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선 제118권 / 비명(碑銘) / 홍진광제 도대선사 각엄존자 증시 각진국사 비명 幷書 外

2019. 6. 19. 22:24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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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선 제118권 / 비명(碑銘)





 

왕사 대조계종사 일공정령 뇌음변해 홍진광제 도대선사 각엄존자 증시 각진국사 비명 병서 (王師大曹溪宗師一邛正令雷音辯海弘眞廣濟都大禪師覺儼尊者贈諡覺眞國師碑銘) (幷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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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충(李達衷)

   지원 14년 을미년에, 왕사(王師) 각엄존자(覺儼尊者)가 적멸하였다. 5년이 지난 뒤에 그의 무리 원규(元珪) 등이 임금께 아뢰기를, “우리 스승님의 행실이 묻히어 없어지게 버려둘 수 없으니, 원하옵건대, 비석을 세워 기록하게 하소서.” 하였다. 이에 임금이 신에게 명령하여 비문을 지으라고 하였다. 신이 이미 명령을 받고 가만히 생각하니, 옛날에 달관한 사람들은 몸 담은 세상을 여관으로 생각하고, 명예와 지위를 헌 신짝 같이 본다고 하였다. 더구나 부도씨(浮屠氏)는 유위(有爲)를 꿈처럼 덧없이 여기고 무상(無相)을 굳게 지켜 청정하고 적멸하여 이루 이름지어 말할 수 없다. 비록 더할 수 없이 칭송한들 사(師)에게 무슨 도움이 있겠는가. 그러나 그의 무리가 통절하게 사모하는 것은 사의 교화가 반드시 그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었기 때문이며, 우리 임금께서 믿고 숭앙한 것은 사의 도가 반드시 다스리는 데 도움이 있었기 때문인 것이니, 서술하지 않을 수 없다.

   옛날 우리 태조(太祖)께서 일찍이 국가를 창건하매, 모든 왕화(王化)를 도와 밝히고, 민생을 보우할 만한 것은 하지 않음이 없었다. 불법은 그 교화가 어질어서 우리 나라의 정교(政敎)에 보탬이 된다고 하여, 드디어 널리 불사를 세우고 그의 무리들을 머물러 살게 하였다. 선종과 교종이 각각 그들의 법으로써 나라를 복되게 하나 선종은 교종에 비하여 더욱 왕성하였다. 도량을 주재하는 자는 그럴 만한 사람이 아니면 감히 그 자리에 있지 못하는 것이니, 그를 존숭하기 때문이라는 뜻이 이미 분명한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뒷날 혹은 게을러질까 염려하여 신서(信誓) 10조를 만들어서 조서로 반포하였다. 그 첫째 조목에 이르기를, “삼보(三寶)를 존경하고 신앙하라.” 하였다. 이로부터 그 뒤로는 반드시 그들의 무리 중에서 덕이 높은 자를 기용하여 예로써 섬기어 임금의 스승으로 삼게 되었다. 대대로 이루어 놓은 규례가 있어서 예의 형식이 점점 갖추어졌다.

   위대한 우리의 주상께서는 정신을 가다듬고 잘 다스리기를 기도하여 밤낮으로 근심하고 부지런하게 하였다. 베풀어 하는 모든 일은 거의 다 옛법을 좇으며, 재상들에게 자문하고 여러 종문(宗門)을 방문하고 이르기를, “보잘 것 없는 어린 내가 왕위를 이었는데, 하필이면 어려운 때를 만났으니, 임금으로서 위에 임할 자격이 없을까 두려워한다. 장차 승려 중에서 덕이 높은 자를 높여 스승으로 모시어 나의 다스림을 보필하게 하고 조상의 교훈을 빛나게 하고자 하는데 누가 좋은가.” 하였다. 여럿이 아뢰기를, “각엄존자(覺儼尊者)만한 이가 없습니다. 전대(前代)에서 그를 존숭하여 호를 주어 그의 덕을 칭찬하였습니다.” 하니, 곧 주무관(主務官)에게 명령하여 드디어 왕사(王師)로 책봉하였다. 그때 사(師)는 불갑사(佛岬寺)에 머무르고 있었다. 나이가 많고 길이 험난하여 감히 불러오지 못하고, 사(師)의 초상을 그려 놓고 보는 예를 거행하였으며, 익재(益齋) 이시중(李侍中)으로 하여금 찬(讚)을 짓게 하고 크게 예물과 예의를 갖추어 사가 머무는 곳에 가게 하였다. 스승으로 섬기는 예를 표시함에 정성과 존경이 돈독하고 지극하였다. 사가 국서(國書)를 받고 말하기를, “노승이 일찍이 전왕(前王)의 그르치신 은총을 입어 외람하게 왕사의 지위에 있었는데, 이제 또 중한 명령을 욕되게 하였으니, 깊이 두렵고 부끄러워하는 바 있습니다. 향화(香火)의 받듬을 부지런히 하여 임금께 복을 받들어 올림이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하였다. 실로 금상께서 즉위하신 제 2년인 임진년의 일이었다.

