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두산(665m,안동),국망봉,퇴계태실,침천정,용수사,도산서원

2019. 6. 15. 09:12여행 이야기


용두산(665m,안동),국망봉,퇴계태실,침천정,용수사,도산서원 | ☆..경북

김복현 2018.10.13 22:04


  용두산(龍頭山 664.6m)은 남쪽으로 국망봉을 거느리고 동쪽으로 청량산과 이웃하고 있으며 문수지맥 상에서  안동호를 바라보고 있다.

퇴계 선생의 조부인 이계양(李繼陽)공이 마을터를 정할 때 산의 형상이 용의 머리를 닮아 용두산이라 하였고, 또 용수사의 뒷산이기도 해서다.

 

 국망봉(國望峰)은 문수지맥 용두산 남쪽에 있으며 삼각점이 있는 국망봉(481m)과 국망봉단비(檀碑)’가 있는 국망봉(478.5m)은 약 500여m 떨어져 있다.

퇴계 선생의 조부인 이계양 공이 단종의 죽음을 애도하며 30여년 동안 제사를 올리던 곳은 단비(檀碑)’가 세워져 있는 봉우리다.

정상에는 당시 의식을 거행하던 제단과 바위에 국망봉(國望峰)이라고 새겨진 글자가 남아있다.

날머리에는 고려시대 사찰로 알려진 용수사(龍壽寺)’가 있고, 온계마을에는 태계태실이 있으며, 안동호변에는 '도산서원'이 자리잡고 있다.

우리는 산행전 퇴계태실을 먼저 들렀고, 들머리에서 침천정을 거쳤으며, 귀가시에는 도산서원을 탐방하므로서 테마산행을 완성하게 된 것.

 

 이 등산로는 안동선비순례길(전체 91.3km)’ 9개 코스 중 8코스의 마의태자길과 겹친다.

신라가 망하자 태자였던 김일이 고려로의 귀부를 거부하는 세력을 이끌고 끝까지 신라부흥을 일으켰던 흔적이 이 일대에 전설로 남아 있다.

마의태자가 매일 올라가 망국의 신라 땅을 바라보았다는 마의대(麻衣臺), 태자의 한을 담고 있다는 달래재길, 태자리 태자사, 신라리 등 그 흔적들이 빼곡하다.

 

 먼저 들린 퇴계태실(退溪胎室, 민속자료 제60호)은 1454(단종 2)에 퇴계선생의 조부인 계양공(繼陽公) 이계양이 건립하였다고 한다.

뒷날 'ㅁ'자 몸채의 중앙 돌출된 방에서 퇴계 이황(李滉 1501~1570)이 태어났다고 하여 당호가 되었으며, 1930년대 전면 개축이 있었다.

침천정은 조선 후기 유학자 운산 이휘재(李彙載) 선생이 1834년에 용계고택의 별당으로 세워 지역 유생들에게 강학을 한 장소였고, 병인양요(丙寅洋擾) 땐

의군을 모집 양인(洋人)을 성토한 장소이다.

그의 손자 운포 이중린(李中麟 1838~1917) 선생은 조선 말기 안동 출신의 의병으로 항일운동을 했던 인물.

 

 용수사는 용두산 자락 용의 앞발에 해당되는 지점에 남향으로 앉아 있으며, 지금은 통도사의 말사로 1181(고려 명종 11)에 건립되었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인 안동 용수사 대정삼년명 금동고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인 안동 용수사 금호비가 소장되어 있다.

    

 도산서원(陶山書院)은 사적 제170호로 지정되었고, 상덕사 및 삼문은 보물 제211, 전교당은 보물 제210호다.

도산서당은 1561(명종 16) 퇴계선생이 낙향 후 학문연구와 후진 양성을 위해 직접 설계하여 지었다고 한다.

1575(선조 8)에 한석봉이 쓴 도산서원의 편액을 하사 받음으로써 사액(賜額)서원으로서 영남유학의 총본산이 되었다

 

 문수지맥(文殊枝脈)은 백두대간 박달령 가까이의 옥돌봉(1,244m)에서 남으로 분기, 문수산(1207.6m)에서 용두산을 거쳐 봉수산, 불로봉, 조운산을 지나

학가산(874m)에서 내성천에 이르는 114.5km의 산줄기이다.


코스: 침천정-국망봉(삼각점)-무덤갈림길-국망봉단비(U턴)-무덤갈림길-임도-문수지맥갈림길-임도삼거리-<선비순례길>-용두산-용수사-일주문(4시간30분)



산행궤적

약 11km에 4시간 30분 걸린 셈.

고도표.

안동 선비순례길

안동선비순례길 1~9코스

8코스 '마의태자길'

문수지맥

문수지맥

산행 전 퇴계태실을 먼저 답사하기 위해 버스를 도산중학교 정문 앞에 댔다.

퇴계태실은 불과 2~300m의 거리. 길가 키 작은 수수에 눈길이 간다. 쓰러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개량을 한 듯 난쟁이 수수다.

퇴락해 가는 한옥에 품위있는 향나무 한 그루.

퇴계태실 문은 중앙에 대문을 두고 양쪽에 방을 들인 솟을 대문이다. 

솟을 대문의 현판엔 성림문(聖臨門)이라 편액되어 있는데, 이는 퇴계의 어머니 성인(공자)이 문에 들어오는 태몽을 꾸었다 하여 지은 이름.

성림문을 들어서면 중앙에 노송정(老松亭)이 자리잡고 있다.

퇴계의 조부인 이계양 공은 단종이 폐위된 세조원년(1455)에 이 집을 짓고 뜨락에 소나무를 심은 뒤 '노송정(老松亭)'이라는 현판을 내걸고, 스스로의 호(號)도

 '노송정'이라 하였다.

귀암(龜巖)과 지간(芝澗)의 편액을 당겨보니...

둘 다...

 해사(海士) 김성근(金聲根 1835~1919)의 글씨.

노송정 편액은 이계양 공이 직접 썼다고 한다.

옥루무괴 (屋漏無愧) 또한 해사의 글씨로 ‘다른 사람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늘 행동을 삼가하여 하늘에 부끄러움이 없도록 한다’는 뜻.

산남낙민(山南洛閩)은 아주 편안하고 강한 느낌의 해서체로 '해동의 낙양과 민중'이란 뜻으로 우리나라 성리학의 발상지임을 의미한다.

해동추로(海東鄒魯)는 공자가 태어난 노(魯)나라의 추() 땅과 온혜를 상호 연결시켜 바라보는 의식을 담고 있는 현판이다. 해서체.

퇴계선생태실(退溪先生胎室) 편액.

중앙에 삼면(三面)을 계자난간으로 둘러 누(樓)형식으로 독특하게 꾸민 곳이 퇴계태실이며, 이 방이 퇴계 이황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이계양공도 이 방만은 며느리들 신방이나 산실로만 이용했다고 한다.

본채는 안마당을 중심으로 'ㅁ'자형이다.

온천정사(溫泉精舍) 현판이 걸려있다. 낙관엔 역시 해사(海士).

퇴계태실은 일명 노송정 종택이라고도 부른다.

퇴계태실을 탐방하고 바삐 차에 올라 용수사  방향으로 500여m 이동(온천교에서 100m 지점)하여 차를 댄다.

용수사로 가는 도로는 1차선으로 대형차량과 교차할 땐 어느 한 쪽이 양보를 해야만 된다.

좌측 세멘트 농로 끄트머리에 낮은 산자락이 내려와 있고, 기와집이 한 채 보이는 게 '침천정'이다.

침천정과 낮은 산자락.

진행하면서 우측으로 눈을 돌리니 멀리 용두산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돌아본 모습에, 황토색 간이 건물은 '온천수 시추공'이라 적혀있다. 도산온천에 온천수를 공급하는 모양.

버스에서 내려 불과 2~300여m의 지점에...

침천정이 있고, 본격 산길입구는 침천정 뒷편 낮은 산자락.

정면 3칸 팔작지붕의 침천정...

