세기 중엽 이후의 일로, 말차(抹茶)가 최고의 위치를 확고히 지키고 있는 가운데 일상의 끽다에 전차(煎茶)가 스며들기 시작했습니다.
송 시대에 추구했던 이상의 극치는 일본의 다탕(茶湯) ― 다도(茶道) ― 에서만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1281년, 계속되는 몽골의 침입을 물리친 덕분에 일본은, 기왕에 받아들인 송(宋)의 문화를 다듬고 발전시킬 수 있었습니다. 일본에 있어서의 다탕 ― 다도 ― 은 마시는 법 이상(以上)의 것이 되었으며, 이윽고 삶의 술(術)에 관한 종교로 자리 잡았습니다.

   다탕 ― 다도 ― 은 우선 청정(淸淨)과 세련(洗練)을 존중하는 은밀한 자기표현 되었습니다. 또 주객(主客)이 일체(一體)가 되어 함께 있는 시간 현세의 행복을 최대한 발휘하게 하는 신성한 임무를 띠게 되었습니다.
다실(茶室)은 인생이라는 음울한 황무지에 오아시스 같은 곳이 되었습니다. 피로한 나그네는 이 샘터에 모여 예술 감상으로 목을 축이면서, 차와 꽃과 그림으로 꾸며진 즉흥극(卽興劇) 같은 의식을 즐겼습니다. 따라서 다실에서는 조화를 깨는 어떠한 색채도, 리듬을 흩어놓는 작은 소리도, 어울리지 않는 움직임도, 통일을 깨는 말씨도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모든 움직임을 단순화하여 자연스럽게 진행하였고, 나아가 이것이 다회(茶會)가 바라는 이상적인 방향이 되었습니다.
다탕 ― 다도 ― 의 배후에는 이처럼 미묘한 철리(哲理)가 숨어있으니 일본의 다도는 그 현묘한 이치, 즉 도교의 현대적 변이었던 것입니다.






기타

2005.03.30 16:27

100년전 일본인이 영어로 쓴 동양 차 이야기(3) - 도교사상과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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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敎思想과 茶


茶道와 禪

   다도가 선(禪)과 관계가 있다는 것은 일반에게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다도는 선의 의식(儀式) 가운데에서 발전하여 온 것으로 도교의 시조 노자(老子)도 차 역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중국 풍속습관의 시원(始原)이 기록된 교과서에는, 손님에게 차를 접대하는 예절이 그 유명한 노자의 제자 관윤(關尹) 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적혀 있습니다. 관윤이 함곡관(函谷關)에서 노자에게 황금빛 불로장수(不老長壽) 영약(靈藥)을 바쳤다는 전설이 바로 그것입니다. 도교 교도들이 그렇게 먼 옛날에 차를 마셨는지는 고사하고라도 우리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도교와 선의 인생관과 예술관이 다도에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는 점입니다. 간단히 설명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옛 현인들은 스스로의 교의(敎義)를 알기 쉽게 이해시키려고 계통을 세우는 일 따위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역설(逆說)을 잘 활용하였으며 불확실하고 서투른 진리를 주입식으로 설득하려 하기보다, 바보스럽게 이야기하여 결국 듣는 이로 하여금 스스로 깨우치도록 하는 것을 기대했습니다.

   노자 역시 기발한 역설을 사용하여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우둔한 자는 『도(道)』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껄껄 웃는다. 웃지 않는다면 그것은 『도(道)』라 말할 수 없을 것이다.」(老子․上士楣章四一)
「道」의 문자를 풀이하면「경(經)」이란 의미이며 영어로는 Nature(자연), the Supreme Reason(최고원리), the mode(양상 : 樣相) 등으로 번역되어 왔는데, 이 역어(譯語)는 어느 것도 틀린 것이 아닙니다. 도교 내부에서도 경우에 따라 그 쓰임의 의미를 달리 했기 때문입니다.
노자 스스로도 이런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만물을 내포하는 일물(一物)이 있다. 그것은 천지개벽 이전에 태어났다. 그저 조용하게 외로이 홀로 고독하게 서있으며, 변치 않는다. 그것은 회전(回轉)하지만 아무런 위험도 없고 하늘의 어머니가 된다. 나는 그 이름을 모른다. 이것이 「도」다. 또한 그것은 무한(無限)이며 무한은 무상(無常)이다. 무상은 소멸(消滅)이며 소멸은 회귀(回歸)이다」(老子․有物混成章第二十五).

   「경」이라기보다도 「통로(通路)」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주 변전(變轉)의 정신, 즉 새로운 형(形)을 탄생시키기 위하여 끊임없이 자기에게 회귀하는 영원한 성장인 것입니다. 도교인들이 좋아하는 상징인 용(龍)이, 운무(雲霧)에서 생겨 용으로 굳어지고, 다시 운무로 돌아가는 것처럼 자신에게도 무한히 돌아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도」란 대추이(大推移)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관적으로 해석하면 우주의 기운(氣運)입니다. 그 절대성은 말할 것도 없이 그 본질이 항상 상대적이기 때문입니다.
도교에서 중시하는 참다운 것의 계승이란, 중국 남부 지역의 개인주의적 경향을 대표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유교(儒敎)로 대표되는 중국 북부 지역공유주의(共有主義)와 대립합니다.

   중국은 유럽처럼 광대합니다. 광대한 대륙을 흐르는 두 개의 큰 하천에 의하여 북부와 남부로 나뉘고, 두 개의 전혀 다른 이질 문화권으로 분리됩니다. 양자강(揚子江)과 황하(黃河)는 유럽의 지중해와 발트해 같아서, 몇 세기에 걸쳐 통일을 이룬 오늘날에도 남부중국인과 북부중국인은 라틴민족과 튜턴민족(게르만 민족의 하나)과의 차이만큼이나 그 사상과 신앙을 달리 하고 있습니다. 교통이 불편했던 옛날 ― 특히 봉건시대에는 그 사상의 서로 다름이 더욱 현저하였으니 남부의 미술, 시가(詩歌)는 북부의 것과는 전혀 다른 대기(大氣)를 호흡하고 있었습니다.

   기원전 4세기에 살았던 노자와 그 제자들, 그리고 양자강 하반(河畔)의 자연시(自然詩)의 선구자 굴원(屈原)은 같은 시대 북부 문인들의 산문적 윤리관과는 판이하게 다른 이상을 갖고 있었습니다.
도교사상의 싹은 노자의 출현 훨씬 이전에 볼 수 있으니, 중국의 고문헌, 『역경(易經』에서 그 편린을 찾을 수 있습니다.
기원전 12세기 주(周) 왕조의 성립과 더불어 중국의 고전문화는 정점에 이르렀는데, 그 문화는 법률과 관습만은 중히 여겨서 오랜 세월 개인주의의 발전을 저해했습니다. 주(周)가 분열하여 많은 독립왕국이 성립되면서 비로소 자유사상이 화려하게 꽃피기 시작하자, 노자와 장자는 남부사람으로 그 신학파(新學派) 최대의 주창자(主唱者)가 되었습니다.

   한편에서 공자(孔子)는 많은 제자를 거느리고 예부터 내려오는 전통을 유지하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그렇게 나뉘다보니 노자의 도교도, 공자의 유교도, 양측을 다 이해하지 않고는 그 어느 한쪽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도교에서의 절대(絶對)란 너무 상대적이어서, 도교인은 사회 법률이나 도덕률을 매도하기도 합니다. 선악이란 그저 상대적인 용어에 불과하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의(定義)한다는 것은 그것을 한정하는 것이므로「일정(一定)」이라든가 「불변」이라는 말처럼 성장의 정체를 표현하는 용어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굴원(屈原)「성인은 잘도 세상과 더불어 추이(推移)한다」고 했습니다.

   도덕이나 규범 역시 과거의 사회적인 필요성에서 탄생된 것에 불과합니다. 하나의 사회가 어느 때고 같은 상태에 머물러 있으면서 전통을 준수하려고 하면 개인은 국가를 위하여 희생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교육이란 것은 이런 가당치도 않는 미망(迷妄)을 믿게 하기 위한 일종의 무지(無知)를 장려하는 것입니다. 교육은 인간에게 유덕(有德)하라고 가르치는 것보다 그저 행실 바르고 요령껏 처신하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항상 자기중심으로 초조하기 때문에 타인에게 너그럽지 못하고 자신이 옳지 못함을 깨닫지 못합니다. 결국 남을 용서하는 아량도 없을 뿐더러 타인에게 진실을 말하지도 못합니다. 나아가 자기 자신에게 조차 진실을 알리는 것을 두려워하는 까닭에 도리어 잘난 체로 자신을 숨겨 허세를 부립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끊임없이 양심이란 것을 배양(培養)하고 길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세상사가 이렇게 한심스러운데 어떻게 세속에 충실할 수가 있겠습니까?
남에게 무엇인가 베푸는 것은 그 보상으로 자신의 이익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명예라든지 정절(貞節)이라든지는 진(眞), 선(善)도 팔아서 기쁨을 얻고자 하는 매물(賣物)에 지나지 않습니다.

   종교도 매입(買入)할 수가 있습니다. 역시 꽃과 음악으로 짙게 장식한 진부한 도덕률에 지나지 않는 것일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웅장한 집과 매끄러운 말씀을 제거한다면 대체 무엇이 남겠습니까. 그렇지만 이 믿음을 상품으로 하는 기업은 크게 번성(繁盛)하고 있습니다. 적은 부담으로 무한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 한 번으로 천국행 티켓과 모범시민 증서를 가질 수도 있지 않습니까.  

   어디에서도 자기를 과시하는 일은 아름답지 못합니다. 만일 당신이 진실로 유능한 사람이라면, 조만간 세상에 알려져 경영의 최고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자연히 그렇게 될 것인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왜 그렇게 자기선전에 매달리는지. 아마도 노예제도가 있던 옛날로 돌아가려는 본능이 아닐런지요.


차와 도교사상

    도교사상은 대단히 큰 힘으로 계속해서 일어난 여러 가지 운동을 지배하였습니다. 힘이 강력했기에 같은 시대의 다른 사상을 헤쳐 나올 수 있었습니다.
진(秦)의 중국통일시대 도교는 사회의 일대 활동력이었습니다. 시간이 있다면 당시의 사상가 수학자(數學者)․법률가․병법가(兵法家)․신비론자(神秘論者)․연금술사(鍊金術師), 또는 후일 양자강 하반(河畔)의 자연시인인 두보(杜甫), 이백(李白) 등이 도교에서 어떤 영향을 받았는가를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입니다.

   백마(白馬)는 희기 때문에 실재(實在)하는가, 혹은 단단(堅)하기 때문에 실재하는가를 생각한 실재론자(實在論者)선학자(禪學者)처럼 「청정(淸淨)과 절대(絶對)」를 논한 육조(六朝)의 청담가(淸談家)들도 간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도교가 중국인의 국민성 형성에 많은 기여를 했고 「온화하기가 마치 구슬(玉)과 같다」고 한 일종의 세련된 신중함을 길러준 점에 경의를 표해야 합니다.

   중국 역사를 나오는 많은 도교인 중에는, 왕후나 은자(隱者)들이 각자 나름대로 교의(敎義)에 따라서 여러 가지 흥미 있는 성과를 남기고 있습니다. 이들 이야기 중에는 독특한 교훈과 재미있는 일화, 우의(寓意), 경구(警句)들이 샘솟듯 합니다.
혹시 「살아 있었다는 것도 없었으니 죽는다는 것도 없다」고 한 황제(皇帝)를 만나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은 생각은 안 듭니까.
바람을 타고 참된 정적을 음미한 열자(列子)와 같이 우리들 자신이 바람이 되고 천지간을 주유하는 황하상(黃河上)의 「태상노군(太上老君 : 老子)과 같이 공중에 살아보는 것은 또 어떻습니까.
현재는 중국의 기괴한, 이름뿐인 도교이지만, 내면에는 다른 어떤 종파에서도 볼 수 없는 유쾌하고 풍요한 상상들로 가득합니다.

   도교는 주로 미학적(美學的) 영역(領域)에서 아시아인의 생활에 공헌했습니다. 중국 역사가들은 도교를 「처세술(處生術)」이라 불렀는데, 그것은 도교가 현재 ― 즉, 우리들 자신을 취급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자기 존재를 의식하고 확인한다는 것은, 우리 내부에서 신(神)과 자연이 융합하면서 어제가 내일과 헤어져 「현재」란 때를 만들어내는 작업입니다.
현재는 끊임없이 움직이는 「무한(無限)」인 동시에 「상대(相對)」의 영역입니다. 「상대성」이란 「조정(調整)」을 희구하는 것이며, 「조정」이란 바로 기술입니다. 인생의 술(術) ― 즉, 처세술은 우리들이 환경과 끊임없이 조정을 되풀이 하는 가운데에 있는 것입니다.

   도교는 현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비탄과 고뇌로 가득한 현실 속에서 아름다운 것을 찾아내려고 합니다. 이런 점이 유교나 불교와의 차이점입니다.
송(宋) 시대 우화(寓話)「초(酢)맛 보는 세 성인(三聖人)」이 있습니다. 간결하게 유교․불교․도교의 각각 다른 경향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 어느 날 석가(釋迦), 공자(孔子), 노자(老子) 세 분이 함께 초(酢) 항아리(인생의 상징) 앞에서 만났습니다. 세 사람은 각각 자기 손가락으로 초를 찍어 맛을 봤습니다. 실제적인 공자는 시다고 했고, 석가는 쓰다고 했는데, 노자는 달다고 했습니다.
「인생이란 희극(喜劇)은 모든 연기자가 화합하게 되면 더욱 흥미로워진다」고 도교인들은 주장합니다. 현세의 극(劇)을 성공시키려면 모든 요소가  균형이 잡고 자기 역할을 훌륭하게 해내야 합니다. 그리기 위해서는 모두가 극 전체를 알지 않으면 안 되며, 개인이란 개념 가운데 전체란 개념을 잊어서도 안 됩니다. 이를 노자는 「득의(得意)의 무(無)」란 비유로 설명하면서「무」에 실재의 참다운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예를 들면 방(房)의 실재(實在)는 지붕도 벽도 아니요, 벽으로 둘러싸인 공간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주전자의 필요한 곳은 물이 들어가는 공간이지, 주전자의 형태나 그것을 만든 재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무」는 모든 것을 포함하기 때문에 만능이라고 했습니다. (老子, 三十輻章 第十一).