   사(師)의 휘는 복구(復丘)이니, 스스로 호를 무언수(無言叟)라고 하였다. 고성군(固城郡) 사람이니, 판밀직 우상시 문한학사 승지(判密直右常侍文翰學士承旨) 이공(李公) 휘 존비(尊庇)의 아들이다. 사의 족계(族系)는 안팎으로 세상에 혁혁하게 드러났으므로 여기에서는 그의 계보를 생략한다. 사는 위대한 고승이다. 모부인(母夫人)이 항상 대승불경(大乘佛經)을 가지고 외우고 있었는데, 일찍이 꿈에 한 거사가 의관을 성대하게 차리고 앞에 와서 말하기를, “내가 이미 왔습니다.” 하였다. 이어 임신하여 지원(至元) 경오년 9월 15일에 낳았는데, 자질이 밝고 맑아서 진세(塵世)의 보통 아이들과는 같지 않았다. 조금 자라서 불법을 존경할 줄 알았으며, 장난하고 놀 때의 장난거리도 반드시 도량의 규칙을 본뜨는 것이었다. 나이 겨우 10세 때에 조계종의 원오국사(圓悟國師)에게 가서 머리를 깎고 수구(受具 구족계를 받음)하였다. 얼마 안 되어 원오국사가 입적하매, 그의 유촉(遺囑)으로 대선사(大禪師) 도영(道)에게 추종하여 쉬지 않고 부지런하게 배웠다. 10년만에 배움이 이루어지니 총림(叢林)에서 여러 사람의 우두머리로 추앙되었다. 경인년 가을에 선선(禪選) 과거에서 장원으로 급제하니, 그 때 나이가 21세였다. 보는 바가 이미 초연하여서 도에만 뜻을 두고 번거로운 것을 싫어하였다. 구름처럼 노닐면서 도를 찾고 흙덩이처럼 움직이지 않고 앉아서는 심(心)을 관조하였다. 산과 물의 경치 좋은 곳에 슬슬 노닐고, 구름과 수풀 사이를 유유자적하면서, 공명을 위한 길은 밟지 않기를 맹세하였다. 자각국사는 사의 제2의 스승이었다. 사를 대우하기를 지극히 예로써 하였다. 일찍이 자기의 학도들을 사에게 맡기니, 사가 말하기를, “자기에게 얻은 바가 있은 뒤라야 남에게 전할 수 있는 것인데, 나는 진실로 감히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하고, 드디어 백암사(白巖寺)에 가서 동지 몇 명과 더불어 밤낮으로 참구(叅究 참선하여 진리(眞理)를 연구함)하기를 또 10여 년이나 하였다. 월남송광대도량(月南松廣大道揚)에 머무른 것이 전후 모두 40여 년이나 되었다. 그동안 나라를 복되게 하고 민생을 이롭게 한 일과, 포상과 존숭하고 하사(下賜)의 은총을 받은 것은 갑자기 다 헤일 수도 없다. 그러나 그런 일들은 또 사의 찌꺼기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쓰지 않는다.

   만년에 불갑사에 머물게 된 것은 임금의 명령에 좇은 것이다. 그의 무리들에게 말하기를, “지난날 이 산에서 자고 간 일이 있었는데, 꿈에 어떤 사람이 와서 절하고 말하기를, ‘사께서는 마땅히 이곳에 머무르실 것입니다’ 하기에, 나는 마음으로만 이상하게 여겼더니, 이제 그 꿈이 증험이 있다.” 하고, 송(頌)을 지어 말하기를,

임금이 오성 불갑사를 주시니 / 君賜筽城佛岬山
사람들은 나더러 게을러진 새 돌아올 줄 안다고 하네 / 人言倦鳥已知還
공손히 간절하게 하늘 같은 수를 비노니 / 殷勤薦祝如天壽
이로부터 나라 기초 길이 편안하리라 / 從此邦基萬古安

하였다. 그가 임금과 나라를 위하는 일에 힘쓰던 마음을 또한 볼 수 있다.

   을미년에 백암사(白巖寺)로 옮겨서 우거하였다. 6월에 병들었다가 7월 27일에 병이 조금 덜하니, 국왕과 재부(宰府)에 하직하는 봉함의 편지를 써서 읍관(邑官)에게 청탁하여 인신(印信)을 찍어 봉하게 하였다.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깎고 목욕하고 법복을 갖춰 입은 뒤에 모시는 자에게 명하여 북을 치게 하고, 작은 선상(禪床)에 앉아서 말하기를,

곧 심이고 곧 불인 강서의 늙은이여 / 卽心卽佛江西老
불도 아니고 심도 아닌 물외의 옹이로다 / 非佛非心物外翁
날다람쥐의 소리 속에 나 홀로 가노니 / 鼯鼠聲中吾獨往
열반에는 죽고 사는 것이 본래부터 공이로구나 / 涅槃生死本來空

하고, 의젓이 화(化)하니, 자색 구름은 골짜기에 가득하고, 얼굴빛은 분바른 것 같았다. 이튿날 문인들이 울며 절의 서쪽 산봉우리 아래에서 화장하고, 유골은 함에 담아서 불갑사로 모셔 왔다. 12월에 임금이 사자(使者)를 보내어 조위하고, 시호를 각진국사(覺眞國師)라고 하였으며, 탑(塔)은 자운(慈雲)이라고 명명하였다.
국사의 춘수는 86세이고, 승려의 경력은 76세였다. 사람됨이 간묵(簡黙)하고 맑고 순박하며 단아하고 평화스러우며 곧고 정성스러웠다. 이마는 푸르고 눈썹은 반만 희고 입술은 붉고 이는 희어서, 멀리서 바라보면 깨끗하기가 신선과 같고, 가까이 나아가면 온화하기가 부모와 같았다. 입으로는 남의 선악을 말하지 아니하고, 마음으로는 공경함을 지니고 있었다. 평생을 방장(方丈 주지)으로 지냈으나 한 개의 제물도 갖지 아니하였다. 그가 조술(祖述)하는 종파는 보조(普照)로부터 국사에 이르기까지 모두 13대이며, 그의 문인으로서 뛰어난 자는 선원(禪源)ㆍ백화(白華)ㆍ가지(迦智)ㆍ마곡(麻谷) 이하 1천여 명이 된다. 내질(內姪)인 행촌(杏村) 시중(侍中)은 지금의 명재상(名宰相)으로서 우리들의 모범이 되어 있다. 행촌의 아우 이부 상서(吏部尙書)는 나의 동갑인 친구로서 내가 또 한 번 주실(籌室)에 참여하였더니, 그 뒤로 여러 번 편지를 받게 되어 아주 다행으로 생각한다. 그런 까닭에 국사의 비명을 글의 낮고 졸렬한 것을 돌아보지 않고 다행으로 생각하여 글을 쓴다. 그 명(銘)에 이르기를,

높아도 위태하지 않음은 / 高而不危
우리 국사의 스스로 하심이고 / 吾師之爲
몸을 낮추어 스스로 기르심은 / 卑以自牧
우리 임금의 복이로다 / 吾王之福
큰 길이 갈림길로 나뉘었으나 / 大道歧分
한 근원에 뿌리하였더라 / 本乎一原
서로 도와서 제도하여 / 相須以濟
복지를 세상에 키우시니 / 介祉于世
몇천 년 몇만 년 / 於萬斯年
뒤에도 빛이 나고 앞에도 광채나네 / 耀後光前
비석에 새기는 사연이야 / 刻辭于石
찌꺼기며 막치일 뿐이나 / 伊糟伊粕
유구하고 아득한 먼 날까지 / 悠悠茫茫
잊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로다 / 庶乎不忘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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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文選卷之一百十八 / 碑銘