편액을 살짝 당겨본다.  침천정(沈泉亭)이면 샘을 베고 있는 정자라는 의미.

애국지사 '운포(雲圃) 이중린 선생 사적비'가 세워져 있고...

그 옆에 침천정의 유래와 내력이 자세히 적혀있다.

항일운동을 했던 운포 이중린은 위정척사의식으로, 대원군 봉환상소사건으로 옥살이를 하고, 외척 국정농단 때 조정과 불화로 4년간 유배생활을 했다.
또 을미사변 때는 상소를 올려 민족의식을 일깨웠으며 격문을 돌려 의군을 모으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1895년 초에는 연합의병대장에 추대 일본군대를 습격 큰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그는 경술국치 이후에도 입산 피신생활을 하면서 항일운동을 계속했으니, 거룩하도다. 선생의 생애여!

능선에 오르자 산길은 유순한...

솔밭길로 송이버섯이 나는 모양으로 입산금지 푯말이 붙어있다.

지형도 상의 국망봉(481n)엔 국망봉이 저쪽에 있다고 화살표를 그은 표지판과 삼각점이 있고...

퇴계 선생의 조부이신 계양공이 제사를 올렸던 봉우리(국망봉 단비)는 여기서부터 500m에 위치한 봉입니다라는 코팅지.

작은 봉우리를 살짝 올라서면 남동쪽 능선으로 갈림길이 있지만 우측으로 살짝 틀어 내려선다.

중간의 작은 봉우리를 좌측 사면으로 살짝 우회하는데, 무덤이 있는 이 작은 봉우리가 중요한 갈림길로 단비가 있는 국망봉에서 되돌아와야 하는 지점이다.

국망봉의 단비와 그 옆에 기묘하게 생긴 자연석에다 다시 국망봉이라 새겨 놓았다.

권 선생님과 함께 기념사진.

단비 아래에 자잘하게 새겨져 있는 글자를 살펴보니 13대, 14대, 15대손이 쓰고 세웠다는 뜻이다.

그 옆의 작은 바위에도 한 자씩 국망봉이라 새겨져 있다.

나라를 바라본다 하였으니,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며 한양을 보았겠으나 단종은 영월에서 죽임을 당했지 않았나?

 돌비 뒷면엔 꽃이 피어 있다.

단비가 있는 국망봉에서 식사를 한 뒤 U턴하여 무덤이 있는 갈림길에 돌아왔다.

이후 북쪽 능선으로 이어가면 우측으로 살짝 조망이 열리면서 범상치 않은 하늘금이 보여...

당겨보니 봉화의 청량산인 듯하다. 청량산에도 퇴계의 흔적들이 있다.

잘록한 안부(비포장 임도)에 내려서서 후미들에게 탈출할 수 있다고 무전으로 알렸다.

광주 이씨묘를 지나고...

제법 반듯한 등로를 이어가면...

잘 관리되고 있는 무덤에서 임도를 만난다.

우리는 지맥꾼이 아니라서 굳이 능선을 고집할 필욘 없어...

우측 어깨에 문수지맥을 무겁게(?) 짊어지고...

임도를 걸으니 산행속도에 가속도가 붙는다.

여름철이 아니라서 임도걷기는 아주 쾌적하였고, 벤치에서 쉼도 하며...

40여분 만에 임도 삼거리에 닿았다.

삼거리 우측 10m지점에 이정표가 있어...

확인을 해보니...

'선비순례길'이어서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후미팀에게 국악진흥원 방향 임도로 내려가면 용수사 일주문 옆에 우리 버스가 있다고 하였다.

선비순례길의 친절한 안내판.

용두산은 이정표(수운정 방향) 맞은편 원목걔단을 밟고...

산길로 접어 들지만 곳곳에 송이버섯 입찰구역으로 입산급지라는 현수막이 걸려있다.

선비순례길 이정표와...

안내판.

안부에서 사거리 갈림길이 나오고...

우리는 능선을 고수하여...

바위가 있는 작은 봉우리에 올라선다. 바위가 있는 이 봉우리에서 용수사로 내려가는 갈림길이 있다.

바위 봉우리에서 5분 만에 용두산 정상에 올랐더니 카메라맨 문채 씨가 사진을 찍어주기 위하여 기다리고 있다.

말끔히 제초작업을 한 정상에서 동쪽으로 조망이 열린다. 아까도 보았던 청량산이어서...

살짝 당겨 보았더니 육육봉이 확인이 된다. 그래서 퇴계 선생이 쓴 것으로 알려진 싯귀를 읊조린다.

'청량산(淸凉山) 육육봉(六六峰)을 아나니 나와 백구(白鷗) 

백구(白鷗)야 헌사(喧辭)하랴 못 미들슨 도화(桃花)로다

도화(桃花)야 떠나지 마라 어주자(魚舟子) 알가 하노라.’

청량산 육육봉을 아는 이는 나와 갈매기뿐 / 갈매기야 소문내었느냐 못 믿을 것은 복숭아꽃이로다/ 복숭아꽃아 떠나지 말아라 어부가 알까 염려하노라>

용두산에서 기념촬영을 한 후...

제초작업한 길을 무심코 내려섰더니 그 길은 '선비순례길'이어서 되올라 왔다.

우측 수더분한 능선을 선택하여...

네이버지도와 다음카카오에 그어진 등로를 따라...

능선늘 내려섰더니...

멧돼지가 횡포를 부린 묘 2기를 만나고...

다시 묘 1기를 만나니...

좌 우로 반듯한 길이 나있고 능선으로도 흔적이 보인다. 네이버지도를 따라 좌측으로 진행하니...

이 길은 자꾸만 사면을 따라 좌측 능선으로 올라 붙는다.

그 길을 따르면 능선을 따라 용수사로 내려갈 수도 있을 것 같았지만...

네이버지도에 나와있는 트랙을 고수하며 계곡으로 진행하였는데, 사진에서 보는 우측 능선이었을까.

풀숲에 가린 희미한 족적을 좇아...

들국화 향을 맡으며...

계곡에 내려서서 우측으로 길을 찾았다.

오래된 묵은 길을 만나...

계류를 좌측으로 끼고 내려서니...

산판길인 듯 널따랗다.

마의태자가 신라땅을 바라보았다는 마의대가 있다고 하였지만  정확히 어느 지점인지 찾을 길이 없다. 

이 바위는 아닐 테고...

쇠줄을 넘어오니...

또다시 출입금지 쇠줄.

임도급 산길에서...

또다시 쇠줄.

물탱크를 지나자...

용수사의 뒷모습이 나오고...

돌아보니 산신각이다.

새로 반듯하게 지어진 당우는 규모가 상당하고 절마당에는 곱게 잔디가 깔려있다.

대웅전 우측에 있는 이 석탑은 어디서 많이 본 한데,

바로 불국사의 다보탑이다. 다보탑의 모조품인 셈.

용두산 중턱에 있다는 마의대(麻衣臺)는 찾지 못하고...

마의당(麻衣堂) 현판만 올려다 본다.

반대편의 당우는...

월오관(月午觀). 달이 대낮처럼 밝다는 뜻이니, 마의태자가 망국의 한을 품고 월오리로 넘어가다 달빛에 서러움과 한을 되새겼다는 스토리텔링.

대웅전 앞에도 안면이 있는 석탑 두 기가 있다. 가까이 있는 석탑은 지난 어래산 봉좌산 때 보았던 '정혜사지 13층석탑'이고, 뒤의 것은 유명한 석가탑.

석탑 세 기가 모두 경주에 있는 국보로 이미테이션. 

대웅전 좌측에 있는 세 기의 석비는...

운곡리 주민일동이 기증한 하마비(下馬碑)이고,  

용수사 뒷산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안동 용수사 금호비(安東 龍壽寺 禁護碑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00호)'.