   만물은 무일 때만 운동이 가능해집니다. 자기를 비워 허하게 함으로서, 그 공간에 다른 것이 출입할 수 있게 하는 사람은, 어떤 경우라도 자유스러운 지배자일 수 있습니다. 전체는 언제나 부분을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도교사상은 모든 행동 이론에 커다란 영향을 주어 왔습니다. 검술이나 씨름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일본의 호신술을 유술(柔術)이라 하는데 그 용어도 도덕경 1절에서 인용한 것입니다(老子․天下柔弱章 第七十八). 천하의 가장 유약한 자는 천하의 가장 단단하고 무거운 것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가 있다는 구절입니다. (老子․天下之至柔章 第四十三)
유술에서는 무저항 즉, 허를 사용하여 적의 힘을 끌어내고 소모시킵니다. 최후의 싸움에 이기기 위하여 자기 힘을 저축하는 기술적 노력이 유술인 것입니다.

노자의 설법

    예술에 있어서도 동일한 원리가 「암시(暗示)」라는 형태로 중시됩니다. 이것이 무엇이라고 말하지 않고 그냥 둠으로서, 보는 사람이 생각이나 느낌으로 완성하도록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위대한 걸작(傑作)이란 사람의 마음을 강렬하게 사로잡아, 보는 이로 하여금 그 작품의 일부가 된 것처럼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예술 작품이 만든 빈 공간에 관객이 몰입되어서, 공간이 미적 감동으로 가득 채워지고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삶의 술(術)」을 터득한 사람은 도교에서는 「사(士)」라 부릅니다. 「사」의 탄생은 자기 스스로가 감지하는 무심현묘(無心玄妙)의 경지에 들어감으로써 시작되는데, 반대로 거기에서 현실에 눈을 뜨는 것은 「사(士)」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자기 자신의 총명의 빛을 덮어둔 채 세속 가운데로 뛰어들어야 사는 것입니다. (老子․知者不言章 第五十六)
또 그는 「일을 당하여서는 겨울날 냇가를 조심스럽게 건너는 사람처럼 주저하며, 이웃 사방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움츠리고, 또 그 태도는 손님처럼 엄숙하고 조신해야 합니다. 조심할 때는 따스한 봄빛에 무르녹는 얼음처럼 융통무애(融通無碍)하도록 하며, 마음은 한결같이 질박해야 하고 다듬어지지 않은 원목(原木) 같아야 합니다. 그러면서 도량(度量)은 계곡처럼 넓고 비어두어 무엇이든지 가리지 않고 수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특히 「사」인 자는 물건을 세밀하게 구별하지 말고, 어리석은 자와 어울리면 자신도 어리석은 자처럼 행동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마치 물이 탁해지는 것과 같습니다. (老子․古之善爲士章 第十五).
「사」에게 있어서 인생의 세 가지 보배는 자비(慈悲)․검약(儉約)․겸양(謙讓)입니다. (老子․天下皆謂章 第六十七).

   선(禪) 쪽으로 눈을 돌리면 도교의 교의를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선은 범어(梵語)의 선나(禪那 : Dhyana)에서 나온 명칭이며, 정려(靜廬)란 의미입니다. 선은 정진정려(精進靜廬)에 의하여, 구극적(究極的) 자성료해(自性了解)에 도달할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려(靜廬)는 오도(悟道)에 들어가는 6대 방법(六大方法:육바라밀)의 하나로, 석가모니도 만년의 가르침에서는 이 방법에 비중을 두어 규칙을 만들고, 제자인 가섭(迦葉)에게 전했습니다.
선의 시조가 된 가섭(迦葉)은 그 깊은 뜻을 아난타(阿難陀)에게 전했고, 그 후 순차적으로 다음 대로 이어져 제 28조 보리달마[菩提達磨]에 이르렀는데, 달마는 6세기 전반, 중국 북부로 건너와 중국 선종(禪宗)의 시조가 되었습니다.

   선을 철학적으로 조명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초기의 선은 한편에서는 인도의 나가라아수나[那迦閼刺樹那]의 부정론(否定論)과 닮았고, 다른 한 편은 샨가라아지리[商羯羅阿자利]가 계통을 세운 무명관(無明觀)과 닮은 것처럼 보입니다.
현재 알려져 있는 가장 오래된 선의 가르침은, 중국 6조사의 한 분인 혜능(慧能 ; 673~713) 선사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는 남방선(南方禪)의 창시입니다. 혜능의 뒤를 이은 마조대사(馬祖大師 ; 788滅)는 선을 중국인의 실생활 속에 넣어 중국화 시켰습니다. 마조의 제자 백장(百丈 ; 719~814)은 처음으로 선원(禪院)을 열고, 그것을 운영하기 위하여 의식(儀式)과 규칙(規則)을 확립시켰습니다.(禪林淸規二卷).

도교의 상대성

    마조(馬祖) 시대 이후, 선종(禪宗)의 논의(論義)를 관찰해 보면 거기에는 양자강 풍토의 정신이 움직이고 있으며, 옛 인도의 이상주의와는 대조적인 중국 고유의 현실주의적 사고 나타나고 있습니다. 편파적인 종파의식(宗派意識)에 굳어 있다 해도, 남방선과 노자나 청담가(淸談家) 가르침과의 유사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미 오래전에 『도덕경』은 정신집중이 중요하며 올바른 조식(調息)이 필요한 점을 논하고 있는데, 이는 선의 명상(瞑想)에 불가결(不可缺)한 요소인 것입니다. 『도덕경』의 제일 좋은 주석서(注釋書)는 선(禪) 학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많습니다.

   에서도 도교처럼 상대성이란 것을 존중합니다. 어느 선사(禪師)는 선을 「남쪽 하늘에서 북극성을 보는 것으로 알 수 있는 술(術)」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진리란 반대물(反對物)을 이해함으로서 회득(會得)하기 쉬운 것입니다. 선(禪)도 도교처럼 개인주의를 신봉하며, 우리들 마음의 움직임과 관계되는 것만 실재한다고 합니다.
두 사람의 스님이 바람에 휘날리는 탑 위의 깃발을 보았습니다. 한 스님이 「움직이는 것은 바람이다」하자, 또 한 스님은 「아니, 움직이는 것은 깃발이다」라고 말했습니다. 6조 혜능(慧能)은 두 사람에게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현실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은 바람도 깃발도 아니다. 너희들 마음속에 있는 그 무엇이다」라고. (無門關非風非幡).

   또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백장(百丈) 조사가 제자와 삼림 속을 걷고 있을 때, 한 마리의 토끼가 두 사람에게 놀라서 도망을 쳤습니다. 「토끼는 왜 도망을 쳤을까?」하고 백장은 물었습니다. 제자가 「내가 두려워서겠지요.」라고 대답하니, 조사는 「아니야, 너에게 살생의 기운이 있었기 때문이야.」라고 말했습니다.
이 대화에서 생각나는 것은 도교인이었던 장자(莊子)의 일화입니다. 어느 날 장자가 친구와 강변을 산보했습니다. 「고기가 물 속에서 참 재미나게 놀고 있구나.」라고 장자가 감탄하니 친구는, 「당신은 고기가 아닌데 어찌하여 고기가 즐겁게 놀고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장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당신은 내가 아닌데 어찌해서 내가 고기가 즐기고 있는 것을 모른다고 하십니까.」 (莊子. 秋水十七).

   도교는 유교와 대립합니다. 선 역시 가끔 정통 불교의 교리와 대립됩니다. 언어는 선이 제창하는 초절적(超絶的) 통찰(洞察)에 대하여 사고의 방해가 될 뿐입니다. 불전(佛典) 모두 눈여겨봐도 그저 개인의 사색에 대한 주석(注釋)에 지나지 않습니다. 반면 선문(禪門)의 도는 사물의 내부에 있는 본성과 직접 교류하는 쪽으로 눈을 돌립니다. 밖으로 나타나 있는 것은 진리의 명확한 체득(體得)을 방해하는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선문의 도는 그 추상(抽象)을 좋아하는 정신 때문에 고전적 불교파(佛敎派)의 채색(彩色) 그림을 배격하고, 수묵(水墨)의 소묘화(素描畵)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선문에는 우상 파괴주의자도 있는데, 이는 우상이나 상징에 의지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 내부에 불성(佛性)이 있다고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극단적인 예이지만 단하화상(丹霞和尙)은 추운 겨울날 불을 피우기 위하여 나무로 된 불상(佛像)을 때려 부쉈습니다.
「도대체 어찌된 일이오?」하고 옆 스님이 공포에 떨면서 소리쳤습니다. 그러자 선승은 차분히 「나는 이 재 속에서 고마운 사리를 얻고자 합니다.」했습니다. 스님은 언성을 높이며 「목불(木佛)에서 무슨 사리가 나오겠습니까?」하고 질타했습니다. 그러자 화상은,「사리가 나오지 않는다면 그것이 무슨 부처님 입니까? 그렇다면 대단한 일이 아니지요.」하며 불쪽으로 가서 몸을 녹였습니다. (景德傳燈錄 第十四卷).

선은 동양사상의 뿌리

    선은 본래의 동양사상에다 한 가지 특징을 첨가했습니다. 그것은 현세도 내세처럼 중요하다는 인식입니다. 사물의 상대 세계에 대소 구별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모두 동등한 것이라고 선문의 도는 주장하고 있습니다.
완전을 추구하는 자는 자신의 생활 속에서 내적인 영광의 반영(反映)을 감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선원(禪院)의 조직은 그런 면에서 의미심장한 점이 있습니다. 조사(祖師)를 제외하고 모든 스님은 선원의 잡다한 일 중에서 한 가지를 맡아야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신참자에게는 비교적 가벼운 일을 맡기는 반면, 수행을 많이 쌓은 스님일수록 누구나 싫어하는 비천한 일을 맡는 것입니다. 이는 그 자체를 선 수행의 일부로 보기 때문입니다.
어떤 작은 행동도 완전무결하게 수행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런 까닭에 스님들은 정원의 잡초를 뽑으면서, 혹은 차를 점다(点茶)하면서 아득히 먼 논의(論義)를 계속합니다.
다도의 이상은 일상다반사에서 중요한 것을 찾는 선(禪)의 개념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도교(道敎)는 이렇게 다도에 미학적(美學的) 이상(理想)의 기반을 제공했으며, 선(禪)은 그것을 실제적인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기타

2005.03.31 18:14

100년전 일본인이 영어로 쓴 동양 차 이야기(4) - 꽃과 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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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과 다인



    어두컴컴한 봄날의 새벽, 작은 새들이 수목 사이 영묘한 분위기에서 지저귀고 있습니다. 이럴 때 당신은 작은 새들이 끼리끼리 꽃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고 느껴 본 적이 있습니까.
인간이 꽃을 칭찬하게 된 것은 아마도 연가(戀歌)와 더불어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스스로 아름다움을 의식하지 않기에 아름다우며, 조용하기에 향기로운 꽃처럼 소녀를 돋보이게 하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원시인은 사랑하는 소녀에게 꽃다발을 바쳤을 때 처음으로 야수의 영역을 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사람은 자연에만 대립하는 용맹에서 빠져나와 인간의 영역으로 높여졌습니다. 그리고 미묘한 무용(無用)의 용(用)을 알게 되었을 때 예술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꽃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변치 않는 우리들의 벗입니다. 우리들은 꽃과 더불어 먹고 마시고 또 노래하며 춤추고, 꽃을 가지고 혼례를 올리고, 세례를 받습니다. 꽃 없이는 함부로 죽을 수도 없습니다. 백합꽃으로 신에게 빌고, 연꽃과 함께 명상하고, 장미와 국화를 내걸고 전투에 임합니다. 꽃 이야기로 대화를 하기도 합니다.
  
   꽃 없이 어떻게 삶을 영위할 수 있을까요? 꽃이 없는 세계란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칩니다.
꽃은 병자의 머리맡에서 부드러운 위로를 주며, 피로한 마음의 어두운 곳에 축복을 뿌립니다. 그 정등(靜證)한 맑음은 힘을 잃은 우리 마음속에 스며들어 우주에 대한 신뢰의 념을 새롭게 일깨워줍니다. 그것은 어린아이의 한결같은 눈망울이 우리들의 상실한 희망을 불러 일으켜 주는 것과도 같습니다. 우리들이 죽어서 흙에 누웠을 때, 묘지를 아름답게 장식해 주는 것도 꽃인 것입니다.

   그런데 슬프게도 우리는, 꽃과 벗하며 살아가면서도 야수의 영역에서 별로 멀리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숨길 수 없는 사실입니다. 양의 가죽을 한 겹 벗기면 안에 도사리고 있던 이리가 곧 이빨을 드러냅니다.
사람은 10세에 짐승이 되고, 20세에 미치광이가 되며, 30세에 실패(失敗)하고 40세에 행여나 하는 한탕주의자가 되고, 50세에 죄인(罪人)이 된다고 합니다. 야수처럼 그대로 있기 때문에 죄인이 되는 겁니다. 굶주림이 가장 현실적인 것이며, 사리사욕은 당연한 것처럼 신성시됩니다.

   신의 영역은 우리 눈앞에서 차례차례 붕괴되어 갔습니다. 단지 하나, 영원히 남게 된 제단이 있는데 우리는 거기에 「자기」라는 지상의 우상을 세우고 향을 피웁니다. 이 제신이 가장 위대한 신이며 재산은 그의 예언자라 말합니다. 우리는 그 신에게 제물을 바치기 위하여 대자연을 짓밟아 황폐시켰습니다.
물질을 정복했다고 말하지만, 실은 우리들 자신이 물질의 노예가 되어버린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문화라든지 풍아라든지 하는 미명(美名)하에 얼마나 잔학무도한 일을 많이 하고 있는지 돌아본 적이 있습니까?

우아한 꽃이여, 별의 눈물이여,
이슬이나 햇빛을 노래하는 나비와 벌을 기다리며
뜰에 말없이 서있는 꽃이여!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무서운 운명을 알고나 있는지.
여름을 실어 나르는 산들바람을 즐기며
행복한 꿈이라도 꾸어 두려무나.
금방이라도 무정한 손이 너의 목덜미를 조이면서
몸을 비틀고 손발을 낱낱이 자른 뒤
조용한 집과 이별하게 될지 모르니까.  

그런 잔학무도한 사람이 혹 절세미인일지도 모른단다.
제 손가락에 네 피가 묻어있는 동안
아, 아름답구나! 할지도 모른다.
과연 그것이 너를 동정함일까.