王師大曹溪崇師一邛正令䨓音辯海弘眞廣濟都大禪師覺儼尊者贈謚覺眞國師碑銘 幷序 [李達衷] , 1478년 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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維至元十四年乙未。王師覺儼尊者示滅。間五年。其徒元珪等。聞于上曰。吾師之行實。不可使堙晦。願碑而識之。於是上命臣爲文。臣旣受命。竊謂之曰。古之達者。以身世爲蘧廬。視名位如弊屣。况所謂浮屠氏。夢幻有爲。住持無相。淸浄寂滅而不可名言。雖極稱頌。於師乎何有。然其徒之所以痛慕者。師之化必有以感于心。吾王之所以信崇者。師之道必有以補于理。可不敍乎。昔我太祖。肇造邦家。凡可以贊毗王化。保佑民生者。靡所不爲。謂佛氏其化仁於吾東方。政敎爲允迪。遂廣置仁祠。以居其徒。粤禪若敎。各以其法福于國。禪視敎爲尤盛。主道塲者非其人。不敢處焉。其所以尊崇之意。旣已炤然。尙慮後之或怠。爲信誓十條而詔之。其一曰敬信三寶。自是厥後。必擧其徒之德尊者。禮事而爲之師。代有成規。禮儀浸備。洪惟我主上。勵精圖理。宵旰憂勤。凡所施爲。率繇舊章。咨于相府。訪諸宗門。若曰眇冲嗣位。適値時艱。恐無以臨涖。將以僧中碩德者。尊拜爲師。以輔予理。用光祖訓。疇歟。僉曰無如覺儼尊者。前代尊崇。號稱其德。迺命有司。遂冊爲王師。時住佛岬寺。以年高道阻。未敢屈致。畫像瞻禮。俾益齋李侍中爲讚。大備物儀使還師所。以申師事之禮。誠敬篤至。師奉國書乃曰。老僧甞荷前代誤恩。濫居師位。今又辱重命。深有兢慚。第以香火之勒。庶幾奉福耳。實上卽位之二年壬辰也。師諱復丘。自號無言叟。固城郡人也。判密直右常侍。文翰學士。承旨李公。諱尊庇之子。師之族系。內外赫世。今略其譜。大浮圖也。母夫人常持頌大乘佛經。嘗夢一居士盛冠服而前曰。我已來矣。因而有娠。洎至元庚午九月十五日而生。資質明朗。不類塵凡。稍長知敬佛乘。嬉游之具。必模㨾道塲規矩。年甫十歲。就曹溪圓悟國師。剃落受具。未幾圓悟順寂。以遺囑從大禪師道英。孜孜請益。十年而學通。叢林推爲衆首。庚寅秋。中禪選上上科。時年二十一。所見已超然。志道厭煩。雲游訪道。塊處觀心。徜徉乎泉石。搖裔乎雲林。誓不蹋名途。慈覺國師。師之二師也。待之甚禮。甞以學徒委諸師。師曰有得於己然後傳諸人。吾固不敢。遂往白巖寺。與同志如干人。蚤夜參究十又餘年。住月南松廣大道塲。前後四十餘年。其間福國利生之事與夫褒崇錫賜之寵。蓋不可遽數。而又師之糟粕也。故不書。晚住佛岬寺。王命也。謂其徒曰。往宿此山。夢有人拜且曰。師宜住此。心竊異之。今而驗矣。乃作頌曰。君賜筽城佛岬山。人言倦鳥已知還。殷勤薦祝如天壽。從此邦基萬古安。其惓惓於君國之意。亦可見矣。乙未移寓白岩寺。夏六月示疾。七月二十七日疾小閒。緘書辭于國王宰府。請邑官封印信。更衣剃沐具法服。命侍者擊鼓。坐小禪床。乃云卽心卽佛江西老。非佛非心。物外翁。鼯鼠聲中吾獨往。涅槃生死本來空。儼然而化。紫雲滿洞。顔如傅粉。翌日門人號奉茶毗于寺之西峯下。函還佛岬寺。冬十二月。上遣使弔慰。謚曰覺眞國師。塔曰慈雲。春秋八十六。夏七十六。爲人簡默淸淳。端平直諒。綠頂尨眉。丹唇皓齒。望之洒然如神仙。就之溫然如父母。口不臧否。心存敬恭。平生方丈。不留一物。其祖派。則繇普照至師。凡十三世。門人之秀者。禪源,白華,迦智,麻谷。而下等千有餘人。內姪杏村侍中。爲今之名宰相。吾輩所矜式。杏村之弟吏部尙書。於吾爲同年友。予又一參籌室。厥後屢奉辱書。深以爲幸。故於師之銘。不揆鄙拙。幸而爲之辭。其銘曰。
高而不危。吾師之爲。卑以自牧。吾王之福。大道歧分。本乎一原。相須以濟。介祉于世。於萬斯年。耀後光前。刻辭于石。伊糟伊粕。悠悠茫茫。庶乎不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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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수재 소(法壽齋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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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복암(釋宓菴) , 1478년 간행

   1천 겹으로 싸인 보주(寶珠)의 그림자 속에는 성인도 범부도 비추고, 한 면의 옛 거울의 광명 속에는 스승도 제자도 어립니다. 이치로는 저와 나의 다름이 없지마는 사상(事相)으로는 자기와 남의 다른 것이 있으므로, 부처님께 귀의하되, 귀의할 것이 없는데 귀의하며, 스승님을 축수하되, 축수할 것이 없을 때까지 축수합니다. 우리 조계의 노스님은 동방[震旦]의 큰 사문(沙門)이라, 한 번 화로와 풀무를 개설하여 여러 기류(機類)를 접대하시어, 얼마나 사람과 하늘의 복을 힘입으셨습니까. 이미 자비함을 나타내시고 또 세속을 좇아서 일을 같이 하시기에 세월이 흘러가서 춘추(春秋)가 벌써 환갑(還甲)이 되었으니, 이 어리석은 생각에 조심스럽고 송구한 정을 품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에 물방울보다도 작은 공을 드려서 허공과 같이 무한한 수명을 축원하오니, 이 일편의 참된 정성이 시방 삼세[十方三世]의 부처님에 감응되소서. 엎드려 원합니다. 큰 스님께서 법랍(法臘)이 더 높으셔서 갑자(甲子)가 하늘을 두루하도록 늙지 마시고, 색신(色身)이 길이 강건하시어 격심한 바람이[毗嵐] 동산에 누우셔서 항상 편안하여지이다.