“이 산에는 제단이나 옛 절뿐만 아니라 영역 안에 중대한 설이 있기 때문에 영원히 산 안에서의 모든 출입을 금지하고 보호하도록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글을 지은 사람은 일영(日營)으로 되어 있고, 비를 세운 연대는 신해년 10월이라 되어 있으나 신해년이 정확히 언제인지는 알 수 없다.<자료요약>

그리고 알 수 없는 또 한 기의 비석.

그 옆 전각에는 기구한 운명을 가진 돌부처 한 기가 모셔져 있다. 개성 영통사 불상으로 탈북민이 모셔왔다는 탈북1호 불상인 미륵불(彌勒佛)이다.

-용두산 용수사-   
용두산 자락 불보사찰에 오신 
통일미륵부처님 


분단된 국토에 이산가족이 있었는지
몇 구비 인연 따라 용수사에 왔다 

북한 땅속에 묻혀 지낸지 얼마였는지

답답한 육신 꺼내달라는 현몽도
북한을 떠나려거든 데려가 달라는 목소리도
믿어지지 않은 실화지만 

생사를 넘나드는 곡절 많은 인연 따라
북한에서 중국 안동(단둥)으로
중국 안동(단둥)에서 우리나라 안동까지

이념을 초월한 수행의 발걸음이 머문 부처님 

대웅전 옆에 소박한 야단법석을 차려놓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면 
한 가지 소원은 들어준다며
대중의 발걸음을 붙잡고 있다
     

<潤疇 목 필 균>

날아갈 듯 단정한 정면 3칸 팔작지붕의 대웅전과 석탑 두 기의 안정적인 모습.

잔디밭을 가로질러 나와 돌아 본 모습.

용수사를 뒤로하고 내려서는 길엔 작은 돌탑들이 배열해 있다.

금방 일주문.

산행을 마친 일행들이 터를 잡은 모습.

일주문엔 '용두산용수사'

글씨는 퇴계학 연구원 이사장을 맡고 계시는 '행파(杏坡) 이용태(李龍兌) 박사.  

선비순례길 안내판.

잘 지어진 화장실 밑으로 계곡이 있었지만 정자와 맞배지붕 건물 우측에 수고꼭지가 있어 그곳에서 대강 땀을 씻었다.

여러 편의시설이 있는 건 선비순례길을 의욕적으로 꾸민 것.

그 옆의 커다란 비석과 부도 세 기.

뜬금없이 '희양산봉암사사적비'.  이 비석이 안동에 온 까닭은?

용수사는 퇴계가 20세 때 먹고 자는 것도 잊은 채 주역을 탐구하다 병까지 얻을 정도로 유서 깊은 사찰이었지만 소실되었다.

이후 봉암사 주지를 지낸 원행스님이 용수사 주지로 와서 경험과 공력을 바탕으로 현재의 용수사로 재탄생 시킨 게 인연일까?

귀가길에 도산서원을 들렀다.

도산서원은 안동 북부에 위치하여 지난 안동 여행에서도 미처 답사치 못한 곳. 왕모산 때도 그랬고, 청량산 때도 그랬다.

이번 용두산 국망봉 산행을 테마로 엮기 위해선 꼭 답사해야만 하는 곳.

매표소와...

입구의 하마비.

입장료는 어른 2,000원에 경로 우대이며,

하절기 09:00~18:00까지이다.

조금 걸어 들어가면...

우측으로 시야가 열리며 마치 섬 같은 제단이 하나 있다. '시사단(試士壇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33호)'이다.

이황 선생의 학덕을 추모해 제사를 지낸 곳으로 그곳에서 과거를 치르기도 했다.

1792년 정조는 이조판서 이만수(李晩秀)에게 명을 내 퇴계의 학덕과 유업을 기리는 뜻에서 도산별과를 신설하여 이 지방의 인재를 선발하도록 하였는데,

이를 시행하고 기념하던 장소가 시사단이다.

안동댐으로 수몰되기 전에는 도산서원과 마주 보이는 강변의 소나무가 우거진 곳에 비각이 세워져 있었는데, 1975년에 원위치에 10m 높이의 돌축대를

쌓아올린 뒤 원형대로 옮겨 지었다.



 비각 안에는 1824년(순조 24) 비각을 다시 지을 때 새로 새겨 세운 비석이 있다.

이보다 앞서 1796년(정조 20)에는 영의정 채제공(蔡濟恭)이 도산별과(陶山別科)를 기념하려고 지은 글을 새긴 비석이 있었다.<자료인용>

안동호에 물이 차면서 시사단은 완전 섬이 되어버렸다. 

시사단 안내판.


선생은 서원의 동쪽을 천연대(天鳶臺), 서쪽을 천광운영대(天光雲影臺)로 불렀다.

탐방 시간이 20분 정도으니 주마간산(走馬看山) 정도가 아니라 말위에서 쏜 화살처럼 쏜살같이 돌아야 할 판.

 산기슭 옴팍하게 또아리를 튼 서원을 들어가다... 

아주 기이하게 가지를 뻗친 왕버들을 쳐다본다. 마치 한 마리의 용이 용트림을 하는 듯한 모습이다.

누가 여기에다 우물 정(井) 자를 써놨노?

도산서원에서 식수로 사용했던 우물인 열정(冽井이다.

우물 하나의 이름에도 주역 정괘(井卦)의 지혜와 교훈이 들어 있다.

도산서원을 들어와...

농운정사(隴雲精舍)는 도산서당에 붙어 있는 기숙사로 언덕 위의 구름이라는 뜻이다.

열심히 공부하라는 뜻에서 공(工)자형의 평면을 갖고 있다. 2개의 긴 방, 2개의 마루방, 2개의 토방이 이어져 있고 앞뒤로 툇마루가 붙어 있다.

서쪽마루는 ‘관란헌(觀瀾軒)’이라 이름 붙였고, 나이 적은 후배들의 공간이다.

퇴계 선생의 시 '관란헌'이다.

浩浩洋洋理若何 넓고도 양양하니 그 이치 어떻던고
如斯曾發聖咨嗟 일찍이 성인께서 이렇다고 탄식했소
幸然道體因玆見 도체가 다행히도 이로부터 나타나니
莫使工夫間斷多 공부를 할 양이면 끊임있지 말아다오

농운정사 1561(명종 10년)에 지어졌다.

퇴계선생의 시 '농운정사'

常愛陶公 上雲  도홍경의 농상 구름 두고두고 사랑하여 
唯堪自悅未輸君  오직 홀로 기뻐하나 임에겐 못 보냈소
晩來結屋中間臥  늦게서야 집을 얽고 그 가운데 누웠으니 
一半閒情野鹿分  한가한 맘 그 반을 들사슴과 나누련다

툇마루의 동쪽마루는 ‘시습재'로 나이든 선배들의 공간이다.

농운정사의 시습재(時習齎)는 '배우고 익히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라는 논어 학이편에서 인용했단다.

퇴계 선생의 시 '시습재'를 보자.

日事明誠類數飛  날로 명성 일삼아서 새 나듯이 익히고는
重思複踐 時時  거듭 생각 다시 실천 때때로 나아가오
得深正在工夫熟  공부가 이룩되어 깊은 맛을 얻고 보면 
何 珍烹悅口   맛있게 삶은 고기 입에 맞을 정도리요

도산서당(陶山書堂)은 퇴계선생의 친필로 그의 시 [도산서당]을 보자.

大舜親陶樂且安  순이 친히 그릇 구워 즐겁고도 마음편코 
淵明躬稼亦歡顔  연명 몸소 농사하니 얼굴 역시 기뻤다오
聖賢心事吾何得  성현의 그 심사를 내가 얻음 아니로되
白首歸來試考槃  백수로 돌아왔으니 이에 숨어 살으리랏다

휴식을 취하던 마루에는 암서헌(觀瀾軒)이라는 이름(친필)이 붙어있고, 암혈지사(巖穴之士)인 은사(隱士)가 사는 집이란 뜻이다. 

퇴계선생의 시 [巖栖軒(암서헌)]을 보자.