네가 소녀라면  
얼굴 한 번 쳐다봐주지도 않는 무정한 사나이의
앞가슴에 꽂혀지는 것을 어찌 받아들일까.
마지막에는 좁은 화병에 담겨  
빈사상태에서 마른 목을 축이려 해도
썩은 물이 있을 뿐.

이것이 정녕 정해진 너의 운명인지는 모르지만
네가 일본 땅에서 피어났다면
어느 땐가는 가위와 작은 톱을 가진 무서운 인간
스스로 꽃꽂이 선생이라 칭하는 사람을 만날 것이다.
그는 의사처럼 거드름을 피우며 특권을 휘두르기에
너는 당연히 싫어질 것이다.
의사가 환자의 고통에 잔신경을 쓰지 않듯이
꽃꽂이 선생은 너를 절단하고 구겼다 비틀었다 해가며,
엉뚱한 형상으로 변형시켜놓고 혼자 희열을 느낀단다.
뼈를 부러뜨린 뒤 지혈을 시켜준답시고
새빨간 숯불로 너에게 화상을 입히고
피의 순환을 돕는다면서 몸에 침봉을 박아준단다.
주는 음식이란 소금과 산(酸), 명반이나 때로는 유산…
너희가 기절할 것같이 보이면
발에 탕수를 부우며 자만에 차서 이렇게 말한단다.
내 처치로 꽃의 생명이 2~3주 길어질 거야. 하고.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붙잡혔을 때 바로 죽는 것이 좋았을 것을.
이런 벌을 받다니 전생에 무슨 악업을 쌓았단 말이냐.

   서양 사회에서 함부로 꽃을 낭비하는 상황은, 동양의 꽃 선생이 꽃을 다루는 것과 비교할 때 더욱 오싹해집니다. 유럽이나 미국에선 댄스파티장이나 연회장의 테이블을 장식하기 위하여 많은 꽃들이 잘려졌다가 다음 날 거의 버려지고 맙니다.
그것은 아마도 굉장한 양일 것입니다. 그 꽃을 연결시키면 한 대륙 쯤 화륜(花輪)으로 감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서양에서 이와 같이 무신경하게 생명을 함부로 취급하는 것에 비하면 동양의 꽃꽂이 선생들의 죄과는 별 것 아닐지 모릅니다. 꽃꽂이 선생은 적어도 자연계의 경제는 생각합니다. 세심한 통찰로 희생자를 가려 선택하고, 사후 유해인 꽃에 예를 다합니다. 그러나 서양에서 꽃을 장식하는 것은 다분히, 부를 과시하는 일시적인 기분일 따름입니다.

   그 시끄러운 행사가 끝나면 꽃들은 어디로 갈까요? 시든 꽃들이 무정하게 쓰레기통에 버려진 것을 보면 슬퍼집니다.
꽃은 아름답게 태어났음에도 왜 이처럼 불행해야 할까요. 작은 벌레도 위기에 처해서는 독을 휘두르고, 어떤 순한 짐승도 궁지에 몰리면 싸움을 합니다.  
모자에 꽂힌 장식품이 자기들의 깃인 줄 안다면 새는 멀리 날아 도망갈 것입니다. 모피 코트로 털을 빼앗기는 동물은 사람이 가까이 가면 몸을 숨깁니다.

   슬픈 일입니다. 날개 없는 꽃들은 폭군 앞에 그저 서 있을 뿐.
꽃들이 죽음의 고통에서 비명을 울려도 양심이 마비된 우리들 귀에는 들리지 않습니다. 조용히 쓰이고 불평 없이 온갖 심부름을 해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잔인한 방법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어느 땐가는 그 잔인함으로 인해 꽃이라는 벗에게 미움을 받아 황폐한 삶을 살지도 모릅니다.
해를 거듭할수록 야생의 들꽃이 감소되고 있음은 알고 있습니까. 현명한 꽃의 현자(賢者)가 있다면, 인간이 더 인간다워질 때까지 땅을 떠나라고 명령을 내릴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꽃들을 아예 하늘로 이주시킬 지도 모릅니다.

   초목을 기르는 사람을 칭찬해야 합니다. 식목 분을 취급하는 사람은 가위를 휘젓는 사람보다 인정이 있어서, 보는 사람도 유쾌해집니다. 물과 햇볕에 신경을 쓰고, 해충과 서리를 조심하고, 잎이 돋아나는 것이 늦으면 걱정하고, 나뭇잎의 색이 건강하고 영롱하면 우쭐해 합니다.
동양에는 꽃 재배술이 옛부터 있었으며, 시인과 마음에 드는 식물과의 관계가 시가(詩歌)나 화제가 되는 일도 잦았습니다.

당․송 시대에는 도예의 발달과 더불어 꽃이나 나무를 심을 좋은 용기가 만들어졌으므로 화분마다 한사람씩 정해서 관리하기도 했습니다.
잎은 부드러운 토끼털붓으로 닦아내고, 모란은 성장한 미녀가, 겨울 동백은 야위고 창백한 얼굴의 스님이 씻었다는 옛 기록도 있습니다. 일본에서 인기 있는 노오[能]의 작품 중 아시카가[足利] 시에 만들어진 분의나무[鉢の木]란 것이 있습니다.
어느 추운 겨울밤 한 가난한 무사가 방랑하는 스님을 알뜰히 모시려고 하는데 불을 피울 나무가 없어 그가 아끼는 분의나무[鉢の木]를 절단한다는 내용인데, 그 스님은 호오조오 도끼요리[止條時賴]였습니다. 스님은 훗날 이 무사의 희생적 호의에 후한 보답을 했습니다.
노오[能]의 이 이야기는 오늘까지도 에도[江戶:東京] 사람들의 눈물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약한 꽃을 보호하기 위해 정성을 기울인 이야기도 있습니다.
당의 현종황제는 정원에 있는 나뭇가지에 금으로 만든 작은 방울을 매달아 놓아 새들이 가까이 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화사한 봄날 궁정 악사들과 정원에 모여 온화한 분위기에서 꽃을 기쁘게 해준 것도 그였습니다.
일본판 아서왕 전설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요시쓰네[義經]가 묵필(墨筆)로 남긴 기묘한 고찰(高札)도 일본의 한 절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훌륭한 매화나무를 보호하기 위하여 세워진 인데, 전국시대 특유의 처절함이 담긴 유머가 재미있습니다. 고찰에서 요시쓰네는 꽃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한 후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일지(一枝) 절단은 일지(一枝) 절단이다.」
오늘날 마음 내키는 대로 꽃을 꺾고 함부로 예술작품을 파괴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벌이 주어지면 좋을 것입니다.
인간은 화분에 있는 꽃도 인간 본위로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왜 식물을 그 본래의 자리가 아닌, 보지도 알지도 못하는 환경에 두고 꽃피우기를 강요할까요. 이는 새를 새장에다 가두어 놓고 「노래 불러라, 교미하라」하고 바라는 것이나 같습니다.
온실의 인공 열기에 질식할 것 같은 난(蘭)이 간절하게 고향인 남쪽 하늘을 연모(戀慕)하고 있음을 누가 알아줄까요.

   이상적인 꽃 애호가란 꽃이 피어있는 현장으로 손수 가보는 사람입니다.
도연명(陶淵明)은 아무렇게나 둘러쳐진 대울타리 앞에 앉아서 들국화와 대화를 나누었고, 임화정(林和靖)은 석양 무렵 서호(西湖)의 매화 사이를 거닐며 꽃향기에 도취되어 무아지경이었습니다. 또 주무숙(周茂叔)은 자기의 꿈이 연꽃과 어울리기를 바라는 상념(想念)에서 작은 배 안에서 잠을 잤습니다. 나라조[奈良朝]의 이름 높은 광명황후(光明皇后)는 이들과 같은 심경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아 ꠏꠏ 꽃이여, 너를 꺾어들면 나의 손은 더러워진다. 지금 너희가 야생으로 서 있는 자연스러운 모습 그대로를, 나는 과거 현재 미래의 부처에게 바치리라」
그렇다고 너무 감상적으로 빠져드는 것도 바람직스러운 것은 아닙니다. 유유자적하고 여유 있는 마음을 갖기를 바랍니다. 노자(老子)「천지는 무정하다」(老子, 天地不仁章第五) 고 했고, 홍법대사(弘法大師) 역시 「흘러 흘러 또 흘러 생명은 흘러가며, 죽고 죽고 또 죽고, 죽음은 만물에 찾아온다.」고 했습니다.
우리들이 지향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끝에는 파괴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파괴가 없다면 신생(新生)도 없습니다. 파괴라는 변화야말로 유일의 영원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죽음도 삶과 같이 기쁨으로 맞아들이지 못할까요? 양자는 일물(一物)의 표리(表裏) 관계로써 범천의 낮과 밤에 불과한데 말입니다. 낡은 것이 멸해야만 재생이 가능해집니다.

   우리들은 각양각색의 이름을 붙여 「죽음」이란 냉혹한 자비의 여을 받들어 왔습니다. 그것은 조로아스터교(Zoroaster敎)「성스러운 화중(火中)에 맞이한 일체를 탐식하는 것」의 그늘이었습니다.
신도(神道) 일본이 오늘날 그 앞에 엎드려 추망하는 것은 검혼(劒魂 ; 日本刀)의 얼음 같은 순입니다. 조로아스터교(敎)의 신비스러운 불이 우리의 약한 마음을 불태우듯 신도 일본의 성스러운 검(劒)은 번뇌의 끈을 절단합니다. 재가 되어버린 망해(亡骸)에서 무한한 희망의 불사조가 파르르 날아 자유의 날개를 치는데서, 보다 고상한 인간상은 나타나는 것입니다.
꽃을 절단함으로서 새로운 형을 창조하고 고차원의 무엇이 이루어진다면 그것대로 좋지 않습니까.
꽃에게 바란다면 그저 「아름답기 때문에 희생의 대열에 참가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 죄는 순수와 간소에 철저함으로써 속죄될 수 있다고 봅니다. 다인(茶人)들은 이러한 사고에서 「화도(幻)」를 확립하였습니다.

    일본의 다인이나 꽃꽂이 사범은 그렇게, 대부분 종교적인 차원에서 외경스럽게 꽃을 취급합니다. 손닿는 대로 꽃을 자르는 것이 아닙니다. 한 가지일망정 함부로 하지 않습니다. 마음속에 그린 미적 구성에 바람직스러운 것을 주의 깊게 가려 꼭 필요한 부분만 절단합니다. 필요 이상 자르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주목할 것이 있다면 잎이 있는 경우, 반드시 꽃과 잎이 같이 어울리게 합니다. 식물의 생명을 종합미(綜合美) 입장에서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서양의 꽃꽂이는 일본과 다른 면이 많습니다. 서양에서는 몸통 없이 화경(花莖) 상부만 무더기로 꽃병에 꽂아 놓는 수가 많습니다.
일본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꽃이 잘 꽂아지면 다인은 그것을 도꼬노마[上座 : 床の間]에 갖다 놓습니다. 생화 가까이에는 그 효과를 감소시킬만한 것을 두지 않습니다. 다만 한 폭의 그림도 걸지 않습니다.
가까이 둘 수 있는 것은 꽃과 어울려 각별한 미적 효과를 낼 수 있을 때 만입니다. 꽃은 왕관을 쓰고 상좌에 모셔지는 것입니다.

   손님이든 제자든 방에 들어오면 주인에게 인사하기 전에 먼저 생화를 향하여 머리 숙여 경의를 표합니다. 꽃이 시들었을 때는 하천에 흘려보내거나 땅에 묻어주고, 때로는 꽃의 영혼을 위로하며 묘비를 세워주기도 합니다.
화도(幻)의 창립은 15세기 다도의 정립과 때를 같이 했습니다. 옛 이야기에, 최초의 꽃꽂이[生花]는 승려가 폭풍우에 떨어진 꽃을 모았던 것이라고 합니다.
소우아미[相阿彌]아시카가 요시마사[足利義政] 시대 제일가는 화가이며, 명망 있는 미술 감정가였는데, 동시에 초기 꽃꽂이의 달인이기도 했습니다.
다인 무라다 슈우고[珠光]는 그의 문인(門人)이었습니다. 화도사상(幻思想) 회화(繪畵)의 가노가[狩野家]에 필적하는 유명한 가계(家系)가 된 이게노보류[池之坊流]의 개조(開祖) 센노[專能]도 그의 문인(門人)이었습니다.

   16세기 후반 리큐[利休]에 의하여 다도의 작법이 완성되면서 꽃꽂이[生花]도 대단한 진보를 하였습니다. 그의 후계자인 오다우라구[織田有樂] 후루다오리베[古田織部] 고에쓰[光悅] 고보리엔슈[小握遠州] 가다기리 세기슈[片桐石州] 등도 꽃꽂이의 새로운 조형을 창조하는 데 적지 않은 노력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잊어서 안 될 것은, 다인들의 꽃 숭배는 이들의 심미적(審美的) 예법 ― 다탕(茶湯) ― 의 일부 지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꽃만이 독립된 신앙 대상은 아니었습니다.
꽃꽂이는 다실 내의 다른 예술품과 같이 장식체계의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세키슈[石州]는 마당에 눈이 있을 때는 하얀 매화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유별나게 눈에 띄는」 꽃은 다실에서는 추방되었습니다. 다인의 꽃꽂이는 그것이 본래 있어야 할 다실을 떠나면 무의미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꽃의 선이나 배분 등이 한결같이 다실 내에서 조화를 맞추었기 때문입니다.

