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8. 11. 16:14ㆍ우리 역사 바로알기
노자에 <도가도 비상도>란 말이 있습니다. 여러가지 풀이가 있으나 저는 <도는 도라 할수 있으나 참된 도는 아니다>라고 풀이합니다. 이를 다시 풀이하면 <양부는 부라 할수 있으나 친부는 아니다> 이렇게 풀이가 됩니다.
노자를 이해하지 못하면 결국 <백제>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개루에게 있어 초고는 기록에서 큰아들도 아니고 둘째아들도 아니고 그냥 아들입니다.
고이왕은 개루의 둘째아들이고 초고왕은 그냥 아들입니다. 이 둘다 개루왕의 친아들은 아니라는 거죠. 양아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양아들이 정권을 찬탈한 건지 정권을 이양받는 건지는 아직 모릅니다. 일단 왕통은 이어가되 왕의 씨가 바귀었다는 건만 이해하면 될 거 같습니다.
결국 노자의 해석에 따라 초고왕는 <부가부 비상부>에서 <양부는 부라 할수 있으나 친부는 아니다>. 라고 해석이 됩니다. 즉 초고왕이 왕위계통을 잇기 위해서 초고왕의 아들이 되어야 하는데, 친아들이 아니라는 뜻이죠.
고이왕은 개루왕의 둘째아들이라고 나옵니다. 그럼 개루왕의 아들이 됩니다. 개루왕의 친아들이라면 적자라든가 첫째아들 정도는 되야 합니다, 경우에 따라 첫째가 있었는데 둘째가 왕위를 물려 받을 경우 이 때는 첫째가 어떤 사고로 죽었다든가 설명이 이어지면 그건 정말 친아들 맞습니다, 하지만 설명없이 둘째아들이다 그냥 아들이다 하면 아는 친부가 아니라는 <도가도, 비상도>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초고왕에서 구수왕까지 잘 이어오다가 사반왕때에 어떤 변고가 생깁니다, 고이왕이 왕위를 잇게 됩니다. 왕통을 우씨가 이어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후 고이왕, 책계왕 분서왕에서 비류계통인 비류왕이 왕위를 차자하게 됩니다. 근초고왕는 비류왕의 둘째아들이 이라고 합니다. 그렁수도 있고 또 아니면 한번의 왕위찬탈이 또 있게 됩니다. 이후 근초고왕시대에는 왕이 역활을 잘하여 쭈~욱 여씨가 왕위를 계승한 것으로 보입니다.
백제는 생각처럼 하나의 왕씨로 왕위가 물려진게 아니라 여러번 바뀐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보면 시시때때로 바뀐 것으로 보입니다. 저는 이 과정이 나중에 일본이 만세일계를 위해서 일본서기를 조작했다고 생각합니다.
백제는 온조백제, 대방백제, 구태백제, 비류백제, 부여백제, 요서백제등 여러가지 이름으로 부르는데 그많큼 왕위계승에 중간중간 문제가 많았다는 것으로 보여준다고 할수 있습니다.
근초고왕이 왕통을 이어가지만 왕성인 여씨까지 되찾았다고 보는 건 무리가 있을 듯 합니다
근초고왕은 부여에서 온 부여씨입니다, 일명 요서백제의 시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서는 당시 모용씨와의 전쟁으로 정신이 없었는데, 근초고왕이 요서를 평정하고 남하하여 백제를 정복하여 거기에 백제의 대통을 잇는다는 명복으로 초고왕의 후계를 자처하면서 근초고왕이라 이름하지만 원래 부여씨라 씨까지는 바꾸지 않습니다. 그 대신 온조왕이 해씨이므로 온조왕의 성을 부여씨로 바꾸는 거죠. 온조왕의 씨를 후손이 바꾼다. 그게 가능할까요? 왕이라면 가능할 수도 합니다. 왕이 명령을 내려 온조왕의 해씨를 부여씨로 바꾸어라 하면 그렇게 될 수도 있습니다. 불가능하지 않다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근초고왕은 초고왕의 대통을 잇는 것이 온조왕의 대통까지 잇는 것으로 생각한 것으로 보입니다.
