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8. 11. 23:21ㆍ우리 역사 바로알기
근초고왕과 진지왕의 칠지도
칠지도는 한일고대사를 밝히는데 중요한 사료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칠지도는 두개이며, 하나는 근초고왕이 부여왜에게 받친 칠지도(372년), 또하나는 전지왕이 야마토왜왕 지에게 하사한 칠지도(408년) 이렇게 두가지가 있습니다.
근초고왕은 부여왜에게 칠지도를 받쳤다는 것은 <부여왜서기>를 일본사람이 720년경 개작하여 <일본서기>를 편찬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중 신공황후 49년조부터 65년조는 개작된 부분도 있지만 왕의 서거와 즉위는 대부분이 삼국사기와 내용이 일치하는 하는 것으로 보아 내용이 사실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신공황후 52년조 입니다.
52년(372) 가을 9월 丁卯 초하루 丙子日 久氐 등이 千熊長彦을 따라와서 七枝刀 1자루와 七子鏡 1개 및 여러가지 귀중한 보물을 바쳤다. 그리고 (백제 근초고왕)의) 啓에 “우리나라 서쪽에 시내가 있는데 그 근원은 谷那鐵山으로부터 나옵니다. 7일 동안 가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멉니다. 이 물을 마시다가 문득 이 산의 철을 얻어서 성스러운 조정(부여왜)에 길이 바치겠습니다. 그리고 손자 枕流王에게 ‘지금 내가 통교하는 바다 동쪽의 귀한 나라는 하늘이 열어준 나라이다. 그래서 天恩을 내려 바다 서쪽을 나누어 우리에게 주었으므로 나라의 기틀이 길이 굳건하게 되었다. 너도 마땅히 우호를 잘 다져 土物을 거두어 공물을 바치는 것을 끊이지 않는다면 죽더라도 무슨 한이 있겠느냐’라 일러두었습니다”라 하였다. 이 이후로 해마다 계속하여 조공하였다.
참고자료
http://cafe.daum.net/alhc/3Cdg/575
이 내용으로 보아 372년 당시 백제는 부여왜의 속국인 것으로 보입니다.
인덕천황묘에서 칠자경이 나왔다는 이야기는 당시 근초고왕이 부여왜에게 받친 칠지도와 칠자경이 인덕천황묘에 수장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여집니다. 이는 372년에 받친 칠지도와 칠자경을 408년 이후 일본으로 가지고 건너가 인덕천황묘에 함께 묻친 것으로 이해됩니다. 인덕천황묘는 408년 이후에 만들어 졌을 것으로 보입니다.
인덕천황 참고자료
http://cafe.daum.net/alhc/51qG/337
http://cafe.daum.net/alhc/ALGC/961
아래 글은 귀거래사님이 쓰신 글인데 대체적으로 공감가는 글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이해가 다른 부분을 댓글로 이어가기에 어려워 따로 글을 올리면서 의견이 다른 부분을 빨간색으로 처리하여 글을 이어가도록 하였습니다. 저는 대부분 이러한 방식으로 글을 쓰고 있는데 이러한 방식의 글이 마음에 안드신다고 본인의 요청이 있으면 삭제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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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cafe.daum.net/alhc/3Cdg/463
전지왕과 칠지도
일본 나라현 天理市 石上神宮에는 七支刀가 소장되어있다. 나무줄기의 좌우에 3개씩의 가지가 나있는 특이한 모양의 검으로, 1873년 그 검의 녹을 제거하고 보니 刀身의 앞뒷면에 다음과 같은 銘文이 새겨져있었다.
泰和四年十一月十六日, 丙午正陽, 造百鍊銕七支刀, □辟百兵, 宣供供侯王 □□□□作 - 앞면
(태화 4년 11월 16일 병오 정양에 철을 백번 단금질해서 칠지도를 만들었다. 百兵을 피할 수 있는 신검으로 마땅히 후왕에게 공급할만하다. 〇〇〇〇(~재료로) 만들었다)
先世以來, 未有此刀, 百濟王世子奇生聖音, 故 爲倭王旨造, 傳示後世 - 뒷면
(선세 이래 이런 검은 없었다. 백제왕세자(구이수)가 기생성음(귀하게 성음으로 태어났다) . 그래서 왜왕 지를 위해서 만들었다. 후세에 전하여 보여주도록 하여라)
그런데 일본서기에 의하면 367년 백제의 근초고왕이 일본의 神功황후에게 조공함으로써 양국이 처음 통교를 하였고, 369년에는 부여왜가 백제군과 함께 가라7국을 평정하고 호남지방을 복속시켰으며, 이때 일본은 이 호남지방을 백제에게 할양했다. 그래서 372년에 백제 근초고왕은 神功황후에게 조공하고 감사의 표시로 칠지도를 바쳤다고 한다. 이에 관한 일본서기의 기사는 다음과 같다.