曾氏稱顔實若虛  증씨는 안연더러 실하면서 허한 듯이
屛山引發晦翁初  병산(유자휘)은 회옹에게 가르치던 처음이라
慕年窺得巖棲義  바위에 깃드는 뜻 늦게서야 엿봤으니 
博約淵氷恐自   박약공부 연빙자세 성기었음 두려웁소

유독 연꽃을 좋아한 퇴계 선생은 연꽃을 심어 정우당(淨友塘)이라 하였다.

직접 지은 도산서당의 거처하던 방은 완락재(玩樂齋)라 하였다.

선생의 시 '완락재'다.

主敬還須集義功  공경을 주장해도 집의(集義) 공부 종요롭네
非忘非助漸融通  잊고 돕지 않고도 점차로 융통하리
恰臻太極濂溪妙  염계의 태극도의 묘한 경계 알고보니
始信千年此樂同  천추에 이 기쁨 같을 것을 알았노라

돌에 새겨진 매화원(梅花園). 마지막 눈을 감기 전 "저 매화나무에 물줘라."하였을 정도로 유달리 매화를 사랑한 퇴계 선생.

아래에서 보면 마치 2층 누각처럼 보이는 광명실(光明室)은 선생의 친필이다.

광(光)은 햇빛, 명(明)은 달빛을 의미하므로 이 세상의 어두움 즉 무지의 세계를 밝히는 것이 책이라고 하여 이름이 지어졌다.

서원 서고의 이름이 광명실인 것은 이런 의미를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역락서재(亦樂書齋) 광명실.

광명(光明)은 많은 책이 서광(瑞光)을 비추어 준다라는 뜻.

도산서원은 이황이 세상을 떠나고 삼년상(三年喪)을 마치자 그의 제자들과 선비들이 1574년(선조 7년) 봄에 도산서당 뒤로 조성이 시작됐다.

그 이듬해인 1575년 8월 낙성과 함께 선조로부터 '도산'이라는 사액을 받았으며, 1576년 2월 사우를 준공해 이황의 신위를 모셨다.

서원으로 출입하는 정문이 '진도문'(進道門)이다.

진도문을 들어서야 서원의 중심이 되는 건물인 전교당으로 뜰아래에는 정교대가 설치되어 불을 밝힐 수 있게 했다.

강당인 전교당(典敎堂;보물 제210) 은 정면 네 칸, 측면 두 칸의 건물로 전체적으로 큰 대청을 형성하고 있으며...

서쪽으로만 한존재라 불리는 한 칸의 온돌방이 있다.

전교당 앞에는 마당을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유생이 묵었던 동재의 박약재와...

서재인 홍의재가 마주보고 서 있다.

이곳에 걸린 도산서원과 전교당 현판은 선조의 어명을 받아 조선조 최고의 명필 한석봉(韓石峰)이 어전에서 쓴 친필 글씨다.

 작은 글씨는 만력36월 일 선사(萬曆三年六月 日 宣)’. 만력 3년은 1575년이고, 선사는 임금이 하사한다는 의미다. 사액서원임을 말해주고 있다.

전교당 안내판.

바삐 들어선 곳은...

고직사(庫直舍)로 서원을 관리하는 사람들의 살림집이다.

도산서원을 내려서며...

고직사는 상 하로 나눠져 있다.

고직사.

'락서재'의 현판 글씨도 선생의 친필.

역락서재의 안내판.

도산서원을 벗어나니 어느새 땅거미가 진다.

도산서원 안내판을 일별하고...

바삐 버스에 오른다.


당일 산여행으로 이러한 일정을 한꺼번에 테마로 묶기에는 여러모로 무리가 따를 수 있다.

그러나 이번 기회마저 포기해버리면 다음 기회는 언제 또다시 올 것인가?

메모장의 버킷 리스트는 그대로이고 , 살아갈 날은 그렇게 마냥 길지 않을 것이니...






blog.daum.net/bok-hyun/885   김복현의 산이야기






안동 용두산 용수사 | 산사의 풍경



           경북 안동시 도산면 운곡리 273-1 

             용두산 자락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산자락에 자리하고 있는 용수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5교구 본사 통도사 말사이다.

             안동에 있는 사찰들은 대부분 대한불교 조계종 제16교구 본사 의성 고운사 말사들인데

             용수사가 통도사 말사가 되었다는 것이 특이하다.   

                                                                     용수사 일주문

                                 정갈한 손길이 오고간 장독대 옆으로 '무말랭이'가  가을볕에 잘 말라가고 있다.

                                                              용수사 범종각

                                          용수사 입구에는 이렇게 생긴 돌탑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가을이 곱게 내려앉은 용수사 뜰 앞

                  용수사 개창기에 의하면

                  고려 의종의 발원으로 화엄종 사찰이 개창되어, 명종 때에 완성되었으며

                  이후 의종의 명복을 비는 사찰로 운영되어 왔다. 

                                                                  용수사 대웅전

                                                               용수사 대웅전 사분합 꽃살문

                                                   산신각 주변으로 가을이 깊어가고 있었다.

                                                          용수사의 미륵불

                            .

                                                    요사채 월오관

 

                         고려명종 11년(1181년)에 최선이 건립하였으며, 조선 선조때 극락전을  중수하였다.

                         1895년 을미의병이 일어나 일본군과 전투 중에 용수사와 부속암자 '영은암'이

                         불에 타서 소실되었다.

                         그 후 터만 남은 곳에 1994년에 대웅전과 요사를 건립하였다고 한다.





안동 용두산 용수사 2015.11.14 

blog.daum.net/nami3152/2402   산사에서의 풍경소리





안동시 도산면 운곡리에 있는 용두산 용수사 | 유적및 전설

도요새 2018.07.30 15:53


안동시 도산면 운곡리에 있는 용두산 용수사

 

용수사 개창기에 의하면

고려 의종의 발원으로 화엄종 사찰이 개창되어, 명종 때에 완성되었으며 이후 의종의 명복을 비는 사찰로 운영되어 왔다

 

고려명종 11(1181)에 최선이 건립하였으며, 조선 선조때 극락전을  중수하였다.

1895년 을미의병이 일어나 일본군과 전투 중에 용수사와 부속암자 '영은암'불에 타서 소실되었다. 그 후 터만 남은 곳에 1994년에 대웅전과 요사를 건립하였다고 한다.

 

용두산 용수사(龍壽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본사 통도사의 말사이다.

용수사는 신라시대에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수 차례 화재로 옛터만 남았는데 봉화의 각화사 주지 성원이 1146(의종원년)에 용수사 옛터의 남쪽에 암자를 지은 뒤 입적하자 각화사의 주지로 왕실과 가깝던 고승 석윤이 의종에게 용수사 창건을 건의하자 의종은 예종(1079~1122)이 각화사를 창건해 화엄교리를 폇듯이 의종도 사찰을 지어 화엄교리를 펴고자 하였다. 이에 의종(1127~1173)은 석윤에게 용두산의 암자를 증축하여 용수사라 사액하고 크게 번성시켰는데  의종이 믿었던 장군에게 죽음을 당하자 명종1(1181)에 형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국왕의 원찰로 지정 최고 문신 최선에게 왕명으로 '용수사개창비문'을 짓고 비석을 세우게 했다.

 

용수사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머리 형상의 용두산 자락에 여의주 부분에 자리하고 농암 이현보,퇴계 이황,금계 황준량,간계 이덕홍선생이 이곳에서 학문을 연마하였던 곳으로 평소에 선비들의 도학 강마처가 되기도 했고 국란을 당해서는 의병과 승병의

본부가 되기도하고 지역민의 피난처가 되기도 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 일본군이 의병들을 진압하기 위해 용수사에 본부를 차렸고 의병장 이중린이 용수사를 불태웠으며 1992년 문경 봉암사 주지를 지낸 원행스님이 부지매입을 시작으로 대웅전등을 복원하였고 지속적으로 복원을 해가고 있다.