[주-D001] 법수재 : 
원오국사(圓悟國師)를 위하여 재(齋)를 행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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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重寶珠影裏。聖乎凡乎。一面古鏡光中。師也弟也。理雖無彼我之異。事則有自他之殊。宜歸佛兮無歸而歸。乃祝師以不祝之祝。惟曹溪老和尙。是震旦大沙門。一開爐鞴以接機。幾許人天之賴福。旣慈悲出現。且隨凡俗以同塵。故寒暑推移。已涉春秋於環甲。其在迷盲之念。盍懷戰懼之情。肆修同涓滴之功緣。用薦等虛空之壽量。兾眞誠之一片。格妙鑒於十方。伏願大和尙法臘增崇。甲子周天而不老。色身永固。毗嵐偃嶽而恒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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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정집 제3권 / 묘지명(墓誌銘)


고려 왕사 대조계종사 일공정령 뇌음변해 홍진광제 도대 선사 각엄 존자 증시 각진 국사 비명 병서 〔高麗王師大曹溪宗師一邛正令雷音辯海弘眞廣濟都大禪師覺儼尊者贈諡覺眞國師碑銘 幷序〕   ㅡ 이달충(李達衷), 2013년 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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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원(至元) 14년(1355, 공민왕4) 을미년에 왕사(王師) 각엄 존자(覺儼尊者)가 열반에 들었다. 5년이 지난 뒤에 그의 무리 원규(元珪)가 전하께 아뢰기를,
“우리 왕사의 행적이 묻혀 사라지도록 내버려 둘 수 없습니다. 원컨대 비석을 세워 사적을 기록하게 하소서.”
하였다. 이에 주상께서 신에게 명하여 비문을 짓게 하였다.
신이 명령을 받은 후에 가만히 다음과 같이 생각하였다.
‘옛날에 달관한 사람은 일생을 잠시 머물다 가는 여관으로 여기고, 명예와 지위를 헌신짝같이 보았다. 더욱이 이른바 부도씨(浮屠氏)는 유위(有爲)를 꿈처럼 헛된 것으로 여기고 무상(無相)을 굳게 지키며 청정하고 적멸하니 뭐라 형용할 수 없다. 아무리 대단하게 칭송을 한들 왕사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그러나 그의 무리가 간절히 사모하는 것은 왕사의 교화가 반드시 마음에 감동을 주었기 때문이다. 우리 주상 전하께서 믿고 숭앙한 것은 왕사의 도가 반드시 다스리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니 서술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옛날 우리 태조(太祖)께서 국가를 창건하실 때 왕의 교화에 보탬이 되고 민생을 도울 수 있는 모든 것을 하지 않음이 없었다. 불법은 그 교화가 어지니 우리나라의 정교(政敎)에 행할 만한 것이라 생각하여, 마침내 불사를 여러 곳에 세우고 승려들을 머물러 살게 하였다. 선종과 교종이 각각 그들의 법으로 나라를 복되게 하였는데, 선종이 교종에 비해서 더욱 왕성하였다. 도량을 주재하는 자는 합당한 사람이 아니면 감히 그 자리에 있지 못하게 하였으니, 그를 존숭하는 뜻이 이미 분명히 드러난 것이다. 그런데도 뒷날 혹 태만하게 될까 염려하여 신서(信誓) 10조를 만들어서 조서로 반포하였다. 그 첫째 조목에 이르기를 “삼보(三寶)를 존경하고 믿으라.”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승려의 무리 중에 덕이 높은 자를 기용하여 예우하며 스승으로 섬겼다. 이것이 대대로 법규로 굳어졌으며 예의(禮義)가 점점 갖추어졌다.
위대한 우리 주상께서 정신을 연마하며 잘 다스리기를 도모하느라 밤낮으로 근심하며 부지런히 일하셨다. 펼치는 모든 일은 옛 법을 따르고 재상들에게 자문하셨다. 그리고 여러 종문(宗門)을 방문하여 이르시기를,
“보잘것없는 내가 어린 나이에 왕위를 이었는데, 마침 이렇게 어려운 때를 만났으니 위에 군림하여 제대로 된 임금이 될 수 있을까 걱정스럽다. 장차 승려 중에 덕이 높은 자를 스승으로 모셔 나의 정치를 보필하게 함으로써 선왕이 남기신 교훈을 빛내고자 한다. 누가 좋겠는가?”
하였다. 모두들 아뢰기를,
“각엄 존자만 한 이가 없습니다. 선왕께서 이 사람을 존숭하여 ‘각엄 존자’라는 호를 내려 그의 덕을 칭찬하였습니다.”
하였다. 이에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마침내 왕사(王師)로 책봉하였다.
당시 왕사는 불갑사(佛岬寺)에 머물고 있었는데, 나이가 많고 길이 험난하여 감히 대궐로 불러오지 못하였다. 그래서 왕사의 초상을 그려 놓고 스승으로 모시는 예를 거행하고, 익재(益齋) 이 시중(李侍中)에게 찬(讚)을 짓게 하였다. 그러고는 예물과 예의를 크게 갖추어 왕사가 머물고 있는 곳으로 이 시중을 보내 스승으로 모시는 예를 표하였으니, 그 정성과 존경을 다하는 것이 매우 독실하였다.
왕사가 국서(國書)를 받고 말하기를,
“노승은 일찍이 선왕의 과분한 은총을 입어, 외람되이 왕사의 지위에 있었습니다. 이제 또다시 과분하게도 막중한 직위를 맡게 되니 매우 두렵고 부끄럽습니다. 다만 열심히 향을 피워 부처님께 빌어서 나라가 복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하였다. 이는 실로 전하께서 즉위하신 임진년(1352, 공민왕1)의 일이었다.
왕사의 휘는 복구(復邱)이고 스스로 호를 무언수(無言叟)라 하였다. 고성군(固城郡)이 본향이며, 판밀직 우상시 문한학사 승지(判密直右常侍文翰學士丞旨) 이존비(李尊庇) 공의 아들이다. 왕사는 친족과 외족이 모두 대대로 혁혁한 가문이므로 여기서는 가계에 대해 생략하는데, 큰 승려였다.