神功 52년(372) 9월 10일 백제의 구저 등이 千熊長彦을 따라 일본으로 왔다. 그때 七枝刀 한 자루, 七子鏡 한 개 및 각종 보물을 헌상했다. 그리고 아뢰기를
“우리나라의 서쪽에 강이 있는데 그 水源은 곡나 철산입니다. 7일을 가도 닿지 않는 먼 곳입니다. 그곳의 물을 마시고 그 산의 철로 오로지 聖朝를 위하여 만든 칼입니다”
石上神宮의 칠지도가 일본서기에 나오는 칠지도와 동일한 것이라는 보증은 없다. 사실 石上신궁의 그 칼은 원래 六叉刀라고 불렸는데 녹을 제거하고 보니 刀身에 ‘七支刀’라는 명문이 새겨져있어서 칠지도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七支刀가 일본서기에 기록된 七枝刀와 동일한 물건이라는 것이 정설로 되어있지만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칠지도 명문의 해석에 있어서 우선 명문의 ‘泰和’라는 연호를 둘러싸고 동진의 太和 설, 북위의 泰和 설, 백제고유연호 설 등이 있다. 泰和라는 연호는 북위에 있지만 북위의 泰和 4년은 480년에 해당하므로 칠지도가 372년에 헌상되었다는 일본서기의 기술과는 맞지 않는다. 동진에는 泰和라는 연호는 없다. 하지만 동진에 太和라는 연호가 있고 이 太和 4년이 369년이므로 지금은 동진연호설이 거의 정설로 굳어져있다. 백제연호설은 동진의 연호가 泰和가 아닌 太和이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일본학자들은 泰和가 백제의 고유연호라는 것에 부정적이다. 그 첫째 이유는 백제의 建元을 전하는 사료가 없다는 것이다. 확실히 삼국사기에는 백제 建元에 대한 기사는 없다. 그렇지만 고구려도 建元에 관한 사료는 없지만 ‘永樂’(광개토왕비문)을 비롯한 다수의 연호가 있었음이 확인되고 있다.
또 한 가지 이유는 백제에서 연호를 사용한 흔적이 없다는 것이다.
사택지적비에는 기년이 ‘甲寅年正月九日’로 표기되어있고 부여 능산리 寺址에서 출토된
백제창왕銘사리감(국보 제288호)에는
<百濟昌王(백제창왕) 十三季太歲在(십삼계태세재) 丁亥(정해) 妹兄公主(매형공주) 供養舍利(공양사리)>
로 되어있어 역시 연호를 사용하지 않고 있다.
무녕왕릉 출토의 무녕왕 誌石에도
<寧東大將軍(영동대장군) 百濟斯麻王(백제사마왕) 年六十二歲(연육십이세) 癸卯年五月(계묘년오월) 丙戌朔(병술삭) 七日壬辰崩(칠일임진붕) 到乙巳年八月(도을사년팔월) 癸酉朔十二日甲申(계유삭십이일갑신) 安厝登冠大墓(안厝등관대묘) 立志如左(립지여좌)>
라고 있어 무녕왕이 ‘영동대장군’이라는 중국의 작위를 받았음을 보여주고 있지만 중국의 연호는 사용하지 않고 있다. 그렇지만 백제가 연호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은 거꾸로 칠지도의 泰和가 중국의 연호가 아니라는 증거로도 된다. 중국의 연호를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는 백제가 칠지도에서만은 동진의 연호를 썼다고 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일본학자들은 일본서기의 서술에 따라 이 칠지도가 야마토정권에 헌상된 것이라고 보고 그에 맞추어 명문을 해석하려고 시도했다. 그 결과 온갖 기상천외한 해석들이 나왔다. 福山敏男은 奇生聖音의 聖音을 천황의 ‘聖恩’으로 해석하여 백제헌상설의 주요 근거로 하였다. 三品彰英은 倭王 旨를 ‘왜왕의 뜻’이라고 보고 故爲倭王旨造를 ‘왜왕의 뜻을 받들어 만들었다’라고 해석했으며, 가장 권위가 있다고 정평이 나있는 일본고전문학대계의 <일본서기>도 마찬가지로 ‘백제왕과 태자는 생명을 천황의 聖恩에 의존하고 있으므로(奇生聖音) 왜왕의 聖旨를 받들어 만들었다’고 주석을 붙여 놓았다.