 

대웅전에 석가모니부처님을 주불로 관음.대세지 양대보살과 8대보살이 안치되어 있고 후불 목각 탱화는 화려하고 호화로우며 마당에 옥돌로 다듬은 석가탑과 다보탑이 있고 한가지 소원은 꼭 들어준다는 탈북부처님과 금호비(禁護碑)에는 '이 산은 다만 제단과 옛 절뿐아니라 국내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하다 이 산 전체를 영세토록 금지하여 보호 할일이다 일영(日營)이 제목을 짓고 신해(辛亥) 10원에 세운다'라는 비가 있었다.

 

원행스님은 탬플스테이와 다례문화체험,불교경전 강의등 다양한 사회교화활동과 지역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불교와 유교의 소통을 위하여 노력을 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동정각에서 반야심경의 해설과 원문독송.한글로 풀이된 반야심경을 청취 하면서 불교의 교리를 익히는 시간을 가졌으며

좋은 말씀을 하여주신 주지스님에게 감사를 드리며 우리는 농암종택으로 향했다.

 

세상사 한마디

잘난척 하지않고 있는척 하지않으며 아는척 하지않는 이렇게 삼척을 피하며 나이들어가는것이  노테크의 한 방법이다.















안동시 도산면 운곡리에 있는 용두산 용수사 2018.07.30


blog.daum.net/snipe5853/3633   인생은 "0"





KOREAN CULTURE - Yongsusa Temple Stay in Andong / 안동 용수사 템플스테이


https://youtu.be/HfPZRGZLsvs






https://youtu.be/Ks7HR3bGM14








2008-08-14 오후 5:15:19 입력 뉴스 > 화제의 인물

[화제의 인물]안동 용수사 원행스님
“안동사람들 정신 바짝 차려야 합니다.”
주지스님의 안동사랑과 퇴계사랑!



고즈넉한 용두산 자락에 자리 잡은 용수사(주지 원행)는 석양을 받아 황금빛으로 물들고 저녁 공양을 마친 스님의 예불소리가 속세의 속인들을 꾸짖듯 혹은 천상의 감미로운 보살들의 나긋나긋한 목소리처럼 들려오고 곳곳에 옥으로 재현해 놓은 탑들과 조형물 또한 타 사찰과 비교되는 가운데 오늘도 용수사는 그렇게 하루의 긴 일상을 마감한다.

 


▲ 용수사 대웅전

 

용머리 형상을 하고 있는 용두산은 안동시 도산면 운곡리에 있는 산으로서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머리 형상의 여의주 부분에 용수사라는 절이 날듯이 내려 앉아 있어 가히 절터로는 부족함이 없는 지형에 사찰로서는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예로부터 이름을 드날리는 뛰어난 학자와 정치가를 배출한다는 기운을 지닌 곳이라고 회자 되던 용수사는 고려시대인 1146년(의종 즉위)에 경상북도 봉화에 있던 각화사 주지인 성원이 암자를 지으면서 세워진 이후 1164년 왕명으로 ‘용수사’라는 사액을 받아 화엄종단독립사찰 되었지만 1896년에 불타버린 뒤 다시 지어졌다.

 

▲ 정혜사지 13층 석탑과 석가탑을 옥으로 재현 해 놓았다.

 

또한 안동지방의 대학자인 농암 이현보와 퇴계 이황 등 학자들의 학문탐구의 장이 되었는데, 퇴계의 경우 20세 때 용수사로 들어와 먹고 자는 것도 잊은 채 주역을 탐구하다가 병까지 얻었다고 전해질 정도로 유서 깊은 사찰로 알려졌던 용수사가 구한말 소실되었던 바 용수사의 재건은 불교계의 오랜 숙원이자 숙제로 남아 있었다.


이에 국, 내외 백여 개의 사찰을 창건하고 일찍이 불혹도 되기 전인 39세에  신라 헌강왕 5년(879) 지증이 창건한  경상북도 문경시 희양산의 봉암사 주지를 지낸 원행스님이 그동안 창건 또는 재건한 사찰의 경험과 공력을 바탕으로 현재의 용수사가 재탄생하기에 이르렀다.

 


▲ 푸른하늘 뭉개구름과 너무나 어울리는 대웅전 뒤 옥 다보탑

 

부처님의 진신 사리와 가사를 봉안하고 있는 불보사찰인 용수사는 통도사 계통의 율종종파를 따르는 사찰인데 인근 도산서원과 온혜온천 등 안동에 산재한 많은 문화재와 더불어 안동뿐 아니라 타지에서도 신도들이 하루에도 수십 명씩 용수사와 원행스님을 알현하러 오는 실정이다.


용수사의 주지 원행스님은 1973년 입문하여 안동에서 15년여를 지내신 분으로 세계각지를 돌아다니며 건축한 사찰만도 백여 개에 이른다. 


시원한 미싯물을 앞에 놓고 스님과 마주한 필자에게 대뜸 갈을 던지며 하는 말이 도대체 당신네 기자들은 어떤 사람들이냐? 뭐하는 사람들이기에 나라가 이 모양이 되어가고 안동이 이 모양이 되어 가는데도 지면을 통하거나 필을 통해 바로 잡을 생각은 않고 절구경이나 하러 다니고 이깟 중놈 보러 다니면 되겠느냐며 호통이다.

 

 



▲ 용수사 주지 원행스님


소생이 속인이라 스님의 말씀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다며 재언을 구하자 그제야 자세를 바로 하여 미싯물을 한 모금 하시고 말문을 여는 첫마디가 “안동사람들 정신 바짝 차려야 합니다.”였다. 


스님은 불교전파를 위해 세계 각국과 우리나라를 구석구석 돌아다니다 보니 자연히 안동과 강릉이 비교 되더라는 것이다.


안동을 말하자면 성학십도를 통해 성리학을 집대성한 퇴계 이황을 해동주자 라고 호칭하며 숭상하고 있지만 강원도 강릉에서는 동시대를 살며 역시 성리학발전에 많은 힘을 쏟은 율곡 이이가 숭상 받고 있다.

 



▲ 세계각국을 다니며 모으신 불기들1


이런 대학자의 본향인 안동에서 과연 퇴계선생과 그에 따른 모든 것을 어떻게 지키고 키워 나가냐고 반문하는 원행스님은 이이와 퇴계는 같은 시대를 살면서 같은 학문을 하며 두 분 모두 대학자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퇴계선생이 훨씬 더 뛰어난 학자였다고 주장한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원행스님은 자연스레 안동과 강릉이, 퇴계와 이이가, 도산서원과 오죽헌이, 경북과 강원도가 비교되더라고 말하고, 현재 퇴계선생을 말하자면 공자의 나라 중국에서도 퇴계학이 연구되고 있고, 일본 에도시대에 퇴계 이황의 영향을 받은 학파로 기몬(崎門) 학파와 구마모토(熊本) 학파가 이미 활동 중에 있어 퇴계는 이제 동양뿐 아니라 세계에서도 알아주는 대학자로 거듭났다고 밝힌다.


이렇듯 두 선인들을 비교할 때마다 가슴을 치며 답답함을 느낀다는 스님은 오죽헌과 도산서원을 비교하면 도산서원이 오죽헌에 비해 초라하고, 강릉의 신사임당이 안동의 장씨 부인만 못 함이 눈에 보이는데도 안동사람들은 도대체 뭐하느라 이렇게 훌륭한 마인드를 가지고도 강릉의 신사임당과 오죽헌, 율곡 이이에게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를 자꾸 뺏기는 것 같다며 안타까워했다.

 



▲ 원행스님의 茶실


심지어 가까운 영주의 선비촌이나 봉화의 닭실마을 같은 가까운 이웃에게 조차 마인드를 뺏기고 있으니 참 한심한 노릇이라고까지 했으며, 안동시는  퇴계이황과 도산서원을 이처럼 방치 할 것이 아니라 더 노력하고 연구하고 키워서 유네스코 등재 및 세계적인 문화재로 키워나가야 할 것이라고 했다.


한편 원행스님은 현재 안동에는 국학진흥원이 개관해 지식을 중시하는 유교문화권에서의 중요한 자료인 민간 소장 유교 목판을 10만장 목표로 수집하여 한국 목판 인쇄의 우수성을 알리는 것과 더불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을 추진하는 것 까진 좋지만 보관문제에 있어 너무 소홀한 것 같다고 피력했다.