왕사의 어머니는 항상 대승 불경(大乘佛經)을 몸에 지니고 암송하였다. 하루는 꿈에 한 거사가 성대하게 관복(冠服)을 착용하고 나타나 어머니 앞으로 나와 말하기를 “내가 이미 왔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로 인해 임신하였으며, 지원(至元) 경오년(1270, 원종11) 9월 15일에 왕사가 태어났다.
왕사는 자질이 밝고 맑아서 속세의 보통 아이들과는 달랐다. 조금 자라서 불법을 알고 존숭하였으며 장난하며 놀 때에도 반드시 도량의 규범을 흉내 내었다. 겨우 10세에 조계산의 원오 국사(圓悟國師)에게 가서 머리를 깎고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원오 국사가 입적하자, 유언에 따라 대선사(大禪師)인 도영(道英)을 모시며 열심히 공부하였다. 10년이 지나 학문이 정통해지니 총림(叢林)에서 여러 사람이 왕사를 우두머리로 추앙하였다.
경인년(1290, 충렬왕16) 가을에 선선시(禪選試 승과(僧科))에 장원으로 급제하니 당시 나이 21세였다. 소견이 남보다 뛰어났고 도(道)에만 뜻을 두어 번거로운 것을 싫어하였다. 구름처럼 자유로이 다니며 도를 탐구하고, 흙덩이처럼 가만 앉아서 마음을 관조하였다. 산수 속에서 소요하고 구름과 수풀 사이에서 노닐면서 공명을 구하는 길은 가지 않기로 맹세하였다.
자각 국사(慈覺國師 도영(道英))는 왕사의 제2의 스승이었는데, 왕사를 지극히 예우하였다. 일찍이 자신의 학도들을 왕사에게 맡겼는데, 왕사는 말하기를,
“자기에게 터득한 바가 있은 뒤라야 남에게 전할 수 있습니다. 저는 참으로 감히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그러고는 마침내 백암사(白巖寺)에 가서 동지 몇 사람과 함께 10여 년이나 밤낮으로 참선하며 진리를 탐구하였다.
대도량인 월남사(月南寺)송광사(松廣寺)에 머문 것이 전후로 40여 년이나 되었다. 그동안 나라를 복되게 하고 민생을 이롭게 한 일과 주상께서 존숭하여 하사품을 내린 은총은 대번에 다 셀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왕사에게는 술지게미처럼 쓸데없는 것이므로 일일이 적지 않는다.
만년에 불갑사에 머물게 된 것은 전하의 명에 의한 것이었다. 왕사가 승도들에게 말하기를,
“지난날 이 산에서 자고 간 적이 있었는데, 꿈에 어떤 사람이 와서 절하고 말하기를 ‘왕사께서는 마땅히 이곳에 머무르실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마음속으로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제야 그 꿈이 실제로 이루어졌도다.”
하였다. 그러고는 송(頌)을 지어 이르기를,
전하께서 오성 불갑사를 내려 주시니 / 君賜筽城佛岬山
사람들은 게을러진 새가 돌아올 줄 안다 말하네 人言倦鳥已知還
정성을 다해 전하께서 천수하시기를 비오니 / 殷勤薦祝如天壽
이로부터 나라의 기반이 만년토록 편안하리라 / 從此邦基萬古安
하였다. 왕사가 전하와 나랏일에 정성을 다하는 뜻을 여기서 또한 볼 수 있다.
을미년(1355, 공민왕4)에 백암사로 옮겨와 머물렀다. 6월 여름에 병이 들었다. 7월 27일 병세가 다소 누그러지자 국왕과 재상에게 하직하는 편지를 쓰고 고을 관리에게 부탁하여 인신(印信)을 찍어 봉했다.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깎고 목욕하고 법복을 갖추어 입고, 시종에게 명하여 법고를 치게 하였다. 그러고는 작은 선상(禪床)에 앉아서 말하기를,
곧 심이고 곧 불인 강서의 늙은이며 / 卽心卽佛江西老
불도 아니고 심도 아닌 물외의 늙은이로다
/ 非佛非心物外翁
날다람쥐의 소리 속에 나 홀로 가노니 / 鼯鼠聲中吾獨往
열반에는 죽고 사는 것이 본래부터 공이로다 / 涅槃生死本來空
하였다. 그런 후에 의젓하게 입적하시니 자색 구름은 산골짜기에 가득하였고 얼굴은 분을 바른 듯 깨끗하였다.
이튿날 문인들이 통곡하며 절의 서쪽 산봉우리 아래에서 다비식을 거행하고, 유골은 함에 담아 불갑사로 모셔 왔다. 12월에 전하께서 사자(使者)를 보내어 조문하고, 시호를 각진 국사(覺眞國師)라고 하였으며, 탑호(塔號)는 자운(慈雲)이라 하였다.
왕사의 춘추는 86세였고, 승려의 경력은 76년이었다. 왕사는 사람됨이 소박하고 조용하며 맑고 순후하며 단아하고 평온하며 솔직하고 성실하였다. 푸른 이마와 반쯤 센 눈썹, 붉은 입술에 하얀 치아, 멀리서 바라보면 깨끗하기가 신선과 같고, 가까이 가서 보면 온화하기가 부모와 같았다. 입으로는 남의 잘잘못을 말하지 않고, 마음으로는 공손함을 간직하였다. 평생 주지(主持)를 지냈으나 물건 하나도 남긴 것이 없었다.
조파(祖派)는 보조(普照)로부터 국사에 이르기까지 모두 13세이며, 국사의 문인으로 뛰어난 자는 선원(禪源)ㆍ백화(白華)ㆍ가지(迦智)ㆍ마곡(麻谷) 이하 1000여 명이 된다. 왕사의 조카인 행촌(杏村) 시중(侍中)은 지금의 명재상으로 우리들의 모범이 되는 분이고, 행촌의 아우인 이부 상서(吏部尙書)는 나와 같은 해에 과거에 급제한 친구이다. 내가 또 한 번 주실(籌室)을 참알하였는데, 그 뒤로 나에게 여러 번 편지를 보내 주셨으므로 아주 다행스러운 일이라 생각하였다. 그런 까닭에 국사의 비명을 글재주가 졸렬한 것은 생각하지 않고 이에 힘입어 쓴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높은 곳에 있어도 위태하지 않음은 / 高而不危
우리 왕사께서 하신 것이요 / 吾師之爲
몸을 낮추어 스스로 기르심은 / 卑以自牧
우리 임금님의 복이로다 / 吾王之福
큰길이 여러 갈래로 나누어지나 / 大道歧分
근원은 하나의 뿌리였도다 / 本乎一原
서로 도와서 백성을 구제하여 / 相須以濟
세상에 큰 복을 주셨으니 / 介祉于世
수만 년에 걸쳐 / 於萬斯年
뒤에도 빛이 나고 앞에도 광채가 나네 / 耀後光前
비석에 새겨진 글이야 / 刻辭于石
술지게미처럼 쓸데없는 것이지만 / 伊糟伊粕
아득히 먼 저 훗날까지 / 悠悠茫茫
잊지 않기를 바랄 뿐이네 / 庶乎不忘