   꽃만을 별개로 숭배하는 관습은 17세기 중엽, 꽃꽂이 선생이 출현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후 꽃은 차츰 독립하여 화병이 주는 법칙 외에 달리 속박하는 것이 없게 되었습니다. 꽃꽂이에 새로운 개념이 생겨 새로운 방법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그 결과 수많은 규칙과 유파가 생겨나게 되었는데, 19세기 중엽 한 문인의 말을 빌리면 당시 꽃꽂이 유파가 백을 넘었다 합니다.
이들 유파는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는데, 형식을 중시하는 파와 자연미를 중시하는 파입니다. 형식 파는 이게노보류[池之坊流]가 주류를 이루고, 회화에서의 가노파[狩野派]에 필적하는 고전 이상주의를 목표로 했습니다. 이 파 선생들의 작품은 단세쓰[探雪] 쓰네노부[常信]의 그림을 거의 모사한 것 같은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자연미를 중시한 쪽은 말 그대로 자연을 견본으로 삼았으며, 형의 수정은 단순히 그 미적 통일을 표현하기 위한 데 그쳤습니다. 이들의 작품에선 우키요에[浮世繪]나 사조파[四條派]의 그림에서 볼 수 있는 것 같은 분위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틈이 있다면 더 깊이, 이 시대 여러 꽃꽂이 선생들이 정한 구성상의 규칙을 세부까지 파고들어, 도쿠가와[德川] 시대의 장식을 지배했던 근본이념을 탐구해 보는 것도 흥미 있는 일일 것입니다.
대체로 그들은 「주(主)의 원리」 천(天), 「종(從)의 원리」 지(地), 「화(和)의 원리」 인(人)에 대하여 논하면서, 이러한 원리를 구현하지 않는 꽃꽂이는 무미건조한 죽은 꽃이라 하였습니다.
의자연파(擬自然派)에서는 꽃을 「정식(正式)」 진(眞), 「반정식(半正式)」 행(行), 「약식(略式)」 초(草)의 세 가지 양상으로 나눠야 한다고 했는데 「정식(正式)」은 위엄 있는 장식을 단 무도복을 입은 꽃, 「반정식(半正式)」은 유유하고 우아한 외출복을 입은 꽃, 그리고 「약식(略式)」은 집안에서 매혹적인 실내복을 입은 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겐 꽃꽂이 선생이 꽂은 꽃보다 다인이 꽂은 꽃이 더 차분하고 정감 있게 다가옵니다. 특히 다인이 꽂은 꽃은 있어야 할 장소에 놓여질 때 예술이 되며, 참 생활로 이어지기 때문에 우리들 마음에 호소해 오는 것이 있습니다.
이런 다인의 꽃꽂이는 의자연파(擬自然派)나 형식파(形式派)와 구별하여 자연파(自然派)라 불렀습니다. 다인은 「자기의 임무는 꽃의 선택까지」이며, 그 다음은 꽃으로 하여금 스스로 이야기하게 했습니다.

   늦겨울 다실에 들어가면 산 벚꽃나무의 가느다란 가지에, 봉오리 진 동백이 꽂혀 있을 때가 있습니다. 이는 가는 겨울과 오는 봄을 향합(響合)한 것입니다.
또 무더운 여름날 낮에 다회에 가면 도꼬노마[上座 : 床の間]의 유현한 공간에 한 송이 백합을 담은 화병이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 자태를 보고 있으면 백합이 조용히 세상사를 비웃고 있는 것 같습니다.  
꽃만의 독주(獨奏)도 좋지만 그림이나 조각과 협주곡이 되면 그 짜임새는 더욱 재미있을 겁니다. 세기슈[石州]수반(水盤)에 수초를 띄워 호수의 식물처럼 꾸미고 윗벽에 기러기가 나는 그림을 걸었습니다.
다인 조하[紹巴]어부의 집 모양을 한 청동 향로와 갯벌의 야초, 거기에 포구의 적적한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를 조합했습니다. 조하의 손님들은 그 구성에서 저물어 가는 가을을 느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꽃을 화제로 하면 이야기가 끝이 없는데 하나만 더 소개합니다. 16세기 일본에서 나팔꽃은 아직 진귀한 꽃이었습니다. 리큐[利休]는 정원 가득히 나팔꽃을 심고 열심히 가꾸었습니다.
리큐의 나팔꽃 소문은 도요도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귀에도 들어갔습니다. 리큐의 다회에 다녀온 사람마다 하도 나팔꽃 예찬이 자자하자 히데요시도 한 번 보고 싶다고 전했습니다. 그러자 리큐는 날을 정해 아침 다회에 초대했습니다.
약속한 날 히데요시는 정원에 들어섰는데, 어디를 보아도 나팔꽃은 그림자도 없었습니다. 히데요시는 별로 좋지 않은 심기가 되어 다실에 들어섰습니다. 다실에 들어서니 거기에 그의 심기를 일변 시키는 것이 있었습니다. 도꼬노마[上座 : 床の間]에 놓인 송대(宋代)의 진귀한 청동기에 오직 한 송이의 나팔꽃이 꽂혀 있어 히데요시를 반겼습니다. 정원에 가득했던 나팔꽃 중 여왕 같은 나팔꽃임을 물론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꽃을 바치는 의미를 충분히 살폈습니다. 아마 꽃 자신도 그 의미를 이해하고, 아름다움에 함께 봉헌하려는 뜻을 공감해 줄 것이라 믿어집니다. 꽃 중에는 인간처럼 겁쟁이가 아니어서 죽음이란 것에 긍지를 가지는 것도 있습니다.
벚꽃은 바람 부는 틈틈이 떨어져갑니다. 요시노[吉野]나 아라시야마[嵐山]의 그윽한 꽃 보라에 젖어보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꽃잎은 맑은 시내를 보석처럼 춤추며 흘러갑니다. 웃으며 속삭이듯 물위를 떠가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봄이여 안녕. 우리는 영원한 여행을 시작합니다.」




기타

2005.03.31 18:18

100년전 일본인이 영어로 쓴 동양 차 이야기(5) - 다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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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실(茶室)


일본의 다실 - 스끼야 (數寄屋)

   구미의 건축은 돌과 벽돌에 의한 양식의 전통 속에서 발전하여 왔습니다. 나무나 대를 사용하는 일본식 건축법은 서양에서 볼 때에는 건축의 부류에도 넣을 수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서양의 건축 연구가들이 일본 대사원의 완벽한 아름다움을 인식하여 찬사를 보낸 것은 극히 최근의 일입니다.
정통적인 건축물에 대한 인식이 이런 정도이니 건축양식이나 장식의 원리가 서양과는 전연 다른 다실의 미묘한 아름다움은 더욱 이해되기 어려울 것입니다.

   스기야(數寄屋)라고 부르는 다실은 단순한 작은 집 ― 말하자면 작은 뗏집일 뿐, 달리 무슨 취호(趣好)를 자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끼야[數寄屋]의 스끼[數寄]는 원래 일본말로 좋다는 뜻인 스끼[好き]를 그 음과 같은 한자로 표기한 것입니다.
훗날에 여러 종장(宗匠)들은 자기 다실관에 따라 여러 가지 한자를 달리 쓰기도 했는데 「빈집(空き家)」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한순간의 심미적(審美的)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최소한의 도구를 제하고는 아무런 장식도 없기 때문에 「빈집(空き家)」이며 무엇인가 일부러 부족하게 준비하고 상상력으로 그것을 완전하게 한다는 불완전 숭배를 요지(要旨)로 하고 있기 때문에 「스끼야(數寄屋)」이기도 합니다. 시취(詩趣)를 남기는 가옥(假屋)이니「좋아하는 집(好き家)」인 것입니다.

  16세기에 형성된 이와 같은 다도의 이상은 건축에 대단히 큰 영향을 주어서 그 뒤 일본집의 실내는 그 장식과 양식이, 극단적으로 간소청정(簡素淸淨)해졌습니다. 아마도 외국인의 눈에는 거의 살풍경하게 느껴질 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실(茶室)을 처음 독립된 건축물로 규정한 것은 센리큐[千宗易]로, 훗날 센리큐[千利休]란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대종장(大宗匠)입니다.
16세기에 그는 다이조오[太閣] 히데요시의 도움을 받아 차(茶)의 작법(作法)을 정립하고 그것을 완성 단계까지 이루어 놓았습니다. 다실의 넓이는  그보다 먼저 조오오[紹鷗]에 의해 정해져 있었습니다. 초기의 다실은 다회가 있을 때마다 객간의 일부를 병풍으로 둘러쳐서 이루어졌습니다.
다실을 가꼬히[囲い]라 부르게 된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도 가꼬히[囲い]란 말은 독립된 건물로 되어 있지 않은 다실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스끼야[數寄屋]「글레스의 세 여신보다는 많고 뮤즈의 아홉 여신보다는 적다」란 구절처럼 다섯 사람 정도 밖에는 들어갈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스끼야에는 차 도구를 씻고, 쓰기 전에 놓아둘 공간[空間 - 水遣(けすや)], 손님이 다실에 초대될 때까지 기다릴 수 있게 현관 가까이에 만들어 놓은 대합실(待合室), 그리고 이 대합실과 다실을 연결하는 정원(庭園)의 소경(小經), 로지(露地)가 있습니다.
다실은 돋보이는 구조가 아닙니다. 다른 어떤 일본 집보다 작으며 건축 재료도 청빈을 느끼게 배려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예술적 사려에 의한 것입니다. 하지만 세부 하나하나는 사치스러운 궁전이나 사원 건축보다 훨씬 주의 깊게 제작됩니다. 그러므로 좋은 다실은 웬만한 저택보다 고가입니다. 건축 기술은 물론, 자재 선택에 있어서도 세심한 주의와 정밀함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실제 다인(茶人)에게 고용되는 목수는 기능인 가운데 각별히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며, 칠기공인(漆器工人)처럼 정교한 일을 하게 됩니다.

   서양 건축에서 보면 다실은 아주 이질적인 것이며, 일본의 전통적 건축과도 확연히 구별됩니다. 일본 고대의 호장(豪壯)한 건축은 종교적인 것이든 아니든 간에 그 크기에서만 보더라도 얕볼 수 없습니다. 수세기에 걸쳐 비참한 화재가 많았기에, 현존하는 건조물은 많지 않지만, 그 장대하고 호화스러운 장식에는 외경(畏敬)의 염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지름 2~3척, 높이 30~40척의 거대한 나무기둥은 복잡한 강목(綱目) 위의 거대한 대들보[梁]를 받치고 있으며 이 대들보는 기와지붕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습니다.

   재료도 건축법도 화재에는 약하지만 지진에는 최적인 건축입니다. 법륭사금당(法隆寺金堂)이나 약사사(藥師寺)의 탑(塔)은 일본 목조건물의 내구성(耐久性)을 말해주는 좋은 예입니다. 이 건물들은 12세기에 건립되어 긴 세월을 변함없이 서있는 것입니다.
옛날의 사원(寺院)이나 궁전 내부는 아쉬움 없이 장식되었습니다. 우지(宇治)의 봉황당(鳳凰堂)은 11세기에 건립되었는데 지금도 벽면의 회화나 조각 유물은 물론, 정묘한 천개(天蓋)며, 채색, 화려한 무늬의 비단, 거울[鏡]이나 진주조개를 상감(象嵌)한 금시회(金蒔繪)의 묘개(廟蓋)가 남아있어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후세의 것으로는 일광(日光)의 동조궁(東照宮), 교토(京都)의 이조성(二條城) 등에, 화려한 아라비아나 혹은 무어 미술에 필적할 수 있는 채색과 정교한 세공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들의 경우 그 호화스러운 장식이 도리어 건축 자체의 미를 감소시키고 있습니다.

   다실의 간소(簡素)와 청정(淸淨)선원(禪院)의 타종파(他宗派)와의 대항의식(對抗意識)에서 생겨났습니다.
선원은 다른 종파의 사원(寺院)과 달리 단지 승려가 거주하는 곳이며, 그 본당(本堂)은 예배 순례하는 장소가 아니고, 수행자들이 모여 토론하고 묵상하는 도장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방에 아무런 장식도 없고, 시조(始祖) 보살달마(菩提達磨)의 상이나 석가모니가 가섭(迦葉)과 아난타(阿難陀)와 함께 있는 상이 있을 뿐입니다. 또 불단에는 그들 성자의 시대에 선(禪)이 크게 발전한 것을 기념하여 향화(香華)가 놓여져 있을 뿐입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다도는 선승(禪僧)들이 달마상(達磨像)앞에서 한 잔의 차를 돌려가며 마신 의식에서 발전했습니다. 그리고 선단(禪壇)의 불단(佛壇)은 뒷날 일본집의 도꼬노마(床の門) ― 손님을 그 자리 분위기에 융합시키기 위하여 그림이나 꽃을 장식하는 장소 ― 의 원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일본의 위대한 다인은 모두 선을 수행하였으며, 선의 정신을 실생활에 불어넣었습니다. 그래서 다실에도, 여러 가지 차도구에도 선의 교리가 많이 반영되었습니다.

   정식(正式) 다실의 넓이4조반(四조半, 다다미 넉장반)인데 이는 『유마경(維摩經)』의 일절에서 정하여진 것입니다. 이 흥미진진한 경전에 의하면 비가라마지자(비柯羅摩詞秩多)는 만주실이보살(曼珠室利菩薩)과 8만 4천 제자를 1장 4방(一丈四方) ― 4조반(四조半) ― 의 좁은 방에 모셨다고 합니다. 깨친 자에게는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론에 바탕을 둔 우화(遇話)입니다.
대합(待合:마찌아이)과 다실을 연결하는 정원의 소경(小經) ― 로지(露地)명상의 제 1단계나타냅니다. 말하자면 자성요해(自性了解)로 이어지는 통로입니다. 외계와의 접촉을 끊고 다실 그 자체가 갖는 아름다움을 마음 닿는데 까지 맛볼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신선한 마음을 불러일으키기 위하여 있는 것이 로지(露地)인 것입니다.

   로지에 발을 내딛어, 늙은 소나무 잎이 구르고 불규칙한 가운데 미묘한 정비(整備)를 느끼게 하는 정석(庭石)과 상반목(常磐木)이 어둠침침하게 그늘을 드리운 길을 따라서 이끼가 낀 석등용(石燈籠)의 옆을 지나면 속념(俗念)은 사라지고 마음은 풍요한 기분으로 충만해집니다. 번화한 도심지 안에서 문명의 티나 괴음을 멀리한 심산유곡에 드는 셈입니다. 이 정적(靜寂)과 청정경(淸淨境)을 조성하기 위하여 차의 종장(宗匠)들은 많은 재능을 발휘했던 것입니다.
로지를 걸어가면서 느끼는 감흥은 각기 독자적이겠지만 리큐(利休)는 절대 적요(寂寥)를 목표로 했습니다. 그는 로지를 제작하는 비결을 다음과 같은 옛 노래의 마음에 비유했습니다.

바라보니 꽃도 단풍도 보이지 않는구나
포구(浦口)의 뗏집에 가을이 저물고」

고보리엔슈[小堀遠州]는 이것과는 틀린 효과를 노려 로지의 취의(趣意)가 다음 구(褠)에 표현되어 있음을 알립니다.