 



▲ 하늘로 오르는 계단이 아닌 산신각으로 오르는 계단


원행스님은 그동안 사찰을 짓느라 나무에 대해 많은 공부와 지식을 접할 수 있었다며 나무라는 것은 일단 콘크리트나 시멘트 건물 안에 들어가면서부터 부식이 시작된다 해도 무방하다고 말하고 아무리 현대과학이 통풍과 습도와 온도를 적절하게 제어 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안 될 말이라고 전했다.

 

또한 국학진흥원에서는 어떠한 방법으로 부식을 예방하는지는 몰라도 목판이라는 것은 정기적으로 한 번씩 끄집어내어 자연 바람을 쐬어주고 옻칠을 해주어야 하며 옻칠이 부담이 된다면 먹이라도 한 번씩 먹여 골고루 찍어주어야만 부식방지를 할 수 있다고 강력히 피력했다.

 


▲ 산신각에서 내려다 보면 옥으로 만든 탑 3기가 모두 보인다.

 

이처럼 부처님을 섬기며, 안동의 미래와 정신문화의 수도 안동의 자존심을 걱정하는 원행스님은 안동시 관계 공무원 이하 시민들이 “우리의 후손들에게 무엇을 물려 줄 것인가?”하는 화두 한 가지를 머릿속에 항상 간직하는  안동인 들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말과 함께 안동시민 모두에게 부처님의 법력이 함께 하길 바란다고 전했다.

 

<관련사진>

 

▲ 너무나 귀여운 동자승 상

 

▲ 옥 다보탑과 수목속에 내려앉은 산신각

 

▲ 세계각국을 다니며 모으신 불기들2

 

▲ 요사채 2층 다락방은 또다른 별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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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용수사 금호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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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문
안동 용수사 금호비는 용수사 경내에 있으나 본래 용수사 뒷산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비석의 크기는 높이 131㎝, 폭 45㎝, 두께 17㎝이다. 금호비의 앞면 모습이다.

소재지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운곡리 273-4

문화재지정번호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00호

제작일자
2009-08-05

제작
씨씨포유㈜

저작권
한국학중앙연구원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안동 용수사 금호비

www.grandculture.net/ko/Contents/Contents?dataType=0403&content..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적/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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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용수사 대정삼년명 금동고

한자명 :
安東 龍壽寺 大定三年銘 금동고
영문명 :
Andong Youngsusa Daejeong Samnyeon Myeonggeum Donggo
분류 :
문화 > 전적/유물류 기타
소재지 :
도산면 운곡리 60
  • 분 류 : 기타
  • 지 정 : 도유형문화재 제323호
  • 지정일 : 2001. 4. 30
  • 소재지 : 안동시 도산면 운곡리 60
  • 시 대 : 고려시대 의종
  • 소유자 : 용수사

용수사에 보관되어 있는 청동으로 만든 동고(銅鼓)로 징과 같은 형태이다. 용수사는 고려 의종 원년(1146)에 각화사 주지인 성원이 암자를 지으면서 개창되었다. 1896년에 불타버린 것을 이후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동고는 가로 31.3㎝, 세로 30.3㎝ 크기로, 절을 다시 지을 때 발견되어 보관하게 되었다. 동고의 위부분과 그 양옆에 각각 1개씩의 고리가 있으며, 아랫부분에는 길이 15.5㎝, 최대 폭 6.2㎝의 울림통이 있다. 앞면 중앙에는 연꽃무늬가 있고 중간에는 문양을 새긴 띠가 있으며, 그 바깥쪽에는 글자와 당초무늬가 있고 뒷면에도 가장자리를 따라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 동고는 앞면과 뒷면의 글자로 미루어 볼 때 고려 의종 17년(1163)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어 고려말에 제작된 금고의 양식을 살피는데 매우 소중한 자료이다.



안동 용수사 대정삼년명 금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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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용수사 33관음성지 순례
  일광  2010-01-05 17:41:16, 조회 : 3,190, 추천 : 54








안동 용수사 33관음성지 순례


1. 안동 용수사
안동에 있는 용수사(龍壽寺) 절이 있다 이 절은 용두산(龍頭山)을 의지 하고 있는데 고려시대 창건한 절이다. 지금은 현대식 건물로 변모일신하고 있지만 오래된 고찰이다.
“동국여지승람”에 용수사 이름이 나오고 있는데, 고려 의종 원년(1146)에 각화사 주지인 성원이 암자를 지으면서 개창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옛날부터 사찰에 보전되어 오던 오래된 금동고(金銅鼓)가 있으며 사찰의 변천을 알리는 귀중한 자료로, 유형문화재 323호로 지정되어 있다. 사찰에 세워져 있는 금호비(禁護碑)에는 “이 산은 다만 제단과 옛 절 뿐만 아니라 국내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하다. 이 산 전체를 영세토록 금지하여 보호할 일이다. 일영(日營)이 제목을 짓고, 신해(辛亥) 10월에 세운다.”라고 되어 있으며 문화재자료 400호로 지정되어 있다.
과거 조선 시대에는 퇴계 이황 선생과 서애 유성룡 영남학파 학자들이 공부하던 곳이라고 전한다. 이러한 사찰이 임진왜란으로 전소 되었다가 근년에 원행 주지스님이 오시면서 원력으로 복원하였다.
용수사 대웅전에는 석가모니부처님이 주불로 모셔져 있으며 관음세지 양대보살과 8대 보살이 안치 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대웅전의 후불 목각 탱화는 화려하고 호화롭다.
밖으로 나오면 마당에는 석가탑, 안쪽에는 다보탑이 있으며, 한켠에 금호비가 서 있고, 옆에는 북에서 왔다는 돌 미륵 부처님이 서 있는데 기도하면 기도발이 있다고 소문 나 있다.

2. 송자관음 남해관음  용두관음 마두관음
불교에는 4대 보살이 있다. 보현, 문수, 관음, 지장이다.
보현은 코끼리, 문수는 청사자, 지장은 선청(개), 그러면 관음은 무엇일까?
그러니까 한 분의 보살이 하나의 동물과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우리는 알수 있다. 관세음은 용(龍)이다. 올해가 경인년인데 호랑이는 산신 할아버지와 관련성을 갖는다. 관세음보살은 좌보처 남순동자, 우보처 해상용왕이다. 때문에 용은 관세음의 보살과 함께 한다. 그리고 우리나라 3대 관음 가운데 서해 보문사는 송자(送子)관세음보살이라고 한다. 송자는 자식을 낳게 해주는 관세음 보살이다. 법화경에 칠난 삼독 이구가 있다. 이구(二求)에 남자 아이 원하면 남자 아이를, 여자 아이 원하면 여자 아이를 준다라고 했다. 그래서 보문사를 송자 관음 도량이라 한다. 그러면 남해 보리암은 무었일까 그곳은 남해(일명 해수관음) 관음이라 부른다. 우리는 보리암을 남해 보리암이라고 한다. 지명이 남해이기도 하지만 보리암 관세음보살을 남해 보리암 이라고 한다. 남해 보리암의 관세음 보살님은 어떤 분인가  배를 타고 고기를 잡으러 먼 바다를 나가거나, 이웃 나라에 무역을 가거나, 배를 타고 제주도 다른 육지나 섬으로 갈 때  안전운항을 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보살님이시다. 낙산사 관세음보살님은 무엇인가. 그곳은 용두관세음보살이다. 용두관세음 보살은 무슨 뜻인가  용은 원래 상상의 동물인데 뱀의 몸매, 잉어의 비늘, 사슴의 뿔, 토끼의 눈, 소의 귀, 매의 발톱, 범의 발바닥, 뱀의 이마로 만들어진 것이다. 용은 영물이며 사람들이 신령스럽게 생각하는 동물이다 따라서 용두 관세음은 우리 중생의 소원과 소망을 들어 주고 성취하게 하는 관세음보살이시다.
마두(馬頭) 관세음보살이 있다. 마두는 사람이 육지에서 말을 타고 가거나 집을 나가 객지 생활하는 자식이 동서남북을 돌아다니는데 무사안녕을 하기를 기원하는 관세음보살이시다. 요즘 표현으로 하면 교통사고 실개소멸을 다 들어주는 보살이 마두관세음보살이다. 수퍼맨의 주인공 그리스토프 리브가 말을 타다가 떨어져서 일생돵안 불구의 몸으로 살다가 2004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우리는 용두관세음보살님께 경인년 새해 나의 소망과 소원을 기도해야한다.