[주-D001] 고려 …… 비명 : 
《동문선》 권118에 수록되어 있다. 각진 국사(覺眞國師)는 고려 후기의 선승(禪僧)인 복구(復丘, 1270~1355)로, 고려 시대 수선사(修禪社) 16국사 중 제13세 국사이다. 본관은 고성(固城), 속성(俗姓)은 이(李), 호는 무능수(無能叟)ㆍ무언수(無言叟)이다. 아버지는 충렬왕 때의 문신인 이존비(李尊庇)이다. 10세 때에 조계산(曹溪山)의 천영(天英) 밑에서 출가하였고, 천영이 입적하자 수선사 제8세 자각 국사(慈覺國師) 도영(道英)을 좇아 공부하였다. 충정왕의 왕사(王師)가 되어 각엄 존자(覺儼尊者)라는 호를 받았고, 또 1352년(공민왕1)에는 공민왕으로부터 왕사의 책(册)을 받았다. 사후에 국사로 추증되었고 시호는 각진, 탑호는 자운(慈雲)이다.
[주-D002] 지원(至元) 14년 을미년 : 
지원은 원나라 세조(世祖)의 연호이자, 원나라 순제(順帝)의 연호이다. 세조 때의 지원은 1264~1294년까지이고, 순제 때의 지원은 1335~1340년까지인데, 각진 국사의 생년을 고려할 때 후자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순제 때의 지원 연간에 을미년은 없다. 따라서 여기서의 ‘지원’은 원나라 순제의 또 다른 연호인 ‘지정(至正)’의 오류인 듯하다. 지정은 1341~1367년까지이다.
[주-D003] 신서(信誓) 10조 : 
훈요십조(訓要十條)라고도 한다. 고려 태조는 943년(태조26) 여름 4월에 대광(大匡) 박술희(朴述希)를 불러 훈요십조를 내렸는데, 그 첫째와 둘째 조목이 불교에 관한 것이다. 그 요지는, 왕업은 반드시 부처의 도움을 받아야 하므로 절을 창건하고 주지를 파견하여 불법(佛法)을 연마해야 한다는 것과 절을 놓고 간신들이 쟁탈전을 벌이거나 무분별하게 사찰을 신축ㆍ증축하는 것이 우려되므로 도선(道詵)이 선정한 것 외에 함부로 사찰을 지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高麗史 卷2 太祖世家》 도선은 통일신라 말기의 승려이다.
[주-D004] 불갑사(佛岬寺) : 
전라남도 영광군 불갑면(佛甲面) 모악리에 있는 절이다. 현재 대한 불교 조계종 제18교구 본사 백양사(白羊寺)의 말사(末寺)이다. 통일신라 시대인 8세기 후반에 중창하였고, 고려 후기에 각진 국사가 머무르면서 크게 중창하였는데 당시 수백 명의 승려가 머물렀으며 사전(寺田)이 10리 밖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주-D005] 익재(益齋) …… 하였다 : 
익재는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의 호이고, 벼슬은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다. 이제현이 썼다고 하는 각엄 존자의 화상찬은 현재 전하지 않는다.
[주-D006] 복구(復邱) : 
《동문선》 권118 〈각진국사비명(覺眞國師碑銘)〉에 의거할 때 ‘邱’는 ‘丘’로 되어야 할 듯하다.
[주-D007] 이존비(李尊庇) : 
1233~1287. 본관은 고성(固城), 초명은 인성(仁成), 자는 지정(持正)이다. 1260년(원종1) 과거에 급제한 이후 내시(內侍)에 입적되었으며, 이어 비서 교서랑(秘書校書郞), 권지합문지후(權知閤門祗候), 전중 내급사(殿中內給事) 등을 역임하고 1275년(충렬왕1) 상서우승(尙書右丞)ㆍ예빈경(禮賓卿)을 거쳐 좌승지에 올랐다. 1287년에는 경상도ㆍ충청도ㆍ전라도의 도순문사가 되어 여몽군(麗蒙軍)의 일본 정벌을 위한 병량(兵糧) 및 군선(軍船)의 조달을 담당하였다. 관직은 판밀직사사에 이르렀다.
[주-D008] 큰 승려였다 : 
대본에는 ‘大浮屠也’로 되어 있는데, 문맥상 연문(衍文)이거나 전후에 탈문(脫文)이 있는 듯하다.
[주-D009] 지원(至元) : 
원나라 세조(世祖)의 연호로, 1264~1294년까지이다.
[주-D010] 원오 국사(圓悟國師) : 
고려 시대 선승인 천영(天英, 1215~1286)으로, 속성은 양(梁), 호는 충경(冲鏡)이다. 조계산 수선사(修禪社) 16국사 중 제5세로서, 양택춘(梁宅椿)의 아들이다. 1230년(고종17) 수선사 제2세인 진각 국사(眞覺國師) 밑에서 득도하였고, 1236년 승과(僧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1256년 조계산 수선사의 제5세가 되어 1286년(충렬왕12) 2월 입적 직전까지 불대사(佛臺寺)에서 종풍(宗風)을 크게 떨쳤다. 충렬왕은 자진원오(慈眞圓悟)라는 시호와 정조(靜照)라는 탑호를 내렸다.
[주-D011] 구족계(具足戒) : 
정식 비구 또는 비구니가 되기 위해 비구는 250계(戒), 비구니는 500계를 받는데, 이것을 받으면 정식으로 교단에 들어간 것을 의미하게 된다.
[주-D012] 도영(道英) : 
고려 시대의 선승으로 수선사 16국사 중 제8세이다. 시호는 자각(慈覺)이며, 현재 자각 국사의 부도가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사의 산내 암자인 감로암(甘露庵) 경내에 남아 있다.