하지만 북한학자 김석형은 1963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이 銘文은 명백히 윗사람인 백제왕이 아랫사람인 왜왕에게 하사한 문장이라고 주장하였고 일본학자 上田正昭도 이에 적극 찬성한 이래 백제헌상설, 백제하사설, 백제.왜 동등설, 동진하사설 등 의견이 분분했었지만 지금은 백제하사설 쪽으로 기우는 느낌이다. 동진하사설은 栗原朋信이 주장한 것으로, 聖音을 聖晉이라고 보고 칠지도제작의 배후에 聖晉, 즉 東晋이 있다고 상정한 것이지만 이것은 백제하사설을 받아들이기 싫어서 그 代案으로 만든 억지논리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백제.왜 동등설도 결국은 왜가 백제의 下位에 있었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나온 설일 뿐이다.
일반적으로 칼은 상위자가 하위자에게 하사하는 것이 관례라고 한다. 일본서기는 칠지도가 神功황후에게 바치기 위하여 정성을 다하여 만든 것이라고 기술하고 있지만 실제 칠지도의 명문은 侯王, 供 등의 용어, ~해라 투의 명령어를 썼다는 것 등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 상위자가 하위자에게 사용하는 문장인 것이다. 이런 점으로 보아 칠지도가 근초고왕에 의하여 그 하위자인 왜왕(侯王)에게 하사되었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런데 이것은 실로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이것은 367년 통교 이래 백제가 왜국의 속국이었다는 일본서기의 서술을 정면으로 뒤집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칠지도는 그와는 정반대로 왜국이 백제의 속국이었고 왜왕은 근초고왕의 후왕이었음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또 이것은 칠지도가 이른바 ‘가라7국 평정’과 호남 할양에 대한 답례로 제작된 것이라고 하는 지금까지의 일본학자들의 주장을 정면으로 뒤집는 것이다. 그렇다면 칠지도는 무슨 목적으로 제작된 것일까?
개로왕은 458년 남조 송에 제출한 상표문에서 자신이 11명의 신하에게 임시로 관직을 내렸음을 밝히고 송의 황제가 이를 승인해줄 것을 요청했는데 그 중에는 좌현왕. 우현왕이 포함되어있었다. 즉 개로왕은 좌현왕, 우현왕을 거느린 王中王, 즉 大王이었던 것이다. 또 동성왕은 490년과 495년에 남조 齊에 제출한 상표문에서 자신의 신하 중 面中王. 邁盧王. 辟中王. 弗斯侯. 八中侯 등의 관직 승인을 요청하고 있다. 그가 신하에게 王, 侯의 칭호를 부여했음을 알 수 있다. 개로왕과 동성왕은 단지 修辭上의 대왕이 아니라 王과 侯를 거느린 실질적인 대왕이었던 것이다. 익산 미륵사 <사리봉안기>에는 무왕을 ‘대왕폐하’라고 했으며, 삼국사기 전지왕 즉위 조에서는 아신왕을 ‘대왕’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와 같은 백제왕의 ‘대왕’ 호칭은 근초고왕 대에 시작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369년부터 부여왜가 광개토태왕의 마지막 공격으로 참살탕진된 407년까지는 부여왜가 백제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광개토태왕이 비문 내용으로 보아 사실인듯 하다. 부여왜가 망하여 일본으로 이주하는 408년에는 백제 전지왕이 당시 왜왕인 지에게 위로와 격려의 차원에서 하시한 것으로 보인다.
http://cafe.daum.net/alhc/3Cdg/463
다음 카페 <우리역사문화연구모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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