3. 일본 후구이(福井)에 있는 풍재원(豊財院) 이야기
후구이에는 영평사라는 유명한 절이 있다. 영평사에서 버스로 30여분 가면 풍재원이라는 작은 절이 있는데 규모는 작지만 일본의 중요문화재가 4점이나 있는 유명한 사원이다. 그 중에서 십일면 관세음보살, 마두 관세음보살, 성 관세음보살상은 일본에서 제일 오래 된 불상이다. 풍재원은 600부 반야경 혈서가 보존되어 잘 있는 곳이다. 사람들은 이것을 보기 위하여 이 절을 많이 찾아 온다. 그리고 이 절에서 기도하면 누구나 재물을 풍성하게 얻는다는 뜻으로 풍재원이라 한다.  
과거 500여년 전 이곳 풍재원 인근에 젊은 부부가 서로 만나 다복하게 살았다. 어느 해 흉년이 들자 남편은 교토에 가서 돈을 벌어오겠노라고 3년동안 이별의 약속을 하고 길을 떠난다. 남편은 교토에 가서 열심히 일을 하다가 어느 여자를 만나 살면서 후구이에 두고 온 여자를 잊어 버리게 된다. 후구이에 있던 여자는 남편이 돌아오기를 바랐지만 남편의 소식이 없자 너무 사무치는 마음에 밤에 꿈을 꾸고 남편이 다른 여자와 결혼하고 사는것을 보게 된다. 여자는 꿈속이지만 남편의 목을 물어 뜯어 크게 상처를 주었다.
여자는 교토에 가야겠다는 마음을 먹는다 남편이 디른 여자와 사는지 확인을 하고 싶었다. 며칠을 걸어서 선광사라는 절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는데 그 숙소에서 어느 여자를 만난다. 그 여자는 교토에 사는데 자기 남편이 갑자기 죽어서 이 선광사 절에서 천도재를 할려고 찾아 왔다고 했다. 자초지종 이야기를 나누어 보니 천도재를 할려고 모시고 온 영가가 전처와 후처의 남편이었다. 두 사람은 기이한 인연이라 생각하고 남편의 고향 후구이에 있는 풍재원 절에 시주금을 내어서 남편의 명복을 비는 종을 만들었다 지금도 그 종이 풍재원에 메달려 있다.

4. 십일면 관세음보살
자상 3면.................자           진상 3면..................비          
백아상출상 3면.......희          대폭소상 1면.............사
불면 1면



안동 용수사 33관음성지 순례

www.kidobal.com/bbs/zboard.php?id=buddha1&page=24&sn1=&divpage=..    기도발





안동 용수사의 "미륵 " 이야기| 공지사항,안동 고향 소식

유랑아제(김종태) | 조회 73 |추천 0 | 2009.09.25. 18:00


 

 

 

 

 

 

 

안동 용수사의

 

 

        탈북1호 미륵 돌부처님 이야기~실화

 


   

 일명 탈북1호 미륵 돌부처님

 

경북 안동 용두산 용수사 전경

  

 기이한 사연이 있는 이 돌부처는 지난 2005년 어느 노 보살님이 탈북하면서

북한에서 모시고 나온 것이다.


 이 돌부처를 어떤 사람이 구입하여

용수사스님에게 시주한 것을 경내에다 봉안해 놓았다.


 이 돌부처는 원래 휴전선 근방

북한 행정구역으로는 개성시 영통사에 모셔져 있던 돌부처님이다.


 영통사는 1027(고려 현종 18)창건된 사찰로,

개성시 용흥동 오관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16세기 무렵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2002년 11월 북한의 조선경제협력위원회와 대한불교천태종이 함께

복원 사업을 시작하여 2005년 10월 31일에 복원을 완성했다.


 영통사는 일찍이 고려 왕실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어서

인종을 비롯한 여러 왕들이 자주 참배하고, 각종 왕실 법회가 열렸던 큰 사찰이었다.

 

 당시에는 인연이 있는 왕들의 진영(眞影)을 모시는 진영각(眞影閣)이 있었다.

대각국사 의천(義天)은, 이곳에서 교관(敎觀)을 배우고 천태종을 열었으며,

입적한 후에는 그의 비가 이곳에 건립되었다.

 

 

 


문화재로는 영통사 대각국사비(북한 국보 155호), 영통사 오층석탑(국보 133호)이 있다. 그 외에 당간지주, 삼층석탑, 의천의 사리를 모신 부도가 남아 있다.


그런데 이 돌부처가 탈북하게 된 사연은 그야말로

기묘한 일이라고 밖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그러니까 이 미륵부처님을 모시고 탈북한 보살님은 다른 지역에서 살다가

2003년경 이 영통사 앞마을로 이사를 오게 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아들과 딸 며느리가 모두 탈북 하여, 중국으로 넘어간 까닭에

정안수를 떠 놓고 매일매일 자식들의 무사안일과 만나기를 빌었다.

 

 


 그러기를 3년째, 어느 날 꿈속에 친정아버지가 나타나

집 뒤에 묻혀있으니 답답하다며 꺼내달라고 호소를 하였다.


 기이한 생각이 들었지만 꿈속의 일이라 그냥 지나쳤다.


 그런데 3일 계속 꿈속에 나타나 자신을 땅 속에서 빨리 꺼내달라고 호소하였다.

집 뒤로 가서 꿈에서 본 곳과 비슷하여 파 보니 돌로 조각된 불상이 나오게 된 것이다.

 

 


 아마도 영통사가 16세기경 화재로 소실될 적에

이 돌부처님은 어느 누군가에 의하여 마을의 가정집으로 옮겨졌거나

아니면 고려 때 불교가 성할 적에 민간이 자신의 가족이나 개인의 안녕을 위하여

자기 집에 모셨거나 하였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여러분도 보시다시피 이 부처님은

보통 우리의 상식적인 불상의 모습에서 벗어나

일반 보통사람들의 정감이 넘치는 해학적이고

중생의 근심을 짊어진 마치 등신불에 나오는 부처님의 형상을 하고 있다.

 


 그래서 이 불상을 노 보살은 친정아버지의 현신이라고 믿고

날마다 정안수를 떠올리며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드리며 치성을 다했다.


 그런 말이 있다. 부모는 땅에다 묻고 자식은 가슴에다 묻는다고.

자식이 살았는데 만나지 못한다면 세상에 그 애간장이 녹지 않을 부모가 있겠는가.

보통 자식이 군대에 가도 밤잠을 설치고 음식을 먹지 못하는 분들이 대부분인데

하물며 타국 땅으로 금생에 다시 볼 수 있으려나 하는 마음이야 오죽 하겠는가?

 

 


 불가에서는 이런 말이 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지듯이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고. 그리고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오직 자식 생각에 오매불망 몸이 쓰러지도록 간절히 기도를 드렸다.


 그러던 어느 날 석 달 정도 지났을 적에

생각지도 않던 조카가 찾아와 함께 탈북하자고 권유했다.

자식과 며느리를 보고 싶어 매일 밤 꿈속에서까지도

그리던 가족이기에 가다가 붙잡혀 죽는 한이 있더라도 탈북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열흘 후에 탈북을 하겠다고 서로 약속을 하였다.

그런데 또 다시 꿈속에 친정아버지의 형상을 한 미륵부처님이 나타나

자신도 함께 데려가 달라고 한 것이다.