초저녁 달빛에 나무 사이로 호수가 보이는구나.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것들이 아닙니다. 새롭게 깨친 혼(魂)이, 과거의 몽롱한 꿈속을 방황하면서도 부드러운 영광의 감미로운 무아경지에 젖어 저편에 광활하게 퍼지는 자유를 동경한다. 이런 느낌을 로지로 하여금 주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로지를 따라 손님은 조용조용 성경(聖境)을 향해 걸어갑니다. 무사의 경우는 입구의 칼걸이[刀架]에 칼을 걸어야 합니다. 다실은 평화스러운 곳이기 때문입니다. 객은 석자[三尺] 전후되는 좁은문(門 ― 躙國 : 니지리구지)을 통하여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다보면 자연히 머리를 숙이고 무릎걸음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신분의 상하를 막론하고 모든 객이 지켜야하는 규칙인데, 이것이 바로 겸양을 가르치는 길이기도 합니다.

   자리에 드는 순서는 마찌아이[待合]에서 정해진 대로이며, 객은 한사람씩 차례로 다실에 들어가 먼저 상좌(上座 ― 도꼬노마 : 床の間)에 모신 그림이나 생화(生花)를 배견(拝見)하고 자기 자리에 앉습니다.
객이 모두 자리에 앉고 주위가 조용해지면 들리는 것은 오로지 물 끓는 소리뿐. 이 물 끓는 소리가 절정을 이루는 것과 주인이 다실에 들어오는 것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산중 폭포의 울림 바위에 부딪치는 파도소리, 먼 산의 솔바람 소리 같은 물 끓는 소리의 정취를 내야합니다.
대낮이라도 다실 안은 빛이 많이 들지 않게 합니다. 지붕이 낮고 경사져서 빛은 조금밖에 들지 않고 내부의 색조는 모두 수수한 색으로 통일되어 있습니다. 손님도 신경을 써서 그 조화를 깨지 않도록 수수한 색상의 옷을 입지 않으면 안 됩니다.

   원숙한 고(古)티가 사방을 지배하므로 금방 새로 산 것 같은 것은 금물입니다. 그러나 죽제(竹製)의 표자(杓子)와 마(麻)로 된 차수건[茶巾]만은 깨끗하고 흰 것일수록 좋아서 대조(對照)를 이루게 됩니다. 다실과 차도구는 낡았을지라도 철저하게 깨끗하며 방의 가장 어두운 구석일지라도 먼지 하나 없어야 합니다. 만일 있다면 그 주인은 다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다인의 첫째조건으로 쓰는 법, 깨끗이 하는 법, 씻는 법의 지식 있어야 합니다.

   리큐[利休]청정(淸淨)에 대한 관념엿볼 수 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 날 리큐는 아들 쇼안[少庵]이 로지를 청소하며 물을 주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쇼안이 일을 끝내자, 리큐는 「아직 깨끗해지질 않았어」하며 한 번 더 하라고 했습니다. 한 시간쯤 더 청소한 후 피로에 지친 아들은 아버지께 말했습니다.
「아버님 더는 할 일이 없습니다. 정석(庭石)은 세 번이나 씻었으며 석등용(石燈籠)과 정목(庭木)에는 충분히 물을 주었고 땅바닥은 나무 잎사귀 한 장 없이 깨끗합니다.」
그러자 리큐는 「바보 녀석!」하며 야단쳤습니다.
「로지는 그렇게 쓰는 것이 아니야」
하며 정원으로 간 리큐는 나무를 흔들어 마당에 빨갛고 노란 낙엽을 떨어뜨렸습니다. 리큐가 추구하는 깨끗함이란 단순한 청결이 아니고 아름다움과 자연이 한데 어울어진 깨끗함이었던 것입니다.

   스끼야(좋아하는 집, 好き家)란 무엇일까요. 개인의 예술적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건조물입니다. 스끼야는 다실 때문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후세에 남기기 위한 것도 물론 아닙니다. 그러므로 가옥(假屋)입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 자신의 집을 소지한다는 사고는 일본민족의 옛부터의 습관에 의한 것이기도 합니다.
신도(神道)의 미신적(迷信的) 전통에 의하면 어느 집이고 그 가장(家長)이 죽으면 그 집을 철거하는 관습이 있었는데 명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위생 때문이었다고 생각됩니다. 또 신혼부부에게는 새로 지은 집을 준다는 옛부터의 관습도 있습니다.
고대에 황실이 가끔 옮겨진 것이나 천조대신(天照大神)을 모신 이세(伊勢)의 대묘(大廟)를 20년마다 개축(改築)하는 것도 이러한 고대 의식(儀式)이 현존하고 있는 한 예입니다. 이런 관습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한결같이 건축양식이 목조였기에 부수기도 쉽고, 짓기도 쉽기 때문이었습니다. 벽돌이나 돌을 사용하는 영속적인 양식에서 이와 같이 이전을 되풀이 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견고하고 큰 중국식 목조건축이 채택된 나라시대[奈良時代]이후에는 항구적(恒久的)인 건축으로 바뀌어졌습니다.

   15세기에 들어서서 선(禪)의 개인주의가 확산됨에따라 가옥에 대한 옛 사고방식이 다실에 채용되어 더 큰 의의를 갖게 됐습니다.
선종 불교의 무상(無常)관정신 지상주의에서 가옥(家屋)은 육체의 가옥(假屋)으로 작고 초라한 순간의 집입니다. 산야에 자라는 초목으로 만들어진, 바람이 불면 금방 날아갈 것 같은 뗏집에 불과합니다. 초목을 엮어놓은 이음새가 끊어지면 원래의 황야로 복원됩니다.
다실의 구조도 이런 무상(無常)의 취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초가지붕도 은둔(隱遁) 취향이고 대[竹]를 기둥으로 사용하는 가벼움! 주변에 흔한 자재를 이용하는 게 모두 그렇습니다. 이런 간소하고 검약한 삶 가운데 세련(洗練)이란 미광(微光)으로 이를 미화하는 정신에서만이 다인의 풍정(風情)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다실은 개인의 취호(趣好)에 맞게 만들어지기 마련입니다. 어떤 의미로는 예술이 지닌 생명력의 원리를 실천하는 것이요, 그 시대 생활에 성실함으로서 예술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구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과거의 산물을 가볍게 보거나 후세의 요구를 무시하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과거를 자신의 몸으로 감득(感得) 동화(同化)해서 현재를 더 풍요롭게 즐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건축에 있어서 형식에 예속되면 개인표현은 속박당하고 맙니다. 현대 일본에서 흔히 보는 구미건축의 무분별한 모방은 참으로 슬픈 현상입니다. 진취적이라는 서양제국이 어째서 건축에서는 몰개성(沒個性)이고 구태의연한 형식을 되풀이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예술의 민주주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누군가 거장(巨匠)이 나타나 신시대를 예술적으로 개척할 것을 대망하고 있습니다. 고인(古人)을 경애하면서도 모방은 아니었으면 합니다. 그리스인이 위대한 이유는 그들이 결코 과거의 산물을 모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봐야합니다.

   다음으로 「빈집(空き家」이란 용어를 생각해봅니다. 「빈집」은 만물을 포함한다는 도교의 가르침을 전하고 있는 외에 장식이나 테마를 언제나 바꿀 수 있다는 생각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다실에는 심미적(審美的) 분위기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어느 물건을 일시적으로 놓아둘 뿐입니다. 그렇다 해도 결국은 다실입니다.
그때그때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무엇인가 특별할 예술품을 갖다놓으면서, 그것의 미를 강조하기 위해 다른 것들은 배경으로 선택되거나 배치(配置)될 뿐입니다.
이는 동시에 서로 다른 두 음악을 들을 수 없는 것과 같이 아름다움을 진정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주제에 집중시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일본 다실의 장식 체계는 서양 박물관의 뒤섞인 장식과는 대조적으로 다릅니다. 일본인은 간소한 장식을 좋아하며 또 장식 방법도 자주 바꾸는 습관이 있습니다. 일 년 내내 많은 회화와 조각, 골동품을 진열하고 있는 서양의 실내는, 우리에게는 그저 자기 부를 과시하는 속된 것으로만 보입니다.
한 점의 걸작을 걸어놔도 그것을 즐기려면 고도의 감상력(鑑賞力)이 필요한 것인데, 이에 비하면 구미의 가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색채와 형태의 혼란 속에서 나날을 보내는 분들의 감상력은 실로 대단하다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스끼야(數寄屋)」란 용어는 일본인의 장식 체계에서 또 하나의 국면을 가르칩니다. 대칭성(對稱性)이 결여된 일본의 미술품이 가끔 서양 비평가의 호평을 받는 일이 있습니다. 이것 역시 선(禪)을 통하여 도교 이념이 발현된 결과입니다.
뿌리 깊게 이원론(二元論)을 주장해온 유교나 삼존숭배(三尊崇拜)의 북방 불교도 그 이념을 구상화하는데 있어서는 대칭적(對稱的) 표현을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고대 중국의 조형예술이나 당대(唐代), 나라조[奈良朝]의 종교미술 역시 끊임없는 대칭성(對稱性)의 추구가 인정됩니다. 일본 고대의 실내장식 역시 분명히 규칙적인 배치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도교와 선(禪)은 「완전(完全)」의 개념이 이질적입니다. 도교의 철학은 그 동적(動的) 성질 때문에 완전 보다는 완전을 추구하는 과정을 강조하였습니다. 참다운 미(美)는 불완전(不完全)을 마음속에서 완전한 것으로 만드는 사람만이 견출(見出)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인생과 예술의 강력함은 그 성장의 가능성에 걸려 있습니다.
다실에 있어서 주인과 관련된 통합(總合)의 효과를, 마음속으로 완성하는 것은 손님 각자의 임무입니다.

   선(禪)의 사고방법이 일반화되면서부터 동양의 예술은 대칭을 피해 왔습니다. 대칭은 완성이 아니라 두 가지 것의 중복을 의미한다고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획일적인 의장(意匠) 역시 신선한 마음의 움직임을 말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물보다는 산수화조(山水花鳥) 쪽이 화재(畵材)로 애용되었던 것입니다. 인물은 다만 그것을 보는 사람으로서 존재했습니다.
우리들은 이따금씩 전부를 있는 그대로 나타냅니다. 아무리 자기도취에 빠질망정 자존(自尊)이란 미덕마저 불편하기 짝이 없는 것이 되기 쉽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다실에서는 어느 때고 중복을 거부하기 때문에 방의 장식에 쓰이는 물품은 색채나 모양이 중복되지 않게 선택해야 합니다. 생화(生花)가 있으면 꽃 그림을 걸지 말아야 하고, 둥근 솔을 쓰면 수호(水壹)는 각(角)진 것을 준비하고, 흑자완(黑茶碗)을 사용할 때는 검은색 차호(茶壺)를 쓰지 않아야 합니다. 도꼬노마(上座, 床の間)에 화기(花器)나 향로(香爐)를 놓을 때도 한가운데는 피해야 합니다. 한 가운데 놓으면 공간을 똑같이 둘로 나누기 때문입니다. 도꼬노마(床の間)의 기능은 방의 단조로움을 깨기 위하여 다른 기둥과는 색다른 나무를 썼습니다.

   서양의 맨틀피스(mantelpiece) 등이 좌우대칭의 진열을 선호하는 것을 보면서 필요 없는 되풀이라고 느낄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사람과 이야기 하고 있을 때 그 사람과 같은 크기의 초상화가 그 사람 뒤에서 나를 응시하면 어쩐지 말하기가 거북스럽고 어느 쪽이 진짜인지, 묘한 착각에 빠질 때가 종종 있습니다.
서양의 식당 벽에 줄줄이 걸려있는 그림도 마찬 가지입니다. 연회석 같은데서 그것들을 바라보면 소화불량이 될 것 같은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왜 하필이면 사냥한 짐승을 그린 것이나 물고기, 과실 등의 정교한 조각품을 진열하는지, 또 전래(傳來)의 식기를 진열하여 옛날 그것을 사용한 고인들을 생각하게 하는지….

   다실은 간소하고 세속을 등져 있어 외계의 번거로움을 떠난 성역(聖域)입니다. 이런 곳이기에 사람들은 아무 것에도 괘념(掛念)하지 않고 자유스러운 상태에서 마음 가는대로 아름다운 것에 몰입할 수가 있습니다.

   16세기에 다실은 일본 통일과 재건의 역군이었던 무사나 정치가들에게 즐거운 휴게소로 활용되었습니다. 그것이, 17세기 도꾸가와(德川) 막부(幕府)의 엄격한 형식주의가 발전한 후로는 예술애호자가 자유스럽게 교제할 수 있는 장소로 발전하였습니다. 위대한 예술품 앞에서는 영주(大名, 領主)나 무사나 일반인이나 구별이 없었습니다.
현대는 산업 지상주의이기 때문에 전 세계를 통하여 참다운 풍아(風雅)를 음미하기 어렵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그 어느 때 보다도 다실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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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3.31 18:20

100년전 일본인이 영어로 쓴 동양 차 이야기(6) - 예술 감상



예술 감상(藝術鑑賞)


거문고 길들이기

    도교(道敎)「거문고 길들이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 용문(龍門 : 중국 洛陽의 龍門山) 계곡에 숲 속의 왕이라 일컬을 만한 거대한 오동나무가 한 그루 있었습니다. 나무는 머리를 높게 들어 별과 대화하고, 청동(靑銅)으로 감고 있는 뿌리는 깊은 땅 속에서 잠들고 있는 은(銀)의 용(龍)을 휘감고 있었습니다.
한 마법사가 이 나무로 거문고를 만들어 황제에게 바쳤습니다. 황제는 크게 기뻐하며 궁중 최고의 악사를 불러 연주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나무의 정기가 너무 센 나머지, 다루기가 어려워서 어떤 악사도 거문고를 연주할 수 없었습니다. 거문고는 오랜 세월 황제에게 비장된 채, 「아아, 나를 튕기고 타 줄 명수는 이 세상에 없나 보구나」하며 비통해 했습니다.
어느 날 백아(伯牙)라는 거문고의 명인이 나타났습니다. 그는 거친 야생마를 진정시키는 것처럼 거문고를 부드럽게 애무하며 살며시 줄을 튕겨서 자연의 사계절을 노래하게 했습니다. 싱그러운 바람이며, 계곡을 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도 만들었습니다.
그랬더니 나무의 추억이 되살아났습니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미풍이 살짝 살짝 가지를 춤추게 하자 얼음이 녹아 바위 위를 흘러 부푼 꽃봉오리에 웃음을 선사합니다. 여름이 되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벌레들의 꿈꾸는 소리가 조용히 내리는 빗소리에 섞였습니다.
호랑이의 거친 숨소리도 들려오고 그에 응답하는 산울림 ―.
인기척 없는 가을밤의 달은 칼날처럼 날카롭게 서리 내린 초원을 비춰줍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겨울의 풍정! 흰눈 내리는 하늘을 백조가 무리지어 날고, 나뭇가지에 세차게 부딪치는 싸락눈 소리….