초고왕의 성씨는 정확히 무엇인지 모릅니다, 다만 초고왕 또한 온조왕의 계통을 이어 갈 뿐이죠. 그러다 고이왕이 나타난 초고왕계를 무너트리고 세로운 왕조를 세웁니다, 일명 우씨들의 나라죠. 이때를 우씨백제 또는 고이백제 또는 구태백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초고왕은 ? 초고왕에서 비류가지 이어졌으니 초고백제 또는 비류백제라고 할 수 있죠. 그럼 온조왕은 ? 온조백제라 할수 있습니다. 근초고왕은 요서에서 건너와 온조와 초고의 왕통을 잇는다는 명분으로 이름 또한 근초고왕이라 하지만 해씨나 우씨나 진씨가 아닌 부여씨입니다. 바로 부여출신이라는 것를 굿이 숨기지도 숨길 필요도 없었을 것이라고 보여집니다.
근초고왕은 요서백제의 시조입니다.
아래 글은 청골님이 쓰신 글인데 대체적으로 공감가는 글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이해가 다른 부분을 댓글로 이어가기에 어려워 따로 글을 올리면서 새 글을 이어가도록 하였습니다. 저는 대부분 이러한 방식으로 글을 쓰고 있는데 이러한 방식의 글이 마음에 안드신다고 본인의 요청이 있으면 삭제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 http://cafe.daum.net/alhc/3Cdg/544
386년 7월부터 390년 9월까지 고구려와 막상막하의 전력으로 전쟁을 이끌어갔던 백제의 진사왕은 갑자기 이상한 행동을 보인다. 391년 4월 적현성(赤峴城)을 잃고, 392년 7월 석현성(石峴城) 등 10여 개의 성과 10월 요충인 관미성을 잃었는데도 화초와 새를 기르고, 사냥에만 몰두하며 고구려와의 전쟁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18세의 어린 광개토태왕의 전술이 신묘했기 때문에? 이는 말이 되지 않는다. 저자의 생각은 다음과 같다.
요서백제의 지도층을 받아들인 온조백제는 389년부터 시작된 요서백제 유민의 본격적인 귀국을 적극 지원하였다. 이들을 받아들인 온조백제의 힘은 강해졌고, 본국인 요서백제의 처사에 불만을 제기하면서 독자적인 길을 걷기 시작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390년 이후 벌어진 전쟁은 고구려와 요서백제의 전쟁이 아니라 온조백제와의 전쟁으로 보아야한다. 이러한 이유로 진사왕은 고구려의 침공에 무관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온조백제는 아직 고구려의 상대가 아니었고 변방의 주요 거점을 모두 잃고 말았다.
이제 더 이상 요서는 백제의 땅이 아니고, 후연은 백제의 동맹국이 아니었다. 진사왕의 실정으로 요서백제는 서서히 분열되었으며 온조백제의 상당 부분을 고구려에 빼앗겼다. 그러나 아직도 요서백제 유민의 귀국은 계속되고 있었다. 요서백제가 총체적 난국에 직면한 것이다.
391년 온조백제 진사왕이 고구려 담덕에게 패배하자 요서백제의 유민뿐만 아니라 백제로부터도 유민이 발생하여 백제는 혼란에 빠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총괄해야할 온조백제의 진사왕은 국정에 무관심하였다. 당연히 반란이 일어날 상황이었고 결국 391년 요서백제에 있던 아신왕이 진사왕을 살해하고 백제왕으로 등극하였다. 이 반란을 도운 것이 바로 요서백제이었을 것이다. 요서백제 출신의 아신왕의 첫 번째 국정과제는 유민문제의 해결이었다. 아신왕은 전쟁으로 발생한 유민을 본국(임나)와 신라, 야마토왜의 분국으로 분산 수용했고, 자신의 정변을 도왔으며 중원의 선진문화를 경험한 요서백제의 지도층을 각 분국의 요직에 기용하였을 것이다.