[주-D013] 백암사(白巖寺) : 
지금의 백양사(白羊寺)로, 전라남도 장성군 북하면(北下面) 약수리(藥水里) 백암산(白巖山)에 있다. 631년(무왕32) 승려 여환(如幻)이 창건하고, 1034년(덕종3) 중연(中延)이 중창한 후 정토사(淨土寺)라 개칭하였다. 1574년(선조7) 환양(喚羊)이 백양사라 이름하였는데, 당시 환양 선사가 절에 머물며 염불을 하면 흰 양들이 몰려오는 일이 자주 일어나자 사찰 이름을 백양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주-D014] 월남사(月南寺) : 
전라남도 강진군 성전면 월남리 월출산(月出山)에 있던 절이다. 고려 중기에 진각 국사(眞覺國師)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의 절터에는 보물 제298호로 지정된 월남사지모전석탑(月南寺址模塼石塔)과 보물 제313호로 지정된 월남사지석비(月南寺址石碑)가 있다.
[주-D015] 송광사(松廣寺) :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松光面) 조계산(曹溪山) 서쪽에 있으며, 한국의 삼보 사찰(三寶寺刹) 가운데 승보 사찰(僧寶寺刹)로서 유서 깊은 절이다. 신라 말기에 혜린(慧璘)이 창건하였으며, 고려 때 보조 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이 정혜사(定慧社)를 이곳으로 옮겨와 수선사(修禪社)라 칭하고, 도(道)와 선(禪)을 닦기 시작하면서 대찰로 중건하였다. 그 뒤 보조 국사의 법맥을 진각 국사(眞覺國師)가 이어받아 중창한 때부터 조선 초기에 이르기까지 약 180년 동안 16명의 국사를 배출하면서 승보 사찰의 지위를 굳혔다.
[주-D016] 오성(筽城) : 
전라남도 영광(靈光)의 옛 이름이다.
[주-D017] 곧 심(心)이고 …… 늙은이로다 : 
강서(江西)의 늙은이는 중국 선종(禪宗) 남종(南宗)의 제7조 남악 회양(南嶽懷讓)의 제자로, 강서 지방에서 돈오(頓悟)의 선풍(禪風)을 떨친 마조도일(馬祖道一, 709~788)을 가리킨다. 어떤 승려가 마조 선사(馬祖禪師)에게 “화상(和尙)은 어찌하여 즉심즉불(卽心卽佛)이라고 설하십니까?”라고 물으니, 어린아이의 울음을 그치게 하기 위해서라고 대답하였고, 울음을 그치면 어떻게 하느냐고 다시 묻자 ‘비심비불(非心非佛)’이라고 대답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五燈全書 卷5 馬祖道一禪師》
[주-D018] 가까이 …… 같았다 : 
대본에는 없는데, 《동문선》 권118 〈각진국사비명〉에 의거하여 ‘就之溫然如父母’ 7자를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주-D019] 보조(普照) : 
고려 후기의 선승인 지눌(知訥, 1158~1210)을 가리킨다. 보조는 그의 시호이다. 속성(俗姓)은 정(鄭), 호는 목우자(牧牛子), 시호는 불일보조 국사(佛日普照國師)이다. 지눌은 고려 후기에 조계종을 중흥하여 이른바 ‘조계종의 개조(開祖)’라고도 불린다. 정혜결사(定慧結社)를 조직해 불교의 개혁을 추진했으며, 돈오점수(頓悟漸修)와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주장하여 선교일치(禪敎一致)를 추구하였다. 저술에 〈진심직설(眞心直說)〉, 〈수심결(修心訣)〉 등이 있다.
[주-D020] 행촌(杏村) : 
고려 후기의 문신인 이암(李喦, 1297~1364)을 가리킨다. 행촌은 그의 호이다. 본관은 고성(固城), 초명은 군해(君侅), 자는 고운(古雲)이다. 판밀직사사 감찰대부 세자원빈(判密直司事監察大夫世子元賓)인 이존비(李尊庇)의 손자이며, 철원군(鐵原君) 이우(李瑀)의 아들이다. 1313년(충선왕5) 문과에 급제하였고, 충혜왕 때 정당문학(政堂文學)ㆍ첨의평리(僉議評理) 등을 역임하였다. 공민왕 즉위 후 철원군에 봉해졌고 수 문하시중(守門下侍中)을 거쳐 좌정승에 올랐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주-D021] 행촌의 아우 : 
고려 후기의 문신인 이교(李嶠, ?~1361)를 가리킨다. 공민왕 때에 이부 상서(吏部尙書)를 지냈다. 자는 모지(慕之), 호는 도촌(桃村)이다. 충숙왕 때 문과에 급제하고, 1357년(공민왕6) 천추사(千秋使)가 되어 원나라에 다녀왔다. 1360년 어사대부로서 전선(銓選)을 관장하였다.
[주-D022] 주실(籌室) : 
수행인을 교화하고 지도하는 방장화상(方丈和尙)을 말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실(祖室) 스님이라고도 한다. 인도(印度)의 우바국다 존자(憂波鞠多尊者)가 많은 사람들을 교화하였는데, 그가 한 사람을 이끌 때마다 산가지〔籌〕 하나씩을 둔 것이 높이와 너비가 모두 6장(丈) 되는 방에 가득했다는 데에서 유래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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霽亭集 卷三 / 墓誌銘