   백아는 줄을 골라서 이번에는 연가를 불렀습니다. 그러자 숲은 상념에 짓눌린 열렬한 연인처럼 흔들어 댔습니다. 구름은 교만한 소녀처럼 하늘 높이 흐르면서 검고 긴 그늘을 절망인양 창에 드리웠습니다.
다시 줄을 고른 백아는 전쟁을 노래했습니다. 서로 부딪치는 칼과 땅을 차는 준마들의 포효가 영웅들의 혼을 일깨웠습니다. 순간 거문고 속에서 용문의 폭풍이 일어났습니다. 용이 번개를 타고 하늘에 오르자 산사태의 굉음이 온 산에 울렸습니다.
황제는 그저 황홀하게 듣고만 있다가 백아에게 물었습니다.
「명금(名琴)을 이길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인가?」
백아는 말했습니다.
「폐하! 다른 사람들이 실패한 것은 자기가 연주한다며, 자신을 앞세웠기 때문입니다. 저는 거문고로 하여금 곡을 고르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거문고가 나였는지 내가 거문고였는지 저 자신도 잘 모르는 상태에서 연주를 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예술 감상의 깊은 의미를 잘 전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걸작이라 불리는 것들은 우리들의 뇌리에 있는 가장 묘한 마음의 금선(琴線)에 맞추어 연주되는 교향악과 같습니다.
참다운 예술은 백아이며 우리들은 용문의 거문고라 할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마법의 손끝이 튕겨지면 우리들 마음속에 잠들고 있던 줄[絃]이 일깨워져, 거기 맞춰 전신이 움직이고 진동하며, 마음에서 마음으로 이야기 되어 나갑니다. 그러면 그때 우리들은 소리 없는 것에 귀를 기울이고 형태 없는 것을 보게 됩니다.
결국 명인은 우리 의식에 없는 분위기를 불러 일깨워 오랜 동안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던 추억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며 가까이에 회귀하게 하는 것입니다.
공포로 움츠렸던 희망이, 오랜 동안 잊고 있었던 동경이 새로운 빛에 싸여 면전에 나타납니다.
우리 마음은 화가가 색채를 칠하는 캔버스입니다. 정감이 화구라면 명암의 밝음은 기쁨이요, 어둠은 슬픔입니다. 걸작이 우리에게 새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것과 같이, 우리 자신이 걸작의 원천이 되어있는 것입니다.

예술 감상에 없어서는 안 되는, 서로의 마음과 마음의 상통은 상호 양보하는 정신에서 이루어집니다. 예술가는 자기가 말하고 싶은 것을 전할 수 있는 기술을 알고 있지 않으면 안 됩니다. 보는 측에서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충분한 수용태세를 갖추어야 합니다.
종장(宗匠) 고보리엔슈[小握遠州]는 자신이 영주[大名:領主]이면서 다음과 같은 잊기 어려운 말을 남기고 있습니다.
「위대한 회화(繪畵)에 접한다는 것은 왕후(王侯)를 대하는 것처럼 해야 한다」고.
걸작을 이해하려면 그 앞에서 겸손한 마음으로 숨소리마저 죽여서 그가 이야기 하는 것이라면 아주 작은 소리일지라도 놓치지 않고 들으려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송 대의 한 비평가 이런 흥미 있는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젊을 때의 나는 내가 좋아하는 그림을 그린 예술가를 크게 칭찬했습니다. 그러나 감상력이 무르익어감에 따라 내가 좋아하게끔 그러준 작품을 좋아할 수 있는 나 자신을 칭찬했습니다.」

   요즈음에는 예술가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연구하는 사람이 아주 적어졌습니다. 무지나 편견을 완고하게 믿고 가볍게 지나쳐 버리려하니 이것은 슬픈 일입니다. 연구해 보는, 이 단순하기 그지없는 예술가에 대한 예의를 지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눈앞에 펼쳐지는 풍요한 아름다움의 향응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기회를 놓치고 맙니다.
명인은 맛있는 음식을 제공하려고 하나 우리들 측에서 맛 볼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항상 공복을 움켜쥐고 있는 것입니다.
걸작과 마음이 상통하면 바로 그 작품이 그 자리에 살아 있어서 친구가 되어 버리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가 만들어낸 사랑도 공포도, 우리 내부에서 되살아나 삶을 이어가는 까닭에 예술은 불노불사(不老不死), 즉 영원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호소하는 것은 손[手] 보다는 혼 ― 기술보다는 예술가 그 자신인 것입니다. 그 부름의 소리가 인간적이면 인간적일수록 대답하는 소리도 감회어린 것이 되는 것입니다.
예술가와 우리들과의 사이에는 이와 같이 은밀한 마음과 마음의 만남이 있음으로 해서, 비로소 시나 소설을 읽고 거기 나오는 주인공과 더불어 슬퍼하고 같이 기뻐할 수가 있습니다.

   일본의 세익스피어라고 예찬하는 지가마쓰[近松]극작의 중요한 법칙 중 하나가 관객에게 작가의 비밀을 털어놓는 일이라 하였습니다.
하루는 몇몇 제자들이 자기 작품을 보아달라고 가져왔는데, 그 중 지가마쓰 마음에 든 것은 한 편 뿐이었습니다.
「쌍둥이 형제가 무엇이 잘못되어 고민하는」세익스피어의 「잘못됨을 계속」과 흡사한 희곡이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 작품은 극 본래의 정신을 구비했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할 수 있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관중은 작가보다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어서 어디가 잘못되었는지도 알고 있다. 죄도 없는데 애통하게 운명에 밀려내려 가는 사람들을 가장 애석하게 여기는 것은 바로 관중이다.」

   지가마쓰 역시 관객에게 비밀을 알리는 방법으로 암시(暗示)란 것을 중히 여겼습니다.
걸작이라 불리는 것은 어느 것이나 그 배후에 방대한 사상의 넓이를 갖게 마련이어서 누구나가 외경의 념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런 가운데 친근해지면 서로의 마음이 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걸작이란 사람의 마음 깊은 저변에서 온화함을 샘솟게 하는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반대로 현대의 졸작들은 냉기가 서려서 단순한 형식적 의례 밖에는 얻어내지 못합니다.

   현대인은 기교에만 부심하지, 거의 자아(自我)를 넘지 못합니다. 용문(龍門)의 거문고를 다룰 수 없었던 연주인들처럼 자기에 대하여만 노래를 부릅니다. 이런 작품들은 과학에는 가까워졌을지 모르지만, 인간성이란 관점에서는 먼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여성 세계에 「교만한 남자에게는 반할 수가 없다.」란 말이 있습니다. 그런 남자는 애정이 들어가 자리할 틈이 없기 때문인데, 예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허영이란 마음이 통해야 할 정감을, 가로막고 그르치기 때문입니다.
육친 간에 서로 마음이 통하는 정신 유대가 있듯, 예술에서는 작품과 그 작품을 보는 사람과의 사이에 그런 정신적 유대가 생겨나야 합니다. 예술은 그 때를 신성시합니다.

   이 정신적 만남의 순간에,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아를 초월합니다. 그들은 존재함과 동시에 자기 존재를 떠납니다.
그들은 무궁(無窮)을 담 넘어 봅니다만, 그 환희를 말로 표현하지는 않습니다. 눈에는 혀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정신은 물질이란 구속에서 벗어나 자연에서 생성되는 리듬대로 움직이게 됩니다. 이리하여 종교에 가까워지며 인류를 고상하게 만들어 줍니다.
때문에 걸작은 신성한 것입니다. 옛 사람들은 훌륭한 예술가의 작품을 무한히 숭배했습니다. 종장(宗匠)들은 그 귀중한 도구를 종교적 차원으로 승화시켜 비장하였으니, 여러 겹으로 포장한 상자를 한 겹 한 겹 풀어 가면 마지막에는 부드러운 명주 천에 감싸인 신체에 이르게 됩니다. 이는 사람 눈에 띄는 일이 거의 없으며, 오의(奧義)를 전수받은 자에 한하여 보여지곤 합니다.
다도가 융성했던 시대에 무사들은 전공의 포상으로 넓은 영토보다, 진귀한 예술품 한 점 하사받는 것을 더 기뻐했습니다. 인기 있는 연극에 유명한 예술품을 잃었다 찾았다 하는 내용이 많습니다.

   셋숀[雪村]이 쓴, 유명한 달마 그림을 소유한 호소가와[細川候} 별장의 화재 사건을 테마로 한 연극 그 중 하나입니다. 별장이 한 당직 무사의 실수로 화재를 당한 즉, 그는 이 중요한 그림만은 어떻게든지 구해야겠다는 일념에서 불타고 있는 집 안으로 뛰어들어 벽에 걸린 그림을 움켜잡았지만, 출구가 화염에 싸여 길이 막혔습니다. 그림을 구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는 그는, 칼로 배를 째고 그림을 말아서 그 속에 집어넣었습니다. 얼마 뒤에 불이 꺼지자 반쯤 타다 남은 그의 사체가 발견됐는데, 그 뱃속에 화재를 면한 국보급 그림이 들어 있었습니다. 무서운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신뢰했던 무사의 충의를 포함하여 그들이 얼마나 예술을 존중하였는가를 알려주는 좋은 예입니다.

   예술이란 그것이 우리들의 마음에 와서 닿는 만큼 비례해서 가치를 갖게 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만일 우리들과 예술가의 마음의 상통이 보편적인 것이라면 예술은 누구에게나 같은 말을 할 것입니다. 우리들의 유전적 본능에 대해서는 재론의 여지가 없지만 성질은 전통이나 관습의 힘에 지배당하고 있기에 예술 감상력의 시야는 자연히 한정됩니다.
어쩌면 외부 영향이 아닌, 우리들 개성이 우리들 이해력을 스스로 한정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개인적인 심미안은 과거의 창작물 중에서 자기에게 닮은 것을 구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술 감상의 감각은, 닦으면 닦을수록 폭이 넓어져 이제까지는 몰랐던 많은 아름다운 표현을 맛 볼 수 있게 됩니다.
결국 우리들은 우주에 있어서 자기 자신의 모습만 보고 있는 것이며, 개인의 독특한 성질에 의하여 그 지각(知覺)의 형식도 스스로 규정지어 지는 것입니다.

   종장들은 거의가 자기의 감상안(鑑賞眼)의 척도에 도달한 것만을 모았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고보리엔슈[小握遠州]에 대한 에피소드가 생각납니다. 엔슈[遠州]의 제자들은 수집품에 나타난 스승의 훌륭한 기호에 감탄하며
「어느 것을 보아도 너무 아름다워서 누구나 놀라게 됩니다. 이는 선생님이 리큐[利休] 종장(宗匠]보다 더 우수한 취미를 가지셨다는 증거입니다. 리큐 종장[利休宗匠]의 애장품은 천 사람 중 한 사람이나 알아볼까 말까 하거든요」라고 제자가 말하니 엔슈[遠州]는 슬픔어린 표정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것은 내가 누구보다도 범인인 까닭이구나! 리큐 종장처럼 자기가 좋다고 느끼는 것만을 좋아할 용기가 없어진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대중이 좋아하는 것에 영합하고 말았구나. 리큐야 말로 천 사람 중에서 뛰어난 한 사람의 종장이다.」

   슬픈 일이지만 요즈음의 표면적인 예술 애호 열기는 거의가 실감과는 거리가 먼 공허한 것들입니다.
민주주의 시대에 있어서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감정과 관계없이 세속적으로 일반이 좋다는 것에 매달려 떠들어 댑니다. 그들이 욕심내는 것은 「값이 비싼 것」이지 「고아(高雅)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말로는 감탄하는 것 같지만, 초기 이태리나 아시카가시대[足利時代]의 명작을 보는 것보다 현대 기계문명의 소산인 그림 있는 잡지 보는 쪽을 더 편하게 여깁니다. 소화도 잘 되고 양식도 될 겁니다. 작품의 질보다 작가의 이름을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몇 세기 전에 중국의 비평가가 개탄한 것처럼 현대 사람들은 귀로 그림을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는 순수한 감상력의 결여에서 빚어진 일입니다.

   또 하나 자주 범하는 과오는 미술과 고고학의 혼동입니다.
옛것을 보고 느끼는 숭경(崇敬)의 념은 인간의 좋은 습성 중 하나이며, 더욱 도야해야 할 일입니다. 앞서간 종장들이 후세에게 인심 개발이 되는 길을 개척하여 준 점은 칭찬하여 마땅할 것입니다. 그걸 위해 그들은 몇 세기에 걸친 비판을 견디어 냈으며 지금 역시 영광의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실로 존경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들의 업적이 단지 옛것이기 때문에 존중된다고 하면 그것은 대단히 바보스러운 일입니다. 옛것에 대한 향수에 젖다보면 자칫하면 아름다움을 꿰뚫어 보는 안목이 흐려지기 쉽습니다.
작가가 묘지에 묻힌 뒤에야 「참으로 훌륭한 인생이었습니다.」 하며 꽃을 바치는 것입니다. 진화론을 믿었던 19세기에 우리들은 종족을 제일이라 생각한 나머지 그 안에 있는 개인은 망각하는 습성을 기르고 말았습니다.

   무엇이나 수집하고 싶어 하는 학자는, 시대의 편린이나 어느 유파(流波)의 견본 등을 조금이라도 많이 구하려고 초조해 합니다.
단 한 점의 걸작이 한 시대나 유파의 수없이 많은 졸작보다 훨씬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는 것을 잊고 있습니다. 많이 구해서 분류 따위나 하려할 뿐 즐거움을 가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과학적 진열 방법은 심미적 진열 방법을 무시하기 때문에 많은 미술관에서 즐거움이 적어졌습니다. 한 시대의 기본적 생활양식은 그 시대의 예술적 요구를 무시하고는 성립할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시대를 막론하고 예술은 진정 우리들의 것이며 우리들 자신의 반영입니다. 이것을 경시하는 것은 자신을 경시하는 것이 됩니다. 현대는 예술이 없다는 등 이야기를 하는데 그것은 과연 누가 책임져야 하는 말일까요.