이런 백제의 상황을 광개토태왕은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광개토태왕에게는 요서백제에게 씻을 수 없는 원한이 있었다. 바로 고구려를 멸망직전으로 몰고 갔으며 전연에 무릎 꿇게 했던 사건, 즉 모용황의 침공 때 요서백제인이 주축으로 참전하였던 것이다. 게다가 요서백제의 모여니는 조모와 증조모를 사로잡아 전연으로 끌고 간 원흉인 것이다. 이런 그들이 백제를 건국하였고, 조부인 고국원왕을 전사하게 만들었으며, 자신의 등극에 즈음하여서는 삼한으로 몰려들어 마침내 모든 백제의 분국에서 요직을 차지하였으니 마치 삼한을 지배했던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광개토왕 비문 신묘년조 왜(倭)가 신묘년 이래로 바다를 건너가고, 백잔, [가야], 신라를 쳐서 신민(臣民)으로 삼았다.
위에 인용한 광개토태왕비에 언급된 왜가 바로 요서백제 또는 부여왜 또는 이잔, 또는 구태백제 여러가지로 부르고 있으나 필자는 여기서 요서백제라 부르겠다. 당시 일본열도의 왜가 한반도로 대규모 군사를 보낼 수 있을 만큼 강력하지 않았다는 것은 대부분의 학자가 인정하고 있다. 따라서 열도의 왜가 광개토태왕 비문의 왜가 될 수 없다. 혹자는 모용황에게 멸망한 부여가 남하하여 백제, 가야, 신라를 장악했다는 가설 하에 부여를 왜로 보기도 하는데 고구려와 모용황에게 멸망한 부여가 그렇게 강력한 힘을 유지하고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
그러나 이 왜를 해상제국을 건설했던 요서백제로 보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필자는 ‘요서백제=왜’라는 새로운 가설을 제시한다.
열락 6년(396년), 왕이 친히 (대)군(水軍)을 이끌고 백잔국(百殘國)을 토벌했다.....잔(殘-백제)이 의(義)에 복종치 않고 감히 나와 맞서 싸우니 왕위(王威)가 크게 노했다. 아리수(阿利水)를 건너 선두부대(刺)를 보내 그 성에 육박하자 백잔병이 도망갔다. 태왕은 곧 그 성을 포위했다. 이에 잔주(殘主)가 곤핍(困逼)해졌으므로, 남녀 생구 1천 명과 세포(細布) 천 필을 바치며 왕에게 무릎을 꿇었고, 이제부터 영원히 노객(奴客)이 되겠다고 맹세했다. 태왕은 그 후에 순종한 정성을 들어 미혹하여 저지른 지난 허물을 용서했다. 이에 58성 700촌을 획득하고 잔주(殘主)의 아우와 대신(大臣) 10인을 거느리고 군을 돌려 수도로 돌아왔다.
비문에 의하면 백잔(百殘)은 분명 고구려에 항복하였다. 그러나 백잔이 항복했음에도 불구하고 왜는 이후 12년에 (396~417) 걸쳐 고구려와 전쟁을 계속 하고 있다. 백제가 항복한 상황에서 잔여 세력만으로 장기간에 걸쳐 고구려와 신라에 대항하여 전쟁을 계속할 수 있었을까?
백잔은 분명 고구려에 58성 700촌을 잃었다. 엄청난 타격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에는 이런 내용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 사건이 사서에 기록되지 않았다고 비문에 나오는 내용을 허설이라 말하기는 어렵다. 58성을 잃은 패배의 후유증은 분명히 보여야만 한다. 그러나 사서 상에는 백제에게 어떤 후유증도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백제가 이 사건으로 큰 타격을 받지 않았다고 보아야 한다.