高麗王師、大曹溪宗師、一邛正令雷音辯海弘眞廣濟都大禪師、覺儼尊者贈諡覺眞國師碑銘 【幷序】


 ㅡ 이달충(李達衷), 1836년 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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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四年乙未,王師覺儼尊者示滅。間五年,其徒元珪尊問于上曰:“吾師之行,實不可使堙晦。願碑而識之。” 於是上命臣爲文。臣旣受命,竊謂之曰:“古之達者,以身世爲蘧廬,視名位如獘屣。況所謂浮屠氏,夢幻有爲,住持無相,淸淨寂滅,而不可名言。雖極稱頌,於師乎何有?然其徒之所以痛慕者,師之化必有以感于心;吾王之所以崇信者,師之道必有以補于理,可不敍乎?”
 昔我太祖肇造邦家,凡可以贊毗王化,保佑民生者,靡所不爲。謂佛氏其化仁,於吾東方政敎爲允迪,遂廣置仁祠,以居其徒。粤禪若敎,各以其法福于國,禪視敎爲尤盛。主道場者,非其人,不敢處焉。其所以尊崇之意,旣已炤然。尙慮後之或怠,爲信誓十條而詔之。其一曰:“敬信三寶。” 自是厥後,必擧其徒之德尊者,禮事而爲之師。代有成規,禮浸備。
 洪惟我主上,精圖理,宵旰憂勤。凡所施爲,率繇舊章,咨于相府。訪諸宗門,若曰:“眇沖嗣位,適値時艱,恐無以臨蒞。將以僧中碩德者,尊拜爲師,以輔余理,用光祖訓,疇歟?” 僉曰:“無如覺儼尊者。前代尊崇,號稱其德。” 迺命有司,遂冊爲王師。時住佛岬寺,以年高道阻,未敢屈致。畫像瞻禮,俾益齋 李侍中爲讚。大備物儀,使還師所,以申師事之禮,誠敬篤至。師奉國書,乃曰:“老僧嘗荷前代誤恩,濫居師位。今又辱重命,深有兢慚。第以香火之勤,庶幾奉福耳。” 實上卽位壬辰也。
 師諱,自號無言叟固城郡人也。判密直、右常侍、文翰學士、丞旨公諱尊庇之子。師之族系,內外赫世,今略其譜。大浮屠也。母夫人常持頌大乘佛經,常夢一居士盛冠服而前,曰:“我已來矣。” 因而有娠,洎至元庚午九月十五日而生。資質明朗,不類塵凡。稍長知敬佛乘,嬉游之具,必模樣道場規矩。年甫十歲,就曹溪圓悟國師,剃落受具。未幾,圓悟順寂,以遺囑從大禪師道英,孜孜請益。十年而學通,叢林推爲衆首。庚寅秋,中禪選上上科,時年二十一。所超然,志道厭煩。雲游訪道,塊處觀心。倘佯乎泉石,搖裔乎雲林,誓不蹋名途。慈覺國師,師之二師也,待之甚禮。嘗以學徒委諸師,師曰:“有得於己,然後傳諸人。吾固不敢。” 遂往白巖寺,與同志如干人,蚤夜參究十餘年。住月南松廣大道場,前後四十餘年。其間福國利生之事,與夫褒崇錫賜之寵,蓋不可遽數。而又師之糟粕也,故不書。
 晚住佛岬寺,王命也。謂其徒曰:“往宿此山,夢有人拜,且曰:‘師宜住此。’ 心竊異之,今而驗矣。” 乃作頌曰:“君賜筽城 佛岬山,人言倦鳥已知還。殷勤薦祝如天壽,從此邦基萬古安。” 其惓惓於君國之意,亦可見矣。乙未,移寓白巖寺。夏六月,示疾。七月二十七日疾小間,緘書辭于國王宰府,請邑官封印信。更衣剃沐,具法服,命侍者擊鼓,坐小禪床。迺云:“卽心卽佛江西老,非佛非心物外翁。鼯鼠聲中吾獨往,涅槃生死本來空。” 儼然而化,紫雲滿洞,顏如傅粉。翌日,門人號奉茶毗于寺之西峯下,圅還佛岬寺。冬十二月,上遣使弔慰,諡曰覺眞國師,塔曰慈雲
 春秋八十六,夏七十六。爲人簡默淸淳,端平直諒。綠頂厖眉,丹脣皓齒,望之灑然如神仙,就之溫然如父母。口不臧否,心存敬恭。平生方丈,不留一物。其祖派,則繇普照至師,凡十三世,門人之秀者,禪源白華迦智麻谷而下等,千有餘人。內姪杏村侍中,爲今之名宰相,吾輩所矜式。杏村之弟吏部尙書,於吾爲同年友。余又一參籌室,厥後屢奉辱書,深以爲幸。故於師之銘,不揆鄙拙,爲之辭。其銘曰:

高而不危,吾師之爲。
卑而自牧,吾王之福。
大道歧分,本乎一原。
相須以濟,介祉于世。
於萬斯年,耀後光前。
刻辭于石,伊糟伊粕。
悠悠茫茫,庶乎不忘。

[주-D001] 元 : 
문맥상 “正”인 듯함.
[주-D002] 尊問 : 
《東文選ㆍ覺眞國師碑銘》에는 “等聞”.
[주-D003] 崇信 : 
《東文選ㆍ覺眞國師碑銘》에는 “信崇”.
[주-D004] 義 : 
《東文選ㆍ覺眞國師碑銘》에는 “儀”.
[주-D005] 礪 : 
《東文選ㆍ覺眞國師碑銘》에는 “勵”.
[주-D006] 之 : 
《東文選ㆍ覺眞國師碑銘》에는 뒤에 “二年”이 더 있음.
[주-D007] 邱 : 
《東文選ㆍ覺眞國師碑銘》에 의거할 때 “丘”인 듯함.
[주-D008] 大浮屠也 : 
문맥상 衍文이거나 전후에 脫文이 있는 듯함. “屠”는 《東文選ㆍ覺眞國師碑銘》에는 “圖”.
[주-D009] 見 : 
《東文選ㆍ覺眞國師碑銘》에는 뒤에 “已”가 더 있음.
[주-D010] 有 : 
《東文選ㆍ覺眞國師碑銘》에는 “又”.
[주-D011] 就 …… 母 : 
底本에는 없음. 《東文選ㆍ覺眞國師碑銘》에 의거하여 보충.
[주-D012] 而 : 
《東文選ㆍ覺眞國師碑銘》에는 앞에 “幸”이 더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