   고인을 극구 흠모하고 칭찬하면서, 자신의 가능성에 눈을 돌리지 않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명성을 얻기 위하여 고군분투하는 예술가들 ― 냉랭한 모멸(侮蔑)의 그늘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지친 영혼들이 자기 본위적 생각에 빠진다면 무슨 말로 새로운 활력소를 불어넣어 줄 수 있을까요. 과거는 연민의 정으로 우리의 이 깊이 없는 빈약한 문명을 관조 하겠지요. 미래 역시 현대판 불모의 예술을 조소할 것입니다. 참으로 현대는 우리 생활 속에 존재하는 아름다운 것을 잃어가면서 예술까지 파괴시키고 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누군가 위대한 선각자의 출현이 기대되는 때입니다. 그래서 역사란 나무로 힘센 거문고를 만들고, 그 줄[絃]이 천재 연주인의 손끝에 닿아 아름다운 선율이 사회 전체에 울려 퍼지는 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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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전 일본인이 영어로 쓴 동양 차 이야기(7) - 다인2005.04.01by 반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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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4.01 14:36

100년전 일본인이 영어로 쓴 동양 차 이야기(7) - 다인


 
다인(茶人)

   종교에서는 미래가 우리 삶의 배후에 있다고 봅니다. 반면, 예술에서는 현전(現前) 그 자체에 영원이 존재한다고 보았습니다.
다인(茶人)들은 말하기를, 예술이란 그 예술을 실생활에 반영할 수 있는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다인들은 다실에서 도달할 수 있었던, 고도로 세련된 정신을 가지고 일상생활마저 규제하려는 노력을 했습니다.
그들은 어떠한 경우일지라도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고자 하였습니다. 일상의 대화도 주위와의 조화를 손상하지 않도록 했으며, 옷의 모양이나 색, 자세, 걸음걸이 까지 예술적인 사람됨을 나타내려고 했습니다. 어느 것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사람은 스스로를 아름답게 가꾼 다음에야 비로소 아름다움에 접근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다인은 단순한 예술가 이상의 것, 결국 예술 자체가 되려고 노력했던 것입니다.

그야말로 심미주의의 선 아닐 수 없습니다.「완전함」이란 인정하려고만 하면 도처에 존재합니다. 리큐[利休]는 기꺼이 다음과 같은 노래를 인용했습니다.
「화려한 꽃만 기다리는 사람에게, 눈 녹은 산촌에 움트는 풀을 봄의 징표로서 보여주고 싶구나.」
다인은 여러 방면의 예술 발전에 공헌하였습니다. 전통적인 건축의 실내장식을 완전히 개혁했으며, 다실의 장에서 설명한 것처럼 새로운 양식을 세웠는데 그것은 16세기 이후 세워진 궁전이나 사원에까지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만능의 재간을 타고 난 고보리엔슈[小握遠州] 계리궁(桂離宮), 나고야성(名古屋城), 이조성(二條城), 고봉암(孤蓬庵) 등에 그의 천분(天分)을 십분 발휘하였습니다.
일본의 이름 있는 정원 또한 거의 다인들의 설계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일본의 도기도 다인의 영감이 작용했기 때문에 그처럼 우수한 품질이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일본의 도공들은 다인들이 요구하는 다탕(茶湯)의 도구를 만들기 위해 모든 창의와 정혼(精魂)을 경주(傾注)하였습니다.
엔슈[遠州]의 7요(窯)로 알려져 있는 각지의 토질을 살린 도예는 일본도예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겐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직물에도 가끔 색이나 문양을 고안한 다인의 이름이 붙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회화와 칠기 분야 역시, 다인들이 많은 노력을 하였다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일본 회화에 있어서도 가장 큰 유파는, 다인이면서 도사(塗師), 도예가(陶藝家)로 유명한 혼마미고오에쓰[本阿弥光悅]에서 그 물줄기가 시작됩니다. 그의 작품 앞에서는 그의 손자인 고오포[光甫], 생질인 고오린[光琳]이나 겐산[乾山] 등의 대표작도 빛을 낼 수 없었습니다.
세상에서 고오린파[光琳派]라 불려지는 모든 그림이 사실은 다도의 한 표현입니다. 이 유파의 굵은 선에는 자연 그대로의 활력이 맥맥이 흐르고 있습니다.

   다인들은 이와 같이 예술의 각 분야에 걸쳐 그 천분(天分)의 발자취를 남겨놓았습니다. 그러나 실제의 일상생활에 끼친 영향에 비교한다면 그런 것은 별로 큰 것이 못됩니다.
고아(高雅)한 사교계의 의례뿐 아니라 우리들 가정에 있어서의 작은 관습마저도 모든 것이 다인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일본적인 맛이나 색이 짙은 요리도, 또 시중드는 방법도 다인의 고안에서 나온 것이 수없이 많습니다.
다인들은 수수한 색상의 옷을 입도록 가르쳤고 또 꽃을 가까이 하는 바른 정신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항상 간소한 것을 애호하도록 이끌었고 겸양의 아름다움을 시범하여 주었습니다. 차(茶)는 다인들의 가르침을 통하여 민중의 생활 깊숙이 착실하게 침투되었습니다.

   인생 ― 이라 부르는 이 우둔하고 거세게 휘몰아치는 해원에서는, 끊임없이 자기 생활을 바로 잡아주는 비결이 필요합니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보이기 위한 행복과 만족이나 공허 속에서 추구하는 ― 결국은 보잘 것 없는 짧은 인생을 마치고야 맙니다.
마음의 안정을 유지하려고 하면 더욱 비틀거리고 수평선에 떠 있는 구름은 하나 같이 폭풍전의 징후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거세게 몰아치는 파도가 영겁을 향하여 전진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면, 거기에는 환희와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물결치는 파도에 정(精)을 몰입하고, 열자(列子)와 같이 열풍을 타보지 않으시렵니까.

   아름다운 것과 더불어 살아온 사람만이 아름답게 죽을 줄 압니다.
위대한 다인들의 마지막은 그 생애처럼 영묘전아(靈妙典雅)한 것이었습니다. 우주의 위대한 리듬에 실리려고 노력한 그들은 어느 때라도 죽음의 세계에 진입할 수 있는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리큐[利休]의 최후의 다회」야 말로 빛나는 비극의 일단으로 영원히 이야기되어 전하여질 것입니다.

   리큐와 다이꼬오[太閣] 히데요시[秀吉]와는 친분이 상당히 두터웠습니다. 히데요시는 특히 리큐의 차를 대단히 높게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음모와 배신이 난무하여, 육친이라 할지라도 신용하지 않는 시대였습니다.
리큐[利休]는 그저 비위만 맞추는 부하는 아니었기에 다혈질의 무서운 후원자(後援者)인 다이꼬오[太閣] 히데요시[秀吉]와 의견 충돌이 가끔 있었습니다.
이러한 감정의 엉킴 때문에 두 사람 사이가 냉각되는 기간이 있었는데 평소 리큐[利休]를 시기하던 자들은 그 틈을 노렸습니다. 그들은 히데요시를 독살(毒殺)하는 음모에 리큐가 관여(關與)되어 있다고 꼬여 바쳤습니다.
어느 때고 리큐가 대접하는 차에 히데요시를 죽게 할 독약이 들어 있을 것이라고 귓전에 전했습니다.
일본을 통일하고 최고의 권력을 두 손에 거머쥔 히데요시는 누구라도 혐의만 있으면 즉각 처형할 수 있었습니다. 히데요시는 격노했고, 리큐[利休]는 노기 찬 군주 앞에 순종하는 것 이외에는 길이 없었습니다.

   히데요시는 과거의 정리를 생각하여 사형수가 영광스럽게 스스로 생명을 끊을 수 있도록 은전을 베풀었습니다.
정해진 자해(自害)의 날이 되자 리큐[利休]는 아끼는 문인들을 최후의 다회에 초청했습니다.
약속된 시간에 손님들은 슬픔에 잠긴 채 대합실에 모였습니다. 로지(露地)를 바라보니 정원의 나무들은 떨고 있었습니다. 나뭇잎이 팔랑거리는 가운데 집 없는 망자의 속삭임이 들려오는 것 같았습니다. 거뭇거뭇한 석등용(石燈籠)은 천국의 보초병인양 엄숙하게 서 있었습니다.
묘한 향(香)의 훈훈함이 다실에 감돌았습니다.
「들어오십시오!」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손님들은 차례로 들어와 자리에 앉았습니다.
도꼬노마[床の間]에 걸린 것은 고승의 묵적(墨跡)으로 만물의 부질없음을 설파해놓은 것이었습니다.
화로에 올려진 솥에서는 마지막 가는 여름을 무한히 슬퍼하는 매미 울음처럼 끓어오르는 물소리가 들렸습니다.
주인이 들어왔습니다. 이윽고 한사람 한사람에게 찻잔이 돌려졌습니다. 손님들은 묵묵히 마셨으며 최후로 주인 스스로도 잔을 비웠습니다.
정해진 작법에 맞추어 손님들은 도구를 배견(拝見)하길 원하였습니다. 리큐는 벽에 걸린 것을 비롯하여 다실 안의 모든 도구를 손님 앞에 내놨습니다. 손님들이 그 도구의 아름다움을 칭찬하니 리큐는 그 하나하나를 손에 잡아 한사람 한사람에게 기념으로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윽고 그가 마셨던 찻잔만이 그의 손에 남았습니다.
「불행한 자의 입에 더럽혀진 이 찻잔은 두 번 다시 다른 사람이 써서는 안 돼!」
리큐는 찻잔을 산산조각으로 때려 깼습니다.
다회가 끝나자 손님들은 눈물을 참으면서 최후의 이별을 고하고 다실을 나왔습니다. 리큐는 오직 한 사람, 각별했던 분에게 최후를 지켜봐주길 부탁하였습니다.

   둘 만 남자 리큐는 다회 옷을 벗었습니다. 그러자 이제까지 가려져 있었던 순백(純白)의 수의(壽衣)가 드러났습니다. 리큐는 자기 생명을 끊을 단도의 번쩍임을 유연(悠然)히 바라보며 다음과 같은 마지막 말을 남겼습니다.
人生七十 刀圍希咄  吾這寶劒 祖佛共殺
영원한 도검이여 자 -- 오너라. 불타도 달마도 나처럼 너는 쳐들어온 것이다.
그러면서 리큐는 만면에 웃음을 띤 채 영원한 나라로 떠났습니다.






기타

2007.10.21 00:57

차문화 발전의 3단계


 
차문화 발전의 3단계

    차는 예술품입니다. 그림에 좋고 나쁨이 있듯이 차에도 좋은 차와 나쁜 차가 있습니다. 지시안이나 셋숀[雪村]이 작품을 창작하는 데 아무런 규칙이 없는 것처럼 완벽한 점다(點茶)를 하는 데도 무언가 각별한 법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차엽(茶葉)의 제법(製法)에는 그것 나름대로의 개성이 있고, 물과 열(熱)에 대한 특유의 친화성이 있고, 그 위에 대대로 내려오면서 추억담이 곁들여져 독특한 비방이 이루어지는 법입니다.

   차가 가지고 있는 고아(高雅)한 특질을 끄집어내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만이 명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정성과 진실한 아름다움이 없어서는 안 되는데, 이 아름다움 ― 예술과 인생에 있어서 단순한 근본 원칙 ― 을 우리들은 자칫하면 무시하기 쉽고 그래서 혼이 날 때가 있습니다.

여기 대하여 명나라 시인인 이죽신(李竹嬾)은 이렇게 한탄했습니다.
「세상에 세 가지 슬퍼할 일이 있으니, 하나는 그릇된 교육으로 훌륭한 청년을 쓸모없게 만드는 것이요, 둘은 저속한 찬사로 훌륭한 그림의 격을 도리어 낮추어 버리는 일, 셋은 서투른 점다(點茶)로 좋은 차를 버리는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예술과 마찬가지로 차도 시대에 따라 변천이 있었습니다. 차의 진화는 크게 단차(團茶)․말차(抹茶)․전차(煎茶)의 3단계로 나눌 수 있는데 현대는 세 번째 전차 단계에 속해 있습니다.

   진화 단계에 따라 음다법(飮茶法)도 변화하면서 그 시대의 정신을 여실히 나타내고 있습니다. 우리들 생활이란 결국 속마음의 표현인 것이며, 무의식 가운데 하는 행동 역시 속마음의 끊임없는 발로이기 때문입니다.

일상의 음다사(飮茶事)에는 철학이나 시(詩) 속에 반짝이는 섬광같이 그 민족의 이상을 알 수 있는 실마리가 담겨져 있습니다. 인기 있는 포도주의 이름이 변함으로 해서 유럽의 서로 다른 시대와 국민의 특질을 명확히 알 수 있듯, 시대가 이상(理想)으로 여긴 차문화의 변천은 동양문화의 다양한 양상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달이는 차[團茶]․휘젓는 차〔抹茶〕․우리는 차〔煎茶]당대(唐代)․송대(宋代)․명대(明代)의 독자적인 취미를 분명히 구별해주고 있습니다. 상식적인 예술분류상의 용어를 빌면 그것은 차의 고전주의(古典主義)․낭만주의(浪漫主義)․자연주의(自然主義)라 할 수도 있습니다.

   차나무는 중국 남부에 서식하는 것으로 먼 옛날부터 중국의 식물학 및 의학에는 잘 알려진 것입니다. 옛날 문헌에는 도(茶)․설(蔎)․천(荈)․가(檟)․명(茗) 등의 명칭으로 적혀 있습니다. 피로회복․심기상쾌(心氣爽快)․기력충실(氣力充實)․시력회복(視力回復) 등의 효능이 있는 보배 같이 소중한 것으로, 내복약으로 음용했을 뿐만 아니라 가끔 류마치스 등 통증에 바르는 외용약으로도 쓰였습니다. 도교에서는 이것을 불로장수의 주성분이라고 하였고, 불교에서는 좀 더 용도를 넓혀 장시간 명상 때 졸음을 물리치는 약으로 썼습니다.

   4, 5세기 경에는 양자강(楊子江) 유역 사람들이 차를 많이 애하였는데 현대의 「茶」라는 표의문자가 대체로 이 시대에 정해졌다고 보면 됩니다. 이는 분명히 「도(荼)」라는 고전어의 변형인데, 남조(南朝) 시인의 작품에 보면 「액체를 이루는 비취의 포말」이라고 하여 차를 열광적으로 숭배한 대목들이 있습니다.

   당시의 황제는 고관들의 무훈이나 공로에 대한 포상으로 진귀한 제법(製法)의 차를 내렸습니다. 하지만 그 시대 음다법은 대단히 원시적인 것이어서 찻잎을 찌고[蒸] 발(鉢)에 갈아서 단차(團茶)를 만들어 쌀․생강․소금․귤껍질․향료․우유에다 때로 옥파까지 혼입(混入)하여 달였습니다.