또 광개토태왕은 잔주(殘主)의 아우와 대신(大臣) 10인을 볼모로 끌고 갔다. 그런데 백제는 1년 뒤인 397년 왜에 태자 전지를 볼모로 보냈다. 삼국사기에는 그렇게 적혀있다. 하지만 삼국사기 기년을 그대로 믿기는 웬지 미심쩍은 부분이 많다고 보여진다. 삼국사기 내용대로라면 백잔을 제압하기 위한 더 좋은 볼모로 태자를. 당연히 왕의 아우 대신 태자를 볼모로 삼아야했다. 그러나 광개토태왕은 태자가 아닌 왕의 아우를 볼모로 끌고 갔다. 이는 삼국사기 내용이 틀렸다는 것을 반증해 주는 것으로 보인다. 태자 전지가 이미 요서백제에게 불모로 잡혀있었다는 것을 반증헤 주고 있다고 보여진다. 실제로 태자 전지는 광개토왕이 쳐들어 오기전 이미 왜의 불로로 있었다. 그리하여 광개토태왕은 왕의 아우를 볼모로 삼았다.
요서백제는 온조백제를 차지하여 이를 분국으로 삼았으므로 요서백제가 백제이고 온조백제가 백잔이 되는 것이다.
비문 14년(404년) 기록에 ‘왜(倭)가 불궤(不軌)하여 대방계(帶方界)에 침입했다.’라는 구절이 있다.
여기서 왜는 요서백제로 왜가 대방계를 침입한 것은 광개토태왕이 396년에 점령한 백잔의 고토 즉 대방백제를 수복하기 위한 전쟁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백잔은 백제의 비칭이 아니라 바로 온조백제를 의미하는 것이다. 백제는 요서백제인데 고구려는 이를 인정하기 싫어 왜라 표현한 것이다. 396년에 온조백제는 고구려에 공격당하여 58개성 700촌을 잃었다.
해상제국 백제는 또다시 대방백제를 잃었고 유민들은 모두 가까운 온조백제로 몰려들었다. 게다가 396년 모용수의 사망을 계기로 후연이 급속히 무너지자 그동안 귀국을 주저하던 요서의 백제유민들도 또 다시 귀국을 시작했다. 아신왕은 몰려드는 유민을 해결하기 위하여 새로운 땅이 필요했다. 마한과 가야의 분국이 상당수의 유민을 수용했지만 이들만으로는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이에 아신왕은 391년부터 새로 제국에 편입된 왜로 유민들을 이주시키기로 결정하였을 것이다.
광개토왕 비문 신묘년조 왜(倭)가 신묘년(391년) 부터 바다를 건너가고, 백잔, □□, 신라를 쳐서 신민(臣民)으로 삼았다.
여기서 왜는 요서백제이다 이는 바다를 건너 새로운 제국을 만들기 위한 요서백제의 의중이 담겨있는 것을 고구려가 표현한 문장이다.
그런데 삼국사기와 일본서기 모두에서 아신왕의 태자 전지가 볼모였다고 기록되어있다. 두 사서에 동일한 기록이 존재하므로 이는 사실일 것이다. 태자 전지가 요서백제에 볼모로 간 이유는 무엇일까? 열도의 왜가 해상제국 백제에 편입된 것은 근초고왕 때인 366년 무렵으로 불과 30년이 경과했을 뿐이다. 따라서 열도의 야마토왜는 다른 분국들과는 다르게 유민들을 자신들의 동족으로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수십만의 유민, 그것도 자신들보다 모든 면에서 우월하고, 여씨가의 가장 오랜 근거지인 요서와 대방백제의 유민들을 수용할 경우 이들이 열도의 야마토왜 정권을 무너뜨리지 않는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그렇다고 제 발로 몰려드는 훌륭한 인적자원을 거부하고 해상제국 백제에서 대항하여 싸우거나 대항할 힘도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열도의 야마토왜는 유민을 수용하는 조건으로 백제에게 믿을만한 안전장치를 요구하였을 것이다. 백제는 이에 응했고, 또, 효율적인 유민관리를 위해 모두가 따를만한 인물 즉, 태자 전지를 열도로 보냈을 것이다.