 이 돌부처님은 무게가 약 200킬로그램 정도 된다.

이처럼 무거운 돌부처를 옮기고 이동하는 것이 여간 힘들고 복잡한 일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꿈을 3일 동안 계속 꾸어서 보살님은

조카에게 이야기하니 조카도 이 돌부처님이 자신의 꿈에도 나타나

자신과 작은 어머니를 등에 업고 달리는 꿈을 꾸었다는 것이다.


 조카는 부처님을 모시고 가야한다고 마음먹고 어디에선가

광목천을 구해 와서 미륵 돌부처님을 둘둘 말아서 마치 미라같이 만들었다.


 그리고 조카가 중고차를 가지고와서

미륵 돌부처님을 차에 싣고 탈북하기위해 길을 떠났다.


 이 보살님은 자녀들에게 줄 것은 없고

마침 자신이 직접 담은 아들이 좋아하는 3년이나 묵은 간장이 있어서

유리로 된 병에다 담아 차량 난간에다 걸어두었다.

 

 

 비포장 산길을 달리게 되었는데

간장을 담은 유리병의 끈이 끊어져서

미륵돌부처님 머리에 떨어져 병은 깨지고

간장이 온통 광목천에 쏟아져서 한여름에 마치 시체가 썩는 냄새가 나게 된 것이다.

 

 


 한여름에 3년이나 묵은 간장이 몸에 몇 방울만 묻어도 옷을 빨아야하는데

여러분 머리위에 한 병의 간장이 쏟아져서

더운 여름날 한나절만 길을 걸어 다닌다면

아마도 수십 미터에 있는 사람도 코를 막고 피해서 다닐 것이다.

 

 


 그런데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하지 않았는가?

탈북 하는 신세이다 보니 지나가는 경찰만 보아도 마음은 얼마나 조리지 않겠는가?

 그러나 어쩌랴 모든 것을 운명에 맡길 수밖에 그리하여 어쩔 수 없이

그냥 그대로 오다가 중간에 검문소에서 경찰에게 검문소 검색을 당하게 된 것이다.

 

 


 어디에 가느냐? 묻는데 마침 조카가 임기응변으로

자신의 아버지가 엉겁결에 몸이 썩어가는 옴병에 걸렸다고 했더니

의외로 경찰이 먼저 얼굴이 사색이 되어 놀래서 빨리 가라고 재촉하였다.

 

 

 

 이렇게 하여서 몇 번을 무사히 통과하여 드디어

중국과 국경선인 신의주에 도착하여 지난번과 비슷한 검문이 발생했는데

조카가 또다시 기지를 발휘하여 무사히 국경을 넘어 탈북 할 수 있었다.

드디어 중국의 단둥에 이르게 되었다.


 단둥의 옛 이름은 안둥[安東(안동)]이었으나,

1965년 개명하였으며, 압록강 하구부의 신의주 대안에 자리하여

신의주와는 철교로 연결된다. 참 기이하지 않은가?

중국의 단둥 즉 옛 안동의 부처님이 오랜 세월 흙속에 묻혀 있다가

대한민국의 안동에 오게 되다니

정말로 우연인지 기연인지 참으로 신기할 따름이다.

단둥에 도착한 보살님과 조카는 십 여일 여 만에 오매불망 그리던 자식들을 만났다.

 

 

 


 그런데 타국에서 이 무거운 돌부처님을 모시고 다닐 수가 없어서 고민하였다.

그런데 마침 아들과 인연이 있는 한국에서 10여 년 전에 사업을 하다 실패하여

부도를 내고 중국으로 피신한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이 어렵사리 탈북을 할 수 있었던 노 보살님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이 부처님을 사겠다고 하였다.

 

 


 이 노 보살님은 아버지와 같은 부처님이지만

그러나 타국으로 탈북 하여 어려운 신세라 어쩔 수 없이 팔게 되었다.

한국에서 중국으로 도망간 사업가는

자신의 가진 돈을 다 털어서 부처님을 모셔서 용수사의 스님께 시주하여

현재 안동 용수사에 모셔지게 된 것이다.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운곡리 용수사에는 법당 좌측 편에

돌부처님이 모셔져 계신다.

 

 

 이와 같이 우여곡절 끝에 미륵 돌부처님이 안동 용수사로 오게 된 것이다.


 이 미륵 돌부처님은 2005년 6월경에 용수사에 오게 되었는데

그 해 10월경에 이 시주한 사업가가 용수사에 오게 되었다.


 어떻게 올 수 있게 된 일이냐고 하니

이 사업가가 10여 년 동안 도저히 풀리지 않던 자신의 일이

부처님을 시주한 이후로 불과 3개월여 만에 모두 풀려서

2005년 10월 달에 한국에 들어오게 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지난 2008년 10월 말에 탈북한 김복희 보살님과

주위 사람들이 오셔서 말씀을 해주시고

그리고 2009년 부처님 오신 날 또 오셔서 탈북부처님에 대하여

많은 분들에게 시낭송과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그리고 지금 용수사에 계신 스님들이 새벽 3시에 일어나 기도하고

매일 아침 돌부처님 앞에서 30분정도 기도드리는데

가끔 간절히 기도하면 칠흑 같은 밤에 다른 옆에 비석이나 물체는 보이지 않는데

이 부처님만이 마치 사람이 앉아 있듯이 방광을 발한다.

 

 


 그리고 용수사의 신도 분들 가운데

힘든 분들이 마치 탈북한 노 보살님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면

일이 잘 풀려서 소원을 이룬다고 기도 소원을 이룬 불자들이 말씀을 하신다.

 


 탈북한 김복희 보살님은 이번 부처님 오신 날에

용수사에 와서 불가사의한 일에 대해서 증언을 해 주셨다.

 


 

“이 미륵돌부처님에게 치성으로 기도 드려보세요.

뭐든 한 가지 소원은 들어줍니다.”


 김복희보살님의 체험담이다.


- 이 이야기는 탈북하신 김복희 보살님의 증언과

용수사 스님들의 말을 들어서 쓰여 졌습니다.

 

 

경북 안동 용두산 용수사 전경

 

경북 안동 용두산 용수사 대웅전

 

  용수사 대웅전앞 왼편 승요

 

   용두산 용수사  산신각

 

  용두산 용수사  수조

 

  용수사 조왕단        본존 : 나무팔만사천조왕대신 ,    좌보처:담시역사 ,  우보처:조식취모

     용두산 용수사 금호석비  ↕

 

 

경북 안동 도산 운곡

용수사는 고려 의종 원년(1146)에 각화사 주지 誠源이  암자를 짓고, 처이(處彛)가 수도 하였다.
龍壽寺는 創建主석윤(釋胤각화사 주지)이 제자인 雲美(2대 주지)에게 맡겨 짓도록 하였으며,
고려 의종9년 (1165년에 90 여칸을 완공하여 의종으로 부터 용수사라 사액을 받았다.

1896년 화마로 전소 되어 오던중 1992년: 現 會住 願行스님이 부지 약 2만평을 매입,
1994년:대웅전. 寮舍 2동(각98평) ,1995년 석가모니불,1996년 문수+보현. 후불탱,신중탱 점안.

 

♨문화재자료  제400호   안동 용수사금호비(安東龍壽寺禁護碑)  
  용수사 금호비는 용수사를 다시 짓기 위한 목재 보관소 옆에서 다른 장대석 등과 함께 출토

  되었는데,  이 산 전체를 영세토록 금지하여 보호할 일이다.

  일영(日營)이 제목을 짓고,  신해(辛亥)10월에 세운다 라고 되어 있다.
 

  높이 131㎝, 가로 45㎝, 세로 17㎝ 규모로 앞면에 34자, 오른쪽 옆면에 9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오른쪽 옆면의 글은 비석을 만든 이후에 새긴 것으로 보인다.

  용수사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옮긴글, 유랑아제

 


안동 용수사의 "미륵 " 이야기 2009.09.25

cafe.daum.net/annong28/CBr/313   안동농림고등학교28회동기회