이러한 풍습은 현재도 티베트나 몽골의 일부 부족 사이에 남아 있는데, 같은 재료로 변형된 시럽을 만들기도 합니다. 러시아인은 중국의 대상(隊商)에게서 차 마시는 법을 배웠는데 그들이 차에 레몬조각을 띄우는 것은 이때 생겨난 습관으로 보입니다.

청자(靑磁)와 차의 관계

   8세기 중엽에 출생한 육우(陸羽)는 우리들이 마시고 있는 차의 최초의 사도(使徒)입니다. 그가 태어난 때는 불교․도교․유교가 상호보완하고 융합하려는 시대였습니다. 당(唐) 시대, 이와 같은 빛나는 시대정신이 있었기에 차는 자연 그대로 방치된 상태를 벗어나 참된 이상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범신론적(汎神論的) 상징주의의 영향으로 당시의 사람들은 개개의 존재에서 우주의 축도를 보았습니다. 시인 육우는 다탕(茶湯) 하나에서 만물을 지배하는 조화와 질서를 관취(觀取)하였으며, 유명한 저서 『다경(茶經)』으로 다도를 확립하였습니다. 그 공적으로 육우는 성인(聖人)의 반열에 올려져 차의 수호신으로 숭앙받고 있습니다.

   육우의 『다경(茶經)』은 모두 3권 10장으로 엮어져 있습니다. 제 1장은 차나무(茶木)의 성질, 제 2장은 다엽(茶葉)을 따는 기구(器具), 제 3장은 다엽(茶葉)의 선별법을 논하고 있는데, 육우의 말을 빌면 최상의 잎은 「북방족(北方族)의 가죽신처럼 주름지거나 쭈그러진 것도 있고, 혹이 달린 들소의 가슴처럼 반듯한 것도 있고 모가 난 것도 있다. 산에서 떠오르는 구름 같기도 하고 둥근 버섯 모양의 것도 있다. 바람이 잔잔히 수면을 스쳐갈 때처럼 잔물결 같은 것도 있다. 비에 씻긴 산뜻한 대지처럼 윤이 나고 부드럽다.」고 했습니다.

제 4장은 24종이나 되는 차 생활도구를 설명하고 있는데, 풍로(風爐)로 시작하여 도구 전부를 담는 차찬장[茶簞笥]으로 종결짓고 있는 것에서 육우의 도교적인 상징주의 경향을 엿볼 수 있습니다.

여기 관련하여 차가 중국 도자기 예술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중국의 자기는 비취의 묘한 색채를 재현시키기 위해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그 결과 당(唐) 시대 남부에서는 청자(靑磁)가, 북부에서는 백자(白磁)가 탄생했습니다. 육우는, 차를 하는 데는 청자가 이상적이라고 여겼습니다. 이는 백자가 차를 복숭아 색으로 보이게 해서 맛을 짙게 한다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당시의 차가 단차(團茶)였기 때문인데, 후일 말차(抹茶)를 즐겼던 송(宋) 시대 다인들은 짙은 쪽빛과 흑갈색(黑褐色)의 중량감 있는 다완(茶碗)을 애호했습니다. 그리고 전차(煎茶)를 즐긴 명(明) 시대 사람들은 순수한 백자를 좋아했습니다.

  『다경』 제 5장에 육우는 점다법을 적고 있는데, 그는 소금 이외의 혼합물을 일체 배제했습니다. 이제까지 가끔 논하여졌던 물의 좋고 나쁨과 탕의 끓는 모양에 대하여는, 솟아나는 물[湧水]이 최상이고, 다음이 냇물[川水], 그 다음이 우물물[井戶水]이라고 했습니다.

   탕의 끓는 모양에도 3단계가 있다고 하였으니, 첫 끓음[沸]은 솥 안에 작은 물고기의 눈[目]같은 물거품[泡]이 송알송알 깔릴 때, 두 번째는 그 포말들이 공모양의 구슬을 이루어 솥 가운데로부터 구슬처럼 연달아 솟아오를 때, 세 번째 단계는 파도치듯 맹렬하게 끓는 것이라 했습니다.

  「단차(團茶)는 아주 부드러워질 때까지 불에 쪼여 좋은 종이에 말아 비벼서 가루로 만든 다음,  첫 끓음(初沸)에서 소금을 넣고, 두 번째 끓음에서(沸)에서 차를 넣고, 세 번째 끓음(沸)에서 냉수 한 잔을 섞어 차를 정지(靜止)시켜 물의 정기(精氣)를 식힌 다음 차를 다완(茶碗)에 부어 마신다.」고 했습니다.

   영주(靈酒)란 바로 이런 차일 것입니다. 엷은 차잎이 맑은 하늘에 뜬 비늘구름처럼, 또는 에메랄드 흐름에 흔들흔들 떠도는 수련(水蓮)처럼 번지는 것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래서 당(唐) 시대 시인 노동(盧仝)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一碗으로 입술과 목을 축이고
二碗으로 우수(憂愁)를 쫓고
三碗으로 몸속에 남은 것은 문자(文字) 5천권
四碗으로 현세의 모든 제악(諸惡)이 땀으로 발산되고
五碗으로 몸과 마음이 맑아지니
六碗에 이르러 불로(不老)의 세계로 나를 유인하는 구나
七碗은 마실 수가 없구나. 지금은 우화등선(羽化登仙)의 심지(心地)이며, 겨드랑이에서 청풍(淸風)을 느낄 뿐, 봉래산(蓬萊山)이 어드메냐, 이 청풍 타고 가고 싶구나.

   『다경』 종장(終章)에는 세간의 음다법 중 속되고 좋지 않은 점, 차의 명인들의 간단한 전기(傳記), 중국 내의 유명한 다원(茶園), 여러 종류의 다기(茶器)․다도구(茶道具) 삽화(揷繪) 등을 기록했다고 하는데 이 장은 전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다경』이 세상에 처음 나왔을 때 대단히 평판이 좋았음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육우는 당의 8대 대종(代宗: 763~779)과 교분이 두터웠을 뿐 아니라 명성만큼 많은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득도한 사람은 육우의 점다와 제자의 점다를 맛으로서 구별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 관리가 찾아 왔다가 위대한 육우의 차 맛을 몰랐던 까닭으로 유명해졌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송(宋) 시대 말차(抹茶)가 유행하면서 그것이 차의 제 2의 유파가 되었는데 이는 차엽을 먼저 작은 돌절구[石臼]에 넣어 곱게 찧고, 거기에 열탕을 붓고, 대[竹]를 가늘게 쪼개어 만든 포립기(泡立器:茶筅)로 휘저어 줍니다.

이 새로운 점다법이 유행하면서 소금은 쓰지 않게 되었습니다. 송나라 사람들의 끽다열(喫茶熱)은 그칠 줄 몰라서 서로 경쟁적으로 진귀하고 새로운 점다법을 만들려고 애썼으므로 정기적으로 차겨루기 대회를 열어 우열을 가리게까지 되었습니다.

송의 8대 황제 휘종(徽宗;1101~1124)은 정치적으로는 좋은 군주가 되지 못했지만 좋은 예술가이기는 했습니다. 그는 좋은 차를 구하기 위하여 많은 재정을 소모했고, 24권에 달하는 차에 대한 서적을 저술했는데, 여러 가지 차 중에서 「백차(白茶)」를 가장 진귀한 차라 하였습니다.

   송 시대에 차의 이상(理想)은 당 시대와는 바뀌었으니 그것은 양 시대 인생관의 차이에서 오는 것입니다. 일례로 송 시대 사람들은 그 선조인 당 시대 사람들이 상징화했던 것을 현실에 구현하려고 했습니다. 즉 신유교(新儒敎)에 있어서는 우주의 법칙이 현상계(現象界)에 반영되는 것이 아니고, 현상계 그 자체가 우주의 법칙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영겁(永劫)은 순식간이며 열반(涅槃)은 항상 손 안에 있고 불후(不朽)는 영겁(永劫)이 변전(變轉)하는 가운데 있다는 도교적인 이해가 그들 사고에 전적으로 침투하고 있었습니다.

진실로 긴요한 것은 완성에 이르는 과정이지 완성 그 자체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런 논리를 통하여 인간은 자연과 직면하게 되었으며 「삶의 술(術)」에 새로운 의미가 부여되기 시작했습니다.

   다도가 단순한 시적(詩的) 오락이 아니라 자기를 아는 것 ― 자성여해(自性予解) ― 의 수단된 것입니다. 왕원지(王元之)는 차를 상찬(賞贊)하길, 「진지한 직언처럼 혼(魂)에 깊숙이 스며드는 그 현묘(玄妙)한 씁쓰레한 맛은, 좋은 말을 들은 뒷맛 같다」고 했습니다. 또 소동파(蘇東坡)차가 갖는 부패(腐敗)를 거부하는 청정무구(淸淨無垢)의 힘을 참된 유덕자(有德者)로 비유했습니다.

  불교도들은 도교의 교의(敎義)를 폭넓게 융합한 남방선(南方禪)의 차 방법을 완벽하게 정립시켜 갔습니다. 선승(禪僧)들은 보리달마상(菩提達磨像) 앞에 모여 한 잔의 차를 성찬처럼 경건한 자세로 나누어 마셨습니다. 이러한 선(禪) 의식이 발전하여 15세기 일본의 다도로 확립하게 됩니다.

차 중의 차는 말차

불행하게도 13세기 들어 몽골민족인 원(元)의 세력이 커졌습니다. 급기야 중국대륙을 지배하게 된 원(元)의 폭정은 찬란했던 송(宋) 문화를 송두리채 파괴시켰습니다.
뒤에 명(明)이 들어서서 국가 재흥(再興)을 시도하였지만 이도 오래 가지 못하고 내분에 시달리다가 17세기에 다시 외적인 만주인에게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역사의 격랑을 겪으면서 풍속습관이 변혁되고 왕년의 면모가 사라지니 말차(抹茶)도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명의 어느 훈고학자(訓古學者)가 송 시대 고전에 나오는 차선(茶筅)의 형태를 몰라 당황한 기록도 있습니다.

지금에 와서는 뜨거운 물에 차엽을 넣어 우려서 마시고 있으니 서양인이 옛 끽다법을 모르는 것은 당연합니다. 유럽은 명(明) 시대 말기에 처음으로 차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중국인에게 차는 중요한 음료이기는 하나 옛날처럼 정신적 이상은 아닙니다. 이 나라의 기나긴 비참한 역사가 이 나라 사람들의 「삶의 의미를 희구하는 마음」을 고갈시킨 까닭입니다. 중국도 현대화했습니다. 새롭게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시인이나 옛 사람들의 영원한 활력원 ― 꿈을 믿는 숭고한 신앙 ― 은 잊고 말았습니다.

우주의 철리를 공손히 받아들이고 자연과 더불어 호흡은 하지만, 자연을 정복하려는 의욕도 없고 숭배하려고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꽃과 같은 방향(芳香)을 발산하는 황홀한 중국인의 전차(煎茶), 당 송 시대 의식이 보여주었던 그 몽환경(夢幻境)은 찻잔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습니다.

   중국 문명의 발자취를 충실하게 밟아온 일본은 이 차의 3단계를 빠짐없이 알고 있었습니다. 729년 성무천황(聖武天皇) 때에 이미 나라[奈良]의 궁정에서 100인의 승려에게 차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때에 사용된 차엽은 견당사(遣唐使)를 통하여 당에서 수입되었을 것이고, 당시 당에서 유행하는 점다법에 따라 사용되었을 것입니다.

   801년에는 승(僧) 최등(最澄)이 당에서 차 종자를 일본에 가져와 에이산(叡山)에 심었습니다. 그 후 차가 귀족, 승려사이에서 애호되고 일반화되면서 여러 지방에 다원(茶園)이 조성되었습니다.

   송 시대 말차는 남방선(南方禪)을 공부하러 갔던 영서선사(榮西禪師)의 귀국과 함께 1191년 일본에 들어왔습니다. 그가 가지고 온 새 품종이 세 지역[三個地方]에 심어졌는데 교오토(京都) 근교 우지지방(宇治地方)의 다원이 그 중 하나입니다. 우지에서는 오늘날도 세계에 자랑하는 좋은 차가 생산되고 있습니다. 영서(榮西) 선사가 전한 남방선도 놀라운 속도로 포교되면서 송의 다례법(茶禮法)과 이상(理想)이  함께 보급되었습니다. 15세기에 다도는 완전히 확립되면서 종교에서 분리 독립한 예법으로 그 자리를 굳혔습니다.

   그 다음에 중국에서 유행한 전차(煎茶)는, 일본에는 비교적 근년에 전하여진 것입니다. 17세기 중엽 이후의 일로, 말차(抹茶)가 최고의 위치를 확고히 지키고 있는 가운데 일상의 끽다에 전차(煎茶)가 스며들기 시작했습니다.

송 시대에 추구했던 이상의 극치는 일본의 다탕(茶湯) ― 다도 ― 에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1281년 계속되는 몽골의 침입을 물리친 덕분에, 일본은 기왕에 받아들인 송(宋)의 문화(文化)를 다듬고 발전시킬 수 있었습니다. 일본에 있어서의 다탕 ― 다도 ― 은 마시는 법 이상(以上)의 것이 되었으며, 이윽고 삶의 술(術)에 관한 종교로 자리 잡았습니다.

다탕 ― 다도 ― 은 우선 청정(淸淨)과 세련(洗練)을 존중하는 은밀한 자기표현이 되었습니다. 또 주객(主客)이 일체(一體)가 되어 함께 있는 시간 현세의 행복을 최대한 발휘하게 하는 신성한 임무를 띄게 되었습니다.

다실(茶室)은 인생이라는 음울한 황무지에 오아시스 같은 곳이 되었습니다. 피로한 나그네는 이 샘터에 모여 예술 감상으로 목을 축이면서, 차와 꽃과 그림으로 꾸며진 즉흥극(卽興劇) 같은 의식을 즐겼습니다. 따라서 다실에서는 조화를 깨는 어떠한 색채도, 리듬을 흩어놓는 작은 소리도, 어울리지 않는 움직임도, 통일을 깨는 말씨도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모든 움직임을 단순화하여 자연스럽게 진행하였고, 나아가 이것이 다회(茶會)가 바라는 이상적인 방향이 되었습니다.

다탕 ― 다도 ― 의 배후에는 이처럼 미묘한 철리(哲理)가 숨어있으니 일본의 다도는 그 현묘한 이치, 즉 도교의 현대적 변신이었던 것입니다.




  ㅡ  반취다도교실 반취동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