몰려든 유민들이 열도의 왜로 출발할 곳은 바로 가야의 임나이다. 대마도를 거쳐 일본으로 가기위한 가장 빠른 곳이고 가장 좋은 곳이다. 399년 무렵 가야 일대에는 유민들이 넘쳐났을 것이고, 이들은 백제를 배신하고 고구려에 붙은 신라를 공격하였을 것이다.
광개토태왕비 399년의 기록 ‘왜인(倭人)이 국경에 가득 차 성지(城池)를 부수고 노객(奴客:내물신라왕)을 백성으로 삼으려 하니....’
라는 신라 사신의 말은 바로 이 상황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400년 광개토태왕이 다시 5만 군사를 출전시켜 가야 분국마저 평정하였다. 야마토왜 분국으로 이주하려던 계획마저 차단된 것이다.일본서기에 궁월군(弓月君)이 120현의 인부(人夫)를 이끌고 귀화하고자 하였으나 신라의 방해로 인해 2년간 귀국하지 못했다는 기록은 이 당시 백제유민의 exodus를 표현한 것이다. 이제 해상제국 요서백제에게는 분국 온조백제와 마한분국 가야분국 그리고 아직 군사를 동원하기에는 미숙한 열도의 야마토왜만이 남았다.
그러나 유민들의 이주는 아직 완결하지 못했다. 백제는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했을 것이다. 404년 왜가 고구려의 대방계를 침입한 것이다. 왜, 즉 해상제국 백제는 대방백제를 탈환하기 위하여 남은 전력을 총 동원해 고구려를 공격하였지만 이 전쟁마저 광개토태왕의 친정에 의해 대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 시간동안 백제는 유민을 열도의 왜로 무사히 이주시킬 수 있었다. 이후 백제는 가야분국을 되찾아 임나가라(대가야)를 탄생시켰고, 열도의 왜를 급속히 성장시키는 등 세력을 다시 확장하였으나 제국 내에서의 온조백제의 위상은 추락하였다. 이는 중국과 일본을 잇는 무역로의 중심에 위치해 영화를 누렸던 4세기와는 다르게 적국 고구려와 직접 국경을 맞대게 되어 전쟁의 위협에 직면하였고, 무역로에서도 종착점이 되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고 생각된다. 5세기 중, 후반 온조백제와 열도의 왜백제(야마토 왜5왕) 사이에 주도권을 두고 헤게모니 싸움을 벌인 것이 추락한 온조백제의 위상을 잘 보여준다. 이때부터 벌어진 역사에 대해서는 김운회 교수의 ‘새로 쓰는 한일 고대사’를 참고하기 바란다.
결론적으로 광개토태왕비의 왜는 해상제국 요서백제를 의미하며, 백잔은 백제 즉 온조백제를 지칭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요서백제의 시조는 근초고왕이고 기존의 온조백제는 근초고왕의 맏아들이 , 광개토왕 비문에 왜라 표현된 나라는 근초고왕의 둘째아들이 다스렸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고 보면 온조백제나 부여왜나 다 같은 형제의 국가라 할 수 있고. 이는 371년 처음에는 온조백제의 힘이 더 크게 발전했지만 부여왜는 이후 가야의 철 생산이라든가 가야를 정복하기 위해 기마부대가 내려가고 무역을 하기 위해 해상력을 이용하여 거기에 정착하다보니 391년 경에는 그 국력이 온조백제를 능가하게 되어
광개토왕 비문의 신묘년조처럼 왜(倭)가 신묘년(391년) 부터 바다를 건너가고, 백잔, □□, 신라를 쳐서 신민(臣民)으로 삼았다. 로 표현한 게 아닌가 생각된다.
369년 근초고왕은 모든 부대가 황색깃발을 사용하였지만 고구려의사유만이 빨간깃발을 사용한 것을 보면 이 당시의 이 같은 전략전술은 온조백제에서 발생했다기 보다는 폭넓은 지역을 누비고 다녔던 요서백제인 부여씨의 근초고왕만이 생각할 수 있는 작전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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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카페 <우리역사문화연구모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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